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이어령의 다시 읽는 한국시_17

醉月 2009. 8. 21. 07:12

김소월의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개벽(開闢) 1922년 7월 序詩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시.그러나 가장잘못 읽혀져 온 시-그것이 바로 김소월의「진달래꽃」이다.거의 모든 사람들은「진달래
꽃」이 이별을 노래한 시라고만 생각해왔으며 심지어는 대학입시 국어 문제에서도 그렇게써야만 정답이 되었다.

하지만「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  우리다」라는 그 첫행 하나만 조심스럽게 읽어 봐도 그것이 결코 이별만을 노래한 단순한 시가 아니라는  것을 간단히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가실 때에는…」「…드리우리다」와같은 말에 명백하게 드러나  있듯이 이 시는 미래 추정형으로 쓰여져 있기 때문이다.

영문같았으면「If」로 시작되는 가정법과  의지미래형으로 서술되었을 문장이다.

이 시 전체의 서술어는「…드리우리다」「…뿌리우리다」「…옵소서」「…흘리우리다」로 전문에 모두 의지나 바람을 나타내는 미래의 시제로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 의미로 보면 지금 님은 자기를 역겨워하지도 않으며 떠난 것도 아니다.오히려그들은 지금 이별은커녕 열렬히 사랑을 하고 있는 중임을 알 수가 있다.그런데도 이 시를 한국 이별가의 전형으로 읽어온 것은 미래추정형으로 된「진달래꽃」의 시제를 무시하고 그것을 현재나 과거형으로진술한 이별가와 동일하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고려때의 가요「가시리」에서 시작하여「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라는「아리랑」의 민요에 이르기까지 이별을 노래한 한국시들은 백이면 백 이별의 그 정황을 과거형이나 현재형으로 진술해왔다.오직 김소월의「진달래꽃」만이 이별의 시제가 미래추정형으로 되어 있고 시 전체가「만약」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해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진달래꽃」의 시적 의미를 결정짓는 것.그리고 그것이 다른 시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바로 이같은 시의 시제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가령 미래추정형의 시제를 실제 일어났던 과거형으로 바꿔서「나보기가 역겨워 가신 그대를 말없이 고이 보내 드렸었지요」로 고쳐보면 어떻게 될 것인가.그것은 이미 소월의 진달래꽃과는 전혀 다른 시가 되고 말 것이다.그렇기 때문에「진달래꽃」을 이별의 노래라고 생각한다는 것은「만약에 백만원이 생긴다면은…」이라는 옛가요를 듣고 그것이 백만장자의 노래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시 음치에 속하는 일이다.그같은 오독이「진달래꽃」을읽는 시의 재미와 그 창조적인 의미를 얼마나 무참히 파괴해버렸는가는 췌언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오독으로 인해서「고이보내 드리 우리다」나「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와 같은 시의 역설이 한국  여인의 부덕으로 풀이되기도 하고 급기야는 이 시를 명심보감이나 양반집 내훈의 대역에 오르도록 했다.
  자기를 역겹다고 버린 님을 원망은커녕 꽃까지 뿌려주겠다는 인심좋은 한국 여인의 관용이,그리고 눈물조차 흘리지 않겠다는 극기의 그 여인상이「진달래꽃」의 메시지였다면 그 시는 물론이고「진달래꽃」의 이미지조차도 우스워진다.그렇다.그런 메시지에 어울리는 꽃이라면 그것은 저 유교적 이념의 등록상표인「국화」요「매화」일 것이다.


  「진달래꽃」은 결코 점잖은 꽃,자기 억제의 꽃이라고는 할 수 없다.그것은 울타리 안에서 길들여진 가축화한 완상용 꽃이 아니다.

오히려 겨우내내 야산의 어느 바위틈이나 벼랑가에 숨어 있다가 봄과함께 분출한 춘정을 주체할 바 모르는 야속(野屬)의 꽃인 것이다.

