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정민_차문화사_01

醉月 2009. 6. 29. 05:02

차에 깃든 시정

가만히 앉아 차를 마신다. 코 끝을 스치는 차의 향기. 한 모금 머금어 내리면 어느새 내 몸 속에는 시냇물이 흘러가고 향그런 꽃이 피어난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차 마시며 느끼는 오묘한 경계를 이렇게 노래했다.

靜坐處茶半香初 고요히 앉은 곳, 차를 반쯤 마신 후 향을 피우고
妙用時水流花開 깨달음이 일 때, 물은 흘러가고 꽃은 피어 있다.

우리 옛 선인들에게 있어 차는 인생의 향기와도 같았다. 사람의 한 평생이란 쓴맛의 연속일 뿐이지만, 그 사이에 차를 마시는 여유가 있어 그 맛이 쓴 줄을 잊었다. 옛 선인들의 생활 속에서 차는 늘 함께 하는 벗과 같았다. 스님네의 수행처에도 선비들의 일상에서도 차는 없어서 안될 소중한 물건이었다. 차는 정신을 맑게 하고, 갈증을 걷어가 준다. 차를 마시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벗과의 대화도 차와 함께라면 한결 운치가 있다. 그래서 옛 그림을 보면, 선비의 시 짓는 모임이거나 풍류의 자리 한편에는 으레 차 달이는 童子의 모습이 등장한다. 차를 마시는 일은 그네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일상이요 생활이었던 것이다.
이목(李穆, 1471-1498)은 〈다부(茶賦)〉에서 차의 효능에 대해 한 잔을 마시면 마른 창자에 눈 녹인 물을 부은 것 같고, 두 잔을 마시면 정신이 상쾌해져 신선이 될것만 같으며, 석 잔을 마시면 병든 사람이 깨어나고 두통이 가셔지고, 넉 잔을 마시면 웅장한 기운이 일어나고 근심과 분노가 사라진다. 다섯잔을 마시면 색마(色魔)가 놀라 달아나고 몸 속 귀신의 눈과 귀가 멀며, 여섯 잔을 마시면 훨훨 하늘로 날아올라 노니는 듯 하고, 일곱 잔을 마시면 반도 채 마시기 전에 맑은 바람이 옷소매 사이에서 일어나 선계에 노니는 듯 하다고 노래한 바 있다.
이제 몇 수의 작품 감상을 겸하여, 옛 선인들의 차 마시기에 깃든 시정을 펼쳐 보기로 하자.

산 위 산 아래로 소롯길이 갈려 있고
비 머금은 송홧가루 어지러이 떨어진다.
도인이 물을 길어 띠집으로 가더니만
푸른 연기 한 오리 흰 구름 물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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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北山南細路分 松花含雨落繽紛
道人汲井歸茅舍 一帶靑煙染白雲

고려 말 이숭인(李崇仁, 1349-1392)의 〈제승사(題僧舍)〉란 작품이다. 산 아래 위로 오솔길이 나있고, 빗 기운을 머금은 송홧가루가 그 위로 떨어진다. 어디선가 스님네 한분이 골짜기 샘물을 길어서는 다시 숲속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숲 저편에서 푸른 연기가 모락모락 일어나더니 흰 구름 위로 포개진다. 스님은 지금 좀전에 길어간 그 샘물로 차를 달이고 있는 것이다. 차를 달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깊은 산 홀로 앉아 온갖 일 던져두고
문 닫고 날 보내며 덧없음을 배우노라.
한 평생 돌아봐도 남은 것 하나 없고
한 사발 새 차와 한 권 경전 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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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坐深山萬事輕 掩關經日學無生
生涯點檢無餘物 一椀新茶一卷經

부휴당(浮休堂, 1543-1614) 스님의 작품이다. 깊은 산 속에 사는 스님은 홀로 앉아 아무 것도 영위하는 것이 없다. 문 닫아 걸고서 하는 일이라고는 인생이란 덧 없는 것임을 되새기는 일 뿐이다. 덧 없는 인생이고 보니 평생의 자취를 돌아본대도 수중에 지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새로 덖은 향기로운 차 한 잔과 한 권의 불경이 있어 내 벗이 되어줄 뿐이다. 혜근(慧勤, 1320-1376) 스님의 다음 시에도 차와 함께 하는 조촐한 삶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본래 천연이란 조작할 수 없는 것을
어이 애써 바깥에서 깊은 이치 구하는가?
다만 능히 한 생각, 마음에 일 없으니
목 마르면 차 달이고 곤하면 잔다
.
本自天然非造作 何勞向外別求玄
但能一念心無事 渴則煎茶困則眠

