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김종대의 민속으로 본 性이야기

醉月 2009. 9. 26. 09:39

경복궁 민속박물관의 남근석과 여근석

풍요·다산 기원… 민중의 신앙

성(性)은 가장 고귀한 것이면서도 오랜 기간 유교 전통에 갇혀 그에 대해 관심을 드러내면 천박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민간에 전해 내려온 설화들과 전국 각지에 널려 있는 남근석, 여근석 등 각종 성 관련 민속자료들은 조상들의 성에 대한 관심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상징물들이다. 전통 생활과 민속에 뿌리내린 성에 대한 올바른 접근 없이는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의 깊이도 얕을 수밖에 없다. 세계일보는 민속 가운데 살아 숨쉬는 성문화를 새롭게 조명하는 새 기획 시리즈를 매주 한 차례 내보낸다.
편집자주
‘왜 민속박물관에 남근석을 세웠을까.’
경복궁 내에 위치한 국립민속박물관을 찾아가면 우리 민속문화를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다. 실내 전시실 내용뿐 아니라 야외에도 우리 문화의 상징적인 모습들을 선정해서 재현해 놓았다. 예컨대 민중 신앙의 상징인 돌탑과 장승, 그리고 돌로 만든 장승인 벅수 등이 그것이다. 그 곳을 박물관에서는 장승동산이라고 부른다.
그 중에서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이 장승동산 한구석에 세워진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닮은 돌들이다. 남근석 2기와 여근석 1기가 있다. 남근석은 북한 평북 태천 학봉리와 전북 순창 창덕리에 있는 것을 재현한 것이다. 이것을 선정한 이유는 북한과 남한을 대표하는 남근석으로 일종의 화합과 통일을 기원하는 의도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남우세스러워 보이는 이 돌들을 왜 세웠느냐는 항의가 있을 법한데, 아직까지 항의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이곳은 봄가을이면 학생들이 많이 찾는다. 물론 이들의 위치는 장승동산에서도 가장자리에 있다. 문제는 왜 이들 돌을 우리 민속문화의 상징들을 모아놓은 장소에 세워놓은 것일까. 과연 이들 돌이 우리 문화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기에 이곳에 세워놓은 것일까.
한국문화 유산 가운데 아직 온전하게 설명되거나, 혹은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다. 그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제대로 알리는 작업은 매우 긴요하다. 쉬운 예로 전통적인 성과 관련한 풍속과 이야기가 그러하다.
최근에 와서 이들과 관련한 보고서나 논문, 그리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논의가 과연 우리 문화를 올바르게 읽어낸 것인가 하는 점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즉 이들 성 관련 소재를 상품화하거나 흥미의 대상으로 이해하고 즐기기 위한 목적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 조상들이 단지 성을 즐기는 대상으로 삼았을까.
조선시대에 중국에서 들어온 도자기 하나가 지체 높은 양반과 관리들의 목을 달아나게 만들었다. 그 도자기는 바로 남녀의 성행위가 묘사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바로 이런 도자기를 완상하다가 적발되면 바로 처벌을 받았다. 지금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조선시대에 자행된 것이다.
그러나 민중들은 그와 같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찾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그런 즐김의 대상이기보다는 삶과 직결된 신앙적 대상으로 더욱 생활에 밀착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엿볼 수 있는 증거는 청동기시대까지 소급될 정도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이 시기에 세워진 울주의 반구대 암각화와 대전 괴정동 출토 농경문의기(農耕文儀器)는 좋은 예다.
반구대 암각화를 보면 맨 위에 성기가 굳건하게 서 있는 남자가 있다. 그 밑에는 고래와 여러 물고기들이 그려져 있다. 잘 알려진 농경문의기에는 솟대와 따비(풀뿌리를 뽑거나 밭을 가는 농기구)로 밭이랑을 가는 농부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 농부의 모습이 매우 가관이다. 성기가 유달리 크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 유물을 통해서 우리는 성기 문화의 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즉 과장되게 큰 성기가 많은 수확을 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생산능력이 강화되어 있다는 믿음과 관련이 있다. 사람의 신체에 달려 있는 과장된 성기가 보다 많은 생산을 초래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그런 점에서 원초적인 사고라고 할 만하다.
신체에 달려 있는 성기가 그와 같은 능력을 지녔다고 한다면, 거대한 바위로 나타난 성기 모습은 얼마나 능력이 탁월할 것인가. 이런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우리 조상들은 굳게 믿어 왔다. 그렇기에 이들 바위를 신성하게 모시는 민간신앙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성기바위, 즉 남근석은 그렇다면 어느 때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잡았을까. 무엇보다도 청동기시대 이래로의 전통은 풍요로운 수확에 있었다.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서 정착생활을 하며 농사를 지으면서 추구하였던 가장 큰 지향점은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수확이 요구된다. 농사가 잘되고 못되고의 사연은 물론 자연재해로부터 얼마나 피해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하지만 그 자연재해는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남근석에 대한 치성행위다. 즉 많은 결실을 위해 생산력이 강한 남근석에 치성을 드림으로써 보다 많은 씨를 뿌릴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이와 함께 자식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도 탁월하다고 믿었다. 불임여성들이나 딸만 생산한 부녀자들에게는 이 바위 자체가 바로 생산할 수 있는 변강쇠와 같은 남성신이었던 것이다. 우뚝 선 바위는 바로 강력한 힘의 원천이며, 동시에 단단함을 통해 영원한 능력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였다. 특히 자식 낳기를 기원하는 기자(祈子)신앙의 대상으로 남근석을 전국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남근석에 대한 숭배와 의례 행위가 오랫동안 우리의 전통으로 계승되어 왔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성기바위에 대한 믿음이나 혹은 숭배가 미개인들이나 하는 행위로 치부되는 경향도 부정하기 어렵다. 실증주의와 서구적 과학주의, 혹은 기독교와 같은 고등종교에서 바라볼 때 남근석에 대한 믿음은 그런 면이 두드러질 수 있다. 그러나 이웃 나라인 일본에는 한 마을에도 성기를 모시는 신사를 여러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어떤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은 바로 다른 문화의 잣대로 자기 문화를 잴 수 없다는 것을 명쾌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근석이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으며, 그에 대한 믿음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가 살피기 위해 떠날 시간이 되었다. 다음에는 가까운 서울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경기도 안양 삼막사 소재 여근석(오른쪽)과 전북 순창군 창덕리 소재 남근석 복제품.
인왕산 선바위
"아들 하나만 점지해 주소서"
 땅 속에 박혀 길쭉하게 서 있는 선바위는 선사시대 이후 집안의 평화나 아기를 낳기를 기원하는 이들의 치성 대상이었다.
선바위 혹은 입석(立石)이라고 부르는 바위는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길쭉하게 서 있는 바위를 선바위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선사시대 이후 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왜 이들 바위가 주목을 받았는가 의문이 들 만하다.

무엇보다도 이들 바위는 땅속에 박혀 있다. 그런 형상 자체도 매우 의미심장하지만, 실상은 이런 바위 형태가 무언가를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이 기자(祈子)신앙과 같은 민간신앙의 치성 대상으로만 존재해 왔던 것일까.

벚꽃이 한창 바람에 날리던 일요일, 초등학교 4학년인 막내아들을 데리고 인왕산의 선바위를 찾았다. 물론 등산을 핑계로 올랐다. 등산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막내는 무엇인가 재미있는 것이 있는 줄 알고 나섰다. 그러나 선바위까지 오르는 동안 계속 씩씩거렸다. 아무런 재미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선바위 주위를 맴돌면서 계속 사진을 찍어대고, 그곳을 찾은 사람들 곁에서 얼쩡거리는 것이 더 신기했던 모양이다. 숨을 돌린다고 계단 밑에 앉아 있던 아이가 선바위까지 올라와 나에게 물었다.

“저 바위에다 왜 사람들이 절을 하는거야.”

“응, 절하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는 전설이 있대.”

그 말을 들은 아이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몇 번에 걸쳐 절 시늉을 하였다. 막내에게도 무언가 빌고 싶은 소원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공양이 없는 그 소원도 이루어질 수 있을까 궁금하다. 왜냐하면 선바위의 앞쪽과 좌우측에는 초와 사기등잔으로 만든 공양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도성과 인접한 곳에 왜 이런 바위가 있었고, 그리고 사람들은 왜 이곳을 찾아서 치성을 드리는 것일까. 더욱 흥미로운 것은 독립문 위쪽에 위치한 안산에도 선바위가 있다는 것이다. 즉 골짜기를 하나 사이로 선바위가 2개 놓여 있는 형국이다.

인왕산에 위치한 선바위는 국사당을 밑에 두고 있다. 원래 이 국사당은 태조 이성계를 모신 사당으로 남산에 있었던 것인데, 일제 때 남산에 신사를 세우면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국사당 위에 있는 선바위에는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관련된 전설이 있다. 선바위를 성 안쪽으로 넣으면 불교가 성하고 유교가 퇴보한다고 해서 성 밖에 놓이게 되었다고 한다.

