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중국통 김준엽과 함께 떠나는 韓中交流史 여행
김준엽(金俊燁) 사회과학원 이사장에게는 독립운동가 역사학자 교육자 등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어 있다. 일제 때인 1944년 1월 일본 게이오대학 재학중 학병에 끌려갔다가 중국의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에서 일군을 탈출, 천신만고 끝에 충칭(重慶)의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에 투신한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김 이사장은 광복 후 이범석 장군 등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임정 요인과 애국지사들의 귀국대열에 합류하지 않고 홀로 중국에 남아 난징(南京)대학에서 중국사를 전공한 뒤 지금껏 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 또 교육자로서 김준엽은 고려대 교수와 총장, 아주대 재단이사장 등 근 반세기를 후진양성에 매진해왔다. 이밖에도 김 이사장은 이범석 초대총리와 박정희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역대정권으로부터 장관 국무총리 등을 거듭 제의받았으나 이를 모두 뿌리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준엽 이사장과 중국의 인연을 짧은 지면에서 다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중국대륙에서의 파란만장한 독립운동과 학업과정은 생략하더라도 고려대에서의 중국근대사 강의 33년, 중국학회의 발기인 부회장 회장 역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 시절의 공산권(주로 중공) 연구 및 학술활동 등 한국의 초창기 중국관련 연구의 산파역을 도맡아 왔다.
김 이사장의 중국전문가로서의 면모는 그가 고려대 총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오히려 더욱 돋보이는 느낌이다. 한중간 교류가 재개되면서 1988년 무려 39년 만에 다시 중국을 찾은 이래 그의 중국방문은 지금까지 48회에 달하고 있다. 한 해 평균 세 차례 이상 중국나들이를 하고 있는 셈. 1920년 생이니까 새해 들어 84세가 되는데, 도대체 김 이사장은 무슨 일로 노구를 이끌고 중국을 쉴새없이 드나들고 있는 것일까.
항저우 임정청사도 곧 복원
-지난 11월 하순에도 중국을 다녀오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이번엔 무슨 일로 다녀오신 것입니까.
“상하이(上海)에 있던 우리 임시정부는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훙커우(虹口)공원 의거 뒤인 1932년 5월에 항저우(杭州)로 옮겨가 1935년 11월까지 그곳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전장(鎭江)으로 옮겼습니다. 항저우를 방문한 것은 바로 그때의 임정청사 복원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지요.”
-항저우 임정청사 자리는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그리고 언제쯤이면 또 하나의 임정청사가 복원될 수 있을까요.
“그 동안 임정청사 자리에서 살고 있던 주민을 시에서 내보냈어요. 중국도 이제는 사유재산 보호문제가 간단치 않아서 보상금을 다 주어야만 집을 비우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규모는 상하이 임정청사와 비슷하거나 조금 작은데, 진열실을 만들어야 하므로 옆집도 비우게 해야 할 겁니다. 항저우시측은 일단 2004년 6월까지 복원사업을 마무리하는 게 목표라고 하니까 멀지 않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지를 고심해야 했다. 김 이사장과 중국의 접촉면이 워낙 넓고 방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요즘 김 이사장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중국내 한국 역사유적지 발굴 및 복원사업 그리고 여기에 얽힌 한중교류사의 뒷이야기들과 한중간 학술교류사업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과거 독립운동 시절의 활약상은 흥미진진하기는 하나 이미 김 이사장의 저서 ‘長征’ 시리즈와 그의 학병동지인 고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돌베개’를 통해 자세히 소개됐기 때문이다.
-중국과의 왕래가 재개되자마자 착수하신 일 가운데 하나가 유구한 한중관계의 상징물들을 찾아 복원하고 기념비를 세우는 작업이었습니다. 처음 시작한 일은 어떤 것이었나요.
“짧은 기간이나마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만큼 상하이와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 청사의 복원을 첫 사업으로 정했습니다. 1988년 말에 상하이에서 임정청사를 찾았는데, 임정이 시내 여러 곳을 전전했기 때문에 모두 복원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1926년에서 1932년까지 가장 오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봉창(李奉昌)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지휘했던 마당로(馬當路) 306농(弄) 4호의 건물이라도 먼저 복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복구공사에 앞서 이런 유적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중국당국에 인식시켜 문화재로 지정받는 일이 시급했어요. 그래야만 도시계획 등으로 철거되는 일이 없고 앞으로 복구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전조치라고 보고 중국당국자를 설득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989년에는 충칭의 치싱강(七星崗) 롄화츠(蓮花池)에 있는 임정청사도 방문하여 충칭시 당국에 똑같은 설득작업을 폈습니다. 그후 우리 정부나 광복회 그리고 큰 기업가들이 노력을 기울여 상하이와 충칭의 임정청사가 복원돼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이 찾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상하이 충칭과 더불어 우리 임시정부가 활약한 3대 기지의 하나가 항저우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2004년 중에는 한국독립기념관이 준공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김준엽 이사장이 독립운동 유적지 복원사업에 발벗고 나선 것은 자신의 젊음을 바친 현장에 대한 애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가족사와도 인연이 깊다. 김 이사장의 장인은 임시정부 주중대표단장과 김구 주석 비서실장 등을 역임하면서 임정 살림을 도맡았던 민필호(閔弼鎬) 선생이고, 또 민필호 선생의 장인은 임시정부 법무총장 외무총장 국무총리 등을 지낸 신규식(申圭植)선생이다. 3대에 걸친 장인-사위 독립투사 집안인 셈이니 김 이사장이 ‘평생사업’으로 여기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상하이에는 또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인 훙커우공원(루쉰공원으로 이름이 바뀜)이 있지 않습니까. 1990년대 초 처음 상하이를 방문할 기회가 있어 훙커우공원엘 찾아갔더니 안내인이 소개해준 의거현장이라는 곳에 아무런 표지도 없어 서운했었습니다. 그 뒤에 다시 가보니 표지석도 서 있고 기념건물도 있어 무척 반갑더군요.
“10여년 전쯤 매헌기념사업회에서 윤 의사의 영혼을 모시는 매헌정(梅軒亭)을 건립했는데, 건물 앞에 있는 기념비가 너무 작을 뿐만 아니라 조각한 글도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1932년 4월29일’이라고만 돼 있었어요. 윤 의사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느 나라 사람이 무슨 의거를 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당시 상하이 한국총영사 경창헌(慶昌憲)씨와 함께 상하이 시정부 외사부처장이었던 저우밍웨이(周明偉) 박사를 찾아가서 비석을 크게 할 것과 의거내용을 상세히 기록할 것을 부탁했지요. 그 뒤에 경 총영사 후임인 손상하(孫相賀) 총영사가 꾸준히 노력해 현재 큰 비석이 매헌정 앞에 새로 건립돼 여간 다행스럽지가 않습니다.”
-이밖에도 중국대륙에는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가 도처에 많습니다. 특히 만주지역이나 한중국경지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곳이 많은데요. 이를테면 청산리 대첩 현장 같은 곳은 현재 어떻게 보존되어 있나요.
“청산리 대첩 현장에는 기념비가 건립돼 있습니다. 광복회에서 세운 거죠. 봉오동 전투 현장에도 기념비가 있습니다만, 중국대륙 도처에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가 산재해 있어 할 일이 태산 같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哈爾濱)역 현장에도 기념비가 없는 실정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중국에 와서 남긴 의미있는 발자취를 찾아내 복원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계신데요. 가장 관심이 큰 유적은 어떤 것입니까.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내 기념관을 만드는 일 다음에 착수한 것이 항저우에 있는 고려사(高麗寺)의 복구였는데,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항저우를 처음 방문한 것이 1948년인데 그후로 지금까지 20여차례는 찾았을 겁니다. 항저우는 남송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이름난 아름다운 도시예요. ‘하늘에 천당이 있고, 지상에 소항(蘇杭 : 쑤저우와 항저우)이 있다’고 할 정도로 경치가 아름답고 미인이 많다는 곳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임시정부가 항저우로 이전한 일이 있고, 개인적으로는 제 처도 어렸을 적에 임시정부를 따라 부모님과 함께 항저우로 피난해 일본군이 진격한 1937년까지 그곳에서 학교를 다닌 인연이 있습니다.
제가 항저우의 고려사 복구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고려 11대 임금 문종(文宗)의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과 인연이 깊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절의 원래 이름은 혜인사(慧因寺)로 당시 유명한 정원(淨源)대사가 있던 곳이었어요. 의천은 정원의 가르침을 받을 목적으로 모친과 맏형인 12대 임금 순종(順宗)의 반대를 무릅쓰고 30세의 나이에 밀항하여 자오저우(膠州) 카이펑(開封)을 거쳐 항저우로 찾아가 정원대사에게 사사했어요. 그후 의천은 모친의 독촉으로 중국체류 1년4개월 만에 돌아와야 했는데, 귀국 후 혜인사에 많은 재물과 불전을 보낸 연유로 혜인사가 고려사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고려사는 현재 약간의 초석만 남아 있을 뿐 병란으로 소실된 상태입니다. 의천이 직접 창건한 절이 아니기 때문에 중국당국이 주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원의 복구가 어렵다면 기념비라도 세웠으면 하는 게 저의 바람입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의천이 밀항하면서 처음 상륙했던 자오저우시에 어떤 유적지가 있지 않을까 해서 수소문한 끝에 현지 박물관 자료실장의 도움으로 의천의 상륙지점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의천이 20일 정도 머물렀던 곳도 알아냈고, 상륙지점에는 기념비도 세워놓았습니다.”
-의천이라면 나중에 천태종(天台宗)을 창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속장경을 간행하는 등 우리나라 불교사상 대단히 위대한 인물 아닙니까. 고려사는 말하자면 한중 불교교류의 중요한 사적지인 셈이군요. 대각국사 의천이 항저우까지 가서 불교 공부를 한 것을 보면 당시 그 지역과 고려의 왕래가 그만큼 잦았다는 얘기 아닙니까.
“당·송(唐宋)시대에 중국의 대외무역이 매우 활발했어요. 그래서 주요 항구에 시박사(市舶司)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무역업무나 선박의 입출항 및 관세업무 등을 관장토록 했습니다. 시박사를 설치한 곳은 장쑤성의 양저우(揚州), 저장(浙江)성의 항저우와 닝보(寧波), 푸젠(福建)성의 취안저우(泉州) 등 양쯔(揚子)강 유역과 남쪽지역 즉, 강남에 많았고, 강 북쪽으로는 북송시기 산둥성 자오저우에만 설치했어요. 따라서 무역거래차 중국의 강남지역을 오간 한국인이 매우 많았고 그 유적들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베이징이나 동북3성에만 많은 관심을 쏟아왔는데, 사실은 이 강남지역을 새롭게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지역은 비단 한국과의 교류역사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가장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고, 최근엔 경제발전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어 중국대륙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느껴볼 수 있는 얼굴과도 같은 곳이라 하겠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오늘날 상하이 장쑤성 저장성 등 중국동해안 지역에 많은 한국기업들이 진출해 있는 데에는 오랜 역사적 배경이 있음을 실감케 됩니다. 중국과의 무역이 성행했던 곳인 만큼 상인들의 왕래와 관련된 유적도 많이 있을 것 같은데요.
“물론입니다. 중국과의 무역에 종사했던 우리나라 상인들이 체류할 상관(商館)을 주요항구에 건립했지요. 흔히 고려사관(高麗使館) 고려정관(高麗亭館) 고려관(高麗館) 등으로 명명했는데, 역시 닝보 양저우 자오저우 등지에 있는 것들이 유명합니다.”
-시박사가 설치된 곳 중에서도 닝보가 우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닝보는 지금도 상하이 부근의 주요 도시로 꼽히고 있습니다만, 과거에도 중국대륙과 한반도를 잇는 요충지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1990년대 중반쯤 한국인 탐험대가 옛날 선사시대 우리 선조들이 바다를 건너는 데 이용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뗏목배를 타고 중국에서 한반도를 목표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고생한 일도 있었지요. 그때 탐험대의 출발지가 바로 닝보 앞바다의 저우산열도(舟山列島)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곳에도 많은 유적들과 사연이 있을 법한데요.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대외 무역항구로서 상하이가 가장 각광받는 곳이 되었습니다만, 그 전에는 닝보 항저우 양저우 취안저우 광저우(廣州) 등지가 중심이었습니다. 특히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와 무역하던 배들이 가장 활발하게 드나들던 항구는 산둥반도의 펑라이(蓬萊, 당시 지명은 登州)와 닝보(당시 지명은 四明 혹은 明州)였어요. 대각국사 의천도 귀국할 때는 닝보에서 고려선에 탑승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와 왕래가 빈번하였던 곳이 닝보였으므로 당연히 상인들이 머물던 고려사관이 설치됐었지요.”
-닝보의 고려사관은 지금 복원이 됐습니까.
“처음 닝보시를 방문한 것이 1992년 11월이었는데, 고려사관의 존재를 확인하고 시당국에 이를 문화재로 지정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고속도로가 없어서 항저우에서 기차로 갔는데, 2시간 반이나 걸리더군요. 가보니 다행히도 시에서 고려사관을 문화재로 지정했어요. 그러나 시 문화국의 안내로 현장에 찾아가보니 남아 있는 건물은 고려사관 내에 있었던 절 보규묘(寶奎廟)뿐이었습니다. 문헌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었던 것으로 설명돼 있는데 화재로 파괴됐고 그나마 보규묘도 목공소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고려사관이 들어섰던 터를 확인하고는 시당국과 복원에 관해 의논했는데, 20만달러의 경비만 있으면 복원을 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귀국 후 잘 아는 기업인들을 설득해 기꺼이 부담하겠다는 답을 듣고는 다시 닝보 시당국과 의논했더니 요구액이 점점 늘어나 나중에는 200여만달러는 있어야겠다고 하더군요. 주변 건물을 매입하고 도로도 확장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내 능력으로는 그런 거금을 모금하기가 힘들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원 시급한 닝보의 고려사관
-그러면 현재 고려사관은 어떤 상태에 놓여 있습니까.
“제가 복원을 위한 경비조달을 포기한 후, 그러니까 1999년 봄에 닝보시 문화국에서 고려사관터를 발굴했다며 발굴보고서와 함께 곧 복원한다는 희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그리고 2000년 여름에는 복원사업이 완료됐다는 소식을 알려주기에 그해 11월 부랴부랴 찾아갔지요. 그때는 막 개통된 항저우-닝보간 고속도로를 이용했더니 1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더군요. 닝보대학 교수들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현장을 둘러봤는데, 보규묘만 새롭게 단장했을 뿐이었고, 사관 건물 자체는 그 모형만 진열돼 있는 겁니다. 건물의 유적은 보규묘 뒤 새로 조성한 공원 지하에 묻혀 있었어요. 경비가 부족해 그렇게 됐다는 것을 알고 실망스러웠지만 이만큼이나마 보존한 것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곳을 떠나오면서 공원내 유적이 묻힌 자리에 석조기념비와 안내판이라도 설치해줄 것을 건의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정부나 기업에서 출자하여 본건물을 완전히 복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닝보의 고려사관은 어느 정도 규모였습니까. 단순히 고려인들이 머무는 숙소의 기능을 했던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역할도 했었나요.
“중국 문화부에서 설계도를 만들어 보내온 것을 보면 단층으로 규모가 꽤 크고 양식은 역참(驛站)건물과 비슷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시박사에서 선박의 출입이나 세금징수 등을 관장했는데 시일이 꽤 걸렸어요. 그래서 많은 고려인들이 오랫동안 머물러야 했고 또 이곳에서 매매가 이루어지기도 했으므로 규모가 컸던 것 같습니다.”
-고려사관이 복원되면 제법 볼 만하겠습니다.
“물론이죠. 그래서 10여년 전부터 항저우시 당국에 복원문제를 제기했는데, 아직도 못하고 있어요. 이번에 갔을 때도 또 독촉을 했습니다. 그쪽 관계자들 말로는 곧 될 거라고 합니다. 저장성 성장하던 분이 지금 저장성인민대외우호협회장인데 이 문제에 관심이 많고 영향력이 크니까 잘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닝보에 그밖에 다른 유적들은 없습니까.
“이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중국무역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고 불교방면으로도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모르는 유적들이 널려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2001년 봄에 닝보대학 총장 일행이 내한하였기에 제가 동국대학과 자매관계를 맺도록 주선했습니다. 그리고는 두 대학 총장에게 첫 번째 사업으로 의통(義通)대사가 세운 보운사(寶雲寺)에 기념비를 건립할 것을 제의했어요. 아마 두 대학의 노력으로 머지않아 성사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닝보 남쪽의 린하이(臨海)라는 곳은 1488년 최부(崔溥)가 표류하여 처음 도착한 곳으로 여기에도 기념비가 건립됐습니다.”
한국의 마르코폴로 최부
-최부는 어떤 사람입니까.
“최부(1454~1504)는 일반인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보다 학술적 가치가 더 높다고 평가되는 표해록(漂海錄)을 남긴 중요한 인물입니다. 원래 과거합격 후 서울에서 벼슬하다가 추세경차관으로 제주도에 파견된 사람이었어요. 옛날에 죄를 진 사람들이 제주도로 많이 도망가 정부에서 죄인을 체포해오곤 했는데, 그 책임자로 제주도에 간 것이지요. 그런데 제주도에 가자마자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부랴부랴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가 1488년(성종19년) 1월3일로 난파된 배에 탄 일행 43인과 함께 표류하다가 1월17일 저장성 해안(臺州府 臨海縣)에 도착했어요. 처음엔 왜구로 오인받아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만, 필담을 통해 왜구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부터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게 됐습니다. 135일 동안 중국에 체류하면서 닝보 항저우 양저우 등지를 거쳐 운하를 통해 베이징(北京)까지 간 뒤 귀국했는데 이때 거쳐간 거리가 무려 8000여리에 달합니다. 귀국 후 성종에게 제출한 보고서가 바로 표해록입니다. 당시 중국의 각지에서 목격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학계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사료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그런 중요한 기록이 그 동안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까.
“표해록을 보면 최부가 메모를 아주 상세하게 해 명나라 말기 중국의 지방사정을 소상히 알 수 있습니다. 최부가 직접 경험한 해안의 경비상황, 즉 해방(海防)이라든가 지방의 군사제도, 특히 지명을 아주 상세히 기록해 역사지리에 중요한 자료입니다. 또 운하의 상황이라든가 수차(水車)도 자세히 기록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수차를 만든 사람이 바로 최부입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1979년에야 비로소 최부의 17대손인 최기홍(崔基泓)씨에 의해 표해록 한글번역본이 나왔어요. 일본에서는 이미 1769년에 일어 초역본이 나왔고 이를 근거로 한 영역본도 1965년에 존 메스킬이라는 사람에 의해 나왔으니까 매우 늦은 셈이지요.”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무역거래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는데요. 주로 어떤 물자들을 서로 사고 팔고 했습니까. 화폐도 통용됐습니까.
“시대에 따라 다소 변동이 있습니다만, 고려와 송나라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우리쪽에서 수출한 것은 금 은 동 인삼 잣 종이 붓 먹 부채 등이고, 중국으로부터 사들인 것은 비단 서적 자기 약재 향료 악기 등입니다. 중국은 일찍부터 화폐가 발달해 무역거래에도 사용됐는데, 대개는 물건 판 돈으로 다시 물건을 사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역으로 통하는 실크로드 외에도 해상 실크로드가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닝보 등지의 항구와 한반도와의 무역도 따지고 보면 해상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옛날 바닷길의 개척에 따라 무역의 거점에도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요.
“중국 남방과의 교통로를 학계에서 해상실크로드라고 부릅니다. 중국은 동아시아뿐 아니라 명나라 때는 멀리 아프리카까지 갔을 정도로 해외교류가 활발했습니다. 한국과 중국 사이만 해도 이미 선사시대부터 해상교통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처음엔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아 연해를 따라 항해를 했어요. 대동강 앞에서 랴오둥(遼東)반도로 해서 발해만을 건너는 식이었는데, 차차 교통이 발달해 황해를 직접 건너 산둥반도로 가게 됐습니다. 그때 출발지가 경기 남양만이었어요. 그러다가 삼국시대 무렵부터는 닝보쪽으로 직접 항해했습니다. 따라서 무역의 거점도 시대에 따라 변해왔지요. 고려시대에 금나라가 생겨 중국북부를 점령하자 칭다오(靑島) 남쪽의 자오저우가 대한반도 무역의 중요한 거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강남지역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시박사가 설치된 곳 가운데 장쑤성의 양저우는 바로 양쯔강 연안도시인데요. 이곳도 우리와 교류가 많았던 곳인가요.
“당·송대에 대외항구로 유명한 양저우에는 최치원(崔致遠)이나 고려관의 유적이 있어서 우리나라와 대단히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최치원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들어가 18세에 진사 합격을 했어요. 그후 880년부터 884년까지 5년간 양저우에서 벼슬을 하다가 이듬해 신라에 귀국했는데, 이런 연유로 중국에서도 문호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최치원이 중국에서 남긴 업적이나 일화 같은 것이 전해내려 오고 있습니까.
“많습니다. 저 유명한 ‘황소(黃巢)의 난’을 진압할 때 격문을 쓴 사람이 바로 최치원입니다. 명문장으로 알려져 있지요. 최치원이 양저우에서 5년간 벼슬할 때 남긴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도 널리 알려진 작품입니다. 또 최치원이 양저우로 오기 전에 난징 동남쪽의 율수(?水)라는 고장에서 요즘으로 치면 치안국장에 해당하는 현위라는 벼슬을 했는데 지방출장 갔다가 두 자매의 묘지(雙女墓)를 보고 쓴 시가 아주 유명합니다. 무슨 내용인가 하면 두 자매의 집안이 그런대로 괜찮게 살았는데, 부모가 열몇 살된 두 딸을 소금장사에게 시집보내려 했어요. 당시 저장성 일대에서 잘나가던 직업이 소금장사거든요. 그런데 두 자매는 소금장사에게 시집가기가 싫어 자살을 해버렸어요. 그러자 죽은 두 딸을 선산에 묻지 않고 한지에 묻어버린 것인데 이 사연을 들은 시인 최치원이 멋진 작품을 남긴 것이지요. 이 시는 지금도 중국의 창희(오페라)에 나올 정도입니다.”
-당시 중국에선 외국인에게도 벼슬을 하게 했습니까.
“그럼요. 당시 당나라는 아주 국제적인 나라였어요. 우리나라의 고선지 장군도 그렇고 안록산도 선비(鮮卑)족 사람이었습니다.”
의상대사와 선묘의 러브스토리
-양저우라면 중국의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고향으로도 유명한 곳인데, 그런 일화가 있었군요. 그곳의 고려관은 복원이 되었나요.
“2001년 정월에 양저우시 인민대표대회 주임 일행이 서울로 저를 찾아왔기에 최치원에 관한 일화를 전해주면서, 고려관 이야기도 했습니다. 아랍이나 페르시아 상인들과 함께 과거 우리나라 무역상들도 빈번하게 양저우를 내왕하였다, 이때 상인들이 머물렀던 곳이 고려관인데 이곳에 기념비라도 건립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해 7월에 제가 직접 양저우를 방문했더니 기념비를 훌륭하게 건립하고 있었어요. 그리고는 10월에 양저우 시정부의 지원으로 최치원에 관한 학술회의를 개최한다고 해서 갔더니 최치원기념비와 자료진열실이 설립돼 있었고, 양저우 시내에 고려관 기념비가 잘 건립돼 있었습니다.”
-중국의 강남지역 못지않게 우리와 관련이 많은 곳이 아마도 산둥성 지역일 것입니다. 이곳에 깃든 사연이나 한국유적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산둥성에서 주목할 곳은 역시 시박사가 설치돼 무역이 활발했던 자오저우(膠州)입니다. 이곳에도 고려정관이 있었는데 제가 시당국에 거듭해서 기념비 건립의 필요성을 설득하자 흔쾌히 동의하고 2000년말에 시 자체 비용으로 기념비를 건립했습니다. 1083년 송나라 조정에서 고려 순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양경략(楊景略)을 사절로 파견했는데, 바로 이곳에서 출발했어요. 자오저우는 한국과 중국의 관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항구입니다. 자오저우와 함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지역이 의상(義湘)대사가 상륙한 곳이자 아리따운 처녀 선묘(善妙)와의 미담이 전해내려 오는 펑라이(蓬萊)입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보낸 배가 출발한 곳으로 유명한 ‘봉래’가 바로 그곳이지요.”
-선묘와의 미담이란 건 무슨 내용입니까.
“의상대사와 선묘 사이에 있었던 일종의 러브스토리입니다. 이거 아마 영화로 만들어도 괜찮을 겁니다. 의상이 중국유학길에 올라 처음 상륙한 곳이 산둥성 펑라이입니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선묘란 아가씨를 만나게 됐는데 그만 연애에 빠져버린 거예요. 그래서 하마터면 공부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살 뻔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단단히 마음먹고는 창안(長安, 오늘날의 西安)으로 떠났어요. 의상의 마음을 빼앗은 선묘란 아가씨는 추측건대 신라방에 있던 우리 동포의 후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두사람은 말이 안 통해 필담으로 감정을 나누었던 것 같아요.
창안에 도착한 의상은 교외의 종남산(終南山)으로 들어가 화엄종의 제2대 교주인 지엄대사로부터 화엄경을 배웠는데, 11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배를 타기 위해 다시 산둥반도의 펑라이로 왔는데, 이때 11년 전의 애인 선묘가 생각난 겁니다. 이 대목부터가 기막힌 사연입니다. 의상이 몰래 선묘를 찾아가보니 결혼을 안한 것은 물론 삭발한 모습으로 불상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있더라는 겁니다. 이를 목격한 의상은 마음이 흔들릴까 두려워 아무말 없이 슬며시 떠나 배를 타고 귀국했어요. 의상이 떠난 뒤에야 선묘는 꿈속에 그리던 옛 애인이 왔다 간 것을 알게 됩니다. 그 길로 선묘는 바다에 몸을 날려 자살을 합니다. 자신이 바다의 용이 되어 의상을 무사히 건너가게 해달라는 염원과 함께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선묘가 실존인물이 아닌 줄 알았어요. 그러다가 후일 사료에 의해 실존인물임이 확인됐습니다. 이 이야기는 중국의 찬녕(贊寧)이 쓴 송고승전에 나옵니다. 일본의 교토에는 선묘를 기리는 절이 있고, 교토박물관에는 선묘의 목상조각이 있습니다. 화엄종이 의상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는데 선묘 덕분이라고 해서 우러른다는 것입니다.
의상대사가 세운 영주 부석사를 가보면 지금도 선묘의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저도 부석사에 여러 차례 가봤는데 선묘와 관련된 전설적인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한 가지 소개하면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할 때 절이 들어설 자리가 명당이었는데, 산적들이 그곳을 점령하고 있어 어찌 해보지를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어요. 이때 저승의 선묘가 내려다보니 의상이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 대웅전 자리 옆에 큰 돌이 있는데, 이 돌을 하늘로 떠오르게 했다는 겁니다. 깜짝 놀란 산적들이 의상대사의 힘이 엄청난 줄 알고 달아나는 바람에 부석사를 세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가로챌 뻔했던 장보고 유적
-또 산둥성 지역에는 한중교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통일신라시대의 해상왕 장보고(張保皐)의 유적이 있지 않습니까.
“장보고는 산둥성 끄트머리에 있는 스다오(石島)를 근거지로 무역이나 해상교통을 지배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때의 상황은 일본인 승려 엔닝(円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자세히 나옵니다. 이 사람은 중국에 갈 때와 돌아올 때 모두 신라선을 타고 갔었는데, 일본에 귀국해서 이 순례행기를 썼습니다. 주일미국대사를 지낸 유명한 학자 라이샤워의 박사논문이 바로 이것을 연구한 것이에요. 이 기록이 없었다면 장보고의 활약상이라든가 당시 신라방의 사정 등등을 알 수 없었을 정도로 중요한 자료입니다. 그런데 한때 일본사람들이 엔닝을 들먹이며 장보고 유적지 복원 운운했어요. 그래서 제가 언론사에 문제제기를 해 고찰단이 파견되기도 했는데, 그뒤 불교계 등의 협조로 일이 잘 풀려 지금 가보면 법화원 등 유적지가 아주 잘 복원돼 있습니다.”
노학자의 중국이야기는 끝이 없을 만큼 술술 풀려나간다. 도대체 그 많은 역사적 일화들을 어떻게 자료도 보지 않고 소상히 설명할 수 있을까. 그만큼 우리 역사를 사랑하고 중국과의 교류사를 귀중한 유산으로 보고 있기 때문일 듯싶다. 그래서 펑라이의 고려관에 기념비 설립하는 일이 김 이사장에게는 ‘소원’이 된 것 같다. 한중간 역사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정말 우리가 알고 기념해야 할 역사적 사실이나 유적들이 중국대륙 도처에 산재해 있다는 게 실감이 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언제까지나 김 이사장 혼자 다 하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 학계에도 관심있는 분들이 더러 있지 않습니까.
“많지는 않지만 관심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당사(唐史)를 전공하는 아주대변인석(卞麟錫) 교수도 그런 분 중 하나입니다. 3년 전에 정년은퇴를 했는데 시안을 20여차례나 방문했을 정도로 열의를 갖고 있는 분이지요. 변 교수는 신라시대의 유명한 도사 김가기(金可記) (?∼859)의 행적을 조각한 암석을 발견했어요. 시안 교외 종남산 중턱의 암석에 조각돼 있던 것인데 명나라때 지진으로 떨어져나가 한동안 논에 방치돼 있다가, 현재 시안시내 박물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변 교수는 또 혜초(惠超)가 당 대종(代宗)의 청으로 기우제를 올렸던 흑수 옥녀담에 있는 암석을 발견하여 중국당국과 교섭 끝에, 흑수의 댐공사로 수몰되어 이전하는 근방의 절(仙遊寺)에 보존하도록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조계사의 도움으로 혜초기념비를 그곳에 건립하는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이밖에 학계의 김문경(金文經), 조영록(曺永祿), 최병헌(崔炳憲) 교수도 이 방면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큰 성과를 올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종남산이라면 세속적인 영달에는 관심이 없고 학문에만 뜻을 둔 사람들이 은둔했던 곳으로 유명한 산인데요. 김가기 도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중국의 종남산 오대산 등 몇 군데가 불교 혹은 도교의 성지입니다. 종남산은 우리나라 경주의 남산과 비슷해요. 김가기 도사는 원래 신라의 왕자라고 하는데 어느 왕의 자식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이 사람은 처음엔 중국에 와서 유교를 공부하고 과거에 합격했는데, 그후 도교로 돌아 도사가 됐어요. 우리나라 도사로서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김가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가기를 잘 모르지만 우리와 달리 도교의 영향이 매우 큰 중국에서는 유명한 분이에요. 김가기 선인(仙人)을 연구하는 한국김선학회에서 2년여 전에 종남산에 아주 훌륭한 기념비를 건립했습니다.”
중국의 성인이 된 김교각대사
-지금 도교의 김가기 도사에 관한 말씀을 하셨는데, 중국대륙에 산재해 있는 우리의 관련유적들 가운데는 역시 불교 고승들에 관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앞에서 얘기한 대각국사 의천 말고도 누구나 알 만한 분들만 연대순으로 꼽아보면 신라시대의 원측대사(613~696), 원효대사(617~686), 의상대사(625~702), 김교각대사(696~794), 혜초대사(704?~?)가 있고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중국 천태종의 제16대조가 된 의통대사(927~988)를 들 수 있습니다. 역사유적도시로 유명한 시안 근교의 흥교사(興敎寺)라는 절에 가보면 원측(圓測)대사의 사리탑이 현장(玄훻)대사의 사리탑과 나란히 서있습니다. 불교에 관심있는 중국인들과 얘기를 해보면 이들 대사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김교각대사의 경우 지장보살로 추앙받고 있는데, 중국사회에서 대단한 성인으로 우러르는 것을 저도 많이 보았습니다. 요즘은 김교각대사가 열반한 지우화산(九華山)에 성지순례차 관광을 가는 한국인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불교계에서 관심이 크고 많이 찾아간다고 들었습니다. 지우화산은 멀기도 하거니와 유적이 잘 단장돼 있다고 해서 가보지는 않았습니다. 이곳에는 김대사가 수도하고 99세에 입적한 절(化城寺)이 있는데요. 현재 김대사의 동상이 99m의 높이로 건립되고 있는데 2004년 중 완공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김교각대사는 우리나라보다도 중국사람들이 더 존경하고 있더군요.
중국기록에 의하면 김교각대사는 신라 왕실에서 태어났는데 키가 7척에다 용모는 험상궂어도 마음이 어질고 총명해 10명의 상대를 당할 힘이 있었다는 겁니다. 원래 지우화산은 신선이 노니는 민간신앙의 숭배지였는데, 김교각대사가 들어와 절을 짓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오늘날의 성지가 됐다고 합니다. 중국에는 4대 불교성지가 있는데, 다른 세 군데의 성지(문수보살의 성지 산시성 오대산, 보현보살의 성지인 쓰촨성 아미산, 관세음보살의 성지 저장성 보타산)가 보살이 현신했던 곳인데 비해 이 지우화산은 지장보살이 직접 와서 살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릅니다. 지우화산에 살았던 인간 지장보살이 바로 신라의 왕자였던 김교각이라는 것이지요.”
낙양성 십리밖에 묻힌 의자왕
-얼마전 신문을 보니 북망산에 있다는 의자왕의 무덤을 찾는 작업이 곧 시작될 것이라고 하던데요. 저는 백제의 의자왕이 중국에서 일생을 끝마쳤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뤄양(洛陽)엘 들렀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 역사에 너무 무지했다고 자책한 적이 있습니다. “낙양성 십리허에---”로 이어지는 노랫가락이 그대로 역사를 읊은 것이라 생각하니 왠지 묘한 감상에 젖어들기도 했습니다. 혹시 낙양성이나 그 인근의 북망산에 가보셨는지요.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망할 때 의자왕을 비롯해 1만2000여명의 백제인이 당으로 압송됐습니다. 왕자만도 88명이었다는 설도 있어요. 북망산에도 가봤는데 거기가 공동묘지예요. 의자왕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근거가 될 만한 기록이 없어 찾기가 아주 힘든 실정이에요. ‘낙양성 십리허에’ 하는 노래도 아마 의자왕과 관련있는 것으로 짐작은 됩니다만, 아무튼 묘지를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아까 말한 의천대사가 상륙한 지점을 찾는 데도 3년이 걸렸으니까요.”
-그동안 우리는 조상들의 발자취와 한중간의 역사에 대해 너무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은 대개 어떤 문헌에 많이 나와 있습니까.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서에 많이 나오는데 아직 연구가 부족한 실정입니다. 승려들에 관해서는 혜교(慧皎)의 고승전, 도선(道宣)의 속고승전, 찬녕의 송고승전 등이 대표적인 중국문헌이고, 한국측 문헌으로는 신라 김대문(金大問)의 고승전, 고려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 등에서 당시 승려들의 내왕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김대문의 고승전은 지금 소실돼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절에 가서 기록들을 뒤져보면 우리가 잘 몰랐던 여러 사실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처럼 무궁무진한 중국내 한국관련 유적의 현황을 어느 정도나 파악하고 있고 또 발굴이나 복원 혹은 기념비건립 등이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겁니다.
“이제 시작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 동안 국교가 단절돼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사실이나 유적이 많습니다. 우선 학자들이 역사책에 나오는 내용을 고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학자들이 고증하고 발굴을 하더라도 이를 복원하고 기념하기 위해서는 중국당국의 허락과 사업 자금이 필요합니다.”
중국내 한국 관련 유적들의 의미
-중국 당국이나 학계인사들은 한국관련 문화유적 복원사업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한국측에서 자금을 대면 응하는 정도인가요.
“한중관계가 밀접해짐에 따라 근래에는 중국측이 고구려나 발해문제 이외에는 매우 협조적입니다. 그것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자오저우시나 양저우시 닝보시가 타지역에 비해 훨씬 적극적입니다. 특히 양저우와 닝보는 당나라때 대단히 중요한 항구였기 때문에 우리 말고도 일본이나 페르시아 상인들이 많이 와서 거주한 일종의 국제도시였습니다. 양저우에서 황소의 난 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아랍상인도 약 8000명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마르코 폴로가 양저우에 와서 한 3년간 지방행정 고문역을 한 일도 있어 마르코 폴로 기념관도 건립돼 있습니다.”
-중국에 산재해 있는 한국관련 유적들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한국과 중국이 말로만 밀접한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대단히 밀접한 관계였다는 점을 증명해주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 조상들의 활약이 대단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비단 무역뿐 아니라 중국의 불교나 유교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또 지정학적으로 우리와 중국의 관계가 앞으로도 밀접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음을 역사를 통해 깨닫게 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역사유적 이야기 한 가지만 해도 끝이 없을 것 같다. 이쯤에서 화제를 김 이사장이 요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한중간 학술교류사업으로 돌려보자.
-김 이사장께서는 요즘 유적지 복원사업과 함께 중국에서 한국학 연구를 발전시키는 일에 정력을 쏟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일은 어떤 계기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1950년대 말 제가 하버드대에 객원교수로 가 있었습니다. 그때 절실하게 느낀 것 가운데 하나가 해외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한국인이나 한국이 제대로 존경받지 못한다는 점이었어요. 그래서 외국에서 한국학을 발전시키는 일이 시급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후 힘이 닿는 대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즘 중국내의 한국학 연구를 발전시키는 데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술교류라는 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상대국에서도 연구를 발전시켜야만 원만히 이루어지는 법이지요. 이런 학술교류를 통해 서로 상대방을 옳게 이해하는 것이 국가간 친선의 기본이 된다고 봅니다.”
-중국은 오랜 역사를 통해 한국과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나름대로 한국에 대한 연구랄까 이해의 폭이 넓고 깊을 것 같은데요. 비록 40여년 단절의 시기가 있었습니다만, 중국의 한국연구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대만에서는 이미 20여년 전에 한국학회를 조직해서 우리와 학술교류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만, 중국대륙은 수교 이전까지는 학술이나 문화교류가 전무한 상태였어요. 일제통치와 6·25전쟁 국공투쟁 등으로 전후 근 80년간 학술교류가 거의 두절된 상태였지요.
예를 들어 중국은 북한과 근 40년간이나 혈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남한은 몰라도 북한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진전됐으리라고 추측했습니다만, 막상 현장을 돌아보니 그렇지가 않아요. 중국의 각 대학을 순방해보니까 학술교류는 거의 없고 동북지방의 옌볜(延邊)대학과 창춘(長春)에 있는 동북사범대학이나 지린(吉林)대학 그리고 지린성 사회과학원에 있는 조선족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연구결과는커녕 자료조차 전무한 상황이었어요. 북한유학생은 더러 있었지만 모두 자연과학이나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그나마 한중수교 이후에는 거의 모두가 북한으로 소환되었다고 합니다. 중국학자들이 북한에 대한 연구는 물론이고 관심조차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알고 놀랐을 정도였으니까요.”
-북한과 중국의 과거 혈맹관계로 미루어 서로간에 상당한 수준의 연구가 있었을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해왔는데 예상과는 다르군요. 중국과 북한의 학술교류와 상호연구가 그처럼 저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부나 당차원에서는 교류와 연구가 활발했겠지만 대학 등 민간차원에서는 북한이 아직도 폐쇄사회여서 연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중국학자들이 김정일정권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향이 강한 것도 중국과 북한 사이의 학술교류가 저조한 이유라고 봅니다.”
-중국에서의 한국연구를 진흥시키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입니까.
“중국사람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한국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관련연구소를 설립하는 게 지름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명문대학에 한국연구소를 설립하는 일부터 시작했는데, 이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어요. 우선 대학내에 한국연구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진력할 교수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동시에 대학당국이나 중국정부에서 동의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또 연구사업을 추진할 재원이 필요하고 말입니다. 특히 중국사정으로 보아 중국내에서 재원을 얻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제가 한국내에서 모금하여 지원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적지 않은 재원이 필요했을텐테 어떻게 마련했는지 궁금합니다.
“여러 군데서 저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대우재단이나 진로문화재단 국제교류재단 학술진흥재단 등에서 지원을 해주었고, 또 사회과학원이나 정부도 지원했습니다.”
-중국 대학의 한국연구는 주로 어떤 분야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대학별로 조금씩 중점연구분야가 다릅니다. 베이징대 저장대 산둥대 난징대는 주로 한국의 역사 문학 철학 등 전통문화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상하이에 있는 푸단(復旦)대는 주로 한국독립운동사, 랴오닝(遼寧)대 둥난(東南)대는 한국경제, 베이징어언문화대학은 한국어, 양저우대는 최치원 연구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각 대학에서 외교와 안보도 연구하고 있지요.”
-학술교류를 통해 상대방을 옳게 이해하는 것이 국가간의 친선에 매우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이와 관련해 요즘 역사학계에서는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중국측의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논란이 많습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학문에는 실사구시라는 게 있습니다. 증거를 가지고 얘기해야지요. 증거라는 게 문서뿐 아니라 유물도 있잖아요. 고구려는 말할 것도 없고 발해시대 유적도 발굴해보면 거기서 나오는 게 다 우리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 문제는 실사구시의 원칙을 지키면서 양국간 이견을 일치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면 시간이 걸릴 것으로 봅니다. 유물발굴작업이 돈이 많이 들어 학자 개인적으로 하기는 어려우므로 정부지원이 필요합니다. 우선은 중국의 한국학 연구를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하고 우리도 중국연구와 고대사연구를 본격적으로 해서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재 중국에 김 이사장의 협력으로 한국연구소가 설치된 대학은 모두 8개로 베이징대를 비롯해 한결같이 최고의 명문대학들이다. 지금까지 약 200권에 달하는 한국관련 연구서적이 간행됐고 수시로 학술회의가 열려 중국내 한국학연구가 본궤도에 올랐다는 게 학계의 평가다. 이런 일들이 가능했던 데에는 김 이사장의 중국인맥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의 한국통들과의 인연
-말하자면 중국의 한국통들을 총동원해 연구소를 만들고 한국학 연구를 독려하신 셈인데요. 처음에 어떻게 중국학자들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까.
“1945년 해방이 된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이 귀국할 때 저는 그대로 중국에 남아 있었어요. 공부를 더 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남경 중앙대학에서 중국사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그때 동방어문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일이 있습니다. 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중국은 장차 독립한국과의 교류를 담당한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국립동방어문전문학교를 설립하고 우리 임시정부에 그 교수요원 파견을 요청했는데 제가 추천을 받아 가게 된 것이지요.
현재 베이징대학의 한국연구소 소장인 양퉁팡(楊通方) 교수와 베이징어언문화대학의 한국연구소 소장인 쉬웨이한(許維翰) 교수가 바로 나의 옛 제자입니다. 양 교수는 국립동방어문전문학교의 1기 졸업생이고, 쉬 교수는 양 교수의 2년 후배입니다. 50여년 전에 가르친 제자들이 오늘날 한중 학술교류에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김 이사장이 중국의 초창기 한국통을 길러내는 역할을 한 것을 보면 그가 요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한중 학술교류사업은 이미 반세기 전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야말로 필생의 과업인 셈이다.
-두분 교수는 저도 만나봤습니다만, 한국어도 능통하고 한국에 대한 애정이 보통이 아니더군요. 이 분들과 김 이사장의 남다른 인연이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만, 이 자리를 빌려 소개해주시지요.
“국립동방어문전문학교는 나중에 베이징대학과 합병된 학교입니다만, 제가 가르친 이 학교 1기 졸업생 중 4명을 1948년에 한국으로 유학시킨 일이 있습니다. 국내 지인들에게 협조를 부탁하고 해서 서울대에 보낸 것이지요. 중국학자들에 의하면 양 교수는 송대 이후 100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서 유학한 중국인이라고 하더군요. 지난 2000년에 고려대에서 양 교수에게 명예문학박사학위를 수여했는데, 이것도 중국학자로 한국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시초라는 겁니다. 양 교수는 서울대에서 공부하던 중 6·25가 발발하면서 귀국하는 바람에 소식이 끊겼는데,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전환하면서 1986년 9월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극적으로 해후 했습니다. 그 후 양 교수는 저의 중국내 활동에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중국내 한국학연구와 관련된 김 이사장의 역할은 그가 베이징대를 비롯해 모두 8개 대학에서 명예교수로 추대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물론 직접 강의하는 기회는 드물겠지만 아무튼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많은 중국대학의 교수가 된 셈이다. 힌중 학술교류에 끼친 공으로 김 이사장은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지난 2000년에 중국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중국 강남 발음과 유사한 우리 한자음
-평소 궁금하던 것을 좀 묻겠습니다. 중국어를 배우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처음엔 한자를 좀 아니까 쉬울 줄 알고 덤벼들었는데, 조금만 해보면 그게 아니더라는 거지요. 무엇보다도 중국어의 발음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한자의 독음과 다른 데다가 성조까지 있어서 매우 애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자의 발음이 서로 달라진 것에는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일까요.
“중국어는 한자뿐 아니라 4성이라는 성조 때문에 외국인이 배우기가 어렵습니다. 중국은 또 땅이 넓기 때문에 지방마다 사투리가 심해 외국인은 더 배우기가 어렵지요. 상하이어나 광둥어가 통역 없이는 알아듣기 힘든 게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한국에서 지금 사용하는 한자음은 오음(吳音)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나라가 지금의 장쑤성 저장성 일대였으니까 이 지역의 발음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지요.”
-중국 강남지역의 발음과 우리 한자음은 실례를 들어보면 어떤 유사점이 있겠습니까.
“닝보지역에서는 쉐성(學生)을 ‘학상’으로, 마치 우리의 사투리처럼 발음합니다. 또 항저우에서는 한궈(韓國)를‘안국’으로 발음하는데, 성조까지 감안해 들으면 꼭 한국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대만에 가면 저장성과 붙어 있는 푸젠성 출신들이 많은데, 이 사람들은 궈지환뎬(國際飯店)을 ‘국제본덴’이라고 발음합니다. 우리 발음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아까 해상실크로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만, 한반도와 중국과의 해로교통이 활발했던 것과도 관련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봅니다. 왕래가 많으면 말도 자연히 퍼지는 것이니까 말이죠. 오늘날 베이징 지역의 중국어가 표준어가 된 것은 북방에서 중국을 정치적으로 통일한 영향을 받은 것이고, 우리가 쓰는 한자음은 오히려 선사시대부터 내왕이 활발했던 강남지방의 발음과 유사하다는 것이지요. 발음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중국 강남지역의 문화적 연관성이 최근 속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쌀만 해도 과거엔 산둥반도에서 들어온 것으로 여겼는데 요즘은 강남에서 5천년 혹은 7천년 전의 쌀이 출토되고 있어 이 지역에서 전해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어요. 또 지석묘도 북쪽에서만 온 줄 알았으나 지금은 중국 남쪽에서도 전해졌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중국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지금까지는 화북지역에 치우친 감이 있는데 앞으로는 강남지역에 좀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한국인을 상대로 대외호감도를 조사한 것을 보면 중국에 대한 호감도가 무척 높게 나왔습니다. 이와 관련해 일부에서는 중국에 대한 근거없는 혹은 막연한 우호감을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도 펴고 있습니다. 자칫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중국에 문화적으로 동화되거나 종속화돼 민족의 자주적인 입지가 약해질 수도 있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집니다만, 이런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조선시대에 모화사상이 심했다고 비판합니다만, 그때는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선진국이었으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에 대한 태도와 비슷한 것이지요. 그런데 청일전쟁 후에 일본이 중국을 멸시하니까 우리나라 사람들도 덩달아 중국을 깔보았거든요. 이런 건 시정하고 객관적으로 있는 대로 보아야겠지요. 최근에 와서 중국이 크게 발전하고 있으니까 이제 중국에 대해 일종의 공포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국제관계라는 게 늘 변화합니다.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자주적인 국가로 대접받고 존경받으려면 국력이 강하고 문화가 발전해야만 됩니다. 국제관계에서 위기는 항상 외부보다는 내부에서 비롯되는 게 철칙입니다. 결국 우리 내부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중국인은 한국이나 한국인, 한국문화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겉으로는 한국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중국인이 많다지만 속으로는 대국의식을 갖고 한국이나 한국인을 우습게 보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한국사람이 민족정신이 강하고 재능 있고 근면하다는 점 등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고 해서 한국의 경제발전상에 감탄하면서 그 노하우를 배우려고 열심이에요. 이른바 한류(韓流) 현상도 이 같은 긍정적 평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한국인을 우습게 보지 않느냐는 것은 글쎄요, 사람마다 다른 게 아닙니까. 우리나라 사람 중에 아직도 중국인을 깔보는 사람이 있잖아요. 한국학이나 중국학이 발전함에 따라 서로 상대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갖게 되리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중국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미래의 중국통들에게 도움될 말씀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내가 늘 강조하는 게 있어요. 외국을 연구할 때 우선 그 나라 언어에 능통해야 하고 그 나라에서 생활해본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분야를 연구하든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또 하나 강조할 것은 그 나라 사람을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역사의 주인공은 사람이거든요. 중국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사람은 아마 개인적으로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요즘 중국유학생이 급속도로 늘고 있는데, 나는 이런 현상을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물론 남이 가니까 덩달아 따라가는 식의 유학은 곤란하겠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이 가서 중국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변신을 거듭중인 중국공산당은 과연 13억 인민의 대변자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한반도 통일에 대한 중국의 속내는?
정종욱(鄭鍾旭) 전 주중대사(64· 아주대 교수)는 김영삼 정권 때인 1996년 1월부터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년 4월까지 대사직을 역임했다. 중국과 수교 이후 지금까지 중국대사는 현재의 김하중 대사까지 합쳐 모두 6명. 이 중 정종욱 전 대사는 중국정치학을 전공한 교수출신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말하자면 이론과 현장경험을 함께 갖춘 경우다. 이번 호의 중국탐험 주제를 중국정치로 잡고 보니 자연스럽게 정 전 대사가 꼽힌 것도 이런 경력 때문이다.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은 흔히 한국보다 더 자본주의적이라고 하지만 엄연한 사회주의국가다. 따라서 우리 입장에서는 중국 체제의 특성과 정치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중국정치의 현주소와 역사적인 배경,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부의 은밀한 모습들을 최고의 중국정치 전문가 정종욱 전 대사와 함께 파헤쳐본다. 중국정치 탐험은 역시 13억 중국인민의 새 지도자로 떠오른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권좌에 앉게 된 안팎의 사정들로부터 시작해야 할 듯하다.
-2002년 11월 제16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직후 열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가 선출된 데 이어 2003년 봄 국가주석에 취임함으로써 후진타오 체제가 공식출범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후진타오가 권력을 완전히 이양받았느냐 또는 장악했느냐 여부를 두고 논란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전임 장쩌민(江澤民)측과의 권력투쟁설도 언론에 많이 보도되지 않았습니까. 예를 들어서 후진타오는 오너가 아닌 CEO다, 장쩌민이 상왕노릇을 하고 있다, 사스 파동을 계기로 후진타오가 장쩌민에 승리했다 등등 각종 설들이 나왔습니다. 현재 중국 최고지도부의 내부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후진타오 체제의 등장은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정권교체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경우입니다만 권력구조 내부는 다소 복잡합니다. 후진타오가 국가주석직과 당 총서기직을 승계하여 국가권력과 당권을 장악하긴 했지만 장쩌민이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군권을 계속 쥐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권력이양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셈입니다. 뿐만 아니라 최고지도부인 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9명 중 5명 정도가 장 주석과 가까운 이른바 상하이방 인물들이어서 후진타오의 권력 장악이 불완전하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지요.
권력의 공유시대 개막
그러나 오래 전부터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후진타오가 실제 당과 국가의 최고지도자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권력승계가 제도화되는 단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 시대가 인치의 시대였다면 후진타오 시대의 개막은 법치의 시대가 열린다는 신호라 할 수 있겠지요. 중국공산당이 정부를 수립한 1949년부터 따지면 마오쩌둥이 27년 통치했고 덩샤오핑이 18년 통치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절대권력자에 의한 인치의 시대가 있었기 때문에 법치로 넘어가는 과정이 쉽지는 않습니다. 과정이 점진적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후(胡)가 이끄는 새로운 지도층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시각은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진타오가 후계자로 지목된 1992년부터 실제 권력승계가 이루어진 2002년까지 약 10년의 기간동안 장쩌민이 후를 제거하려 했다면 벌써 했을 겁니다. 장쩌민이 그럴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지금의 중국 권력구도는 대립과 갈등의 관계라기보다 협력과 공조의 관계라고 봅니다. 서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권력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지요.”
-지금의 정치구조가 권력의 공유를 전제로 하는 집단지도제라는 얘기 같은데요, 중국공산당의 과거 권력투쟁사를 상기하면 과연 권력의 공유가 실질적으로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권력의 공유는 중국에서 이제 불가피한 추세입니다. 개혁 개방이 진행되면서 국가와 사회의 관계가 복잡해졌고 다원화되었습니다. 국가가 사회를 압도하거나 한 개인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권력의 중심이 개인으로부터 집단으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쩌민이 군권을 계속 붙들고 있는 게 권력의 속성 때문이라는 주장에 전혀 설득력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지금의 상황에서 후진타오에게 권력의 공유는 축복일 수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후진타오는 군대 경험이 없습니다. 군에 대한 장악력도 아직은 불충분합니다. 그래서 군부에 대한 후진타오의 기반이 강화되기까지는 장쩌민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정치안정을 위해서나 권력의 제도화를 위해서나 나쁠 게 없을 수도 있습니다. 덩샤오핑도 장쩌민이 군을 확실히 장악할 때까지 그랬지요.”
-중국의 권력분산 추세를 말씀하셨습니다만, 권력이양 과정도 관심거리입니다. 세계 최대의 인구를 다스리는 중국의 권력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등장하는 것인지 사실 신비로운 부분이 많습니다. 실제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최고지도자가 등장하게 되는 겁니까?
“아직까진 중국에서 최고지도자의 등장과정이 명확하게 밝혀진 게 없습니다. 과거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 시대에는 최고권력자가 지명하는 식이었죠. 그러나 이런 방식이 오늘날의 중국에서 적용되기는 어렵습니다. 제도상으로는 5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당대회에 참석한 2000여명의 대표들이 중앙위원을 뽑습니다. 2002년 11월에 열렸던 16차 당대회에서는 356명의 중앙위원(정위원 198명과 후보위원 158명)이 뽑혔습니다. 다시 이 중앙위원들이 당총서기를 포함하여 25명의 정치국원을 선출하고 당 중앙서기처 등 그밖의 당 지도부를 구성합니다. 제도적으로 당 중앙위원들의 모임에서 최고지도자가 선출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중앙위원들이 백지상태에서 최고지도자를 뽑는 것은 아닙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과거 마오쩌둥 시대에는 마오가 지명하는 형태를 취했고, 덩샤오핑 때는 덩의 주도하에 천윈(陳雲)이라든지 리셴녠(李先念) 혹은 왕전(王震) 같은 원로들이 협의해서 지명하는 식이었거든요. 장쩌민의 경우를 보면 1989년에 톈안먼(天安門) 사건이 일어나면서 자오쯔양(趙紫陽) 당시 총서기가 갑자기 물러나게 되니까 덩이 당 8대 원로들과 상의한 후 상하이시 당서기로 있던 그를 베이징으로 불러올려서 후임 자리를 맡겼습니다.
후진타오가 정확히 언제 후계자로 지명되었는지는 공식적으로 발표된 게 없지만 대개 1992년이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후가 이 해에 열린 14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후진타오는 공식적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후계자로서 10년 이상 수련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죠. 이 수련과정은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키우고 복잡한 업무를 익히는 기간인 동시에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시험받는 일종의 테스트 기간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방식이 상당 기간 유지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후진타오의 뒤를 이을 주자가 아직은 확실하게 부각되지 않았습니다만 차차 나타나겠죠. 선두주자는 현재의 정치국 상무위원 중에서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후진타오를 제외한 8명의 상무위원 중에서 한 명이 집단지도부의 합의를 통해 부각되고 내정된 다음 다시 상당 기간 자질을 검증받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막후의 숨가쁜 조율과정
-결국 내용적으로는 당지도부 실력자들이나 원로들의 합의로 후계자를 지목하고 형식적으로는 중앙위원들이 선출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중앙위원회에서 최고지도자를 뽑는 어떤 투표절차가 있는 것입니까.
“중국에서 최고지도층이라 하면 넓게는 당 중앙위원이 있고 좁게는 정치국원과 정치국 상무위원이 있습니다만 이들의 선출방식은 각각 다릅니다. 중앙위원은 당 대표들이 선출하고 정치국원과 정치국 상무위원은 중앙위원들이 뽑습니다. 먼저 중앙위원의 선출은 차액(差額)선거라는 특이한 방식을 택합니다. 6600만 당원들이 뽑은 2000여명의 당 대표들이 모여서 중앙위원을 선출하는데, 과거에는 미리 상부에서 제시한 명단을 놓고 가부 투표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는 정원보다 5% 내지 10% 많은 후보 명단을 당 지도부가 제시하면 대표들이 그 중에서 정원만큼의 인원을 투표로 선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제한적이지만 경선의 요인이 생겨난 거지요. 그러나 정치국원이나 상무위원은 중앙위원들이 투표로 뽑지만 차액선거는 아닙니다. 당의 최고지도부가 미리 정원만큼의 후보명단을 작성하면 이를 중앙위원들이 토의한 후 투표라는 형식을 통해 결정합니다. 실상 찬반투표인 셈이지요. 물론 지금까지 중앙위원들이 최고지도부가 작성한 후보명단을 부결시킨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중국식 민주주의라고나 할까요.”
-그런 과정을 거쳐 최고지도부와 최고권력자가 탄생하기까지는 역시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막후에서 조율이 밀도있게 진행된다고 볼 수 있겠군요.
“물론이지요. 지난 16차 대회의 경우를 보면 당 대회가 열리기 2, 3년 전부터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서 새 지도부의 명단을 작성했습니다. 이 위원회의 책임자가 후진타오였고 부책임자는 장쩌민의 오른팔로 알려진 쩡칭훙(曾慶紅)이었습니다. 절묘한 배합이지요. 이 두 사람이 당 원로들의 의견을 참고하고 당 조직부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후보명단을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치열한 막후교섭과 숨막히는 힘겨루기가 있었다는 짐작들이 많았습니다.
정치국 상무위원 선출을 예로 들면 발표가 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리루이환(李瑞環) 정협주석이 유임될 것이라는 전망이 강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그가 탈락하고 대신 리창춘(李長春)과 우관정(吳官正)이 뽑혔습니다. 부정부패 케이스로 탈락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자칭린(賈慶林)이 선출되었고 생각지도 않았던 뤄간(羅幹)이 들어갔습니다. 자칭린은 장쩌민 사람이고 뤄간은 리펑(李鵬)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물론 밖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지만 외부에서는 알 수 없는 막후 조율이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요.
다른 얘기입니다만 중국에서 오랫동안 후계자의 운명은 비극 그 자체였습니다. 후계자로 지명된 사람이나 후계자가 될 것으로 모두가 믿었던 인물이 권력승계를 못하고 숙청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류사오치(劉少奇)가 대표적인 케이스고, 린뱌오(林彪)가 그랬고 덩샤오핑도 그랬죠. 화궈펑(華國鋒)은 마오쩌둥 사후에 정상에 올랐지만 얼마 못 갔죠. 그리고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趙紫陽)은 일단 권좌에 올랐지만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하야하거나 사퇴를 강요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후계자의 선출과정이 공개되기 힘들었습니다.
이런 과거의 역사에 비하면 지금은 상당히 달라졌습니다. 후진타오가 장쩌민의 후계자라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습니다. 비록 서구적인 의미의 제도화는 아니지만 후진타오의 권력승계과정을 통해 하나의 전통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도 덩샤오핑의 업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후진타오의 대중적 인기 배경
-마오쩌둥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과거에는 권력을 장악하는 데 군부의 지지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만, 장쩌민이 양상쿤(楊尙昆)과 양바이빙(楊白?) 이복형제의 소위 양가군(楊家軍)을 제거하고 권력을 굳힌 이후에는 군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든 반면 대중적 인기나 지지가 상대적으로 중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대중적인 이미지가 좋은 후진타오 체제가 앞으로 강력한 추진력을 가지고 중국을 이끌어나갈 것으로 보이는데요. 후진타오의 어떤 점이 중국인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게 된 것입니까.
“말씀하신 대로 군이 권력투쟁에 개입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아마 권력승계과정에서 비토권을 행사할 정도만 남아 있지 않나 싶습니다. 후진타오의 이미지가 좋게 형성된 것은 우선 청렴하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와 관련된 부정부패라든지 염문이라든지 주변의 잡음 같은 게 거의 없습니다. 칭화(淸華)대학의 클라스메이트였던 부인이나 자식과 관련해서도 전혀 잡음이 없습니다.
주변의 친인척도 마찬가지입니다. 후진타오의 고향이 안후이(安徽)성 지시(積溪)현인데, 그곳에 동생과 가까운 친척들이 모두 옛날 모습 그대로 가난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후는 지난 10여년 동안 고향을 한번도 찾지 않았다는 것 아닙니까. 또한 업무파악 능력이나 추진력이 뛰어나고 일에 대한 집념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저도 몇 번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만 전혀 빈틈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만하거나 차가운 사람도 아닙니다. 겸손하고 따뜻하다는 인상을 주면서도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참 잘생겼다는 인상이 들 정도로 외모도 준수합니다.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이나 장쩌민이 호랑이라면 후진타오는 준마라고나 할까요.”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후진타오 체제의 진면목을 파헤쳐볼 차례다. 우리로 치면 대통령에다가 집권당 대표를 겸하고 있는 후진타오와 그를 둘러싼 지도부, 그리고 앞으로 부상할 차세대 리더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은 앞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것인지….
-흔히 후진타오 체제를 제4세대라고 부르는데요. 중국 권력층의 세대구분은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까. 또 제4세대와 그 전 세대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중국 권력층의 세대 개념은 덩샤오핑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평화적인 지도층 교체를 실현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자의적인 측면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를테면 덩샤오핑 자신은 객관적으로 볼 때는 1세대인데 본인은 2세대라고 주장하거든요. 애매한 점이 있기는 합니다만, 1세대는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창당세대 내지는 장정(長征)세대입니다. 1921년에 중국공산당이 창당되고 34년에서 35년 사이에 대장정이 있었는데, 그때 참여했던 사람들이 1세대인 셈이지요. 주더(朱德)나 저우언라이(周恩來)나 류사오치 같은 인물이 모두 1세대에 속합니다. 2세대는 1937년에 일본이 중국본토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항일전쟁 때 당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자오쯔양, 후야오방이 여기에 속합니다. 옌안(延安)세대라고도 합니다. 제3세대는 장쩌민처럼 1945년 일본이 항복한 후 1949년까지 국민당과 내전을 벌이던 시기에 가입한 그룹으로 내전세대라고도 부릅니다. 후진타오의 제4세대는 1940년대 전후에 태어나서 1949년 공산당 정부수립 이후 본격적으로 교육을 받고 경력을 쌓기 시작한, 이를테면 해방후 세대를 말합니다.
제4세대 지도부의 특성
이들 제4세대 지도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혁명 경험이 없다는 겁니다. 이들은 이전 세대와는 달리 창당하고 항일전쟁을 하고 내전에 참가한 경험이 없습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혁명적 열정이나 끈끈한 애착이 없다고 볼 수 있겠지요. 또 이들은 거의 전부가 문화혁명 때 심한 정치적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문화혁명에 대해 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덩샤오핑이 본격적으로 개혁개방 정책을 펴면서 당의 중요한 지도자 자리에 올랐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반(反)문혁, 친(親)개혁개방이라는 특징을 공유하면서 중국의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시장경제의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탈이념적 민족주의자이기도 합니다.”
-후진타오 체제의 또 하나의 특징이 정치국 상무위원 9명 모두가 이공계통을 전공한 기술관료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향후 중국의 진로를 예측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들 기술관료 출신 지도자들이 일찌감치 발탁돼 훈련과 교육을 거쳐 등장한 준비된 지도자라는 점입니다. 후진타오만 해도 40대 초반에 중국의 미래 국가지도자로 발탁돼 상당기간 수련과정을 거치지 않았습니까. 중국 지도자의 발탁과 훈련과정은 어떤 식으로 이뤄집니까.
“내부적으로 어떤 발탁절차나 훈련과정이 있는지는 자신있게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만 일단 당에는 조직부가 있지 않습니까. 간부를 양성하고 지도자를 선발하는 그런 일차적인 임무를 조직부가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원이 된 사람 가운데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 눈에 띄면 조직적인 관리를 시작합니다. 소련의 경우에는 노만클라투라(nomanclatura)라고 해서 여기에 들어가게 되면 별도의 관리를 받았었지요. 이들은 보직이라든지 그밖에 여러 선발과정에서 특별관리대상이 됐었는데, 중국도 비슷합니다. 당 조직부에서 예비지도자로 떠오른 사람들에 대해 초기부터 경력을 관리하고 이들 가운데 중앙위원을 뽑고 또 중앙위원들 중에서 정치국원이, 그리고 궁극적으로 정치국 상무위원이 뽑히는 그런 단계적인 과정이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이 자동적인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엄격한 심사와 경쟁을 거칩니다.”
-그런 예비지도자를 양성하는 전통이 있기 때문에 후진타오 체제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출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또 중국의 정치를 예측 가능하게 하는 그런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점에서 후진타오 체제의 등장과 함께 벌써부터 10년 후의 차세대 리더들이 부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벌써 다음 10년을 대비하는 계획들이 구체화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그 다음 10년, 20년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10년 후 4세대가 물러나면 5세대가 권력의 정상에 등장할 겁니다. 지금 나이로 50세 전후인 이들은 벌써 장관급의 책임 있는 자리에 올라 있습니다. 지방에서는 당 서기나 성장(省長)이 되어 있고 중앙에서는 부장(장관)이 됐습니다.
10년마다 정권교체 제도화
5세대의 대표주자로는 허난(河南)성 서기 리커창(李克强), 저장(浙江)성 서기 시진핑(習近平), 랴오닝(遼寧)성 성장 보시라이(薄熙來) 등이 있습니다. 이들 중 몇 명은 2007년 1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은 물론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고 다음 5년 후에는 정상에 오를 것입니다. 6세대와 7세대도 이미 올라오고 있습니다. 선발 68세대, 양성 79세대라는 말이 나오고 있을 정도입니다. 68세대는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한, 지금 40대 전후의 젊은 세대인데 이들이 20년 뒤의 차차기를 대비해서 지금 선발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79세대는 70년대에 태어나서 90년대에 대학을 졸업한 30대 전후 세대로서, 앞으로 30년 후 최고지도자의 반열에 나서게 될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지금부터 양성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지도부 교체가 어느 정도 제도화돼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총서기라든가 국가주석의 임기가 5년으로 한 차례 연임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이게 헌법에 규정돼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도부가 대과 없이 임무를 수행할 경우 연임하면 10년마다 새 정권이 들어서도록 제도화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헌법에 규정된 것은 아닙니다만 중국의 최고지도자 교체는 대개 10년을 주기로 이루어집니다. 1997년의 15차 당대회 때 이런 관행이 합의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관행에 따라서 당과 정부의 영도들은 3회 연임이 금지되고 나이가 70이 넘어도 안 됩니다. 현재 70이 넘은 장쩌민이 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맡고 있는 것은 이 규정에 저촉되지만 군사위 주석은 예외로 하고 있습니다. 당 중앙의 정치국 상무위원들도 이런 규정을 적용받으니까 자기가 안 나가려고 해도 70이 되면 일선에서 물러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국 지도층의 교체는 10년을 주기로 이루어지도록 돼 있고, 그 중간에 5년마다 한번씩 당대회가 열리니까 일종의 중간점검을 통해 작은 조정을 하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20년, 30년이라면 먼 훗날의 얘기이기 때문에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을 수 있지만 어쨌든 10년을 주기로 세대간에 권력을 교체하는 관행은 이제 하나의 정치적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는 아니지만 세대간에 이루어지는 중국의 지도부 교체는 특기할 만한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중국사회에서도 인맥과 파벌의 위력은 정평이 나 있다. 중국에서 사업하려면 관시(關係)가 중요하다는 것은 이제 한국인에게도 상식이 됐을 정도다. 오래 전부터 중국정치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 중의 하나도 바로 이 파벌 문제다. 장쩌민 주석 시절에는 상하이방이 뜬다는 말이 나돌았고, 요즘은 또 궁칭방(共靑幇)이니 칭화방(淸華幇)이니 하는 말들이 떠돌고 있다.
-중국정치에 파벌이란 개념이 부각된 연원은 어떤 것입니까.
“파벌의 기원은 역시 1949년 중국공산당 정부수립 이전의 항일전쟁시기(1937~45)와 국민당과의 내전시기(1946~49)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때 공산당의 각 군대가 4개의 야전군으로 나뉘어 국민당이나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 속에서 서로 고립되고 격리되어 있었습니다. 바다에 떠 있는 4개의 외딴 섬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니까 한 야전군에 배속을 받게 되면 다른 야전군으로 전근을 간다거나 왔다갔다 하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지요. 그래서 같은 야전군에서 오랫동안 함께 근무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고 그게 1949년 이후 중국정치의 인맥을 형성하는 근거가 됐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덩샤오핑은 제2야전군에, 린뱌오는 제4야전군에 오래 있었습니다. 그래서 린뱌오가 득세할 때는 제4야전군 인맥들이 따라서 출세하고, 또 제2야전군 출신들은 덩샤오핑과 정치적 부침을 함께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서방학자들이 파벌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그걸 통해서 중국정치를 보는 게 한때 유행했습니다.”
-그런 인맥과 파벌의 정치행태 역시 지금은 상당히 바뀌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럼에도 출신대학이나 출신지역에 따라 인맥형성이 활발하다는 말도 들립니다.
“정치라는 게 조직이 하는 것이고, 파벌도 하나의 조직이라고 본다면 그런 의미에서 과거와 형태를 달리할 뿐 파벌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군 근무경력보다는 방금 말씀하신 출신지나 성장지역, 출신학교나 사회생활 경력 등에서 경험을 공유했다는 공통점이 조직을 만드는 근거가 될 수 있죠. 상하이방과 같은 지방(地幇)이 있고 칭화방 같은 학방(學幇)이 있는가 하면 단방(團幇)이나 직방(職幇)도 있습니다.
단방은 꼬마 공산당이라고 할 수 있는 공산주의청년단 인맥을 말하는데 후진타오나 왕자오궈(王兆國), 후야오방 등이 대표적 인물로 꼽힙니다. 직방은 직장의 근무인연을 말합니다. 그것도 하나의 조직적인 권력기반이 될 수 있는 거죠. 이를테면 장쩌민이 1950년대 초 소련유학에서 돌아온 후 처음에는 창춘(長春)에 있는 창춘제일자동차공장에서 근무했고, 그 뒤에는 베이징으로 와서 제1기계공업부와 전자공업부에서 근무를 하거든요. 이런 인연으로 장쩌민이 당총서기로서 권력의 정상에 있었을 때 자동차방이니 기계방이니 전자방이니 하는 말들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보면 상당히 무차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파벌이라는 개념은 중국정치에서 무시할 수 없는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다만 흔히 상하이방 얘기를 많이 하는데 상하이방이 과연 그렇게 응집력이 있느냐에 대해서 저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상하이방에 속하면서 궁칭방에 속할 수도 있고 칭화방에 속할 수도 있거든요. 상하이 출신으로 칭화대학 나와서 궁칭단에서 일하면 셋 다에 속하니까요. 서로 배타적이 아니라 중복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같은 상하이방이라 하더라도 맡고 있는 업무에 따라 입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하이방이기 때문에 언제나 일사불란한 행동을 할 것으로 보는 시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의 영향력
정종욱 전 대사는 중국정치 가운데서도 마오쩌둥 사상에 정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예일대 박사학위 논문 ‘대약진운동의 등장과 마오쩌둥 사상’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중국정치의 이데올로기 문제에 관심이 많다. ‘주의’와 ‘사상’ ‘이론’이 뒤엉켜 있는 오늘날의 중국 정치현실에서 이데올로기의 현주소는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중국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사상, 덩샤오핑이론 등이 정치행위의 기준이랄까 원리원칙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장쩌민대에 와서는 3개 대표론이 있었고요. 이런 이데올로기가 정치과정이나 권력투쟁에서 아직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까.
“상징적 측면에선 아직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다고 봅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라는 게 원래 이데올로기의 차별성을 근거로 출발했습니다. 이데올로기라는 게 세계관이나 역사관 같은 추상적 이론이지만 동시에 당의 지도노선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느 이데올로기나 사상, 그와 관련된 사람의 이름이 당장(黨章)에 들어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1956년 8월 중국공산당 8차 당대회가 열렸을 때 당장이 수정돼 당의 지도이념에서 마오쩌둥 사상이 빠졌습니다.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난했기 때문이지요. 마오의 권력장악력은 그때부터 내부적으로 위축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중국공산당의 당장을 보면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사상, 덩샤오핑이론 그리고 3개 대표, 이 4가지를 지도이념으로 삼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3개 대표는 3개 대표론이라 해야 표현이 맞는데, 무언지 미완성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실제 그렇지요. 미완성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게 바로 권력층 내부의 복잡한 역학구도를 대변하는 거지요. 처음에는 장쩌민의 3개 대표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려 했는데 그렇게 되면 장쩌민이 덩샤오핑과 동격이 되기 때문에 내부에서 반대가 일어 애매한 채로 3개 대표라고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아무튼 당장에 특정인의 이데올로기가 들어가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지위가 상당히 강화되고 보장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장쩌민이 3개 대표론을 당장에 삽입시키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고 또 내부에서 상당한 반발이 있었던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장쩌민으로서는 자신의 이론이 당장에 명문화될 경우 권력을 잡고 있든 아니든 간에 공산당 역사에서 지위가 엄청 강화되기 때문에 넣으려 애를 썼던 것이지요. 그러나 요즘 중국 신문들을 보면 ‘장쩌민의 3개 대표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금년 3월에 전인대가 열리면 여기서 국가 헌법을 고쳐 3개 대표론을 국가 지도이념으로 삽입하기로 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결정했다고 합니다. 결과는 두고 보아야겠지만 그만큼 역사에서 장쩌민의 몸 만들기 작업이 아직도 진행중인 것 같습니다.”
-이데올로기도 자세히 구분해보면 주의(ism)와 사상 이론 혹은 특정한 명칭이 붙지 않는 정치적 논리 같은 것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실제 중국정치에서 어떤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차이가 있죠. 마오쩌둥사상은 마오쩌둥주의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덩샤오핑이론을 덩샤오핑사상이라고 하지 않거든요. 중국에서는 이 점을 굉장히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일반적으로 ‘주의’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이론을 의미하고, ‘사상’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이론을 중국에 적용시킨, 지역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구체적이고 제한된 의미로 사용됩니다. 또 ‘이론’이라는 것은 흔히 주의나 사상의 하위개념이라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마오쩌둥사상이 덩샤오핑이론의 상위개념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다만 마오쩌둥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지금의 중국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은 너무나 명확하지 않습니까?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무시당하고 마오쩌둥사상은 부정당하는 게 오늘의 중국입니다. 지금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덩샤오핑이론이에요. 소위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든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가 바로 덩샤오핑이론 아닙니까. 장쩌민의 3개 대표라는 것은 이론보다는 조금 더 제한된 의미를 갖는 거지만 실제로는 가장 중요합니다. 이는 사상이나 이론의 현실적 적응이나 보편적 이데올로기의 수용이 아니라 새로운 변혁이라고 보아야 할 겁니다. 다시 말해 주의와 사상과 이론이 상징적인 의미에서 위계성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적 영향력의 측면에서는 거꾸로 올라가지 않나 싶어요.”
-3개 대표란 선진생산력, 선진문화, 다수 인민대중의 이익 이 세 가지를 당이 대표한다는 이야기인데요. 선진생산력은 기업가를, 선진문화는 지식인을 의미하고, 다수 인민대중의 이익이라는 건 결국 노동자나 농민, 사기업가 소시민들의 이익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결국 중국공산당이 노동자와 농민뿐만 아니라 지식인이나 기업가까지 다 끌어안고 그 사람들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것으로 새롭게 정리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기업가를 착취계급으로 보지 않고 당이 대표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과거의 공산주의 논리로 볼 때 이만저만한 모순이 아닙니다. 이쯤 되면 이데올로기라는 게 중국 정치현실에서 유명무실해진 것 아닐까요.
‘3개 대표’의 등장 배경
“바로 그 점이 지금의 중국정치를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핵심 포인트죠. 지금 중국은 경제 부분에서는 아마 우리나라보다 더 자본주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정도로 이데올로기가 유명무실해졌습니다. 비국유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국유 부분을 능가하면서 국유기업이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철밥통 이론이 깨져나가면서 실업자가 양산되고 도산기업이 늘고 있습니다. 노동자와 농민들이 일확천금의 꿈을 꾸면서 복권을 사고 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증권에 투자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젊은 인재들은 거의 사기업 쪽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들어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는 것이죠. 이런 경제부분의 변화를 정치에서 어떻게 담아내느냐가 관건입니다. 이것이 중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열쇠입니다. 공산당이 변화를 외면하고 노동자 농민의 정당으로 남기를 고집하면 소수정당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3개 대표론이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공산당은 농민과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본가 계층의 이익을 정치권에서 대표할 수 있는 정치적 구조조정이 필요한데, 문제는 공산당이 모든 계층을 대표하는 국민정당이 될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3개 대표론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보아야 합니다.”
-이데올로기의 모순도 그렇고, 계속해서 경제가 발전하다 보면 인민의 민주화랄까 자율화, 다원화에 대한 요구가 거세질 텐데, 지금의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로 과연 언제까지 끌고 갈 수 있을 것으로 보십니까.
“지금까지는 일당독재 체제하에서 정치적 안정이 보장된 덕분에 경제가 상당히 빠르게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비슷한 개발독재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경제만으로는 안 되고 정치와 경제가 함께 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게 대충 국민소득 3000 내지 5000달러로 보고 있어요. 그런데 중국은 2020년 중국말로 샤오캉(小康)상태가 되면 1인당 국민소득이 그 수준에 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마 실제 구매력으로 따지면 벌써 3000달러 가까이 될 겁니다. 따라서 그동안 경제성장이란 명제에 억눌려왔던 정치적 자유화에 대한 요구가 급속도로 터져나올 겁니다. 그래서 2003년 10월에 열렸던 중국공산당 16기 3중전회에서 당내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정치과정을 보다 투명하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당 외곽에 머물러 있던 소외계층을 당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것을 골자로 한 정치개혁 결의를 채택하기도 했습니다만, 궁극적으로는 권력의 공유단계를 넘어 복수의 정당들 간에 정책경쟁을 전제로 한 다원적 정치구조가 정착되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지금의 상황으로 보면 이런 정치구조는 당분간은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중국정치 탐험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중국공산당일 것이다. 인구의 약 5%인 6600여만명의 당원이 13억 인구를 이끌고 있는 세계최대의 정당이 바로 중국공산당이다. 이 중국공산당의 실체와 그 특성을 파악하지 않고 중국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공산당이 실제로 어떤 시스템으로 대륙을 움직여나가는지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자.
-중국 최고 엘리트들의 집합체가 바로 중국공산당 아니겠습니까. 그런 공산당원도 요즘엔 예전 같지 않다는 말도 있더군요. 젊은 사람들 중에는 당원이 돼봐야 도덕적 의무감만 커지고 실속은 없다며 굳이 당원이 되기를 열망하지 않는 풍조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도 현실적으로 중국의 각 분야, 예컨대 어떤 기관이나, 조직, 단체의 장은 100% 공산당원 아닙니까.
“최소한 정부기구의 장을 비롯한 주요직책은 100% 공산당원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봐야죠. 중앙정부는 물론이고 지방정부의 주요 책임자는 예외없이 당원으로 채워지고 그 밑의 조직, 예를 들면 우리의 군에 해당하는 현(縣) 같은 일선 지방행정조직의 주요 책임자도 모두 당원이라고 보면 됩니다. 민간기업이나 외자기업이 많이 출현했는데, 그런 곳은 사정이 다르겠죠.”