본연의 이치는 인위로 지어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깨달음은 내 안에 있는데 자꾸만 밖에서 이를 찾으니 찾아질 까닭이 없질 않은가? 내 마음에서 깨달아야겠다는 그 생각을 걷어내고 보니 마음은 한가로와 일이 없다. 그때 하는 일이라고는 목 마르면 차 마시고, 피곤하면 잠을 청하는 것 뿐이다. 이제야 내 삶의 모습이 투명하게 떠오른다. 깨달음은 목 말라 마시는 한 잔 차 속에도 있고, 곤하여 청하는 단잠 속에도 깃들어 있는 것을.
차와 함께 하는 생활 속에는 결코 야단스러움이 없다. 욕심이 없으매 하루 하루의 삶은 자족의 충만으로 넘쳐 날 뿐이다.

고개에 올라 찻잎를 따고
물을 끌어 와 꽃밭에 대다가,
고개 돌려보면 하루 해는 이미 기울었다.
먼 암자에선 풍경 소리 들려오고
고목엔 까마귀도 깃들었구나.
기쁘다. 이다지도 한가롭고 즐겁고 아름다움이
.
引水灌花 登嶺採茶
忽回首山日已斜 幽菴出磬
古樹有鴉 喜如此閒如此樂如此嘉

혜장(惠藏, 1772-1811) 스님의 시이다. 아침에 일어나 산 마루로 올라가 햇차를 딴다. 대통으로 물을 끌어와 꽃에 물을 준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하루해는 저물어 있다. 이제 그만 돌아오시라고 주인 없는 암자에선 풍경 소리가 울려오고, 까마귀도 잠자리를 찾아 고목 위로 모여들었다.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허리를 펴며 해질녘의 광경을 바라보던 스님은 자신도 모르게 `기쁘다!`는 탄성을 터뜨린다. 이토록 한가함이 기쁘고, 이다지 즐거움이 기쁘고, 이렇듯 아름다운 자연이 기쁜 것이다. 지금 그의 망태기 속에는 갓 따낸 햇차의 새순이 가득 들어 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혜장 스님에게 차를 좀더 보내달라고 보낸 글에서, 자신이 차를 탐하는 것은 차가 마음의 병을 치료해주는 약이 되는 까닭이라고 적고 있다. 그는 달빛 아래 차를 달여 혼자서 또는 스님과 함께 마시면서 세상살이에서 오는 마음의 갈등을 달래었다. 손님이 오면 으레 차로 대접하였고, 석 잔을 마신 후에야 비로소 대화를 시작하였다. 주인과 손님 사이에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차를 끓여 석 잔의 차를 마시는 그 동안의 침묵, 이 침묵의 시간이야말로 끽다삼매(喫茶三昧)의 경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방엄사(訪嚴師)〉란 작품에서 차와 함께 나누는 대화의 참 멋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한 잔 차 마실 때마다 이야기가 하나씩
점차 오묘한 경지로 들어가누나.
이 가운데 즐거움 맑고도 담백하니
어찌 거나하게 취하야만 좋으랴?
一啜輒一話 漸入玄玄旨
此樂信淸淡 何必昏昏醉

주인은 자꾸만 차를 새로 따르고, 새 잔을 잡자 화제는 어느새 딴데로 옮겨간다. 차 마시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두 사람의 이야기는 깊어만 간다. 이 맑고도 담백한 경지를 모르고 술에 취한 풍류만을 찾는 세상 사람들이 안타깝지 않은가?
차는 대화의 벗이기도 하지만, 약의 효능도 있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병중전다(病中煎茶)〉란 시에서 차의 효능에 대해 이렇게 노래한다.