선바위는 자연의 조화로 만들어졌는데, 마치 남녀가 같이 서있는 것 같은 형국이다. 그래서 이 바위의 모습을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일설에는 무학대사 상이라고도 한다. 안내판에는 선바위의 ‘선’을 스님이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선(禪)자를 따서 선바위로 불렀다고 적혀 있다. 이 설명은 견강부회된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둥처럼 솟아 있는 바위를 대개 선바위, 즉 입석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바위의 일반적인 특징은 남근의 형태를 띠고 있다. 다만 그것을 상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에 고상하다고 생각되는 표현을 찾은 것은 아닐까. 일제시대에 발간된 ‘조선의 귀신’에도 이 바위를 부부암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기자와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는 석신(石神)으로 그 대석 앞에는 소원을 기원하는 축문도 새겨져 있다고 한다.

선바위에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치성을 드린다. 이때 공양을 올리는데, 대개 과일 공양과 촛불 공양이 일반적이다. 그런 후에 바위를 향해서 절을 올린다. 소원은 일반적으로 아기를 낳기를 기원하는 기자속(祈子俗)이 주류를 차지한다. 선바위의 뒤쪽에 가보니 동자상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많은 사람이 아들 낳기를 기원하기 위해 이곳을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바위에 올랐을 때 한 젊은 여성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절을 올리고 있었다. 아마 아기를 점지해 달라고 치성을 드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외에도 집안의 평안이나 사업 번창 등을 기원할 때 찾기도 한다. 이곳을 찾아온 한 아주머니의 말씀은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성취해주는 영험한 산신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렇기에 아기만 점지해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소원들도 잘 들어준다는 것이다.

인왕산에서 내려와 서대문형무소 자리를 끼고 안산으로 올랐다. 안산의 기상대로 오르는 길목에도 거대한 남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바위가 있다. 그런데 이 바위는 잘 찾아봐야만 한다. 다른 한 면은 넓적한 바위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남근처럼 잘 보이는 한 쪽이 있는데, 이쪽 방향으로 성혈(性穴)이 패어 있는 흔적들이 많다. 아마 그곳에 돌멩이를 갖고 문질러야만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발전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바위 밑쪽으로 따로 둥근 홈이 파인 조그만 바위가 짝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즉 남·여근석을 맞춘 듯한 느낌을 준다. 요즘도 이 바위에는 검게 그을린 흔적이 있다. 아직도 찾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 바위의 영험함이 남아 있다는 증거라고 할 만하다.

이런 바위와 달리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있던 붙임바위는 세검정 쪽으로 도로를 만들면서 없어졌다. 부암동이라는 명칭 자체가 이 바위 때문에 생겨난 지명이다. 즉 붙을 부(付), 바위 암(岩)자를 써서 부암동이라고 한 것이다.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바위 때문에 동네가 만들어진 것인가 궁금하다. 서울에는 이 외에도 불광동 선바위 등 여러 곳에서 믿음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가평 용추계곡 미륵바위

앞에서 보면 웅녀像… 뒤에서 보면 단군像

경기도 가평까지 달리는 동안 북한강변에는 무수히 많은 숙박시설과 식당이 보였다. 과연 강이라는 공간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관광지인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가평으로 들어와 승안리의 용추계곡에 도달해서는 절정에 이르렀다. 가건물이 대부분 파란 천막천으로 만들어져 푸른 숲을 가렸기 때문이다. 숲보다 천막이 크게 보이는 계곡 사이로 그 우람하던 미륵바위는 너무나 왜소해 보였다.
10년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이처럼 사람을 상대로 장사를 하던 모습이 없었다. 물 흐르는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조용함 그 자체였다. 계곡을 따라 오르면서 10년 전에 봤던 그 바위와 분위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변화에는 역시 사람들이 중심에 서 있다. 바위는 가건물에 막혀 어디에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가까스로 미륵바위를 찾아냈을 때, 기쁨보다는 가건물 뒤에 초라하게 서 있는 모습에 동정심이 앞섰다. 그리고 바위 앞에 만들어져 있던 제단과 그 밑의 치성 드리던 자리 등이 어느 해의 홍수 때문인지 몰라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10년 만의 재회가 상전벽해를 느끼게 만들었다.
이 바위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박옥자라는 분이다. 이분의 고향은 함경도인데, 광복 이후에 이곳으로 와 정착했다고 한다. 이 바위를 캘 때 단군의 현몽을 받았다고 하여 자신의 몸주신으로 생각하고 있다. 가평 용추계곡이 한국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으로 자신을 인도했다는 것이다. 현재 승안리 미륵소 근처에서 단군과 마고(痲姑) 등을 모신 용화정사를 운영하고 있다. 용화(龍華)라는 용어 자체가 미륵과 관련된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바위는 미륵바위라고 부르지만, 박옥자씨에 의하면 단순하게 미륵바위가 아니라고 한다. 즉 앞쪽에서 보면 웅녀의 상이지만 뒤쪽에서는 오른편이 단군, 왼편이 용녀(龍女)를 각기 상징한다는 것이다. 미륵바위의 주위에는 계곡에서 주워온 편석을 쌓아 놓았다. 10년 전에는 돌탑이 몇 기 있었는데, 그동안 장마로 인해 다 쓸려 내려갔나 보다. 이 외에도 12동물에 해당되는 바위를 계곡에서 찾아 놓았지만 소와 쥐 정도만 남았다고 푸념을 한다.
바위를 찾아 사진을 찍고 박옥자씨 집을 찾아갔다.

집안에 모셔진 제단을 보니 가운데 마고, 좌우에 웅녀와 용녀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옆쪽에는 단군상을 화강암으로 깎아 세웠다. 마고는 일반적으로 ‘마고할미’라고 부른다. 체구가 거인으로 산이나 바위를 움직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긁어서 산과 산을 만들었으며, 치마에 흙을 담아서 산봉우리를 만들었다고 하는 전설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마고할미와 단군의 관계가 조금 이상스럽다는 것이다. 마고를 웅녀와 용녀가 호위하고 있다는 주장이 그러하다. 웅녀가 단군의 어머니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마고가 지존의 신이 된다. 그렇다면 단군도 역시 마고보다는 하위신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미륵바위가 단군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박옥자씨는 역시 단군을 가장 상위의 신으로 모시고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미륵바위는 박옥자씨가 말하는 것처럼 단군의 모습을 갖추었는지 알 수 없다.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단이 마련된 방향에서 보면 사람의 얼굴로 보인다.
그러나 약간 비켜 남쪽에서 보거나 북쪽에서 보면 이것은 영락없이 거대한 남근 형상이다. 약 2m 가까이 되는 높이에 귀두 부분으로 갈라진 비율이 거의 남근을 닮아 있다. 그런데 뒤쪽에서 보면 바위가 둘로 갈라진 형태다. 왼쪽이 중심이고, 오른쪽에 조그만 사람이 붙여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왼편을 단군이라고 하고, 오른편을 용녀의 상이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이 바위에는 주로 자식 낳기를 기원하는 사람과 불치병에 걸린 사람, 그리고 사업 번창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찾는다. 물론 자식 낳기를 기원하는 경우에는 사람들이 없을 때인 새벽에 주로 찾는다.
그러나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은 아침에도 찾아와 치성을 드린다. 대개 백일기도를 드려야 기본인데, 요즘은 사람들이 빠른 소원성취를 기원하기 때문에 주로 49일 정도를 한다고 한다.
박옥자씨를 이번에 찾아가서 또 만났다. 이제는 막 화를 낸다. 왜 단군상제를 제대로 모시지 않느냐는 것이다. 단군이 우리나라를 세운 조상인데 말이다. 그래서 요즘 사회도 혼란하고 비도 내리면 홍수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속담에 ‘잘되면 제 탓이요,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그런 사정에 해당되는가 의문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의 휴식을 취해 탁족(濯足)의 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낮에는 함부로 보이기 힘든 발을 계곡 물에 담그고 바위에 누웠을 때, 그 기분은 무어라 말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옛 선비가 부럽지 않았다. 아직은 시리고 찬 기운이 감도는 물과 맑은 공기, 따스한 햇볕이 있는 그곳에 미륵바위가 서 있었다.
 
안양 관악산 삼막사
칠보전과 남녀근석이 한 곳에
"자식하나 주세요"발길 줄이어
 삼막사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마애삼존불을 모신 칠보전과 남·여근석이 한 곳에 모여 있다.
경기도 시흥에서 안양으로 내려가는 길에 관악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예전에는 찾기도 편했는데, 지금은 마무리 도로공사를 하느라 한참 바쁘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으로 터널을 뚫어서 바로 연결된 것도 모르고 시흥대로를 거쳐 안양으로 내려오는 길을 택했다.

삼막사로 오르는 길은 시민들의 등산로가 되어 평일에도 많은 차량이 주차해 있었다. 삼막사 주차장에서 삼막사까지는 약 2㎞ 정도가 되는 듯했다. 계속 오르막으로 된 길을 따라 오르는 것 자체도 운동이 될 법하다. 삼막사에 도착해서 보니 화강암으로 사찰을 온통 치장해 놓았다. 남·여근석이 위치하고 있는 칠보전까지의 계단도 온통 화강암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걸어 오르기는 편한데, 너무 돈으로 치장된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

예전에 올 때는 이렇게까지 치장되지 않았다. 옛 흙길을 걷듯이 산길에 고즈녁한 분위기가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절을 찾아오면서 생긴 변화인 듯하다. 아니면 돈 많은 사람이 보시를 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칠성각(七星閣)을 칠보전(七寶殿)으로 암자 명칭을 바꾼 것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삼막사(三幕寺)는 신라시대 유명한 승려인 원효와 의상, 윤필 등이 창건한 절이다. 세 사람이 이 곳에서 막(幕)을 치고 수도를 했기 때문에 삼막사라고 하는 유래담이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은 듯하다. 또 다른 전설에는 원래 이곳 주위에 일막사, 이막사, 삼막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막사와 이막사는 폐사가 되어 터만 남고, 삼막사만이 명맥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삼막사가 주목을 받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 사찰의 칠보전에 모셔진 마애삼존불의 앞에 세워져 있는 남근석과 여근석 때문이다. 이처럼 기자신앙의 대상물로서 산신각이나 칠성각에 해당되는 칠보전과 남·여근석이 한곳에 모여 있는 사례는 삼막사가 유일하다. 이런 지형적 특징 때문인지 몰라도 자식 낳기를 기원하는 기도처로서 전남 돌산의 향일암과 함께 잘 알려진 곳이다. 특히 이 남·여근석은 1983년에 경기도 민속자료 3호로 지정되어 일찍부터 주목받았음을 알게 한다.

