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임동헌의 우리 땅 우리 숨결

醉月 2009. 9. 24. 08:27

옹진군 덕적도
손 뻗으면 바다 아닌가!
 ◇덕적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서포리 해수욕장. 해변이 산자락을 따라 둥글게 휘어져 있는 데다 모래가 고와 여름철에는 꽤 붐빈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쾌속선으로 한 시간 길, 덕적도 선착장 가에 할머니들이 진을 치고 있다. 누구 한 사람 가릴 것 없이 구릿빛 얼굴들이다. 덕적도에 사는 할머니들도 있지만 절반가량은 소야도에서 건너왔단다. 좌판에 고사리, 영지버섯, 낙지, 각종 어패류를 펼쳐 놓고 손님을 기다려 보지만 지갑 꺼내는 사람 보기가 쉽지 않다. 할머니들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실린다.

“이거, 내가 직접 캔 거여. 영지버섯도 자연산이랑께. 서울 가면 30만원은 줘야 할 텐데 그래도 안 사? 몸도 약하게 생겼구만.”

부두 앞에 서울식당 간판을 내건 부부는 여유만만이다. 건축 일을 하려고 덕적도에 들어왔는데 계획과 달리 식당을 열게 됐다는 주인은 ‘나는 원래 서울 사람’이라고 운을 뗀다. ‘서울’을 넣어 식당 이름을 지은 까닭을 알 만하다.

“우리 저이가 신통한 재주가 있어요. 꾸물꾸물, 저이가 음식을 다 개발했다니까요.”

부인이 남편 자랑에 나서는데, 남편은 싫지 않은 듯 빙긋이 웃기만 한다. 부창부수다.

진리 선착장에서 벗어나 북리 쪽으로 들어서니 능동 자갈마당이 나타난다. 덕적도 해변에서는 유일하게 모래 대신 자갈이 깔린 곳이다. 바닷물의 흐름과 파도의 힘이 절묘하게 작용해 해변으로 자갈들을 밀어낸 것인데, 이 탓에 덕적도 찾는 관광객들치고 자갈마당을 비켜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돌 수집에 이력이 좀 붙은 사람들이 허리를 잔뜩 굽히고 바닷바람에 몸을 맡긴다.

자갈마당의 터줏대감은 극구 이름을 밝히기를 꺼리는 김씨다. 자신이 직접 그물로 잡아온 생선을 자갈마당에서 횟감으로 팔기 시작한 지 9년째란다.

“횟집 가서 10만원 주고 먹어도 시원찮을 거 여기서는 5만원이면 끝이에요. 봐요, 자연산 맞죠?”

◇덕적도 주민과 소야도 주민은 서로 섞여 부둣가에 좌판을 형성한다. 물건을 사면 사는 대로, 안 사면 안 사는 대로 좋고 싫은 내색을 거의 안 하는 순수파들이다.

김씨가 우럭의 내장에서 채 소화되지 않은 가재를 발견하더니 잘됐다는 듯이 씩 웃는다. 양식장에서야 우럭에게 사료 먹이지 가재 먹여 키우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건 좋다. 아무리 간판 없이 하는 해변 장사라고 해도 그렇지 9년차라는 이 양반, 회 뜨는 솜씨가 영 신통찮다.

“맞아요. 다른 건 다 배웠는데, 회 뜨는 거 이건 영 늘질 않는다 이거요. 그것 참.”

이런 저런 질문을 던져보니 김씨, 경찰을 싫어한다. 오죽하면 경찰대학에 합격한 아들을 설득해 재수 끝에 다른 대학 보냈단다.

“아니, 남들은 못 가서 안달인 경찰대학을… 왜요?”

“아무튼, 경찰이 싫어서.”

◇세계 최고로 꼽힐 만큼 개성적인 친환경 조건을 갖춘 덕적초중고등학교. 병설 유치원까지 있어 거의 ‘종합학교’에 가깝다. 운동장이 좁은 것이 유일한 흠이다.

김씨, 젊을 적에 경찰서 출입 좀 한 게 틀림없는 것 같은데, 질문에는 대답 대신 씩 웃고 만다. 이따금 힐끔거리며 아내 쪽 눈치를 보는 것이, 젊을 적 호기 부리며 산 대신 이제는 아내에게 잡혀 사는 삶을 수긍하기로 한 모양이다. 늘그막으로 들어선 사내의 삶이 짠하다. 회 뜨는 솜씨는 신통찮지만 호남형에, 호주가에, 언변 좋으니 나무랄 데 없다. 그런데도 얼굴 전체에 이빨 빠진 호랑이 같은 그늘이 얹혀 있다.

김씨, 저녁에 이곳으로 다시 와 일몰을 찍으라면서도 나머지 이름 두 자는 ‘비밀’이란다.

섬을 휘감아 도는 산자락 길을 달린다. 마을 뒷산의 성당 자리에는 성모마리아 상만 온전하게 남아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폐허가 됐다. 이 성당은 까마득한 1960, 70년대 성탄절이 되면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무성영화를 상영해 줬던 문화공간이었다. 폐교를 이용해 만든 연수시설에서는 사람들이 족구시합에 나서 발 대신 목청을 돋우는데 ‘서브’만 잘 넣으면 한 점을 따는 모양새를 보니 운동에는 담 쌓고 지낸 서울내기들인 모양이다.

또 다른 폐교 서포초등학교 자리에는 아직 ‘독서하는 소녀’ 상과 ‘이승복 어린이’ 동상이 운동장을 내려다보며 서 있다. 운동장 건너편은 곧장 서포리 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바다다. 이만한 조건의 친환경 학교를 만들기가 쉽지 않을 텐데, 섬 사람이 줄어드니 학교 또한 통폐합되거나 폐교된다. 그게 덕적도라고 해서 피해 가는 것은 아니다.

덕적도의 아이콘이나 다름없는 서포리 해수욕장을 지나는데 할머니 한 사람이 무작정 차를 막아선다. 진리까지 가는 길인데 좀 타고가야겠단다.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를 들었다.

◇능동자갈마당에서 독특한 개성미를 연출하고 있는 바위. 선바위, 매바위 등 섬 사람들조차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생선 두 마리 얻었는데 오빠 생각이 나서 말이지.”

“조금 전에는 하나밖에 없는 오빠가 인천 어디 구청장이랬잖아요.”

“그러니까, 한 명은 친오빠고 한 명은 사촌오빠인 거지.”

이 할머니, 이번에는 자신의 집에서 민박을 하고 가란다. 검은 비닐봉지 속의 생선이 또 등장한다.

“내가 생선도 구워 주고, 방값도 싸게 받고….”

덕적초중고등학교 앞의 보건진료소 마당에 내려서자 생선의 용도가 또 한 번 뒤바뀐다.

“의사 선상님, 내가 선상님 드리려고 요놈의 생선을 좀 가져왔는디… 그런디 약을 타러 온 건 아니지만 기왕 온 김에 지난번 줬던 그 약을 좀….”

차를 얻어 탈 때도, 약을 탈 때도 그 검은 비닐봉지 속의 생선은 유효한데, 진짜 생선이 들어 있기는 한 것인지 그게 궁금하다.

덕적초중고등학교 마당에 들어선다. 소나무숲에 바짝 붙은 채로 농구 골대가 서 있다. 가만 보니 전후좌우 네 개다. 좁은 터에 유치원을 포함해 초중고등학교가 함께 있다 보니 농구장 만들 자리는 없고 고육지책으로 농구 골대만 여럿 만든 격이다. 그러나 이만한 학교도 없다. 운동장 앞은 울울창창한 소나무숲이요, 소나무숲에서 손을 뻗으면 바다 아닌가. 환경으로 보면 해마다 시인 소설가가 쏟아져 나올 것 같다.

남씨 할머니를 내려두고 다시 서포리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언덕길에 서니 저녁해가 산자락 쪽으로 떨어질 기세다. 능동 자갈마당의 김씨 말이 맞다. 저녁 때 이곳으로 다시 와 일몰을 찍으라고 그는 말하지 않았던가. 서둘러 차를 돌린다. 저녁해가 바다를 물들이고 길을 물들인다. 그런데 가만, 섬에 들어선 이후 뭍에서 느끼지 못했던 너스레의 향기에 취했던 것 같다.

◇능동자갈마당에 놓인 폐선의 깃발이 저녁 빛에 물들어 있다. 자갈마당은 자갈뿐만 아니라 일몰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경기도 양평 말치마을과 동막골
여름아 왔니?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동막골 소년이 느닷없이 달리기 시작한 강아지와 속도를 맞춰 논두렁길을 달리고 있다.
땀이 식었다고 이내 길 위로 오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기왕 계곡에 내려섰으니 발이라도 담그는 게 순서인 법. 바위 위에 양말과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두 발을 내려뜨린다. 온몸으로 시원한 기운이 실핏줄처럼 뻗어간다.

생각해 보니,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제일 앞자락에 등장하는 곳이 양평이긴 하다. 용문사 일주문에 들어선 후 20여 분은 걸어야 대웅전 마당에 들어설 수 있으니 그 사이 맺힌 땀을 식히는 데는 계곡물처럼 적당한 게 없다. 꼬마들은 벌써 분수대 밑에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절집 밖 노래 테이프를 파는 곳에서는 어울리지 않게도 ‘땡벌’이 기승을 부린다.

◇‘당신의 뜻을 따르겠다’는 꽃말을 지닌 금낭화. 설악산 지역에 많이 피지만 양평 야산 자락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당신은 날 울리는 땡벌, 당신은 날 울리는 땡벌, 혼자서는 이 밤이 너무 너무 길어요.”

이승기의 ‘땡벌’은 일주문 안쪽 계곡 안에까지 또렷이 울린다. “당신은 날 울리는 땡벌….” 천 년 고찰 숲 속으로 퍼져 드는 ‘땡벌’ 가락이라니. 문득 요사채 신축을 위해 의정스님이 내걸었던 모연문 일부가 떠오른다. ‘불사란 시절 인연이 닿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요사채 신축에는 주춧돌 34개, 대들보 10개, 추녀 6개, 서까래 621개, 기와 2만5000장 등이 필요하다고 적었다. 불사란 시절 인연이 닿아야 하는데, 그러고 보면 대중가요 가락이 들려온다고 해서 무턱대고 내칠 일은 아닐 수도 있다. 이승기의 ‘땡벌’ 또한 인연이라고 하면 그만이다.

용문사 대웅전 마당은 더운 바람이 쓸고 지나간 듯 적막에 가깝고, 마당 아래 천년 묵은 은행나무의 위용은 여전하지만 가을에 비하면 사람들의 눈길이 턱없이 적다. 용문사도, 용문사 은행나무도, 사람들 뇌리에는 그저 가을과 맞물리는 처소인 모양이다.

◇용문산 자락 계곡의 물살은 벌써 여름빛을 띠고 있다. 일찌감치 찾아온 더위에 사람들도 바짓자락을 걷고 계곡으로 들어서기 일쑤다.

용문사 은행나무 앞에 서서 가만히 화장실 표지판에 눈길을 준다. 최근에 들른 다른 절집에서는 보지 못한 표지판이다. 엉덩이를 까내린 동자승이 소변을 보고 있다. 멋쩍은 듯한 손은 이마에 가 있고, 또 한 손은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동자승 스스로 고추를 붙들고 있으며, 승복을 입고 선 동자승의 앞으로 오줌 줄기가 점점이 떨어져 내린다. 이쯤 되면 절집 화장실치고는 익살맞기 그지없는 것이고, 솔직하기 그지없다. “킥킥” 절에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역시 동자승이다.

용문사에서 물러나 더덕막걸리 향에 몸을 맡겼다가 용문면 망능리와 연결된 말치를 향해 시골길로 들어선다. 용문면 망능리 말치에서 단월면 향소 2리 동막골에 이르는 길은 자동차 두 대가 만나면 비켜 가기 힘들 정도로 예스러운 멋을 풍기는 곳이다. 도회지 사람들이 지은 전원주택과 전형적인 농가들이 나름대로 조화를 풍기는 것도 말치 마을의 매력이다. 대체로, 전원주택과 전통 농가들이 모여 있으면 이질적으로 보이기 십상인데 망능리 말치마을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모를 심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산중의 손바닥만한 논자락의 모는 한 뼘 넘게 자라 가을을 향하고 있다.

말치마을을 벗어나면 이내 단월면 향소 2리, 전원주택은 거의 보이지 않고 농사짓기에 바쁜 사람들만 드문드문 나타난다. 향소 2리의 별칭은 동막리. 아주머니 한 명이 모자를 눌러쓴 책 들통을 지고 밭작물에 약을 주고 있다. 한 손에 분무기를 쥔 모습에서 프로 농군의 느낌이 우러난다.

“약 치는 건 남자를 시키시지.”

그래도 옛날의 알루미늄 농약 분무기처럼 무거워 보이지는 않는다.

“남자? 내가 그걸 모르나요. 남자가 있어야 시키지.”

아주머니 반응은 시큰둥이다. 농사는 몇 평이나 짓느냐는 물음에는 ‘그냥 먹고살 만큼’이란다. 고향이 원래 동막골이냐는 물음에 그는 씩 웃었다.

“그럼요, 고향이니까 살지.”

고향 동막골에서 산 지 60년이 넘었단다. 남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몸을 다쳐 농사를 지을 처지가 못 되니 자신이 농약 치러 나왔다는 얘기다. 남편 얘기를 하는 사이사이 60 넘은 아주머니의 얼굴에 그늘이 스쳐간다. 먹고살기 힘들 정도로 가난한 것은 아니지만 농사지을 사람 없다고 땅을 놀릴 수도 없는 것 아니냐는 반문이 그 얼굴에 씌어 있다.

◇농촌 사람들은 빈 농가가 생기면 농기계 보관용으로 이용한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 꽃들이 만개해 지나간 봄을 아쉬워하고 있다.(왼쪽)
◇양평 단월면의 향소 2리 동막골에서만 60년 넘게 살았다는 아주머니가 손수 농약을 치고 있다.

단월면이라고 해서 빈집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향소 2리는 그나마 적은 편이고, 빈집이 나면 사람들은 그곳을 농기계 보관소로 이용한다. 비싼 돈 주고 사들인 농기계이니 어느 한 곳이라도 녹슬까봐 애지중지 보살피는 것이다. 그 농기계가 들어선 농가 앞에 서니 슬레이트 지붕은 30, 40년을 훨씬 넘겼음 직한데 이앙기 빛깔만으로도 제법 때깔이 난다. 어느 부농의 마당 앞에 선 느낌이 드는 것이다.

논 쪽으로 눈길을 던지니 그곳, 못자리 끝난 들판은 녹음을 되찾은 산자락과 어울려 얼핏 골프장과 다름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리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필드 위로 골프 공을 날리는 사람들의 세계와 근육을 움직여 벼농사 짓는 사람들의 세계가 같은 선상에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자세히 보니 동네 소년 하나가 강아지를 데리고 나와 논두렁길을 산책하는 모습이 보인다. 길섶 한쪽에서는 장화를 신은 농부 한 사람이 낡디낡은 자전거 안장에 앉아 페달을 밟는 모습이 보인다.

잠시 후 논두렁을 걷기 시작하던 강아지가 냅다 뛰기 시작하자 끈을 쥔 소년도 도리 없이 뛰기 시작한다. 정적에 파묻힌 듯했던 동막골이 갑자기 동적으로 변한 느낌인데 그것도 잠시, 강아지가 내달리기를 멈추자 동막골은 이내 적막 속으로 가라앉는다.

마을을 한바퀴 더 돌아보려고 차를 돌려세워 들어가 보니 마을 안쪽 작은 야산 등성이에는 양봉통이 놓였다. 꿀 한 줌 제대로 받으려고 자신들이 사는 집 지붕보다 고운 슬레이트를 얹었는데, 그 빛이 농심 못지않게 곱다. 농심을 흐르는 땀 냄새조차 향기로운 시간이다.

◇용문과 단월의 경계에 있는 향소 2리 마을 사람들은 작은 동산 비탈이라도 이용해 양봉을 친다.(왼쪽)
◇용문사 은행나무 옆의 화장실 안내 표지판. 동자승의 모습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이미지 때문에 절집이 한층 가깝게 여겨진다.

당진군 수당리
"출세하면 뭐한대유?”
 ◇고향에서 농사 지으며 살지만 세상 흐름을 누구보다 잘 꿰뚫고 있는 정광호씨. 요즘 세상에는 남 잘되는 것을 좋게 보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부탁할 일이 생기면 비굴하게 몸을 낮추는 ‘신 상놈’이 많다고 분석했다.
당진군 정미면 수당리 해발 283m의 은봉산 아래에는 이질적인 공간 안국지(安國池)와 안국사지(安國寺址)가 들어서 있다. 한쪽에서는 고기를 잡고, 한쪽에서는 살생을 하지 말라는 부처의 소리가 흘러나온다.

안국 저수지 가에는 전국에서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낚시꾼들이 빙 둘러앉았다. 낚시꾼들은 토종 붕어 낚시터로 이만 한 데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모내기 철에도 물을 빼는 일이 거의 없어 수심 변화도 없고 붕어 씨알이 굵어 한 번 손맛을 본 사람들은 다른 낚시터로는 눈길조차 안 돌린단다. 입질이 뜸한 참에 낚시꾼 한 사람이 입을 연다.

◇안국사지에는 절이 없지만 신자도 많고, 스님은 네 명이나 있다. 신자들과 함께 하루에 만 배 올리기를 이끌던 스님이 깨진 무릎을 살펴보고 있다.

“일본에서는 낚싯대용 대나무만 대를 이어 키우는 사람이 많아요. 아버지가 키우던 대나무를 아들이 이어받아 30년 넘게 키워요. 그야말로 장인 정신이죠. 그런 낚싯대는 아무에게나 팔지도 않아요.”

낚시터에 갑자기 장인 정신이 등장하고, 낚시 산업이 등장한다. 산 그림자 드리워진 수면 위로 형형색색의 찌가 그림처럼 솟아 있다. 낚시하는 사람에게는 입질이 가장 그립지만, 저수지 옆 다랑논에 일하러 나온 농부들은 허리춤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모판을 옮기느라 바쁘다.

안국 저수지에서 안국사지로 내려선다. 안국사지는 보물 100호인 안국사지석불입상, 보물 101호인 안국사지석탑 등 보물 두 점이 있는 고려시대 때의 절터이다. 안국사지의 특징은 대부분의 절터가 인적 드문 곳에 방치되다시피 하는 것과 달리 불자들이 즐겨 찾는다는 것. 절집은 없지만 스님은 네 명이나 있다. 학자들은 이곳 석불 입상의 조형미를 높이 평가하지 않지만 문외한인 필자가 보기에 이 석불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얼굴에 비해 사각형의 갓이 지나치게 크다고는 하지만 비례를 생각하지 않고 멋을 낸 분위기에서 가식 없는 촌부의 표정이 보이고, 몸체가 기둥처럼 뻗어내려 볼품없다고 하지만 몸만들기에는 관심없이 먹고사는 일에 충실한 서민들을 닮았다. 사람들이 석불을 향해 절을 올린다. 가만 보니, 방석과 담요까지 준비해 온 사람도 있는데 잠시 잠깐 폐사지를 찾았다가 돌아가는 사람들과는 뭔가 다르다.

“1년에 두 번 만 배 올리는 행사를 하는데, 그게 오늘예유. 저녁 다섯 시부터 내일 다섯 시까지 절을 만 번 하는 거쥬.”

◇보물 100호인 안국사지석불입상. 조형미는 뛰어나지 않지만 고려시대 충청도 지방의 불상양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중앙의 석불 양 옆으로는 본존불이 서 있다.

멀리서 망원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니 석불 앞 비닐 하우스에 사람들이 빼곡하다. 만 배를 이끌고 있는 스님 한 명이 절을 하다 말고 주저앉아 승복을 무릎 위까지 걷어올린다. 무릎에 붉은 피멍이 맺혀 있다.

“절은 없는데 신자도 많고, 스님도 많네요.”

“절유? 읎슈. 불공만 열심히 드리면 되지, 꼭 절을 세워야 하남유.”

맞는 말이다. 기도처라고 해서 꼭 일주문에다 단청 화려한 대웅전이 들어서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나저나 스님의 무르팍이 온전치 못하니 스님은 언제 만 배를 끝낼지 걱정이다.

안국사지 아래 마을 쪽으로 내려서니 젊은 부부 한 쌍이 물텀벙 같은 못 위에 노끈으로 얼기설기 그물을 치고 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가물치를 키우려구유. 만 마리를 집어넣었는데 새들이 가물치를 잡아먹지 못하게 그물을 치는 거예유.”

“가물치요? 차라리 잉어를 키우시지.”

“잉어유? 잉어는 똥값예유. 잉어는 킬로당 2000원이면 사는데유 뭐. 가물치는 1년 키워두 사료는 6개월만 주면 돼유. 11월부터는 겨울잠을 재워버리면 되니까유. 이거 잘 키우면 대박예유. 중국산이 왕창 들어오지만 않으면 1년 키워서 1억은 번다니까유.”

◇안국지는 토종 붕어의 손맛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계곡형 저수지. 낚시꾼들의 소망과는 관계없이 수면에 떠 있는 찌는 한동안 요지부동이다.

잉어를 우습게 아는 가물치 양어장 주인은 대박과 쪽박을 여러 번 경험해 봤단다. 왜가리 한 마리가 날아들면 애써 키운 가물치 한 관은 먹어치우고 자리를 뜨니 그물을 안 칠 수 없다는 얘기고, 중국산 가물치 수입이 얼마나 될지 모르니 대박 아니면 쪽박을 각오하고 양어장을 한다는 얘기다. 양어장 주인, 이름 좀 알려 달랬더니 그냥 씩 웃으며 돌아선다.

양어장 아래 손바닥만 한 밭에서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고, 논 한가운데서는 청남방을 입은 농부가 양동이에 담아 들고 나온 비료를 뿌리고 있다. 장화와 양동이와 밀짚모자가 모두 금빛이다. 슬며시 그에게 다가가는데, 구릿빛 얼굴의 농부가 먼저 말을 건넨다.

“예술하시는 모양인데, 배 좀 고프겠슈. 어떻게 아냐구유. 우리 딸도 예술한답시고 미대 나왔는데 지금은 피자 가게 허구 있으니께 잘 알쥬.”

농부는 예순을 갓 넘겼을까 싶은데 올해 일흔하나란다. 일흔하나인 농부의 입에서 이내 세상을 평정하는 말이 쏟아져 나온다.

“요새는 신 상놈이 너무 많어유. 남 잘되면 뒤에서 욕하다가 자기가 아쉬우면 찾아가서 조아리잖어유. 그게 신 상놈이지 뭐래유. 나는 안 그래유. 남 잘되면 어찌 그리 잘되셨냐구 덕담허구, 아쉬운 거 있으면 솔직하게 도와달라구 해유. 빽이 따로 읎슈. 비윗장 좋은 게 빽이라니게유. 그러니 뒤에서 욕은 하지 말어야쥬. 그러면 신 상놈이 되니게유.”

시골 농부가 펼치는 세태론이 걸판지다. 가물치 양어장 주인과 달리 ‘나는 정광호유’ 해가며 이름 석 자 당당히 밝히는 이 양반, ‘우리 막내는 서울대 나와서 LG전자 다니는데 장가를 못 들어서 큰 일’이라고 엄살이다. 여자들이 줄줄 따르긴 하는데 하도 바빠서 일요일에도 회사에 출근하다 보니 여자들이 이렇게 얘기하곤 돌아선단다.

◇가물치 양어장 주인이 새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그물 치는 작업을 해놓았다. 가물치는 겨울잠을 자기 때문에 사료값이 덜 들고, 요즘은 잉어보다 수익성이 좋다.

“일요일에도 데이트 못하는 게 사랑이예유? 이게 연애예유?”

“당진에서 서울대 갔으면 천재에 가깝죠.”

“아이구, 뭘유. 우리 사위는 공무원인데 차관보유 차관보.”

웬만한 시골 사람은 그런 직위가 있는 줄도 모를 판인데, 정광호씨 입에서는 정부 관리들의 직위가 술술 나온다.

“장관 차관, 그 다음에 차관보 아뉴. 큰사위가 높은 사람 아닐 때는 모내기 할 때마다 내려와서 모도 심고, 모 심기 힘들면 장인어른 힘들다고 라디오라도 틀어주고 했는데 이젠 못 내려와유. 집안에 출세한 사람 있으면 가족 관계는 멀어진다니까유. 워낙 바빠서 가족 간에 예약해 가며 만나야 하니 출세하면 뭐한대유?”

얘길 듣다 보니, 이 양반 안국사지 석불이 환생이라도 한 것인지 논일 하면서도 세상 이치 다 꿰고 있다. 도시물 먹고 살았어도 할 말이 없으니 괜히 한마디 던져 본다.

“자식들 잘됐으니 농사 그만 지으시지 그래요.”

“농사 안 지으면 뭐 한대유. 땅이야 좀 있지만 내 손으로 산 땅 내가 어떻게 판대유. 시가로 치면 부자 같지만 주머니에 돈 있어유? 읎슈. 그러니 원시인처럼 살쥬. 그래도 자식들이 나중에 싸우든 말든 땅은 못 팔어유.”

농부 정광호씨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할(喝)이다. 마을 위에서는 불자들이 부처를 향해 만 배를 올리느라 땀을 흘리고, 마을 논에서는 부처 못지않은 설법이 뿌리를 내린다.

 

제주도 이중섭 공원
'소의 눈'을 닮은 화가의 향기가 …
 ◇이중섭이가족과함께세들어살았던초가집 이중섭공원을만든다는소식을 접한 집주인은 문화 공간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인정을 베풀었다.
5분만 걸어가면 천지연 폭포를 만날 수 있는 서귀포시 도로변에 한 시절을 풍미했던 화가 이중섭의 삶터가 자리해 있다. 마당은 서너 평 될까 말까 하고, 이중섭이 붓을 들었던 초가집 방 역시 서너 평에 불과하다. 이중섭은 이곳에서 아내와 두 아들, 세 명의 가족을 건사하며 그림을 그렸다.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그림 좀 한다는 요즘 젊은이들이 이삼십 평 화실을 꾸미는 세태에 비하면 중섭의 방은 화구들만 들여놓아도 꽉 찰 지경인 셈이다.

그러나 이중섭 생가는 집의 크기만 가지고 따질 일은 아니다. 집 밖으로 나서면 어른 허리 높이의 돌담이 이어지고, 한라봉을 매단 귤나무가 보인다. 지은 지 50년도 더 됐을 법한 여인숙이 보이고, 서귀포시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을 법한 아카데미 극장이 보인다. 이들 구조물들이 모두 하나의 벨트를 이루고 있으니 이중섭 공원에 들어서면 이중섭이 고무신을 신은 채 마당으로 내려설 듯한 느낌에 빠진다. 공원 잔디밭에는 띄엄띄엄 징검다리가 놓여 있고 문 닫은 극장의 외벽은 푸른 잎들로 덮여 있다. 이만한 풍광이면 시인은 시인대로, 화가는 화가대로 저 앞의 천지연 폭포 소리를 끌어당겨 상상력을 분출하고도 남을 것 같다.

나이 마흔에 세상을 떠난 이중섭이 제주와 인연을 맺은 기간은 불과 1년이다. 1951년 일본인 아내 마사코와 두 아들을 데리고 피란지로 택해 정착한 곳이 서귀포시 서귀동이었는데, 그는 1월부터 12월까지 제주의 사계를 보내며 ‘섶섬이 보이는 풍경’, ‘서귀포의 환상’ , ‘파란 게와 어린이’, ‘물고기와 게와 노는 네 어린이’ 등의 작품을 남겼다. 바다 곁에 사니 바다 풍경이 담기고, 섬이 보이는 섬의 모습이 담긴 그의 그림들은 그러나 제값을 받고 팔려나가지 못했다. 그는 어떤 때 술 한 잔 사준 사람에게 작품을 건네기도 했으니 돈에 집착하지 않은 화가였다. 하긴, 작품의 화제(畵題)에 비춰 보더라도 그는 늘 동심에 젖어 있었던, 철이 덜 든 사람이기도 했다.

◇섶섬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이중섭 미술관 전경. 처음에는 미흡한 대로 대향전시실로 출발했으나 지금은 유명 작품을 많이 보유한 1급 미술관이다.

작은 솥단지 두 개가 걸린 생가 부엌에는 생전의 이중섭 사진 액자가 놓여 있다. 이중섭이 세 들어 살던 집에 이중섭의 흔적이 놓일 수 있게 된 것은 김순복 할머니가 자신의 집이 기념관이 된다는 얘기에 흔쾌히 동의해 이사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중섭 생가가 이중섭 공원에 포함된 배경은 블로거 ‘라르고’의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몇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제주도가 아닌 도심 사람들이 그런 경우를 겪었더라면 보상비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일이 생겼으리라.

공원 안의 감귤나무 아래에는 한라봉이 잔뜩 떨어져 있다. 한라봉을 따는 데 쓴 장대가 놓여 있다. 아마도 밤 사이 누군가가 한라봉 몇 개 따먹으려고 장대를 휘두른 듯 한라봉은 냉장고에서 꺼낸 것처럼 싱싱하다. 마침 동네 아주머니 한 명이 공원을 가로질러 읍내 쪽으로 향한다.

“이거 먹어도 되는 거예요?”

아주머니는 낯선 객임을 확인하더니 알아듣기 쉽게 표준말을 동원해 되묻는다.

“혼나려고 그걸 왜 땄수과?”

“제가 딴 게 아니고, 여기 떨어져 있던 거예요. 먹어도 돼요?”

“들키지 않게 먹으삼.”

아주머니의 얼굴에 스쳐가는 미소에 기대 한라봉 껍질을 벗겨 한입 덥석 깨문다. 거칠기 짝이 없는 껍질과 달리 달콤한 즙이 입 안 가득 고여든다. 잔디밭에서 뒹구는 한라봉 몇 알 가방 속에 넣을까 싶은데, 카메라 장비만으로도 가방은 이미 한도 초과에 가까워 이내 포기한다. 일본 농림부에서 육성한 교잡종이 제주에서 각광받는 감귤 품종이 된 게 아이로니컬하다.

◇외벽에푸른잎을잔뜩두른아카데미극장 문을닫은지오래여서 허름한 모습이지만 허름함에서 오히려 푸근한 추억이 되살아난다.

생가 위, 이중섭 미술관을 향해 오른다. 변변한 현대미술관이 없던 서귀포시에 이중섭 미술관이 들어선 것 역시 이중섭이 제주에 머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 미술관 현관 앞에 이르니 청년 같은 이중섭의 얼굴이 담긴 조각상이 눈길을 끈다. 조각 속에 크고 맑은 이중섭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다. 이중섭 초상 아래, 그의 시 ‘소의 눈’이 다가온다.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 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소의 눈’ 전문)

‘소의 눈’을 대하고 보니 그의 그림 ‘길 떠나는 가족’이 떠오른다. 달구지를 끄는 소는 앞 다리 하나를 들고 ‘맑게 두 눈 열어’ 화면 앞을 보고 있다. 달구지에 올라탄 한 아이는 새를 잡고 있고, 또 한 아이는 꽃을 품고 있다. 젖가슴 내놓은 여자는 헤실거리며 웃고 있는데, 소 고삐 쥔 사내는 트위스트라도 추는 듯 즐거운 모습이다. 일본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린 그림이니 거기에 약간의 우수가 깃들 법도 하지만, 적어도, 그림에는 티끌만한 우울도 없다. 맑은 눈의 소도 황금빛, 달구지도 황금빛, 중섭은 마음속으로나마 온 가족이 소달구지 타고 소풍 가는 꿈을 꾸었던 것이리라.

◇이중섭 미술관 앞의 조각상. 이중섭의 초상과 함께 그의 시 ‘소의 눈’이 새겨져 있다.

이중섭 미술관은 사실 처음부터 ‘미술관’이 아니었다. 출발은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 이중섭의 호를 따 ‘대향 전시실’이었다. 2003년 이중섭 미술관으로 새출발했지만 그때도 역시 1급 미술관은 아니었다. 1급 미술관이 갖춰야 할 작품 수, 그리고 예술성 높은 작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런 소식을 접한 갤러리 현대의 박명자 대표가 2003년 이중섭의 ‘파란 게와 어린이’를 비롯해 국내 유명 작가의 소장 작품 54점을 기증했고, 그 이후 이중섭 미술관은 어엿한 1급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중섭은 불운한 시대를 살았으나, 훗날 그의 예술성을 높이 기리는 사람들을 만나 짧은 삶에 대한 보상을 받고 있는 셈이다.

미술관에서 내려와 거리에 서니 이중섭 거리 표지판이 보인다. 멀리 섶섬이 보이는 언덕에서 천지연 폭포를 향해 내려가는 길목 일대가 제주에서 지정한 예술가 이중섭의 거리이지만, 별다른 장식 없이 수수하기 그지없다. 하긴 그게 맞다. 이중섭의 거리라고 해서 요란할 필요는 없는데, 그래도 서운한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거리 어디쯤에든 이중섭의 그림엽서 파는 가게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해는 쨍쨍한데도 잠시 공원 쪽으로 비켜서니 거기, 돌담 위에 더위를 피하기 위해 쓰고 다녔던 누군가의 양산이 놓여 있다. 여름의 중심으로 들어선 날씨 핑계를 대고 양산을 집어 들까 하다가 이내 손을 거둔다. 더위 피할 생각으로 남의 양산 집어드는 것은 도리가 아닌 듯하다. 양산 주인이 나타날까 두려운 것은 아니다. 이중섭 공원에서는 버려진 양산도 하나의 소품, 그 자리에 그냥 있어야 어울린다.

 

인천 교동도, 은빛 병어와 바다, 그물에 걸리다
 
연산군의 유배지였던 곳이자 북한과 지척인 ‘평화의 섬’
병어잡이 어부집 풍경은 활어처럼 퍼득인다
어부의 아내는 돈받고 파는 병어보다 덤으로 주는 게 더 많을 만큼 인심이 넉넉하다
“장가가려고 애쓰다 마지막으로 걸린 ‘대어’가 집사람이야”
거판진 어부의 말투에서 바다내음이 난다

고깃배 몇 척 들어선 포구의 안쪽 마을, 섬마을 식당치고는 여간 고급스럽지 않은 ‘별해별식’ 간판을 단 식당 앞에 사람들이 북적인다. 섬을 한 바퀴 돌고 시장기를 느껴 찾아온 사람이 밥 빨리 달라고 보채는가 하면 ‘병어는 언제 오는 거냐’고 재우쳐 묻는 사람이 있다. 식당 여주인은 싱긋 웃을 뿐이다. 병어회를 먹으려는 사람도 기다리라는 얘기고, 병어를 사가려는 사람도 기다리라는 얘기다. 병어잡이 나간 남편의 배가 아직 안 들어왔으니 달리 방도가 없단다. 사람들은 일순 조용해진다.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10분이면 건너갈 수 있는, 그러나 불과 3㎞ 앞에 군사분계선을 두고 있는 교동도(喬桐島)의 한낮 풍경이다. 근처의 유명짜한 석모도와 달리 좀 낯선 섬 교동도는 사실 두 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 하나는 ‘유배지로서의 섬’이며, 하나는 ‘평화의 섬’이다. 인천시 강화군 교동도, 즉 강화 화개선착장에서 지척인 교동도는 연산군의 유배지이자 그가 사망한 곳이니 ‘유배의 섬’이며, 북한과 지척인 곳에 자리해 있으니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해소되기를 희망하는 ‘평화의 섬’이다. 섬이긴 하되 이 땅에서 14번째로 큰 데다 제일 높은 화개산이라고 해봐야 해발 259m에 불과해 ‘섬 안에 평야 있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곳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섬 총각에게 시집가기로 마음먹은 여자가 ‘생선 좀 다듬으며 살면 되겠지 했는데 논일부터 배워야 했다’고 했을 정도로 논이 많다.
아무튼, 병어잡이에 나갔던 어부 현상록(54)씨가 병어를 트럭에 옮겨 싣고 나타나면 어부의 집은 아연 활기를 띤다. 현씨의 아내 김순자(50)씨는 바닥에 저울을 턱하니 내놓고 병어 판매에 나서는데, 이 양반 돈 받고 파는 병어보다 덤으로 내주는 병어가 더 많을 만큼 손이 크다. 1㎏당 대강 세 마리가 저울에 올라가는데 검은 비닐봉지 속으로는 다섯 마리, 여섯 마리가 들어가는 것이다.
◇식당 주인 김순자씨가 남편이 잡아온 병어를 팔고 있다. 입소문을 듣고 병어를 사러 온 사람들은 덤을 많이 주는 김씨의 인심에 놀라 단골이 된다.

“장가 좀 가보려고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돼야지. 이래저래 허탕만 쳤는데 마지막으로 걸린 여자가 이 사람이었어.”
어부 현씨의 말이 걸판지다. 고깃배 모는 어부 말투 그대로 아내를 두고 ‘걸렸다’고 하는데 서울에서 시집 온 김씨는 씩 웃고 만다.
“사람들이 배고파 죽겠다는데 왜 밥부터 주지 않고…”
현씨의 타박이 이어진다.
“어떻게 밥만 줘요? 배 들어오면 싱싱한 병어회랑 같이 내주려고 그랬지.”
갑자기 어부의 집이 바빠진다. 김씨가 병어를 파느라 눈코뜰새 없으니 어부 현씨와 현씨의 친구가 팔 걷어붙이고 병어회 뜨기에 나선다. 평상에 철퍼덕 앉아 시장기를 다스리던 사람들이 군침을 삼키며 활어처럼 펄떡이는 어부의 집 풍경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마당 한켠의 빨랫줄에 널린 수건들이 바닷바람에 흔들리는데, 참 눈부시다.
다시 물때가 되면 선주와 함께 병어잡이에 나갈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골프깨나 배웠다는 권순구(44)씨의 너스레가 시작된다.
“올해는 북한에서 포를 안 쏘네. 이상한 일야.”
포를 안 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북한이나 남한이나 새떼들이 농작물을 해치는 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데, 북한에서는 이맘 때면 새를 쫓기 위해 툭하면 공갈포를 쏘았다는 얘기다. 북한 쪽의 공갈포 소리에 놀라 덩달아 교동도의 새떼들도 도망치곤 했으니 나름대로 도움을 받았다는 뜻이다.
“여기 쌀이 얼마나 유명한지 알아요? 교동 섬 쌀 사 먹으려면 빽 있어야 돼요. 철원 오대쌀? 쨉이 안 되지.”
◇교동도 읍내리의 평화로운 풍경. 수건들은 식당용임을 알려주고, 알록달록한 빨래들은 땀흘려 일한 사람들의 삶을 말해 준다.

권씨가 평상에 놓인 쌀 부대를 툭툭 친다. ‘나는 그 옛날 코미디언과 이름이 똑같다’고 이름 자랑하는 권씨의 동갑내기 이기동(44)씨가 빙그레 웃는다.
“나는 박찬호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찬호야.”
동네 아우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던 이찬호씨도 슬쩍 나선다.
“교동도가 이래봬도 유서 깊은 곳이요.”
맞는 말이다. 교동도는 옛적에는 송나라와 한양을 잇는 관문 역할을 했던 곳이다. 중국 산동반도를 떠난 배가 황해도를 거쳐 장산곶을 돌아 교동 앞바다를 거친 후 예성강에 다다르곤 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지금도 교동도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에는 송나라 때의 화폐가 많다.
하지만 그때의 영화는 간 데 없고 지금은 다른 섬사람들보다 조금 더 잘사는 지역일 뿐이다. 거리에는 학교에서 파한 여중생들이 서넛씩 나타난다. 그런데 하굣길의 풍경이 색다르다. 소형 오토바이 한 대에 세 명, 네 명씩 앉았는데 여중생치고는 오토바이 타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위험한데 왜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
“안 위험해요. 이거 없으면 학교가 너무 멀어서 안 돼요. ”
인천에서 전학왔다는 중3 박다슬양이 입술을 삐죽이 내민다.
“그래도, 오토바이도 있고 좋네. 나는 옛날에 한 시간씩 걸어다녔는데.”
“좋긴요. 이 오토바이, 빌린 거예요.”
◇교동도의 학생들은 유난히 오토바이를 많이 타고 다닌다. 등하굣 길에 한 오토바이에 서너 명이 타는 것은 거의 상식. 박다슬양이 친구들을 데려다주기 위해 주택가로 들어서고 있다.


박양이 친구들을 집까지 데려다주러 다시 휭하니 사라진다.
아내를 거들어 손님 치다꺼리를 한 후 한숨 돌린 선주 현씨가 다시 바다에 나갈 채비를 시작한다. 이찬호, 권순구, 이기동씨가 차례차례 선주를 따라 나선다. 전업 어부가 아니라 농사가 바쁠 때는 농사에 치중하고, 농사 일에 틈이 나면 병어 잡는 일에는 나서는 투잡인 셈이다.
병어를 잡는 물때는 하루 네 번이다. 여섯 시간 간격으로 바닷물의 흐름이 바뀌니 때를 놓치면 그물에 걸린 병어가 다시 바다로 헤엄쳐 나간단다. 그러니 아무리 귀한 손님이 와도 그물 걷는 것을 미룰 수는 없는 일, 그것이 바다 농사다.
현씨의 배 순덕호 기관실 엔진이 돌아가기 시작하자 바닷길이 열린다. 선주가 키를 잡고 드럼 통보다 좀 작은 통발들이 그물을 지탱하고 있는 곳을 향해 나간다. 바다 곳곳에서 그물을 걷어올리는 배들이 보인다. 한 시간 내에 여섯 군데의 그물을 끌어올려야 하는 강행군이다. 선주가 싱긋이 웃는다.
“아무래도 다 걷기는 힘들 것 같은데. 식당에 손님들이 많이 오는 바람에 좀 지체했더니.”
손님들이 많아 지체된 탓도 있지만 난데없이 들이닥친 글쟁이를 마지막 배 시간까지 데려다 줘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리라. 덜컥 ‘병어 잡는 구경 좀 해보자’는 필자의 청을 마음씨 좋은 선주가 들어줘 배에 동승시킨 탓이었다.
그물을 걷어올리자 은빛 병어들이 줄줄 매달려 올라온다. 네 사람이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몸짓으로 손발을 맞춘 끝에 병어는 한 마리, 한 마리 바구니 속으로 들어가고 그물은 다시 바다로 던져진다. 햇살은 뜨거운데 매듭마다에서 바닷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에서 청량감이 느껴진다.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데도 입에서 살살 녹는 병어찜 맛에 군침이 돈다.
 
강원 배후령과 청평사

수직으로 떨어지는 九聲폭포,아홉가지 물소리 선계에 온듯 …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의 드라마는 끝나지 않았다. 러시아 소치에 개최지를 넘겨줬지만, 대신 이땅에는 희망의 땀이 왜 소중한가를 알려주는 메타포가 남았다. 그 메타포를 전한 쪽은 평범한 평창 사람들이다. 한 사내가 가파른 고갯길을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넘는다. 군인들도 도보 행군에 나서면 지쳐 나가 떨어지기 일쑤인 강원도 춘천에서 양구 쪽으로 이어지는 오음리 고갯길이다. 뭔가 작정하고 나선 길인 듯, 사내의 뒤에는 갖가지 깃발을 단 4륜 구동 자동차가 호위하고 있다. 한여름 뙤약볕이 쏟아지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를 기원하는 전국 일주 팀이다. 한 달 내내 전국을 돌며 2014㎞를 달리겠다는 의지다.
배후령 고개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무턱대고 그들을 가로막는다.
“좀 쉬면서 하시지 그래요? 그래, 어디에 사시는 분들인데 이 고행을?”
“고행은요, 좋아서 하는 일인데. 평창 살아요.”
오음리 고갯길을 헉헉거리며 올라온 사람은 강돈혁(42)씨, 자동차를 운전한 사람은 박상만(54)씨인데 이들은 나이 어린 후배 3명과 자발적으로 전국 순례에 나섰단다.
“지원금은 좀 나오죠?”
“우린 그런 거 안 받고 하는 겁니다. 뜻 맞는 사람끼리 서로 갹출해서 시작했는데, 가는 데마다 환영해 줘서 오히려 고맙죠. 기념품 받아가세요.”
자동차에서 휴대전화 고리와 배지를 들고 나오는 강돈혁씨의 피부는 온통 구릿빛이다. 마흔 둘의 사내이긴 하지만 피부색으로 보면 마치 20대 후반 같다.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어 전국을 순례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특별한 이유가 있겠어요? 평창이 고향인데, 평창에 좋은 일 생기면 평창 사람들이 좋은 거니까요. 좋은 일 만드는 데 힘이 됐으면 해서 뭉친 겁니다.”
평창 사람들의 순박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혹시 있을지 모를 위험에 대비해 동원된 자동차도 평창의 개인 독지가가 차를 내줬다는 설명이다. 한여름이지만, 이들의 얘기를 들으니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가는 것 같다. 가장 역할 하랴, 자신이 운영하는 ‘스키114.com’ 운영하랴 시간 내기도 어려운 판에 무려 한 달씩 순례길에 나선다는 게 그리 쉬운가.
◇청평사 아래의 영지. 오봉산 그림자가 비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영지 옆에서 나들이에 나선 사람들이 수다를 떨고 있다. 아녀자들의 수다에는 역시 남편 흉보기와 자식 자랑이 순위를 다툰다.