금년 들어 쇠한 병에 갈증 부쩍 심해지니
이따금 즐겁기는 차 마실 때 뿐이로다.
맑은 새벽 찬 샘물을 길어와서는
돌솥에다 한가로이 노아차(露芽茶)를 달인다.
衰病年來渴轉多 有時快意不如茶
淸晨爲汲寒泉水 石鼎閑烹金露芽

뒤척이다가 새벽에 잠을 깨면 입이 바짝 말라 있다. 맑은 새벽 신선한 공기를 뚫고 나가 찬 샘물을 길어온다. 돌솥 앞에 앉아 금빛 차를 천천히 끓여낸다. 차를 아직 마시지도 않았는데, 마른 혀에 군침이 돈다. 맑은 새벽 돌솥에서 솔솔 이는 차의 향기. 병든 중에도 온몸이 가뜬하여 아픈 것을 잊는다. 또 그는

향과 빛깔, 그 맛은 논할 필요 없도다
마셔보면 정신이 맑아짐을 알리니
.
不必更論香色味 啜來方覺長神精

라고도 노래하였다. 차를 마시면 흐리멍덩하던 정신이 맑게 되돌아 오기에 굳이 맛과 향을 따지지 않더라도 그저 좋다는 것이다.

화려한 석류꽃은 푸른 가지 불태울듯
흰 커튼에 어리비쳐 햇볕 함께 옮겨가네.  
향연은 사위었고 차가 보글 끓을 때
유인(幽人)이 그림 펼쳐 구경하기 알맞도다.
的的榴花燒綠枝 緗簾透影午暉移
篆烟欲歇茶鳴沸 政是幽人讀畵時

봄날 석류꽃은 초록 가지를 불태울 듯 붉은 꽃을 피웠다. 방안에는 흰 커튼이 쳐져 있고, 꽃 그림자의 붉은 빛은 오후의 햇살과 함께 방까지 비쳐들고 있다. 방 안 향로에는 연기가 가물대고 그곁에선 차가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고 있다. 주인은 옛 사람의 그림을 펼쳐 놓고 그윽한 감상에 빠져 든다. 속세의 시간도 이 속에서는 그대로 정지되어 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단양일집관헌(端陽日集觀軒)〉이란 작품이다.
이렇듯 차를 마시는 일은 인생의 의미를 음미하는 일이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다연 속에는 물끄러미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한잔 차로 쉬었다 가는 긴장의 이완을 옛 선인들은 즐길 줄 알았다. 그것으로 가파른 삶의 속도를 조절하고, 잃기 쉬운 자신을 추스릴 줄 알았다.


 

최초의 다서(茶書) 『부풍향차보(扶風鄕茶譜)』

조선 후기 차문화사의 첫 출발을 이운해(李運海, 1710-?)의 『부풍향차보(扶風鄕茶譜)』로 시작한다. 『부풍향차보』는 1755년 또는 1756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다. 그 내용은 부안 현감으로 있던 이운해가 고창 선운사 일원의 차를 따서 약효에 따라 7종의 향약(香藥)을 가미해 만든 약용차의 제법에 관한 것이다.
우리나라 차에 관한 최초의 저술로 흔히 1837년에 지은 초의(1786-1866)의 『동다송』을 꼽는다. 필자가 2006년 발굴해 공개한 이덕리(李德履, 1728-?)의 『동다기(東茶記)』는 그보다 50년 가량 앞선 1785년을 전후하여 지어졌다. 『부풍향차보』는 이덕리의 『동다기』 보다 다시 30년이나 앞서는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다. 우리 차문화사의 편년을 다시 한번 앞당기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이 글에서는 저자 이운해와 『부풍향차보』의 구체적 내용, 차문화사적 의의 등을 차례로 살펴보겠다.

저자 이운해(李運海)에 대하여

『부풍향차보』는 황윤석(黃胤錫,1729-1791)의 일기인 『이재난고(頤齋亂藁)』에 그림과 함께 인용되어 있다. 분량은 두 쪽 밖에 되지 않는다. 더 자세한 내용을 담은 별도의 책자가 있었고, 여기 실린 것은 그 핵심 내용만 간추려 소개한 것으로 보인다. 『부풍향차보』는 1757년 6월 26일자 일기 끝에 실려 있다.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이 자료는 18세기 당시 조선의 음다풍속과 실상을 이해하는 데 더 없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재난고』에 수록된 『부풍향차보』는 서문과 「다본(茶本)」․「다명(茶名)」․「제법(製法)」․「다구(茶具)」의 네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끝에는 이 일기를 쓴 지 19년 뒤에 황윤석이 적은 저자 이운해(李運海)에 관한 추기(追記)가 있다.
본문 분석에 앞서 먼저 저자 이운해에 대해 알아본다. 다음은 저자의 인적 사항에 관해 기술한 황윤석의 추기다.