-중국 공산당이나 당원의 위상을 보면 참 특이해서 우리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당-국가체제로 공산당과 국가기관이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당서열 1위 후진타오는 영어로 프레지던트로 번역되는 국가주석을 맡고, 당서열 2위 우방궈(吳邦國)가 국회의장 격인 전인대 상무위원장이죠. 3위인 원자바오(溫家寶)가 국무원총리입니다. 이런 권력구조의 특성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권력이 소수의 엘리트집단에 집중돼 있는 한편 서로 견제도 하는 일종의 분권형 권력구조로 볼 수 있을까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지만 중국에서야말로 모든 권력은 당에서 나와 당으로 들어간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기에 따라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당 내부의 사정은 조금씩 다릅니다. 마오쩌둥 시절엔 당의 권력이 1인지배체제로 당주석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그의 의도에 따라서 권력이 분담되는 형태였어요. 마오쩌둥이 죽고 난 다음에 화궈펑이 잠깐 했지만 그후 당주석제가 없어집니다. 1972년 13차 당대회 때 주석제 대신 총서기제를 도입했습니다. 총서기는 원칙적으로 ‘총(總)’이라는 수식어가 붙긴 했어도 하나의 서기에 불과합니다. 주석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총서기는 집단지도체제의 일원입니다. 당중앙의 결정을 집행하는 부서인 서기처 서기들을 총괄하면서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비롯하여 정치국과 중앙위원회의 각종 회의를 주재하지만 투표할 때에는 한 표밖에 행사하지 못합니다. 즉 영향력은 있지만 결정권은 없는 거죠. 그러니까 현재의 중국공산당은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권력을 공유하면서 그 안에서 권력의 분담이나 분산이 이루어지는 합의형 지도체제로, 특정 개인보다는 조직에 권력이 집중돼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당중앙이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데, 이는 당의 중앙위원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당조직의 핵심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또 당위(黨委) 혹은 당위원회라는 말도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듣기로는 중국의 경우 공산당원이 3명 이상인 기관이나 단체나 조직이면 반드시 당위원회가 조직돼 있다고 하던데요. 실제로 이 당위의 기능과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 중국의 통치원리를 이해하는 키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당위원회의 파워라든가 역할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당원의 수가 적은 기초조직에서는 당조를, 규모가 큰 곳에서는 당위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웬만한 기관에 가보면 예외없이 당위원회가 있고 그 책임자인 당위원회 서기가 최고 실세로 소개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공장엘 가면 경영을 책임지는 공장운영위원회가 있고 당 조직과 정치문제를 책임지는 당위원회가 있거든요. 그런데 서열상으로 당위원회가 더 높습니다. 왜냐하면 공장책임자는 대개 당원이고, 그가 당원인 이상 당위원회에 들어와 조직원으로 활동해야 하기 때문이죠. 최근 경영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그래도 중요한 결정은 당위원회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아야 합니다.
당위원회의 위상은 성(省)의 성장(省長)과 당위 서기의 관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장을 하다 잘하면 서기로 승진합니다. 반대로 서기를 하다가 성장으로 나가면 좌천입니다. 지금의 정치국에는 베이징시, 상하이시, 푸젠성, 장쑤성 등의 당위 서기는 들어와 있지만 성장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장이 그 성의 모든 행정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이라면, 서기는 정치문제를 비롯해 전반적인 책임을 집니다. 그래서 일은 성장이 더 많지만 위계질서상 서기 밑에 성장이 있는 것입니다.
외교부의 예를 들어보죠. 외교부에도 당연히 부장(장관)을 포함한 당위원회가 설치돼 있고 이 기관이 최고 결정권을 갖습니다. 지금 외교부의 당위 서기가 아마 수석부부장인 다이빙궈(戴秉國)일 겁니다. 그런데 외교부장은 리자오싱(李肇星)이거든요. 분명히 리자오싱 부장도 당위원회 멤버일 겁니다. 그러니까 당의 조직으로 따지면 오히려 다이빙궈가 더 높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걸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조금 애매하지요. 아마도 리자오싱은 부장으로서 대외업무를 총괄하고 다이빙궈는 당위 서기로서 인사문제를 포함하여 대내 문제나 당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이빙궈는 원래 당에서 연락부장을 했으니까 장관급이고 리자오싱은 전에 부부장(차관)급 인사였습니다. 대외연락부로 옮겨가기 전에도 외교부에 있었는데 그때도 부부장급으로서 리자오싱보다 직급이 높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옛날 관계로 따지면 다이빙궈가 리자오싱의 상급자란 얘기가 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외교정책과 당 업무를 분장하는 분업체제를 형성하고 있지 않나 합니다.”
-중국은 강력한 일당독재국가여서 국가의 리더십이 매우 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경우 핵폐기물처분장 건설이라든가 새만금사업 등등 국책사업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고 지지부진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중국은 아직도 당과 정부의 힘이 막강해서 대형 프로젝트를 과단성 있게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현장에서 보신 바로는 당정의 리더십이 어느 정도로 발휘되고 있습니까.
“우리하고는 비교가 안 되죠. 우리는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중국은 아직 중앙집권제니까요. 중앙의 힘이라는 게 정책과 예산과 인사권이잖습니까? 중국에서도 개혁개방이 이루어지면서 중앙정부의 권한 중 상당부분이 지방으로 넘어갔어요. 예산이 특히 그렇고 정책에 관련된 권한도 많이 넘어갔습니다. 덩샤오핑이 조대방소(?大放小)라고 해서 큰 것은 중앙이 잡고 있고 작은 것은 지방으로 내려보내라고 했지요. 그런데 지금도 인사권은 다 중앙에서 쥐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게 가장 중요한 거지요. 우리나라는 지금 중앙의 인사권이 많이 약화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중국에서는 당을 통한 중앙정부의 리더십이 아직까지는 우리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막강합니다. 비근한 예로 광시(廣西) 자치주에서 당위 서기도 하고 성장도 하고 중앙에서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까지 지낸 사람을 부정부패 혐의로 사형시켰습니다.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만큼 중앙정부의 권한이 세다는 얘기죠.”
上有政策, 下有對策
-지난번 사스파동 때 보면 베이징시 외곽에 사스전문병원을 만들었는데 불과 일주일 만에 완공을 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 청량리 위생병원인가를 사스 지정병원으로 삼았다가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결국은 취소했습니다. 아주 대조적이죠. 물론 국가의 리더십이 지나치다 보면 환경문제 같은 것을 도외시해서 나중에 시행착오의 비싼 대가를 치를 가능성은 있지만, 어쨌든 국가적으로 필요한 사업을 강력히 밀어붙일 수 있다는 점이 중국이 계속 힘을 키워나가는 데는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중국이 서부개발과 관련해서 추진하고 있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있잖아요. 남방의 물을 북쪽으로 끌어온다는 남수북조(南水北調) 사업이나 서쪽의 가스를 동쪽으로 가지고 오는 서기동송(西氣東送) 사업 같은 것은 엄청난 역사(役事)입니다. 이런 사업은 중앙정부의 강력한 리더십이 없으면 불가능한 거죠. 아직까지 중국은 정치체제라든지 행정체제가 명령식이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도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독재 시기에 경험했지만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력하고 규모가 큽니다. 다만 지적하신 것처럼 그런 명령식 행정체제는 잘못된 결정이라도 한번 시작하면 고장난 자동차처럼 계속 그쪽으로 가버리기 때문에 문제점이 발생한 다음에도 고치기가 힘듭니다.”
-중국에서 흔히 듣게 되는 말로 ‘상부에 정책이 있으면 밑에는 대책이 있다(上有政策 下有對策)’라는 게 있습니다. 주로 부패현상을 이야기할 때 인용되곤 하는데, 중앙의 지시나 방침이 지방으로 내려가면 잘 먹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이 또 한편으로는 중앙은 어떤 원칙이나 방향만 정하고 지방정부가 특성에 맞게 조정한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쨌든 나라가 크다 보니까 중앙과 지방의 관계가 주목을 받는데요. 그 실상은 어떻습니까.
“개혁개방이 진행되면서 가장 크게 변한 것 가운데 하나가 중앙과 지방의 관계일 것입니다. 정책의 틀이나 방향 같은 큰 줄기는 아직도 중앙정부가 잡아주지만 구체적 내용은 지방의 특성에 맞춰 실행하도록 일임합니다. 지방정부가 독자적으로 추진하는 경제개발사업과 개혁조치도 많아졌고요.
그래서 중앙정부에 가서 어느 지방의 사업에 대해 물어보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한국 사람은 대개 중앙정부가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걸로 알고 무조건 베이징에 와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지방정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또 중앙정부가 지방정부들끼리 서로 경쟁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경쟁이 심한 만큼 독자성도 강해지는 셈입니다. 전통적으로 중앙정부에 대해서 독자적인 성향이 뚜렷한 지방일수록 더욱 강합니다.
예를 들어 광둥(廣東)성이 그렇습니다. 광둥성은 재정자립도가 엄청 높을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베이징과는 전혀 다른 정서와 문화전통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다 보니 베이징 정부에서도 이 지역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광둥성 책임자가 특별히 베이징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 사람으로 임명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지난번까지 리창춘이 광둥성 당서기였는데 지금은 장더장(張德江)이라고 하는 김일성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당서기로 있습니다. 정치국원이면서 광둥성에 나가 있는 것이지요. 지금 정치국에는 주요 성(省)의 당서기가 7명이나 됩니다. 상하이시 당서기로 있다가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황쥐(黃菊)나 산둥성 서기로 있다가 역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우관정, 비슷한 경우인 리창춘, 왕자오궈 등을 합치면 10명이 넘습니다. 정치국 정원이 24명이니까 40퍼센트가 넘는 셈입니다. 그래서 정치국에 들어가고 싶으면 지방에서 당서기를 하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입니다. 군이나 당중앙이 정치국원을 독식하던 시기는 다시 돌아오기 힘들 겁니다.”
지식, 유머감각 뛰어난 지도자들
-사실 지방이라고 하지만 땅이나 인구의 크기로 본다면 웬만한 하나의 국가라고 할 만한 규모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웬만한 국가보다 큰 경우가 많죠. 충칭(重慶)직할시만 해도 인구가 3500만입니다. 충칭시는 원래 쓰촨(四川)성의 일부였다가 직할시로 독립해나갔습니다만, 현재도 쓰촨성의 인구가 9000만쯤 되니 독립국가라고 해도 상당히 큰 나라지요. 이런 현상이 충칭시나 쓰촨성에 한정된 게 아니니까 중국의 성(省)을 우리의 지방정부 개념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들죠.”
정종욱 전 대사는 장쩌민 전 주석과 후진타오 현 주석 등 당과 정부의 최고위층 인사들은 물론 기업인, 한반도전문가 등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다양한 중국인들을 접촉해왔다. 정 대사가 직접 만나본 중국 지도층 인사들의 면면은 어땠을까. 또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느낀 중국의 대(對)한반도정책의 속내는 어떤 것일까.
-제 기억에 1997년인가 장쩌민 주석이 미국 방문 도중 하와이에 기착했을 때 하와이 주지사 부인이 피아노를 치고 거기에 맞춰서 장주석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를 유창하게 불러서 미국사람들한테 상당히 신선한 이미지를 심어준 일이 있었어요. 그때 중국 지도자들이 우리가 이제까지 생각해온 공산당 수뇌의 딱딱한 이미지와는 달리 외국어도 잘하고 국제 무대에도 능숙하게 대처한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지요. 실제로 만나본 중국 지도자들의 진면목은 어떤 것이었나요.
“제가 최고위층 지도자들의 개인적인 능력을 평할 수 있을 만큼 깊이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만, 그동안의 접촉경험을 통해 느낀 것은 대단한 능력과 뛰어난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만났던 중국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외국유학이나 연수의 경험이 드문, 주로 국내에서 활동한 사람이 많았는데도 대부분은 국제정치에 대해 상당히 조예가 깊고, 중국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긍지, 사명감이 놀라울 정도로 투철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방금 장쩌민의 인간적인 면모를 언급했지만, 역시 직접 만나보니까 근엄한 외모와 달리 농담도 아주 잘하고 유머러스하더군요. 여유가 있다고 할까요. 그리고 같은 문화권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편안한 느낌을 받았고, 부정부패와는 거리가 먼 청렴한 지도자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후진타오 주석은 1998년 1월에 저녁식사를 하면서 옆에서 관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고 자상할 뿐 아니라 말도 아주 논리적이고 군더더기가 없었어요. 그때 한국의 IMF사태, 국제금융위기, 중국의 국내정치와 한중관계 그리고 전반적인 세계정세 등이 화제였습니다만 그의 지식의 폭, 특히 국제정세에 대한 식견이 깜짝 놀랄 정도로 넓고 깊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야기 도중 관련 수치를 언급할 때는 메모도 보지 않고 마치 컴퓨터식으로 나오는 걸 보고 엄청나게 기억력이 좋은 분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게다가 2시간 반 동안 얘기를 하면서 자세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13억 가운데 지도자로 뽑혔으니까 그러기도 하겠지만 역시 유능하고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이구나 하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후진타오 주석은 출세한 이후 한번도 고향을 찾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느 책에서 보니까 덩샤오핑도 15세에 쓰촨성 고향 마을을 떠난 이후 죽을 때까지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다고 해요. 또 그런 지도자를 배출한 고향이라 해서 특별히 덕을 본 것도 없다고 하죠. 이런 걸 보면서 그야말로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할 줄 아는 지도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죠. 마오쩌둥도 아마 고향엘 가지 않았을 겁니다. 마오는 개인적으로 청렴했을 뿐 아니라 엄청난 희생을 당한 사람 아닙니까. 작은아들은 국민당에 잡혀서 죽고 큰아들은 한국전쟁 때 죽어 사실상 혈육이라곤 리민(李敏)이라는 딸 하나밖에 없었죠. 최근 그 딸이 ‘나의 아버지 마오쩌둥’이라는 책을 썼습니다만, 그 책을 보더라도 마오는 역시 독재는 했을망정 부정이라든지 축재와는 거리가 멀었어요. 여성편력이 심했다는 평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람을 피운다거나 여러 명의 여성과 어울린다거나 한 건 아니었죠. 딸 리민에 대한 마오의 사랑도 특별했고요.
저우언라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 없었고 금전문제 같은 건 더욱 더 엄격했고, 주변 친인척 관리를 보면 숙연해질 정도로 깨끗한 사람이었죠. 사적으로 그만큼 희생했기 때문에 공적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북핵문제 대책팀장 후진타오?
-대사 재임기간 중 만난 중국의 유명인사나 공직자 중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제가 베이징에 근무할 때 가장 많이 만난 사람은 당시 외교부 부부장으로 한국문제를 맡고 있던 탕자쉬안(唐家璇)입니다. 지금은 국무위원, 그러니까 부총리급으로 중국외교를 사실상 전결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스타일이 아주 특이했습니다. 이를테면 개인적으로 만나면 자기가 잘 가는 뒷골목 음식점으로 저를 데리고 갑니다. 개인적인 터치가 아주 강하고 선이 굵은 사람으로 보스 기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선물을 하나씩 줍니다. 물건을 주는 게 아니라 우리측이 요구했던 것 중 실무 차원에서 잘 풀리지 않았던 걸 하나씩 해결해줘요. 역시 노련한 데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그밖의 고위관료 중에는 우이(吳儀) 부총리가 기억에 남습니다. 지금은 부총리로 대외부문, 특히 경제관계를 책임지고 있습니다만 당시는 대외경제무역부장, 우리로 치면 산자부 장관이었습니다. 한중간 무역문제로 비교적 자주 만났는데 두뇌회전이 빠르고 낙관적이면서도 치밀한 분입니다. 한마디로 여장부지요.
덩샤오핑의 큰아들 덩푸팡(鄧樸方)도 인상적인 사람입니다. 문화혁명 때 베이징대학에 다니다가 홍위병에 쫓겨 높은 건물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척추를 다쳤습니다. 제가 만났을 때 그는 중국 장애자협회 회장이었습니다. 몇 번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책을 많이 읽어 그런지 참 박식합니다. 당시 막 화제가 되고 있던 책이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었어요. 한번은 제가 저녁식사에 초대한 적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덩푸팡이 문명충돌론을 화제로 얘기를 풀어나갔습니다. 그 책을 다 읽은 것은 물론이고 상당히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데 그 아래에 소변통 같은 것이 달려 있어 모양이 아주 우습죠. 엄청난 박해를 받아 불구자가 된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밝은 모습으로 해박한 비전을 내비치면서 논쟁하는 것을 보며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국의 고위층 인사들과 개인적으로 친숙한 분위기에서 만나게 되면 공식적인 대좌에서는 말하기 꺼리던, 예를 들어 북한문제 등에 대해 속내를 털어놓기도 합니까.
“안 털어놓죠. 털어놓을 수가 없지요. 다만 이런 건 있었죠. 황장엽 사건이 마무리된 다음에 탕자쉬안 부부장과 둘이서 뒤풀이 비슷하게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황장엽 사건 때 중국외교부와 남북한 사이에 치열한 삼각외교전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탕 부부장이 그러더군요. 한 달 남짓 동안에 한국대사는 14번 만났고 북한대사는 15번 만났는데, 한국대사는 15분 만나기로 약속했으면 실제로는 30분 이상이 걸렸고 북한대사는 10분이면 끝났다고 말입니다. 북한대사와는 대화가 잘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최근 중국이 북한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른바 셔틀외교에 나서는 등 과거에 비해서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는데, 어떤 배경에서 그렇게 하고 있을까요.
“북핵문제를 더 이상 내버려두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는 위기상황이라고 판단을 했겠죠. 특히 부시 미국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전쟁, 이라크전쟁을 치르면서 대단히 공격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습니까.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표현했고 북한에 대해서 선제공격 가능성까지 거론했고요. 그리고 만약 북한의 핵보유가 공식화되면 한반도에서 미국과 북한 사이에 군사적인 충돌이 일어날 뿐 아니라 일본이나 대만까지도 핵무기를 갖겠다고 나올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지난해에 당중앙에 북핵문제를 다룰 위기대책반이 가동됐고 후진타오 주석이 직접 책임을 맡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또 외교부내에 북핵대책반이 설치된 것은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국이 북핵문제가 야가할 사태를 심각하게 본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금년 들어서 중국의 한반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북한정권 교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보도됐는데요. 실제로 최근 만나본 중국내 관계자들이 북한의 정권교체 가능성을 얘기하고 있습니까.
“대학이나 연구소의 전문가들은 가끔 그런 얘기를 합니다만, 자기들이 먼저 그런 가능성을 제기하기보다는 우리한테 물어보죠. 북한의 정권교체 가능성이나 혹은 정권이 언제까지 생존하겠느냐며 간접적으로 얘기를 걸어오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북한의 정권교체나 몰락은 아예 화제에 오르지를 않았고, 우리가 얘기를 걸어도 대꾸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해보면 그런 화제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중국 내 분위기가 달라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요. 다만 요즘은 중국에서도 언론의 자유가 신장돼 학자들도 과거처럼 정부의 공식적 입장에 입각해 발언하는 데서 벗어나 좀 자유롭게 이야기를 합니다. 따라서 학자들의 말에 큰 비중을 둘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중국은 여전히 김정일 정권 붕괴시 곧바로 자국에 엄청난 안보상 위협이 초래되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북한을 지원하고 달래가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도모한다고 하는 공식적인 방향을 바꾸지는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 당국자들에게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거론하면 한결같이 “우리가 그렇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다, 우리도 수단이 없어 답답하다”는 얘기들을 합니다. 그럼에도 식량이라든지 에너지를 상당히 많이 대주지 않습니까. 중국의 대북한 영향력을 어느 정도로 봐야 됩니까.
“저는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식량은 거의 70~80%가 중국에서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고, 또 원유는 특히 미국이 1년에 50만t씩 제공하던 중유가 끊긴 이후에는 거의 90% 이상이 중국에서 들어가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래서 경제적인 차원에서 북한이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정도는 거의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경제원조를 담보로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말입니다. 다만 중국은 그런 영향력을 잘 행사하지 않으려 할 것이고, 한다 해도 눈에 덜 띄는 방법으로 할 겁니다. 노골적으로 하게 되면 북한의 반발이 심할 것이니까 행사한다고 해도 중국식으로 부드럽게 하겠지요. 중국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하지만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를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한반도 통일과 美中 관계
-원유 공급을 언급하셨는데, 그게 중국에서 북한으로 어떤 파이프라인이 설치돼 제공되는 것입니까.
“헤이룽장(黑龍江)성에 다칭(大慶)유전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나오는 기름이 파이프를 통해 북한에 제공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파이프라인이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통과해야 될 텐데요. 제가 듣기로는 압록강 철교 밑에 북한으로 연결되는 송유관이 설치돼 있다고 합니다만.
“제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게 있다는 얘기죠. 지난해 3월에 첸치천(錢其琛) 부총리가 북한에 갔다 오지 않습니다. 핵문제와 관련해 북한에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간 것인데, 평양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온 직후 그 송유관에 무슨 사고가 나서 공급이 중단되었다는 보도가 나온 적이 있어요. 관이 워낙 노후해서 고장이 잘 난다는 얘기이지만 워낙 타이밍이 절묘해서 이 사고가 북한에 압력을 가하려는 의도였다는 추측도 나왔습니다.”
-그러면 중국이 마음먹고 언제라도 꼭지 틀어 잠그면 공급이 중단되는 것 아닙니까.
“그럴 수 있다는 얘기죠. 그런데 북한은 기름에 대한 의존도보다도 석탄 의존도가 훨씬 높기 때문에 당장 기름구멍을 틀어 잠근다고 해서 북한이 붕괴될 정도로 경제적인 타격을 입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송유관을 잠근다는 것은 그 자체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중국이 북한에 대해 압박을 가하려고 한다면 다른 수단들이 엄청 많습니다. 북한은 지금 남북으로 막혀 있지 않습니까. 남쪽에는 휴전선이 있고 북쪽으로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있고, 러시아 쪽으로 조금 육지가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거의 전부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중국이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많습니다. 예를 들어 베이징공항을 폐쇄해 북한 민항기를 못 들어오게 하면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타격이 될 것입니다. 그외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압력수단을 가지고 있지만 쓰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거의 끝나는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터뷰를 시작한 지 어느새 4시간이 다 돼간다. 중국이 한반도 통일에 대해 어떤 속내를 갖고 있는지, 중국정치의 미래 전망을 물어보는 것으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지금 6자회담 중국측 수석대표인 왕이(王毅) 부부장이 아주사장(亞洲司長)할 때가 아닌가 싶은데요. 한반도의 통일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우회적으로 답변하더군요. ‘한반도가 통일됐을 때 중국군이 미군과 압록강에서 서로 총을 겨누는 사태는 정말 생각하기도 싫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중국의 한반도 정책이 현상유지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면 중국은 내심 한반도 통일을 원치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한반도 통일에 관한 중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우선 현상유지죠. 그런데 현상유지가 깨진다는 것은 곧 전쟁이나 한반도 통일을 의미합니다. 현상황에서 북한 주도의 통일이 어렵다고 본다면 남한이 주도하는 통일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미국이 압록강까지 올라간다는 것 아니겠어요. 중국으로선 굉장히 걱정스러운 측면이죠. 따라서 지금 상황에서 중국은 현상유지를 가장 선호할 겁니다. 좌우간 북한 내의 여러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결국은 어떤 형식으로든 한국이 주도하는 통일정부가 등장하게 될 것이라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중국의 한반도관계자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한반도 통일에 대한 중국정부 입장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반도 통일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한반도 통일국가는 중국에 대해 적대적인 정책을 취하지 말아야 된다, 셋째 통일한국 정부는 중국과 적대관계에 있는 국가와는 동맹관계를 맺지 말아야 된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첫째와 둘째 조건은 우리로서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만, 문제는 셋째 조건입니다. 현재 한국은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데, 한반도 통일후 미국과 중국 사이가 나빠지게 되면 한반도 전체가 중국과 적대적인 관계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미중관계가 좋고, 당분간 대만문제라든지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큰 변화가 없는 한 양국의 관계가 극적으로 나빠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미국의 한국전문가들은 ‘한국이 지금은 우리와 동맹관계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중국하고 더 가까워지지 않겠느냐’는 말들을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거북하고 곤혹스러운 게 사실인데, 과연 이런 말이 우리에게 뭘 의미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중국 민족주의의 진로
이에 대한 대처방안을 미리 강구해야 합니다. 그 중 하나로 다자적인 협력체를 구성해서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 아시안을 하나의 틀로 묶는 다자적인 무역메커니즘을 추진해야 한다고 봅니다. 새로운 다자적인 조직을 자꾸 만들어서 양자관계에서 나올 수 있는 문제를 희석시키고 걸러줘야지 내버려두면 언젠가는 우리한테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 정치사의 흐름에서 볼 때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오늘의 중국을 어떤 의미로 볼 수 있을까요. 또 앞으로 중국정치는 어떤 이정표를 거치게 될 것으로 보십니까.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중국은 19세기 초 아편전쟁을 치르면서 서구 열강과 직접 부딪쳤다가 결국은 청조가 멸망했습니다. 당시 중국은 중체서용, 그러니까 중국적인 건 그냥 두고 서양의 실용적인 기술을 도입해 근대화에 대응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가 결국 실패하고 공산주의가 들어오게 됐습니다. 공산주의가 좋아서라기보다도 중체서용이 표방했던 부국강병이라는 민족주의적인 목표랄까, 꿈 이런 걸 달성시킬 수단으로서 사회주의가 채택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마오쩌둥 시절을 지나면서 수단이 잘못됐다는 게 입증됐고, 결국 덩샤오핑이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정치적인 부분을 빼고는 사실상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졌거든요. 사회주의의 포기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민족주의가 원래 목표였고 사회주의는 하나의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시장경제가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중국의 민족주의적인 꿈이었던 부국강병을 충족시켜줄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되겠죠.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부국의 꿈’을 상당부분 실현시킬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러나 공산당 권력체제가 바뀌는 본격적인 정치개혁은 하지 않은 채 현재의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과연 중국인들이 추구하는 부국강병의 진정한 꿈이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해서 저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중국은 중체서용을 놓고 또 한번의 변혁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중국을 이끌어갈 후진타오 체제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도전이며 동시에 우리한테도 굉장히 중요한 함의를 갖는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각급학교 117만개, 학생 3억1800만명, 초등교사 578만명…. 세계최대의 ‘교육대국’ 중국의 외형이다. 이 거대한 학교와 학생 그리고 교직사회가 지금 개혁과 변화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세계일류 수준으로의 도약을 목표로 내건 대학은 이합집산을 통해 경쟁력 있는 거대캠퍼스로 다시 태어나고, 중등학교는 이념교육 대신 입시 과외열풍이 달아오르는가 하면, 초현대식 시설을 갖춘 귀족학교가 번창하고 있다. 교직사회는 가난하지만 평생을 보장하던 철밥통이 사라진 자리에 교사평가제가 도입되고 우수교원 스카우트 경쟁이 불붙는 등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모를 거듭중이다.
이런 와중에 한국학생들의 중국유학은 날이 갈수록 열기를 더하고 있다. 의대계열 학부생과 일부 석박사과정 및 언어연수생이 주류를 이루던 초창기 유학대열은 이제 조기유학 붐을 타고 중국대륙 곳곳의 초중고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확산중이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에서 막상 중국교육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어떤 교육체제와 철학을 갖고 무슨 내용을 가르치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중국으로 달려가는 최근의 유학열기가 불안스럽기조차 하다. 중국의 교육현실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과 정보가 절실한 시점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호 중국탐험에서 만난 구자억(具滋億·49) 박사는 국내에서 거의 독보적인 중국교육 전문가로 꼽힌다. 영남대와 고려대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명문인 베이징사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교육개발원 기획처장으로 재직중이다. 외국인 제1호 교육학박사학위 취득자로 베이징TV에 소개됐을 정도로 이 분야의 선구자인 셈이다. 중국교육의 탐험은 일단 전반적인 변화의 기조부터 파악하는 게 순서일 듯싶다.
紅과 專 겸비한 인재양성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모든 면에서 변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교육도 예외는 아니어서 각종 관련제도가 바뀌고 각급 학교의 교육현장도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변모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런 가운데 한국 학생들의 중국유학 열기가 높아가고 있어 중국교육 전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매우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우선 중국교육의 성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현재의 중국교육은 한마디로 ‘우홍우전(又紅又專)’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홍’과 ‘전’을 아우른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홍은 사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마르크스적인 입장이나 관점 방법을 견지하는 것을 말하고, 전은 전문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중국의 현대사는 한마디로 ‘홍’과 ‘전’의 싸움의 역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화혁명기에는 ‘홍’의 잣대로 모든 것을 쟀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불순하다고 보는 사람, 예를 들면 교사와 같은 지식인은 모두 제거의 대상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대학에서 학생을 선발할 때 실력보다 사상으로 뽑은 적도 있으니까요. 그러다가 개혁개방 이후 시장경제의 발전을 추구하면서 ‘전’이 매우 중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연히 교육도 ‘전’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고, 반면 그런 과정에서 ‘홍’이 약해진 것이지요. 이에 따라 중국정부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홍’과 ‘전’을 두루 갖춘 인재양성에 목표를 두게 된 것입니다.”
-결국 개혁개방 이후 중국교육의 성격이 획기적인 전환기에 들어선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요. 이 같은 우홍우전의 원칙하에서 중국 교육개혁의 주요내용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교육의 양적 확대와 질적 수월성을 추구하는 것이 개혁의 핵심적 화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양적으로는 고등교육의 경우 1980년대만 해도 대학입학 정원이 30여만명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400여만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것을 계속 늘려서 고등교육을 받는 전체학생수를 3000만명까지 확대할 계획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초중등교육의 경우 여건이 취약한 변경(邊境)지역이나 농어촌 지역의 교육기회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질적인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100개 대학을 집중육성한다는 ‘211공정’이라든지 ‘3+X제’ 같은 대학입시제도의 개선, 고등학교 졸업시험제 시행, 교수·교사평가제 등을 도입했습니다. 또 사립학교가 등장하고 다양한 경쟁체제를 도입해 교육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교수·교사평가제를 말씀하셨습니다만, 일련의 교육개혁 조치 가운데서도 교직사회의 철밥통이 사라지고 개혁을 주도할 교장이나 총장의 외부영입이 특히 피부에 와닿는 변화인 것 같습니다.
“교직사회의 개혁을 보면 중국은 날아가고 있는데, 한국은 기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 초중고에 교사평가제를 도입했고, 둘째 대학교수 사회의 종신제를 타파하는 평가제도가 도입됐으며, 셋째 성과급제를 도입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교사나 교장 초빙제입니다.
제가 베이징사범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그 대학 부설 실험소학교에 쑨인한(孫銀漢)이라는 교장이 부임했는데 당시 27세였습니다. 27세에 베이징사범대학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교장으로 초빙돼 간 것입니다. 제가 쑨 교장에게 ‘학교에 50세 넘은 선생들이 즐비한데 어떻게 학교를 운영하느냐’고 했더니 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에요. 자기는 교장으로서 나이 든 교사들을 존경하고 학교의 미래에 대해 비전을 제시하면서 끌어나가고 있는데, 교사들이 이에 동의하면서 교장으로 존중해준다는 겁니다. 그 분이 3년간 재직했는데 학교를 획기적으로 바꿔 놓고는 기업체 사장으로 갔어요.
초중고에서의 교사평가제와 관련해 얼마 전 중국신문에 이런 얘기가 실렸더라고요. 어느 교사가 중국의 교육부를 상대로 불만을 토로한 글인데요. 자신이 재직중인 학교에서 성과급을 줬는데, 그 기준이 학생들이 평가한 점수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신은 학생들이 평가한 것보다 잘했다고 생각한다며, 학생들에 의한 평가점수로 성과급을 주는 게 말이 되느냐는 항의였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상황인데, 그 정도로 중국의 교육현장은 개혁의 강도가 셉니다. 대학교수들도 철저한 성과급제에 따라 봉급 차이가 굉장히 심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각급학교의 교육현장으로 들어가보자. 우리에게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역시 전환기에 처한 대학의 속사정이다. 변화에 변화를 거듭중인 중국대학의 각종 개혁작업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또 최근 들어 대학평가 순위가 바뀌는 등 치열한 경쟁에 돌입한 명문대학의 판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1990년대 이후 고등교육관리체제 개혁이 시작되면서 대학의 체제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장 큰 변화가 대학간 합병으로 인해 규모가 큰 대형 대학들이 출현한 것을 들 수 있겠습니다. 예컨대 저장(浙江)대학 같은 경우 4개의 대학이 합쳐져 중국 최대 대학으로 재탄생했는데요. 이런 현상은 왜 생긴 것이고 현재 어떻게 전개되고 있습니까.
“중국의 대학들이 1990년대부터 이합집산을 시작했는데,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동안 중국의 대학은 학문영역에 따라, 또는 대학을 관리하는 주체에 따라 아주 작은 규모로 쪼개져 있었습니다. 한 대학의 정원이 200~300명, 혹은 500명쯤 되는 곳이 많았고, 큰 대학이라고 해봐야 1만명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 개혁을 하려니까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이죠.
그래서 대학의 이합집산이 시작됐는데, 여기에 1990년대 중반에 100개 대학을 중점육성하는 211공정이 생기면서 가속화된 겁니다. 이후 해마다 30여개 대학이 사라져 지금은 일반 정규대학이 1000개쯤 될 겁니다. 말씀하신 저장대학의 경우는 1998년도에 기존의 저장대학을 중심으로 항저우(杭州)대학, 저장농업대학, 저장의과대학이 합친 것입니다. 4개 대학의 합병으로 저장대학은 학생 수가 2만6000명이 넘는 최대 규모의 대학이 되었을 뿐 아니라 대학서열에서도 과거 10위권 밖이었으나 최근엔 3위에 올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학의 합병에는 물론 장단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장점이라면 일단 투자의 효율성이 높아지고 전체적인 수준도 향상됐다는 점입니다. 교수진도 과거보다 훨씬 확대됐고 상호경쟁을 하다 보니 교육의 질과 연구능력이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에요. 한마디로 시너지 효과가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학교를 합쳐놓으니까 구성원들의 이익 충돌현상이 일어납니다. 저장대학을 가봤더니 캠퍼스가 4개로, 여전히 과거에 하던 역할을 하고 있어요. 처음 대학합병시 행정조직도 하나로 합쳐 새롭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걸 못하고 그대로 놔두었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부분을 집중 육성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각 구성원간의 이익이 충돌하는 경우가 빈발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중국대학의 구조조정은 일부 문제가 있음에도 비교적 성공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베이징(北京)대의 경우 세계 일류대학으로의 도약을 목표로 내걸고 여러 가지 개혁조치들을 시행하고 있는데요. 특히 교수 신규채용시 반드시 계약제로 한다든가 철밥통을 없애는 등 교원인사제도의 획기적 변화가 대표적입니다. 현재 베이징대라든가 기타 다른 대학들의 개혁조치는 어느 단계에 와 있습니까.
“베이징대가 2003년 5월에 가장 먼저 획기적인 인사제도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현재 시행중인 이 내용을 보면 중국대학의 전반적인 개혁방향을 알 수 있어요. 베이징대가 대대적으로 인사제도 개혁에 나선 것은 한마디로 교수의 일류화가 아니면 생존할 수 없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교수들이 일류가 아니면 일류대학을 만들 수 없다, 치열한 외부도전에 대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교수가 일류가 돼야 한다, 세계 유명대학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교수가 일류가 돼야 한다, 베이징대에 돈을 많이 투자한 것에 비해 교수의 연구수준이 떨어진다는 일부의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면 국가나 사회로부터 지지를 상실할 수 있다는 등의 4가지를 베이징대는 중시하고 있습니다.
베이징대 인사제도 개혁안의 내용을 보면 종신제를 타파하고, 근친번식을 극복할 수 있는 평가체제를 도입하며, 이를 통해 능력이 떨어지는 교원을 퇴출하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근친번식 극복이라는 것은 베이징대 출신이 베이징대 교수로 많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교수를 채용할 때는 철저히 계약제로 하는데, 신규로 채용되는 교원들은 계약기간이 3년이에요. 전임강사는 3년씩 두 번 연임하고도 승진하지 못하면 자동퇴직입니다. 부교수는 이과와 의과계열은 최고 세 차례에 걸쳐 모두 9년, 인문사회계열은 최고 네 차례 12년까지 계약을 연장할 수 있지만 그때까지 승진하지 못하면 자동퇴출하도록 했습니다.
현재 재직중인 교수들에게도 새로운 인사제도가 적용됩니다. 기존의 부교수는 2회 범위 내에서 정교수 승진 기회를 제공하되 승진심사에서 탈락됐을 경우에는 반드시 1년 후 재승진 심사를 받도록 하고 거기서도 탈락하면 퇴출시킨다는 것입니다. 정년을 보장한 정교수에 대해서도 3년 연속해서 규정한 교육이나 연구활동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퇴출시키도록 했어요. 또 결원이 발생하는 자리는 반 이상은 반드시 외부에서 공개 초빙하되 당해연도에 베이징대를 졸업한 박사는 응모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성과가 없는 학과에 대해서는 존속 여부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 폐지시키고 소속 교수도 퇴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외부 저명인사 초빙 붐
-대학교육의 개혁방안 가운데 하나로 외부수혈도 활발하다고 합니다. 칭화(淸華)대의 경우 지난해부터 골드만 삭스 미국본사 사장인 존 손턴을 금융연구센터 석좌교수로 초빙했다고 하는데, 연봉이 100만위안(약 1억5000만원)을 훨씬 넘는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실정에서는 엄청난 금액인데요. 대학의 외부 저명인사 초빙이 어느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요즘 중국 신문을 보면 외부 저명인사를 교수로 초빙한다는 광고가 자주 실립니다. 최근에 화중(華中)사범대학이 특별초빙교수를 공모했는데, 조건이 파격적이어서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초빙대상자가 중국과학원이나 사회과학원의 원사(院士)일 경우에는 150만위안의 주택구입비와 매년 30만위안의 수당 및 300만위안의 연구비를 지원하며, 조수를 지원해준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대학이 신문에 낸 초빙광고를 보면 박사학위를 가진 부교수급이나 박사후과정을 밟은 사람에게 15만위안의 주택보조비와 3만위안의 연구비를 지급한다는 것이에요. 중국의 대학들은 이런 식으로 우수한 교수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하고 있어요. 이제 중국의 대학에서도 능력만 있으면 엄청난 대우를 받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지요.”
-원사라면 우리의 학술원 회원에 해당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중국과학원과 사회과학원에 원사가 있습니다. 원사가 아니더라도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중국내에서 웬만큼 유명하다는 학자들은 평생이 보장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우수인력에 대한 스카우트 경쟁이 치열한 것이죠.”
100개 중점대학 육성
-1996년 시작된 ‘211공정’은 21세기에 100개 안팎의 대학을 세계수준으로 발전시킨다는 목표를 내세우고 중점대학을 선정해 집중육성해 왔습니다만, 최근엔 100개도 많다 해서 다시 10개로 줄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실제 상황은 어떻습니까.
“중국에서 중점대학은 오래 전부터 있었어요. 1954년도에 최초로 중국인민대학,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하얼빈(哈爾濱)공업대학, 베이징농업대학, 베이징의학원 등 6개의 중점대학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개혁개방 이후 211공정이라는 대학 개혁제도가 시행되면서 본격적으로 중점대학이 선정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100개 대학과 1000개 학과를 세계 선진수준으로 육성하겠다는 것이 목표였는데, 현재 95개 대학이 중점대학으로 지정돼 211공정에 들었어요. 그런데 다시 10개의 중점대학으로 줄였다는 것은 아마 중앙정부 차원에서 육성하는 중점대학이 10개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211공정의 초창기에는 적지 않은 혼란이 있었어요. 대도시의 유명대학들만 중점대학으로 선정됐기 때문이었어요. 이에 성(省)정부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중앙에서 선정하는 211공정 대학 이외에 지방에서도, 예를 들어 신장(新疆) 지역이라면 신장대학을 211공정 대학으로 선정하도록 한 것입니다.
211공정은 고등교육체제의 개혁에 커다란 성과를 올리고 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211공정이 대학간 통폐합이라든지 학과 구조조정 혹은 인력의 조정 등 대학의 구조조정을 이끌었다는 점입니다. 중국의 대학이 안고 있는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과도한 인력이 대학 울타리 안에서 먹고 산다는 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베이징대학 같은 경우 교직원만 1만8000명이에요. 211공정 과정에서 이런 비효율성의 문제들이 제기돼 선택과 집중의 논리에 의해 대학을 개혁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95개의 중점대학은 전체 대학의 10%에 미달하지만 학생수는 중국 전체 대학생의 32%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석사의 69%, 박사의 84%가 이들 대학에서 배출되고 있어요. 선택과 집중의 원리로 질을 높이는 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이들 대학에 108억9400만 위안이 투자됐는데, 그중 62억위안을 중점학과 육성에 사용했습니다. 대학 내부에서도 특정학과에 집중 투자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중점대학 중에서도 중점학과가 많은 대학이 좋은 대학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2003년 9월 중국교육부가 각 대학별 중점학과의 숫자를 발표한 것을 보면 베이징대가 81개의 중점학과를 보유해 가장 많고, 다음으로 칭화대 49개, 푸단(復旦)대 40개, 난징(南京)대 28개 등의 순으로 돼있습니다.”
-중국의 대학평가에서 칭화대가 베이징대를 앞질렀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도 있습니다만, 중국내 명문대학의 판도도 계속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재 대학의 평가순위는 어떻게 나오고 있습니까.
“2004년 1월14일 ‘21세기 경제보도’가 교육부 자료를 근거로 발표한 대학랭킹을 보면 칭화대학이 232.56점으로 1위를 했습니다. 이어서 2위 베이징대학, 3위 저장대학, 4위 푸단대학, 5위 화중(華中)과기대학, 6위 난징대학, 7위 우한(武漢)대학, 8위 지린(吉林)대학, 9위 상하이(上海)교통대학, 10위 쓰촨(四川)대학 순이에요.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21세기 경제보도’에서는 2004년 최고의 학술수준을 보유한 대학을 기준으로 중국의 15대 일류대학을 선정했는데, 여기에서는 조금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10위권에 들어있던 쓰촨대학, 지린대학이 빠지고 앞서 소개한 랭킹 10위권에 포함되지 않았던 중국협화의과대학, 중국농업대학, 시안(西安)교통대학, 베이징사범대학, 중국과기대학, 하얼빈공업대학, 중국인민대학, 톈진(天津)대학이 들어 있습니다. 상위 랭킹 10위까지의 대학이 주로 종합대학의 성격을 가진 대학 중심이었다면, 15대 일류대학으로 선정된 대학들은 이런 대학에다 특정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대학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10개 명문대, 15개 일류대
-학문분야별로도 우수대학을 꼽을 수 있겠는데요. 예를 들어 이공계는 칭화대가, 인문계는 베이징대가 최고로 꼽히고 있지 않습니까. 그밖에 분야별로 강세를 보이는 대학은 어떤 곳이 있습니까.
“중국에서는 전공별 순위를 매우 중시합니다. 그래서 학과별로 1등부터 500등까지 발표하기도 합니다. 이런 점은 우리보다 앞서가는 것이지요. 중국대학의 학과는 크게 사회과학계열의 법학 철학 경제학 역사학 관리학 교육학 문학, 자연과학계열의 이학 공학 농학 의학의 11개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21세기 경제보도’에서 발표한 것을 종합해 보면 법학 철학 문학 이학의 경우 베이징대학, 경제학은 중국인민대학, 관리학은 시안교통대학, 역사학은 난징대학, 교육학은 베이징사범대학, 농학은 중국농업대학, 공학은 칭화대학, 의학은 중국협화의과대학 등이 가장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렇게 보면 중국의 대학들이 특성화가 비교적 잘 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베이징대학은 법학 철학 문학 이학 등 4개 학과영역에서 최우수로 평가돼 중국 최고의 명문대학임을 짐작케 하고 있습니다.”
-요즘 중국의 대학에서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학과는 어떤 것들입니까.
“젊은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학과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것 같아요. 신문방송학과, 컴퓨터 및 인터넷 계열학과가 취업이 잘되고 전망도 밝아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밖에 생물공정, 경제와 무역, 재정학, 공상관리, 통신, 환경, 토목 등의 분야가 인기 있는데, 대부분 중국의 경제나 사회발전과 밀접히 연관된 학과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도 중점대학과 그렇지 못한 대학에 대한 선호도의 차이가 매우 크다고 합니다. 명문대학의 존재가 우리처럼 학벌의 폐단 등 사회문제화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중국사회에서 학벌에 따른 사회문제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베이징대학 출신이 주요 관직이나 국회의원(전인대 대표)직을 다수 차지했다는 등의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중국은 실용주의 정신이 강하기 때문에 이공계 분야에 명문대가 많고, 또 이공계 출신들이 골고루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특정 학맥에 의한 폐해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장쩌민(江澤民) 주석을 중심으로 상하이방이 한창 거론되면서 장 주석이 졸업한 상하이교통대학이 주목받기도 했지만 우리나라에서처럼 학벌의 폐단이 큰 사회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의 경우는 서울대가 대부분의 학과에 걸쳐 전국 최고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중국은 앞서 말씀한 대로 각 분야별 최고수준의 학과가 여러 대학에 분산돼 있기 때문이지요. 대학특성화가 잘돼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기초과학, 국제적 수준
-중국대학의 수준은 국제적으로 어느 정도 위치에 있습니까. 인문학의 핵심인 중국 문사철(文史哲) 분야의 경우 대만대학의 수준이 더 높다고도 하고, 특히 사회과학의 경우에는 아직도 사회주의국가라는 체제상의 문제로 인해 제대로 된 학문적 접근이 쉽지 않다는 지적이 많지 않습니까.
“간단히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제가 볼 때 문사철의 경우 1990년대 중반까지는 대만쪽이 훨씬 높았을 겁니다. 그러나 현재는 이념적 속박이 많이 해소되면서 문사철이나 사회과학 분야의 학문수준이 급속히 올라가고 있어요. 중국의 학문발달과 관련해 장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학문연구에 필요한 자료의 수집 및 정리가 굉장히 잘돼 있다는 점입니다. 중국의 과거제도 연구를 예로 들면 이 주제와 관련된 각종 자료들을 모두 수집·정리해 책으로 내놓고 있습니다.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중국의 과거제도를 충분히 연구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연구를 위한 기초적 시스템은 잘돼 있으나 그런 자료들을 사회주의 이념에 좇아서 해석하다 보니까 문제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문제만 해소되면 급속히 학문이 발전할 것이고, 또 현재 발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공계 대학의 학문수준은 우리보다 당연히 앞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우리가 앞서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은 이미 인공위성 항공기 원자탄을 다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수학이나 물리 등 기초과학이 발달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하거든요. 일부 한국인들은 중국이 자체적으로 자동차를 만들지 못한다고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중국의 기초과학 수준은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NASA(항공우주국)에서 중국 연구진이 빠져나가면 운영이 안 된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베이징대와 서울대의 인원구성을 비교한 자료가 최근 국내언론에 보도됐는데, 일단 외형적으로는 베이징대가 훨씬 앞서는 것으로 보입니다. 교수 1인당 학부 학생수가 20.7 대 3.28로 베이징대가 훨씬 적습니다. 전체학생 중 대학원생의 비율은 서울대가 31%인데 비해 베이징대는 45%로 더 많았고, 외국인학생도 590명 대 1776명으로 베이징대가 훨씬 국제화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대학수준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고 계시는지요.
“중국 최고수준이라는 베이징대나 칭화대 같은 학교는 교수나 학생이 매우 우수하고 학문수준도 상당히 높습니다. 저는 지난해 중국학생들의 수준이 높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적이 있어요. 무슨 일인가 하면 한국교육개발원 이종재 원장이 중국 저장대학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그 대학 학생들을 상대로 강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주로 교육학과 학부생과 석박사생 200여명을 대상으로 강당에서 강연을 하기로 했었는데, 제가 사전에 그쪽 대학관계자에게 전화를 해서 영어로 강연을 할텐데 통역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상의를 했어요.
그래서 이 관계자가 학생들한테 물어보았는데 이구동성으로 그냥 영어로 해달라고 하더라는 거죠. 결국 영어로 강연을 했는데, 무리없이 마칠 수 있었어요. 특히 강의가 끝난 후 영어로 진행된 질의응답도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저장대학에서 특별히 영어를 잘 하는 학생들만 따로 모은 것은 아니라고 하니 그만큼 학생들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다는 얘기죠. 이런 것을 보면 일부 명문대학들은 세계적 수준에 다가가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구 박사께서도 베이징에서 유학생활을 하셨습니다만, 우리나라 대학생들과 비교해 중국학생들의 학구열이라든가 대학생활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한마디로 학구열이 대단합니다. 제가 유학할 당시 알고 지내던 학생들은대개 돈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도서관에 가서 공부만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학교수업시간이 많은 데다가 야간에도 수업을 하고 과제물도 무척 많습니다. 학칙상 한 과목이라도 과락이 있으면 상급학년으로 올라가지를 못하니까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 우리와는 다른 것이 학생들이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학교당국에서 방과후 시간까지 사실상 학생들을 관리하고 있는 셈입니다. 결론적으로 중국대학이 우리 대학보다 공부를 훨씬 더 많이 시키는 시스템이고, 학생들의 학구열도 우리보다 높다고 봅니다.”
중국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꼭 빠지지 않는 단골소재가 있다. 바로 돈, 혹은 돈벌이에 관한 것이다. 교육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정부지원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던 중국의 학교들은 요즘 자체사업으로 수익을 올려 학교운영자금으로 쓰느라 분주하기 짝이 없다. 작게는 학교 담장을 헐고 그곳에 상점을 내는 것에서부터 직접 기업을 설립, 운영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대학의 돈벌이는 이제 상식이 돼버린 느낌이다. 그런가 하면 학생들에게는 무상교육이 사라져 등록금 부담이 만만찮다.
-베이징대가 1988년 세운 베이다팡정(北大方正)이라는 회사를 보면 직원이 6000명이 넘고 매출액이 우리돈으로 1조4000억원을 돌파했으며 홍콩과 상하이 증시에 상장하는 거대그룹으로 성장했다는 겁니다. 대학이 설립한 기업을 샤오반(校辦)기업이라고 하는데요, 2001년말 기준으로 575개 대학이 무려 5039개의 샤오반기업을 운영하고 있고 그 매출액이 607억위안(약 9조원)에 달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 같은 대학의 상업활동은 어떻게 해서 시작된 것이며 현재 어느 정도인가요.
“개혁개방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그 전까지는 전혀 없었어요. 그 전에는 모든 것을 국가에서 대주었는데, 개혁개방 이후에 학교 재정의 일정 부분만 국가가 지원하고 나머지는 자체적으로 벌어서 쓰라고 했어요. 이런 과정에서 샤오반기업이 생겨났죠. 현재는 대학뿐 아니라 능력이 되는 초중고교에서도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일반화됐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어느 학교에서 벽돌공장을 운영하면서 어린 학생들에게 일을 시키고 돈을 조금 주다가 문제가 된 적도 있어요.
대학은 거의 대부분이 샤오반기업을 운영하고 있는데, 베이징대학이 운영하는 베이다팡정을 비롯해 칭화대학 하얼빈공대 저장대학 등의 샤오반기업은 거의 우리나라의 재벌그룹처럼 운영되고 있습니다. 또 재미있는 게 샤오반기업을 놓고 순위를 매깁니다. 학교마다 설립한 기업체의 숫자, 총매출액, 학교재정에 기여한 액수, 순이익 등등 말입니다.”
대학등록금 연간 63만원
-이 같은 기업활동은 학교재정에 도움을 주고 산학결합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효과도 없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여러 가지 부정적인 면도 또한 클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내에서는 어떤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학교의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는 데 필요하고, 또 중국의 이념적 특성에도 부합한다는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교육과 노동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 반면 문제점으로는 주객이 바뀌는 현상을 들 수 있어요. 대학이 기업을 경영하다 보니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쳐야 할 교수가 기업체 경영하는 사장 역할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는 겁니다. 학교보다 회사를 중시하는 현상이죠.
이런 현상은 대학에서 기술뿐 아니라 자본과 인력까지 모두 투자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빚어지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대학의 기업 운영방식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들립니다. 푸단대학의 양위량(楊玉良) 부총장이 대표적인데요. 이 분은 ‘대학이 투자에 전념하게 되면 일반기업의 시장 참여가 힘들어지므로 앞으로는 기술투자만 하면 좋겠다. 국립대학이 만든 샤오반기업은 결국 국영기업인데 이는 지금 국영기업이 없어지는 추세와도 모순되는 것 아닌가’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 중국이 계획경제체제를 탈피하면서 1977년부터 모든 대학에서 학비를 받는 유상(有償)교육이 시작됐는데, 현재 대학의 등록금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이렇게 유상교육으로 제도가 바뀜에 따라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대학생들의 학비는 해당지역의 교육청에서 그 한도를 정하는데 지역에 따라 달라요. 베이징시의 경우 일반대학은 연 4200위안(약 63만원)을 초과할 수 없도록 하고 있고 중점대학은 5000위안 이내로 제한돼 있습니다만, 특수학교는 이보다 더 받을 수 있습니다만 베이징대, 칭화대, 중국인민대, 베이징사범대는 아예 4800위안을 받도록 정해 놓았어요. 상하이시는 일반대학은 5000위안 이내로 받도록 했지만, 인기 전공학과는 6500위안, 예술계통은 1만위안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학비가 중국인들에게는 적은 돈이 아니기 때문에 과거 우리나라처럼 이른바 우골탑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국정부로서는 돈이 없어 대학에 못가는 일이 없도록 대부제도라든가 장학금제도를 확충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다지만 아직 완벽하지 않아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과거 무상교육 시절에는 졸업후 국가가 배치해주는 직장에서 일하면 됐습니다만, 유상교육으로 바뀌면서 이제는 학생들 스스로의 힘으로 취업을 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이에 따라 대학졸업생들의 취업경쟁도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졸자들의 취업률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대학생들에게 유상교육을 실시하면서 취업도 스스로 선택하도록 한 것은 중국사회의 전체적인 개혁작업의 일환이라고 보면 됩니다. 현재 중국 대졸자들의 취업실태를 보면 그리 만만치가 않습니다. 2003년 12월에 발표된 각 대학의 취업률 통계를 보면 저장대학이 90%를 넘어서 가장 높습니다만, 이는 특별한 경우입니다. 중국에서도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취업이 보장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대학졸업자가 보모로 취업하는 사례도 나타나 화제가 된 바 있습니다. 상하이의 한 인력회사에서 보모를 모집했는데 뽑힌 다섯 명이 모두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또 이들의 월급이 1800위안이니까 그리 많은 편도 아닙니다. 이렇게 대졸자 취업이 어려워진 것은 아마 대학입학 정원을 최근 몇 년간 기하급수적으로 늘린 것이 한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실제로 2003년 대학졸업자는 212만명으로 2002년의 67만명보다 3배 가량 늘었습니다. 당연히 일자리도 그만큼 늘어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지요.”
교육의 빈부격차 현상
중국의 초등학교는 샤오쉐(小學), 중고교는 각각 추중(初中), 가오중(高中)으로 불린다. 대학 못지않게 변모를 거듭하고 있는 초중고교는 농촌과 도시의 교육여건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개혁개방이 몰고온 빈부격차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장이 바로 초중고교인 셈이다.
-중국의 의무교육 연한이 9년입니다만 농촌은 교육여건이 극도로 열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희망공정(希望工程)’이라는 벽지학교 지원제도도 있어 중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교육성금이 답지하고 있는데요. 반면 대도시의 일부학교는 호화롭기 짝이 없다고 소문이 나 있습니다. 교육의 빈부격차는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입니까.
“희망공정은 중국정부가 개혁개방 이후 농촌이나 산촌지역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도입한 제도로 일종의 민간에 의한 학교지원사업입니다. 이 프로젝트에 돈을 기부하면 학교를 만들어 ○○ 희망소학 혹은 △△ 희망중학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문을 열게 됩니다. 이 같은 희망공정을 통해서 벽지에 학교가 많이 지어졌습니다만, 몇 년 전만 해도 학생들이 교과서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요.
반면 대도시지역은 학교 수준이나 시설 수준이 아주 좋습니다. 일부 중점학교나 사립학교의 경우는 한국보다도 앞서간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제가 1년 전에 베이징4중을 방문했어요. 이 학교는 과거 한국의 경기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이 건물 한 동(棟) 전체를 실험동으로 꾸민 것이에요. 물리 화학 생물 등 수많은 실험실에서 진행되는 각종 실험으로 냄새가 진동을 할 정도였어요. 식물배양실까지 두고 철저한 실험위주의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또 수영장이 있다길래 가봤더니 학생들이 매일 수영을 하도록 돼있어요. 또 작년에 항저우의 한 고등학교에 간 적이 있는데, 말 그대로 우리나라의 대학 수준이에요. 없는 시설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미술수업시간에 도자기를 굽는 가스 가마 시설도 있었는데요. 미술시간에 직접 도자기를 만들어 학생이 집에 가지고 갈 수 있다고 하더군요.”
초호화판 기숙학교
-그렇게 좋은 시설을 갖춘 도시지역의 학교는 예산을 많이 지원해줘서 그런 겁니까 아니면 학생들한테 돈을 많이 거둬서 그렇습니까.
“기부금이 큰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어요. 중국은 우리와 달리 기부금입학제가 실시되고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항저우의 고등학교도 기업체로부터 후원을 받아 그런 훌륭한 시설을 갖춘 것입니다.”
-방금 베이징4중이나 항저우의 고등학교 사례를 말씀해주셨는데요. 그런 우수한 국립학교 말고도 이른바 귀족학교라든가 혹은 기숙학교가 성행하고 있다는데, 이런 학교가 지금 크게 주목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중국에서는 사립학교를 민반(民辦)학교라고 하는데, 여러 종류가 있고 수준차도 큽니다. 사립 초중고는 대부분 학교에서 숙식을 하는 기숙학교로 운영됩니다. 이 기숙학교는 시설이 좋고 운영방식이 독특해서 일반적으로 귀족학교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몇 개 학교만 소개해보죠. 베이징에 있는 수런(樹人)학교는 1993년 6월에 개교한 12년제 기숙학교로 700명이 재학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 모두 이곳에서 마치게 돼 있지요. 이 학교의 학기당 학비가 초등학교 1만3800위안, 중고등학교는 1만4800위안인데, 기타 비용을 포함하면 최소한 2만위안(약 300만원)이 넘게 들어갑니다.
또 베이징에 후이자(匯佳)학교라는 12년제 기숙학교가 있는데, 여기도 비슷해요. 학비가 1년에 약 4만5000위안으로 12년 졸업하려면 총 55만여 위안을 지불해야 하니까 우리돈으로 따지면 8000만원 이상이 들어가는 셈입니다. 이 학교는 기숙사가 호화로운 것은 기본이고, 보도교사라는 상근 과외교사가 있어서 방과후에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의사도 상주한다고 해요. 그리고 랜(LAN)으로 연결된 컴퓨터를 통해 학부모들이 학생들의 생활을 수시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이런 귀족학교들은 영어교육에도 차별화를 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학교는 체육시간에 ‘하나 둘 셋’이라는 구령을 ‘원 투 스리’로 하게 하고, 학교 경비원들에게도 영어를 배울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광저우(廣州)시에 있는 현대준혜학교(現代俊慧學校)의 교장은 ‘우리 학교는 아이들이 중학교 졸업시 대학 1,2학년의 영어 수준에 도달하고, 고교졸업시에는 대학 3,4학년 수준에 도달하도록 가르친다’고 말합니다. 아예 초등학교 고학년 어린이들을 단체로 미국에 데려가 영어 단기훈련을 시키는 학교도 있을 정도입니다.”
치밀한 영재교육 시스템
-귀족학교와의 관계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중국에서도 영재교육을 하고 있습니까. 들리는 이야기로는 덩샤오핑(鄧小平) 등장 이후 영재교육을 매우 중시했다고도 하는데요. 실제로 중국에 영재교육이 있다면 어떤 시스템으로 이뤄지고 있습니까.
“중국에서는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영재교육이라는 말을 꺼낼 상황이 아니었어요. 국민들의 교육수준이 너무 낮아 다른 데 신경 쓸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개혁개방이 시작된 1978년 영재교육이 도입됐습니다. 시장경제를 살리고 사회를 발전시키려면 아무래도 최상의 교육을 받은 최고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영재교육을 중국에선 차오창(超常)교육이라고 하는데요. 그 시스템을 보면 아주 체계적입니다.
우선 초등학교나 중학교에는 영재반이 있고, 고등학교에는 소년반, 대학교에는 대학소년반이 설치돼 있어요. 그래서 보통 고등학교 때 소년반에 들어가면 자동적으로 대학소년반에 진학하게 되는데, 이때 나이가 13세쯤 됩니다. 대학소년반에서는 또래들끼리 생활을 하고 대학 3학년이 되면 전공별로 흩어져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보통 15세에 대학을 졸업한 뒤 20세에 박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외국으로 나가서 다시 박사학위를 더 받고 국내에 들어와서 전문분야에서 인재로 활동을 하는 겁니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영재교육 시스템이 아주 치밀하게 짜인 나라가 바로 중국입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영재교육을 위한 학교가 별도로 있는 게 아니라 기존학교 내에 특별반을 설치하는 형식이군요.
“중국 영재교육의 특징은 일반교육과 영재교육이 공존하는 시스템이에요. 그러니까 학교 속에 또 하나의 학교가 있는 셈입니다. 중국에서 가장 먼저 영재교육을 시작한 학교가 베이징8중인데 여기에도 소년반이 있어요. 톈진(天津)실험소학에도 학년마다 한 학급의 소년반이 있는데 교육과정은 일반학급과 똑같습니다. 단지 교사들이 영재교육에 맞게 개편한 것이지요. 모든 학교가 이런 소년반을 설치하고 있는 건 아니고 주로 대학의 부속학교인 실험학교에서 영재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는 입시를 치릅니까,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학교를 배정하고 있습니까.
“초등학교는 그냥 입학하고 중학교는 이전에 시험을 봤는데 1998년부터 컴퓨터에 의해 근거리 배정을 하고 있어요. 그러나 고등학교는 입학시험을 봅니다. 중카오(中考)라고 해서 베이징 같은 경우, 어문 수학 외국어는 베이징시 교육국에서 공동출제를 하고, 그밖에 몇 과목은 각 구(區)나 현(縣) 별로 출제합니다. 대학과 마찬가지로 일류학교인 중점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입시경쟁이 매우 치열합니다.”
-고교입학과 관련해 기부금입학제와 비슷한 개념의 택교(擇校)라는 것도 있던데요. 이건 어떤 제도입니까.
“이 제도는 일단 입시를 통해 정원을 채우고 난 후, 커트라인에 조금 못미치는 점수로 낙방한 학생이 꼭 그 학교를 가고 싶어할 경우 택교비를 내고 입학하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이때 택교비는 최대 3만위안을 넘을 수 없도록 돼있습니다만, 5만위안 이상 받는 경우도 있고 해마다 그 액수가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입학하는 학생을 택교생이라고 하는데, 모집정원의 10%를 넘을 수 없고 학교가 정해놓은 일정한 점수를 얻은 학생에 한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이 택교제도는 고교뿐 아니라 중학교에도 있습니다. 중학교는 입학시험은 없지만 택교를 통해 가고 싶어하는 지역의 시범학교 같은 곳에 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베이징시의 경우 대학이 몰려 있는 하이뎬취(海淀區)에 있는 중학교들이 인기가 높습니다. 대학에도 택교는 아니지만 찬조금 내고 입학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이런 택교 제도는 상당한 액수의 기부금을 내야 하므로 학부모에게 부담이 크고 또 사회적 여론도 좋지 않을 것 같은데요.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학교 입장에서는 발전기금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선호합니다. 학부모나 학생 입장에서는 원하는 학교를 갈 수 있으니까 역시 좋아하고 있지요. 사회적으로는 환영을 받지 못하지만 학교측이나 택교 당사자들은 선호하고 있어 이 제도가 쉽게 없어지지 않을 전망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부 부유층들은 여론도 좋지 않은데 굳이 거액의 택교비를 내고 입학할 필요가 있느냐 해서 미국이나 싱가포르, 영국 등으로 조기유학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중국에서도 조기유학 붐이 일고 있어요.”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중국인들을 접하다 보면 참 말을 잘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회식 때도 보면 꼭 환영사니 답사니 해서 유창한 연설을 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마치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아요. 중국의 교육과정에 이런 발표력 훈련을 특별히 중시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중국이 어문교육을 엄청나게 중시한다는 점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중국어를 가르칠 때 단어부터 가르치지 않고 발음기호를 통해 언어를 터득하도록 합니다. 한 6개월 가량을 이렇게 발음기호 위주로 가르치고 나서야 그 다음부터 글자를 보도록 하고, 또 다양한 고사성어나 위인전기 등을 읽고 쓰게 하는 학습을 많이 시켜요. 이런 교육방식이 중국사람들이 말을 잘하는 첫째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둘째는 사회주의의 특징 중 하나가 집단으로 발표하고 토론하는 기회가 많다는 점이에요.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이 같은 체제의 특성이 발표력을 키운 하나의 배경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중국인들의 또 하나 특징이 무슨 연설을 하거나 글을 쓸 때 고사성어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웬만한 유명한 시나 명문장은 줄줄이 외워서 구사하고 있어요. 그래서 물어봤더니 국어시간에 유명한 시 100수를 암기하도록 했다는 것이에요.
“그렇습니다. 문장을 철저히 암기시키는 교육을 중시하는 것 같아요. 우리처럼 시험에 필요한 부분만 외우는 게 아니라 시나 문장 전체를 외우도록 합니다. 저의 집 아이도 베이징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 왔는데, 지금 고등학교에 올라갈 나이인 데도 그때 배운 것을 잊지 않고 있어요. 발음도 아주 정확하고요. 바로 암기 암송교육을 철저히 받은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교육제도 가운데 가장 먼저 우리 눈에 띄는 것이 아마 대학 입시제도일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도 논란이 됐던 지역할당제에 의한 신입생 모집을 이미 오래전부터 실시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대학 신입생의 선발도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입학시험 문제출제도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많은 게 사실이다. 중국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유학생들뿐 아니라 교육정책 당국에서도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중국의 대학은 통일적으로 실시하는 입학고사(高考) 성적과 함께 다양한 요소를 병행해 학생을 선발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대학입시와 학생선발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집니까.
“중국의 현행 대입제도는 문화혁명이 끝난 후인 1977년도에 처음 골격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전 10년간은 입시가 없었으니까요. 중국의 대학입시에서 가장 중요한 게 우리의 수능시험과 비슷한 통일시험입니다만 이것 말고도 여러 방법으로 학생들을 선발합니다. 최근 도입한 자율선발제도가 그 가운데 하나로, 통일시험 점수가 아닌 대학의 자율적인 방법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것입니다. 이 제도에 의해 2003년도에 22개 대학이 정원의 5% 이내에서 학생을 자율적으로 선발했어요.
이밖에 또 소년반, 정향배양생, 보송생, 추천생, 특기생 등의 선발방식이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학생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대학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영재교육이 제대로 되는 것이지요. 단순화시켜 말하면 일반학생들은 입학시험인 통일시험을 통해서 뽑고 또 별도의 형식으로 학생들을 뽑는 이원화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죠.”
지역할당제의 실제 사례
-지금 말씀하신 다양한 선발방식 가운데 특히 고교에서 대학에 학생을 추천해 무시험으로 진학하는 보송생(保送生)제도가 인상적입니다. 우리나라처럼 고교의 추천장을 대학에서 별로 신뢰하지 않는 풍토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송생 제도는 대학입학 통일시험을 거치지 않고도 고교 추천에 의해 대학에 가는 제도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중국의 대학과 고교 사이에 신뢰관계가 구축돼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와는 달리 중국에선 고교에서 보내준 내용을 대학이 그대로 믿습니다. 믿을 수밖에 없는 게 형식적인 추천이 아니고 당안(?案)이라고 해서 해당 학생에 관한 모든 것이 담긴 기록을 토대로 추천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성적은 물론 학교생활 사회활동 품행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어 이것만 보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할 수 있게 돼 있습니다. 이 당안은 사회에 나가 직장생활을 할 때도 활용되는 등 일생동안 그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학신입생 선발시 지역할당제를 도입하는 문제가 거론됐다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중국은 오래 전부터 지역할당제를 실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역할당제가 중국에서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이 제도는 각 대학의 모집정원이 지역별, 그러니까 각 성과 직할시별로 할당이 되면, 그 지역 내부의 경쟁을 통해서 할당된 숫자만큼 대학에 진학하는 것입니다. 2003년도 칭화대학의 합격상황표를 보고 설명해보면 칭화대가 광시(廣西)성에는 60명을 배정했는데, 커트라인이 805점이었습니다. 광둥성은 69명이 배정됐는데 커트라인이 815점, 상하이시는 66명에 커트라인이 555점이었어요. 신장(新疆)성의 경우는 30명 배정에 597점으로 지역별로 배정인원과 커트라인에 차이가 많습니다.
이 지역할당제를 학생 입장에서 보면 예를 들어 산둥(山東)성의 고3학생이 대학에 가려고 할 때 산둥성에 할당된 각 대학의 모집인원 즉, 베이징대학 ○○명, 칭화대학 △△명, 산둥대학 ××명 등등의 리스트를 참고해서 자신의 통일시험 성적을 가지고 3개의 대학까지 지망을 하는 식입니다.”
-지역별로 커트라인에 차이가 많은데요. 대개 어떤 지역들이 높거나 혹은 낮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또 이로 인한 불만이라든가 사회적 현상이 발생하지는 않습니까.
“베이징시나 상하이시처럼 교육여건이 아주 좋은 곳이거나 아니면 아예 낙후된 곳이 커트라인이 낮기 때문에 수험생들에게 유리합니다. 교육여건이 좋은 대도시는 할당된 인원이 많기 때문이고, 교육 낙후지역은 학교수준이 낮으니까 자연 시험성적도 떨어지는 것이지요. 베이징시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자가 전국의 0.9%밖에 안 됩니다만, 베이징대는 전체인원의 14%를 이곳에 할당하고, 칭화대는 무려 18%를 할당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커트라인이 타지역에 비해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역별 불균형 현상이 심하다 보니 ‘대학입시 이민’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일부 수험생들이 지역간 점수차를 고려해서 본인과 부모의 호구(戶口)를 다른 성에 옮겨 놓고 있다가 시험 때 호구가 있는 성으로 가서 시험을 보는 거죠. 할당인원이 적은 곳에서는 불만의 목소리도 나옵니다만, 오랫동안 시행돼온 제도여서 쉽게 바꾸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이런 지역할당제를 실시하게 된 배경이나 이유는 뭡니까.
“이 제도가 언제부터 생겼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제가 보기엔 호구제도 때문인 것 같아요. 중국은 인구문제가 워낙 심각하다 보니까 출산에서부터 대학입학생 숫자까지 모두 계획적으로 조절하고 호구제를 엄격하게 실시합니다. 또 대학생들이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니까 대학의 정원도 기숙사 수용인원 등을 고려해서 철저히 계획적으로 정합니다. 따라서 지역할당제도 지역발전을 위한 배려 차원이라기보다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학생 숫자를 지역별로 관리할 필요성 때문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계획적으로 하지 않으면 호구정책의 근간이 흔들리게 된다는 것이지요.”
-중국의 이 같은 지역할당제를 우리가 참고해보면 무언가 입시제도 개선에 시사해주는 점이 있지 않을까요. 혹시 교육당국이나 연구기관에서 중국의 경험을 우리 현실에 맞게 변형해 적용하는 것을 연구해본 적이 있습니까.
“본격적으로 검토해본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이디어 자체는 도움이 되겠지만 지역할당제가 중국내에서도 형평성에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신중히 검토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나라처럼 도시지역에 전인구의 70~80%가 살고 있는 상황에서 지역할당제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대입 시험과목 3+X로 개혁
-중국은 매년 7월7일부터 3일간 전국대학입시통일시험을 치르지 않습니까. 최근 시험과목이 3+X로 바뀌었는데, 그 내용에 대해 국내 교육관계자들도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중국도 그동안 입시위주 교육이 성행하다 보니까 학교교육이 암기 위주로 흘렀어요. 그래서 이런 폐단을 막고 학생들의 창의성이나 종합적인 사고력을 향상시킨다는 목표아래 대학입시과목을 획기적으로 바꿨습니다. 즉 개혁 이전까지 문과 시험과목은 정치 어문 수학 역사 외국어, 이과는 어문 수학 물리 화학 외국어 등 각각 5과목이었는데요. 이것을 3+X로 개편했어요. 여기서 3은 필수 세 과목으로 어문 수학 외국어입니다. 문과든 이과든 이 세 과목을 필수로 보는데 외국어는 영어 불어 등 5개 국어 중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X는 통합과목이라고 해서 문과는 역사 지리 정치를 통합한 문제가 출제되고, 이과는 물리 화학 생물을 통합한 문제가 출제됩니다.
입시과목 개혁의 핵심은 바로 이 X에 있습니다. 통합능력측정시험이라는 정식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종합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는 문제가 출제되므로 과거와 같은 단편적인 암기위주 수업으로는 풀기 힘들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하천의 치수(治水)에 관한 문제라면 하천의 지리적 특성과 이와 관련된 역사적인 배경, 치수의 정치적 의미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해야만 제대로 답을 쓸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사의 수업방식이 달라져야 하고 학생들도 통합적으로 사물을 보고 이해하려는 습관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2003년부터 전국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3+X 시험은 교육현장의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시험문제 출제가 어렵고 학업부담이 과중하다는 단점도 지적되고 있습니다.”
-중국의 3+X에 대비되는 게 우리의 수학능력시험인데요. 문제의 난이도랄까 수준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요.
“중국의 대입 시험문제는 우리처럼 객관식으로만 돼 있지 않고 주관식과 객관식이 섞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관식에 이런 문제가 있어요.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쓴 제퍼슨의 사상에 대해서 읽고 답하시오’ 하고는 제퍼슨의 사상을 설명하는 지문이 몇 개 나옵니다. 또 영어문제의 경우에는 A라는 중국인이 미국에 가서 교통사고를 목격하고 경찰서까지 간 상황을 그린 네 컷짜리 만화를 제시하고는 6하원칙에 의해 교통사고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영작하라는 문제가 나옵니다. 이걸 보면 중국의 대입시험 문제 난이도가 낮다고 할 순 없겠죠. 우리 같으면 이런 문제를 내고 싶어도 채점의 어려움 때문에 출제하지 못할 것 같지만, 제가 유심히 관찰해보니까 중국은 나름대로 일손을 줄이면서 주관식 문제를 채점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있었어요.”
중국 명문대 학생들의 실력
-중국의 인구가 13억 가량 되지 않습니까. 이런 인구대국에서 명문대학에 입학한다는 것은 보통 수재가 아니면 불가능할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또 경쟁도 대단할 것 같은데요. 실상은 어떤가요.
“이렇게 보면 되죠.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진학률이 97% 정도입니다. 다음에 고교진학률은 58%, 대학진학률은 13~15%에 불과합니다. 이 계산대로라면 동일연령층의 6% 미만이 1000개의 일반대학에 들어가는 셈이니까, 여기서도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학생이라면 대단한 실력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러나 명문대학이라고 해도 경쟁률 자체는 그리 높지 않습니다. 각 성별로 시험을 주관하고 있고 우리처럼 대부분의 학생이 대학진학을 희망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기준에 도달한 학생들이 응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학입시 경쟁률이라는 것 자체가 발표되지도 않습니다.
아무튼 대학생의 존재라는 게 굉장히 희소가치가 있고 명문대생의 실력이 우수하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아요. 아까 저장대학 학생들을 상대로 영어 강연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중국은 외국어전공학과는 해당 외국어로 수업을 하도록 하고 있어요. 제가 학부 학생들도 많이 만나봤는데요, 영문과 4학년만 되면 그 어렵다는 셰익스피어 소설을 술술 읽는 것이었어요. 최고 명문대학 학생들은 비율로만 보아도 우리나라의 명문대생보다 훨씬 좁은 바늘구멍을 통과한 학생들이니까 자질이 뛰어날 수밖에 없겠지요.”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중국의 인구와 대학입학 정원 등을 감안하면 대학의 문은 우리나라보다도 훨씬 좁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형편이어서 중국에서도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입시 위주의 교육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우리처럼 과외나 학원교습이 성행하고 있습니까.
“부시반(補習班)이라는 일종의 입시학원도 꽤 있습니다만, 그보다 자쟈오(家敎)라고 해서 현직교사가 자기집에 학생을 모아놓고 지도하는 방식이 더욱 성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A라는 교사가 방과후 자기반 학생들을 모아놓고 가르치는데, 그것도 자신의 집에서 숙식을 함께하면서 가르치는 거예요. 물론 돈을 받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도 많이 생깁니다. 시험볼 때 아무래도 다른 학생들보다는 선생님 집에서 배우는 학생들이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중학교 때 이런 자쟈오를 많이 시키려고 합니다.”
중국식 과외 ‘家敎’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과외형태인데요. 법적으로 문제는 없습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어떤 내용입니까.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중국은 교사의 과외를 금지하는 규정이 없어요. 그리고 인터넷에 보면 교사들이 올려놓은 자쟈오 사이트가 많습니다. 어느 학교 교사가 어떤 학생들을 구한다는 내용이죠. 또 학생측에서도 보수 얼마에, 어떤 선생님을 구한다는 내용을 올려놓습니다. 비밀리에 하는 게 아니라 이처럼 공개적으로 만나 조건을 절충합니다. 교사가 가르치는 학생은 자기 소속학교 학생인 경우가 많지만 타학교 학생도 가르칩니다. 자쟈오가 아주 광범위하게 성행하고 있는데, 비용도 천차만별입니다. 집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며 가르치니까 아무래도 좀 비싼 편이지요.”
-자쟈오 이외에 대학생 아르바이트라든가 다른 형태의 사교육은 어떻습니까.
“아까 잠깐 말씀드린 것처럼 입시학원에 해당하는 부시반이 있고, 푸다오(輔導)라고 해서 주로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형태로 가르치는 과외도 성행하고 있습니다. 또 주말에는 부시반이나 소년궁 같은 곳을 찾아가 예능교육을 받는 학생이 많습니다. 대부분 가정마다 자녀가 한 명뿐이어서 그런지 예능교육을 굉장히 많이 시킵니다. 그러나 이런 사교육은 전국적인 현상은 아니고 도시지역에서 성행한다고 봐야 겠지요.”
-입시 위주 교육에 따른 폐해가 우리처럼 사회문제화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더욱이 중국은 산아제한정책으로 한 자녀만 갖도록 돼 있어 이른바 샤오황디(小皇帝)를 떠받드는 풍토 아닙니까. 어떤 면에선 한국보다도 자녀교육이 더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페이두(陪讀)현상이라는 게 있어요. ‘페이’라는 게 데리고 다닌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학부모가 자녀를 위해 좋은 학교가 있는 곳으로 옮겨다니는 겁니다. 시골 사는 부모가 생업도 팽개치고 도시에 방을 얻어 자녀가 학교 다니는 것을 뒷바라지하는 것이지요. 아이의 교육을 위해 부모의 직업까지도 희생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페이두 현상이 중고등학교에만 있는 게 아니고 대학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종의 과잉보호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학생들의 자립성을 말살시킬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중국의 유학생 정책
구자학 박사는 베이징에서 4년간 유학생활을 경험한 까닭에 중국유학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박사학위논문도 한중 양국의 근대시기 교육교류사에 관한 것이어서 중국유학과는 이래저래 인연이 깊다. 최근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중국유학에 대한 전문가의 시각은 어떤 것일까.
-요즘 국내에서는 중국유학 붐이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처음엔 중국대학으로 진학하거나 중국어 연수를 가는 학생이 많았는데, 최근엔 조기유학에도 관심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중국유학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선 현재 중국에 유학중인 한국학생은 얼마나 됩니까.
“중국유학생 규모가 2003년 6월30일 기준으로 대학원에 1369명, 대학에 6682명인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또 어학연수생이 1만216명입니다. 초중고 조기유학생은 2002년 기준으로 3587명인데, 초등학교 1876명, 중학교 994명, 고등학교 717명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유학생 규모는 미국 다음으로 큰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숫자는 시도교육청에서 공식으로 집계한 것이니까, 아마 실제로는 더 많은 유학생들이 중국에 있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대체로 중국유학생을 3만여명으로 추산하더군요.”