자동차 범퍼 쪽에 붙은 표지판을 보니 이들은 2014㎞ 중 1609㎞를 롤러블레이드로 누볐다. 다리에 알이 박이고, 쥐가 날 만도 하련만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라는 식으로 강건한 기운이 넘친다. 배후령 정상에 오르니 강돈혁씨의 후배들이 자전거를 세워놓고 땀을 식히는 중이다. 나이 어린 후배들은 자전거로 순례하고, 중년의 강씨는 걷거나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2014㎞를 누비니 그 또한 아름답다는 생각이 스쳐간다. 러시아의 소치 사람들에게 이 고행을 자비 들여서 하라고 하면 선뜻 나섰을까.
배후령 아래, 청평사를 향해 굽이진 길을 달린다. 더러는 소양댐에서 배를 타고 오기도 하고, 더러는 곡예 운전을 마다하지 않고 육로로 찾기도 하는 청평사는 1970년대부터 이 나라 청춘들의 가슴을 들뜨게 했던 명소 중의 하나이다.
광종 24년(973)에 창건됐으니 천년 고찰로 이름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청평사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부도탑은 물론 영지(影池)와 폭포를 거느린 점만으로도 숲길 산책의 미덕을 주는 곳이다.
오봉산 자락을 타고 흘러온 계곡 물이 구성 폭포에 이르러 수직 낙하한다. 산이 깊으니 물이 마를 일 없는데, 사람들은 정말 아홉 가지 소리가 들리는가 싶어 발길을 멈추고 귀를 세운다. 그러나 아홉 가지 소리야 마음속에 있는 것이거늘, 폭포에서 아홉 가지 소리를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그저, 선계에 들어선 듯 시원스런 낙하음에 빠져 있으면 그로써 한나절이 갈 뿐인 것이다.
◇청평사 대웅전에 든 젊은 남녀가 간절한 모습으로 기도를 올리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청춘들의 데이트 코스로 유명한 청평사는 육로로 접근하는 방법과 소양댐에서 배를 타고 가는 방법이 있다.

오봉산의 옛 이름인 경운산이 그림자처럼 비친다고 해서 붙여진 영지 앞 공터에서는 절 나들이를 나온 할머니들이 야외 돗자리를 펴놓고 수다를 떠는 중이다. 아들이 집을 샀네, 딸이 승진을 했네, 누구네 집에서 청첩장이 왔네, 속 썩이던 남편이 요즘은 철이 들어가는 중이네 해가며 돌아가며 몇 마디씩 하는데 한 가지 결론이 선다. 대한민국 어디를 가나 어른들의 레퍼토리는 거의 똑같다는 것. 그런데 이 어른들 수박을 반쪽으로 쪼개 랩에 씌워 놓고는 먹을 생각을 안 한다.
“수박은 먹으라고 있는 건데 왜 감상들만 하고 계시나. 멀리서 온 사람 수박 한 쪽 주시지.”
단번에 대답이 날아온다.
“칼이 없어서 이러고 있는데….”
“그럼 칼을 구해 오면 수박 주시는 거지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스님한테 가서 칼 좀 달라고 할 테니.”
스님에게 가기 전 영지를 둘러보니 한쪽 구석에는 백련이 피어 있고, 물 속에서는 팔뚝 길이만 한 붕어와 잉어들이 망중한을 즐기는 중이다. 살생을 금하는 절집 아래턱에 있으니 그야말로 팔자 중의 상팔자인 셈이다. 어떤 이들은 2014㎞를 순례하느라 야단법석(野壇法席)인데, 물고기들은 수중에서 법석(法席)을 마련한 것이니 그만 한 행복이 없는 것 같다.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유치를 위해 전국 2014㎞ 순례길에 나선 강돈혁씨가 박상만씨의 칸보이 차량을 뒤에 두고 오음리 배후령을 오르고 있다. 개최지 결정과 관계 없이 자비를 들여 선후배 3명과 함께 순례길에 나선 이들의 땀은 순결하다.

수박 한쪽을 염두에 두고 칼을 챙겨 와야지 하면서 청평사에 오르니 스님도, 보살도 모두 마당 가의 벤치에 앉아 더위를 피하고 있다. 염불 소리는 스피커에서 나오고, 대웅전 안에서는 젊은 남녀가 나란히 좌정한 채 간곡한 기도를 올리는 중이다. 경춘선 기차, 시내 버스, 유람선을 번갈아 타고 땀흘리며 산길을 걸어 절집에 닿았으리라. 등산복 차림의 한 사내는 대웅전에 들어서지 않고 밀짚모자를 벗어 땅에 내려놓은 채 부처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경건하기 이를 데 없다. 수박 한쪽 먹자고 칼 좀 달라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보물 164호로 지정된 회전문 앞으로 나오니 스님과 보살들은 여전히 벤치에 앉아 있는데 스님 한 분이 돌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아, 이곳이 어디인가라고 화두를 떨어뜨리는 것인가, 아니면 먹장구름 잔뜩 낀 하늘을 보며 천문을 살피는 것인가.
산길을 내려오며 다시 영지에 들르니 할머니들은 돗자리를 걷고 내려가려는 참이다.
“절이 멋있어요?”
이분들 아예 절에는 올라가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멋있는 절이 어딨습니까. 절은 다 똑같은걸요. 그나저나 칼을 못 빌려왔네.”
할머니들이 조용히 웃는다. 숲 밖으로 나가면 아직도 찜통일 텐데, 이 할머니들은 분명 조금 전까지 흉보던 남편, 혹은 직장 다니는 아들 며느리를 위해 저녁을 짓기 위해 서둘러 일어나는 것이리라.
그들에 앞서 산길을 내려간다. 2014㎞를 향해 계속 걷고 달리는 사람들은 지금쯤 어디에 다다라 있을까. 이제 생각해 보니 청평사를 찾는 길에 만난 그들이 실상은 부처요, 절집이었던 것도 같다.올림픽 개최지 자격을 얻는 데는 실패했지만, 평창 사람들이 무욕의 삶을 산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수확은 쏠쏠하다. 그것이 강원도의 힘이다.

 

충남 연기군 송원리

"이대론 못 떠난다” 성난 農心
 ◇송원리 주민들의 바람을 간직한 채 흔들리는 플래카드 사이로 폐가와 능소화가 동거하고 있다. 능소화는 양반집에서나 키우는 꽃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귀한 꽃이었다.
충청도 산들은 대부분 올망졸망하다. 정상 쪽을 바라보아도 날카로운 데가 별로 없다. 마치 밀짚모자 형국인데, 산을 보다 보면 ‘충청도 사람들 성격은 산을 닮은 모양’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렇다고 충청도 사람들이 영 물러터졌다고 생각하면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송원리 주민 김종선씨

물러터지기는커녕, 참고 참다 작심하고 나서면 어르고 달래도 영 마음을 돌리지 않는 사람들이 충청도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을 충남 연기군 남면 소원리에서 만났다.

고3, 고1 두 딸을 둔 김종선(45)씨는 송원리가 고향이지만 전국을 돌며 소장사로 돈맛깨나 본 사람이다.

“소장사가 아주 재밌슈. 지금이야 큰돈 못 벌지만 옛날에는 소 무게를 눈짐작으로 어림했잖유. 저거 400키로 나가겠는데 값 잘 쳐줄 테니 팔어유 그러면 알았슈 하고 팔았슈. 그 소를 끌고 가 저울에 달아보면 450키로도 나가고, 500키로도 나가고 그랬다니까유. 앉은자리에서 50키로, 100키로 값이 남는 거쥬. 아, 속일라고 속인 게 아니라….”

지금도 소장사를 그만둔 것은 아니지만 김씨는 요즘 송원리 대로변에 설치된 컨테이너 사무실에 나와 있을 때가 많다. 컨테이너 사무실의 이름이 절박하다. ‘송원리주민생계대책위원회’. 행정중심도시(이하 행복도시, 행복도시는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해 우여곡절 끝에 건설이 추진되고 있는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줄임말이다)가 추진되면서 이달에 첫 번째로 삽질이 시작되는 곳이 바로 김씨의 고향 마을 송원리인데, 보상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의 골이 파이다 보니 길가에 ‘주민생계대책위원회’가 들어선 것이다. 김씨가 소장수 이력을 얘기하고 있는데 송원리 이장이 적재함에 빈 상자를 가득 실은 트럭을 몰고 마을로 털털거리며 들어간다.

◇연기군의 특산물인 복숭아 과수원에 복숭아가 탐스럽게 매달려 있다.(왼쪽)◇송원리 표지석.

“저 양반이 동네 이장유. 복숭아 팔고 오는 거쥬.”

김종선씨도 복숭아 과수원 1400평을 갖고 있다. 보상을 많이 받았냐는 물음에 그는 3.3㎡당 36만원을 받았으니 계산은 직접 해보라며 시큰둥한 표정이다. 대로변에 있는 과수원도 36만원, 산비탈에 있는 과수원도 36만원이니 그럴 줄 알았으면 왜 길가의 비싼 땅을 싸서 과수원을 했겠냐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행복도시 얘기가 있기 전에도 40만원에 팔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 팔 걸 그랬다는 얘기다.

김씨가 받은 과수원 땅값은 3억7000만원 남짓이다. 땅 좀 있는 사람들은 10억원 넘게 받기도 했지만 김씨는 대수롭지 않은 금액이란다.

“옛날에는 그게 큰돈였슈. 지금은유? 아니라니까유. 고향 떠나 땅 사서 집 사봐유. 건축비가 장난 아니잖어유. 제대로 지으려면 평당 400 가까이 들어유. 대충 지어도 300이유. 땅 사고 집 짓고, 게다가 타향에 가서 텃세 참아야쥬. 그러고 나면 농사지을 땅을 어떻게 장만한대유. 뭘 생산해야 먹고 살 수 있잖유. 그뿐유? 시골 사람들 몇 천만원씩 빚보증 없는 사람이 어딨대유. 이거저거 빼고 나면 다 빛 좋은 개살구예유.”

◇주인이 떠나고 없는 빈 집 앞의 경운기 적재함에 한 잎 두 잎 떨어져 내린 능소화 잎. 사람은 떠났어도 꽃은 절기마다 제 몸을 활짝 열어 반겨줄 사람을 기다린다.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다. 자신은 소장사를 하느라 고향을 떠나 살다가 7년 전에 낙향했단다. 고향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아야 살맛이 나기 때문에 돌아온 거였다. 고향이 복숭아로 유명하니 그는 그루당 7000원꼴을 들여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몇 년 전에도 7000원 들여 심은 복숭아나무 보상비가 얼만 줄 알아유? 4000원이래유. 기가 막혀서. 이의신청을 했더니 오히려 깎아버렸슈. 그래서 돈을 찾아오지도 않아유. 공탁 걸려 있슈. 내가 대책위다 뭐다 시위에 앞장을 서니까 미운털이 박힌 거쥬. 이런 법이 어딨슈?”

김씨가 회계사처럼 통계자료를 들이대며 자분자분 열변을 토하는 컨테이너 사무실 옆의 폐농가 앞에는 능소화가 잔뜩 피어 있다. 한여름, 작열하는 태양빛을 받으면서도 은근하고 끈기 있게 피어나는 꽃이 능소화 아니던가. 옛날에는 한여름의 귀한 꽃이라 해서 양반집에서만 심게 했던 꽃이 폐가 지붕을 덮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이채로운 게 다는 아니다. 논밭 매고 돌아오는 농부들을 은근한 멋으로 반기던 능소화도 행복도시를 위해 자취 없이 사라져야 한다. 능소화 아래 경운기 적재함 옆으로 ‘송원리 주민 생계 대책 보장하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펄럭인다.

“복숭아나무 이전비가 1200만원이래유. 그런데 이전비를 뽑아 보니 4000만원은 들어유. 하도 어이가 없어서 사람들한데 이렇게 말해유. 복숭아나무 값으로 12억원 받았다구유. 하도 화가 나서 건설청 들어갈 때는 술부터 찾게 된다니께유. 건설청 가면 보상비 얘기보다 욕이 먼저 나와유.”

◇남면 읍사무소 근처의 느티나무 아래에서 대평리 노인들이 더위를 피하고 있다.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연기군 사람들의 화제는 ‘어디로 떠나야 하는가’이다.

김씨는 도로변 자신의 과수원으로 슬금슬금 걸어가더니 담배 피우는 사람에게는 복숭아처럼 좋은 약이 없다면 잘 익은 복숭아 몇 개를 따다 내민다. 일손이 잡히지 않아 다 익은 복숭아도 따지 않고 내버려 두고 있는데, 그나마 ‘저 사람 보상비 받아 배가 불러 일도 안 하고 저렇게 빈둥빈둥거린다’는 얘기가 들릴까봐 길가에 있는 복숭아들만 조금 따냈단다. 복숭아가 풍작이라서 애써 딴 복숭아를 시장에 내가봐야 품값이 나올 둥 말 둥이란다.

송원리 사람들은 108가구에 280명 남짓이다. 대식구가 올망졸망 모여 살던 시대에서 비켜나 이제는 도시 가구 인구보다 적은 인구밀도인데 마을 입구의 표지석에는 ‘충효마을 송원리’라고 씌어 있다. 말하자면 아들 손자 며느리 등 예닐곱 명이 다복하게 살았던 마을이라는 뜻이지만, 한 가구에 세 명이 안 되니 농촌 해체의 기운은 송원리에도 퍼져 있는 셈이다.

“나도 이제 딸애를 대학 보내야 되는 나이유. 복숭아밭 이전비는 철거비가 아니라 이전비거든유. 이전할 곳 없다고 끝까지 이전하지 않으면 돼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유.”

나직하면서도 소신이 뚜렷한 김종선씨의 목소리가 과수원 자락에 퍼진다. 이쯤 되면 충청도 사람은 물러터졌고, 그 성정은 봉우리가 날카로운 산이 없어서 그렇다는 얘기는 다 헛말이다.

토지개발공사의 건설청 앞으로 가니 럭셔리한 청사 앞에 만장(挽章) 같은 깃발이 잔뜩 펄럭인다. ‘투기꾼은 누구인가. 농민인가 정부인가’ ‘송원 주민 무시하면 첫마을 사업 어림없다’ ‘주민 목소리 무시하는 건설청 해체하라’.

건설청이 들어서 있는 대평리 일대와 남면 읍내 어디를 가도 플래카드의 물결은 계속 이어진다. 한여름 볕에 논자락의 벼는 잘도 익어가는데 논두렁 곳곳에는 ‘억울해서 이대로는 못 떠난다’는 외침이 즐비한 셈이다.

건설청 앞을 서성이다가 남면 읍내로 들어서니 느티나무 고목 아래 노인들이 잔뜩 모여 앉아 더위를 피하고 있다. 농촌 경로당에서는 환갑 지낸 노인이 최연소에 속한다는 시대, 느티나무 아래의 노인들 중에는 환갑 언저리의 사람들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 역시 머잖아 고향을 떠나야 할 사람들이니 무슨 얘기를 나눌까는 들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들이 가야 할 곳이 ‘행복도시’인데, 지금 그들이 떠나갈 자리에 ‘행복도시’의 삽질이 시작된다. 폐가 앞의 능소화도 더 이상 볼 수 없을 터, 주인 없는 집을 뒤덮고 있던 능소화가 눈에 밟힌다.

 

신안군 자은도
서해바다 물결따라아침 햇빛 일렁이고…
 ◇한운리 임도에서 내려다본 일출 무렵의 자은도. 고깃배 한 척이 붉은 기운을 뒤로 한 채 항해에 나서고 있다.
전남 신안군청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1004 ISLAND’다. 천사섬이란 뜻이다. 언뜻 생각하면 1004개의 섬을 가진 곳으로 여겨지기 십상이지만, ‘진실’에 가깝다. 신안군은 3000 개 수준의 우리나라 섬 중에서 800개가 넘는 섬을 지니고 있으니 국내로 치면 섬의 약 25%에 가까운 독과점(?)에 해당되고,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1개 행정지역이 1000개 가까운 섬을 지닌 경우는 없다. 그나마 800여 개의 섬을 지니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수많은 섬들이 다리와 다리로 연결되어 섬의 수가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자은도의 명물로 꼽히는 분계 해수욕장의 여인송. 자은도의 몇몇 섬은 소나무숲이 방풍림 역할을 하고 있어 더욱 이채롭다.

그 중에서도 자은도는 우리나라 섬 중에서 11번째로 큰 매머드급이다. 하지만 섬은 텅 비어 있다시피하다. 한때 2만명에 이르렀다는 인구는 지금 2000여명에 불과한데 그나마 젊은 처자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넓디넓은 해수욕장은 아홉 개나 되는데 휴가철이 왔는데도 해변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다. 이만큼 한적한 동네가 있을까. 기네스 북에 오르고도 남을 일이다.

하긴, 그래서 자은도는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섬이니 이 한적함이야말로 복권 맞은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기도 하다. 곱디고운 외기 해수욕장에 들어선다. 역시 한밤중처럼 조용한데, 해변 저 앞에 사람의 움직임이 나타난다. 노인 두 명이 천막처럼 세워놓은 그물 앞에서 숭어를 잡아내고 있다. 자은도 사람들은 밀물 때는 물에 잠기고 썰물 때는 해변에 드러나는 그물을 양쪽 장대 사이로 걸어놓는데, 썰물이 되면 그물에 걸린 숭어를 잡으러 해변에 나오는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나온 노인 부부는 그물에서 떼어낸 숭어를 비닐봉지 속에 넣고 돌아갈 채비다.

“많이 잡으셨어요?”

“많이 잡기는. 이만큼이야.”

박원균씨(70)가 비닐봉지를 허리춤까지 들어 올려 보이는데 곁에 선 박씨 아내의 눈빛이 사납다.

“누군 줄 알고 이름을 알려주고 그래쌌소?”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박씨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저 그물, 엊그제 8만원 주고 사다가 쳤지라. 요거,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기도 모지러지라.”

◇자은도는 크고 작은 해수욕장 9개를 거느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 몽돌해변은 가장 작으면서도 가장 아늑한 원시의 공간이다.

그런 식으로 그물 치는 게 합법이냐 불법이냐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데 박씨의 아내는 미심쩍은 표정을 거두지 않고, 박씨는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으려고 숭어 몇 마리 잡는 게 무슨 문제냐는 듯 해명부터 하기 바쁘다.

“어서 갑셔잉?”

아내가 재촉하자 박 노인은 담배 한 대를 꺼내 물고 오토바이에 시동을 건다.

“내가 여그서 국민핵교 1학년 때 해방을 맞았지라. 6학년 때는 전쟁이 터졌뿌꼬. 맥어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 한다고 전함을 몰고 가는 것을 이 두 눈으로 직접 봤당게.”

“또 옛날 얘그. 어서 가더랑게요잉?”

박 노인은 오토바이 안장에 궁둥이를 얹고 아내가 뒤에 타자 액셀러레이터를 잡아당긴다. 오토바이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모래밭에 뒷바퀴가 빠진 것이다.

“내려서 밀어!”

◇자은도 외기리 주민 박원균씨 부부. 모래에 바퀴가 깊이 잠기는 바람에 오토바이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자 남편은 ‘밀어보랑게’를 외치고, 순박한 아내는 안간힘을 다해 밀어보지만 요지부동이다.

박 노인이 아내를 향해 툭 던지자마자 아내가 짐받이를 붙들고 안간힘을 써 보지만 오토바이는 요지부동이다. 할 수 없이 박 노인도 안장에서 내려선다. 그제서야 오토바이는 서서히 움직이고, 부르릉, 아내를 태운 박 노인이 해변을 빠져나간다. 박 노인의 아내는 남편 허리춤은 본 체 만 체 숭어 봉지만 꽉 끌어안고 있다.

외기 해수욕장을 나와 자은도에서 제일 먼저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는 한운리를 향해 간다. 길 옆으로는 대파밭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전국에서 대파와 양파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 섬이 바로 자은도다. 논이며 밭이며 가릴 것 없이 대부분 모래땅인 자은도에서 사람들이 대파 양파를 키우는 데는 일종의 벤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어느 해인가 대파 흉년이 들었을 때 자은도 대파 농부는 트럭 한 대에 2000만원이 남는 대박을 터뜨렸다. 트럭 한 대에 대파를 실어 보내면 중형 승용차 한 대 값이 남았던 것이다. 어느 해인가 대파 풍년이 들었을 때 대파 농부는 단돈 백만 원을 받고 트럭 한 대에 대파를 실어 보냈다. 인건비도 못 건진 ‘부도 농사’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은도 사람들이 대파 농사에 실패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경우의 수는 언제나 섬 밖에서 발생하는 셈이다. 그러니 자은도에는 사계절 내내 푸른 기운이 감돈다.

◇분계 해수욕장 입구 언덕에서 만난 흰염소들. 정작, 가장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대상은 바로 이렇게 놓아 먹이는 짐승들이다.

한운리 임도에 오른다. 자은도 임도는 바다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비포장 도로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서남해안에 자리하고 있어 일출은 일출대로, 일몰은 일몰대로 볼 수 있는 것도 한운리 임도에서의 값진 추억이다. 뿐이랴. 일자형으로 늘어선 소나무 숲이 방풍림 작용을 하는 한운리 해변은 썰물 때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노둣길 끝의 옥섬도 거느리고 있다. 임도 아래 곳곳에는 거의 원시 때 모습을 유지한 몽돌 해변과 자연동굴이 나타난다. 잔잔한 파도가 수천 년을 두고 철썩이며 만들어 낸 공간이다. 오죽 폼이 났으면 일제치하 때 일본은 이 몽돌 해변에서 수없이 돌을 실어 날랐을까.

한운리 임도는 몽돌 해변을 거쳐 외기 해변에 이르기까지 자은도를 끼고 빙빙 돌아간다. 4륜구동 자동차가 털털거리며 달리는 길에는 바다에서 길을 잃고 올라온 게들이 솔찮게 보인다. 장마전선을 타고 온 비바람이 몰아치지만 인적 드문 섬 일주의 멋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다. 그 멋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느림이다. 혹은 자연 그대로의 원시성이다. 백길 해수욕장 한 군데만 빼면 모든 해수욕장이 맨땅 그대로의 주차장이니 그게 곧 멋이다.

자은도는 암태도 안좌도 팔금도와 다리로 연결돼 있지만 네 개의 섬 중 유독 해변의 모래가 곱다. 해변만 그런 것이 아니다. 밭도 모두 모래 지층이다. 모래가 하도 고우니 한때는 해변 옆에 유리 광산이 들어섰을 정도였지만 고운 모래가 재산이라는 데 눈을 뜬 섬 사람들의 반대로 광산은 철수했다. 자은도의 콘텐츠나 다름없는 모래는 대체 어디서 생성된 것일까. 지도를 보면 자은도는 온전히 중국 쪽 서해를 향해 열려 있다. 그러니 수천 년 동안 중국 쪽에서 모래 바람이 날아와 자은도에 안착했다는 가정이 성립한다. 그 모래들을 잔잔한 파도들이 해변으로 밀어올려 해변을 만들고, 밭을 만들었다는 가정도 성립한다.

한운리에서부터 시작해 섬 전체를 아우르는 임도을 일주하고 나니 다시 비바람이 몰아친다. 서울살이를 접고 귀농해 텃밭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의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작물은 주인의 발짝 소리 듣고 큰다길래 밭에 물 주려고 했는데 비가 오니 참 잘됐네.”

 

전남 강진
광활한 차밭… 푸르름에 눈을 씻고
 ◇월출산 아래 장원 차밭의 한낮. 인부들이 땡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랑을 지나며 차나무를 관리하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먼저 달빛을 받는다는 월출산 천왕봉 아래 초록빛이 가득하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시야가 맑게 트이면서 가슴까지 시원한 느낌이 스며든다. 삼복 더위의 복판이지만 한순간 청량감이 쏟아져 들어와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구릉지에 광활한 차밭이 펼쳐져 있다. 뙤약볕을 견뎌야 하는 한여름의 여행길에서 이건 일종의 횡재에 가깝다. 드넓은 차밭 하면 보성 쪽만 생각하고 강진 일대에는 소규모 차밭만 있으리라 여기기 일쑤인 터에 강진 바다에서 가까운 곳에 3만358㎡(10만여평)의 녹차밭이 자리하고 있으니 푸르름에 눈을 씻으며 과문(寡聞)을 탓할 수밖에.

알고 보면 강진군 성전면은 차 보급의 1번지라고 할 만큼 오랜 역사가 있다. 그중에서도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것은 일제 때부터 차장수로 이름을 날렸던 이한영옹의 이야기다. 그는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에 거주하면서 어려서부터 자생 차 잎을 수확해 시장에 내다 팔았던 장본인이다. 처음에는 상표 없이 봉지에 넣어 장터에 나가 팔았지만 나중에는 ‘백운옥판차’라는 상표를 붙이고, 더 나중에는 차꽃의 도안까지 새겨 넣었으니 일찌감치 녹차의 브랜드 가치를 알았던 귀인임이 분명하다.

◇서각가 김성씨의 작업실 앞 정원에 있는 솟대 위로 여름 하늘의 짓푸름이 열려 있다. 김성씨는 찻집을 운영하면서 만덕산과 다산의 기를 받아 서각에 몰두하는 중견 예술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에게 차를 브랜드 상품화한 최초의 개척 상인이란 칭호를 붙여준다. 그 개척 상인의 체온이 남아 있는 곳이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월출산 경포대 계곡 아래의 장원 녹차밭이다. 예컨대 동네 슈퍼에서 언제나 살 수 있는 녹차 티백의 원료가 거의 장원 녹차밭에서 생산된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드넓은 차밭 고랑 사이를 지나며 직원들이 소형 절삭기를 밀고 다닌다. 옆으로 삐죽이 돋아난 잎들을 제거하는 이동식 톱으로 차밭 경관과 생육을 관리하는 것이다. 차밭 위로는 작은 풍차 모양의 바람개비들이 월출산에서 내려온 바람에 따라 휘휘 돌아간다. 전기를 일으키기 위한 것도 아니고, 방문객의 눈요기를 위한 것도 아니다. 서리가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한 방상(防霜)용 팬인데 얼핏 보면 차밭 풍광을 한층 돋보이게 해주는 설치 미술품처럼 보이니 그 또한 월출산과 어울려 하나의 아이콘처럼 작용한다.

차밭의 초록 향기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는데 이웃한 월출산 경포대 계곡 아래의 진입로를 따라 ‘텅텅텅’ 소리를 내며 일군의 바이크 족이 차밭으로 들어온다. 가죽 점퍼에 머플러를 두르는 모습이 멀리서 보기에도 프로 바이크 족임이 틀림없다. 햇살에 오토바이의 몸체가 광채를 번뜩인다. ‘텅텅텅’ 소리에 차나무들이 잎을 떠는 것 같다.

◇‘들꽃 이야기’ 입구의 이색적인 문패. 김성씨 일가족의 삶이 문패 하나에 올곧이 들어서 있다.

“오토바이가 멋있네요. 몇 ㏄짜립니까? 이거, 750㏄ 정도 되나?”

“하하. 1400㏄입니다.”

어이쿠, 실례를 해도 크게 한 셈이다. 1400㏄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에게 750㏄ 운운한 것은 3000㏄ 승용차를 타는 사람에게 ‘이거 중형차죠?’라고 물은 격 아닌가.

녹차밭 사잇길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담배를 한 대씩 나누는 그들 곁에 섞여들어 담배를 한 대 얻어 피운다. 담배를 끊는 중인데 공기 좋은 곳에 오니 담배 한 대 생각이 간절하다는 얘기처럼 좋은 핑계는 없다.

“그래, 이 좋은 오토바이를 타고 어딜 가는 중입니까?”

“아, 그냥요 여기저기 둘러보러 나섰거든요. 3박4일 일정인데, 전라도로 경상도로 왔다 갔다 하는 거죠. 여기서 순천으로 갔다가 7번 국도 타고 강릉으로 올라갈 겁니다.”

참 끌밋한 계획이다. 2륜 오토바이의 참멋은 큰길 샛길 가릴 것 없이 다 갈 수 있고, 언제든지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괜한 추억이 떠오른다.

“나도 한때는 효성스즈키 125㏄ 오토바이를 탔다 아닙니까. 그때는 그것도 비쌌는데….”

“허, 그러셨군요. 그런 오토바이도 있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바이크 족의 목소리에서는 감동의 느낌이 전달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1400㏄와 125㏄ 사이의 간격은 너무 멀다.

“우린 3박4일 동안 2000㎞ 정도를 달릴 겁니다.”

◇전국 일주에 나선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 동호회 회원들이 차밭 사잇길을 지나고 있다. ‘푸시롯’ 회원인 이들은 2000㎞를 달릴 생각으로 길을 나섰다고 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선 사람들은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 동호회 ‘푸시롯’의 멤버들이란다. 2000㎞. 경부고속도로를 두 번 이상 왕복하는 거리다. 그 거리를 국도 따라 종횡으로 달리는 바이크 족의 쾌감이야 느껴본 사람만이 알 일이다. 계곡이 나타나고, 평야가 나타나고, 바다가 나타나고, 간판 허름한 찻집이 나타나는가 하면 고찰이 나타나는 모든 길을 달릴 수 있는 것이다. 문득 효성스스키 125㏄ 오토바이를 타고 민통선 언저리를 질주하던 기억이 새롭다. 오토바이의 또 다른 매력 중엔 이런 것이 있지 않았던가. 뒤에 여자를 태우고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당기면 도리 없이 운전자의 허리를 꽉 붙들고야 마는. 여자를 태우기까지가 힘들지 일단 태우고 나면 ‘이 여자가 내 허리를 붙드는 강도만큼 나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착각의 자유이자 모터바이크족의 영원한 희망 사항이다.

그들처럼은 아니더라도, 차를 몰아 강진 앞바다를 향해 달린다. 지난 밤에 비바람이 거칠게 휩쓸고 지나간 탓에 하늘이 천연의 빛 그대로다. 파도가 낮게 출렁이는 바닷가 방파제 끝자락에는 ‘진입금지’ 표지판이 붙어 있는데, 방파제로 들어서는 초입의 원두막에서는 중년 부부가 수박을 깎아 먹고 있다. 원두막 아래 세워 놓은 승용차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보니 맞춤한 곳 있으면 무조건 쉬어가는 쪽을 택한 여행자인 모양이다. 하긴, 좋은 선택이다. 이웃하고 있는 장흥이 남성적이라면 강진은 여성적인 멋을 지닌 곳이니 여름 풍광 앞에서 수박 몇 쪽 베어 먹는 일은 무엇에 비견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강진 바닷가의 아름다움은 흔히 여성미로 얘기된다. 한차례 비바람이 지나간 덕분에 강진 바닷가의 아름다움이 하늘에서부터 물까지 그야말로 환상이다.

차밭과 바다를 지났으니 다산초당에 들러야 마땅한 일인데, 초당 진입로 앞의 찻집 ‘들꽃 이야기’가 발길을 잡는다. 찻집이기는 하지만 명실공히, 서각가 김성씨의 작업실이기도 한 공간이다. 김성씨는 얼마 전 인천 신세계갤러리에서 ‘산중에서 홀로 새기다’ 전시회를 열었는데,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두 번이나 완각한 ‘칼잡이’ 장인이다. 무안 사람인 그가 다산초당 아래에 찻집을 내면서 작업실로 공용하고 있는 이유는 한 가지, 기(氣)로 새기기 위해서란다.

그런데 ‘들꽃 이야기’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김성씨의 서각도 아니고, 차맛도 아니다. 초입에 걸린 문패가 단연 압권인데,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서각가 김성 들꽃주인 노정화 양념딸 김수미 청암이대 김형준’. ‘청암이대’는 김성씨의 호에서 따온 것이려니 쉽게 짐작이 가는데 ‘양념딸’은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노정화씨에게 슬쩍 말을 건넸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재미있다.

“아, 그거요? 우리 집안에 딸이 굉장히 귀해요. 낳았다 하면 아들인데, 내가 딸을 낳았더니 시어머니께서 양념 같은 딸이라고 노래를 하시더라구요. 우리 양념딸 우리 양념딸….”

차맛 보는 것보다 양념딸 이야기를 듣고, 서각가 김성씨가 가꾼 ‘들꽃 이야기’의 정원을 둘러보는 것이 훨씬 의미롭다. 문득 고개 들어 보니 정원 한쪽에 솟대가 솟아 있다. 다산초당에는 아직 오르지 않았는데, 멀리 기운찬 쪽빛 하늘이 솟대에서부터 이미 열려 있다.

 

경기 광주시 퇴촌면 분원리
조선백자 마지막 가마터 숨결 서려
 ◇특별한 구조물을 배제한 도자기 가마터. 조선 시대의 마지막 가마터였던 이곳은 학교 운동장으로 쓰였다가 문화재가 발굴되면서 공터로 보존되고 있다.
팔당호 물결이 내려다보이는 분원초등학교 운동장에 빈 그네 몇 개가 주인을 기다리며 멎어 있다. 아이들의 궁둥짝에 닳고 닳아 앉음판이 매끈하기 이를 데 없다.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산 쪽으로 난 언덕길을 따라 걸어간다. 발 밑 보도 블록엔 낯선 글씨들이 음각돼 있다. 청화백자, 사기….

산자락과의 경계에 둘러쳐진 울타리 주변에는 보기 드문 인동초가 만개했다. 겨울을 이겨내고 피는 꽃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이쯤 되면 한여름 뙤약볕을 자양분 삼아 피어나는 꽃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울타리에는 작은 표지판이 걸려 있다. ‘이 지역은 문화재 보호 구역으로서….’

작은 언덕 위는 초록 광장이다. 밋밋해 보이지만 저 앞으로 코발트빛 건물이 줄지어 선 전나무들과 함께 들어서 있다. 바로 130년간 지탱해 왔던 조선시대의 마지막 가마터를 상징하는 분원백자관 모습이다.

광주시 퇴촌면 분원리의 ‘분원리’는 꽤 의미심장한 행정지명이다. 조선시대 궁중의 부엌살림을 관장하던 곳이 사옹원이라는 사실은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아는 터, 사옹원은 부엌살림과 함께 궁궐에서 사용하는 그릇을 만드는 일도 맡고 있었다. 당연히 자기를 굽기에 적당한 곳을 물색해야 했는데 퇴촌면 분원리는 당시 최고의 자기 제작 여건을 갖춘 명당이었다. 한양으로 자기를 실어나를 물길이 좋으니 교통 여건 완비, 흙이 좋으니 도자기 원료 완비, 나무가 많으니 도자기 구울 땔감 완비. 사옹원은 퇴촌면에 분원을 설치했는데 그 지명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

◇백자관 안에 도자기 만드는 과정을 재현한 모형들이 전시돼있다.

분원리에서도 분원초등학교와 분원백자관 주변은 1752년부터 1883년까지 가마터를 유지해 온 조선시대의 마지막 가마터다. 광주시의 6개 면에서 450여 년간 가마터가 운영됐지만 그 숨결을 끝까지 기억하고 있는 자리인 셈이다.

“분원백자관은 원래 분원초등학교 자리였죠. 분원초등학교가 한때는 학생이 1000명 가까이 되는 큰 학교였는데 지금은 100명이 될까 말까죠. 학교가 작아지면서 교사 한 동을 분원백자관으로 재건축한 겁니다.”

역사를 전공하고 분원백자관에서 해설사로 일하는 임영미씨의 눈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럴만도 하다. 분원백자관은 여느 도자기 전시관과는 좀 다르다.

분원백자관은 단지 백자전시관만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건축가 이종호는 백자관을 설계하면서 몇 가지 키워드를 이곳에 적용시켰다. 초등학생들이 떠난 교사동을 철거하는 대신 온전히 살리기로 했다. 건물 외관을 살린다는 것은 추억을 살리는 것과 같은 일, 교사동을 살리기 위해 그는 철골을 세웠다.

◇전시관 안에 설치된 분원리 지질 원형 설치물과 사기 파편. 분원리 일대에서는 땅을 파면 지금도 사기 파편이 많이 나온다.

그의 또 다른 키워드는 도자기였다. 그는 외벽에 코르텐 강판을 썼다. 코르텐 강판은 시간이 흐르면서 녹이 생기지만 녹층이 벽면을 보호하는 저합금강이다. 이종호는 바로 그 점을 보았다. 조선시대의 철화백자에 그 맥락이 있었던 것이다. 검은 철분이 적갈색으로 변해 철화백자의 멋으로 태어난다는 점을.

“모르는 분들은 분원백자관에 돈이 없어서 외벽 칠도 못한다고 짐작하기도 하는데 사실은 조선백자를 은유하는 건축 정신이 깃든 겁니다. 철화백자운룡문호라는 도자기가 10여 년 전에 842만 달러에 경매됐다는 거 기억하시죠?”

맞다. 1996년 미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철화백자운룡문호가 당시 돈으로 99억 원에 팔려나갔던 것은 장안의 빅 뉴스였다. 그 도자기의 ‘철화’는 코발트를 뜻하는 것으로 도자기를 구우면 청색이 된다. 구리를 쓰면 붉은색이 되고, 산화철을 쓰면 고동색이 되는데 바로 코르텐 강판이 고동색이다.

◇분원초등학교 운동장 한켠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는 그네틀. 분원초등학교는 유서깊은 역사를 자랑하지만 조선시대의 마지막 가마터를 없애려는 일제의 복선이 작용한 곳이기도 하다.

백자관 안으로 들어선다. 철화백자운룡문호 재현품이 전시돼 있다. 99억 원에 팔려나간 도자기의 값어치는 화려한 데 있는 게 아니다. 조선백자의 가치는 질박한 가운데 결백하고 순결한 빛의 구현에 있는 법, 철화백자운룡문호 역시 마찬가지다. 국내에서도 최고가로 경매된 도자기는 화려한 고려청자가 아니라 조선시대의 철화백자운룡문호이니 진정한 화려함이란 외관의 빛이 아니라 내적으로 감추어진 빛인 셈이다.

백자관 벽면의 한쪽에는 분원리의 지질과 사금파리가 원형에 가깝게 설치돼 있고, 바닥의 강화 유리 아래에는 분원리에서 출토된 도자기 파편들이 전시돼 있다. 전시관이지만 도자기의 탄생과 파기 과정이 리얼하게 재생된 공간이다. 왕실에서 쓰기 위한 그릇으로 작용하기 위해 진품으로 태어난 도자기보다 파기되는 도자기가 훨씬 많았으니 전시실에는 파기만 전문으로 담당하는 사람의 미니어처까지 재현돼 있다.

도자기의 예술성이야 한없이 높아졌지만 그 통에 산하의 나무들이 잘려나가고, 민초들은 가난한 삶에 허덕였으니 분원백자관은 그런 시대에 대한 은유의 산물일 수도 있다.

백자관 앞, 학교 운동장으로 쓰였던 공간은 이제 초록의 빈 터이다. 한여름 바람도 이곳에 이르면 잠시 쉬었다 가는 공간이고, 해설사들도 짬이 나면 숨 돌리러 나오는 공간이다. 빈 터이지만 땅 아래에는 아직도 도자기 파편들이 무수히 묻혀 있는 역사의 공간이기도 하다.

◇분원초등학교의 교사동 하나를 리모델링한 분원백자관 전경. 일본인들이 심은 전나무도 그대로 두었고, 초등학교의 겉모습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내부 공간을 바꾸는 건축정신을 발휘했다.

“분원초등학교는 사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세운 거예요. 이곳이 조선시대의 관요 터였다는 것을 알고는 일부러 기를 죽이기 위해 학교를 세운 것이지요. 그 후로 일본의 싸구려 사기 그릇이 넘쳐나서 격조 높은 우리나라 도자기가 명맥을 잃게 된 거구요.”

임미영씨의 손에는 도자기 관련 책이 꼭 쥐어져 있다.

백자관에서 나와 분원리 마을을 기웃거린다. 텃밭 옆 평상에서는 붉은 고추가 몸을 말리고 있고, 평상을 가로지른 빨랫줄에는 농부의 티셔츠와 바지가 널려 있다. 어느 농가의 대문 앞에는 우편으로 배달된 신문이 띠지조차 벗겨지지 않은 채 빗물에 젖어 있다. 여름 농사에 바쁜 농군 입장에서는 새로운 소식이 그렇게 궁금하지 않을 게 뻔한 노릇이다.

◇분원백자관 옆 울타리에 피어난 인동초. 인동초는 겨울을 이겨내고 봄에 피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여름에 핀다.

면사무소 앞을 지나 남한강 가로 나선다. 마을 안쪽은 조선시대와 다를 바 없이 고즈넉한데 강가로 나서니 갑자기 현란한 간판들이 눈길을 잡아 끈다. 분원리 유래가 사옹원의 분원이 설치됐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이곳이 붕어찜으로 유명하다는 것은 미식가들의 ‘상식’에 가깝다. 그 간판들 앞에서 어리둥절해 있는데 어느 식당 앞에 걸린 기막힌 플래카드 한 장이 보인다. 이름하여 ‘에어컨을 기절시킨 할머니 붕어찜’이란다. 플래카드의 문구는 아마도 겨울이 되면 ‘동장군도 기절시킨’으로 바뀔 터인데, 그 플래카드의 해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폭염은 계속된다. 도자기 문화가 살아 있는 조선시대로 잠시 소풍을 갔다 왔다가 눈을 뜨니 다시 현실, 여름은 진행형이다.

 

강원도 영월
동강에 흐르는 '사진의 향기'
사람은 오감(五感)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므로 정직할 수 있다. 아니다. 그러므로 착오를 일으킬 수 있다. 그 반대편에 카메라의 눈이 자리해 있다. 카메라의 뷰파인더는 오감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냉철하다. 그러므로 기계적 철학만으로 수용되는 피사체는 에스컬레이트된 인간의 감정을 절제시켜 지구상에 유일한 리얼리티의 세계를 가져다준다.

한 소녀가 흑백사진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호기심 가득한 눈길을 던진다. 많은 사진 중에 제일 관심이 가는 사진이란다. 흑백사진의 존귀함을 이미 알아 버린 소녀는 강원도 태백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 박종호씨의 딸 정선(12)양이다. 열한 살, 일곱 살짜리 두 동생은 사진에는 관심없이 전시장 여기저기를 뜀박질하며 놀기 바쁘지만 정선양은 줄곧 작품들 앞에 서서 진지한 시선으로 사진을 해석하기에 바쁘다.

“나중에 사진작가가 되려고?”

“아뇨.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누구 사진을 좋아해?”

정선양은 옆에 서 있는 아빠를 힐끗 올려다보더니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음, 우리 아빠 사진요.”

초등학교 5학년 소녀의 눈을 호사시킨 공간은 강원도 영월에서 열리고 있는 ‘2007 동강사진축제’(8월 3∼22일)다. 2002년부터 시작됐으니 올해가 여섯 번째 축제. 이 축제는 작품 걸어놓고 사진 마니아들의 발길을 기다리는 단순함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다. 내부 공간 영월은 ‘박물관의 고장’이란 말이 낯설지 않게 한국 최초의 공립 사진박물관이 자리한 곳이니 사진을 보고, 카메라를 만지고, 경험할 수 있는 자리가 동강사진축제다.

◇아버지를 따라 사진 전시회에 나선 박정선양. 초등학교 5학년이지만 박재성씨의 흑백사진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작품 전시를 박물관에 한정하지 않고 영월 학생체육관, 초등학교 운동장, 대로변, 아파트 옥상 외벽으로 확대했으니 그야말로 영월읍 어디를 가나 사진 천지다. 사진뿐인가. 디지털 카메라에 밀려났다가 다시 필름 카메라로 유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을 반영하듯 한쪽에서는 중고 카메라 벼룩시장이 열린다. 예부터 ‘유배지의 고장’으로 불린 영월이 사진 콘텐츠의 고장이 됐으니 한마디로 멋지다.

동강사진박물관 전시회 명칭은 ‘바라보기-상상하기’. 160년 사진 역사의 의미망을 적확하게 도출해 냈다는 느낌은 바로 ‘상상하기’에서 발견된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끝난다면 사진의 역할은 거기에서 멈추는 법, 작품을 감상하고 나서 유리 전시장 안의 갖가지 카메라를 들여다보노라면 호흡을 같이한 카메라 주인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전시관 밖에서는 등산을 마치고 온 사람들이 벤치에 배낭을 내려놓고 사진 얘기로 더위를 식히고 있다. 카메라 제조회사의 이벤트용 대형버스 위에는 1000만원이 넘는 렌즈가 설치돼 구매욕을 자극한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스린다.

“나는 저런 렌즈 들고 다니다가 몸살날까봐 안 사는 거야. 암, 내 체격엔 너무 무겁지.”

◇관풍헌에서는 영월 사람 29명의 초상을 전시하는 ‘사람들의 초상’전이 열리고 있다. 29명은 모두 이웃과 다름없는 서민들이다.

박물관에서 나와 학생체육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거기, 영월사람들이 낯선 객을 반긴다. 전시 작품 중에서도 영월의 사진가들이 영월군 직동면 직동리 사람들의 생활상을 담은 사진들이 눈길을 끈다. 밭을 매는 백발의 할머니, 일손을 멈추고 밭뙈기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 노인 부부… 거의 모든 사진들이 전하는 메타포는 주름살인데, 거기에서 흙과 살아가는 영월사람들의 향기가 느껴진다.

