풍류, 술, 멋

정민_차문화사_09

醉月 2009. 8. 21. 07:13

초의와 신위(申緯)

앞서 박영보의 「남차병서(南茶幷序)」와 「몽하편(夢霞篇)」을 읽었으니, 이번에는 박영보의 스승이자 「몽하편」의 당사자인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와 초의 사이에 오간 차 관련 시문을 살펴보겠다. 박영보가 초의차를 세상에 널리 알린 장본인이라면, 신위 또한 초의차를 아끼고 사랑하여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신위의 「원몽(圓夢)」 4수

신위는 박영보를 통해 초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초의가 서울로 오기 전 일지암을 완공하고 이사하기 전날 밤에 자신을 만나 제액(題額)까지 받는 꿈을 꾸었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며 4수의 화답시를 지어 주었다. 신위의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에 실려 있는 「원몽사편(圓夢四篇) 병서(幷序)」가 그것이다. 원몽(圓夢)이란 ‘꿈풀이’, 즉 해몽이란 뜻이다. 1830년 12월에 지었다. 앞쪽에 긴 병서가 실려 있다. 중간 부분은 앞서 박영보가 지은 「몽하편 병서」의 내용과 중복되므로, 앞뒤만 보이면 다음과 같다.

해남현 대둔사의 승려 초의는 이름이 의순으로 시 짓는 중이다. 새로 두륜산 서편 기슭에 띠집을 짓고 이름하여 ‘구련사(九蓮社)’라 하였다. (중략) 올해 초의가 서울로 와 금령 박영보를 만나보고 이 일을 이와 같이 얘기해 주었다. 금령이 그 자리에서 7언 장가를 지어 기록하고 제목을 「몽하편」이라 하였다. 이를 돌려 내게도 보여주므로 나 또한 시 4편을 지어 다시 금령과 초의 모두에게 화운하게 하여, 이로써 바닷가 이름난 가람과 천리의 묵연(墨緣)을 맺었다.
海南縣大芚寺僧草衣, 名意洵, 詩僧也. 新結茅頭輪山西麓, 號曰九蓮社......今年草衣來京師, 見錦舲而咏其事如此. 錦舲卽爲七言長歌, 以記之曰夢霞篇, 而轉示余. 余亦爲詩四篇, 復令錦舲草衣皆和之, 以結海上名藍千里墨緣.

자하는 초의를 시승(詩僧)이라 했다. 초의가 대둔산 서편 기슭에 새로 지은 일지암(一枝庵)의 다른 이름이 ‘구련사(九蓮社)’였던 사실은 앞서도 잠깐 지적한 바 있다. 지면 관계로 4수 중 처음 두 수만 읽어 본다.

師豈有求於世者 스님 어이 세상 이름 구하려는 자이랴
意行飛錫到王城 뜻으로 석장(錫杖) 날려 왕성에 이르렀네.
詩拈閏集閨媛例 시 지어도 윤집(閏集)으로 규원(閨媛)의 예 따르고
跡晦煎茶博士名 자취 숨겨 차를 끓여 박사 이름 얻었다네.
초의는 차를 잘 만들었다. 금령이 일찍이 「초의차가(草衣茶歌)」를 지은 것이 있다.

인하여 더불어 사귐을 맺었다. (草衣工製茶. 錦舲嘗有草衣茶歌. 因與證交.)
聞木犀香離說悟 목서(木犀) 향기 맡다가 말없이 깨우치고
看梅子熟種因成 매실 익는 것을 보다 인연을 이루었지.
只應道在蒲團上 다만 도는 마땅히 포단(蒲團) 위에 있나니
方丈三更海日生 삼경이라 방장에선 바다 해가 떠오르리.