삼막사의 남·여근석 과 관련해서 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금실이 좋은 부부가 있었는데, 자식이 없는 것이 큰 걱정이었다. 시어머니는 씨받이라도 들이라 난리였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꿈에 웬 할머니가 나타났다. 그 할머니는 삼막사의 남·여근석 을 문지르면서 소원을 빌면 자식을 낳을 수 있다고 하였다. 부부는 그 바위를 찾아 근처에 움막을 짓고 치성을 드렸다. 하늘이 감응했는지 과연 아들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자손이 번창하고 잘 살았다는 것이다. 이런 소문에 자식을 낳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치성을 드렸으며, 지금도 사월 초파일과 칠석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고 한다.

삼층석탑 앞에 놓여 있는 무수한 동자상도 삼막사라는 사찰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석탑은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으로,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칠보전 안에 모셔진 마애불의 코가 완전히 납작해질 정도로 갉아낸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왜 코를 그렇게 갉아냈을까. 이것은 장승과 같이 나무도 아닌 화강암이기 때문에 코를 갉아내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코를 갉아낸 것은 자식을 얻고자 하는 여인네의 심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코를 갉아낸 돌가루를 물에 삶아 먹으면 바위가 지닌 뛰어난 생산 능력을 지닐 수 있게 된다는 전통적 사고방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런 사정은 줄다리기에 사용되는 수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창녕 영산의 줄다리기는 지름이 50㎝ 이상이 될 정도로 굵다. 그런데 이곳의 줄은 수줄과 암줄을 비녀목이라는 굵은 막대기로 연결하게 되어 있다. 여기서 수줄의 머리통이 바로 남근 모습을 띠고 있다. 그래서 줄다리기가 끝나면 사람들은 수줄의 머리를 베어간다. 이것을 지붕에 올려놓으면 잡귀가 근접하지 못한다고 믿는다. 또 아기를 낳지 못한 사람은 이 줄로 삶아 먹으면 잉태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삼막사를 찾을 때마다 묘한 인연이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항상 여근석 가운데 물이 고여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누군가 물을 뿌려놓은 것은 분명히 아니다. 이것은 전날 비가 내렸기 때문에 고인 물이다. 너무나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 관심을 끌었던 것은 물이 조금 고인 여근석 안에 누군가 백원짜리 동전을 넣어 놓았다는 점이다.

◇남근석(왼쪽), 여근석.

동전이 여러 개가 있다는 것을 보면 한 사람의 소행은 아니다. 누군가 치성을 드리고는 그 안에 백원을 넣은 것임이 분명하다. 삼막사의 여근석에는 백원짜리와 같은 동전을 문지르는 특징이 있다. 10년 전에 찾았을 때도 백원짜리 동전이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던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그래서 치성이 끝나고 그 돈을 던진 듯하다. 아들을 낳기 바라는 마음에서 그 안에 돈을 넣은 것은 마치 음양의 교합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제천 공알바위와 선돌
마을 농경지에 '우뚝' 풍요의 神으로 숭앙
 마을제의 때 쳐놓은 금줄로 둘러싸인 송학면 무도리의 공알바위. 안쪽에 자갈들이 쌓여 있다.
제천은 산골이면서도 산골이 아닌 곳처럼 보인다. 충청북도 내륙 지방은 강원도와 인접하여 깊은 산골이 연상된다. 그러나 제천은 이웃한 단양과 달리 평야 지대가 발달해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신라 진흥왕 때 세운 제천의 의림지와 함께 오래 전부터 이곳이 농사 지대였음을 잘 보여준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물론 제때에 파종을 하고 김매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농사력과 함께 적절하게 비가 내려야 한다. 그리고 병충해로부터도 큰 피해가 없어야 한다. 이런 모든 상황이 적절하게 맞춰질 때 풍요로운 수확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이른 시기부터 마을 사람 모두가 합심해서 마을 제의(祭儀)를 올렸다.

제의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 바로 제천시 송학면 무도리 음지만실에 있는 ‘공알 바위’와 입석리의 선돌을 들 수 있다. 공알바위는 여자 성기를, 선돌은 남자 성기를 상징한다. 이런 상징물들이 멀지 않은 이웃 마을에 위치하고 있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제천은 물론 의림지로도 유명하지만, 송학면 무도리의 공알바위는 그에 못지않게 유명하다.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공알바위’로 약 150×100㎝의 크기의 알과 같은 바위가 안에 들어 있다. 그러나 이 바위 앞에는 도로가 오래 전부터 나 있었고 철도가 바로 옆에 위치하여 시끄러움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만약 신이 살고 있었다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지나 않았을까 걱정될 지경이다. 바위 앞에는 지난 정월 마을제의 때 쳐놓은 금줄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바위의 안쪽을 유심히 쳐다보니 자갈들이 쌓여 있었다. 이것은 아들을 낳고 싶은 부녀자들이 넣어 놓은 흔적이다. 즉 개울 건너편에서 자갈 3개를 던져 한 개라도 이 바위 안쪽에 들어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것이다.

마침 그곳에 도착했을 때 딸 하나를 두고 있는 여인이 아들을 낳기 위해 돌을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리가 족히 20m나 떨어져 있어 바위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고도의 수련이 요구될 만하다. 바위 안쪽으로 들어갈 만한 크기도 20㎝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넓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위 안쪽에 자갈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면 많은 여자들이 찾아와 아들 낳기를 간절히 기원했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 바위에 대한 제의로 동제가 있다. 음력으로 정월 초이튿날 자정에 포와 삼실과 등의 제물을 차리고 제사를 올린다. 이것은 원래 마을 전체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이다.

◇송학면 입석리의 선돌. 7개의 돌을 3단으로 쌓아 높이가 약4m에 달한다.

그런 점에서 ‘공알바위’는 개인의 치성 대상이면서 동시에 마을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수확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공알바위’는 말 그대로 여성기를 상징한다. 그래서 이 바위를 함부로 건드리면 부녀자들이 바람이 나서 마을이 망한다고 한다. 그런 속설 때문에 바위를 시멘트로 메워 버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국 여러 지역에서 전해진다.

문제는 이 마을에서 이 바위를 용왕바위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마을 앞에서 만난 박한기(76)씨에 따르면 ‘공알바위’라는 명칭이 상스럽다고 해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바위 앞의 안내에는 용암이라고 표기돼 있다. 표지판에는 “왕박산(王朴山)의 남맥인 마을 앞 안산(案山)이 마치 용의 형국을 이루었으므로 이 바위를 용암이라고 하고 일명 독바위라고도 일러왔다”고 적혀 있다. 참 혼란스러울 만큼 여러 명칭이 만들어졌다.

무도리를 떠나 38번 국도를 타고 평야 지대를 따라서 약 6 정도 내려가면 입석리에 도착한다. 여기에는 거대한 선돌이 세워져 있다. 일반적인 선돌의 규모에 비해 매우 큰 편이다. 특히 하나의 돌이 아니라, 7개의 돌을 3단으로 쌓아 전체 높이가 약 4m 정도에 달한다. 둘레만도 세 사람이 팔을 펼칠 정도로 약 250㎝라고 한다.

선돌은 마을 입구에 세워져 논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원래는 논 복판에 있었는데, 1992년 농지개량을 하면서 50평에 입석을 조성할 수 있었다. 이들의 형상을 보면 단순한 돌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마을의 명칭이 입석리(立石里)인 것도 바로 이 선돌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돌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마고할미가 치마에 돌을 담아와 포개 놓았다고 하는 것이다. 왜 마고할미가 바위들을 이처럼 포개놓았는지 전혀 알 도리는 없다. 하지만 이들 사이로 천을 넣고 잡아 당겨도 쉽게 끌려 나올 정도로 중간에 틈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마을에서는 원래 선돌과 관련한 제의가 없었으나, 1974년부터 선돌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마을 노인회가 중심이 되어 축관과 헌관을 뽑아 음력 10월 초에 택일을 해서 제사를 올린다. 이 외에도 몸이 안 좋은 사람이 선돌에 제물을 차리고 비손을 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자식이 없는 사람이 몰래 찾아와 이곳에서 비손하기도 한다. 현재도 선돌제 때 쳐놓은 금줄이 남아 있다.