직동리는 ‘핏골’로 불릴 정도로 애환이 많은 곳. 한국전쟁 전에는 빨치산에 의해 우익 청년단 백여 명이 목숨을 잃은 데다 호환을 당한 사람들이 많아 지금도 곳곳에 호식총(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의 무덤에 떡시루를 씌우고 삼베할 때 쓰는 쇠꼬챙이를 꽂아놓은 곳)이 있을 정도로 골짜기가 깊은 대표적인 화전민 마을이었다. 그런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찍혀 나온 사진 앞에 서면 문득 문명의 이기 앞에 사족을 못 쓰고 사는 삶이 부끄러워진다.

◇영월이 사라진 꿈꾸며 개최하는 동강사진축제는 2002년부터 시작돼 올해가 여섯번째다. 매년 여름 열리며 올해는 오는 22일까지 계속된다.

전시장 입구에는 중고 카메라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한때는 재산 목록 1호로 장롱 깊숙이 보관되곤 했을 카메라들의 몸체는 주인의 온기를 다 기억하고 있지만 정작 카메라는 새로운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영월초등학교로 발길을 옮긴다. 일명 지붕 없는 전시관이다. 학교 주차장 자리에 사진기자 6명이 내놓은 보도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전시회 명칭은 ‘신문사진에 반하다’. 화려한 조명은 없지만 초등학교 교사 벽에도 사진이 걸리고, 학교 밖 아파트 옥상 벽에도 사진이 걸렸으니 이만하면 영월 외에서는 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사진전 자체가 사진의 대상이 될 수도 있으니 이만하면 성공작이다.

읍내 관풍헌으로 자리를 옮긴다. 관풍헌은 550년 전 단종이 사약을 받고 승하한 곳. 관풍헌 벽에 영월사람 29명의 초상이 걸려 있다. 그들의 초상이 의미 있는 것은 잘나고 못난 것과 상관없이 바로 이웃이라는 점. 집배원, 택시 운전사, 학생, 식당 주인, 양어장 주인이 역사적인 공간의 벽체에 자리하고 있으니 사진전은 곧 ‘민중의 힘’에 대한 은유로 작용한다.

영월읍 곳곳에 사진의 향기가 배어나게 된 것은 솔직히 동강의 힘이다. 영월의 수해 위험 때문에 댐 건설이 추진됐지만 환경단체는 물론 수해 당사자인 영월사람들조차 동강의 자연미를 위해 댐 건설을 반대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오늘의 자연미 넘치는 동강은 국민이 지켜낸 강이기도 하다.

◇영월초등학교 주차장에 마련된 신문기자들의 ‘신문사진에 반하다’전. 학교 밖의 아파트 옥상 벽면에도 사진이 걸려 사진전의 이색 풍경을 연출한다.

호우 경보가 내려진 가운데 간밤에 100㎜가 넘는 빗줄기가 쏟아진 탓에 동강은 황톳빛이다. 황톳빛 물결 위로 고무보트 위에 몸을 실은 사람들이 스릴을 즐기며 내려온다. 문산리 래프팅 출발장에서는 교관의 지시에 따라 쪼그려뛰기와 맨손체조로 PT체조를 하는 선남선녀들의 모습이 보인다. 저마다 패드 한 개씩을 지급받고, 노젓는 법을 배우는 모습에서는 동심이 느껴진다.

“양현 앞으로 하면 패드를 물 속에 넣고, 하나 둘 다음에 셋 넷 해가며 힘차게 패드를 당기는 겁니다. 알았습니까아?”

“네에.”

“복창 소리 봐라. 알았습니까아?”

여름 한철 래프팅 수입으로 대목을 올리는 사람들은 어느새 유격 조교 못지않게 노련한 교관이 됐고, 동강을 찾은 사람들은 초단기 교육을 받고 동강의 물결에 몸을 싣는다. 황톳빛 물결, 출렁거리며 여름을 지나는데 그 물결 위로 사진 몇 장이 함께 인화된다.

 

강원도 원주 고산리·주포리

여름 늦자락 노랗게 물들인 해바라기 천지

여름과 가을의 갈림길은 단 두 가지, 해바라기의 만개와 잠자리의 저공 비행이다. 처서가 지나는 순간 여름꽃들은 하나 둘 지고, 해바라기는 드높아진 하늘 아래 노란 물을 들인다. 잠자리는 황금 들녘을 누비며 짝짓기에 분주한 시간을 보내는데, 녀석들은 짧은 가을이 저물면 자신들의 생도 다한다는 것을 바람결을 통해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까 설왕설래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지만, 시골 들녘의 사람들은 오히려 무심하기 이를 데 없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농사 짓는 사람들의 삶에 그리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을 수십 년 동안 체득해 왔기 때문이다.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의 해바라기 축제 마당에 가니 그런 느낌이 왈칵 다가온다. 산자락 아래 1만여 평의 비탈진 밭에 해바라기가 가득 들어섰다. 하지만 사람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우리 마을에서 처음으로 준비한 행사거든요. 홍보에 애쓰지 않았는데도 문의 전화는 많이 와요.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안내해야 하는데 요즘 복숭아 따는 철이라.”
마을 이장 이병규씨(43)가 슬그머니 다가와 앞뒤 사정을 설명하면서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농촌 마을들이 특성화 작업을 하다 보니 고산리 사람들도 생태마을 만들어 시범 마을로 지정받아 보자며 팔 걷어붙이고 나섰단다. 농촌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지천의 해바라기 풍경을 보여주고, 해바라기 씨를 받아 팔면 일거양득 아니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이다. 아무렴, 맞는 말이다.
◇주포리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처음 만나는 방호벽의 벽화. 벽화를 그린 어린이들의 이름이 씌어 있다.

야트막한 동산을 거닐며 보니 해바라기가 가득하다. 동산 아래에는 비닐 하우스용 파이프를 이용해 조롱박 터널을 만들었다. 더위도 식히고, 조롱박 구경도 하라는 의미인데 그게 다는 아니다. 유치원생들이 찾아오면 해바라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크레파스를 잔뜩 사다 놓았고, 잠자리 채집 프로그램을 운영하려고 잠자리채도 수십 개를 갖다 놓았다. 이런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동기가 궁금해 물으니 이 이장의 말에 막힘이 없다.
“직장 생활하다가 농사만 전업한 지 12년 됐고, 이장 맡은 지 4년 됐거든요. 그래도 명색이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는데 마을을 위해서 뭐라도 해봐야잖아요.”
“아, 대학원 나오셨다고요? 지금 학력 속이는 거 아니죠? 요즘 학력 속이면 큰일나요.”
이 이장은 다시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더니 ‘속일 게 뭐 있냐, 나는 그저 그런 지방 대학 나왔을 뿐’이란다. 그런 그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해바라기 마을을 만드는 데 투여한 예산은 달랑 1500만원이다. 고산리의 인적 자원이라야 108가구에 주민이 322명이니 가구당 평균 15만원 안팎으로 출자한 셈이다. 농촌 살림에 현금 투자하고, 해바라기 심는 데 노동력 투자했으니 그만하면 경영학 전공한 사람의 수완이 나름대로 성과를 거둔 셈이다.
조롱박 터널 안으로 들어서니 유치원 아이들이 그려놓고 갔다는 그림들이 눈에 띈다. 귀찮아서 대강 그린 그림, 해바라기의 리얼리티를 살려 정교하게 그린 그림, 가로 세로로 줄만 죽죽 그은 그림…. 유치원생들의 짓궂은 크레용 자국을 보노라니 웃음이 나온다. 그 그림들을 터널에 걸어놓은 뒤 25일에 입상작을 발표할 예정이라니 녀석들은 얼마나 밤잠을 설칠 것인가.
◇고산리 해바라기 축제를 여는 데 앞장선 이병규 이장. 보기 드물게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원주시 최연소 이장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왼쪽)
◇손주완 목사가 17년 전부터 일군 공동체 안의 교회. 이 공동체에 들어서면 갖가지 아름다운 조형물들이 마음의 평안을 준다.

동심이 우러나고, 마을 사람들의 진정성이 묻어나지만 냉철하게 둘러보니 해바라기 축제 마당치고는 좀 밋밋하다.
“이래 가지고는 흑자 내기 힘들걸요?”
“그렇죠? 올해는 준비가 좀 모자랐어요. 올해 처음 하는 거니까요. 뭐, 내년에는 준비를 착실히 해서 홍보도 많이 하고 그럴 겁니다.”
마을 이장은 여유만만이다. 이장 직위에서 쫓겨날까 걱정돼 물어보니 자신이 원주시에서 최연소 이장이란다. 게다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논이 1만8000평에 복숭아 밭도 있으니 별 걱정 없다는 투다. 마을 사람 위해 마케팅 기법을 도입한 최연소 이장을 누가 쫓아낼까. 여유만만인 이유를 알 법하다.
복숭아 먹고 가라는 말을 뿌리치고 귀래면 쪽으로 길을 잡는다. 귀래면 주포리 황산마을은 일찌감치 정보, 생태, 전통을 한데 묶어 농촌마을의 새로운 콘셉트를 성공시켜 주목받은 곳이다. 마을 입구에는 세계 각국의 국기가 새겨진 기둥과 솟대를 세웠고 개울 옆의 진입로 변에는 아이들 이름을 실명화한 벽화까지 설치했다. 또 다른 설치물은 마을 안쪽의 산자락 옹벽에 달았다. 찌그러진 양동이에는 ‘꿈은 용기를 만든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개미 천 마리가 모이면 맷돌도 든다’는 글귀도 있다. 전자는 수긍할 수 있지만 후자는 엄청난 과장법이되, 맞는 말이긴 하다. 맷돌을 종이로 만든다면 개미 천 마리가 그까짓 종이 맷돌을 옮기지 못하랴. 모든 윤택함은 발상의 전환에서 비롯되는 것 아닌가.
◇주포리 산자락 아래, 깨밭 및 잠자리와 역광의 공존. 잠자리의 형체가 분명치 않지만 녀석들에게는 지금 이 시기가 가장 황홀하다.

황산 마을을 오가며 보니 교회 하나가 눈에 띈다. 형용사를 넣어 만든 교회 이름은 처음인데, 이름하여 ‘쉴 만한 물가 교회’다. 이름은 또 있다. ‘작은 예수 공동체’, ‘연민 농장’이 그것이다. 연민은 ‘聯民’에서 가져왔으니 꽤 의미심장한데 17년 전 손주완(45) 목사가 작은 땅뙈기를 마련해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었단다. 17년 전이면 나이 서른이 되기 전의 목회자가 오늘날의 고령화 사회를 예측하고 노인 복지 시설을 만들었다는 뜻이 된다. 노동력이 있는 노인들은 잠깐이나마 흙에 손 묻히고 일할 기회를 얻고, 몸이 아픈 노인들은 봉사자들의 힘을 빌려 휠체어를 타고 바람을 쐴 수 있으니 어쩌면 가장 바람직한 공동체가 시골 마을에 형성된 것이다.
“나도 이 다음에 늙으면 이곳으로 와야겠네요. 받아줄 거죠?”
손 목사는 대학원으로 공부하러 간 탓에 공동체를 지키는 부인에게 물으니 그는 소녀처럼 까르르 웃는다.
“후원금 많이 내고 오세요. 카메라도 좋고, 돈 많이 버실 것 같은데요.”
돈 많이 벌 것 같다?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리 가난하지도, 그리 부유하지도 않은 작가의 삶을 시시콜콜 얘기해 봐야 선뜻 이해되지 않을 것 아닌가.
손 목사의 부인은 그래도 손님인데 뭐라도 대접해야 한다며 냉커피를 내온다. 백발이 성성한 몇몇의 허리 굽은 노인들이 농장 주변을 산책하고 있다. 곁에서는 물소리 들리는데 손 목사의 부인이 하소연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농촌 공동체가 발전하려면 마을 사람들도 바뀌어야 하는데 괜히 어깃장 놓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래서 이 마을에도 분란이 있었는데….”
자세히 안 들어도 뻔한 얘기다. 생태 마을 만든다 어쩐다 하면 그게 잘 될 것 같냐며 비아냥거리다가 막상 잘 돼나가면 심통을 부리는 사람이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농장 겸 공동체 겸 교회를 나오니 잠자리들이 깨밭 위에 가득하다. 녀석들, 그물무늬 날개가 닳도록 신나게 허공을 맴도는데 저만큼 가을이 와 있는 게 실감난다. 고개 들어 보니 어느새 하늘이 잔뜩 높다. 시간을 이길 장사는 없는 법, 쉴 만한 물가 교회 곁에서 가을을 영접한다.
 
‘나무 뿌리’ 머리 산발한 채 우뚝 선 장승 ‘파안대소’
전북 순창군 북흥면 추령 장승촌
  • ◇추령 장승촌의 다양한 장승들. 나무의 뿌리를 하늘로 향하게 한 모습에서 발상의 참신함이 보인다.
    가을에는 굽이진 길마다 차들이 빼곡히 들어차는 내장산 가는 길, 그러나 지금은 한적하기 이를 데 없다. 겨울 산행보다는 단풍구경이 윗길인 듯싶은데, 그래도 내장산 허리를 감아 도는 추령에 다다르면 헐벗은 나무들의 을씨년스런 모습에 안타까운 느낌이 절로 파고든다. 추령을 오르기 전, 내장사의 풍경 속에는 까치밥으로 남겨둔 주황빛 감들이 부처의 가르침을 받아들었을 때보다 황홀해 거의 무아지경이었다. 대웅전에 들어서기 위해 벗어놓은 털신의 모습도 경건해 보이고, 텅 빈 극락전의 붉은 방석 역시 경건해 보였지만 주렁주렁 매달린 감보다 아름다울 수 없다. 그게 다 자연의 이치가 가져다 주는 황홀경이다. 꽃이란 꽃은 모두 져버렸는데, 꽃보다 아름다운 빛을 내고 있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으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겨울의 매력은 바로 이런 것이다. 미처 예측하지 못한 진경은 몇 그루의 감나무에서 생성되는 것, 절을 찾은 사람들 역시 옷깃을 곧추세우면서도 감탄사를 뱉기에 바쁘다.

    내장산 추령은 내장사에서 나와 순창 쪽으로 가는 고갯길로 이어진다. 내장산의 신선봉은 해발 763미터, 등산객들에겐 만만한 높이지만 등산에 취미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까마득한 높이다. 자동차가 지날 수 있는 추령 단풍고개의 해발은 370미터, 액셀러레이터만 밟으면 될 것 같지만 여간한 드라이버가 아니면 혀를 내두를 만큼 S자 난코스가 계속 이어진다. 눈이라도 내리면 옴짝달싹 못하고 갇히기 십상인데, 맑았던 하늘에 구름이 잔뜩 몰려들더니 진눈깨비 몇 점이 차창에 날아든다.
    ◇장승이 있는 곳에는 솟대가 있고, 솟대 있는 곳에 장승이 있는 법이다.

    단풍고개 정상에 이르니 왼편에 장승촌의 모습이 드러난다. 저마다 키가 다르고, 모습이 다른 장승과 솟대가 겨울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다. 장승은 예부터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그 의미망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게 사실인 터. 그러므로 천하대장군, 상원대장군으로 표시되기 일쑤인데 추령의 장승들은 그런 획일성에서 벗어나 있다.

    추령 장승 마을에 들어서 안쪽으로 옮겨가니 거기 십이지신상 탑이 보이고, 탑을 둘러싼 장승들이 소·닭·쥐·뱀·말·양·원숭이 등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말 하나 마나이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 각각의 동물 모습을 한 장승들 앞에 서니 문득 두 동물의 모습이 떠오른다.

    2007년은 정해년(丁亥年)으로 돼지띠이므로 눈앞에 닥친 2008년은 십이지상의 첫 번째인 무자년(戊子年)으로 돌아가 쥐띠 해 아닌가. 황금돼지해 운운하는 소리에 거리의 상점마다 금빛 돼지저금통이 즐비했던 연초의 풍경이 저절로 스쳐간다. 그 많은 황금돼지 저금통에는 얼마나 많은 동전들이 들어가 쌓여 있을까.
     
    순창 장승촌에서 십이지의 동물 모습을 한 장승들은 저마다 익살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돼지는 넉넉하게 살찐 볼에 눈초리가 잔뜩 치켜올라간 모습이고, 미구의 주인공이 될 서생원은 양 볼에 수염 세 가닥씩을 매단 채 목에 리본을 매고 있으니 곳간 곡식을 축내는 동물이 아니라 강아지처럼 거실 한쪽에 키우고 싶은 애완 쥐의 형색을 하고 있다.
    ◇추령 아래의 내장사 극락전 뒤편에는 까치밥으로 남겨둔 감들이 겨울풍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왼쪽)
    ◇장승촌의 십이지간상 중 쥐 모습의 장승. 2008년은 무자년(戊子年)으로 쥐띠 해이다.

    이런 장승촌이 순창에 들어서게 된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장승의 민속학적 의미를 대중들이 곱씹게 하려면 해학적 의미를 곁들인 축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순창군에서 깨달은 것이다. 하필이면 왜 순창에서? 순창의 추령은 풍수지리적으로 북쪽에 내장산, 서쪽에 백양산, 남쪽에 강천산을 거느린 좌청룡우백호의 명당으로 꼽혀 온 곳이다. 게다가 전국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11기의 장승 중 7기의 장승이 전북, 그 중의 2기가 순창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장승촌’ 콘텐츠의 당위를 이끌어내는 데 한몫 했다.

    “장승 이름들이 참 특이하네.”

    찬바람에 몸을 맡긴 채 수백 점의 장승을 둘러보던 사람들이 한두 마디씩 내뱉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 장승들은 ‘천하대장군’ ‘상원대장군’ 등의 전통적 작명에서 비켜나 있다. 예컨대 ‘해맞이 대장군’도 있고, ‘해바라기 대장군’도 있으며, ‘개미와 베짱이 대장군’도 있다. 장승의 본래적 의미를 훼손한 것 아니냐고 넉장거리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꼭 그렇게 볼 일은 아니다. 개성 있는 장승들과 조우하고 돌아서면 장승의 의미를 다시 저작해 보기 마련이니 일단은 호기심을 자극하고 볼 일이다. 십이지신상을 장승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 역시 그런 차원이니 이 또한 장승의 민속학적 의미를 공유하는 단서로 맞춤하다.

    장승공예가 윤흥관씨가 추령 마을에 터를 잡은 10여 년 전부터 유명해진 추령 장승촌에는 장승만 있는 게 아니다. 울퉁불퉁한 장대 위에 각양각색의 새들이 올라앉아 있다. 솟대다. 솟대가 무엇인가. 솟대는 섣달 무렵 새해의 풍년을 기원하며 장대에 볍씨를 매달아 놓았던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고, 마을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장대 끝에 용 모양을 매단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장대 위에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의 솟대로 변화돼 온 것인데, 솟대와 장승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은 겨울 진경으로 손색이 없다. 
    ◇하나의 장승이 우뚝 서기 위해서는 나무를 자르고, 대패와 끌의 손길이 수없이 가야 한다.

    짱짱한 바람이 휘몰아치는 탓에 인적이 드물기는 하지만 전통 수호신으로서의 근엄함과 해학적인 모습을 갖춘 장승, 날렵함을 뽐내는 솟대가 한 해를 보내고 맞는 절기의 심사를 어루만져 주기 때문이다.

    장승과 솟대들 사이의 움막 마루에는 호박 한 덩이 놓여 있고, 다른 한켠에는 얼기설기 지어진 토끼장이 자리해 있다. 토끼 한 마리가 마른 배추잎을 뜯어먹다가 인기척에 놀라 쏜살같이 집 안으로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농가 뒷마당 쪽으로 가보니 얼굴 표정이 완성되지 않은 통나무들이 길게 누워 있다. 체험 학습용으로 준비된 대패와 끌, 톱 등의 연장도 즐비하다. 그 주위로 해발 370미터를 휘감는 바람이 날을 세운 채 몰아친다. 하늘에는 어쩌다 푸른빛이 나타날 뿐 곧이라도 눈보라가 날릴 기세다.

    지레 겁을 먹고 내장사로 내려와 극락전 처마 위로 주렁주렁 매달린 주황빛 감이 빚어내는 풍경 앞에 선다. 대웅전 댓돌 위에는 털신 한 켤레가 놓여 있다. 겨울을 실감나게 하는 것 중에 털신만 한 게 있을까. 털신 벗어놓고 기도에 열중인 사람을 생각하니 장승이든 솟대든, 거기에 다 돼지 해를 보내면서 쥐띠 해를 맞아야 하는 사람들의 다사다난한 심경이 묻어 있는 것 같다. 해발 370미터의 추령에서 낙하한 바람이 내장사 앞마당에 이르러 몇 점 낙엽을 조용히 쓸고 지나간다.

귀항하는 고깃배 뒤로 꼬리무는 궤적 한해 긴 추억이 묻어나고

강릉 금진항과 심곡항

◇조업을 마친 소형 선박이 금진항으로 귀항하고 있다.

작은 고깃배 한 척 포구를 향해 들어온다. 붉은 등대, 흰 등대가 양쪽 방파제 끝에서 고깃배를 맞아들인다. 바다는 잔잔하다. 하지만 고깃배의 선원은 착잡할 터. 한 해를 정리하는 시기이니 파도가 잔잔하다고 해서 마음 놓을 때가 아니다. 배 뒤편으로 꼬리를 무는 어선의 궤적에서 한 해의 긴 추억이 묻어난다. 어선을 몰고 나간 어부는 맵짠 겨울 파도 속에서 어획고를 올리기 위해 사투를 벌이지만 유람선은 좀 다르다. 
◇강릉시 옥계면 금진항과 심곡항 사이의 해안도로는 절벽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굽어 있다.


아직은 매섭지 않은 바람 속에서 겨울 바다 위를 항해하는 동안 사람들은 지나온 시간 속의 번민들을 씻어내고, 망망대해처럼 넓은 포부를 다져넣는다. 그 번민과 포부의 줄기는 다르다. 나이 열여덟인 사람은 열아홉 살 성년이 되는 기분을 만끽하지만 나이 오십줄인 사람은 50킬로미터로 달려온 시간을 셈하고, 육십줄인 사람은 60킬로미터로 달려온 시간을 셈하면서 세월의 덧없음을 실감한다.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의 금진항 앞에 서서 50킬로미터의 속도를 저작한다. 슬몃 부는 바람조차 50킬로미터의 속도로 여겨지는데, 포구는 낮게 엎드려 있다. 금진항은 작고 아름다운 포구다. 사람들이 경포대로, 정동진으로 몰려가니 사람 북적일 일 없고, 포구가 작으니 크게 오염될 일 없다. 파도가 강해지기 전 일찌감치 귀항한 배들이 늘어선 부두에는 만선 깃발들이 펄럭인다.

붉은 깃발에서 묘한 강렬함이 묻어나는데, 포구 옆으로 해변을 따라 잘 닦인 도로가 심곡항으로 이어진다. 길은 해안선 모양을 따라 S자 모양을 그리면서 길에 이어진다. 역시 S자에서도 묘한 울림이 묻어난다. 삶은 결국 휘어지고, 다시 펴지고, 다시 휘어지면서 반복되는 것이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분명 그렇다.

금진항과 심곡항 주변은 지금 조용하지만 레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입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강릉시가 기업체와 연대해 무려 6000억원대의 자금을 투입하는 관광 클러스터 사업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포구 두 개뿐인 곳에 관광 클러스터가 가능할까 싶은데, 금진항 초입의 식당에서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만났다. 그는 대뜸 소주 잔을 건네다가 사양을 하자 앞뒤 가릴 것 없이 물 자랑부터 늘어놓는다.
◇강릉 지역에서 ‘물 박사’로 소문난 김정득씨.

“내가 여기에 땅을 좀 사놓았는데 뭐, 처음에는 펜션 사업 같은 걸 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땅을 파니까 뜨거운 물이 나옵디다. 그게 온천 아니요? 그런데 물맛이 짜지 뭡니까. 다 틀렸다 했는데 누가 귀띔해 줘서 성분 검사를 해보니 이게 거의 기적의 물인 겁니다.”

식당에서 소주 잔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금진항 위에서 금진온천을 운영하고 있는 김정득 대표. 온천을 운영하고 있으면 주말에 꽤 바쁠 텐데 한낮에 소주 잔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기적의 물을 발견했으면 로또 맞은 것 아닌가요.”

“에이, 그게 사정이 복잡하다 이겁니다. 온천수가 나왔는데, 칼슘과 마그네슘이 인체에 흡수되기 딱 좋은 황금비율로 나왔어요. 게다가 셀레늄이 0.29피피엠이나 함유돼 있다는 거예요. 이게 미국 FDA 산하기관에서 검사한 결과고, 그래서 미국으로 수출까지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물을 팔 수 없게 돼 있어요. 기가 막히죠. 항암 효과 있는 물인데도 의료용 광천수 기준이 없어서 먹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목욕하고 가세요.”
◇금진항 포구에서 흔들리고 있는 조업용 깃발. 그 빛만큼은 어떤 고급 옷감보다 곱다.

김 대표는 펜션 사업을 하려고 땅을 사두었다가 이제는 거의 ‘물 박사’가 됐고, 급기야 개인의 꿈을 포기하는 대신 강릉시를 비롯해 여러 대학의 산학협력 기관과 연계, 관광 클러스터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 참이란다. 용평에서 강릉까지 직선도로를 뚫으면 15분 거리인데 사람들은 용평으로 스키 타러 왔다가 휭 가버리니 강릉의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강원도가 힘이 없잖아요. 게다가 돈도 없어요. 이것 참, 그래도 가능성이 보이면 밀어붙여야죠. 될 때까지 힘들어서 그렇지 끝까지 하면 됩니다.”

목소리가 우렁우렁하다. 눈매며 얼굴선이며, 게다가 목소리까지 꽤 터프해 보인다 했더니 젊을 적에는 건설회사에서 잔뼈가 굵었단다. 김 대표가 운영하고 있는 언덕 위의 온천에 올라가니 금진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관광 버스 한 대가 조심조심 커브를 돌아 심곡항 쪽으로 달리고, 연인들 몇은 금진항 방파제에서 겨울 바람을 맞고 있다. 유람선이 일으키는 포말을 따라 갈매기들이 낮게 날면서 먹잇감을 사냥하기에 바쁘다. 
◇금진항에 정박 중인 소형 선박들.

게으른 녀석들, 포구의 갈매기들은 먼 바다로 나가 먹이를 구하는 대신 바위에 앉아 쉬고 있다가 배가 출항하거나 귀항할 때 스크류가 만들어내는 포말과 함께 떠오르는 고기를 잡아먹는다. 조류학자들이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포구나 선착장에 포진하고 있는 녀석들의 행동 반경은 대체로 8킬로 남짓. 그쯤 나갔다가 다시 포구로 돌아와 항해하는 배를 기다리는 습성이 배어 있다. 얄밉기는 하지만 그것도 나름의 생존 비법인 셈이다. 하긴, 남의 먹이를 빼앗지 않고 살아가기만 한다면 최소한 그들 세계에서 위선은 아니다.

“이것 좀 보세요. 내 주위에 신부님 수녀님들이 많아요. 그 양반들이 아픈 사람 돌보다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여기 물을 먹였더니 효험이 있다는 거예요. 이게 다 그 사람들이 보낸 감사 편지 이런 겁니다. 기도하고, 신자들 이끌기 바쁜 신부님 수녀님들이 왜 물 배달까지 하느라 고생하겠어요. 물 법이 바뀌어야 하는데….”

“하하, 물 관리법 혁명을 해야겠는데요.”

“그게 마음대로 돼야 말이죠. 물을 마신 사람은 다 좋다는데 법은 바뀔 생각을 안 해요. 이거, 기득권 가진 사람들이 기득권 포기하지 않아서 그래요.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도 좋아지지 않아요.”
◇포구 주변의 해변 바위에 앉아 쉬고 있는 갈매기들.

컴퓨터로 인쇄한 편지, 비뚤비뚤 육필로 쓴 편지들이 한 뼘도 더 되게 묶여 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정말 기적의 물인 셈인데, 어떻게 그런 물이 바닷가 1100미터에서 솟아난단 말인가.

금진항과 심곡항 주변은 고생대 단구지역이란다. 땅이 뒤집혔다는 뜻인 동시에, 저 아래 물이 뿜어 올라오는 1100미터 아래가 공룡이 살았던 고생대 페른기층이어서 이른바 화석수(化石水)가 나오는 것 아니냐는 설명이다. 중고등학교 때의 생물 시간에 귀 닫고 있었던 글짓기 소년 입장에서는 고생대의 느낌을 불러내기가 쉽지 않다.

어쨌거나, 옷을 훌렁훌렁 벗고 지하 1100미터 아래에서 뽑아 올린다는 온천수에 몸을 맡긴다. 겨울바람과 맞서느라 긴장했던 근육들이 스르르 풀리면서 안온한 느낌이 맨살을 휘감는다. 투명한 유리창 밖으로 금진항의 모습이 한눈에 잡혀든다. 금진항에서 심곡항까지의 해안도로는 S자, 더디게 가는 자동차들이 오히려 반갑다.
 
강원도 홍천군 동면 수타사

빛바랜 봉황문 들어서자 단아한 대적광전 환한 미소

◇수타사의 봉황문 입구. 다른 절들과 달리 절집 안의 풍경을 완벽히 차단했다가 문 안으로 들어서야 구조를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절집 마당 앞 약수터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개 한 마리가 인적을 살피더니 입을 약수로 가져간다. 가만히 살펴보니 새끼를 밴 듯 갈비뼈 자국이 선명할 정도로 배가 불러 있다. 녀석, 주인이 챙겨준 끼니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먹을거리를 찾아나섰는데 마침 목까지 많이 말랐던 모양인지 한동안 약수에서 고개를 들지 않는다.

“나도 목 좀 축이자.”

녀석, 고개를 들어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약수에 고개를 박는다. 자신을 해할지도 모르는 사람보다 태 안의 새끼를 위해 갈증을 해소하는 게 먼저라는 뜻이다. 겨울산 아래, 동물의 모성 앞에서 추위가 저만큼 물러간다.

절집 울타리 밖에서는 자잘한 공사가 한창인데, 일군의 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운 채 컵라면을 끓여 먹고 있다. 중년의 사내들 몇을 빼면 나머지는 모두 노파들이다.
◇인부들을 산 쪽으로 올려보낸 공사 감독 김사훈씨가 모닥불 앞에서 효율적인 공사 지혜를 궁리하고 있다.(왼쪽)
◇수타사 앞 생태공원 조성사업에 뛰어든 인근 마을 할머니들 앞에 물 주전자가 놓여 있다

“군에서 생태공원을 만들고 싶다 했더니 절에서 땅을 좀 내줬어요. 그래서 내년에 완공하려고 공사를 하는 중이죠.”

추위를 가릴 양 완전 무장을 하고 나온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쭈그려 앉아 컵라면으로 간식을 먹는 사이 공사 감독을 하는 김사훈 반장은 모닥불을 헤집으며 담배연기만 연신 내뿜는다. 할머니들을 향해 ‘자, 일 좀 빨리 합시다’ 재촉할 수 없으니 알아서 움직여 주기만을 바라는 것인데 할머니들의 몸놀림이 빠를 리 없다.

“노인들과 일하려면 힘들겠는데요?”

“뭐, 그렇기도 하지만 저분들이 꾀를 부리지는 않으니까 편한 면도 있죠. 게다가 대부분 동네에 사시는 분들인데, 일할 능력 있는 분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도 좋은 일이구요. 생태공원 만든다니까 절에서도 땅을 내줬는데, 사는 게 별건가요. 서로 도우면서 살면 되는 거예요.”

김 반장의 얘길 듣고 보니 현실감 측면에서는 두 자릿수가 나온 대통령 후보들의 공허한 공약보다 오히려 낫다.
◇절집 기와에 얹힌 낙엽들과 채 거두지 않은 은행 열매들. 고즈넉한 산사의 운치를 더해 준다.

“나도 겨울에는 좀 한가한데, 여기 나오면 일당을 얼마나 줍니까.”

“허허, 일당을 아무에게나 밝힐 수 있나요. 뭐, 4만원 안팎 받는 사람도 있고, 그보다 높은 사람도 있고. 줄 만큼 줘야 일이 되니까….”

사람 좋아 보이는 김 반장이지만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이내 크레믈처럼 무표정으로 바뀐다. 조경학과를 나와 강원도 공사 현장이라면 안 가는 곳이 없는 명 반장다운 처세다.

수타사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봉황문의 퇴색한 빛이 겨울 햇살 아래서도 고즈넉한 울림을 던져준다. 봉황문 안으로 절집의 마당만이 보일 뿐 봉황문 양 옆은 겹겹의 문이다. 절집 풍경이 어떻게 펼쳐질지 가늠치 못하게 만드는 신비감이 수타사의 매력인데, 그런 신비감을 간직할 때 여유를 갖으라는 듯 봉황문 옆자락 고풍스런 문에 촌스러운 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화장실 가는 길’.

수타사는 이름에서부터 특이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신라 성덕왕 7년(708)에 창건될 때의 이름은 일월사였다. 800년 이상이 지난 조선 선조 2년(1569)에 수타사(水墮寺)로 바뀌었는데, 이때의 의미는 물 수, 떨어질 타였다. 이름 탓이었는지, 스님들이 물놀이를 즐겨해서였는지는 모르나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水墮寺’일 때 스님들이 물에 빠져 목숨을 잃는 경우가 해마다 있었단다. 
◇새끼를 밴 개 한 마리가 수타사 봉황문 앞의 약수에서 목을 축이고 있다.

절 옆이 물 맑고 힘찬 덕지천 상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절을 옮길 수는 없는 법, 스님들은 수타사라는 이름은 놔둔 채 아미타불의 무량한 수명을 상징하는 뜻의 ‘수타사(壽陀寺)’로 바꾸었다. 스님들이 물에 빠져 목숨을 잃는 일이 사라졌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절집이 이런 일화만으로 불자들을 모을 수는 없는 터. 수타사는 봉황문을 들어서는 순간 봉황문에 섰을 때의 폐쇄적 분위기를 일거에 거두어들이면서 한순간에 대적광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속된 말로 그토록 애태우던 첫사랑 여인이 보조개 핀 미소를 지어주며 손짓하는 것과 흡사하다.

대적광전, 대부분의 절이 위세를 자랑하기 위해 위압적인 모습의 규모를 자랑하는 것과 달리 수타사의 대적광전은 규모에 연연하지 않고 소박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수백 년 묵은 대적광전의 현판이 그 사실을 웅변한다. 건축미의 흡인력이란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규모의 흡인력과는 다른, 공간 배치의 흡인력이 수타사에 스며 있는 것이다. 그러니 수타사는 제 몸집을 불리는 데 연연하지 않고, 주변 공간을 홍천군의 생태공원 터로 내줄 수 있었던 것이리라.
◇산사에서 가장 큰 두려움은 문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이다. 문마다 비닐을 대어 바람을 막았다.

대적광전 마당 앞을 거니는데 마실 나온 개들과 절집 개들이 서로 짖어대며 기싸움을 벌인다. 족보도 모를 낯선 개들이 침입했으니 절집을 지키고 있는 개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경계해야 마땅할 일이지만, 어찌 생각하면 절집이 사람 따로 견공 따로 출입을 허용하나 싶은 짓궂은 생각이 교차한다. 다행히 견공들은 잠시 짖다가는 목청을 낮춰 저네들끼리의 교분을 쌓느라 정신이 없다.

대적광전 옆은 원통보전이다. 보통은 원통보전을 대웅보전보다 작게 짓는 것이 상례지만 수타사는 예외다. 대적광전이 워낙 작고 단아하다 보니 예배처를 확보하기 위해 원통보전을 크게 지어 약간 불균형스러워 보이고, 마당 또한 네모꼴이 좀 흐트러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다. 대적광전을 등지고 봉황문 지붕을 보니 낡은 기왓장 위에 은행잎이 가득하고, 기왓장 골 사이에서는 은행의 고약한 냄새가 풍겨 나온다. 그뿐인가. 절집 창문마다에는 한겨울 바람을 막아내기 위한 비닐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대못질돼 있다. 강원도 홍천 땅 하면 25도짜리 소주 병을 동파시켰을 정도로 강추위로 유명하니 스님네들도 추위에는 ‘앗 뜨거라’ 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수타사 아래의 덕지천은 이미 깊은 겨울로 접어들었다.

산자락 아래의 절집에서는 해도 일찍 진다. 뉘엿해진 길을 따라 천천히 덕지천 쪽으로 내려가니 천을 막아 만든 작은 소(沼)에 잣송이와 잣나무 잎들이 깡깡 언 수면 위에 붙어 있다. 다시 떠올려 보니 스님들의 목숨을 거두어 수타사의 이름을 바꾸게 만든 그 소이다. 하지만 유명을 달리한 스님들의 삶을 되새길 겨를이 없는 객에게는 겨울이 왔다는 게 실감날 뿐이다.

그 소 위켠의 산 밑에는 신라 때부터 절을 지켜온 부도탑이 세월의 더께를 지고 서 있는데, 이상한 일이다. 공덕 높은 스님들보다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던, 새끼를 밴 개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산 아래 내려와서 생각해 보니 이래저래 낯선, 겨울 산사의 낯선 풍경이었다.

전통 한옥-현대식 양옥 접목…동서양 공존하는 예술 공간

경기 과천시 갈현동 제비울미술관

◇제비울미술관의 전경. 철제빔을 이용한 공간은 식물원이고, 기와지붕을 얹은 공간은 미술관이다.
수은주는 예고 없이 떨어진다. 늦가을의 정취를 한없이 느끼게 해줄 것 같던 은행잎이 너나없이 떨어져 나무 밑동 주위에 수북이 쌓이고, 처마 밑의 물받이에는 살짝 얼음이 얼어 솔잎과 나뭇잎이 꼼짝없이 붙들려 있다. 여차하면 여기저기서 수도관이 얼었다는 전화가 수도국에 빗발칠 형국이다.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의 제비울미술관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제비울이라는 단어에 매혹되면 사계절 내내 따뜻한 봄일 것 같지만 계절은 어느 곳도 비켜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랴. 제비울미술관 앞에 서니 제일 먼저 바짝 마른 수국이 객을 반긴다. 잎은 모두 그대로인 가운데 갈색으로 변한 자태에서는 다소곳한 여인네의 품성 바른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서울 도심에서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수국뿐인가. 제비울미술관은 전통과 현대가 결합된 건축미학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미술관은 전통 기와를 얹은 한옥인데 그 옆의 식물원은 철강 기둥을 세운 현대식 양옥이다. 대부분의 미술관은 전통만을 따르거나 디지털적인 건축미학만으로 승부하는 시대인데… 잠시 이 공간의 주인이 누구인가 궁금해진다.

◇찬바람이 점점 강해지는데도 단풍 몇 잎은 바싹 마른 줄기에 매달려 가을의 추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왼쪽)

◇제비울미술관은 그림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산책하며 사유할 수 있는 나무계단이 사방으로 연결돼 있다.


“우리 관장님은 젊어요. 아직 쉰 살이 안 되셨을 걸요? 우리 미술관의 처마는 전국 방방곡곡의 한옥을 산 다음 거기서 옮겨온 처마로 만든 거예요. 모르죠. 우리 관장님이 왜 그런 고집을 피우셨는지. 그런데, 그렇게 옮겨온 처마가 제각각이라서 균형이 안 맞는 곳이 많아요.”

미술관의 큐레이터 김가현씨는 설립자 흉을 보는 듯, 자랑을 하는 듯 띄엄띄엄 미술관 이력을 소개하면서도 꽤 조심스러운 눈치다.

제비울미술관의 설립자는 신창건설의 오너인 김영수씨다. 그게 또 이해가 가지 않는다. 건설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니 최신 공법으로 미술관을 지어 내외의 눈길을 끌고 싶었을 것 같은데 시골 마을의 한옥을 사들인 다음 처마를 옮겨와 미술관을 지었다니 얼마나 미련한 문화행동가인가. 하지만 미련하지 않다. 세상은 변하여 이제는 문화복합공간이 주목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직접 만나 확인하지 못했으니 장담할 수 없으나, 김영수 관장은 동서양이 만나는 복합 건축을 통해 미술관의 새로운 덕목을 발현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미술관으로 오르는 층계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디귿 형태를 이룬 기와 처마 사이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드러난다. 기와만 있는 게 아니다. 아래쪽으로는 서양식 구조물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까 동양과 서양의 구조물 사이로 늦가을의 하늘이 양동이에 갇힌 듯이 시야 가득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 미술관은 입장료가 없거든요. 주말이면 200명 정도가 찾아오는데 산책도 할 수 있고, 그림도 볼 수 있고. 이만하면 괜찮은 공간이죠.”

◇제비울미술관의 뒤편은 나무와 꽃들의 공간이다. 미술관 사람들은 야생 동물의 겨울나기를 위해 떨어진 모과를 줍지 않는다.(왼쪽)

◇전통과 현대를 접목한 제비울미술관의 아름다움은 전시관 입구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옥과 양옥의 구조물 사이로 올려다보이는 디귿자 하늘은 생경하면서도 부드러운 공간미를 자아낸다.


괜찮은 게 아니라 썩 좋은 공간이다. 미술관 뒷동산으로 올라서니 거기, 나무 층계가 길게 이어지고 층계 전후좌우로는 각양각색의 식물 이름을 알리는 팻말이 꽂혀 있다. 용머리·범부채·붉은인동덩굴·도라지·금꿩의다리꽃…. 저마다 푸른 기운은 사그라졌지만 겨울 지나고 나면 다시 싹을 밀어올려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감탄사를 자아내게 할 게 분명하다.

뒷동산의 직립한 나무들은 하오의 그림자를 드리운 채 푹푹 빠지는 낙엽을 거느리고 있다. 모과나무에는 천연의 노란빛을 띤 모과들이 점점이 달려 있고, 땅에 떨어진 모과에는 야생동물들이 갉아먹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감기 기운 다스릴 때 요긴한 모과차를 담으려고 몽땅 수확하기보다는 야생동물의 겨울나기를 위해 수확의 욕심을 버린 흔적이다. 소문나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 나눔의 한 방식이다.

나무 계단을 하나씩 디디며 겨울을 예감하는 바람과 맞서 본다. 쌀쌀한 바람 탓에 사람들의 인기척은 거의 들리지 않는데, 나무들 사이로 자동판매기에서 커피 한 잔씩을 빼들고 올라오는 두 명의 여자가 보인다. 모락모락 김이 솟는 종이컵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커피 들고 있는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아, 우리 말인가요? 그러세요.”

“종이컵 들고 있는 손만 찍겠습니다.”

◇수은주가 뚝 떨어지면서 한없이 길 것 같았던 가을도 이제 막을 내려간다. 하룻밤 사이 얼음이 얼면서 은행잎도 솔잎도 얼음에 갇혀 버렸다.

◇여름과 가을을 지나오면서 보랏빛으로 물들었던 수국이 잎 한 점 떨어뜨리지 않은 채 갈색으로 빛나고 있다.


사진 찍겠다고 하면 손사래를 치는 사람들이 많으니 손만 찍겠다고 한 것인데, 두 사람은 왜 손만 찍으려 하느냐고 의아해하는 얼굴이다. 그들뿐이 아니다. 조금 있으니 중년 남녀 한 쌍이 추억을 반추하듯이 나직하게 속삭이며 계단을 오른다. 할머니, 중년 주부, 소녀들 일가족이 서로의 손을 잡아끌며 계단을 오르내린다. 날씨가 아무리 차가워도 세대와 세대가 서로 손을 잡으면 두려울 게 없는 법, 바람이 나뭇잎을 다 떨어뜨릴 듯이 기세를 부리다가도 이내 수그러드는 듯하다.

제비울미술관이 이런 공간으로 태어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김영수 관장은 청계산 자락 과천에서 14대째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과천의 캐릭터에 맞는 예술 공간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며, 기왕이면 청소년들이 예술 향취를 느낄 수 있는 미술관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입장료를 안 받는 것은 물론 방학 때면 자녀와 학부모가 함께 참여하는 미술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그런 초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무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솔잎 위에 단풍잎 몇 점이 걸려 있다. 푸른 기운과 붉은 기운이 맞물려 있는 게 기막히게 곱다. 그 둘만이 어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소나무 뒤쪽으로는 미술관의 기왓장이 검푸른 빛을 내면서 한옥의 곡선미를 자아낸다.

◇여름과 가을을 지나오면서 보랏빛으로 물들었던 수국이 잎 한 점 떨어뜨리지 않은 채 갈색으로 빛나고 있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선다. 화가 이흥덕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단발머리 소녀 모습의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그림들은 동심에 가까운 모습을 많이 담고 있지만 의미만은 꽤 진지하다. 이름하여 ‘저항의 암시적 풍경전’이다. 얼핏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림과 전시회 명칭이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소녀는 성년 이전의 애매한 지점에 서서 세상의 가르침 그대로 때로는 순진하고, 때로는 교활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녀의 눈빛은 ‘당신들이 나를 이런 눈빛의 소녀로 만들었다’고 외치는 은유의 다른 표현이다.

이런 전시를 비롯해 제비울미술관은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아우라를 획득하고 있는 화가들의 전시회를 계속 연다. 23일부터는 디지털 시대의 인간 관계와 소통을 음미하게 하는 홍성대의 전시회가 열리니 이흥덕의 작품과는 또 다른 향취가 제비울을 물들일 게 틀림없다.
 