得無過去生曾識 이전에 일찍이 일면식도 없었는데
慚媿闍梨夢不才 스님께서 못난 사람 꿈 꾼 일 부끄럽네.
湖上梅尋君復約 강가 매화 구경 옮을 그대 다시 약속하니
내가 용경(蓉涇)에 있었으므로 한 말이다.(余在蓉涇故云)
山中人語子瞻來 산 속에 사는 사람 자첨(子瞻) 왔다 말하리.
禪心藥草凌冬秀 선심(禪心) 깃든 약초는 겨우내 푸르른데
畵意茆菴鑿翠開 그림 같은 띠집이 산을 뚫고 들어섰네.
倘否投名容入社 구련사(九蓮社)에 들겠다면 투명(投名)이라 하실텐가
암자 이름이 구련사인지라 원공사(遠公社) 가운데 사강락(謝康樂)이 투명(投名)한 고사를 썼다.(茅菴名九蓮社, 故用遠公社中康樂投名故事.)
打鐘掃地臥莓苔 종을 치고 땅을 쓸어 이끼 위에 누으리라.

첫 수 첫 구에서는 초의가 명예를 탐하여 있지도 않은 꿈 이야기를 꾸밀 사람이 아니란 말로 시상을 열었다. 3구에서는 시를 잘 쓴다 해도 시선집으로 묶으면 정집(正集)에 수록되지 못하고 끝 부분 윤집(閏集)에 여류와 승려로 따로 묶이는 차별을 안타까워했다. 4구에 ‘전다박사(煎茶博士)’란 표현이 보인다. 당시 초의가 가져온 차가 장안에 상당한 술렁거림을 낳았고, 아예 차박사의 칭호까지 누리게 된 사정을 잘 보여주는 귀한 구절이다. 주석에 적은 박영보가 지었다고 한 「초의차가(草衣茶歌)」는 별도의 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앞서 본 「남차(南茶)」시를 두고 한 말이다.
둘째 수에서는 매화 시절에 당시 자하가 머물고 있던 한강 가 용경(蓉涇)으로 놀러오겠다고 약속한 일을 말하고, 그림 같은 구련사(九蓮社)의 풍광을 떠올리며, 예전 원공(遠公)의 결사(結社)에 강락(康樂)이 참여하여 이름을 얻은 것처럼, 나도 구련사의 일원으로 받아줄 수 있겠느냐고 하여 초의에 대한 친밀한 감정을 나타냈다.
자하는 화답시를 짓는데 그치지 않고 박영보의 「남차」시에 화운한 시까지 지어서 초의에게 준 듯하다. 이일을 계기로 서울의 명류들 사이에 초의의 명성은 순식간에 진동하게 되었다.

삼여탑(三如塔)과 초의차
이때 초의가 서울행을 하게 된 것은 스승인 완호(玩虎) 스님의 삼여탑(三如塔)에 새겨 넣을 서문과 명시(銘詩)를 받기 위해서였다. 박영보를 통해 「원몽」 시와 「남차」시를 받은 초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신위가 박영보에게 준 시를 차운하여 화답했다. 이에 신위는 초의를 위해 다시 시를 지었다.
「초의가 내가 금령에게 준 시운에 차운하였는데 몹시 아름다웠다. 그래서 다시 원래의 운자를 써서 시를 지어 보인다. 이때 초의는 스승인 완호대사를 위해 삼여탑을 세우고, 해거도위 홍현주에게 명시(銘詩)를 청하면서, 내게도 서문을 써달라고 하며 떡차 4개를 보내왔다. 떡차는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인데, 이른바 ‘보림백모(寶林白茅)’라는 것이다. 시 속에서 아울러 이를 언급하였다.(草衣次余贈錦舲詩韻, 甚佳. 故更用原韻賦示. 時草衣爲其師玩虎大師, 建三如塔. 乞銘詩於海居都尉, 乞序文於余. 而遺以四茶餠. 卽其手製, 所謂寶林白茅也. 詩中幷及之.)」라는 긴 제목의 시다. 작품을 보자.

道潛坡老共周旋 도잠과 소동파가 함께 노닐었더니
此樂衰年有此年 늙은 나이 이 즐거움 이 같은 해 있구려.
苦茗嚴時宜砭俗 쓴 차를 엄히 할 때 속됨 경계 마땅하고
好詩佳處合參禪 좋은 시구 훌륭한 곳 참선에 합당하다.
乞銘二夢師如在 생사의 꿈 명(銘) 청하니 스님 살아 계시는 듯
彈指三生性自圓 삼생(三生)을 튕겨내자 성품 절로 원만하다.
檀越滿城歸不得 성안 가득 보시타가 돌아가지 못하니
忘情時有爲情牽 정 잊고도 이따금 정에 끌림 있구려.

