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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과 선화, 미륵 세상을 꿈꾸다

醉月 2009. 6. 26. 09:01

서동과 선화, 미륵 세상을 꿈꾸다
출처 : http://jungmin.hanyang.ac.kr/ 


 

2009년 1월 19일, 백제 미륵사지 서탑 해체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와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가 공개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무왕 40년, 즉 639년의 이 기록은 무려 1370년만에 햇빛을 보았다. 정작 소동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사리를 봉안한 왕비의 이름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가 아닌, 백제 사탁적덕(沙乇積德)의 딸이었던 것이다. 앞서 살핀 도깨비 대장 비형랑과 신인종 승려들의 이야기 또한 신라 진평왕대에 일어난 일이었다. 같은 시기 백제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 따지고 살펴야 할 내용이 적지 않다.

사리봉안기, 미륵사 창건의 블랙박스

15.5cm×10.5cm 크기의 금판에 새겨진 194글자의 사리봉안기는 실타래처럼 얽힌 미륵사 창건에 관한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새 자료이니만큼 원문과 함께 그 내용을 소개한다. 필자의 번역이다.

생각건대 법왕(法王)께서 세상에 나오시어 기미(機微)에 따라 감응하사, 사물에 응해 몸을 드러내시매 마치도 물에 비친 달과 같았다. 이런 까닭에 왕궁에 삶을 의탁하시고 사라쌍수(娑羅雙樹) 아래서 입적하시니, 8곡의 사리를 남기시어 삼천세계(三千世界)를 이롭게 하시었다. 마침내 빛을 오색으로 빛나게 하여, 나아가 일곱 차례 돌게 한다면 신통한 변화가 불가사의 하리라.
우리 백제의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탁적덕(沙乇積德)의 따님이시니, 드넓은 겁에 선인(善因)을 심으사 지금 세상에서 빼어난 응보를 받으시어,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三寶)의 동량이 되시었다. 그런 까닭에 능히 정결한 재물을 삼가 희사하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639, 무왕 40)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였다.
원컨대 대대로 공양케 하여 겁겁에 다함이 없게 할지니, 이 선근(善根)을 써서, 우러러 대왕폐하께서 수명은 산악과 더불어 굳셈을 나란히 하고, 보력(寶曆)은 천지와 함께 장구함을 함께 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을 교화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소서. 또 원하옵노니 왕후 자신에게는 마음은 물거울과 같아 법계(法界)를 비추어 항상 밝으며, 몸은 금강(金剛)과 다름없이 허공과 한 가지로 소멸하지 않아, 7세의 구원(久遠)에서도 나란히 복리(福利)를 입게 하시어, 무릇 마음 있는 이라면 모두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
(竊以法王出世, 隨機赴感, 應物現身, 如水中月. 是以託生王宮, 示滅雙樹, 遺形八斛, 利益三千. 遂使光曜五色, 行遶七遍, 神通變化, 不可思議. 我百濟王后, 佐平沙乇積德女, 種善因於曠劫, 受勝報於今生, 撫育萬民, 棟梁三寶. 故能謹捨淨財, 造立伽藍. 以己亥年正月卄九日, 奉迎舍利. 願使世世供養, 劫劫無盡, 用此善根, 仰資大王陛下, 年壽與山岳齊固, 寶曆共天地同久. 上弘正法, 下化蒼生, 又願王后卽身, 心同水鏡, 照法界而恒明, 身若金剛, 等虛空而不滅, 七世久遠, 竝蒙福利, 凡是有心, 俱成佛道.)

4,6변려문으로 짜여진 수식이 화려한 글이다. 사리의 봉안과 함께 발원(發願)의 내용을 적었다. 내용은 세 단락으로 구분된다.

첫 단락은 법왕(法王),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 8곡의 사리를 남겨 삼천세계를 이롭게 하시니, 오색영롱한 사리를 모신 탑을 일곱 번 돌면서 빌면 그 신통한 변화가 참으로 불가사의하리라고 한 내용이다. 첫 단락의 부처님에 대한 장황한 서술은 이때 받들어 맞이한[奉迎] 사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였음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둘째 단락은 왕후이신 사탁적덕의 따님이 기해년 1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봉안하게 된 경과를 말했다. 왕후가 광겁(曠劫)에 쌓은 선인(善因)을 금생에 승보(勝報)로 받아, 그 인연으로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을 만들어 세웠다고 했다.


셋째 단락은 발원문이다. 진신사리를 겁겁에 다함없이 대대로 공양하여, 그 선근(善根)의 힘을 빌어 대왕 폐하의 수명이 산악과 같고, 보력(寶曆) 즉 재위 기간이 천지처럼 장구하여, 이로써 정법(正法)을 드넓히고 창생을 교화하기를 염원했다. 재물을 희사한 왕비 또한 마음은 법계를 비추고 몸은 금강석처럼 변치 않아 구원(久遠)의 시간 속에서 복리(福利)를 누리고, 이를 통해 마음 있는 이들이 함께 불도(佛道)를 이룰 수 있기를 빌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새로운 사실과 접한다.

첫째, 미륵사 서탑에 봉안한 것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였다.

둘째, 무왕 재위 40년 되던 639년 당시 왕비는 좌평 사탁적덕의 딸이었다.

셋째, 미륵사 가람의 조성 또한 당시 왕비의 희사로 이루어졌다.

넷째, 사찰 조성 목적은 왕실의 안녕과 홍법(弘法), 즉 불법의 확산을 위해서였다.


이로써 미륵사 창건의 주체로 사탁씨 왕비의 존재가 오롯이 부각되었다. 선화공주의 발원에 의한 것으로 적힌 『삼국유사』의 기록과 정면 배치된다. 이 봉안기로 인해 『삼국유사』 기록의 신뢰성은 깨지고 마는 것인가? 나아가 서동과 선화의 낭만적 사랑 이야기는 한편의 허구적 설화에 불과한가? 이 기록이 기성의 지식을 전복하는 판도라의 상자가 될지, 파편적 정보를 하나로 꿰어줄 블랙박스가 될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이제 이 새로운 사실이 발신하는 의미를 하나하나 음미해보기로 하자.