-한국학생들에 대한 중국정부의 기본적인 정책이랄까 시각은 어떤 것입니까. 주한 중국대사관이 주최하는 유학설명회가 서울에서 열리는 것을 보면 일단은 한국학생을 가능한 한 수용하려는 자세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너무 유학생이 급증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으니까 무언가 규제하려는 움직임 있지 않을까요.
“규제 움직임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모든 학교가 유학생을 못 받아들여서 안달이었습니다만, 지금은 학생들의 질적인 수준도 고려하되 기본적으로 유학생 유치를 장려한다는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왜냐면 대학의 경우 유학생으로 인한 재정수입 증대 효과가 엄청나거든요. 그걸 포기할 수 없겠죠. 중외합작학교설립조례를 보면 외국유학생은 계속적으로 확대한다고 돼 있어요. 단지 오려는 사람이 많으니까 입학기준을 과거보다 엄격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뿐이지요.”
“양쯔강 이남 대학을 노려라”
-중국에 유학하려는 한국학생들은 무조건 베이징이나 상하이에 있는 일부 명문학교로만 가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학생들이 너무 많이 몰려 여러 가지 부작용이 일어난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립니다. 그러나 조금만 눈높이를 낮추면 명문이 아니더라도 오히려 훨씬 알찬 유학생활을 할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습니까. 이런 점을 감안해 추천할 만한 유학지역이나 학교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중국은 각 성(省) 자체가 하나의 국가단위로 볼 수 있을 만큼 큽니다. 베이징이나 상하이로만 가려 할 게 아니라 성 단위로 눈길을 돌릴 필요성이 있어요. 저장성 수도인 항저우에 있는 저장대학이라든가, 광둥성의 중원(中文)대학, 쓰촨성의 쓰촨과기대학 같은 성 단위 지역경제의 중심지에 소재한 중점대학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그런 지역의 중점대학도 다 명문이거든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중국내 중점대학이 95개쯤 되지만, 이중에서 50~60개는 전국 각지의 구석구석에 산재해 있는 대학입니다. 이런 데서 공부를 하면서 인맥을 쌓는 게 유리하다고 봅니다.
지금 상황에서 본다면 저는 양쯔(揚子)강 이남 지역으로 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지역은 경제가 발달했을 뿐 아니라 지금 중국정부가 역점을 두고 있는 서부대개발의 시발점이 되는 쓰촨성의 청두(成都)와도 연결되는 곳이어서 이곳에서 공부를 한다면 무역회사에 취직하려거나 자기 사업을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유학할 학교를 추천한다면 저는 베이징에 있는 항공항천(航空航天)대학을 권하고 싶어요. 이 학교는 수준이 매우 높아서 열심히 공부하면 아직 이 분야가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우리나라에서 취업도 문제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 양쯔강 이남 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는데요. 중국대학의 특성을 고려할 때 전공분야로는 어느 쪽이 앞으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몇 가지가 있는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기초과학 분야를 들 수 있어요. 중국은 인공위성이나 원자탄, 비행기를 만들 수 있을 만큼 기초과학이 발달돼 있습니다. 두 번째는 외국어 분야입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외국어 교육을 아주 탄탄하게 시키는 나라입니다. 개혁개방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지의 공산주의국가 사람들이 와서 외국어를 배우는 기지 역할을 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영어를 비롯해 외국어 교육의 틀이 잘 짜여진 나라입니다. 다음으로 중국이나 동양의 문사철 분야 연구는 역시 중국이 자료가 많고 정리가 아주 잘 돼 있습니다. 기초학문 말고 응용학문분야도 도움이 돼요. 아까 말씀드린 항공기 분야, 컴퓨터 소프트웨어 분야도 지금은 우리를 초월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조기유학의 장단점
-중국이 외국어 교육에 노하우가 많은 나라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일부 학부모들 중에는 중국에 유학을 보내면 중국어와 함께 영어도 익혀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점은 어떻게 보십니까.
“그래서 어떤 학부모들은 자녀를 중국대학의 영문학과로 보내기도 합니다. 중국어는 기본적으로 배울 것으로 보고 두 개의 언어를 습득하겠다는 것이죠. 제가 보기에 중국에서 영어와 중국어 두 개의 언어를 습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국유학을 크게 나누면 조기유학을 거쳐 중국대학으로 진학하는 경우와, 국내에서 고교과정까지 마치고 중국대학에 진학하거나 석·박사학위를 하러 가는 경우가 있는데요, 중국이라는 나라의 특성을 고려할 때 조기유학은 어떤 장단점이 있겠습니까.
“다른 나라도 그렇겠지만 특히 중국은 그 문화와 전통을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일찍 중국에 가서 공부를 하면 문화와 전통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대학 때 몇 년 갔다오는 것과는 다릅니다. 또 중국어를 분명하게 배울 수 있고 더 중요한 것은 인맥을 구축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실험소학교’ 같은 좋은 학교에 보내면 나중에 중국사회의 지도자가 될 아이들을 사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반면 조기유학을 보낼 경우에 단점도 있어요. 가장 어려운 게 생활지도 문제입니다. 학부모들도 이 점을 걱정하고 있어요. 일부 유학원들이 한국학생들을 집단으로 모아서 책임지고 생활지도를 해준다고 하는데, 문제는 그렇게 했을 때 한국아이들끼리 어울리기 때문에 언어를 배우고 중국문화를 접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조기유학을 보내더라도 단체로 보내기보다는 자녀가 현지에서 생활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기만 하면 개인적으로 보내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습니다.”
-조기유학의 경우, 한국인으로서의 기초적인 소양을 쌓아야 할 시기에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교육을 받는다는 점을 우려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무비판적으로 사상교육을 받아들일 소지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물론 일반 중국인 학교에 입학하면 사상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초등학교에는 품덕 과목이 있고 중고등학교에는 사상 과목이 있어서 이를 통해 사회주의 사상교육을 받게 되는데 그것 때문에 조기유학생들이 크게 영향을 받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주일에 사상교육시간이 얼마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외국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중고교에서는 따로 국제반을 편성하는데, 이 경우 대부분 사상과목을 가르치지 않으므로 괜찮다고 봅니다.”
의과계통 중국유학의 문제점
-중국유학을 가려는 사람들 중에는 한어수평고시(HSK)만 준비하면 언어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학 알선업체 광고에는 몇 달만 집중적으로 중국어를 공부하면 유학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합니다만, HSK 성적과 실제 중국에서의 수학능력과는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몇 달 집중적으로 중국어 공부를 하는 것으로 대학 수업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절대로 못 따라갑니다. HSK는 단순한 중국어능력시험이에요. 대학에서 제대로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한 차원 높은 중국어가 필요하죠. 지금 중국대학에 입학하려면 HSK 6급 정도를 요구하는데 그것만으로는 강의를 듣기에 부족합니다. HSK 성적과 중국대학에서의 수학능력은 일치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것은 다만 최소한의 요구일 뿐이므로 충분한 어학능력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중국의 중의약(中醫藥)대학에 유학한 한국학생들이 졸업후 국내에 돌아와 한의사자격시험을 볼 수 없는 실정입니다. 또 얼마 전에 중국에서 의과대학 나온 유학생 출신들에게 국내 의사고시 자격을 부여할 것으로 알려졌다가 계속 불허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까. 중의약의 경우 중국대학의 수학연한이 국내대학보다 1년 짧다는 게 한의사 국가고시 자격시험을 주지 않는 이유로 알고 있습니다만, 중국과 한국의 학제 차이에서 비롯되는 문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지금 의과대학 계통이 문제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중국에서 의과대학은 대부분 5년제인데요. 우리와 비교해 1년이 모자란다고 해서 국내에서 활동할 자격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국유학생들이 많은 옌볜(延邊)대 의대 같은 곳에서는 아예 6년제로 고쳤는 데도 인정되지 않았지요. 제가 알기로는 주한 중국대사관에서 한국정부에 건의를 했다고 합니다만, 정부 입장에서는 내면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역시 수업연한이 문제가 된 중의약대 졸업생의 경우도 한의사협회의 반발이라든가, 이걸 허용했을 경우의 의료인력 수급문제 등으로 인해 아직까지는 해결되지 있어요.
반면 중국에서 의대나 중의약대를 졸업하고 온 유학생들은 앞으로 숫자가 많아지면 당국도 결국은 인정해주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갖고 있거든요. 이게 나중에 헌법재판소에 가는 등 큰 문제가 될 수 있어요. 좀더 시간이 흐르면 기존의 중의약대학 졸업생에다가 의대졸업생까지 가세해 엄청나게 복잡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학제의 차이로 인해 빚어지는 혼란은 현재로서는 의과계통 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중국 교육개혁의 성공 비결
-마지막으로 중국의 교육정책이나 입시제도 혹은 교육현장에서 참고할 만하거나,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이 있다면 어떤 내용일까요.
“중국도 우리처럼 교육체제개혁에 나서고 있는데요. 중앙에서부터 밑에까지 일사불란하게 이뤄집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한번 만들었다가 몇 년 후에 확 뒤집어버리고 새로 만드는 식이 아니라 계속 내용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입니다. 10년 전에 만든 교육개혁방안이 지금까지도 그 맥을 이어오고 있어요. 그 다음에 중앙에서 거시적인 것을 만들어주면 지방에서는 현지실정에 맞는 구체적인 정책방안을 만들어서 교육개혁을 합니다. 이런 게 잘 돼있어요. 또 교육개혁안이 국가발전계획의 한 부분으로 되어 있어요. 우리는 교육개혁안과 국가발전계획이 별개인 것처럼 여겨지는데 중국에선 하나의 틀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지요.
입시제도 측면에서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3+X 같은 건 상당히 혁신적이고도 깊은 의미가 담긴 개혁사례라고 생각됩니다. 이 입시과목 개혁은 학교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채택한 것인데, 이렇게 하기까지 5년 동안의 준비기간을 가졌어요. 우리는 어떤 개혁조치를 할 때 모의시험과정을 거치지 않고 단번에 확 시작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실험이라는 것을 잘 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중국은 처음에 1개 성 혹은 2개 성부터 실험을 해봅니다. 그 뒤 문제점을 보완해서 5개 성에서 하고 또 10개 성에서 하고 해서 2003년도에 전국으로 확산시킨 겁니다.
대학입학통일시험에 대비해 학습지침서를 만든 것도 우리가 눈여겨볼 만 합니다. 이 지침서는 매우 두꺼운 책인데 학생들은 이 범위 내에서만 공부를 하도록 돼 있어요. 우리처럼 교과서 내에서 출제한다고 해놓고도 막상 교과서를 벗어나는 어려운 문제가 나오니까 너도나도 학원에 가는 것과는 달리 이 학습지침서 범위 내에서만 공부하면 되도록 아주 상세하게 잘 만들어 놓았어요.
결론적으로 중국의 교육은 계획경제의 깊은 잠에서 벗어나 시장경제체제하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어요. 중국에서 교육개혁이 급속히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시장경제의 개념을 학교현장에 접목시키는 과정이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백지에 그림을 그리듯이 정부가 취하는 교육정책들이 교육현장에서 비교적 잘 수용되었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중국교육의 발전이 한국의 장래와도 연관된다고 볼 때 우리가 어떤 자세로 교육개혁에 임해야 할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중국시장의 특성과 공략 노하우, 그리고 중국경제의 파고를 극복할 우리의 생존전략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우리 사회에 중국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게 엊그제가 아니지만 요즘처럼 중국이 중대한 관심사로 떠오른 적도 없는 듯하다. 그 핵심은 역시 고속으로 성장하는 중국의 경제다. 금년들어 기록적인 증가세를 보이는 수출도 따지고 보면 대(對)중국수출의 급증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중국진출 한국기업들의 활약도 눈부시다. 휴대전화 단말기가 인기 상종가를 기록하더니 이제는 국산자동차가 중국대륙을 누빌 채비를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선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너나할 것 없이 떠나는 바람에 산업공동화 우려가 현실화되고, 이로 인해 사라진 일자리가 100만개에 달한다는 비명이 나오고 있다. 중국경제가 드리우는 어두운 그림자인 셈이다. 한마디로 중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이 우리에게는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노용악(盧庸岳·64) LG전자 중국지주회사 고문은 10년째 중국현지에서 사업을 진두지휘해온 경영인이다. 노 고문은 2002년에 중국경제보가 뽑은 ‘중국 10대 가전(家電)인물’에 선정됐고, 지난해에는 사스 창궐 기간에 보여준 용기와 사업능력을 평가받아 ‘역경을 이긴 10대 경영인’(중국 재경시보), ‘비상인물’(非常人物·대단한 사람, 경제참고보)로 꼽히는 등 중국 언론매체들로부터 높이 평가를 받은 바 있다.
1965년에 LG전자에 입사해 한국 전자산업의 산증인이자 마케팅 전문경영인으로도 유명한 ‘중국통’ 노용악 고문. 그가 체득한 중국에서의 성공 노하우는 어떤 것일까. 또 그의 눈에 비친 중국시장의 내막과 특징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지에 진출한 혹은 진출하려는 한국기업인들은 어떤 사업전략을 구사해야 하나? 이번달 중국탐험 인터뷰는 지난해 중국경제를 강타했던 사스파동의 극복사례를 시작으로 노 고문의 LG전자중국지주회사 경영 노하우를 들어본다.
사스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지난해 사스가 창궐해 외국기업인들이 서둘러 중국을 떠나 귀국하던 시기에 노 고문은 중국에 계속 머무른 것은 물론 ‘아이 러브 차이나(愛在中國)’ 캠페인을 벌여 중국인들로부터 크게 신망을 얻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스기간중 중국인들로부터 가장 큰 가치를 얻은 기업의 대표’로 ‘비상인물’에 뽑히기도 했는데요. 당시의 상황은 실제로 어땠습니까.
“무서웠지요. 그때 분위기를 전하면 이런 식입니다. 제가 계속 출근하니까 직원들이 회사에 나오고 싶지 않아도 안나올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연세가 든 사람에게 더 잘 걸린다는데 나오실 필요가 뭐 있습니까’ 하는 거예요. 제가 피신을 해야 자기들도 피신할 수 있으니까 말이죠. 사스 발생 초기에는 정말로 공포가 엄습했으니까 이런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통계적으로 보면 교통사고로도 몇백 명씩 죽는데 사스에 걸릴 운명이면 걸리는 거지 뭐, 이 기회를 이용해 우리가 중국사회에서 한 단계 점프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의연하게 대처했는데, 주변의 평가가 달라지고 성과도 나니까 조금씩 안정되어갔죠.
중요한 것은 덮어놓고 무모하게 버틴 게 아니라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입니다. 소독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오렌지, 김치 같이 사스 예방에 좋다는 음식을 직원들에게 지속적으로 공급했습니다. 물론 사스 예방약도 식구 숫자대로 지급했고요. 사스 예방에 좋다는 것은 다 했던 것 같아요. 이렇게 하니까 직원들이 집에 있는 것보다 오히려 회사에 출근하는 게 더 안전하다는 인식을 갖게 됐어요.
이렇게 내부적으로 안정을 찾으면서 모든 마케팅 컨셉트를 사스 공포에 질려 있는 소비자에게 어필할 수 있도록 바꾸는 작업을 했어요. 예를 들어 전자레인지 같으면 살균효과를 마케팅 컨셉트로 잡고 광고전단과 카탈로그까지 모두 바꿨습니다. 그 결과 매출도 늘고 주위에서 좋은 소리도 듣고 중국정부도 고마워하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누린 셈이었죠.”
-당시 중국에 진출한 다른 외국기업들은 어땠습니까.
“서양사람들은 대개 쉬었지요. 결과적으로 중국 국내업체들은 덜 쉬었고요. 저희 회사 바로 옆의 일본 마쓰시타 공장도 가동이 중단됐었습니다. 환자가 한 명만 발생해도 그 공장이 폐쇄되었으니까요. LG는 예방조치를 철저히 한 탓인지 다행히 직원 중에 감염된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사스파동 때의 인상적인 처신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중국에 진출한 LG전자는 지난해 ‘포춘’ 중국판이 선정한 ‘가장 일하고 싶은 10대 기업’에 한국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선정되는 등 중국에서 성공한 대표적 기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동안 대(對)중국사업의 실적은 어땠습니까. 그리고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다고 보십니까.
“1993년 중국에 진출한 지 10년 만인 2003년에 LG전자는 중국시장 매출이 70억달러에 도달했고, 전국 곳곳에서 19개의 공장을 가동하는 성장세를 보였습니다. 주요제품은 PDP, LCD, 프로젝션TV 등 디지털 제품과 디오스냉장고 트롬세탁기 등 프리미엄 제품, 여기에 IT제품 및 단말기 제품도 호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제품들은 중국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거의 전제품이 중국내 톱5에 진입해 있습니다. 중국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습니다만, 올바른 전략방향을 갖고 일관되게 추진해온 점과 중국 현지의 우수기업 및 중국정부와의 합작을 통한 윈-윈 사업 운영, 철저한 현지화 전략과 공격적이고 차별화된 마케팅 전략 등을 꼽고 있습니다.”
현지화 전략의 사례
-현지화 전략을 성공요인으로 들었습니다만, 어떤 내용입니까. 현지화의 필요성이랄까 장점은 무엇인가요.
“생산 마케팅 인재 연구개발 등 전방위적으로 현지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현지완결형 기업구조를 갖춰야 한다는 발상인데요, 연구개발(R&D)까지 현지화하면 그야말로 완결형 체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과정에서 핵심경쟁요소를 발견할 수 있고 중국 현지에 뿌리내려 진정으로 중국인에게 사랑받는 기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를 통해 현지의 경영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경영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봅니다. 현재 중국지주회사 전체 종업원의 98%가 현지채용 인력인데 앞으로 99%까지 늘릴 예정이고 간부직도 현지인 비중을 늘려나갈 겁니다. 3~4개의 성(省)을 관장하는 분공사는 지역영업본부에 해당하는데 사장 9명 중 4명이 중국인이에요. 이 부분도 궁극적으로는 모두 중국인이 끌고 나가도록 한다는 방침입니다.”
-R&D의 현지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같은 품목의 제품이라도 한국에서의 R&D와는 다르게 진행되는 부분이 많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한국에서 생산하는 냉장고와 중국에서 생산하는 냉장고는 서로 독자적으로 연구개발이 이루어지는 겁니까.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품목은 중국이 주생산지가 되고 한국에서는 일부만 생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R&D 기능을 중국에 옮겨옵니다. 또 중국에서의 생산물량이 한국에 비해 미미하더라도 제품의 특성에 차이가 클 경우는 중국에도 R&D 기능을 운영하게 됩니다. 그 반대의 경우라면 한국에 R&D의 중점을 두어야겠지요. 한국과 중국에 각각 R&D 기능이 있을 경우 그 내용은 물론 공유합니다.”
-R&D의 현지화를 말씀하셨습니다만, LG전자는 요즘 중국소비자에 대한 과학적 조사와 분석을 거쳐 디자인과 성능을 특화한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럴 경우 한국에서 생산되는 제품과 중국현지 생산제품과는 차이가 많지 않겠습니까?
“제품에 따라서 다르겠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차이가 난다고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생산하는 냉장고는 유럽식에 가까워요. 한국형과는 반대로 냉동실이 밑에 들어가는 것이 많습니다. 용량도 여기서는 300ℓ이상의 길거나 넓은 것을 선호합니다. TV의 경우, 형태의 차이는 미미한 편이지만 규격 자체가 NTSC식이 아닌 PAL방식이라 한국제품과는 많이 다르지요.”
현지직원 관리 노하우
-중국 진출기업의 경영실태를 연구한 것을 보니까 현지직원의 직무만족과 업무성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임금 위주의 인센티브 제도 외에도 직원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승진이나 자기발전의 동기를 부여해서 감정적 몰입을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더군요. LG는 현지직원에 대한 관리의 원칙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문자 그대로 감정적 몰입을 유도할 수 있다면 좋겠지요. 그런데 이런 문제는 기업의 규모와 관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현지직원 몇 사람 데리고 하는 경우라면 쉽게 감정적 몰입을 유도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대규모의 인력을 여러 단계를 거쳐 사용하는 경우에는 역시 인센티브 제도가 효과적이라고 봅니다. 저희는 인센티브제를 한국에서보다 좀더 적극적으로 실시했어요. 물론 현지인의 능력에 맞게 승진도 시키고, 중요한 직책을 맡겨 비전을 갖도록 하고 있습니다. 감정적인 측면에서는 생일파티든 길흉사든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센티브 제도와 감정적 접근의 두 가지를 적절히 구사해 상승효과가 일어나도록 해야 할 것 같아요.”
-현지직원의 승진은 어디까지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공장에는 부총경리까지 현지직원이 맡고 있습니다. 우리로 치면 부사장 직책입니다만, 한정된 일을 맡긴다든가 해서 좀 다른 점이 있긴 합니다. 영업쪽으로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중국 전역의 9개 분공사 가운데 절반 정도가 중국인이 책임자인데, 앞으로 가급적이면 현지인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이게 별 것 아닌 듯 보이지만 실제론 굉장히 큰 것입니다. 중국을 9개로 나누었다고 하면 한 개 분공사에서 담당하는 지역이 웬만한 나라보다도 크니까 여기에서 상당한 재량권을 갖고 있다는 것은 큰 직책이라고 볼 수 있지요.”
-중국에 진출한 다른 나라 기업들도 현지인을 중용하는 추세입니까.
“서양기업과 동양기업이 서로 다릅니다. 제가 보기에 서양기업들은 현지화를 최고의 가치로 여겨서라기보다는 자체적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인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양기업이 외견상 동양기업보다 현지화라는 점에서 앞서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동양기업들이 외국인을 책임자로 두는 것은 상당히 어색한 측면이 있어요. 어떻게 보면 현지화니, 현지인에 의한 경영이니 해서 명분이 앞서가지고 억지로 앉혀 놓은 경우도 많아요. 제 경우는 회사의 전반적인 면을 고려할 때 중국인에 의한 경영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편입니다만, 이 문제는 국적보다는 어떤 사람이 잘할 수 있느냐에 기준을 두어야 할 겁니다. 억지로 현지화를 추구하면 홍보거리는 될지 모르지만 사업 자체는 진전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또 중국인에게 더 중요한 일을 맡기려면 교육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되겠지요.”
-중국인의 소득수준은 아직 전반적으로 낮지 않습니까. 그러나 상류층은 상당한 구매력을 가진 데다가 그 절대 규모가 만만치 않습니다. 따라서 중국에서 사업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제품의 타깃을 어디에 두느냐는 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오셨는지요. 그리고 중국사업을 구상중인 한국기업인들에게 이와 관련해 조언을 하신다면 어떤 것입니까.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겠습니다만, 저희는 한마디로 상류층에 타깃을 맞추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또 앞으로도 저희는 중국의 상류층을 상대로 제품을 출시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상류층에 고급제품이나 고가제품을 팔고 싶을 겁니다. 문제는 자기 회사의 여건을 따져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LG는 여건을 갖추었고 또 그런 과정을 통해 세계시장에서 인정받는 제품을 개발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브랜드 이미지도 올라간다고 생각합니다.”
지역별 중국시장의 특징
-중국은 영토가 광활해 시장도 지역에 따라 각각 특색이 있을 것 같은데요.
“우선 기후가 북부는 한랭하고 남부는 덥습니다. 또 양쯔강 이북에서는 밀가루를 주식으로 하고, 이남에서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 등 지역별로 기후·문화·인간성에 차이가 많습니다. 따라서 시장환경에 맞추려면 같은 제품이라도 달리할 필요성이 있어요. 예를 들어 에어컨은 남부지역에 판매할 것은 냉난방 겸용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남부는 기후가 따뜻해 아주 춥지 않은 한 별도의 난방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에어컨이 냉방기능은 물론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는 시기에는 난방기능도 갖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탓에 에어컨은 북부와 남부의 수요패턴이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대외개방이 시작된 남부지역 사람들이 외국문물을 빨리 받아들이는 데 비해 북부에서는 그 속도가 굉장히 늦습니다. 또 북부사람들은 아주 씩씩하고 결단력도 좋고, 기분에 따른 구매를 많이 하는 반면, 남부사람들은 연구를 해가며 합리적으로 구매하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판촉전략이 달라져야 합니다.
LG의 경우 기본적인 판촉활동은 각 지역 책임자가 지역실정에 맞게끔 변형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경품이나 판촉물을 예로 들면 북부 사람들은 덩치 큰 물건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저런 물품을 많이 안겨줍니다. 그러나 남부사람들은 정밀하고 작고 예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한국에서 잘 만든 전통제품을 사다가 주기도 합니다. 또 남쪽에서는 PDP TV의 수요가 많은데 북부지역에서는 아직은 팔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동안 중국LG가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평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큰 위기나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어떤 일이었습니까.
“중국진출 초기만 해도 중국의 정치나 법, 제도 등이 국제적 기준과 크게 달라 리스크가 크다는 서양사람들의 평가를 듣고 많이 머뭇거렸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직접 이곳에 와서 적극적으로 상황을 파악해보니 중국경제가 발전하리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어요. 그래서 과감히 사업계획을 실행해나갔죠.
중국진출 이후 최우선 과제는 현지기업은 물론 세계적인 기업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독자적인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중국기업과의 경쟁에서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에는 경쟁사가 아주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기업이 갑자기 판매가를 20% 이상 떨어뜨리는 경우도 자주 일어납니다. 이럴 땐 정말 난감합니다. 가장 큰 위기는 역시 지난해 발생했던 사스였습니다. 정체 모를 질병은 외국에 나와 있는 기업으로서는 대처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현지직원들에게 발병할 위험도 있지만 한국인 주재원들의 상황도 문제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책임자의 입장에서 정말 고민스러웠어요.”
노용악 고문의 베이징 사무실을 둘러보니 한쪽 벽면이 책으로 가득하다. 거의가 중국관련 책들로 중국고전부터 한국에서 출판된 중국소개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들이다.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중국역사상 부와 명예와 권력 그리고 최고미인 서시(西施)까지 쟁취한 대표적 인물인 춘추전국시대 범려의 이야기를 다룬 책을 읽었다”고 한다.
노 고문은 또 휴일이면 각종 박물관이나 전시회를 찾는 게 취미라고 한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중국인과 친구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가 경제계의 대표적인 중국통으로 꼽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런 노 고문인 만큼 중국이라는 거대한 사업장과 시장을 보는 시각은 그리 단순치 않아 보인다. 좀더 깊은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자산업계 최초로 미국 현지판매법인을 설립해 대표를 맡으셨고 캐나다 일본 필리핀 독일 등 세계 각지에 현지법인을 세우는 데도 산파역을 하셨는데요. 중국에서의 회사설립 경험을 다른 국가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저희가 처음 미국에 진출할 때 헌츠빌에 컬러TV 공장을 세웠는데 당시에도 미국사람들이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만, 지금 중국은 거기에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공무원이 외국인투자를 유치하면 그 실적에 따라서는 팔자를 고칠 만큼 파격적인 혜택을 주고 있어요. 국장이 차관이 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현재 상황을 보면 중국의 투자유치 정책은 제도적으로 뒷받침이 잘돼 있고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열심이어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중국이 워낙 넓다 보니 한마디로 외국과 비교하기는 어렵고 투자여건 등 여러 부분이 지역마다 모두 다르다는 점입니다.”
-중국시장은 현지브랜드의 경쟁력이 유난히 강하다고 하는데, 전자업종의 예를 들어 현지브랜드의 실태를 설명해주십시오.
“말씀하신대로 중국은 현지브랜드 파워가 막강합니다. 전자업종을 보면, 지금 미국 같은 곳은 주인은 없고 손님들끼리 싸우는 형국인데 비해 중국시장은 아주 강한 주인이 여럿 있고 여기에 또 여러 손님이 와서 싸우는 양상이에요. 거의 모든 제품의 50% 이상, 경우에 따라선 80%까지 중국기업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나머지를 놓고 외국사끼리 경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휴대폰 단말기는 불과 3년 전만 해도 중국업체들의 시장점유율이 모두 합쳐봐야 5%밖에 안 됐어요. 신규제품이어서 현지브랜드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죠. 나머지 95%는 노키아 모토로라 등의 제품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닝보 버드나 TCL 같은 중국기업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니까 금방 현지브랜드가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해버렸거든요. 중국기업이 외국기업들을 제치고 1위가 됐어요. 이렇게 된 것은 중국기업들이 다른 외국기업보다 경쟁력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고, 또 예부터 중국인이 장사를 잘하는 것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중국기업들을 얕볼 게 아니라 이들을 잘 연구해야 합니다.”
-이처럼 중국에서 현지브랜드가 강한 문화적 바탕은 무엇일까요. 중국인들이 한국의 ‘신토불이’ 정신을 높이 평가하면서 부러워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만, 중국인들도 역시 애국적 소비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봐야 할까요.
“만약에 당국에서 정책적으로 애국심을 부추기며 국산 애용 등 소비행위를 유도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중국인들은 정치색을 떠나 합리적인 소비를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인은 최소한 다섯 집(가게)을 방문해보고 구매를 결정하며, 주위의 평판을 중시하기 때문에 입소문이 잘못 나면 망하기 일쑤입니다. 이것이 중국인들의 특성이에요.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 일본과 중국간 분쟁이 생겨서 그게 사회적 이슈가 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고서는 일본제품이라고 해서 배척하지는 않지요.”
-중국의 통계수치를 신뢰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그래서 합작파트너 선정시 상대가 제시하는 데이터를 그대로 믿지 말라는 충고도 있고, 경영계획 수립에도 각종 통계의 오차를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실제 경험에서 느끼신 중국의 각종 통계의 신뢰도는 어느 정도입니까.
“저희가 처음 중국에 진출했을 때만 해도 마케팅과 관련한 부정확한 통계수치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부분이 급속도로 개선돼 지금은 큰 문제가 없습니다. 간혹 국가적인 차원의 통계문제가 외국언론에 보도되는데, 마치 중국이 조작의 소굴인 양 소개되는 경우를 봅니다. 저는 중국을 이상한 나라로 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라가 크다 보니 경우에 따라서는 통계작업 과정에서 거치는 단계가 많으므로 오류가 발생할 여지야 있겠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조작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요. 그런 예를 발견하지도 못했고 말이죠.
중국의 통계수치 신뢰도
인구센서스도 5년마다 전국적으로 실시하는데, 중국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과정이니까 누락되는 것도 있겠지만, 인구를 줄이기 위해 주관부서에서 일부러 조작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지난 얘기지만 재작년까지만 해도 일부 서양사람들은 중국이 경제성장률을 실제보다 부풀려서 높게 발표했다고 비판했어요. 그런데 제가 관계자들을 관찰한 바로는 성장률을 더 올리고 싶어하는 기색을 전혀 찾을 수 없었어요. 조작할 필요성이 없는 거죠. 그러다가 작년부터는 거꾸로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굉장히 높은데 이를 숨기고 실제보다 낮게 발표했다고 비판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태도들을 가만히 관찰해보면 특히 미국이나 일본에서 중국에 대해 위스풀 싱킹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니까 희망사항을 갖고 주장한다는 말이지요. 중국이 어떻게 됐으면 좋겠다 하는 전제를 두고, 그런 쪽으로 예상하고 그렇게 되도록 애를 쓰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10년 전 저희가 중국에 진출할 무렵만 해도 미국의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중국은 분열될 것이라느니, 민중봉기의 가능성이 있다느니 하는 전망을 내놓았어요. 요즘은 거창한 예측들이 잘 맞지 않아서인지 금융대란설이나 위안화 절상설 등을 내놓고 있는데 계속 틀리고 있어요. 위안화 문제만 해도 90년대 후반에는 곧 인하할 것이라고 소동을 피웠지만 지금까지 그런 일은 없었고, 이제는 그 반대상황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중국의 문제는 중국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외국에서 보는 중국에 대한 전망, 예측이 전혀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국문제는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보아야 정확하다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대부분 틀리는 것을 보면 오히려 중국방식으로 중국을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노 고문께서 대(對)중국사업을 하려는 분들에게 강조하는 말 중에 서양시각으로 중국을 보지 말라, 중국을 하나로 보지 말라,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하나가 아니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구체적 사례를 들어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서양의 시각으로 중국을 보니까 선입견이 작용해 결과적으로 제대로 보지 못하더라는 거죠.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중국 내부를 중국적 시각으로 관찰할 때 중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중국을 하나로 보지 말라는 것은 국토가 넓고 지역마다 특성이 강하므로 이걸 하나로 뭉뚱그려 중국이 어떻다고 말하기가 굉장히 어려우니까 광둥성은 어떻고, 상하이는 어떻다는 식으로 구분해서 얘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각 지역마다 발전 정도와 사람들의 기질 등이 모두 다르거든요. 유럽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하나의 유럽으로 통합된다고 해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각국의 개성이 제 각각이고 강하지 않습니까.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다르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 유의해야 할 대목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기업인이 베이징에 와서 후진타오 주석이라든가 중앙의 지도자들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경우는 후난(湖南)성에서 성장(省長)을 만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때 가령 후난성에 TV공장이 없다면 후난성장은 TV공장을 유치하고 싶을 것이므로 투자를 요청할 것입니다. 반면 베이징에서 만난 중앙정부 지도자들은 전국적으로 TV공장이 포화상태이므로 오히려 줄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니까 서로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우 후난성장의 말이 중국을 대표하는 게 아닙니다. 중앙과 지방의 판단기준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외국투자기업에 대한 지원책
-나라가 커서 빚어지는 현상 같은데요. 이런 경우 중앙정부에서 계획적으로 산업시설을 안배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다시 계획경제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옛날 같으면 이런 일들에 대해 철저히 중앙정부의 비준을 받았는데, 요즘은 지방에 권한이 대폭 이양돼 있어요. 또 예를 들어 2000만달러 규모 이상의 외자유치는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도록돼 있지만, 지방정부에서는 1900만달러짜리로 꾸며서 자기들 뜻대로 처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를 하나로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기업인의 입장에서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입장을 둘 다 이해하고 의사결정을 해야 합니다.”
-중국 당국이 외국투자기업에 대해 여러 가지 파격적인 지원을 해준다는 얘기는 이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상하이는 지난해 여름 40℃를 넘는 무더위가 계속됐지만 공식적인 기상예보는 38℃ 이하였다는 것입니다. 38℃가 넘으면 근로자들이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중국측이 얼마나 기업 입장을 배려하고 있는지 짐작이 갑니다. 직접 경험하신 중국당국의 외자기업 지원사례를 드신다면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이런 점도 중국 전체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 지역의 사례인지를 구분해서 봐야 합니다. 아무튼 기업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외자도입을 하면 처음 3년은 면세를 해주고, 다음 2년간은 절반만 세금을 내면 됩니다. 또 기술도입에 유리한 투자라고 판단되면 중국정부가 굉장히 잘해줍니다. 이런 경우는 이익이 나고부터 7년간 면세받을 수 있어요. 저희도 이런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토지는 50년간 사용권을 주는데, 당연히 무료입니다. 더 나아가 아예 공장을 지어줄 테니 월세를 좀 내고 사용하라는 파격적인 조치도 제안합니다. 이밖에도 한국에서 파견나온 사원이나 핵심기술인력에 대해서는 소득세를 면제해주기도 하고, 기술자들을 연수차 외국에 보낼 때 그 경비를 정부에서 부담해주기도 합니다. 또 우리나라의 부가가치세에 해당하는 증치세의 25%정도가 지방정부로 가는데, 이 부분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
난징(南京)에 LG산업원이 있는데요. 이곳은 LG가 디스플레이 복합단지를 조성한 지역입니다. 이곳에 단지를 조성하게 된 배경에는 난징시에서 경제기술개발구내 60만평이나 되는 부지를 LG산업원으로 명명해주고 주변의 왕복 4차선 진입도로도 LG남로, LG북로 하는 식으로 명칭까지 고쳐 줄 정도로 지원해준 것이 적잖게 작용했습니다.”
중국적 노사관계
한국의 사업장을 중국으로 옮기는 기업인들 중에는 노사문제를 이전사유로 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국에 가면 노사분규를 피할 수 있어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중국 노사관계의 실상은 어떤 것일까.
-중국의 개혁개방이 완전히 정착하면서 중국근로자의 의식도 많이 바뀌고 있어 어떤 면에서는 한국보다도 더 자본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임금 등 근로조건에 대한 중국근로자들의 의식이나 태도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양면성이 있어요. 사회주의국가여서 노동자 보호에 대한 의식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는 반면에 하루빨리 경제를 일으켜 인민들의 생활수준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기업경영에 해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측면이 있는데, 현재는 후자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즉 기업이 웬만큼 잘하면 노사문제는 원활하게 풀어나갈 수 있지요. LG의 경우도 대부분의 현지법인에서 노사 마찰이 없습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중국근로자들은 평등논리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일 잘하는 사람이 더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사회주의 국가니까 평등지향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예상과는 많이 다르군요. 어떤 이유에서 그런 의식을 갖게 됐을까요.
“고찰하는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겠지만, 저는 우선 노동력이 풍부하니까 그런 사고방식이 생겨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또 근래에 와서 젊은 사람들의 의식이 굉장히 선진적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국기업이 중국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한국식 조직문화를 고집할 게 아니라 중국인의 사고방식에 적합한 조직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역설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중국적인 조직문화의 특성과 이를 반영한 경영방침을 소개해주시지요.
“중국에 어울리는 조직문화를 간단히 말하기는 힘듭니다. 중국에는 우리의 노조에 해당하는 공회(工會)라는 게 있습니다. 저희는 이 공회와의 관계를 좋은 쪽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으로 중국적인 조직문화를 만들어나가고 있습니다. 무슨 기념행사라든가 시상식 같은 게 있으면 처음 계획단계부터 행사진행까지 공회를 통해 중국인들에게 맡깁니다. 당신들이 더 잘 알 테니까 알아서 해라 하면 기대 이상으로 잘합니다. 그 사람들하고 따로 노는 게 아니라 의미있는 일을 맡겨주면 아주 잘합니다. 한국에서도 잘하는 사람에게는 더 주는 성과주의가 확산되고 있습니다만 저희가 여기서 지향하는 것은 한국보다도 좀더 적극적인 성과주의입니다. 이곳에서는 임금 자체가 아직은 그리 높지 않으니까 잘하는 사람에게는 인센티브를 더 주어서 안정되게 일할 수 있게 해주어야겠다는 게 기본방침입니다.”
대부분 1년 계약제로 직원 채용
-후난성 창사(長沙)에 한중합작으로 설립된 LG필립스서광의 경우 4360명이 가입한 공회가 조직돼 있는데, 아직 노사분규나 쟁의신고가 한 건도 없고 공회가 품질향상 경진대회와 사원교육 역할까지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중국의 공회는 한국의 노조와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까.
“중국의 공회는 기본적으로 회사에 큰 지장을 초래하거나 손해를 입히면서까지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관계당국에서도 외국기업이 중국경제에 기여하고 있는 게 확실한 이상 공회의 활동이 그 회사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거꾸로 중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 기업이라면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우리가 중국경제에 기여하고 중국국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만큼 잘하는 한 당분간은 공회 때문에 어려움에 처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봅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다는 건 아니죠. 정상적으로 잘해나가면 정부에서도 보호해주고, 공회와도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중국의 노사관계는 노사간 합의에 의해 주요사항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까.
“한국처럼 노사합의라는 건 없어요. 함께 논의하고 협조를 구하기는 하지만 공회와 합의해야만 무엇을 할 수 있도록 돼있지는 않습니다. 완전히 동반자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중국인을 배척하는 게 아니라 함께 가고, 적절한 역할을 주어 회사경영의 동반자라는 의식을 심어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중국에서 경영을 해보니까 중국인 근로자들을 적절하게 대우해주고 공회측의 의견을 들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이 훨씬 유리합니다. 조금 더 잘해주고 그것을 통해 능률을 올리는 쪽이 옳은 방법인 것 같아요. 그런 정신으로 해나가면 당분간 중국에서는 노사문제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중국 노동시장의 유연성 문제는 어떤가요. 외국기업들은 대부분 1~2년 계약제로 직원을 뽑는다고 하더군요. 중국노동부도 외국기업이 직원을 해고할 경우 누구도 간섭할 수 없도록 보장했다는데, 실제로 그렇습니까.
“처음 직원을 뽑을 때 3개월의 견습기간을 거칩니다. 그리고 나서 정식으로 채용할 때는 대개 1년 계약제로 합니다. 1년 후 재계약을 하지 않으면 자동해고되는 셈이지요. 많은 기업들이 이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만, 저희는 최근들어 이런 식으로 채용하는 건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다고 보고, 다른 회사가 어떻게 하든 우리는 장기계약을 해서 현지직원들의 마음을 붙잡아 장기적으로 근무하게 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떤 게 옳은 방식인지는 각 회사의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말로 유능한 인재를 채용하고 유지하려면 차원높은 생각이 필요합니다.”
베이징올림픽과 중국경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는 중국경제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등 호재를 앞에 두고 있어 당분간 흔들림이 없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또 중국경제를 이끌어나가는 지도부의 능력과 자세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듯하다. 중국경제의 도약을 현장에서 목도하고 있는 노용악 고문의 평가와 전망은 어떤 것일까.
-지난해말까지 중국에 대한 외국인투자 누계액이 무려 5000억달러에 달했고, 중국에 설립된 외국기업이 46만여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같은 외국자본의 중국진출 현상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십니까.
“제가 보기엔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아요. 왜냐하면 중국경제의 응집력이 점점 강해지기 때문에, 이곳에 투자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가고 있거든요. 현재 진행되는 여러 가지 현상으로 보아 상당 기간, 최소한 2008년 내지 2010년경까지는 무난하게 경제성장을 해나갈 것으로 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까지 중국의 경제는 계속 상승세를 탈 것이라는 전망이 많습니다. 베이징올림픽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눌 때 중국경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올림픽 때까지는 중국경제가 잘나갈 것이라고 누가 먼저 말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시각이 지배적인 건 사실입니다. 지금 중국경제의 형세를 보면 마치 기차가 막 달려오는데, 철로에 돌멩이 같은 장애요소들이 있어요. 그런데 고속으로 달리는 기차가 이런 장애요소들을 휩쓸고 지나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중국관리들은 장래를 상당히 낙관적으로 보는 경향인데 비해 학자들은 상대적으로 비관적인 입장입니다. 원래 학자들은 남이 다 그렇다고 하면 자기는 다른 쪽으로 말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런데 중국 학자들조차도 중국경제가 잘 안될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현재 중국은 계층간·지역간 빈부격차를 비롯해 국유기업문제, 금융문제 등 난제를 앞에 두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이런 것들도 경제발전 추세를 가로막지는 못할 것으로 봅니다. 국유기업의 경우 과거에는 그 비중이 100%를 차지했지만 이제는 30% 미만으로 줄어들었어요. 설사 이게 문제를 야기한다고 하더라도 과거처럼 치명적인 타격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30%는 문제가 된다고 해도 그게 몽땅 망하지는 않을 것이니까 말이죠.
또 동서지역간 격차는 서부대개발사업이 시작돼 점차 줄어들 것으로 보이고, 도농간 격차는 농촌의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도시인구가 늘어나고 있으니까 그 비중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빈부격차는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해결한다는 목표아래 중국정부가 애쓰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처럼 중국정부가 자신들의 약점과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고 나름대로 최선의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보기에는 베이징올림픽 이후에도 큰 문제가 발생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담당분야에 통달한 중국관료들
-중국의 영도급 인사들이나 관료들과도 교분을 쌓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들 공직자의 자세나 마인드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중국사람들과 친해지면 부정부패 같은 문제를 화제로 삼아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때 중국인들에게 ‘당신들은 어떠냐’고 물으면 ‘우리도 이런저런 부패사건이 일어나고 있지만 한국처럼 최상층부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고 장담합니다. 중국엔 최소한 국가 영도자들에게 부정부패 문제는 없다는 것이지요.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를 예로 들면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국민에게 모범을 보이고 있거든요. 이런 점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나라가 크다 보니 학습효과도 큰 것 같아요.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외국인을 많이 접하고 있어 세계정세와 흐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 사람들이 옷도 허술하게 입고 나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국내외 정세를 세밀하고도 객관적으로 보는 식견을 갖추고 있어요. 또 높은 사람부터 아랫 사람에 이르기까지 자기 담당분야의 목표나 진전사항 등과 관련된 수치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윗사람이 되면 그런 세세한 것은 모르는 게 미덕인 줄 아는데 여기선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를 들어 어느 시(市)의 시장이면 그 시의 현황에 대해 몇 시간이라도 통계숫자를 인용해가며 떠들어댈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게 무슨 시험공부식으로 외워서 하는 것은 아닐 테고 그만큼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중국의 경제관료들이나 경제인들은 한국경제의 경쟁력이나 향후 잠재력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하고 있나요.
“중국사람들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아요. 겉으로는 한국이 대단한 나라다, 중국기업이 세계적 수준이 되려면 한국부터 따라잡아야 한다는 식으로 얘기하기도 합니다만, 시간이 흐르면 지금과는 서로 다른 위치에 서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저와 친한 중국친구는 ‘마오쩌둥 주석이 문화혁명을 하지 않았다면 한국이라는 존재가 있겠냐’고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중국을 찾는 한국의 고위층이나 기업인들이 중국인들과 만나면 이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좀 듣고 가면 좋겠는데, 오히려 그 반대란 점이에요. 중국사람들이 오늘날 한국이 많이 발전했는데 어떻게 한 겁니까 하고 물으면 그냥 자랑삼아 막 얘기하거든요. 그러다 보면 면담시간이 다 지나가버립니다. 중국은 세계 각국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지난해의 경우 사스 파동이 가라앉고 연말까지 각국의 원수급 지도자 방문이 60여회에 달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우리보다 훨씬 많은 국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인사치레로 한번 물어보는 건데 정말 한국을 대단하게 여기는 줄 알고 말을 늘어놓을 게 아니라 상대방의 속셈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국기업의 중국진출은 이제 하나의 도도한 흐름이 되었지만 그만큼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도 산적한 느낌이다. 중국에 진출한 기업들이 제대로 돈을 벌고 발전해나갈 수 있을지, 국내의 산업공동화 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중국에 대한 투자러시가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오지는 않을는지 등등 하나같이 쉬운 문제들이 아니다. 한국과 중국의 경제에 모두 정통한 노고문의 시각이 궁금하다.
-한국수출입은행에서 펴낸 우리 기업의 해외투자수익률 자료를 보니까 대 중국투자의 수익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더군요. 2002년의 경우 한국기업의 세계 전체 투자수익률이 7.6%인데 비해 대중국 투자수익률은 10.8%였어요. 제조업만 보면 12.8%의 수익률을 기록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중국에 투자해서 그런대로 돈을 번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 투자했다가 노련한 중국인에게 당해 손해만 본다는 식으로 알고 있어요. 현장에서 느끼시기에 한국 투자기업들이 돈을 벌고 있는 것 같습니까.
“투자수익률 통계라면 지금 잘 운영되고 있는 곳을 대상으로 한 것 아닌가요. 망한 회사를 통계에 넣을 수는 없잖아요. 분명한 건 중국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망하는 사람도 많고, 그러니까 덮어놓고 중국에 와서 기업하면 돈벌 것이란 믿음은 금물이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중국에 오면 다 망하느냐 하면 역시 아니거든요.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 어떤 업종을 갖고 들어오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볼 때 한국기업, 특히 중소기업들이 갖고 있는 하나의 맹점은 과거의 사례와 경험을 전수받아 피할 건 피하고 따낼 건 따낸다는 마인드가 부족하다는 점이에요. 어떤 사람이 어떤 부분에서 실패했다면 그 다음에 오는 사람은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하다못해 컨설팅이라도 받아보고 진출하면 실패할 확률이 상당히 줄어들텐데, 중소기업일수록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아무튼 통계적으로 중국에서 투자수익률이 높게 나온 것을 보면 충분히 준비하고 제대로만 한다면 중국시장이 기회가 많은 곳이고, 다른 나라에 비해 유리한 조건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노 고문께서는 LG전자가 중국에서 성공한 기업에 만족할 게 아니라 중국을 동반자로 삼아 세계시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에서의 성공과 세계시장 진출의 연관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중국에서의 사업을 운동경기에 비유한다면 이것은 중국의 국내리그가 아니라 올림픽이나 월드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난이도도 그렇고 중요성도 그렇다는 것이죠. 앞으로 글로벌기업을 지향한다면 중국을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세계적 기업들이 모두 나와 있는 중국에서 등수에 들지 못한다면 세계랭킹에 들 수 없는 것이죠. 이건 아주 명확한 사실이에요. 그래서 중국의 거대한 내수시장을 공략하는 한편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자는 것입니다. LG가 중국에서 성공한다면 이는 곧 세계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LG 혼자만이 아니라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 세계시장으로 비약하자는 게 저희가 추구하는 방향입니다.”
경쟁력 있는 제품으로 승부해야
-비슷한 맥락에서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제품으로 정면승부해야 중국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역설하고 계신데요. 이는 대기업이라면 몰라도 중소기업에는 다소 이상적인 주문이 아닐까요. 지금 중국진출 중소기업의 상당수는 세계적 기술력보다는 저임금 등의 메리트를 보고 왔는데, 그렇다면 이들 기업은 희망이 없다는 얘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마찬가지입니다. 한 예로 베이징에 오토바이 탈 때 쓰는 헬멧 만드는 한국투자회사가 있는데, 이 분야에서 세계1위예요. 중국의 광둥성 쪽에서는 주민들이 오토바이를 많이 타니까 헬멧업체가 수십개에 달합니다. 그렇지만 이 기업은 끊임없는 연구개발과 경영의 효율화로 자기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된 것이지요. 한국에서 곧 문을 닫을 정도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체가 중국이나 가볼까 한다면 과연 중국에서는 살아 남을 수 있을까요? 약간 생명이 연장될 뿐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기업의 중국진출을 이렇게 비유합니다. 나무가 아주 싱싱할 때 옮겨와도 제대로 살 것인지를 자신할 수 없는데, 죽을락말락할 때 옮기면 살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절대로 중국을 피난처로 봐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한국기업의 중국진출은 앞으로 서비스 분야에도 확산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얼마 전에는 국내 모 은행이 전화로 고객상담을 처리하는 콜센터의 중국이전을 추진중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한국어가 가능한 중국동포를 활용하고, 인터넷 전화회선을 사용하면 국내보다 훨씬 싼 비용으로 콜센터를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분야까지 중국으로 이전한다면 국내에 무슨 업종이 남아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제조업이 아닌 서비스 분야의 중국이전 가능성을 어떻게 보십니까.
“미국기업이 영어가 통용되는 인도로 그런 기능을 옮겨간 데서 나온 발상인 것 같습니다만, 그게 만만치는 않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 미국이 인도사람들을 활용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합니다. 아마 조선족 동포들을 뽑아서 쓰겠다는 것으로 보이는데, 서비스의 질에 한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서서히 서비스분야 진출 사례도 늘어날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인터넷을 활용하면 단순한 콜센터에 비해 좀더 두뇌를 써야 하는 분야도 중국에서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한국내에서 중국어를 번역하려면 돈이 많이 들겠지만 이걸 인터넷 상에서 중국으로 가져가 번역해서 한국으로 보내면 비용을 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미 일부 신문사의 인터넷판에 제공되는 중국어 서비스는 중국현지 인력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단순 서비스 분야보다는 경비가 비교적 많이 드는 분야부터 중국인력으로 대체하는 현상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좀더 차원높은 설계나 디자인 등은 한국에서 만들어 중국으로 가져갈 수도 있을 겁니다.”
서비스 분야의 중국진출 전망
-한국기업의 중국진출이 확대되면서 국내에서는 산업공동화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동안 100만개의 일자리가 중국으로 이전됐다는 통계도 발표된 바 있습니다. 이런 국내산업의 공동화 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걱정되는 부분입니다만, 이 같은 현상을 중국진출 자체의 결과로만 돌리는 데엔 문제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중국이 없었다면 산업공동화 현상도 없었을 것이냐를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중국에서 한국기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막말로 수명연장도 못하고 사망선고를 받은 기업이 적지 않았을 겁니다. 예를 들어 가방 섬유 신발 업종이 중국에 많이 진출해 공장을 가동하고 있는데 이들이 계속 한국에 남아 있었다면 지금 어떤 처지가 됐을지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대안도 없이 문을 닫아버리면 국가적으로 큰 골칫거리였겠지요.
문제는 한국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기업들이 서둘러 뜬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국내기업들이 틈새시장을 잘 찾아내야 한다고 봅니다. 가령 철강산업이라면 아주 특수한 스테인레스 강판이라든가, 조선산업이라면 유조선을 심화 발전시키고 가지를 쳐서 경쟁력을 강화하는 식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남들보다 한 발 앞서갈 수 있는 분야를 계속 창출해서 국내산업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만이 공동화 현상을 방지할 수 있는 근본대책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중국과 한국의 기술수준 차이가 나날이 좁혀지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2010년경이면 휴대전화의 기술력이 비슷해지는 등 상당한 분야에서 한국의 기술적 우위현상이 상쇄될 전망이라는 겁니다. 전자산업의 경우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현장에서 느끼는 한중간 기술수준의 차이는 어느 정도입니까.
보유기술 특화만이 살길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이 문제가 화제가 되고 있어요. 상대적으로 여유있는 분야의 종사자들은 중국이 쫓아오려면 아직 멀었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미 수준이 같아졌거나 우리를 추월했다고 난리입니다. 각자 자기분야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곧 닥칠 수 있는 일들을 예측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가령 지금 죽겠다고 하는 사람도 한 해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을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좌우간 기술격차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임은 확실한 것 같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를 압도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보유 기술을 날카롭게 가다듬어 특화시키고, 각 기업이 잘할 수 있는 분야를 계속해서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또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현재 다소 비중이 작더라도 앞으로 가능성이 큰 분야, 예를 들어 바이오산업 같은 쪽을 육성하는데 좀더 힘을 실어주어야지요. 이런 일은 분야별로 매우 세밀하게 돌아가야 하는데, 항상 총론에서만 맴돌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전문가들 중에는 중국에 대한 투자러시가 나중에 부메랑이 돼 한국을 겨냥할 것이라며 경고합니다. 한중간 기술수준이 대등해지면 기술력과 저임금으로 무장한 중국제품이 상대적으로 우월한 경쟁력을 앞세워 한국으로 밀려올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이런 우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특별히 대비하지 않는다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인구를 비교해보면 중국의 자동차 보급률이 우리의 절반만 된다고 해도 수요 물량이 우리의 15배 이상이 될 겁니다. 정말 엄청난 규모지요. 한국기업도 중국 자동차시장에 진출해 있습니다만, 이렇게 엄청난 중국시장이 잘나가다가 경기가 부진하다고 해서 만약 한국으로 물량을 실어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동차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겠지요. 철강의 경우,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포철에서 연간 2000만t을 생산한다고 하는데 중국의 연간수요량이 2억t입니다. 일년에 2000만t씩 늘어난다고 하니까 포철만한 철강업체가 하나씩 생기는 셈이지요. 중국이 여러 가지 여건상 철강을 해외시장에다 많이 팔아야겠다고 나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잘못하면 엄청난 재앙이 될 수 있어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중국의 존재에 대해 이는 우리에게 위기인 동시에 기회라고 말하는 전문가가 많습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어떤 게 위기이며, 어느 경우에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중국이 우리에게 하나의 기회가 되고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회라는 측면만 보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피나는 노력이 필요해요. 국가경영부터 기업경영이나 개인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려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반면에 기회를 잘 활용하지 못하면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에게 위기가 닥쳐올 수도 있습니다.
중국에 줄 수 있는 것은 과감히 주고, 우리는 시장경제의 노하우, 중국보다 한 발 앞선 서비스 자산 등을 밑천삼아 새로운 첨단기술을 개발해 그들이 따라오는 속도보다 더 빨리 달아나면 됩니다. 그러나 이 기회도 일반론이나 범용성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각 제품별, 산업별로 각론 차원의 차별화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제품의 빛깔, 디자인 등 각 산업별 포인트를 찾아내야 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중국에 대한 총체적인 국가전략을 세워서 하나하나 실천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국이 기회다, 위협이다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중국사업 10계명
이제 오늘의 인터뷰를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다. 중국진출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면 현지에서 성공할 수 있는 노하우를 습득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을 듯하다. 마침 노용악 고문이 만들었다는 중국사업 10계명이 있다기에 마지막으로 물어보았다.
-중국사업 10계명이라는 걸 역설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내용입니까.
“10계명이라는 게 누구나 알고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몸에 배어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처음 중국에 와서 사업을 시작할 때 이러이러한 마음가짐을 갖자는 취지에서 만들어본 것입니다.
열거해보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업을 운영하라, ▲좋은 합작파트너를 찾아 관계를 유지하라, ▲사업의 현지화를 적극 추진하라,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로 승부하라, ▲중국에 맞는 독특한 마케팅을 개발하라, ▲소비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강화하라, ▲관시(關係)에 모든 것을 의존하지 말라, ▲회사내 최고인재를 파견하라, ▲중국직원을 동반자로 생각하라, ▲솔선수범하고 희생정신을 가져라 등입니다. 어찌 보면 상식적인 내용입니다. 중국을 잘 모르는 사람은 그 내용이 가슴에 와닿지 않을지 모르지만 중국경험이 많은 사람에게는 깊이있는 내용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10가지 가운데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떤 내용입니까.
“10가지가 다 중요합니다. 중국사업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말은 다른 외국도 그렇겠지만 특히 중국에서는 기반을 닦고 시장을 개척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단기적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없으므로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서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중국파트너 문제는 이곳의 사업적 토양이 한국과는 판이하므로 좋은 파트너의 안내를 받으면서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사업의 현지화를 강조한 것은 최근 많은 사람이 깨닫기 시작했는데요. 중국도 노임이 계속 올라가고 있으니까 단순히 저임금에 의존해서는 승산이 없으므로 사업 자체를 현지화하고 그 과정에서 핵심경쟁요소를 찾아내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케팅 개발도 현지화와 관련이 됩니다만, 지금까지 중국에 진출한 대부분의 외국업체들은 마케팅을 개발하기보다는 중국내 도매상에 제품을 일괄해서 넘기면 그 도매상이 팔아주는 식이었는데, 저희는 처음부터 독자적인 마케팅 채널을 구축했어요. 바로 이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중국특유의 인간관계를 의미하는 관시는 분명히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체라고 생각하지 말고 단지 어떤 일을 촉진하는 촉매역할 정도로만 활용하라는 겁니다. 기본적인 것은 역시 법과 제도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겁니다.
중국에 진출한 기업들을 보면 대개가 한국에서 파견된 사원이 중요한 일을 하고, 현지의 중국인은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중국에서 사업하는 의미가 없어요. 중국인의 두뇌까지 활용할 생각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인 직원을 육성하고 그들에게 비전도 주어야겠지요. 그래서 중국직원을 동반자로 생각하라는 것이지요. 이런 내용들은 아주 당연한 것인데 실제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중국과 대만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어떻게 될까. 혹시 한반도의 안보환경에 커다란 변수가 되는 것은 아닐까. 또 북핵문제가 악화돼 북미간 위기상황이 초래되면 중국군은 어떤 움직임을 보일 것인가.
중국은 미국 러시아에 이은 세계 3대 핵강대국이자, 세계 최대의 군사조직인 300만 인민해방군과 무장경찰대를 거느리고 있다. 급속한 경제발전에 힘입어 명실상부한 군사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중국 군사력의 실체와 유사시 전략구사 방향을 살펴보는 작업은 우리의 생존전략 수립에 필수적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최근 총통선거에서 대만독립의 기치를 내건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이 우여곡절 끝에 재선되면서 대만사회가 극심한 혼란에 휩싸여 있다. 중국은 천 총통의 대만독립노선이 가시화할 경우 무력사용도 불사할 태세다. 오늘 중국탐험 인터뷰는 황병무(黃炳茂·64) 국방대학교 안보대학원 교수와 함께 고조되는 대만위기에 대한 진단과 전망을 시작으로 중국 인민해방군의 모든 것을 파헤쳐 본다.
황 교수는 중국의 군사문제에 관한 국내 최고의 전문가로 꼽히는 중국군사통이다. 30년 이상 중국 군사문제를 연구해오고 있어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저명하다. 황 교수의 중국군사 관련 주요저서로는 ‘신중국군사론’ ‘China Under Threat’ ‘China’s Security’ 등 다수가 있는데, 일부는 미국에서 교재로 쓰이고 있다. 황 교수는 현재 외교부 정책자문위원장, 한국군사학회 부회장 등을 맡고 있고, 중국의 인민해방군 관계자나 군사전문가들과도 폭넓은 교류를 하고 있다.
-최근 대만 총통선거에서 대만독립의 목소리가 크게 표출됨에 따라 양안간에 또다시 긴장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선거과정에서 나온 얘기들을 보면 2006년에 헌법을 개정하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열리는 해에 독립선언을 하는 수순을 밟을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렇게 전개된다면 2008년이 주목할 만한 시기인데요, 그 가능성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지금 총통선거의 후유증이 크지 않습니까. 가장 중요한 변수는 이 후유증이 어떤 식으로 안정될 것이며, 천수이볜의 민진당 정권이 어떻게 정통성을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천수이볜 정권이 불안정해지면 민진당의 독립 시나리오대로 추진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대만 본성인(本省人)들의 70~80%가 중국의 통일정책인 일국양제(一國兩制)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대만독립을 추진하는 것도 반대한다는 여론이 높습니다. 현재로선 현상유지 후 서서히 독립으로 가자는 측이 우세해요.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천수이볜의 대만독립 관련 시나리오가 방금 말한 일정대로 추진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천 총통은 현상유지 쪽으로 가면서 대내적으로 사회동요를 막고 정치적인 기반을 확충하면서 대륙간 삼통(三通)을 확대해나갈 겁니다. 또 양안간 대등협상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입장에서 현상유지 중심의 대륙정책을 추진하리라 전망합니다.”
중국과 대만의 군사력
-황 교수께서는 일단 대만이 현상유지 정책을 택할 것으로 보시는데요. 그렇지 않고 적극적인 독립정책으로 나온다면 예상되는 조치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대만이 독립을 하려면 정치적으로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라든가 영토조항을 바꾸기 위한 헌법개정, 국호의 변경 등을 시도하겠지요. 지금 대만 헌법에는 중국대륙도 영토에 들어가 있는데 독립하려면 먼저 그 부분을 삭제해야 합니다. 또 국호도 변경한다면 ‘리퍼블릭 오브 타이완’으로 해야겠지요. 중국 입장에서는 대만의 이런 행동뿐 아니라 대만사회가 분열상을 보여 내란 상태로 들어간다든지 혹은 폭동이 일어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대만이 중국 영토의 일부이므로 이 같은 사태를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이죠.”
-유사시 양측이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중국이 대만공격에 사용할 수 있는 지상군은 푸젠(福建)지역에 배치된 제31 집단군 7만명을 비롯해 유사시 전략예비부대와 기동부대로부터 약 25만명을 증원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대만은 지상군 약 20만명과 예비군을 동원하면 40만명 수준의 침공군을 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중국 해군은 60여척의 잠수함을 동원해 수중봉쇄를 하고 다양한 유형의 어뢰를 주요 항로에 설치할 수 있습니다. 해양과 공중통제력을 장악하고 상륙용 주정으로 동력어선단을 구성한다면 약 40만명의 경무장 병력으로 대만과 인접도서에 대한 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반면 대만 해군은 수척의 잠수함밖에 없으나 11척의 구축함과 21척의 신예 프리깃함으로 대만해협에서 중국 해군이 일방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도록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항공력 면에서 중국 공군은 수호이-27 100여대, 수호이-30 58대를 보유한 반면, 대만은 미라지-2000 57대, F-16 146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주력기 구성으로만 보면 유사시 중국 공군이 대만해협에서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기는 어렵다는 게 일반적 평가입니다.
중국이 확실히 우세를 과시할 수 있는 것은 미사일입니다. 대만을 겨냥한 490여기의 미사일 이외에도 중·단거리 미사일 110기, 잠수함 발사미사일 12기 등은 대만에 아주 위협적이에요. 대만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가지지 못했거든요.”
-요약하면 해·공군력은 대만이 질적으로 우세하고, 중국군은 미사일에서 상대를 압도한다는 것인데요. 그렇다면 앞으로 양측의 전력은 어떻게 변화할 것으로 보십니까.
“말씀드린 대로 대만을 겨냥한 중국의 미사일 490기는 사실 해·공군력의 열세를 상쇄하고 대만에 대한 강압 능력을 갖자는 것이죠. 중국이 해군력과 공군력을 현재의 추세대로 증강시켜 나간다면 2008년 내지 2010년이면 역전되리라고 봅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지난번 대만총통선거와 함께 실시한 국민투표의 1번 항목이 미사일 대응능력 강화였던 겁니다. 이것은 반드시 선거전략의 일환만은 아니고 군사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세월이 가면 군사적 균형은 중국 쪽으로 기울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중국, 해·공군력에서 열세
-만약 중국과 대만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어떤 양상이 전개될까요. 중국과 대만의 공격·방어 시나리오 같은 것이 있습니까.
“미국과 대만의 전문가들에 따르면 중국군의 대만공격 시나리오는 대만의 수역과 항구에서 비무장 어선단에 의한 교란, 대만 근접지역에서의 무력시위, 미사일 발사 시위, 연안 소도시 점령, 봉쇄위협 및 실시, 전자충격탄에 의한 대만군 지휘망의 마비, 대만사회를 교란시키기 위한 공중침투작전, 대만 방위력 파괴를 위한 해공전 그리고 수륙양용 작전에 의한 대만점령 등 아주 다양합니다.
이에 대한 대만의 전략을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최근 대만 국방백서에 따르면 대만군은 대만해협을 자연적 장애로 삼아 중국군의 무력행동 징후를 조기에 탐지하고 합동작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투태세와 능력을 지속적으로 향상시킨다는 데 전비태세의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만군은 중국군 침공시 ‘전략적 지구와 전술적 신속성’의 원칙하에 각종 부대와 화력을 통합하고 민간자원을 총동원하는 총력전을 감행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대만은 또 제해 및 제공권을 장악해 중국군의 상륙작전을 저지하는 동시에 중국의 미사일 공격에 대해서는 ‘조기경보, 즉각대응, 다차원의 요격 및 결정적 파괴’지침에 따라 대응한다는 것입니다. 양측의 시나리오를 보면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다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대만 점령은 현실적으로 어려워
-어느 책을 보니까 중국의 대만점령 시나리오로 대만을 향해 200만 병력을 20만척의 어선에 나눠 태워 보내겠다는 대목이 있던데요, 현실성이 있는 것입니까.
“중국의 인해전술과 게릴라전술을 말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런 시나리오입니다. 중국이 초전에 본토에서 미사일을 대량으로 발사해 대만의 주요 지휘체계, 통신시설과 비행장 등을 파괴하면 하늘과 바다의 통제능력을 장악하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에 어선을 총동원해서 대만의 주요 항구를 봉쇄하고 수십만의 병력을 상륙시킨다는 것입니다. 현실성은 없다고 보아야겠지요.”
-말씀을 듣고 보면 당장 전쟁을 한다 하더라도 중국이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는 상황이군요.
“그럼요. 특히 전쟁의 양태가 문제인데요. 중국군이 대만해협을 부분적으로 봉쇄한다든가 또는 어떤 도서를 점령한다든가, 미사일로 중요한 항로를 공격하는 정도가 아니라 대만섬을 점령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현재 중국군의 능력으로 대만을 점령하려면 대가가 너무도 큽니다. 다만 다양한 방식으로 위협을 가하면 주가가 폭락하고, 무역량은 뚝 떨어지고 투자가 줄어드는 등 피해를 줄 수는 있겠죠.”
-거꾸로 양안전쟁시 대만이 중국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범위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대만에는 장거리 미사일이 없기 때문에 광저우(廣州)직할시 등 일부 가까운 지역을 공격할 수 있을 겁니다. 베이징은 멀어서 어림도 없습니다. 대만도 MTCR(미사일기술통제체제)에 걸려서 300km 이상의 사거리를 갖는 미사일은 개발할 수 없는데, 대만해협만 해도 그 폭이 100마일(160.9㎞)이니까 말이죠.”
-중국은 대만과의 전쟁이 불가피할 경우 속전속결 작전을 펴 미국이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습니다. 이런 점은 어떻게 보십니까.
“만약에 군사력을 사용한다면 그런 전략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겠지요. 양안간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제가 볼 때는 중국이 주도권을 잡을 텐데요. 중국이 전쟁의 목표를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시나리오가 달라질 것입니다. 중국이 대만섬을 점령하고 정권을 붕괴시켜서 완전히 새로운 정부를 세우겠다고 하면 전면전의 개념으로 작전을 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해협의 중요 항구를 봉쇄한 뒤 대만측의 반응을 보아가면서 정치적 효과에 따라 다음 수순을 결정한다면 전쟁의 양상은 또 달라질 것입니다. 혹은 일부 도서를 점령해놓고 대만에 대해 국민투표 실시 중지 같은 정치적 압력을 가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떤 경우가 되든 중국도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피해를 각오를 해야겠지요. 무엇보다도 중국이 난처한 것은 대만사람을 외국인으로 볼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지금 중국은 대만을 내국(內國)으로 보는데 거기에 군사력을 사용한다면 정치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명분이 서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할 수밖에 없거든요. 또 나중에 대만을 통합했을 때에도 반발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중국은 ‘우리는 절대로 같은 민족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표명해왔기 때문에 대만인들의 반발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라크 상황을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보기에, 중국이 대만에 대해 군사력을 사용한다면 제한적·상징적으로나 가능하지 대만섬 자체를 완전히 장악한다는 것은 정치·군사적으로 대가가 너무 클 뿐 아니라 미국과도 부딪쳐야 해 어렵습니다. 중국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인민해방군으로 널리 알려진 중국군은 여러 면에서 독특한 군대다. 당의 군대로서 부여되는 특수한 위상, 혁명군대의 전통, 인해전술에서 핵전쟁까지 구사하는 다양한 전술전략, 넓은 국토를 분담하고 있는 대군구 제도 등 우리로서는 하나같이 생소한 모습들이다. 인민해방군의 어제와 오늘, 구조와 편제에서 첨단무기에 이르기까지 세계 최대 군조직의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보자.
黨軍으로서의 인민해방군
-먼저 중국군, 즉 인민해방군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그 성립의 역사를 간단히 말씀해주시지요.
“중국군은 1927년 8월1일 난창(南昌)폭동을 계기로 중국공산당의 주더(朱德)와 마오쩌둥(毛澤東)의 영도하에 주로 농민들을 조직해 만든 군대였습니다. 당시 중국공산당의 목표는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군은 혁명을 수행하는 군대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의 영도를 받는 ‘당의 군대’라는 것이죠. 중국군은 인민을 동원해서 국가를 만들어낸 군대입니다. 따라서 중국군은 군 본연의 전투대 역할 이외에도 1927년에서 1930년 초에 걸쳐 강서소비에트라고 하는 최초의 해방구를 만들어서 통치행위를 하는 등 정치적 역할도 수행했고, 또 군대의 보급을 자급자족해온 데서 비롯된 경제적인 역할 등 3가지 역할을 맡아왔다고 하겠습니다.”
-중국군의 가장 큰 특징은 당의 군대, 즉 당군(黨軍)이라는 사실입니다. 당군이란 개념이 우리에게는 아주 생소하지 않습니까.
“당군에 대한 학설이 많습니다. 당이 군을 지배하는 형태다, 당과 군은 서로 공생하는 관계다, 또 군은 당 속에 통합된 형태다 등등 여러 가지로 분석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중국군은 당내에 통합돼 있으므로 ‘당내의 당군관계’라고 표현하는 게 정확할 듯합니다. 이처럼 당과 군을 분리해 생각할 수 없습니다. 현재 중국공산당의 정책 결정을 대표하는 제16기 당중앙위원회의 정위원 198명 가운데 인민해방군 간부가 48명입니다. 군부 인사가 중앙위원의 22%나 돼 단일조직으로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당군이라고 했을 때 당과 군의 연결고리가 군의 당위원회이고 그 책임자가 정치위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현재 정치위원은 어떻게 배치돼 있고, 그 역할과 파워를 어떻게 보십니까.
“중국군에는 이른바 당위원회라는 게 설치돼 있습니다. 이것은 당과 군의 연결고리라기보다는 당위원회 자체가 하나의 집단적인 지도기구이자 정책결정기구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당위원회에는 당중앙위원회에서 파견한 간부와 인민해방군 총정치부에서 보낸 정치위원, 그리고 군사령관이 들어와 있고, 요즘엔 당기율검사위원회에서 파견한 간부들까지 있어 각각의 기능을 발휘하면서 당에 의한 군의 통제와 지휘를 제도화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군내의 당위원회 책임자, 즉 당서기를 누가 맡느냐는 것입니다. 당서기가 해당 부대의 수장이 되기 때문에 누가 그 자리를 맡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지금 중국 인민해방군 내의 사단급 이하 부대, 그러니까 사단 연대 대대에서는 정치위원이 대개 당서기가 됩니다. 그런데 사단보다 상위부대인 집단군에서는 정치위원이나 군사령관이 당서기가 되고, 그 상부의 7개 대군구는 사령원(사령관)이 당서기가 됩니다. 이 대군구의 사령원은 거의 모두가 당중앙위원회 정위원이고 과거에는 당 정치국에까지 진출한 적이 있었어요. 군구 사령원이 바로 당서기이기 때문에 당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부대 이동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군대의 수뇌부는 사령원과 정치위원의 쌍두마차 체제라 할 수 있는데요. 이런 점이 유사시 군지휘권에 문제가 되지는 않을까요.
“흔히 정치위원과 사령원간의 관계를 논할 때 전자는 정치와 관련된 문제를 담당하고 후자는 부대 지휘를 맡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구분은 일단 기능상으로는 맞습니다만, 그 모든 결정은 당위원회에서 결정하고 당서기가 주관하죠.
그런데 지금까지 군 지휘권과 관련한 문제의 핵심은 정치위원과 사령원간의 갈등보다는 당이 군을 지휘하는 데 있어 당내 누가 군을 지휘하느냐는 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톈안먼(天安門)사태나 린뱌오(林彪)사건 때처럼 정치지도부에 균열이 생겼을 때 누가 군을 지휘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 경우 인민해방군은 당군이므로 당총서기가 군을 지도할 수 있고, 혹은 군통수조직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군을 지도할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군령권을 가지고 있고, 당총서기는 당권의 최고지도자라는 위상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과거 마오쩌둥 시절에는 당권과 군령권이라는 2개의 모자를 혼자 쓰고 있었습니다만, 톈안먼사태 때만 해도 자오쯔양(趙紫陽)이 당권을, 덩샤오핑(鄧小平)이 군권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도 장쩌민(江澤民)이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서 군권을 가지고 있고, 당권은 총서기인 후진타오(胡錦濤)가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평상시에는 국가나 당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군령권을 근거로 7대 군구의 사령원에게 직접 부대 이동과 같은 중요한 사안을 발의할 수 있습니다만, 정치지도부에 분열이 생겼을 경우에는 미묘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중국군 관계자들에게 슬쩍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중앙위원으로 나간 군간부 48명은 장쩌민의 지시와 후진타오의 지시가 다를 때 누구 지시를 따르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대답이 재미있어요. 군인한테 물어보면 당연히 장쩌민 주석의 말을 따라야 하지 않겠냐는 반면, 민간인 간부들한테 물어보면 당총서기인 후진타오의 지시를 따르는 게 맞다는 식이에요.”
중국군 움직이는 8인의 실세
-경우에 따라서는 커다란 혼란이 초래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군대 내부에서 혼란이 생기기보다는 당지도부가 분열됐을 때 군이 분열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중국공산당 역사상 지금까지 군이 분열돼 정치리더십까지 분열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야전군은 지금까지 당의 명령에 충실히 복종해왔습니다. 그런데 문화혁명 같은 사태가 일어나면 4인방의 말을 들어야 할지, 군통수권자의 지시를 들어야 할지를 놓고 군이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민해방군은 이런 정치적 동란을 아주 싫어합니다. 자칫 줄을 잘못 서면 나중에 숙청대상이 될 수도 있거든요. 이런 점을 살펴보면 사령원과 정치위원간 갈등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당중앙군사위와 국가중앙군사위가 중국군의 최고정점을 이루고 있습니다만, 군사정책 결정의 메카니즘과 핵심 실세는 누구라고 볼 수 있습니까.
“현재 중국 군사정책 결정의 핵심 실세는 중앙군사위의 구성원들입니다. 당중앙군사위와 국가중앙군사위는 구성원이 동일한데, 장쩌민 주석 아래로 3명의 부주석이 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후진타오로 당총서기인 동시에 군 문제에서는 부주석입니다. 나머지 두사람은 차오강촨(曹剛川) 상장과 궈보슝(郭伯雄) 상장이죠. 두 사람은 현역군인으로서 부주석이고 그 밑에 총정치부장 총참모부장 총후근부장 총장비부장 등 4대 총부장이 위원들입니다. 이들이 실질적으로 군사관련 정책을 결정하면 그 내용이 최종적으로 정치국에 올라가는 구조입니다.”
-중국군은 전투뿐만 아니라 정치공작을 하고 생산활동에도 참여한다는 점에서 다른 국가의 군대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중국군의 이 같은 역할의 특징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당군으로서의 인민해방군은 당의 명령에 복종하고 정부의 이익과 인민의 이익에도 봉사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단순히 전투대만이 아닌 정치공작대의 전통을 갖게 돼 농민을 동원하는 작업이라든가, 더 나아가 생산대의 전통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중국군이 생산대의 전통을 가졌던 대표적인 경우가 1958~69년까지의 대약진시기입니다. 이때는 대만해협에 위기가 고조됐던 시기로 전투훈련을 많이 실시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약진운동을 명분으로 내세워 군을 경제전선으로 내몰았습니다. 이 시기에는 농사일에서부터 댐건설, 탄광노동 등 각종 생산활동에 군을 투입했어요. 부식(副食)을 군대가 자급자족하는 건 기본이었구요.
이처럼 생산대의 역할을 함으로써 인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활동은 군 본연의 전문적 직업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이 안 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이런 문제를 놓고 갈등이 표출되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군부의 역할은 공산국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 소련에서도 그랬고 북한에서도 최근 선군(先軍)정치를 내걸고 군에서 농사를 다 맡아 하지 않습니까.”
-생산활동에 종사했던 전통이 오늘날에는 군의 기업경영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 중국 인민해방군의 경제활동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현재 중국군의 경제활동 규모나 실태는 어떻습니까.
“1980년대 초반 덩샤오핑이 군의 기업활동을 허용했어요. 그 내용은 군이 자급자족하기 위해 직접 농업과 공업에 관련된 기업에 들어가서 생산 주체로서 시장에 참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유명한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이 나온 것입니다. 국방예산이 많지 않으니까 생산활동으로 돈을 벌어 쓰고 군인들에 대한 복지비용도 거기서 충당하라는 것이었지요. 또 군의 기업활동을 군인 가족의 취업확대에 활용하라는 내용도 들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업활동이 확대되다 보니까 총후근부를 비롯한 4대 총부는 물론이고 해군사령부, 공군사령부도 자회사를 두어서 기업활동에 나서게 됐어요. 그 결과 한때 군기업의 숫자가 2000개, 3000개를 넘기도 했습니다. 이런 추세가 15~16년간이나 지속돼 1997년에 장쩌민이 중지시킬 때까지 엄청나게 커진 것이지요.”
-군의 기업활동을 통해 올린 매출액이라든가 수익이 통계로 잡히지는 않았습니까.
“일부는 통계가 나온 게 있습니다만, 군 자체적으로 무기를 생산, 판매한 부분과 순수 기업활동을 통해 올린 수익 부분이 제대로 구분되질 않습니다. 군공기업과 군대기업의 생산물 가치총액은 1980년대 말 공식적 국방예산 210억위안의 30%에 해당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베이징 시내에도 군에서 운영하는 기업으로 알려진 바오리(保利)집단의 고층빌딩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오리 테크놀로지는 총참모부 산하 장비부의 자회사였습니다. 총후근부 산하 신싱(新興)이라든가, 총정치부 산하 카이리(凱利)가 대표적인 군기업입니다. 이들 군기업은 자회사가 또 자회사를 만드는 식으로 해서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죠. 이런 자회사는 군가족을 고용하기도 합니다. 또 각 지역으로 내려가면 대군구가 자회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광저우(廣州)군구 산하 자회사는 홍콩까지 들어가 기업활동을 했어요.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넘어오던 시기에 인민해방군이 들어가 합작회사를 운영했는데, 엄청나게 불공정 경쟁을 한다고 해서 말썽이 일기도 했습니다. 인민해방군 기업은 면세혜택은 물론이고 원료획득과 금융면에서 특혜를 받았는가 하면, 군소유 토지에다 공장을 건설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지요.”