입석리의 선돌은 그 거대함 때문에 생산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돌이 농경지의 한가운데 위치했다는 점은 오래 전부터 돌이 지닌 생산력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제천 ‘공알바위’와 선돌은 생산을 중시하는 농경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들은 우리 성문화의 상징으로 보여주는 데 매우 유효한 유물이다. 그러나 현재 이들에 대한 믿음은 점점 쇠퇴하고 있다. 단지 누가 건드려 훼손할까봐 철책을 쳐서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괴산 은티마을 남근석
여근곡에 안긴 마을 남근석 세워 음양조화
 은티마을 남근석. 지난 마을 제의 때 쳐놓은 금줄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은티 마을은 멀고도 멀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나에게는 그렇게 멀어만 보이던 그 마을에 많은 사람들을 위한 주차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원래 은티 마을은 충북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에 있는 것으로 관련 책자에 기록돼 있었다. 그러나 분지리를 찾아가 안말과 가장 깊숙이 있는 흰두뫼까지 들어가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다. 허탈한 심정으로 다시 괴산으로 방향을 돌려 내려오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영감님을 만났다. 찾아온 이유와 함께 남근석이 있는 마을을 물었더니 주저 없이 주진리(周榛里)라고 알려 주었다.

낯선 이방인에게는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도 찾기 어려웠다. 사람을 만나면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고 해서 겨우 은티 마을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 마을은 희양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위치하기 때문에 많은 등산객이 찾는 곳이었다. 하지만 등산을 하지 않는 이에게 마을을 찾아 들어가는 것은 미로게임이나 다름없었다.

산골 마을이지만 오래 전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괴산지명지’를 찾아보니 조선 초기로 추정하고 있다. 아마 병자호란 때 김해 김씨들이 이곳으로 피란을 오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깊은 산속 무릉도원으로서 이 마을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진리는 조선시대에 연풍군 현내면에 속했던 마을이다. 1914년 여러 마을을 합쳐 주진리라고 하였으나, 8·15 광복이 되면서 행정구역을 세분화하여 3개 마을로 나누었다. 그 중에서도 은티리는 희양산 자락에 위치한 가장 산골 마을이었다.

 

 

 

 

 

 

 

 

조선시대 특산물로 송이버섯과 석이버섯, 잣, 꿀 등이라는 점에서 농사가 별로 없는 산골임이 분명하다. 현재도 주로 콩과 고추 등의 밭작물과 사과 같은 과일이 주 작물이다.

은티 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커다란 화강암 판석에 마을의 유래를 적은 것이 보인다. 이런 마을에 무슨 남근석이 필요할까 매우 궁금하던 차에 이 내용을 보니 쉽게 이해가 되었다.

◇은티마을 입구에 세워진 장승.

사실 은티 마을은 여느 산골 마을처럼 계곡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그래서 그 형세가 마치 여성의 성기와 같은 여근곡(女根谷)이다. 이를 여궁혈(女宮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근곡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도 나타난다. 신라 선덕여왕은 세 가지의 일을 미리 알아냈는데, 그 중 하나가 여근곡에 숨어 있던 백제 병사를 찾아낸 일이다. 즉 겨울인데도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서 개구리가 울었다고 한다. 이것을 들은 여왕이 군사를 여근곡에 보냈다. 그곳에는 경주를 습격하기 위해 백제 병사들이 숨어 있다가 전멸됐다. 게다가 이들의 후미에 있던 병사까지 몰살됐다고 한다.

개구리가 우는 것은 남자가 성냄을 뜻하는 것이요, 옥문은 여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근곡에 병사가 숨어 있음을 알아내고 이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선덕여왕은 ‘남자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로 들어가면 필경 죽는다(男根入於女根則必死矣)’라고 하는 설명으로 대신했다. 매우 탁월한 표현법이 아닐 수 없다.

이 마을도 역시 여근곡이기 때문에 이를 맞춰줄 어떤 장치가 필요했던 듯하다. 즉 마을이 번창하고 아들을 많이 낳기 위해서는 남근석을 세워야 한다는 논리가 가미되었다. 여근과 남근을 합체시킴으로써 음양의 조화를 꾀할 수 있는 인식 때문이다. 물론 아들을 많이 낳을 수 있다고 한 것은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반대로 여근곡만 있을 경우 마을이 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여자들의 바람기를 잠재울 수 있는 풍수 비보(裨補)의 기능을 담당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합당하다. 즉 남근석을 마을 입구, 즉 여성기의 입구에 세움으로써 그 바람기를 막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비단 남근석보다는 탑이라는 장치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마을이 배의 형국일 경우가 그러하다. 과거에 배라는 것은 돛이 달렸기 때문에 바람을 이용해서 항해한다. 그렇기에 바람이 불면 마을이 쉽게 흔들릴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돌탑을 세웠던 것이다.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도마리 탑동의 경우가 좋은 예이다. 하지만 은티 마을은 남근석이라는 특수한 사례를 제시했는데, 이것은 마을의 형국이 여근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 남근석은 하나의 선돌을 세운 것이 아니다. 약 120㎝짜리 남근석을 가운데 세우고 그 옆으로 조그만 돌들을 세워서 아기자기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지난 마을 제의 때 쳐놓은 금줄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 주위에는 아름드리 전나무가 세워져 있는데 300∼400년 정도 된 것이라고 한다.

이 남근석에 대한 제의가 매년 섣달 20일에 행해지며, 이를 ‘동구제(洞口祭)’라고 부른다. 아마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붙인 명칭인 듯하다. 음식을 장만하는 주판집과 지관, 축관 등 4명을 선출해서 제사를 올린다. 대개 농사가 잘되고 동네가 화목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현재 거주하는 28가구의 대주(大主·바깥주인)를 위한 소지를 올려주는 것으로 끝난다.

문제는 이 마을의 남근석은 기자신앙의 대상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마을을 수호하는 신앙체로 자리잡았는데, 이것은 남근석이 자식 점지라는 기자신앙의 한 모습으로만 정착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남근석을 모시는 신앙의 중심은 바로 마을의 평안과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것임을 은티 마을을 통해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영동 부상리 남근석·여근석

마주보는 男·女石…마을 수호신으로

충북 영동군은 곶감과 박연의 출생지로 유명하다. 경부고속도로에서 영동나들목을 빠져나와 19번 국도를 타고 보은 쪽으로 가다가 514번 지방도로 갈라져 약 6.4 정도를 가면 부상리 부상골이 보인다. 그리고 이곳에서 약 200m 정도로 내려가면 큰골이 있다.
원래 부상골이 먼저 개척되고 나중에 큰골이 형성된 듯하다. 왜냐하면 부상골에는 여흥 민씨 집안의 99칸 집이 있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특히 부상골에는 효자로 소문났던 민대혁(閔大爀)의 정려비가 세워져 눈길을 끈다. 흥미로운 것은 화려한 비각과는 대비되는 초라한 돌탑과 선돌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민대혁의 효자비가 세워진 것은 조선 말기였다. 민씨 집안은 당시 명성황후의 당질이었던 민병주에 의해 이곳에서 토호로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는 농민들에 의한 민란이 자주 일어날 정도로 국정이 문란했던 때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효자비를 세운 것은 민중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효자비 옆에 세워진 돌탑이나 선돌이 민중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부상골에게 탑이나 선돌에 대한 제의는 단절된 상태다.
부상골에서 조금 지나면 큰골이 나타난다. 그런데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거대한 ‘부상리 마을자랑비’가 세워져 있다. 무려 5m나 됨직한 거대한 ‘마을자랑비’ 옆에 서 있는 남근석과 여근석은 초라하게 보인다. 마치 효자비와 비각에 가려진 돌탑과 선돌과 같은 처지라고 할 만하다.
자랑비 옆에는 마을의 유래를 설명한 비문도 같이 세워 놓았다. 그 글 중에서 자웅석(雌雄石)과 관계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740년경에 남석(男石)만이 서 있었는데, 가뭄이 극심했던 1940년쯤에 어느 노승이 지나가다가 여석(女石)이 울고 있는 장소를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정들을 동원해서 여석을 가져다가 마주보게 하니 마을에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마을 수호신으로 모셔 정월 대보름마다 제의를 올린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도 남근석은 수탑이나 남석, 여근석은 암탑이나 여석이라고 하지만, 정확하지 않은 명칭이다. 여근석 앞에 살고 있는 민노식(65)씨는 이 돌들을 수톨과 암톨이라고 부른다. 명칭은 그렇다고 치고, 그 형상은 영낙없이 남성기를 닮아 있다. 남근석의 크기는 약 266㎝인데, 밑에서부터 위로 170㎝ 지점에서부터 좌우로 귀두를 표시하듯이 약 2∼3㎝ 정도의 폭으로 도드라져 있다. 여근석은 한쪽에서 보면 마치 남근석과 유사하지만, 정면에서는 직사각형으로 보인다. 이를 임신한 여성으로 보고 있는데, 약간 과장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크기는 최고 높이가 203㎝에 가로가 140㎝ 정도다.