필선(弼善) 이운해(李運海)는 부안현감으로 있었다. 막내 아우인 전(前) 정언(正言) 이중해(李重海) 및 종숙(從叔)과 함께 한천(寒泉)의 문하에서 노닐었고, 『상확보(商確譜)』를 만든 사람이다. 내가 또한 쓸모가 있다고 여겨 기록해둔 것이 벌써 20년인데, 여태도 보자기에 쌓여 있다. 하지만 필선 형제는 모두 고인이 되고 말았으니 슬프다. 잠시 아래 적어두어 자식들에게 보인다. 병신년(1776) 5월 14일 이옹(頤翁). -그 종숙의 아들 일해(一海) 진사는 조유숙(趙裕叔)과 동문이라고 한다.
右李弼善運海知扶安縣, 與其季前正言重海及從叔, 曾游寒泉門下者. 商確譜製者也. 余亦爲其有用, 錄來今二十年, 尙在巾衍, 而弼善兄弟, 俱作古人, 哀哉. 姑志下方, 以示兒輩. 丙申五月十四日, 頤翁. -其從叔之子一海進士, 與趙裕叔同硯云.

저자는 필선(弼善)이란 자를 가진 이운해(李運海)였고, 그는 당시 부안현감이었다. 한천(寒泉)이란 호를 가진 학자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한천의 호를 쓴 사람은 여럿이어서 특정하기 어렵다. 이운해는 『부풍향차보』 외에 『상확보(商確譜)』란 책도 지었다. 황윤석은 그 쓸모를 인정하여 이를 함께 베껴 두었다. 하지만 『상확보』는 일기에 초록해 두지 않아서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다. 일기는 1757년에 썼고, 이 추기는 1776년에 썼다.
『사마방목』에 보면 이운해는 1710년 생이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용(子用)이다. 아버지는 이현상(李鉉相)이다. 1740년(영조 16)에 증광시 병과로 급제했다. 뒤에 이름을 심해(心海)로 개명했다. 『승정원일기』와 『왕조실록』을 통해 그의 벼슬 이력을 추적해 보면, 1741년 가주서(假注書)가 되고, 1746년 전적(典籍), 1747년 경상도사(慶尙都事), 1752년 장령(掌令)과 지평(持平)을 거쳤다. 1753년 정언(正言)에 올랐고, 1754년 10월 3일 부안현감으로 부임한다. 2년 뒤인 1756년 10월 9일 다시 장령으로 서울로 올라갔다.
1752년 1월 3일 충군죄인(充軍罪人) 이시번(李時蕃)이 이운해의 종족이라 하여 대망(臺望)에서 삭제할 것을 청한 박치문(朴致文)의 상서에 대해 장령 유현장(柳顯章)이 그 부당함을 논하면서, “이운해는 인망과 문벌과 문행(文行)이 동류들 가운데서 칭송받고 있는 사람이니, 대선(臺選)에 통망(通望)된 것 또한 늦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충군(充軍)시킨 죄인 이시번(李時蕃)의 시복친(緦服親)이 되는 소족(疎族)이라는 것으로 경솔하게 낙점(落點)에 하자를 제기하였으니, 이렇게 한다면 자못 장차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고, 이천보(李天輔)도 적극 두둔하는 글을 올린 것으로 보아, 당시 상당한 명망이 있었던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문집은 물론 그가 지은 『부풍향차보』와 『상확보』의 원본 모두 전하지 않고 있다.

『부풍향차보』는 어떤 책인가?
『부풍향차보』는 서문과 「다본(茶本)」․「다명(茶名)」․「제법(製法)」․「다구(茶具)」의 네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서문을 본다.

부풍(扶風, 전북 부안의 옛이름)은 무장(茂長)과 3사지(舍地) 떨어져있다. 들으니 무장의 선운사(禪雲寺)에는 이름난 차가 있다는데, 관민(官民)이 채취하여 마실 줄을 몰라 보통 풀처럼 천하게 여겨 부목(副木)으로나 쓰니 몹시 애석하였다. 그래서 관아의 하인을 보내서 이를 채취해오게 했다. 때마침 새말 종숙께서도 오셔서 함께 참여하였다. 바야흐로 새 차를 만드는데, 제각기 주된 효능이 있어, 7종의 상차(常茶)를 만들었다. 또 지명을 인하여 부풍보(扶風譜)라 하였다. 10월부터 11월과 12월에 잇달아 채취하였는데, 일찍 채취한 것이 좋다.
扶風之去茂長, 三舍地. 聞茂之禪雲寺有名茶, 官民不識採啜, 賤之凡卉, 爲副木之取, 甚可惜也. 送官隸採之. 適新邨從叔來, 與之參. 方製新, 各有主治, 作七種常茶. 又仍地名, 扶風譜云. 自十月至月臘月連採, 而早採者佳.