-이 같은 군의 경제활동에 대해 중국정부가 규제에 나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배경에서 규제를 하게 된 것인가요. 현재는 군의 기업활동이 많이 줄어들었습니까.
“앞서 언급한 대로 여러 가지 문제점이 속출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군의 부패를 방치하면 안 된다는 점이 고려됐습니다. 총후근부 중심으로 기업활동이 이루어지다 보니 후방일꾼들이 부패의 온상이 돼버렸다는 겁니다. 유사시 전방에서는 열심히 싸우는데 후방 조직이 부패해 사욕만 채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군은 황량(皇糧), 즉 중앙정부에서 내려주는 양식을 먹어야 말을 잘 듣는 법인데 그대로 두어 인민해방군이 돈이 많아지면 중앙을 우습게 알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또 군대가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토지나 자원 등의 조달문제를 다루다보니 성(省) 단위의 관료들과 관시(關係)가 생겨 서로 유착하는 현상이 나타나는가 하면, 군의 기업활동이 외교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도 제기됐어요.
예를 들어 홍콩주둔군은 기업활동을 못하도록 했는 데도 군이 다른 방식으로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과정에서 시장질서를 교란시켰다는 것입니다. 또 중국의 WTO(세계무역기구) 가입과정에서도 군기업이 재정이나 원료조달, 은행융자 등에 있어 일반기업과 달리 특혜를 받고 있다며 미국이 불공정경쟁 문제를 제기했을 정도입니다. 물론 군이 기업활동에 빠져들다 보면 군의 전문화가 안 돼 전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점도 고려했다고 봅니다.
이런 배경에서 1997년 말에 장쩌민이 직접 명령을 내려 4대 총부와 7대 군구, 성군구 집단군의 기업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예외로 국무원 산하 군수공장과 군부대의 자급자족 체계에 의한 농사나 두부공장 돼지사육을 제외하고, 군이 투자해서 이익을 추구하는 활동을 법으로 엄격히 규제한 것이지요. 기업활동 금지조치 이후 군기업들이 민영화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제대군인이 중심이 되고 있어 효율성이 더 떨어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중국은 땅이 넓은 데다가 병력도 많아 군의 구조와 편제가 간단치 않을 것 같은데요. 어떤 구조로 돼 있습니까.
“중국군은 과거에는 중앙군 지방군 민병으로 이루어졌었는데, 1984년에 병역법을 만들면서 구조조정을 거쳤습니다. 그 결과 중앙군은 7대 군구와 그 산하의 24개 집단군으로 재편했고, 지방군을 없애는 대신 무장경찰대를 발족시켰어요. 그리고 민병과 예비병을 상호결합했습니다. 무장경찰대는 전투부대 임무보다는 지방의 소요를 진압하고 국경지대의 안정을 책임지도록 돼있습니다.
중앙군의 구조조정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총참모부 산하에 7대 군구를 두었는데, 각 군구는 합성방위사령부 형태로 조직돼 있습니다. 즉 군구사령관 산하에 공군구성군 사령관과 해군구성군 사령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7대 군구의 사령관은 보통 서너 개의 집단군과 함께 공군 및 해군부대를 거느리고 있어요. 그래서 공군은 집단군과 연계시켜 공군군구를 만들고, 해군은 북해함대 동해함대 남해함대로 나누어 해당 군구의 지휘를 받도록 했습니다. 우리의 경우처럼 3군 병립제도가 아닌 군구별 합성집단군 체제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토가 넓다 보니 각 군구가 관할지역에서 신속하게 육해공 통합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든 것이지요. 이외에 제2포병이라는 전략미사일부대가 있습니다.
-제2포병이 육해공군과 동격인 것이 이채롭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제2포병이 별도의 군조직으로 위상이 높아진 겁니까.
“제2포병은 핵무기와 미사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현재 450개의 핵탄두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통합해 운영하는 것이 제2포병의 임무입니다. 각 집단군에 속해 있는 전술 미사일인 M-11 정도가 아닌 중장거리 미사일은 전부 제2포병 휘하에 배치돼 있습니다. 이 제2포병은 1960년대에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만들었는데, 총참모부가 아닌 중앙군사위원회의 지시를 받습니다. 6개 사단(기지) 사령부가 있고, 각 사단은 3개 여단으로, 1개 여단은 4개의 발사대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여단에는 동풍(東風)계열 미사일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한반도는 선양군구가 대처
-중국군은 7대 군구로 나뉘어 있는데요. 각 군구의 편제와 관할지역 및 그 특성은 어떻습니까.
“7대 군구는 베이징군구 선양(瀋陽)군구 지난(濟南)군구 난징(南京)군구 광저우(廣州)군구 청두(成都)군구 란저우(蘭州)군구입니다. 이 밖에 베이징 위수구를 비롯 상하이, 톈진, 난징 경비구가 있습니다. 베이징군구의 경우 6개 집단군 40여만의 병력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양군구는 동북3성을 관할하고, 난징군구는 동남연해의 인구밀집지역과 공업지역 5개 성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이밖에 광저우군구는 광둥(廣東)성을 비롯한 5개 성과 함께 홍콩을 관할하고 있고, 란저우군구는 핵무기 생산시설 및 미사일 시험발사 기지를 방어하는 임무를 띠고 있습니다.”
-7대 군구 가운데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은 어디입니까.
“우선 베이징군구는 수도 방위 임무를 띠고 있으므로 당연히 가장 중요한 곳이지요. 과거 소련을 가상적(敵)으로 삼던 시절, 소련이 기갑부대와 전략무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맞서는 베이징군구의 전략적 중요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선양군구도 중요시되고 있죠. 광저우군구는 요즘 대만해협에 위기상황이 조성되면서 새삼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군구 산하의 집단군은 A급 B급 C급으로 구분해 각각 평지, 산악지대, 국경지대에 배치하는데, 평지의 집단군에는 기갑부대와 기계화부대 전술미사일 등을 많이 배치하고 있습니다. 베이징·선양·광저우군구가 바로 이런 평지 집단군 위주로 구성됐습니다.”
-한반도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선양군구의 배치실태랄까 전략개념은 어떻게 돼 있습니까.
“지역적으로 봐서는 선양군구가 한반도로부터 오는 위협에 1차적으로 대처하는 부대가 되겠죠. 창춘(長春) 하얼빈(哈爾濱) 잉커우(營口) 진저우(錦州) 툰시(屯溪) 등에 5개의 집단군이 주둔하고 있는데 기계화부대가 주력이고, 정보화가 확충돼 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한반도와 관련해서는 유사시 선양군구가 관할구역으로서 일차적으로 책임을 집니다만, 만약 어떤 우발적인 계획을 만들어서 그걸 이행하려고 한다면 별도의 전선군(前線軍)을 편성하게 됩니다.
한국전쟁 때도 전선군을 편성해서 참전했고, 지난 1979년 베트남과의 전쟁에서도 해당 군구인 청두군구가 나서지 않고 별도의 전선군을 편성했습니다. 당시 총사령관도 청두군구 사령관이 아닌 전선군 사령관 양더즈(楊得志)였습니다. 아무튼 선양군구가 한반도를 맡는다면 지난군구는 일본을 맡도록 돼 있습니다.”
-중국군의 병력을 감축한다는 발표가 그동안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감군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중국군은 어느 수준까지 줄어들게 됩니까.
“1985년에 덩샤오핑이 중앙군사위 확대회의에 200명의 장군을 모아 놓고 100만 감군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때 철도병이나 지방군이 없어지고 무장경찰대가 만들어졌지요. 그후 1997년에 50만 감군방침이 발표됐고, 2003년에서 2005년까지 다시 20만을 줄이겠다는 언급이 장쩌민의 군사과학기술대학 연설에서 나왔습니다. 실제로 2003년에는 4만여명을 감축했습니다. 대신 해·공군의 작전효율성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해군은 칭다오, 뤼순, 상하이 등 9개 기지를 폐쇄하여 지휘제대를 보다 단순화한다는 것이고, 공군은 기존 5개 군단을 폐쇄하여 대군구 공군사령부에서 직접 비행사단을 통제하겠다는 것입니다.
육군의 경우는 신속대응부대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구조조정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땅이 넓으므로 유사시 신속히 부대를 투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지요. 집단군을 편성하고 긴급대응부대, 신속대응부대, 공수부대를 만든 것도 이런 방침에 따른 것입니다. 저장성 항저우(杭州)에 2개 공수사단을 신규 배치하여 유사시 군용기로 분쟁지역에 투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대만을 의식한 조치라고 보여집니다. 란저우군구의 전력보강은 신장(新疆)지역의 독립세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조치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감군조치 등을 거쳐 현재 인민해방군의 총병력은 얼마나 됩니까.
“영국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 문건에 의하면 중국군 정규병력의 총수는 약 220만입니다. 무장경찰대 약 80만을 합치면 300만이 되는 셈이지요. 20만 감군이 예정대로 완료되는 2005년 말 중국 정규군은 약 200만 수준이 될 것입니다.”
-군병력의 숫자만 놓고 보면 세계에서 가장 많지 않을까요.
“숫자상으로는 가장 많죠. 그러나 중국의 지리적 여건을 봐야 합니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남쪽의 베트남에서 파키스탄을 지나 중앙아시아 쪽으로 근래에 분리 독립한 나라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습니다. 인도와 러시아 같은 대국과도 국경이 맞닿아 있지요. 동쪽으로 한반도가 있고 일본과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있어요. 또 대만해협과 한반도에서는 미국과도 마주하고 있습니다. 아마 EU를 뺀 모든 강대국과 직간접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300만의 병력이 결코 많은 건 아니라고 중국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인구대비로 봐도 그렇구요.”
-중국군은 혁명군의 전통을 갖고 있어 다른 나라 군대와는 다른 점이 많다고 하겠습니다. 한때 계급제도가 폐지됐던 적도 있고 말입니다. 그래서 군의 정규화가 중요시되지 않았습니까.
“정규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군대의 계급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혁명군의 동지 개념 대신 정규군대의 계급개념을 도입한 것이지요. 문화혁명 때 계급이 폐지되었다가 1988년도에 부활된 데 이어 군관 복무조례를 제정해 계급정년제와 연령정년제 진급요건 등을 규정했어요. 과거엔 정년이 없어 노병(老兵)이 득실거렸어요. 지금 북한군에 정년이 없습니다. 한번 군인이면 영원한 철밥통이지요. 중국군은 이제 그런 군대가 아닙니다.
또 군대를 전문화하기 위해서 원교교육을 강조해요. 전에는 혁명군대라고 해서 사상력만 강하면 된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현대전의 전기(戰技)를 갖지 못하는 장교는 앞으로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군단장을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자연히 원교교육, 그러니까 오늘날의 군사학교 교육을 강조하게 됐고 이는 진급의 필수조건이 됐습니다. 후근관리 개발연구 의무직종의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1980년대 말에는 10만명의 문직간부를 탄생시키기도 했어요. 병참부서 간부의 약 60%는 문직간부로 채워지고 있는데, 이 제도의 도입으로 장교 대 사병의 비율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과거 관시문화가 군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것도 엄정한 규율에 의해 통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고, 군복무자에 대한 복지혜택도 제도화했습니다. 예를 들어 지원병으로 입대해 10년 이상 복무하고 제대하면 출신 성(省)에서 직장을 보장해줍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나서 예편하면 연금을 주게 돼 있어요. 또 1997년에 국방법을 만들어 국가주석이 총동원령을 내릴 수 있게 했습니다. 인민해방군이 당의 군대라고 하지만 유사시에는 국가의 군대가 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방비도 체계화해 국가의 재정과 국방소요를 상호 결합시켜서 책정하도록 했어요. 1980년 이후 이 같은 국방비 규정을 강력히 이행하고 있어 중국군을 전문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자력갱생의 무기획득 원칙
-중국의 무기는 과거 소련제 위주로 구성됐던 것으로 압니다만, 최근에는 독일이나 프랑스로부터 무기도입을 추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중국군의 무기획득 원칙은 어떤 것입니까.
“중국군의 무기획득은 근본적으로 자력갱생의 원칙에 따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기의 기술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은 편입니다. 중국군은 무기수입을 하되 라이선스로 생산한다든가 기술을 모방하려 하지 대량으로 수입하지 않습니다. 우수한 무기 기술은 남이 주지 않기 때문에 자주적으로 개발해야 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으므로 결국 외국 기술을 라이선스로 생산한다든가 모방생산한다는 겁니다. 심지어는 일부 무기를 역설계해서 기술을 가져오자는 것이지요. 남의 무기를 대량으로 가져오면 그로 인해 외국에 의존하게 되므로 국산화를 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런 원칙을 갖고 있다 보니까 전력화에 걸리는 시간이 비교적 긴 편입니다. 수호이-27 전투기도 러시아와 도입계약을 했지만 60~70대밖에 들여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중국의 수요로 봐서는 얼마든지 도입량을 늘릴 수가 있거든요. 무기획득의 또 하나의 원칙은 선진국의 첨단무기 독점을 파기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무기는 남이 가지면 나도 갖는다는 것이지요. 선진국의 패권추구라는 건 결국 다른 국가가 못 가진 첨단무기를 가지고 약자를 들볶는 것이죠. 그래서 선진국가의 무기독점 그 중에서도 핵독점을 깨야 하고, 우주의 독점, 해양 통제의 독점도 깨야 한다는 것을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같은 무기획득의 원칙이 실제로 지켜지고 있습니까.
“핵독점은 이미 1964년에 깼습니다. 1955년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 이와 관련한 전략논쟁이 있었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대만해협 위기가 언제 촉발될지 모르니까 미국과 대적할 수 있는 현대화된 재래식 무기를 들여오느냐 아니면 장기적인 측면에서 핵을 개발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결론은 재래식 무기의 현대화는 인민전쟁체계로 돌리자, 적을 끌어들여 싸우면 된다, 그러나 핵이 없으면 계속 강대국에 들볶일 것이니 핵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부에서는 소련의 핵우산을 빌리면 된다고 주장했으나 마오쩌둥이 국가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 소련이 중국의 이익을 보호해줄 것으로 믿을 수 없다, 자주국방 개념에 맞지 않는다 해서 핵개발쪽으로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이미 우주개발까지 구상한 것이지요. 거기서부터 발전을 거듭해 선저우(神舟) 5호 유인 우주선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중국은 병력을 감축하는 대신 현대화 첨단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지상군 현대화의 구체적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중국 지상군이 추구하는 방향은 기계화와 정보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의 이라크전쟁을 보면서 공중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기동력, 화력과 공수부대를 강화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보병의 경우 장갑기계화해야 한다 해서 기계화를 추구하다가 최근에는 정보화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단거리 미사일도 과거의 포병화력을 대치시킬 수 있는 것으로 정보화에 합치된다는 것입니다.”
항공모함 보유계획 없어
-해군의 전략개념과 현대화 방향은 어떤 것입니까.
“해군은 근해(近海) 적극방어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원양(遠洋)이란 말을 쓰지 않습니다. 중국의 국익을 지켜야 할 해군의 작전통제지역으로 근해 300만㎢를 설정해놓고 있습니다. 이 해역은 근해라고 하지만 어느 면에서는 원양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함정이 커야 하므로 엔진 추진력이 좋은 구축함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구축함은 약점이 있어요. 함대함(艦對艦) 미사일은 그런대로 가능한데 함대공(艦對空) 미사일이 없다는 겁니다.
최근 새로 선보이는 구축함에는 모두 함대공 미사일을 장착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서브르매니 구축함을 러시아로부터 도입했는데, 함대함·함대공 미사일은 물론 대잠수함 작전능력까지 갖고 있어요. 정보체제와 작전통제체제가 있고 화력통제장치도 자동화돼 있는 구축함입니다. 중국 해군은 또 대만해협에서의 작전을 중요시하므로 잠수함의 세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중국 해군이 항공모함을 보유할 가능성은 없을까요.
“아직까지는 항공모함 획득 계획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것 같아요. 첫째, 항공모함의 작전해역이 마땅치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해역인 대만해협의 폭이 100마일에 불과해 항공모함이 끼어들 수가 없어요. 즉, 대만의 지상미사일 사격권에 들어간다는 것이지요. 둘째, 운영비가 엄청나게 소요된다는 점입니다. 셋째, 중국이 항공모함을 보유하게 되면 일본 미국 등 주변국을 자극하게 된다는 것으로, 항모를 남중국에 띄우면 자칫 미7함대를 끌어들일 염려가 있습니다.
제가 이 문제를 가지고 중국 미국 양국의 관계자들과 인터뷰를 해보았습니다만, 중국은 항공모함을 획득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항공모함의 운영을 위한 간부 양성과 함재기에 관련된 부분을 준비하고 있는 정도인 것 같아요.”
-중국은 공군의 작전반경이 짧아 강대국이 못된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공군의 전략개념은 어떤 것입니까.
“공군이 상대적으로 가장 부진한 편입니다. 역사적으로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인도, 베트남, 러시아 등과 전쟁을 치렀습니다만, 한번도 공군이 제대로 작전을 한 적이 없어요. 고작 연락기나 정찰기 역할을 했죠. 그리고 아직까지도 교리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80년대에 나온 교리라 해도 제공(制空)에 관련된 교리라든가, 근접전투시 지상군 지원, 전장 차단, 후방지역의 중요한 표적을 공격할 수 있는 전략폭격 등등에 대해 제대로 된 교리가 없습니다. 공군장교들을 만나 공군 교리에 대해 물어보면 “부칭추(不淸楚)”라고 합니다. 확실치 않다는 뜻이죠. 그래서 지금 공군의 현대화 방향은 교리 발전을 부단히 추구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공군의 작전 개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방어에 있어서는 3선방어의 개념을 갖고 있어요. 우선 제1선에는 요격기를 배치합니다. 적이 영공을 침입하려고 하면 요격기가 미리 바깥으로 나가 요격을 시도합니다. 만약 이것이 실패하면 그 다음에 또 다른 요격기 편대가 출격하고, 그 다음에는 방공포나 방공미사일로 대응합니다. 현재 상하이를 빼면 주요 도시와 시설은 내륙 깊숙이 들어가 있습니다. 따라서 영토방공에 있어 중국은 아직은 요격기 체제에 의존하기보다는 방공미사일에 주로 의존하는 편입니다.”
방어위주의 공군력 운용
-유사시 중국 공군력이 한반도지역까지 커버할 수가 있습니까.
“외지에 멀리 나가서 전력을 투사할 수 있는 능력, 예를 들어 원정대를 따라가서 지원할 수 있는 공군력은 크게 부족합니다. 다만 기지에서 발진할 수 있는 육속지역에서는 가능하겠죠. 수호이-27은 전투 행동반경이 1500km인데 공중급유기 없이 한반도까지 오려면 산둥반도 쪽에다 기지를 형성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발진하면 한반도에 겨우 들어올 수 있죠. 그런데 지금 대부분의 공군력이 대만해협을 겨냥해 광저우지역에 몰려 있거든요. 거기서는 한반도로 날아오기가 어렵습니다. 중국은 3000km 전투행동반경과 대지공격 능력을 갖춘 수호이-30을 별도로 도입해 전력화하고 있어요. 또 최근 공중급유기를 도입했고 조기경보기도 일부 운영하고 있습니다만, 일단 공격보다는 방어 위주로 공군력을 운용하는 실정입니다.”
-중국은 일찌감치 핵실험에 성공한 핵강대국인데요. 중국군의 핵무기 보유실태와 총체적인 핵능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중국이 보유한 핵폭탄은 450기 정도고, 대륙간 탄도탄은 약 20기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 전술핵도 가지고 있지요. 지금 중국은 지속적으로 핵무기 현대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어요. 대표적인 게 고체 핵연료의 개발입니다. 지금의 액체연료는 발사할 때 시간이 많이 걸리거든요. 다음에 로드미사일 개발입니다. 이것은 고정식이 아니라 이동하면서 발사할 수 있는 미사일을 말합니다.
핵미사일의 사거리 확장도 주요 목표입니다. 개발중인 동풍(東風)-41은 사거리 1만2000km에 다단계 재돌입체계를 갖춘 최신형 미사일로 구형 동풍-5A를 대체할 계획입니다. 그 다음에 2세대 미사일 내지 3세대 잠수함발사 미사일을 개량하고 있습니다. 대개 거랑(巨浪)-Ⅰ을 말하는데 이것을 고체연료로 개량하려고 합니다. 이 미사일은 사거리가 3000km로 파괴력이 큽니다. 그 다음에 SSBN에 해당하는 게 한 척 있는데, 이걸 2008년까지 영국·프랑스가 보유한 4척 수준으로 늘리려고 합니다. 또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크루즈미사일을 2005~06년에 개발해서 배치할 계획입니다. 그러니까 단계적으로 핵무기를 업그레이드시키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대륙간 탄도탄 20기의 전략전술
-중국군의 핵전력은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이나 인도 같은 경쟁국과 비교하면 어느 수준입니까.
“미국, 러시아와 비교하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떨어지죠. 미국과 러시아가 핵탄두를 2000기 수준으로 줄인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감축한 핵탄두를 완전히 폐기하는 게 아니라 안전한 장소에 옮겨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사시에 재조립하면 그만이에요. 현재 450기를 보유한 중국은 미국과 러시아가 앞으로 1000기까지 감축하면 핵감축클럽에 가입하겠다는 것입니다. 프랑스나 영국은 질적으로 다른 면이 있겠지만 양적으로는 중국에 크게 떨어집니다. 인도는 더욱 낮은 수준이라 비교도 안 되고요. 전체적으로 중국의 핵전력은 세계 3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군의 기본적인 핵전략은 어떤 것입니까.
“지금 중국은 기본적인 핵전략을 최소억지전략에서 제한억지전략으로 전환하는 과도기에 있습니다. 제한억지전략이란, 예를 들어 과거 70년대에 미국과 소련이 가지고 있던 실증 파괴전략과 비슷합니다. 상대에게 어느 정도 얻어 맞더라도 나머지 핵을 가지고 보복하겠다는 것이죠. 중국도 그런 전략 개념에 따라 어느 정도의 억지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죠. 1964~65년경 마오쩌둥이 ‘우리는 상징적으로 핵무기 한두 개만 가지면 된다’고 했는데, 1970년대에 계속 양적으로 늘어났습니다. 때문에 80년대에 와서 비로소 핵전략이 본격적으로 나오게 된 것이지요.
중국이 제한억지전략을 구사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이런 식입니다. 자국에 20기의 대륙간 탄도탄이 있으므로, 초전에 미국의 공격에 10기를 얻어 맞는다 해도 나머지 10기로 로스앤젤레스든 어디든 미국을 향해 날려보낼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논리로 러시아에 대해서도 과거에는 ‘적에게 얻어 맞으면 우리도 볼세이 극장 정도는 때릴 수 있다’고 하다가 요즘은 ‘극동의 군사시설을 박살낼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중국의 핵전략이 상대의 민간시설 공격전략에서 군사시설을 파괴할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둔 억지전략으로 격상됐음을 말해주는 사례입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게 미국은 군사적 신뢰구축 차원에서 상대방을 데려와 핵시설을 다 보여주는데 비해 중국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중국의 전략적 모호성은 제한억지전략의 일부분입니다.”
-미국의 미사일방어(MD)에 맞서기 위해 중국은 사거리 8000㎞로 미 서부까지 사정권에 두는 동풍31호 미사일과 우주에서 12개 이상으로 분리되는 탄두미사일인 MIRV 등의 개발을 상당히 진척시켰다는 보도가 나온 바 있습니다. 미국의 MD에 대처하기 위한 중국의 대응책은 무엇입니까.
“MD에 대해 중국이 구체적으로 발표한 것은 없습니다. 미국의 MD구상 초기단계를 놓고 본다면 중국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20기에 대응해 MD 100기를 만들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5대1이지 않습니까. 즉 중국이 탄도미사일 하나를 발사했을 때 미국측에서 5개의 요격미사일을 발사해 막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율이면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또 미국은 중국이 탄도미사일 20기를 동시에 발사하지 못할 것으로 계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실시간으로 상공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하나씩 요격하면 알래스카에 20기의 MD체제만 구축해도 중국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중국은 결국 탄도미사일의 양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갈 것입니다.
두 번째는 디코이(교란 물체)를 동시 발사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겠지요. 그리고 중국은 MD 자체를 공격용 무기로도 보기 때문에 자국 미사일 발사기지의 취약성을 제거하는 데도 신경을 쓰리라고 봅니다.”
-중국의 군사력이 미국에 필적할 만한 수준으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 랜드연구소에서 많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2001년에 나온 QDR(4개년 국방검토서)을 보면 미국은 자신에게 필적할 가상의 적을 중국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이 따라오지 못하게끔 기술적인 갭을 만들려는 것이 미국의 기본정책입니다. 현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정보전 수행능력 아닙니까. 멀리서, 미리 보고, 먼저 정확히 때리는 정보전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중국이 1990~91년 걸프전 당시 미국이 보여준 정보전 능력을 가지려면 2020~30년은 돼야 할 겁니다. 중국은 이런 격차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능력을 절대 과대평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면대결보다는 ‘너는 너대로 싸우고 나는 나대로 싸운다(훏是훏的 我是我的)’는 논리로 상대의 약점을 이용하는 인민전쟁 혹은 점혈(點穴)전쟁이라든가 급소를 때리는 전략 등을 부단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자체개발한 유인우주선 선저우5호 발사에 성공함으로써 중국의 우주군사력 개발이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중국이 위성공격용 레이저와 미사일을 연구중이라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이런 우주개발 능력의 군사적 활용 가능성을 어떻게 보십니까. 우주선을 지구궤도에 진입시키기 위한 로켓기술은 미사일 기술의 핵심 아니겠습니까.
“중국은 이미 미국의 첩보위성에 달라붙어서 교란시키는 이른바 기생위성도 개발했어요. 2005년에 또다시 유인우주선을 발사할 예정이고요. 기본적으로는 우주정거장을 만든다는 계획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2007~08년에 달 탐험선을 보낼 계획도 갖고 있죠. 우주공간에서의 군사적 활용에 대한 미국의 독점을 깨려는 중국의 계획은 부분적으로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아직은 본격적인 우주무기 획득계획이 없습니다만 레이저빔을 일정 수준 개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구를 내려다볼 수 있는 기상위성이라든가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GPS 기술은 중국도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시켰다고 할 수 있어요.”
중국 국방예산의 내막
-중국의 올해 국방비는 약 31조원 규모로 11.6%의 증가율을 기록했습니다. 지난해 14년 만에 처음으로 한 자릿수로 낮췄다가 다시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한 셈입니다. 중국의 공식적인 국방예산과 이에 대한 서방측의 시각은 어떤 것인가요?
“두 자릿수로 국방비가 증가한 것은 중국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02년에 중국 국방부가 발표한 것을 보면 국방비가 204억달러로 나와 있어요. 이에 대해 미국은 중국의 실제 국방비는 그보다 3배는 될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 미국은 중국측이 발표한 204억달러도 PPP라고 하는 구매력 등가지수를 감안하면 몇 배를 곱해야 한다고 보고 있어요. 제가 한번은 중국군 간부들에게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150억~160억달러를 가지고 핵무기도 없이 60만 군대 유지하는 데에도 허덕거리는데 당신들은 204억달러 가지고 어떻게 그만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는지 노하우좀 가르쳐달라’고 말입니다.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만 중국은 중요한 군사력 건설비가 국방비 항목이 아닌 아닌 과학기술비 예산항목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인민해방군 장교들의 해외연수 비용이 문화비에 포함돼 있어요. 이런 식으로 숨어 있기 때문에 중국의 국방비를 정확히 추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3배니, 4배니 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이지요.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구매력 등가지수를 고려하면 중국 국방비의 실제규모는 훨씬 더 크다고 봐야 할 겁니다. 지금의 추세로 본다면 2010년에는 1500억달러를 초과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민해방군의 전력은 평가하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 현재보다는 미래의 잠재력에 더 높은 점수를 주어야 할 것 같다. 아직은 지상군에 비해 공군력이 상대적으로 크게 뒤떨어지고, 해군 역시 대양해군으로 발돋움하기에는 다소 미약한 느낌이다. 그러나 핵능력이나 우주개발 속도를 보면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다. 문제는 이런 현실적 힘과 막강한 잠재력을 갖춘 중국군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이들의 과거 행동패턴 연구를 통해 전략전술상의 특징을 파악하는 일은 그래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중국의 대표적인 군사전략으로 알려진 적극방어의 개념은 어떤 것입니까.
“적극방어 개념은 국공내전과 항일전쟁을 거치면서 하나의 군사전략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은 전략적으로는 방어를 내세우고 있지만 전역(戰役)전투상으로는 항상 공세적인 성격을 띱니다. 그러니까 남의 공격을 받은 뒤에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공격이 임박하면 먼저 기선을 제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는 기동전과 진지전, 유격전을 배합한다는 것이지요. 한국전쟁 때도 이 3개의 전술개념을 융통성 있게 배합했죠. 예를 들어 한국전쟁 마지막 단계에 휴전선 근처에서 전세를 굳히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진지를 파기도 했습니다.”
경고는 하되, 선전포고는 없어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도 적극방어의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까.
“그럼요. 적극방어의 개념에 따라 유엔군이 중국 쪽으로 넘어오기 전에 먼저 전략적 공세를 취한 것이지요. 특히 장진호 전투는 미해병 1사단을 7개 사단이 포위해서 섬멸전을 시도한 대표적인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1951년 1· 4후퇴 후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은 한수 이남으로 기동전을 펼쳤지요.”
-중국이 군사력을 사용할 경우 그 정치적·군사적 목표는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정치적으로는 일단 안보위협을 배제하는 데에, 군사적으로는 자국을 위협하는 성격의 군사력을 파괴하는 데 목표가 있습니다.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상대방 국가의 영토로 진격하기도 합니다만, 반대로 적을 끌어들여서 싸우지는 않는 전통이 있습니다. 베트남이나 인도와의 전쟁에서도 국경을 넘어 들어갔지요.”
-중국의 전쟁방식, 예를 들어 전쟁을 시작하고 종결시키는 양상에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중국은 전쟁을 개시하기 전에 항상 경고를 발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선례후병(先禮後兵)이라는 것이죠. 단, 정치적 혹은 군사적으로 반격 시그널을 보낸 후 전쟁에 들어가지만 선전포고 없이 기습적으로 군사력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좌시하지 않는다’든가 ‘우리가 공격받으면 틀림없이 반격한다’는 표현이 정치적인 시그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이 정치지도자나 군사지도자로부터 나올 때는 중국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봐야 합니다.
반면 전쟁을 끝낼 때는 일방적으로 철군선언을 합니다. 절대로 상대국 영토를 점령해놓고 교섭을 하거나 항복문서를 받지 않습니다. 인도 베트남 러시아와의 전쟁 때 모두 이런 식으로 끝냈습니다. 다만 한국전쟁에서만 정전협정을 체결했는데, 그때는 남의 나라 영토였고 또 북한의 안전을 보호해줘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죠. 항상 일방적으로 철군함으로써 전쟁을 종결짓는 식이기 때문에 반대급부를 요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전쟁이 응징전의 형태를 띠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중국의 전쟁방식상의 특징에 어떤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까.
“이를테면 자국의 중화주의에 굴복하지 않는 번국(藩國)들, 그러니까 주변국들에게 응징을 해왔다는 역사적 배경을 들 수 있겠지요. 병자호란도 응징전 아닙니까. 항복을 받고 세자를 끌고는 갔지만 점령군을 주둔시키지 않았거든요. 이런 특징이 있다 보니까 미국처럼 아예 상대국의 정권을 교체시켜버린다거나 친미정권을 세우는 등의 정치적 목표를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빛을 감추고 어둠을 기르자’
-중국의 대미(對美) 전략기조로 ‘도광양해 유소작위(韜光養晦 有所作爲)’라는 말이 유명합니다. 이 말의 뜻과 유례를 설명해주시지요.
“뜻을 풀이하면 ‘빛을 감추고 어둠을 기르며 일정한 역할만 한다’는 것이에요. 이게 원래 삼국지에서 유비의 생존전략으로 나온 것입니다. 유비가 조조의 식객노릇을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때 조조의 참모들이 유비가 범상치 않으니 제거하라고 조언하는 것을 눈치챈 유비가 몸을 낮춰 조조와 참모들의 경계심을 풀도록 한 것입니다. 자신의 재능은 감추고 모호성을 기른다는 의미로, 한마디로 인내하며 때를 기다리는 철학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중국의 자세가 뚜렷이 드러난 게 1993년의 은하호 사건입니다. 중국의 중형 화물선이 칭다오(靑島)항을 출발해 이란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미국의 첩보에 의하면 이 선박에 화학무기 생산 물질을 적재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홍해에서 미7함대가 불심검문을 했어요. 중국으로선 주권을 침해 당했다고 할 수 있지만 결국은 검색에 응했습니다. 힘이 약하니까 말이죠. 700여개의 컨테이너를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어요.
그러자 중국 내부에서 보수주의자들이 연판장을 돌리는 등 난리가 났어요. 그때 덩샤오핑의 말이 ‘우리가 아직은 힘이 약하니까 시간을 벌어 국력을 신장시켜야지, 지금 미국과 대립하여 싸우면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이런 내용을 모든 외교 국방관련 당·정 지도자와 관료한테 교육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런 것이 아직도 중국의 대미전략에 있어 기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한국과 미국은 동맹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대미 전략기조는 한국의 안보전략 수립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있을까요.
“중국은 주한미군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미군의 한반도 주둔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고, 미국과의 역학관계로 볼 때 중국이 ‘주한미군은 철수하라’고 해봐야 나갈 것도 아니고 결국은 문제만 생긴다는 것이죠. 그러나 중국은 주한미군을 증강한다거나 한국이 MD 구축에 참여하는 데에는 반대하고 있습니다.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를 동아시아에서 심화시키고 장기화시키므로 국제정치의 다극화에 역행한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한반도문제에 대한 중국의 이런 태도는 바로 몸을 낮추면서도 나름대로의 견제역할을 하는 전략기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어요.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중국이 건설적이고도 적극적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도 이런 전략기조가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북핵문제는 한반도의 안정을 해칠 뿐 아니라 잘못하면 미중관계도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이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중국의 또 하나의 전략원칙으로 ‘남이 만약 우리를 공격하면, 우리도 반드시 남을 공격한다(人若犯我 我必犯人)’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 같은 전략원칙의 등장배경과 의미는 무엇인가요.
“이 원칙은 1930년대 초반에 마오쩌둥이 처음 제기한 것입니다. 이 뒤에 한 구절이 더 들어갑니다. ‘남이 나를 공격하지 않으면 나도 절대 공격하지 않는다(人不犯我 我不犯人)’는 것이지요. 여기서 ‘범(犯)’은 공격으로 번역합니다만, 한국전쟁 때인 1950년 8월에도 이 말이 나왔습니다. 당시의 중국은 주변의 공산주의 국가가 붕괴되는 것을, 중국 자체에 대한 공격인 ‘범’으로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적극방어의 군사전략과 이 원칙은 상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당연히 서로 통하는 것이죠. 적극방어라는 것은 상대가 공격해오면 절대로 피해가지 않는 전략입니다. 중국은 외부에서 자국의 이익이나 주권을 공격해오면 절대 피해가지 않습니다. 한국전쟁 때 미국의 맥아더도 바로 중국의 참전가능성에 대해 오판했지요. 당시 병참도 약하고 제공권도 부족한 중국이 감히 한반도까지 나와서 싸우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했지만 결국 중국은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그 방식이 인해전술이긴 했습니다만.”
북한지역의 전략적 중요성
이제 마지막으로 한반도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부분에 대해 알아볼 차례다. 6·25 전쟁에 개입해 우리와 직접 맞닥뜨린 과거가 있고, 지금은 북한과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을 떼놓고는 한반도 안보를 논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한국전쟁을 통해 깨달은 점도 많고, 얻은 것과 잃은 것도 많았을 것이다. 21세기 초엽, 격동하는 한반도 주변정세에서 중국군이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통일한국과 중국의 군사적 대응관계도 궁금하다.
-중국의 입장에서 동북지역, 나아가 북한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은 어떤 것입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은 북한을 전략적 주변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완충지대화하는 데에 전략적 목적을 둡니다. 그러니까 이 지역을 자신의 영향권에 두지 못하게 된다면 최소한 강대한 세력이 단독 지배하는 것만은 반대한다는 입장입니다. 이런 입장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중국에서는 북핵문제를 놓고 전략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북한이 중국의 국가이익에 자산이 될 것인가 아니면 부담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였어요. 진보파는 냉전적인 사고는 그만하고 새롭게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주류는 북한의 지정학적인 위치는 중요하다며 북한의 생존이 중국의 국가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중국은 북한 핵문제 해결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한반도 문제에 미국과 더불어 ‘공동’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북지역에는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데, 중국은 이 지역이 소수민족의 관할지역으로 중화민족에 통합된 부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반도에 비우호국가가 들어서게 될 경우 자칫 잘못하면 동북지역에 대해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며 우려하고 있습니다. 특히 북한 핵문제가 잘못 되면 탈북자가 대거 발생하게 되고, 이로 인해 한만국경이 불안정해지면 동북지역이 더욱 불안정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한국전쟁시 중국은 한국군이 단독으로 38선을 넘으면 개입하지 않겠지만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오면 개입하겠다고 천명했고 그대로 실천한 바 있습니다. 중국은 한반도의 38선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까.
“1950년 10월1일 국군 3사단이 38선을 돌파한 날 밤, 정확히는 2일 새벽 2, 3시경일 겁니다. 저우언라이가 베이징주재 인도대사 파니칼을 불렀어요. 파니칼의 메모에 보면 당시 상황이 나오는데, 캄캄한 새벽에 저우언라이가 보낸 사람이 왔다길래 서둘러서 옷을 입고 나오니까 ‘우리 외교부장이 당신을 보자고 하니까 가자’고 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영문도 모른 채 외교공관으로 가니까 저우언라이 외교부장이 인민복을 입은 채 눈을 말똥말똥 뜨고 ‘당신 뉴스 들었느냐. 오늘 남조선군 3사단이 38선을 넘었다. 만약 미군이 38선을 넘어가면 우리는 군사 개입할 것이다. 이 같은 우리의 의사를 당신이 본국 정부를 통해서 미국한테 전달해달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당시 중국과 미국은 외교관계가 없었거든요.
중국은 한국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한 것은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이니까 간여하지 않겠지만 미군에 대해서는 방관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었지요. 내전의 성격과 국제전의 성격을 구분해서 대응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중국은 1950년 10월25일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의 시작으로 보고, 그 이전은 내전으로 취급합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유사시 한반도의 사태진전에 대해서 깊이 연구해야겠지요.”
-북한의 핵개발은 일본의 핵무장을 부추기는 등 동북아의 세력균형에 미치는 영향이 작지 않습니다. 중국군의 입장에서 북핵이라는 존재는 군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의 대북 영향력이 약화되는 것이겠죠. 그리고 북한의 대남도발을 억제하는 것도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중국이 북한의 오판 소지를 완전히 억지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북한은 도발시 사태의 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중국의 연루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만, 중국을 상대로 위협하는 등의 군사적 행위는 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건 게임이 안 되는 일종의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니까요.
중국은 북한의 핵보유가 주변국에 미칠 파장을 크게 우려하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일본의 핵무장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고, 다음으로는 미국의 군사개입에 구실이 되는 점을 크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핵을 계속 개발하고, 미국은 선제공격도 불사한다는 식으로 치닫는다면 중미가 대립할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태를 염려하는 것이지요.”
한반도와 대만해협
-앞에서 중국의 몇 가지 전략원칙을 살펴보았는데요. 이 같은 전략원칙이 한반도의 상황, 특히 북핵위기 처리과정에 주는 시사점은 어떤 것입니까.
“지금 중국은 북한의 동맹국가가 아닙니까. 그런데 혹시 북핵사태가 악화돼 북한에 대한 (미국의) 봉쇄조치나 무력공격이 가해진다면 중국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가 상당히 민감한 관심사가 될 것입니다. 만약 이런 경우가 발생한다면 중국은 매우 신중한 계산을 하리라고 봅니다. 이 같은 사태를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볼 것인가의 여부를 예측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일단 자국의 국익을 훼손하는 것으로 평가하겠지만, 군대를 보낸다거나 혹은 어느 수준의 군사적 지원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속단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다만 미국의 지상군이 북한지역에 들어가지 않는 한 중국도 지상군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라는 정도로 조심스럽게 전망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이 있어요. 바로 1950년대에 두 차례에 걸쳐 고조된 대만해협 위기지요. 그때 동맹관계였던 소련의 후르시초프가 말하길 ‘중국의 도발에 의해 빚어진 일이므로 그로 인해 중국 본토가 공격받더라도 소련은 지원해줄 수 없다’고 했거든요. 이런 역사적 사례도 북한에 대해서는 상당히 복잡한 의미로 전달될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중국의 대만점령이 좌절됐다고 하는데요. 당시 상황이 어땠습니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이 사태를 이용해서 중국이 대만을 공격한다든가 대만이 중국을 공격하는 움직임을 차단하려 했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전쟁 개입을 결정하면서 동시에 대만해협을 중립화시킨다는 정책을 세웠습니다. 중국이나 대만 어느 측도 군사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지요. 이런 방침에 따라 대만해협에 7함대를 파견했던 것이에요. 미국의 조치로 인해 중국의 대만공격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됐어요.
당시는 중국이 건국(1949년 10월1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여서 아직도 대륙의 남쪽에는 대만군대의 잔당인 게릴라들이 활동했으니까 준전시상황이었어요. 중국이 대만을 해방시키겠다며 광저우 군구에 군사력을 집결시키는 등 대만에 대한 공격이 임박했었습니다만,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자 미국이 천명한 대만해협 중립화 방침에 의해 좌절된 것입니다. 그리고 곧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이죠. 아무튼 중국의 대만해방전쟁 꿈은 한국전쟁 발발로 일단 사라지게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한반도에서의 남북관계와 중국·대만의 양안관계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향후 양안관계의 사태 진전에 따라서 한반도의 안보환경에도 어떤 변화가 초래되지는 않을까요.
“기본적으로 미국과 중국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 방향으로 문제를 처리하려고 합니다. 왜냐 하면 전선을 또 만들어서 도움될 게 하나도 없거든요. 베트남전쟁 때 김일성이 프에블로호 납북과 1·21사태를 일으켰지만 미국은 또 하나의 전선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중국도 베트남에 파병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새로운 전선을 만들려 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냉전시대도 아니지 않습니까.
다만 대만 문제에 미군이 개입할 경우 주한미군의 이동에 대해 한미간 협의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것이고, 일본은 후방기지화할 수밖에 없겠죠. 그렇게 된다면 중국도 미국이 발진하는 기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해당국가와 협의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는 외교적인 분쟁이라든가 민감한 문제가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동아시아가 안정될 수는 없겠죠. 그래서 우리로서는 중국과 대만이 모든 것을 평화적인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한반도에서 한국주도의 통일이 현실화될 때 중국은 어떤 움직임을 보일까요.
“중국으로서는 어떤 방식의 통일인가가 가장 중요할 겁니다. 남북한이 교류 협력을 통해 평화적인 통일로 가게 되면 중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명분도 없고요. 또 한중간 교류협력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해 있고, 중국이 실용주의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통일한국에 대해 우호 협력관계의 유지라는 현실주의 정책을 택할 것으로 봅니다. 다만 통일방식이 무력에 의한 것이 된다면 중국도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실질적인 개입이 불가피할 것 같습니다.”
-통일한국과 중국의 군사적 대응관계는 어떤 내용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까. 이 경우 한국군의 적정한 군사력은 어느 수준이라고 보십니까.
“제가 볼 때는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서 안보체제를 유지하는 윈윈 방식을 취해야지 군사적 대치관계로 가서는 곤란합니다. 다만 우리도 적정 군사력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어느 수준이냐가 문제가 되겠는데요. 이와 관련된 전문용어로 ‘방위적인 충분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의 주권국가로서 주변국의 위협이나 무력 침략에 대처할 수 있는 수준이나 주변국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준의 방위적 전력은 구비해야 한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군사문제를 한국 입장에서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대처해야 할 것인지를 말씀해주시지요.
“중국은 과거부터 군사강국입니다. 정치적 목적이 있으면 그 군사력을 사용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 중국과 정치적으로 잘 지내야겠죠. 그게 가장 중요합니다. 한국이 중국과 싸울 이유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또 그러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외교 실패를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동북아 국가들이 참여하는 협력안보체제의 구축도 필요합니다. 또 앞에서 살펴봤듯이 중국 권력구조에서 차지하는 군부의 위상이 높고 입김이나 역할이 대단히 큽니다. 따라서 중국 군부가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한중간) 정치·군사적 신뢰구축을 강화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주권국가니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항상 만반의 방어태세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화려한 성공의 꿈을 안고 너도 나도 중국으로 몰려가는 현상을 보면 가히 중국러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중국으로 떠난 한국인들 가운데 얼마가 꿈을 현실로 만들고 있을까. 들리는 바로는 중국에서 사업하기가 그리 만만치 않다는 얘기다. 중국이 기회의 땅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기회를 틀어쥐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번 달에 소개하는 베이징의 한국식당 수복성(壽福城)의 성공스토리는 대기업도 아닌 작은 업체가 어떻게 해서 단기간에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지 그 내막을 상세히 보여줄 것이다. 중국사업에 푹 빠진 한 젊은 경영인의 생생한 경험담은 비단 식당뿐 아니라 어떤 업종이든 중국에서의 사업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다.
수복성은 두산그룹이 1997년 베이징에 설립한 한국식당. 지난해 중국정부로부터 특급식당으로 비준받아 국내외에 화제가 된 바 있다. 현재 중국내 특급식당은 모두 83곳. 외국식당으론 미국계 패밀리 레스토랑 TGI프라이데이스에 이어 두 번째 특급식당이 됐다. 이 수복성의 주인공은 온대성(溫大成·42)씨. 두산그룹의 3년차 부장으로 파견된 주재원이지만 수복성에서는 총경리(사장)로 어엿한 최고경영자다.
-베이징의 수복성 하면 이제 중국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한국식당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우선 개업 이후 지금까지의 영업 성적표와 기본적인 현황을 공개해주실 수 있습니까.
“1997년 7월 개업해서 지금까지 약 7년동안 25억원을 한국으로 송금했습니다. 그동안의 투자총액이 14억원이니까 이미 180% 회수한 셈입니다. 수복성의 영업면적은 총 300평이고 임대료는 한국돈으로 월 4000만원입니다. 매출액은 연 20억원으로 평일에는 보통 600만원 수준입니다. 영업이익률이 20%로 높은 편이지요.”
준비기간 2년 6개월
-짧은 기간에 이익을 많이 내셨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남다른 노력이 숨어 있을 것 같습니다. 개업할 당시의 상황부터 얘기를 들어볼까 합니다. 무엇보다도 준비기간이 무려 2년 6개월이나 걸렸다고 하는데요.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까.
“우선 중국시장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를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고, 그 다음에는 건물주와의 임대협상이 장기전으로 진행돼 시간이 많이 소요됐습니다. 특히 임대료를 깎는 과정에만 10개월 가량 걸렸습니다.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끝내기 위해 중국인보다도 더 느긋하게 나갔으니까요. 처음에 제시된 임대료가 평방미터 당 월 77달러였는데, 이걸 3분의 1 수준인 25달러까지 끌어 내렸습니다. 당시, 그러니까 1995~96년에 베이징의 임대료가 아주 높았어요. 평방미터 당 보통 50달러 이상이었으니까요. 아무튼 중국인과의 협상을 한국식으로 다급하게 추진하면 안 된다고 보고 처음부터 중국인보다 더 여유있게 협상에 임했던 것이지요. 또 직원교육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 개업이 늦어진 것입니다.”
-수복성은 한국인 등 외국인이 많이 오가는 옌사(燕莎)백화점 주변이 아니라 오래된 도심지라 할 창안(長安)대로 동쪽에 위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톈안먼(天安門)광장 쪽에서 차량을 타고 오면 곧장 건물로 들어올 수가 없어 베이징역 앞으로 우회해야 하고, 또 반대방향에서 오게 되면 수복성 쪽으로 좌회전이 안되므로 역시 불편한데요. 그럼에도 이곳에 자리잡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개업 장소를 고를 때 우리 식당의 타깃이 누구냐는 점을 가장 중요시했어요. 저는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 그중에서도 상류층 사람들을 겨냥했거든요. 그래서 한국식당이 많이 들어선 옌사백화점 부근이 아닌, 베이징의 중상류층이 밀집한 창안대로 쪽에 자리를 잡은 겁니다.”
-개업 장소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고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사석에서 가끔 하는 얘긴데요. 만약 수복성을 그만둔다면 저는 택시운전사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워낙 많은 곳을 돌아다녀서 베이징 거리가 제 눈에 다 들어옵니다. 그때는 운동화와 자전거가 제 친구였다고나 할까요. 그만큼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보고 베이징 후퉁(胡同)이라고 합니다. 골목이라는 뜻이지요. 베이징의 골목을 구석구석 돌아다녔다고 해서 후퉁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제 운전기사가 베이징 토박이인데 그 사람보다 제가 이곳 지리에 더 밝습니다. 그래서 저는 친구나 아는 사람이 중국에 와서 사업을 하겠다고 하면 항상 자전거를 선물합니다. 본인 스스로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좋은 입지조건을 갖춘 곳을 고르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하루 세 차례의 직원교육
-현지에서 종업원을 모집하고 훈련시키는 일도 매우 중요한 과정일텐데요. 인력 문제는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가장 걱정했고 또 중요하게 여겼던 부분이 인력문제였습니다. 처음에 사업계획서를 짜보니까 약 100명의 직원이 필요한 것으로 나왔습니다만, 저는 140명을 뽑았습니다. 40%를 더 뽑은 것이지요. 이 사람들을 3개월 동안 교육시키고 나니까 그 가운데 20% 정도가 떨어져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120명의 직원으로 영업을 시작하게 됐는데, 여기서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왔어요. 교육 잘 받았다고 해서 실제로 영업을 잘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아무튼 이런 방식으로 이 일에 적성이 맞고 능력있는 직원들을 확보해나간 방식이 다른 식당과 달랐던 것 같습니다.
보통 식당들을 보면 100명이 필요하다면 영업하기 전에 먼저 60명을 뽑습니다. 영업이 잘 되면 더 뽑자는 생각이지요. 저는 능력있는 직원을 뽑고 이들을 잘 교육시키는 것이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믿었기 때문에 남들과는 달리 인력부문에 투자를 많이 한 것입니다. 지금도 수복성에서는 하루에 세 차례 교육을 합니다. 아침 8시부터 1시간, 11시부터 30분, 또 저녁영업 직전인 오후 5시부터 30분간 365일 반복적으로 고객에 대한 서비스나 종업원으로서의 바람직한 인격형성 등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수복성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중국인들과 수많은 거래를 했을텐데요. 중국인 하면 흥정의 대가들 아닙니까. 그래서 성질 조급한 한국 사람이 중국인에게 당한 사례가 비일비재합니다. 중국인을 상대하는 기본원칙은 어떤 것이었나요.
“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관련기관에 근무하는 사람들부터 시작해 중국인들이 얼마만큼 협조를 해주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협조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신뢰감을 심어주어야 하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임대료를 77달러에서 25달러로 깎을 수 있었던 것도중국인에게 신뢰를 심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에 따라 저 자신이 철저히 중국인이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또 중국인과 공존공생하자는 차원에서 번 돈의 일부는 중국사회에 환원하기로 했고요. 초창기부터 사회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 것도 이런 생각에서였습니다. 중국인들의 마음만 얻어내면 사업을 하기가 생각보다 쉽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업체로 리우비쥐(六必居)라는 식료품제조회사가 있습니다. 거의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인데, 처음엔 주점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리우비쥐는 중국에서도 작명을 잘한 상호로 손꼽힌다는 것이에요. ‘여섯개(六)의 반드시(必)가 산다(居)’는 뜻으로 반드시 최고의 양곡 누룩 그릇 술병 연료 샘물을 사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수복성도 상호를 지을 때 중국인의 문화랄까 기호를 많이 고려한 느낌이 듭니다만, 작명 과정은 어땠습니까.
“처음부터 수복성이라고 작명한 건 아닙니다. 법인명은 한국의 본사 명칭을 따 두산백화찬음유한공사라고 했고 영업장은 백화주막(白花酒幕)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나중에 알고 보니 문제가 많은 이름이었어요. 두산의 두(斗)는 투쟁할 투(鬪)의 간자체입니다. 그 다음에 백화는 하얀 꽃이라는 뜻인데, 이건 사람이 죽었을 때 쓰는 꽃이거든요. 또 백화의 중국발음 ‘바이화’는 헛돈을 썼다는 의미도 있다는 것입니다. 주막이라는 말도 중국에서는 쓰지 않고 주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지요.
결국 백지상태에서 다시 작명을 하게 됐습니다. 조사를 해보니까 중국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복(福)이고 그 다음이 수(壽)예요. 이 두 글자를 결합하려고 했더니 한국 발음상 ‘복수’가 돼 쓸 수가 없었죠. 하는 수 없이 두 글자를 뒤집어 ‘수복’이라 명명하고 등록하러 갔더니 이미 누군가가 등록한 상호라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하기를, ‘수’와 ‘복’ 두 자만으로는 허전한 듯한 느낌도 들고 하니 뒤에 적당한 글자를 붙이는 게 좋겠다 해서 찾아본 끝에 ‘성(城)’을 찾아낸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수복성이라는 상호는 아주 성공작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중국손님들이 상호가 마음에 든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그렇겠습니다만, 특히 중국에서 사업을 할 때는 그 사업의 성격에 어울리고 발음도 좋은 상호를 정하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을 실감했습니다.”
최고의 서비스가 성공 비결
온 사장의 설명을 들어보니 개업과정부터가 여간 치밀한 게 아니다. 그러나 수복성의 성공비결은 뭐니뭐니 해도 최고의 서비스에 있다는 것이 사정을 아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중국에 아직 서비스 개념이 상대적으로 미약하기 때문에 수복성의 서비스가 돋보인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수복성 하면 서비스를 떠올리는 것일까.
-수복성의 서비스가 뛰어난 것으로 소문이 나서 외부에서도 직원 교육을 의뢰할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서비스 교육을 시켜서 이런 소문이 날 정도가 되었습니까.
“저는 영업시간에 자리를 비워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사장인 저부터 고객을 접대하는 데 최선을 다한 것이 수복성의 서비스가 소문난 비결이 아닌가 합니다. 고객이 식당을 찾는 순간부터 식사를 마치고 문을 나설 때까지 사장이 직접 솔선수범해 고객을 모시니까 직원들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는 거죠.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직원들에게 철저히 반복 교육을 시킵니다. 교육내용의 핵심은 고객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겁니다. 다른 업소에서도 고객 위주라는 말은 다 하고 있지만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저는 이유를 불문하고 고객 위주 경영방침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아예 교육 매뉴얼을 만들어가지고 어떤 상황에서는 어떻게 고객을 대해야 한다는 식으로 하루에 세 차례 반복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고객 위주의 서비스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사례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손님이 불고기와 파전을 먹고 나서 콜라를 시켰어요. 콜라를 잔에 따라 마셨는데 남아 있는 콜라 위에 기름이 뜨게 된 것이에요. 당연히 그렇게 될 수 있지요. 그런데 이 분이 종업원을 불러서는 왜 콜라에 기름이 뜨냐, 이 콜라 가짜 아니냐고 항의하는 겁니다. 이때 저희 종업원이 이 콜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이 만든 것인데 기름이 낄 리 없다는 식으로 말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커집니다. 이처럼 억지를 부리는 손님에게도 곧바로 죄송하다며 콜라를 새로 내오도록 하고 있습니다. 파전도 새로 부쳐 드립니다. 이렇게 되면 종업원한테 장난 삼아 시비 걸었던 손님이 더 할 말이 없게 될 뿐 아니라 수복성 갔더니 정말 서비스 좋더라며 소문을 내게 마련입니다. 콜라 한 병의 원가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식당손님 중에는 가끔 속이 불편해 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저희는 대처요령을 매뉴얼로 작성해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손님이 토하면 종업원이 즉시 달려가 괜찮으시냐고 묻고는 바로 깨끗이 치워드립니다. 토한 손님한테 시원한 냉수와 물수건을 갖다 드리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 다음에는 잠깐 안정을 취하라고 권하고는 곧바로 약국으로 달려가 약을 사다 줍니다. 그리고 바로 주변 테이블에서 식사중인 손님들한테도 가서 죄송하다고 사과를 합니다. 우리 종업원이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수복성에 와서 식사를 하다가 이런 문제가 발생했으므로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뜻을 표하는 겁니다. 이 손님이 나중에 집에 갈 때는 차에 오르는 것까지 저희 종업원이 도와드립니다. 이렇게 고객 위주로 진정한 접대를 하면 토한 당사자뿐만 아니라 이런 광경을 목격한 주변 손님들도 자연히 수복성 서비스 정말 좋더라며 선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객 위주’ 서비스 사례들
-듣고 보니 정말 고객 위주의 서비스라는 게 실감이 나는군요. 말이 나온 김에 다른 서비스 사례를 한두 가지 더 소개해 주시지요.
“사실 방금 말씀드린 사례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죠. 그보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도 모든 것을 무조건 고객의 입장에서 친절하게 처리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손님의 옷이 바뀌는 사건이 가끔 일어납니다. 특히 겨울엔 외투를 보관하고 번호표를 나눠주는데 손님이 많다보니 일일이 번호표를 확인하지 않고 손님이 달라고 하면 옷을 내줄 때가 있어요. 그런데 비슷하거나 똑같은 브랜드의 옷이 많다보니까 서로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번은 옷이 바뀌었는데, 일본에서 산 옷이라며 소란을 피우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일본에 사는 친구한테 바로 연락해 똑같은 옷으로 사다 드리겠다, 만약 그 옷이 마음에 안 들면 손님이 원하는 조건으로 옷값을 변상해주겠다고 양해를 구한 뒤 손님을 보냈습니다. 1시간쯤 지나니까 아니나다를까 먼저 옷을 잘못 가져갔던 손님이 오는 겁니다. 그날 밤 제가 직접 옷이 바뀐 손님 댁까지 찾아가 다시 죄송하다는 사과와 함께 옷을 돌려드린 적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아주 비싼 옷을 입고 온 중국 여자손님이 있었는데, 그만 저희 종업원이 간장소스를 옷에다 엎질렀어요. 제가 보기에도 비싼 옷이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가서 사과를 드리고 잘 하는 세탁소에 맡겨 세탁해드리겠다고 하니까 화가 풀리지 않은 이 분 말씀이 왕푸징(王府井)호텔에서 산 것인데 반드시 그 호텔에서 세탁해달라는 것이에요. 두말 않고 그러겠다고 했죠. 왕푸징호텔은 온갖 명품이 다 모인 최고급 호텔입니다. 알고 보니 이 옷이 우리돈으로 300만원짜리였어요. 그런데 왕푸징호텔에 갔더니 호텔에 투숙한 손님의 옷만 세탁해준다는 겁니다. 할 수 없이 급하게 집사람을 나오라고 해서 호텔에 투숙시킨 후에야 그 옷을 세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 밤 늦게 옷주인을 찾아가 왕푸징호텔에 세탁 의뢰한 접수증까지 보여주며 안심시켜 드렸더니 비로소 화를 푸는 것이었어요.”
중국인 감동시킨 이벤트
-중국에는 각국의 요식업체가 진출해 있습니다. 나라마다 서비스의 특징이 있을 것 같은데요.
“중국에서 서비스 개념이 완전히 정립되려면 좀더 시간이 걸려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처음 중국에 왔던 10여년 전과 비교하면 상당히 좋아진 건 사실입니다만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중국도 종업원들에게 인센티브 제도를 실시하는 곳이 많아지면서 고객에 대한 서비스의 질도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식당엘 가보면 서비스가 낯간지럽다는 느낌이 듭니다. 지나치게 신경을 써줘서 오히려 손님이 불편해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일본 비행기를 탔을 때 이야기입니다. 비행기에서 식사할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자꾸 와서 뭘 드시겠냐고 해서 오히려 불편했던 적이 있습니다. 일본식 서비스가 이런 것 같아요. 미국의 경우는 서비스가 시스템화돼 있다고나 할까요. 기계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국 사람은 위생관념이 철저하지 못하다는 평이 많지 않습니까. 중국인 종업원들한테 청결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 화장실을 깨끗이 청소한 후 온 사장과 모든 종업원이 함께 화장실에서 식사를 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그런 아이디어까지 나온 당시 상황이 어땠습니까. 지금도 화장실에서 식사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요즘도 가끔 화장실에서 식사를 하죠. 위생관념이 조금 떨어지는 중국인 직원들한테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위생교육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떠오른 아이디어가 바로 화장실 식사였습니다. 화장실이 얼마나 위생적인가가 손님을 맞이하는 예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여겼기 때문에 ‘보여주는 교육’ 차원에서 식사를 하도록 한 것이지요.”
-화장실 식사에 대한 직원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죠. 그러나 곧 총경리(사장)가 무얼 의도하는지 알아차리더군요. 지금은 제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직원들 스스로 알아서 깨끗하게 관리합니다. 다른 식당엘 가면 화장실만 청소하는 사람이 있는 데도 저희 화장실보다 더럽습니다. 저희는 전담직원이 따로 없지만 누구든 알아서 수시로 청소를 하므로 언제든지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깨끗합니다. 화장실뿐만 아니라 수복성 전체 어느 구석이든 깨끗합니다. 이곳이 고깃집인데 식탁은 물론이고 바닥이든 천장이든 기름기가 전혀 없고 냄새도 나지 않습니다. 특히 주방은 저희집 주방보다 깨끗합니다.”
-고객에 대한 서비스 말고도 감동을 안겨주는 이벤트를 많이 개발했다고 들었는데요. 몇 가지만 소개하면 어떤 게 있습니까.
“2000년 7월13일이 토요일이었습니다. 이날 밤 10시에 중국이 베이징올림픽 유치에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당시 유치 확정 한 달 전부터 직원들한테 반강제적으로 기도하라고 했어요. 중국이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이죠. 그리고 만약 중국이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면 7월14일 모든 메뉴의 음식을 공짜로 제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건물주가 반대하고 나서는 것이에요. 공짜 좋아하는 중국인들이 몰려오면 건물이 남아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전에 선양(瀋陽)에서 비슷한 행사를 했다가 큰 소동이 났다는 것이지요. 또 롯데리아에서 햄버거 하나 공짜로 준다니까 쳰먼(前門)에서 톈안먼까지 줄을 선 적도 있는데, 수복성 같은 고급음식점에서 공짜로 음식을 준다면 난리가 날 거라는 것이에요. 결국 50% 할인행사를 하는 것으로 낙착됐지요. 그뿐만 아니라 올림픽 개최지가 베이징으로 결정됐다는 발표가 나자마자 미리 준비해놨던 축하 플래카드를 내다 걸고 수복성 모든 직원과 함께 창안가(街)에 나가 큰 소리로 유치 성공을 축하했습니다. 이걸 본 직원들이 좋아한 것은 물론이고 고객들도 수복성의 한국인 총경리가 정말로 중국을 좋아한다고 느꼈을 겁니다. 부산아시안게임 때는 중국선수가 금메달을 딸 때마다 관련사진을 인터넷에서 뽑아 식당 한편에 전시했더니 반응이 아주 좋더라고요.”
1만2493명의 고객명단
-그야말로 고객감동 행사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사회봉사 활동 같은 것은 안합니까.
“양로원이나 경로원을 찾아 위로하는 행사도 하고, 불우한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지급하고 있습니다. 양로원이나 경로원에는 분기별로 한번 직원들과 함께 가는데, 이때 직원들이 손님들로부터 팁 받아 모은 돈 5000위안(약 75만원)을 갖고 갑니다. 저희 직원들 월급여가 100달러에서 150달러 수준이지만 더 어렵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고 또 남을 돕고 살자는 취지에서 꼭 직원들과 함께 갑니다. 직원들 반응이 너무나 좋습니다.”
-사스(SARS·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 파동 때 수복성에서 중국 사람들한테 김치를 나눠줬다고 해서 국내 신문, 텔레비전에도 보도됐었는데요. 이것도 고객감동 전략의 하나였습니까.
“무슨 전략이라기보다는 중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이었어요. 중국인들이 고통받는 어려운 시기에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이지요. 그때 수복성의 하루 매출이 4만위안에서 2000위안으로 떨어졌어요. 한국돈으로 600만원 매상 올리다가 30만원으로 95%나 격감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와중에 내가 뭘 해야 될까 고민하다가 중국인도 돕고 한국과 한국문화를 홍보할 수 있는 김치를 만들어 대대적으로 뿌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에요. 그래서 매일 김치 500근씩 담가 국가기관, 대형병원 등에 무료로 공급했습니다. 아마 저희가 가장 먼저 이런 행동에 나섰기 때문에 중국사회에 인상적으로 비쳐진 것 같아요. 이 일로 수복성의 이미지가 크게 올라갔고 온대성이라는 한국사람이 정말 좋은 친구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온대성 사장은 항상 수복성의 정문에 서서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한다. 또 손님이 식사를 마치고 떠날 때도 예외없이 문앞에서 배웅을 한다. 이런 식이니 처음 수복성을 찾는 손님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건 당연하다. 고객관리의 첫 단계에서 점수를 따고 들어가는 셈이다. 고객관리뿐 아니다. 식당 경영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전략이 스며들어 있다. 수복성 성공의 비결을 좀더 파고 들어가보자.
-고객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주 고객층이 대개 어떤 사람들인지 직업이나 연령 등 성향을 파악하고 있습니까.
“오늘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고객명단이 정확히 1만2493명입니다. 이 명단 가운데 자주 안 오시는 분은 빼고 신규손님은 추가하는 식으로 일주일마다 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저희 고객은 20대에서 60대까지 아주 다양하고 대부분 상류층입니다. 이 고객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한국대사관에서 매주 발행하는 8쪽짜리 한국관련 정보지를 보내드립니다. 이걸 저희가 별도로 비용을 지출해서 매주 3000부씩 고객들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고객 확보의 비결
-그 많은 고객의 이름과 주소를 일일이 파악할 수 있습니까.
“가능합니다.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중국에서 사업하면서 고객 신상정보를 얻으려고 하면 의외로 쉽습니다. 우선 손님이 계산할 때 신용카드를 주잖아요. 이때 한국에서와는 달리 신분증을 함께 제시하도록 돼 있습니다. 영리한 종업원은 카드와 신분증을 확인하면서 손님의 이름과 주소를 외워두었다가 계산 끝나면 얼른 적어놓는 겁니다. 중국에서 카드를 만들려면 미리 10만위안을 예치해야 하기 때문에 카드를 소지한 손님들은 거의가 재력이 막강한 사람들입니다.
또 몇 번 찾아온 손님한테는 저희가 ‘한국정보지를 보내드리는데 정확하게 보내야 하니까 주소좀 알려달라’고 하면, 대개는 알려줍니다. 혹은 제가 명함을 손님한테 주면서 손님의 명함을 받기도 하죠. 이밖에도 고객의 신상명세를 알아내는 방법은 많습니다. 어린이한테 20위안짜리 배지를 선물하는데, 이걸 타기 위해서는 저희가 만든 양식에 기재를 하도록 했어요. 그러면 어느 학교 다니는지, 부모님 직장이 어딘지 다 나옵니다. 연말이면 손님들한테 왕복비행기 티켓이나 텔레비전 휴대전화 등을 내걸고 대형 판촉행사를 하는데 이때도 고객이 신상명세를 적게 돼 있어요. 저희 고객명단 1만2493명은 하루아침에 얻어진 게 아니라 이런 과정이 하나 둘 모아져 만들어진 것이고, 이 고객들이 있기에 수복성이 잘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두 번 온 사람이면 거의 고객으로 확보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제가 직접 손님을 식당입구에서 영접하거나 배웅하면서 받은 손님의 명함에 적힌 주소로 그날 중으로 반드시 메일과 감사편지를 보내드립니다. 또 축하할 일이 있으면 화분이나 꽃을 보내드리는데, 이것도 금요일은 피합니다. 금요일에 꽃을 배달하면 토요일과 일요일 연휴를 보내고 월요일에 출근할 때쯤엔 다 시들거든요. 그래서 조금 늦어도 괜찮으니까 월요일에 보내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성껏 대하면 자연히 한두 번 오신 손님을 ‘로열고객’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한테 관심을 가지는 게 고객을 모으는 비결인 셈이지요.”
-지금 1만2000여명의 고객을 보면 누구인지 대강 짐작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언제 다녀간 손님인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는 물론이고 성격도 파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기구이를 좋아하는 손님이라면 매운맛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보통의 조기맛을 좋아하는지 구분이 됩니다.”
-그런 사항들을 모두 기록해놓습니까. 아니면 다른 비결이 있습니까.
“일일이 메모를 해놓습니다. 완전한 고객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돼 있는 셈입니다.”
-중국의 고위층 인사들도 찾아온다는 얘기가 있는데, 어떤 분들입니까.
“저희 집을 찾은 최고위층이 바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입니다. 그 다음에 여성 국무위원으로 정치국원인 우이(吳儀) 부총리, 국가여유국 국장,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중량집단의 총재 등을 꼽을 수 있고, 유명한 연예인들도 찾아옵니다.”
-그런 중국의 고위층 손님들은 한국 음식에 대해 어떻게 평합니까.
“모두들 맛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의례적인 말이 아니라 정말로 맛있게 먹었다는 표정입니다. 역시 중국 손님들은 갈비를 가장 좋아하는 것 같고, 국수전골이나 김치도 굉장히 좋아합니다.”
-식당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뭐니뭐니 해도 맛이 결정적 요소 아니겠습니까. 수복성의 경우도 중국사람 입맛에 맞는 맛을 제대로 개발했기 때문에 성공했을 것 같은데요.
“어떤 음식점이든 성공하려면 서비스는 두 번째고 우선 맛이 좋아야 하겠지요. 그래서 저는 중국사람이 좋아하는 맛을 얻기 위해서 이들이 즐겨 찾는 중국식당에 가서 벤치마킹을 했어요. 여기서 내린 결론이 약간 단맛이 나고 기름기 있는 음식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음식에 중국적인 요소를 가미해 수복성 특유의 맛의 현지화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중국인들은 한국식당 하면 육류를 떠올리는데, 바로 이점에 착안해 차별화를 했다는 점입니다. 지금 수복성은 고기 요리에 다른 식당에 비해 15배나 비싼 재료를 씁니다. 시장에 가면 보통 고기 한근에 10위안인데 저희는 150위안짜리를 쓰고 있어요. 최고품질의 육류를 사용하는 겁니다.”
-어떤 고기이길래 15배나 비싼 것입니까.
“소 한 마리를 잡으면 저희가 원하는 부위가 6㎏밖에 안나옵니다. 가장 좋은 등심부위만 취하는 거지요. 저희처럼 생고기 전문식당으로 승부하려면 고기 품질에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고기는 중국의 한 목장에서 공급해주고 있는데, 풀만 먹이면 육질이 질기기 때문에 사료가 따로 있어요. 그리고 최근엔 소에게 인삼을 먹입니다. 최고의 품질을 가진 소를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좋은 고기를 좋은 가격에 팔자는 게 제 소신입니다.”
-그렇다면 원료조달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한국에서도 들여옵니까.
“개업 초기에는 거의 한국에서 가져왔어요. 그랬더니 원가가 무려 40%나 올라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바로 현지화로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100% 중국에서 조달합니다. 고춧가루 된장 고추장 뭐든지 가능합니다. 음식재료를 현지에서 조달하지 못하면 수복성뿐만 아니라 중국에 와 있는 모든 한국음식점이 성공할 수 없어요. 중국에서 나는 재료로 중국인의 입맛에 맞는 한국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한국에서는 다들 중국산 농산물의 품질이 국산보다 크게 떨어진다고 합니다. 이게 중국의 기후나 토질이 한국보다 좋지 않아서 그런 겁니까, 아니면 운송과정에서 변질되어서 그런 겁니다. 혹은 우리 입맛이 우리 농산물에 길들여져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중국 농산물의 품질도 아주 우수합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중국에도 분명히 지역마다 농산물 품질에 차이가 있어요. 중국 농산물 자체가 한국산보다 나쁘다고 보기는 어렵고, 질 좋은 중국 농산물이 한국시장에 많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중국식당에 갈 때마다 궁금한 것이 주방 내부의 모습입니다. 중국식당은 메뉴가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그걸 주문하면 어떻게 제때에 나오는지 신기합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인원이 어떤 식으로 일하고 있습니까.
“중국식당은 주방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역할과 서열이 마치 군대처럼 엄격합니다. 인원도 많습니다. 저희는 주방인원이 모두 35명인데 이중에서 매일 25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중국식당은 비슷한 규모의 한국식당에 비해 3배쯤 많은 인원이 주방에 있다고 보면 맞을 겁니다. 수복성의 경우 육류를 담당하는 육부, 탕만 만드는 탕부, 전을 만드는 전부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고기를 공급하는 절육부가 있고, 반찬을 새로 만드는 찬부, 반찬을 손님들한테 공급하는 찬공급부, 야채와 과일주스를 내보내는 야채부가 있습니다. 그릇은 임시공들이 씻고 있습니다. 이들 주방내 각 부서가 유기적으로 돌아가야 하므로 저희는 각 파트마다 고유업무의 내용을 매뉴얼화해서 곳곳에 써붙여 놓고 있습니다.”
모든 작업과정을 매뉴얼화
-매뉴얼화했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입니까.
“누가 어떤 파트에서 일을 하더라도 그 작업의 내용과 요령을 알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해놓은 것입니다. 요리하는 방법은 물론이고 그릇을 닦는 방법, 재떨이를 놓는 방법까지 모두 해당됩니다. 예를 들어 영업을 시작하기 전 손님을 맞기 위해 의자를 가지런히 정돈하는 일 등 준비작업이 1번부터 27번까지 정리돼 있습니다. 처음 온 직원이라도 일일이 말로 지시하지 않죠. 매뉴얼대로만 행동하면 되니까요.”
-종업원들의 모든 행동요령을 일일이 적어서 식당 곳곳에 붙여놓는다는 것입니까.
“적어놓기도 하고 직원들한테 반복교육을 해서 몸에 배도록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인사부 직원이 갑자기 아파서 출근을 못했는데, 마침 노동부에 신고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때 담당자가 아니더라도 매뉴얼만 보면 다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 매뉴얼에 의하면 1번 버스를 타고 시단(西單)에서 내려 왼쪽에서 두 번째 골목의 세 번째 건물 2층으로 올라가면 오른쪽 두 번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우리 담당자라는 것까지 기록돼 있습니다.
주방의 경우 국수전골 국물을 뜰 때 1인분에 1161g 뜨도록 돼 있습니다. 직원들이 처음엔 못했지만 지금은 한번에 정확히 1161g의 국물을 떠냅니다. 또한 오른손엔 국자, 왼손에는 솥뚜껑을 들도록 매뉴얼화돼 있기 때문에 일이 편리하죠. 때에 따라 짜거나 싱겁거나 하지 않고 맛이 항상 일정합니다. 디지털 저울을 사용하는 식당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식탁에 반찬을 놓는 것도 철저히 매뉴얼에 따르도록 교육하고 있습니다. 잘 보시면 저희 식탁에 반찬이 여덟 가지 놓입니다. 이 여덟 가지 반찬을 놓는 순서와 위치가 정해져 있습니다. 손님이 식탁에 앉아 있는 형태에 따라 반찬을 놓는 위치가 또 달라집니다. 저희는 육류전문점이기 때문에 고기와 함께 상추가 나오는데, 이때 먼저 진열한 반찬그릇을 옮기느라 소리 나는 일이 절대로 없습니다. 상추그릇 놓을 자리를 감안한 매뉴얼대로 미리 진열했기 때문입니다. 손님에게 조금이라도 스트레스를 주는 일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지요.”
-수복성이 중국정부에 의해 특급식당으로 지정받은 요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처음에는 저희가 1급식당이었다가, 그 다음에 베이징시 특급식당이 됐고, 2003년 1월에 국가 특급식당으로 비준받았습니다. 특급식당이라고 하면 규모, 음식, 맛, 실내장식, 서비스, 직원교육, 위생 등 각 분야를 평가해서 일정한 수준 이상이어야 합니다. 그중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업소의 위생상태 및 직원들의 서비스 능력입니다. 어느 곳보다도 깨끗하다고 자부하는 저희 수복성도 몇 차례 탈락한 것을 보면 위생문제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수복성이 한국식당으로는 처음으로 국가 특급식당으로 지정받았다는 것보다도, 음식대국인 중국이 한국의 음식문화를 인정해주었다는 데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싶어요.”
-특급식당으로 지정을 받으면 특혜 같은 것이 있습니까.
“중국의 요식업 관련 규정을 보면 총매출에서 원·부재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40% 이하로 내려가서는 안 됩니다. 과다한 이윤을 남기지 못하도록 한 것이지요. 사실 수복성 규모의 큰 식당에서 원가가 40%를 넘고 임대료로 매달 한국돈 4000만원씩 주면 남는 게 없거든요. 그런데 특급식당이 됨으로써 그런 규제에서 풀려날 수 있고요, 봉사료를 특급호텔처럼 15%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한국인 중에는 싼 인건비의 매력에 이끌려 중국에서 사업을 해보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수복성의 경우 급여나 후생복지비 등이 어떤 수준입니까.
“중국이 인건비가 싸다니까 여기 와서 뭘 좀 해봐야겠다고 말하는 한국사람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만, 실상을 알고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인건비의 비중이 총외형의 15%거든요. 만약 싼 노동력을 구한다면 저는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등지로 가야지 중국은 아니라고 봅니다. 직원들한테 지급하는 양로비, 의료보험비, 복리후생비, 교육비, 실업보험비, 주택소비기금, 노동조합비, 기타비용 등 법적으로 규정된 각종 복지비용을 모두 포함하면 급여 이외에 추가로 59.3%가 더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직원한테 월 1000위안의 급여를 준다면 실제 각종 복지비용을 포함해 매달 1593위안이 들어가는 셈입니다. 또 이 1593위안 이외에 인센티브로 지출되는 비용도 있고, 춘절이나 노동절 국경일 때 지급되는 보너스도 별도로 지출되는 비용입니다.”
-가격정책도 궁금합니다. 수복성의 주 고객층이 중국인 상류층이라면 가격도 보통의 중국요릿집보다는 높은 수준일 것 같은데요.
“일반 중국음식점보다 훨씬 비쌉니다만, 고급 중국음식점보다는 쌉니다. 고가의 메뉴가 없기 때문이죠. 한국음식도 중국의 삭스핀이나 제비집 전복요리 같은 고가의 메뉴를 개발해 매출을 올릴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도 연구를 많이 하는데, 한국 하면 가장 잘 알려진 게 인삼 아닙니까. 이 인삼을 이용해서 고가의 메뉴를 만들어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잘 아는 중국분과 가족회식을 한 적이 있어요. 중국의 고급음식점에서 어른 4명과 아이 3명이 먹었는데 식대가 1만500위안이 나오더군요. 1인당 1500위안이니까 우리돈으로 20만원이 넘지요. 그런데 우리 수복성에서 아무리 먹어도 1인당 500위안 나오기 힘듭니다. 비싼 메뉴가 없다는 얘기예요.”
노사분규 ‘제로’
-중국식당에 가서 종업원에게 이런저런 주문을 할 경우, 한국에서처럼 동시에 여러가지를 요구하면 잘 처리되지 않는 경우를 많이 겪어봤거든요. 중국인 종업원의 생산성을 한국종업원과 비교하면 어떨까요.