더구나 영변 약산에 피는 진달래꽃은 그 색깔이 짙기로 이름나 있다.온 산 전체를 온통 불태우는 꽃으로, 신윤복의 그림「연소 답청」에서
보듯 남자들과 나귀 타고 산행을 하는 기녀들의 머리에 꽂았을 때 가장 잘 어울리는 꽃인 것이다.그런진달래가 이별의 슬픔을 억제하고 너그러운 부덕을 상징하는 자리에 등장하는 꽃이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유교사회에 있어 진달래꽃은 그 흔한 화조병풍이나 화투장에서마저도 멀찌감치 물러나 앉은반문화적 꽃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째서「진달래꽃」이 어둡고 청승맞은 4 4조의 우수율이 아니라 밝고 경쾌하며 조금은 까불까불한 느낌조차 주는 7 5조의 기수율로 되어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그것은 이별가의 침통한 가락이 아니다.약간은 수줍게 그러면서도 철없이 불타오르는「진달래꽃」같은 사랑의 언어들,때로는 장난기마저 깃든 천진난만한「소녀의 기도」소리의 율동을 들을 수가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밤의 어둠을 바탕으로 삼지 않고서는 별빛의 영롱함을 그려낼 수 없듯이 이별의 슬픔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사랑의 기쁨을 가시화할 수 없는 역설로 빚어진 것이 바로 소월의「진달래꽃」인 것이다.

즉 이별의 가정을 통해 현재의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낸 시이다.이별을 이별로써 노래하거나 사랑을 사랑으로 노래하는 평면적 의미와 달리 소월은 사랑의 시점에서 이별을 노래하는 겹시각을 통해서 언어의 복합적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이라는 대립된 정서,대립된 시간 그리고 대립된 상황을 이른바「반대의일치」라는 역설의 시학으로 함께 묶어 놓는다.그래서 사랑을 반기고 맞이하는 꽃이 여기에서는 반대로 이별의 객관적 상관물이 되고,향기를 맡고 머리에 꽂는 꽃의 상부적 이미지가 돌이나 흙과 같이바닥에 깔리거나 발에 밟히는 하부적 이미지로 바뀐다.그러한 꽃의 이미지 때문에 가벼움을 나타내는
「사뿐히」와 무거움을 나타내는「밟다」라는 서로 모순하는 어휘가 하나로 결합하여「사뿐히 즈려밟고」의 당착어법이 되기도 한다.


  소월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산에 핀 진달래거나 혹은 여인의 머리나 나무꾼의 지게에 꽂아진 진달래의 그 아름다움밖에는 모를 뻔했다.그러나 반대의 것을 서로 결합시키는 소월의 시적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바위 틈에서 피어나는 진달래만이 아니라 슬픈 발걸음 하나하나에서 밟히우면서 동시에 희열로 피어나는 또 다른 가상공간의 진달래꽃의 아름다움과 만난다.
  그것이 바로 이별의 슬픔을 통해서 사랑의 기쁨을 가시화하는 역설 또는 아이러니라는 시적 장치이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시의 복합적 의미는 반드시 한 항목만을 골라 동그라미를 쳐야 하는 사지선다의 객관식 답안지로는 영원히 도달될 수 없는 세계이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의 마지막 구절을 눈여겨 보면 산문과는 달리 복합적 구조를 가진  시적 아이러니가 무엇인지를 알게될 것이다.어느 평자도 지적한 적이 있지만 산문적인 의미로 볼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와「죽어도 눈물 아니 흘리우리다」는 조금도 뜻이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부정을 뜻하는「아니」가「눈물」앞에 오느냐 뒤에 오느냐로 시적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아니가 뒤에 올 때에는 단순히 평서문으로서 그냥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진술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하지만 아니가 눈물 앞에 올 때에는 그 부정의 의미가 훨씬 강력해진다.「아니」라는 말이 의도적으로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들수록 눈물을 흘리지 않겠
다는 다짐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그러므로 강력한 부정일수록 긍정으로 들리는 시의 역설이 생겨나게 된다.

 

  김소월의「진달래꽃」은 한 세기 가까이 긴 세월을 두고 오독되어온 셈이다.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이별의 노래가 아니다.역겨움과 떠남이 미래형으로 서술되고 있는 한「사랑」은 언제나「지금」인 것이다.사랑을 현재형으로,이별을 미래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소월의 특이한 시적 시제 속에서는 언제나 이별은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랑의 기쁨과 열정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구실을 한다.그러한 모순과 역
설의 이중적 정서를 가시화하면 봄마다 약산 전체를 불타오르게 하는,

그러면서도 바위틈 사이에서 하나 하나 외롭게 피어나는 진달래꽃잎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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