◇부상골 여근석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얼핏 임신한 여성으로 보인다.
사실 이 남근석도 현재의 위치에 있지 않고 도로보다 동쪽의 옛날 도로에 있었다고 한다. 즉 보은으로 통하는 도로에 ‘말차쟁이’라는 주막이 있었는데, 그곳에 수톨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도로가 폐쇄되고 밭이 되어 탑도 눕혀지면서 마을에 줄초상이 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그래서 수톨을 세우고 마을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와 동제를 중단했다. 추측컨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미신 타파의 일환으로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영동군지’에는 이 제사터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내용이 기록돼 있다.
제사터에 어떤 사람이 집을 짓고, 돌탑이 있던 장소에는 샘을 팠다는 것이다. 그런데 샘을 팔 때 참여한 사람이나 그들의 부인이 계속 죽어 나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 뒤에 이 집을 보건소로 이용했는데, 까치가 유리창에 부딪쳐서 스스로 죽는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 집은 흉가로 변했다.
흉흉한 사건이 발생하자,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다시 동제를 지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지금 모시고 있는 자웅석, 즉 남근석과 여근석이 그 대상이었다. 지금도 정월 보름날에 맞춰 동계에서 유사 2명을 정한다. 1명은 반장이며, 다른 한 명은 탑제만을 지내도록 한다. 특히 탑제를 담당한 유사는 몸을 정갈히 하는 등 정성을 드려야만 한다. 만약 동네에 불상사가 일어나면 이 유사의 정성이 부족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사람들이 유사를 맡지 않으려고 하기에 순번제로 정했다. 즉 떠맡아서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제사는 남근석에서만 하는데, 이를 위해 2∼3일 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린다. 제물로는 백설기와 삼실과, 메, 명태포, 술 등이다. 음력으로 정월 14일 밤 12시쯤에 제물을 차리고 유교식 제의로 행한다.
이 마을에서 전해지는 남근석과 관련한 이야기는 당(堂)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남근석을 단순한 돌이 아니라, 마을을 수호하는 신통력을 지닌 존재로 이해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선돌이 지니고 있는 탁월한 생산 기능을 믿어온 우리의 전통적 사고방식에 근거한다. 그것은 비단 아기를 점지해주는 능력뿐 아니라 곡식의 풍요로운 수확에도 영향력을 준다는 믿음인 것이다.
이런 사정은 비단 부상리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남근석의 명칭 때문인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지금부터라도 남근석에 대한 맹목적인 거부감을 없애고 문화의 본질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충북 옥천군 동이면 선돌
임산부형상 여근석… 다산 기원
 석탄리 여근석 선돌.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전을 지나면 금강휴게소가 있다. 필자는 옥천 밑의 지방을 가게 되면 대개 이곳에서 식사를 한다. 강을 끼고 있는 휴게소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강휴게소에서의 식사는 즐겁다. 옥천에는 이상스럽게도 선돌이 많이 존재한다. 그 선돌들은 누가 세운 것일까. 그들도 금강을 보면서 식사했을까. 이처럼 먼 과거의 사람과 교통하기 위한 증거로 선돌은 매우 유효한 역할을 한다.

옥천군의 선돌은 대청호가 세워지면서 많이 이동됐다. 선돌과 고인돌들도 자신의 고향을 떠나 2005년에는 ‘선사유물 테마공원’ 내로 모일 예정이다. 보존이라는 명목으로 문화가 훼손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든다.

옥천에는 선돌이 많이 산재한다. 이 선돌은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처럼 선사시대의 유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시대에 들어와서도 선돌은 의미 있는 대상이었다. 무엇보다도 왕성한 생산력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돌은 마을 공동체 신앙의 중요한 신체(神體)로서 역할을 했왔다. 하지만 테마공원을 만들기 위해서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으로 모아 둔다는 발상은 분명 재고돼야 한다.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는 3기의 선돌이 있다. 이웃 마을인 남곡리에도 선돌이 있다. 이들은 다른 지역의 선돌과는 달리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석탄리 마을 뒤쪽에 있는 선돌은 남근석으로 생각된다. 이 선돌의 크기는 80㎝ 정도에 불과하지만 남근과 유사한 형태이다.

 

 

 

마을 입구의 우측 언덕에 위치한 여근석 선돌은 마치 배가 부른 임신부의 모습을 띠고 있다. 크기도 남근석보다 2배가 넘는 190㎝ 정도 된다. 충북대학교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땅 밑에 묻힌 부분까지 합하면 260㎝에 달할 정도로 거대하다. 더 흥미로운 것은 마치 사람의 배에 해당하는 부분에 직경 84㎝의 둥근 원이 음각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임신부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석탄리 여근석 선돌 밑부분의 원.

왜 돌의 중간부에 원을 형상화했을까. 과연 그것은 단순한 표현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원의 형상은 임신을 뜻하는 것으로서 달의 상징일 가능성이 높다. 충북대학교에서 발간한 ‘옥천군의 선사유적·유물’에는 태양숭배사상의 한 표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여성의 임신한 모습을 상징화했다면 그것은 분명 달의 상징이다. 한국의 기층문화가 달을 근간으로 삼고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런 추정은 함부로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의 달 상징은 생산 기능과 결부돼 만들어진 관념이다. 특히 달은 여성의 월경(月經)을 관장하는 존재로 알려져 왔다. 월경을 달거리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달이 여성을 관장하며, 여성신이라는 점을 잘 알 수 있는 예로 ‘개보름쇠기’를 들 수 있다. 정월 보름에는 개에게 밥을 주지 않는다. 개기월식과 같은 달의 변화는 개가 물어뜯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다. 달의 크기가 줄어드는 것은 풍요로운 생산에 큰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달의 정기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 개에게 밥을 주지 않고 굶긴다는 것이다. 만약 정월 보름에 개에게 밥을 준 여자는 자신의 생산력을 빼앗긴 꼴이 된다고 생각했다.

정월 대보름에 마을마다 마을 제의가 행해진다. 그 해의 풍요로운 수확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 마을 제사가 끝나면 대동놀이가 행해진다. 왜 이들 놀이가 정월 보름날 행해지는가. 바로 달의 정기가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정기를 받게 되면 여성의 생산력도 높아질 뿐만 아니라 토지의 생산력도 강화된다고 믿었다.

만월이 떠오르는 때에 여성들의 집단놀이가 행해진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전남 지방의 강강술래나 경상도의 해안 지역에서 행해진 ‘월월이청청’ 등은 좋은 예이다. 이런 놀이는 여성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놀기 위한 목적만을 갖고 있지 않다. 바로 둥근 보름달의 정기를 한몸에 받아 생산력을 강화하는 여성의 집단놀이였던 것이다.

석탄리 마을에서 남자와 여자로 생각하는 선돌에 금줄을 치고 동제 때 치성 대상으로 모시고 있는 것도 그런 풍요 기원의 목적을 지녔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 그런 전승은 끊어지는 과정에 있다. 원래 해마다 동제가 거행됐는데, 2004년에는 마을에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곡리의 줄무늬 선돌.

따라서 이 마을에 있는 사찰 호국정사에서 대신 치성을 올려주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고인돌과 같이 서 있는 선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만난 승룡 스님(43)이 설명해줬다. 그가 호국정사에 온 지는 약 3년 정도 된다고 한다.

이 돌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관심도 점차 떠나는 것 같다. 마을 입구에서 여근석에 대해 물었을 때 답변을 시원하게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을 장승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냥 선돌이라고 말해준 이도 있었다. 오히려 자기 동네의 선돌보다는 남곡리의 선돌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승룡 스님의 안내가 없었다면 여근석을 찾지도 못할 뻔했다. 이것은 이 선돌이 선사공원으로 옮긴다는 결정에 대한 반발심리와도 무관하지 않은 듯한 인상을 받았다.

여자가 임신한 모습을 원으로 표현한 선돌과 달리 남곡리에서는 줄무늬 선돌이 있다. 줄무늬 선돌은 이웃의 수북리에서도 발견돼 이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선돌이라고 할 만하다. 왜 선돌의 앞쪽에 줄무늬를 새겼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남곡리의 선돌은 약 165㎝의 높이에 앞면 폭 52㎝ 정도의 크기다. 돌의 모양은 마치 남근처럼 곧고 윗 부분은 뾰족하지만, 날카롭기보다는 완만한 편이다. 앞면에는 가로로 45줄이 새겨져 있다.

무엇보다도 이들 선돌의 형태는 어떤 유의미한 면을 암시하고 있다. 남근의 줄무늬를 새긴 것인지, 아니면 다른 용도의 의미를 담은 표현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아니면 일반적으로 추정하는 것처럼 죽은 자를 기념하기 위한 비석의 기능을 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충북 옥천군 송정마을 세개의 선돌
노부부-아들 세바위의 사연
 알터바위.
경부고속도로 옥천나들목에서 빠져나오면 37번 국도가 연결된다. 이 도로는 대청호가 만들어진 뒤 호수와 산이 어루어진 경치가 좋아 드라이브 코스로 손색이 없다. 이 도로를 타고 보은 쪽으로 16 정도 오르면 안남면 소재지로 접어드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다시 안쪽으로 10리 정도 들어가면 도로변에 충북 옥천군 안남면 청정리 송정마을이 나타난다.

이 마을에는 흥미롭게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위, 그리고 알터바위가 삼각 구도로 자리 잡고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위는 부부로서 알터바위는 그런 점에서 이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을 의미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위 사이에 알터바위가 위치하는 것 자체도 흥미로운 배치라 하겠다.