『일본서기』의 의자왕 정변 기사의 행간

사리봉안기를 통해 새롭게 확인된 사탁씨 왕비의 존재로 인해 단연 흥미를 끄는 것은 『일본서기』 제 42권 황극(皇極) 원년조의 기사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642년 2월 정해 삭 무자(2일)일에 아담산배련비라부(阿曇山背連比羅夫)와 초벽길사반금(草壁吉士磐金), 왜한서직현(倭漢書直縣)을 백제 조사(弔使)의 처소로 보내, 저들의 소식을 물었다. 조사가 대답했다. “백제국주께서 신에게, ‘새상(塞上)이 항상 나쁜 짓만 하므로 돌아오는 사신 편에 딸려 보내기를 청해도 천조(天朝)가 허락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백제 조사의 겸인(傔人) 들이 말했다. “지난 해 11월, 대좌평 지적(智積)이 죽었고, 또 백제의 사신이 곤륜(崐崙)의 사신을 바다 속에 던져버렸습니다. 금년 정월에 국주(國主)의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또 아우 왕자의 아들인 교기(翹岐) 및 그 모매(母妹)의 딸 4인,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높은 명성이 있는 사람 40여명이 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
(二月丁亥朔戊子, 遣阿曇山背連比羅夫, 草壁吉士磐金, 倭漢書直縣, 遣百濟弔使所, 問彼消息. 弔使報言, 百濟國主謂臣言, 塞上恒作惡之, 請付還使, 天朝不許. 百濟弔使傔人等言, 去年十一月, 大佐平智積卒. 又百濟使人擲崐崙使於海裏. 今年正月, 國主母薨, 又弟王子兒翹岐, 及其母妹女子四人, 內佐平岐味, 有高名之人四十餘, 被放於嶋.)

백제는 641년 10월에 서거한 서명천황(舒明天皇)의 조문 사절을 왜에 파견했다. 의자왕은 같은 해 3월 무왕의 서거로 갓 왕위에 오른 상태였다. 위 2월 2일 기사에 바로 앞서 1월 29일의 기사는 백제국에 사신 갔던 아담련비라부(阿曇連比羅夫)가 백제 조문 사절과 함께 도착한 사실을 아뢴 뒤, “그 나라가 지금 크게 어지럽습니다.”는 보고를 올리고 있다.
백제의 조문 사절이 전한 의자왕의 요청은 나쁜 짓만 하는 새상(塞上)을 본국으로 송환해 달라는 것이었다. 새상(塞上)은 새성(塞城)이라고도 불린 의자왕의 아우로 당시 왜에 볼모로 와 있었다. 의자왕은 새상이 왜에 있으면서 악한 행동을 계속하므로 본국으로 송환하려 하는데, 왜와 협조가 되지 않는 상황을 답답해했다.


왜의 조정은 다시 조문 사절의 하인들에게도 백제 쪽의 사정을 탐문했다. 그들은 대좌평인 지적(智積)이 서거한 일과, 백제 사신이 곤륜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린 사건, 그리고 642년 1월, 조문 사절 출국 직전에 일어난 정변(政變) 사실을 잇달아 알려주었다. 이렇게 본다면 백제는 당시 정변에 휩싸인 상태였고, 이 사태가 의자왕의 동생인 새상 왕자의 모종의 움직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가늠케 한다.
대좌평 지적은 사택지적(砂宅智積)이니, 1948년 부여읍 관북리(官北里) 도로변에서 발견된 사택지적비의 주인공인 바로 그 사람이다. 사리봉안기의 왕비와 성씨가 같다. 사택씨는 백제 대성팔족(大姓八族) 중 가장 위세 있던 귀족 집안이었다. 사택(砂宅), 사탁(沙乇), 사타(沙吒) 등으로 달리 표기된다. 다만 641년에 서거했다던 사택 지적은 이듬해 일본에 사신으로 오고 있고, 「사택지적비」에 따르면 654년까지 생존해 있었으므로 위 『일본서기』 황극 원년 기사를 642년이 아닌 계명 원년(655)조 기사의 착란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일본서기』에 위 기사와 맞물려 있는 고구려 연개소문의 반란과 보장왕 등극 등 분명한 641년의 정황과 밀착되어 있어 쉽게 단정할 수 없다. 또 곤륜 사신을 바다에 내던진 사건은 전후 맥락이 소연치 않으므로 여기서 따지지 않는다.


이제 백제에서 발생한 친위 정변 소식을 좀더 찬찬히 따져 보자. 정변의 계기는 무왕 어머니의 서거였다. 금번 발견된 사리봉안기는 639년 1월에 안치되었고, 무왕은 그 2년 뒤인 641년 5월에 세상을 떴다. 그러니 그로부터 8개월 후인 642년 1월에 세상을 뜬 국왕의 모후는 사탁씨 왕비일 수밖에 없다. 의자왕은 모후가 세상을 뜨자마자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정변을 단행했다. 그 대상은 동생의 아들 교기(翹岐)와 모매(母妹)의 딸 4인, 그리고 내좌평 기미(岐味)였고, 여기에 이들 편으로 분류된 고명한 40여인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모두 섬으로 추방되었다.
의자왕의 이 조처는 무왕 사후 의자왕의 즉위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고, 선왕후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 사탁씨를 정점으로 한 귀족세력의 보이지 않는 위협이 지속되었음을 말한다. 의자왕은 어떤 임금인가? 『삼국사기』 의자왕 기사가, “의자왕은 무왕의 원자(元子)다. 용감하고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 무왕 재위 33년에 세워 태자로 삼았다. 효로써 어버이를 섬겼고, 형제들과 우애로웠으므로,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리웠다.”고 적었던 인물이다. 그랬던 그가 모후 사망 직후에 일본에 인질로 가 있던 아우 왕자의 아들 교기와 이모인 사탁씨의 딸 4인을 한꺼번에 내친 것은 뜻밖의 행보다. 또한 사탁씨였을 것이 분명한 내좌평 기미와 이들에 동조한 명망 있는 40여 명도 동시에 추방되었다.
무왕 33년에야 비로소 세자로 책봉된 것을 보면, 의자왕의 세자 책봉 과정 또한 상당한 진통이 따랐던 것은 분명하다. 무왕은 일본과의 화호(和好)를 위해 왕자 풍장(豊璋)을 인질로 보냈다. 당시 태자 책봉을 둘러싸고 맏아들 의자를 지지하는 세력과 왕자 풍장을 지지하는 세력 간의 갈등이 있었다는 관점도 있고 보면, 의자왕의 세자 즉위는 두 세력 간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무왕의 확고한 의지 표명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짐작케 한다.