도잠(道潛)은 소동파와 가까운 교분을 나누었던 승려 혜원(惠遠)의 이름이다. 예전 소동파와 도잠이 그랬던 것처럼 뜻하지 않게 초의와 알고 지내게 된 것을 기뻐하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 시는 앞서 「원몽」시를 지은 이듬해인 1831년 4월에 지은 것이다. 당시 초의는 스승 완호의 삼여탑에 새겨 넣을 시문을 받지 못해 계속 서울 근교에 머물며, 경화세족들과의 시회에 참석하여 한창 성가를 올리고 있었다.
초의는 삼여탑에 새길 명서(銘序)를 신위에게 부탁했고, 명시(銘詩)는 정조의 외동 사위였던 해거도위 홍현주(洪顯周)에게 부탁을 했다. 홍현주는 뒤에 초의가 「동다송」을 지어주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초의는 신위에게 명서를 부탁하면서 자신이 보림사 대밭에서 직접 따서 만든 ‘보림백모병차(寶林白茅餠茶)’ 4개를 폐백으로 드렸다. 글 부탁을 하면서 바친 떡차가 고작 4개뿐인 것으로 보아, 이때 초의가 만든 떡차는 하나하나 따로 포장된 상당히 크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모(白茅)는 갓 나온 여린 잎이 보송보송하여 흰 빛이 도는 것으로 고급한 첫물 떡차를 가리킨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초의의 떡차를 노래한 「죽로차(竹露茶)」란 장시에서 설명하고 있는 ‘아침(芽針)’ 즉 바늘 같은 창기(槍旗)를 구리 시루와 대소쿠리로 구증구포 하여 마치 머리카락을 뭉쳐놓은 것처럼 만든 차가 바로 이 보림백모다. 중국차에서 말하는 백호은침(白毫銀針)이니 신양모첨(信陽毛尖)이니 하는 것과 비슷한 이름이다. 이유원은 당시 우연히 신위의 집에 놀러 갔다가 이 차를 얻어 마신 일이 있었다.
신위는 초의에게 준 위 시의 6구 아래 자신이 쓴 「삼여탑명서(三如塔銘序)」의 내용을 소개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별 오듯 와서 진짜 가듯 갔구나. 이는 생과 사의 두 꿈이다. 총림(叢林)의 주맹(主盟)으로 『화엄경』을 강한 것이 19년이요, 금벽(金碧)으로 장엄(莊嚴)하고 옥불(玉佛)을 새긴 것이 1003개이다. 이것이 두 꿈의 중간에 한 공화(空花)의 사업이다. 대사께서 시적(示寂)하신 뒤에 문인의 꿈에 나타나 말씀하셨다. “과거도 같고, 현재도 같고, 미래 또한 같다.” 문인이 마침내 삼여(三如)로 스님의 시호(諡號)를 삼고, 그 탑에 ‘삼여탑’이라고 썼다.
星來而來, 眞去而去. 此生與死之二夢也. 主盟叢林, 講華嚴者, 一十九年. 莊嚴金碧, 雕玉像者, 一千有三. 此二夢中間, 空花事業也. 大師示寂後, 見門人之夢曰: ‘過去如, 現在如, 未來亦復如.’ 門人遂以三如爲師諡. 書其塔曰三如之塔.