할아버지바위는 원래 삼화초등학교였다가 현재 수련원으로 사용하는 폐교 앞 옥수수 밭에 있다. 원래 이곳은 논이었는데, 밭으로 개조한 것이라고 한다. 노출된 바위의 크기는 약 172㎝이며, 두 줄의 가로지른 선과 마치 턱처럼 갈라진 형상을 하고 있다. 머리 부분을 뾰족하게 다듬어 놓았기에 전체의 모습은 마치 성기와도 같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수염이 난 할아버지의 형상을 한 것처럼 느껴진다. 두 가지 형상은 모두 남성을 의미하기에 할아버지바위로서의 상징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할머니바위도 원래는 논 사이의 둑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소를 키우는 축사 옆에 세워져 있다. 소가 울어대는 소리와 오물 등의 냄새로 범벅이 된 곳에 서 있는 할머니바위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논과 밭 사이에서 농작물이 잘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살아왔던 세월에 대한 기억 혹은 추억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할머니바위는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의 여근석에 비해 배 부분이 약간 밋밋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임신부의 형상을 연상하는 데 큰 무리가 없다. 또한 바위의 위쪽이 할아버지바위에 비해서 평평하게 다듬은 것으로 보아 여성의 상징으로 표현한 것은 분명한 듯하다.

◇할머니 바위.

키도 물론 20㎝ 이상 크다. 우리 선조들은 여성이 더 큰 신체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이 마을을 찾은 이유는 사실 알터바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원래는 마을회관 옆을 흐르는 개울에 있다고 했는데, 개울은 복개되고 없었다. 마을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원래 농협 창고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창고를 지으면서 약간 떨어진 개울 옆에 세웠는데, 공교롭게도 자선비와 선적비가 세워진 옆이다. 이들 비석도 1984년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알터바위도 이 무렵 옮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알터바위는 높이가 약 130㎝에 불과하다. 그런데 길이가 15 ㎝에 폭이 7㎝ 정도인 알터 모양의 흔적이 있다. 이것은 정면이 아니라 왼쪽 측면 중간에 새겨져 있다. 이 흔적은 구멍이라고 보기에는 약간 어설프고, 길쭉한 홈 정도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홈은 단순한 홈이 아니다. 이 바위에만 유독 금줄이 남아 있는 이유도 이런 사정과 관련이 있다.

이 바위를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위가 낳은 자식으로 상상하는데, 문제는 왜 이 바위에 대해서만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기자행위가 행해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유감주술(類感呪術)’의 의미로 본다면 할머니바위가 치성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아들을 많은 낳은 부인의 월경대를 차고 있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일반적인 주술행위로 연상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아들바위가 자식을 기원하는 남근석의 기능을 맡고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한 부녀자가 이곳을 찾아와 선돌을 한 바퀴 돌고, 손가락을 넣었다 뺏다 하는 동작을 반복한다. 이렇게 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소문이 근방에 퍼졌다고 한다. 요즘에는 찾아와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하는데, 여하튼 효험이 있었던 듯하다.

이 선돌은 광개토태왕비와 같은 직육면체로서 위쪽은 완만하게 다듬어진 것처럼 보인다. 남근석처럼 굳건함을 잘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런 바위에 대고 치성을 드리는 부녀자들이 바위의 홈에다가 손가락으로 하는 행위는 분명 모의적 성행위다. 이 바위가 갖고 있는 성적 생산력을 빌려 자식을 낳을 수 있도록 기원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왜 남근석에 여성의 손가락으로 성행위를 할까, 성의 역할이 뒤바뀐 것은 아닐까 자못 궁금하다. 여기에서는 그런 측면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성행위가 가져다주는 의미 때문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몸으로 할 수 있는 성행위라면 당연히 남근석은 남성을 상징한다.

◇할아버지 바위.

그러나 이 바위는 올라타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기능을 대신할 홈이 있기 때문에 단순한 역할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바위는 남근석의 형상과 유사하기 때문에 남성임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아들바위, 즉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낳은 자식인 것이다. 이것은 이 바위가 아들을 생산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부각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효하다.

그런 점에서 이 바위는 알터바위라기보다는 아들바위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적당하지 않을까. 알터바위는 생산 기능을 의미하지만, 아들바위는 단순한 생산이 아니라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신통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이 마을에는 사모와 족두리, 함진애비 등을 형상화한 바위가 있다. 그리고 풍수지리상으로는 금두꺼비를 뱀이 잡아먹으려는 형국에다 이것을 본 황새가 뱀을 찍으려는 모습을 띠고 있다고 한다. 이들 형국은 바위로서 표현되며, 이와 관련한 전설도 전해온다.

하지만 도로를 새로 내면서 바위를 깨버리는 등 과거의 상상력을 재현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제 사람들은 상상력이 소멸된 각박한 세계에서 살려고 마음먹은 듯하다.

 

충북 천안 봉서산 미륵바위·남근석
미륵골에 부자가 많은 이유는?
 정월 초 마을 주민들이 백시루와 돼지머리 등의 제물로 제의를 올렸던 미륵바위.
충남 천안은 현재 개발 속도가 엄청나다. 과거의 천안을 생각하고 찾아갔다가는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이 말은 과거의 자리에 있던 유적이나 유물들의 흔적이 현재는 찾기 어렵다는 말과 같다. 아파트 등 택지나 건축지가 개발되면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유물들이 훼손된다. 문제는 그 유물들이 어디로 갔는가 물었을 때 제대로 답해줄 만한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천안에도 아름다운 남근석이 존재한다. 이들 남근석이 어디로 갔는가 문의하기 위해서 천안시청과 천안문화원에 전화를 했다. 한 곳은 정확히 말해주었지만, 나머지 한 유물에 대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천안에서 오랫동안 거주해왔던 신탁근 선생에게 전화를 드렸다. 신탁근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민속박물관인 온양민속박물관의 산 증인으로서 충청도 지역의 민속문화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매우 깊다.

신 선생과 새벽 약속을 하고 그곳을 찾아 나섰다. 왜 새벽에 만나야 하는가 의문이 들었다. 필자의 경우 새벽잠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침 일찍 나서야 노인 분을 만날 수 있으며, 이들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현익(69)씨를 만나 겨우 봉명동 미륵바위를 찾아낼 수 있었다.

미랏골은 미륵이 있다고 해서 예전에는 미륵골이라 불렸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몰라도 미랏골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마을은 전주 이씨 집성촌이다. 미륵바위는 봉서중학교 앞에 서 있었다고 한다. 미랏골은 조선 말기만 해도 군수가 찾아오기 어려울 만큼 오지였다. 그러나 이 지역이 아파트로 개발되면서 미륵바위는 사라질 지경에 처했다. 그런데 이곳 땅주인의 부인이 미륵바위를 모시길 원해서 현재의 봉서산 기슭에 옮겨 치성을 드렸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이곳에는 부자들이 많다고 한다.

미륵바위는 땅 위로 솟아오른 부분만 약 140㎝에 불과하나, 땅 밑에 묻혀 있는 부분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원래의 미륵바위는 임진왜란 때 왜인들이 이곳까지 쳐들어와 머리를 잘라내 냉천에 넣었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의 바위는 그 이후에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미륵바위는 원래 기와지붕으로 비각을 세워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1988년 구획정리를 하면서 지붕을 없애고 시멘트로 제단 주위를 정리해 놓았다. 미륵바위 제의 날짜는 정월 초로 택했다. 백시루와 돼지머리, 메 등이 중요한 제물이며, 이 미륵제를 위해서 제관과 제주를 선정한다. 이 외에도 개인이 찾아와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또다른 남근석 2기가 봉서산 쌍용공원 내에 위치한다. 큰 남근석은 약 178㎝의 크기이며, 위에서부터 귀두부를 경계 짓는 곳까지 35㎝로 매우 늠름한 모습이다. 형체도 우람할 뿐만 아니라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귀두부의 경계까지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에 비해서 작은 남근석은 120㎝로 작다. 마치 치마를 두른 듯이 다소곳한 모습이다.

사실 이들 바위도 원래 이곳에 있지는 않았다. 미륵바위와 마찬가지로 큰 남근석은 봉명동 북쪽 개목 마을에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작은 것은 여근석으로 천안의 에덴조경사에서 보관하던 것을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이들 두 바위의 귀두 부분이 깨져 있는데, 일부러 훼손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남근석이 개목 마을 입구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 바위가 마을신앙의 대상이었음을 의미한다. 즉 서낭제나 미륵제처럼 마을 수호신으로 모셔져 왔던 것이다. 특히 이 마을의 뒤쪽에 있던 봉서산 중턱에서 선사유적지가 발견된 바 있었다.

◇아들을 낳는데 영험한 신통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남근석.

유적지에서 무문토기나 반월형 돌칼 등이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최소한 청동기시대까지 소급이 가능하다.

출토된 반월형 돌칼의 쓰임새로 보아 이곳은 농경지대임이 분명하다. 특히 돌칼은 이삭을 자를 때 사용되는 농경도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근석도 그 당시에 세워진 것일 경우 그것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표지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이 바위가 선사시대 이래로 최근까지도 개목 마을사람들에 의해서 신으로 모셔져 왔을 정도로 오랜 전통을 지녔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남근석의 경우 아들을 낳는 데 매우 영험한 신통력이 있다고 한다. 그런 신통력을 믿어서 일까. 일제 때 이 바위를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하늘의 조화로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현재는 등산객들에게도 관심거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 필자가 남근석을 조사하는 동안 옆쪽 공터에서 운동하던 한 사람이 기웃거리며 다가왔다. 그 사람에게 이 바위가 무엇 같으냐 물어보았다. 그 사람은 이곳에 이런 바위가 다 있었나 혼자 중얼거리면서 비켜 지나갔다.

토박이가 떠나간 마을에는 아파트촌이 들어서고 남근석에 대한 기억도 점차 사라져 간다. 바위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이나 눈길을 한번 받을 뿐이다. 매일 이곳을 찾아 오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바위가 되었다. 길목을 꾸며주는 조경석 정도로 생각하는 듯하다.

