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리와 『동다기(東茶記)』
『동다기(東茶記)』는 이덕리(李德履, 1728- ?)가 지은 차에 관한 문헌이다. 『동다기』는 초의 스님의 「동다송(東茶頌)」의 주석에 한 대목이 인용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다만 실물이 전하지 않아, 그간 엉뚱하게 다산 정약용의 저작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2006년 9월 필자는 전남 강진군 성전면 백운동의 이효천 선생 댁에서 『강심(江心)』이란 표제의 필사본에 수록된 「기다(記茶)」가 바로 초의가 인용한 『동다기』의 원본임을 확인했다.
기다(記茶)인가 동다기(東茶記)인가?
먼저 책의 정확한 명칭에 관해 따져보자. 우선 『동다송』에 인용된 책 이름은 『동다기(東茶記)』다. 1992년 용운 스님이 발굴 소개한 법진본 『다경(茶經)』 속에는 그냥 『다기(茶記)』로 되어 있다. 필사본 『강심(江心)』 속에 수록된 글은 거꾸로 「기다(記茶)」라고 했다. 이덕리는 자신의 다른 저술인 『상두지(桑土志)』에서 자신이 「다설(茶說)」을 지었다고 했다. ‘전의리(全義李) 저(著)’로 표기된 법진본 『다기』는 「기다(記茶)」와 내용이 같지만, 원문의 뒷부분이 모두 탈락된 불완전한 사본이다.
‘동다기(東茶記)’ 또는 ‘다기(茶記)’란 명칭이 있었고, 이덕리 문집의 전사본에서는 ‘기다(記茶)’로 표기하였고, 다른 책에서는 스스로 ‘다설(茶說)’을 지었다 하여, 같은 자료를 두고 모두 4가지 다른 명칭이 존재한다.
먼저 따져볼 것은 초의 스님이 『동다송』에서 말한 『동다기』가 이덕리의 「기다」 또는 법진본 『다기』와 같은 것인가 하는 점이다. 『동다송』에서 초의는 “동국에서 나는 것도 원래 서로 같나니, 색과 향 기운과 맛 중국과 한 가질세. 육안차의 맛에다 몽산차의 약효 지녀, 옛 사람은 두 가지를 아울렀다 평가했지. 東國所産元相同, 色香氣味論一功. 陸安之味蒙山藥, 古人高判兼兩宗”라고 노래했다. 그리고는 위 시의 구절 아래 단 주석에서 고인의 이 말이 『동다기』에 나온다면서 그 근거가 된 한 구절을 인용했다.
정작 이덕리의 저술을 그대로 베낀 것으로 보이는 『강심』에서는 「기다(記茶)」라고 했는데, 왜 초의는 책 이름을 『동다기』라고 했을까? 법진본의 『다기』 또한 제명이 다르고, 내용에도 상당한 누락이 있다. 이덕리의 이 저술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 베껴져서 유통되었고, 베껴 쓰는 과정에서 제목도 필사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던 듯하다. 동다기와 다기 및 기다는 그래도 계열성이 있어 보이는 이칭인데 반해, 자신이 『상두지』에서 밝힌 다설(茶說)은 다르다. 이는 책 제목으로 쓴 것이 아니라 차에 관한 논설이 있다는 정도의 의미로 쓴 듯하다.
이 책의 공식 제명은 「기다」 또는 『동다기』 둘 중의 하나로 해야 옳다. 이에 있어 『동다송』에 인용된 『동다기』란 명칭이 오래 사용되어 왔고 문헌 근거가 있으며, 『동다송』이란 명칭과도 세트를 이루고, ‘동(東)’이란 접두어에서 차 일반론이 아닌 우리 차에 대한 기록이란 의미를 강조할 수 있으므로, 공식 명칭은 「기다」 보다는 『동다기』로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따라서 이후 표기는 『동다기』로 통일한다.
이덕리는 누구인가?
『동다기』의 저자는 누구인가? 근대 이능화나 최남선, 문일평 같은 쟁쟁한 학자들은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이 책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저작이라고 했다. 초의는 『동다기』의 저자를 그저 ‘고인(古人)’으로 적었다. 『동다기』가 다산 정약용의 저작이었다면 초의가 살아 있는 스승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을 리가 없다. 고인으로 적은 것은 자신과 시간적 거리가 상당하다는 뜻이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다. 법진본 『다기』에서도 저자를 ‘전의리(全義李)’라고만 했지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반면 『강심』에 수록된 「기다」에는 끝 부분에 필사자 이시헌(李時憲, 1803-1860)이 남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강심(江心)’의 의미는 분명치 않다. 이 한 책에 적힌 사(辭)와 문 및 시는 바로 이덕리(李德履)가 옥주(沃州)에서 귀양 살 때 지은 것이다.