결국 의자왕의 효성과 우애는 자신에게 여러 모로 불리한 상황에서 세자에 오르고 마침내 왕권을 잡기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었음이 드러나는 셈이다. 그는 자신을 반대하는 음해 세력을 오래동안 참고 기다리다가 결정적인 기회가 오자 담력과 결단력으로 단번에 제압해 버렸다. 이런 상황 전개는 모후였던 사탁씨 선왕비가 의자왕의 친모가 아님을 뜻한다. 교기의 아버지로 보이는 제왕자(弟王子) 풍장과 그 아우 새상도 모두 사탁씨의 혈통을 이은 이복이라는 의미다. 앞서 의자왕이 일본에 인질로 가 있던 아우 왕자 새상(塞上)의 악행에 격분하여 본국 송환을 꾀하다 사정이 여의치 않자 답답해한 기사로 보아, 새상 또한 일본에서 의자왕의 즉위를 반대하는 행동을 취했던 듯하다. 이들은 새로 즉위한 의자왕에게 쿠데타의 가능성이 높은 위험 세력으로 간주되어 견제되었다.


『일본서기』의 다른 기사에 교기의 아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기록되었다. 추방 당시 교기의 나이는 적어도 20대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교기의 아버지 되는 제왕자(弟王子)의 나이 또한 30대 후반을 넘겼을 것이고, 그 이복 형인 의자왕은 40대였을 것이다. 의자왕이 사탁씨의 소생이 아니고, 사탁씨 소생 왕자의 나이가 30대 후반을 넘겼다면, 의자왕은 무왕 즉위 이전 선화공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된다. 이로 보아 선화공주는 의자왕이 아주 어렸을 때 세상을 뜬 듯하다. 무왕은 선화공주의 소생인 의자왕을 몹시 아꼈다. 의자왕 또한 이러한 기대에 부응해 어려서부터 부왕의 계비(繼妃)인 사탁씨와 그 소생 아우들에게 각별한 효성과 우애로 신망을 쌓아나갔다.
지금까지의 정리로 새롭게 확인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의자왕은 사탁씨의 소생이 아닌 선화공주의 소생이다. 둘째, 의자왕의 생모 선화공주는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떴다. 셋째, 세자 책봉에서부터 즉위에 이르기까지 사탁씨 왕비를 정점으로 한 집요한 반대가 있었다. 넷째, 의자왕은 사탁씨 왕비의 서거 직후에 정변을 단행하여 사탁씨 일가와 이들에게 찬동한 정치 집단을 추방함으로써 집권 초기의 불안 요소를 제거해 버렸다.
이렇게 본다면 금번 사리봉안기에 나타난 사탁씨 왕비의 존재는 그간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던 의자왕의 모계를 밝혀주고, 사탁씨 모계 왕자와의 후계 구도를 둘러싼 갈등을 선명하게 정리해주는 획기적인 자료가 되는 셈이다.

지룡(池龍)과 과부가 교통하여 낳은 아들 서동

이제 『삼국유사』 제 2, 「무왕」조로 이야기를 되돌린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제 30대 무왕(武王)은 이름이 장(璋)이다. 어머니가 과부로 지내며 경사(京師)의 남쪽 연못 가에 집을 지었는데, 못의 용과 교통하여 낳았다. 어릴 적 이름은 서동(薯童)이었다. 그 그릇과 국량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늘 마를 캐서 이를 팔아 생업으로 삼았다. 나라 사람이 인하여 이름으로 삼았다.

무왕의 어머니는 사비성 남쪽 연못 가에 살던 과부였다. 그의 아버지는 지룡(池龍)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를 두고 『삼국사기』는 “무왕의 이름은 장이니, 법왕의 아들이다”라고 분명하게 적고 있다. 연못 용의 정체를 법왕으로 특정한 셈이다. 사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신라 공주를 취해왔다 한들 마를 캐던 서동이 어찌 백제의 왕으로 오를 수 있었겠는가?
법왕은 혜왕(惠王)의 맏아들로 이름은 선(宣), 또는 효순(孝順)이라 했다. 법왕의 아버지 혜왕은 형님인 위덕왕을 이어 즉위했다. 즉위 당시 혜왕은 70세 전후의 노령이었다. 고구려의 기습 공격으로 야기된 급박한 전시 상황에서 이루어진 비정상적인 왕위 계승이었다. 그런데 598년에 즉위한 늙은 혜왕은 이듬해인 599년에 바로 세상을 떴다. 이를 이어 법왕이 왕위에 올랐다.
법왕은 근 50대에 이르러 왕위에 올랐다. 그 또한 고작 2년을 못 채우고 서거했다. 그는 성왕의 손자요, 위덕왕의 조카였던 왕실의 지친(至親)이었다. 위덕왕이 세상을 뜬 지 불과 3년 1년만에 아버지 혜왕을 이어 그가 백제의 왕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짐작치 못했을 것이다. 왕성 근처 연못에 사는 용이란 도성 연못가에 살던 왕족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 아들이 마를 캐서 이것을 팔아 생업으로 삼았다는 기사, 그리고 이 때문에 이름마저 서동(薯童)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서동이 왕가의 혈통을 타고 태어났음에도, 그 결합이 공식적인 혼인으로 공인될 수 없었던 사정을 말해준다.
그런 면에서 『삼국사기』 무왕 35년(634)의 다음 기사가 흥미롭다.

35년(634) 봄 2월, 왕흥사(王興寺)가 낙성되었다. 그 절은 물가에 임해 있는데, 채색과 장식이 장려했다. 왕은 매번 배를 타고 절로 들어가 향을 올렸다. 3월, 궁 남쪽에 못을 파서 20여리나 물을 끌어왔다. 사방 언덕에 수양버들을 심고, 물 가운데는 섬을 쌓아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본떴다.