“한국과 비교하면 중국종업원의 생산성이 조금 떨어집니다. 수복성 같은 규모면 한국에서는 40명이면 충분할텐데, 저희는 100여명 되니까 분명히 차이가 있지요. 하지만 교육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오히려 한국보다 훨씬 낫다고 봐요. 저는 교육의 효과를 굉장히 많이 느끼고 있거든요.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인성도 다르고 생활습관도 다르잖아요. 따라서 직원을 뽑아서 회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곳에 진출한 한국기업인들을 보면 교육은 별로 시키지 않고 종업원에게 한국식으로 일해주기만 원하니까 생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가 하루에 세 차례 교육하는데, 근무시작 시간이 9시지만 교육받으러 1시간 일찍 나오라고 하면 다들 잘 나옵니다. 차도 없어서 새벽에 버스 타고 나옵니다. 한국 같으면 순순히 말 듣겠습니까. 교육만 제대로 하면 생산성은 충분히 커버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은 한국과 문화가 다르고 체제도 달라서 한국식으로 종업원을 대해서는 곤란한 경우도 많을 것 같습니다. 더욱이 체제특성상 평등관념이 강한 중국 직원들에게 상명하복식 지시만 내려서는 일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실제로 중국에서 사업하는 한국인 가운데 직원들 문제로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국인들은 중화사상이 있어서인지 자존심이 강해요. 이들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동일한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하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해마다 4명의 모범사원을 뽑아서 한국에 연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16명이 한국에 갔다 왔는데, 단 한 명도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국대사관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예요. 다른 식당이나 기업의 경우에는 중국인 직원의 한국연수를 중단한 곳이 많습니다. 건너 간 직원이 돌아오지 않고 불법체류를 하는 경우가 빈발하니까 불안해서 보내질 못하는 거예요. 수복성에서 비자를 신청하면 대사관에서 그냥 도장 찍어줄 정도로 저희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마 자존심을 존중하고 믿어주기 때문에 중국직원들이 다른 맘을 먹지 않는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엔 반쯤은 돌아오지 않을 줄 알고 불안한 마음이었습니다.”
-한국으로 연수를 보내면 어떤 것을 배워옵니까.
“작년에는 워커힐호텔에서 3개월 동안 교육을 받았고요. 올해는 드라마 대장금으로 유명해진 (사)궁중음식연구원에 보냈는데, 학원비가 한달에 200만원입니다. 3개월이면 학원비만 600만원이 들어가는 셈입니다. 이렇게 비싼 돈을 들여서 자기들을 교육시킨다는 것을 직원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 갔다 온 뒤에 업무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보면 역시 교육의 효과가 크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노동조합에 해당되는 조직이 공회(工會)인데요. 수복성에도 공회가 조직돼 있습니까.
“저희도 공회가 있습니다만, 한국의 노조와는 여러 면에서 다릅니다. 투쟁조직이라기보다는 저와 함께 직원들의 문제점을 서로 협의해 나가는 기구로 생각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복리후생 차원에서 한달에 한번씩 영화를 보는 문제, 춘절 같은 명절에 선물이나 보너스를 지급하는 문제, 연말 선물 등등을 서로 협의하는 식입니다.”
-어쨌든 그런 과정에서 노사분규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노사문제가 발생하는 회사들을 보면 대개가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법규정을 위반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급여의 2%에 해당하는 노동조합비를 지출한다거나 의료비용 14% 등 각종의 비용을 갹출해 직원들을 위해 써야 하는데 이게 안 되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중국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특히 외국기업의 경우 종업원을 해고할 명분만 있으면 해고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 하는데, 수복성에서는 종업원의 해고를 자유롭게 하고 있습니까.
“저희는 모든 직원을 1년 계약직으로 채용하기 때문에 1년 후 평가해서 재계약을 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 대신 중간에 수시로 해고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다만 반복교육 같은 수복성 특유의 문화를 따라오지 못하는 직원이 스스로 그만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사람을 자르기가 굉장히 힘들어서 항상 문제가 되고 있는데,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한국보다도 더 자본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근로자들 사이에 능력에 따라 다른 임금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상식처럼 돼있다고 하는데요. 수복성도 직원의 능력이나 성과에 따라 급여에 차등을 두고 있습니까.
“저희는 매달 15일 전에 다음달의 목표와 이에 따른 행동전략을 세웁니다. 이 목표는 전체목표와 조별 목표, 개인별 목표로 세분됩니다. 목표를 달성하면 인센티브를 주게 되는데, 직원마다 실적에 따라 받는 액수가 다른거죠. 제가 중국사업에 뜻을 둔 분에게 충고를 한다면 이 같은 인센티브 제도의 효과가 굉장히 커서 이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실시하느냐가 사업의 성패를 가를 수도 있다는 점일 겁니다.”
-개인별 목표를 어떻게 일일이 평가합니까. 예를 들어 고객에게 서빙하는 직원 같으면 목표를 어떤 식으로 계량화할 수 있습니까.
“처음에는 목표달성 여부를 측정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만, 데이터 관리를 하다보면 각 직원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전체 영업목표를 개인별로 세분화해서 부여한 뒤 각자 목표 달성 정도를 산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손님에게 서빙하는 직원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의 매출이 달라질 수 있거든요. 이런 것 하나하나를 모두 컴퓨터에 입력하고 있습니다. 주방직원에게는 원가관리 및 이번 달에 요리를 몇 개 개발한다는 식의 목표가 부여됩니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담당하는 직원 같으면 영업목표가 좀 다르겠지요. 손님과 마찰은 없었는지, 현금 관리에 문제점은 없었는지, 출퇴근은 정확했는지 등이 평가대상이 될 겁니다.”
전문화·대형화·고급화 추세
이제 중국에서의 식당관련 사업에 관심있는 독자를 위해 참고가 될 만한 조언을 들어보자. 중국 외식산업의 전문가가 된 온대성 사장이 보는 사업전망은 어떤 것일까.
-중국에 진출한 한국식당이 얼마나 됩니까. 그리고 운영실태나 영업실적 같은 것이 알려져 있습니까.
“중국 전체적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이름을 알 만한 도시에는 빠짐없이 한국식당이 들어가 있다고 보면 맞을 겁니다. 베이징만 해도 한국식당이 약 100여 개 있는데, 역시 옌사백화점 주변에 가장 많고 이어서 신위안리(新源里)일대,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왕징(望京)아파트, 대학이 몰려 있는 우다오커우(五道口)지역에 많습니다. 영업실적을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한달에 한번씩 모임이 있을 때 들어보면 대략 두 집 가운데 한 집은 부진한 것 같고 돈을 제법 버는 곳은 10% 정도 아닐까 짐작됩니다.”
-생각보다는 실적이 좋지 않은 것 같군요. 한국인들의 식당업 진출에 어떤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을까요.
“두루뭉실한 한국음식점보다는 전문화된 메뉴를 갖춰야 할 것 같아요. 한국도 그렇지만 이곳에도 이제는 식당의 전문화 대형화 고급화 바람이 불고 있는데, 대형화 고급화는 자금력이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전문화는 비교적 쉽게 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중요한 문제가 타깃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한국식당이 개업할 때는 중국인을 상대로 돈을 벌어보겠다고 나서지만 정작 행동전략은 한국인 상대가 돼버리니까 고전하는 겁니다. 한국인을 겨냥해서는 매출에 한계가 있거든요. 다시 말해 현지화가 관건이라는 말이지요. 중국에서 성공하려면 경영자의 사고방식, 원·부재료, 직원, 이 3가지가 현지화돼야만 합니다.”
-실제로 중국에 와서 사업하는 한국인들이 고전하는 사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에서의 사업에 관심을 가진 분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창업희망자들에게 구체적인 도움말을 준다면 어떤 것일까요.
“제가 1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식당사업 하려는 분들과 상담을 합니다. 대부분이 5억 이하의 자금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물어보시는데요, 그때마다 제가 강조하는 말이 장소선정을 잘 하고 규모가 크든 작든 반드시 정식절차를 거쳐서 설립하라는 것입니다. 장소는 천차만별이겠습니다만 일단 200평 이하규모로 대도시에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식당에 와서 식사하려면 역시 돈을 많이 쓸 수 있는 계층이어야 하는데, 이런 사람은 대도시에 많거든요.
요즘은 전과는 달리 10만달러 이상만 투자하면 영업허가증을 얻을 수 있고, 법인이 아닌 개인과도 사업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정식절차를 거쳐 개업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으므로 법과 규정대로 하는 게 여러모로 좋습니다. 그 다음에는 스스로 중국현지화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중국에 와서 성공하려면 중국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하는데, 한국인만 상대하고 한국식으로 행동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중국말도 열심히 배워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한국보다 훨씬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곳이 중국이라고 저는 봅니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업종을 불문하고 장소를 구해서 임대차 계약을 체결해야 되는데요. 중국의 법이나 관행이 우리하고 다른 만큼 아무래도 신경 쓸 부분이 많지 않겠습니까. 꼭 챙겨야 할 사항만 충고한다면 어떤 점입니까.
“식당뿐 아니라 중국에 와서 사업하시는 분들한테 가장 중요한 게 건물주한테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사람한테 건물을 임대하면 이 건물이 활성화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실한 믿음을 주면 그때부터 일은 쉽게 풀리게 돼 있습니다. 저희 수복성의 경우 개업날짜가 1997년 7월8일이었는데 영업허가증이 나온 건 1996년 3월29일이었어요. 그리고 영업허가증 나온 뒤인 12월31일 인테리어 공사계약을 했고요. 건물주가 저를 믿고 먼저 도장을 찍어줬기 때문에 일찌감치 영업허가증이 나올 수 있었던 겁니다. 다음으로 변호사를 적극 활용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한국 상공회의소에서 운영하는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면 적은 비용으로 초창기에 부닥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대와 관련해서는 이곳에선 전세 개념이 없고 대신 월세로 지불해야 한다는 점을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고요. 임대기간을 정할 때 가능한 한 10년, 15년 정도의 장기간 계약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해약조건도 확실히 해서 내가 필요할 때 손해 보지 않고 해약할 수 있도록 미리 장치를 마련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밖에 건축면적이 아닌 전용면적 기준으로 계약하라든가 중국에선 인테리어 공사기간이 길어질 수 있으므로 이 기간동안의 월세를 면제하는 조건으로 계약하라는 것 등도 꼭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이런 문제로 골치를 앓는 한국인이 많기 때문입니다.”
-중국사업에서 또 중요한 것이 합작 파트너의 선정 문제입니다. 외국인 단독으로 할 수 없는 사업도 많고 또 단독사업이 가능하더라도 현지사정을 잘 아는 파트너가 있으면 훨씬 수월할 테니까요. 그러나 파트너 잘못 만나서 사업 망쳤다는 실패 사례가 많은 것을 보면 매우 신중히 따져보아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합작 파트너를 고를 때 어떤 점에 특히 유의해야 할까요.
“파트너를 제발 동일업종에서 골랐으면 좋겠어요. IT사업 하겠다고 중국에 온 회사가 시멘트 회사나 가구제조 회사와 합작하는 경우도 봤는데, 이건 정말 문제입니다. 이런 식으로 합작 파트너를 물색한 회사는 오래 안가 문을 닫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동일업종의 실력있는 회사를 골라야 합니다. 건물주를 합작 파트너로 삼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이럴 경우 영업이 부진하면 임대료를 인하해주는 등 이점이 있습니다.”
-중국식당이 한국식당과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중국식당도 대형화, 고급화, 전문화 추세로 가고 있고 식당에다가 가라오케 사우나 같은 시설을 묶어서 영업하는 게 유행입니다. 그리고 중간급 식당은 거의 없고 아주 작거나 아니면 대형의 식당으로 양분돼 있는 게 재미있는 점이지요. 200평 정도의 어중간한 식당은 인기가 없습니다. 한가지 눈여겨볼 점은 야외에 위치한 식당이 드물다는 겁니다. 아직 자동차 보급률이 낮아서 그렇겠지만 아마 수년후, 특히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전후해서는 주차장을 겸비한 야외의 가든형 식당도 많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중국 외식산업의 전망
-중국의 외식산업에 대해서는 어떤 전망을 하고 계십니까.
“중국의 외식산업은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합니다. 제가 보기에 중국인이 좋아하는 음식만 개발하면 한국보다 훨씬 더 성공할 기회가 많은 분야가 외식산업입니다. 출장뷔페 같은 것은 이제 막 출발하는 단계이므로 개척의 여지가 많습니다. 그 다음에 단체급식 사업도 유망합니다. 중국에서는 직장에서 직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한국인의 장점을 살려 위생적이고 저렴하게 단체급식을 한다면 경쟁력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현재 중국에서 각국 외식업체간 경쟁상황은 어떻습니까.
“아직은 한국에서처럼 활성화되지는 않은 것 같아요. 베이징을 기준으로 보면 TGI 프라이데이스는 본점과 지점이 있는데, 본점의 영업이 부진합니다. 아웃백스테이크도 1호점에 이어 2호점이 생겼는데, 2호점 영업은 부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반면 맥도날드나 KFC, 피자헛 같은 패스트푸드점 및 패밀리레스토랑이 아주 영업이 잘되고 있어요. 중저가로 미국이나 일본 한국에서 붐을 이루었던 이런 패스트푸드점이 요즘 중국에서는 잘 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밖에 이태리식당이나 프랑스식당 같은 각국의 전통음식점은 아직은 미미한 실정입니다.”
-중국에서 사업하면서 중국음식점은 물론 외국음식점들의 경쟁력을 비교해보셨을 것 같은데요. 중국음식이나 서양음식과 비교해볼 때 한국음식의 특징이나 장단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다른 외국의 식당들은 원·부재료를 모두 자국에서 들여와야 합니다만, 한국음식점은 100% 현지화가 가능합니다. 이는 그만큼 경쟁력이 높다는 얘기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중국인들이 한국요리를 좋아할 뿐 아니라 하나의 요리 분야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갈비, 국수전골, 김치 등 세 가지 음식은 특히 중국인에게 인기가 매우 높습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보면 중국내에서 어떤 외국음식보다도 한국음식의 경쟁력이 높다고 봅니다.”
3000억 매출에 도전
수복성의 성공스토리를 듣노라면 온대성 사장의 경영철학이나 실천력이 대단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의 경력을 보면 ‘중국’에 대해서나 ‘식당경영’에서나 거의 초보자로 출발해 짧은 시간에 최고의 전문가가 된 점이 인상적이다. 이제는 성공한 사업가일 뿐 아니라 연세대 무역협회 중소기업청 등에서 자신의 경영사례를 강의하는 유명강사가 된 온대성 사장의 회고와 포부를 들어보자.
-처음에 어떤 인연으로 중국에 오게 됐습니까.
“1993년도에 본사인 두산의 주류판매 주재원으로 파견됐습니다. 두산에서 생산하는 주류를 중국시장에 판매하는 일이었지요. 그 이전에는 중국과 아무 관련이 없었고 중국말도 못했어요. 성이 온씨라는 점이 좀 중국적이라고 할까요. 물론 외식업 쪽에도 전혀 경험이 없었고요. 원래 저는 국제무역이 전공이었거든요. 두산에서는 처음에 구매과에 있었고 그 다음에 마케팅부와 영업부에서 근무했습니다. 이런 경력이 오히려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식당이나 외식업 쪽에 경험이 있었으면 생각이 굳어져 있어 폭넓게 보지 못했을 겁니다.”
-애초에 주류판매를 위해 중국에 파견된 것이군요. 그런데 식당은 어떻게 해서 하게 된 것입니까.
“두산의 주류제품을 가장 효과적으로 광고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찾다보니 식당이었지요. 그래서 1987년에 베이징호텔 뒤에 두산주가라는 식당을 개업했습니다. 이게 식당으로서는 물론이고 중국에 설립된 최초의 한국기업일 것입니다. 당시 미수교 상태여서 일본의 두산재팬을 통해 투자한 것인데, 제가 1993년에 와보니 테이블 14개에 불과한 작은 식당이었어요. 그래서 이걸로는 안되겠다 싶어 본사에 건의해 1995년도에 문을 닫고 수복성을 준비하기 시작한 거지요.”
-수복성이 짧은 시간에 베이징의 대표적인 한국식당으로 성장했는데 그동안 어려움에 처한 경우는 없었습니까.
“역시 1997년 IMF사태 때와 2003년 사스 파동을 겪었을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개업 후 6개월 만에 IMF를 맞으면서 영업이 부진해 매각을 시도했었으니까요. 개업하자마자 영업부진으로 매각을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죽기 살기로 수복성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잠을 하루에 4시간밖에 안잡니다. 이곳 한인사회에서 저는 골프장 사우나 가라오케에서 볼 수 없는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을 정도로 하루종일 수복성의 영업에만 심혈을 쏟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그렇게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오늘의 수복성을 만든 저력이 생겨난 것 같기도 합니다.”
-앞으로의 발전구상이랄까 개인적인 목표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0년내에 연간 매출액 3000억원짜리 회사로 만들고 싶습니다. 3000억 매출목표가 달성되면 중국 주식시장에 상장할 계획입니다. 이 목표가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구체적으로는 수복성을 베이징에 4개, 지방에 4개 정도로 확대할 생각입니다. 이미 2호점은 금년 7월8일 베이징에서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2호점은 베이징 최고급의 식당으로 꾸밀 것입니다. 실면적만 600평입니다. 최고의 한국식당으로 중국식당과 경쟁할 것입니다. 기대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사업영역도 케이터링(출장요리), 전문단체급식, 전문서비스학원, 외식업컨설팅회사 등으로 확대할 계획입니다. 또 식자재 연구센터를 설립하여 중국내 원·부재료 소싱(sourcing) 및 수복성 각 지점에 공급하고 한국의 외식업체에도 공급하면 매출이 대단히 클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한국에서 성공하고 있는 외식산업을 중국에 합작 진출시키거나, 역으로 중국의 유명한 식당을 한국으로 유치해도 수익성이 좋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사업구상을 현실화하면 10년후 쯤에는 3000억원 매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외국의 문화콘텐츠를 조심스레 받아들이면서 21세기 유망산업인 문화산업 진흥에 발벗고 나섰다.
2007년 문화소비 규모 1000억달러로 세계2위가 될 중국시장을 겨냥한 각국의 공략 또한 치열하다. 중국 대중문화의 실태와 발전 전망, 그리고 한류(韓流)현상으로 힘을 받고 있는 한국 문화상품의 중국진출 전략은 무엇인가.
21세기는 문화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무성하다. 그래서 문화산업이라는 말도 이젠 낯설지 않게 들린다. 잘 만든 영화 한 편으로 벌어들이는 외화가 자동차 수천, 수만 대 수출효과와 맞먹는다는 계산도 그럴듯하다.
굳이 이런 분석을 곁들이지 않아도 중국의 문화와 문화산업에 대한 이해는 중국탐험의 필수코스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의 현주소를 모르고는 중국진출이니 현지화니 하는 것들이 사상누각이 되기 십상일 터이다.
권기영(權基永·38)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중국사무소장은 우리 문화의 중국 문화산업계 진출과 문화 분야의 한중협력을 위한 실무작업을 총괄하고 있다. 말하자면 중국 문화산업의 최전선에 파견된 선발대인 셈이다. 베이징대에서 중국문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현재까지 9년째 중국에 체류중인 권 소장은 중국 문화산업의 구석구석을 꿰뚫고 있는 ‘중국문화통’이다. 각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중국 문화산업의 전반적인 분위기부터 짚어보기로 했다.
-권 소장께서는 중국에서 9년째 생활하시면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또 중국의 문화산업 전반을 직접 다루고 있으므로 누구보다도 보고 듣고 느끼는 점이 많을 줄 압니다. 좀 두루뭉실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우선 중국의 대중문화를 한국의 대중문화와 비교해보면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우리와 특별히 다르다기보다는 서로 통하는 면이 참 많다는 점을 자주 느낍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파고들면 우리와 상이한 측면이 많겠지요. 몇 가지 인상적인 점을 든다면 먼저 드라마를 10대에서 50~60대까지 광범위한 계층이 즐겨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중에 사극(史劇)이 아주 많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한류(韓流)의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청춘드라마도 많이 찍고 있습니다. 음악도 발라드풍은 기본이고, 외국풍의 댄스뮤직도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한국과 크게 다르다고 보기 힘들죠. 오히려 한국에서 널리 인기를 얻은 것들이 중국에서도 크게 환영받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다만 현대적인 대중문화의 수준이라든가 제작능력을 놓고 보면 한국보다 떨어진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제성장률 뛰어넘는 문화소비
-중국의 경제발전이 지속됨에 따라 문화소비 지출도 증가하고 있는데요. 전반적인 문화소비의 추세와 전망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몇 가지 경제지표만 보더라도 문화소비 지출이 늘어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1990년대 이후에 비로소 엥겔계수가 50% 이하로 감소했는데, 대도시는 40% 이하로 낮아졌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의 비중이 낮아진 대신 문화에 지출할 여력이 생겨난 것이지요. 지난해의 경우 경제성장률이 8.5%였던 데 비해 문화소비는 약 10% 늘어난 725억달러에 달했습니다. 경제성장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문화소비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2008년의 베이징올림픽과 2010년의 상하이엑스포 개최를 계기로 급속한 성장세가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2007년에는 문화산업의 시장규모가 1000억달러를 넘어서 미국에 이어 세계2위가 될 전망입니다.
흔히 중국의 일인당 소득을 놓고 소비수준을 예상합니다만, 지금 웬만한 젊은이들은 자기 월급보다도 비싼 휴대전화를 다 가지고 있어요. 또 문화적 접촉 공간이 점점 넓어지면서 생활방식이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갖가지 외국문화가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지요.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지난해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발생 기간에 사람들이 외출을 자제했는데 그 바람에 인터넷 서비스가 17.3%, 통신서비스가 31.4%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전반적으로 문화소비에 대한 욕구가 팽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라가 크기 때문에 지역별로도 문화의 생산과 소비 유형이 다를 것 같은데요. 지역별로 어떤 특징이 있나요.
“보통 중국 전체를 다섯 개의 문화권역으로 구별합니다. 베이징(北京)을 중심으로 한 화북지역, 상하이(上海)를 중심으로 한 화동지역, 광저우(廣州)를 중심으로 한 화남지역, 청두(成都)를 중심으로 한 서남지역, 선양(瀋陽)을 중심으로 한 동북지역 등인데 시장규모도 크고 각기 특색이 있습니다.
베이징과 상하이는 모든 것이 갖춰진 종합도시입니다만, 상하이가 경제중심지로 외래문물이 빨리 들어오고 실험적인 요소가 강하다면 베이징은 중앙정부의 통제가 심하고 문화적 보수성이 강한 편입니다. 상하이에서 애니메이션, 온라인게임, 영화 등이 발전하고 베이징에 각종 공연이 성행하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입니다. 남부의 경제중심지인 화남지역은 홍콩의 영향을 받아서 문화적으로도 상당히 개방적입니다. 현재 모바일콘텐츠 시장의 70%를 차지할 정도입니다.
청두는 전통적으로 문화의 고도(古都)지만, 경제적으로 낙후돼 있다가 최근 서부대개발의 핵심도시로 떠오른 곳인데, 차(茶)문화가 발달해서인지 이곳 사람들은 참 놀기를 좋아해요. 이런 특성이 오히려 문화산업에서는 굉장한 이점이지요. 예컨대 중국 온라인게임의 최고 히트작인 ‘미르의 전설’ 같은 경우 회사 본부는 상하이지만 실제 서비스해서 돈버는 곳은 청두를 중심으로 한 서남지역입니다. 청두지역이 동부의 연안지역보다 경제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오락산업은 더 발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북지역은 전통적으로 중공업지대였는데, 일본의 진출이 굉장히 활발합니다. 다롄(大連)시에는 일본문화가 상당히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동북지역은 또 조선족 동포가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방송이나 문화가 가장 먼저 들어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WTO 가입과 점진적 개방정책
-2001년 11월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후 각 방면에서 개방이 진행되고 있는데요. 문화산업 분야는 현재 어디까지 개방돼 있습니까.
“공식적으로는 문화산업 쪽에서도 상당히 개방을 하는 것으로 돼 있어요. 예컨대 스크린쿼터제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연간 20편의 외국 영화를 수입할 수 있도록 했고, 외국자본에 의한 영화관 건설도 가능해졌습니다. 또 외국자본과 합작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개방의 폭은 더욱 넓어지겠지요.
그럼에도 중국의 다른 산업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장 소극적이고 규제가 많은 것이 문화 영역입니다. 가령 정보통신(IT)산업을 보면 세금 감면 조치 등 외국기업에 대한 적극적인 유치 노력이 돋보이는데 비해 문화 쪽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국문화가 들어와서 중국의 사회주의 정신문명을 해칠 수 있다, 특히 자본주의 문화가 인민들에게 불건전한 풍조를 부추길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정권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이데올로기를 장악해야 하는 중국정부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문화산업의 개방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중국정부의 입장을 말씀하셨는데요. 중국의 경우 정부가 주도적으로 문화산업 정책을 펴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중국정부의 문화산업 진흥정책이 대개 어떤 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중국정부가 문화사업과 문화산업을 구분한 구체적인 정책을 내놓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라고 하겠습니다만, 문화산업을 진짜 산업으로 인식하고 적극 추진한 것은 2000년 이후입니다. 예를 들어 애니메이션 발전 10차 5개년 계획에 따르면 각 방송국마다 애니메이션 관련 채널을 신설한다든가 성(省)급 이상 방송국은 하루에 최소한 30분 이상 애니메이션물(物)을 방영하되, 방영시간의 60%는 국산으로 하라는 식입니다. 또 애니메이션 제작 관련사들은 매년 30%씩 제작량을 늘리라는 정책도 나왔습니다.
중국은 이미 2003년을 디지털방송 원년으로 선포하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100% 디지털 방송으로 송출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또 2014년경에는 중국내에서 아날로그 방식의 송출을 완전히 없애도록 하겠다는 등의 정책들을 내놓고 있어요. 주목할 것은 문화산업을 정보산업과 결합시키는 구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처럼 적극적인 정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만, 문제는 문화산업과 관련된 각 장르들을 보면 관리하는 부서가 도처에 흩어져 있다는 점이에요. 예컨대 방송이나 영화는 광전총국에서 관리하고 있고, 전자출판물이나 게임은 신문출판서에서, 기타 순수 민간예술과 공연 연극 등은 문화부가 맡고 있어서 정책을 통일시켜 나가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전통문화와 외래문화의 공존
-요즘 중국의 문화현상을 관찰해보면 과거 전통문화적인 요소를 많이 간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습니까.
“전통문화적 요소와 현대화된 국제적인 유행문화가 섞여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외국과 합작해서 방송프로그램이나 드라마, 혹은 애니메이션을 만들 경우 중국에 관련된 스토리나 혹은 중국의 민족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이라야 정부당국에 의해 공동제작으로 인정받습니다. 특히 최근에 나온 애니메이션의 소재를 보면 대부분 중국의 고전에서 따온 것들입니다.
반면에 청소년들이 열광하는 유행문화는 전통적인 것과는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홍콩 대만, 나아가 한국 일본에서 수입되는 것들은 중국의 전통문화와는 별 관련이 없죠. 이처럼 계층별, 연령별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면서 전통문화와 외래문화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문화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사회주의 체제의 특성과 1960~70년대 문화혁명의 경험이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대중문화라는 것이 소비나 유행에 민감하기 때문에 자유롭고 유동적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만, 중국은 체제의 특성상 정부 혹은 정책의 주도성이 굉장히 강하고 특히 사회주의 정신문명의 가치관이 강조되고 있어서 일정 부분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비근한 예로 우수한 문화 콘텐츠의 개발은 결국 좋은 작품이나 시나리오가 나와야 가능한데, 여기에 심사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많은 영향을 주고 있어요. 민감한 정책상의 문제라든가, 과거의 역사라 하더라도 현재와 관련돼 있는 것들, 폭력적인 것들, 음란성이 강한 것들이 모두 규제대상입니다. 그런데 그 규제의 기준이 아주 모호해서 속된 말로 작가가 알아서 긴다는 것입니다. 작가 스스로 한계를 설정해 창작에 임하다 보니 작품이 위축되고 재미도 없어지게 되는 것이죠. 또 소재 부분에서도 예를 들면 중국공산당에 관한 새로운 시각, 중국역사에 관한 새로운 해석이 금기시돼 있다는 겁니다.”
-중국 문화산업이 콘텐츠에서 열세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도 지금 말씀하신 체제의 특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할 것 같군요.
“연관성이 굉장히 크다고 봐야죠. 중국의 작가들이나 예술가들의 창의력이 부족해 문화 콘텐츠가 빈약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제한하는 조치가 너무 많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까 스스로 만든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측면도 크다는 것이죠.”
문화산업을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문화콘텐츠산업이다. 즉, 문화콘텐츠의 기획, 제작, 유통, 소비와 관련된 산업으로 매우 광범위하다. 영화나 드라마 음악 같은 전통적인 문화콘텐츠에서 최근 IT산업의 발달에 힘입어 새롭게 부각된 온라인게임이나 모바일콘텐츠에 이르기까지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해 오늘은 우리가 비교적 익숙한 분야를 중심으로 중국의 문화산업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한국인 누구나 한번쯤은 봤음직한 중국영화의 현황과 안팎의 사정부터 물어보았다.
-중국에서는 ‘누가 미우면 그를 보고 영화에 투자하라고 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화를 만들어 돈 벌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장이모(張藝謀) 천카이거(陳凱歌) 등 세계적 감독을 배출한 중국의 영화산업이 의외로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로 현장에서 느끼는 중국 영화산업의 현황은 어떻습니까.
“중국영화의 배우나 감독, 촬영기사들 수준이 결코 한국에 비해서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상당히 괜찮아요. 장이모나 천카이거가 세계적인 감독인 것은 분명합니다. 제작 편수도 적지 않습니다. 저희들이 조사한 것을 보면 1979년에 극영화를 63편 찍었는데, 2002년에는 100편 정도 찍었어요. 2003년에는 제작 승인을 받은 영화가 197편으로 늘었습니다. 이중 해외자금이 투자된 경우가 40편을 넘었습니다. 중국영화가 나름대로 꽤 활발히 제작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수요, 즉 시장이 매우 열악하다는 겁니다. 개혁개방 초기인 1979년만 해도 영화 관람객이 연인원 293억명에 달했는데 1990년에 161억명, 1999년에 4억6000만명으로 격감했고 2001년에는 2억2000만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불법복제가 주원인이겠지만 영화상영관 문제도 있을 것입니다.”
소득에 비해 비싼 영화관람료
-중국의 영화산업이 개혁개방 이후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먼저 외국영화에 대한 수입규제에서 원인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수입요건이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방송과 마찬가지로 영화 제작에 있어서도 규제가 많습니다. 체제의 경직성이랄까 폐쇄성이 영화산업 발전을 제약하고 있다는 지적은 사실인 것 같아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요인들이 순환되다 보니까 영화에 대한 투자가 활발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영화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대학인 베이징영화학원 학생들의 가장 큰 희망사항이 인디영화 같은 걸 잘 만들어서 어떻게든 국제적인 상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상을 받아야만 투자유치가 가능해지고 그래야 상업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영화관 말씀을 하셨는데요. 영화 상영시스템이 낙후돼 있다는 얘기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요즘 좋은 시설을 갖춘 멀티플렉스관도 많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한국에 디지털 영화관이 하나인가 둘밖에 없을 겁니다만, 중국에는 꽤 많습니다. 디지털 영화관은 필름없이 송신 받아서 바로 상영이 가능한 데, 그렇게 하기 위한 제반 시스템들을 갖추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처럼 영화 상영시스템은 선진화됐는데, 문제는 영화관람료가 너무 비싸다는 것이에요. 게다가 영화관람료가 고정돼 있지 않아요.
예컨대 중국 국산영화 관람료는 개봉관에서 25~30위안으로 우리돈 약 4000~5000원 정도입니다. 그런데 1998년 무렵 미국영화 ‘타이타닉’을 수입개봉하면서 관람료를 80위안이나 받았어요. ‘진주만’ ‘매트릭스’ ‘반지의 제왕’도 80위안 안팎으로 관람료를 책정했지요. 이는 중국의 소득이나 물가수준을 감안하면 상당히 부담스런 금액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청소년보다는 30대 직장인들이 영화관을 더 찾아요. 우리처럼 젊은층이 영화를 많이 보고 또 그들을 타깃으로 한 영화를 제작할만한 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것입니다.”
-저도 ‘타이타닉’을 중국에서 봤는데, 그때 상당히 비싼 입장료를 냈다는 기억이 남아 있어요. 한 가지 재미있는 게 영화관에 들어가 보니까 좋은 위치에 좌우 측면과 후면을 칸막이한 2인용 좌석이 마련돼 있고 요금도 아주 비싸더군요. 커플 전용석이라고나 할까요. 그런가 하면 영화관 입구에서는 영화보는 동안 파트너가 돼주겠다는 여성들이 영업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 이런 것을 보며 영화 하나를 놓고도 다양한 상술이 동원되는 나라가 중국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감입니다. 얼마 전에 베이징의 유명한 멀티플렉스관에 가봤는데 그곳도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일반석 뒤쪽으로 딱 두 사람만 앉을 수 있게 양쪽이 막혀 있고 앞만 뚫려 있는 좌석이 있더군요. 그런가 하면 VIP룸이 따로 있어서 그 안에서도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해놓았어요. 의자가 자동으로 뒤로 젖혀지거나 안마기가 작동하기도 하고 음료수도 마실 수 있도록 돼있는데, 관람료는 150위안 정도를 받고 있었습니다.”
-영화의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 여러가지 기준이 있겠는데요. 일례로 유명한 감독이나 배우의 배출 또는 국제영화제에서의 수상기록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중국영화가 그동안 이룩한 성과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제가 정확한 통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만, 그 부분에서는 한국영화보다는 중국영화가 훨씬 앞서갔죠. 한국영화가 히트작을 많이 내고 국제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 아닙니까. 중국은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국제영화제에서 상당히 주목을 받았고 걸출한 감독과 배우를 많이 배출했어요. ‘붉은 수수밭’ ‘부용진’ ‘패왕별희’ 등이 모두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들입니다. 당시 5세대 감독으로 불렸던 장이모, 첸카이거, 장원(姜文)이 대표적인 감독들이죠. 배우는 궁리(鞏麗)라든가 최근에 활발히 활동하는 장쯔이(章子怡) 등이 세계적 스타 대열에 올라 있습니다.”
-중국인은 어떤 영화를 즐겨 봅니까.
“어떤 영화를 특별히 선호한다기보다는 비교적 다양한 취향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인들이 한국영화 ‘엽기적인 그녀’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만, 영화관에서 최고의 수익을 낸 작품은 ‘매트릭스’ ‘반지의 제왕’‘해리포터’ 같은 수입 대작영화였거든요. 그런가 하면 장이모 감독의 ‘영웅’이 360억위안의 매표수입으로 중국 영화사상 최고의 수익을 올렸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국영화나 감독 배우에 대한 중국 관객들의 평가는 어떻습니까.
“한국영화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웬만하면 다들 한국영화를 보는데 문제는 영화관에서 보지 않고 불법 DVD를 통해서 본다는 겁니다. 아직 한국의 특정 감독을 좋아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만, 배우는 많이 알고 있죠. ‘엽기적인 그녀’를 통해 전지현을 좋아하는 팬이 굉장히 많아졌고, 원빈 장동건도 중국 사람들이 아주 좋아합니다.
-한국영화 ‘엽기적인 그녀’가 2003년 중국의 10대 인기영화로 선정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중국여성들이 애인이나 남편을 폭행하는 행태가 늘어났을 정도로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도 하더군요. 이 영화의 어떤 측면이 중국인에게 인기를 끌었을까요.
“글쎄요. 거기에 대해서 이런저런 해석이 있습니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엽기적인 그녀’가 한국인에게는 엽기적이었는지 몰라도 중국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중국인들에게 여주인공의 행동이 엽기적이었냐고 물어 보았더니 어떤 경우는 좀 심하기는 하지만 엽기적이라고는 느끼지 않는다는 게 대체적인 반응이었어요. 그보다는 오히려 영화 속에서 그려진 남녀간의 사랑, 예컨대 약간 멍청한 듯하면서도 순수한 사랑을 간직한 남자주인공, 뻔한 스토리인 데도 눈을 떼지 못하고 웃게 만드는 스토리 구성, 사람들을 웃기는 코믹한 요소 등이 적절하게 가미돼 있기 때문에 중국인들을 사로잡은 것으로 보고 싶습니다.”
중국의 엄청난 TV드라마 시장
-문화의 전파와 교류에 방송매체만큼 큰 영향을 미치는 도구도 없을 것 같습니다. 또 TV드라마는 문화산업의 중요한 아이템입니다. 중국은 방송업계의 규모 자체가 엄청날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어느 정도입니까.
“TV방송국이 368개에 채널만 2124개입니다. TV 보급률 98%에 3억600만 가구가 시청하고, 전체 시청자수는 10억7000만에 달하니까 엄청난 규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2년의 TV 방송시간이 총 1095만 시간이라고 합니다. 얼른 실감나지 않는 숫자라고나 할까요. TV드라마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2002년 중국에서 촬영하여 심의를 통과한 드라마가 313편 2642회분에 달합니다. 국영 중앙방송인 CCTV의 8개 채널에서 방송하는 드라마만 연간 1000회 정도이고, 각 지방의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를 모두 합하면 중국 전역에서 연간 약 8000회 분량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가히 드라마왕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TV드라마 분야에서도 외국 작품이 수입되고 있을텐데요.
“수입은 물론이고, 공동제작도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 방영중인 ‘북경 내 사랑’도 한국과 중국이 공동제작한 TV드라마입니다. 2002년에 중국에서 방영된 외국 드라마는 모두 327부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역시 홍콩드라마가 133부로 전체의 40.7%를 차지하고 있습니다만, 한국드라마도 67부로 전체의 20.5%를 차지해 대만이나 미국 일본 유럽 등을 제치고 2위에 올라 있습니다. 중화권의 홍콩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외국드라마로는 한국 작품이 가장 많이 방영되고 있는 셈입니다.”
-중국에서 방영된 한국 TV드라마 가운데 가장 인기를 끈 작품은 무엇이었습니까.
“역시 ‘사랑이 뭐길래’가 최고 인기였죠. 중국에서 외국드라마를 들여와 방영한 이래 사상 두 번째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으니까요. 이 드라마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사랑이 뭐길래’가 비교적 나이 드신 분들이 좋아한 드라마였다면 젊은이들에게 크게 다가갔던 게 ‘가을동화’입니다. ‘가을동화’는 주로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했는데, 중국은 거의 모든 대학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기숙사에 대여섯 명씩 모여 TV나 VCD 등을 통해 ‘가을동화’를 보면서 우느라고 매번 휴지 한 통이 날아갔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최근에는 ‘보고 또 보고’가 인기를 끌고 있고, 막 방영을 시작한 ‘명성황후’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중국사람들이 그렇게 한국 TV드라마를 즐겨보는 배경이나 이유는 뭘까요.
“기본적으로 재미있다는 겁니다. 구성을 잘해서든 어떻든 재미있다는 반응이 많아요. 사실 ‘가을동화’의 스토리는 기존 멜로물과 별 다를 건 없이 빤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나고, 또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대사가 인상적이라는 거지요. 한국어 대사를 중국어로 한번 옮겼음에도 중국인들이 흠뻑 감동에 젖는다는 거예요. 거기다가 아름다운 화면과 음악이 결합돼 팬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는 분석입니다.”
-한국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중국 TV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커지고 드라마 수입가격도 크게 올라 중국정부가 최근 수입 편수를 제한하고 심의도 엄격하게 하고 있다는 말이 있는데요. 실제로 당국의 견제가 심해졌습니까.
“반드시 그렇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다른 산업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국가든 외국의 문화가 급속히 인기를 얻게 되면 긴장하고 나름대로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게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방송가에서는 지금 한국드라마가 없어서 문제인 실정입니다.”
대중음악은 전통가요와 발라드
영화나 드라마와 함께 중국의 대중문화 소비층에 한국제품이 파고든 분야가 바로 음반 영상분야다. 이른바 한류현상도 90년대 후반 드라마와 음반에서 불붙기 시작했다. 중국인의 음악적 취향과 음반영상산업의 현황을 살펴보면 한국 가수들이 중국에서 인기몰이를 하는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의 음반영상분야의 시장규모나 현황은 어떻습니까.
“중국의 음반영상 시장규모를 TV와 비디오 CD VCD DVD플레이어와 컴퓨터 CD롬의 보유량에 근거해 계산해보면, CD 수요량만 최소한 20억장이라는 수치가 나옵니다. 1인당 연간 2장을 소비한다고 보고 장당 10위안(1500원)으로 치면 260억위안의 시장규모라 하겠습니다. 전문가들의 예측에 의하면 앞으로 3~5년 내에 음반 및 영상시장의 전체 수요는 1000억위안(약 15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하니 관련업계의 상승효과를 불러일으킨다면 그 경제적 효과는 엄청날 것입니다. 워낙 인구가 많아 그 시장규모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지요.
이처럼 시장규모가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자본을 가진 대형기업이나 다국적기업이 없고 업계의 전반적인 수준이 낮아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또 음악산업의 전세계적인 하락추세에도 많은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인들의 노래 부르기 취향은 어떨까요. 거리 곳곳에 가라오케니 KTV니 해서 노래방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노래방문화도 발달해 있는 것 같던데요.
“음악분야를 놓고 보면 중국인의 취향은 댄스뮤직은 아니에요. 한국인이 여전히 트로트를 좋아하는 것처럼 중국에서도 전통적 대중음악인 민가(民歌)라든가 홍콩 대만풍의 발라드가 주류입니다. 댄스음악이 양념으로 덧붙여지는 형태입니다. 중국사람들도 최근엔 집에서건 집 밖에서건 노래 부르기를 즐기는데 한국이나 일본과는 좀 다릅니다. 노래를 부르는 문화가 따로 있다기보다는 음주 같은 유흥문화에 곁들여지는 하나의 부가적인 취향일 뿐이지요. 가라오케가 그 대표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처럼 따로 노래방이 있어서 신나게 한두 시간씩 즐기는 그런 문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
불법복제 음반 단속실적
-댄스뮤직은 그리 발달한 것 같지 않다고 하셨는데, 중국사람들이 춤을 즐겨 추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고 학교에서도 춤을 가르치지 않습니까. 오히려 한국사람보다 춤에 일가견이 있을 것 같은데요.
“집단무용은 모르겠습니다만, 춤은 한국사람이 더 즐기는 것 같습니다. 한류의 영향으로 인해 중국에서도 젊은이들 사이에 힙합 혹은 댄스그룹이 많이 생겨났어요. 심지어 현대무용학원 같은 전문대학에 한국무용과가 생겼는데 한국 전통 부채춤 등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힙합을 가르치고 있거든요. 그런데 가르치는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중국 학생들이 정해진 동작을 그대로 따라하라면 잘하는데, 흥이랄까 신명 같은 감각적인 부분에서는 다소 떨어진다는 것이에요. 아무튼 제가 보기에 춤은 한국 쪽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2001년 불법복제품으로 적발돼 소각된 음반영상제품이 1억장에 달하고 2002년에도 상당량이 소각됐다고 하는데요. 현재 불법복제 문제는 좀 개선이 되고 있습니까.
“이게 참 골칫거리인데요, 외국인 눈에는 개선 속도가 더뎌서 불만족스럽겠지만 점차 나아지고 있습니다. 불법복제는 음반이나 DVD 위주로 성행하고 있지만 이외에도 저작권 침해라든가 인터넷상에서의 연예인 초상권 침해 등의 사례가 비일비재합니다.
2002년도 단속실적을 보면 1월6일 전국에서 약 20만명의 조사요원이 출동해서 음반영상 경영단위 17만여개를 조사했어요. 이때 몰수한 불법 음반영상제품이 4344만장에 달하고 폐업시킨 영업단위가 1만개가 넘었습니다. 이 해에 미국영화협회가 중국정부의 해적판 소탕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중국 문화부에 간판을 선물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앞으로 3년 정도 지속적으로 단속을 펴면 베이징올림픽 전해인 2007년경에는 어느 정도 정상화되지 않을까 전망됩니다.”
-WTO 가입으로 외국업체의 중국내 음반발행이 가능해졌다고 하는데요. 외국음악에 대한 중국인의 수용태도는 어떻습니까.
“중국인의 사고는 굉장히 개방적입니다. 외국 것에 대한 수용태도가 한국인이나 일본인보다도 훨씬 더 너그럽습니다. 중국은 내부에 55개 소수민족이 있어서인지 굉장히 개방적이에요. 음악 자체가 좋으냐 나쁘냐가 문제이지, 어느 나라 것이냐는 상대적으로 크게 문제삼지 않는 것 같아요.”
-한국의 음반이 중국시장에서 대박을 터뜨린 사례가 있습니까.
“음반영상 분야에서 성공의 기준을 이른바 대박을 터뜨렸느냐 여부로 본다면 아직 한국 음반이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HOT나 NRG 베이비복스의 음반이 아주 빠른 시간에 광범위하게 팔렸던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프로모션을 예컨대 ‘서울음악실’ 같은 고정 방송프로그램을 통해서 성공시켰고 또 대규모 공연도 성립시켰다는 점을 성과로 꼽을 수 있습니다만, 아직은 음반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기 힘듭니다. 한 가지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지금 중국의 A급 가수들의 소속사가 중국 기획사에 소속돼 있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모두가 소니뮤직 같은 메이저급 글로벌 회사에 소속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의 스타급 가수들의 활동으로 얻어지는 수입은 그 기획사들이 가져가는 거죠.”
해외가수 톱10 중 한국인 8명
-요즘 중국 최고의 인기가수로는 누구를 꼽습니까.
“중국 최고 인기가수라면 대륙에서는 나잉(那英)을 꼽습니다. 나잉도 중국기획사가 아닌 미국의 타임워너 음반사 소속입니다.”
-한국의 기획사가 중국 가수를 거느리고 있는 경우는 없습니까.
“아직은 없습니다. 다만 한국의 기획사나 음악관련 기업이 중국 청소년 가운데 노래 잘하는 친구들을 뽑아 한국에서 춤도 가르쳐주고 곡도 주어 중국으로 내보내는 방식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금년 초에 선보인 남성 4인조 그룹 신무기(新舞器)도 그런 경우인데요, 중국 방송계에서도 그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중국의 음악잡지에서 독자투표로 선정하는 ‘해외가수 톱10’에 한국가수가 여러 명 들어 있다고 하는데요. 한때는 한국가수들이 마이클 잭슨이니 머라이어 캐리 같은 세계적 톱스타들을 제치고 상위권을 독차지하지 않았습니까.
“중국의 대표적 음악잡지인 ‘당대가단’이 지난 5월호에 발표한 외국연예인 인기순위를 보면 톱10에 한국 연예인이 8명 들어가 있어요. 1위가 강타고 다음으로 보아 장나라 원빈 JTL 배용준 순으로 한국인이 상위권을 휩쓸었습니다. 7위가 미국의 백스트리트 보이이고 뒤이어 한국의 세븐 안재욱이 8,9위에 올라 있고, 10위가 캐나다 사람입니다. 다만 이 순위에는 홍콩과 대만 연예인은 제외돼 있습니다.”
-이제 화제를 공연 쪽으로 돌려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중국 공연시장의 추세를 구풍미우한류(歐風美雨韓流)로 표현하더군요. 그만큼 다양한 외국공연단이 오고 있다는 거겠지요. 중국 공연예술의 현황과 외국공연팀의 활동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대충 통계만 훑어보아도 각 지역의 공연시장이 활기에 넘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02년 한해 동안 베이징의 공연 횟수가 1만7000여회에 관중은 1300만명에 달하고 있어요. 같은 기간 상하이에서는 1만4000여회의 공연에 893만명의 관중을 기록했습니다. 성단위로 치면 더욱 많아져 장쑤(江蘇)성은 3만여회의 공연에 1401만명의 관중을 동원했고 광둥(廣東)성도 연간 공연횟수가 5만회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연간 중국에서 벌어지는 공연횟수는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할 수 있겠지요. 베이징의 연간 공연횟수를 365일로 나누면 하루에 47회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처럼 공연이 엄청나게 많고 공연시장도 무척 큰 편인데, 문제는 제대로 수익을 올리는 공연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는 겁니다. 중국 문화부의 승인을 거친 외국공연팀의 방중(訪中)공연 실적을 보면 1998년 162회, 2002년 428회에 달합니다. 그리고 2002년에 내국업체의 중국내 공연이 359회입니다. 상당히 많은 것이죠.”
-베이징이 어떤 면에서는 서울보다 더 국제화돼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요. 공연분야만 보더라도 이미 90년대 말에 오페라 ‘투란도트’가 베이징의 자금성에서 성황리에 공연됐습니다. 그때 공연장 입장료가 엄청나게 비싸서 한국언론에도 소개된 적이 있을 정도였어요. 이밖에도 러시아 발레단 공연이나 북한의 ‘꽃파는 처녀’ 같은 작품 공연도 열려 세계 각국의 다양한 공연팀들이 베이징으로 모여든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베이징은 물론이고 상하이도 그렇습니다. 베이징국제음악제, 상하이국제예술제 등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공연행사들이 열리고 있고, 장르별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공연단이 수시로 중국을 찾고 있습니다. 이들 세계 일류의 공연단은 중국 공연을 단순히 한번 왔다 간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시아 진출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상징성 못지않게 중국 공연은 비즈니스 측면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예로 호세 카레라스,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등 세계 3대 테너가수의 자금성 공연은 VIP석 티켓이 1장에 2000달러였어요.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었지만 가장 먼저 팔렸다는 겁니다.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중국에서 웬만한 공연일 경우 티켓값이 1500위안, 우리 돈으로 20만원 이상은 기본입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중국에는 그렇게 비싼 문화상품을 소비할 수 있는 재력가들이 존재한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자금성뿐 아니라 우리의 국회의사당 격인 인민대회당에서도 가끔 공연이 열리더군요. 인민대회당은 공산당 전국대표대회 같은 대규모 정치행사를 하는, 권위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인데 그런 데서도 공연을 하는 걸 보면 문화예술에 대해 굉장히 관대하고 유연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런 점은 어떻게 보십니까.
“국제적으로 공인된 예술작품이나 전통적인 클래식을 존중해주는 풍토는 중국이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자금성이나 인민대회당이라면 우리로 치면 경복궁이나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에 해당하는 데도 예술공연을 허용할 정도로 개방적이에요. 이렇게 자금성이나 인민대회당 혹은 만리장성에서 공연하는 배경에는 일종의 이벤트적인 상징성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명소가 아니더라도 중국에는 훌륭한 공연시설이 많은 편이에요. 작년에 저희들이 상하이 대극장을 방문해서 내부시설을 돌아봤는데요, 아직 한국에는 그 정도 시설을 갖춘 공연장이 없습니다. 베이징에도 내년에 돔형의 중국대극장이 인민대회당 바로 옆에 들어설 예정입니다.”
-최근에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한국의 정상급 클래식 음악가들이 공연을 했는데요. 한국 예술가가 인민대회당에서한 최초의 공연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중국에 소개된 한국문화가 대중문화 위주로 치우친 것엔 어떤 사정이 있는 것입니까.
“고급문화 쪽의 중국진출이 상대적으로 저조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공연은 기본적으로 비즈니스이기 때문에 기획사들이 선뜻 나서지 않은 것 같아요. 중국측 기획사가 개런티를 주고 한국 공연단을 초청하는 방법이 좋을 것 같은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한국의 고급문화 공연수준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유명한 대중가수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전통문화나 고급문화 공연을 기획할 경우 리스크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명성황후’라든가 ‘지하철 1호선’ ‘난타’ 같은 공연은 중국에서 굉장히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한국이 대중문화만 뛰어난 줄 알았더니 순수예술에서도 상당한 수준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지하철 1호선’에 대해서는 작품의 형식과 내용, 무대장치 조명 등에서 모두 호평을 받았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암울한 뒷면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그것들이 인간적인 면과 맞부딪치는 모습을 중국 작가들은 감히 표현해내지 못한다며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문화산업이 엄청난 잠재력을 갖는 것은 일단 거대한 인구에서 비롯된다. 워낙 인구가 많다 보니 문화상품의 소비자층이 두터운 것은 당연하다. 거기다 중국정부가 문화산업 육성에 발벗고 나선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딱 맞아떨어지는 분야가 애니메이션이다. 엄청난 아동인구와 정부의 강력한 육성책으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애니메이션 산업의 잠재력
-중국의 아동인구만 3억이라고 하니까, 애니메이션 산업의 규모나 향후 발전전망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중국의 애니메이션 산업은 일단 규모만 놓고 보면 그것만큼 큰 시장이 없을 정도로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그 자체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이 때로는 출판물이 되고, 온라인에서도 활용되고, 캐릭터상품 개발로 연결되는 등 연관분야가 망라해서 보는 겁니다. 2003년 중국산 애니메이션 생산량이 2만9000분에 달했고, 2년 후에는 4만8000분 분량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 막대한 물량의 내용을 채워갈 작가들의 창작관념이나 표현기법의 수준은 어떻습니까.
“1960~70년대만 해도 애니메이션 분야에 중국학파라는 게 있었습니다. 수묵으로 표현하는 애니메이션 기법이었는데, 개혁개방 이후 점차 명성이 사라져 오늘날 중국 애니메이션은 세계수준에 크게 뒤처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소재와 시나리오 창작, 캐릭터 창조, 스토리, 특정부분에 대한 묘사, 상상력, 생산공정, PC기술 운용 등 전반적으로 떨어지고 시장경쟁력도 약한 실정입니다.”
-중국 애니메이션의 문제점으로 특히 주제가 단조롭고 교과서적이라는 평이 있던데요. 대개 어떤 주제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나요.
“전통적인 것들에서 아이디어를 따오는 경우가 많은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서유기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전통적인 것에 집착하다 보면 창의성이 발휘되기 힘들거든요. 중국도 이런 문제점을 깨닫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CCTV에서 만든 ‘나타전기(헳咤傳奇)’나 상하이미술영화제작소에서 만든 ‘수당영웅전(隋唐英雄傳)’이 환영을 받은 대표적 작품인데요. 제목에서 보다시피 전통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중국 최대의 애니메이션 제작기지로 알려진 상하이미술영화제작소의 시설이나 수준은 어떻든가요.
“중국의 애니메이션 제작기지는 북쪽의 베이징 중앙텔레비전방송국(CCTV)과 남쪽의 상하이미술영화제작소로 크게 구분됩니다. 상하이미술영화제작소가 2D기법의 선두주자라고 한다면 CCTV는 점차 3D기법으로 넘어가는 단계에 있습니다. 상하이미술영화제작소는 몇 번 가본 적 있습니다만, 시설이나 설비가 아주 선진적이라고 평가하기는 힘듭니다.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현재까지 굉장히 많은 애니메이션 작품을 제작했습니다만, 실제로 흥행되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오히려 CCTV 쪽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CCTV 애니메이션 기술부가 편집 제작한 방송프로그램 애니메이션성(動畵城)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만화영화 방송프로그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문인력이 210명이나 되고 제작능력이나 중국내 위상이 첫손꼽힐 만합니다.”
일본만화가 점령한 중국만화계
-중국정부가 해외업체와의 공동제작을 적극 장려한다는데, 한국 애니메이션의 진출 전망은 밝은 편입니까.
“일단 중국의 애니메이션 관련 방송사나 제작업체들이 한국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한국 애니메이션도 노하우가 풍부한 것이 아니어서 실제 팔려고 해도 팔 만한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중국과 공동제작을 추진하려고 합니다. 그럴 경우에는 중국 국내용으로 간주되므로 황금시간대에 방영할 수도 있고 이는 곧바로 수익으로 연결되거든요.”
-중국의 애니메이션산업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만, 그 바탕에는 만화가 자리잡고 있지 않습니까. 중국의 만화 역사는 우리보다 오래됐다고 합니다만, 오늘날 중국만화계는 일본만화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하더군요. 실상이 궁금합니다.
“중국에서는 원래 시사만화류, 즉 카툰(Cartoon) 일색이었는데, 1990년 일본의 애니메이션 작품 ‘성투사성시’가 전국의 대도시에서 방송돼 인기를 끌자, 중국의 해적판 복제업자들이 바로 같은 제목의 만화책을 출판하면서 일본만화 붐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중국 최초의 만화연재 잡지인 ‘화서대왕’(畵書大王)이 1993년에 창간됐는데, 각양각색의 일본만화를 수집하여 연재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만화를 거의 시차없이 중국으로 가져왔기 때문에 중국의 만화 마니아들에게 높은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일본만화의 불법유통이 계속 늘어나자 중국 관련당국이 전면적인 단속에 나섰는데 그 첫 번째 타깃이 ‘화서대왕’이었습니다. 현재 만화를 자주 보는 청소년이 8000만명이나 된다고 하지만 95%는 일본만화와 미국만화에 점령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중국의 만화산업이 그처럼 외국만화 세력에 억눌리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요.
“중국만화를 보면 만화 특유의 오락성이 배제되고 대신 예술성이 강조돼 신문의 부속물 역할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동안 만화가 출판사나 신문사의 미술편집의 한 방면으로 진행돼왔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프로만화가라고 할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러니 소재나 창작면에서 외국만화를 따라잡을 수 없는 거죠. 게다가 중국시장에서 유통되는 만화의 60% 이상이 불법복제물이다 보니까 출판사들이 만화 단행본 출판을 꺼립니다. 결국 만화시장은 있으나 자신들의 만화는 없는 상황에서 외국만화의 진출이 가속화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출판대국으로 불려왔다. 종이를 발명하고 한때 세계적 수준의 인쇄술을 보유한 적도 있다. 그러나 중국이 WTO에 가입한 이후 외국자본의 상륙에 대비해 출판계를 재편하는 등 지각변동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다. 요즘 중국의 출판계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출판계 지각변동 내막
-그동안 중국의 출판산업은 나름대로는 잘 나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역사적인 문화유산이 풍부한 데다가 특히 인구대국이어서 책의 절대 판매량도 많았을 것 아닙니까. 책을 한 권 내더라도 상당한 양이 팔려나갔을 것 같은데요.
“개혁개방 이후 출판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개혁개방 원년인 1978년 105개에 불과했던 출판사가 2001년에는 565개로 늘어나는 등 양적인 성장세가 두드러집니다. 책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기본적으로 팔려나가는 부수가 많은 것은 확실합니다. 신간서적의 판매량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5000~1만부는 나갑니다. 일반도서든 전문도서든 그 정도는 팔려나간다는 얘깁니다. 전국의 도서관에서만 구입해도 꽤 되니까요.”
-한국은 외국어나 처세술 건강 경영 재테크 등 실용적인 책이 잘 팔리는 반면 순수문예물은 퇴조하는 분위기인데, 최근 중국에서는 어떤 유형의 책이 잘 팔리고 있습니까.
“한국과 유사한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빌 게이츠 같은 세계적 거부(巨富)의 성공스토리, IT 관련서적과 컴퓨터 관련서적이 상당히 많이 나가고 있죠. 그러나 역시 가장 활발한 출판분야는 아동서적입니다. 최인호의 소설 ‘상도’도 중국에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반면에 시나 소설 등 순수문학작품은 상대적으로 판매부수가 떨어집니다.”
-WTO 가입후 출판계도 크게 변하고 있다는 말이 들리는데요.
“WTO 가입이 중국 출판업계에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외국자본의 유입이 자유로워졌다는 점입니다. 아직 외국자본의 최대 지분율이 49%를 초과하지는 못하지만 그동안 정부의 관리하에 놓여 있던 중국 출판업계가 부분적으로는 외국자본의 관리를 받게 된 셈입니다. 특히 외국의 대형서점이 선진적인 판매방식과 막대한 광고량을 앞세워 진출하면 신화서점 위주의 판매방식인 중국의 도서유통업계에 엄청난 타격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또한 가입을 전후해 출판관련 합작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외국업체와 합작으로 중국에서 백과사전을 출판하는가 하면, 아동관련 전문출판사도 생겨나서 외국의 베스트셀러와 관련상품들을 직수입하기도 합니다.
이런 외국자본의 진출에 맞서 중국 출판업계가 그룹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 점도 커다란 변화입니다. 과거 출판사란 게 국가에서 출판사업을 하도록 허락해준 국유기업이었거든요. 이들이 뭉쳐서 출판그룹을 만든 것입니다. 대형화로 WTO체제에 대비한다는 것이죠. 그 대표적인 사례가 2002년 3월 인민출판사를 비롯한 13개의 대형 출판업체가 그룹화를 선언한 것입니다.
이때 생겨난 중국출판집단은 총인원 5000명에 자산이 50억위안(한화 약 7500억원)으로 매출액이 중국 전체 도서시장의 17%를 치지했을 정도입니다. 여기에는 상무인서관 중화서국 삼련서점 인민문학출판사 등 전통있는 유명출판사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렇게 대형화된 출판그룹이 얼마나 시장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지는 좀더 두고봐야겠습니다만, 정부 입장에서는 관리하기가 좋겠지요. 아무튼 WTO 가입이 중국의 출판업계 전반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오는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한국책의 중국수출 전략
-최근 한국의 도서를 중국에서 판권수입해 번역, 출판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도서의 중국 수출 전망은 어떤가요.
“최근 한국책의 판권이 중국으로 수출되는 사례가 늘고 있긴 합니다만, 제가 보기에 책 자체만 가지고는 일정 수준 이상의 매출을 올리기가 힘들 겁니다. 요즘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예를 들어 드라마 등 대중의 흥미를 끌만한 부분과 함께 엮어서 들여오는 형식이 필요할 것 같아요. 소설 ‘상도’가 중국에서 꽤 오랜 기간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홍콩에서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상도’가 방송이 되면서 판매에 상승세를 탔거든요.
애니메이션 방영과 연계해 만화책의 판매를 늘린 것도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국화꽃 향기’ 같은 순수문예물도 중국에서 많이 팔렸습니다만, 아직은 번역의 문제 등 한국의 출판물을 적극적으로 중국시장에 내놓기에는 여건이 미숙한 상태입니다. 최근 ‘옥탑방 고양이’를 중국 인터넷에 연재하겠다는 계약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런 유형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중국의 출판물 유통시장에서 재미있는 현상 중의 하나로 이른바 서시(書市)가 매년 열리고 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거대한 책시장이 고궁 같은 데서 열리는 건데,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유통형태가 되겠죠?
“그렇습니다. 서시는 중국의 웬만한 출판사들이 모두 참가해서 독자들과 직접 대면해 새로 나온 책들을 선보이고 재고서적도 싸게 파는 연례행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서시가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사고 싶은 책을 한꺼번에 싸게 구입하기도 합니다. 국가신문출판총서 주관으로 열리는 전국서시(全國書市)는 전국을 돌면서 해마다 개최되는 최대규모의 서시인데요. 전시부스 1000여개에 15만여종의 책이 시장에 나올 정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한류(韓流) 현상에 대해 살펴볼 차례인 것 같다.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열풍이라고 할 한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안겨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한류를 통해 한국의 이미지가 상승하고 있는 것은 물론, 경제적 효과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2007년 한국의 문화상품 수출목표가 100억달러인데 이중 상당부분이 중국시장에서 달성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 현지에서 파악하는 한류의 실체와 현주소가 궁금하다.
-일본에서는 드라마 ‘겨울연가’가 NHK 프로그램중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고 하고, DVD OST 소설 등으로도 나와 직접적인 수익만 1000억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또 ‘겨울연가’ 촬영지를 찾는 일본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있고 한국어교재 판매도 2배 이상 늘어났다고 합니다. 일부에서는 공동개최한 한일월드컵보다도 더 한국에 대한 이해와 친밀도를 높였다고 평가하더군요. 이 같은 한류현상이 원래 중국에서부터 일어난 것 아닙니까. 중국내 한류현상의 진행과정과 현황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한류라는 것이 중국에서 먼저 시작돼 동남아 일본 등으로 확산됐고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1997년 6월 CCTV에서 방영한 ‘사랑이 뭐길래’가 외국드라마 중 시청률 2위라는 인기몰이를 하면서 촉발된 한국 대중문화 열풍이 그뒤 H.O.T. 등의 대중음악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완전히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정착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에는 영화와 온라인게임, 애니메이션, 캐릭터, 모바일콘텐츠 등 문화산업의 전체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상영중인 영화들은 대개 일주일 후면 중국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가 됐습니다. 한국에 직접 가서 캠코더로 찍어오는지는 모르겠지만, DVD의 경우는 화질도 굉장히 좋습니다. 다만 더빙이라든지 번역이 엉터리더군요. 아무튼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에 대한 호감도나 이해도가 더 깊어지고 넓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한류현상을 놓고 여러 측면에서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그로 인해 일단 한국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된 것 같고 다행스럽게도 이것이 오래 지속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 대중가수를 좋아하거나 드라마나 영화가 좋아서 한국을 좋아하게 됐다는 중국 청소년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어요. 얼마전 베이징제2외국어대학에서 한국문화축제를 연다고 해서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학교 학생들이 펴낸 학회지를 보니까 ‘왜 나는 한국어과를 선택했나’라는 질문에 ‘좋아하는 한국 연예인에게 한글로 편지를 써보고 싶어서’ ‘좋아하는 한국노래를 한국어로 부르고 싶어서’라고 답한 학생이 굉장히 많았어요. 제가 볼 때 한류현상은 앞으로도 한동안은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류현상의 숨은 배경
-중국에서 한류현상이 나타난 배경과 이유를 어떻게 분석하십니까.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소득이 늘어나면서 문화소비 욕구가 높아졌습니다만, 국내에서 그것을 채워줄 콘텐츠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개혁개방 초기에는 홍콩과 대만문화가 물밀 듯이 몰려왔고, 이후 80년대 중후반에는 잠시 미국문화가 휩쓸었다가 이어서 일본문화가 들어왔고, 다시 일본문화가 식상할 때쯤 한국문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미국문화나 일본문화가 한번씩 휩쓸고 간 기간이 5년 정도니까 한류현상도 한 5년 지나면 자연스럽게 다른 걸로 대체되거나 사라져야 할텐데 꼭 그렇지는 않은 듯합니다.
구체적으로 한국 대중문화의 어떤 점이 중국인에게 호감을 샀느냐가 중요한데요. 드라마의 경우를 예로 들면 우선 배경설정이 진솔하고, 스토리 구성이 탄탄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전통적 가치관과 현대적 가치관의 충돌, 세대간의 충돌 그리고 그 사이에서의 애정관계 같은 것이 복합적으로 전개돼 굉장히 재미있다는 것이 중국인들의 대체적인 평입니다. 또 중국인들이 모두 동의할 정도로 배우의 연기가 뛰어나다는 것과 함께 화면처리, 배경음악 등에도 높은 점수를 주고 있습니다.
온라인게임은 말할 것도 없고 애니메이션 경우에도 기술력으로는 한국이 훨씬 앞서 있으니까 중국 청소년들에게 일단은 먹히는 거죠. 청소년들이 무언가 대리만족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 갈증을 풀어야 하는데, 그런 공간이 중국내에서는 제공이 안된다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한국문화가 동양문화와 유럽문화의 융합체라서 흡인력이 크다는 얘기도 합니다. 일본문화가 바로 중국으로 들어오는 경우에는 잘 안 먹힌다는 거예요. 거부감이 많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한국이나 대만을 한번 거쳐서 오면 중국에서 잘 먹힌다는 거죠. 미국문화나 유럽문화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니까 외래문화를 동양감각에 맞도록 융합시켜 한 단계 끌어올려주는 맛이 한국문화에는 있다는 얘기죠. 사실 이런 평가에는 일면 서양문화나 일본문화에 대해선 두려움이 있는 반면 한국문화에 대해서는 크게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일종의 만만하게 보는 시각도 저변에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엽기적인 그녀’ 벨소리 1위
-한국 대중문화에 열광하는 이른바 합한족(哈韓族)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이들이 요즘 가장 좋아하는 한국 연예인은 누구입니까.
“합한족은 일종의 한국마니아, 한국팬을 일컫는 말인데요. 10대 초중고생이 대부분입니다. 이들은 개혁개방 이후 태어난 세대로 자기 표현이 강하고 우리로 치면 X세대에 해당하는 부류입니다. 장르마다 차이는 있습니다만, 이들에게 가장 자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분야가 음악입니다. 대중음악 쪽에서는 지금은 해체됐지만 H.O.T.가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타, 보아, 장나라, 이정현, NRG 등 가수들이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연기자 가운데서는 배용준, 안재욱, 김희선, 전지현, 차태현 등이 합한족의 우상입니다.”
-한류를 문화산업이라는 측면에서 활용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한류 비즈니스는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나요?
“한류효과는 비즈니스 차원에서 여러 각도로 따져볼 수 있습니다. 우선 경제적 효과로는 안재욱이 광고 모델로 출연한 삼성전자의 모니터가 중국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고, LG드봉이 김남주 CF 기용을 통해 중국 화장품시장의 70%를 점유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드라마 촬영지 관광이나 한류 스타와의 팬미팅 관광이 유행하고 있다거나 한류를 통해 한국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가 상승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류는 각 장르별 문화산업의 중국진출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어요. 카세트테이프와 CD의 발행이 2002년 한해에만 32종 114만장에 달했고, 영화산업 쪽에서는 지난해 베이징에 멀티플렉스관이 건설되기도 했습니다. ‘엽기적인 그녀’의 주제가가 벨소리 다운로드 1위를 기록한 것도 한류 비즈니스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중국에서 발행된 한국음반들은 보통 얼마씩에 어느 정도나 팔리고 있습니까.
“정품 음반이라면 우리돈으로 3500~4000원 정도에 판매가가 정해지는데, 그렇게 팔리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복제품이 정품의 10배쯤 유통되니까요. H.O.T. 음반이 가장 많이 팔렸을 때 정품으로 약 30만장 정도가 나갔으니까 복제품은 그 10배에서 30배인 300만장에서 1000만장 가량이 퍼져 있다고 보면 됩니다.”
-한류(韓流)의 상대적 개념으로 한국에서의 한류(漢流)현상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국문화를 접하시면서 한국에도 본격적인 한류(漢流)현상이 대두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처럼 중국문화의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에 대해 굉장히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흘러가는, 때로는 일방적인 듯한 한류(韓流)현상이 언제까지 갈까, 오히려 그 역류현상이 나타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죠. 다만 역류현상이 생겨난다 하더라도 그 분야는 다를 것 같아요. 예컨대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 분야에서는 소재의 발굴이라든가 재미있고 역동성 넘치는 전개 등에 있어 우리가 상당기간 앞서갈 수 있을 것이라고 보니까요. 반면 중국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것들 가운데 한국인이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중국문화의 세계화 가능성
중국도 지금 드라마를 찍는 기술, 노래를 하는 테크닉, 공연장의 무대장치와 조명 등에서 매우 빠르게 발전하고 있어요. 이처럼 기술적인 문제를 따라잡는 건 시간문제예요. 중국이 자국의 풍부한 문화유산을 단순히 중국적인 감수성이 아닌 글로벌한 감수성으로 취사선택해 문화상품으로 개발해낼 수 있다면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가 열광하는 현상도 충분히 예견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국과 중국의 문화교류에 있어 바람직한 방향, 그리고 우리 문화의 중국진출과 관련해 요구되는 전략은 무엇이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중국시장을 개척하지 못하고 세계시장에서 한국문화를 드높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리고 중국의 문화를 우리 것으로 재창조하는 노력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문열 삼국지’가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이게 중국고전 삼국지냐, 아니면 이문열 혹은 한국 삼국지냐를 따진다면 저는 한국 삼국지라고 봅니다. 기본 스토리는 중국에서 나왔지만 이것을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콘텐츠로 가공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능력이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문화도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우리것을 자꾸 팔아야 한다는 논리에서 벗어나 우리도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한국의 문화 소비자들한테 보다 다양한 문화를 흡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우리 문화의 전반적인 수준이 향상될 수 있습니다. 그런 적극성과 개방적인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다만 전략적으로 저는 중국과의 문화교류에서 어깨동무하고 같이 가기보다는 거인의 목마를 탄 난장이가 돼야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거인이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면서 그 위에 목마를 탄 난장이가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멀리 바라보는 기회로 만들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무서운 핵기술·우주과학, 일취월장 첨단산업기술
중국의 경제적 부상에 대한 경탄이 최근엔 두려움으로 바뀌는 듯하다. 특히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갈수록 높아가고 있는 한국은 이제 중국경제가 기침만 해도 곧바로 감기에 걸리는 정도가 됐다.
중국이 내뿜는 이 같은 위력의 원천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번 호에서 중국의 과학기술을 탐구키로 한 것도 이런 의문에서 비롯됐다. 고도성장을 가능하게 한 중국 과학기술의 현주소와 관련정책들 그리고 우리의 대응방향을 짚어보기로 한다.
인터뷰에 응해준 홍성범(洪性范·46) 박사는 중국과학의 전반적인 현황을 파악하고 있는 극소수의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현재 과학기술부가 베이징에 설립한 한중과학기술협력센터장으로 근무하면서 현장에서 중국 과학기술을 진단하고 협력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우선 중국 과학기술의 전반적인 면모부터 살펴보자.
-지난해 10월15일 중국은 자력으로 인간을 선저우(神舟) 5호에 태워 우주에 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과학기술력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음을 세계에 과시한 바 있습니다. 중국 과학기술의 총체적 수준을 요약해서 표현한다면 어떤 것이 되겠습니까.
“중국사람들에게 과학기술 분야의 성과를 물어보면 ‘양탄일성(兩彈一星)’이라는 말을 즐겨 합니다. 원자탄, 수소탄, 인공위성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죠. 중국은 그동안 국방 및 우주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상당한 수준의 능력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그렇듯이 중국도 과학기술을 사회주의체제의 우월성 과시와 국방력 강화 그리고 대(對)국민 체제홍보 수단으로 활용한 측면이 큽니다. 아울러 세분화된 전공분야 가운데 한 길만 걸어도 평생 생활이 보장됐던 체제특성에 힘입어 기초과학분야도 상당 수준에 도달해 있습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생산기술 측면에서는 약점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이 분야도 1990년대 이후 괄목할 만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개혁개방 이후 정책의 초점을 연구성과의 상업화 내지는 산업화에 맞춘 것이 효과를 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중국 과학기술의 이중구조
-흔히 중국은 기초과학은 발달했으나 산업화 기술 수준이 뒤떨어지는 것으로 이야기합니다만, 최근 일련의 보도들을 보면 한국과 중국의 기술격차가 근접해 있으며, 이 격차도 얼마 안가 사라질 것 같습니다. 중국의 기술경쟁력을 한국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입니까. 그리고 세계수준에 비추어보면 어디쯤 와있을까요.
“중국의 기술경쟁력을 한마디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각 분야별로 상황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해외 직접투자에 의한 첨단기술의 유입, 이른바 해귀파(海歸派)라 불리는 해외유학 인력의 귀국, 그리고 해외첨단기술의 빠른 소화흡수능력 등으로 최근 들어 기술경쟁력이 급성장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강한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국의 기술경쟁력은 현재보다는 5년, 10년 후를 보아야 하고, 우리의 주력종목과의 격차를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가지 예로 지난해 우리의 주력수출품인 휴대전화에 대해 기술경쟁력을 조사해 본 적이 있는데, 전반적으로 한국과 2년 정도의 격차를 보이고 있고, 2010년에는 대등한 수준이 될 것으로 전망되었습니다.”
-중국 과학기술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사례로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발사대 옆 산골마을에서는 발사소식조차 모르고 있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과학기술뿐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나타나는 중국의 이중구조를 빗댄 표현이겠습니다만, 이런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중국은 거의 모든 측면에서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도시와 농촌, 핵심지역과 주변지역이란 극심한 이중구조를 가진 사회체제와 마찬가지로 과학기술분야에서도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이중구조는 첫째,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 과시와 국방력 강화라는 우선순위에 따라 국가가 항공우주기술, 핵 분야 등 국방관련기술과 기초과학에 한정된 자원을 집중적으로 지원한 데서 연유합니다. 따라서 군수산업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된 인공위성, 핵, 광섬유, 리모트 센싱 분야 등은 거의 선진국 수준에 접근해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둘째는 과학기술을 둘러싸고 있는 정치·경제 메커니즘의 성격에서도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의 과학기술 활동은 정치·경제 환경의 명암에 좌우되는 굴절된 역사로 특징지워집니다. 즉 중국 현대사를 규정하였던 ‘홍’(紅, 정치이데올로기)과 ‘전’(專, 전문성)의 논리가 과학기술에도 그대로 적용된 것이에요. 그래서 과학기술이 활발히 전개되던 시기에는 ‘전’의 논리가, 과학기술이 정체된 시기에는 ‘홍’의 논리가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육체노동이 강조되어 과학기술자가 노동현장에 투입되었고, 연구기자재 등 연구환경이 전면적으로 파괴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외 과학기술교류도 중단된 상태였고, 기술혁신에 대한 인센티브가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중국 과학기술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려 이후의 발전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했지요. 그러나 최근 이러한 이중구조는 눈에 띄게 타파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각종 학술지의 논문게재 실적이나 과학기술력을 종합해 국가별 순위를 매기는 자료 등 객관적 수치로 본 중국의 과학기술 수준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과학기술논문에 대한 순위를 매길 때는 흔히 SCI, EI, ISTP 등 국제논문색인집에 수록된 논문을 기준으로 삼는데, 2002년 기준으로 중국은 총 774만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미국 일본 영국 독일에 이어 세계 5위에 올랐습니다. SCI에 발표된 논문만 보면 408만편으로 미국 영국 일본 독일 프랑스에 이어 6위입니다. EI 수록 논문 수는 232만편으로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 ISTP 통계에 의한 국제회의 논문은 134만편으로 미국 일본 독일 영국에 이어 세계 5위입니다.
과학기술력을 종합해서 살펴볼 수 있는 IMD(국제경영개발원) 경쟁력보고서 순위를 보면 2003년 기준으로 중국의 기술인프라는 세계 23위, 과학인프라는 12위, 생산성은 17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중국이 갖는 평균지수의 함정입니다. 연해지역과 내륙지역의 커다란 차이를 무시한 채 중국 전체를 하나의 잣대로 잴 경우 실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IMD 보고서도 2003년부터는 상하이(上海)를 포함한 저장(浙江)성을 분리해 따로 지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규모로 산정하는 부문을 제외한 지표, 예를 들면 생산성은 우리가 15위인데 반해 중국 저장성은 미국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근 중국의 기술력이 한국을 추월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향상되는 비결이랄까, 그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요.
“크게 세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미 보유하고 있는 과학기술자원의 측면입니다. 기초과학, 국방 및 우주분야의 시스템기술 그리고 막대한 인적자원이 그것으로, 이는 우리가 구조적으로 가지지 못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둘째는 해외직접투자(FDI)에 의한 첨단기술 및 경영노하우의 유입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중국이 첨단의 지식과 기술을 단시간 내에 소화 흡수할 수 있는 인적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울러 해외유학 인원의 귀국이 급증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이들의 귀국은 첨단기술네트워크, 자본네트워크, 인적네트워크가 유기적으로 가동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셋째는 정부정책입니다. 광대한 시장을 첨단기술과 바꾸겠다는 이른바 ‘시장환기술(市場換技術)’ 정책은 돈만 가져오는 해외투자는 사양하고 기술을 가져와야 시장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중국시장을 둘러싼 다국적기업들의 경쟁이 결과적으로 첨단기술을 앞다퉈 중국에 유입시키는 상황을 초래한 것이지요. 또한 중국내 각 성시(省市)마다 인재유치에 나서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질 정도로 과학기술 인력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가 이뤄지고 있는 것도 기술력 향상의 주요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인과 노벨상
우리가 그동안 중국과학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 중 하나가 기초과학에 강하다는 점이다. 중국뿐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는 대부분 기초과학은 앞서 있으나 산업화 기술에서 뒤진다는 게 상식처럼 돼있다. 과연 중국의 기초과학 수준은 어떨까.
-한 나라의 기초과학 수준을 잘 설명해주는 게 노벨상 수상실적입니다. 그동안 중국인이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실적이 있습니까.