江心之義未詳. 此一冊所錄辭文及詩, 乃李德履沃州謫中所作.
이 책의 저자가 이덕리(李德履)이고, ‘옥주적중(沃州謫中)’에서 이 책을 저술했다고 했다. 옥주(沃州)는 진도(珍島)의 별호다. 이덕리가 죄를 지어 진도에 유배와 있으면서 지은 것이다. 당시 죄인 신분이었던 그는 이 때문에 자신의 저서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본관만 밝혔던 듯하고, 이것이 필사되어 유통되면서 법진본의 ‘전의리(全義李) 저(著)’로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이시헌은 이 책의 저자가 이덕리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필사 후 위의 언급을 남겨두었다.
여러 문헌 자료를 통해 볼 때, 이덕리의 본관은 전의이고, 자는 수지(綏之)였다. 그는 숙종조 조선 최고의 무인이었던 장한상(張漢相, 1656-1724)의 외손이며, 어영대장과 훈련대장을 거쳐 영조 때 병조판서에 올랐던 무신 이삼(李森, 1677-1735)의 처조카였다. 무인 계통의 명망 있는 집안의 후손이었음을 알 수 있다. 1749년에는 성균관 생원(生員), 1759년에는 진사(進士) 신분이었고, 1763년에는 조선통신사의 자제군관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1772년 정 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에 가좌되었고, 1774년 9월에는 도성 경비의 책임을 맡은 종 2품 창경위장(昌慶衛將)이 되었다.
이덕리의 문장은 윤광심(尹光心, 1751-1817)이 당대 뛰어난 문인의 시문을 모아 엮은 선집인 『병세집(幷世集)』에도 실려 있다. 이 중 「제고이헌납중해시(祭告李獻納重海詩)」 9수가 수록되었다. 1775년 이덕리 48세 때 쓴 글인데, 헌납 벼슬을 지낸 이중해(李重海)와 평소 절친한 사이였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이 이중해가 누군고 하니, 앞절에서 살핀 『부풍향차보』의 저자 이운해의 친동생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덕리는 이운해의 『부풍향차보』를 동생 이중해를 통해 진작에 보았을 가능성이 있고, 이를 계기로 차에 대해 일정한 안목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최초의 다서라 할 『부풍향차보』와 『동다기』 사이에 일말의 연결점이 시사되는 것이다.
『병세집』은 당대 최고의 문장이었던 박지원과 이덕무 등의 문집에 실리지 않은 글이 수록되어 있을 만큼 현장성이 강한 엔솔로지다. 이 책의 시권과 문권 모두에 이덕리의 이름이 올라있는 것을 보면, 이덕리는 당대 문명이 높았던 문인이었음이 분명하다.
막상 전의이씨 대동보에는 이덕리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는 그가 진도에 장기간 유배되어 세상을 뜬 일과 관련이 있다. 또 그가 일관되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족보에 마저 이름이 지워진 것을 보면, 그의 죄는 역모죄나 이에 준하는 것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대동수경(大東水經)』에 이덕리의 다른 저술인 『상두지(桑土志)』를 각각 한 차례 씩 인용하였다. 『상두지』는 국가 경제와 지리 등의 내용을 담은 실학 계통의 서적이다. 이 책 또한 『동다기』와 마찬가지로 현재 다산의 저술로 오인되어 1973-74년에 다산학회가 편찬하여 간행한 『여유당전서보유(與猶堂全書補遺)』(경인문화사) 제 3권에 실려 있다.
『상두지』의 서문에 ‘계축정월상간서(癸丑正月上澣序)’라고 했으니, 이 책은 1793년(정조 17)에 지은 것이다. 이 또한 저자가 밝혀져 있지 않고 서문 끝에 “공은 야인으로 이름을 칭탁코자 했으므로 권도로 이 서문을 써서 스스로를 감추었다. 公欲托名野人, 權爲此序以自晦”고 적었다. 이글 역시 이덕리가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지은 것이다. 다산이 이 책을 두 차례나 인용하면서 분명하게 이덕리가 지었다고 했으니, 『상두지』는 다산의 저술일 수 없고, 이덕리가 지은 것이다.