왕흥사는 낙화암과 고란사가 바로 건너다보이는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 자리 잡은 왕실의 원찰이었다. 기록은 법왕 2년 정월에 승려 30명으로 창건한 절이라고 되어 있다. 부왕이 시작했던 왕흥사 건립이 무려 36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마무리되었다. 이 큰 역사를 마무리 짓자 마자, 무왕은 3월에 20여리나 물줄기를 끌어오는 대공사를 벌여 궁 남쪽에 큰 연못을 조성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궁남지(宮南池)다. 이 연못은 결국 자신이 태어난 경사(京師) 남쪽의 연못을 크게 확장한 것이다.
신라와의 전쟁에서 잇달아 대승을 거두고, 사비성의 수리가 끝나며, 당나라와의 외교도 순탄했다. 두 해 전에는 치열한 경쟁 상대였던 진평왕이 죽었다. 그와 동시에 오래 골치를 앓던 후계 구도도 마무리되어 의자가 태자로 책봉되었다. 여기에 이은 왕흥사의 완공은 무왕의 치세에서 상징적인 한 매듭이 지어진 것을 뜻했다. 이 완공에 이어, 그는 바로 자신의 출생지였던 궁남지의 성역화 사업에 착수했던 셈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왕흥사의 완공 단계에서 궁남지 확장 공사를 병행하여 진행시켰고, 차례대로 완공을 보았다.
무왕은 연못 용의 아들답게 유난히 물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것 같다. 37년(636)년 3월에도 사비하의 북쪽 포구에서 신료들과 함께 잔치하며 노니는 얘기가 보인다. 기암괴석과 기화요초가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 보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왕은 금(琴)을 뜯으며 제 흥에 겨워 노래를 불렀고, 종자들은 거기에 맞춰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이 대왕포(大王浦)라 불렀던 이곳은 바로 왕흥사가 바라다 뵈는 지점이었다. 39년(638) 3월에도 궁녀들과 큰 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사가 있다. 큰 못이란 바로 궁남지를 가리킨다. 만년의 자신감이 이렇게 피력되었다.
『삼국유사』』「남부여·전백제·북부여」조의 기사에 왕흥사 이야기가 한 차례 더 나온다.

사비수 언덕에 또 바위가 하나 있는데 십여 명이 앉을만 하다.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하러 행차할 때면 먼저 이 바위에서 바라보며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 그 바위가 절로 따뜻해졌으므로 인하여 돌석(火+突石), 즉 온돌바위라고 한다.

무왕이 왕흥사를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는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타기 전에 강 가 바위에 올라가 멀리 왕흥사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 그러면 그 뜨거운 정성이 바위에 그대로 전혀져서 마치 온돌처럼 덥혀졌다고 했다.

서동과 선화, 결연에서 즉위까지

법왕이 과부와 야합하여 낳은 서동이 아버지를 이어 즉위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통과의례가 있었을 것이 자명하다. 우선 그가 마를 캐어 생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은 아버지와 절연된 상태로 유년을 보냈다는 뜻이다. 알 수 없는 사정으로 그는 어머니와 함께 익산 지역으로 거처를 옮겨 마 캐는 아이 서동(薯童)의 존재로 살았다. 어느덧 그는 결혼 적령기의 청년이 되었다. 다시 『삼국유사』의 기록을 이어 읽는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인 선화(善花: 선화(善化)라고도 한다)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서울로 왔다. 마을의 꼬맹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꼬맹이들이 친해져서 그를 따랐다. 이에 노래를 지어, 꼬맹이들을 꾀어 이를 부르게 했다. 노래는 이러하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을 가고, 서동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아이들의 노래가 온 서울에 가득하여 궁궐에까지 이르렀다. 백관들이 극렬히 간하여 공주를 먼 지방에 유배 보내게 했다. 장차 가려 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여비로 주었다. 공주가 유배지에 이르려 하는데 서동이 도중에 나와 절을 올리며, 곁에서 지키며 가겠다고 하였다. 공주는 비록 그가 온 곳을 알지 못했지만, 어쩌다 보니 믿고 좋아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를 따라 가서 남몰래 관계하였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게 되자, 이에 동요의 징험을 믿게 되었다.

느닷없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가 등장한다. 머리를 깎고 경주로 간 것은 그가 승려 행세를 했다는 뜻이다. 당시 신라와 백제 사이에는 승려 복장만 하면 왕래와 소통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이 따라 부르기 쉬운 노래까지 척척 지은 것을 보면 그는 결코 마나 캐는 무지렁이 청년일 수가 없었다. 야망이 있고, 권모(權謀)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서동은 노래를 지어 아이들 입을 빌어 서라벌에 온통 공주와 자신과의 야합 소문을 퍼뜨렸다. 마를 미끼로 쓴 것도 서동답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소문으로 공주는 유배를 떠나게 되고, 왕후는 딸이 안쓰러워 순금 한 말을 준다. 길을 막고 호위를 자처하는 서동을 본 공주는 그의 알 수 없는 매력에 빠지고 만다. 왠지 마음이 이끌려 근본도 모르는 그를 따라가 몸을 허락하고 만다. 정작 그가 서동인 것을 확인한 것은 결연 다음의 일이었다. 그 다음은 운명이려니 하고 현실로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서동이 대단한 수완과 기지의 소유자임을 입증하기에 손색이 없다. 왕족인 아버지가 과부와 결연하여 자신을 낳았는데, 이번엔 마 캐던 과부의 아들이 신라의 공주와 결연해서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어지는 한 대목을 마저 읽고 생각을 정리해 본다.