 

충남 서산시 온석동 선돌
바위 옆 샘물 마시며 아들 기원
 충남 서산시 온석동에 있는 선돌은 앞 부분이 나와 있고 그 위에 진달래가 자라고 있다.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된 이래 서울에서 태안반도 쪽으로 여행하는 시간이 2시간 정도는 단축된 느낌이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천안에서 빠져나와 충남 온양을 거쳐 서산까지 가는 길은 너무나 멀었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1980년대 태안반도의 해안선을 따라 어촌지역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기차가 없었기에 꼭 버스를 타고 가야만 했다.

그런데 거리상으로는 서울에서 가까운 곳임에도 시간으로는 부산에 위치할 정도로 먼 지방이라는 기억이 남아 있다.

이처럼 가까워진 때문인지 몰라도 예전의 기억과 달리 너무나 생소한 타지로 변해 있었다. 서산만이 갖고 있었던 충청도의 전형적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분위기가 꼭 서울 외곽지역과 흡사했다.

이런 서산 시내에서 벗어나 649번 지방국도를 타고 동북쪽으로 약 2를 오르면 온석동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마을 입구에 있는 표지석에는 온석동의 유래가 설명돼 있다.

이곳에서 온천이 나왔다고 해서 온(溫)자와 동산에 바위가 있어 석(石)자를 따서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에 온천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진다. 한 가난한 농사꾼이 겨울에 나무를 하다가 뱀에게 물렸다. 황급히 산을 내려오다가 김이 나는 물을 발견했다. 나무꾼이 물을 떠 마시고, 물린 자리를 씻었더니 신기하게 나았다. 다음해에는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나무꾼이 효험한 샘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샘에 와서 물을 마시고 몸을 씻어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전설 때문에 이곳에 온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온석동에는 선돌 2기가 있었다. 이들 선돌 때문에 마을 이름까지도 상입석과 하입석으로 명명됐다. 그러나 현재 상입석인 내동의 선돌만이 남아 있고, 하입석에 있던 선돌은 사라졌다.

개발 과정에서 돌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마치 새마을운동 때 미신을 타파한답시고 당제를 지내던 당들을 파괴하고 당목(堂木)을 베어냈던 행동과 다를 게 없다.

상입석은 내동이라고 한다. 그 내동에 있는 선돌은 지금까지 보아온 크기 중에서도 제일 큰 듯했다. 약 3m가 넘어 보이는 이 돌은 그 크기만큼 효험도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 마을에서 만난 김영숙 할머니(81)에 의하면 온석동 사람들이 부자가 된 것은 이 바위 덕택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제대로 대접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김 할머니가 이 마을로 시집온 것은 약 60년 전인 22세 때였다. 그때 시댁이 바로 이 바위 옆이라고 하였다. 이 바위는 단순한 바위가 아니라 마을에서도 치성을 드리던 매우 영험한 바위였다는 것이다. 즉 마을을 수호하는 신으로 매년 2월 초하루마다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이 바위의 형상을 보면 마치 옆으로 쓰러질 듯이 서 있다. 그러나 바위의 우람한 모습을 보면 쓰러질 것이라는 생각은 기우에 불과하다. 이런 우람한 모습 때문인지 몰라도 사람들이 몰려와 치성을 드렸다.

김 할머니는 젊은 시절 이래 최근까지 이 바위 주위에 새벽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해 주었다. 물론 자신도 아들이 잘되기를 기원하면서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찾아오는 사람은 대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치성을 드린 모양이다. 이때 제물로는 주로 돼지머리와 백설기를 올렸다고 한다. 치성은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밤에 시작해서 대개 새벽에 끝난다.

흥미로운 것은 바위 옆에 마르지 않는 샘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샘물을 마시면 바위의 능력이 치성을 드리는 사람의 몸으로 전이될 수 있다는 믿음이 만들어졌다. 즉 바위의 탁월한 생산력이 그 여성의 몸에 들어감으로써 원하던 새 생명을 잉태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위를 유심히 쳐다보면 중간 턱이 있고, 약간 평평한 곳에 진달래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충남 서산시 온석동 마을 입구의 모습.

바위에는 물도 없고 흙도 없는데 어떻게 해서 이 진달래가 자랄 수 있는지 마을 사람들은 신기하기만 하다고 했다. 혹자는 바위의 영험함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임이 분명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바위의 상징성이 가지고 있는 생생력(生生力)을 보여주는 좋은 예인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그저 단단한 물질에 불과한 바위를 신앙적 대상물로 믿어온 것은 바위가 무수한 생산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위가 뿌리내리고 있는 땅은 바로 여성을 상징한다.

즉 바위가 세워져 있다는 것은 바로 남녀의 교합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런 곳에서 농사를 짓게 되면 더 많은 수확이 가능하다고 믿어온 것도 그런 이치라 하겠다. 이러한 원시적인 상상력이 바로 바위를 굳건한 믿음의 대상으로 자리잡게 했으며, 그런 믿음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온석동의 선돌이 위치한 곳은 마을 뒷산 쪽이다. 이곳은 택지를 개발하는지 온통 흙투성이였다. 산이나 언덕에 있어야 할 나무나 풀 등이 사라진 자리가 사람들이 살 택지로 변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선돌을 감싸고 있던 높다란 소나무들이 오히려 흉물스럽게 보일 정도였다.

속설에는 이들 소나무가 우거져 바위가 동네에서 보이지 않아야 온석동이 잘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 속설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시대다. 그나마 서울 사람이 이 근처의 땅을 사서 택지를 조성한답시고 그 울창하던 나무도 베어 버렸다.

바위 주위에 남아 있는 서너 그루의 소나무는 그나마 땅주인이 베푼 자비심일지도 모르겠다.

 

충남 서산시 고북면 선돌
바위에 얽히고 설킨 갖가지 '삶의 사연'들
 고북면 가구리 선돌
충남 서산시 고북면은 평야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동쪽은 차령산맥의 줄기를 따라 덕산도립공원의 중심인 가야산에서 삼준산으로 이어져 마치 병풍과 같은 형국이다. 물론 서쪽은 구릉과 평야로 이루어져 있는데, 조선시대만 해도 서쪽은 바닷물이 들어온 갯벌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현재는 간척돼 거의 논으로 변했다.

이들 지역에는 이상스럽게도 마을마다 선돌이 있다. 이들 선돌의 정체는 분명 선사시대 이래 사람들의 흔적임이 분명하다. 왜 이들 마을에 선돌이 있는 것일까. 일상적으로 선돌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의 업적을 기리고 위해서 세운다. 좋은 예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를 들 수 있다. 이 추정이 맞다면 이 지역에서는 뛰어난 군주가 나와 평화로운 삶을 살도록 통치했음이 분명하다.

또다른 추정은 묘지석일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오랫동안 사람들이 살아왔으며, 그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선돌이 어느 시대부터인지 단순한 묘지석이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만 세워진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개인적 치적이나 흔적이라기보다는 현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다 유용한 존재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좋은 예로 이들 단순한 돌이 아니라 마을을 수호하는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북면과 같은 농사권에서는 이들 바위를 동시에 풍요로운 수확을 가져다주는 의미 있는 신격체로 인식하였다.

먼저 서산 시내에서 해미를 지나 남쪽으로 29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고북면 소재지에서 왼편으로 약 1 정도 들어가면 가구리의 갯바위를 볼 수 있다. 면소재지도 가구리에 해당되는데, 이곳의 바위를 찾기 위해 사람들에게 물었으나 제대로 가르쳐 주지를 않았다. 그래서 주막 비슷한 술집을 찾아 들어가 물었다. 마침 그 안에서 술을 드시던 노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바로 “아, 개×바위”였다.

사실 그 바위가 그런 바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바위를 보고 나니 그런 명칭이 정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다지 크지 않다. 높이가 약 134cm 정도인 데다가 위쪽이 요상하게 휘었다.

다른 동네에서 보던 거대한 선돌에 비해 이것은 너무나 초라하다. 그러나 바위가 작다고 해서 신통력도 그렇게 작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바위에는 무언가 탁월한 신통력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바위가 있는 뒷집의 경우 이전에는 묘지였다고 한다. 김모씨가 들어와 살기 위해 터를 다지는 작업 중에 묘 4기 정도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 자리가 명당터로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김모씨는 풍수상으로 묘터인 음택(陰宅)이 아니라 집자리인 양택(陽宅)으로서 이 위치를 택했다.

그런 판단이 정확했는지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바위는 바로 명당을 알리는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북면 장요리 선돌

만약에 이 바위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남근석은 또 다른 상징을 부여받을 수 있다.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하는 기자(祈子)신앙의 대상에서 확대된 생산기능은 마을 구성원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구리 마을의 남근석은 바위가 위치한 집안에만 혜택을 주었다. 이것은 바로 양택풍수로서의 기능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또 이 바위가 지닌 남성적 상징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록리에 산다고 하는 임종환(67)씨에 따르면 한때 이 바위를 흔들어서 쓰러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과부와 젊은 여자들이 바람이 나서 나가는 등 마을에 문제가 발생했다. 그 바람을 잠재우기 위해서 이 바위를 다시 세웠다는 것이다. 음기가 너무 센 마을이기 때문에 음양의 조화를 맞추기 위해서 바위를 세운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몰라도 이 바위의 둘레는 철제로 된 담이 세워져 있다. 물론 담의 높이가 낮기 때문에 사람들이 드나들기에 큰 불편은 없는 편이다. 그렇다면 왜 낮은 담을 둘러쳤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동네 개들이 함부로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의도는 아닐까. 이 바위에 와서 개가 방뇨라도 한다면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구리 위쪽의 용암리 매령에도 선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해안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과정에 도로를 높인다고 해서 묻어 버렸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이 항의했지만, 도로를 파헤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건설업체가 그 대신에 약 3m가 넘는 거대한 돌을 세워주는 일이 벌어졌다. 신앙적 대상이었던 선돌을 정원이나 꾸미는 돌로 대체해준 발상이 너무나 기가 막힌다.