경북 포항시 호미곶

호미곶 등대… 거센 파도 벗삼아 뱃길 밝히기 100년

등대의 꿈은 아주 멀리까지 보는 데 있지 않다. 다만 등대는 먼 곳에서 발견되기를 꿈꾼다. 그런 점에서 등대는 사람의 욕망과 반비례하는 설치물이고, 자신의 몸을 태우지는 않지만 스스로의 빛으로 길을 안내한다는 점에서 희생의 가치를 발견하게 하는 설치물이다. 사물의 생명력을 발견하는 일은 그래서 즐겁다.
경북 포항의 호미곶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상은 바다에 서 있는 청동 조각상 ‘상생의 손’이다. 하지만 ‘상생의 손’을 만나기 전 우리는 등대의 삶이거나 등대지기의 삶을 먼저 만나는 게 순서다. 등대 혹은 등대지기의 삶이야말로 상생의 빛으로 은유되기 때문이다.
◇어린이 한 명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세계 여러 나라의 등대 모형을 감상하고 있다. 어쩌면 이 아이의 장래 희망은 등대지기가 돼 있을지도 모른다.

상생이란 무엇인가. 못난 사람, 잘난 사람이 인생의 높낮이에 연연하지 않고 함께 소통하며 사는 것이다. 등대의 빛 또한 그러하고, 등대지기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 옛날 우리네 등대지기들은 험한 파도와 맞서 싸우며 뱃길을 밝히기 위해 발전기를 돌리다가 골방에서 쓰러져 잠들곤 했다. 사람들은 ‘시원한 파도와 벗하며 사니 얼마나 좋으냐, 마누라에게 바가지 긁히지 않고 사니 얼마나 좋으냐’며 부러워했지만 알고 보면 그들의 삶이야말로 하나의 사투였다.
호미곶에 자리한 국립등대박물관에 들어서며 그런 생각을 곱씹는데, 곧장 그런 삶의 한 갈피가 진열장 안에 복원돼 있다. 1963년부터 1985년까지 22년 동안 등대지기로 근무했던 김용정씨의 누런 봉급 명세표에는 60만 원 남짓의 숫자가 적혀 있고, 책 몇 권 놓인 골방에서 웅크려 잠든 등대지기의 모습이 나타난다. 어느 진열장 안에는 대통령이 하사했다는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놓여 있다. 등대지기는 아마도 ‘파도여 어쩌란 말이냐’ 같은 노래 소절을 읊조리다 뱃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잠시 눈을 붙였을 것이다.
◇배 모양의 자연친화적 원형 곡선미를 간결하게 살림으로써 등대 건축미의 압권으로 꼽히는 Brandywine Shoal Point Lighthouse. 이 등대 모형은 800분의 1로 축소돼 온라인 쇼핑몰에서 65달러에 팔릴 만큼 유명하다.

몇몇 아이들이 부모 손을 잡고 들어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진열장 안의 모습들을 살핀다. 세대가 많이 바뀌었으니 꼬마들에게는 바다도 낭만이고, 등대도 낭만이다.
“와, 멋있다. 정말 예쁘네.”
형을 따라온 초등학교 1학년짜리가 감탄사를 연발하는데 녀석의 앞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외의 갖가지 등대 미니어처가 서 있다. 등대라기보다 미끈한 조형물처럼 건축미가 살아 있다. 저런 등대에서 근무를 하면 매일같이 소풍을 가는 것처럼 행복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스쳐간다. 하지만 등대지기들이 그런 말을 들으면 단번에 한 마디 할 것 같다.
“그렇게 부러우면 여기 와서 근무해 보라예.”
국립등대박물관에는 봉급 명세서만 있는 게 아니다. 등대일지며, 등대를 만들 때 인부들에게 지급했던 일본 동전이며, 위험을 알리던 쇠나팔과 등대의 소소한 부품, 호미곶의 옛이름이었던 장기갑 등대의 종류와 전파 탐지기, 괘종시계 들이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당긴다. ‘아, 이런 것이 등대의 역할을 위해 단단하게 조직화되어 어부들의 삶을 뒷받침해 주었구나’ 생각하니 오늘의 해양강국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옛적 등대지기의 삶을 재현해 놓은 모습.

등대박물관에서 머무는 시간은 이렇게 갖가지 사념을 저작하게 만든다. 낭만적일 수도 있으나 때로는 인명을 살리고 죽이는 역할을 했던 사물, 그리고 그 사물의 효용성을 극대화시키려 애썼던 등대지기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탓이다.
박물관 밖으로 나오니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 등대 하나가 미끈하게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프랑스 풍이다. 아름다운 여성의 등처럼 휘어져 올라간 등대 표지판에 다가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프랑스 풍이란 짐작이 딱 들어맞는다.
‘1901년 일본 선박이 대보리 앞바다 암초에 부딪혀 침몰한 것을 계기로 세움. 프랑스 사람이 설계하고 중국 기술자가 시공함. 1908년 완공, 높이 26.4미터. 일반적인 고층건물과 달리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벽돌만으로 쌓음. 6층으로 구성된 칸마다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을 새김.’
그러니까 호미곶 등대는 프랑스 건축미학, 중국인들의 시공 능력, 대한제국의 상징성이 가미된 다국적 건축물인 셈이다.
◇호미곶 광장 앞바다에 서 있는 ‘상생의 손’ 청동 조각상. 호미곶이 한반도의 최동단이라는 점을 활용해 관광 자원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호미곶이란 이름은 한국의 지도 모양이 호랑이를 닮았다는 데서 출발한다. 행정 지명으로는 경북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이지만 모양새로는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한반도의 최동단에 해당되는 것이다. 포항시가 이런 지역 특성을 그냥 내버려둘 리 없다. 강릉의 정동진, 전남 장흥의 정남진이 여행 문화의 일부분으로 도입돼 성공했으니 이들은 ‘한반도의 최동단’을 내세우는 것이고 호미곶 등대와 함께 ‘상생의 손’ 조각상을 세워 관광객들의 발길을 끄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매년 1월 1일 새벽이 되면 호미곶 광장에 나와 신년을 맞이하던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던 모습이.
앞에서 말했듯이 호미곶의 옛이름은 장기갑인데, 지금도 호미곶 언덕 위 ‘장기갑호미등’ 표지석에는 이런 내용의 유래비가 서 있다.
‘대보(大甫)는 옛날부터 경관이 수려하여 육당 최남선 선생의 ‘조선상식지리’ 편에 대한십경(大韓十景) 중 하나로 기록돼 있으며, 조선 명종 때 풍수지리학자 격암남사고산수비록(格庵南師古山水秘錄)에서도 이곳을 호미등이라 하여 범꼬리라 부른다.’
◇엄마를 따라나온 소년이 호미곶 등대 표지석 앞에서 혀를 샐쭉 내밀어 포즈를 취하고 있다. 파도 소리가 이들 가족을 따뜻한 가을 기운으로 감싸안는다.

육당의 혜안과 격암남사고산수비록을 떠올리고 있는데 꼬마 한 녀석이 ‘장기갑호미등’ 표지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카메라를 들고 있는 엄마를 향해 혀를 샐쭉 내민다. 파도는 철썩이고, 가을바람 시원하니 녀석은 모처럼의 나들이에 아주 신이 난 표정이다. 하긴, 나들이의 덕목은 세대를 초월해 서로 웃는 데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야말로 이 땅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세상 참 좁다. 지인의 말을 듣자니 지난번 다녀왔던 청도 유천마을에서 몇 년 전 목회를 했던 목사가 호미곶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목회를 하고 있단다. 그 목사가 봉직하는 교회는 바닷가 포항의 캐릭터를 상징하기 위해 배 모양을 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준다. 이쯤 되면 세상이 좁은 것이 아니라 사람 인연은 어쩔 수 없다는 쪽으로 수정할 수밖에 없다.
자, 수많은 여행자들이 7번 국도를 따라 남하하다가 그 끝자락 최동단에 닿고 싶어 하는 그곳에 서서 다시 상생의 의미를 떠올린다. 사람 사이의 정을 낳는 것은 이익과 관계 없이 서로의 사람살이를 존중하는 것이라는 사실, 조각상 하나 세워놓고 상생의 의미를 강요하기보다는 너나 가릴 것 없이 계절의 바람을 공유하고, 험난한 세상살이를 서로 위무하는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 상생 아닌가.
다시, 쇠나팔과 호미곶 등대가 어우러진 모습을 올려다보니 거기 서늘한 바람을 막아줄, 솜이불처럼 따뜻한 구름이 가득 덮여 있다. 융단이 따로 없는 호미곶의 가을이다.

 

경북 청도

새마을 운동 발상지… 씨 없는 감 '명성'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돌담길 위로 감나무가 서 있다. 청도의 감나무들은 씨 없는 감을 맺는 것으로 유명하다.
나이깨나 든 사람들은 여전히 기억한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만드세.”

귀에도 쟁쟁한 새마을노래를 떠올리면 너나할 것 없이 새벽잠을 떨치고 일어나야 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는 단 한 군데가 아니다. 경북 포항 기계면과 경북 청도군 신도마을 사람들은 ‘새마을운동 발상지는 우리 동네‘라고 기싸움을 벌인다. 청도군은 박정희 대통령이 1969년 수해 시찰차 청도군에 와서 새마을운동 발언을 했다는 것이고, 포항시는 1971년 전국 시장·군수가 모인 자리에서 새마을운동 발언이 나왔으니 그 시기가 새마을운동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둘 다 일리 있지만, 아직은 경북 청도군이 판정승을 거둔 분위기다.

씨 없는 감이 생산되는 것으로 유명한 경북 청도, 그 중에서도 신도마을에 들어서면 마을 입구에서부터 마을에 이르는 도로변에 새마을 깃발이 무려 212개나 걸려 있다. 청도군의 마을 수에 맞춘 깃발 자체가 ‘우리가 새마을운동의 원조’라는 주장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도마을로 들어서니 마을회관 안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붓글씨가 담긴 액자가 걸려 있고, 그 옆 마을 이발소에는 수십년을 지나온 이발 의자가 놓여 있다. 하지만 이발소 그림의 원조인 밀레의 ‘만종’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눈길을 끄는 것은 울타리 안과 밖을 가릴 것 없이 마을을 붉게 물들이는 감나무들이다. 어느 감나무에는 사닥다리가 놓여 있고, 어느 감나무 아래에는 바구니 몇 개에 수확한 감이 담겨 있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의 하나,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라는데도 마을 집들은 수십 년 전의 모습에서 크게 ‘진화’하지 못했다. 담은 돌담이거나 낡은 블로크 벽돌 담이고, 낮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에서는 감 농사를 마무리하는 사람들의 구릿빛 얼굴이 들고난다.

◇신도마을 할머니들이 마을 초입에 농작물을 내다 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손님이 많거나 적거나 이들에게는 한나절을 소일할 수 있는 유일한 낙이다.

마을 초입에는 동네 할머니들 세 명이 나란히 앉아 감이며 호박을 내다 놓고 여행객들이 차를 세울 때마다 반색을 하며 반긴다.

“씨 없는 감 좀 사이소. 호박도 있어예.”

세 할머니 모두 칠순은 훌쩍 넘긴 모습인데, 그 중 젊어 보이는 김씨 할머니 앞에는 감 상자가 잔뜩 놓여 있다.

“우리 집에서 딴 감 아인교.”

김씨 할머니는 스무 살에 신도마을로 시집와 내내 살고 있는 터, 한동네 할머니들과 가을볕 쪼이며 동네 입구에서 감장수를 하고 있는 시간이 그리 나쁘지 않다. 잘 팔리면 팔려서 좋고, 안 팔리면 다음날 팔면 되는 것이다. 까짓 새마을운동의 발상지이건 아니건 황혼기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 무탈하게 사는 일인 것이다.

신도마을을 벗어나 유천마을을 향한다. 유천마을의 행정지명은 유호리이지만, 옛적부터 유천 유천 해온 탓에 유천마을에는 식당이나 술집, 다방 간판은 거의 ‘유천’을 매달고 있다. 신도마을 역시 집집마다 감나무 몇 그루씩은 다 거느리고 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새마을 기가 걸려 있는 곳이 신도마을이다. 신도마을에서는 요즘 새마을운동 발상지 조성 공사가 한창이다.

유천마을의 진풍경은 수십 년 전 풍경을 뛰어넘어 일제 때의 건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60년 된 정미소가 여전히 ‘피대줄’을 돌리고 있고, 지금은 없어진 축산업협동조합의 사료판매소 간판도 어엿하게 걸려 있다. 뿐인가. 극장 건물도 그대로이다. 그야말로 시간여행의 명소인데, 유천마을이 예전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면 소재지도 아니면서 밀양과 청도의 경계에 위치해 양쪽 군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자리인지라 예전에는 번성했으나 지금은 투자 가치가 별로 없는 고장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도 유천마을에는 갖가지 간판을 단 ‘다방’이 두세 집 건너 하나 꼴이다. 세월은 변했으나 ‘유천에 나와야 이런저런 볼일을 볼 수 있’고, 그러자니 모닝 커피도 마시고, 식후 커피도 마실 수 있는 다방이 성업 중인 것이다.

유천마을의 또 다른 명소인 시인 ‘이호우 이영도 생가’를 찾아 들어선다. 이호우와 이영도는 오누이 사이. 이호우는 시조시인으로서 문학성 높은 작품을 많이 남겼지만 우리의 속된 기억은 이영도 시인과 청마 유치환 시인의 로맨스에 더 기울어져 있다. 그 기억의 질료는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이다. 청마 유치환은 같은 학교 교사였던 이영도를 만난 후(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을 때 유치환은 기혼자였고, 이영도는 스물한 살에 남편을 떠나 보내고 딸 한 명을 키우고 있는 처지였다) 무려 5000여 통의 연서를 보냈고, 두 사람의 사랑은 유치환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로맨스로 그치고 말았다. 그 5000여 통의 편지 중 200편을 골라 펴낸 것이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이다.

◇청도군 신도리 마을회관에 걸려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 액자. 신도마을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이영도 시인의 생가에 사는 그의 6촌이 혼자 집을 지키고 있다가 문을 열고 나온다. 생가 마당에는 감나무는 물론이려니와 밀감나무, 금낭화가 자라고 있다.

“밀감예? 남편이 살아생전 애지중지 키우던 거라예. 그래 내도 열심히 키우는데 이거 살리기 엄청 힘들어예.”

이영도 시인의 6촌이라는 할머니 얼굴에 화색이 돈다. 좋은 일 있냐는 물음에 이내 대답이 돌아온다.

“내일 아들 딸 며느리 사위가 온다카네예. 집에는 사람 냄새가 나야 하는 법이라예. 감 좀 드실라예?”

감 하나를 받아들고 손으로 쓱쓱 문질러 입에 넣으니 역시 씨가 없다.

“이상하죠? 감은 감인데 어떻게 씨가 없을 수 있냐 말예요.”

“몰라예. 청도 감나무를 다른 지역에 가져다가 심으면 3년 후쯤 씨 있는 감이 열린다는데예. 다른 지역의 감나무도 청도에 가져다 심으면 3년 후쯤 씨 없는 감이 되고예.”

◇유천마을 읍내 풍경. 고즈넉한 분위기의 읍내 거리에는 일제 때 건물을 비롯해 향수를 자극하는 간판들이 적지 않게 자리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소설가 김제철은 소설 ‘청도 감나무’에서 씨 없는 감의 비결을 청도의 지질과 안개에서 찾고 있는데 그것 아니라면 씨 없는 감의 정체를 설명할 길이 없다. 청도 지역 밖으로 나가면 감에 씨가 생기고, 멀쩡한 감나무도 청도에 옮겨 심으면 씨 없는 감이 생기는 아이러니는 사실 아이러니가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 생장의 비밀이다.

유천마을을 빠져나오는데 마을에서는 가장 화려한 간판 하나가 눈에 띈다. 당구장 간판인데, 이름하여 KISS 당구장이다. 유천마을에서는 거의 유일한 영어 간판 앞에 서서 보니 당구공 역시 씨 없는 감을 닮았다. 뿐인가. 구생당약방, 중앙소리사 간판도 눈에 띈다. 구생당은 생명을 구한다는 뜻이고, 중앙소리사는 예전 전파사의 다른 이름이면서 요즘의 가전제품 수리센터와 같으니 유천마을에는 50년 전과 현대가 공존한다는 느낌이 교차한다. 유천, 물이 흐르는 마을에 시간은 여전히 고여 있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
소금 뿌린듯 하얗게 핀 메밀꽃 '산들산들'
 ◇이효석 생가가 있는 마을의 메밀꽃밭. 메밀밭은 봉평으로 관광객을 이끄는 문화상품이 된 지 오래다.
초등학생 두 명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는 봉평 장터 근처의 섶다리 위를 오간다. 달리기를 하다가는 멈춘 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히죽거리며 웃고, 섶다리의 난간 역할을 하는 줄을 잡고 그네 타듯 매달린다. 학교가 파했는데도 얼른 집에 갈 생각 안 하고 길에서 시간 보내는 모습은 도시 아이들이나 농촌 아이들이나 다를 게 없다. 뿐인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집에 안 가니?”

“놀다 갈 기래요.”

영락없이,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강원도 평창 지역 사투리가 흘러나온다. 한 녀석은 심보헌, 한 녀석은 김영재군인데 둘 다 초등학교 3학년 친구란다.

“학교 파했으면 집에 가서 숙제도 하고 메밀묵 만드는 것도 도와드리고 그래야지.”

녀석들의 해맑은 얼굴에 가을 햇살이 환하게 비추는데, 아이들을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는 레퍼토리를 강조하고 싶어서 꺼낸 얘기는 아니다. 소읍 아이들의 심사를 슬쩍 떠보고 싶어진 것이다.

“헤헤, 숙제 없는데요.”

또 한 녀석이 토를 단다.

“울 선생님은 무지 착하드래요. 기래서 숙제 안 내주드래요.”

◇보헌(붉은 옷), 영재군이 어깨동무를 한 모습으로 섶다리를 건너고 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이 녀석들은 숙제 안 내주는 선생님을 ‘착하다’고 말하는 개구쟁이들이다.

녀석들, 귀엽기 짝이 없다. 담임 선생님을 ‘착하다’고 얘기할 정도이니 순박한 시골 무지렁이의 아름다운 측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녀석들이 걷고 뛸 때마다 섶다리가 가볍게 출렁인다. 섶다리는 Y자 모양의 나무를 기둥으로 세우고 나뭇가지 등을 엮어 상판을 만드는 임시다리로, 계곡을 사이에 둔 오지마을 사람들이 물살이 약할 때 계곡을 건너는 소통의 길이었다.

하지만 봉평 읍내의 흥정천에는 번듯한 콘크리트 다리가 있는데도 섶다리가 두 개나 있다. 읍내에서 소설가 이효석 생가로 가는 길의 메밀밭 정취를 살리기 위해 관광 마케팅용으로 설치한 것이다. 그러니 콘크리트 다리 대신 쿠션 감각이 있는 섶다리를 오가는 보헌과 영재는 하굣길의 추억을 만들 줄 아는 녀석들이다. 추억 없이 소년 시절을 보내는 것처럼 소중한 것은 없으니, 스스로 추억을 만들 줄 아는 녀석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현금을 쌓고 있는 셈이다.

◇이효석 생가. 소설가 이효석은 봉평에서 태어나 평창보통학교를 다녔고, ‘메밀꽃 필 무렵’으로 한국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두 녀석이 어깨동무를 한 채 읍내 쪽으로 사라질 즈음 다리 건너에서 장구 소리, 징소리가 들려온다. 효석문화제는 끝난 지 오랜데 무슨 축제가 열린 것인가, 잠시 신명을 내볼까 해서 다가가 보니 흥정천 옆 공터에 평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다. 어떤 이는 도리깨질을 하기에 바쁘고, 어떤 이들은 꽹과리, 징, 장구, 소고를 치느라 바쁜 모습이다. 초등학생부터 팔순이 다 된 노인까지 보이니 명실공히 남녀노소인데, 평균연령으로 치면 어림잡아도 60세는 넘어 보인다. 선창꾼이 앞소리를 내고 나면 꽹과리, 징, 장구를 치는 사람들이 소리의 뒤를 잇는 것을 보니 꽤 조직화된 소리임이 분명하다.

“뭐하시는 건가요?”

“보면 모르드래요? 내일 평창군 전체 읍면이 모여 군민의 날 행사를 하드래요. 봉평은 메밀도리깨질 소리가 유명하드래요. 내일 우승하면 도 대회 나가고, 도 대회에서 우승하면 전국 대회에 나가드래요. 그건 그렇고 우리가 다음주에 서울에서 장터를 여는데 그때 꼭 오드래요.”

말하자면 군민의 날 예행연습을 하는 참이라는 얘기다. 그중에 눈이 초롱초롱한 소녀 한 명도 끼어 있다. 섶다리에서 만난 소년들과 같은 또래다. 이지은, 봉평초등학교 3학년이다. 작은북을 치는 지은이는 아무리 둘러봐도 메밀 도리깨질 공연단의 최연소 참가자임에 틀림없다.

◇이효석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주요 장치 중 하나인 물레방아. 이효석 생가와는 10분 거리에 물레방앗간이 복원돼 있다.(왼쪽)
◇흥정천 공터에 자리한 주막거리 옆 우리에서 가을을 보내는 당나귀. 역시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이다.

사진 한 장 찍자고 했더니 지은이를 앞세워 주부 여러 명이 우 달려들어 카메라 앞에 선다.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얼굴에 건강미가 넘친다. 노인들이 빙 둘러서서 도리깨를 내려칠 때마다 풀썩풀썩 먼지가 인다. 농촌 공동체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정과 흥이 넘치는 현장이다.

봉평의 이런 풍경은 사실 메밀이 낳은 것, 자연스레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떠오른다. 흥정천을 지나 이효석의 생가 쪽으로 발길을 잡는다. 메밀꽃들의 일부는 이미 져버렸고, 늦된 메밀꽃들이 한창 가을볕을 즐기는 중이다. 촬영 포인트 2000원. 예전과 다른 푯말이 눈에 띈다. 메밀밭 안에 들어가서 사진 찍으려면 사용료를 내라는 뜻이다. 메밀 농사를 망친다고 무작정 못 들어가게 할 수도 없고, 마냥 들어가게 할 수도 없다는 고육지책의 하나다. 제주도의 유채밭 주인들이 먼저 써먹은 ‘채산성 맞추기’인데, 그게 봉평까지 ‘수입’된 모양이다. 하긴, 일리 있는 주문이다. 요즘은 수익자 부담이 원칙인 세상이니 ‘뽀대’ 나는 사진을 얻으려면 지갑을 열어 메밀밭 사용료를 내는 게 옳다.

◇봉평 주민들이 군민의 날 행사에 출연하기 위해 ‘봉평 메밀 도리깨질 소리’ 연습에 한창이다. 이들은 7일 열린 군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상금 70만원과 도 대회 출전권을 얻었다.

이효석 생가로 건너는 길목의 다리 옆 광장에는 소설 속의 충주집이 옛 모습 그대로 복원돼 들어서 있고, 주막거리 한켠에는 당나귀 우리가 자리 잡았다. 당나귀 몇 마리가 우리 안에서 순한 눈을 껌벅이며 낯선 이를 살핀다. 무구한 동공 속에 몇 점 슬픔이 도사린 듯 눈빛이 그지없이 맑고 곱다. 이효석이 소설 속에 돼지며 닭 당나귀를 자주 등장시킨 또 다른 이유는 눈빛에 있지 않았을까.

섶다리를 택할까, 콘크리트 다리를 택할까 망설이다가 개울물에 바지를 적셔가며 흥정천을 건넌다. 가을 햇살 아래 발목까지 적셔보는 느낌이 색다르다. 흥정천을 건너니 이내 메밀밭이 펼쳐진다. 소금밭 같은 메밀밭을 좌우에 두고 허생원과 처녀의 인연을 맺게 해주었던 물레방아가 느리게 돌아가는데 그 옆에 처녀 조각상이 서 있다.

메밀밭 사잇길을 걸어 이효석 생가 앞에 선다. 작은 산자락 아래 비탈진 밭뙈기마다 메밀과 수수가 들어섰다. 이효석은 산 아래 작은 집에서 일어나 보헌, 영재, 지은이와 마찬가지로 섶다리를 건너 학교로 갔을 것이다. 그러니 메밀밭은 하나의 작물이 아니라 봉평의 문화 아이콘이다. 메밀밭이 전국 도처에 생겼지만 봉평의 메밀밭은 달라도 많이 다르다. 그나저나 가을볕 아래서 도리깨질 소리를 연습하던 그들은 경연대회에서 어떤 성적을 올렸을까. 서울로 돌아와 전화를 해보니 도우미 이진호씨의 목소리가 밝기 그지없다.

“우리가 최우수상 받았드래요. 상금도 70만원 받고 이제 도 대회 나가게 됐드래요.”

 

경남 남해 ''다랭이 마을''

다랑논 - 파도 어우러져 ''한폭의 풍경화''

남해군 남면 가천마을은 ‘다랭이마을’로 더 유명하다. 산비탈을 깎아 계단식 논을 만들다 보니 가을이 되면 눈부신 황금빛 물결이 층을 이루어 빛난다. 다랑논이야 전국 곳곳에 많지만, 가천 다랭이마을이 유명세를 치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해안 도로 바로 아래에 있으니 다랑논과 파도가 하나의 풍경을 이뤄 사진가들이 얘기하는 ‘달력 그림’을 연출하는 것이다.
경운기가 겨우 지날 수 있는 골목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민박집으로 변신한 농가의 황토벽에는 나들이에 나섰던 사람들의 낙서가 벽화를 이루고 있고, 비탈에 세워진 양철지붕 아래 마당에는 색색의 빨래들이 널려 있다. 강한 바닷바람에 빨래들이 그네를 타는데, 할머니 한 분이 하늘빛을 곁눈질하더니 빨래를 걷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비가 내릴 모양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빗방울이 후두둑 듣기 시작한다. 이런 날, 부침개 한 장에 막걸리 한 잔이 간절한데 바로 옆에 ‘시골할매 막걸리’ 간판이 보인다. 간판이라야 문패보다 조금 큰 정도인데, 객을 반기는 사람은 그다지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다.
“어서 오시다(어서 오세요).”
◇다랭이 마을의 농가 앞마당에서 노파가 빨래를 걷고 있다. 바닷가 사람들은 하늘빛과 바람으로 기상청보다 정확한 날씨를 예측해 낸다.

알고 보니 객을 반긴 사람은 시골할매의 딸이란다. 시골할매가 얼마 전 마루에서 내려서다 넘어지는 바람에 몸져 누워 계시단다. 문 열린 방을 슬며시 들여다보니 요즘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싶은 요강이 구석에 놓여 있다. 아랫목에서는 시골할매의 기침소리가 들려온다. 칠순이 넘은 할머니는 넘어지기 전까지 농사도 짓고, 유자잎을 갈아넣은 시골 막걸리를 담기도 했는데 황홀지경의 가을볕도 쬐지 못한 채 누워 있는 것이다. 가슴 한쪽이 싸해진다.
막걸리 한 사발 팔아주는 것 외에 도울 길이 없다. 막걸리를 시켜 놓고 집을 휘 둘러보는데, 처마며 벽이며 고급스럽기 그지없다. 40여 년 전에 지었다는데도 백 년 전에 지은 듯하고 3년 전에 지은 듯하다. 시골 할매의 딸이 한마디를 덧붙인다.
“이 집에서 3대가 뫼여 살아예.”
3대가 한 집에 산다는 것, 귀한 일이고 아름다운 동거다. 막걸리 잔에 저절로 손이 간다. 막걸리 잔을 내려놓는데 입구 쪽에서 여러 인기척이 들려온다. 얼굴빛들이 밝지 않다.
“어서오시다.”
◇다랭이 마을 깊숙이에 자리한 밥무덤. 음력 10월15일이 되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경건한 마음으로 풍년과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낸다.

시골 할매의 딸이 손님을 맞는 줄 알았는데 모두 마을 사람이란다. 벼도 베어야 하고, 태풍 온다는 소식 있으니 배도 대피시켜야 하는데 시골 할매가 몸져 누웠다는 얘기를 듣고 문병을 온 참이다. 역시 아름다운 이웃들이다.
몇 뼘밖에 안 되는 농사를 지으며 사는 이들이 공동체 정신을 잃지 않는 비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해안에 바짝 붙어 있는 ‘밥무덤’에 그 해답이 있다. 밥무덤은 음력 10월15일 풍년과 마을 사람의 안녕을 위해 햇곡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제사를 지내기 한 달 전부터 가장 정갈한 사람을 제주로 뽑아 무덤 안의 황토를 바꿔 넣고, 밥을 한지에 싸 넣어두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의지도 세월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는 것, 시골 할매가 몸져 누운 것이 그 단서이다.
다랭이마을에서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다음 행선지로 가기 위해 시골 할매의 집을 나서는데 할매의 딸이 여행정보를 건넨다. 마을에서 나가 왼쪽으로 가다가 고갯길에서 사진을 찍으란다. 신문이며 텔레비전이며 가릴 것 없이 다랭이마을의 전경은 다 그곳에서 찍는다는 것이다.
◇삼동면 물건항 해안의 물건방조림. 오랫동안 숲에 투자한 지혜 덕에 웬만한 태풍에는 피해를 보지 않는다.

빗줄기가 굵어지고, 거센 바람이 초가을의 나뭇잎을 떨어뜨리기 시작한다. 단풍이 들기도 전에 가지고 부러져 도로 여기저기에 흩어진다. 날이 저물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헤드라이트를 켠 자동차들이 곡예운전을 하면서 스쳐간다. 그렇다고 숲 중의 숲으로 꼽히는, 삼동면 물건리방조림을 포기하고 갈 수는 없다.
물건항 쪽에 다가가니 바다의 해안선을 향해 고목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게 보인다. 팽나무, 이팝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해안선을 따라 1.5㎞에 걸쳐 겹을 이루고 있다. 수십 년에서 수백 년 된 나무들이니 견고하기 그지없다. 비바람이 몰아치지만 숲은 끄떡하지 않는다.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마을 역시 끄떡하지 않는다. 나무를 믿고 수십 수백 년 보살피다 보니 이제는 나무들이 사람을 보호하고 삶터를 보호하는 현장이다. 그러니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천연기념물(150호)이다.
방파제 안쪽으로 눈을 돌린다. 방파제 안쪽에 대피해 있는 소형 선박들이 거세게 달려드는 파도에 맞서 출렁인다. 5t도 안 되는 배들은 거센 파도에도 용케 버텨낸다. 포구 옆의 횟집 상가 사람들은 사나운 파도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발을 동동 구르지 않는다. 태풍경보가 내려져 있는데도 다급해하지 않는 모습이 의아하다. 할 수 없이 뱃사람 한 명을 붙들고 묻는다.
◇물건항 방파제 안쪽에 대피해 있는 작은 배들 주변으로 태풍이 몰아치고 있다. 바다 사람들은 소형 태풍이 바닷물을 뒤집어주기만 하고 물러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태풍이 왔다는데, 배가 괜찮겠어요?”
“할 수 없지예. 이미 와버린 태풍을… 태풍이라고 꼭 나쁜 것은 아니라예.”
5000여만원짜리 작은 배를 갖고 횟집도 운영하고 있는 이동헌씨의 얘기는 간단하다. A급 태풍이 들이닥치면 바람이 작은 배들을 방파제 위까지 밀어올려 그야말로 생계 수단을 완전히 망가뜨리지만 소형 태풍은 별 다른 손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흙 갈아엎듯이 바다를 뒤집어엎어 산소를 공급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물갈이가 되니 물고기들이 활력을 얻고, 어종까지 교체되면서 당연히 어획량이 늘어난다는 얘기다. 그러니 그가 비바람 몰아치는 바다를 향해 지긋한 눈길을 보내는 것은 태풍이 물러간 후 바다에 나가면 만선 깃발을 올릴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그럼, 태풍이 이 정도에서 소멸되면 바다 농사 잘 짓겠네요. 선원은 몇 명이나 있어요?”
“선원? 배가 코딱지만한데 무슨 선원을… 마누라하고 나하고 둘이 나가지예.”
문득 바다에 나가서는 부부싸움 하지 말라는 뱃사람들의 우스갯소리가 스쳐간다.
이제 강풍을 헤치고 길을 떠나야 한다. 사진 한 장 찍자는 청을 끝까지 마다하던 이동헌씨가 바람 좀 잔 뒤에 떠나라고 만류한다. 낯선 객은 바닷사람들을 걱정하고 바닷사람들은 먼 길 떠나는 사람을 걱정하는 시간, 그 역시 아름답다.
 
충북 영동

굽이굽이 휘감긴 고갯길 굴곡 많은 인생살이 닮아

집은 가족이다. 바다 없는 도(道), 충북 영동은 포도로 유명한 곳이지만 포도밭 주변을 거닐다 떠올린 생각은 ‘집은 가족’이라는 것이다. 집은 왜 ‘가족’인가. 사람이 살지 않는 집과 사람이 사는 집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도마령 고갯길에서 만난 이씨 할머니. 하루 종일 칡을 캐 영동 장터에 내다 판다.

영동군 양강면 괴목리 김참판 고택(중요민속자료 제142호)에 들어서니 마당 한쪽에 자리한 우물이 눈에 띈다. 우리네 옛 집의 정취는 우물에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니 고택다운 고택을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우물 안쪽으로 눈길을 보내니 돌 틈을 비집고 풀이 자라는 게 보이고, 수백 년이 지났어도 마르지 않고 차오른 물이 보인다. 17세기 때 지어졌다는 김참판 고택은 사대부 건축 양식을 증거하는 ㄷ자 건축물로 유명한데 그중에서도 안채의 왼쪽 날개에 자리한 들마루 형식의 쪽마루가 가장 정겹다. 들마루는 한여름에는 나무 그늘 쪽으로 옮겨 평상으로 쓰기도 했던 다용도 마루인 것이다. 사대부는 체면만 따지는 줄 알았는데 집 지을 때 이동성을 감안한 들마루를 놓은 것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참판댁 친척유?”
고택 대문 앞에서 깨를 말리고 있던 노인이 말을 건넨다.
“할머니, 오늘 비온다는데 깨를 말려요? 그만하고 들어가세요?”
“비가 또 온대유? 열흘 넘게 왔는데도 아직 남은 모양이쥬?”
할머니 얘기를 들어보니 영도에서는 가을 재촉하는 비가 열흘 넘게 주야장천 내렸단다. 수확기에 접어든 포도농사 망칠까봐 동네 사람들이 전전긍긍했다는 얘기 끝에 할머니가 운을 뗀다.
◇괴목리 김참판 고택의 왼쪽 날개 쪽에 자리한 들마루와 창호지. 옛 사람들은 이동성이 있는 들마루를 놓아 마당에 옮겨놓았을 때는 평상으로 쓰는 지혜를 발휘했다.

“우리 집도 오래 됐슈. 백 년도 넘었슈. 130년 되면 문화재로 지정해 준다는디.”
얘길 듣고 보니 김참판 고택보다 할머니 집이 숨쉬는 집에 가깝다. 무엇보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가. 불쑥 마당으로 들어선다. 처마에는 어렸을 적 보았던 필름통 모양의 전기 애자가 설치돼 있고, 마루 기둥에는 몇 해 전 사망했다는 할머니의 남편 문패가 여전히 걸려 있다. 사람은 떠나보냈어도 기억은 떠나보낼 수 없는 것, 할머니는 문패를 통해 매일 남편을 만나고 있는 것이리라.
마당에 서서 가만히 안방 쪽을 보고 있으려니 큼지막한 액자 하나가 걸려 있다. 천년대길(千年大吉), 대대손손 무병장수하며 우애하고 지내기를 바랐던 민초들의 소박한 꿈을 대신하는 말이다. 천년대길, 그 앞쪽 빨랫줄에는 옷들이 난분분 걸렸다. 물방울 블라우스, 흰 러닝셔츠, 베개 커버, 그리고…. 압권은 흙물이 점점이 튄 팬티 한 장이다. 안쓰러움이 스쳐간다. 값비싼 팬티가 잘도 팔려나가는 시대에 영동의 농군들은 흙물이 잔뜩 튄 팬티를 빨고 또 빨아 입는 것이다. 문득 바지 안쪽의 외국산 팬티 브랜드가 생각난다. 빨고 또 빨아 오래 입어야 하리라.
남편의 문패를 떼지 않고 살아가는 할머니의 부엌에 들어가니 양은솥 안에 잘 익은 옥수수가 여러 자루다. 출출하던 참에 두 자루를 꺼내 들고 덥석 깨물며 나온다. 그게 실수다.
◇김참판 고택의 앞에 위치한 100년 된 민가. 안방 입구에는 천년대길 액자가 걸려 있고, 그 앞에는 형형색색의 빨래가 걸려 있다.

“아니, 남자가 왜 부엌에 들어간대유. 배 고프면 밥을 사먹어야지 왜 남의 부엌에 들어가유? 남사스럽게.”
할머니의 눈초리가 사납다. 옥수수 두 자루가 아깝기 때문은 아니다. 남정네에게 부엌살림을 들켜버린 여심(女心)의 쑥스러움이 야속함으로 변해 다가온다.
김참판 고택의 이웃에서는 포도 다듬기가 한창이다. 하루에 3만원을 받고 아르바이트에 나선 임예순(72) 할머니는 농장주 장경만씨(67) 아내와 눈짓을 주고받으며 포도를 다듬어 상자에 담기에 바쁘다. 하루 3만원의 수입만이 초점은 아니다. 장경만씨의 아내가 몇 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실어증에 걸리는 바람에 눈짓으로 대화를 하며 말동무를 해줘야 하는 까닭이다.
“비가 그쳤으니 다행유. 하마터면 포도 농사 다 망칠 뻔했슈.”
임예순 할머니는 내 집 포도 농사인 것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장경만씨는 더 여유만만이다.
“봐유. 여기에 내 이름, 전화번호 다 적혀 있쥬? 포도알 터진 거 섞으면 한번은 속여도 두 번은 못 속여유. 신용으로 농사지어야 하는 시대가 왔다 이거예유.”
장경만씨는 한마디 더 보탠다.
◇영동은 어느 곳을 가든 검푸른 포도밭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최근에는 포도와 와인을 결합한 축제를 열어 지역 콘텐츠로 성공한 지방으로 꼽힌다.

“잘 나온 사진으로 뽑아서 꼭 보내줘유. 그리고 이건 가면서 먹어유.”
포도 몇 송이 얻어 들고 도마령을 향해 간다. 해발 800미터의 도마령을 향해 가는데 포도 농사 짓는 사람들의 인심이 계속 따라온다. 남편의 문패를 떼지 않고 100년 넘은 집에서 사는 할머니의 모습이 계속 따라온다.
도마령은 상촌면과 용화면을 잇는 고갯길이다. 고개 정상에 올라서면 골짜기마다 오지 마을을 품고 끝없이 굽이진 길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10여분 동안 찬바람을 맞고 있는 동안 고갯길에 나타난 자동차는 단 두 대뿐이다. 오간 자동차는 두 대뿐인데, 힘겹게 고갯길을 오르는 할머니가 나타난다. 등에는 걸망을 멨는데, 옷이 흠뻑 젖은 것을 보니 습기찬 산을 헤집고 다닌 게 분명하다. 오른발이 저절로 브레이크로 옮겨간다.
“할머니, 타세요.”
오 척도 안 돼 보이는 할머니가 걸음을 멈추더니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데, 세상 어떤 치아 미인보다 곱다. 땡볕에 얼굴이 검게 탔으니 가지런하게 드러난 치아가 눈부실 수밖에 없다.
“아니, 이 고갯길을 걸어서 넘으시는 거예요?”
“그럼유. 걷다 보면 금방 가유.”
충청도 사람들의 ‘금방’은 한 시간일 수도 있고, 두 시간일 수도 있다. 댁이 어디냐고 여쭈니 산 아래 마을 둔전리라니 최소한 한 시간 거리다.
“사람이 제일 무서운데 덥석 타시면 어떡해요?”
“다 똑같은 사람인데 뭐가 무서워유.”
◇괴목리 포도 농가에서 출하된 포도를 손질하고 있는 임예순(왼쪽), 장경만씨와 장씨의 부인. 임예순씨는 이곳에서 일하며 하루 일당 3만원을 받아 살림살이에 보탠다.

노인은 걸망을 열더니 집에 가서 깎아먹으라며 칡뿌리부터 내놓는다. 조금 전에는 포도향이 퍼졌는데, 이번에는 차 안이 이내 칡 향기로 가득해진다.
칠순이 넘은 할머니는 아들이 단 한 명뿐이란다. 당연히 며느리도 한 명인데, 당신은 아침 먹고 나면 걸망 챙겨 산에 오른 지 꽤 오래됐단다. 너댓새 산에 올라 칡과 나물을 캐다 영동 장터에 내다 팔기 위해서다.
“많이 캐지도 못하지만 영동까지 왔다 갔다 하려면 차비가 팔천 원 들어유. 그래서 모았다가 장날 나가유.”
노인의 말에 힘이 없다. 다시 안쓰러운 마음이 스쳐간다. 칠순 노인이 아들 하나만 낳고 말았다면 사연이 있는 것, 남편이 일찍 사망했거나 당신의 몸이 안 좋거나 둘 중의 하나인 것이다.
도마령 고갯길을 내려와 둔전리에 다다르니 노인이 집에 가서 물이라도 한 잔 마시고 가란다. 고개를 젓는다. 어차피 고갯길 내려오는 참에 노인 한 분 태웠을 뿐이니 손님 대접 받을 이유란 없다. 노인이 당신의 집을 향해 천천히 언덕길을 오른다. 가슴이 싸해 온다. 등에 진 걸망이 노인의 등판을 가득 채우고 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영동의 곳곳에서 만난 이들은 거개가 할머니들, 또한 생각해 보니 그들의 얼굴에는 탐욕의 빛 없이 지금의 삶에 순응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이 집을 만들고 가족을 만든다.

 

강원도 화천

'노란 코스모스' 가을인사
 ◇온통 군부대로 둘러싸인 화악산 주변 탱크 저지벽 비탈에 노랑코스모스 군락이 자리 잡고 있다. 노랑코스모스는 멕시코 원산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잘 자란다.
가을은 강원도에서부터 온다. 강원도 중에서도 첩첩산중으로 유명한 화천 땅 짓푸른 하늘에 흰구름 몇 점들이 흘러간다. 화악산 깊은 산을 타고 내려온 따끈한 햇살이 손바닥 만한 논밭들에 오래 머문다. 그럼에도 가장 눈에 띄는 풍경은 민간인보다 군인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는 것이고, 5번 국도에는 일반 승용차보다 군용 트럭이나 지프가 많이 달린다는 것이다. 화천은 그런 곳이다. 민간인보다 군인 수가 훨씬 많아 보이는… 상병 계급장을 단 군인 한 명을 붙들고 묻는다.

“날씨가 선선해져서 지낼 만하겠네?”

“아닙니다. 여긴 여름에도 별로 안 더웠는데요. 가을 되면 겨울 보낼 걱정 때문에 오히려 겁나죠.”

“요즘 군인 방한복이 얼마나 잘 나오는데 겨울 걱정을 해?”

“그래도 추운 건 싫습니다.”

상병은 그러면서도 씩 웃는다. 그렇기도 하겠다. 군복 입은 사람에게 호시절을 즐기는 건 언감생심인 법이다. 전방 지역에서 고된 군대 생활하는 젊은이를 만나니 병장 계급 달고 휴가 나와 있는 아들 녀석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위로 갈수록 힘들어요. 요즘 군대는 후임에게 잘 보여야 되거든요. 속 썩여도 말로만 타일러야 되는데 아무리 타일러도 속 썩이는 후임들이 있으니까. 그래도 병장 되니까 계급장이 꽉 차서 기분이 좋습니다.”

상병과 헤어져 화천 붕어섬을 향해 가는데 탱크 저지벽 바깥의 비탈에 노랑코스모스 군락지가 눈에 띈다. 환상적이다. 멕시코 원산의 노랑코스모스가 산비탈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그 부분만 놓고 보면 멕시코의 어느 지점에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화천읍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붕어섬 앞 호수에서 카약 선수들이 힘차게 패들을 젓고 있다.

돈 안 들이고 멕시코 정취를 느끼는 셈이다. 노랑코스모스 군락에 취해 담배 한 개비 피워 물고 나니 노랑코스모스의 색깔이 바뀐다. 이게 무슨 조화일까. 출장에서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니 노랑코스모스에는 알칼리성을 만나면 주황이나 붉은색으로 변하는 색소 ‘플라본’이 들어 있단다. 담배 연기가 강알칼리성이니 플라본이 반응해 순간적으로 마술을 펼치는 것이다. 노랑코스모스의 마술, 일종의 가을여행 보너스이고 사면초가에 부딪혀 있는 끽연가들에게는 잠깐의 위로이다.

붕어섬에 닿는다. 춘천댐이 생기면서 조성된 호수에 앞뒤가 뾰족한 배들이 점점이 떠 있다. 카약 경기 연습을 하는 선수들의 얼굴이 완전히 구릿빛이다. 호수를 가르는 선수들의 입에서 리듬을 맞추기 위한 구령 소리가 들려오고, 패들이 가을 햇살 속으로 떠올랐다가 이내 물속으로 들어가 배를 밀어낸다. 누구 한 사람, 패들을 조금만 늦게 물에 담가도 배는 똑바로 나가지 못하니 구령을 맞추는 일은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가장 디지털적인 신호다.