이운해가 부안에 부임한 것이 1754년 10월 3일이고 보면, 오자마자 바로 차를 땄을 수는 없었을테고, 서문을 쓴 것은 서서히 사정을 알게 된 이듬해인 1755년 또는 1756년의 일일 것이다. 또한 황윤석이 자신의 『이재난고』에 이를 초록한 것이 1757년 6월이다. 황윤석은 고창에 살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고장과 관련된 내용을 적은 이 기록에 흥미를 가졌던 것이다.
이운해는 부풍(扶風) 즉 지금의 전북 부안(扶安)에 부임해 와서, 근처 무장(茂長, 지금의 고창) 선운사(禪雲寺)에 좋은 차가 난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관민(官民)할 것 없이 차에 대해 무지하여 보통 잡목처럼 보아 부목감으로나 쓰기 일쑤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운해가 관노를 고창 선운사로 보내 그곳의 작설차를 채취해오게 하였다.
때 마침 부안에 들른 이운해의 종숙(從叔)도 새 차를 만드는 일에 합세하였다. 모두 7종의 상차(常茶)를 만들었다. 그런데 각 차별로 주치(主治)가 있는, 즉 특정 증상에 약효가 있는 향약차(香藥茶)라 했다. 차를 만든 곳이 부풍이었으므로 책 이름을 『부풍향차보』라 한다고 적었다.
서문이 알려주는 사실은 이렇다. 첫째, 이운해는 부안 현감으로 오기 전에 이미 차에 대해 상당한 식견과 조예가 있었다. 둘째, 선운사에서 좋은 차가 많이 났지만 관민 누구나 할 것 없이 차에 대해 무지해서 차 나무 보기를 잡목 보듯 하여 땔감으로 썼다. 셋째, 차를 만들었는데, 그냥 차가 아니라 주치의 효능이 있는 약초를 배합해 7종 상차(常茶)를 만들었다. 넷째, 부안의 옛 지명이 부풍이므로, 책이름을 『부풍향차보』라 하였다. 다섯째, 찻잎 채취 시기를 이른 봄이 아닌 겨울로 잡고 있다.
본문을 살펴보자. 먼저 차에 대해 기술한 「차본(茶本)」이다.

고차(苦茶) 즉 쓴 차는 일명 작설(雀舌)이라고 한다. 조금 찬 성질이 있지만 독성은 없다. 나무가 작아 치자(梔子)와 비슷하다. 겨울에 잎이 나는데, 일찍 따는 것을 ‘차(茶)’라 하고, 늦게 따는 것은 ‘명(茗)’이 된다. 차(茶)와 가(檟), 설(蔎)과 명(茗)과 천(荈) 등은 채취 시기가 이르냐 늦으냐로 이름 붙인다. 납차(臘茶) 즉 섣달차는 맥과차(麥顆茶)라 한다. 여린 싹을 따서 짓찧어 떡을 만들고 불에 굽는다. 잎이 쇤 것은 천(荈)이라 한다. 뜨겁게 마시는 것이 좋다. 차가우면 가래가 끓는다. 오래 먹으면 사람의 기름기를 없애 사람을 마르게 한다.
苦茶一名雀舌. 微寒無毒. 樹少似梔. 冬生葉, 早採爲茶, 晩爲茗. 曰茶曰檟, 曰蔎曰茗曰荈, 以採早晩名. 臘茶謂麥顆. 採嫩芽, 搗作餠, 並得火良. 葉老曰荈, 宜熱. 冷則聚痰, 久服去人脂, 令人瘦.