가구리에서 29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오다가 고북농공단지를 끼고 좌회전해서 약 3 정도 들어가면 고북제라는 저수지가 나타난다.

◇고북면 신송리 선돌

이 저수지 주위에도 선돌이 많다. 위쪽의 장요리에도 선돌이 있고, 아랫 마을의 신송리에도 선돌이 있다.

장요리의 선돌은 원래 저수지에 묻혀 있었는데, 마을에 남자들이 죽는 액운이 잦아 이 돌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선돌처럼 위로 뾰족하지 않다. 옆으로 넓게 퍼져 마치 사각형에 가깝다. 마을 표지석으로 활용하는 비석처럼 두께가 일정하기 때문에 선돌로 보기에도 의문이 있다. 그러나 이 선돌을 세워 액을 막았다는 점에서 남성 보호를 위한 마을 수호신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신송리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선돌의 형태를 보면 좌우 230cm, 70cm에 두께가 30㎝ 정도로 마치 비석과 같다. 이 선돌과 관련한 전설도 전해진다. 이 마을에 큰 부자가 있었는데, 손님을 좋아했던 부자 때문에 며느리의 손에 물기가 마를 날이 없었다.

탁발승에게 물어보니 선돌 2개를 세우면 손님이 끊길 것이라고 하였다. 마을 동쪽 산에서 돌을 캐와서 세웠더니 정말 손님이 끊겼을 뿐만 아니라 집안까지 망했다는 것이다. 최근 땅 주인이 선돌을 세우려고 해서 마을 주민과 소송에 들어갔지만, 마을 사람들이 승소해서 그냥 눕혀 놓았다.

이 외에도 이웃하고 있는 정자리에도 선돌이 있는데 약 110㎝에 불과하다. 고북면의 선돌들은 신송리를 제외하고 대개 성인 키보다도 작은 편이다. 그러나 마을마다 선돌이 있을 정도로 풍부하다. 이들 선돌은 대략 청동기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은 이들 지역이 농경을 영위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풍요 기원의 상징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충남 보령 동오리 선돌
"여자들 바람날라, 남근석 말 말라"
 직육면체 모습을 한 지팡이 바위.
충남 서산에 위치한 많은 선돌을 보면서 보령 땅을 향해 남으로 내려갔다. 이번에 찾아가는 동오리 마을은 주산면 소재지 북쪽에 위치한 보령댐 바로 밑에 있다. 동쪽의 명덕산과 서쪽의 배창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인데, 논농사가 주업이다. 원래는 이곳까지도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배창산이란 명칭도 배를 매놓은 곳이어서 붙여진 것이다.

마을 입구를 들어서면 방앗간 옆 밭에 서 있는 커다란 선돌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선돌 때문에 마을 이름도 선돌 마을이라 부른다. 현재 밖으로 나와 있는 길이만도 약 2.3m 정도인데, 마을 사람은 밑에 묻힌 것이 더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바위가 왜 깊이 묻혔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에 있는데, 마침 버스가 들어와 동네 사람들이 내렸다. 그 중에서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를 붙잡고 바위의 내력을 물었다. 처음에는 경계하는 표정이었으나, 이내 찾아온 이유를 듣고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이 동네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화산리라는 마을에서 이 선돌을 보면 바람이 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화산리 사람들이 마을 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선돌을 눕혔다고 한다. 그러나 안병숙씨의 말에 의하면 자기가 이 마을로 시집온 이래로 이 바위가 눕혔던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현재 66세인데 21세에 시집을 왔으니 1959년 이전에 바위를 쓰러뜨렸을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여하튼 화산리 사람들에 의한 선돌 훼손 사건이 난 후에 이 마을 사람들이 다시 바위를 세웠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는 이 바위를 남근석이나 무슨 무슨 바위라고 부르지 않는다. 지팡이바위라고 한다. 형체가 지팡이처럼 생기지도 않았는데, 지팡이바위라고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것을 남근석으로 부르면 안 된다고 하는 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땅 위로 솟아 있는 길이만도 약 230㎝나 된다. 그리고 사람 팔로 두 아름이나 되는 것으로 보아 둘레도 약 2m는 됨 직하다. 이 바위는 마치 직육면체처럼 솟아 있다. 그런데 윗부분은 훼손을 당했는지, 아니면 오랜 세월의 풍화 때문인지 완만한 경사가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밑부분에는 마치 성혈과 마찬가지로 홈이 파여 있어 주목할 만한 바위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 마을에 사는 김승평(67)씨는 그것이 한국전쟁 때에 표적으로 삼고 총을 쏜 흔적이라고 말해 주었다. 왜 바위에 총을 쏘았는지는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흔적이 탄흔보다 더 크게 파여 있다는 점과 주로 밑부분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도 흥미를 끌 만했다.

문제는 지팡이바위의 전설에 있다. 이 바위와 관련한 전설은 두 가지가 전한다. 먼저 ‘보령군지’에 실려 있는 ‘선돌과 여장사’의 내용을 간략히 하면 다음과 같다.

한 부부가 아들딸과 함께 성주산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남편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후 관군을 피해 부인은 자식들을 데리고 산속 깊이 들어가 살았다. 처음에는 곡식이 없어 자식들에게 칡뿌리를 먹였더니 장사로 성장했다. 하루는 아들이 호랑이를 잡아왔는데, 밤중에 암호랑이가 와서 슬피 우는 것을 딸이 때려잡을 정도였다. 그날 밤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힘을 아무데나 쓰는 오누이를 탓하며, 앞으로 전쟁이 날 것이니 주암산 근처로 자리를 옮길 것을 명했다.

◇여성의 엉덩이처럼 생긴 마당바위(왼쪽)와 지팡이바위 밑에 있는 알터 흔적.

그들은 전쟁에 대비해서 돌을 모아 주암산에 산성을 쌓기 시작했다. 누이동생이 돌을 머리에 이고, 앞치마에 싸고, 한 돌은 지팡이 삼아 지금의 동오리를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오빠의 다급한 소리에 돌들을 버리고 산에 올랐더니, 오빠 혼자서 오랑캐와 싸우는 중이었다. 누이와 힘을 합쳐 싸웠지만 너무나 많은 오랑캐가 쳐들어왔기에 죽고 말았다.

이들이 죽은 것은 산신령이 자신의 사자인 호랑이를 죽여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누이가 돌을 갖고 오다가 떨군 것이 바로 동오리의 지팡이바위와 마당바위, 그리고 고깔바위라는 것이다.

이와 달리 지명 유래에는 매우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즉 ‘옛날 여장부가 고깔바위를 쓰고 마당바위를 치마에 싸 안고 지팡이바위를 짚고 가다가 치마 폭이 터져서 마당바위가 떨어지는 바람에 세 바위가 함께 우뚝 서 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 ‘선돌과 여장사’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만이 전설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을 때도 모두 이와 같은 대답을 해주었다. 특히 여장부를 ‘옹녀각시’라고 하며, 바위로 만든 신발도 있었는데 땅에 묻혔다고 한다. 그리고 치마폭이 터진 것이 아니라, 옹녀각시가 명덕산에서 배창산으로 건너뛰다가 방귀 소리에 놀라서 마당바위를 놓쳤다고 하기도 한다. 전설이 점점 확대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여하튼 마당바위는 높이가 160㎝ 정도에 위는 약 7∼8평 정도 넓적한 형태를 보여준다. 예전에는 젊은 남자들 10명 정도가 올라가서 잠을 잘 정도로 컸다고 한다. 이러한 바위를 치마에 싸서 산 사이를 건너뛸 정도로 옹녀각시가 거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전설과 달리 지팡이바위는 남근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바위 밑부분에 남겨진 흔적들은 바로 남근석의 뿌리에 해당되는 것으로 성혈임이 분명하다. 표적으로 총을 마구 쏘았다고 하더라도 성혈 자국처럼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화산리의 여자들이 이 바위를 보면 바람이 난다고 하는 속설 때문에 두 마을 간의 갈등이나 알력이 있었다는 사실도 그런 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동오리 여자들은 바람이 나지 않고 왜 화산리 여자들만 바람이 날까. 그것은 마당바위의 형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하다. 마당바위는 마치 여자의 엉덩이처럼 탐스럽다. 그렇기에 마당바위는 여근석에 해당된다. 즉 동오리에는 남근석과 여근석이 같이 자리 잡고 있기에 그런 부정한 행위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화산리에는 짝을 이루는 남·여근석이 없고 미륵바위만 있기 때문에 그런 속설이 생겨난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지팡이바위가 갖고 있던 원래 신앙적 속성이 탈락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신에 옹녀각시가 짚고 다니는 지팡이라는 또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전승시킨 것임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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