배에서 빠져나온 학생 한 명을 붙들고 묻는다.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은데…”

“재미도 있지만 무지 힘들어요.”

“저거, 전부 카약이지?”

“아닌데요. 저기 저 사람 보이죠? 물갈퀴가 한쪽에만 있는 건 캐나디안 카누예요. 물갈퀴가 양쪽 모두에 있으면 그건 카약이구요.”

이런 경우, 무식이 탈이다. 하지만 어린 학생에게도 배울 게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여행길의 즐거움이란 낯선 이들에게 말을 걸어 소통이 가능하면 사람 재산을 늘리는 데 있고, 궁금한 것을 해소해 가며 교양을 쌓는 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첩첩산중의 계곡을 따라 평화의 댐을 향해 내려가는 물줄기. 평화의 댐은 북한의 물공격에 대비한다며 대대적인 국민 성금 모금 운동을 벌여 만든 냉전시대의 산물이다

물끄러미 호수의 물살을 지켜본다. 양 끝이 뾰족한 배가 나타나고 네 명의 여학생이 일사불란하게 패들을 움직인다. 양쪽에 물갈퀴가 있으니 카약이다. 배가 쑥쑥 나아가는데 그 속도가 놀랍다. 파인더에 들어와 셔터를 누를라 치면 벌써 저만큼 달아나니 모습에서 한 가지 지혜가 떨어진다.

“아무리 작은 것도 우습게 볼 것은 없다.”

차를 돌려 평화의 댐을 향해 달려가니 이내 아흔아홉 고개가 나타난다. 급하게 휘어진 커브가 계속 나타나면서 11년 된 승용차 차창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날아든다. 솔직히, 춥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흔아홉 고개를 넘는 이유는 평화의 댐은 둘째치고 해산터널을 지나고 싶어서이다. 해를 제일 먼저 받는다는 의미에서 붙은 해산의 터널은 우리나라 ‘최고봉 최북단 최장 터널’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 만큼 화천·양구 일대의 군인들은 지옥 같은 행군을 할 때 이 터널을 지나길 가장 반긴다. 2㎞에 이르는 터널의 자연냉방 기운이 행군에 지친 군인들의 피로를 상큼하게 풀어주기 때문이다.

터널의 위치가 해발 680m이니 한여름 해산터널 안이 얼마나 시원할지는 말하나 마나이다. 해산터널은 국내에서 최북단,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터널. 해산터널의 길이가 재미있다. 1986m. 1986년, 북한의 물 공격에 대비한다면서 국민성금으로 평화의 댐을 막으면서 터널의 길이도 1986m로 맞춘 것이다. 냉전시대의 유산이지만, 거꾸로 얘기하면 그 냉전이 교통량 드문 화천 산골에 독특한 터널을 ‘선물’한 셈이다.

◇평화의 댐 아래쪽에 자리한 비목공원에는 6·25전쟁에 희생당한 장교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한 돌무덤이 복원돼 있다. 애창곡 ‘비목’의 가사는 이 돌무덤에서 착상된 것이다.

이제 ‘비목(碑木)’을 얘기해야 할 때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이 유명한 노래의 작사자는 6·25전쟁 때 화천 지역에서 근무한 장교 출신 한명희씨다. 한씨는 비무장지대(DMZ) 초소장으로 근무할 때 DMZ에서 돌무덤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옆에는 철모와 카빈 소총이 놓여 있었다. 무덤 머리에는 비목이 십자가 모양으로 서 있었다. 젊은 장교 한씨는 젊은이의 운명 앞에서 비감에 잠겼다. 한씨는 공교롭게도 제대 후 방송국에 취직해 음악 프로듀서로 근무하다가 작곡가 장일남씨로부터 작사를 의뢰받고는 비무장지대의 돌무덤을 떠올려 가사를 지었고, 그 가사는 오랫동안 우리 앞에서 심금을 울려왔다.

그 비목은 지금 평화의 댐 아래쪽 비목공원에 들어서 있다. 십자가 모양의 비목 한 그루가 파로호 옆 둔덕에 서 있고, 비목 위에는 녹슨 철모가 을씨년스럽게 올라서 있다. 젊은 여성 몇이 비목 옆에 서 있다가 이내 자리를 옮기며 투덜거린다.

“별거 아니네 뭐.”

사람이 누워 있는 곳을 상징하는 모습이 별것일 수 있는가.

대단한 볼거리를 기대한 사람은 분명 가사를 음미하지 않고 그저 리듬만 즐긴 것이리라. 그러거나 말거나, 앙상한 비목 위로 어둠이 내려앉는다. 아직은 깊은 가을이 아닌데 벌써 바람이 차다

 

충남 공주시 계룡 갑사
대웅전 앞뜰 연꽃 위에잠자리 좌선 '삼매경'
 ◇대웅전 앞 연꽃 위에 착지한 가을 잠자리의 자태. 녀석도 때로는 참선하듯 앉아 부처님 말씀을 듣는다.
절집 마당 앞에 연밭이 널찍하게 펼쳐져 있다. 더러는 꽃이 피었는데, 흔치 않은 백련들이 수줍은 표정으로 객을 맞는다. 전남 무안의 백련지에 비할 바 아니지만 곳곳에서 홍련을 보아온 입장에서는 꽤 반갑다. 연잎 아래에는 개구리밥이 못을 덮고 있다. 절을 찾아온 사람들이 일주문으로 들어설 생각은 하지 않고 연밭에서 수런거린다.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아두는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연꽃은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은, 우리네 사람살이와 닮은 것이다.

◇교육자로 정년 퇴임한 김상철옹. 무욕의 삶을 살아온 탓인지 피부색이 젊은이 못지않게 곱고 탄력 있다.

갑사의 갑은 ‘甲’이다. 말하면 무엇하랴. 한반도 어느 사찰과 견주어도 으뜸이라는 뜻이다. 그럴 만도 하다.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 최초의 절을 세우고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땅 계룡을 지나다가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발현하기에 발걸음을 멈추고 창건(420년)했다는 절이 갑사이니 역사가 1600년 가까이에 이른다.

절의 역사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절에 이르는 내내 계룡산 자락에서 물살이 흘러내려 계곡을 이룬다. 아직은 녹음이 여전한 숲 사이로 계곡 물 소리가 스며든다. 절은 절이되 산과 물이 화음을 이룬 절이다. 그뿐인가. 절집 아래 대나무숲으로 둘러싸인 공터에서 숨을 고르고 있자니 낯선 표지판이 보인다. 자연의 이치를 일깨우는 자연 생태 Q&A 게시판인데,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대나무의 속은 왜 비었을까요?’

질문이 씌어 있는 상자의 뚜껑을 열면 답이 나온다.

‘대나무의 줄기를 이루는 벽은 자라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그 안쪽은 세포분열이 느리기 때문입니다.’

이쯤 되면, 어른 손에 이끌려 억지로 절집 나들이에 나선 아이들에게는 썩 맞춤한 환경교육이다. 이 나라 모든 절과 교회, 성당이 자연에 빚지고 있으면서도 자연의 이치를 가르치는 투자에는 인색한데 갑사에서 이런 설치물을 만난 것은 의외의 소득이다.

◇계룡갑사 대웅전 앞에 연꽃 항아리가 놓이고 그 위로는 극락왕생을 비는 연등이 가득 매달렸다. 그렇지만 김상철옹의 부동심에 기대면 극락왕생은 허황한 욕망일 수밖에 없다.

소득이 이뿐인가. 갑사에는 쇠로 만든 당간이 우뚝 솟아 있다. 보통은 양 옆으로 세워진 당간 지주의 구멍에 나무 당간이 걸려 있는 게 상식인데 철 당간이 솟아 있으니 이 또한 갑사만의 콘텐츠다. 철통 24개를 이어 붙여 15미터 높이까지 솟구치도록 당간을 만들었으니 신라시대 때 갑사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것만 보더라도 갑사는 중창을 거듭해 가며 절의 규모만 넓히는 데 급급한 사찰들에 일침이 될 수 있다.

대웅전을 향해 대적전을 지나는데 거기, 늦여름 볕이 내리쬐는 돌담 아래에 한 노인이 부처와 다름없이 좌정을 하고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참선에 몰입해 있는 참이다. 염치 불구하고 그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그가 참선을 끝내기를 기다린다.

“아직은 날씨가 더운데 좌정하고 계시느라 힘드셨겠네요.”

“뭘유. 힘들게 뭐 있어유. 부동심을 얻으려면 누구나 그래야 해유.”

이쯤 되면 장난기가 발동돼 잊고 있던 충청도 사투리가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다.

“저도 고향은 스산예유. 부동심이라뉴?”

“부동심유? 그건 누가 죽인다고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거쥬. 죽는 순간에도 죽음이 두렵지 않아지는 거예유. 어떤 상황이 생겼다구 쳐유. 그 상황을 쫓아가면 괴롭겠쥬?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겄슈? 그 상황에 끌려들어가지 않으면 편한 거예유. 지혜란 게 어딨슈.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지혜가 쏟아지게 돼 있는 거예유. 그게 바로 해탈예유.”

맞다. 끌려가는 자에게 무슨 지혜가 다가올 것인가. 갈지자로 가는 마음에 무슨 해탈의 그림자가 다가올 것인가. 그럼에도 다시 짓궂어진다.

“그래도, 여긴 불전 앞인데 부처님 말씀을 들으러 오신 거 아닌가 보쥬.”

노인은 빙그레 웃는다.

◇계룡갑사 대적전 돌담 아래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 김상철옹. 부동심을 얻으면 지혜의 문이 저절로 열린다고 했다.

“부처님이 원래 돈 갖다 바치라고 저러고 계신 게 아니라니께유. 와서 절하라구 저러구 계신 게 아니구유. 불경 달달 외워서 읊으라구 누가 그랬대유? 아녀유.”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길게 얘기해 봐야 노인의 얘기에 감복할 일 외에는 없는 것이다. 이런 때, 얘기자락을 늘이는 것은 속세의 삶으로 화제를 바꾸는 것이다.

노인의 성함은 김상철, 갑사 바로 아래 하대리가 고향이라고 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침 먹고 나서 산책 삼아 갑사에 올랐다가 내려간단다. 5남매를 두었는데 딸 셋은 모두 미국에 가 있고, 아들 중 한 명은 한의사, 또 다른 한 명은 수의사라는 얘기를 들려준다. 그만하면 자식 농사를 썩 훌륭하게 지은 터수다. 자식 농사 잘 지은 사람을 덕 있는 사람으로 치면 자식 농사 제대로 못 지은 사람은 덕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꼴이니, 자식들의 신분과 학력으로 노인의 삶을 재단할 일은 아니다 싶어 다시 말꼬리를 늘인다.

노인의 삶에 대해 질문하니, 그는 오랫동안 교사 생활을 했고, 교장으로 정년 퇴임했다는 얘기가 돌아온다. 그러나 그는 내가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다며 벤치에서 일어난다. 일흔여섯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걷는 맵시가 꼿꼿하기 이를 데 없다. 하긴, 삶과 죽음이 따로 없는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부동심으로 무장하고 있으니 걸음걸이가 흔들릴 까닭이 없다.

낯선 이가 찾아와 도둑 촬영을 하고, 신상명세 자꾸 캐물으니 노인은 도인처럼 몇 마디 흘리고는 걸음발을 빨리한다.

◇일주문 들어서기 전에 만날 수 있는 연밭. 보기 드물게 백련이 많이 피어 절집 나들이에 나선 사람들이 한동안 발길을 멈춘다.

“부처님도 이게 진리다 이렇게 주장하지 않았슈. 그런데 내가 무슨 진리를 얘기해유?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도 부동심이 아니쥬.”

김상철옹의 얼굴에는 더 이상 얘기할 게 없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숲길을 내려가는 옹의 걸음걸이에서 한평생 교육자로 일한 후 초심으로 돌아간 사람의 의연함이 뚝뚝 떨어진다.

갑사에 갔으나 말씀을 들은 것은 전직 교장 김상철옹의 부동심이고, 눈에 들어온 것은 갑사 대웅전 앞에 놓인 연꽃 항아리다. 연꽃 항아리 위로 ‘극락왕생’이 씌어진 연등이 가득 매달려 있는데 거기에 김옹의 얘기가 겹쳐진다.

“부동심을 얻으면 죽고 사는 것의 경계가 읎슈. 그런데 극락으로 가고 못 가고가 무슨 상관이래유.”

그렇구나. 노인은 절 아래로 내려가고 없는데, 연꽃 위의 잠자리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하늘은 맑고, 연꽃의 자태는 곱다. 부동심을 얻지 못했으니 아름다운 생명체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계룡갑사에 가을보다 먼저 한 노인의 화두가 당도해 있다

 

제주 두모악 갤러리
"선생님은 저기서 쉬고 계세요”
 ◇김영갑씨가 투병할 때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 김영갑씨는 감나무 아래에서 숨 쉬고 있지만 그를 대신한 조각은 사계절 내내 지상에서 사람들을 맞는다.
한라산 자락 아래, 폐교된 초등학교가 전시 공간으로 변신한 두모악 갤러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사진작가 김영갑의 영혼이 서린 곳이기 때문이다. 그 갤러리 건물의 뒤쪽에 항아리와 카메라 모습이 보인다. 사진 찍는 사람은 간 데 없고, 삼각대에 카메라만 덜렁 얹어져 있는데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떤 이는 대패질을 하고, 어떤 이는 망치질을 하고 있다. 목소리들이 정겹다. 알고 보니 항아리들 앞에 세워 놓은 카메라는 두모악지기를 맡고 있는 박훈일 관장의 것이란다.

제주도 성산읍 삼달리, 섭지코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두모악갤러리에 들어서면 일순 모든 긴장이 스르르 풀린다. 제주의 산과 바다와 밭을 축소해 놓은 듯한 운동장은 이름 그대로 제주도 미니어처에 가깝지만 소꿉처럼 귀엽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공간을 만든 사진작가 김영갑은 2년 전 이맘때(5월29일), 나이 50이 되기도 전에 나비처럼 가벼운 몸이 되어 이 땅을 떠났다. 온몸의 근육이 삭아 없어져 카메라를 들 힘조차 없게 되는 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일명 루게릭병)과 싸우다 영면한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두모악 갤러리는 김영갑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은 채 여전히 우리에게 제주의 아우라를 전해 주는 장소로 좌정해 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5개월 정도 함께 일했는데 지금도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안타까움을 안은 채 턱을 손으로 괴고 있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1년 동안 일본에 나가 있었는데, 이 공간을 잊을 수 없어 다시 돌아와 갤러리 일을 보고 있어요.”

스님처럼 머리를 빡빡 깎은 학예사 이재은(31)씨가 갤러리 밖으로 나오더니 ‘선생님은 저기서 쉬고 계세요’라며 연민 어린 표정을 짓는다. 세상 어떤 갤러리의 직원보다 친절한데, 가식적인 느낌은 전혀 없다. 어떤 점에서는 사진작가 김영갑이 몇m 앞쯤에서 실제로 쉬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자그마한 키의 감나무 한 그루가 보이고, 그 옆에 토우 한 점이 서 있다. 카메라를 들 힘도 없고, 스스로 목을 가눌 힘도 없어 손으로 턱을 받치고 견뎠다는 생전의 모습 그대로이다.

◇사진 작가 김영갑씨가 생전에 폐교 운동장에 가꾼 두모악 갤러리의 제주도 상징소들. 오름, 한라산, 나무와 꽃들의 모습에서는 인위적인 느낌이 거의 묻어나지 않는다. (왼쪽)
◇나무와 돌에 둘러싸인 두모악 갤러리 입구. 학교 교사의 외형을 거의 변화시키지 않아 더욱 자연친화적인 멋을 풍긴다.

“그러니까 수목장을 하셨다는 얘기죠?”

문득, 사진 작품만 보았지 그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하고 두모악갤러리를 찾았다는 게 안타까워진다. 사진 작업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한 번 대면할 기회가 있겠거니 여겼는데, 그는 홀씨처럼 날아가 버렸으니 통성명할 기회란 다시 없는 것이다.

김영갑이 누구인가. 그는 고향 부여를 떠나 제주 땅을 밟은 이후 제주의 바람과 바다와 산에 취해 제주도 사진만을 찍은,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제주를 사랑한 사람이다. 섬이 좁다고는 하나 비바람 고스란히 맞으며 제주 전역을 누비고 다닌 까닭에 작곡가 김희갑 양인자 부부는 자동차 한 대를 선물하면서 딱 한마디 했다고 하지 않는가.

“사진 찍는 것도 힘든데 비 맞고 다니지 마라.”

김영갑은 사진관을 하는 친구 아버지 때문에 사진에 입문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한양공고를 졸업한 후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형이 카메라를 선물하자 그것을 들고 친구 아버지의 사진관에 찾아가 잔심부름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사진을 배운 독학파였던 것이다. 필자 역시 그와 유사한 기억을 갖고 있으니, 필자는 소풍 날이 되면 사진관을 하는 동네 형의 비윗장을 맞춰가면서 카메라를 빌려온 후 며칠 동안 반납을 안 하고 속을 썩인 기억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윗길이다. 동네 사진관 주인에게 카메라를 빌리기는 했지만 사진 잘 찍는 비결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고 어깨너머로 구경도 하지 않고 독학했기 때문이다. 아니다. 김영갑이 윗길이다. 김영갑은 마음에 드는 피사체가 발견되면 스스로 몸을 묶고 절벽에 매달려 셔터를 눌렀고, 그렇게 해서 얻은 필름이 30만 장에 이른다. 필자는 낯선 거리에서 험악한 사람들과 대거리를 한 적은 있으나 쓸모없는 필름까지 합해도 30만 장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김영갑씨의 영혼이 쉬고 있는 감나무 주변. 갤러리 바로 앞에 자리해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잠시 숙연한 느낌에 젖어들곤 한다. (왼쪽)
◇두모악갤러리는 폐교된 ‘삼달국민학교’를 임대해 전시 공간으로 만든 제주도의 문화 공간이다. 사진 작가 김영갑씨는 부여 출신이지만 오직 제주도 사진만 찍었다.

갤러리 옥상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을 딛는다. 여기저기 널빤지가 삭아 자칫하면 발목이 낄 것 같은데, 막상 오르고 보니 거기에 제주의 모든 것이 있다. 오름, 묘, 때죽나무, 한라산, 현무암, 해녀들의 걸망이 운동장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사진에 국한하지 않고, 제주의 모든 형상을 자신의 삶터에 가꾸고자 했던 김영갑의 모습이 눈에 잡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가 럭셔리한 갤러리를 만들어 수입을 늘려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전시실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 하지만 식물원이기도 하고, 조각 전시장이기도 한 학교 운동장에 들어서는 것은 무료인 것이다. 그는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던 것이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꿉장난하듯이 갤러리를 운영했던 것뿐이다. 그래서 두모악갤러리에서는 자본의 냄새 대신 환경 친화적 요소만 가득하다.

“제주도 바람이란 게 참 묘하거든요. 가슴을 싸악 훑어 내리는 그런 뭐가 있으니까요. 김영갑 선생님도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저도 그래요. 그래서 다시 돌아왔구요.”

이재은씨가 제스처까지 써가며 가슴을 훑어 내는 제주 바람을 표현하려 애쓴다. 어김없는 동심이다. 생전의 김영갑과 함께 두모악갤러리를 꾸며온 이재은씨는 박훈일씨와 함께 김영갑 2주기 추모전을 준비 중이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의 끝자락에서 10월까지 제주 산하의 아름다움을 빛낸 사진들로 섬사람들과 뭍사람들의 마음을 적시려는 것이다. 하지만 걱정이 태산이다. 입장료로는 교육청에 내야 할 임대료며 인건비 대기도 빠듯하니 전시회 준비라고 해서 순탄할 리 없다.

이재은씨는 관람객 안내를 위해 전시실로 돌아가고, 현무암과 꽃나무들로 가득한 운동장을 서성여 본다. 도 닦는 마음으로 10년만 살아보자고 제주 땅을 밟았던 사내가 20년 이상 제주의 바람 곁에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생전에 “나는 제주의 자연을 더 멋지게 보이려고 이미지를 가공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제주의 본질을 보여 주고 싶었으나 그 본질은 내 카메라가 담아내기 전에 훌쩍 날아가 버리곤 했다”고 자신의 사진에 대해 겸양했다. 그러면서 이 남자는 제주의 황홀한 순간을 맞을 수만 있다면 간장 고추장 된장에 밥 한 술 먹으면 될 뿐이라면서도 죽을 때가 되면 필름을 모두 불태우겠다고 호언했었다.

◇두모악갤러리 앞바다에서 물질에 나선 해녀. 불가해한 생활력으로 집안을 이끌어온 해녀들은 막상 자식 세대에는 물질을 물려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가 만나는 김영갑의 사진은 그 사투의 결과물로 탄생한 것인데, 그러니 더 애처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스럽다. 무엇보다도, 그는 영영 떠나지 않은 채 자신이 만든 갤러리의 한쪽, 감나무 밑에서 사람들의 발길 소리를 듣고 있으니 말이다. 그에게서 사진을 배웠던 박훈일 원장이 갤러리두모악을 지키고 있고, 이재은씨 역시 일본에서 돌아와 김영갑의 향기를 민들레 홀씨처럼 멀리까지 퍼뜨리고 있으니 말이다.

두모악, 설악산의 옛 이름에서 지금 김영갑의 사진이 다시 살아난다. 잘들 있었어? 비 맞고 다니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자동차를 선물 받았던 그가 이제는 비 몇 모금에도 몸이 젖는 감나무 아래 잠들어 있다. 하지만 그는 곧이라도 몸을 일으켜 카메라를 들고 갤러리 밖으로 나설 것 같다. 그는, 살아 있다.

 

경북 청송 진보 장터
사람 만나는 재미… 장터의 아우라
 ◇산비탈에 만든 고추밭에 모종을 심고 있는 진보 들녘의 부부. 남편은 아내를 위해 허리를 폈다 숙였다는 하는 일을 도맡아 한다.
장날의 신명은 흥청거림에 있다. 사람이 자연을 만났을 때도 좋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일단 ‘이바구’가 가능하니 장터를 찾는 사람들은 실상, 물건을 사기 전에 사람 만나는 재미부터 꿈꾼다. 하지만 장터의 흥청거림이 점점 사라지는 게 현실이니 어디를 가도 장터의 아우라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곳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장터 구경의 맛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첩첩산중의 고장으로 유명한 청송 진보 장터를 향해 간다.

거짓말 좀 보태면 진보 장터에는 물건 사러 온 사람과 장사하는 사람의 수가 비슷하다. 장터가 왜 이리 썰렁하냐는 물음을 던지면 고추 모종을 해야 하는 시기이니 주말에는 장터가 썰렁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 돌아온다. 일손이 부족해 도회지에 나가 있는 아들 딸들을 불러 가족이 함께 고추 모종을 심는다는 얘기다. 고령화사회가 실감나는 얘기다.

그렇다고 모처럼 찾아간 시골 장터에서 이내 돌아설 수는 없으니 기웃기웃하다가 장터에 철퍼덕 앉아 톱을 손질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톱은 멀쩡한데 망치질을 계속하는 사연이 궁금해 뭐하시는 거냐고 질문하니 톱날이 일자형으로 돼 있는 것을 오른쪽 왼쪽으로 자리 배치하는 중이란다. 대장간에서 톱날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이 나무를 베기 위해서는 톱날이 서로 대칭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것은 기계적으로 되지 않는단다.

“이래 비도 이걸로 자식 농사 짓고, 지금도 입에 풀칠하고 있는 기라.”

약간 허풍이려니 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거든다.

“맞다니, 내 옆에서 다 봤으니 하는 얘기라.”

몇 마디 더 얘기를 나눠 보니 이 양반은 올해 예순여섯 된 정대봉씨이고, 둘째아들은 한국관광호텔대학의 식품영양학과 교수인 정상열씨란다. 이어서 며느리 이야기가 뒤따른다.

“내, 며느리는 중앙일간지의 기자라. 며느리를 을매나 잘 얻었는지….”

큰아들이라고 해서 뭣한 것은 아닌 것이 당신의 가업을 이어받아 풀무질을 하며 아버지를 돕고 있단다. 이 정도면 뭐, 장터에 앉아 톱을 손질하지 않아도 될 법하다.

“먹고는 살지만 내 톱을 사러 오는 단골이 을매나 많은데. 30년 단골도 있다말이지.”

 

이쯤 되면 장인의 반열이다. 유명짜한 장인들도 많지만, 그런 허명에 휘둘리지 않고 단골들을 위해 복무하는 장터 상인 역시 흔한 법은 아니지 않은가.

막걸리 한 잔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을 물리치고 장터를 다시 누빈다. 버스정류장에는 노인들이 무료한 듯 앉아 있는데, 정류장 앞에서 생선 트럭을 세워놓은 사내가 노인들을 말벗해주고 있다. 가만히 보니 같은 동네의 남자인 듯한데 생긴 모습이 탤런트 뺨치게 잘생겼다. 진보는 일흔 가까이 됐으면서도 여전히 미남 소리를 듣는, 소설가 김주영 선생의 고향인데 진보는 아무래도 미남을 쏟아내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다. 생김새만 번듯한가. 아니다. 생선트럭 장수는 옆의 또 다른 트럭에 실린 물건들까지 함께 봐주고 있다. 트럭을 두 대씩 가지고 다니면서 장사하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란다.

“친구 트럭인데 지금 밥 먹으로 갔으니 내가 봐줘야 한다 이거요.”

하긴, 질문부터 잘못됐다. 트럭 두 대를 가지고 장사한다면, 또 한 대의 트럭은 누가 운전해서 이 장터 저 장터를 찾아다닌단 말인가.

버스터미널 쪽으로 가니 인도에 임시 옷가게를 차려놓은 아낙네가 보인다. 역시 흥정하는 손님 한 명 없다. 슬그머니 농담기가 도져 말을 건넨다.

“아주머니, 아예 공치고 계시네.”

“그러게요. 뭐, 공치는 날도 있고 많이 버는 날도 있고. 그게 장사지요.”

역시 현답이 돌아온다. 손님 탓하는 게 아니라 장사의 ABC를 읊고 있으니 늘 불경기만 탓하는 기업들의 하소연과는 딴판이다. 내일 장사는 잘될 것이라는 낙관이 없으면 어찌 장사를 할 수 있겠는가. 그게 다는 아니다. 이 아낙은 몸을 비스듬히 눕혀 아예 책을 읽고 있다.

“우리나라 장사꾼들 중에서 아주머니가 최고 지성인이네.”

“호호, 그래요? 심심한데 가만 있으면 졸음만 오니까 책이라도 봐야지.”

가만 들어 보니, 진보 장터의 장사꾼들은 모두 세상만사에 초탈한 것 같다. 글감 찾아, 사진감 찾아 애면글면 동분서주하는 작가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것이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다가오니 벌이에 신경 써야 할 사람들의 얼굴에 전혀 초조한 기색이 없다니. 별일이다. 산 깊은 곳에 살다 보니 어쩌면 낙망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경계할 일이라는 지혜를 스스로 터득한 것 아닐까 하는 느낌이 솟구친다.

◇장날을 맞아 장터에 나온 노인들은 버스가 오거나 말거나 정류장에 앉아 한담을 꽃피운다. 그들 중 한 명이 생선 트럭 장수와 반가운 해후를 하고 있다.
◇한평생 톱과 관련한 일을 해온 정대봉씨가 망치질로 톱날을 손질하고 있다. 그는 자식 농사만큼은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만큼 잘 지었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진보 장터의 진객 중 하나는 닭, 오리, 토끼 등이다. 팔려나갈 손님을 기다리느라 한나절 동안 화사한 햇살 아래 진 치고 있던 중닭들이 목을 축이기 위해 물그릇 앞에서 앞을 다투고 있다.

장터를 쏘다니다 보면 저절로 시장기가 동하니 국밥집을 찾아 들어간다. 역시 손님이 없으니 식당 아지매는 낮잠을 자는 중이다. 손님을 반기는 게 아니라 잠 깨웠다고 타박하는 눈치다. 국밥 시켜 놓고 식당 앞을 어정거린다. 트럭 옆에서 병아리, 오리, 토끼, 강아지를 파는 아주머니가 펑퍼짐하게 앉아 있다. 손님은 없고, 동네 아이들 몇이 강아지를 들었다 놓았다 해가며 동심을 짓까불고 있다. 손님 없는데 아이들이 나서 강아지와 놀라치면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이 아주머니 역시 마냥 태평이다. 병아리는 3000원, 오리는 2500원, 토끼는 5000원, 강아지는 4만, 5만원 한단다. 식당에서는 오리 요리가 한참 비싼데도 난전에서는 병아리가 비싼 게 특이하다.

“손님이 없네.”

“오늘이 그런 날이라예.”

“그러게, 집에서 편히 쉬시지 않고 뭐하러 나와?”

“뭐하러 나오긴. 영감이 장사하러 나가자고 하니까 나와야지.”

“그래, 한 달에 얼마나 버시는데?”

“을매나 벌긴. 그건 알아서 뭐하게?”

그 말도 맞다. 한 달에 얼마 버는지 알면 어쩌겠는가. 많이 벌었다고 용돈 타 쓸 일도 아니고, 못 벌었다고 모자라는 돈을 벌충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국밥집 주인이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다. 쓸데없는 이바구 그만하고 들어와서 밥 먹으라는 뜻이다. 하긴,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지만 장터 인심을 잔뜩 삼켰더니 마음속으로는 배가 잔뜩 부른 듯도 하다. 다음 장날에는 손님이 잔뜩 쏟아져 나와 대박이 나야 할 텐데, 진보 장터 마당을 휘 둘러보니 하오의 햇살만 가득하다.

 

충남 서천 홍원항

삶이 아무리 황홀하다 한들… 삶이 아무리 처연하다 한들…

모두들 바빠졌다. 몸이 근질거리는 것은 둘째치고, 눈만 뜨면 꽃이 어른거려 방구들 지고 누워 있을 수가 없다. 어디로든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것은 그야말로 봄꽃의 책임이며, 봄바람의 책임이다.
봄 주꾸미, 가을 전어로 유명한 홍원항에 들어서니 갯바위에는 사내 세 명이 선 채로 낚시를 던져 놓고 있다. 시원스런 입질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앞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은 ‘짱’이다.
“잘 잡혀요?”
“그럭저럭요. 뭐, 잡혀야 맛인가요.”
낚시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대체로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라는 데 있다. 고기가 잘 잡히면 잘 잡혀서 좋지만, 그게 신통찮으면 바람 한번 잘 쐤다고 여기는 축이다.
방파제 끝자락의 등대 앞에서는 잠수부 몇 사람이 산소통과 물갈퀴를 벗어놓은 채 돗자리를 깔아놓고 찌개를 끓여 먹고 있다. 어떤 이는 잠수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인적 드문 방파제 아래쪽으로 내려서는데, 어쩐지 희색이 만면하다. 가만 보니, 아이스박스 안에 바다에서 건져 올린 해삼이 만만치 않다. 일당은 하고도 남았겠다는 생각이다. 바다 인삼으로 불리는 해삼, 아이스박스 안에 든 해삼은 검은 기운이 감돌고 탁하다. 일식집에서 보던 뽀샤시한 빛과 사뭇 대조적인 것이, 역시 자연산은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다.
◇나무 위쪽에서는 꽃이 피고, 나무 아래에서는 떨어진 꽃잎이 땅을 덮는다. 마량리 동백숲에서만 볼 수 있는 장관이다.

아예 멀리 갯바위 낚시를 나갔던 사람들이 낚싯배를 타고 물길을 가르며 항구 쪽으로 들어오는데, 항구에 정박 중인 고깃배에서는 어구를 손질하는 어부들의 손길이 바쁘다. 어떤 이는 비교적 한가하게 시간을 낚고, 어떤 이는 다시 바다로 나가기 위해 어구를 손질하고…. 주꾸미 축제는 끝났지만 출어는 계속돼야 한다. 홍원항이 다시 흥청거리는 것을 보려면 가을 전어축제 때까지는 기다려야 하니 그때까지 또 부지런히 바다농사를 지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꽃구경하기 좋은 날씨라 해도 노동의 현장은 그래서 엄숙하다.
홍원항은 오른쪽 왼쪽으로 절경을 끼고 있다. 오른쪽으로는 춘장대와 무창포 해수욕장이요, 왼쪽으로는 그 유명한 마량리 동백나무숲이다. 홍원항에서 주꾸미 맛을 즐긴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해변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은 바로, 홍원항에서 빤히 바라다보이는 곳에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기 때문 아닌가.
무창포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해변에는 동심이 철철 넘치고 있다. 모래집을 짓는 아이들은 벌써 종아리 위로 바지를 걷어올렸다. 어떤 녀석은 어디서 구했는지 작대기 하나를 들고 국어 공부를 하는 중이다. 가만히 지켜보니 작대기 끝에서 ‘아버지’라는 글씨가 나타난다. 아마도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모양이다. 한 녀석은 모자를 지긋이 눌러쓰고 모래 탑을 쌓는 중이다. 별무늬 셔츠를 입은 모습이 제법 터프해 보이는데, 아니나 다를까 녀석의 입심이 요란하다.
◇왜 찍어요? 어른에게도 호통을 치는 동심의 주인공. 모래톱을 쌓기에 열중인 녀석은 벌써 바지를 종아리 위까지 걷어올렸다.

◇해변의 아이들은 봄을 즐기기만 하면 되지만 포구 쪽 식당 주인의 아이는 장사하는 법부터 익힌다. 손님 접대하기 바쁜 어른들 곁에서 벗어난 꼬마가 건어물을 뒤집어 보이고 있다.

“왜 찍어요?”
이런, 거의 맞먹자는 투 아닌가. 문득 말문이 막힌다. 어른들 앞에서도 초상권 문제로 얼굴 붉힌 적이 없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갔을까 말까 한 아이에게서 기습을 당한 기분이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다.
“왜 찍긴. 네가 멋있어서 찍은 거야.”
녀석, 어쩔 수 없는 아이인지라 더 이상 사나운 눈초리를 보내지 않는다. 그럼 그렇지, 녀석은 셔터 소리에 모래성을 쌓는 작업에 미세하나마 지장을 받은 모양이다. 어린아이도 신경이 예민할 수 있는 노릇 아닌가. 푸훗, 괜히 민망해지는 기분을 모터 보트에 몸을 싣고 신나라 하는 사람들을 일별하며 달랜다. 한 사람당 만 원씩 받고 10분여를 질주하는 모터보트가 급회전을 거듭해 가며 사람들의 환호성을 낳는데, 아, 봄이 만개했다는 느낌만이 가득하다. 하지만 상가 쪽으로 가니 사정은 달라진다. 식당 종업원들이 사람들이 주문한 식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사이 꼬마 한 녀석이 흥얼거리며 말린 물고기를 뒤집느라 바쁘다. 가만 보니 함께 놀아줄 친구가 없어 손님 호객하는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녀석의 할아버지가 대견하다는 듯 혼잣소리를 뱉는다.
“저놈이 이 다음에 크면 장사는 잘 할겨.”
그러나, 장사를 잘할지는 몰라도 해변에서 마냥 동심을 즐기고 있는 아이들과 섞여 놀아야 할 아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녀석의 해맑은 눈빛이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 자, 마량리 동백숲으로 갈 차례다. 전국 곳곳의 동백이 제아무리 사람의 혼을 빼놓는다 해도 마량리 동백숲에 미치지는 못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터. 게다가 수백 년씩 된 80여 그루의 동백숲을 마음놓고 드나들 수 있는 곳도 마량리 외에는 없다. 선운사의 동백숲이 유명하다고는 하나 거기서는 울타리 너머로 눈요기만 해야 하지 않는가.
◇‘휴식은 없다.’ 주꾸미잡이에 전념하느라 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게 바쁜 홍원항 어부들이 어구를 손질하고 있다.

◇낚시는 언제나 기다림을 가르친다. 홍원항 방파제 옆 바위에 선 세 남자가 저마다 다른 자세로 대물의 입질을 기다리고 있다.

마량리 동백숲의 역사는 5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마량의 수군첨사가 꽃 뭉치를 증식시키면 마을에 웃음꽃이 핀다는 꿈을 꾸고 바닷가에 나가 보니 꿈에서 보았던 꽃이 두둥실 떠다니기에 가져다가 심었더니 그게 바로 동백이었다는 전설이다.
안 믿어도 그만인 얘기지만, 마량리 동백숲은 그 후로 마량리 바닷가의 방풍림 역할을 하면서 지금, 봄날의 가장 화려한 생을 지나고 있다. 바닷바람과 맞싸워 자신의 몸을 지탱시키느라 위로 뻗기보다는 옆으로 생장을 거듭한 동백의 몸체는 그 자체로 근육질이다. 그런 몸에서 무더기로 꽃이 피고, 무더기로 꽃이 져 내린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동백나무의 위아래는 멀리서 보아도 선연한 빛의 융단이다. 사람들은 동백숲 여기저기를 거닐며 탄성을 쏟는다.
“세상에, 곱기도 하지.”
“곱기만 한 게 아냐. 이거 봐. 아예 동백이 땅을 덮었네.”
맞다. 수군첨사의 꿈에 기댄 동백꽃은 나무에도 가득, 땅에도 가득 우리네 꿈처럼 붉게 봄날의 중심을 덮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볕은 더욱 따뜻해지리라. 삶이 아무리 황홀하다 한들, 동백보다 붉을 수는 없다. 삶이 아무리 처연하다 한들 낙화보다 처연할 수는 없다.
 
경기 화성 제부도
섬에 갇혔던 사람들
 ◇삼각대를 세워 놓은 채 가장 황홀한 일몰 때를 기다리는 사진 동호회 회원 한 명이 쪼그려 앉아 해변 모습을 찍고 있다. 나머지 회원들은 모두 자동차에 들어가 대기 중이다.
기다리고 기다린 날이 왔지만 막상 닥치고 보면 아쉬운 게 있다. 섬에서의 하루가 그렇다. 물길이 막히면 하루를 묵어야 하는 게 섬이니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조바심부터 난다. 제부도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물길이 열렸을 때 들어갔다 물이 들어차기 전에 살짝 드러난 차도를 타고 빠져나와야 하는데 좀체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왜냐, 봄날이니까….

뭍으로 나가느냐, 섬 안에 남느냐는 선택의 문제다. 잠깐의 선택이지만 그 시간은 최소한 서너 시간의 공백을 가져온다. 지상에 아무리 급한 일이 생겨도 자가용 비행기가 없는 한 빠져나갈 수 없는 섬이다. 그런데도 선택은 의외로 서너 시간의 공백 쪽으로 기운다. 한밤 중에 뭍으로 나가리라. 꽃과 나무가 무성해서는 아니다. 별다른 볼거리가 널려 있어서도 아니다.

해가 기울고 있는 서쪽 해변에 삼각대 몇 대가 설치돼 있다. 저녁 무렵부터 카메라를 들고 서성이던 동아리 회원들은 모두 자동차 안에 들어가 바닷가 봄바람의 매서움을 피하고 있는 중이다. 어떤 삼각대 위에는 아예 카메라까지 장착돼 있으니 누군가가 냅다 들고 뛰면 카메라까지 도둑맞을 판이다. 겁도 없지, 생각하다가 이내 실소를 머금는다. 냅다 들고 뛰어 봐야 바닷길이 열리기까지는 도둑 역시 ‘뛰어봐야 섬 안’인 것이다. 동아리 회원들의 배짱이 똥배짱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나니 괜한 걱정 해줬다는 기분이다.

◇제부도에서 봄을 만끽하는 축은 사실 바닷새들이다. 물속에 두 다리를 담근 채로 의연히 서 있는 모습이 앞으로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는 기세다.

◇제부도의 볼거리 중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매바위. 물이 빠지면 매바위까지 건너가 굴도 딸 수 있으나 물이 차면 접근이 불가능하다.

바닷새들은 물이 덜 들어찬 갯벌 쪽에 두 발을 딛고 먹이를 찾고 있는 중이다. 두 발을 딛고 있다는 것은 물이 차갑지 않다는 뜻이다. 조류들은 대체로 물이 차가우면 한 발만 물에 담그고, 한 발은 몸에 바짝 붙여 체온을 유지하는 법이다. 물에 담근 발이 못 견딜 정도로 시리면 체온으로 덥힌 발을 물에 담그고, 물에 담갔던 발을 깃털 속으로 거둬들여 녹이는 것이다. 언제나 두 발, 두 손이 편하기를 원하는 인간보다 훨씬 지혜롭다.

어쨌거나 해는 수평선을 향해 계속 낙하 중이다. 밑자락이 물에 잠긴 매바위도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매바위까지 걸어가려던 사람들 몇이 아쉬움을 삼키며 돌아선다. 물때를 놓쳤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이런 경우가 바로 ‘때는 늦으리’이다. 삼각대를 세워놓은 채 일몰을 관망하던 청춘들이 자동차 문을 열고 하나 둘 나온다. 저녁 해의 외곽선이 점점 흐릿해지는 것이 수평선에 닿기 전 사라질 기세다. 날씨가 아무리 좋아도, 해가 아무리 강해도 사실은 해무와의 싸움에서 이기기란 쉽지 않다. 건조주의보가 발령돼도 바다에서 밀어올리는 수증기는 저녁 해의 몸체를 한순간 해무로 덮어 버리기 일쑤다. 그게 바다다. 그러니 자동차에서 나와 삼각대 앞으로 가는 청춘들 역시 일몰 사진을 꽤 찍어본 고수들임은 분명하다.

◇서해안의 별미는 역시 조개구이. 이제 거개의 식당이 양과 질 모든 면에서 손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쓴다. 인터넷의 공로가 크다.

저녁 해를 향해 셔터를 몇 컷 눌러본 청춘들이 자신들의 인물 사진을 찍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장대 두 개 사이에 흰색 반투명지를 붙이는 작업이 진행된다. 그뿐인가. 카메라 렌즈 앞에는 주황빛 셀로판지가 붙어 있다.

“어이, 학생. 그걸 만들어서 뭘 하려고?”

“아 예, 부∼우옇게 만들어 보려고요.”

흰색 반투명지는 아스라이 먼 곳에 있는 저녁해를 달덩이처럼 퍼지게 하고, 인물 사진은 약한 석양빛을 보충하겠다는 뜻이다. 실험은 다양할수록 좋지만, 인위적으로 빛을 만드는 게 바람직한 것인지는 모를 일인데 저마다 들고 있는 카메라를 보니 필자가 1년 넘게 고민하다 ‘지른’ 기종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비싼 카메라 사들고 실험에 나선 청춘들에게 고언하겠다고 나설 일이 아니다. 아닌 말로 저마다의 아우라, 저마다의 레토릭이 넘치는 세상 아닌가.

해는 해무 속에 잠겨 사라져 버렸고, 뭍으로 나가는 바닷길이 열리기에는 아직도 세 시간이 남았다. 문득 출출하다. 해변에 줄지어 선 식당가를 향해 간다. 식당가에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그야말로 ‘총출동’이다. 자동차 한 대가 다가갈 때마다 그들의 팬터마임이 시작된다. 두 팔을 식당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우리 식당으로 오시라’는 뜻이요, 두 팔로 원을 그리는 것은 ‘원없이 드실 만큼 많이 준다’는 뜻이요, 손가락으로 하늘 쪽을 가리키는 것은 ‘전망 좋은 2층, 3층 온돌방이 있다’는 뜻이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것은 ‘우리 식당이 제일 맛있다’는 뜻이거나 ‘당신이 최고’라는 뜻이다. 그러니 어느 식당인들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선택은 하나, 그 중 나이 들어 보이는 사내의 팬터마임에 이끌려 차를 세운다. 나이 든 그만큼 얼굴은 검고, 그런 만큼 세파에 시달렸다는 뜻이니 저녁 바닷바람과 싸우는 사내의 시름걱정을 덜어주고 싶은 탓이다.

◇제부도 밤의 해변에 배 한 척이 정물화로 굳어 있다. 뒤쪽의 실타래 같은 불빛들은 물이 빠지면 뭍과 섬을 연결하는 도로의 가로등 빛이다.

미지근한 온돌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완연한 어둠 속으로 잠겼다. 누군가가 시를 읊듯 말한다.

“밤이 되면 모든 바다는 똑같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조개구이가 나오고, 회가 나오고, 대하 소금구이가 나온다. 걸판진 상인 듯하지만 사실은 이것저것 조금씩이다. 섬마을에도 퓨전 메뉴가 상륙한 지는 오래인 것이다. 머리를 잔뜩 기른 청년이 밑반찬을 내오는데, 가만 보니 이 청년 ‘알바’에 나선 눈치다.

“어느 학교 다니니.”

“○○대 공대 공칠 학번입니다.”

대답하는 품새가 여간 예의바르지 않다. 그런데 어허, 섬마을에서 만난 이 녀석, 필자의 아들 녀석과 같은 학교 학생이다. 또 다른 인연이다. 바짝 조인다. 집은? 형제는? 알바비는? 그래? 저기 좀 앉아 봐라. 기념 사진 한번 찍자.