고차(苦茶)의 이름이 작설(雀舌)인 것과 약간 냉하나 독이 없는 차의 성질을 말했다. 크기는 치자나무 만하다고 적었다. 겨울에도 잎이 나는데, 일찍 채취한 것을 ‘차(茶)’라 하고, 늦게 딴 차는 ‘명(茗)’이라 한다. 그밖에 육우의 『다경』 첫머리에서 적고 있는 차(茶)․가(檟)․설(蔎)․명(茗)․천(荈) 등의 이칭을 소개한 후 모두 채취 시기에 따른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납차(臘茶) 즉 섣달에 딴 찻잎으로 만든 차를 따로 맥과차(麥顆茶)라 한다는 설명이 이채롭다. 맥과차는 갓 나온 차싹이 꼭 보리알처럼 생겼대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창일기 이전 상태의 초출한 잎이다. 또 차를 만들 때는 여린 싹을 채취해서 짓찧어 떡을 만들고, 불에 말린다고 했다. 당시 마시던 작설차 또한 찻잎 채취 후 증배하여 절구에 찧어 덩이 짓는 떡차 방식으로 만들었음이 확인된다.
쇤 잎차는 천차(荈茶)라 하는데, 뜨겁게 마셔야 하고, 차게 마시면 가래가 끓어오르는 부작용이 있다고 했다. 또 차를 오래 마시면 몸의 기름기를 제거하므로 사람이 수척해진다는 지적도 남겼다. 이 내용은 당나라 때 기모경(棊母㷡)이 「벌다음서(伐茶飮序)」에서 차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한 말이다. 이운해의 차에 대한 이해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려준다.
다음은 「다명(茶名)」이다.

풍 맞았을 때[風] : √감국(甘菊), 창이자(蒼耳子)
추울 때[寒] : √계피(桂皮), 회향(․茴香)
더울 때[暑] : 백단향(白檀香), √오매(烏梅)
열날 때[熱] : √황련(黃連), 용뇌(․龍腦)
감기 들었을 때[感] : √향유(香薷), 곽향(藿香)
기침할 때[嗽] : 상백피(桑白皮), √귤피(․橘皮)
체했을 때[滯] : 자단향(紫檀香), √산사육(․山査肉)
표점 찍은 글자를 취해 칠향차(七香茶)로 삼으니 각각 주치(主治)가 있다.
(風 甘菊․蒼耳子, 寒 桂皮․茴香, 暑 白檀香․烏梅, 熱 黃連․龍腦, 感 香薷․藿香. 嗽 桑白皮․橘皮, 滯 紫檀香․山査肉. 取点字爲七香茶, 各有主治.)

앞서 서문과 「다본(茶本)」에서 계속 작설차 이야기를 해놓고, 「다명」에는 약초 또는 향초의 이름만 나온다. 내용을 보면 풍(風)․한(寒)․서(暑)․열(熱)․감(感)․수(嗽)․체(滯) 등의 7자 아래 각각 두 가지씩의 약초명을 적었다. 앞의 낱글자는 뒤에 나오는 차를 마셔야 할 증세다. 서문에서 말한 각각 주치(主治)가 있다는 것이 이 뜻이다. 끝에서 표점 찍은 글자를 취해 칠향차(七香茶)로 삼는다고 했다. 원본을 보면 국(菊)․계(桂)․매(梅)․황련(黃連)․유(薷)․귤(橘)․사(査) 자 위에 표점이 찍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풍증이 있을 때는 감국차 또는 창이자차를 마시고, 추울 때는 계피차나 회향차를 마신다. 더울 때는 오매차와 백단향차, 열날 때는 황련차와 용뇌차가 좋다. 감기가 들었을 때는 향유차, 즉 목이버섯차와 곽향차가 제격이다. 기침이 날 때는 귤피차나 상백피차가 좋고, 체했을 때는 산사육, 즉 산사열매로 만든 차나 자단향차라야 한다.
앞서 서문에서 말한 칠향상차(七香常茶)는 작설차에 일곱 가지 약초를 가미해서 각종 증상에 맞춰 마시도록 한 상비차(常備茶)란 뜻이다. 그렇다면 이 칠향상차는 어떻게 만들어 마셨을까? 다음 「제법(製法)」에 구체적 설명이 나온다.

차 6냥과 위 재료 각 1전(錢)에 물 2잔을 따라 반쯤 달인다. 차와 섞어 불에 쬐어 말린 후 포대에 넣고 건조한 곳에 둔다. 깨끗한 물 2종(鍾)을 다관 안에서 먼저 끓인다. 물이 몇 차례 끓은 뒤 찻그릇[缶]에 따른다. 차 1전(錢)을 넣고, 반드시 진하게 우려내어 아주 뜨겁게 마신다.
茶六兩, 右料每却一錢, 水二盞, 煎半. 拌茶焙乾, 入布帒, 置燥處. 淨水二鍾, 罐內先烹, 數沸注缶, 入茶一錢, 盖定濃亟熱服.

