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어어령의 다시 읽는 한국시_21

醉月 2009. 9. 30. 08:52

심훈「그날이오면」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 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우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사람들은 수백 수천의 시를 쓰고도 시인의이름으로 기억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심훈은 「그날이 오면」의 단 한편의 시로 불
멸의 시인이 되었다. 한국에서만이 아니다.심훈은 옥스퍼드 시학교수 바우러의 역저 「시와 정치」(1966년)에서 파스테르나크와 세
페레스와 같은 노벨문 학상 수상자와 당당히어깨를 겨루고 있다.공공적 주제를 다루고있는 정치시에 있어 「개인적인 열렬한 기분
」과 단순성이 얼마나 특수한 효과를 거두고있는지 바우러는 그것을 실증하는 모형으로「그날이 오면」 전문을 분석했다.  한국 시
인은 독일 시인처럼 잔악한 사실에 구속되지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비록 먼훗날의 일이라 하더라도 감격적인 그 미래가
일깨우는 자극적이고도 숭고한 그 기분인 것이다. 그는 한국의 산과 강, 종로와 같이친숙한 환경에 그의 비전을 설정한다. …자
연은 그와 기쁨을 함께 나누고 일어나서 함께춤을 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자연환경과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사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바우러 교수는 서구의 저항시인들에게서 맛볼 수 없는 색다른 감동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날이 오면」이 정치시로서 성공하게 된 이유를 좀더 정밀하게 검증하기 위해서 우리는 바우러 교수가 지적한 「개인적인 열렬한 기분」,「감격적인 그 미래가 일깨우는 자극적이며 숭고한 그기분」이란 것이 대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해답은 의외로 간단한데 있다. 그 시의 1연 맨 처음과 마지막에 나오는 시구를 한데 이어보면 「그날이 오면, …무슨 한이 남으
오리까」라는 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인경을 머리로 받아 죽는 옛   전설의 까마귀 비유이기 때문에 1연의 시를 한 형태로 축약하면 「그날이 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가 된다. 즉 한국민족이라면 누구나 속으로 외우고 살아온 말이다.

 

심훈은 바로 한국인의 뿌리깊은 민족정서와 그 삶의 본질에서 저항의 언어를 가져온 것이다. 그 한의 언어를 어떻게 희랍 고전시의 연구가가 알았을리 있겠는가. 더구나 그가 인용한 「그날이 오면」의 번역시에는 바로 그 한의 구절이 삭제되어있다. 그러니 영어로 번역조차 할 수 없는 그 「한」의 정서가 그에게는 그저 「개인적인 열렬한 기분」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한이란 외부의 어떤 힘이나 방해로 이루지 못한 욕망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모든 것을 멸할 수 있어도 평생동안 마음 밑바닥에 쌓인 그 한만은 없앨 수가 없다. 한국인이 종교로부터 구하려고 한 것은영생이 아니라 바로 그 한을 푸는 일이다. 오구굿과 같은 무속의식 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한」에 뿌리를 둔 저항시는 「원」에서 출발한 그 정치 시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원과 한은 어떻게 다른가. 춘향이에게 있어 변학도에 대한 감정은 원이지만, 이도령에 대한 그것은 한이다.


  춘향의 시가 변학도에게로 향하면 「원의 언어」가 되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면 원수를 갚는 복수로 발전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변사또를 복수한다 해도 이도령을 만나 사랑을 이루지 못하면 한은 풀 수가 없다. 춘향이 심훈이 되고 일제의 극악한 지배가 변학도가 된다면, 그리고 이도령과의 극적만남이 민족 강토가 해방되는 그날이라고 한다면, 그 시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독일형 저항시와
는 분명 다른 「그날이 오면」과 같은 시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감격적인 미래의 자극적이고도숭고한 기분」이란 곧 「한을 푸는 미래」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이다.이와 똑같은방법으로 2연째의 그 시를 읽어가면 「인간의 자연환경과 기쁨을 나누는 사상」이라고 한 그 비평이 얼마나 피상적인 것인가도 알게 된다. 점잖은 영국의 그 시학자는 춤추는 삼각을 「감상적 오류의 멋진 변형」이라고 칭찬하고 있지만, 산과 강물을 춤 추게 하는 기쁨…. 육조 넓은 거리에서 울고 뒹굴고 춤춰도 복받쳐 오르는 주체할 수 없는 그 기쁨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한국인들에게 물어보면 금세신바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 1연의 시가 죽음보다도 강한 「한풀이」를 노래한 것이었 다면,


2연의 그것은 죽음보다 강한 「신바람」의 세계를 읊은 것이다. 1연에서는 제 머리로 인경을 받아종을 울리지만, 2연에서는 칼로 제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어 친다. 그 종소리가 민족의 한을 푸는 소리라면, 이 북소리는 민족의 행진을 이끄는 신바람의 소리인 것이다. 신바람은 존재의 저 근원으로부터 절로 솟아나는 힘이다. 나와 너의 경계가 사라지고 안과 밖의 담벼락이 무너지고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문자 그대로의 해방공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서는 북과 북을 치는 사람이 구별되지 않는다. 자기 가죽으로 만든 북을 자기가 친다고 했다. 치는 것도 자기요, 울리는 것도 자기다. 사람이 북이 되고, 북이 사람이 된다. 그러한 신명의 북소리는 삼각산 한강수와의 교감은 물론이고 생과 죽음의 문지방마저도 횡단한다. 바우러는 그것을 그저 「황홀한 순간」이라고 했지만 한국인들은 사물놀이나 탈춤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신바람인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한의 종소리와 신바람의 북소리는 다같이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실현된다는 사실이다. 「그날이 오면」에서 한을 푸는 기쁨의 그 종소리는 바로 자신의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소리이고, 신명의 그 북소리는 자신의 살가죽을 칼로 벗겨내는 소리이기도 한 것이다. 종소리든 북소리든 그것은 울려 퍼진다. 끝없이 진동하고 넘치고 확산하고 상승하다가 침묵속으로 사라진다. 두개골이
파열되고 가죽이 벗겨지는 아픔이 희열의 종소리와 북소리로 바뀌어지는 그 한과 신바람의 위대한 아이러니야 말로 시를 창조하는 자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의 기쁨을 뒤집기만 하면 가혹한 일본압제의 상황인 「오늘」에 대한 고발과 분노의 심판이 된다.

 

  바우러는 말한다. 일본 사람들의 어떤 압제도 한국 시인들을 죽일 수 없었다고. 그러나 한국 시인의 가슴에는 죽음보다 강한 한과 신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과연 알았을까. 그리고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대립개념으로만 생각해온 그의 시학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면서도 사회나 민족 그리고 우주전체를 넘나드는 한풀이와 신바람의 그 담벼락없는 리듬을 포용할만한 자리가 과연 있었을까.

 

그 시가 쓰여진지 한세기 가까이 지나고 「그날」을 맞이한지 반세기가 넘었는데도 우리는 심훈의 언어에서 여전이 자신의 머리와 자신의 가죽으로 울리는 생생한 그 종소리와 북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기쁨과 아픔이 한데 어울려 가슴을 저리게 하는 가락들을 만약 바우러와 같은 서구의 비평가들이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그날이 오면 한국의 시는 세계의 지붕위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