함께 백제에 이르러, 모후가 준 금을 꺼내 장차 살 꾀를 도모코자 하였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은 무슨 물건이오?”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입니다. 백년의 부유함을 가져올 만합니다.” 서동이 말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는 진흙처럼 쌓여 있소.” 공주가 듣고 크게 놀라 말했다. “이는 천하의 지극한 보물입니다. 그대가 이제 황금이 있는 곳을 안다면 이 보물을 부모님의 궁전으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동이 말했다. “좋소.” 이에 황금을 모아 언덕처럼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의 처소로 가서, 황금을 옮길 계책을 물었다. 법사가 말했다. “내가 신령의 힘으로 옮길 수 있으니 황금을 가져 오십시오.” 공주는 편지를 써서 황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두었다. 법사는 신령의 힘으로 하루 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옮겨 두었다. 진평왕이 그 신통한 변화를 기이하게 여겨 존경함이 더욱 심하였다. 늘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황금을 보고도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몰랐다는 서동의 대답이 우습다. 마를 캐던 곳에 지천으로 쌓여있다는 말에 바로 부모님의 궁전으로 보내자는 공주의 제안도 속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녀로서는 어찌되었건 자신의 혼인을 부모에게 공인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그리하여 언덕처럼 쌓인 황금은 사자사 지명법사의 신통력을 빌어 하루 밤만에 신라 궁중으로 옮겨졌다. 이 일을 계기로 진평왕은 서동을 대단히 존경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늘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게끔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서동은 이 일을 통해 백제 사람들의 인심을 얻어 왕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이 대목의 해석이 사실 가장 난감하다. 도대체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닌 까닭이다. 신라 진평왕은 유언비어에 속아 자신의 가장 예쁜 딸을 쫓아낸다. 귀양 도중 공주는 근본도 모르는 사내 손에 이끌려 백제 땅까지 오고 만다. 공주가 편지와 함께 보내온 엄청난 황금에 혹해 진평왕은 딸을 훔쳐간 적국의 마 캐던 청년을 존경하게 되었다. 어느 것 하나 사리에 닿는 것이 없다.
이것은 설화다. 사실의 언어와 혼동하면 안 된다. 설화는 상징과 은유로 구성된다. 앞서 왕실의 지친을 연못 용으로 표현한다거나, 귀에 거슬리는 입바른 말 하는 집단을 당나귀 귀 소문을 퍼뜨리는 대나무 숲으로 설명하는 것과 같다. 위 이야기를 단순화 시키면 이렇다. 서동은 백제인들이 신라의 가장 예쁜 공주로 믿은 귀한 신분의 어여쁜 아내를 얻었다. 서동은 유언비어를 이용한 권모로 어렵지 않게 목적을 달성했다. 선화는 적지 않은 황금을 지참금으로 가져왔다. 그녀는 황금의 가치를 잘 알아 금을 캐어 크게 치부하였다. 선화의 존재와 황금의 가치로 인해 서동의 위상도 전혀 달라졌다.
이 과정에서 사자사의 지명법사가 이들의 강력한 후원자로 등장한다. 사실 서동이 익산에서 자랐다는 명시적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용화산 사자사가 익산 미륵사지 바로 위에 있던 절이고, 근처에서 캔 황금을 이곳 절 앞에 쌓아 두었다는 것에서 서동과 익산의 연고를 확인하게 된다. 서동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출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뒤에 법왕이 되는 아버지와의 인연도 지속적인 연결고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법왕의 갑작스런 즉위와 이에 이은 급서 이후, 후계자로 낙점 받을 수 있었던 사정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법왕은 서동 외에 다른 자손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즉위한 그 해 영을 내려, 살생을 금하고 민가에서 사냥용으로 기르던 매를 몰수하여 놓아주며, 어렵(漁獵)의 도구를 불태우게 했을 만큼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가 짧은 재위 기간 중에 한 일이라고는 2년(600) 봄 정월에 왕흥사를 창건하고, 여름 가뭄에 칠악사에서 기우제를 지낸 것이 전부였다. 이렇듯 불교에 온통 경도되었던 법왕에게 지명법사란 도승의 법력을 등에 업고, 엄청난 재력과 신라 왕도 그를 존경한다는 풍문, 신라의 가장 예쁜 공주라는 아내까지 거느린 서동의 존재는 인심을 크게 움직였다. 서동은 이제 화려하게 비상한다. 그는 더 이상 마 캐던 시골청년일 수가 없었다. 마땅한 대안이 없던 상황에서 왕실은 그를 왕으로 세우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본다.

미륵사 창건 설화의 행간과 미륵하생 신앙

이제 다시 미륵사 창건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사리봉안기에는 미륵사가 사탁적덕의 딸인 왕후의 희사로 조성되었다고 분명히 적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은 전혀 다르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로 행차하려 하였다.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자,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이 출현하므로, 수레를 멈추고 예를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모름지기 이곳에다 큰 가람을 세우는 것이 진실로 소원입니다.” 왕이 이를 허락했다. 지명법사의 처소에 이르러 못을 메우는 일에 대해 묻자, 신령의 힘으로 하루 밤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이에 미륵삼회(彌勒三會)의 형상을 본받아 전탑(殿塔)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창건하였다. 편액에 미륵사(彌勒寺)[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 하였다.]라 하였다. 진평왕은 온갖 공장들을 보내 이를 도왔다. 이제껏 그 절이 남아 있다.[『삼국사』에는 법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이 전승에서는 혼자 사는 여자의 아들이라 하였으나 상세치 않다.]

왕이 사자사로 행차한 것은 즉위 이후의 일이다. 부여 사비성에서 익산 사자사까지는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니다. 왕의 행차라면 왕복에 여러 날이 걸리는 여정이다. 서동은 선화와의 결합을 통해 입신할 수 있었다. 즉위 당시 이들은 벌써 여러 해째 부부로 살아왔고, 자식도 두었을 것이다. 의자왕이 이들 사이에 난 아들이란 가정이 성립한다면, 의자왕은 무왕이 즉위 이전에 선화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맞다. 선왕이 즉위 이전 과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던, 그래서 공인 받지 못하고 마 캐는 백성으로 살아야했던 젊은 날 무왕의 처지와, 즉위 이전에 신라 왕녀와의 사이에서 낳아 세자 책봉까지 33년이나 기다려야 했던 의자왕의 처지는 묘하게 겹쳐진다. 무왕의 의자왕에 대한 집착도 이 지점에서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이해된다.
설화는 다시 이렇게 이어진다.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사자사 지명법사를 만나기 위해 왕이 된 무왕 부부는 용화산(龍華山) 자락 큰 못가에 도착한다. 여기서도 또 연못이 나온다. 무왕은 이래저래 연못과 인연이 깊다. 그때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출현한다. 부부는 수레에서 내려 미륵삼존께 예불했다. 감격한 선화는 이곳에 큰 가람을 창건하고 싶다는 소원을 말했고, 왕은 즉시 허락한 후 사자사로 올라가 지명법사에게 연못 메울 일을 묻는다. 지명법사는 앞서 하루밤에 황금을 신라로 옮겼던 신통력을 다시 발휘해,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웠다.
한편 무왕 부부 앞에 출현한 미륵삼존과 가람 창건의 소망은 『삼국유사』 탑상편 「미륵선화(彌勒仙花) 미시랑(未尸郞) 진자사(眞慈師)」 조와 묘하게 겹쳐진다. 신라 진평왕의 선왕인 진지왕 때 흥륜사 승려 진자(眞慈)가 미륵상 앞에 나아가 미륵불께서 화생(化生)하시어 곁에서 시중 들 수 있게 되기를 소원했다. 어느 날 한 꿈에 어떤 승려가 진자에게 웅천(熊川)에 있는 수원사(水源寺)로 가면 미륵선화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잠을 깬 진자는 열흘을 걸어 백제의 수도 근처인 지금의 공주 땅으로 미륵선화를 찾아 간다. 미륵선화를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던 그는 경주로 돌아와 곡절 끝에 미시랑을 만나 그가 미륵선화임을 확인한다.
일연은 미시(未尸)의 ‘시(尸)’가 쓰기에 따라 ‘력(力)’과 혼동될 수 있으므로, 미시(未尸)는 미력(未力)이고, 미력은 곧 미륵이라는 풀이를 덧붙였다. 신라 흥륜사 승려가 백제의 중심부에 있는 수원사까지 가서 미륵선화를 모셔간 이 사건은, 여러 모로 승려로 변장한 서동이 권모를 써서 선화공주를 배필로 맞아온 이야기와 겹치는 구조를 보여준다. 이 두 사건을 하나의 계기 선상에 놓고, 신라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미륵쟁탈전으로 보는 연구 시각도 있다. 앞서 진자가 모셔간 미륵선화를 서동이 되모셔온 것과 같은 의미로 보고, 이를 그가 민심을 얻어 백제의 왕으로 오르게 되는 계기로 보았다.
미시랑은 하생한 미륵이었고, 그는 신라에서 국선으로 공경 받으며 7년을 지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종적 없이 사라졌다. 그런데 신라에서 백제로 건너온 선화 공주 앞에 미륵삼존이 출현했고, 무왕과 선화는 미륵삼존이 머무실 가람을 창건하여 이 땅 위에 미륵의 세상을 활짝 열 소망을 품었던 것이다. 그녀의 이름 선화(善花)는 예쁜 꽃이라는 뜻도 되고, 미륵선화의 선화(仙花)와 음이 같다는 점도 음미할 만하다.
다시 위의 기록으로 돌아간다. 일연은 이 절의 이름이 미륵사라 하고 나서, 주석에서 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하였다는 언급을 남겨 많은 연구자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왕흥사는 앞서 여러 차례 살핀 대로 익산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부여 낙화암 맞은편에 있던 절이다. 일연의 우연한 착각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삼국유사』 권 3, 「법왕금살(法王禁殺)」조에서도 왕흥사를 또한 미륵사라고도 한다고 적었다. 왕흥사에 대한 설명 끝에 붙은 주석을 보면 다시 갸우뚱해진다.