『강심』에 수록된 「실솔부(蟋蟀賦)」에는 이덕리 자신의 신상과 관련된 한 가지 단서가 더 있다.
나는 병신년(1776년, 영조 52), 4월 은혜를 입어 옥주(沃州)로 유배왔다. 성 밖 통정리(桶井里)에 있는 윤가(尹家)에서 살았다.(중략) 3년만에 통정리 서쪽 이가(李家)로 옮겼다.
余以丙申四月, 恩配于沃州. 居城外桶井里尹家.....三年移住井西李家....
이로 보아 이덕리는 49세 때인 1776년 3월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4월 초에 사도세자 복권 움직임과 관련해서 일어난 상소 사건에 연루되어 역모죄로 진도로 유배온 듯 하다. 전후의 자세한 정황은 남은 기록만으로는 알기 어렵다. 진도에 유배온 지 10년 정도 지난 1785년을 전후해서 『동다기』를 저술했고, 66세 때인 1793년에는 국방에 관한 중요한 제안을 담은 『상두지(桑土誌)』란 책을 잇달아 발표했다. 하지만 그는 역모죄에 연루된 유배 죄인의 신분이었기에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익명으로 이들 저술을 세상에 공개했다. 그간 저자 문제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동다기』는 어떤 책인가?
이제 『동다기』의 내용을 살펴보자. 『동다기』는 서설 5단락과 본문 15 항목, 그리고 ‘다조(茶條)’ 7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분량이래야 모두 14쪽에 불과하다. 더욱이 이시헌이 이덕리의 원고 『강심』을 필사할 당시 원본은 서문도 없고 체재도 갖추어지지 않은 난고(亂藁) 상태였던 듯하다. 필사자 이시헌은 다산이 아꼈던 강진 시절의 막내 제자였다. 뒤편 다산 떡차론 관련 글에 인용된, 다산이 3증3쇄 떡차의 제조법을 일러주며 차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던 편지의 수신인이기도 하다. 본문 15항목의 끝부분에는 이덕리의 다음과 같은 메모가 적혀 있다.
앞의 십여 조목은 모두 차에 관한 일을 떠오르는 대로 적은 것이다. 하지만 국가에 보탬이 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하는 큰 이로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제 바야흐로 본론으로 들어가려 한다.
右十數條, 皆漫錄茶事. 而未及其裨國家裕生民之大利. 今方挽入正事.
그리고 이 메모 아래 필사자인 이시헌이 작은 글씨로 “이하 10조목은 지금 책이 흩어져서 적을 겨를이 없다. 以下十條, 今散帙, 不暇錄.”고 부기하였다. 이덕리가 『동다기』를 한 번에 저술한 것이 아니라 두 차례에 나눠 썼고, 앞쪽은 차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뒤쪽은 차가 국가 경제와 민생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에 대해 쓴 것임도 알 수 있다. 법진본 『다기』가 앞쪽만 싣고 뒤쪽은 싣지 않았던 것은 원본의 어지러운 상태와도 무관치 않다.
이어 『강심』의 맨 뒤쪽에 「다조(茶條)」란 제목 아래 다시 4쪽 7항목의 글이 이어진다. 제목 아래 “마땅히 앞의 「다설(茶說)」 아래 놓여야 한다.(當在上茶說下)”라고 적혀있다. 이 「다조」가 앞서 말한 「기다」의 속편임을 밝힌 것이다. 이 7항목이 법진본에는 모두 빠져있다. 또 앞부분에서도 법진본은 백운동본의 서설 3단락 일부와 4단락 전체가 탈락되어 있고, 본문의 11단락도 누락되어 있다. 그러니까 현재 남은 분량으로 보면 법진본은 백운동본의 절반 가량만 남아있는 셈이다. 특별히 여기서 앞부분의 글을 「다설(茶說)」이라 한 것이 주목되는데, 혹 다른 필사에서는 앞쪽 글을 ‘다설’이라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덕리는 무슨 의도로 『동다기』를 저술했을까? 서설 다섯 단락을 검토하여, 저술 동기를 살펴보자. 다섯 단락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 단락은 도입 서설로, “황량한 들판의 구석진 땅에 절로 피고 지는 평범한 초목에서 얻어 이것으로 국가를 돕고 민생을 넉넉하게 할 수만 있다면, 어찌 그 일이 재물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다 하여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차로 국부 창출의 자원으로 삼을 수 있음을 말했다.