◇세 시간 동안 섬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바닷길이 열리기를 기다려 일제히 뭍을 향해 차를 몰아 달려나가고 있다. 제부도에 가려는 사람들은 물때 정보를 챙겨 스케줄을 맞춰야 한다.

이 청년, 정신이 좀 나간 눈치지만 이력서 쓰기에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술술 대답한다. 수원에서 태어났으나 춘천에서 살고 있고, 1박2일 알바비는 8만원이고, 누나가 한 명 있고…. 하지만 사진 찍는 것은 영 쑥스럽다며 머리를 긁적인다.

“알바도 중요하지만 공대 다니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돈이 최고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어.” 돈이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다. 다만, 어른 입에서 나와야 할 얘기의 수순 같은 것에 매달렸을 뿐이다. 문득, 상병 계급장을 단 아들 녀석의 얼굴이 스쳐간다.

뭍으로 나가는 바닷길이 열릴 시간, 청년은 행주를 들고 식탁 닦는 일에 분주하고, 사람들은 식당에서 일어선다. 모두들 갈 길이 바쁜 것이다. 식당일 마무리하고 수원까지 버스 타고 간다는 녀석의 목소리가 꽤 맑다. 주머니에 슬그머니 손을 넣어 만 원짜리 한 장 꺼낸다. 버스비라도 해라. 돈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고 했지만 알바 청년에게는 그게 지금의 현실, 비싼 카메라 들고 석양 찍던 청년들과는 상황이 다르다.

밤바다의 바람은 쉬 자지 않는다. 멀리 바닷길을 헤치고 뭍을 향해 달려나가는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 행렬이 보인다. 섬에 갇혔던 사람들, 섬을 두고 서서히 떠나간다. 섬 안에는 아직 청년 한 명 남아 있다

 

담양 명옥헌과 소쇄원
조선시대의 산책 고요하고 평화롭다
 ◇소쇄원 입구의 대나무 숲. 소쇄원에 깃든 선비정신은 대숲 수런거리는 소리와 닮았다.
◇요즘은 보기 드문 정선임씨네 집 화단의 할미꽃(사진 오른쪽).
세상은 둥글다고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세상을 사각형이라고 여겼다. 우리네 옛 정원이 사각형 모양으로 반듯하게 만들어진 연유가 여기에 있다. 봄날, 명옥헌(鳴玉軒) 정자 앞의 연못도 그래서 사각형이다. 하긴 둥그런 연못이든 사각형 연못이든 무슨 상관이랴. 조선 중기의 인물 오희도가 자연을 벗하며 살기 위해 능양군(훗날의 인조)의 청을 뿌리친 채 명옥헌에서 안빈낙도했듯이 우리가 잠시 연못 앞에서 상춘객 행세를 한들 그리 흉잡힐 일은 아닐 터.

◇명옥헌 정자 앞의 연못. 연못을 ㅁ자 형태로 만든 것은 ‘지구는 사각형’이라는 생각의 투영이다.

정자 앞과 연못 안의 배롱나무는 아직 백일홍을 피우지 않았다. 대신 동백이 만개해 동백나무 아래 위가 온통 붉은빛 일색이다. 연못 둑은 제 세상 만난 듯 피어난 개불알꽃 차지다. 농부의 발바닥에 잡힌 티눈 크기밖에 안 되는 것이 용케도 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명옥헌 아래 농가 쪽을 기웃거려 본다. 한겨울 내내 연기를 피워올렸던 붉은벽돌 굴뚝 아래로 어느새 복숭아꽃이 피었다. 도원경이 펼쳐지면 길 가는 여인네들의 가슴이 벌렁거린다던데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다.

사람을 찾아 동네를 어슬렁거리다가 나희덕 시인이 귀띔해준 기억을 되살려 정선임씨네를 찾아들어 간다. 나 시인의 ‘방을 얻다’는 작업실로 쓸 요량으로 시골의 방 한 칸을 얻으러 돌아다니다 불쑥 들어갔던 얘기를 질료로 삼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던 것이다. 나 시인은 그 집을 ‘된장도 팔고 감식초도 파는데 꽃이며 나무를 잘 가꾸어 놓은 집’이라고 했었다. 꽃 많은 집을 찾아들어 수건 둘러쓰고 땔감을 끌어내리고 있는 아낙네에게 다가간다.

“혹시 어떤 여자가 방 세놓으라고 찾아왔던 집이 아닌가요?”

“세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 많은디. 어떤 여자가 오긴 왔었지.”

◇제월당에서 바라본 소쇄원 전경. 소쇄원은 은둔하던 선비들의 소통로였고 교류처였는데 지금도 양산보의 후손들이 가꾸고 있다.

아낙네 옆에서는 견공 두 마리가 봄타령을 하고 있는 중이다. 어미와 새끼인 것이 분명한데, 흙바닥에서 레슬링을 펼치고 있다. 몸이 근질근질하니 짐짓 싸움하는 시늉이라도 해가며 무료함을 달래겠다는 심사이다. 끌끌, 웃음이 나온다. 네 녀석들도 봄을 타는구나.

볕이 따사로운 날에 땔감을 끌어내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석회와 유황합제를 섞어 감나무밭에 뿌릴 살충제를 만드는 중이란다.

“유기농 농사를 지으려면 내가 이걸 해야지라.”

감나무 농사만 1만평이란다.

“무지하게 잘사시는구만.”

“좀 살지라. 저번에는 플로리다 여행 갔는디, 95번 도로 타고 잭슨빌에서 마이애미까지 여덟 시간 동안 드라이브도 했지러.”

◇명옥헌 정자. 오희도는 이곳에서 글을 읽으며 자연과 벗했다. 능양군이 말을 타고 찾아왔으나 속세에 나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올해 61세라는 정선임씨 입에서 도로 번호와 영어 단어가 술술술 쏟아져 나온다. 미국에서 운전을? 국제면허 있느냐, 무섭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씩 웃는다.

“5000원만 내면 국제면허증 나오는디 뭘. 남편하고 있응께 하나도 안 무섭더라고. 다음에는 캐나다를 한 번 가봐야 쓰겄는디.”

정씨가 저온창고에서 수박 한 덩이를 내온다. 감나무밭 1만평에, 저온창고에, 가만히 보니 마당에 세워둔 승용차가 두 대다.

“저건 누구 차예요?”

“누구 차긴? 내 차지라.”

한 대는 경차인데, 사륜구동을 경차로 바꿨단다.

“우리야 뭐 큰 차 탄다고 뻐길 일도 없으니께.”

견공 두 마리는 여전히 놀이 삼아 싸움을 하고 있고, 정선임씨는 마당 가의 꽃밭 소개에 나선다. 할미꽃이 피었고, 수선화가 피었다. 연자방아 옆에는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간다는, 주목 버금가게 유명한 구상나무가 서 있다. 연자방아는 시아버지가 쓰던 것이란다.

◇명옥헌 연못가를 장식하고 있는 개불알꽃. 꽃 하나하나는 앙증맞지만 무리를 이루면 그것 역시 한 부분을 차지한다.

“내가 꽃을 좋아허니께. 저쯕에 가면 마삭줄도 있지라. 마삭줄은 땅에서는 잘 안 자라. 그래서 타고 올라가라고 기둥을 해줬지라.”

얘길 듣다 보니 덩그러니 정자 한 채 서 있는 명옥헌보다 유익한 현장 실습이다. 하긴 연간 1억원짜리 농사를 짓는다니 글밥 먹는 사람에게 현장 학습할 자격은 충분하다.

“그때 방 세놓으라고 찾아온 사람이 유명한 시인인데 세를 놓지 그랬어요?”

“시인? 세를 줬더라믄 책도 나누어보고 좋았겠구만. 근디, 한 번 얘기해서 덜렁 세주는 사람이 있겄소. 우리 가족의 역사가 있는 방인디. 별채도 있지만 내가 지금도 안채를 쓰는 것은 내가 이 집을 지키기 위해서지라.”

◇수선화가 곱게 핀 정선임씨네 집. 정씨는 일하는 틈틈이 야생화를 가꿔 동네에서 제일 아름다운 집을 만들었다.

우리 가족의 역사, 내가 이 집을 지키기 위해서… 가르침은 완벽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 일어날 수밖에. 스스로 내온 수박이니 돈을 받을 리 없고, 감식초 두 병 사 들고 다시 길을 나선다. 지척에 소쇄원이 있지 않은가.

명옥헌도 민간 정원이요, 소쇄원도 민간 정원이다. 명옥헌은 1300여평, 소쇄원은 1400여평이니 크기도 비슷하다. 소쇄원을 만든 양산보도 때를 제대로 만나지 못해 은둔하며 학문에 매진했으니 오희도의 삶과 다르지 않다. 양산보가 1503년에 태어나 1557년까지 살았으니 54세로 삶을 마감했고, 오희도가 1583년에 태어나 1623년까지에 살았으니 불과 마흔에 삶을 마감한 점도 또한 비슷한 데가 있다. 산에서 내려온 계곡 물소리가 명징하다는 점 또한 같다.

명옥헌과 다른 점, 소쇄원에 들어서니 대숲 바람소리가 명징하게 들린다. 계곡 아랫자락의 나무 걸개 위로 봄 이끼가 피어오르고, 나무를 타고 계곡물이 흘러내린다. 제월당과 광풍각이 소음이 차단된 대숲 속에서 청정한 소리를 가득 담아 낯선 객에게 전해준다. 무슨 소리인가. 양산보의 유훈이다.

◇소쇄원 숲 속에서 한겨울을 난 다람쥐가 산책에 나섰다. 웬만한 인기척에는 달아나지도 않는다.

“어느 언덕, 어느 골짜기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지 말라. 어리석은 후손에게도 물려주지 말라. 후손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

어디서 들어본 소리인 듯하다. 그렇다. 명옥헌 아래 감나무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서 들은 소리다.

“별채도 있지만 내가 지금도 안채를 쓰는 것은 내가 이 집을 지키기 위해서지라.”

정선임씨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있는데, 대숲에서 나온 다람쥐 한 마리 보인다. 녀석, 인기척에도 도망가지 않는다. 조선시대 산책, 고요하고 평화롭다.

 

경기 용인의 화가 장욱진 고택
지도에도 없는 섬에서 한나절
 ◇장욱진 고택의 뒤뜰에 산수유가 곱게 피었지만 장욱진의 맏사위인 이병근 선생은 지난해 산수유보다 빛이 곱지 못한 게 불만이다.
서울 도심에서 한 시간 남짓이면 닿는 경기 용인시 구성면 마북리에 섬이 있다. 섬은 앞동산 산자락에는 아파트 단지, 뒤쪽으로는 3분만 달려가면 티샷한 공이 쭉쭉 날아가는 골프장, 또 한쪽으로는 상가 즐비한 도로변을 거느리고 있다. 낮은 돌담 사이의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천자문 읽는 소리 들릴 것 같은 기와집, 갖은 일화와 함께 여전히 동심으로 남아 있는 화가 장욱진 고택이 바로 그 섬이다. 장욱진 고택이 왜 섬인가. 무릇, 세파에 깎이거나 세파에 아랑곳없이 청정하면 섬인 것이다. 장욱진 고택도 마찬가지다. 도시적 물결에 에워싸인 채 청정하게 예술가의 삶을 간직하고 있으니 영락없는 섬이다.

섬에 들어서니, 곳곳에서 열리는 봄꽃 축제에는 아예 관심 없는 듯 초로의 한 사내가 아직도 털신을 신은 채 나무를 손보고 있다. 그렇다고 나무 가꾸기에 ‘선수’가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고 아마추어는 아닌 것 또한 분명하다. 나무를 손보는 행동이 빠르지도 않고 건성건성도 아니다. 내심, 그를 유심히 곁눈질하고 있는데 그가 먼저 말을 걸어온다.

“올해는 꽃이 좀 별로예요. 허허허”

“그런가요? 이대로도 좋은데요 뭘. 꽃샘추위가 들락날락해서 그럴 겁니다.”

“허허허. 작년에는 더 좋았는데. 아무튼 올해 꽃은….”

예고 없이 찾아간 사람에게 연방 사람 좋은 웃음소리를 건네는 모습이 여간 따뜻한 게 아니다. 허허허, 그의 웃음소리에 산수유 꽃이 가늘게 떠는 듯하다.

◇고택에 씌어 있는 갑골문자 모양의 ‘觀自得齋’. 무슨 뜻인지 몰라 중국에서 갑골문자 자전을 사들고 와 전권을 독파한 끝에 알아냈다고 한다(왼쪽), 장욱진의 맏사위 이병근 선생.

산수유 앞에서 셔터 누른 까닭을 설명하고는 ‘혹시 장욱진 선생의 사위 되시지 않냐’고 했더니 ‘허허허, 그렇습니다’ 하고는 또 웃는다. 이제부터 당신의 자기 소개가 시작된다. 서울대 국문과에서 국어학을 가르치다가 3년 전 퇴직했고, 지금은 장인 어른의 고택에서 나무 심고 텃밭에 거름 주면서 지내고 있단다. 바로, 우리나라에 최초로 국어사전학 과목을 개설했던 이병근 선생이다. 그는 지금도 서울대 명예교수인데, ‘나도 모르게 명예교수 명단에 올라갔다’며 ‘이젠 젊은 사람들이 가르쳐야 하는 시대’라며 강단에 서기 싫다고 손사래를 친다.

봄날이 되니 먹을 복이 계속 찾아온다. 일부러 점심 때를 맞춰 찾아간 것은 아닌데도 시간이 그 즈음인데, 선생이 먼저 운을 뗀다.

“요 윗집에서 청국장도 팔고, 막걸리도 팔고… 같이 갑시다.”

칠순을 두 해 남기기는커녕 50대 중반밖에 안 돼 보이는 선생을 따라 식당과 맞붙은 고택 마당을 나서다 보니, 손바닥만한 텃밭 군데군데에 구덩이가 파여 있고 그 안에 검은 거름이 들어 있다. 채소 심어 먹으려고 소똥을 말려 만든 거름을 아침나절에 주었단다. 국어학계에서 이름났던 노학자가 나무 가꾸기와 채소 재배에 나섰다니…. 청국장이 나오기 전에 그가 담뱃갑을 매만진다. 아침 먹고 한 대, 점심 먹고 한 대, 저녁 먹고 한 대, 이렇게 세 개비만 피우려고 하는데 일하다 보면 심심해서 두 개비를 더 피운다면서 허허허, 또 웃는다. 봄볕도, 상 위에 오르는 때깔 좋은 반찬들도 그의 웃음소리보다는 아름답지 않다.

◇‘한평주의’를 고수했던 장욱진 선생은 파란만장한 작가생활을 접고 1990년 12월 27일 눈을 감았다. 그는 숨지기 전 자신의 작품 중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들을 스스로 불태웠다.

막걸리 주전자를 나눠 마시면서 보니, 그의 얼굴빛이 막걸리 색을 닮았고 풀어내는 이야기는 막걸리 맛을 닮았다. 텁텁하면서도 진국이지 않은가.

“저희 장인어른, 그림 안 그려지면 내게 글 안 써지지? 이렇게 묻고는 그럼 술이나 한 잔 해 이러셨죠. 허허허. 그림 그릴 때는 식음 전폐, 그리고 막걸리 한 잔은 휴식이라고 하시면서 잔을 기울였는데…. 기관지와 폐가 안 좋아서 제가 업고 병원으로 달려간 적도 많았죠. 명륜동 살 때 데모가 심했잖아요. 기관지 안 좋은 양반이 최루가스에 시달렸으니…. 그때 내가 장인어른 업고 인사동을 막 달리고 그랬죠. 허허허.”

화가 장욱진이 누구인가. ‘나는 가(家)가 좋다’며 서울대 교수를 스스로 그만두고 전기 안 들어오는 한강변 덕소로 스스로를 유폐하고, 명륜동에서 다시 수안보로, 거기서 다시 용인으로 옮겨다니며 화가의 삶만을 고집한 화가였다. 그림 잘 그리는 화가만으로 살았던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이 다해가는 것을 알고는 숨지기 전 자신의 그림을 다 끄집어내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을 몽땅 불태웠던, 자기 검증의 고수였다.

◇자기 검증에 누구보다 철저했던 고 장욱진 선생의 작업실. 유족들은 작가 정신을 기리기 위해 장욱진 선생이 숨지기 전까지의 작업실 상태에서 손 하나 대지 않았다.

화가 장욱진의 그림 한 점이 떠오른다. 화제는 ‘수하’(樹下). 나무 위에는 새 네 마리가 앉아 있다. 나무 왼쪽에는 깡마른 개 한 마리, 그리고 나무 아래에는 역시 깡마른 소년이 팬티만 걸친 채 두 팔을 머리맡에 두른 채 누워 있다. 눈보다 배꼽이 더 크게 보이는 소년이다. 나무 위의, 윗동네쯤으로 보이는 정경에는 고만고만한 집들이 키재기를 하고 있다. 그 그림의 값이 얼마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림 속의 집도, 사람도, 개도, 새들도 모두 깡말랐다는 것이다. 평생 살찐 모습으로 산 적이 없는 장욱진의 모습이 그곳에 있거니와, 피둥피둥 살찐 모습으로 살려고 해봐야 정신의 풍요보다 나을 것 없다고 웅변했던 모습이 그림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래서 화가 장욱진이 남긴 정신의 아우라는 ‘한평주의’다. 침실도 한 평, 작업실도 한 평, 부엌도 한 평, 정자도 한 평, 모든 공간을 한 평 이상 누리지 않은 화가가 장욱진 아니었던가.

“허허허. 우리 장인어른이 장모님 그림을 일주일 넘게 그린 끝에 완성했는데, 그걸 들고 덕소에서 명륜동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장모님에게 주더니 그 자리에서 픽 쓰러지셨다지 뭡니까. 그러고는 몇 개월 앓아누우시는 바람에 장모님이 생각하시길, 이 양반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웬걸, 그 후로도 이십 년 가까이 더 사셨죠 아마. 허허허.”

◇ㅁ자 형태의 장욱진 고택. ㄱ자와 ㄴ자 형태를 딱 붙지 않게 한 것은 바람이 드나들고 사람이 드나드는 소통의 한옥 건축미로 평가된다.

‘진진묘(眞眞妙)’ 이야기다. 평생 동안 남편을 위해 가사를 책임져 준 아내가 불경을 외는 모습에 감동해 그렸다는 작품인데, 이 그림도 역시 깡마른 모습 외에 어떤 살집이 없다.

화가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화가의 아내는 요즘도 ‘진진묘’의 모습 그대로 불심에 젖어 지내는데, 이번에는 셋째사위 김우생씨가 화가 장욱진이 숨지기 전까지 그림을 그렸던 양옥의 2층 작업실로 안내한다. 쥐어짠 물감이 그래도 굳어 있고, 바짝 마른 붓과 벼루와 먹 역시 그대로 장욱진의 ‘가(家) 정신’을 증명한다. 그리고 작은 탁자 위에는 ‘1990년 12월 27일’, 숫자판이 그대로 놓여 있다. 화가 장욱진이 세상을 등진 그 시간이 그대로 멈춰 있는 것이다.

섬에 봄볕이 가득한데, 큰사위 이병근 선생은 그림 얘기 끝에 다시 식물 얘기로 돌아간다. 이놈은 육모초, 이놈은 꽃사과, 이놈은 청매, 이놈은 마가목…. 그러면서 정자에 걸린 안광석 선생이 쓴 갑골문자 ‘관자득재’를 해제한다. 볼 관(觀), 스스로 자(自), 얻을 득(得), 재실 재(齋), 사물을 외형으로부터 관찰해 내면으로까지 끌고 들어가면 얻을 게 있나니…. 중국에서 갑골문자 자전을 사들고 와 한 자 한 자 해독해 그것이 갑골문자라는 것을 알았다는 설명이다. 그러니 선생은 지금 나무 키우기에 여념이 없으나 어쩔 수 없이 욕망을 내려놓은 ‘선생’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스쳐간다.

오라, 진짜 선생은 역시 숨어 있구나. ㅁ자를 이룬 한옥의 ㄱ자와 ㄴ자 사이로 바람이 들락날락하며 섬의 봄날을 두둥실 떠올리는데, 또 한 번 허허허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어느 새 털신 벗은 이병근 선생이 서울 나들이를 한다며 노교수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화가 장욱진의 큰사위라는데, 어찌된 셈인지 아무리 눈을 비비고 봐도 장욱진의 분신을 만난 듯 막걸리의 취기가 가시지 않는다. 하긴 그렇다. 지도에 없는 섬이니, 꿈인지 생시인지 봄날 취기가 아름답다.

전북 고창군 도솔산

눈여겨보지 않으면봄은 소리없이 흘러가 버린다

고창 도솔산 입구 진입로 양켠으로 재래 상인들이 줄줄이 진을 쳤다. 칡즙, 복분자액, 갖가지 봄나물 등속이 진열대에 올라 있다. 그 중에서 한 가게가 눈길을 끈다. 호떡 장수인데, 호떡 색깔이 특이하다. 전통 호떡처럼 밀가루 색도 아니고, 녹차 호떡처럼 푸른 기가 도는 것도 아니다. 좋게 얘기해서 핑크빛, 수수팥떡 색깔에 가깝다. 개당 1000원, 두 개 사면 1500원이란다. 일반 호떡에 비하면 50% 이상 비싸다. 바가지 아닌가. 알고 보니 복분자 호떡이란다. 호떡 장수 이영순씨가 고창의 특산물인 복분자를 이용해 개발한 호떡 마케팅이다. 마케팅이 관건이라는 슬로건이 호떡 장수라고 해서 비켜갈 수 없는 세상. 슬그머니 장난기가 동한다.
“호떡 홍보해드리려면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홍보비 좀 내세요.”
“홍보비? 어디다 내주는데?”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내준다는 소리에 이영순씨가 동업자를 부른다.
“우리 호떡이 신문에 나온단다. 호떡 한 개 그냥 드리라.”

◇낭창낭창하게 흘러가는 계곡물 옆에서 조용히 몸을 드러내는 뚝버들 잎자루. 눈여겨보지 않으면 봄은 소리 없이 흘러가 버리기 일쑤다.


염치없이 호떡 하나 받아들고 주소를 받아 적고는 도솔산 산행에 나선 사람들 틈에 섞여 든다. 선운사를 지나 도솔암으로 향하는 길목의 골짜기에 차밭이 펼쳐져 있다. 차밭 한켠에도 사람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더 키워도 생육이 신통찮을 것 같은 차나무를 뽑고 새 차나무를 심는 작업을 하는 중이란다.
“차나무가 중해요? 객지 사람에게 물 한 잔 주는 게 중해요? 세상 인심 하고는.”
짐짓 어깃장을 부려본다. 모자를 눌러쓰고 그 위에 수건까지 칭칭 감아 두른 모습이 살 속 파고드는 봄바람을 단단히 경계한 눈치다.
“나도 알바 나온겨. 시간이 돈인디 목마르먼 알아서 찾아 마셔야징. 자기 마실 물은 가지고 댕겨야 허는 거 아닌감.”
웃을 수밖에, 할 말이 없다. ‘알바’란 게 시간 다툼이니 내 고장 찾은 사람에게 물 대접 갖다 준다, 말동무 해준다 하다 보면 작업량을 채우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 곁으로 도솔산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낭창하다. 물소리를 양분 삼아 냇가에서는 뚝버들 잎자루가 몸뚱이를 형성해 가고 있다. 잎자루 솜털에서 생명의 경외가 느껴진다.


◇사랑할 시간도 없는데 어찌 미움을…. 요즘 사찰의 기념품 가게는 물건 파는 데 그치지 않고 속인들의 욕망을 나무라기도 한다.


형형색색의 등산복 차림을 한 사람들이 숲길을 오간다. 일행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아낙네 몇이 숨을 고르면서 말을 건넨다.
“양산에서 왔는디 사진 한 장 콱 박아주지 않을랑교.”
“양산요? 나는 양산보다 더 먼 데서 왔거든요. 사진 찍어주고, 그 돈으로 여비해서 올라가야 하는데. 단체로 찍으면 할인해 줄 수도 있지만. 그런데 일행을 찾으려면 밑으로 내려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왁자한 웃음소리가 퍼져간다. 도솔산 정상까지 오르는 일행들에서 빠져나와 ‘땡땡이’를 쳤단다. 뻔하다. 일행들이 땀 흘리며 산행을 하는 동안 아낙들은 고창 복분자 한 잔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을 터.
“할인하면 얼만데예?”
이 양반들, 근사한 사진 한 장을 갖고 싶은 게 아니라 말벗이 필요했던 모양인지 아예 걸음발까지 비슷하게 맞춰가며 걷는데 일행 모두 키가 오종종하다. 시쳇말로 숏다리 네 자매에 가까운데, 숏다리이다 보니 정상 코스가 부담스러워 산 아래에서 시간을 보낸 것이다.

◇도솔암 마루에 걸터앉은 보살과 진돗개. 봄나들이 못 하고 있는 것이 불만인 듯 진돗개도 보살도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


사진 원하면 돈 내라 돈 없다,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사실 숲 속에서는 별무소용이다. 저잣거리에서는 그게 흥정이지만 숲 속에 들어서면 그런 대화조차 식물성으로 변해 돈이 오가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저, 서로 웃자고 하는 얘기인 것이다. 이를테면, 과장되게 얘기해서 도반이다. 선운사를 지나 도솔암까지 오르는 길, 차밭을 지나고 장사송(長沙松)을 지나는 길은 그렇게 정겹다.
도솔암에 올라보니 암자 마루에 보살 한 명이 입을 잔뜩 내민 채 걸터앉아 있다. 암자를 지키는 진돗개가 연신 짖어댄다. 스님을 닮아 화평해야 할 견공의 심사를 누가 거슬렀는가. 보살에게 ‘저놈이 왜 이리 짖어대냐’고 물어보니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등산객을 보면 하냥 짖어댄다는 설명이다.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탓이란다. 진돗개가 등산객의 지팡이 따위를 경계하다니, 스님을 모시는 행자 역을 대신하는 놈치고는 싱겁다. 스님 곁에서 도 닦으면 동자승 수준은 되어야 하는 것을.
암자 위쪽, 마애불 옆 동백은 바야흐로 꽃을 피우는 중이다. 낙조대에 이르는 길을 포기하고 걸음을 돌려 선운사로 향한다. 거기, 선운사 대웅전 뒤편의 동백나무 숲이 눈앞을 가린다. 동백처럼 가슴을 달구는 꽃이 있던가.
천연기념물이기도 한 5000여 평의 동백숲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모였다. 만개한 것은 아닌데도 나무 밑에는 벌써 낙화한 동백 몇 점이 보인다. 처연하다. 동백은 잎만 달랑 떨어지는 꽃들과 달리 꽃봉오리 전체가 툭 떨어져 내리지 않는가. 잎과 수술이 낙화할 때도 생을 함께 마감하니 애틋하다. 꽃말 그대로 허세 부리지 않는 몸짓이다.

◇복분자를 이용해 호떡 시너지 효과를 보고 있는 이영순씨의 유연한 손놀림 속에 복분자 호떡이 익어가고 있다.


동백나무숲에서 물러나 약수 한 모금에 목을 축이는데 동백 잎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투명하게 붉고 노란 동백이 약수에 몸을 적시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약수 한 모금씩을 마신 후 저마다 한 마디씩 건넨다.
“거 참, 물 위에 떠 있으니 더 이쁘네.”
꽃의 운명을 모르는 사람들의 말을 꽃이 알아들을까 두렵다. 제 어미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물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거늘.
막 피어나기 시작한 동백을 보고, 이미 낙화해 나무 밑에 떨어진 동백을 보고 있자니 미당 서정주가 떠오른다. 평생 동심에 살고 간 그의 고향이 바로 도솔산 아래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이다. 당연히 선운사 곳곳을 누비고 다녔을 터인데, 그 발걸음에서 길어 올린 ‘선운사 동구’는 지금도 선운사 입구의 시비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하하, 또 짓궂은 생각이 떠오른다. 미당 선생은 어쩌면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을 들으러 선운사 ‘골째기’를 찾았을지도 모를 일이야. 그 어른 본시 ‘만년 소년’ ‘악동’ 소리를 들었지 않은가 말이야. 하하.
해가 기운다. 동백도 보았고, 그 비싼 복분자 호떡도 공짜로 얻어먹었으니 이만하면 본전치기가 너끈한 여행길이다. 남은 일은 꽃소식 몰고 상춘하는 것, 뒤돌아보니 도솔산 너머로 해가 기운다. 해는 기울지만, 한 가지 잊은 게 있다. 선운사 마당을 나오기 전 기념품 판매점에서 보았던 경구 한 구절.
‘사랑할 시간도 없는데 어찌 미움을….’

봄날 석양 속으로

전북 부안 변산

일행 몇몇이 격포항 입구의 횟집 근처를 지나면 웃는다.
“저 간판 좀 봐. 육땡아줌마 횟집이란다.”
“정말 그러네. 장땡도 아니고, 구땡도 아니고 겸손하구먼.”
일행들의 옷차림을 보니 겨울옷, 봄옷이 뒤섞여 있다. 겨울옷을 입은 사람은 저녁 늦게까지 해변을 거닐지 모른다 생각한 것일 테고, 봄옷을 입은 사람은 한나절 바람 쐬고 얼른 집으로 돌아갈 심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육땡아줌마 횟집 앞에 서고 보니 소주 한 잔에, 주꾸미 회 한 접시가 동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이 한두 명 모이더니 이내 육땡아줌마 횟집에만 사람들이 몰린다. 흥정이 오가고, 저울에 주꾸미 바구니가 올라간다.
노인 한 분이 횟집 옆에 쭈그리고 앉아 휴대전화에 대고 연신 고함을 쳐댄다. 통화 내용을 가만히 훔쳐 들으니 이쪽에서는 주소를 부르라는 것이고, 저쪽에서는 못 부르겠다고 버티는 모양이다. 이쪽에서는 주꾸미를 나눠 먹고 싶어 택배로 보내려 한다는 것이고, 저쪽에서는 안 받아도 받은 것과 진배없으니 말씀만으로도 고맙다는 것이다. 나눔을 두고 입씨름하는 모습이 아름다운데, 마침내 저쪽에서 진 모양인지 노인은 이윽고 볼펜을 꺼내 주소를 적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머지않아 주꾸미 축제가 열릴 서해안의 이른 봄날 풍경은 이렇게 왁자하다.

◇격포항의 흰 등대는 등대 구실만 하는 게 아니다. 아래쪽에는 선남선녀들의 만남을 상징하는 낙서들이 잔뜩 적혀 있다(왼쪽), 횟집 주인의 얼굴까지 큼지막하게 자리한 육땡아줌마 횟집 간판. 인터넷 예약 환영이란 글귀까지 포함돼 있다.


부모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은 책을 쌓아 놓은 듯 겹을 이룬 채석강 바위에서 눈길을 뗄 줄 모른다. 발을 헛디디면 바위에 무릎을 다칠 수 있는데도 깡총거리는 녀석, 번데기 사 달라고 조르는 녀석이 연이어 나타난다. 이빨 빠지지 않는 울릉도 호박엿 맛을 보라고 권하는 엿장수, 손자 손녀 용돈 마련하려고 이동 찻집을 연 할머니들이 격포 등대에 이르기까지 한없이 이어진다. 노인 양반들도 참, 집에서 편히 지내시지 않고…. 커피 한 잔 팔아 주며 슬그머니 말을 건넨다.
“노인네도 참, 경로당 가서 고스톱 치지 뭣하러 커피 리어카 끌고 나왔어요?”
“고스톱도 멤바가 있어야 치지라. 다들 리어카 끄불고 나왔는디. 내만 경로당 가 있으멘 그것도 독수공방인겨.”
“그래요? 할머니, 그래 얼마나 벌었는데?”
“을매? 을매 벌었는지는 쉬봐야 알지라.”
맞는 소리다. 커피 판 돈은 받는 족족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니 얼마나 벌었는지는 세어 보기 전엔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할머니들 참 욕심 없다. 장사가 되거나 말거나 소일거리 삼아 리어카 끌고 나와 사람 구경도 하고, 봄 공기도 쐬려는 것이다.
격포항 앞의 등대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방파제 아래에는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살림망 속에 손바닥만한 우럭 열댓 마리씩 들어 있는 걸 보니 그나마 조황은 괜찮은 편이다. 그 중의 두 사람이 눈에 띈다. 부부임 직한데, 낚싯줄이 엉키면 서로 도와 가며 풀어 준다. 남편이 우럭 한 마리 잡아올리면 아내가 좋아하고, 아내가 한 마리 올리면 ‘우리 마누라 솜씨 좋네’ 해가며 남편이 히죽히죽 웃으며 좋아한다. 그 모습 보니 생전 부부싸움 안 한 사람들 같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 이런저런 싸움 다 극복한 후의 평화이리라. 아니, 모처럼 봄바다 앞에 나와 있으니 어제저녁 부부싸움 다 잊고 서로 웃는 것이리라.

◇화강암과 편마암이 7000만년 전부터 침식을 거듭해 만들어낸 채석강. 흡사 책을 쌓아 놓은 것 같다는 평을 많이 듣지만 채석강이란 이름은 중국의 채석강과 흡사하다 해서 붙은 것이다.


◇격포 육땡아줌마 횟집 앞에 모여든 사람들. 흥정이 오가고 저울에 주꾸미 바구니가 올라간다.


등대 앞에 선다. 한 녀석은 흰 등대, 또 한 녀석은 붉은 등대. 두 개의 등대 사이로 연신 고깃배들이 들락거린다. 어느덧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해가 등대를 입체적으로 비추는데, 가만히 보니 등대 표면은 온통 낙서로 가득 차 있다.
“성진이 윤진이 영원히 사랑해라!!”
“희숙 왔다 감. 1년 후엔 꼭 좋은 사람이 되자!”
등대에 서약한 젊은이들의 사랑과 다짐이 아름답다.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들은 그들대로 사랑의 엄숙함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고 1년 후에는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가상한 다짐만 보아도 기성세대의 판단은 오히려 섣부른 것 아닌가 싶어진다.
고깃배들이 연신 들락거리는 방파제에서 돌아나오는데 번데기와 고둥을 파는 부부가 눈에 띈다. ‘기막히게 맛있다’며 아내는 연방 손님을 부르고 있는데 남편은 한 손 가득 쥔 천 원짜리를 세고 있다. 돈 세는 모습 좀 찍고 싶다고 했더니 ‘뭣에다 쓸랴고?’ 해가며 손을 내젓다가 이내 다시 돈 세기에 바쁘다. 돈 세는 재미처럼 좋은 게 있을까. 신권 구권 천 원짜리가 그의 손에서 시푸르뎅뎅 봄볕을 맞고 있다.

◇한 부부는 방파제에서 번데기를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손에도 돈, 바구니에도 돈. 대부분 1000원짜리지만 돈 세는 재미처럼 좋은 것은 없다.


◇바다낚시의 진수는 뭐니 뭐니 해도 손맛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래도 남편일 터. 지금은 아내까지 그 손맛에 반해 채비를 하고 따라나선다.


해가 슬몃슬몃 기울기 시작한다. 변산의 일몰은 ‘가장 아름다운 3대 일몰’의 하나로 꼽힌다는데, 일몰에도 3대 일몰, 5대 일몰이 있는가 싶어진다. 어느 곳에서나 일몰은 비장하지 않은가. 해뜨고 해지는 모습의 아름다움은 사실 사람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바다가 붉게 물들며 채석강 바위를 비춰 내는 모습을 보니 뭔가 다르긴 다르다. 채석강, 7000만년 전의 백악기 때부터 퇴적됐다는 화강암과 편마암의 해식 단애가 종잇장이 쌓인 형세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아쉽다. 채석강도 적벽강도 사실은 중국의 채석강, 적벽강과 비슷하다 해서 붙인 이름인 것이다. 채석강은 이태백이 배 타고 술 한 잔 하다가 바다에 비친 달빛에 반하여 물에 뛰어들었다는 곳과 흡사하며, 적벽강은 중국의 소동파가 노닐던 곳과 흡사하여 그 이름을 본떠 붙인 것이니 최소한 ‘작명의 아이덴티티’는 한국적이지 않다. 그러나 거기에 연연할 때가 아니다. 해가 점점 가라앉으니 물가에만 있을 노릇이 아니다.
사람들을 버리고, 채석강 적벽강을 버리고 해안도로로 올라선다. 해변에서 보는 일몰은 결국 석양에 불과하지만, 길에서 보는 석양은 삶의 일부분이 포함된 모습이다. 모름지기 삶의 윤곽조차 담기지 않은 풍경은 이름값을 못하는 법 아닌가. 해무 속으로 잠겨 드는 봄날 석양 속으로 돈 세는 번데기 가게 아저씨, 등대의 낙서 주인공, 육땡횟집 아줌마의 모습이 스쳐간다. 풍경 속에는 겨울과 봄이 혼재돼 있지만 마음은 이미 화창한 봄날이다.

 

마음에서부터 훈기가 불어오니…

경북 문경
 ◇새재, 즉 조령관문은 예부터 영남과 한양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사람들은 새재를 넘어 남한강에서 다시 배를 타고 한양을 향했다. 그러므로 조령은 지배자들이 반드시 확보해야 할 거점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네다섯 시간을 줄곧 가야 닿을 수 있었던 문경새재.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서울에서 단 두 시간 만에 이화령 아래 조령 관문에 닿는다.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밝다. 조령 1관문 성벽을 따라 걸려 있는 영(令) 깃발이 역사를 거스르려는 듯이 힘차게 펄럭인다. 견훤의 욕망과 왕건의 욕망이 부딪쳤던 곳이고, 더 가까이에는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호랑이에 물릴 각오를 하고 선비들이 넘던 고갯길이다.

조령 관문 앞에서 군밤을 파는 총각이 슬쩍 말을 건넨다.

“비싼 카메라네요.”

그냥 씩 웃으면서 지나친다. 정말 비싼 카메라라고 하면 군밤 팔아 언제 저런 카메라 살 수 있을까, 희망을 꺾을 것 같아 저어된다. 별로 안 비싼 거예요, 하면 ‘그까이꺼’ 할까봐 저어된다. 군밤 사세요, 소리가 귓등으로 흘러가는데 조령 관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물컹한 느낌이 온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스멀스멀 녹아 질척한 것이다. 신발이야 닦으면 그만이고, 물컹한 느낌이 한없이 반갑다. 봄이 목전인 것이다.

조령 2관문까지 오를 자신은 없다. 체력보다는 시간이 문제다. 사실, 문경의 방짜유기촌을 찾아 나선 길이다. 아쉽지만 드라마 ‘왕건’ 촬영지를 힐끗거리다가 걸음을 돌린다. 팔순을 넘긴 이봉주옹이 놋쇠를 두드려 수저를 만들고, 방짜 상을 만드는 문경 가은역 언저리로 달려가고 싶은 탓이다.

가은, 중고등학교 다닐 때 짝사랑했던 아이의 이름처럼 예쁜 지명이다. 이름뿐인가. 가은역 앞에는 도라지 위스키를 팔 것 같은 청파다방이 다소곳이 앉아 있고, 가은 역사는 녹슨 철길을 거느린 채 겨울 풀들과 소곤거리고 있다. 역사 문을 열고 들어가 역무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본다. 기적 소리 들리는 듯, 창문 밖 소나무 한 그루에 무연히 눈길을 던지면 그 옛날 석탄 열차에서 탄가루가 날리는 듯하다. 그렇다. 가은과 진남 사이, 거기에는 온종일 석탄 열차가 오가곤 했다. 그러나 이젠, 그 역과 역 사이에 레일 바이크가 등장해서 한겨울에도 발 구르며 레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쉴새없이 몰려든다. 빠르고 눈부신 KTX 열차와는 정반대의 속도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아들딸을 데리고 봄 마중에 나선 것이다. 엄마 아빠는 페달을 구르고, 아이는 그 사이에 앉아 마냥 즐거워하는 모습이 싱그럽다. 아이의 다른 이름은 곧 봄 아닌가. 모두 새싹인 것이다.

◇문경 지역의 석탄을 실어나르는 데 큰 역할을 한 가은역. 폐허처럼 변한 가은역에는 낡은 역사를 필름에 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다(왼쪽), 겨울 끝물을 지나는 관광객이 진남역의 레일바이크에 앉아 페달을 구르고 있다.

레일 바이크 출발지에서 오뎅 파는 아주머니와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다가 방짜유기촌을 찾아 다시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가은읍의 방짜유기촌은 아직 미완성이다. 대차게 땅을 파고 고르는 포클레인 소리가 우렁우렁 울리는데, 미완성이라고 해도 괜찮다. 이미 이봉주옹의 유기 전수 교육관은 어엿하게 완성된 터이고, 그 옆에서는 이옹 밑에서 방짜 유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하루 종일 근육을 단련하며 쇠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작업장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제일 먼저 백열등 아래 선반에 꽂힌 수저 한 개가 보인다. 눈부시다. 놋쇠의 찬연함이 거기에 있다.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운 곡선미가 밥 한 술 뜨고 싶은 식욕을 자극한다. 그러나 낯선 객에게 밥상 내올 리 없으니 이옹부터 찾는다.

“안 계신데요. 성당 가셨거든요.”

장애가 있어 불편한 걸음걸이로 객을 맞은 이경호씨가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린다. 그 앞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저가 놓여 있다. 설날 떡국 한 그릇 놓고 앉아 손에 들었으면 싶을 만큼 눈부신 빛, 수저라기보다는 보석빛에 가깝다.

“수저 하나에 얼마나 해요?”

이내 답이 돌아온다.

“삼만원은 줘야 하는데요.”

이경호씨는 이봉주 옹 밑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벌써 10년이란다. 그 옆에 서 있던 김송현씨가 맞받는다.

“나는 5년 됐구요.”

두 사람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방짜 유기 작업장에 비해 일하는 사람들 모습이 의외로 적다. 다들 어디로 갔는가.

“설 쇠러 갔다가 아직 안 온 사람도 있죠.”

이경호씨도 김송현씨도 문경이 고향은 아니란다. 직원 수가 30명은 된다는데 서울 사람도 있고, 점촌 사람도 있으니 명절이나 주말이 되면 몇 사람만 남아 방짜 유기 만드는 일에 매달린다는 설명이다.

“여기가 전국에서 제일 큰 방짜 유기장이에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봉주옹 밑에서 방짜 수저를 만드는 이경호씨. 10년 세월을 방짜 유기 만드는 일에 바쳤다(왼쪽), 가은역 앞의 청파다방. 60, 70년대 풍의 전형적인 시골 다방 모습이 간이역과 잘 어울린다.

김송현씨가 작업장에 놓여 있는 종을 발로 툭 건드리니 발 아래에서 성당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지름 1m짜리 상은 1000만원에 이르고, 교회나 성당의 종 역시 수백만원에 이른다니 과연 직원 30여명의 호구를 해결할 만큼 괜찮은 재래 사업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저, 불구덩이에 쇠를 넣어 녹이고, 그 다음에는 땅땅 두들겨 모양을 내고, 그러다 보면 우리 것이 좋은 법이여 해가며 수저도 사가고 주발도 사가는 사람들이 찾아오니 말이다.

그러니 이제야 알겠다. 이경호씨도 그렇고, 김송현씨도 그렇고, 얼굴 가득 먹고 살 만하다는 표정을 지은 까닭을.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작업복 입고 일하는 모습을 보여 준 까닭을. 이들은 모두, ‘이래 봬도 우리가 대한민국 최고의 방짜 유기를 만드는 집단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작업장 밖으로 나서니 누각 하나가 눈에 띈다. 김송현씨가 곁에 붙어서서 누각에 달린 풍경을 가리킨다.

“저게 얼만지 알아요? 무지하게 비싸요.”

“이 지붕을 뭘로 만든 줄 알아요? 저 기와가 모두 방짜로 만든 거라구요. 우리나라에서 유일해요. 어마어마한 금액이죠.”

얼마나 비싼 줄 아느냐고 물어놓고서는 정작 대답은 ‘무지하게 비싸다’, ‘어마어마하다’로 끝나니 온통 방짜 유기로 무장한 누각이 새삼 위대해 보인다.

길을 나서야 하는데 아직 이옹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무슨 기도를 그리 열심히 하시느라 돌아오지 않고 있는가. 혹시 가은읍의 청파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 시켜놓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아닌가. 설날 즈음이니 직원들 좀 쉬게 하려고 말이다. 그럴 수도 있다. 볕 좋고 바람도 그리 차갑지 않으니 한나절쯤 직원들 쉬게 하는 것도 나름의 세뱃돈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옹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그리 무겁지는 않다. 금빛으로 빛나던 수저 하나 들고 떡국 한 그릇 후딱 비워내는 생각만으로도 시간은 즐겁다.

 

인생은 짠맛쉬어가면 어떠리
 ◇보문사 극락보전 위편의 낙가산 자락에서 본 석모도 풍경. 석양에 물든 섬들이 겨울의 추억을 물들이며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간다.
인생은 짠맛이다. 입춘을 넘겼으니 칼칼한 바람은 더 이상 불 것 같지 않지만, 깡마른 염전 바닥에서는 여전히 소금기가 맡아진다. 바닷물을 끌어 대는 주황색 고무 호스가 염전 둑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다. 제 몸을 말려 소금을 잉태하는 바닷물이 들어올 때는 고무 호스가 탱탱하게 팽창하지만, 지금은 염전의 농한기이니 고무 호스는 애 많이 낳고 황혼길을 가는 할머니 뱃가죽처럼 축 늘어져 있다. 축 늘어지기는 했을망정 주황빛의 의미는 크다. 주황색은 빛이 분광됐을 때 가장 밝고 명랑한 느낌을 주지 않는가. 감성과 감정을 북돋워 준다니 텅 빈 염전 한가운데서 느끼는 고적함을 상쇄하기에는 그만이다.