고기(古記)에 실린 것과는 조금 다르다. 무왕은 가난한 어미가 못의 용과 교통하여 낳은 바다. 어릴 적 이름은 서여(薯蕷)였는데, 즉위 후에 무왕이라 이름하였다. 처음에 왕비와 더불어 창건하였다.

부여 왕흥사는 부왕인 법왕이 창건했고, 왕비와 더불어 창건한 절은 익산 미륵사다. 일연의 이 대목 기술은 명백하게 혼동되어 있다. 가능성은 일연이 왕흥사와 미륵사를 같은 절로 착각했거나, 아니면 실제로 당시에 두 절을 같은 이름으로 혼용했던 것일 터이다. 전자라면 더 말할 것이 없다. 익산의 미륵사는 근처에 왕이 배를 타고 들어올 강물이 아예 없는 절이다. 후자라면 법왕이 부여에 왕흥사를 세웠듯이, 자신은 익산에 자신의 왕흥사를 따로 세운다는 의미에서 미륵사와 왕흥사란 이름을 혼용했을 수는 있다. ‘처음에 왕비와 더불어 창건했다’는 말은 익산 미륵사를 두고 본다면 뜻밖에 의미심장하다. 완공은 왕비와 함께 하지 못했다는 문맥으로 읽을 수 있는 까닭이다.
일연은 미륵사 창건 설화의 끝에다가 진평왕이 백공(百工)을 보내 절의 건립을 도왔다는 한 줄을 덧붙였다. 이 말이 또 많은 혼란을 가져왔다. 무왕은 즉위 3년째 되던 8월에 신라 아막산성 공격을 계기로 신라 진평왕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이 첫 번째 회전은 좌평 해수(解讎)에게 보기(步騎) 4만을 주어 싸우게 했을 만큼 백제로서는 군사력을 총집결한 전투였다. 하지만 신라 귀산(貴山) 등의 분전으로 백제는 해수만 단기로 돌아왔을 정도로 참혹하게 패배했다. 무왕으로서는 즉위 후 처음으로 치른 신라와의 야심찬 전쟁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해, 입지가 말이 아니게 되었다. 이후로도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의 잇단 공격으로 거듭 패퇴했다. 그러다가 12년 10월 가잠성 전투를 계기로 백제는 다시 공격의 주도권을 되찾는다. 이후로는 연전 연승했다.
이렇듯 무왕은 진평왕과의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쟁으로 치세의 대부분을 보냈던 임금이다. 백제군 4만명이 거의 궤멸 당하는 패배를 당하고, 이후 잇달아 조성된 긴장과 대치 국면에서 진평왕이 미륵사 창건을 돕겠다고 신라 백공들을 보냈다는 것은 앞뒤가 없는 말이다. 더욱이 당시의 토목 기술은 이보다 훨씬 뒤인 643년 신라의 황룡사 9층탑 창건에 백제에서 아비지를 보내 돕고 있을 만큼 백제가 신라보다 한 수 위였다. 632년 정월 진평왕이 서거한다. 공교롭게 같은 달 백제 무왕이 맏아들 의자를 세자로 앉히고 있는 것도 주목할만 하다.
위 『삼국유사』 미륵사 창건 기사의 끝 대목은 많은 번역서들이 흔히 오역했다. 원문은 “乃法象彌勒三會, 殿塔廊廡, 各三所創之,”이다. 미륵삼회(彌勒三會)를 법상(法象)하여 전탑과 회랑을 각각 세 곳에 창건하였다는 뜻이다. 법상은 형상을 본떴다는 의미다. 1970년대에 이루어진 실제 미륵사지의 발굴 결과는 놀랍게도 『삼국유사』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했다. 백제계 사찰의 기본적인 가람 형태인 1금당 1탑파 형식이 아닌 3금당 3탑파 형식이었다. 절터의 바닥이 뻘층이어서 연못을 메워 절을 세웠다는 언급도 사실로 판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금당 터는 주춧돌을 높게 쌓아 바닥과 상당한 거리를 두어, 습기를 차단하는 구조를 지녔음도 확인되었다.
미륵사의 구조는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의 가르침을 재현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미륵보살이 먼 훗날 미래불로 세상에 내려와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믿음이 미륵 신앙이다. 이러한 미륵사상은 흔히 미륵삼부경으로 일컬어지는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과 『미륵하생경』, 그리고 『불설미륵대성불경(佛說彌勒大成佛經)』으로 구성된다. 미륵상생 신앙은 미륵보살이 도솔천에 태어난다는 믿음을, 미륵하생 신앙은 미륵보살이 사바세계에 다시 태어나 용화수 아래에서 3차례 설법으로 상중하의 중생들을 차례로 제도한다는 믿음이다.
미륵보살은 도솔천의 칠보대에 있는 마니전의 사자좌(獅子座)에 홀연히 환생한다. 그곳은 염부단의 사금(砂金)으로 장엄된 공간이다. 그러다가 56억 7천만년이 흐른 뒤 도읍인 시두성(翅頭城) 가까운 곳에 엄청나게 큰 용화수(龍華樹)가 있는데, 이곳으로 하생한 미륵보살은 나무 아래서 무상도(無上道)를 이루어 삼천세계를 진동시킨다. 그러면 양거왕이라는 전륜성왕이 화림원 용화수 밑에 계신 미륵불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청한다.
양거왕에게는 일곱 가지 진귀한 보배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미인보(美人寶)다. 그녀의 얼굴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 살결은 한 없이 부드러워 마치 솜과 같다. 보배 곳간을 맡은 신도 있다. 그는 입으로 보배를 내놓고, 발 아래로 보배를 비처럼 내린다. 군사를 맡은 신도 그의 일곱 가지 보배 중 하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네 가지 군사가 구름처럼 허공에서 쏟아져 나와 그 나라 국경과 백성을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 보살핀다.
미륵의 세상은 어떤 곳인가? 칠보나무가 줄 지어 서 있고, 개울 양편에 금모래가 깔렸으며, 궁전은 연못 근처에 있다. 곳곳마다 금은과 구슬 등 온갖 보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온 세상은 평화로워 도둑 걱정이 없다. 도시나 시골이나 문을 잠그지 않는다. 늙고 병드는 걱정이 없고, 물과 불로 인한 재앙도 없다. 전쟁과 가난이 없고, 짐승이나 식물의 해독이 미치지 않는다. 대소변을 보려 하면 땅이 저절로 열리고, 마치면 땅은 다시 닫힌다.
이러한 미륵신앙의 얼개는 위 미륵사 창건 설화 속에 그대로 상징화 되었다. 무왕 부부는 사자사로 지명법사를 찾아간다. 미륵이 처음 환생한 상계 도솔천 사자좌의 변용이다. 미륵삼존이 출현한 연못의 뒷산은 용화산(龍華山)이다. 용화수 아래서 환생한 미륵보살을 나타낸다. 삼존(三尊)은 세 차례의 용화법회(龍華法會)를 뜻한다. 이것이 미륵사의 삼소(三所)로 다시 구현되었다. 환생한 미륵보살을 알현한 전륜성왕은 비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여인과, 산처럼 쌓인 보물, 구름같은 군사를 거느린 제왕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화 공주와 언덕처럼 쌓인 황금, 막강한 군사를 거느린 무왕 자신과 대응된다.
결국 미륵사를 창건하는 일은 이 세상에 미륵부처님을 맞이할 준비였던 셈이다. 미륵 부처님을 친견한 무왕 부부는 전륜성왕 부부가 된다. 이후로 펼쳐질 세상은 전쟁과 죽음의 공포가 사라진 평화와 열락 뿐인 낙원이다. 이렇게 해서 미륵사 창건 설화는 『미륵하생경』을 중심으로 한 미륵경전의 완벽한 재현이 된다.