삼여란 말의 의미를 밝히고 완호 스님의 평생 사업을 간략하게 요약했다. 초의는 글씨까지 써줄 것을 요청했는데, 당시 신위는 비방을 입어 근신하고 있던 황황한 처지여서 글씨를 써줄 형편이 못되었다.
다시 3년 뒤인 1834년 8월에 신위는 「의순의 편지를 받았는데, 나더러 금선암(金仙菴)에서 한번 만나자고 했다. 이때 내가 한질(寒疾)을 앓고 있었으므로 먼저 이 시를 지어 답장한다. 2수 (得意洵書, 要余金仙一會, 時余有寒疾, 先此賦答二首)」란 시를 남긴다. 이때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다만 초의가 1834년 가을에도 다시 서울 걸음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초의는 1838년 봄에 서울에 다시 왔다. 역시 완호대사의 「사리탑기(舍利塔記)」글씨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초의는 이번에도 폐백으로 자신이 직접 만든 수제차를 가져왔다. 신위는 「초의 스님이 편지와 차를 보내면서 스승의 사리탑기를 청하였다. 또 금선암에서 한번 만나기를 원했다. 이때 제사가 있어 가지는 못하고 시로 화답하였다.(釋草衣有書致茶, 求其師舍利塔記. 且願金仙一會. 時有享役未赴, 以詩爲答.)」란 시를 지어 주었다.

數年然後聞師健 몇 해 지나 스님이 건재하심 들으니
甁錫金仙趁道場 병석(甁錫)으로 금선암 도량을 뒤쫓으리.
葬佛苦心徵塔記 장불(葬佛)로 고심하여 사리탑기 청하면서
製茶淸供到山房 보내온 수제차가 산방에 이르렀네.
細傾且玩瓷甌色 가만히 기울이며 자구(瓷甌) 빛깔 완상하고
透裹先聞箬葉香 포장 풀자 우선 먼저 댓닢 향기 풍겨오네.
悟在虛空何必面 깨달음은 허공에 있어 굳이 만나 무엇하리
對床言說淡相忘 상 마주해 얘기하며 담백히 서로 잊네.

초의가 가져온 차가 대나무 껍질로 단단하게 포장되었음을 말했다. 하지만 이때도 신위의 집안 일로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초의의 차는 맛이 너무 여려 진한 중국차에 길들여져 있던 신위에게 싱거운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시 한 수를 짓는다. 제목은 「초의의 차맛이 너무 여려, 전부터 간직해둔 학원차(壑源茶)와 고루 섞어 한 통 속에 같이 보관했다. 다시금 묵은 것과 새것이 섞이길 기다려서 써보려 한다. 또 시 한 수를 지었으니 장차 초의에게 보이기 위함이다. (草衣茶味太嫩, 故與舊所藏壑源茶和勻, 同貯一籠中, 更俟陳新相入而用之也. 又成一詩, 將以示草衣也)」이다.

戀情刋落略無痕 연연한 정 다 끊어져 흔적도 없건마는
未足平生茗事存 평생해도 찻 일 만은 만족을 모른다네.
香積飯過淸佛座 향적반(香積飯)을 올려서 불좌(佛座)를 맑게 하고
松風湯熱淨詩魂 송풍탕(松風湯)을 끓여서 시혼(詩魂)을 정화하네.
評品得聞於鴻漸 평품(評品)은 육우(陸羽)에게 들어서 알았거니
氣味相投借壑源 기운과 맛 서로 맞아 학원차(壑源茶)를 빌렸지.
此是藏收又一法 차 거두어 보관하는 또 다른 방법이니
侍童秘勿俗人言 아이야 속인에겐 비밀로 해 말을 말라.

아껴 둔 중국의 학원차(壑源茶)와 초의의 떡차를 함께 보관하는 것이 진한 맛과 연한 맛이 어우러져 알맞게 하는 방법이라고 적었다. 학원차는 중국의 명차다. 중국차를 마시다가 우리 차를 마시면 맛이 싱겁게 느껴지는 것은 지금도 한 가지다. 하지만 다른 종류의 차를 그것도 묵은 것과 새 차를 함께 보관하는 것이 그의 말대로 보관의 비법이 될런지는 알 수 없다. 신위는 이 시를 지어 차맛 품평을 겸해 초의에게 보이려 한다고 적었다.

초의의 단차(團茶)와 신위의 음다법
초의는 몇 차례의 서울 걸음에도 불구하고 신위가 지은 「삼여탑명서」의 친필 글씨를 받지 못했다. 1841년 3월에 초의는 예전에 신위가 지은 글을 부치면서 글씨를 청하는 편지와 함께 자신이 정성껏 만든 수제차를 다시 신위에게 보낸다. 다음 시는 초의의 편지를 받고 신위가 써준 답장 시다.