강화도 외포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여객선은 10분도 안 돼 석모도와 보문사로 이어지는 석포 선착장에 사람을 부려놓는다. 사람들은 거의 보문사로 달려가거나 바닷가를 향해 좁은 길을 줄달음친다. 하지만, 보문사 못 미처 왼편의 염전에 들어서 보는 게 중요하다. 염전은 소금밭, 즉 짠맛이고, 짠맛은 인생이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런데 여름에는 팍팍한 노동에 땀방울 줄줄 흘리며 수레 가득 소금을 실어 나르는 농부를 볼 수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대신, 소금창고 뒤편에서는 주민등록증이 발급됐을까 말까 한 젊은 남녀가 절박한 몸짓으로 입술을 포개고 있다. 인생의 짠맛을 알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 청춘들의 사랑이란 그렇게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니 위태롭기 그지없다.

◇법고 치는 시간까지 문을 안 닫고 손님을 맞는 감로다원. 낙가산을 올랐던 사람들이 다향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손발을 녹이는 공간이다.

세상에는 위태로움만 존재하는가. 아니다. 석포리의 간이 정류장에는 어쩌다 한 대씩 오가는 동네 버스를 기다리는 마을 노인들이 앉아 있다. 이 어른들, 눈빛이 한결같이 곱다. 보문사 가서 기도드리지 않아도 만사형통일 것 같다. 스님이 따로 있는가. 세상 이치를 조금 더 아는 사람이 스님이고, 인생길 조금 더 걸어본 사람이 스님이고, 다른 사람에게 평화로운 느낌 주면 스님인 것이다. 그러니 말을 거는 것도 주저되지 않는다.

“할머니, 어디 가세요?”

“어디 가긴? 읍내 장 구경 가.”

“그래요. 할머니 핸드백이 참 곱네. 할머니도 곱고.”

그 중 가장 연로해 보이는 할머니가 가장 고운 핸드백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다. 고동색 손잡이 아래 씨줄 날줄을 따라 분홍, 보라, 청색, 검은색 무늬가 이어진다.

“다 늙었는데 곱긴 뭐가 곱다고 그래? 할머니 놀리면 못써.”

“할머니도 참, 속으론 좋으면서. 할머니, 모델 좀 해주셔야겠어요.”

“모델? 다 늙은 사람을 찍어서 뭐하게. 모델 하면 돈 주는 거 아닌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 꺼내려는 시늉을 하자 할머니들이 일제히 손사래를 치며 웃는다.

“우스갯소리여. 예쁘게 찍어줘야 돼.”

◇마애석불좌상 입구의 종무소 입구에 놓인 운동화와 털신. 털신의 기억은 새마을운동 이전 시대까지에 닿아 있다.

할머니들, 갑자기 바빠진다. 모자 고쳐 쓰고, 두 손 가지런히 모으고, 평생 고민 없이 살아온 사람처럼 얼굴 가득 미소가 번져간다. 재빨리 셔터를 누른다. 표정이 완성되기 전에 셔터를 눌러야 생생한 사진 한 장이 얻어지는 것. 셔터를 누르면서 보니 배경도 할머니들을 닮았다. 손때 탄 장의자 빛깔이며, 길게 금이 가고 굴곡마다 먼지 내려앉은 벽이며가 온통 그렇다.

“할머니, 사진 보내드릴게. 주소 좀 알려주세요.”

“보내긴 뭘 보내. 돈 드는데. 나쁜 데나 쓰지 마.”

“할머니도 참. 할머니 사진을 나쁘게 쓸 곳이 있겠어요?”

“아, 그렇지?”

할머니들, 왁자하게 웃는다. 할머니들의 배웅을 받고 돌아서 보문사로 향한다. 듣자하니, 어떤 스님들은 보문사 주지 한 번 해 보는 게 꿈이라는 얘기도 있는 명찰인데, 무욕의 화신 같은 스님들도 명찰의 주지에 대한 욕망은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그거야 뭐 어쩔 텐가. 보문사 입구에서 눈길을 잡아끄는 사람들이 또 있다. 촘촘히 좌판을 벌여놓고 있는 할머니들이다. 할머니들, 보기에도 안쓰럽게 콩도 사고 팥도 사고 고구마도 사고 참기름도 사라며 손짓해 보지만 지갑을 꺼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니 할머니들의 간절함이 또 뒤따른다.

◇염전을 보면 ‘인생은 짠맛’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겨울 염전은 개점 휴업이지만 깡마른 염전 바닥에서도 짠맛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거, 우리 노인네들이 직접 농사지은 거여. 중국산 아니란 말여. 한 번 잡숴봐. 노인네들이 거짓부렁하겠어?”

차마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기가 민망하다. 이럴 때 사진을 찍는 가장 손쉬운 비법은 ‘할머니, 얼굴 안 나오게 찍을게요’ 하는 것이다.

할머니들이 펼친 좌판을 지나 낙가산 자락 아래 보문사로 들어선다. 이미 석양빛을 받기 시작한 소나무들이 당당하게 푸른빛으로 겨울 저녁을 인내하고 있다. 대웅전의 다른 이름인 극락보전 안에는 대학 합격, 취직 성공, 사업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의 이름표가 등불 아래 빼곡히 걸려 있다. 그 이름표들을 보면 지구상에 근심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명제에 붙들린다. 어쩌면, 근심은 자신들이 만들어 내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을. 부처가 살아서 오늘의 중생들을 보았다면 절에 와서 빌지 말고 식솔들 땟거리 챙기며 집에서 빌어라 했을 것 같다. 하지만 백팔 배를 하는 사람들에게 차마 그런 말 할 수 없다. 그랬다가는 누구 손에 멱살 잡혀도 하소연할 데가 없는 것이다.

마애석불좌상을 향해 언덕을 오른다. 낙가산 등성이 사이로 석포리 해안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석양빛에 황홀하게 빛나는데, 마애석불좌상 안내소 입구에 놓인 운동화 한 켤레와 털신 한 켤레가 눈에 띈다. 얼마 만에 보는 털신인가. 한 세대 전만 해도 겨울을 나기 위해 털신 한 켤레를 간절히 소망하지 않았던가. 며느리가 사온 털신 한 켤레 앞에서 고부간의 갈등을 휙 날려버리던 할머니가 떠오른다.

◇석포리 버스정류장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할머니들. 사진 모델 해달라는 청을 받자 예쁜 모습 보이려 저마다 애를 쓰는 중이다. 애쓰지 않아도 아름답다(왼쪽), 보문사 극락보전에 빼곡히 들어찬 소원 성취 기원자들의 이름표. 이 땅 모든 근심이 이들의 이름표 속에 좌정하고 있는 느낌이다.

사위는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법고 칠 시간이 다가오니 서둘러 산등성이를 내려가야 한다. 눈인사만 하고 내려가는 거냐고 마애석불이 눈을 흘기는 듯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그것이 바로 속인들의 겉 다르고 속 다른 심사이다.

극락보전 앞마당에 당도하니 스님네 셋이 범종각 앞에 서 있다. 둥둥둥, 법고 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저 앞의 감로다원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처자의 모습이 보인다. 1년 내내 법고 소리 들으며 찻집 일을 할 텐데도 그날그날의 법고 치는 소리에 희망을 걸고 사는 모양인가. 어둠 속 처자의 모습이 한없이 곱다.

고운 모습의 여인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가. 법고 치는 스님네들 곁을 떠나 슬그머니 감로다원으로 들어선다. 순간 어둠 속에서 본 모습보다 훨씬 아름다운 처자의 모습이 다가서는데, 처자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지금 내려가지 않으면 강화 나가는 배 못 타는데 어쩌시려구요.”

그런가. 그래도 감로다원 처자 곁을 떠나기가 종내 아쉬워 그냥 씩 웃는다. 인생은 짠맛, 묵어가면 어떠리. 온종일 벗으로 다가왔던 사람들의 모습이 다향처럼 향기롭다.

 

남쪽 나라의 겨울
전남 장흥
 ◇한겨울에도 바다농사는 계속된다. 김 채취에 나선 사람들이 한 점 수묵화처럼 겨울 풍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바닷가 마을에서는 겨울에도 농사를 짓는다. 맵찬 바람 맞아야 하니 옷 두툼하게 입고,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비닐 장화를 신은 사람들이 통통배를 타고 김 양식장 사이를 조심조심 누빈다. 가까이서 보면 그런 행위조차 먹고살기 위한 몸짓이지만 멀리서 보면 한 폭의 그림이다. 겨울바다 같지 않게 잔잔한 물결 위로 양식용 깃대가 바늘처럼 곤두서 있다. 그 사이로 배가 빠져나가는 모습은 한 점 수묵화에 가깝다.

전남 장흥군 회진면 삭금마을 앞바다 일대는 지금 사람들의 김 채취 손놀림으로 분주하다. 그러나 삭금마을에서 작은 산자락 하나를 타고 오르면 만나게 되는 진목마을 사람들은 농한기를 즐기느라고 바쁘다. 즐기는 것은 편한 말로 근심 걱정 내려놓고 일단 놀고 보는 것. 이귀심(69)씨는 며느리가 부엌에 있는 사이 고스톱 방을 데우기 위해 근처의 ‘빈집’을 향해 나선다. 고스톱을 하는 짬짬이 식사를 챙겨야 할 할머니들도 있으니 전기밥솥 코드도 꽂아놓아야 한다. 그래 봐야 10원 내기 고스톱이지만 내기인 것만은 분명하니 내기판을 제대로 챙겨놔야 하는 것이다.

◇정남진 앞바다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가슴앓이 섬. 소설가 이승우의 소설 ‘샘섬’의 소재가 된 곳이다.

“이기 다 할머니들 밑천이지라.”

이귀심씨가 군불을 지핀 다음 펄펄 끓는 방으로 들어가 벽장 문을 열고 할머니들이 알뜰히 챙겨 놓고 간 돈 보따리를 꺼내보이며 웃는다. 아침 먹고 슬금슬금 내려와 고스톱판을 벌이는 할머니들이 실상은 돈은 고스톱 치는 집 벽장에 모두 놓아두고 가는 것이다. 비닐 돈 주머니에 담긴 동전들이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이래 봬도 텔레비전에 나가 맛 자랑도 했지라.”

이귀심 할머니는 밤 내내 달려왔더니 춥고 배고프다는 객을 향해 밥상을 차려 나오며 슬그머니 얘깃자락을 편다. 지난해 여름 진목마을에서 호박 축제를 벌였는데, 그게 빌미가 되어 방송국에서도 연락이 와 맛 대결 하는 프로에 출연했다는 것이다.

“호박으로 만들 게 뻔하지라. 호박죽, 호박전, 이래저래 만들다 보니 만들 게 없어서 내가 호박술을 빚었지라.”

◇소설가 이청준의 생가 방에 걸린 자료 액자들. 집도 방도 액자도 모두 수수하다.

호박술이라는 게 있었을 턱이 없는데, 이귀심씨는 그래도 뭔가 새로운 상품을 내놓아야 할 것 같아 ‘연구를 거듭해서 호박술을 담갔더니 인기가 좋았다’며 웃는다. 호박 축제에 뭔가 기여해야 할 당위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들이 호박 축제를 주관하는 이장을 맡고 있어서였다고 운을 뗀다. 그러니 호박술 자랑에 이번에는 아들 자랑까지 겹친 셈인데 할머니는 인기 탤런트인 양 ‘텔레비전에서 나를 못 봤느냐’고 되묻는다.

이귀심 할머니는 사실 소설가 이청준 선생을 ‘시아재’라고 부르는, 이청준 선생의 사촌 형수이다. 그리고 이귀심 할머니가 고스톱을 치기 위해 군불을 때는 집은 장흥군에서 거금을 들여 복원한 이청준 생가이다. 그러니까 한쪽 방에는 대작가의 학창시절, 작가시절 사진이 담긴 액자가 걸려 있는데 한쪽 방에서는 할머니들이 모여 고스톱을 치는 게 ‘이청준 생가’의 안팎인 셈이다.

“용인 사는 우리 시아재 집은 을매나 넓은지 어디가 어딘지 찾기도 힘들지러. 그래도 우리 시아재가 고향 왔다가 내가 없으면 요기서 이래 기다리지러. 우리 시아재가 똑똑하기도 하지만 을매나 착헌지. 핵교 다닐 때와 똑깥지러.”

◇소설가 이청준의 사촌 형수 이귀심씨. 호박 술을 개발해 텔레비전에 나왔던 유명인이다.

이귀심 할머니의 호박 얘기, 이청준 선생 얘기를 들으며 밥 한 그릇 비워 내고 나와 보니 호박 체험관이 이청준 선생의 생가보다 훨씬 크고 멋스럽다. 마을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 호박 축제 아이템을 구상했고, 그것이 생태마을 지정으로 연결돼 정부 지원금을 받아 지었단다. 마을 사람들도 이청준 선생과 마찬가지로 뭔가를 창작해 내는 능력을 지닌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진목마을은 영화 촬영지로, 생태마을로, 소설가 생가 문학기행지로 유명세와 더불어 짭짤한 수익 구조를 갖춘 형국이다.

사람살이의 근본은 어울림이다. 진목마을에서는 그런 모습이 쉽게 느껴진다. 낯선 객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는 대신 ‘사진 찍으러 오셨구랴’ 인사부터 건네는데 인사를 받는 축이 민망할 지경이다.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50대에서 70대까지, 인생의 풍파를 웬만큼 겪어낸 ‘어른’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거처 찾아온 사람은 잠시나마 함께 사는 것이라는 뜻일 터이다.

◇진목마을에서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가릴 것 없이 동거하듯 소 개 닭들도 한자리에 동거한다.

사람만 그럴까. 느티나무 아랫집의 외양간을 들여다보니 거기에도 함께 사는 가족들이 있다. 소 세 마리, 개 한 마리, 닭 한 마리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낯선 객을 향해 눈길을 던지고 있다. 그 눈길들이 모두 순해 빠져 보여서 슬며시 웃음이 난다. 소도 개도 닭도 동네 사람들 심성을 닮았구나.

진목마을에서 나와 정남진을 향해 간다. 정남진이라니, 정동진은 낯익지만 아직은 낯설다. 하지만 드라마 한 편 때문에 정동진이 유명해지자 장흥군은 서울중심표시돌로부터 정방향 남쪽이 관산읍 신동리 사금마을이라는 것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정남진인데, 서울에서 일직선을 그었을 때 닿게 되는 북쪽의 중강진, 동쪽의 정동진과 같은 의미이다. 정동진이 드라마 ‘모래시계’ 때문에 유명해졌다면 정남진은 영화 ‘축제’ ‘천년학’ 때문에 유명해졌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정남진 지역을 마라톤 코스에 맞춰 42.195㎞에 걸쳐 지정한 것도 재미있다. 다분히 스포츠 마케팅을 염두에 둔 느낌인데, 지난해 3월에 이어 올해도 3월11일 마라톤 대회를 연다는 소식이다. 마라톤 대회를 열지만 대회 본부의 캐치프레이즈는 ‘느린 세상’이다.

◇진목마을의 또 다른 이름은 ‘호박나라’. 호박축제 기간에는 마을 전체가 북새통을 이룰 정도로 흥겨움에 빠진다(왼쪽), 남쪽 지방에 동백이 피면 봄은 멀지 않다. 장흥에는 이미 동백이 피었다.

봄기운이 만져질 듯 부드러운 해풍에 몸을 맡기고 있는데 동네 사람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건다.

“이 동네가 매생이로 유명하지라. 드셔 보셨소?”

나주 사람이 운영하는 서울의 한 식당에서 매생이 국 좀 더 달라고 했다가 ‘매생이가 을매나 비싼지 아요?’, 퉁박 한번 호되게 먹은 기억이 떠오른다. 동네 사람이 이내 화제를 돌려세운다.

“유명한 사람도 많이 나왔지라.”

얘기를 듣고 보니 한국화가 김선두도, 소설가 이승우도 사금마을 사람이란다. 아하, 그렇다. 해초처럼 가는 선을 자주 부리면서 바다색을 많이 쓰고 섬마을 소년을 자주 등장시키던 화가의 그림이 떠오른다. 고향집 앞 돌섬을 소재로 쓴 소설 얘기를 했던 작가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 돌섬 이름이 가슴앓이 섬이라고 했었다. 가슴앓이 섬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니 뒤편은 천관산이다. 눈이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믿고 달려온 것이었는데 날씨는 맑고, 대신 눈 덮인 천관산이 농한기와 농번기가 공존하는 장흥 땅을 지켜보고 있고 그 옆에 이미 동백은 피었다.

 

남한강변의 겨울풍경
충주 탄금대·목계
 ◇석양이 남한강변을 비춘다. 목계교와 배는 과거와 현재의 목계리를 웅변하는 또 하나의 상징소다.
물오리 가족들이 물그림자를 남기며 재빨리 헤엄쳐 간다. 한낮이 되어 수온이 올라가니 먹이 사냥에 몰두해 있던 녀석들, 인기척을 피해 재빨리 호수의 중심으로 도망쳐 가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해 헤엄쳐 본들 얼마나 멀리 가겠느냐고 우습게 봤다가는 후회하기 십상, 조금만 방심하면 카메라 파인더에는 작은 점처럼 찍힐 뿐이다. 해서 남한강변 탄금호 수면에는 물오리떼가 만든 부챗살 모양의 유영 흔적이 가물가물 나타났다 사라진다.

햇살이 고운 겨울 한낮 탄금대에 오른다. 문득 머리 위에서 엔진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고 보니 모터 패러글라이딩에 심취한 사람이 노란 날개에 의지해 겨울 비행의 낭만에 취해 있다. 투투거리는 엔진 소리를 따라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하늘로 향한다. 모터에 의지해 맨몸으로 감행하는 비행, 일찍이 하늘을 나는 게 사람의 꿈이었으니 그렇게라도 하늘을 날고 있는 사람의 모습에서 몇 줌 부러움이 솟는다.

◇지상에서 가장 큰 집을 가진 탄금호수의 물오리떼. 한없이 느린 듯하지만 사람의 발짝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줄행랑치는 데는 이력이 나 있다.

탄금공원의 숲은 고요함에 잠겨 있다. 나무들은 모두 잎을 떨구었지만 탄금대와 대흥사 사이의 대나무 숲은 푸른 빛이 완연하다.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댓잎 소리를 들으며 숲길로 들어선다. 문득 짓궂은 생각이 스쳐간다. 신라의 악성(樂聖) 우륵이 탔다던 가야금 소리라고 해서 겨울 한낮의 댓잎 두런거리는 소리보다 낫지는 못했으리라. 대숲 아래로 절집 지붕이 보인다. 지역은 다르지만 구도는 똑같다. 부여의 부소산 낙화암에는 삼천궁녀가 몸을 던진 바위가 있고, 그 아래 고란사가 있다. 여기, 탄금대에는 신립 장군이 왜구와 싸우다 몸을 던진 십이대가 있고 그 아래 대흥사가 있다. 숲길을 내려서 단청을 입히지 않은 대흥사 대웅전에 앞에 선다. 사람들 몇, 디딤돌로 변한 맷돌들을 밟고 대웅전 앞에 서서 합장하며 기도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대학 입시생을 둔 학부모가 틀림없다. 우리 용현이 대학에 꼭 합격하게 해주시옵고…. 빌 것은 참 많은 법이어서 기도의 대상은 저마다 다르지만 간절함의 질량은 같다.

◇탄금대 아래쪽에 자리 잡은 대흥사. 역사는 길지 않지만 단청을 입히지 않은 모습은 미황사를 닮았고, 위치로 보면 고란사를 닮았다.

탄금호에서 내려와 목계를 향해 간다. 오래전, 목계에 갔을 때의 기억은 사람보다 돌이 더 많은 곳이라는 것이었다. 10년도 더 지난 기억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사람보다 돌이 더 많을까 궁금해진다. 그리고 목계교 아래 남한강 수면에서 작은 배에 의지해 고기잡이를 하던 사람의 모습도 떠오른다. 모든 것이 같을 수는 없을 터이다. 목계나루터가 유명세를 좀 치른 후이니 변하지 않은 것은 강일 뿐 강변 풍경은 전과 다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목계교를 건너니 제일 먼저 목계나루텔이 눈에 잡힌다. 가장 높고 화려한 건물이 모텔이라니. 모텔과 잇대어 있는 허름한 가게들 앞에 돌무더기의 행렬이 이어진다. 그나마 다행이다. 여전히 목계나루터 주변은 돌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단골행 차지인 것이다. 자세히 보니, 돌들은 매끈하기 이를 데 없는데 돌을 파는 가게들은 곧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남루하다. 어둠이 내리려는 데도 외등을 켠 가게는 단 한 곳뿐, 한 가게의 간판은 지붕에 넘어져 있고, 지붕은 비 새는 것을 막으려고 덮은 비닐과 돌멩이로 얼룩져 있다. 알고 보면 돌 팔아 알뜰살뜰 살아가는 몸짓이지만, 그래도 안쓰럽다. 대저, 도심에서는 간판 하나 세우는 데 몇백만 원도 쓰고, 몇천만 원도 쓰는 시대 아닌가. 그러고 보면 목계리 사람들은 비에 휩쓸리고, 바람에 휩쓸려도 비바람에 몸을 맡기는 돌을 닮은 것은 아닌가 싶다.

◇탄금대에서 대흥사로 이어지는 숲길이 아련한 추억처럼 굽어 있다. 가을 이후 줄곧 낙엽이 쌓여 어떤 양탄자도 부럽지 않을 만큼 푹신하다.

고급 승용차를 길가에 세운 사내들 몇이 돌 가게 주인과 흥정을 하는 사이 강변으로 내려선다. 목계교 상판을 내달리는 트럭들의 소음이 강변에 매어놓은 작은 배 위로 떨어진다. 아마도 단속원을 피해 한밤중에 고기잡이에 나서는 듯 배의 이름은 아예 지워져 있다. 배 도둑맞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배 주인이 누구인지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하긴 그것이 찬바람 속에서 민물고기 잡아 그날 먹고 그날 살아가는 사람의 감출 것 없는 속내이리라.

사실, 남한강 목계나루는 나라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곡선이 들어갈 수 있는 남한강 수운의 종점이었다. 곡식 사백 가마니를 실은 배 20여 척이 서로 교차할 수 있었고, 나루 건너편에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보관하는 가흥창이 있었으니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을 터이다. 인천에서 소금 젓갈 건어물 등속을 싣고 온 황포돛배 수십척이 닻을 내렸을 때는 또 어떠했을까. 갯내음 물씬거리는 장터에 사람들의 고함과 인정이 뒤엉켜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수심이 얕아지는 겨울에는 목계리 일대 남한강변을 자동차에서 내리지 않고도 둘러볼 수 있다. 얼고 녹기를 거듭한 강물이 햇살을 받아 영롱한 콘트라스를 이룬다.

하지만 지금 그 자리에는 식당 몇 개가 들어섰을 뿐 가흥창의 자취는 찾을 길 없다. 그 언저리에 신경림 시인의 시 ‘목계장터’, 판화가 이철수가 신경림의 시집 목록을 새긴 시비가 들어섰을 뿐이다. 그리고 강변 둑에 옛날 모습을 재현한 목선 한 척이 둥실 떠 있는데, 철제 빔 위에 올려 세워진 목선을 보노라면 물 위에 띄워놓은 비행기처럼 생뚱맞다. 배는 물 위에 있어야 하고, 비행기는 하늘에 있어야 한다는 당위를 깨물다 보면 거기서 ‘사람이든 사물이든 모름지기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아름답다’는 명제가 툭 떨어진다.

그러나 어떠랴. 물 자락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차를 몰고 가면 손에 잡힐 듯 얼음장으로 변한 수면이 보이고, 갈대의 수런거림이 들려온다. 그 수면에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햇살이 비추면 남한강변은 무아지경의 화폭이 된다. 한 부분은 검고, 한 부분은 더없이 눈부신 황금빛으로 물드는 것인데 그 물결 속으로 들어온 노부부가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한마디씩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온다.

◇사람보다 돌이 더 많은 마을을 상징하듯 목계리에 수석 가게가 많다. 대부분의 돌은 매끈하고, 대부분의 수석 가게들은 허름한 것도 이곳의 특징이다.

“이것 봐, 참 좋네. 날씨도 참 좋고.” “그러게요.”

감동의 표현이라고 해서 꼭 길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형용이 필요없을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노부부가 간단하게 주고받는 남한강 관상기는 강의 아이덴티티를 읽어낼 줄 아는, 그러나 미사여구를 동원하는 데 급급하지 않은 인간적 표현법으로 맞춤하다.

목계교 위로 저녁 해가 기울기 시작한다. 목계교를 건너는 자동차들은 하나 둘 미등을 켜기 시작한다. 전에는 강물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줬지만 이제 그 몫은 목계교가 하고 있는 것이다.

강둑으로 올라서며 눈길을 던지니 이름 지워진 배에 노란 바구니가 놓여 있는 게 보인다. 날이 완전히 저물면 어부는 펄떡이는 물고기를 한가득 채워 올 희망에 품고 강의 중심으로 나서리라. 그에게는 밤의 겨울바람도 춥지 않으리라. 남한강변의 겨울 한나절이 그려낸 소묘, 질박해서 오히려 하나의 기억을 완성한다.

 

강원도 인제군 귀둔리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겨울이 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식당 안의 온기를 유지시켜 주는 연탄의 불꽃. 한 장에 320원, 김월영씨는 하루에 아홉 장을 때는 것으로 난방비를 감당한다(왼쪽), 필례약수터 앞에서 식당을 하고 있는 김월영씨. 30년 넘게 약수터 앞을 지키며 살아오는 동안 지난해처럼 지독한 물난리는 처음이었지만 마음으론 여전히 ‘잘될 것’이라고 낙관한다.
길은 한없이 굽어 있다. 길 옆으로는 녹지 않은 눈들이 종아리 높이만큼 쌓여 있고, 자동차들은 허덕이며 조심조심 언덕을 오른다. 새로 뚫린 대관령 길은 거의 일직선에 가까워졌지만 한계령 길은 여전히 좁고, 한없이 굽어 있으니 거기에서 한 줌 인생길이 연상된다. 길은, 인생길에 탄탄대로는 없다고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계령 길을 오르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사유할 수 있게 된다. 느림과 빠름이 무엇인지, 오르고 내리는 것이 무엇인지. 그런 사유는 순전히 빠르게 달릴 수 없는 길의 특성에서 발현된다. 길은 사람이 내지만 길을 내놓고 나면 역할이 바뀌어 길이 사람을 가르친다. 그 중에서도 굽은 길이 가르치는 사유가 으뜸이니 한계령의 휘어지고 휘어진 길이 밉지 않다.

인제 원통을 지나 한계령을 넘으면 양양군이 되지만 한계령을 넘자마자 오른쪽 샛길로 접어들면 길은 다시 인제군으로 이어진다. 길은 훨씬 더 자주 굽어 있고, 잔뜩 쌓였던 눈이 그대로 얼어붙어 저절로 브레이크에 발이 간다. 지난해 물난리를 호되게 겪으면서 유실됐던 도로들은 아직도 복구 공사중이지만 강추위 탓에 포클레인은 멎어 있고, 계곡에는 수마에 휩쓸린 나무들이 헐벗은 채 누워 있다. 지나간 상처이긴 하지만, 상처를 확인하는 일은 슬프다.

◇양양군과 인제군의 경계인 한계령 아래턱은 오후 5시만 돼도 어둠이 내린다. 미등을 켠 자동차들이 폭설의 흔적이 남은 한계령을 아슬아슬하게 오가고 있다.

그러나 상처는 아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이 현란한 수사를 정직하게 증명하는 사람을 만났다. 식당 주인이다. 귀둔리 필례약수터 앞의 필례식당 주인 김월영씨는 정갈한 산채정식을 내놓고는 이내 연탄집게를 든다.

“기름 난로를 때면 기름값 감당 못해요. 기름값 아끼려고 밤에 꺼놓으면 식당 안의 물건들이 다 얼어버리거든요. 연탄이 최고예요. 한 장에 320원인데, 하루에 아홉 장만 때면 만사형통이라고요. 이 깊은 골짜기까지 배달해주고도 320원이면 싼 거예요.”

김씨의 얼굴에는 그늘 한 점 없지만, 식당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이렇게 손님이 없어서야 어떻게 먹고 사나 싶다. 하지만 김씨는 또 태평이다.

“수해 나기 전에는 손님 많았어요. 도로만 제대로 복구되면 손님들이 많이 올 거예요. 우리만 어렵나요 뭐. 다들 어렵다고 하는데. 봄 되면 나아질 거예요.”

◇‘어서 오십시오 귀둔리, 안녕히 가십시오 귀둔리’ 표지석 앞으로 장엄한 겨울 산이 석양을 맞고 있다. 은비령은 이 지점에서 시작돼 은둔하는 땅의 신비로움을 보여준다.

식당을 둘러보니 진열장에는 이름표를 붙인 술병들이 가득이다. 삼지구엽주, 산머루주, 솔주…. 어떤 녀석은 1만원을 받고, 어떤 녀석은 6000원을 받는다는데 술병 진열대 반대편에는 갖가지 꿀병들이 놓여 있다. 딸 하나, 아들 하나 키우면서 30년 넘게 식당을 유지해온 비결이 이런 데 있다. 말하자면, 시골 식당의 복합화 같은 것으로 생존전략을 삼은 셈이다. 그렇다고 복합화가 순탄하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관광객이 늘어서 펜션 몇 채를 지었더니 지난해 수마에 다 쓸려 내려가고 말았단다. 여러 채가 쓸려갔지만 정부 지원금은 한 사람 앞에 한 채만 지급한다는 명목에 걸려 2000만원밖에 받지 못했다는데, 김씨는 그 얘기를 하면서도 어두운 표정을 짓지 않는다. 천성이 밝은 사람인지, 숲 가까이에 살아 그런 심성이 됐는지, 아니면 그 둘 다인지 모를 일이다. 상처는 아물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하지만, 그 상처를 혼자 힘으로 다스리는 사람을 보면 안쓰럽다.

필례약수터는 텅 비어 있다. 붉은 플라스틱 표주박으로 약수 몇 모금을 들이켠다. 철분이 많아 좀 비릿하긴 하지만 모름지기 참을 일이다. 피부병과 위장병에 좋고 숙취까지 해소해 준다니 여간 반갑지 않은데, 몇몇 사람들은 을씨년스러운 약수터 주변만 둘러보고 이내 발길을 돌린다. 하긴, 얼핏 보면 시골 마을 느티나무 밑의 정자 모습에 가까우니 먼길을 달려온 사람들에게는 ‘실망’일 수도 있지 싶다. 하지만 약수터에서는 약수가 주인이니 거기에 무슨 치장이 필요할까.

◇피부병, 위장병, 숙취 해소에 좋다는 필례약수. 방동약수, 오색약수와 더불어 강원도 약수 3인방으로 불린다.

약수터 위쪽 마을을 향해 방향을 잡는다. 작은 언덕이지만 자동차는 이내 눈길에 미끄러져 뒷걸음질친다. 만만하게 볼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몇 차례 미끄러지기를 거듭하고 나서야 작은 언덕 위로 차가 오른다. 이윽고, 거기 새로운 풍경이 나타난다. 자작나무숲이다. 팔만대장경을 자작나무로 만들었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그보다는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 가는 저 겨울 자작나무’라고 읊은 시인 정끝별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제 멍을 완성해가는 자작나무들 곁에 영화 ‘태백산맥’을 촬영할 때 세워둔 세트 건물들이 귀기한 모습으로 들어서 있다. 퇴락한 모습이지만 그 자태는 자작나무와 묘한 대조를 이루어 빛난다. 사실 어떤 구조물도 주변 형세와 어울리지 않으면 그 가치가 상실되는 법, 자작나무도 소용가치를 잃은 세트장도 겨울 설경에는 그야말로 딱이다.

그러나 자작나무 숲 곁의 카페 문은 잠겨 있다. 한겨울, 약수터를 찾는 사람 구경하기가 힘드니 난방비도 안 나오는 찻집 장사는 겨울 한철 동안 쉬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이래저래 필례 약수터가 자리한 귀둔리 일대는 자작나무 혼자 흔들리는 공간이 돼버렸다. 소설가 이순원이 중편소설 ‘은비령’을 쓴 뒤 독자들과 곧잘 귀둔리를 찾는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소설 속의 은비령은 태초의 공간처럼 ‘隱秘嶺’으로 묘사된다. 거기에는 속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땅과 하늘과 사람이 은둔자처럼 자리해 있다. 문득, 필례식당 주인이 식당 옆에 은비령이라는 카페를 낸 것도, 소설가 이순원이 ‘은비령’을 쓴 것도 약속하지 않은 가운데 마음의 결이 닿았던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필례약수터 위쪽의 자작나무 숲. 잎이 다 떨어져 스산하기는 하지만 영화 ‘태백산맥’을 촬영할 때 쌓은 돌탑과 어울려 은비령의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다시 약수터 밖으로 나와 지방도로 위의 눈길을 달린다. 해는 벌써 서산을 넘어가는데 길 한쪽의 집들마다 겨울을 날 땔감들이 잔뜩 쌓여 있고, 어느 집 굴뚝에서는 때 이른 저녁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 땔감들을 볼 때마다 필례식당 주인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연탄이 최고예요. 한 장에 320원인데, 하루에 아홉 장만 때면 만사형통이라고요.” 아무렴, 식당 복판에서 활활 타던 연탄 불꽃이 어른거린다. 그놈의 연탄가스 중독이 두려워 다들 기름 보일러를 거쳐 가스 보일러로 갈아탔지만 여전히 연탄은 유효하다. 그러니 시인 안도현은 ‘연탄 한 장’에서 읊지 않았던가.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다시 한계령에 서서 미등을 켜고 언덕을 오르는 자동차들을 보지만 눈에는 여전히 식당을 데우던 연탄 몇 장의 불꽃이 선연히 떠오른다. 대한 추위가 내일모레인데, 문득 연탄 난로 옆 산채 정식 밥상이 다시 그립다.

 

'풀하우스'의후광이…
인천 신도·시도·모도
 ◇일몰 무렵, 밀물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뻘에 몸을 눕히고 있던 배들은 이윽고 출항의 기대에 부풀어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듯하다.
영종도 삼목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인천시 옹진군 북도면의 신도는 연륙교를 통해 시도·모도가 연결돼 세 개의 섬을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여객선은 사람들을 내려놓고 다시 장봉도를 향해 뱃머리를 돌리는데, 섬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다른 생각할 것 없이 드라마 세트장을 찾기에 바쁘다. 하긴, 드라마 촬영장이 관광명소로 각광받는 것은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드라마의 중심에는 주연 배우가 있지만 드라마를 탄생시키는 사람은 프로듀서이고, 프로듀서가 낙점한 헌팅 장소는 어떤 식으로든 아우라가 담겨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드라마가 뜨면 헌팅 장소도 뜨는 법이다. 모름지기, 미장센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긴 하지만 그게 다일 수는 없다. 드라마 ‘풀하우스’의 세트장 입구 논뙈기 옆에서는 올해 예순다섯이 된 강성식씨가 무쇠솥에 불을 지피고 있다. 작은 둔덕 아래 매달린 솥만 해도 세 개나 된다. 식솔이 꽤 많은가 보다 싶어 물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엄청난 수의 양식이 필요하단다.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해지면서 신도 시도 모도에 관광객을 불러모으고 있는 풀하우스 세트장 전경. 실내를 구경하려면 입장료 5000원을 내야 한다.

“개죽을 끓이고 있슈.”

영목항을 다녀온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옹진군의 섬에서도 충청도 사투리가 들려오니 고향이 어디냐고 물을 수밖에 없다.

“충남 스산유.”

서산이라면 필자의 유년 시절이 배어 있는 곳이니 대화가 술술 풀려가는 것은 시간 문제다. 국회의원을 지낸 친척 이름을 대니 강씨의 안색이 단박에 밝아진다.

“그럼유, ○○○ 그 사람, 내가 잘 알쥬. 고향 사람이잖유.”

듣고 보니, 개에게 먹일 죽을 무쇠솥에 끓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연초에 개가 새끼를 낳았단다. 무려 아홉 마리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런즉, 강씨는 산후 조리를 해야 할 어미 개를 위해 복무하고 있는 셈이다.

◇바다와 잇닿아 있는 이일호조각공원의 남녀 조각상. 그 위로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날고 있다.

그는 비닐하우스 안의 개집에 있는 강아지들을 보여 주었다. 강아지들은 갑자기 찾아온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서로 몸을 포갠 채 끙끙거리는 중이었다. 애완견들은 사람 못지않게 값비싼 양말 신고 목도리까지 두르고 다니는 세상이지만 강씨의 비닐하우스에서 태어난 강아지들에게 양말과 목도리는 언감생심이었다.

“저놈들이 한 마리에 4, 5만원 해유.”

개 키우는 것이 본업은 아니지만 강아지 아홉 마리를 잘 키우면 그 수입도 만만치 않겠다 싶은데 그의 눈길은 어느새 집 앞의 염전 쪽으로 향해 있다. 염전도 자신의 밭이란다.

“겨울에는 괜찮은데, 봄 되고 여름 되면 일할 사람이 읎어서 무지 힘들어유. 사람들이 힘든 일을 안 하려구 하잖어유.”

무쇠솥 앞을 지키고 있는 강씨 곁을 떠나 시도와 모도를 잇는 다리 앞에 차를 세운다. 남자와 여자 모습의 조각 한 쌍이 서로 등을 보인 채 바다를 향해 열려 있다. 여자는 안식을 취하고 있는 듯하고, 남자는 두 팔을 쳐들어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 뒤로, 배 한 척이 둥실 떠 있다. 지금은 밀물 무렵, 바다가 더 깊어지면 배 주인이 나타나 먼바다로 나갈 채비를 차릴 것 같은데, 갑자기 밀어닥친 한파를 생각하면 바위 위의 조각상은 왠지 부풀려진 낭만처럼 여겨진다. 그 낭만의 조각상을 밀쳐내듯 연륙교 쪽을 향해 고기잡이에 나섰던 통통배 한 척이 물살을 만들어가며 다가든다. 거침없는 바람 탓에 배보다 더 큰 물살이 오랫동안 수면 위에 머문다. 개 죽을 끓이던 강씨는 벌써부터 여름 일꾼 댈 것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바다에서는 계절 가릴 것 없는 농사가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마릿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몸을 포개 추위를 견디고 있는 강성식씨네 강아지 아홉 마리.

모도의 초등학교 터에는 카페가 들어섰다. 학교 운동장은 당연히 텅 비어 있다. 족구를 하거나 배구 시합을 하기에 좋을 성싶지만 그런 모습을 보려면 우수 경칩이 지나기를 기다려야 할 터이다. 그러니 초등학교 터 앞의 저수지도 지금은 온통 갈대들 차지다. 바람 좋고, 따뜻한 날에는 낚싯대가 드리워지곤 했을 수면은 얼음장으로 변해 버렸는데, 갈대와 얼음의 어울림이 사뭇 대조적인 게 화가의 붓놀림이 그리운 눈치다.

승용차들이 초등학교 터를 지나 작은 언덕 쪽으로 우회전해 들어간다. ‘배미꾸미 조각공원’ 팻말이 눈밭 속에 직립해 있다. 배미꾸미 조각공원은 조각가 이일호씨가 조성한 것으로, ‘배미꾸미’는 ‘배의 밑바닥’을 뜻한단다. 모도의 형세가 배 밑바닥을 닮았다고 해서 붙였다는데, 500여평의 잔디에 설치된 그의 조각들은 한결같이 생의 근원을 묻는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상체가 활처럼 휜 여자는 두 팔 벌려 하늘로 비상하는 듯하고, 모래사장 위에서 서로 몸을 포갠 남녀의 얼굴은 윤곽만 살아 있을 뿐 나머지는 뻥 뚫려 있다. 바다는 잔잔하지만, 바다 곁의 이일호 조각들은 잔잔하지 못한 삶에 대해 사유하기를 권유하는 셈이다.

◇신도와 시도를 잇는 연륙교 옆의 바위에 설치된 남녀 조각상. 썰물 때는 개펄과 조화를 이뤄 질박한 삶의 결을 곱씹게 만든다.

그 조각들 위로 인천공항 활주로를 이륙한 비행기들이 1, 2분 간격으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1, 2분 간격이긴 하지만 비행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별과 재회가 동승해 있다. 그러니까 신도·시도·모도에서의 시간은 뭍과 바다와 하늘의 움직임이 더불어 존재하는 공간이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공간이다.

해가 기울면서 밀물이 시작된다. 개펄의 면적이 조금씩 줄어든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잠깐씩 비추기는 하지만 장엄한 일몰 풍경을 보기는 힘들 것 같다. 하긴 일몰 풍경이 뭐 그리 대수인가. 궁금한 것은 무쇠솥 앞을 지키던 강성식씨가 한낮의 일을 끝내고 낮술이라도 한 잔 걸치며 쉬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다시 차를 몰아 신도 쪽으로 나가 인정 많은 사람인 척 강씨네 비닐하우스 쪽을 기웃거린다. 아홉 마리 새끼의 안위를 걱정하는 어미 개가 컹컹 짖어댄다. 강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무쇠솥 걸린 아궁이에서도 더 이상 장작이 타지 않는다.

다행이다. 타향살이 30년째라던 강씨, 이제 좀 쉬는 모양이다.

 

서해는 결코 잔잔하지 않다
안면도 영목항
 ◇완전무장한 채로 먼 바다를 향해 나가는 뱃사람들. 바다의 움직임에 삶을 맡긴 터라 뭍에서 멀어질수록 마음은 결연해진다.
한겨울 추위가 예전만 못하다고는 해도 바닷가에 서면 사람은 두 종류로 분간된다. 바다를 중심으로 생업에 나선 사람이 그 하나요, 머리를 식히러 바닷가를 찾은 관광객이 또 하나다. 그걸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바다가 생업의 현장인 사람은 장갑에 귀마개에,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장치들은 모두 동원한 모습이다. 관광길에 나선 사람들은 폼 나는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까지 끼었을지언정 귀마개까지 한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같다. 머리 식히러 나선 사람도 먹고사는 일에 한층 충실하기 위해 길을 나선 참이고, 바다와 사투를 벌이는 사람도 ‘오늘은 어제의 오늘’이고 ‘내일 또한 내일의 오늘’이니 먹고사는 일의 밧줄을 잠시도 느슨하게 풀어 놓을 수 없다. 예컨대 모든 사람은 지금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 해를 순조롭게 보낼 수 있다는 결연함에 차 있다는 점에서 같다.

◇부두에서 해산물을 팔고 있는 할머니. 장작불은 거의 손님들 차지이고, 할머니는 손이 시려워 못 견딜 정도가 돼야 잠시 손을 녹이려 일어선다.

새해가 시작된 지금, 영목항 부두에서 해산물을 파는 할머니 곁의 함석 통에서는 장작불이 일렁이고 있다. 인심 좋은 할머니다. 물건을 사지 않는 사람에게도 ‘불 쬐고 가라’며 장작불을 내어주고, 길손이 불을 쬐고 있노라면 김도 한 장 구워 주고 굴 한 점도 내어준다. 당신은 손이 시려워 일을 못할 정도가 돼야 가끔 장작불 앞에 두 팔을 늘어뜨려 언 손을 녹일 뿐이다. 자세히 보니 항구에서 바닷바람과 싸운 할머니의 손치고는 곱다. 손은 곱지만 머플러를 머리에 두르고 목에 감고, 스웨터에 점퍼에 조끼까지 중무장한 모습을 보노라면 삶이 사람을 얼마나 단련시키는가를 저작하게 된다. 하지만 이 할머니의 얼굴에 수심은 없다. 무릇, 나 좋아서 하는 일과 싫은데도 억지로 하는 일의 차이는 바로 표정에서 나타나는 법이니 이 할머니의 1년은 내내 행복할 터이다.

영목항 부두와 맞붙어 있는 오복횟집으로 들어선다. 청년 한 명이 식탁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무슨 작업인가를 하고 있어 식당 주인의 아들이려니 했는데, 밥을 먹으면서 들어보니 청년이 주인이다.

“우리 식당이 유지되려면 한 달 매상이 3000만원은 돼야 해유.”

주인을 둘러싼 종업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간장게장 1인분이 1만5000원이니 간장게장 먹는 사람만 하루 평균 70명은 받아야 하는데 그게 꼭 쉬운 일은 아닐 성싶다. 영목항의 식당들은 거의 다 간장게장을 주메뉴로 팔고 있으니 말이다.

“매상을 채우려면 인터넷에 홍보도 돼야 하고, 주차장 문제도 해결돼야 허는디 주차장은 결국 도로변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잖유. 그러니까 인터넷 홍보와 맛, 그리고 서비스예유.”

◇호떡 굽는 손이 여럿이다. 이미 타버린 호떡만 보아도 이들이 아마추어 호떡장수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호떡을 팔아 이웃을 돕겠다는 의지 때문에 아무도 호떡 맛에 시비를 걸지 않는다.