전륜성왕을 꿈꾼 무왕, 진평왕을 벤치마킹하다

무왕의 치세 곳곳에서 우리는 그가 진평왕을 벤치마킹한 듯한 흔적과 문득문득 만난다. 따지고 보면 신라와 백제는 비슷한 꼴로 미륵하생신앙을 받아들였다. 무력이 아닌 정의의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전륜성왕의 세상을 똑 같이 꿈꾸었다.
『미륵하생경』에서는 미륵불의 성불 소식을 듣고 달려온 양거왕이 그 거룩한 법문을 듣고는 왕위를 태자에게 물려 준 뒤 머리를 깎고 보물을 바친다고 했다. 신라 법흥왕도 이차돈의 순교 후 불교를 받아들여, 흥륜사(興輪寺)를 짓고 내외가 아예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또 법왕이 살생을 금하는 율령을 반포한 뒤 왕흥사(王興寺) 창건을 선언한 것도 생각이 같다. 신라에서 법흥왕을 이어 보위에 오른 진흥왕이 흥륜사를 완공하고, 나아가 황룡사의 장육존상을 조성하여 부처의 사리를 잇달아 모셔오는 것과, 백제 무왕이 법왕의 유촉을 받들어 왕흥사를 완공하고, 미륵사를 세워 그 탑에 진신사리를 봉안한 것도 대응된다.
진흥왕은 아들 이름을 동륜(銅輪) 사륜(舍輪) 금륜(金輪) 국륜(國輪) 등 전륜성왕의 이름을 본떠 지었다. 동륜 태자의 아들로 즉위한 진평왕은 자신의 이름을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인 백정(白淨)으로 하고, 왕비의 이름을 마야부인(摩耶夫人)으로 하는 등 일가의 이름을 석가모니의 부모와 삼촌의 이름으로 지어 신라를 불국토화 하려는 석종의식(釋宗意識)을 보여주었다. 무왕은 연못에서 출현한 미륵삼존을 알현하고 예를 올리며, 나아가 미륵불이 하생하여 세 차례의 용화법회를 베풀 도량인 미륵사를 창건함으로써 자신이야 말로 진정한 전륜성왕이라고 선언했다.
진평왕은 즉위 원년에 천사(天使)가 상황(上皇)의 뜻을 받들어 옥대(玉帶)를 하사했다는 신화를 유포시켰다. 또 궁궐 내에 있던 제석궁(帝釋宮)의 섬돌을 발로 밟아 부서뜨려 자신의 권위를 확고하게 다진다. 무왕은 본인이 미륵삼존을 친견한 전륜성왕이면서, 미륵사 근처에 새로 조성한 왕궁 곁에 신라와 마찬가지로 제석사(帝釋寺)를 창건하여, 이곳에 진신사리와 금판 불경을 모셨다.
여기서 잠깐 익산 미륵사 근처, 왕궁평 옆에 있는 제석사의 존재에 대해 음미해보기로 한다. 제석사에 관한 기록은 우리 쪽에는 없고, 엉뚱하게 일본 쪽 기록에 남아 있다.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枳慕蜜地)로 천도하여 새로 정사(精舍)를 세웠다. 정관 13년 기해년(639) 겨울 11월에 큰 우레와 비가 내려 마침내 제석정사(帝釋精舍)에 화재가 났다. 불당과 칠급부도, 회랑 및 방에 이르기까지 일체가 다 타버렸다. 탑 아래 초석 중에 여러 종류의 칠보가 있었는데 불사리가 보이는 수정병이 있었다. 또 구리를 종이처럼 만들어 금강파야경(金剛波若經)을 써서, 나무로 된 칠함에 보관하였다. 초석을 열어 살펴보니 모두 타버렸지만, 불사리병과 파야경을 담은 칠함만은 전과 같았다. 수정병은 안팎이 훤히 보였는데, 대개 또한 손대지 않았는데도 사리가 하나도 없었다. 누가 꺼내갔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장차 병을 대왕께 돌려보냈다. 대왕께서 법사에게 청하여 즉시 참회하고는 병을 열어 살펴보니, 불사리 6개가 모두 안에 놓아둔 병에 있었다. 밖에서 살펴보니 6개가 다 보였다. 이에 대왕과 여러 궁인들이 배나 공경하고 믿게 되었다. 즉시 공양하여 다시 절을 지어 보관하게 하였다.
(百濟武廣王遷都枳慕蜜地, 新營精舍. 以貞觀十三年歲次己亥冬十一月, 天大雷雨, 遂災帝釋精舍. 佛堂七級浮圖, 乃至廊房, 一皆燒盡. 塔下礎石中有種種七寶, 亦有佛舍利睬水精甁, 又以銅作紙, 寫金剛波若經, 貯以木漆函. 發礎石開視, 悉皆燒盡. 唯佛舍利甁與波若經漆函如故. 水精甁內外徹見, 盖亦不動, 而舍利悉無, 不知所出, 將甁以歸大王. 大王請法師, 發卽懺悔, 開甁視之, 佛舍利六箇俱在處內甁. 自外視之, 六箇悉見. 於是, 大王及諸宮人, 倍加敬信. 發卽供養. 更造寺貯焉.)