둘째 단락에서는 중국 차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하고, 역대 중국 왕조가 차를 미끼로 북방 민족을 제어한 일을 적었다. 북방인은 육식만 하므로 차를 마시지 않으면 배열병(背熱病)에 걸린다. 그런 까닭에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남방의 차를 사마시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해, 그 수요의 일부를 우리 차로 감당할 수 있음을 암시했다.
셋째 단락은 차에 무지한 조선의 실정과, 발상 전환을 통한 차 무역 제안을 담았다. 이 부분은 전체 단락을 함께 읽어 보겠다.
우리나라에서는 호남과 영남의 여러 고을에서 차가 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고사촬요(故事撮要)』 등에 실려 있는 것은 다만 열 곳 백 곳 중에 하나일 뿐이다. 우리나라 풍습이 비록 작설을 사용하여 약에 넣기는 해도, 대부분 차와 작설이 본래 같은 물건인 줄은 모른다. 때문에 예전부터 차를 채취하거나 차를 마시는 자가 없었다. 혹 호사가가 중국 시장에서 사가지고 올망정, 가까이 나라 안에서 취할 줄은 알지 못한다. 경진년(1760년, 영조 36)에 배편으로 차가 오자, 온 나라가 비로소 차의 생김새를 알게 되었다. 10년간 실컷 먹고, 떨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또한 따서 쓸 줄은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차는 또한 그다지 긴요한 물건이 아니어서, 있고 없고를 따질 것이 못됨이 분명하다. 비록 물건을 죄다 취한다 해도 이익을 독점한다는 혐의는 없을 것이다.
배로 서북 지역에 시장이 열리는 곳으로 운반하여, 차를 은과 바꾸면 주제(朱提)와 종촉(鍾燭) 같은 양질의 은이 물길로 잇달아 들어와 지역마다 배당될 수 있다. 차를 말과 바꾼다면 기주(冀州) 북쪽 지방의 준마와 양마가 바깥 관문에 가득하고 교외 목장에 넘쳐날 수가 있다. 차를 비단과 맞바꾸면 서촉(西蜀) 지방에서 짠 고운 비단을 사녀(士女)들이 나들이옷으로 걸치고, 깃발의 천도 바꿀 수가 있다. 나라의 재정이 조금 나아지면 백성의 힘도 절로 펴질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럴진대 앞서 황량한 들판 구석진 땅에서 절로 피고 지는 평범한 초목을 얻어서 나라에 보탬이 되고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我東産茶之邑, 遍於湖嶺. 載輿地勝覽, 攷事撮要等書者, 特其百十之一也. 東俗雖用雀舌入藥, 擧不知茶與雀舌, 本是一物. 故曾未有採茶飮茶者. 或好事者, 寧買來燕市, 而不知近取諸國中. 庚辰舶茶之來, 一國始識茶面. 十年爛用, 告乏已久, 亦不知採用, 則茶之於東人, 其亦沒緊要之物, 不足爲有無, 明矣. 雖盡物取之, 無榷利之嫌. 舟輸西北開市處, 以之換銀, 則朱提鍾燭, 可以軼川流而配地部矣. 以之換馬, 則冀北之駿良駃騠, 可以充外閑而溢郊牧矣. 以之換錦段, 則西蜀之織成綺羅, 可以袨士女而變㫌幟矣. 國用稍優, 而民力自紓, 更不消言. 則向所云得於荒原隙地, 自開自落之閑草木, 而可以裨國家裕民生者, 殆非過言.
우리나라는 영남과 호남 각처에서 차가 생산된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작설을 고약처럼 달이고 고아서 약용으로 쓸 줄만 알 뿐, 애초에 차와 작설이 같은 물건인지조차 모른다. 1760년에 차를 가득 실은 중국 무역선이 전라도 섬 지역에 표류한 일이 있었다. 이 표류선에서 흘러나온 차가 호남 지역에 널리 유통되면서 온 나라가 비로소 차의 생김새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때 중국 배에서 유통된 차를 전체 조선이 10년간 실컷 마셨다. 그 차가 떨어진 지가 벌써 오래 되었는데도 여전히 주변에 널려 있는 차를 따서 마실 생각은 못한다. 애초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차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긴요하지 않은 물건이었던 것이다.