편지를 대신하여 초의 스님에게 답하다. 병서
예전 경인년(1830) 겨울에 대둔사 승려 초의가 자하산으로 찾아왔다. 자기의 스승인 완호의 삼여탑명에 내 병서(幷序)와 글씨를 청하였다. 서문은 지었지만 글씨는 쓰지 못한채, 갑자기 내가 호해(湖海)로 쫓겨나게 되었다. 문자는 흩어져 없어지고, 서문의 원고 또한 잃고 말았으므로 몹시 안타깝게 여겼다. 금년 신축년(1841) 봄에 초의의 편지가 왔는데, 다행히 주머니 속에서 찾아낸 글의 부본을 보내왔다. 12년이나 지나고 나서 다시 읽어보매 마치 급총(汲冢)의 고서를 얻은 것 같았다. 비로소 글씨를 써서 돌에 새길 수 있게 되니, 초의의 소원이 거의 이루어진 셈이다. 먼저 시 한 수로 축하하고, 아울러 좋은 차를 보내 준 것에 감사한다.
代書答草衣師 幷序. 往在庚寅冬, 大屯僧草衣, 訪於紫霞山中. 以己師玩虎三如塔銘, 乞余幷序書. 序則成而書未成. 旋余湖海竄逐, 文字散亡. 序稿亦失, 甚恨之. 今年辛丑春, 草衣書來, 幸致其副本之在鉢囊中而搜出者. 十二年之久, 而重讀之, 如得汲冢古書. 始可以成書上石, 庶畢草衣之願也. 先以一詩賀之, 且謝佳茗之充信也.

海鎭山郵遷謫日 바닷가 산 기슭에 쫓겨 귀양 가던 날
恓惶文稿在亡多 황황하여 글 원고를 잃은 것이 많았지.
塔銘一失嗟無及 탑명 잃고 탄식해도 찾을 길이 없었는데
禪墨重翻字不訛 스님 써서 옮긴 것이 글자 하나 틀리잖네.
藏事終資千佛力 간직한 일 마침내 천불(千佛) 힘을 입음이니
勞心好作十年魔 수고론 맘 십년간의 마(魔)가 되기 딱 좋구나.
書來宛對繙經室 편지 받자 경전 읽는 스님 방을 마주한 듯
風味分嘗自製茶 풍미로 자제차(自製茶)를 나눠주어 맛을 보네.

애초에 초의가 명시(銘詩)를 부탁했던 홍현주는 끝내 시를 짓지 못했고, 뒤늦게 권돈인(權敦仁)의 명시와 신위의 글씨를 받아 초의는 1841년에야 겨우 삼여탑의 비문을 새길 수 있었다. 1831년 1월에 초의는 북선원(北禪院)의 다반향초실(茶半香初室)로 신위를 찾아가 글을 부탁했다. 북선원은 관악산 중턱에 있던 자운암(紫雲菴)을 가리키는 듯 하다. 추사의 글씨로 유명해진 ‘다반향초(茶半香初)’가 바로 이곳 선방(禪房)의 호칭이었음도 확인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따로 쓰겠다. 이때 신위는 초의의 『일지암시고』에 서문도 써 주었다.
1841년 초여름에 쓴 신위의 「벽로방 앞뜰을 산보하며(碧蘆舫前庭散步)」란 시가 있다.

散步階庭玩物華 뜨락을 산보하며 사물 번화 감상하니
古藤陰下岸巾紗 등나무 그늘 아래 깁 두건을 썼구나.
蛾眉淡白初三月 자태도 담백해라 초삼월 한창인데
芍藥翻紅第一花 작약의 붉은 빛이 으뜸 가는 꽃이로다.
靑眼故人懷麗句 반가운 옛 벗의 좋은 싯귀 생각는데
鬅頭童子捧團茶 쑥대머리 아이는 단차(團茶) 끓여 올리누나.
誰能畵我閑中景 뉘 능히 한가로운 이 풍경을 그릴거나
舫閣香燈蘆荻斜 벽로방에 향등(香燈) 걸려 갈대도 기우숙해.