이 기록은 중국 육조 때 육고(陸杲) 등이 찬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 기사의 한 대목이다. 지모밀지는 익산의 옛 이름이다. 무왕의 익산 천도를 기정사실화 했다. 정관 13년 기해년은 앞서 미륵사지 서탑이 완공되어 사리봉안기를 안치했던 639년이다. 미륵사 서탑 봉안기의 안치가 1월이었는데, 같은 해 11월에 제석정사의 불당과 칠급부도 및 부속 건물이 모두 벼락에 맞아 불탔다. 그러니까 무왕의 제석사 경영은 미륵사 및 왕궁 건설과 동시에 이루어졌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칠급부도(七級浮圖)를 탑이라고 했으니, 제석사에 세워진 탑은 7층 목탑이었다. 탑 안에는 불사리가 든 수정병과 동판에 쓴 금강파야경이 목칠함에 담겨 주초석 안 사리공에 장치되었다. 폐허를 헤쳐 주초석을 들어내자 다 타버린 폐허에서 온전한 목칠함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아무 손댄 흔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투명한 수정병 속에는 의당 있어야 할 여섯 개의 사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왕이 즉각 법사를 청해 참회하였다고 했으니, 이때도 지명법사를 불렀던 것이 틀림없다. 참회 후에 수정병을 열자 사라졌던 불사리 여섯 개가 감쪽같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같은 제석사 관련 기록은 내제석궁의 섬돌을 밟아 부서뜨리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제석천에서 신물 옥대를 하사했던 진평왕의 일과 다시 겹쳐진다.
무왕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던 진평왕과의 첫 전투는 거의 다 이긴 싸움이었는데, 원광법사에게서 배운 화랑오계로 무장한 화랑 귀산(貴山) 등의 분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미륵선화(彌勒仙花) 또는 용화향도(龍華香徒)로도 불렸던 화랑의 잇단 분전은 늘 열세에 놓였던 신라에게 극적인 승리를 안겨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 귀족회의에 휘둘려 변변한 왕권조차 행사하지 못했던, 그나마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올랐던 무왕의 입장에서는 미륵신앙의 비전이야 말로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의 중심에 왕권을 우뚝 세워 귀족 세력을 견제하며, 신라와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을 법하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라이벌이었던 진평왕의 앞서간 행보가 주목되었고, 신라에서 흥륜사와 황룡사를 잇달아 건립한 것을 본떠, 백제는 왕흥사와 미륵사를 세우고, 저들의 내제석궁을 보고 새 왕궁 곁에 제석사의 창건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여기에 진평왕의 셋째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미륵사 창건에 적국의 임금인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 공사를 도왔다는 이야기까지 보태지고 보면, 우리는 민심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으나 취약한 왕권 기반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던 무왕의 눈물겨운 노력과 만나게 된다.
이제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어째서 금번 발견된 사리봉안기의 주인공은 미륵사 창건의 계기를 마련한 선화가 아니라 사탁씨 왕비였을까? 우선 서탑 완공 당시 선화공주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사라진 중탑과 동탑의 봉안기에도 사탁씨 왕비의 이름만 있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사탁씨가 자신들의 세력기반인 사비성에서 익산으로의 천도를 꿈꾸었던 무왕의 염원이 깃든 미륵사 창건에 적극적으로 시주하고, 그 내용을 적은 봉안기까지 안치한 것을 보면, 무왕의 왕권 강화 의도는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인다. 비록 무왕의 익산 천도는 왕의 서거와 함께, 사탁씨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아야 했던 의자왕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선화공주는 여전히 미륵사 창건의 계기를 마련했고, 그 일을 추진했던 주체다. 다만 그녀는 완공 훨씬 전에 세상을 떴다. 마지막 완공을 지켜본 것은 사탁씨 왕비였다. 이것이 서탑 사리봉안기에 그녀의 이름만 남게 된 연유다. 이번 봉안기의 발견이 서동과 선화의 사랑 이야기에 손상이 될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이 봉안기는 그간 석연치 않던 의자왕의 너무 늦은 세자 책봉과 즉위 직후의 정변 내막, 왕권과 귀족 세력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구조 등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었을 뿐이다.
무왕과 선화가 꿈꾸었던 미륵세상은 미륵사 창건 이후에도 결코 오지 않았다. 거듭된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고, 전쟁의 먼지와 연기는 끊이지 않았다.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염원했던 선화공주의 간절한 소망은 결국 사탁씨 왕비의 이름만 남긴 채 스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의자왕대에 이르러 백제는 외세를 끌어들인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해 몇 백년 사직의 문을 닫고 말았다. 미륵사와 제석사, 왕궁평은 지금도 빈터만 남아 희미한 옛 기억의 저편을 증언하고 있다. 꿈은 아름답지만 늘 슬픈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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