맞는 말이다. 홍보를 아무리 잘해도 맛없으면 그만이고, 맛이 좋아도 서비스가 안 좋으면 입소문이 날 리 없다. 하긴 굴 맛 좀 볼 수 없느냐고 했더니 망설임 없이 듬뿍 내온 것도, 거기에 소주 한 병까지 서비스를 한 것도 서비스 강화의 일단이었던 모양이다. 젊은 식당 주인의 마케팅 회의를 엿들으면서 게장을 먹다 보니 게장 맛이 생각보다 별로라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부두 한켠에서는 난데없이 호떡 장사가 호황을 누리고 있다. 호떡 파는 가게에 손님보다는 호객꾼과 호떡 붙이는 사람이 더 많으니 분명 호떡집에 불난 격이다. 알고 보니 ‘호떡 팔아 이웃돕기 성금으로 쓰자’고 나선 마을 사람들이란다. 호떡 굽는 손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니 여기저기서 불만이 쏟아진다. 좋은 일 하는 사람들 얼굴 좀 예쁘게 찍어주지 왜 호떡만 찍느냐는 것이다. 불만도 참 많은 세상이다. 얼굴 찍으면 초상권 침해한다고 야단치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이 사람들은 얼굴 안 찍는다고 야단이다. 속으로 은근히 비아냥거려 본다. 호떡 굽는 솜씨들이 영 젬병인데 얼굴만 예쁘게 나오면 뭐한단 말인가. 아무려나, 호떡 사는 사람보다 호떡을 굽는 사람이 훨씬 많으니 이웃돕기 성금이 초라할 만큼 모이면 호떡 장수들이 제 주머니를 털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러나 어떠랴. 새해 첫걸음을 이웃돕기로 시작했으니 이들 역시 한 해의 삶이 윤기 나게 흘러갈 터이다.

◇안면도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영목항은 일출,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는 명소이기도 하지만 이웃한 섬사람들을 육지로 옮기는 다리 역할을 하는 곳이다.

◇영목항 부두에 자리 잡은 식당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골몰하고 있는 오복횟집의 젊은 주인. 한 달 매출 3000만원을 올리기 위해 종업원들과 아이디어 회의를 자주 갖는다.

영목항은 안면도의 가장 남단에 자리 잡은, 삼면이 바다로 열려 있는 항구이다. 그러니 안면도에서 떨어진 섬으로 들어가려면 배를 타야 하는데, 연말연시를 맞으면 통통배들은 사람 실어 나르느라 바빠진다. 고향을 찾은 사람들이 있고, 섬 깊숙이 자리 잡은 펜션에서 하루 이틀 묵어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용무는 다르지만, 통통배 선장에게는 그들이 모두 고객이니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여객선 허가를 받지 않았으니 사진 찍는 사람이 나타나면 으레 삿대질부터 하는데, 그래 봐야 충청도 사람이라서 ‘풍경 찍었는데 왜 난리냐’고 목소리 높이면 이내 수그러든다. 목소리 크면 이긴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통통배 선장은 손에 닿을 듯한 섬으로 사람을 실어 나르느라 바쁘지만 작은 어선에 의지해 먼바다로 나가는 어부들을 보면 일순 바닷가의 낭만은 사라진다. 어선에 탄 사람은 모두 다섯, 모두 완전무장한 모습인데 아무 표정도 읽히지 않는다. 배는 바닷물을 가르고, 갑판에 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앉은 사람들은 추위와 맞설 각오를 끝낸 수도자처럼 보인다. 포말을 일으키는 뱃머리를 등지고 앉은 모습은 당연히 맞바람을 쐬지 않겠다는 뜻, 그러나 돌아올 때 만선을 이루면 그들은 맞바람에도 기꺼이 얼굴을 내줄 것이다.

출어에 나선 배가 멀어질 즈음, 사내 몇 명이 방파제에 진을 치고 낚싯바늘을 바다에 던져 넣는 모습이 보인다.

“뭐가 좀 잡혀요?”

“안 잡혀요. 뭐 잡아야 맛인가요.”

맞는 말이다. 잡아야 맛은 아니다. 바다 속에 낚싯바늘을 던진다는 것은 뭔가를 낚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거는 행위에 가깝다.

“밑밥은 뭘 써요?”

“미끼요? 갯지렁이도 쓰고, 새우도 쓰고, 이것저것….”

밑밥을 뭘 쓰든 역시 상관없는 일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낚아올리는 꿈을 꾸어야 할 시기라는 점이다. 바다는 잔잔하지만 지상은 사람들의 꿈 때문에 꿈틀거린다. 서해는 잔잔하지 않다.

 

절터 마을에서 생불을 만나다
강원도 원주 거돈사지
 ◇거돈사지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불좌대와 주초석. 학자들은 거돈사지 금당이 2층 규모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절집과 절집 터는 다르다. 흔한 말로 절집은 살아 있고, 절집 터는 죽은 공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절집은 스님이 있어 신자가 끊임없이 찾아오니 산 공간이고, 절집 터는 스님이 없어 신자가 거의 찾지 않으니 죽은 공간이라는 말은 얼핏 그럴듯하다. 하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제대로 얘기하자. 절집 터는 사유(思惟)의 공간이다. 왜냐하면 대체로 비어 있기 때문이다. 비어 있음, 사유가 탄생하는 배경이다.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의 거돈사지(居頓寺址)에 선다. 천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7000여평의 널따란 사지(寺址)를 거느리고 서 있다. 한나절 내내 햇볕을 받았지만 삼층석탑 주위는 여전히 눈밭이다. 금당지의 불좌대는 다소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둥그렇게 앉아 있지만 불좌대 주위로는 금당지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 주는 주초석들이 도열해 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비어 있는 공간이다. 도심 공간, 혹은 마음의 휴식처로 일컬어지는 공간과는 확연히 다른, 열린 구조물이다. 이런 탓에 어떤 이들은 ‘절터는 황량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열려 있는 공간에 사유의 집을 짓지 않는 사람들의 시각일 뿐이다.

◇대설경보가 내려진 가운데서도 한낮의 잠깐 동안 청명한 하늘 속에 드러난 거돈사 터 느티나무와 석축의 자태. 절은 사라졌지만 느티나무는 1000년 넘게 이 자리에서 거돈사의 역사를 웅변한다.

거돈사지에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유물은 삼층석탑(보물 750호)과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제78호)인데, 신라 때의 탑 양식과 승묘탑비의 내용으로 보건대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워져 조선시대까지 사찰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학자들은 분석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절의 역사에 대한 기록을 쉽사리 접할 수 없는 게 안타깝지만, 절터를 한층 단아하게 보이게 하면서도 열린 시간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절의 규모에 비해 삼층석탑 한 기만이 서 있는 1탑 가람의 독특함 때문이다. 금당지 터의 중심에 자리한 불좌대는 서너 아름이 될 만큼 크고, 불좌대를 중심으로 들어선 주초석이 15개이니 금당 전각이 꽤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탑은 3층 석탑 1기뿐이니 다소 소박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아쉬워할 일만은 아니다. 지금, 석탑 1기와 불좌대와 주초석만 남기고 자취를 감춘 거돈사 터는 겨울 찬바람 앞에서 정신 추스를 사람들을 맞아들이고 있다. 어떤 이들은 절터를 안고 있는 청계산 자락을 타고 내려와 탑돌이를 한 뒤 느티나무 곁의 나무의자에 털썩 궁둥이를 얹고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어떤 노파는 시집 간 딸의 일가족과 함께 절터 안내문을 다 읽어낸 후 춥다고 투덜거리는 손녀를 업고 불좌대의 주초석 수를 세며 부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객지로 떠돌다가 아버지 병구완을 위해 생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 줄곧 마을 이장으로 일해오고 있는 김석한씨. 아내는 메주를 쑤고, 검은콩 농사를 지어 생계를 잇는다(왼쪽), 마을의 안위를 기원하는 장승과 솟대.

하긴 그럴 만도 하다. 거돈사 터가 자리한 곳은 청계산 자락이지만 양옆으로는 황학산과 봉림산이 자리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세 산자락 모두 계(鷄), 학(鶴), 봉(鳳) 이렇게 새를 안고 있다는 점. 거돈사 터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을 사람들의 말마따나, 세 마리의 새가 알을 품듯 하고 있는 중심에 절이 들어섰으니 얼마나 명당이겠으며, 얼마나 명찰이었겠느냐를 노파는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거돈사 터가 자리한 정산리 사람들은 마을 입구에 ‘불교문화의 유적지’라는 표석을 큼지막하게 세워놓고 있다. 표석만 세워놓고 팔짱 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을을 찾은 사람은 식구나 다름없으니 밥 한끼 먹여 보내야 한다는 것인데, 쌀 퍼주듯이 그런 인심을 내주는 사람이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김석한씨와 김영식씨 부부다.

얘기는 지금부터다. 잠시 잠깐 햇살이 비추던 정산리에 이내 어둠이 몰려오고 다시 폭설이 내릴 것처럼 구름 떼가 몰려와 서둘러 차를 몰아 나오는데 저녁 하늘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가 발길을 잡는다. 요즘은 밥 짓는 굴뚝 연기조차 그리운 세상 아닌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골목골목을 따라 올라가니 연기를 피워올리는 집은 막다른 골목의 이장댁이다.

◇김석한 김영식씨네. 장작이 타는 아궁이에서는 겨울밤의 긴긴 잠이 떠오른다.

낯선 객이 좁은 마당에 차를 들이민 꼴이니 얼른 차를 돌아서 나오려는데 군불을 때던 아낙이 감 몇 개 먹고 가라며 웃는다. 감 몇 개 쥐고 돌아서려는데 추운데 커피 한 잔 마시고 가라며 다시 웃는다. 커피를 마다할쏜가. 커피 한 잔 마시고 일어서려는데 아낙은 ‘지금 나서봐야 길 막힌다. 아예 저녁 먹고 떠나라’며 성큼 부엌으로 들어선다. 알고 보니 김석한 이장 집이란다. 저녁 밥상이 나오자 정산리 이장을 10년 넘게 맡고 있다는 김석한씨는 슬그머니 서울 마포에서 철공소 했던 이야기를 꺼내고, 요즘 마을 사람들이 한전과 싸우고 있다는 얘기를 꺼낸다. 웬 싸움이란 말인가.

“충북 주덕에 기업도시가 들어선대유. 그기 필요한 전기를 끌어가려고 우리 동네에 철탑을 세운다지 뭐유. 그래, 요즘 철탑 반대하는 데모하러 댕기느라 을매나 바쁜지. 이장 맡으면 내 농사 지을 시간 없잖어유.”

◇신라시대의 소박하고 간결한 사찰 건축미를 자랑하는 3층 석탑. 원광국사승묘탑비와 함께 거돈사의 역사를 구명(究明)하는 중요한 단초이다.

김석한(54)씨는 손가락을 이마로 가져가더니 손톱만 하게 자리 잡은 흉터를 가리킨다. 한전 제천 관리처에 가서 시위를 하다가 한전 사람들이 내온 알로에 병으로 자신의 이마를 쳐서 생긴 흉터란다.

“내가 간첩도 아닌데, 철탑 설치를 반대한다고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하고 댕겨유. 사람 사는 동네에 철탑 세우면 사람이나 가축이나 몸에 해롭다는 거 과학적으로 다 증명된 거잖아유. 그런데도 이놈들이…. 내가 이래 봬도 주민이 뽑아준 이장이고, 한 달에 이십만원밖에 안 주지만 엄연히 준공무원예유. 뭐가 겁나유. 그래서 싸워유.”

강원도 사투리와 충청도 사투리가 뒤섞인 김석한씨의 얘기가 의미심장하다. 농한기에는 어떻게든 철탑 세우는 걸 막을 수 있겠는데 농번기에는 그걸 어떻게 막아야 할지 캄캄하다면서도 그는 슬며시 웃는다.

“그래도 막아야쥬. 그걸 막고 나면 내가 조계사로 가서 거돈사지 복원해 달라고 할 참이래유.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살기 힘들어유. 내가 이래 봬도 부론면 이장협의회장유. 유적 관광지 만들어서 농민들 먹고살게 해야쥬.”

얘길 듣다 보니 서울 마포에서 철공소 하던 사람이 아니다. 주민 위하는 것으로 보면 대통령감 아닌가. 아니다. 문화재청장감이라는 생각 뒤로 다른 생각이 스쳐간다. 여기, 옛 거돈사 주지 스님이 나타난 것 아닌가.

식후 커피까지 한 잔 마시고 방을 나서는데, 방문 앞에 붙여 놓은 이장님네들 전화번호표가 보인다. 이장 사모님이 한마디 더 건넨다. 두부 만들 때 연락할 테니 그때도 오셔유. 그럼요, 오구 말구요. 이런, 실상은 절터를 찾아왔는데 생불들을 만난 느낌이라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한 가지 분명치 않은 게 있다. 거돈사 터가 이들에게 사유의 틀을 벗어나게 해 주었는지, 이들이 거돈사 터의 넉넉함을 주었는지. 다만, 절터에 갔다가 밥 짓는 연기에 홀렸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날로그 풍경 속을 거닐다
 ◇상여라는 말에서는 축축한 느낌이 우러나지만 상여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런 느낌은 사라진다. 상여는 또 다른 삶을 찾아 길을 떠나는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장치였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차다. 긴 장대의 끝에 새 한 마리 앉아 있다. 투박하긴 하지만, 투박해서 오히려 사람의 훈기가 느껴지는 솟대에는 모든 것을 하늘의 뜻에 맡기던 시절의 소박한 심성이 배어 있다. 그저 한 해 농사 잘되게 해 달라는 기원만이 실려 있을 뿐 로또가 당첨되게 해달라는 터무니없는 소원도 없었고, 아파트를 사고팔아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소원도 없었다.

간절했으나, 솟대를 통해 빌었던 것은 식구들의 입칠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풍년이 들게 해 달라는 것이었으니 지극히 인간적이었던 셈이다. 그래서일까, 이 땅에서 보는 솟대들의 대부분은 질박하다.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 있고, 새의 형상조차 비상(飛翔)의 의지와는 거리가 먼 느낌이다. 그런데도 특별히 가공하지 않은 솟대에서는 아름다움이 흘러나온다.

이유는 간단하다. 가공되지 않은 사람의 숨결을 담은 탓이다. 새 모양의 솟대가 그런 소박한 희망의 전령으로 평가받는 것 역시 서민들의 희망에 과장이 없기 때문 아닐까.

경기 파주시 법원읍의 초리골에 자리한 두루뫼 박물관은 아날로그의 세계이다. 설립자인 소설가 강위수씨와 박물관장 김애영씨 부부가 수십 년간 전국을 돌며 수집한 항아리, 장승, 맷돌, 절구, 풍구(곡물의 쭉정이·겨·먼지 등을 가려내는 농기구)에서부터 삼국시대의 토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원형질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시설 좋은 박물관들에 비하면 허름한 쪽에 가깝지만 가족들이 다듬이질, 널뛰기, 펌프질 등의 체험을 함께할 수 있는 점을 감안하면 마당이 빚어내는 공동체 생활의 멋을 연출하는 장인 셈이다.

◇두루뫼박물관을 찾는 사람이 입장료를 냈는지 안 냈는지 용케 구분하는 것처럼 보였던 진돗개. 그의 눈빛에서도 한 해를 보내는 아쉬운 감정이 읽혀진다(왼쪽), 대가족 시대의 밥상을 증거하고 있는 무쇠 솥들. 밥 짓는 냄새처럼 아날로그의 향기를 일깨우는 장치도 없다.

공동체 생활의 멋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요강들이 길게 줄을 이어 저녁 빛을 받고 있다. 그 앞에 서면 어쩔 수 없이, 문풍지 떠는 엄동설한의 한밤중에 속옷을 내리고 사기 요강에 궁둥이를 얹던 기억이 떠오른다. 뿐인가. 대가족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떤 날 밤에는 식구마다 한 차례씩 소변을 보는 바람에 요강이 넘칠 기세로 차오른 적도 있었다. 그런 날 아침에는 ‘요강 비우라’는 고함 소리가 더 커지게 마련이었고, 고함 소리에 놀라 신주단지 모시듯 조심스레 요강을 들어올려 몇 걸음 걷다 보면 밖으로 오줌이 흘러 손을 적시기 일쑤였다.

그러나 뭐가 대수랴. 오줌에 젖은 손을 내복에 쓱 문지르고 눈 비비며 아침상 앞에 앉는 날도 허다했다는 것을 사람들은 기억하리라. 웬만한 아파트에는 화장실이 두 개씩 들어서는 요즘은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다. 하지만, 편의성은 몰라도 가족의 훈기를 느끼는 쪽으로 본다면 요강이 단연 윗길이다.

두루뫼는 사실, 경기 장단군 동장리 주산동 마을의 별칭이다. 실제 두루뫼마을이 군사분계선 북쪽 비무장지대에 속해 지뢰밭으로 변해 버리는 바람에 설립자 강위수씨는 지금의 초리골에 박물관을 세우고 자신의 고향 마을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그러나저러나 별스런 일도 다 있다. 박물관 언저리를 맴돌며 셔터를 눌러대니 장독대 옆의 개집에서 나온 진돗개가 사납게 짖어댄다. 박물관 직원이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입장료를 내고 사진을 찍으셔야 하는데요.”

“네, 입장료 내야지요.”

안내에 따라 근세생활사관, 농업생활사관, 테마관, 체험관을 둘러보다 보니 니콘 FM2 카메라도 전시돼 있다. 필자는 아직도 니콘 FM2를 애지중지 사용하고 있는데 두루뫼박물관에서는 전시용으로 ‘전락(?)’한 것을 보니 디카를 들고 있는 손이 부끄러워진다.

◇줄지어 선 요강들의 모습에서는 아주 단순한 추억이 떠오른다. 시린 엉덩이를 그곳에 얹던 기억, 철철 넘칠 듯하던 요강을 신주단지 모시듯 들고 울타리 쪽으로 걸어가던 기억(왼쪽), 우리네 전통적인 솟대에는 허풍도 없고 가식도 없다. 등 따습고, 건강한 몸으로 하루 세 끼 더운 밥 먹게 해 달라는 소박한 기원이 솟대마다 스며 있다.

뭐랄까. 진열장을 열고 니콘 FM2를 꺼내 바깥 바람을 쐬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다.

뜻밖의 ‘발견’을 한 것은 이 즈음이다. 실내 전시관을 다 돌고 밖으로 나오니 진돗개가 사뭇 조용한 것이다. 입장료 내고 관람 코스를 돌고 나온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을 구별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강위수씨 부부는 정말 충견을 두고 있는 셈이다.

몇 차례 짖어대는 것으로 일금 3000원씩을 챙기게 해주니 직원 한 명 몫은 충분히 하는 셈이다.

이미 입장료를 낸 처지이니 진돗개 눈치 볼 필요 없이 박물관 곳곳을 기웃거려 본다. 박물관 끝자락에는 상여집이 자리해 있다. 상여에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묻어나지만, 상여를 덮은 천자락은 온통 밝은 빛 일색이다.

그 이유야 말하나 마나이다. 옛 사람들은 망자를 떠나보내며 한껏 밝은 빛으로 치장해 이승에서의 삶을 위로하는 한편, 이제 이승에서의 고단한 삶에 얽매이지 말고 천국에 이르라고 위무해 주었던 것이다.

사실, 그것이 한평생 고락을 함께했던 사람들의 도리이며, 남아 있는 사람들의 자위행위였을 것이다.

절구와 호미와 무쇠 솥도 눈에 띈다. 절구에서는 모처럼 인절미를 먹게 된 가족들의 힘찬 방아 짓이 읽히고, 호미에서는 밭에서 돌아온 농군의 땀내나는 숨결이 맡아지고, 무쇠 솥에서는 온 가족의 한 끼 저녁 식사를 위해 뜸 들어가는 밥 냄새가 맡아진다. 밥이 뜸 들어가는 냄새, 압력 밥솥이 제아무리 맛 좋은 밥을 짓는 기제를 갖추었다고 해도 장작 아궁이에 의지해 여덟, 아홉 식구의 밥을 해내던 무쇠 솥의 향기를 앞설 수는 없는 노릇일 터이다.

여전히 바람은 차고, 하늘은 맑다. 장갑을 챙기지 않고 길을 나선 까닭에 카메라를 쥔 손이 차갑게 굳어간다. 해가 지려면 아직 한 시간 남짓 있어야 하지만 더 머뭇거리다가는 독한 감기에 나포될 수도 있을 터, 길을 재촉한다.

하지만, 그게 다인가. 길을 가다 보니 잎을 다 떨어뜨린 은행나무가 자신의 긴 그림자를 겨울 한기 속에 늘어뜨리고 있는 게 눈에 띈다. 차를 세우고 다시 내려선다. 켜켜이 쌓인 은행잎들에서는 아예 노란빛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도, 나무도 봄이 오기까지는 한껏 웅크리고 추위와 싸워야 한다는 설법을 받아든 것처럼 잠시 멍해진다. 세속의 거리에서는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벌써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퍼지지만 두루뫼 박물관 언저리에서는 헐벗은 나무가 주인이라는 자각이 스쳐간다.

오라, 그러고 보니 한나절 여행길이었지만 30, 40년 저 뒤편으로 나들이를 다녀온 기분이다. 나이 한 살 더 먹는 게 두려운가. 아날로그의 진경(珍景) 속에서 홀로 머물다 보니 시계 침이 멎었다는 느낌이다. 기분 좋은 환각이다.

 

안개에 갇힌 주산지 이곳이 바로 仙界

경북 청송군 주산지와 얼음골

여름에는 새벽 다섯 시만 돼도 여명이 밝아오며 안개밭으로 변하는 곳이 주산지다. 그 시간이면 주산지의 새벽을 찍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온 사진가들이 셔터를 눌러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하지만 이제 막 겨울 문턱에 들어선 주산지에는 아침 여덟 시가 돼도 안개의 흔적이 남아 있다.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150년 능수버들의 몸체가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황새나 두루미 등은 겨울이 되면 한 다리를 들고 잠을 자다가 발이 시리면 접었던 다리를 펴 땅을 딛고, 땅에 디뎠던 다리를 접어 보온을 하지만 능수버들은 그럴 수도 없으니 나무의 삶이 측은하다.
주산지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유명해지기 시작했지만 역사로 치면 저수지 중에서 거의 국보급이다. 1720년 8월 조선조 숙종 46년에 착공해 1721년 10월 경종 원년에 준공됐으니 285년의 역사를 지닌 것이다. 그 규모야 6000여 평에 불과해 큰 못이라고 할 수 없지만 주왕산 자락의 나무들에 둘러싸여 연출하는 모습은 거의 선계(仙界)에 들어선 느낌을 준다. 김기덕 감독이 ‘봄 여름 가을 겨울’ 무대로 주산지를 택한 것 역시 그런 신비감을 빌려오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아침나절, 한 초로의 부부가 커플 복장을 한 채 카메라를 메고 주산지를 찬찬히 뜯어보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카메라를 들고 있지만 셔터를 열심히 누르는 쪽은 남자 쪽이다.
“두 분이 참 좋아 보입니다. 옷도 커플로 맞춰 입으시고.”
초로의 남자가 물가로 내려가 셔터를 누르는 사이 여자에게 말을 건네니 엉뚱한 대답이 들려온다.
“좋아 보인다구요? 나는 그저 따라다니는 거예요. 저 양반, 사진에 미쳤거든요.”
남편이 사진에 미쳤다고 하면서도 여자는 슬그머니 웃으며 보온병 마개를 연다.
“추우실 텐데, 따뜻한 차 한 잔 드세요.”



◇주산지는 28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주산지 역사 못지않게 비석에도 세월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왕버들 30여 수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물가에 보온병에서 빠져나온 따뜻한 김이 흘러나간다. 물가에 내려갔던 초로의 남자가 ‘나도 한 잔 줘’ 해가며 시린 손을 비비며 올라온다. 초로의 부부가 주고받는 눈빛이 고즈넉한 주산지의 물빛을 닮았다.
‘카메라를 바꾸고 싶은데…’ 남자는 설핏 말을 흘리면서 여자의 눈치를 살핀다. 아마도 상위 모델의 카메라를 사고 싶은데 아내의 결재가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 심정 알 만하다. 마음을 움직이는 피사체를 만나면 내 카메라가 혹시 내가 본 대로, 느낀 대로 담아내는 데 부족한 것 아닌가 저어될 때가 많은 법이다.
초로의 부부와 헤어져 주산지 쪽으로 다시 돌아나오다 처음에는 못 보았던 비석 하나를 만났다. 비바람에 몹시 시달린 티가 역력한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간결하면서도 소박한 뜻이 적혀 있다.
‘一障貯水(일장저수) 流惠萬人(유혜만인) 不忘千秋(불망천추) 惟一片碣(유일편갈)’(정성을 다해 둑을 막고 물을 가두어 만인에게 베푼다. 그 뜻을 오래 기리기 위해 한 조각 돌을 세운다.)
주산지를 만들 때는 만인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지금 주산지의 물로 농사를 짓는 청송군 부동면 이전리 사람들은 60여 가구에 불과하고 외려 관광객의 볼거리로서의 기능이 강하니 비석에 새겨진 유공자들이 이 사실을 알면 기분이 어떨까 싶다. 하긴 관광객들이라고 해서 유혜만인의 만인(萬人)에 포함되지 말란 법은 없다.
주산지 입구의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간밤에 저녁을 먹었던 식당의 주인이 알은체를 해온다. 해장도 자신의 집에 가서 하란다. 문득 하룻밤을 묵었던 민박집 노파 얼굴이 떠오른다. 노파는 밤늦게까지 찬바람 도는 길가에 나와서 지나가는 차를 세우는, 아닌 말로 ‘삐끼’ 노릇을 하며 숙박 손님을 채우는 열성파였다. 아들딸 내보내지 왜 추운 데 나와 계시냐고 했더니, 노파는 ‘젊은 애들이 있어야지’ 해가며 숙박비를 5000원 깎아 주고는 방이 지글지글 끓도록 보일러를 틀어줬었다.



◇부동면 항리의 얼음골 인공폭포. 한겨울에는 빙벽 등반 명소로 변해 전국의 빙벽 등반가들이 몰려든다(왼쪽), 주왕산 국립공원 민박단지 앞에 서 있는 감나무. 까치밥은 한 알의 감에 불과하지만 우리네 인심의 진정성을 상징한다.


덕담 한마디에 5000원이면 괜찮은 장사다. 그 노파에게 떠난다는 인사를 못하고 나온 것은 때늦은 후회, 차를 몰아 다시 저녁을 먹었던 식당으로 달려가 해장 겸 아침을 먹으면서 보니 식당 앞 텃밭에는 다 털어내고 세워둔 깻단이 줄지어 있다. 그리고 배춧잎 몇 장, 그리고 식당 옆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남겨진 붉은 감 한 알이 긴 겨울을 예고하듯 눈 시리게 빛난다.
식당 주인은 주왕산을 타든가 얼음골을 가보든가 하라고 했다. 주왕산을 타든가? 하지만 겨울산을 탈 자신도 없다. 얼음골? 얼음골이 좋은 곳이냐고 물었더니 식당 주인의 얘기가 재미있다.
“요즘 청송 얼음 막걸리가 유행인데 그걸 모르세요? 거기 가면 폭포가 기가 막힙니다.”
청송 하면 소설가 김주영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데 막걸리 이름이 귀에 익을 리 없지 않은가. 그래도, 발걸음은 얼음골을 향한다. 이전리에서 얼음골이 있는 항리까지는 10여 분. 얼음골은 섭씨 32도가 넘으면 얼음이 얼고, 32도 아래로 내려가면 얼음이 녹는다는 곳이다. 이해하기 힘든 노릇이지만 섭씨 32도와의 거리가 먼 초겨울이니 얼음 어는 모습을 확인할 길은 없다. 대신, 높이 60m가 넘는 폭포에나 눈길을 줄 일이다. 얼음골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암벽 위로 물을 끌어올려 낙하시키는 인공폭포라는데 그 모습이 장쾌하다. 도리 없이 삼각대를 세워 카메라를 얹고 폭포의 물줄기를 잡는다. 저 위, 암벽을 따라 물줄기가 떨어지고 지나간 시간들이 떨어진다.
그러나 아뿔싸다. 폭포를 담기 위해 렌즈 하나를 손에서 놓고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갔는가 싶었는데, 잠시 후 되돌아보니 렌즈가 온데간데없다. 휴게소 주인이 마이크를 잡고 ‘카메라 렌즈 주우신 부운’ 외쳐보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이런, 큰마음 먹고 새로 장만한 렌즈인데 삽시간에 주인이 바뀌다니. 묘한 생각이 스쳐간다. 렌즈를 폭포가 삼켰는가. 정신 번쩍 차리라고 폭포 물줄기가 죽비를 내려친 것인지도 모른다는 느낌이다.
주산지에서 만난 초로의 부부가 떠오른다. “저 양반, 사진에 미쳤거든요. 추우실 텐데, 따뜻한 차 한 잔 드세요.”
정신 번쩍나는 얼음 막걸리를 마셔야 할지, 따뜻한 차 한 잔 마셔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참에도 폭포 물줄기는 여전히 낙하 중이다. 겨울이다. 정신 번쩍 차려라. 주산지 물빛은 차가우면서도 안온했으나 죽비로 변한 얼음골 폭포의 힘은 세다.
소설 속 '봄봄'마을에 밥짓는 연기 폴폴
 ◇김유정문학촌 전경. 소설가 전상국 선생이 촌장을 맡고 있는데, 선생은 탐방객들을 이끌고 산국농장 쉼터에서 구수한 문학강연을 펼치곤 한다.
춘천시 신동면 금병산 자락 아래의 산국농장 농장주 김희목씨와 소설가 전상국씨는 막역한 사이다. 그 막역함을 상징하는 것은 이런 대목이다.

“이분이 산국농장 대표인 김희목 선생입니다.”

전상국씨가 낯선 이들에게 농장주를 소개하면 김희목 대표는 껄껄 웃는다.

“아닙니다. 나는 그저 일하는 사람이고, 사실 이 농장은 상국농장이에요.”

산국농장과 상국농장. 사실은 밑받침 하나일 뿐이지만 산국농장으로 부르면 농원이 되고, 상국농장으로 부르면 소설가 전상국 선생이 문화적 공간으로 활용하는 텃밭이 된다. 김유정문학촌장을 맡고 있는 전상국 선생이 탐방객들과 담소하거나 문학 행사를 하게 되면 산국농장은 곧잘 상국농장으로 바뀌는 것이다.

아무튼 금병산으로 이어지는 농장 중턱에 용도 폐기된 트럭 한 대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보닛 위에는 갈색으로 변한 솔잎이 잔뜩 쌓여 있다. 더 이상 구를 수 없게 된 트럭과 솔잎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가을의 잔영을 보노라면 무용지물이 된 사물의 소외감 같은 게 만져진다.

사실 금병산 아랫녘은 그 유명한 실레마을이다. 비단결보다 아름다운 이름 ‘실레’는 소설가 김유정의 고향 마을이다. 하긴 예전에는 ‘신남역’으로 불렀던 간이역 이름을 요즘에는 ‘김유정역’으로 바꿔 부르니 제법 문화적 토양이 된 것도 같다.

◇실레마을과 금병산 사이의 저수지. 김유정의 고향 마을 논밭을 기름지게 하는 젖줄이다.

실레마을은 동쪽으로 금병산을 지고 있어 아침 10시나 돼야 햇살이 비쳐든다. 가뜩이나 안개가 많은 곳이니 어떤 때는 한낮이 돼야 햇살을 구경할 수 있다. 드문드문 깨를 터는 농부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작물의 생육이 더딘 탓이다.

금병산과 마을 사이의 저수지를 찾아나선 길인데, 그게 쉽지 않다. 햇살이 나자 논바닥의 볏짚을 뒤집으러 나온 할머니가 보인다.

“할머니 여기 어디 저수지가 있다던데….”

노인에게 점수를 따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최대한 정중한 화법을 쓰는 것. 다른 하나는 아들이나 손자처럼 아예 존칭을 놓아 버리는 것.

“저수지는 왜? 길을 잘못 들었어. 행색을 보니 돈 많은가 보네.”

“할머니도 참. 길을 묻는데 웬 돈 타령.”

“카메라 들었잖아. 그거 메고 다니는 사람, 다 돈 흘리고 다니는 거야. 내가 다 알아. 돈 흘리고 다니지 말아. 사람이 일을 해야지.”

영 틀린 말은 아니다. 아들이거나 손자거나, 카메라 사 달라고 생떼를 썼던 사람이 있는 모양이고 카메라 사 준 후에는 필름 값 감당하느라 고생 좀 한 눈치다.

◇‘길을 잘못 들었다’며 ‘돈 흘리고 다니지 말라’고 일침을 놓은 할머니의 뒷 모습. 무슨 일갈이 날아올지 몰라 성함을 여쭤보지 못했다(왼쪽), 김유정 역 앞의 은행나무. 잎을 거의 떨어뜨린 자리에 은행 두 알이 곱게 매달려 있다.

“알았어요. 할머니도 힘든 일은 젊은 사람들 시키고 좀 쉬세요.”

“젊은 것들이 도시로 내뺄 줄만 알지 지저분한 일을 해야 말이지.”

가만히 보니 할머니가 쥐고 있는 곡괭이 자루가 당신의 키만 하다. 돈 흘리고 다니지 말라는 할머니 얘기를 뒤로하고 돌아서는데 또 다른 할(?)이 떨어진다.

“길을 잘못 들었어.”

사는 건 온통 잘못 든 길을 바로잡아가는 여정이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김유정문학촌을 버리고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 금병산 등산로 쪽으로 길을 잡는다. 옛 실레마을이라고 우습게 여겼다가 아침부터 걸음품깨나 파는 처지가 되고 보니 좀 쑥스럽다.

금병의숙 길로 들어서니 마을회관 격으로 지은 ‘금병복지회관’이 보이고, 그 옆에 김유정문학비가 보인다. 회관 앞마당의 산수유나무는 붉은 열매를 잔뜩 매달고 있다. 저 앞쪽의 봄날, 우리는 산수유꽃 앞에서 얼마나 즐거워했던가. 그런데 지금, 산수유 열매 앞에 서니 겨울이 눈앞이다. 게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지 않는가.

실레마을의 민가를 버리고 김유정의 소설 ‘봄봄’에 나오는 산길을 따라 올라가니 산 중턱을 막아 물을 가둔 저수지가 나타난다. 가을 가뭄 탓에 물이 차올랐던 자리가 맨살을 드러낸 채이다. 저수지 둑을 따라 억새가 출렁이고, 금병산 자락의 붉은 기운이 안개를 밀어내고 있다. 등산객들 몇이 두런거리며 오가는 소리가 들린다.

◇김유정의 고향을 상징하는 금병복지회관. 산수유나무가 열매를 매달고 있고, 오른쪽으로 김유정문학비가 보인다.

노파는 길을 잘못 들었다고 했지만, 길을 잘못 들지 않았다는 사실은 저수지에서 내려올 때 밝혀졌다. 저수지와 마을 사이에 작은 물텀벙이 자리해 있는 게 아닌가. 물텀벙이 대수랴. 물 위로 나무 그림자가 떨어져 있다. 물가에는 막걸리통 두 개가 넘어져 있다. 아마도 여름날, 밭일을 하던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나와 한 잔씩 마셨던 것이리라. 그들은 다시 술기운으로 힘을 얻어 밭으로 들어갔으리라.

어쨌거나 물 밖의 나무, 물 안의 나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것은 눈이 즐거운 일이다. 산국농장의 용도 폐기된 트럭에서 버려진 사물의 생애를 보았다면 물텀벙에서는 사람의 생애와 함께하는 나무의 모습을 보았으니 이만 하면 할머니의 얘기대로 돈을 흘리고 다니는 신세는 면한 것 아닌가 싶어진다.

다시 실레마을로 들어서니 저수지를 향해 갈 때는 보지 못했던 밭뙈기들이 보인다. 짓물러 터진 오이가 누렇게 썩어가고, 붉은 기운이 만연해야 할 고추에는 검은 멍이 들어 있다. 가을을 나기 전 태풍에 시달린 때문이란다. 실레마을의 시름을 더해 주는 플래카드도 눈에 띈다. ‘주민과의 협의 없는 소각장 건립은 원천무효이며 춘천시는 주민과의 협약 사항을 준수 이행하라.’ 사람 사는 곳 어디를 가든 크고 작은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반증이다.

김유정 역 앞 은행나무들에는 열매가 치렁치렁 매달려 있다. 김유정문학촌에 왔던 여행자들이 하나 둘 막국수집을 향해 들어간다. 막국수집 옆 슈퍼마켓에는 버스시간표가 붙어 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온다는데, 슈퍼마켓 주인의 말로는 그나마 정확하지 않단다. 늦게 오든 빨리 오든, 실레마을 사이를 뚫고 다가오는 시골 버스는 실레마을 이름처럼 예쁠 것 같다. 버스정류장 앞 평상에 궁둥이를 얹는다. 버스정류장 앞까지 이르렀으니 분명 길을 잃은 것은 아닐 터, 자기 키만한 곡괭이 자루를 둘러메던 노파의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어느 결에 해가 기울었는지 바람이 제법 차다. 저녁 안개가 몰려올 시간, 실레마을 여기저기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감나무 아래서 익어가는 황토의 꿈
마령리 마을 초입에 들어서니 황토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장성군 농민들과 공무원들 사이에서 한때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던 남상도 목사가 일궈 나가는 터전의 상징이다. 1997년에 폐교된 남면 서초등학교를 매입해 공동체 삶을 꾸려가는 터전으로 변모시켜 가는 중이니 마령리의 상징이 아니라 장성군의 상징처럼 돼 버린 격이다. 가만히 보니 화장실도 황토요, 폐교 앞의 담도 황토다. 황토집에서 하루 자고 가게 해 달라며 찾아온 사람들은 이튿날 아침이면 ‘꿈을 꾼 것 같다’며 환하게 웃는다.

사람들은 모두 백양사로 달려가는데, 백양사보다는 자꾸만 황토집이 눈길을 끌어서 발길을 돌렸다. 듣자 하니, 목회를 하면서 농민운동에 가열차게 뛰어들었던 남상도 목사가 요즘 황토집 짓는 일에 매혹돼 전남 장성군 신남면 마을 한 귀퉁이를 황톳빛으로 물들였단다. 남 목사야 유기농법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떠름한 사람이다. 목회를 하면서 유기농산물을 공급하는 일에 나서더니 ‘우리 농산물 사먹을 사람들은 유기농의 중요성에 대한 교육을 받아라’, 큰소리치며 교육제도를 도입했고 여봐란듯이 회원 수를 3만명 넘게 확보한 ‘기인’인 것이다.

그러나저러나, 전남 장성군 남면 마령리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발 디디는 곳마다 감나무가 서 있다. 마을 입구의 저수지에는 백로가 먹이사냥을 하고 있고, 가을 가뭄을 해갈하려는 듯이 대차게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도 감들은 붉은 기운을 뿜고 있다. 얼핏 보면 대수로울 것 없는 시골 마을에서는 여지없이 이 가을날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느낌이 묻어난다. 하긴 ‘가을볕처럼 짧은 것 없다’는 말은 회자해도 ‘겨울볕처럼 짧은 것 없다’는 말은 회자하지 않는다.

◇사람과 흙이 함께 숨 쉬는 공간 황토집. 한 채가 320평에 이르는 매머드급이다.

마령리 마을 초입에 들어서니 황토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장성군 농민들과 공무원들 사이에서 한때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던 남 목사가 일궈 나가는 터전의 상징이다. 마령리는 선창마을 선평마을 외마마을 등으로 구성된 곳이지만 마을 단위의 가구 수라야 기껏 30가구, 40가구에 불과하다. 그런데 남 목사가 일구는 마을 초입의 한마음자연학교는 부지만 무려 5000평에 이른다. 1997년에 폐교된 남면 서초등학교를 매입해 공동체 삶을 꾸려가는 터전으로 변모시켜 가는 중이니 마령리의 상징이 아니라 장성군의 상징처럼 돼 버린 격이다.

한마음자연학교는 마령리 초입의 저수지와 맞붙어 있다. 초등학교가 건재하던 시절의 운동장에 이르니 중심에는 소나무 몇 그루와 함께 황톳빛 검은빛 흰빛의 천들이 가을비 속에 흔들리고 있다. 염색체험의 공간이다. 옛 교사(校舍)는 생태학습관으로 변해 교실 입구마다 자연 채집한 곤충들의 표본이 액자 속에 들어 있는 게 보인다. 울고 웃는 아이들의 모습을 투박하게 담아낸 탈들이 금방이라도 삭아 내릴 것 같은 볏집 지붕과 어울려 슬그머니 미소를 짓게 한다.

비는 줄기차게 내리는데, 마당에 서서 보니 황토집의 크기가 상상을 초월한다. 한 채가 320평이란다. 가만히 보니 화장실도 황토요, 폐교 앞의 담도 황토다. 황토집 문을 열고 방을 들여다보니 수십 명이 누워도 될 것처럼 널따란 방에 아예 기둥이 없다. 건축학자들이 보면 입을 쩍 벌릴 일이다. 아무래도, 황토집 짓는 데 몰두해 있는 남 목사의 얘기를 들어야 할 것 같아 외출에서 돌아올 그를 기다리며 황토집 뒤꼍의 감나무밭을 기웃거린다. 나지막한 감나무마다에 주황빛 감들이 실하게 익어가는 중이다. 백운산 자락에는 여전히 비구름이 걸려 있고, 황토집을 지지할 통나무들이 마당 한 편에 길게 누워 있다.

◇폐교의 운동장을 천연 염색 체험공간으로 변모시킨 모습. 체험은 둘째치고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유연해진다.

“시골에서 목회를 하다 보니 사람들이 농촌을 떠난다고 나무랄 수 없었어요. 삶의 터전 역할을 못하면 사람들은 떠나게 돼 있습니다. 고민 끝에 농민들의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고, 도시인들에게 안정적인 먹을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유기농 공동체를 추진한 건데, 이제부터는 또 다른 청사진을 그리고 있습니다. 일이 좀 커졌지요.”

남 목사의 지론은 ‘기술은 바꾸기 쉬워도 생각을 바꾸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렴, 한마음공동체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기 위해 그는 평생 동안 목사직을 유지할 수 있는 ‘원로 목사’의 길을 버렸다. 그 대신 택한 길이 마령리를 웰빙 공동체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지금의 마령리는 앞으로 10만평의 뽕밭, 100채의 황토집이 들어서는 공간으로 변한단다.

그래서 그는 폐교의 일부를 생태유치원으로 변모시켰다. 어린아이들에게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교육을 시키자는 뜻에서 시작한 것인데, 유치원생이 무려 160명이다. 게다가 광주를 비롯해 도시 지역에서도 자녀를 보내겠다는 지원자가 많아 1년 동안 기다려야 입학할 수 있다니, 남 목사의 ‘거창한 계획’이 무모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다.

크게 소문내지 않았는데도 자연학교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연이어 찾아든다. 황토집에서 하루 자고 가게 해 달라며 찾아온 사람들은 이튿날 아침이면 ‘꿈을 꾼 것 같다’며 환하게 웃는다.

◇입학하려면 1년 정도 기다려야 하는 자연생태 유치원 입구. 원생 수는 폐교될 당시의 학생 수보다 많은 160명에 이른다(왼쪽), 폐교 자리에 들어선 생태학교의 벽에 황토로 투박하게 그린 아이들의 얼굴.

“나는 아침 여섯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꼬박 집 짓는 일을 합니다. 막노동 인생이지요. 그래서 예기치 않게 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돼 버렸어요. 그런데 그렇게 일하고 나면 행복합니다. 마령리의 100년 후를 생각해야 하는데 쉴 겨를이 없어요.”

자신이 이 세상에 없는 100년 후를 얘기하는 사람의 표정은 의외로 유순해 보인다.

자연학교에서 빠져나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촌로를 만났다.

“남 목사요? 그 양반 덕분에 먹고살기 좋아졌지요. 그런데 처음에는 그 양반 때문에 아주 피곤했어요.”

저수지 아래쪽의 밭과 논에는 팻말이 붙어 있다. ‘꿀벌반’ ‘토끼반’ ‘사슴반’. 생태유치원 아이들이 ‘공부’를 하는 배추밭 앞의 풍경인데 배추밭 저 너머로 백운교회의 십자가가 보인다. 문득 폐교의 담에 씌어 있던 글귀가 떠오른다.

‘나무 한 그루 심는 것은 과거에 대한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이다. 씨앗은 결코 무에서 창조되지 않았으므로.’

그렇다. 우리는 너무 많이, 나무에 많은 빚을 져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성찰이다. 문득 마령리는 한 그루 나무가 숲이 되기 위해 숨 쉬는 곳이라는 느낌이 찾아든다. 머잖아 뽕잎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주름진 노인들이 옛 추억을 얘기하며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니 이웃한 백양사를 포기하고 작은 시골 마을의 황토집 풍경을 선택한 것은 한 마디로 ‘굿(good)’이었다. 그래도 배고픔은 어쩔 수 없는 것. 오가는 사람이 없는지를 살피며 빗방울을 매달고 있는 감 한 점을 따 덥석 깨무니 달고 또 달았다. 가을비에 잠긴 마령리가 한 점 수묵화로 변해 낯선 객을 배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