“아직까지 중국 국적의 노벨상 수상자는 없습니다만, 중국인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는 화학의 양전닝(楊振寧), 물리학의 리정다오(李政道)와 리위안저(李遠哲) 등 3명이나 됩니다. 특기할 점은 일본의 중국 침략을 계기로 이른바 ‘과학으로 나라를 구한다(科學救國)’는 신념으로 해외의 중국인 과학자가 대거 귀국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항일전쟁 기간 중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에서는 피난 온 저명한 학자들(華羅康, 吳有訓, 周培源, 馬大猷, 王竹溪 등)이 역시 피난 온 대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 시난(西南)연합대학이 설립되었는데, 그때 대학생이던 양전닝, 리위안저가 바로 후일 노벨상을 수상한 것입니다. 최근 중국정부도 칭화대 내에 ‘노벨반’을 설치해 운영하는 등 노벨상 수상을 위한 중장기 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노벨상뿐 아니라 각종 과학기술 관련 국제대회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지 않았습니까.
“중국의 기초과학 수준은 각종 국제대회에서도 여실히 증명되고 있습니다. 세계 청소년들의 과학실력을 겨루는 국제과학올림피아드대회는 중국의 독무대나 다름없을 정도로 중국이 우승을 휩쓸었습니다. 이처럼 꾸준히 쌓아올린 기초과학의 잠재력이 앞으로 과학기술 도약의 발판으로 작용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기초과학 중에서도 특히 수학 물리학 화학 지구과학의 수준은 세계 정상급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체제와 기초과학
-중국의 기초과학이 세계적 수준이라고 하셨는데요.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어떤 분야를 꼽을 수 있을까요.
“우선 인공지능기술 및 시스템을 들 수 있는데, 이공계 명문 칭화대의 연구수준이 높습니다. 그리고 샤먼(厦門)대의 고체표면물리, 중국과학원 반도체연구소와 지린(吉林))대의 광전자 연구 수준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외에 응용물리학(중국과학원 상하이 기술물리연구소), 고체미세구조학(난징 국가고체미세구조연구소), 금속학(중국과학원 금속연구소), 음양학 환경물리학 생물물리학 바이러스학(중국과학원) 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기초과학 분야입니다.”
-중국의 기초과학이 일찍부터 발달한 데에는 어떤 배경이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회주의 체제 국가에선 대학이 분야별로 세분화되어 있습니다. 중국의 예를 보면 석유대학, 화공대학, 항천항공대학 등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따라서 구체적이고 세분화된 전공영역을 일생 동안 꾸준히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중국 기초과학의 강점은 사회주의 체제보다는 청조(淸朝)말 이후 문호개방에 따른 해외유학 및 1949년 중공 성립 이후 유학파의 대거 귀국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1921년 플랑크 상수(Planck 常數) 측정에 참가한 예치쑨(葉企遜), 1920년 콤프턴(Compton, 1927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효과의 실험 합작자 우유쉰(吳有訓), 1928년 미국에서 소행성을 발견한 장위저(張鈺哲), 1932년 미국에서 정부(正負)전자띠의 인위 복사(輻射)현상을 발견한 자오중야오(趙忠堯), 양자역학자인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와 합작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한 왕푸산(王福山), 아인슈타인의 제자인 양자역학자 저우페이위안(周培源), 유전학자 모건(Morgan)의 제자인 탄자정(談家禎), 퀴리 부인의 제자인 첸싼챵(錢三强), NASA의 J.P.L 소장을 역임한 공기동력학자 첸쉐썬(錢學森), 양자역학 창시자인 보어(Bohr)의 제자 장중환(張宗緩) 등이 해외유학을 통해 성장한 과학자들입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해외에서 학자들이 대거 귀국하게 되는데, 1952년까지 약 2000여명의 저명한 학자가 미국에서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중에는 핵물리 실험설비와 전자 기기를 자비로 구입하여 귀국한 자오중야오 같은 사람도 있었지요. 1952~57년에는 1000여명의 학자가 추가로 귀국해, 중국의 기초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이 시기에 귀국한 대표적인 학자가 나중에 중국 미사일의 대부로 불리게 된 첸쉐썬입니다. 해외의 과학자들이 귀국한 것과 더불어 중국 정부가 건국 후 약 2만명에 달하는 유학생을 국비로 소련에 파견한 것도 기초과학의 토대를 쌓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때의 유학생 중에서 세계적인 저온물리학자 관웨이탄(管惟潭)과 공제론(控制論)의 대가로 나중에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주임을 역임한 쑹젠(宋健) 등이 배출되었습니다.”
-중국 학생들의 수학실력이 높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만, 중국인이 태생적으로 과학분야에 소질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과학에 소질도 있고 관심도 많은 것 같아요. 한 가지 예를 들어보지요. 칭화대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한 한 시골 출신의 중국학생이 처음으로 컴퓨터 자판기를 만져 보았다고 합니다. 이 학생은 컴퓨터를 잘 다루는 한국 유학생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1학년 말이 되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타고난 소질이 돋보였다는 것이지요. 요즘 중국 청소년들에게 장래 희망하는 직업을 물어보면 1위가 바로 과학자입니다.”
-중국의 초중고 학교교육이나 입시 등에서 기초과학분야와 관련된 어떤 특징적인 측면이 있습니까.
“전반적으로 초중고의 실험실습 기자재는 연해의 도시지역을 제외하고는 아주 낙후한 형편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이론에 치중하게 되는데, 그 결과 수학적 사고가 발달하게 된다는 겁니다. 관심있게 보아야 할 점은 오히려 대학입학 후 어떻게 공부하느냐는 점입니다. 대학생들의 공부량이 우리와 비교해볼 때 월등하게 많아요. 중국의 대학 바깥에는 사이언스 파크가 있고, 한국의 대학 바깥에는 술집과 당구장이 있더라는 비판을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 과학기술의 역사적인 전통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종이의 발명이나 인쇄술처럼 널리 알려진 것말고도 과거의 중국 과학기술력을 말해주는 역사적 사례로는 어떤 것이 있나요.
“17세기 유럽에서 탄생한 근대과학은 중국의 과학, 기술, 의학 발전을 토대로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항계수의 배열, 지리식물학과 토양학의 창시, 종두의 발견, 나침반 등이 모두 중국의 작품입니다. 이밖에 태양흑점(기원전 4세기), 혈액순환, 내분비학(기원전 2세기), 십진법(기원전 14세기)도 중국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국방·우주분야의 눈부신 발전
중국 과학기술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 해도 국방·우주분야다. 일찍이 핵무기를 만들었고, 최근엔 유인우주선까지 쏘아 올리는 것을 보면 이 분야는 확실히 세계적 수준에 도달해 있다. 중국은 어떻게 핵강국·우주강국이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인물들이 활약했을까.
-중국은 1956년에 이미 핵무기 개발을 결정했고, 현재는 미국 러시아에 이은 세계 3위의 핵강대국이 되었습니다. 현재 중국 핵무기 혹은 핵과학의 현황과 수준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습니까.
“중국의 핵기술은 2단계의 발전과정을 거쳤습니다. 1단계는 1955~78년으로 원자탄과 수소탄, 잠수함 핵동력장치의 개발 등 국방부문에 주력했던 시기이고, 2단계는 1979년부터 현재까지로 민수(民需)전환을 통한 국방과 민수의 공동 발전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1964년 10월 최초의 원폭실험이 신장(新疆)위그루족 자치구 뤄부보(羅布泊) 지역에서 성공리에 끝났는데 핵무기를 제조할 때, 원료는 우라늄235나 플루토늄239를 사용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라늄235를 택할 경우 비용이 더 많이 들고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중국이 개발한 핵무기는 플루토늄형일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중국이 당시 핵폭발에 사용한 것은 우라늄235였습니다.
이런 사실은 군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원폭과 수폭실험의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1966년 12월 수폭실험 직후 베이징방송은 ‘미국이 7년4개월, 소련이 4년 걸린 원폭실험과 수폭실험을 중국은 2년2개월 만에 성공했다’고 자랑스럽게 보도한 바 있습니다. 둘째는 원자력 잠수함의 건조를 용이하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원자력 잠수함에는 작고 가벼운 농축우라늄 원자로가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중국은 1969년에 벌써 원자력 잠수함 건조에 나섰습니다. 최근에는 전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원전건설에 치중하고 있는데, 2020년까지 50여개의 원전을 건설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른 분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핵무기 개발이 앞서갈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요.
“중국이 핵무기 개발을 결정한 것은 1956년입니다. 당시 중국은 육해공군의 무기를 전면적으로 현대화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막대한 자금과 자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중국의 경제적 능력으로는 어려웠습니다. 이 같은 형편을 잘 알고 있던 마오쩌둥(毛澤東)이 정치적, 전략적 이점을 최대로 살릴 수 있는 핵무기 개발에 역점을 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1955년에 설립된 제2기계공업부 주관으로 부속연구소(原子能究所)에 전국의 전문가들을 소집했습니다. 초창기 참가인원이 10만여명으로 추산될 정도로 활기를 띠었는데, 핵탄제조에는 덩자셴(鄧稼先), 궈융화이(郭永懷) 등 미국유학생 50여명과 딩다리(丁大利)를 비롯한 소련유학생 등 500여명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처럼 단기간 내 대대적으로 과학기술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체제와 자원의 집중이 성공의 큰 요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핵공격을 할 수 있는 미사일 분야에서도 강세를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중국의 미사일 개발은 중·소 대립이 노골화되었던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중국은 미국에 대한 직접 공격력을 강화하기 위해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개발에도 전력을 다했습니다. 소련의 원조나 기술지원을 받지 않고 자체 기술로 ICBM 개발에 착수한 것이지요. 이때 로켓개발을 주도한 핵심인물이 1940년대 미국 로켓개발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던 첸쉐썬 박사입니다.
유도탄의 연구 및 제조는 NASA에서 귀국한 첸쉐썬을 비롯한 미국유학파와 쑨자둥(孫家棟), 쑹젠 등 소련유학파가 주축이 되어 1958년 10월에 설립된 국방부 제5연구원에서 전담하게 됩니다. 유도탄 발사기지는 1958년 간쑤(甘肅)성 쥬취안(酒泉)지역에 건립했고요.
ICBM의 전단계라 할 중거리 탄도미사일(MRBM)은 1964년 시험발사를 시작으로 1965년 최초의 지대공 미사일인 훙치(紅旗)1호를 개발한 후, 이어 2호와 3호가 잇달아 발사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룩합니다. 미 정찰기 U-2기를 격추시킨 것이 바로 훙치 미사일이었습니다.
위성발사 능력이 향상됨에 따라 1980년 5월에는 사거리 1만2800km의 ICBM이 개발됐고, 공대함 미사일인 하이잉(海鷹) 잉지(鷹擊) 등 전술미사일에 이어 1982년 10월에는 잠수함의 미사일 수중발사에 성공하는 등 중국의 핵전력은 꾸준히 강화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주과학의 영웅, 첸쉐썬
-인공위성 발사기술도 발달해 중국은 현재 다른 나라의 위성을 대신 쏘아 올려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주과학 분야의 기술수준은 어떻습니까.
“미사일기술과 위성기술은 기본적으로 같은 계열입니다. 위성은 쏘아서 올려놓는 데 반해 미사일은 쏘았다가 떨어지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따라서 중국의 우주기술은 미사일 개발이라는 군사적 목적과 맞물리면서 그 발전속도가 빨라졌습니다. 1957년 소련이 스푸트니크1호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하자 이에 자극받은 마오쩌둥은 그해 5월 인공위성 개발을 강력히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3년 후인 1960년 2월19일에 중국 최초의 실험용 로켓 T-7M을 쏘아 올리게 됩니다. 특히 중소대립이 노골화되면서 1960년대 말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대규모의 운반로켓 및 위성을 개발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국무원내에 설치함으로써 중국의 우주기술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됩니다.
당시 중국정부는 과학기술자들을 중국운반로켓연구소에 집결시켜 연구에 박차를 가한 결과 1970년 직경 2.25m, 중량 300kg으로 저고도에 쏘아 올린 장정(長征)1호를 선보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1970년 4월24일, 쥬취안 우주기지를 떠난 173kg의 둥팡훙(東方紅)1호가 마오쩌둥 사상을 찬양하는 ‘둥팡훙 멜로디’를 송신하여 전세계를 놀라게 한 것이지요. 이 사건은, 말하자면 중국의 우주시대를 알리는 서막이었던 셈입니다.
1971년에 두 번째 위성을 발사한 후 문화혁명기의 혼란으로 4년 이상의 공백기를 거쳐야 했죠. 그래서 1975년 12월에야 제3호 위성을 발사하게 됐습니다. 이때 펑바오(風暴)1호라는 2단식 신형 로켓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미국의 ICBM, 타이탄II와 거의 같은 크기였습니다.
1975년 11월에 발사된 네번째 위성은 중국 최초로 위성을 회수하는 데 성공했고, 1981년 9월, 아홉번째로 발사된 위성은 하나의 운반로켓에 3개의 위성을 싣고 가서 궤도에 진입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중국이 서로 다른 목적과 구조, 궤도를 가진 3개의 위성을 충돌없이 발사하는 정교한 기술을 세계에서 네번째로 보유하게 됐음을 의미합니다. 1984년 4월에는 정지궤도위성을 쏘아 올렸는데 이때 사용된 로켓이 장정3호로 이전의 로켓과는 다른 3단식이었어요. 이 로켓은 지상 3만6000km 궤도에 진입시킬 수 있는 강력한 것으로 중국 우주기술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어서 1986년 2월에는 방송통신용 위성을, 1988년 9월에는 최초의 기상위성을 발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중국은 위성제작과 발사기술을 자체적으로 개발, 보유한 전세계 5개국 중 하나이고, 위성회수기술을 보유한 3개국 중 하나입니다. 다연장 위성로켓 발사기술과 자체 개발한 증속로켓을 이용하여 정지궤도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등 로켓기술에서 세계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몇 번의 위성발사 실패로 한계에 부닥치기도 했습니다만, 1996년 이후 계속적으로 발사에 성공했습니다. 이같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외국에 대해서 저렴한 비용으로 위성발사를 해주는 이른바 우주세일즈에도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중국은 달 탐사위성의 이름을 짓는 등 탐사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워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달 탐사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지난해 10월 발사된 선저우5호 유인우주선과 관련해 2008년 올림픽개최지 선정에서 탈락될 경우에 대비해 발사계획을 앞당겼다는 이야기가 한때 나돈 바 있습니다. 그만큼 정치적인 의미도 크다고 봐야겠지요. 끊임없이 국민적 이벤트를 창출해야 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달착륙처럼 좋은 소재는 없을 겁니다. 일부 서방국가에서는 중국의 연해지역과 내륙지역의 격차가 갈수록 커져가는데 꼭 이런 곳에 예산을 투입해야 하느냐는 비판적인 목소리도 있습니다만, 선저우5호의 성공이 중국 국민들의 자긍심을 높여주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술적 측면에서 보면 우주기술 자체가 시스템기술이기 때문에 관련분야의 기술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의 미사일 개발이나 인공위성 발사에 얽힌 얘기를 할 때 자주 등장하는 첸쉐썬은 어떤 사람인가요.
“2003년 한해동안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생일을 포함해 3번이나 직접 첸쉐썬의 자택을 찾아갔을 정도로 국민적 추앙을 받는 과학자입니다. 그는 1950년대에 잘나가던 미국을 떠나 낙후한 조국으로 기꺼이 돌아와 위성 및 미사일분야의 연구개발을 주도했습니다. 이 점을 모든 중국인이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 미국이 강력히 붙잡았지만, 그동안 이루어놓은 부와 명성을 과감히 내던지고 귀국길에 오른 전설적인 인물이라고나 할까요.”
주목받는 생명공학 연구
수많은 과학기술 분야 가운데 우리가 중국과 관련해 특히 눈여겨 볼 것은 생명공학과 정보통신일 듯하다. 가령 생명공학적 연구 성과가 농업관련 프로젝트와 결합되면 그 파장이 당장 우리에게 밀어닥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정보통신은 우리의 주력산업이기도 하고 향후 중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일 분야여서 중국의 기술력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공학 분야에서도 중국의 저력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 분야의 연구를 중국정부가 적극 지원하고 있는 데다 연구내용에 대한 윤리적 제약이 다른 나라에 비해 크지 않아서 급속한 진전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중국의 생명공학의 전반적인 연구 실태는 어떻습니까.
“중국은 다양한 생물자원 이외에도 바이오 분야의 연구 역사가 매우 깊고 전통기술도 다양합니다. 중국은 첨단 생명공학 기술개발 중에서도 의약 및 농업 관련 프로젝트가 5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활발합니다. 의약분야는 유전공학 단백질 약물, 반응핵산 약물, 유전공학 백신, 유전자 치료, 복제항체 진단시약 및 치료제 연구가 활발하고, 농업분야는 형질전환 식물 및 동물, 배태공정, 가축용 형질전환 백신연구가 핵심입니다.
중국정부의 생명공학 중시정책은 중국의 발전과정과도 관계가 깊습니다. 즉 중국은 입는 것과 먹는 것이 기본적으로 해결된 원바오(溫飽)단계를 거쳐 현재 샤오캉(小康)단계 초기에 와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 샤오캉은 쉽게 말해 삶의 질을 높이는 단계거든요. 그래서 생명공학, 그 중에서도 의학과 농업관련 분야는 샤오캉을 실현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정책적 수단이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최근 국제적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복제기술의 현황은 어떻습니까.
“동물의 경우, 소 양 돼지 닭 등 가축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호동물인 판다를 대상으로 베이징동물연구소, 시베이(西北)농림과기대, 산둥(山東)중의약대 등에서 복제 및 형질전환 연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2001년에 시안(西安)동물원과 중국복제동물기지가 공동으로 ‘최초 복제양 전시회’를 열었는데 당시 전시한 배태복제 산양은 시베이농림과기대 장융교수가 1995년에 최초로 복제기술을 이용해 탄생시킨 앙골라 산양 45마리 중 3마리였습니다. 2002년 1월에는 중국과학원이 수소의 체세포 일부를 떼내 중국 최초의 복제소 ‘커커’를 생산한 바 있습니다. 게놈지도에도 집중하고 있는데 중국과학자들이 인간 게놈 1%서열 기본지도를 완성하고, 벼 게놈 정밀지도를 완성한 후, 세 번째의 중대한 게놈연구 성과인 집누에 게놈지도를 2003년 11월에 완성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벼에 대한 연구는 중국이 세계 최고수준이라고 하더군요. 세계 최초로 벼 게놈 지도를 완성해 세상을 놀라게 한 적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이미 옥수수와 보리 등의 유전자 비밀을 해독하는 수준에 와있다고도 하는데요. 농업분야의 생명공학 연구가 결실을 보면 그 파장이 간단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국은 아직까지 1차산업의 비중이 큰 세계적인 농업대국입니다. 13억 인구를 배불리 먹이는 일이 국가대사일 만큼 농업에 관한 정책을 만들고 농업 관련 과학기술 연구를 촉진하는 일을 중대한 국가발전전략으로 삼고 있습니다. 1996년 말부터 중국에서 연구 중인 형질전환 식물은 슈퍼잡교벼, 항충목화, 보령목화, 저장성이 강한 토마토, 키 작은 나팔꽃, 항바이러스 고추, 항바이러스 토마토 등입니다.
중국의 생명공학 연구가 가져올 파장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생물제품의 안전성 측면과 한국시장에 대한 중국의 무차별 공격 가능성입니다. 이미 산둥성에는 한국시장을 겨냥한 대규모 농업단지들이 집중적으로 건설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설들이 생명공학 연구의 성과를 현실화하는 데 활용될 경우 그 물량 공세는 상상 이상으로 거세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한국 맹추격하는 IT분야
-삼성전자가 독주하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도 중국의 추격이 심상치 않다고 하더군요. 삼성이 0.13미크론 공정을 개발한 것이 지난 2000년인데, 중국의 반도체기업 SMIC가 지난해에 이 기술을 개발했다고 하니까 격차가 3년으로 좁혀진 것 아닙니까. 중국의 IT기술 개발전략 및 한국과의 격차 해소에 대한 전망을 어떻게 보십니까.
“사실 중국의 기술경쟁력이 급부상하고 있어 우리로서는 우려되는 측면이 많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위협받고 있는 곳이 바로 IT분야입니다. 이게 우리의 주력분야 아닙니까. 중국의 전략은 한마디로 앞서 언급한 ‘시장환기술’, 즉 광대한 시장과 첨단기술을 바꾸겠다는 전략에 의한 해외 첨단기술의 흡수와, 원천기술 보유기업과의 직거래그리고 기술표준화를 통한 중국시장 지키기로 요약됩니다.
한국의 주력품인 단말기의 경우, 빠른 모델 체인지와 부가기능에 강점을 갖고 있습니다만, 원천기술의 상당부분은 외국에 있습니다. 그런데 원천기술이 없는 제품은 중국시장에서 한계에 부닥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국시장 자체가 다국적기업과 급성장하고 있는 로컬기업의 전쟁터가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죠.
이동통신의 CDMA 단말기는 현재 한국과 2~3년의 격차가 있으나 2006년에 동일수준에 다다를 것으로 예측됐고, GSM 단말기와 시스템은 한중 기술격차가 6개월에 불과합니다. 이 부분도 역시 2006년에는 같은 수준이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반도체 D램의 경우 현재의 격차는 6~8년이지만 2006년이 되면 그 격차가 2~3년으로 좁혀질 전망입니다. TFT-LCD(초박막 액정표시장치) 기술은 3~4년의 격차가 있으나 2006년에는 6개월 내지 1년으로 바짝 추격해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몇 가지만 살펴봐도 불과 2년 후면 주요 IT분야의 한중간 기술수준이 거의 같아지거나 아니면 중국이 바짝 추격하는 것으로 예측되고 있어요.”
-중국의 실리콘 밸리로 알려진 곳이 베이징의 중관춘(中關村)인데요. 최근엔 이곳 말고도 정보통신 관련산업의 기지가 많이 늘어나 연구와 개발, 생산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중국 IT산업의 주요기지들은 어떻게 분포되어 있습니까.
“중국 내의 발전축은 베이징-톈진(天津)을 중심으로 하는 발해만 지역, 상하이-저장성-장쑤(江蘇)성 중심의 창장(長江)지역, 선전(深)-광저우(廣州) 중심의 주장(珠江)지역 그리고 청두(成都)-충칭(重慶)-시안(西安)의 서부트라이앵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베이징지역은 IT 연구개발, 창장지역은 IT제조, 주장지역은 IT부품으로 대략 특징지울 수 있는데, 최근 들어 새로운 지역클러스터가 속속 등장하고 있어요.
개혁개방 초기에는 경제특구나 연해개방구를 통해 외자를 유입했고, 해외기술과 경영노하우는 경제기술개발구, 고신기술(高新技術)산업개발구 등을 통해 받아들였습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클러스터가 더욱 다양화되고 있는데 각 대학에 대학과기원(大學科技園)이 조성되고 있는가 하면, 소프트웨어단지(軟件園)와 광기술 개발을 위해 광밸리(光谷)도 구축되고 있습니다.”
속속 귀국하는 해외두뇌들
중국의 과학기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데에는 풍부한 인적 자원과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인력정책이 주효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 ‘과학기술로 국가를 부흥시킨다’는 캐치 프레이즈를 내건 중국정부의 각종 정책도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홍성범 박사는 고려대에서 ‘한국의 D램 반도체 및 TDX 교환기 기술혁신전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과학기술정책학 박사인 셈이다. 전문가의 눈에 비친 중국정부의 과학기술정책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과학기술 강국 중국을 상대로 우리가 취해야 할 대응전략은 무엇일까.
-중국의 과학기술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역시 막대한 규모의 과학기술 인적 자원이 아닌가 합니다. 과학기술 인력의 규모와 질적인 수준이 어느 정도입니까.
“2002년 기준으로 과학기술 활동인구는 322만명이고, 이 가운데 과학자와 엔지니어는 217만명입니다. 물론 생산인력은 제외한 숫자죠. 이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예를 들어 중국에 진출한 한국 IT관련기업 현지공장의 생산성이 같은 제품을 생산하는 한국기업보다 높다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사람은 많지만 쓸 만한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기업인도 있습니다. 반면 칭화대 출신의 경력자 등 톱클래스의 인력을 뽑은 중국내 한국기업의 한 연구소장은 아주 만족해하고 있어요.
중국정부 관계자들은 아직 첨단기술인력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결국 양적으로는 많아 보이지만 첨단기술을 습득한 우수한 과학기술 인력은 매우 부족한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중국정부가 해외의 우수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속사정 때문입니다.”
-첨단기술 분야에서의 해외유학 열기도 매우 높다고 하는데요. 해외, 특히 미국에서 중국 과학기술인력의 규모나 활약상은 어떻습니까.
“미국 과학재단(NSF)이 최근 내놓은 ‘2002 과학기술지표’에 따르면 미국 이공계 대학원에 재학중인 중국인은 1990년부터 급증하기 시작해 2002년에는 5만여 명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또 2000년 미국 대학의 신규 임용교수 가운데 아시아계의 60%가 중국인이었고, 실리콘 밸리에도 중국계 기술인력이 무려 1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최근 모교인 MIT를 방문했던 대덕단지의 모 출연연구소 소장은 실험실이 온통 중국인으로 뒤덮여 있어 경악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들 해외유학 인력이 중국으로 돌아와 연구소나 산업현장에 복귀하는 이른바 해귀(海歸) 현상도 중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커다란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해주시죠.
“2002년도에 귀국한 유학생이 약 1만8000명으로 2년 전의 두배 수준이었습니다. 이들 유학파가 귀국 후 창업한 기업이 베이징에만 3300여 개에 달합니다. 베이징 중관춘의 경우, 작년 한 해에만 1000명 이상이 귀국하여 IT분야에 복귀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현재 중관춘에 입주한 첨단과학기술 기업이 400여 개인데, 해외에서 복귀한 인력들이 기술과 자본 및 해외 인적네트워크를 활용해 첨단기술 분야의 전초병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해외유학을 한 고급두뇌 가운데는 장쩌민 전 주석의 아들도 있다고 합니다만, 대표적인 사람들의 면면을 소개해주시죠.
“장쩌민 전 주석의 아들인 장헝(江綿恒)은 미국 드렉셀대 공학박사(초전도)로 HP에 근무한 바 있습니다. 현재 중국과학원 부원장인데, 차이나넷컴 등10개 회사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IT업계의 실세로 꼽힙니다. 장차오양(張朝陽)은 미MIT 물리학박사로 중국 4대 포털사이트인 sohu.com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류톈싱은 미 보스턴대 물리학박사로 전자상거래 업체(亞商在線)를 운영하고 있으며, 리예는 영국 보다폰 수석엔지니어 겸 부사장으로 CDMA 기술과 관련된 25건의 국제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며 연우(連宇)통신기술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연우는 중국의 새로운 CDMA방식인 LAS-CDMA를 개발한 회사로 유명합니다.”
-해외 첨단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각 성과 시별로 치열한 유치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을 내걸고 유치에 나서고 있나요.
“베이징의 사례를 말씀드리지요. 일반 외지인이 베이징에 거주할 수 있는 호구를 취득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만, 유치인력에 대해서는 베이징 거주증(工作寄住證)을 발급해주고 3년 후에는 정식으로 베이징 호구를 획득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얼른 듣기에 베이징 호구를 준다는 것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겠지만 중국사회에서는 상당한 특혜라고 할 수 있어요. 다음으로는 스톡옵션 등 주식으로 받은 인센티브에 대해 소득세를 면제해줍니다. 또 이들이 귀국해서 기업을 설립하면 3년 동안 법인세를 면제해주고, 다음 3년간은 50%만 징수합니다.
다국적기업의 연구소 설립 붐
이외에도 기술자문 등으로 벌어들인 수입에 대해서는 영업세를 면제해주고, 사업을 해서 이익이 발생하면 전액 해외송금을 허용해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해외 귀국인력의 창업을 지원하기 위해 중관춘 내에 해외유학생 부화원(孵化園)을 설치해 인큐베이팅 단계의 지원을 해주는 것은 물론, 인큐베이터 졸업 후에도 ‘유학생 발전원’에서 지속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철저히 배려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첨단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한 데에는 다국적기업들이 중국에 대한 투자를 본격화하면서 수많은 연구개발 (R&D)센터를 설립한 것도 영향이 컸다고 합니다. 다국적기업의 중국내 연구개발투자 중 대표적인 사례로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1990년대 후반부터 다국적기업들이 앞다퉈 중국에 R&D센터를 설립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중국시장에서 중국소비자에게 맞는 중국향(向)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부터 마케팅까지 일관공정을 갖춰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기업별로 우선순위는 약간씩 다르겠지만 이밖에도 영업지원, 인력확보, 글로벌R&D전략 등도 고려된 것 같습니다.
현재 에릭슨 통신SW센터, 후지쓰 연구개발센터, IBM(중국) 연구센터, 인텔 중국실험실,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원, 노키아 중국연구센터, 베이징삼성통신연구소, 루슨트 벨 실험실, P&G 중국연구센터, GM 자동차기술센터, 델파이 중국연구소 등 포춘지 500대 기업 중 120여개 기업이 중국에 R&D센터를 두고 있어요. 나아가 최근에는 복수의 연구개발센터를 둔 기업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예컨대 모토롤러의 경우 중국 전역에 19개의 연구개발센터와 1600명의 연구원을 두고 있을 정도입니다.”
-다국적기업의 대거 진출로 인해 중국의 우수한 과학인재들이 박봉의 연구소를 떠나는 바람에 중국의 과학연구소들이 빈껍데기로 전락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고 합니다. 또 이공계 최고명문 칭화대는 미국유학을 위한 예비학교로 전락했다는 말도 나오고 있고요. 해외유학 열기나 다국적기업의 중국진출이 초래한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아야겠습니까.
“그런 우려의 목소리가 있습니다만, 중국의 기술경쟁력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꼭 부작용이라고만 할 수는 없어요. 한 가지 일화를 말씀드리지요. 개혁개방 이후 58만여 명의 학생이 공부하러 해외로 나갔습니다. 초기에는 이들이 거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두뇌유출을 걱정한 관계장관이 덩샤오핑에게 해외유학을 통제하자고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중국인이고,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며 한마디로 일축했다는 겁니다. 덩샤오핑의 예언대로 1990년 이후 이들 해외유학 인력의 귀국이 크게 늘고 있습니다. 현재 18만명 정도가 귀국했는데 중국정부는 앞으로 20만명을 더 유치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중국은 아울러 국비유학생의 숫자도 늘려나가고 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중국 하이테크 분야의 중요한 자원입니다.
또한 다국적기업이 중국인 연구원을 고용하는 주목적이 중국향 제품의 개발에 있는 만큼 원천핵심기술을 제외한 많은 기술을 중국인과 공유할 수밖에 없고, 기술은 인간에 체화되기 때문에 결국 중국으로 기술이 이전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다국적기업들은 중국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높은 수준의 기술을 중국인 연구자들에게 줄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칭화대의 학습 분위기
-홍 박사께서 근무하는 한중과학기술협력센터가 칭화대에 자리잡고 있으니 이 학교의 분위기를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칭화대 하면 이공계 최고명문 아닙니까. 칭화대의 교수나 학생들의 연구분위기, 학습태도 그리고 대학측의 발전의지 같은 것을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최근 대학평가에 의하면 칭화대가 9년 연속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다소 과장된 부분도 있을 겁니다. 젊은 해외파 교수들이 아직은 주도권을 갖지 못한 과도기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의 수준은 매우 높습니다. 중국 대학입시는 지역별 할당제인데, 베이징에 상대적으로 많이 할당됩니다. 그러다 보니 지방의 성(省)에 따라서는 칭화대의 어떤 학과에 단 1명도 합격생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인구비례로 볼 때 중국 전역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바늘구멍을 뚫고 칭화대라는 명문대에 들어오게 되는 셈입니다.
이처럼 자질이 우수한 데다 기본적으로 학습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1교시 수업이 아침 8시에 시작되고 저녁에도 강의가 이어집니다. 교수 사정에 따라서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보충강의가 있을 정도예요.
한 가지 부연한다면 인재확보를 노리는 다국적기업들이 무상으로 장학금을 준다든지 건물을 지원해주는 등 앞다퉈 거액을 쏟아 붓는 분위기여서 칭화대와의 접촉이나 협력사업이 상당히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디지털TV 같은 정말 꼭 협력이 필요한 분야가 아니면 구태여 칭화대와의 협력에 매달릴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중국대학은 분야별로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칭화대가 아니더라도 톱 클래스의 학과를 보유한 대학이 많기 때문입니다.”
‘기술적 뛰어넘기’ 전략
-중국의 과학기술 경쟁력을 급속히 향상시키기 위한 기본전략은 무엇입니까.
“중국의 첨단기술전략은 한마디로 ‘기술적 뛰어넘기(leapfrogging)’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선통신이 어느 정도 발달한 후 무선통신(mobile)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유선통신을 뛰어넘어 무선통신 위주로 나아가고 있어요. 그 결과 지난해 이미 무선전화 보급률이 유선전화를 앞질렀습니다. VCR 단계를 뛰어넘어 DVD가 대중화되고 있는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동통신에서도 중점을 두는 분야는 3세대 이후 기술입니다.
그런데 중국정부의 이 같은 전략 이전에 과학에 대한 중국인의 앞서가는 마인드가 과학기술 경쟁력 향상의 바탕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중국인은 과학기술이라는 용어를 정말 좋아합니다. 모형항공기나 레고 조립제품을 판매하는 조그만 가게도 간판은 ‘과학기술유한공사’로 끝납니다. 약이나 화장품 관련 TV광고를 보고 있으면 한 편의 연구리포트를 읽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왜 이 약이 좋은지 과학적으로 선전하는데 대개는 유명한 해외연구자가 나와 설명합니다. 그만큼 과학기술에 대한 일반 국민의 마인드가 높게 형성돼 있다고 봐야겠지요.”
-우리나라는 이공계 살리기가 국가적 과제가 돼버렸습니다만, 중국은 최고지도부의 성원 상당수가 이공계 출신이어서 우리와는 정반대인 것 같습니다. 이공계 출신이 국가경영을 책임지는 이런 현상은 어떤 배경에서 나타난 것입니까.
“이른바 제3세대 지도부의 빅4인 장쩌민(상하이 교통대학), 리펑(李鵬, 모스크바 동력학원), 주룽지(朱鎔基, 칭화대), 리루이환(李瑞環, 베이징공업학원) 이 모두 이공계 출신입니다. 2002년 11월 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새롭게 등장한 제4세대 지도부의 핵심인 정치국 상무위원 9명 전원도 이공계 출신입니다. 즉 후진타오(胡錦濤, 칭화대), 원자바오(溫家寶, 베이징 지질학원), 쩡칭훙(曾慶紅, 베이징공업학원), 우방궈(吳邦國, 칭화대), 황쥐(黃菊, 칭화대), 자칭린(賈慶林, 허베이공학원), 리창춘(李長春, 하얼빈공대), 뤄간(羅幹, 독일 프라이버그 광물야금대학), 우관정(吳官正, 칭화대)이 그들입니다.
장쩌민 전 주석은 한국 방문시 반도체 실험실을 시찰하면서 높은 식견을 보여 주위를 깜짝 놀라게 한 적도 있습니다. 이공계 출신 국가지도자들은 그만큼 과학적 사고방식과 관련지식을 가졌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될 점은 이들이 이공계 출신이기 때문에 국가지도자가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보다는 중국 특유의 인사시스템의 역할이 더 크다고 봐야 합니다. 가능성 있는 인물을 일찍이 발굴해 혹독하게 장기간 훈련시키는 중국 특유의 인사시스템 속에서 실용적 사고를 가진 인물들이 더욱 적응력이 높았던 게 아닌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학생의 벤처창업 프로젝트
-중국의 대학 및 연구기관이 기업을 설립하여 운영하는 현상은 한국에도 많이 소개되었습니다만, 이 같은 정책이 실제로 과학기술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십니까.
“칭화대는 칭화퉁팡(淸華同方) 그룹을 비롯한 16개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데, 칭화퉁팡그룹은 PC 전자출판 정밀화학 등의 분야에서 연간 1조원의 매출액을 올리고, 인력이 5000명에 이릅니다. 베이징대는 소프트웨어 정보통신 신소재 분야에서 17개 기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중 베이다팡정(北大方正) 그룹은 연간매출액 1조6000억원에 고용인력이 6000명에 달합니다. 중국과학원도 유명한 롄샹(聯想) 그룹 외에 20개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데, 롄샹 그룹은 매출액 4조5000억원, 인력 1만6000명의 엄청난 규모입니다.
이처럼 대학이나 연구기관이 운영하는 기업을 교판기업(校辦企業)이라고 부르는데요. 이런 기업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과학기술체제의 개혁과정에서 기관에 대한 국가의 예산지원이 축소된 데 따른 불가피한 생존전략이라는 것입니다. 즉, 국가가 예산을 100% 지원하던 기존의 체제를 개혁해 예산의 3분의 1만 지원하고 나머지는 알아서 자구책을 마련하라는 조치입니다. 돈벌기 위해 기업을 설립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대학들도 연구개발 성과를 상업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같은 개혁조치는 국유 및 공공부분의 축소라는 정책 패러다임의 큰틀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에요. 또한 연구개발 성과의 상업화라는 정책 패러다임의 중요한 도구가 된다는 점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같은 정책이 연구개발 의욕을 크게 진작시키고 과학기술의 상업화를 촉진시킨 것으로 평가됩니다. 최근에는 각 대학들이 기업경영에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전문경영인에게 전담시키고 대신 지주회사를 통해 간접적인 연계를 가지는 추세입니다. 이런 시스템을 통해 이공계 학부생들은 실제 관련기업에 가서 프로젝트를 수행하여 학점을 따거나 논문을 쓸 수 있습니다. 또 교수들은 연구결과를 제품화하게 되는 것이고요. 한마디로 실사구시의 과학관이 중요한 토대로 작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직접적인 기업체 운영 말고도 대학교수나 학생의 벤처창업을 지원 장려하는 제도가 있다고 하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예를 들어 대학생이 벤처기업을 창업하면 2년간 휴학을 허용합니다. 연구개발 성과의 상업화를 장려하기 위해 대학생 창업스쿨을 운영하는가하면, 유망한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학교가 창업을 적극 지원하고 출자하는 ‘지식부광(知識富鑛)’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이 지식부광 프로젝트에서는 교수나 학생들로부터 정기적으로 벤처창업과 관련한 제안서를 받아 타당성을 심의합니다. 은행과 대학이 공동으로 창업을 지원하는 ‘은교(銀校)합작’ 프로그램도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중국은 국토가 넓고 지역별 여건이 제각각 아닙니까. 각 지역별로 특화된 과학기술 육성전략이 있을 것 같은데요.
“중국은 중앙정부에 과학기술부가 있고, 각 성에는 과기청이 있습니다. 지역별 과학기술발전계획은 성 차원의 과기청에서 지역특성에 맞게 추진하지만 대부분은 국가과학기술프로그램의 큰 틀에서 이뤄집니다. 지역별로 강점분야가 있는데요. 바이오 분야는 상하이가 중심입니다만, 그중에서도 의약은 쓰촨(四川)성의 청두지역이 강합니다. 생물자원 측면에서는 윈난성과 구이저우(貴州)성이 앞서고 있고, 최근에는 장백산(백두산)지역도 부상하고 있습니다. 창춘(長春)은 광학기술이 강한데, 과거 국방기술 차원에서 육성되었던 전통이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시안(西安)은 소프트웨어 인력이 우수하고 다롄(大連)지역은 향후 중용한 전략분야인 연료전지 쪽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과학기술에는 상호 경쟁적인 측면과 보완적인 측면이 공존하리라 생각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경쟁 혹은 보완관계라고 보시는지요.
“경쟁적 측면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근접한 생산기술, 세계 수준의 IT솔루션, CDMA 상용화기술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런 분야에서 우리의 우위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관건이라고 봅니다. 반면에 바이오, 나노 등 새로운 분야나 기술융합분야 등에서는 중국의 기초과학과 한국의 생산기술이 결합되는 윈윈전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중국에 대한 심층적인 정보와 협력과제 수행시 중국측 연구자에 대한 명확한 연구목표와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필수조건이라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중국 연구자들이 상업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경쟁과 보완의 한중 관계
-한중간 과학기술분야에서 협력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으로는 어떤 것을 들 수 있습니까.
“협력 프로그램은 크게 5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주로 정부간 정책의 틀을 결정하는 기술외교형 프로그램, 인력과 정보 등을 교환하는 자원교류 프로그램, 현지에 연구개발센터 같은 거점을 설립하는 현지거점구축 프로그램, 상호 공동주제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공동연구형 프로그램, 그리고 기술조사단 상호파견 같은 기반조성형 프로그램이 그것이지요. 한중수교 이후 과학기술부를 중심으로 다양한 형태의 협력 프로그램을 추진해 왔는데 새로운 환경변화에 맞는 프로그램의 발굴과 기존 프로그램의 생산성 제고가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과학기술력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현명할까요.
“첫째, 중국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이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내부역량의 강화가 관건입니다. 둘째, 중국이 맹렬히 추격중인 분야는 부품 소재 기술을 집중개발하고 코스트 다운을 위한 공정기술을 개발하는 등 차별화 전략이 필요할 것입니다. 셋째, 서로의 미래형 산업구조 형성을 지원하거나, 중국의 기술을 이용하여 공동으로 선진국을 추격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요. 이밖에도 급변하는 환경변화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베이징올림픽 유치 등으로 인해 거시적인 정책환경이 변하고 있고, 여기에 맞춰 국유기업 개혁 등 내부시스템의 정비와 효율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우리의 경험과 노하우를 제공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과학기술 분야에 서 중국의 위상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기술표준 확립을 위해 중국과의 전략적 제휴도 중시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궁극적으로는 중국과 전략적 협력파트너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겠지요.”
세계 최대 관광대국으로 도약중
바야흐로 중국이 관광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현재 세계 5위, 2020년에 세계 1위의 관광객 유치국가가 될 전망이다. 중국인의 해외관광도 폭발적으로 증가, 2010년이면 연인원 1억명이 대륙 밖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한국인의 최대 관광대상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의 관광 실태와 한·중 관광교류의 내막 그리고 관광을 통해본 한·중 관계의 현주소. |
한국인의 중국러시 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관광분야다. 금년 들어 불과 5개월 만에 중국을 방문한 한국인이 100만명을 넘었다. 이 추세로 가면 금년 한해동안 250만 안팎의 한국인이 중국땅을 밟게 된다는 계산이다. 이들의 방문목적은 대부분 관광. 반면 한국을 방문한 중국인은 중국방문 한국인의 5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한중수교 이래 꾸준히 대중 무역흑자를 기록해온 것과는 반대로 심각한 관광역조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현상은 단순히 관광수지 적자라는 차원을 넘어 한중 양국간의 교류가 일방적인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한중간 인적 왕래 및 관광교류의 실상은 양국관계의 불균형한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번 달에는 한중 양국에서 관광객 유치를 위해 상대국에 파견한 책임자인 쉐야핑(薛亞平·43) 중국 여유국 서울지국장과 안용훈(安鎔·52) 한국관광공사 베이징지사장을 각각 서울과 베이징에서 만나 한중간 관광교류의 실상과 관광산업의 내막을 들여다보았다.
쉐야핑 서울지국장은 중국의 관광산업을 총괄하는 국가여유국에서 15년간 근무하면서 이스라엘·네팔 등지에서 지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지난해 문을 연 서울지국 초대 지국장으로 부임했다. 쉐야핑 지국장을 먼저 만나 한국인이 즐겨 찾는 중국의 관광명소부터 화제에 올렸다.
-한국인이 본격적으로 중국관광을 한 지도 10년이 넘은 것 같습니다. 그동안 관광대상지역도 많이 바뀌어왔고, 또 갈수록 다양화되고 있는데요. 한국인의 중국관광이 어떻게 전개돼 왔습니까.
중국의 관광명소
“중국관광의 초창기에는 역시 창바이산(長白山) 즉 백두산의 인기가 높았고, 옌볜 조선족자치주가 있는 지린(吉林)성을 비롯한 동북3성 쪽으로도 많이 갔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북쪽에서 남쪽으로, 동쪽의 연안지역에서 서쪽의 내륙으로 확대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관광객뿐 아니라 사업차 중국을 찾는 사람도 크게 늘어나면서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 혹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산둥성을 찾는 한국인이 많아졌습니다. 백두산 못지않게 한국인이 많이 찾은 관광지는 자연풍경이 뛰어난 계림(桂林)이었는데, 최근에는 장가계(張家界)나 하이난다오(海南島) 그리고 푸젠(福建)성 지역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앞으로 주5일 근무제가 본격적으로 실시되면 주말을 이용한 단기 골프관광이나 휴양관광이 각광받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칭다오(靑島)와 하이난다오 상하이 등에 시설을 잘 갖춘 골프장이 있어 한국인이 많이 찾고 있습니다만, 윈난(雲南)성 쿤밍(昆明)도 점차 골프장을 늘려가고 있어 앞으로 인기지역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중국은 국토가 넓어 관광자원도 매우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인에게 소개할 만한 명승지로는 어떤 곳이 있습니까.
“아시다시피 중국은 워낙 땅이 넓기 때문에 독특하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많아서 간단하게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일단 산으로는 동쪽의 타이산(泰山), 서쪽의 화산(華山), 남쪽의 헝산(衡山), 북쪽의 헝산(恒山), 중부의 쑹산(嵩山) 등 5악이 유명하고 이 5악보다도 한 수 위라는 황산(黃山)을 꼽을 수 있겠지요.
산과 함께 중국엔 규모가 큰 강(江)도 많습니다. 관광명소로는 역시 창강(長江)으로도 불리는 양쯔강(揚子江)을 꼽을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싼샤(三峽) 일대가 최고의 절경이지요. 고대문명의 발상지이자 중국인에게는 ‘어머니의 강’으로 불리는 황하(黃河)도 장관입니다. 호수로는 유명한 동정호(洞庭湖)가 있고, 항저우의 서호(西湖)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또 최근에는 산과 계곡, 호수 폭포 등이 어우러진 명승지가 국내외 관광객의 인기를 끌고 있는데, 장가계나 구채구(九寨溝) 등이 대표적인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어요. 이밖에도 계림이나 윈난성의 석림(石林) 대리(大理) 등도 독특한 자연경관으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방금 장가계와 구채구가 최근들어 관광지로 인기가 높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사실 이 두 곳은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진 곳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최근 2,3년 사이에 갑자기 유명해져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고 있거든요. 아마 한국인이 요즘 가장 많이 찾는 중국 관광지가 바로 장가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왜 갑자기 최고의 관광명소로 부각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동안 다른 유명관광지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절경으로 이미 높은 평가를 받고 있던 곳입니다. 장가계는 1992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명부에 올랐고, 구채구는 1984년에 이미 세계자연유산은 물론 ‘인간과 생물권보호지역’ 및 ‘녹색환경보전21’로 선정되는 등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동안 중국인들이 교통이 불편한 내륙 깊은 곳까지 관광을 다닐 만큼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많이 찾지 못했습니다만, 최근들어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교통도 편리해지면서 그곳을 많이 찾게 된 것뿐입니다. 또 외국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해외에서도 홍보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것이 주효한 것 같아요. 장가계나 구채구가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것은 한번 보고 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 절경을 높이 평가한 것이 큰 힘이 되지 않았나 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장가계와 구채구가 어떤 곳인지 간단히 설명해주시지요. 우선 이름부터가 독특한데요.
“장가계의 경우 그 명칭의 유래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 하나만 소개하지요. 한고조 유방(劉邦)이 초패왕 항우(項羽)를 꺾고 천하통일을 이룩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장량(張良)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그 장량의 장씨 가문이 이곳에서 살았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후난(湖南)성 장가계시 북부 수백㎢를 국가에서 풍경지구로 지정했는데요, 3000여 봉우리의 돌산이 우뚝 솟아 있고 800갈래의 강물이 굽이굽이 흐르는 거대한 명승지입니다. 산봉우리 수림(樹林) 동굴 호수 폭포가 집대성된 지역이지요. 이 곳의 경치를 ‘기이함 수려함 아늑함 질박함 험준함이 융합돼 걸음 따라 경치가 달라지고 가는 데마다 새로운 경관이 생긴다’고 표현한 사람도 있더군요.
최근 이곳을 찾는 관광객의 60~70%가 한국인일 정도로 특히 한국사람한테 인기가 높습니다. 어떤 분들은 금강산과 비교해 어떠냐고 묻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금강산과는 많이 다른 것 같아요. 금강산이나 설악산 같은 산은 중국에도 몇 있습니다만, 장가계 같은 경치는 어느 곳에도 없거든요. 한국의 명산들은 아름답지만 규모가 작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가계는 경치뿐 아니라 호텔 등 관광시설이 잘 구비돼 있고 한국말로 쇼핑이 가능해서 여러 가지로 편리하다는 점도 한국인에게 인기를 끄는 한 요인인 것 같습니다.
구채구는 쓰촨(四川)성에 있는데 취해(翠海)라고도 부릅니다. 골짜기 안에 9개의 장족 마을이 있다 해서 구채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80여㎞에 걸쳐 길게 풍경지역이 펼쳐지는데, 수정풍경지 장해풍경지 보경애풍경지 원시림생태풍경지 등이 절경입니다. 한마디로 물을 재료로 해서 온갖 아름다운 빛깔로 신이 빚어놓은 작품이라고나 할까요. 말로 어떻다고 표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구채구의 대문에 해당하는 수정군해를 소개해보지요. 13.8㎞의 수정군해 골짜기에 각양각색의 호수와 해자(垓字) 40여개가 마치 계단식 밭 모양으로 분포해 있습니다. 상하의 높이 차가 100m에 달하는 호수들의 주위에는 측백나무 소나무 삼나무 등 상록수가 가득 자라고 위의 호수 물이 아래 호수로 떨어지면서 계단식 폭포를 이룹니다. 가장 경탄을 금치 못하는 것은 이 40여개의 호수가 갖가지 다채로운 색조를 띠면서 투명한 거울처럼 빛나고 있어 선경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구채구는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직은 장가계처럼 한국인이 많이 찾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그 진가가 알려지면 곧 인기 관광지가 될 것으로 봅니다.”
난개발로 환경파괴 우려
-타이산이나 황산 같은 중국의 명산엘 가보면 예외없이 밑에서부터 정상까지 계단으로 이어져 있지 않습니까. 어느 자료를 보니까 타이산의 경우 정상부근의 도교사당인 벽화사까지 모두 7412개의 돌계단이 있다고 적혀 있더군요. 그리고 중국의 산에서는 한국에서처럼 배낭을 메고 등산하는 사람을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 대개 케이블카를 이용해 오르거나 계단으로 오르더라도 등산복 차림은 아니거든요. 산에 대한 인식이나 접근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보십니까.
“산이 크고 높아서 오르기 힘드니까 계단을 만들어 편하게 올라갈 수 있게 한 것입니다. 한국에서처럼 배낭 메고 등산하는 사람이 드문 것은 아마도 생활수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합니다. 어떤 철학적 문화적 차이라기보다는 생활패턴의 차이인 것 같아요. 한국에선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 등산하는 사람이 많지만, 중국에선 공원 같은 곳에서 몸을 단련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산에 오르려면 아무래도 여러 가지 장비를 준비해야 하는데 중국은 아직 그런 단계에까지는 오지 않은 것 같아요. 중국인의 산행은 아직은 관광이나 유람에 국한돼 있어 계단이나 케이블카가 필수적인 것 같습니다.”
-중국의 유명한 산에 가보면 정상 바로 아래의 깊은 산속에도 호텔이나 여관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황산만 해도 서해빈관이니 북해빈관이니 해서 깊은 산속에 호텔이 자리잡고 있고, 타이산에도 산속에 천가(天街)라 부르는, 여관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가 있어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깊은 산속에 시설이 많이 들어서면 자연경관이 훼손되고 환경오염을 막을 수 없지 않을까요.
“그런 경우는 일종의 과도기적인 현상입니다. 그동안 각 지방마다 관광지를 개발해 경제발전을 촉진시키려고 경쟁적으로 나선 게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과도한 투자가 이루어지고 환경오염을 유발할 만한 수준에 다다른 경우가 있다고 봅니다. 이런 점을 중국정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 차원에서도 각 지역의 관광자원을 보호하고 난개발을 방지하기 위해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그 한 가지 사례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소림사(少林寺)를 들 수 있습니다. 소림사가 유명해지자 그 부근에 이를 본뜬 무술관이 앞다투어 생겨나는 바람에 소림사 자체가 퇴색할 위기에 빠진 겁니다. 그래서 정부가 나서 난립한 무술관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황산이나 구채구도 정부가 개입해 생태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중국에는 강이나 호수에도 유명 관광지가 많다고 하셨는데요. 중국인은 특히 배를 타고 창강을 오르내리는 유람을 굉장히 매력적으로 여기는 것 같은데, 아직 한국인에게는 크게 주목을 끌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글쎄요. 한국에서는 배를 타고 며칠씩 관광하는 경험을 해볼 기회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한국관광객은 짧은 시간에 끝나는 관광코스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한군데서 3시간 이상 걸리면 지루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창강유람을 제대로 하려면 일주일 정도, 중요한 곳만 본다 해도 최소한 2,3일은 배 안에서 먹고 자면서 주변경치를 즐겨야 합니다. 그래서 한국인에게는 크게 어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유럽인은 창강유람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중국의 경우 남방사람은 창강유람을 좋아하는데 북방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한국인을 상대로 창강유람을 홍보하려면 관광상품을 변형시켜 여러 가지 부담을 좀 줄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계절과 지역 조건 고려해야
-중국에는 자연경관뿐 아니라 역사유적이나 문화유산 등의 관광자원도 많은데, 한국인이 관심을 가질 만한 곳은 어디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자연경관뿐 아니라 역사·문화유적 중에도 관심을 끌만한 곳이 많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불교와 관련된 유적지나 문화재가 그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안후이(安徽)성 쥬화산(九華山)은 중국 4대 불교명산으로 꼽히는 곳인데, 신라 왕자출신으로 알려진 김교각 대사가 열반한 곳이어서 한국의 불교신자가 많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불교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이곳 외에도 3대 석굴 즉, 다퉁(大同)의 운강석굴, 뤄양(洛陽)의 용문석굴, 둔황(敦煌)의 돈황석굴을 가보시라고 권합니다. 아주 감동적인 관광프로그램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이밖에 역사와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도시들도 유익한 관광지가 되리라고 봅니다. 실크로드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시안(西安)은 중국의 과거를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봐야 할 도시입니다. 한국의 경주와 성격이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동해안의 항저우와 쑤저우(蘇州)는 중국의 문화를 대표하는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쓰촨성의 청두(成都)는 삼국지의 주인공 유비가 다스린 촉(蜀)나라 땅으로 한국인에게 친숙한 유적지가 많습니다. 베이징이나 상하이 충칭(重慶) 광저우 등 대도시들은 역사유적과 함께 오늘날의 중국을 느껴보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할 만한 곳입니다.”
-중국은 국토가 넓고 기후대가 다양하기 때문에 계절이나 지역을 고려한 관광계획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당연한 지적입니다. 기후대를 고려한다면 중국의 남방지역은 열대 내지 아열대지역이므로 여름보다는 겨울에 더욱 볼만하겠지요. 베트남과 맞붙어있는 남쪽의 쿤밍은 사계절이 봄날 같다고 해서 춘성(春城)이라고도 부릅니다. 반면 북쪽의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邇濱)은 추운 곳이어서 피서관광도 괜찮습니다. 이곳은 아예 한겨울에 가도 좋습니다. 해마다 겨울이면 얼음으로 만든 휘황찬란한 대형 조형물들을 전시하는 빙등제가 열리는데 아주 볼만합니다.
지역적인 요소도 매우 다양합니다. 실크로드나 몽골 티베트 지역은 중국에서도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곳으로 소수민족들의 삶의 모습이 이채롭고 자연풍광도 아주 독특한 고장입니다. 또 북쪽에서 남쪽으로 기차를 타고 여행하면 위도가 달라지면서 기후대도 변하므로 흥미로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2월에 베이징에서 쿤밍으로 기차여행을 하면 눈덮인 풍경을 보며 출발하지만, 창강을 건너면 차창 밖으로 유채꽃을 몇 시간씩 감상할 수 있고, 쿤밍에 도착하면 다양한 꽃들이 만발한 화사한 봄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중국은 지역적 특징을 잘 알고 계획을 세우면 매우 다양하고 특색있는 관광을 할 수가 있습니다.”
뜸해진 싹쓸이 쇼핑
쉐야핑 지국장의 설명을 듣노라면 중국대륙의 다양한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중국관광이 말처럼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해마다 중국을 관광하는 한국인이 빠르게 늘어나다 보니 이런저런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한국인의 중국관광 실태를 따져보자.
-한국관광객의 증가추세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파동을 겪으며 일시 감소했으나 이후 굉장히 빠르게 회복되고 있습니다. 금년 1~5월 중국을 찾은 한국인은 모두 101만7700명으로 2002년 동기대비 약 23%나 증가했어요. 작년엔 관광객이 크게 줄었습니다만, 사스파동으로 인한 예외일 뿐 전반적으로 한국인의 중국방문은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하겠습니다. 올해 6월 설문조사를 해보니까 중국을 찾는 한국인은 40세 이상이 많고, 지역별로는 서울과 주변도시에 사는 분이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국을 찾는 외국관광객 가운데 한국인과 기타 다른 국가의 관광객을 비교해보면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한국인 관광객은 다른 외국인들과 비교해 관광기간이 짧은 편입니다. 대부분 5일을 넘지 않아요. 보통 3박4일이나 4박5일로 짧은 시간 내에 많은 곳을 돌아볼 수 있는 관광상품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느 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휴식을 취하는 형태의 관광은 별로 원치 않아요. 반면에 유럽인이나 미국인 관광객은 10일 내지 2주일 정도의 긴 시간을 갖고 중국에 옵니다. 이들은 여기저기 관광도 다니지만 자유롭게 쉴 수 있는 시간도 안배하는 편입니다. 또 한국인은 관광업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영어를 구사하지 못해 반드시 한국어 가이드가 있어야 하므로 신경이 쓰입니다만, 대신 호텔이나 버스 등의 설비문제에 대해 유럽이나 미국인들보다는 관대한 편입니다.”
-한국인이 중국에서 주로 쇼핑하는 품목은 무엇입니까. 과거 동인당 같은 유명약국에서 한약재를 싹쓸이 쇼핑한다고 해서 말이 많았는데, 요즘은 그런 현상이 진정됐는지 궁금합니다.
“요즘은 이른바 싹쓸이 쇼핑현상이 거의 사라진 것 같습니다. 사실 초창기에는 중국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이것저것 많이 샀고 또 한약재를 닥치는 대로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몇 차례 중국관광을 해본 사람도 많아져선지 전처럼 쇼핑에 적극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국인이 주로 사가는 품목을 보면 역시 차(茶) 종류와 한약재, 진주를 비롯한 보석류들인데요. 한국인 입국자의 숫자에 비해서 쇼핑실적은 크게 떨어진 상태입니다.”
덤핑관광의 부작용 사례
-한국인 관광객의 씀씀이는 어떤 수준입니까.
“다른 외국관광객에 비해서는 중간 정도입니다. 구미지역에서 오는 관광객이 가장 돈을 많이 쓰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쪽 분들은 한번 중국에 왔다 가면 다시 오기가 쉽지 않으니까 이것저것 돈을 많이 쓰는 편입니다. 반면 한국인은 언제든지 쉽게 다시 찾을 수가 있다고 여겨서인지 한꺼번에 많이 쓰지 않는 것 같아요. 단기적으로만 보면 구미 관광객이 많이 쓰고 가는 것 같지만 길게 보면 한국인이 많이 쓴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이징을 3박4일 여행하는 데에 그 비용이 20만원대인 관광상품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덤핑관광은 여러 가지로 부작용이 있지 않을까요.
“덤핑관광이 중국만의 현상은 아닙니다만, 그 부작용이 작지 않아 저희로서도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가장 큰 부작용 사례는 여행사측이 부족한 관광경비를 메우기 위해 쇼핑을 강요하는 행위입니다. 또 여행지의 선정이라든가 식사나 숙박시설 등에 있어 서비스의 질이 떨어지게 됩니다. 계림의 경우가 좋은 사례입니다. 계림은 초창기에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던 곳인데, 요즘은 크게 감소해 한달에 3만4000명밖에 찾질 않습니다. 업체간 가격경쟁을 하다 보니 싸구려 관광이 성행했고, 그 결과 서비스의 질이 낮아지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지요. 덤핑관광은 또 한국과 중국의 여행사간 투어비용의 미수(未收)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합니다.
중국정부로서는 일단 최저가격을 정해서 그 아래로는 덤핑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행사의 영업내용에 대해 일일이 간섭하기는 어렵고, 문제가 생기면 곧 해결하는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중국관광시 현지가이드가 관광객을 쇼핑상점으로 안내하면서 당국의 방침이니 의무적으로 가야 한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국가에서 그런 방침을 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데에는 여행사의 체제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중국에선 아직도 국가 소유의 여행사가 많기 때문에 민간업체에 비해 경영마인드나 서비스 정신이 부족한 것 같아요. 그래서 여행사를 국가와 사회 직원들이 나누어 소유하는 식으로 개편하면 앞에서 지적한 문제점을 시정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봅니다.”
-중국을 관광하고 온 한국인이 어떤 평가를 하고 있는지 조사한 결과가 있으면 소개해주시지요.
“한국인은 대체적으로 중국관광에 대해 만족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자연풍경도 멋있고, 역사나 문화유적지도 볼 만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평가가 긍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서비스나 위생문제 그리고 일부 가짜 제품의 범람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희로서는 이런 문제점들을 방치하게 되면 관광산업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고 개선작업에 나서고 있습니다.”
중국의 관광산업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비약적으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중국방문 외국인의 규모가 급속히 늘어나 관광분야 세계 상위권에 진입한 것은 물론, 해외로 나가는 중국인도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 중국 관광산업의 팽창은 우리에게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관광대국 중국의 실상과 한중간 관광역조 현상의 내막이 궁금하다.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세계적인 관광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현재 어느 수준에 와 있습니까.
“금년 1월~5월까지 중국을 찾은 외국인은 연인원 4249만여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해 21.95%, 2002년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9.32%가 증가했습니다. 지난해에는 사스파동으로 인해 관광객이 줄었기 때문에 금년에 상대적으로 높은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여기서 외국인이라고 했지만 그 안에는 홍콩이나 대만지역의 동포가 대거 포함돼 있습니다. 그들을 뺀 순수 외국인 관광객은 608만여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하면 47.93%가, 2002년 동기간에 비하면 19.42%가 늘어난 것입니다. 중화권 관광객보다 순수 외국인 관광객의 증가세가 훨씬 가파르다고 하겠습니다.
개혁개방이 시작된 1978년의 경우 중국을 찾은 외국인이 연인원 71만6000명이었는데, 9년 후인 1987년에 1000만명을 돌파했고, 1994년에 2000만명을, 2000년에 3000만명을 넘어섰습니다. 대단히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어요. 그 결과 1999년부터 중국은 세계 제5위의 관광대국으로 올라섰습니다.
관광객으로부터 벌어들인 외화수입을 보면 올해 1월에서 5월까지 87억2000만달러의 수입을 올렸는데, 이는 작년 동기대비로는 36.67%가 늘어난 것이고, 2002년과 비교해서는 9.49%가 증가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최고기록은 2002년의 203억달러였습니다. 관광수입에서도 2001년부터 세계 5위로 올라섰습니다.”
확대되는 중국인 해외관광
-어느 나라 사람이 중국을 가장 많이 찾고 있습니까.
“일본인입니다. 2003년 통계를 보면 연인원 225만여명의 일본인이 중국을 찾아와 전체 외국인 입국자의 19.8%로 1위고, 한국이 194만여명으로 2위, 러시아가 138만여명으로 3위에 올랐습니다. 다음으로 미국 필리핀 말레이시아의 순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지난해 사스파동으로 인해 입국자가 많이 줄어들었는데요. 일본이 22.9%나 줄어든 데 비해 한국은 8.4%만 줄었을 뿐입니다.”
-중국의 관광산업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정확히 말하면 인바운드, 그러니까 외국인 관광객이 중국을 찾는 경우에 해당할 뿐 중국인의 해외관광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현재 중국인의 해외관광은 어디까지 허용되고 있나요.
“중국인의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매우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습니다만, 중국정부로서는 우선은 인바운드, 그러니까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노력하고, 다음으로는 국내관광, 그리고 나서 아웃바운드, 즉 중국인의 출국관광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출국관광은 1989년 해외관광 자유화조치 이후 매년 40~50%가 늘어나고 있을 정도입니다. 작년엔 사스파동을 겪었음에도 2000만명 이상이 출국했는데, 이 숫자는 일본인의 출국관광을 초과하는 것입니다. 중국인은 현재 28개 국가에 관광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만, 오는 9월1일부터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유럽국가를 비롯해 25개 나라를 여행할 수 있도록 확대됩니다. 그렇게 되면 모두 53개 국가에 대해서 해외여행이 허용되는 셈입니다.”
-중국인의 관광취향은 어떻습니까. 문화나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은가요, 아니면 오락이나 쇼핑에 흥미를 더 느끼는가요.
“해외여행을 가는 중국인은 생활수준이나 문화수준이 비교적 높은 층입니다. 서양문화라든가 한국이나 일본의 문화에 대한 관심도 높고 이해도도 높은 편입니다. 이들은 또 쇼핑도 많이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위스를 찾는 중국인은 아직 숫자가 많지는 않지만 쇼핑액수는 다른 나라에서 온 관광객보다 꽤 많은 것으로 통계에 나와 있어요. 그리고 카지노를 좋아하는 중국인 관광객도 많습니다. 이들은 한국뿐 아니라 마카오나 말레이시아 등지에 가서 카지노를 즐깁니다. 아예 카지노 위주의 관광을 원하는 사람도 많아서 이들이 주말을 이용해 카지노 여행을 할 수 있도록 개발한 상품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카지노장에서 보면 일본인보다 중국인이 많아 보입니다만, 실제로는 중국인구가 많아서 그렇지 비율로만 본다면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불균형한 한중간 관광교류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관광자원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중국은 아시다시피 국토가 넓지 않습니까. 그래서 관광자원이 매우 다양합니다. 관광객에게는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선택할 기회가 널려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중국 자체가 워낙 발전과 변화의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관광지 역시 빠르게 변화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장가계나 구채구 같은 명승지는 3년여 전만 해도 사람들이 잘 몰랐던 곳인데, 최근엔 매우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관광선진국의 관광자원이란 게 대개는 고정적이어서 한번 갔다 오면 다시 갈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데, 중국은 무엇보다 갈 때마다 새로운 관광자원을 만날 수 있다는 게 매력일 것입니다. 우스갯소리로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곳이 중국이다, 그래서 관광을 하고 오면 결코 헛수고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처럼 중국의 변화가 빠르다 보니 문제도 많은 게 사실입니다. 아직도 서비스의 수준이라든지 위생설비 혹은 안전 등에 문제가 산재해 있어 관광산업의 발전에 보조를 맞춰가면서 시정해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오는 2020년이면 중국이 세계최대의 관광국으로 떠오르게 될 것이라는 중국언론의 보도가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중국 관광산업의 향후 발전전망과 이를 위한 전략은 무엇입니까.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추산한 바에 따르면 2020년에 중국은 세계 1위의 관광객 유치국가가 되고, 관광객 송출규모는 세계 4위에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만, 중국의 발전속도와 관광객의 취향 등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보면 WTO의 이런 예측은 실현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사스파동을 겪고 난 이후 중국정부는 세 가지 측면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선 사스로 인해 위축된 관광업계를 격려하기 위해 각종 우대정책을 실시하는 등 관광시장활성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또 해외 각국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홍보에 나서는 등 관광산업 마케팅에도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차이나 포에버’ 같은 구호를 전세계적으로 알리고 CNN 등 세계에 네트워크를 갖춘 매체에도 지속적으로 광고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이밖에 위생문제를 점검해서 개선하는 데에도 획기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있어요. 가령 전에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각 지역에서 알아서 해결하도록 했습니다만, 사스파동 이후에는 정부 차원에서 통제하고 문제발생시 즉각 대응, 조치하는 시스템으로 개선했습니다. 어쨌든 사스파동으로 인해 위생의식과 안전의식이 높아진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것들을 소홀히 했다가는 큰 손해를 입거나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으니까 말입니다.”
-한국인의 중국관광 열기에 비해 중국인의 한국관광 실적은 상대적으로 크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금년 5월까지 중국을 찾은 한국인이 101만여명인 데 비해 한국을 찾은 중국인은 22만여명에 그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약 5대1의 비율입니다. 이 같은 불균형이 해소되어야 한다고 보지 않습니까.
“그런 불균형이 초래된 원인을 두 가지로 요약하면 우선 한국관광 상품 가격이 중국인에게는 다소 부담스럽다는 점입니다. 현실적으로 한국관광을 하는 경비로 동남아 몇 개국을 갈 수 있거든요. 이런 가격상의 문제가 중국인의 한국행을 어렵게 만드는 한 가지 요인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한국과 중국이 같은 한자문화권으로 서로 비슷한 면이 많기 때문에 이질감이랄까 신선감이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국인이 가고 싶어하는 곳을 안배한 특색있는 관광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인에게 어필할 수 있는 관광콘텐츠를 제대로 개발하기만 하면 한국을 찾는 중국인이 늘어나리라고 봅니다.”
-한중간 관광교류의 발전전망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중국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하고 관광여건이 갖춰져 있는 곳입니다. 항공노선이나 기차 버스 등이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고 호텔이나 음식점 쇼핑점도 완비되어 있습니다. 치안도 다른 외국에 비해 안전하다고 자부합니다. 또 한국인이 중국관광에서 만족을 느끼게끔 정부 차원에서도 노력중입니다. 앞에서 한국인의 중국방문에 비해 중국인의 한국방문이 적은 불균형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만, 이 문제도 중국의 경제가 계속 발전해 생활수준이 높아지면 점차 해소되리라고 봅니다. 한국은 독특한 자연과 문화 그리고 현대화된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중국인이 가보고 싶어하는 나라입니다. 앞으로 한중 양국 국민들이 상대국을 많이 찾아 서로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중국인의 한국관광 실태
한국인의 중국관광이 러시인 데 비해 중국인의 한국관광은 상대적으로 저조한 상태다. 그러나 쉐야핑 지국장의 설명대로 중국의 경제성장이 지속된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중국인이 한국으로, 해외로 쏟아져나올지 모른다. 최근들어 부쩍 늘어나기 시작한 중국인의 해외관광, 특히 한국관광의 실상은 어떤 것일까.
안용훈 한국관광공사 베이징지사장은 대만대학 사학과에서 수학했고 1979년 한국관광공사에 입사한 이래 타이베이(臺北)지사장과 중국·동남아부장 등을 역임했으며,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중국통. 2002년 4월부터 베이징지사장으로 부임, 중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안 지사장에게 먼저 한국을 찾는 중국인에 대해 물었다.
-해외관광 하면 색다른 나라를 가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요. 중국인의 해외관광 현황을 보니까 의외로 화교권 내에서의 이동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유럽이나 미주 쪽은 아직은 중국인에게 먼 나라라고 봐야 할까요.
“아무래도 홍콩이나 마카오 대만은 동일 언어권이어서 편리한 점이 많고, 음식도 입에 맞으니까 손쉽게 목적지로 선택하는 경향이 짙다고 볼 수 있죠. 작년의 경우 미주와 유럽을 관광한 중국인이 약 6만명에 불과했습니다만, 금년엔 이 지역의 해외여행 자유화 대상국가가 늘어났기 때문에 관광객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일단 중국에서 미주나 유럽에 갈 만한 계층은 고소득층에 한정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여행경비만 해도 한국을 택할 경우 보통 4000위안(약 60만원) 정도인 데 비해 유럽지역은 최소한 1만5000위안은 들어야 할 테니까요. 아마도 동남아나 한국 일본 등지를 다녀온 부유층 사람들이 유럽이나 미주 혹은 호주로 떠나는 형태가 될 것입니다.”
-해외여행을 하는 중국 부유층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사람들입니까.
“중국에서 해외관광, 특히 미주나 유럽지역을 갈 수 있을 정도의 부유층은 보통 전체인구의 3%인 4000여만 명의 상위 소득자층을 지칭합니다. 이들은 대개 저택과 자가용을 가지고 있고, 비교적 높은 봉급을 받으면서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지역적으로는 동부의 연안도시지역에 부유한 사람이 많이 삽니다. 그래서 저희가 적극적으로 관광객 유치활동을 펼칠 대상으로 연안의 10개 도시를 꼽고 있습니다만,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내륙의 청두(成都)나 충칭(重慶)에서도 해외로 나가는 관광객이 적지 않거든요. 항공노선이라든가 선박편 등 이동수단이 어떻게 구축되어 있느냐도 소득수준 못지않게 출국관광의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이지요.”
인기코스, 롯데월드와 에버랜드
-한국을 찾는 중국인도 그런 부유층 사람들입니까.
“아무래도 부유층이 많겠습니다만, 중산층도 있고 그 외에도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한국을 찾아오고 있습니다. 고소득 관광객들은 카지노를 즐기는 등 휴식을 취하기 위해 한국을 찾는 반면, 중산층 관광객은 대개 처음으로 외국관광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이나 동남아지역이 상대적으로 비용이 덜 들기 때문에 선호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일부 저소득층도 한국을 찾는데, 소속 회사나 단체에서 관광단을 조직해 나오거나 아니면 인센티브 제도에 의해 해외여행을 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또 한국의 경제발전상이나 산업시설을 시찰한다는 명목으로 공무형태를 띠고 오는 사람들도 있고 수학여행단도 있습니다. 요즘엔 한류(韓流) 열풍으로 유명연예인 팬클럽의 한국방문단도 생겼습니다. 매우 다양해졌어요.”
-현재 가장 일반적인 한국관광은 코스와 일정이 어떻게 짜여 있습니까.
“지금 저희가 주로 팔고 있는 상품은 4박5일 코스입니다. 이밖에도 3박4일이나 6박7일 코스도 있고 15일 이내의 장기 코스도 있습니다. 4박5일 표준코스의 경우 이동 거점은 서울과 부산 그리고 제주도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현재 베이징에서 이런 한국 여행상품을 주력으로 삼고 있는 여행사가 15개입니다.”
-중국관광객이 많이 찾는 한국의 관광지는 대개 어떤 곳입니까?
“서울과 경기도, 부산, 제주도가 중국인이 많이 찾는 대표적인 관광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 경기의 경우 경복궁과 월드컵경기장 롯데월드 에버랜드 등이고, 부산은 자갈치시장, 제주도에서는 용두암과 서귀포의 폭포 등 자연경관을 둘러보는 게 전형적인 관광코스입니다. 요즘에는 판문점을 찾기도 하고 수안보 등 온천지역을 둘러보기도 합니다. 롯데월드나 에버랜드는 놀이시설이 중국보다 앞서 있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반응이 매우 좋습니다.
중국은 큰 대륙이지만 연안에 살고 있는 주민들 외에는 바다를 접할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고, 또 바다의 오염이 심하고 물도 깨끗하지 않거든요. 그래서인지 제주도를 둘러본 중국인들은 깨끗한 바다와 해안의 절경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찬탄을 금치 못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어떤 사유로든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사람은 대개 제주도에 가보기를 원하더군요. 일반관광객뿐 아니라 한국을 방문하는 지도층 인사들도 예외없이 제주도를 찾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중국의 내륙지역은 물론이고 연안의 도시에서도 제주도처럼 아름다운 곳은 보기 힘듭니다. 예를 들어 칭다오나 옌타이(煙臺) 샤먼(廈門) 등 경치가 좋은 연안도시에서도 바다경관을 볼 수는 있지만 제주도와는 비교가 안되거든요. 제주는 특유의 이국적 경관은 물론이고, 오염되지 않은 자연환경, 맑은 공기 등 한마디로 청정지역 아닙니까. 이런 천혜의 자연환경을 중국인들이 동경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중국에도 제주도에 견줄 하이난다오(海南島) 같은 섬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 중국은 국토의 크기에 비해 섬이 귀한 편입니다. 그래서 중국인은 누구나 섬에 대해 동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어로 관광이라는 말을 루유(旅游)라고 해서 삼수변이 붙은 글자를 씁니다. 물이 있는 곳으로 가서 즐기는 것이 관광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중국인을 상대로 한 한국관광 상품도 바다경관을 중심으로 구성하려는 전략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이난다오는 가장 큰 섬이고 기후가 온화하다는 점에서 인기지역이긴 합니다만, 제주도의 풍광에 비할 바는 못 된다고 봅니다. 사계절의 변화, 특히 겨울에 눈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한라산 같은 명산이라든가, 여러 가지 즐길 만한 요소가 있어 제주도가 훨씬 뛰어납니다. 거기다가 중국인 입장에서는 제주도는 외국이니까 하이난다오에 비해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겠지요.”
-금수강산이라고 하는 한국의 자연경관에 대한 중국인들의 평가는 어떻습니까.
“단순히 스케일만 놓고 보면 비교가 안 될지 모르지만 똑같은 산과 바다라 해도 중국에서는 느낄 수 없는 부분이 우리 자연에는 있을 수 있거든요. 중국관광객이 이런 부분을 느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자연경관을 찾아내 소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설악산은 중국인들도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움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우리나라에 산재해 있는 국립공원을 중심으로 10대 명산 혹은 10대 국립공원으로 묶어서 중국관광객을 상대로 한 특집 관광상품을 내놓을까 합니다. 한국의 자연을 직접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등산프로그램도 개발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금강산이라는 명산이 있지 않습니까. 아직까지 금강산 관광에 제한이 많고 경비부담도 큽니다만, 설악산 등과의 연계관광 등 점차적으로 문제를 풀어가면 좋은 관광자원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중국의 자금성이나 이화원 같은 거대한 역사문화유적에 비하면 한국의 경복궁이나 비원은 상대적으로 왜소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중국을 다녀온 한국인들은 중국사람이 한국에 와서 궁궐을 보면 우습게 여기지 않겠냐는 말을 하곤 합니다. 실제로 한국에 와서 고궁을 둘러본 중국인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규모면에서 한국의 궁궐이 중국의 자금성 등에 비해 작은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자금성이나 이화원 등 중국의 역사유적이 거대하고 웅장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한국의 궁궐처럼 아름다운 산수를 배경으로 한 아기자기하고, 정교한 멋은 없습니다. 서울의 궁궐을 둘러본 중국관광객은 대부분 작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만, 그러면서도 주위의 아름다운 산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모습이 인상적이라며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자금성 vs 경복궁
-현재까지 개발된 우리의 관광상품이 중국사람들을 끌어들일 만한 요소가 충분하다고 보십니까?
“관점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저는 우리의 관광자원이 중국인을 끌어들일 만한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규모와 크기를 비교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습니다만, 한국관광에서는 한국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거든요. 예를 들어 38선이나 비무장지대(DMZ)의 경우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면 무언가 깊은 느낌을 받게 된다는 중국인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지역에서의 과거 역사를 보고 듣다가 떠날 때 쯤에는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희는 어떤 감동을 안겨줄 수 있고, 스토리가 있는 관광자원을 개발하는 데 한층 더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중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에 오려면 동남아 몇 개국을 관광할 수 있는 비용이 든다고 합니다. 비용대비 만족감이란 측면에서 동남아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말레이시아 태국 등 동남아의 경제, 물가수준은 중국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 동남아에는 비슷한 수준의 나라들이 인접해 있기 때문에 한번 해외여행시 2, 3개국을 관광할 수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 아직까지는 주마간산식으로 한 차례 여행에서 여러 나라를 둘러보는 것을 선호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또 자기네 나라가 워낙 크다 보니 해외관광에 나가서도 여러 군데를 둘러보아야 만족스럽다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동남아지역 관광상품의 경우에는 저가공세와 더불어 옵션상품이 굉장히 많습니다. 어떤 옵션상품은 한 사람이라도 참가하지 않을 경우 단체 모두를 관광시키지 않기 때문에 여행사와 소비자 사이에 마찰이 끊이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동남아는 열대기후지만, 우리에게는 사계절이 있습니다. 봄의 온화함, 가을 단풍, 겨울의 눈은 동남아에서 느낄 수 없는 우리만의 관광자원입니다. 조사에 의하면 2003년 한국을 찾은 외국관광객 중 한국 이외에 다른 나라를 관광해본 경험이 있는 경우가 평균 34%인 반면, 중국인은 45%로 높게 나타나고 있어요. 이들 중국인은 대부분 가격이 저렴해 한번에 2, 3개국을 여행할 수 있는 동남아를 방문한 적이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2003년도 중국측 통계를 보면 해외관광 제1목적지로 한국을 꼽은 사람이 태국이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를 꼽은 사람보다 많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우리나라가 동남아 국가와의 경쟁에서 결코 뒤지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관광을 한 중국인은 대개 어떤 평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마다 보고 느끼는 게 다르므로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대체적으로 기대했던 것 이상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는 반응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실망감을 나타내는 경우도 적지 않아서 어떤 사람은 두 번 다시 한국에 가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한국관광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들의 지적사항 가운데는 먹는 게 부실했다는 의견이 많고,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다는 불만도 많습니다.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은 덤핑관광에서 비롯된 현상인데요. 예를 들어 제주도에 가서도 여미지식물원이나 천지연폭포 같은 곳에는 들르지 않고 정식 민속촌도 아닌 조그만 마을을 구경시켜 주는 식이라는 것이에요. 비용을 줄이려 입장권을 사야 하는 곳은 가급적 피한다는 것이죠. 이 경우 해당 관광객의 불만도 문제지만, 이런 내용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서 한국관광 가봐야 볼 것이 없더라는 식으로 인식되면 우리로서는 치명적입니다.”