실제 1760년에 표류해온 중국차를 가득 실은 배 이야기는 박제가의 『북학의』에도 나온다. 「통강남절강상박의(通江南浙江商舶議)」에서 “나는 황차(黃茶)를 실은 배 한 척이 표류하여 남해에 정박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온 나라가 그 황차를 10여년 동안 사용하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 선박의 표류를 계기로 호남 지역에서 차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된 듯하다. 이덕리가 차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일과 무관치 않다.
그렇다면 이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상관없는 차란 물건을 국가에서 모두 취해 그 이익을 독점한다고 해도 달리 탓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차를 서북 개시로 가져가서 북방의 은이나 말 또는 비단과 맞바꾼다면, 온 나라에 질 좋은 은이 넘쳐나게 되고, 준마와 양마의 수효가 급증할 것이며, 귀한 비단 옷을 모든 백성이 입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있으나마나한 차를 팔아서, 없어서는 안 될 귀한 물건을 풍족하게 얻을 수 있다. 나라 살림에 큰 힘이 되고, 다급한 민생에도 획기적 개선이 이루어질 터이니, 그야 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 아니겠는가?
넷째 단락은 재물을 버는 방법에 대해 논했다. 그 핵심은 근원을 틔워 흐름을 끌어오는 것이다. 교역과 효율적인 정책의 시행을 통해 천하의 패권을 장악했던 월나라와 진나라, 그리고 관중(管仲) 등의 예를 통해 부국의 방법을 설명했다. 여기서 이덕리가 통상의 원리로 제안한 것은 일종의 국가 전매정책의 강화를 통한 유통구조 개선과 가격 조절 정책이다.
마지막 다섯 째 단락은 당국자에 대한 차무역 정책의 건의로 글을 맺었다. 전체 원문을 보자.
중국의 차는 아득히 먼 만리 밖에서 난다. 그런데도 오히려 취해서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오랑캐를 방어하는 기이한 재화로 삼는다. 우리나라는 차가 울타리 가나 섬돌 옆에서 나는데도 마치 아무 짝에 쓸데없는 토탄(土炭)처럼 본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조차 잊어버렸다. 그래서 차에 관한 글 한 편을 지어 차에 대한 일을 다음과 같이 조목별로 구분하였다. 이것으로 당국자가 시행해 볼 것을 건의한다.
中國之茶生於越絶萬里之外. 然猶取以爲富國禦戎之奇貨. 我東則産於笆籬堦戺, 而視若土炭無用之物. 並與其名而忘之. 故作茶說一篇, 條列茶事于左方, 以爲當局者建白措施之地云爾.
구체적 방안 제시에 들어가기 앞서 지금까지의 논의를 수렴하고, 당국자의 정책 입안을 건의한 내용이다. 중국은 만리 밖 남방에서 나는 차를 가지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외적을 막는 수단으로 삼는다. 우리도 호남과 영남 각지에 차나무가 중국 못지않게 많이 자란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과는 달리 아무도 차를 거들떠보지 않을 뿐 아니라, 차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조차 알지 못한다. 이덕리는 자신이 차에 관한 논설 한편을 지어 차를 소개하고, 차무역의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려는 것은 이런 현실이 안타까워서라고 하면서, 부디 눈 밝은 당국자가 자신의 이 글을 읽고서 시행을 건의해 줄 것을 당부했다.
여기까지로 전체 글의 서론이 마무리 된다. 이글을 통해 볼 때, 당시 조선 사람들은 차에 대해 거의 무지한 수준이었다. 아는 경우라 해도 고약처럼 고아서 급할 때 약으로 쓰는 정도였다. 차를 일상의 기호 음료로 생각하는 인식은 전혀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때로 지식인 가운데 차를 즐긴 사람이 없지 않았으나, 대부분 중국 사행 길에 연경에서 구해온 차를 가지고 시늉이나 하는 정도였고, 그나마도 대어 놓고 마실 형편은 못 되었다. 이는 앞서 살펴본 『부풍향차보』의 기술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물론 신라와 고려 때 우리나라에서 차 문화가 대단히 성행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우리의 차 문화는 명맥이 거의 끊어지고 말았다.
이런 척박한 상황에서 이덕리는 차의 국가 전매와 국제 무역을 통한 국부 창출을 과감하게 주장했다. 기호품인 차가 국제 교역 시장에서 갖는 상품 가치를 꿰뚫어 보고 국가적 차원에서 차를 관리하고 전매해서 그 이익으로 국방을 강화시킬 것을 주장하면서 그 실행 방법과 단계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 방법 또한 대단히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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