설명이 소략하지만 이렇게 정리된다. 먼저 6냥 되는 덩이차에 위에서 제시한 약초 각 1전(錢) 씩을 함께 넣고 물 2잔을 붓는다. 그리고는 물이 반쯤 줄어들 때까지 졸인다. 그러면 차가 풀어지면서 약초의 향이 배인다. 이때 차와 향료를 고루 섞어 불에 쬐어 말린다. 차가 바싹 마르면 포대에 넣고 건조한 곳에 놓아둔다. 여기까지가 향차 제조법이다.
이어지는 설명은 음다법에 관한 것이다. 깨끗한 물 2종(鍾)을 다관(茶罐)에 부어 먼저 끓인다. 몇 차례 끓고 나면 끓은 물을 다부(茶缶)로 따른다. 그 물에 차 1전(錢)을 넣어 우린다. 차는 짙게 우려서 아주 뜨거울 때 마신다.
그렇다면 물의 분량이나 차의 양은 정확히 얼마나 될까? 그래서 저자는 「다구(茶具)」 항목을 따로 두어 각종 다구의 이름과 생김새와 용량을 따로 표시해 두었다.

화로는 다관(茶罐)을 앉힐 수 있어야 한다.
다관(茶罐)은 2부(缶)가 들어간다.
다부(茶缶)는 2종(鍾)이 들어간다.
다종(茶鍾)은 2잔(盞)이 들어간다.
다잔(茶盞)은 1홉이 들어간다.
다반(茶盤)은 다부와 다종, 다잔을 놓을 수 있다.
爐可安罐, 罐入二缶, 缶入二鍾, 鍾入二盞, 盞入一合, 盤容置缶鍾盞.

차 끓이는 데 소용되는 다구는 모두 6종류다. 다로(茶爐)․다관(茶罐)․다부(茶缶)․다종(茶鍾)․다잔(茶盞)․다반(茶盤)이 그것이다. 먼저 다로는 다관을 앉힐 수 있는 크기라야 한다. 중간에 숯불을 넣는 구멍이 있고, 위쪽에 다관이 얹히는 구멍이 있다. 다관은 꼭지 달린 뚜껑이 있고 양 옆에 손잡이가 달린 그릇이다. 다관 하나는 2부(缶) 들이다. 다부는 다관과 생김새가 비슷하다. 다만 크기가 그 반만하다. 체형이 조금 날씬하다. 다관에서 끓인 물을 부어 차를 우려내는 도구다. 다종은 다부의 절반 들이다. 1부에는 2종이 들어간다. 손잡이가 한쪽만 달린 큰 컵이다. 다잔은 한 홉들이 용량의 개인 잔이다. 2잔이 1종이다. 그러니까 1다부로 4잔의 차를 만들 수 있다. 한번 다관에 끓일 때 2부의 물을 부으니까, 두 차례 우려내면 모두 8잔의 차가 된다. 두 차례 우리고 나면 『다신전』에서 적고 있는 대로 다부를 찬물로 행궈내어 씻어낸 후 다시 끓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반은 다로와 다관을 제외한 나머지 다부, 다종, 다잔 등을 함께 올려놓을 수 있는 크기의 찻상이다.

『부풍향차보』와 향약차

『부풍향차보』는 과연 전체 내용이 이것 뿐이었을까? 황윤석은 『이재난고』 속에 자신이 읽은 다른 사람의 저술 중 중요한 대목을 자주 베껴 놓았는데, 대부분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부풍향차보』 또한 여기에 실린 내용 외에 비교적 풍부한 다른 설명이 있는 보다 완성된 형태의 저술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현재 남아있는 내용만으로도 저자인 이운해의 차에 대한 해박한 이해 수준이 십분 파악된다. 차의 특징과 성질부터, 증세에 따른 향차 처방, 향차 제조법, 향차 음다법을 차례대로 조목조목 설명한 흥미로운 저작이다.
그렇다면 순수한 찻잎 만이 아닌 향을 가미한 차를 차라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산 정약용이 『아언각비(雅言覺非)』의 「차(茶)」 조목에서 자세히 말한 바 있다.