-다른 외국관광객과 중국인관광객을 비교해 보면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먼저 중국인의 해외관광 현실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중국에서 해외관광은 완전히 자유로운 게 아닙니다. 중국인이 자비로 자유롭게 해외관광을 할 수 있는 나라나 지역은 홍콩 마카오 한국 등을 포함해 29개국 뿐이고, 이곳도 반드시 아웃바운드여행사로 지정된 528개 여행사만을 이용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중국인의 한국여행은 양국간에 지정한 여행사를 통한 패키지관광만이 가능합니다. 대부분이 여행사의 일정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개인관광은 기업 또는 기관의 초청에 의한 비즈니스관광이 대부분입니다. 어떤 경로로 한국에 오든 중국인의 씀씀이가 다른 외국인보다는 큰데, 이들은 쇼핑에서 만족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한 것 같아요. 자기네 상품보다 좋은 물건을 구입하는데, 물건을 잘 샀다며 굉장히 좋아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식입니다.”
중국인의 쇼핑 취향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중국인 관광객들이 동대문시장에서 의류 쇼핑을 하면서 만족해 한다는 보도가 많았는데, 지금은 거꾸로 우리가 중국산 의류를 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중국관광객은 한국에 와서 무얼 사가지고 갑니까.
“중국인의 쇼핑품목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고가 제품으로 홍삼제품과 인삼제품 그리고 자수정을 들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몇 가지를 빼면 이렇다 할 특산품이 없다는 겁니다. 너무 단조롭다는 것이지요. 일본의 경우를 보면 각 지방마다 특산물이 다양하게 개발돼 있습니다. 우리도 각 지방의 특성을 살린 제품을 개발해 관광상품화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의류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최근에는 한국 의류가 싸고 좋다고 해서 샀는데 나중에 보니까 메이드 인 차이나 표시가 돼있더라는 얘기가 많이 들립니다. 또 우리나라의 고유 브랜드로 질 좋고 유명한 제품을 비싸게 주고 사왔는데, 이미 중국에 이미테이션 제품이 나돌더라는 말도 자주 들립니다. 한국에서 어떤 제품이 유행하면 한두 달도 못 되어 중국에 복제품이 나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당국의 제도적인 방지대책이 나오지 않는 한 중국인이 질 좋은 우리 고유 브랜드 제품 구입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관광객의 씀씀이가 크다고 하셨는데, 1인당 소비규모는 얼마나 됩니까.
“저희가 2003년도에 외래관광객 방한실태조사를 해보니까, 개별관광객의 평균소비액이 1262달러였는데, 그중 중국인은 1427달러로 평균보다 162달러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일본인의 경우 831달러로 적은 편이었고, 미국인 1727달러, 대만 937달러, 홍콩 1421달러, 싱가포르 1357달러 등으로 중국인의 소비규모가 중화권의 관광객보다 큰 것으로 나타났어요. 여행사 패키지관광으로 온 경우에도 평균소비액이 1093달러였는데, 중국인은 1363달러로 평균보다 270달러나 많이 소비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걸 보면 중국인의 씀씀이가 만만치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중국인의 한국관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적지 않은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대표적인 게 바로 덤핑관광의 폐해다. 또 중국관광객을 유치하는 과정에서도 중국측의 협조가 미진하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인의 중국관광에서 덤핑의 폐해가 지적되고 있습니다만, 중국인의 한국관광에서도 그런 현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덤핑관광의 실태는 어떠하며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중국여행사에서 한국측 랜드사에 지급하는 비용은 베이징 지역의 경우 하루 35달러 수준입니다. 상하이는 30달러 이하, 심지어는 25달러 이하인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보통 한국관광상품이 4박5일이고 보면 한국 랜드사에서 받는 관광비용은 1인당 약 120~140달러 수준이 됩니다. 이 비용으로 숙식 교통 관광 등 제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 우리 물가수준에 비추어 보면 턱없이 부족한 것이지요. 때문에 국내여행사에서도 자수정이나 인삼 등을 쇼핑할 때 가격을 높게 책정해서 투어 원가를 보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연히 바가지쇼핑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게 마련이지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국내 여행업계에서는 8월부터 하루 40달러 이하의 랜드비는 받지 않기로 결의한 바 있습니다.”
배고프다는 중국관광객의 불평
-최근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상하이발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중국관광단을 이끌고 온 가이드가 관광객들을 모아놓고는 “이제 식당으로 이동할 텐데 식사하다가 먹을 게 부족하다고 불평하거나 떠들지 말라. 더 달라고 하면 더 주니까 너무 걱정 말라”고 당부하더라는 거예요. 평소에 중국관광객들이 어떤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지를 잘 말해주는 사례입니다. 음식의 맛을 따지기 이전에 절대적인 양에 있어 부족감을 갖는다는 게 중국관광객의 대표적인 불만사항 중 하나라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딜럭스 상품일 경우 그런 불만의 요소가 별로 없습니다만 보통의 관광상품이나 중저가상품 쪽으로 내려가면 식사 부실 문제가 지적됩니다. 이런 구조적인 이유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양국의 식생활 자체가 다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중국 사람은 기름에 튀기고 볶은 음식으로 식사를 해야만 뱃속에 기름기가 남아 허기진 줄을 모르는데, 한국음식은 그렇지 않거든요. 무침 같은 냉요리가 많고, 가급적 기름기 대신에 야채를 권장하는 분위기 아닙니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가 고픈 상태에서 관광이 제대로 될 리 없겠지요. 그렇다면 해결책은 크게 돈 들이지 않고 중국인 식성에 맞는 음식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조차 제대로 안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중국인을 위한 메뉴 개발을 귀찮아하고, 여행사는 여행사대로 식사단가를 올려줄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그냥 낮은 가격에 대충 때우려는 자세인 것 같아요. 조금만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면 한국을 다녀간 중국사람들에게서 배고프다는 말은 나오지 않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관광객보다는 중국을 찾는 한국인이 훨씬 많지 않습니까. 관광역조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이는 단순히 관광객의 많고 적음을 떠나 양국 관계의 현주소가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우리만 일방적으로 중국에 접근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관광을 통해서 본 한중교류의 실상과 전망은 어떻습니까.
“2002년에는 212만2000명의 한국인이 중국을 방문했고, 2003년에는 사스파동으로 인해 194만명 정도로 줄었습니다. 반면 중국인의 한국방문은 2002년에 53만9000명, 2003년에 51만4000명에 불과했습니다. 양국의 인구를 감안하면 우리는 상당히 많은 사람이 중국을 찾은 데 비해 중국은 13억 인구 중에서 극히 일부가 한국을 찾은 셈이지요.
이런 실적을 놓고 중국정부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하면 ‘한국은 해외여행을 자주 할 수 있을 만큼 잘살지 않느냐, 중국도 잘살게 되면 관광객이 크게 늘 것’이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관광이라는 게 국가간 교류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된다고 봅니다. 관광 교류를 통해서 상호간에 이해가 증진되고 서로 화합하게 되는, 일종의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현재로서는 우리가 관광수지 적자를 보고 있지만 2010년경에는 중국의 출국관광객이 1억명에 달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쯤이면 중국인의 한국방문도 지금보다는 훨씬 활발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중국관광객의 방한여건을 조성하고 저변을 확대해나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기대에 못미친 월드컵 특수
-지난 2002년에 월드컵대회를 앞두고 10만명 이상의 중국인이 한국을 찾을 것으로 예측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대회기간을 전후해 실제로 한국을 찾아온 중국인 수는 기대에 훨씬 못미치지 않았습니까. 어떤 이유가 있었습니까.
“당시 6만7000여명밖에 오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처음엔 정책당국의 고위층 사이에서 우호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졌고 중국측도 월드컵 참관을 독려했었죠. 또 우리측에서 중국의 고위층을 대거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중국정부가 중국인의 월드컵 참관을 지지해주고 후원해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예컨대 그 전까지만 해도 출국시 아무런 제한조치를 하지 않다가 갑자기 출국 전에 명단을 제출하게 하는 등 고급 공무원의 해외출장을 자제토록 했거든요. 물론 대회기간중 한국에서 파룬궁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 조선족의 불법체류 문제가 확산되지나 않을까, 또 축구팬들이 한국에서 집단행동을 해서 불미스러운 이미지를 남기지는 않을까 우려한 것은 이해합니다만, 어쨌든 이런 이유 등으로 인해 제도적인 통제장치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과연 중국정부가 한국을 위해 적극적인 배려를 해주었는가, 우리는 중국을 친구처럼 열성적으로 대해주었는데 과연 중국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 하는 점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고이즈미 일본수상이 중국관광객 유치를 위해 비자발급을 대폭 완화하는 방안을 관계부처에 지시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만, 한국의 경우 불법체류나 불법취업 등의 문제가 있어 중국인에 대한 비자발급이 까다로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중국은 2001년부터 미국을 제치고 우리나라 제2의 인바운드시장으로 부상했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대로 중국인 입국이 증가하면서 국내 불법체류자의 약 70%가 중국인으로 파악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때문에 영사관에서도 비자 발급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결국 외래관광객 유치확대와 불법체류 억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한다는 얘기인데요. 앞으로 한국방문 실적이 많은 중국인에 대해 복수비자를 발급한다든지, 일본 캐나다 미국 등으로 향하는 경유관광객에 대한 비자면제를 유럽으로 가는 중국인에게도 확대하는 방안 등을 관계부처에 건의할 계획입니다.”
중국관광객 유치전략
-중국관광객이 아시아 관광시장의 큰 손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전략을 가지고 있는지요.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소개해 주시지요.
“올해는 관광공사에서 지정한 ‘한류 관광의 해’입니다. 우리나라의 영화 드라마 음악 등이 일본 중국 등 주변국에 수출되면서 이 지역 젊은이들이 한국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류문화를 더욱 확산하고 한중 문화교류 증진을 위해 지난 7월15일에는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한류 연예인이 대거 참가한 콘서트를 열어 중국인들의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습니다. 이외에도 한국을 알리기 위해 관광담당 언론인 초청, 관광상품 개발을 위한 여행업자 초청, 소비자에게 직접 한국을 홍보하기 위한 TV와 인쇄매체 광고 및 관광관련 전시박람회 참가, 한국관광사진전 개최 등 다양한 홍보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2003년 중국 통계에 의하면, 해외여행을 한 중국인이 2022만명입니다. 그러나 홍콩 마카오 대만을 제외하면 순수 해외관광객은 600만명 정도입니다. 그중 일본이 80만명, 러시아 66만명, 한국 51만명이고, 그 다음으로 태국, 미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순입니다. 한국이 중국인 해외여행의 세 번째 시장인 셈이지요. 올해의 중국관광객 유치목표는 57만명인데, 6월말 현재 30만명이 방한하여 목표대비 117% 실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관광교류가 양국관계의 가장 기본이고 또 그 실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분명 현재의 한중관계는 불균형한 게 사실입니다만, 저희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 같은 현상이 극복될 것이라 보고 당면한 문제들을 풀어나간다는 생각입니다.”
한국과 중국은 서로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경우가 많다. 그중 하나가 의료분야다. 중국의 전통의학이 중의학이라면 한국의 전통의학은 한의학이다. 역사적인 뿌리는 거의 같지만 오늘날 중의학과 한의학은 매우 다른 면모를 보인다. 수천년의 역사를 통해 중국의 전통의학은 어떤 모습으로 자리잡았으며, 그 의술의 실체는 어떤 것일까. 이번 달 중국탐험은 중의학을 중심으로 중국 의료문화의 전반적 실태를 주제로 삼았다.
김인근(金仁根·41) 박사는 한중수교 직후인 1992년 9월 베이징중의약대에 입학, 학부과정을 졸업한 뒤 석박사과정을 모두 마치고 정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중의사면허시험(中醫職業醫師資格考査)에도 합격해 중의사 자격을 딴 중국유학 1세대. 중국현지에서 중의학을 전공한 한국인 유학생 출신 가운데 선두주자인 셈이다. 본격적인 중의학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중국의 전반적인 의료현황부터 간단히 알아보자.
-21세기에 들어와 중국의 의료체계가 크게 바뀌고 있다고 하는데 어떤 내용인가요.
“중국 의료체계의 변화는 민간 의료기관의 활성화와 외국 의료자본의 유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국가 의료기관이 중심이었습니다만, 최근에는 민간 의료기관에 대한 투자가 크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각 성의 주요 현(縣)을 중심으로 2~3개의 민간병원이 속속 설립되고 있고, 심지어 티베트나 우루무치(烏魯木齊) 같은 변방의 산간지역에도 병원을 유치하기 위해 힘을 쓰고 있는 정도입니다. 위생부가 합자병원 설립을 위한 외국자본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는데, 이는 단기간에 선진 의료기술을 흡수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여겨집니다.”
중국 의료계의 변화
-중국에 진출한 외국 병원들의 현황은 어떻습니까.
“베이징에 13개의 외국병원이 설립돼 있고 상하이에는 무려 28개나 됩니다. 물론 다른 지방에도 해외의 의료자본이 투자를 많이 하고 있어요. 상하이의 민항병원은 유럽자본과 합자형식으로 설립됐고, 베이징의 화목가(和睦家)병원은 소아과와 산부인과 중심으로 진료하는데, 미국자본의 투자로 세워졌습니다. 또 상하이의 동세병원은 미국과의 합자로, 상하이의 싱가포르임상국제의료센터는 미국 일본 한국의 합작 투자로 설립된 경우입니다. 이외에도 베이징의 국제의료중심, 싱가포르병원 및 SOS병원 등 외국계 병원이 적지 않고 의료수준도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한국의 의료산업도 중국에 진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실상은 어떤가요.
“SK와 중국위생부 합자병원인 애강(愛康)병원이 작년에 정식으로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이 병원은 특히 최근 들어 성형미인대회가 열리는 등 중국사회에서 성형 붐이 일어나자 이 분야에 뛰어난 한국의 선진 기술력을 유치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애강병원을 비롯해 여러 병원에서 한국인 성형외과 의사가 진료를 하고 있고, 치과와 안과 분야에서도 한국인 의사가 활약하고 있어요. 의사뿐 아니라 한국의 의료기기와 미용재료 등도 중국에서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분만비용이 한화 1000만원대에 달하는 고급 산부인과 병실이 등장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중국 의료기관의 고급화 추세는 어떻습니까.
“앞에서 언급한 외국계 병원이나 합자병원이 고급화를 선도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간단한 감기 치료에도 300달러를 받는 곳이 있는가 하면 한달 입원비가 2만위안(한화 300만원)에 달하는 중국계 병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또 베이징 최고 수준의 병원으로 알려진 협화(協和)병원의 경우 분만비가 8만위안이 넘는 입원실이 있을 정도로 일부 부유층을 겨냥한 고급 의료기관이 성업중입니다.”
-중국의 의료수준은 전반적으로 어떻게 평가받고 있습니까.
“제가 처음 병원에서 근무할 때만 해도 대부분의 병원 건물은 낡아 허름하고 수술실도 우중충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선진기술과 설비를 갖춰 국제적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면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현대 의학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아직 국제수준에 못 미치는 점이 많다고 봅니다만, 중의학 분야는 서양의학과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이론이 많이 나오고 있고 또 놀랄 만한 치료효과를 거둔 경우도 있어 주목됩니다. 의료장비 면에서도 첨단 라식수술장비를 갖춘 베이징의 동인안과병원처럼 고급화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중국인은 병이 나면 대개 어디부터 찾아가 치료를 받게 되나요.
“일반적으로 서의(西醫) 즉, 양의(洋醫)를 먼저 찾아가는데 개인병원보다는 종합병원을 선호하는 편이지요. 그러나 증상이 심하지 않으면 병원에 가지 않고 약국에서 약을 사먹는 사람도 많습니다. 한국과 다른 점은 약국에도 의사가 있어서 병을 진단하고 그에 맞는 약을 준다는 것이지요. 서의 대신 중의(中醫)를 찾는 환자도 있지만, 대개는 처음에 서의에게 갔다가 효과를 보지 못한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중의를 찾아가 완치되면 그 다음부터는 중의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제 중의학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탐구할 차례다. 먼저 역사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중의학이 이루어졌는지를 알아야 할 것 같다. 또 우리 한의학과의 상관관계도 궁금하다. 워낙 오랜 역사를 가진 분야여서 그 연원과 발전 과정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오늘날의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먼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의학이 어떤 발전과정을 거쳐왔는지 간단히 짚어봤으면 합니다.
“문헌상으로는 전국(戰國)시대와 한(漢)나라 때 중의학이 처음 등장합니다. 중의학의 이론체계가 성립된 시기라고 할 수 있어요. 잦은 전쟁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운 분위기에서 의학이 급속도로 발달하게 된 것이죠. 1차 세계대전이나 2차 세계대전 때 의학이 발달한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명의 편작(扁鵲)이 바로 전국시대 사람인데, 망진(望診)이니 맥진(脈診)이니 하는 사진(四診)진단법을 만들었지요. 또 이때 중국 최고의 의서인 황제내경(黃帝內經)이 나오게 됩니다. 한나라 말기에 이르러 장중경(張仲景)의 대표적 저작인 난경(難經)이라든가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이 나오고, 그 다음에 신농본초(神農本草)와 같은 중의학의 경전에 해당할 만한 책이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그후 진(晋)나라 때는 왕숙화(王淑和)가 지은 의서 맥경(脈經)이 나왔습니다. 이 책은 그때까지 전해 내려온 여러 가지 맥의 시스템을 체계화해서 정리한 것입니다. 이외에 당(唐)나라 때는 손사막(孫思邈)이 지은 천금방(千金方) 2편이 나오고, 금원(金元)시대에는 유완소(劉完素) 장종정(張從正) 주진형(朱震亨) 같은 유명한 의사들이 배출됐는데요, 이들을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라고 이릅니다. 명청(明淸)시대에 이르러 중의학은 이론과 경험을 정리하는 전성기를 이룹니다. 아편전쟁 이후 근대에 들어서는 중의학이 서양문명을 흡수하게 되는데, 이 시기의 대표적인 치료제로 서양의 아스피린과 석고탕(石膏湯)이라는 전통 처방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결합한 ‘아스피린 석고탕’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중국 전통의학과 현대의학을 합친 최초의 경우라고 할 수 있죠.”
중의학과 한의학
-그렇다면 중의학의 골격은 어느 시기에 확립됐다고 볼 수 있을까요.
“중의학은 황제내경이라든가 상한잡병론 금궤요약(金풤要略) 같은 고서가 토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전국시대와 한나라 때 골격이 확립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오늘날 통용되는 중의학은 기존의 이론체계에 문화혁명 이후의 유물론적 사관이 결합되면서 독특하게 발전한 것입니다. 진시황이 천하를 제패하면서 도량형을 통일시킨 것처럼, 마오쩌둥은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중의학에 일정한 계통을 세우도록 지시했습니다. 예를 들어 각자가 비장하고 있던 경험방(經驗方)이라든가 비방(秘方)을 모두 문서화하도록 했어요. 그러는 과정에서 중의학 고유의 신비스러운 부분이 거의 사라지고 유물사관에 입각한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성격이 많이 가미된 것이지요. 한마디로 한나라 때 골격이 잡혔던 중의학이 20세기에 들어와서 새롭게 탈바꿈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의학과 우리나라의 한의학과는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요. 또 역사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습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예전에 한(韓)의학을 동의학이라고 불렀습니다. 동의보감이나 사상체질에 관한 몇 가지 책을 제외한 대부분의 책들, 예컨대 황제내경이나 상한론 등등의 전통의학서들은 모두 중국 것이죠. 이 점으로 미루어 한의학은 중국 전통의학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봅니다. 중국에서도 내몽골 쪽의 전통의학은 몽의(蒙醫)라고 부르고 티베트 쪽의 전통의학은 장의(藏醫)라고 부릅니다. 또 남쪽의 소수민족들도 나름대로 이름을 붙여서 무슨무슨 의학이라고 하는데 역시 한족의 중의학을 받아들여 나름대로 변용한 것입니다. 우리 경우도 중의학을 아주 독특하게 발전시켰는데, 중국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발전시킨 영역이 있을 정도입니다.
거꾸로 한의학이 중의학에 끼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다고 봅니다. 다만 동의보감의 경우는 중국에서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요. 제가 1992년에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중국어로 된 동의보감을 샀을 정도니까요.”
-오늘날의 중의학과 한의학을 비교해보면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납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문화혁명 이후 중의학은 유물론의 영향을 받아 많이 바뀌었습니다. 의학교과서에도 유물사관이 나옵니다. 그런데 중의학은 원래 고대부터 유심론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완전히 빼지는 못하고 일부 소개하고 있는 정도예요. 아무튼 이렇게 전통의학을 유물사관으로 새롭게 정립하다 보니까 중의학에서 신비로운 부분은 대부분 삭제돼버린 겁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중의학을 답습하지 않고 독창적인 이론과 의술을 개발하는 등 나름대로 발전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명칭도 중의학이 아닌 한의학(韓醫學) 아닙니까. 그런데 한의학은 체계적인 이론이나 과학적인 방법에 의존하기보다는 다소 형이상학적인 성격이 가미돼 있다고 보여집니다.
제가 볼 때 이 부분에서 양국의 전통의학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원리는 같다고 봐야겠지만요. 중의학은 형이상학적으로 흐르지 않는 반면에 기초가 상당히 탄탄합니다. 황제내경을 이론적으로 밝힌 논문과 책만 해도 무지무지하게 많습니다. 그만큼 중국사람들은 이론에 충실하다는 얘기죠. 한국의 다소 형이상학적인 측면과 중국의 실증적 이론을 접맥시키면 아주 좋을 것 같아요.”
-얼마 전에 허준(許浚)의 동상이 상하이중의약대에 세워졌다고 합니다만, 허준이나 동의보감에 대해 중의학계에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중국 전체로 볼 때 한의학은 그다지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최근 들어 한의학이 뜨면서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났죠. 중의학 기초이론서를 보면 대부분이 중국 책이고 일본책이 두어 권쯤 되죠. 그리고 동의보감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오장육부 가운데 담낭에 관해 설명하는 대목에는 동의보감의 관련부분을 인용하고 있어요. 그들이 보기에는 변방이라 할 한국의 이론을 중국의 정통 교과서에 인용해 설명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봅니다.”
서양의학 선호의 배경
-현재 중국인의 질병치료나 건강유지에 있어 중의학은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까.
“중국사람들은 흔히 ‘중의는 크게 치료하는 것도 없고, 탈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만성병이나 고질은 중의학으로 고치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밖의 질병 치료에는 대부분 서양의학을 선호합니다. 치료효과가 빠르고 눈에 드러나는 서양의학을 더 중시하는 방향으로 의식이 바뀐 것입니다. 한마디로 중의보다 서의(西醫), 즉 서양의학을 공부한 의사를 더 찾는다는 것이지요. 의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는 중의약대학을 졸업한 중의(中醫)가 서의도 겸할 수 있는데, 약을 처방할 때도 서약(西藥) 위주로 하고 있어요. 이처럼 환자나 의사가 서양의학을 선호하는 배경에는 중국인이 아직은 양약에 대한 내성(耐性)이 약하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한국사람만 해도 그동안 항생제를 많이 복용한 까닭에 효과를 보려면 상당히 많은 양을 써야 하는 데 비해 중국인은 아직 그런 내약성이 약하기 때문에 항생제 효과가 빠르고 정확하게 나타나는 편입니다.”
-전통의학보다는 서양의학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황이 한국과 비슷한 것 같군요.
“그렇죠. 비슷한 과정을 거치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 한국에서는 최근 전통의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아마 중국도 머지않아 다시 전통의학을 중시하는 쪽으로 흐름이 바뀌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실제 중의학에 의한 질병치료가 어떤 부분에서 상대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십니까.
“예를 들어 고열이 날 때 서양의술보다는 동양의술이 열을 더 빨리 떨어뜨립니다. 원인을 제거하기 때문이지요. 오늘 날씨가 고온다습하지 않습니까. 이럴 때 습열(濕熱)이라는 증상이 나타나기 쉬운데, 이 경우 습을 빼지 않으면 열이 떨어지질 않아요. 그런데 서양의학에서는 습을 빼는 약이 없어 해열제를 쓰지요. 그러면 열이 떨어지는 듯하다가 다시 오릅니다. 반면 중의학에서는 습과 열을 빼기 위해 약으로 소변이나 대변을 쫙 빼버리는데, 곧바로 괜찮아집니다. 물론 약을 달여서 복용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은 있습니다만,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내면 중약(한약)이 훨씬 효과가 빠를 수 있어요. 반면에 반드시 수술을 해야 하는 경우는 중의로 효과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단순히 뼈에 금간 것이 아닌 복합골절상이나 외상으로 인한 장부파열 등 빨리 처치해야 하는 경우 중의의 치료효과는 상대적으로 떨어진다고 봅니다.”
-중의학에서 사용하는 의술로는 대개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진맥을 한 뒤 그에 따라 처방을 내려 약을 달여 먹는 게 중의학의 가장 기본적인 치료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중에서도 고대로부터 내려온 침술이 대표적인 의술이죠. 침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요. 알코올램프에 달궈서 뻘건 빛이 없어지기 전에 침을 놓고 바로 빼는 불침 혹은 화침(火針)이 있습니다. 제가 직접 실험해봤습니다만, 양기가 극도로 쇠할 때 또는 한사(寒邪)가 심하게 들었을 때 효과가 좋습니다. 다음에 침을 꽂고 나서, 침 꽂은 부위에 부항을 뜨는 방법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부항 안에다 불을 집어넣고 어혈(瘀血)을 뽑아내기도 했지요. 또 요즘에는 침 맞을 때 통증이 적은 이침(耳針)을 쓰기도 합니다. 이침은 왕불유행(王不留行)이라는 조그맣고 딱딱한 씨앗을 반창고에 붙여서 귀의 혈자리에 부착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피내침(皮內針)이나 조그만 침으로 혈자리를 자극합니다만 중국에서는 이침을 쓰고 있어요.
추나요법이나 안마도 중의학의 중요한 분야입니다. 안마도 족안마부터 경락마사지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많습니다. 이밖에도 다른 의술에선 찾아볼 수 없는 중의학만의 특색으로 기공을 꼽을 수 있습니다. 기공치료도 중의학의 한 부분으로서 큰 비중을 차지했고 효과도 상당히 좋습니다만, 파룬궁 사태 이후 거의 사라진 것 같아 아쉽습니다. 또 좌욕법도 있습니다. 여기에도 땀을 내게 하는 법, 토하게 하는 법, 설사로 쏟게 하는 법, 심신을 조화롭게 해주는 화법(和法) 등 여러 가지 치료술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만 소개하면 욕조에 뜨거운 물을 넣고 약재를 풀어 좌욕을 하면 관절염에 효과를 볼 수 있어요. 티베트나 서북쪽 추운 지역 주민들이 널리 활용하고 있는 방법입니다.”
-중의학에서 침술의 중요성이랄까 비중은 어느 정도로 보아야 합니까.
“과거 약이 제대로 구비돼 있지 않은 벽지에서는 웬만한 질병은 다 침으로 치료했습니다. 그 정도로 비중 있는 치료법이었지요. 특히 관절이나 경락에 관련된 질병 가운데 침 한 방으로 나을 수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침을 맞으려 하기보다는 약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갈수록 침의 비중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요. 반면 서양에서는 침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가고 있지요. 제가 중국에 처음 왔을 땐 이름 있는 침의 대가가 꽤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대부분 외국에 나가서는 들어오지 않고 있어요. 중국보다 오히려 선진외국에서 침을 알아주니까 그대로 눌러앉은 게 아닌가 합니다. 어쨌든 아쉬움이 많습니다. 정작 동양의학의 본고장에서 침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말입니다.”
-한국에서는 사상의학(四象醫學)에 대한 관심이 높은 편인데, 중국 의료계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이게 원래 중국에서 나온 것 아닌가요.
“사상이론은 중국에서 나온 것으로 압니다만, 그 이론을 사람의 체질에 접맥시킨 것은 동무 이제마 선생입니다. 상당히 획기적인 논리지요. 중국인들도 체질을 그렇게 분류한 것에 대해서 놀라워하고 있습니다만, 아쉽게도 중국에는 사상의학이라는 건 없습니다. 단지 사상의 개념만 있을 뿐이죠. 지금 옌볜지역에 사상의학으로 치료하는 병원이 있기는 합니다. 의사가 조선족 동포로 이제마의 수제자였다는 분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나온 중국 교과서를 보니까 놀랍게도 체질의학이 들어 있더군요. 그전에도 중국에 나름대로 체질의학이란 게 있었습니다만, 비중이 크지는 않았거든요. 아마 한의학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中·西醫 결합 체계의 장점
-암을 비롯해 불치병으로 알려진 질병에 대해서는 중의의 치료술이 어느 정도 활용되고 있습니까.
“저도 임상에서 암환자를 많이 대합니다만, 간암이나 폐암은 다른 암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월한 것 같아요. 최근 제가 치료하고 있는 한 암환자는 병원에서 두 주일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통고를 받고 나서 저를 찾아왔는데, 지금 4개월째 살고 있습니다. 이 분은 병원에 입원하고 있지만, 항암제 치료는 전혀 못한 채 순전히 중약(中藥)으로만 지금까지 생존해오고 있습니다. 완전치료는 어렵다 해도 생명연장에 중약이 상당한 효과를 보이는 것 같아요. 중국에는 순전히 중약만을 가지고 암을 치료하는 의사들이 있는데, 환자가 꽤 여럿 찾아옵니다. 아무래도 효과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완치된 사람으로부터 소개받고 왔다는 사람이 꽤 많더라고요. 물론 그 의사가 암환자를 100% 다 치료하는 건 아니지만, 일반 병원에 비해서 치료율이 상당히 높다고 볼 수 있죠. 과연 어떤 원리로 암을 치료하는가를 밝혀내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만 결과적으로 효과가 상당히 좋은 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암 이외에 완치가 어려운 피부병이라던가 자궁병, 위장병도 중약으로 치료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난치병에 대해 중의 쪽에서는 서양의학과 전혀 다르게 접근합니다. 예를 들어 간단하게 원인제거를 해서 치료하는 경우도 있죠. 중국에서 전통의학으로 암이나 난치병을 치료하는 의사를 여럿 만나봤는데, 시안(西安)이나 산시성(山西省) 쪽에 특히 그런 의사가 많아요. 어떤 분은 서양의학과 중의학을 결합해서 치료하고, 또 어떤 분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처방을 가지고 치료하는데, 아무래도 후자가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병원에서 치료하다가 안 되니까 이런 분들을 찾아가는 암환자도 많지요.”
-성인병에 대한 중의학의 연구나 치료 수준은 어디까지 와 있나요.
“성인병이라면 기본적으로 고혈압과 당뇨, 심장병을 말하는데, 대부분 발병의 주원인은 혈액에 있다고 봅니다. 즉 혈액이 탁해질 때, 혈관에 노폐물이 쌓이고 그러다 보면 압력이 높아지는데 이게 고혈압이죠. 혈압이 높으면 신진대사의 균형이 깨지면서 신장이나 간 등에 병변이 나타납니다. 서양의학에서는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지면 혈액이 탁하다고 합니다만, 중의에서는 혈액이 흐르는 속도가 늦어도 탁해지는 것으로 봅니다. 아무튼 혈액이 탁해져 성인병이 발생하는 것이라면 혈액을 맑게 해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겠지요.
서의에서도 혈액을 맑게 하는 약이 더러 있습니다만, 중약(한약)에서는 화담제(火痰劑)라고 해서 담을 삭히는 약, 어혈을 풀어주는 약들이 모두 성인병 치료에 쓰입니다. 이런 약들이 기본적으로 피를 맑게 해주는 것이지요. 최근 들어 한국에서 상황버섯이나 차가버섯 같은 일종의 보조약들이 널리 쓰이고 있는 것도 피를 맑게 하는 약효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버섯들이 항암작용을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바로 피를 맑게 해주기 때문에 이차적으로 항암력을 발휘한다는 의미입니다. 버섯 종류는 대부분 피를 맑게 해줍니다. 중국에는 버섯 종류 말고도 화담을 삭혀주는 약이 매우 많아 성인병 치료에 쓰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중의약에 의한 성인병 치료는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한 효과를 보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요즘은 중의에서도 과학적인 의료장비가 많이 활용되고 있다고 하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중국에서는 중서의(中西醫) 결합 체계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중의에서도 서양의학에서 개발된 의료장비들이 자주 이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의사가 진단을 내리고 약을 처방할 때는 피검사나 초음파검사 결과를 보고 합니다. 치료는 탕약으로 하더라도 진단과정에서는 의료장비를 활용한다는 것이지요. 기공의 치료효과에 대해서도 그 메커니즘을 밝히려고 과학적인 장비를 동원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중서의 결합의 정도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죠. 한국에서도 요즘 한의원에 가면 병원에서 쓰는 의료장비들을 볼 수 있지만, 아직 중국처럼 본격적으로 활용하는 단계는 아닌 것 같아요. 한의원과 큰 병원이 협진을 한다면 이런 문제는 풀리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중서의 결합을 말씀하셨는데요. 의료장비를 사용하는 것 외에 중의와 서의가 결합된 진료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까.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얼마 전 한국에서 환자 한 사람을 두고 의사와 한의사가 함께 진료하고, 처방을 내리고, 약을 썼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방식은 서로 시각이 다른 두 의사가 함께 치료하는 형식이죠. 반면, 중국에서는 의사 한 사람의 사고에서 다양한 치료법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환자에 대해 약을 쓸 건가 침을 쓸 건가, 아니면 안마를 할 건가를 한 사람이 판단한다는 겁니다.
중국의 중서의 결합 시스템은 바로 이런 부분에서 장점이 있습니다. 환자 입장에서는 중의 서의 양쪽을 겸한 사람으로부터 상당히 깊이 있는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이런 식의 진료가 가능한 것은 중의약대 커리큘럼에 서양의학 과목이 상당히 많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의약대를 졸업하고 병원에 들어가 중의외과에서 근무하게 된다면 치질 같은 외과수술도 합니다. 소독이나 살균도 서의에서 하는 것처럼 똑같이 하고, 수술한 뒤에 주사 놓고 항생제를 주는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수술후 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탕약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서양의학을 전공하는 일반 의과대학생들은 중의학을 배우지 않지만 중의약대생들은 서양의학도 함께 배우기 때문에 중서의 결합 진료가 가능한 것이지요.”
김 박사는 요즘 ‘베이징의 허준’이라고 불린다. 여행가로 유명한 한비야씨가 베스트셀러 ‘중국견문록’에서 김 박사를 그렇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 박사는 유학생 시절부터 베이징의 한국인들을 무료로 진료해주고 있어 교민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한비야씨도 베이징 유학중에 김 박사에게 신세를 졌고 그 인술에 감동해서 저서에 그런 찬사를 늘어놓게 됐던 것. ‘베이징의 허준’에게 중국의 이른바 명의(名醫)에 관해 질문을 던져보았다. 또 신묘하기 짝없는 비방(秘方)의 내막도 캐물었다.
현대의 명의들
-현재 중의약계에서 명의라고 일컬을 만한 뛰어난 의사가 얼마나 있다고 보십니까.
“지금도 4대 명의니 10대 명의니 하는데, 정말 대단한 분이 많아요. 이들은 대개 의대 교수나 일반병원의 의사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명의를 소개하면, 소아과에 류비천(劉必陳)이라는 의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항간에서 아동왕이라고 부를 정도로 어린이 관련 질병을 정말로 잘 봅니다. 내과분야에서는 임상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체계까지 정리해 내과 교과서를 만든 퉁젠화(董建華)라는 명의가 있었는데, 최근 작고하셨습니다. 또 류두저우(劉度舟)도 명의로 알려져 있는데, 이분은 기초보다는 임상체계를 정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중의학 분야의 임상에 관한 책은 거의 다 이 사람이 썼을 정도로 명성이 높습니다.
물론 명의 가운데에는 이런 분들처럼 이론적으로 정립된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질병에 관한 치료법을 전수받아 뛰어난 치료효과를 보이는 분도 있고, 청나라 때 어의(御醫)의 후손이나 제자가 현대적인 교육을 받고 다시 명의로 떠오른 경우도 있어요.”
-중국 최고지도층 인사들의 주치의는 서의, 그러니까 일반 의사가 맡고 있습니까 아니면 중의사가 맡고 있습니까.
“대부분 서의가 맡고 있다고 봐야 할 거예요. 예를 들어서 베이징에 협화병원이라는, 진료비가 상당히 비싼 병원이 있는데요. 이곳의 의사들이 최고지도층 인사들의 진료를 주로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의사는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덩샤오핑의 말년 무렵 수시로 사망설이 나돌았지만 결국은 1997년에 93세로 사망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덩샤오핑의 장수비결과 관련해 중국 최고의 의료진이 온갖 의술을 펴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다는 말들이 떠돌았습니다만, 실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당시 12명의 기공사가 덩샤오핑에게 계속 기를 불어넣어 생명을 연장시켰다는 소문이 있었지요. 아무튼 현대의술뿐 아니라 중국의 독특한 의술이 총동원돼 생명이 연장될 수 있었던 게 사실이라고 봅니다. 덩샤오핑이 장수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비결은 동충하초를 많이 복용한 데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때 동충하초 가격이 폭등했지요. 지금은 일본사람들이 싹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동충하초를 대량으로 사간다고 하더군요.”
비방(秘方)은 실재하는가
-중의학 하면 이른바 비방이 떠오르는데요. 실제로 특정 질병에 특별한 효험을 보이는 그런 비밀스런 처방이 있습니까.
“제가 중의학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 비방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보통 병증을 분별하는 변증(辨證)을 통해서 처방하기 때문에 의사 개개인의 처방이 각기 다르고 치료법도 다릅니다. 이에 반해 이른바 비방을 보면 처방, 그러니까 약은 고정돼 있고 거기에다가 병을 대입시키는 식이거든요. 그래서 처음에 저는 비방이란 걸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해나가는 동안 다른 병은 하나도 볼 줄 모르지만 어느 한 가지 병에 대해서는 진맥도 안 하고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약만 써서 병을 완치시키는 사람들을 목격하게 됐어요. 그게 바로 비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물론 무슨 약을 썼는지는 당사자 외엔 아무도 모릅니다만, 이런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겁니다. 제가 중국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녀보았는데, 비방을 쓰는 의사가 구석구석에 상당히 많더군요. 이들은 체계적으로 배우지도 않았고 의사 면허도 없이 그냥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비방으로 평생 동안 환자를 치료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사례들을 수없이 목격하면서 저는 비방이란 게 분명히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비방은 약재를 임신부의 배꼽 밑에 붙이면 대부분 원하는 성별의 아기를 낳는다고 합니다. 임신하고 한 달 안에 이 비방을 써야 한다는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요. 현대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지만, 적중률이 높다고 해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거든요. 또 화상을 입었을 때 치료효과가 기막힌 비방을 가진 사람도 봤습니다. 어떤 화상환자든 비방으로 만든 약을 바르면 새살이 돋아나 완치율이 아주 높다는 겁니다.”
-그 비방들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래서 그 실체를 파악해보려고 비방으로 소문난 분들을 찾아가 물어봤습니다만, 그렇게 쉽게 알려주지 않더라고요. 대개가 누구한테도 비방을 알려주지 않는다, 절대로 안 된다, 오로지 장남한테만 전해준다는 식입니다. 그것도 기록으로 남기는 게 아니라 주로 구전으로 알려주어 남이 알 수 없게 한다는 것이지요.”
-중의약대학의 교수들은 그런 비방에 대해서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교수들은 모두 그런 건 없다고 하지요. 정통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비방은 없다는 입장입니다. 특히 대학교수들은 콧방귀 뀌듯 단정적으로 없다고 말하죠. 그러나 제가 실제로 중국을 돌아다녀본 바에 따르면 그런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실제로 목격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화상치료를 잘한다고 소문난 분을 베이징 근교로 찾아간 적이 있어요. 쇠창살 문 앞을 송아지만한 개가 지키고 있더군요. 의사를 만나 중의약대학에 다니고 이러이러한 공부를 하는 사람인데 좀 물어보고 싶다 했더니 한마디로 그냥 돌아가라는 거예요. 돌아가다가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찾아갔더니 자네 같은 사람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오는데 절대 만나지 않는다며 치료장면도 보여주지 않더라구요.
마침 치료받고 나오는 환자가 있어 환부를 볼 수 있었는데, 무슨 약을 바른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어요. 그 환자의 경우 일주일에 한 번씩 약만 발라준다고 하더군요. 새살이 거의 다 돋아난 상태였어요. 웬만한 화상은 세 번만 바르면 다 낫는다는 거예요. 3도 화상 같은 경우는 근육까지 익어서 살이 짓무르면 치료가 불가능한데, 정말 새살이 돋아나고 흉터도 별로 없을 정도로 치료효과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 중국 중의연구원에서 운영하는 서원병원이 백혈병 치료를 잘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만, 이 병원의 혈액과 주임의사가 이른바 비방을 전수받은 사람이에요. 어떻게 비방을 전수받았는가 하면, 옛날에 베이징 근처에 백혈병 치료로 소문난 할아버지가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중의연구원에서 사람을 파견해서 치료법을 전수받도록 했다는 겁니다. 처음엔 이 할아버지가 전수를 거부했지만 끈질기게 설득해 결국 전수받을 수 있었고, 비방을 전수받은 이 의사는 자기 약국을 따로 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합니다.”
-비방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요. 한두 가지만 더 소개해주시지요.
“산둥성 리뎬(李店)이라는 동네에 가니까 비방으로 만든 고약을 가지고 300여년간 대대로 의업을 꾸려온 집안이 있더군요. 마침 그 집의 아들이 중의약대학을 졸업해 얘기가 잘 통했습니다. 이 집의 비방은 골절시 뼈가 잘 붙고 후유증이 전혀 없는 고약이었어요. 보통 골절이 되면 치료를 해서 뼈가 다 봉합됐어도 날 궂으면 쑤시고 아프거든요. 조직에 어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병원이라고 하기도 뭐한 아주 허름한 집에 엑스레이 기계가 한 대 놓여 있는데, 환자가 오면 먼저 골절부위를 찍어 봅니다. 그리고 나서는 골절부위를 딱 맞추고 고약을 그 위에 붙인 뒤 석고가 아닌 딱딱한 나무를 대고 붕대를 감아주는 겁니다. 1주일에 한 번씩 약을 갈아주는데 세 번만 갈아주면 완전히 낫는다고 하더군요. 물론 어혈 같은 후유증도 없이 말입니다.
또 간염만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비방도 있습니다. 산둥성 시골의 할아버지 의사였는데, 이분은 1년에 간염환자 300여명을 본다고 합니다. 지금 서의에서건 중의에서건 B형 간염이 불치병의 하나입니다. 간경화나 간암의 90%가 B형 간염에서 비롯되죠.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보균상태의 간염환자를 치료하시더군요. 이 할아버지 역시 처방전 대신 약을 주는데, 제가 이 약을 입수해 분석을 해봤습니다. 그래서 어떤 약재인지를 알아낼 수 있었지만 가루로 된 두 가지 약재는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무궁무진한 약재의 세계
중국에서는 중의학이란 말과 함께 중의약이란 표현도 자주 쓰인다. 그래서 대학도 중의학대학이 아니라 중의약대학이다. 그만큼 중국의 전통의학에서 약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의원을 찾아가면 결국은 한의사의 처방에 따라 한약을 지어 먹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처럼 중국에서도 탕약으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광활한 중국대륙에서 나오는 약재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중국은 땅이 넓어 그만큼 물산도 풍부한데요. 중의학에서 쓰는 약재의 종류는 얼마나 다양합니까.
“중의학 교과서엔 일반적으로 쓰이는 약재 484가지가 나옵니다. 이외에도 각 지역에서 쓰이는 이런저런 약재들을 합하면 무수히 많다고 봐야죠. 식물성 동물성 광물성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합니다. 식물성 약재만 해도 꽃과 열매, 잎, 껍질, 뿌리 등이 필요에 따라 각기 요긴한 약재가 됩니다. 광물성으로는 주사 우황 자석 석영 등 나름대로 독특한 효능을 가진 약재들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생태계의 모든 것을 약재로 활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중에서도 약효가 뛰어난 귀한 약재나 비싼 약재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중풍에 가장 좋은 게 사향(麝香)입니다. 특히 네팔에서 나오는 사향이 효험이 크다고 알려졌는데, 지금은 구할 수가 없고 대신 러시아산이 흔합니다. 당연히 값이 비싸고 가짜가 많습니다. 중국 의사들도 사향 같은 귀한 약재는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구하기도 어려운 데다가 실제로 써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지요. 또 간경화나 간암 타박상 등에는 웅담(熊膽)만큼 좋은 게 없습니다만, 이것도 구하기가 힘들어요. 요즘은 원담, 그러니까 웅담 그 자체를 구하기 힘드니까 중국 동북지역에서는 사육하는 곰에서 추출한 웅담을 많이 씁니다. 산삼은 중국에서도 최고의 영약으로 알아줍니다. 특히 지리산이나 설악산 것을 최고로 칩니다. 산삼은 기를 보하는 데 대단한 효과가 있어서 예를 들어 암으로 인해 기가 아주 쇠해졌을 때 복용하면 상당히 큰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서각(犀角)이라는 게 있는데, 코뿔소의 뿔을 말합니다. 코뿔소 이마에 커다란 뿔이 하나 있고 그 뒤에 움팍하게 생긴 작은 뿔이 돋아 있어요. 그게 바로 서각입니다. 서각은 모든 열증에 좋습니다. 중풍도 간에 열이 치받아서 생긴 것이므로 서각을 쓰면 좋고, 세균에 감염돼서 고열이 나는 경우에도 서각의 가루를 내서 복용하면 바로 열이 떨어집니다. 서각도 상당히 비쌉니다. 명청시기 중국의 황궁에서는 서각으로 술잔을 만들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에 도수가 높은 백주(배갈)를 따르면 술맛이 순해진다는 겁니다. 서각이 알코올의 열 성분을 다 분해해버리기 때문이지요.”
동충하초의 신비
-말씀을 듣고 보니까 대부분 동물성 약재들이 귀하기도 하고 약효가 뛰어난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동물성 약재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호골(虎骨), 즉 호랑이의 뼈입니다. 호랑이뼈는 관절염에 특효입니다. 바이러스로 감염되는 각종 류머티스는 현대의학에서 불치병으로 봅니다만, 호골을 쓰면 낫습니다. 뿐만 아니라 호랑이는 어느 부위를 막론하고 모두가 훌륭한 약재입니다. 심지어 호랑이의 변도 술 끊는 데 명약이라고 합니다. 호랑이와 관련된 에피소드 한 가지를 소개해볼까요. 제가 동북지역에 갔을 때 일입니다. 식사를 함께한 중국친구가 수첩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내 이를 쑤시는 겁니다. 바로 호랑이 수염으로 만든 이쑤시개로 할아버지 때부터 대물림한 것이라고 해요. 그러면서 자기 집안에는 대대로 충치가 없다며 자랑을 하더군요. 호랑이는 정말 뼈부터 시작해서 털 기름 등등 몸 전체가 좋은 약재입니다.”
-앞에서 덩샤오핑이 동충하초를 복용했다고 해서 한때 동충하초 붐이 일었다고 하셨는데요.
“맞습니다. 그래서 저도 동충하초 산지로 유명한 티베트 지역을 일부러 가봤습니다. 동충하초는 해발 4500m 이상 고산지대에서만 살거든요. 가서 보니까 사람들이 동충하초를 잡는다고 모두 초원에 누워 있어요. 모로 누워서 풀숲을 주시하다가 움직이는 동충하초를 잡는 것이지요. 이 벌레는 얼른 보면 풀과 매우 흡사해서 찾아내기가 힘듭니다.
동충하초를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런 겁니다. 동충하초는 겨울철에 애벌레 상태로 있다가 여름에 나방이 되려고 할 때 이 벌레의 머리에서 포자가 발아합니다. 이 포자는 애벌레의 진액을 먹고 자라나는데 일종의 버섯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과정에서 애벌레는 서서히 말라죽지요. 버섯이 애벌레의 양분을 적당히 빨아먹었을 때 잡아서 말린 것이 바로 동충하초입니다.
동충하초는 보(補)해주는 약재로 특히 폐와 신장에 좋은데, 이 성분이 암세포는 피하고 정상세포에만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암환자가 기력이 떨어졌을 때 동충하초를 씁니다. 암환자에게 보약을 쓰면 오히려 일찍 사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정상세포뿐 아니라 암세포도 함께 보해주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이 한약을 잘못 먹으면 간경화가 된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지요. 아무튼 동충하초는 암환자에게 특효가 있는 보약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동충하초는 티베트에서만 나옵니까.
“티베트와 칭하이성(靑海省), 쓰촨성(四川省) 북부의 고산지대에서만 나오고 저지대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또 인공재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귀할 수밖에 없지요.”
환경오염과 약재의 효능
-중의에서 쓰는 약재로는 역시 식물성이 많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식물성 약재로서 약효가 뛰어난 것 가운데 홍경천(紅景天)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것도 고산지대에서만 자랍니다. 제가 티베트에 가서 보니까 홍경천이 널려 있더라고요. 홍경천은 관절에 좋고, 간장과 신장 기능을 강화시키는 데에 뛰어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국에서는 마라톤 선수들에게 홍경천을 복용시켰다고 해서 유명해졌지요. 설련화(雪連花)라는 약재도 티베트의 고산지대에서만 자라는데, 관절염과 부인병에 특효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영지도 특별한 약재에 해당되는데, 비슷한 것으로 고산지대에서 나는 설령지(雪靈芝)라는 게 있습니다. 류머티스 관절염에 아주 좋다고 합니다.”
-강이나 바다 쪽에서 나오는 약재는 없나요.
“한국에서는 거의 안 씁니다만 해마나 해룡 같은 것이 있어요. 해마의 경우 정력제로 비아그라보다 효과가 더 좋다고 해서 요즘 포획이 성행하고 있다더군요. 간에 좋고 원기를 북돋워주는 효능이 있습니다.
광물질로는 용골이 유명합니다. 옛날에 후난성(湖南省)인가에 한 의사가 있었는데 치료를 잘해 항상 문전성시였다고 해요. 그런데 아무에게도 그 비결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양반이 며칠에 한번씩 밤에 슬며시 어딘가를 갖다 오는 걸 알고 누군가가 어느 날 몰래 따라가 보니까 무언가를 캐오더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용골이라는 것인데, 공룡화석으로 보면 됩니다. 이 용골은 신경안정제의 효능을 발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삼의 경우 한국산을 최고로 치지 않습니까. 농산물도 중국에서 수입한 것보다는 국산을 더 상품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고요. 한약재의 경우 어느 나라의 것을 품질이 우수하다고 보고 있나요.
“드라마 ‘허준’을 보면 청나라에서 약재를 밀수하다가 걸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만큼 옛날부터 우리가 중국의 약재를 많이 수입해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 것이 좋고 나쁜 게 아니라 필요한 것을 가져다 쓰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계피는 발한제로 좋은 약이지만 중국 남방에서만 나옵니다. 감초는 중국 남방에서는 나지 않고 간쑤성(甘肅省), 내몽골 등지의 고온건조한 지역에서 나는 것이 당도도 높고 효과가 아주 좋습니다. 어릴 때 제가 살던 동네에서도 감초를 재배했는데, 전부 망하더라고요. 당도가 떨어지고 비린 맛이 나서 인정받지 못한 때문이지요. 인삼이나 산삼은 역시 한국산이 가장 효과가 좋으니까 그걸 쓰려고 하는 겁니다. 결국 어느 나라 한약재가 좋다, 나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토양이나 기후가 각기 다르므로 각 지역마다 독특한 약효를 지닌 약재들이 나온다고 봐야죠.”
-환경오염 등으로 인해 약재의 효능이 예전만 못할 것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약재는 원래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순수한 성분을 충분히 함축한 것이 약효가 좋습니다. 재배를 하게 되면 아무래도 약효가 떨어집니다. 산삼을 집에서 재배하면 본래의 약효가 안 나오거든요. 그러나 자연산을 많이 취할 수 없어 재배를 하는 것이지요. 지금 중국에서 대형 약재시장의 주변지역이 모두 약재 재배단지로 바뀌었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농약도 쓰겠지요.
문제는 이렇게 재배한 약재에 과연 약효가 있겠냐는 점인데, 저는 이렇게 봅니다. 식물은 환경조건이 맞지 않으면 거기에 맞춰 적응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산성비가 내린다 해도 식물은 나름의 변화과정을 거쳐 살아남습니다. 특히 다년생 풀은 스스로 환경조건에 맞춰서 자기들만의 독특한 영역을 형성하기 때문에 극도로 오염된 상황이 아니라면 큰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재배할 때 특별하게 농약을 많이 사용하거나 수입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경우가 아닌, 일반적인 환경에서라면 그동안 다소 환경오염이 됐다고 해도 약재의 효과에 큰 차이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방금 중국의 약재시장 주변지역에서 약재들을 재배하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어느 정도로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중국에서 나오는 약재들은 대부분 대량 재배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워낙 수요량이 많아 모두 충당하려면 야생에서 채취하는 것만으로는 어림도 없거든요. 베이징에서 가까운 곳에 허베이성(河北省) 안궈(安國)라는 도시가 있어요. 그곳에 아주 큰 약재도매시장이 있습니다. 중국에서 나는 웬만한 약재는 모두 거래하고 있는데, 그곳 일대가 온통 약재 재배단지예요. 안궈시 자체가 약재를 재배하고 도매해 먹고 산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 약재시장이 중국에 얼마나 있습니까.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중국약재도 그런 곳에서 수출하는 것인가요.
“중국 전역에 이런 약재시장이 대략 30여개가 넘습니다. 서울의 경동시장 한약업사들도 모두 여기서 수입해가고 있지요. 저도 약재 조사를 하러 자주 찾아갑니다만, 한국 상인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중국 약재시장에 큰 문제점이 하나 있습니다. 일종의 비리라고 할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제약회사에서 약을 만들 때 보통 증기로 쪄서 약성분을 추출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한번 추출한 약재를 다시 가공해서 판다는 겁니다. 이런 경우 겉으로 보면 약재가 깨끗하고 좋은데, 가격이 의외로 쌉니다. 이렇게 한번 우려낸 것을 재포장한 약재가 꽤 많습니다.”
중국의 의학교육 체제
현재 중국에서 중의학을 공부하는 한국유학생은 줄잡아 수천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이들 중의학 전공유학생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한국에 돌아와서는 한의사시험에 응시할 자격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까. 중국의 의학교육 실태와 한국유학생 문제의 내막에 대해 물어보았다.
-중국의 의학교육 체제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우선 정규대학이 있고, 다(大專)이라고 하는 전문대와 독학과정인 쯔쉐(自學)가 있습니다. 정규대학은 일반 의과대학과 중의약대가 있는데, 이중 중의약대는 각 성마다 하나씩 있으니까 모두 30여개 가량 될 겁니다. 정규 중의약대는 원래 5년제였다가 최근 6년제로 바뀌었어요. 예과과정 2년과 본과 4년 해서 6년이니까 한국과 똑같죠. 아까 중의약대에서는 서양의학 과목도 배운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먼저 학부에서 중의학에 관한 기초과목을 배운 뒤 서양의학의 기초과목인 생리학 병리학 해부학 등을 공부하고 임상과목도 이수하게 됩니다.
학부과정을 마치고 대학원 석사과정에 올라가면 연구생이라고 합니다. 대학원 과정에서는 먼저 1년간 기초이론 수업을 마친 뒤 2년간 병원에 나가 임상근무를 하는데, 이때 자기 환자를 관리하면서 논문을 씁니다. 박사과정도 임상의 경우는 비슷합니다. 기간도 석사 때처럼 3년이지요. 박사과정이 끝나면 박사후과정을 밟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중의약대학에 들어가서 박사가 되기까지는 12년이 걸리는 셈입니다.”
-중의사가 되려면 면허시험에 합격해야겠지요.
“정규대학 졸업자의 경우 정부에서 실시하는 중의사면허시험에 합격하면 중의사 자격이 주어집니다. 전문대의 경우는 졸업 후 소정의 시험을 통과하더라도 바로 의사가 될 수 없고 의사보조 생활을 거쳐야 합니다. 독학을 한 사람도 중의사면허시험을 통과하면 의사가 될 수는 있지만 쉬운 일이 아니죠.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의사인 아버지로부터 배워 의술은 아주 뛰어난데 정규대학 공부를 안해 아직 정식 의사 노릇을 못한 채 보조역할만 하고 있어요. 의사면허 시험을 보라고 권해도 선뜻 응시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아무튼 중국에선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의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베이징중의약대의 경우 교수나 학생들의 학습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제가 경험한 바로는 마치 고등학교를 다시 다니는 기분이었어요. 오전수업 4시간, 오후수업 4시간으로 한마디로 강행군입니다. 완전히 고등학생이에요. 명색이 대학이라지만 한국의 대학에서 흔한 축제도 없습니다. 교수가 강의를 하는데, 첫 시간에 들어오자마자 교과서 진도를 나가는 거예요. 어떤 교수는 자기 이름 소개도 안 하고 진도부터 나갑니다. 그래서 한번은 첫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 성함이 뭡니까’ 하고 물으니까 그냥 칠판에 이름만 쓰고 나가더라고요. 물론 수업시간에 농담도 거의 없어요.
왜 이렇게 분위기가 타이트할까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바로 평가제도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는 학생이 교수를 평가하는 제도가 있거든요. 한번은 어떤 교수가 모친상을 당해 이틀간 결강을 했는데, 중국 학생이 학교측에 투서를 했어요. 결국 이 교수는 일요일에 보충수업을 해야 했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수업을 못했는데, 정말 너무한다며 눈물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한 시간이라도 빠지게 되면 꼭 보충수업을 해요. 게다가 학생들이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니까 학교 안에서 수업하고 먹고 자고 다시 수업하는 일상이 반복되는 겁니다.”
중의학 전공 유학생 실태
-한국에서는 우수한 학생들이 의대나 한의대에 진학하는데 중국에서는 어떤가요.
“중국에서 중의약대의 수준은 한국처럼 그렇게 높지는 않습니다. 의사 월급이 그리 많지 않고 돈을 벌기도 힘들기 때문이죠. 의과대학을 졸업한 서의는 수술을 한다든가 양약을 처방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인센티브가 있는 데 비해 중의 쪽은 별로 없거든요. 그 까닭인지 젊은 중의사들의 수준이 점점 떨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한국유학생은 어느 대학에 얼마나 있습니까.
“중국 전체에 걸쳐 많습니다만, 역시 베이징중의약대에 가장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상하이나 난징 톈진 등 웬만한 지역의 중의약대에는 한국유학생이 다 있어요. 창춘, 하얼빈 등지에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베이징중의약대에 입학할 때는 중의과 50명, 침구과 50명 해서 100명을 모집했습니다만 지금은 그 숫자가 꽤 늘어났습니다. 중의과와 침구과 외에 안마과, 간호학과, 기본과 등이 있는데 한국학생들은 주로 중의과나 침구과를 택합니다.”
-중의학을 공부하러 오는 한국 유학생들은 대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옵니까, 아니면 대학을 졸업하고 옵니까.
“제가 처음 유학 왔을 때 28세였는데 유학생들 중에서 중간이었어요. 유학생의 나이와 학업 정도는 천차만별이에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온 친구부터 군대 제대하고 온 친구, 교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온 사람, 미국에서 공학박사학위를 받고 대기업 이사까지 지낸 분도 있었으니까요.”
-한국유학생이 중의학을 전공하려면 중국어뿐 아니라 어려운 한문도 능숙해야 하지 않습니까. 언어와 문자의 장벽이 다른 분야보다도 훨씬 높을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중의약대학에 입학하려면 일단 중국어의 토익이라 할 한어수평고시(HSK)에서 6급 이상을 따야 됩니다. 기본적인 의사 표현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문제는 지적하신 것처럼 고문실력입니다. 특히 의학에 관한 고전인 의고문(醫古文)은 정말 두손들 정도로 어렵습니다. 중국인들도 어렵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니 한국인이야 더 말할 것도 없죠. 중의학의 4대 경전이라고 일컫는 내경이나 상한론뿐 아니라 여기서 더 깊이 공부하려면 고서들을 많이 찾아서 읽고 연구해야 하니까 고문실력이 중요합니다.”
-한국학생의 경우 중의약대학에서 탈락하지 않고 제대로 공부를 마치는 비율이 대개 어느 정도입니까.
“그나마 한국학생은 성적이 좋다고 볼 수 있어요. 제가 베이징중의약대에 입학할 때 100명 정도 들어왔는데 무사히 졸업한 사람이 49명일 겁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릅니다만 유학생 1기 졸업생은 그런 정도였습니다.”
-유학생들이 중의사 자격을 얻으려면 어떤 시험을 봐야 합니까.
“중의약대 5년과정을 졸업하고 1년의 인턴과정을 거친 후에, 중의사면허시험을 봐야 합니다. 이 면허시험이 중국인도 우수수 떨어질 정도로 어렵습니다. 외국인들에게 의사시험 볼 자격을 준 게 올해까지 쳐서 세 번째입니다. 실기와 필기시험이 있는데, 실기시험도 대충 보는 게 아니고 여러 가지로 나눠서 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증상을 하나 주고 이에 대한 기록부터 시작해서 진단은 무엇이고, 변증은 어떻게 하며, 처방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을 한 시간 내에 써내야 됩니다. 그 다음에 구술시험을 보는데, 심장병에 대해 설명해보라고 하면 줄줄이 다 얘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서양의술과도 관련되는 예컨대 심장압박술이라든가 수술시 무균조작법 같은 것을 구술하라고 합니다.
이런 과정을 다 통과한 사람만이 필기시험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필기시험은 실기시험보다 더 어려워서 1, 2차 시험에서 각각 60점을 넘어야 합니다. 제 경우는 필기시험 1차에 합격했으나 2차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한 해를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한의사 면허시험 불허 배경
-중의사면허시험에 합격하면 한국처럼 개인적으로 개업할 수도 있습니까.
“면허시험에 합격하면 병원 취업은 할 수 있지만 개업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중국에서 병원 개업은 중의학 분야에 크게 공헌한 퇴직 원로들에게나 허용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한국학생으로 면허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얼마 안 됩니다. 베이징대의 경우 지난해 9명이 합격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중의약대를 졸업한 한국유학생에 대해 한국내에서 한의사면허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주지 않고 있어 그동안 문제가 되어오지 않았습니까. 현재 이들 유학생은 귀국 후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한마디로 막막하죠. 최근 들어 한의사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시험인 예비고사제도가 생길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습니다만, 현재로서는 귀국해도 배운 것을 활용할 방법이 없는 실정입니다. 저희 동기생들이나 후배들 가운데 이곳서 석·박사까지 하는 경우는 얼마 안 되고 대개 제약회사에 취업한다든가 경동시장에서 일을 합니다. 아예 전업한 친구들도 있습니다. 또 중국어학원 강사나 무역업에 종사하는 등 정말 다양하게 흩어져 있습니다. 여기 중국내 병원에 취직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보수가 너무 적어요.”
-중의약대 유학생 출신에 대해 국내 한의사면허시험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봅니까.
“실력 면에서 볼 때 유학생 출신이 국내 한의과대학 나온 사람과 겨루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다만 국내에서는 한의대 입학하기가 무척 어렵지 않습니까. 이에 비해 중국유학은 쉽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똑같은 자격을 주기에는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생각이 배경에 깔려 있는 것 같아요. 일종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것이겠지요.
물론 공식적으로는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중국의 수업연한이 5년인 데 비해 한국은 6년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사면허자격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도 이제는 근거가 희박해졌어요. 중의약대도 1년의 인턴과정을 추가해서 6년제로 바뀌었고, 또 중국의 중의사면허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어쨌든 수많은 유학생이 중국에 와서 공부를 하고도 국내에서 발붙일 기회조차 없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낭비라고 볼 수 있어요. 중의약대에 인턴과정이 추가된 것도 중국측이 이런 문제를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만, 어쨌거나 이 문제는 빠른 시일 내에 합리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 상대 진료활동
미국은 이미 여러 해 전에 침술을 합법적인 의료술로 받아들였고 중약을 보건품으로 인정했다. 그런가 하면 유럽이나 남미의 의사들이 중의학을 배우기 위해 중국으로 몰려든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자신들의 의술의 한계를 깨닫고, 동양의술을 통해 부족한 점을 보완하려는 시도로 읽혀진다. 이러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중의약대 유학생의 국내 진출이 막혀 있는 우리 현실이 세계적 추세와는 달리 너무 폐쇄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합리적인 해결책이 나와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김 박사의 개인적 포부를 들어보았다.
-이제 중의학에 입문한 지 12년이 됐는데, 그 사이에 박사학위를 받고 의사자격도 얻었으니 하나의 매듭을 지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중국에 사는 한국인들을 위해 무료 진료활동을 벌여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앞으로 계획은 어떤 것입니까.
“아직은 한국에서 활동할 여건이 안돼 있으니까 당분간 중국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무료진료활동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베이징중의약대 학생시절부터 한국인을 상대로 진료를 해온 지 어언 10년이 넘습니다. 무료봉사한다고 하지만 실은 제가 배우는 게 더 많습니다. 여러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감도 얻었으니까 말이죠. 설령 한국에서 끝내 개업을 못하게 될지라도 저는 죽을 때까지 진맥을 할 생각입니다. 환자 진맥을 볼 때면 잡념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해집니다.
한편으론 문화혁명 때 정리된 문헌들을 찾아내 연구하는 작업도 계속할 생각입니다. 물론 중국 구석구석에서 비방으로 치료를 하는 특별한 의사들(?)을 찾아가 노하우를 전수받는 작업도 계속해야겠지요. 아무래도 대학에서 배운 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 있는 동안에는 대륙의 어느 오지라도 찾아다니며 비방을 배우는 일이 저의 숙원사업이 될 것입니다.
요즘의 중국대륙, 특히 대도시는 거대한 건설현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처에서 빌딩이 올라가고 재개발 공사판이 펼쳐져 있다. 거리마다 요란한 광고문구 가운데 둘 중 하나는 부동산 분양광고일 정도다. 경제가 발전하고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중국대륙을 휩쓸고 있는 건설 붐과 부동산 열기는 마침내 한국인에게도 옮겨져 베이징과 상하이 등에서는 한국인의 부동산투자가 열기를 띠는가 하면, 중국의 부동산만 둘러보고 오는 관광팀이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번 달에 만난 이운학(李雲鶴·42) 중국 인민대학 금융증권연구소 부동산자산관리 수석연구원은 베이징에 8년째 체류하면서 중국의 부동산에 관한 이론과 실제를 함께 다루고 있는 이 분야의 최고전문가. 국내 대기업과 컨설팅회사에서 해외부동산 투자담당을 역임했고 ‘중한 이코노미스트’ 편집장을 지냈다. 최근엔 한국관광공사의 베이징한국문화관광홍보센터 빌딩 매입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등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운학 연구원과 함께 중국인의 주거문화 및 부동산 관련 현황과 속사정을 알아본다.
먼저 우리와는 사뭇 다른 사회주의 중국에서의 부동산 개념과 개혁개방 이후 변화하고 있는 주거문화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자.
토지사용권의 개념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여서 부동산의 개념 자체가 우리와는 상당히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한국에서는 토지가 환금성이 있는 자산입니다. 개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있고, 법적으로도 보호받지요. 그러나 중국에서 토지는 국가와 인민이 공유하는 개념입니다. 국가는 원천적으로 토지의 소유권리를 가지고 있고, 인민은 국가로부터 일정기간 토지사용권을 취득할 수 있는 독점적인 권리를 가졌다고 보면 됩니다. 국유토지사용권을 확보한 개인이나 기업은 매년 국가에 토지사용료를 납부해야 하고, 이 토지를 용도에 맞게 활용해야 합니다. 토지를 개발하지 않고 보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일정 기간 토지를 개발하지 않을 경우 정부는 토지사용권을 강제로 환수할 수 있습니다. 이때 정부가 기본적인 보상비를 지급합니다.
중국에서 부동산의 가치는 토지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정부가 개인에게 토지사용권을 판매하거나 임대하는 것도 토지를 효과적으로 개발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토지보다는 지상권을 더 중시합니다. 한국에서는 토지를 중심으로 부동산 개념이 형성돼 있지만 중국에서는 개발 프로젝트 중심으로 부동산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동산을 사고파는 거래도 우리와는 다른 점이 많을 것 같은데요. 중국에서 부동산 거래의 정확한 개념은 무엇입니까.
“부동산 거래는 토지사용권 거래와 지상물 거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즉 토지는 사용권을 거래하고, 건물은 소유권을 거래한다고 보면 됩니다. 올해부터 토지는 국가와 개발자가 직접 공개입찰을 통해 거래하고 있습니다. 입찰은 공개된 장소에서 진행되는데, 토지를 필요로 하는 실수요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요.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중국에서는 토지 자체보다는 개발 프로젝트가 중요하기 때문에 토지거래시 토지의 용도에 맞는 프로젝트의 규모와 인허가 여부가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예를 들어 프로젝트가 준비돼 있지 않은 땅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건폐율과 용적률 그리고 사용권의 기간도 매우 중요한 요소지요. 그러나 일단 개발이 완료된 뒤에는 지상건축물을 중심으로 거래가 이뤄집니다.
중국의 부동산 거래에서 가장 혼동하기 쉬운 부분이 바로 토지의 사용기간과 지상권, 즉 건물의 소유권 문제입니다. 토지의 사용기간은 주택의 경우 70년, 문화 상업용지는 40년, 사무용지는 50년, 공업용지는 30~40년이 보통입니다. 이 기간에는 개발 부동산을 거래하거나 담보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토지사용기간이 만료될 경우 그 위에 들어선 건물의 소유권이 어떻게 되느냐가 모두의 관심사항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중국인뿐 아니라 중국에 투자하는 개인이나 기업 모두의 관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토지사용 기간이 만료된 사례가 없기 때문에 정답이 없는 상태입니다. 현재 중국정부의 입장은 토지사용기간이 끝나면 토지사용세나 토지출량금을 납부하는 것으로 사용권리를 연장해주겠다는 것입니다. 토지출량금은 토지개발 담보금 성격이 강하지만 개발가치를 금액으로 환산하는 토지관련 세금입니다.
토지는 무(畝) 단위로 거래하는데, 1무는 660㎡로 200평에 해당합니다. 반면에 지상권은 ㎡ 단위로 거래되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동안 중국에서는 국가에서 인민에게 주택을 분배했는데, 개혁개방이 심화되면서 이런 제도가 폐지되지 않았습니까. 주택 분배제는 현재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1998년 이전까지는 국가나 소속 기업에서 주택문제를 해결해주었습니다. 직장 근무기간과 공로에 따라 일정면적의 주택을 배분한 것이지요. 사영기업의 경우는 주택보조금을 지급하거나 국영기업과 같은 방식으로 주택문제를 해결해왔습니다.
따라서 1998년 이전에 국영기업에서 일정기간 이상 근무한 사람들은 주택을 분배받았고,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면서 분배받은 집의 소유권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러나 1998년 중국정부는 이 같은 제도를 폐지했습니다. 외자기업의 투자유치를 촉진하고 투자기업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주택공급을 기업이 자율적으로 하도록 한 것이죠. 그리고 급여에 주택보조금을 지급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부동산 개발이 본격화하고, 각 기업이 소유한 가용 토지를 개발하면서 종업원들을 대상으로 주택을 판매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경우 회사는 종업원의 급여를 담보로 은행에서 30년짜리 장기저리융자를 알선하기도 합니다.”
-주택분배제도의 폐지 이후 중국인의 내집 마련 현황은 어떻습니까.
“주택보급률은 100%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일부 농촌의 경우 국가의 재정문제로 주택보급이 원활치 못한 측면이 있지만 도시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과거 국영기업들이 직원들에게 주택을 공급했기 때문이죠. 심지어 맞벌이 부부가 각각 주택을 받은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중국에서 주택문제는 보유의 문제가 아니라 더 넓고 좋은 주거환경으로 옮겨가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현재 베이징의 주택면적을 보면 가구당 2.7명 기준으로 평균 21.5㎡(약 7평)를 점하고 있습니다. 이를 2005년까지 가구당 56.45㎡(15평)로 확대하고, 2010년엔 80㎡(26평)까지 늘린다는 계획입니다. 상하이의 주택보급계획을 보면 2030년 1인당 점유면적이 30㎡에 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선진국이 1인당 48~70㎡인 점을 감안하면 점유면적에선 상당히 접근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중국의 도시 거주자들은 핵가족화 경향이 있지만 대형주택을 선호하는 추세라고 봅니다. 더구나 중국에서는 주택의 보유 수량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기 때문에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주택을 사두는 경우도 많습니다.”
중국인의 내집마련 전략
-중국 서민들의 소득수준으로 미루어볼 때 주택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최근 중국의 부동산 투자는 50% 이상이 베이징, 상하이, 저장(浙江)성, 광둥(廣東)성, 장쑤(江蘇)성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소득수준이 높은 이들 지역의 1인당 평균소득은 4000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상하이나 베이징에 있는 다국적기업의 경우 월평균급여가 700달러를 넘기 때문에 주택가격이 높다고 해도 충분한 구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정부가 세금혜택이나 은행융자 등 주택구입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있어 생각보다는 손쉽게 집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보통 주택을 구입하여 등기까지 마치는 데 집값의 약 3.5%가 비용으로 들어갑니다. 은행을 활용할 경우 주택가격의 20%만 자기가 부담하고 나머지 80%는 20~30년간의 장기대출로 충당합니다. 이자는 보통 5% 안팎인데 면적과 주택가격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30년짜리 장기대출을 받아 보통의 주택을 사게 되면 매월 1000위안(15만원) 정도의 대출금 이자만 내면 됩니다. 현재 중국인의 소득수준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지요.
중국정부는 은행의 장기대출을 활용한 주택구입을 유도하고 있는데, 특히 85㎡ 이하의 공공주택은 경제주택(서민주택)이라고 하여 저소득층에 여러 가지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이 경제주택은 최저가격으로 공급하며, 장기저리의 은행융자 등 혜택이 있는 대신, 규제도 엄격합니다. 해당지역 주민 이외에는 구입할 수 없고 5년간 매매가 금지됩니다.”
-경제성장에 따라 중국 각지에서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중국인의 주거환경도 크게 달라지고 있지 않을까요.
“말씀하신 대로 중국의 도시개발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80년대를 기준으로 보면 도시화율이 20% 이상 진전됐어요.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주거환경이 질적으로 개선됐을 뿐 아니라 훨씬 다양해졌습니다. 도심지 재개발사업이 활발해지면서 전통주택이 철거되고 새로운 형태의 주택이 지속적으로 보급되고 있는 게 가장 두드러진 현상입니다. 새로 들어서는 주택은 크게 서민주택과 아파트로 나뉩니다. 아파트는 다시 면적과 가격에 따라 일반아파트, 주상복합 아파트, 호텔식 아파트, 콘도형 아파트 등으로 세분화되고 구매목적에 따라 주거용, 레저용, 투자용, 주상복합용, 임대용으로 구분되면서 소비자층도 더욱 세분화되는 추세입니다.
대체적으로 도심지역에는 주거용 주택이 많이 들어서고 있고, 도시 외곽에는 여유 있는 계층을 위한 주말용 주택이 속속 개발되고 있습니다. 주말용 주택 가운데에는 모든 설비가 완벽하게 갖춰진 최고급 별장형 아파트도 등장했습니다. 별장형 아파트는 보통 ㎡당 3000달러 수준이니까 평당 가격이 1000만원을 웃돌 정도로 고가인 셈입니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출퇴근의 편리성을 강조하는 독신자용 원룸형 아파트가 보급돼 새로운 주거문화로 정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중국인은 우리와 달리 입식 생활을 하기 때문에 주택의 형태나 기능도 우리와는 다소 다를 것 같은데,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의외로 중국인의 생활문화와 사고방식은 우리와 많이 다릅니다. 상대적으로 서구화되었다고 할까요. 가장 눈에 띄는 점이 아파트의 기본골조만 완공된 상태에서 분양하므로 각종 실내장식을 구매자가 자기 취향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또 아파트의 같은 동이라 해도 서로 면적과 구조, 방향이 다르고 이에 따라 가격 차이가 납니다. 따라서 중국의 아파트는 실제로 들어가보지 않고서는 어떤 상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파트 평형만 알면 들어가보지 않아도 내부구조를 알 수 있는 우리와는 전혀 다르지요. 이런 식이어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아파트 내에서 이웃과 만나기도 힘듭니다.
우리는 흔히 의식주라고 합니다만, 중국인은 그동안 식(食)을 가장 중시했어요. 그런데 최근 소득수준이 향상되면서 주(住)를 중시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습니다. 먹는 것보다는 좋은 집을 더 중시하게 된 것이지요. 한마디로 주택은 휴식을 위한 공간이라는 개념이 정착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각양각색 아파트 내부구조
-건설회사는 골조만 완성하고 각종 실내장식은 소비자가 알아서 하도록 한다고 하셨는데요. 왜 이런 관행이 생긴 것일까요. 불편하고, 비용도 많이 들 것 같은데요.
“사회주의 국가라는 특징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과거 주택을 정부나 기업이 분배해주다 보니 내부장식은 입주자가 알아서 하도록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개성을 중시하는 중국인의 성향도 이런 관행이 정착되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 같아요. 중국인의 구매행위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남이 산 것과 같은 물건을 잘 사려 하지 않고 늘 새로운 것을 선호하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중국인이 사는 아파트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획일적인 한국과 달리 집집마다 개성이 뚜렷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내장식에도 많은 비용을 들이는 편이지요. 가구나 집기 등의 교체주기가 짧고 첨단 가전제품을 구입하는 비율이 매우 높은 특징을 보이기도 합니다. 중국정부가 2001년 이후 공급되는 주택에 대해 기초적인 실내장식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지만 잘 먹혀들지 않는 실정이에요.
이런 배경에서 중국에서는 주택의 내부장식은 물론 공간의 설계변경도 집 주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새 아파트의 경우 입주가 시작되고나서 최소한 2년쯤 지나야 주변이 어느 정도 정리됩니다. 아파트단지 주변에 대형 건축자재상이나 가구시장이 들어서고 인테리어 시장이 활성화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입니다. 인테리어 비용이 보통 주택가격의 10%를 차지할 정도예요. 최근 들어 분양되는 주택 중에는 추가비용을 내면 표준화된 실내장식을 해주기도 합니다만, 주택의 분양에서 입주까지 시간이 걸리고, 이 기간에 새로운 장식재가 시장에 나오기 때문인지 신청자가 많지 않다고 하는군요.”
베이징을 2, 3년 만에 다시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빌딩이 곳곳에 들어선 데다가 좁은 골목길이 널찍한 대로로 변했는가 하면, 대규모 재개발공사가 진행중이어서 지리감각이 마비될 정도다. 이런 대대적인 도시 재개발로 인해 베이징은 최소한 외형적으로는 서울의 발전상을 능가한 것처럼 보인다. 2008년 올림픽이 가까워질수록 개발의 속도도 더욱 빨라지는 느낌이다. 물론 상하이나 다른 대도시들도 면모가 확 달라지기는 마찬가지다. 대륙을 휩쓸고 있는 부동산 개발의 내막은 어떤 것일까.