이 시의 제 6구 아래 달린 주석에 “이날 저녁에 좋은 샘물을 길어와 초의가 부쳐준 단차(團茶)를 끓였다. (是夕, 汲名泉, 瀹草衣所寄團茶)”고 한 내용이 보인다. 전차(錢茶) 아닌 단차라 했으니 상당한 크기의 떡차였음을 알 수 있다.
신위는 이렇듯 여러 차례 초의가 직접 만든 단차(團茶)를 얻어서 마셨다. 집안에 중국의 학원차를 간직하고 있던 데서도 알 수 있듯, 북경 연행 길에 구해온 중국차도 아껴가며 마셨다. 그의 시집 속에는 음다 생활과 관련된 시가 아주 많다.
중국의 금속학사(金粟學士) 전림(錢林)에게 준 시의 첫구에는 “다산의 전법 따라 엷게 차를 끓인다. 茶山傳法淡烹茶”고 한 것이 있다.

1827년에 지은 시로 신위가 초의와 만나기 전에 이미 다산의 음다법을 숙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숙직을 서면서도 “얼음 장 밑 봄 강물의 가는 무늬 떠내어, 활탕(活湯)으로 차를 끓여 다구(茶甌)에 나눠낸다. 氷底春江剪細紋, 活湯茶熟一甌分”고 노래했고, 감옥에 갇혀서도 화로 불에 찻물을 얹어놓고 차를 마셨던 사람이다. 「성주암(聖住菴)」 시에서는 “단풍 잎을 태워서 엷은 차 끓여내어, 석양의 변화 보며 다구(茶甌)를 기울이네. 淡茗自燒紅葉煮, 夕陽變態一甌傾”라고 노래했다. 죽은 벗을 그리며 지은 시에서는 “옛것 좋아 재물 쏟아 살림에 소홀했고, 향 사르고 차 달이며 평생을 보냈다네. 嗜古揮金輕産業, 焚香瀹茗送平生”라고 자신의 평생을 회고한 바도 있다.


초의의 떡차를 만나기 전에는 주로 중국 연경에서 사온 차를 마셨다. “연경의 가게에서 손수 고른 것이라, 마구 사서 들여온 것과 같지 않다네. 燕肆手揀選, 非同悖入貨”(「早春煮雪點茶」)라고 했다. 또 “찻잎에 매화꽃을 함께 넣어 끓이니, 뉘라서 그 향과 맛 분별 할 수 있으리. 茗葉梅花同一瀹, 誰能香味辨中邊”(「啜梅」)라 하여 찻잎과 꽃잎을 함께 우려 마시는 등 다양한 방식의 응용도 보여주었다. 또 그는 좋은 샘물을 찾아다니며 차를 마셨고, 우물물과 샘물, 냇물과 눈 녹인 물의 맛을 일일이 비교한 시도 여럿 남겼다.
이상에서 확인한 내용을 간단히 정리한다.


첫째,

신위의 모든 글에서 초의차는 단차(團茶) 혹은 차병(茶餠), 즉 떡차로 나온다. 초의가 만든 떡차는 댓닢으로 포장했고, 머리카락처럼 가는 일창일기(一槍一旗)를 따서 만든 상당한 크기의 고급 떡차였다. 이는 뒤에 살펴볼 추사의 많은 걸명 편지를 통해서도 재확인 된다.
둘째,

박영보의 「남차」시와 신위의 「원몽」등의 작품을 통해 초의는 전다박사(煎茶博士)의 칭호까지 들었고, 경화세족들 사이에 초의차가 본격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815년에 초의는 처음으로 서울 걸음을 했지만, 초의차가 유명해진 것은 1830년 이후의 일이다.
셋째,

초의 이전에는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토산차를 맛본 적이 없었고, 연행 길에 비싸게 구해온 중국차를 아껴 마시는 정도의 음다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때로는 매화꽃을 함께 넣어 차를 끓이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차 생활을 즐겼다.
넷째,

이 시기에 오면 찻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이름난 샘을 찾아 여행하고, 물맛을 비교하는 등 차 생활이 상당히 전문적인 수준으로 올라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