차는 겨울에도 푸른 나무다. 육우의 『다경』에 첫째는 차(茶)라 하고, 둘째는 가(檟)라 하며, 셋째는 설(蔎)이라 하고, 넷째는 명(茗)이라 하며, 다섯째는 ‘천(荈)’이라 한다고 했다. 본시 초목의 이름이지, 음료인 음청(飮淸)의 이름이 아니다. -『주례(周禮)』에 육음(六飮)과 육청(六淸)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차(茶)란 글자를 환(丸)이나 고약 같은 것을 끓여 마시는 종류로 생각하여, 약물을 한가지만 넣고 끓이는 것은 모두 차라고 말한다. 생강차․귤피차․모과차․상지차(桑枝茶)․송절차(松節茶)․오과차(五果茶) 같은 말이 익숙해서 늘상 이렇게 말하는데 잘못이다. 중국에는 이같은 법은 없는 듯 하다. 이동(李洞)의 시에 “나무 계곡 은자 부름 기약하면서, 시 읊으며 백차(柏茶)를 끓이는도다. [樹谷期招隱, 吟詩煮柏茶.]”라 했고, 송시에서는 “한잔의 창포차를 마시는 동안, 사탕떡 몇 개를 먹어 치웠네.[一盞菖蒲茶, 數箇沙糖粽.]”라 했다. 육유의 시에서도 “찬 샘물 스스로 창포수로 바뀌니, 활화(活火)로 한가로이 감람차를 다린다.”고 했다. 이는 모두 찻덩이 가운데 잣잎이나 창포, 감람 등을 섞은 까닭에 차 이름을 이렇게 붙인 것이지, 한 가지 다른 물건만 다리면서 차라고 이름 붙인 것이 아니다. -소동파가 대야장로에게 도화차재(桃花茶裁)를 청하면서 부친 시가 있는데, 이 또한 차나무의 별명일뿐 복사꽃에다 차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다.
茶者冬靑之木. 陸羽茶經, 一曰茶, 二曰檟, 三曰蔎, 四曰茗, 五曰荈. 本是草木之名, 非飮淸之號. 周禮有六飮六淸. 東人認茶字, 如湯丸膏飮之類. 凡藥物之單煮者, 總謂之茶. 薑茶橘皮茶木瓜茶桑枝茶松節茶五果茶, 習爲恒言, 非矣. 中國似無此法. 李洞詩云: ‘樹谷期招隱, 吟詩煮柏茶.’ 宋詩云: ‘一盞菖蒲茶, 數箇沙糖粽.’ 陸游詩云: ‘寒泉自換菖蒲水, 活火閒煮橄欖茶.’ 斯皆於茶錠之中, 雜以柏葉菖蒲橄欖之等, 故名茶如此. 非單煮別物, 而冒名爲茶也. 東坡有寄大冶長老, 乞桃花茶裁詩. 此亦茶樹之別名, 非以桃花冒名爲茶也.

다산의 주장은 이렇다. 차는 오직 차나무 잎을 법제하여 뜨거운 물에 우린 것만 차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냥 맹물에 어떤 것을 넣고 끓이기만 하면 다 차라고 말한다. 귤껍질을 넣고 다리면 귤피차라 하고 모과를 넣은 것은 모과차라 한다. 보리를 넣으면 보리차가 되고, 유자를 넣으면 유자차가 된다. 하지만 중국에서 백차니 창포차니 감람차니 하는 것은 잣잎이나 창포, 감람만 따로 넣고 끓인 것이 아니라, 찻덩이를 넣으면서 이것을 함께 넣어 가미한 것을 가리킨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차 아닌 차, 즉 대용차는 엄밀한 의미에서 차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이런 다산의 주장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부풍향차보』의 7종상차는 찻덩이에 약물을 섞어 끓인 향차다. 그저 이름만 차인 일반 대용차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이제 『부풍향차보』가 갖는 차문화사적 의의를 간략히 정리한다.
첫째, 『부풍향차보』는 1755년, 또는 1756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차서다. 초의의 『동다송』 보다 80년, 이덕리의 『동다기』 보다 30년 앞선다.
둘째, 우리나라 최초로 처방에 따라 주치를 두어 작설차에 7가지 약재(藥材)를 조제해서 만든 기능성 향차(香茶)다.
셋째, 지금까지 차 산지로 부각된 적이 없는 전북 고창과 부안 지역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차로 우리나라 차산지와 향유 공간을 확장시켰다.
넷째, 차 그릇의 크기와 명칭을 명확히 규정하여 도량적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당시 음다풍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본 자료의 발굴 소개를 계기로 향후 전북 부안 지역을 중심으로 부풍향차의 복원과 대중화가 이루어져, 효능 및 맛과 향기가 각각 다른 다양한 차를 일반인들이 기호에 따라 마실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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