-요즘 중국의 어느 도시를 가든 부동산 개발이 한창입니다. 베이징이나 상하이는 물론이고 지방의 중소도시에 이르기까지 전국토가 건설현장 같은 분위기입니다. 특히 베이징은 2008년 올림픽을 앞두고 대대적인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중인데요. 주요한 사례를 소개하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베이징의 중심부에 왕푸징(王府井)이 있습니다. 서울의 명동에 해당하는 곳이지요. 베이징 시정부가 1997년부터 개발을 추진해 10억위안(약 1500억원)을 들여 거리를 새롭게 개조했습니다. 지금은 베이징의 대표적인 상업과 오락의 중심지역으로 변했지요. 개발 당시 고위공무원들이 부패혐의로 처형되는 진통을 겪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크게 성공한 역사적인 개발 프로젝트가 됐습니다.
특히 창안(長安)대로의 한 블록을 차지한 동방광장은 홍콩의 리츠 자본을 끌어들여 개발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호텔과 오피스빌딩 아파트 백화점 등이 들어선 이곳은 아시아 최대의 주상복합건물로 1층 상가는 세계 유명브랜드 상품들이 들어차 호화롭기 짝이 없습니다. 상가의 월 임대료는 ㎡당 400달러 정도입니다. 이곳은 중국 부동산 개발의 상징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1996년 개발이 시작돼 1999년 10월1일 건축이 완공되었습니다. 하지만 내부장식 등에 시간이 걸려 2002년에야 완전히 끝났습니다. 토지개발 면적 약 34만㎡, 총건축면적 265만㎡로 개발비용이 20억달러를 초과했다고 합니다.
현재 사무지역과 주거상업지역으로 나누어 개발되는 차오양(朝陽)구의 CBD(핵심상업지역)는 중국정부가 내놓은 야심작으로 2007년 말 완공될 예정입니다.
이밖에 하이뎬(海淀)구 서쪽 지역에는 단일 백화점으로는 세계 최대라 할 수 있는 옌샤(燕莎)백화점이 완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중국자본의 주도로 개발되고 있는 이곳의 면적은 68만㎡(23만평)나 된다고 해요. 국내외 펀드를 통해 조달된 자금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운영은 중국측이 한다고 합니다.
베이징 남쪽에는 중국정부가 제2의 푸둥(浦東)지구로 개발하는 BDA (Beijing Development Area)가 새로운 자립형 산업도시로 태어나고 있어 주목됩니다. 이곳은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새로운 자립형 도시로 성장할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베이징과 톈진(天津)의 중간지점에는 대학촌을 건설하여 중국의 주요대학과 해외 유명대학을 유치한다는 구상이 착착 진행되고 있어 향후 눈부신 발전이 기대됩니다. 이외에도 세계 500대 기업 유치를 표방하고 추진하는 500동(棟)의 빌딩 신축사업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민간 부동산개발 기업이 주도하는 이 사업은 한 개 기업에 빌딩 한 개씩을 판매한다는 야심만만한 전략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한국기업의 경우 LG그룹이 베이징 도심지역에 오피스(쌍둥이) 빌딩을 개발해 성황리에 임대를 완료한 바 있고, 현대자동차도 이전에 판 차오양구의 빌딩을 다시 구입했습니다.”
속출하는 부동산 재벌
-부동산 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토지의 소유자인 국가, 즉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등 제약요인이 많을 것 같은데요. 정부의 역할이랄까 개발에 대한 규제정책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국가가 토지공급을 통제 관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개발과정은 정부의 거시경제정책과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특히 올해는 중국정부가 농촌 농업 농민을 위한 이른바 ‘3농(農) 정책’ 실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정책에 따라 농촌의 토지를 무단 점용하거나 개발한 경우 원상회복을 명령하는 등 강력한 규제정책을 펴고 있거든요.
예를 들어 지난 5월부터 7월까지 도시의 토지거래 및 활용상태를 일제히 점검한 일이 있습니다. 정부가 허가해준 대로 개발이 시행되고 있는지를 조사한 것이지요. 정부에서 허가한 건폐율이나 용적률을 임의로 높여 분양함으로써 이득을 챙겼는지 여부와 농지를 무단 점유해 주택을 개발한 사례 등을 중점적으로 조사한 겁니다. 또 허가를 받고도 공사를 추진하지 않은 프로젝트를 찾아내 허가취소 등 행정제재를 취했습니다.
이처럼 토지사용권 취득에서부터 토지이용계획, 프로젝트 입안에서 인허가 과정 및 개발 판매 관리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정책변화는 부동산 개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부 정책이 조금이라도 변화하면 그로 인해 예상치 못했던 비용이 추가되는 등 자금운용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개발 프로젝트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는데요. 부동산 개발로 인해 가치가 높아졌다면 개발 이익은 누구에게로 돌아가나요.
“결국 개발이익 환수문제인데요. 아직 이와 관련한 제도가 명확하게 정착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간은 토지가 국가 소유이기 때문에 부동산 개발로 인한 지가상승은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도시화 과정에서 국가가 공원을 조성한다든가 도로를 확장하고, 지하철 철도 공항 등 인프라를 구축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주변 토지와 건물들의 가치가 상승하게 되자 이로 인한 이익을 어떻게 환수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논의가 분분합니다. 현재로서는 수익을 얻는 만큼 세금으로 환수하는 방안, 즉 수익자 부담 원칙이 유력한데, 문제는 세금을 부과하는 기준인 것 같습니다.”
-부동산 개발이나 건설사업을 통해 부(富)를 축적한 사람도 많고 부정비리사건도 많을 것 같은데요. 올해 초 ‘포브스’가 선정한 중국의 100대 갑부 중에 35명이 부동산 개발업자라고 하더군요.
“중국에서 부동산 개발의 역사는 이제 겨우 10년 남짓합니다. 개발 초기에는 노하우가 부족하여 일부 기업에 특혜를 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특혜사업에는 비리가 뒤따르기 마련이라 이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부패혐의로 사법처리를 받았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라고는 해도 자본의 위력은 대단하거든요.
그러나 최근에 탄생한 부동산 재벌들은 대부분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초창기와 같은 특혜는 줄어든 반면 합리적인 정책들이 나왔기 때문이죠. 개발기업에 외국계 펀드가 상당히 많이 들어와 있고 새로운 규정들이 만들어지면서 부동산 개발과정의 투명성이 높아졌어요. 국가 지도자들의 세대교체도 투명성이 높아진 한 배경이 됐고요. 이제는 부정한 방법으로 개발 관련 인허가를 얻어내기가 쉽지 않은 실정입니다.
부동산으로 성장한 기업도 많습니다. 특히 부동산 개발회사에는 국영기업들이 지분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베이징에만 3000여개의 개발회사가 설립돼 있는데, 이중 10%는 재정규모면에서 재벌급이에요. 2004년 현재 8개의 부동산 개발기업이 홍콩에서 주식공모를 통해 증시에 상장했습니다만, 중국정부는 계속해서 부동산 개발규모가 큰 기업을 홍콩 등의 주식시장에 상장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제가 베이징 시내에 있는 어느 대학의 교수 아파트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요. 아파트 단지 안에 판잣집들이 늘어서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재개발로 쫓겨날 처지의 원주민이라고 하더군요. 우리처럼 부동산 개발에 따른 분쟁도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까.
“실제로 재개발 과정에서 분쟁이 적잖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보상과 관련된 것이죠. 우리나라에서처럼 철거에 폭력배를 동원하는 경우도 간혹 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중국정부는 개발자와 철거민들 간의 이해관계 조정을 목적으로 한 철거관련규정을 최근 만들었다고 해요. 재개발에 따른 이전보상비는 비교적 높게 책정되는 편입니다.
예를 들어 시내 중심지에 대규모의 주상복합시설을 개발할 경우 토지사용권 가격을 100이라고 하면 이전보상비는 100보다 다소 높게 책정하는 식입니다. 이전보상비는 지상물 철거보상비, 이주비 등을 합친 개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정부가 추진하는 재개발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고 보상도 잘 이루어집니다만, 개인기업 특히 외자기업이 주도하는 경우 원주민들이 보상비를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강하게 버텨 분쟁 해결이 쉽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높아진 주민들의 목소리
-재개발과 철거민 보상문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분쟁거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라는 특성상 정부의 힘이 상대적으로 막강하지 않습니까. 도시계획이나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지역이기주의나 님비현상 혹은 환경문제가 우리처럼 커다란 장애요인이 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실상은 어떻습니까.
“우리보다는 덜하지만 실제로 그런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동산 개발이 공급자 위주에서 수요자 위주로 변하면서 주거문화와 환경관리문제가 더욱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주택가 밀집지역의 주유소 건설이 지역주민들의 반대로 취소된 경우가 많을 정도니까요. 주거지역의 쓰레기장 문제, 상가조성 문제, 공원설립이나 문화공간 조성 등은 반드시 사전에 개발도면을 열람하도록 하고 있고, 주민 의견을 반영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기타 부대시설 등도 지역주민들과 반드시 협의하여 결정하도록 하고 보상도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편입니다. 중국정부도 이제는 인민의 합리적인 요구를 되도록 수용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요즘 중국의 웬만한 도시치고 공사판이 벌어지지 않는 곳이 드문데요. 우리는 흔히 중국인의 행동이 느리다고 해서 ‘만만디’라는 표현을 씁니다만, 어떤 건설사업은 우리보다도 빠르게 공사를 진척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건설현장을 운영하고 있는 걸까요.
“건설현장의 근로자들은 대부분 생활환경이 낙후된 중서부 지역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건설현장을 조직적 집단적으로 이동하며 생활합니다. 공사는 기본적으로 24시간 3교대로 이루어지고 근로자들은 공사가 완료되기 전까지는 건설현장을 마음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해요. 건설현장 근처에는 술집이나 오락실이 영업을 할 수 없습니다. 당국이 규제하기 때문이죠. 근로자의 급여는 하루 평균 30위안(4500원) 정도인데, 이 돈을 현장근로자에게 직접 주지 않고 반드시 은행이 확보, 관리하여 고향에 가서야 찾아쓸 수 있도록 통제하고 있어요. 부동산 개발회사가 부도가 나더라도 현장근로자의 급여는 반드시 지급되도록 제도화한 것이지요. 이처럼 개인생활을 철저히 통제하면서 24시간 공사현장이 운영되므로 마음만 먹으면 아주 빠르게 공사를 진척시킬 수 있는 것이지요”
-중국의 건설분야에 한국기업들이 진출하고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일부 부동산 개발업체들이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특히 CM(건설공정관리) 부분에 진출한 기업들의 경쟁력이 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 건설시장이 완전 개방되지 않아 중국정부가 발주하는 공사 입찰에는 독자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형편입니다만, 대부분의 건설회사와 개발기업들은 각 지역에 사무소를 운영하면서 다각도로 시장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부동산시장으로 몰려드는 돈
최근 수년간 중국에서는 부동산 개발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건설 붐과 동시에 부동산 구매 붐이 일고 있다. 이에 따라 부동산 거래시장도 활성화되고 있고 당국은 시장시스템의 정비에 나섰다는 소식이다. 또 부동산 붐으로 인해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의 토지나 주택가격이 만만치 않은 수준으로 올랐는가 하면, 회원제 호텔이 등장했고 부동산 펀드도 활성화되고 있다. 한마디로 부동산시장으로 돈이 몰려든다는 얘기다. 중국 부동산시장의 현주소와 거래 메커니즘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중국은 부동산의 개념이 우리와 다르고, 사회주의 국가라 정부의 역할이 절대적이어서 부동산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의 환경도 크게 다를 것 같습니다. 중국 부동산시장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입니까.
“중국 부동산시장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공급자 시장이라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공급자는 정부를 말합니다. 물론 개발업자가 주택을 지어 분양하지만 모든 물량과 가격은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죠. 정부는 개발업자가 토지사용권을 취득하고 인허가를 신청하면 주택의 수량과 면적, 형태 등을 국가5개년개발계획에 의거해 조정합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최근 주택 분양시장과 중개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1992년 홍콩기업이 중국에 투자하기 위해 부동산 판매대리점을 설립한 것이 주택 마케팅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공급자 시장이긴 하지만 차츰 수요자를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가 창출되기 시작했어요. 요즘 개발업자들이 내놓은 주택 홍보자료를 보면 상당한 정성과 비용이 들어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부동산시장이 세분화되는 추세이고, 개발 프로젝트가 주택에서 대형 테마파크나 레저시설로 바뀌고 있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또 이전에는 부동산개발 시장이 컸지만 최근엔 부동산 관리기업이 성장하는 추세입니다. 아파트 관리나 빌딩 관리가 주거문화를 향상시키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부동산 마케팅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얘기로 들리는데요. 그동안 중국에서는 부동산 마케팅의 개념조차 없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중국에선 주로 어떤 사람들이 부동산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나요.
“외국에서 부동산 개발의 노하우를 배워온 유학파가 부동산 마케팅의 주역입니다. 현재 중국에는 IT분야와 부동산 개발에 많은 인재가 포진해 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첨단직종에 인재들이 몰려드는 셈이지요. 부동산 개발 및 분양의 마케팅 전문가들은 보통 연봉이 100만위안(1억5000만원) 수준이고 여기에 실적에 따른 성과급이 추가됩니다. 중국 내에서 최고수준의 수입을 올린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부동산 관련 부문의 총수나 중간관리자층이 대개 30~40대 초반의 젊은이라는 사실이 인상적입니다.”
-부동산 거래가 이루어지려면 중개인이나 분양회사 같은 매개체가 필요한데요. 중국은 아직 부동산 거래의 메커니즘이 취약하다는 평가가 많은 것 같아요. 현지에서 보는 실태는 어떻습니까.
“부동산 거래의 메커니즘이 취약한 건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기존 주택시장의 거래가 활발하지 않다는 점과 부동산중개사들이 전문성이 약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현재 중국정부는 부동산평가사, 부동산중개사, 부동산관리사 등 관련분야 전문가를 육성하고 자격을 부여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요. 베이징시에만 약 1만6000명의 부동산중개사 자격증 소지자와 20여개의 부동산 중개기업이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동산 개발자들은 대규모 시설의 분양관리를 이들 중개기업에 맡기지 않고 직접 소비자를 상대로 분양하거나 선진화된 부동산 판매관리 컨설팅회사에 위탁하고 있어요. 부동산관리 전문기업에 위탁판매하면 소비자에게 신뢰감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판매관리 전문회사는 분양뿐 아니라 입주 이후 시설물 관리도 해주기 때문에 회사 인지도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현재 중국에는 외국계 부동산 판매관리 회사가 많습니다. Century21 부동산체인점이나 CB Richard Ellis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죠. 화위안(華遠)부동산그룹 등이 중국 토종기업을 대표합니다. 이런 기업들에 의해 중국에도 선진기법의 부동산 개발과 거래 및 관리 메커니즘이 정착되고 있습니다.”
-부동산 하면 투기꾼이 연상될 만큼 한국에서는 부동산과 투기는 상관관계가 깊습니다. 중국에도 부동산 투기꾼이 있는 겁니까.
“투기꾼의 개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중국에도 분명 거주목적이 아닌 부동산 투자가 성행하고 있으니까 투기꾼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작년까지는 개인보다 기업이 투기를 많이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요지에 국유토지사용권을 확보하고 인허가를 받은 뒤 다른 개발회사에 프로젝트를 넘기면서 차액을 챙겼다는 것입니다. 3000여개의 부동산 개발회사 중 70% 이상이 이런 방식으로 돈을 벌어왔습니다만 앞으로는 그럴 수 없다는 게 중론입니다.
반면 개인의 투기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상당히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개인 투기꾼은 단기적인 시세차익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 번 돈을 분산시키려 한다는 것이지요. 중국은 한 사람이 주택을 여러 채 소유해도 규제가 없을 뿐 아니라 법과 제도도 개인의 사유재산 보호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처럼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지 않거든요. 돈 많이 가진 사람이 더 큰 집을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깔려 있습니다. 물론 토지개발 정보를 미리 알아내 보상비를 노리는 투기꾼들이 있기는 하지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닙니다.”
성장단계 진입한 레저시장
-경제가 발달하면 콘도나 펜션 같은 레저용 부동산에 대한 관심도 커지게 마련인데요. 중국의 경우는 현재 어떤 단계에 와 있습니까.
“중국의 레저관련 부동산시장은 서서히 성장단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미 주5일 근무제가 정착됐고, 주요 도시의 구매력으로 환산한 1인당 평균소득도 4000달러 정도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봐도 국민소득 4000달러 선에서 레저시장이 성장하기 시작했거든요. 지금 중국의 도로망이 빠른 속도로 선진화되고 차량 보유율이 높아진 것도 레저 관련산업의 발달을 촉진할 게 틀림없습니다.
이미 대도시의 스포츠센터, 호텔의 구락부, 골프장, 그리고 소유제 호텔 등은 시장이 형성돼 성장단계에 진입하고 있어요. 시내 중심지나 관광지역의 호텔은 방을 매매하는 객실소유제(産權制飯店)도 활발합니다. 필요할 때는 자신이 객실을 사용하고 그 외에는 호텔측이 관리 운영하여 수익을 분배하는 형태입니다. 또 베이징 외곽에는 최고급 설비를 갖춘 호텔형 별장이 속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런 고급 별장은 우리와 달리 재산증식 수단이라기보다는 접대용 혹은 자신이 직접 사용하기 위해 구입하는 게 대부분이지요. 정부 차원에서도 2004년 3월 RCI(Resort Condominium International)와 같은 제도를 만드는 등 레저시설의 발전전망이 매우 밝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콘도나 펜션 같은 레저시설을 새롭게 개발하기보다는 현재의 관련시설을 보수하거나 선진적인 관리 운영방식만 도입해도 시장 잠재력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국영기업이나 정부에서 운영하는 휴가시설들이 각 지역에 산재해 있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허베이(河北)성 베이다이허(北戴河), 광시(廣西)성 베이하이(北海), 하이난다오(海南島) 등을 비롯해 전국 도처에 각 기관이 운영하는 호텔형 초대소가 많습니다. 비록 시설과 운영관리 측면에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 기능은 콘도나 펜션과 비슷하거든요. 물론 현단계에서 콘도 회원권 개념이 적용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회원권에 투자하지만 중국인들은 재산을 공유한다는 개념이 약한 데다 예약문화가 쉽게 정착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죠.”
-중국의 토지거래는 국가로부터 취득한 토지의 사용권을 거래하는 개념이라고 하셨는데요. 어쨌든 토지마다 가격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토지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 겁니까.
“토지는 용도에 따라 8등급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국가에서 매년 공시지가를 조정합니다만 실제 거래되는 시가는 토지의 용도, 개발 인허가 가능성, 인프라, 주변환경 등을 고려하여 결정됩니다. 특히 용적률이 토지가격을 결정하는 가장 큰 변수가 되었죠.”
베이징 도심 평당 2700만원
-구체적으로 베이징 시내의 토지가격은 얼마나 됩니까.
“중국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전국에서 베이징의 평균 토지가격이 가장 높습니다. 베이징시 최고 중심지역인 둥청(東城)구의 1급 상업지역의 경우 1무(200평)에 2000만위안(30억원) 수준입니다. 평당 1400만원쯤 되는 셈이죠. 그런데 이건 정부로부터 토지사용권을 취득할 때의 토지공급가격이고, 실제 거래되는 가격은 훨씬 높습니다. 2004년 초에 정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베이징의 중심가 상업지역은 평당 2700만원에 거래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중심가의 주택개발지역은 평당 2250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위치에 따른 토지가격의 차별화도 점차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베이징 도심지에서 주택을 개발하여 분양할 경우 분양가에서 토지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약 25~30%인 데 비해 다른 지역은 10% 수준으로 훨씬 낮습니다. 그래서 주택가격 역시 위치에 따라 차이가 큽니다. 가장 비싸다고 알려진 둥청구의 보통 수준 아파트가 ㎡당 약 140만원인 데 비해 가장 저렴한 외곽지역의 핑구(平谷)구는 16만원 정도에 불과합니다. 또 한국인들이 밀집해 있는 차오양구의 왕징(望京)지역은 100만원 수준이에요.”
-막연히 예상했던 것보다는 중국 도시의 토지나 주택가격이 비싸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최근 많이 올라서 그런 겁니까. 그동안의 부동산 가격의 추세나 전망이 궁금합니다.
“토지의 경우 도시화가 추진되면서 가격이 가파르게 올라갔습니다. 베이징 시내와 외곽의 경우 경제개발구의 영향으로 보통 5배 정도, 투자요지는 그 이상 올라갔어요. 2000년 이후 불과 4년 동안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이러한 가격 오름세는 정부의 개발정책에 기인하는 측면이 큽니다. 토지사용권의 가격이 오르면 자연히 주택시장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만, 과거의 주택공급가격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현재는 오히려 하향 안정추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에요.
특히 2000년 이전에 지은 외국인용 아파트 가격이 많이 떨어졌는데, 앞으로도 더 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외국인의 거주지역 제한조치가 철폐된 데다 그동안 높은 임대료로 충분한 수익을 확보했기 때문에 이제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최근 들어 더 좋은 환경과 저렴한 가격을 내세운 고급주택이 계속 공급되는 것도 외국인용 아파트 가격이 크게 떨어지는 원인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보면 중국 부동산시장에 버블현상은 없을 것으로 보이며 적절한 수준에서 통제가 가능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선진국의 경우 전체 주택시장의 물량규모에 비해 신규 공급물량의 비중이 미미한 게 일반적이지만 중국은 오히려 신규 공급물량이 거래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기존 주택물량보다 훨씬 크다는 점입니다. 기존 주택이 전체 거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예요. 이런 현상은 새로 건설한 아파트가 그만큼 많이 부동산시장으로 쏟아져나오고 있다는 걸 말해줍니다. 또 그간 개인의 주택을 구입할 때 은행에서 장기저리 대출을 받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이런 경우 집을 파는 데 제약이 많은 것도 기존 주택거래가 부진한 이유라고 봅니다. 최근 주택가격이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데에는 이처럼 기존 주택의 거래가 극도로 부진한 것도 작용했다고 하겠습니다.”
토지사용권, 공개입찰로 획득
-토지가격이 많이 올랐다고 하셨는데요. 그렇게 된 건 정부가 토지사용권 가격을 올렸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일단 취득한 토지사용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때 원래의 가격보다 비싸게 받기 때문인가요.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에서 토지가격이 결정되는 과정을 살펴봐야 합니다. 2004년부터 전국의 토지는 국가가 직접 관리하고 있는데요. 정부로부터 토지사용권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개입찰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입찰가격은 구매자 스스로 결정해야 하므로 해당 토지의 개발가치를 명확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그래서 같은 구역 내에서도 토지가격이 다를 수 있지요. 한편 토지사용권을 양도하는 것도 이제는 어려워졌습니다. 2003년 이전에는 비교적 자유롭게 토지사용권을 양도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경매를 통해서만 양도가 가능하도록 제도화됐어요. 결국 토지사용권의 가격은 개발가치에 따라 달라지는데, 공개입찰과 경매 등의 절차를 통해 가격이 결정되지요. 결코 정부나 사용권자가 임의로 올리는 것은 아닙니다. 정부는 오히려 가급적 토지가격 결정과정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베이징의 왕징 아파트단지의 한 부동산 소개소에 얼서우(二手) 주택도 취급한다고 써놓았던데요. 이건 무슨 뜻인가요.
“신규분양주택이 아닌 기존주택, 그러니까 중고주택도 취급한다는 뜻입니다. 그게 바로 방금 설명드린 것처럼 신규물량이 넘쳐나 생겨난 표현입니다. 한국 같으면 부동산업소에서 기존주택을 소개하는 게 당연하니까 굳이 그런 표현을 쓸 필요도 없습니다만, 중국에서는 워낙 신규주택이 많이 공급되다 보니까 기존주택도 거래한다고 특별히 명기해놓은 것이지요.”
중국의 부동산 붐은 드디어 한국인에게도 관심사로 떠올랐다. 국내 부동산이 장기침체에 빠져들자 투자자들이 해외로 눈길을 돌리게 됐고, 자연스레 중국이 눈에 띄게 된 것이다. 이미 중국 대도시에 아파트를 사두었다거나 관심을 갖고 중국 현지를 방문해 알아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와 함께 중국 부동산업계도 외국인투자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한국인을 1순위 고객으로 꼽는다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묻지마 투자식 접근은 금물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충고다. 외국인의 부동산 투자에 대한 중국정부의 정책을 이해하는 것은 기본이고, 투자전망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부동산 투자에 관심 있는 한국인이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외국인의 부동산 매입이나 거래는 완전히 자유롭습니까. 아니면 어떤 규제나 제한이 있나요.
“개인이든 기업이든 특별한 규제나 제한은 없습니다. 다만 부동산 개발투자의 경우 자금을 중시합니다. 개발의지만 분명하다면 토지사용권 입찰에도 참여할 수 있어요. 외국계 부동산 펀드들을 보면 영업활동을 아주 적극적으로 합니다. 물론 거래도 자유롭게 진행되고요.”
-그렇다면 실제로 중국에서 외국인이 자기 명의로 부동산을 매입할 경우의 절차나 관련 세금부담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합니다.
“절차도 간편한 편이고 은행대출도 가능합니다. 주택구입 후 취득세와 기타 비용은 면적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구입가의 3.5% 정도입니다. 나중에 부동산을 처분할 때 내는 양도소득세는 거래차액의 3% 정도이고요.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면 신분증과 함께 중국 내에서의 소득증빙자료 혹은 외국에서의 소득증빙자료를 제출해야 합니다.
주택의 경우 대출한도는 구입가의 60%, 상가나 오피스는 50% 수준입니다. 대출기간은 주택의 경우 65세 이전에 상환하는 것을 기준으로 정해지며, 사무실이나 상가는 보통 7~10년입니다. 이자율은 위안화가 4.77~5.28% 수준이고 달러화 대출은 3%대니까 한국에 비해 낮은 편이지요. 예를 들어 아파트를 신규 분양받는다면 착공시점에서 자기부담금을 납부하고 약 2개월 후에 대출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착공시점에 사면 완공 때까지의 이자를 할인받고 입주시점이 가까워질수록 가격이 올라가게 됩니다.”
-부동산 등기제도는 우리와 마찬가지입니까. 외국인이 부동산을 살 경우 등기문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2004년 중반까지만 해도 신규개발 부동산의 소유권 등기는 보통 건물 완공 후 1~2년 이내에 이루어졌습니다만, 얼마 전 부동산 개발자는 구매자와 계약 후 90일 이내에 등기를 하도록 법제화됐습니다. 중국정부는 행정절차를 간소화하고 부동산 매입자의 권익보호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부동산에 투자하여 수익을 올렸을 때 본국으로의 과실송금에 어려움은 없습니까.
“중국도 이미 금융거래에 실명제가 정착돼 있어 외국인도 통장을 개설할 수 있고 이용이 자유롭습니다. 합법적으로 투자된 금액에 대해서는 과실송금이 가능합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일부 한국인들이 자금을 불법으로 빼돌려 중국의 부동산에 투자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같은 불법사례가 아니더라도 요즘 중국의 부동산 투자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현지에서 볼 때는 어떻습니까.
“저도 언론보도를 통해 전해 듣고 있고, 또 실제 상황을 가까이서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한국인의 부동산 투자가 대부분 재중 한국인이 밀집해서 살고 있는 지역에 국한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끼리 부동산을 주고받는 셈이어서 저는 다소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환금성과 실내장식의 문제입니다. 중국에서 부동산을 매입했다가 나중에 처분할 때 여러 가지 문제로 고민하는 한국사람이 꽤 있어요. 그 문제로 저와 상담한 사람도 여럿입니다.
중국 부동산 투자 양성화해야
그럼에도 중국 부동산 투자의 필요성은 점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법적인 문제와는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중국에서의 부동산 취득과 관련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합법적인 부동산 투자관리 펀드를 조성하여 구입과 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야겠지요. 단기적으로야 쉽지 않겠지만. 어쨌든 중국은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부동산 매입과 관리가 용이하다는 이점이 있으므로 투자가 양성화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요즘 한국인들은 주로 어느 지역 부동산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구체적인 지역과 부동산거래 분위기를 알 수 있을까요.
“상하이가 가장 활발한 것 같습니다. 상하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중국에서 가장 발달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어 부동산 투자처로 각광받는 것 같아요. 현재 상하이에 대한 한국인의 투자는 소규모로 운영되고 있어요. 즉 개발과 운영 관리보다는 시세차익이나 재임대에 중점을 두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에 비해 베이징은 2008올림픽을 계기로 국제적인 도시로 성장한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어 개인적으로 투자매력이 상하이보다 크다고 평가합니다. 상하이가 갑작스럽게 개발된 반면 베이징은 상하이의 개발모델을 충분히 연구검토한 후 개발이 진행되고 있어요. 한국기업들이 밀집해 있는 산둥성의 칭다오(靑島), 옌타이(煙臺) 등의 경우 주택시장보다는 레저 리조트 시설의 개발가치가 충분하지만 개인자금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곳에선 개인 중심의 주택거래가 있기는 해도 활발하지는 않습니다.”
-방금 부동산 펀드를 통한 투자도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현재 중국에 부동산 펀드가 많이 있습니까.
“외자기업이나 중국기업들이 펀드를 활용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부동산 개발투자 펀드지요. 주로 개인투자자들을 대상으로 2~3년 만기로 운용됩니다. 펀드 수익률을 보면 주택 위주로 운용했을 경우 연 4.5~8%고 상가나 오피스빌딩의 경우는 12~18%입니다. 이처럼 펀드의 운용수익은 양호한 편인데, 중국정부는 향후 민간자본을 끌어들여 부동산 펀드를 활성화시키려는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감안할 것은 중국의 주식시장이 과거처럼 큰 이익을 내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2006년부터는 중국의 금융시장이 개방될 예정이어서 앞으로는 부동산으로 자금이 몰려들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지요.”
-부동산 투자는 수익성이나 시세차익을 기대하고 이루어지게 마련인데요. 최근 중국 부동산시장에 관심을 갖는 한국인 중에는 근거 없는 낙관론을 펴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부동산 투자시 어느 정도의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투자대상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우선 주택의 경우는 투자수익률을 기대하기가 어렵다고 봅니다. 반면 상가에 투자하면 연 15% 정도의 수익률은 올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무실의 경우는 위치가 좋은 지역을 기준으로 할 때 투자수익률이 10% 정도로 비교적 안정적인 편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처럼 땅을 매입한 후 시세차익을 노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땅은 개인소유가 아니라 다만 국가로부터 사용권만 취득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오히려 토지를 매입하여, 다시 말하면 토지사용권을 사들여 아파트나 상가를 짓거나 또는 재건축 사업을 한다면 개발 수익이 보통 30%는 되니까 개발기간을 2년으로 잡는다면 연 15% 정도는 되는 셈이지요.”
中부동산 투자의 수익률
-중국을 상대로 한 한국인의 부동산 투자를 알선하거나 관리해주는 시스템은 없습니까.
“아직 공식적으로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은행이나 증권회사, 보험회사 등 우리나라의 금융기관들이 중국으로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지만 다른 외국기업들처럼 부동산관련 펀드를 운용하는 사례는 아직 없는 것으로 압니다. 이 문제는 관심 있는 금융기관이나 기업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할 사항이 아닐까 합니다.”
-중국 부동산 투자에 대해 정보제공이랄까 자문을 해주는 기관이 있습니까. 그런 곳이 없다면 어디서 관련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요.
“매우 중요한 사항이지만 아직 중국 부동산 관련정보를 체계적으로 서비스 하는 전문기관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인터넷 카페 같은 동호회를 통해 상호 투자정보를 나누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저도 인터넷을 통해 중국정부의 부동산정책과 방향에 대해 자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만 부동산 투자정보를 제대로 제공하려면 부동산과 금융, 각종 정책과 규정, 관리 운영 등 관련분야를 아우르는 전문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일본이나 영국 등 외국기관에서 제공하는 자료를 접할 수는 있지만 현재로서는 동호회 사이트 활용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고 봅니다.”
-중국 부동산 투자와 관련하여 대상지역이나 투자형태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현재 개인 투자자 가운데는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투자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물론 중국에서 자금의 출처를 문제삼아 투자를 무효화한 사례는 없으니까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래도 합법성을 갖추고 투자하는 것이 좋겠지요. 투자지역을 따져본다면 아무래도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가 무난할 겁니다. 심리적인 안정성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런 도시에는 한국의 외교공관이 있거나 기관 단체에서 파견한 현지 지사 등이 있기 때문에 유사시 도움을 요청하기도 쉽거든요.
기업 차원에서 중국 부동산 투자에 관심이 있다면 도시 외곽의 유통센터, 즉 건자재시장 농수산물시장 가구시장 등을 중심으로 개발사업의 기회가 많을 것으로 봅니다. 자동차 보유율이 급속도로 높아지고 있고 맞벌이 부부가 많은 점을 감안하면 주말을 휴식 겸 쇼핑으로 유도하는 전략이 필요할 것이고, 따라서 도시 외곽의 유통 위락센터가 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입니다. 이밖에 독신자 아파트나 소규모 오피스텔도 한국기업이 진출하기 좋은 시장입니다.
뿐만 아니라 호텔이나 백화점도 한국기업이 관심을 가져볼 시기가 되었다고 봐요. 연간 200만명의 한국인이 중국을 왕래하는 상황에서 주요 도시에 한국 소유의 호텔 하나 없는 것도 문제 아닙니까. 일본기업의 경우 베이징이나 상하이 등에 여러 개의 호텔을 가지고 있어 자국인들이 이용하고 있어요. 개인 차원에서는 상가나 오피스빌딩에 투자를 하되, 반드시 소유권을 확보하여 임대사업을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한국인이 임대사업을 목적으로 주택을 구입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는데요. 실정이 어떻습니까.
“개인이나 법인이 임대사업을 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자신이 직접 임대사업을 하는 경우 임대수입의 5%를 임대소득세로 납부해야 하고, 재임대의 경우는 2.5%만 납부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런 임대사업은 수익성이 별로 없을 거예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신규물량 공급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주택임대사업 전망은 밝지 않습니다.
물론 중국 주요도시의 한국인 밀집지역 아파트를 매입하여 한국인을 상대로 임대사업을 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겠지만 정상적인 임대수익은 기대하기 힘들 겁니다. 아파트 매입비용에 따른 이자와 관리비용, 세금, 장식비 등에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수익성이 없다는 것이지요. 다만 기업 차원에서 베이징 같은 대도시 역세권 상가나 주택을 매입해 독신자용 아파트나 유학생용 기숙사로 개발하는 방안이라면 좋을 듯싶군요.”
호텔·백화점도 관심 가질 만
-주택임대사업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셨습니다만 제가 듣기로는 외국인 상대로 임대사업을 해서 수익을 올린 사람이 꽤 있다고 하거든요. 상황이 바뀐 것입니까.
“1990년대 중반부터 외국기업의 중국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일부 부유층이 외국인 전용주택을 사들여 임대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2003년 10월까지만 해도 외국인들은 거주지역에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임대료가 비싼 집에서 살 수밖에 없었지요. 당시 외국인 대상 주택의 판매가격과 임대료가 매우 높아서 세후 임대수익이 연간 15~30% 정도 됐습니다. 보통 3년 내지 6년이면 투자원금을 회수할 정도였어요.
그러나 외국인 대상 주택이 아닌 일반주택의 경우 그간 임대수익을 내기는 힘들었다고 판단됩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우선 세금이 문제입니다. 금년에 임대소득세가 5%로 단일화됐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임대수입의 18%를 세금으로 내야 했거든요. 이밖에 물가상승률, 주택구입에 따른 대출이자, 자기자본 조달이자, 장식비 등등을 고려하면 실제 일반주택의 임대수입은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사정은 지금도 비슷합니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 고급주택을 싸게 구입해 임대사업을 한다면 승산이 있을 겁니다. 이런 고급주택들은 이미 투자비를 회수한 상태라 비교적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거든요.”
해외 부동산 투자와 규제조치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늘어나면서 한국인 밀집지역의 주택가격이 상승추세라고 하더군요. 특히 베이징의 왕징 지역은 한국기업 주재원이 대거 몰려들면서 집값이 크게 올랐다고 하는데, 실상은 어떻습니까.
“일단 한번 오른 임대료가 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특히 현대자동차에 이어서 관련 협력업체들의 진출이 이어지고 있어 수요는 계속 늘어나고 있어요. 이들에게는 자녀교육 문제가 매우 중요한데 왕징아파트 단지의 경우 이런 점에서 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건이 좋은 편이라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높은 임대료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형국입니다만, 그렇다고 특별한 대책도 없습니다.
사실 재중 한국인의 규모를 고려하면 우리나라 건설업체들이 베이징이나 상하이 등지로 진출해 한국인이 거주할 아파트를 짓고 분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업들의 현지투자가 이루어지기 전에 주거 교육 문화 등 관련 분야에 대한 투자가 선행되는 것이 바람직하거든요. 일본 등 선진국의 경우 정부와 기업 차원에서 이런 문제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나라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태라 비용이 많이 듭니다. 베이징 지역의 우리 주재원과 유학생 등이 지불하는 임대료만 해도 한 달에 최저 500만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 실정이에요.”
-중국 부동산 투자와 관련해서 법적으로 어떤 규제가 있습니까.
“해외부동산 직접투자에 관한 법 규정이 있습니다. 이 규정에 의하면 해외부동산 취득과 관련한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고 한국은행이나 주거래은행으로부터 투자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어요. 최근 들어 유학생 경비나 증여성 송금이 허용돼 소액의 부동산 투자가 가능해졌습니다만 엄격하게 따지면 이러한 투자행위도 위법입니다.
예를 들어 현재 베이징 거주 한국인들이 보유하고 있는 골프회원권이 1000여개를 넘습니다만 이것도 해외부동산 취득규정에 따르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중국에서 식당이나 상가를 운영하는 개인이 많지만 이들이 모두 해외투자승인을 받고 하는 건 아니거든요. 주거용 부동산 투자도 마찬가집니다. 해외투자는 자금여유가 있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이들이 법과 규정을 지킬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제가 보기에 환치기 등을 통한 외환거래의 규모가 정상거래규모보다 클 것으로 추정됩니다.
합법적 투자방안 택해야
이처럼 수요가 있는 줄 알면서도 골프장이나 호텔, 리조트타운, 백화점, 상가 등을 공개적으로 개발하려는 한국기업이 없습니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부동산투자 관련업종의 범위가 매우 넓어 해외투자의 순수한 의도를 인정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하고 싶어도 쉽게 나설 수 없는 것이지요. 글로벌화를 외치고 있지만 실상은 그 반대라고나 할까요. 이제는 해외부동산 취득이나 투자개발도 하나의 산업으로 인식하여 장려해야 합니다. 이미 베이징 상하이 등은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이 진출해 있어 현지대출을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해외부동산 투자를 규제할 게 아니라 투자 이후의 완벽한 관리규정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중국 부동산 투자에 관심을 가진 한국인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일단 중국의 부동산 거래 속성을 파악해야 합니다. 중국은 땅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시스템이 다릅니다. 그리고 합법적인 투자방안을 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현지인들의 말만 믿고 편법으로 투자해서 큰 이익을 남기겠다는 식의 발상은 위험합니다. 금융기관은 부동산 관련펀드를 운용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어요. 현지에 부동산투자 관리법인을 설립하여 해당기업의 주식을 취득하는 방식도 좋겠지요.
중국에서의 부동산 투자는 환금성이 낮다는 점을 고려하여 장기적인 안목에서 결정해야 합니다. 중국 부동산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일단 투자의 목적을 분명히하고 수익성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나서 실행에 옮기되, 현금투자보다는 가급적 현지 금융기관을 통한 대출을 적극 활용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한국정부의 정책이 중요합니다. 중국 부동산에 투자할 의향을 가진 한국인이 많다면 이들을 양성화하는 방안을 하루 빨리 찾아주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투자의 필요성은 분명히 있습니다. 중국 부동산 투자를 통해 양국간 민간 차원의 경제교류가 더욱 활성화할 수도 있을 거고요. 개인이 합법적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창구를 만들어주라는 것입니다. 규제를 강화한다고 해서 외화유출 현상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중국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중국인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중국문화를 둘러싼 이런저런 이야기가 우리 주변에 넘쳐난다. 그러나 대부분 한국인의 시각으로 판단하고 분석한 것들이어서 다소 아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호에는 직접 중국인의 입을 통해 중국인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의 문화는 어떤 빛깔을 띠고 있는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주잉제(朱英杰·48) 주한 중국문화원장은 스스럼없이 한반도가 제2의 고향이라고 말하는 지한파(知韓派) 중국인이다. 헤이룽장(黑龍江)성 출신으로 대학졸업 후 북한으로 유학, 평양무용음악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중국 문화부 아시아처에 근무하면서 한반도를 담당했고 1989년부터 1992년까지는 평양주재 중국대사관에 근무하기도 했다. 2003년부터 한국근무를 하고 있는 주 원장은 오는 12월 중국문화원 개원을 앞두고 있다.
먼저 중국인의 특징적인 기질을 중심으로 그들의 겉모습과 내면세계의 진면목을 살펴보자.
-중국이 워낙 넓고 크다 보니까 사람들도 지역에 따라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산둥 사나이(山東好漢)니 원저우 장사꾼(溫州商人)이니 하는 식으로 각 지역 사람을 일컫는 별칭이 많습니다. 대개 지역에 따른 사람들의 생김새나 기질의 차이를 어떻게 분류할 수 있습니까.
“중국은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고 땅이 넓기 때문에 각 지역마다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납니다. 기후가 더운 남쪽 사람들은 키가 북방인에 비해 작고 습기가 많아 피부색이 하얀 편입니다. 반면 추운 지역인 북방사람들은 키가 크지만 피부색이 남쪽사람처럼 희지 않습니다. 북쪽은 날씨가 춥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주 움직여야 하지만 남쪽은 더우니까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편입니다. 자연히 생활습관과 성격도 서로 달라서 북쪽 사람들은 성격이 밝고 급한 편인데 비해 남쪽 사람들은 느긋한 편입니다. 이런 차이점이 있어서인지 중국인끼리는 처음 만난 사이라도 금방 상대방이 북방인인지 남방인인지 알아차립니다.”
중국인의 감정 표현
-중국인의 얼굴만 보아서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알기 어려운 것 같아요. 그리고 옷입은 것만 보고 신분을 짐작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습니다. 한마디로 겉모습만 봐서는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중국 사람들의 감정표현 방식은 어떤 것인가요.
“사실 오늘 인터뷰가 있어서 이렇게 양복을 입었습니다만, 평소엔 점퍼에 청바지 입고 일할 때가 많습니다. 무슨 공식행사 아니면 양복 정장을 잘 입지 않습니다. 한국인이나 서양사람들처럼 옷차림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습니다. 양복을 입으면 움직이기 불편하다는 게 중국인 대부분의 생각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겉모습에 신경쓰기보다는 편리한 옷을 입는 쪽을 택하는 것이지요.
옛날부터 중국에서는 특히 돈 많은 사람들이 비싼 옷으로 티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가난한 사람보다도 더 허름한 옷을 입기도 했습니다. 며칠 전에 대학에서 한 학생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는데요. 지금 중국의 부유층 규모가 한국 전체인구보다 많다고 하는데, 중국사람들을 겉으로 봐서는 누가 부자인지 도저히 모르겠더라는 겁니다.
감정의 표현에선 대체적으로 북쪽사람들이 한국인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얼굴에 감정상태가 잘 드러나지요. 반대로 남쪽지방에 가면 사람들이 좀 복합적인 모습이라고 할까요, 겉으로만 봐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안갈 때가 많습니다. 중국인들은 역사적으로 전쟁과 혼란의 시기를 무수히 겪었기 때문에 안전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급적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게 몸에 배었다는 겁니다. 일리있는 분석인 것 같아요.”
-중국인의 모호성은 언어생활에서도 엿보입니다. 예를 들어 ‘차부둬(差不多)’라는 말은 크게 모자라지 않다, 대충 비슷하다는 뜻으로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이는 표현인데요. 정확히 어떻다는 것인지 불투명하게 들릴 때가 많아요. 이런 사례가 무수히 많습니다. 이 같은 언어습관은 좋게 말하면 중용지도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고, 중국인의 모호한 태도랄까 보신(保身)주의적 처신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모호성이 분명히 있습니다. 상대방이 저한테 ‘원장님 이러이러한 걸 도와주십시오’라고 했는데, 그때 제가 가타부타 대답하기 곤란하면 ‘커이바 차부둬’(可以? 差不多)라고 해버립니다. 그런데 이 말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아주 모호한 대답이지요. 한마디로 ‘대강주의’라 할 수 있어요. 중국말에 이런 모호한 표현이 많은 것은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더라도 자기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요령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옛날부터 전쟁이 많아 혼란스럽고 곤궁한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자연히 이런 보호본능이 생긴 게 아닌가 합니다. 또 자신이 없을 때 그런 모호성이 나타납니다. 어떤 일을 스스로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으면 그런 식으로 얼버무려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사실 저희 중국사람끼리도 상대방의 진정한 의중을 판단하기 힘듭니다.”
‘만만디’는 신중의 의미
-중국인 하면 ‘만만디(慢慢地)’를 떠올릴 정도로 한국에서는 중국인이 느긋하고 느린 기질을 가진 민족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면서 이런 만만디 현상도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한 통계를 보면 중국인이 운전하는 자동차의 브레이크 패드 마모율이 한국인이 운전하는 경우보다 30%나 높다는 것입니다. 급브레이크나 급회전이 심하다는 것이지요. 만만디 기질도 이제 변한 것인가요, 아니면 그동안 잘못 알려졌던 겁니까.
“이런 질문을 참 많이 받는데요. 제가 보기에 중국 사람들이 일할 때 결코 만만디하게 하지 않습니다. ‘만만디’라는 게 느리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신중히 처리한다는 뜻이에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그동안 사용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제품을 구입하면 주위 사람들이 ‘만만디 보십시오, 만만디 처리하십시오’라고 거듭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그 새 제품에 대해 잘 모르니까 신중히 조작해라, 잘 작동시켜봐라는 것이지 천천히 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동작을 만만디 하라는 말이 아닌 것이지요. 이처럼 ‘만만디’는 아주 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침착하게 잘 처리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만만디’라는 말의 의미가 잘못 전해져 중국인의 행동이 느린 것으로 오해하게 된 게 아닌가 합니다.”
-중국인이 권모술수에 매우 익숙하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래서 1920년대에 중국인의 권모술수와 모략에 관한 이면적 사고들을 종합해 체계화를 시도한 리쭝우(李宗吾)의 ‘후흑학(厚黑學)’이 지금도 중국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라는 것입니다. 중국인의 권모술수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또 중국인이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바둑이나 마작을 즐기는 것도 이 같은 권모술수의 기질에서 비롯됐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권모술수와 연결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중국 사람들이 바둑이나 마작을 좋아하고 삼국지나 손자병법 같은 각종 지략이 출몰하는 책을 좋아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바둑이라는 게 천 번, 만 번을 둬도 똑같은 경우가 한 번도 없거든요. 변수가 너무나 많고 거기에 따른 대처방법과 임기응변이 다양하기 짝이 없는데 이런 걸 중국인이 좋아하는 것을 보면 지략을 짜내는 일에 흥미를 느끼는 게 사실인 듯합니다.”
-바둑과 마작 이야기가 나온 김에 중국인의 일상생활에서 이런 오락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마 중국인의 거의 대부분이 마작을 할 줄 알 겁니다. 바둑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역시 많이들 하지요. 농촌이건 도시건 저녁에 할 일이 없을 때는 네 명이 만나면 마작을 하는 게 아주 흔한 일입니다. 밤을 새우면서 말입니다. 한국인들이 고스톱을 많이 한다고 하는데, 그런 경우겠지요. 재미있는 건 바둑전문대학이 있고, 두뇌운동이라고 해서 스포츠로 간주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신문을 보면 스포츠면에 바둑기사가 실립니다.”
중국인의 시간관념·공간관념
-땅이 넓은 탓인지 시간관념과 거리관념도 한국과는 크게 다른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 여행을 하면서 목적지까지의 거리를 물어보면, “아주 가깝다” “다 왔다”고 하는데도 실제로는 두세 시간 이상 걸리기 일쑤거든요. 일상생활에서 중국인의 시간관념과 거리관념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시간과 거리에 대한 감각이 한국인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제 고향이 북쪽의 하얼빈인데요, 도시와 도시 사이가 보통 차를 타고 4, 5시간은 가야 닿을 정도로 떨어져 있습니다. 마을과 마을도 멀리 떨어진 경우가 흔하고요. 그런 상황이니까 두세 시간 걸려 갈 수 있는 곳이면 가깝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중국인에게 서울서 대전까지의 거리 정도면 아주 가깝다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며칠 전에 영화배우 송일국씨를 만났는데, 그 분이 중국 신장(新疆)지역에 가서 영화촬영을 하고 왔다고 해요. 그런데 한번 촬영하려면 차 타고 8시간씩이나 걸리는 곳에 가기 일쑤라는 겁니다. 중국에서는 이런 일이 보통이거든요.
저도 학창시절에 베이징에서 하얼빈의 고향집까지 가려면 열 시간 이상 기차를 타야 했지만 그리 멀다고 느끼지 않았어요. 당시 윈난(雲南)성 출신들은 아마 기차를 일주일은 타고 갔을 겁니다. 시간약속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중국 사람들은 비교적 정확한 편입니다. 농촌에서야 해가 뜨면 나갔다가 해가 지면 집에 돌아오는 식이니까 시간관념이 희박하지만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시간관념이 강합니다.”
-중국인의 숫자관념도 흥미롭습니다. 중국인이 8자를 좋아한다는 것쯤은 한국사람들도 많이 알고 있는데요. 홀수와 짝수, 그리고 각 숫자에 얽힌 중국인의 의식을 살펴보면 어떤 것일까요.
“중국인은 짝수를 좋아합니다. 짝수는 안전하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기본적으로 하나는 불안하지만 둘은 평형을 이루니까 안정감이 있다는 그런 의식이 깔려 있어요. 선물을 짝수로 하는 오랜 관습도 좋은 일이 반복되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8은 돈 번다는 뜻인 파차이(發財)의 파와 발음이 비슷해서 좋아하고, 6은 리우리우다순(六六大順)이라는 말처럼 일이 아주 순조롭다는 의미로 쓰여 좋아합니다. 중국정부가 베이징올림픽을 2008년 8월8일에 개막하기로 한 것도 8을 선호하기 때문이지요. 9는 숫자 가운데 가장 크고, 발음이 ‘오래가다, 영원하다’는 뜻의 지우(久)와 같아서 좋아합니다. 반면에 4는 ‘죽을 사’자와 발음이 비슷해서 꺼리는 숫자입니다. 그런데 숫자에 대한 이런 선호관념도 지역에 따라서는 또 다릅니다.”
중국은 하나의 나라지만 지역에 따라 면모가 전혀 다르다. 사람들의 생김새와 문화 언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 짝이 없다. 지역색이 뚜렷한 만큼 자연히 지역간 대립의식도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역’을 둘러싼 중국인의 또다른 세계를 들여다본다.
-한국도 그렇습니다만, 중국도 각 지역간 대립의식이 강한 것 같습니다. 상하이에 가서 베이징 사람 티내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타지에서 고향사람을 만나면 각별한 애정을 보인다고 하는데요. 지역간 대립의식이나 동향의식은 실제로 어느 정도입니까.
“실제로 북쪽사람들이 상하이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일할 때 너무 세세하고 짜다고 보기 때문이죠. 반면 상하이 사람들은 북방사람들이 예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직장에서 일하면서 지역색 차이로 갈등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 사무실에도 랴오닝성, 톈진, 상하이 등 각지 출신들이 함께 근무하고 있습니다만 지역의식이 별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지역에 따라 기질이나 개성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것이 함께 일하는 데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고향사람에 대한 애정은 중국이나 한국이나 다 마찬가지겠지요. 중국의 경우 특히 해외의 화교들이 고향사람들에 대해 강한 유대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화교가 전세계적으로 9000만명 정도 되는데요. 각 출신 성(省)별로 단체가 조직돼 상부상조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홍콩갑부 리자청(李嘉誠)을 배출한 광둥성 차오저우(潮州)사람들은 타지에서 동향인을 만나면 그가 성공할 수 있도록 세 번까지 사업밑천을 대주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혈연·지연·학연과 관시
-서울에도 중국대사관을 비롯해 여러 기관에 중국인이 다수 나와 있는데요. 고향사람들끼리 서로 연락해서 자주 만나고 합니까.
“따로 그룹을 만들어 만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런저런 모임에서 만나면 아무래도 같은 성 사람들이 다른 지방 사람들보다는 친하게 느껴지지요. 그런 정도입니다.”
-한국사회에서는 혈연이나 지연 학연이 매우 중시됩니다. 중국의 경우에도 사회생활에서 관시(關系)의 중요성이 매우 크지 않습니까. 이런 관시를 맺는데는 혈연 지연 학연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크게 작용하나요.
“중국에서는 같은 학교를 졸업했다고 해서 한국처럼 사회생활에서도 특별한 관계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중국말에는 한국어의 선배와 후배 같은 말이 없습니다. 물론 업무상 만나서 일을 처리하다가 같은 학교 출신인 것을 알면 아무래도 쉽게 친해지고 일처리에 편리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한국처럼 끈끈한 유대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흔히 중국사회가 관시를 매우 중시한다고 합니다만, 관시를 만들어나가는 데 있어 학연이나 혈연 혹은 지연에 의존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아는 사람이 많아지고 인간관계를 넓혀가는 식입니다. 그래서 중국말에 ‘처음엔 낯설지만, 두 번째는 익숙해지고 세 번째 만나면 친구가 된다(一回生, 二回熟, 三回就是老朋友)’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가까워지는 것이 무슨 학연이나 지연 같은 특별한 인연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쑨원(孫文) 선생이 일찍이 “중국인은 쟁반 위에 흐뜨려놓은 모래”라고 한탄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또 “중국인 한 명은 한 마리의 용이지만 세 명이 함께 있으면 한 마리의 벌레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중국인은 매우 총명하지만 단결력이 약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던 시기에 중국인은 단결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중국민족 자체가 단결하지 못하는 민족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그런 현상이 있는 것 같아요. 이 문제는 각자의 시각에 따라 평가가 다른 것 같습니다.”
지역 사투리와 보통화
-중국어의 경우 지역별 사투리가 심해 같은 중국인끼리도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만, 실제로 원장께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지역 사투리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상하이 사람들끼리 상하이 말로 얘기하면 저 같은 타지역 사람은 아예 알아듣지 못합니다. 제 고향이 북쪽 하얼빈인데요. 동북3성이나 베이징은 상대적으로 가까우니까 그곳 사람들의 대화는 대강 다 알아들을 수 있지만 상하이나 광둥성 푸젠성 저장성 같은 남쪽 말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오쩌둥 주석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뒤 가장 중시했던 게 바로 보통화(普通話)로 언어를 통일시키는 일이었다고 해요.
지금은 표준중국어라 할 보통화가 전국적으로 보급돼 있기 때문에 어느 곳을 가든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에요. 각 지역마다 사투리가 있어 자기들끼리는 사투리를 쓰다가도 타지역 사람이 보통화로 말하면 역시 보통화로 대답하는 겁니다.”
-남북한 사이에도 언어의 이질화 현상이 심각합니다. 중국과 대만의 경우도 비슷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지 않을까요. 휴대전화를 중국에서는 서우지(手機)라고 하고 대만에서는 싱둥뎬화(行動電話)라고 한다던데요. 양안간 언어의 차이가 어느 정도입니까.
“제가 대만에 가봤습니다만, 물론 다른 점이 있기는 합니다. 택시도 중국에서는 추주치처(出租汽車)라고 하는데 반해 대만에서는 디스(的士)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렇게 심하지는 않은 편입니다. 대만에서도 국어(國語)라고 해서 중국대륙과 마찬가지로 베이징어를 기준으로 하는 보통화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문제는 말보다 글자에 더 심각합니다. 중국대륙에서는 간체자를 쓰는데 비해 대만에서는 정자를 쓰고 있어 말보다도 문자가 통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요. 대만사람들은 간체자를 읽기 힘들어 하고, 대륙사람들은 정자체를 잘 몰라 언어생활에 거리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말씀하신대로 중국이 현재 사용하는 한자는 정자(正字)가 아닌 간체자(簡體字)입니다. 그렇다면 요즘 중국인들은 한국인이 사용하는 정자체의 한자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정자체를 읽고 쓸 수 있나요.
“아마 보통 중국사람이라면 3000 내지 5000자 정도의 한자를 구사할 수 있을 겁니다만, 젊은이 중에는 정자체를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온 중국 젊은이가 정자로 써놓은 한자를 못읽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군요. 간체자는 예전부터 있어 왔습니다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하면서 국가정책으로 채택돼 이제 완전히 뿌리내렸습니다. 그래서 나이든 사람들은 과거에 정자체를 배웠으니까 어느 정도나마 알고 있지만 젊은이들은 정자체를 배울 기회가 없었던 거죠. 아마 현재 대부분의 중국인은 정자체에 어려움을 느낄 겁니다. 저도 정자체를 많이 배우지 못해 고전을 볼 때는 어렵습니다. 어떤 글자는 잘 모르겠구요.”
장유유서의 현주소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평등주의 이념이 강조되면서 전통적 관념과 행동양식에 커다란 변화를 겪었으나 개혁개방 이후 또다시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다. 자본주의 마인드가 뛰어나다는 사회주의국가의 중국인, 그들의 문화와 인간관계는 어떤 모습일까.
-한국문화의 특징을 흔히 은근과 끈기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중국문화의 특성을 간단히 설명한다면 어떤 표현이 가능할까요.
“저는 중국문화의 특성을 한마디로 스펀지와 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스펀지가 물을 얼마나 잘 흡수합니까. 중국어만 봐도 콜라를 커커우커러(可口可樂)라고 해서 뜻과 음을 교묘히 결합시킨 단어로 만들어 받아들였지 않습니까. 중국인은 외래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렇게 중국화해 새로운 말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덩샤오핑이 중국식 사회주의라는 말로 개혁개방의 논리적 토대를 만들어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주의라는 외래사조를 중국식으로 변용한 것이죠. 이 역시 스펀지처럼 강한 흡수력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런 강한 흡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유교문화의 핵심은 장유유서에 토대를 둔 예(禮)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요즘 중국에서는 장유유서가 사라진 것 같아요. 특히 중국어에는 한국어와 달리 경어(敬語)가 따로 없어서 한국사람이 보기에 중국인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서로 맞먹는 것 같아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한국에 비해서 상하간 관계가 아주 평등합니다. 예를 들어 상대가 장관이라고 하더라도 업무상으로는 상급자니까 존중합니다만,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격의 없이 대합니다. 함께 식사하고 술 마시는 것은 보통이고 담배도 나누어 피우니까요.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언어생활에서 따로 경어를 쓰지 않습니다. 그저 상대에 따라 호칭이 구분되는 정도입니다. 그것도 성에다가 직위를 붙여 김 교수니 이 국장이니 하고 부르거나 자기보다 나이든 사람 성 앞에 라오(老)를 붙여 라오왕(老王) 라오리(老李) 하는 정도입니다. 한국처럼 장관님 교수님 하는 존칭이 없어요. 다만 상대가 아주 어려운 경우 영어의 유(you)에 해당하는 니(훏) 대신에 존칭의 의미가 있는 닌(훜)이라고 부르는 정도입니다. 이처럼 언어생활을 비롯해 전반적으로 장유유서의 전통이 오히려 한국에 더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중국에는 유교(儒敎)와 도교(道敎) 그리고 불교(佛敎)의 전통과 가치관이 혼재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중국인의 의식과 행동양식에서 이 같은 종교나 학문의 영향이 어떻게 배어나고 있다고 보십니까. 어느 특정종교가 주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경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옛날부터 유교, 도교, 불교가 많이 싸우기도 했습니다만, 청나라 시기에 이르러 대립이 많이 완화돼 서로 융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유교사상이 중국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중국이 사회주의체제를 받아들인 후 평등을 외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유교의 가르침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 저와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다만, 이런 좌석 배치 하나하나에도 유교적인 관습이 상당히 작용하고 있어요. 어떤 분들은 오히려 한국에 유교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만, 중국에서도 유교적인 전통이 남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봅니다.”
-전통종교 이외에도 중국에 기독교인이 3000만 내지 5000만이라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나 가톨릭이 중국인의 종교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요.
“서양종교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역사와 전통이 다르니까 중국사회에서 아직은 기독교나 가톨릭의 교세가 전통적인 종교보다는 미약합니다. 좀 엉뚱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중국에서 왜 한류(韓流)현상이 나타났겠습니까.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유교적인 분위기가 남아 있습니다. 이걸 중국사람이 보면서 동류의식이랄까 비슷한 감정의 교류를 느끼는 겁니다. 거기다가 한국배우의 연기도 좋으니 금방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서양종교와 유교사상에 대한 중국인의 태도를 이렇게 비유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에서 중국인들의 평등한 인간관계에 대해 언급하셨는데요. 요즘 한국에서는 평등의 논리를 둘러싸고 사회적 갈등이 빚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육평준화정책을 둘러싼 최근의 논쟁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이에 비해 중국은 중점대학을 선정해 우수대학과 우수학생을 집중육성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중국인은 부자들이 집을 여러 채 사들여도 한국과는 달리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고 하던데요. 이런 경우 한국에선 주변의 부담스런 시선을 피하기 힘들거든요. 자본주의체제하의 한국인보다도 더 자본주의적 마인드가 발달했다는 중국인은 이른바 평등의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과 태도를 지니고 있나요.
“중국인은 평등의 개념이 강한 게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저희 사무실에서 제가 가장 상급자이지만 업무를 제외하면 직원들과 아주 평등한 관계입니다. 그러나 평등한 인간관계와는 관계없이 경쟁을 통해 우수한 사람을 뽑아 육성하고, 이들이 남보다 앞서가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편입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 베이징대학 가고 칭화대학 가서 지도자로 출세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지요. 제가 음악을 전공했습니다만, 유명한 음악대학이나 무용대학 입학시험 때 보면 50명 뽑는데 4000~5000명씩 응시합니다. 100명 가운데 1명꼴로 우수한 사람을 뽑아서 인재로 키워내는 것이지요.
또 부자들이 집 사는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중국 사람들은 돈있는 사람을 두고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법이 없습니다. 돈 있는 사람이 돈 쓰고 투자하는 것을 보면 왜 나는 저렇게 못하나 하면서 배우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직책의 고하에 관계없이 평등한 관계로 서로 대하지만 실력있는 사람이 좋은 대학 가고 능력 발휘해서 돈벌고 쓰는 것에 대해서는 흔쾌히 인정한다는 것이지요.”
-중국에서 흔히 보는 풍경 중의 하나가 남자와 여자가 말다툼을 할 때 여자쪽이 훨씬 목소리가 높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여자의 발언권이 상당히 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남녀평등이 어느 정도로 구현되고 있나요.
“중국도 과거에는 남존여비(男尊女卑)사상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49년 건국한 다음에 남녀평등 정책이 본격화됐어요. 그때부터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지금 여성들이 시장 성장 장관을 하고 있을 정도로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습니다. 가정에서도 남녀평등이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 집안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남녀가 완전히 평등합니다. 저희 집에서도 저나 집사람 중 일찍 퇴근하는 사람이 밥하고 저녁식사 준비를 합니다. 이렇게 남자들과 대등하게 살다보니까 여자들의 목소리도 커진 것이지요. 어떤 때는 남자들이 불쌍해보일 정도로 여성이 거세게 몰아붙이고, 목소리도 실제로 더 높은 경우가 흔합니다.”
-여성의 지위가 상당히 강화된 것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만, 사회적 권력을 남성이 장악하고 있어 진정한 남녀평등의 실현은 아직 멀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사실 남녀평등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직장에서 직원을 뽑을 때도 가급적 남자를 우대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게 몇천 년 전부터 내려온 것이니까 몇십 년 만에 완전히 바뀌기는 힘들겠지요. 높은 지위에 올라간 여성이 많아지긴 했어도 아직도 무슨 장 자리가 붙은 지위에는 역시 남자가 많죠.”
-주한 중국대사관의 경우 여직원이 얼마나 됩니까.
“정식 외교관 포함해서 아마 30~40%는 될 겁니다. 중국문화원의 경우는 10명의 직원 가운데 4명이 여성입니다.”
-중국인의 성(性)문화가 한국에 비해 좀더 개방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최근 홍콩 ‘문회보’는 중국대학생을 상대로 한 조사결과 92%가 혼전 성관계에 긍정적 답변을 했다고 보도했어요. 중국인의 성의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중국인의 성의식이 그렇게 개방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중국사람들은 이런 성격이에요. 누가 선물을 사들고 집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있잖아요. 방문객과 함께 식사하고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 선물을 풀어보지 못하는 게 중국사람입니다. 서양인들은 이런 경우 그 자리에서 선물을 풀어보고 좋아합니다만, 중국인은 반드시 손님이 돌아간 뒤에 혼자 남았을 때에야 풀어봅니다. 이게 적절한 비유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성과 관련된 사고방식도 이런 식입니다. 겉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자기만의 세계를 간직하려는 함축적인 자세를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중국사람들은 성에 대해 아직은, 방금 말씀하신 그런 조사결과처럼 개방적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저희 세대만 해도 혼전 성관계는 생각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물론 시대가 변함에 따라 젊은이들의 성의식과 표현이 대담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요즘 중국에서는 젊은이들이 대낮에 길가에서 포옹하는 장면도 자주 목격돼 이제는 이상하게 생각지도 않는 분위기입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보니까 여기 젊은이들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젊은이들의 개방적인 행동은 중국만이 아닌 전세계적인 흐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중국의 종교는 식교(食敎)
중국문화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요리문화다.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각 지역 특색의 요리는 물론이고 술에 얽힌 이야깃거리도 무궁무진하다. 잘 알고 있는 듯하면서 혼란스러울 정도로 복잡한 중국 식문화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의식주를 중국에서는 식의주라고 합니다. 또 중국의 종교는 식교(食敎)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만큼 식생활을 중시한다는 것이지요. 중국인이 먹는 것에 관심이 큰 이유는 어디에서부터 유래한 것일까요.
“중국은 인구가 워낙 많은 데다가 해마다 자연재해를 겪어왔기 때문에 먹는 문제의 해결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처럼 섬긴다(民以食爲天)’라는 말도 있듯이 역대 황제의 가장 큰 과제가 백성을 먹이는 것이었으니까요. 지금은 좀 달라졌지만 과거에는 사람을 만나면 먼저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하는 게 아니고 ‘식사했습니까’라고 묻는 게 일반적이었어요. 그래서 무엇보다도 먹는 일, 즉 식(食)이 우선이다는 의식이 형성된 것 같습니다. 앞에서 중국인이 옷입은 것만 보아서는 신분을 짐작하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만, 이런 현상이 생긴 바탕에는 먹는 것을 중시한 반면, 옷이나 집 같은 외관을 꾸미는 데는 별로 치중하지 않는 식의주 의식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어요.”
-중국음식은 다양한 재료와 조리법 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고 있는데요. 지역에 따라 차이도 크지 않습니까. 중국의 각 지역별 요리의 특징이랄까 대표적인 요리를 간단히 분류해보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지역에 따라서 4대 요리니, 10대 요리니 하지만 그 특징은 간단합니다. 북쪽 사람들이 짠맛을 좋아하고 남쪽 사람들은 단맛을 좋아하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하나 더 추가하면 쓰촨(四川)성 사람들이 매운 것을 좋아하고요. 쓰촨성에서 나는 고추는 맛이 아주 매운데 그 매운 고추를 많이 먹습니다. 그 주변의 후난(湖南)성 후베이(湖北)성 윈난성 사람들도 맵게 먹습니다. 단것을 좋아하는 대표적인 지역이 광둥(廣東)성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바다를 끼고 있어서 해산물요리를 즐겨 먹는데 달착지근한 맛이 특징입니다. 이처럼 짠맛 단맛 매운맛을 기본으로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다양한 방법으로 만드는 게 중국요리라고 이해하면 간단합니다.
지역에 따라 요리의 재료도 크게 다릅니다. 북방에서는 주로 쇠고기, 돼지 양고기 등 육류에다가 콩 고량 옥수수 밀가루를 주식으로 삼고 있어요. 그래서 한국인도 잘 알고 있는 만두나 자장면 국수 같은 것들이 모두 북방요리에 해당됩니다. 이에 반해 남방에서는 강이 많고 평야가 발달해 쌀과 생선이 풍부합니다. 자연히 해산물 요리가 발달한 것이지요.
조리법은 남방이든 북방이든 볶거나 튀기거나 삶는 세 가지 방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요리에는 한국처럼 날것으로 먹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다못해 배추도 삶지 않으면 튀겨 먹으니까요.”
중국 술과 한국 술의 차이
-식당이 아닌 일반가정에서도 그처럼 다양한 메뉴의 요리를 직접 만들어 먹습니까.
“집에서 각종 요리를 직접 만들어 먹기도 합니다. 귀한 손님이 오는 경우엔 20가지 이상의 요리를 만드니까요. 그러나 전문음식점에 나오는 것처럼 다양한 중국요리를 직접 해먹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희귀한 재료는 구하기도 힘들고요. 요리과정에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요리를 보통사람이 하기는 어렵지요. 그래도 중국인들은 집에서 요리를 잘 해먹는데요. 재미있는 것은 여자보다 요리를 더 잘하는 남자가 많습니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아버지가 요리하는 걸 보고 자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는 것이지요.”
-중국인의 음주문화는 한국과는 여러 면에서 다른 것 같습니다. 그중 한 가지가 독한 술을 마시면서도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주정을 부리는 사람을 거의 보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중국에는 ‘술이 백약(百藥)의 으뜸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적당히 술을 마시면 약을 먹는 것처럼 몸에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턱대고 술을 마셔대 추태를 부리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게다가 중국 술은 빨리 깨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 드문 게 아닌가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중국 술은 도수가 높아서 마시면 금방 취하지만 30~40분 지나면 술이 깨 회복이 빠릅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드리면 중국 술을 마시면 먼저 다리부터 취합니다. 그래서 술을 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다리가 비틀거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술 마시는 도중에 다리에 힘이 빠지는 듯하면 아, 내가 지금 술에 취하는구나 하고 느낄 수가 있어요. 이때 잠시 술잔을 내려놓고 쉬면서 대화를 하다보면 얼마 안가 거짓말처럼 술이 깹니다.
반면에 한국 술은 머리부터 취하는 것 같아요. 도수 높은 술 마시는 데 익숙한 중국사람이 한국 술을 마시면 도수가 약해서인지 두 병 세 병 휙 마셔버립니다. 그러면 어느 사이에 머리부터 취하면서 한국말로 필름이 딱 끊어진다는 겁니다.”
-한국에서는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을 주당(酒黨)이라고 합니다만, 중국에서는 주귀(酒鬼)라고 하더군요. 술귀신이라는 것이지요. 요즘도 주귀로 불릴 만큼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술 많이 마시는 사람을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주귀는 아무 술이나 마시고 취하는 사람, 주선(酒仙)은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고 정신이 말짱한 사람, 주성(酒聖)은 눈을 감고서도 술을 조금만 마시면 어떤 술인지 다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주성이 술에 관한 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역사적으로 주선이나 주성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의 일화가 무척 많습니다. 한고조 유방의 부하였던 번쾌라든가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 도연명과 이태백 같은 문인들, 은둔생활을 했던 죽림칠현 등등이 모두 술 마시는 데 있어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지요.”
-술의 종류도 무척 많아 혼란스럽기까지 한데요. 흔히 중국의 술을 백주(白酒)와 황주(黃酒)로 나누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백주에 해당되는 술을 고량주(高粱酒)나 배갈(白干兒)이라고도 부르지 않습니까. 중국 술은 어떻게 구분하나요.
“술의 종류가 많은 것 같습니다만, 빚는 방식에 따라 크게 백주와 황주로 구분됩니다. 백주는 말 그대로 백색투명한 술인데 증류주이기 때문에 알코올 도수가 30도 이상인 독한 술입니다. 수수로 만드는 각종 고량주나 중국의 최고 명주로 알려진 마오타이주(茅台酒)가 바로 백주에 속합니다. 주로 북방사람들이 즐겨 마십니다. 반면 황주는 한국의 탁주와 같은 발효주로 그다지 독하지 않습니다. 사오싱주(邵興酒)가 대표적인데 저장성 등 남방에서 많이 마십니다. 이밖에 미주(米酒)는 술에다 각종 식물이나 약재를 넣고 함께 증류시켜 독특한 맛과 향기를 내게 한 술인데요. 한국인도 잘 알고 있는 죽엽청주와 오가피주가 여기에 속합니다.”
-중국의 음주문화를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이른바 명주(名酒)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값비싼 술들이 잇따라 출현하면서 최고의 술을 둘러싸고 판도가 바뀌고 있다고 하더군요. 현재 어떤 술이 품질이나 가격면에서 최고의 명주로 꼽히고 있습니까.
“사람마다 평가가 다르겠지만, 저는 역시 마오타이주가 최고의 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오타이주는 국제대회에서 금상도 많이 받았는데, 이 술이 생산되는 구이저우(貴州)성의 마오타이진(鎭)의 물이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습니다. 마오타이주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1915년 파나마운하의 개통을 축하하기 위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파나마 만국박람회에서 금상을 차지하면서부터입니다. 그후 마오쩌둥 주석이 닉슨 미국대통령과 다나카 일본총리를 접대할 때 내놓았다고 해서 더욱 유명해졌지요. 이 술은 유명한 만큼 가짜도 많은데요. 심지어는 마오타이주를 생산하는 공장 앞에서 가짜 마오타이주를 판다는 말이 나돌 정도입니다.
물론 요즘 우량예(五糧液)나 지우구이(酒鬼), 수정방 같은 비싼 술이 많이 나왔습니다만, 마오타이의 명성을 능가하지는 못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술 마시는 주법도 한국과는 많이 다른 것 같은데요. 어떤 점이 다른가요.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이 한국에서는 술잔을 돌리는데 중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잔에 술이 남아 있으면 잔을 완전히 비우기 전까지는 다시 채우지 않는데 비해 중국에서는 상대방의 술잔에 술이 얼마나 남아 있건 관계없이 부단히 첨잔을 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또 술을 마실 때 한국에서는 자기 혼자 마시고 내려놓아도 크게 실례되는 일이 아니지만 중국에서는 자기가 마시고 싶더라도 반드시 상대에게 술을 권해야만 합니다. 건배의 의미도 한국과 중국이 전혀 다릅니다. 중국어로 ‘간베이’라고 하는 건배(乾杯)는 한국에서는 별뜻없이 하는 소리지만 중국에서는 잔을 완전히 비우라는 뜻이니까 남기면 안 되는 것이지요.”
-먹고 마시는 음식이나 술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게 중국의 차(茶)문화인 것 같습니다. 중국인이 기름진 음식을 많이 섭취하면서도 비만한 사람이 드문 것은 차를 많이 마시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 말이 맞습니까.
“네, 차를 마시면 소화가 잘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차에는 기름기를 없애주는 성분이 있어 중국음식을 먹은 뒤 차를 마시면 아주 개운합니다. 중국에 뚱뚱한 사람이 적은 것은 분명히 차를 많이 마시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차에는 갈증을 해소하고 몸의 분비작용을 촉진시키며 숙취를 제거해주고 정신을 맑게 해주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차 마시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진한 차를 마시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아무튼 차는 중국음식과 궁합이 아주 잘 맞고 건강에 좋은 점이 많은 것 같아요.”
중국요리와 차(茶)의 궁합
-한국에 와서 한국식 식사도 많이 해보셨을텐데요. 중국과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느끼십니까. 질이나 양, 맛 등을 비교한다면.
“한국음식이 저한테 맞는 것 같습니다. 한국 근무하기 전에 혈압이 높았는데, 여기 와서 한국음식을 먹었기 때문인지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중국음식과 비교해보면 한국음식에는 기름을 많이 쓰지 않는 편입니다. 저는 매운 것을 좋아해서 한국음식이 입에 맞죠. 아주 흡족합니다만, 한 가지 문제는 양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일인분이라고 나오는 음식의 양이 중국인 한 사람이 먹기에는 부족한 것 같아요.”
-중국사람들이 손님을 초대해 만찬을 베풀 때 보면 항상 연설을 하는데, 정말 말을 잘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또 연설하면서 유명한 시구를 인용한다든가 고사를 인용하기를 좋아하더군요. 이처럼 말하기 좋아하고 또 잘하는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학교에서부터 그렇게 말하는 법을 배워서 그런 건가요.
“지금은 회의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전에는 정말 회의가 많았습니다. 공산당이 회의를 많이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조직구성원간에 서로 평등하게 의견을 내서 토론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지요. 아무튼 회의를 하면 돌아가면서 모두 발언을 하니까 자연히 연설솜씨를 익히게 됩니다. 특히 간부로 승진한 사람들일수록 회의를 자주 하고 말을 할 기회가 많으니까 말을 잘하게 된 게 아닌가 합니다. 학교에서 특별히 연설하는 훈련을 쌓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연설하면서 시를 자주 인용하는 것은 학교에서 철저히 교육을 받은 덕분인 것 같아요. 요즘 학생들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희가 공부할 때는 보통 300수 이상은 외웠으니까요. 천가시(千家詩)라고 해서 1000명의 유명한 시인의 시를 공부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다 잊어버리고 기억나는 게 별로 없습니다.”
-지금 당장 외울 수 있는 시가 몇 수나 됩니까.
“아마 10수 될 겁니다. 자주 써야 하는데 요즘은 안 쓰니까 거의 다 잊었습니다.”
아시아 최초의 중국문화원
북한유학을 시작으로 한반도와 인연을 맺은 지 18년이 된 주잉제 원장은 한국말이 유창할 뿐 아니라 한국에 대한 이해가 깊다. 어려서부터 조선족 친구들과 교분이 두터워 한민족의 기질과 문화에 접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그가 초대 주한 중국문화원장이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인 듯도 하다. 마지막으로 중국문화원의 운영방향에 대한 구상을 들어보았다.
-주한 중국문화원이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설립되는 중국문화원이라고 들었습니다. 주로 어떤 시설들을 마련하고 있는지 소개해주십시오.
“말씀하신 대로 아시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에 중국문화원을 설립합니다. 서울 내자동 서울경찰청 바로 옆에 있는 7층 건물인데요. 현재 준비작업이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원래는 10월에 개원하려고 했는데, 내부를 중국식으로 꾸미려고 자재를 전부 중국에서 배로 운반하다 보니 시간이 꽤 걸리는 바람에 늦어져 12월28일 개원할 예정입니다.
주요시설은 우선 지하에 소극장이 있어서 영화도 상영하고 소규모 공연도 열 것입니다. 1층은 로비이고 2층에 전문전시관을 마련해 한국그림과 중국그림 서예작품 등의 기획전시를 하게 됩니다. 3층 강의실은 주로 중국회화, 중국서예, 중의학, 중국무술 등을 보급하는 활동공간으로 쓰입니다. 컴퓨터실도 있습니다. 4층 도서관에는 중국책 1만5000권을 비치할 것입니다. 5층과 6층은 사무실이고 7층은 중국요리를 배울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습니다.”
-중국에 관심있는 한국사람이 꽤 많은데요. 이들이 앞으로 중국문화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중국에 대한 유학정보나 관광정보 등 무료로 제공할 계획입니다. 이런 자료들을 지속적으로 얻어보려면 중국문화원 인터넷 홈페이지(www.cccseoul. org)를 방문해서 회원가입을 하면 좋을 겁니다. 또 중국문화원 명예기자 같은 커뮤니티에 참여하는 것도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중국문화원의 운영 방향을 어떻게 구상하고 계신지 말씀해주시지요.
“역사를 놓고 볼 때 중한 두 나라의 문화에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옛날에 중국문화가 한국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요즘은 한국문화가 중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지 않습니까. 문화교류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의 문화가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기보다는 서로 고르게 오가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그래서 앞으로 중국문화를 한국에 소개하는 일은 물론 한국문화를 중국에 소개하는 데에도 힘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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