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삼국지를 읽으면 사람이 보인다_손권의 처세술

醉月 2010. 3. 31. 08:55

넘버 2의 인생철학

손권은 고대의 병법가로서 유명한 손자(孫子)의 후예이다. 흔히 명문의 자제에게는 도무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방탕아가 많은 법인데, 손권은 절대로 그렇지가 않았다.  

'나라를 세우는 일과 성을 지키는 일 중에 어느 쪽이 더 어려운가?'라는 것은, 당나라의 태조가 중신들과 나눈 왕업에 관한 유명한 문답이다. 창업을 하는 데에는 천운이 크게 작용하지만, 성을 지키는 일은 본인의 역량과 성격이 문제가 되며, 운이나 도움이 차지하는 요소는 그리 많지 않다. 스탠드 플레이(stand play 연극에서 배우가 관객을 의식한 과잉 연기)를 좋아하지 않는 순수한 성격의 사람이 수성에는 적합하다.  

'수성의 명군'이라고 불리운 손권의 인간성을 살펴본다.  

ㅇ 조심스럽고 참을성이 강하다.  

'강남의 작은 패왕'이라고 불리웠던 형인 손책과는 달리, 손권은 천성이 겸손하고 마음이 온화한 위에 참을성이 강했다. 허리를 굽혀 챤스가 도래하기를 기다리며, 연장자나 재능있는 부하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낮추어 가르침을 청하였다. 때문에 삼국 중에서는 가장 오랫동안 제왕의 자리에 있었으며,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였다.  

ㅇ 넘버 2의 인생철학

손권의 처세철학의 특징은 그의 '넘버 2'의 철학에 있다. 그는 정치에 있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차선의 방법을 택하며, 한 걸음 후퇴하면 했지 무리한 모험은 피하고, 객관적으로 정세가 호전되기를 기다려서 행동을 시작하였다. 모든 일에 있어서 완전무결을 요구하면 무리가 생긴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현대의 학생을 예로 든다면, '수재이기는 하지만 결코 톱이 되려고 하지 않는 넘버 2의 타입', 이것이 손권의 진짜 모습인 것이다.  

ㅇ 신뢰하면 모든 것을 맡겼다.

'사람의 장점은 소중히 하고, 사람의 단점은 잊어버려라.'  
이것은 부하에 대하여 손권이 자주 하던 말이다. 수줍고 선량한 그는 부하를 귀여워 하고, 일단 신뢰하면 모든 것을 맡겨, 중상모략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부하들도 이 주군을 위해서라면, 하고 평생 충성을 다했다.  

ㅇ 인재의 육성에 열심이었다.

손권은 인재의 육성에 열성적이며, 부하의 장점을 살려내어 더 한층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예컨데 무예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던 여몽장군이 훗날, 오나라의 우수한 전략가로 성장한 것은, 주군인 손권이 시시 때때로 학문의 필요성을 설명하여 여몽을 분발시켰기 때문이다. 주군의 격려와 육성에 의해 대성한 무장이 오나라에는 많다.  

ㅇ 후계자 육성에는 실패하였다.

부하들은 잘 육성했지만, 손권은 자기 자식들의 교육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 하나로는 천성이 온화한 그는, 자신의 자식들을 맹목적으로 사랑하여 엄하지 못한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년에 들어서자 다소 판단력이 무디어진 탓도 있어서, 자식들의 감독과 교육에는 실패하였다. 그로 인해서 상투적인 집안 싸움이 일어나, 오나라의 국운은 쇠퇴하였다. 그가 죽은 후, 적당한 후임자를 얻지 못한 오나라는 어이없이 멸망하고 만다.  

천하를 제패하는 일만을 목표로 했던 조조나 유비에 비하면, 넘버 2의 인생철학에 만족한 손권의 존재감은 더욱 엷어 보인다. 사실 그는 스탠드 플레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수성의 명군으로서 솜씨를 발휘하여 오나라의 장기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1. '손자의 병법'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어필시키는가?
     사람을 뜻대로 움직이는 손무(孫武)의 솜씨  ,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병법'에 있다.  

    자신의 역량을 어떻게 인정받는가

2. 스테이터스 심벌에 구애되지 말라
    '벌 閥' 의식의 폐단을 극복, 남의 샅바를 매고 씨름을 할 수는 없다 , 굴러 들어온 '보배'는 자신의 몸을 망치게 한다  

    허영에 구애되면 실질적인 것을 잃는다

3. 지혜로운 한 마리의 양은 한 마리의 늑대보다 낫다
    저돌적으로 맹진하는 타입은 이 점이 약하다.  스탠드 플레이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4. 믿어야 할 것을 엄격히 구별하라
    죽마고우야말로 진짜 보배이다  무엇이 보배인지 항상 자문하라

5. 부하를 믿지 못하는 리더는 자멸한다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눈, 부하의 장점을 아는 눈  부하의 마음을 휘어잡고 키우는 리더는 이런 점이 다르다

6. 일생 일대의 대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될 때
    무슨 일이 있어도 비관론에 현혹되지 말라  아무리 강대한 적이라도 반드시 약점이 있다.

7. 잊지말라, 적의 적은 자기 편이다
    의도는 달라도 일치점을 찾으라  머리는 이렇게 써라 - 적의 무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

8. 지혜를 다 짜내라, 길은 거기에서부터 열린다
    몸을 내어던짐으로서 살아날 길도 열린다  물량에 의지하지 않는 주도면밀한 통찰력이 강자를 쓰러뜨린다.

9. '천하 삼분의 계' 정략을 우선시킨다
     희대의 전략가가 생각해낸 세력 신장의 계략  여우와 너구리의 서로 홀로서기

10. 온정만으로는 일을 그르친다
      큰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주군까지도 속인다.  단 한번의 찬스에는 철저하게 비정하라

11. 지금까지 남이 못했던 일에 도전하라
      남을 얕보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배짱을 가지고 적에게 대처하라  체면이 서도록 시시비비를 가려서 임하라

12. 항상 변함없는 충절과 긍지를 지녀라
      전략 방침을 180도 전환할 때  충신은 불사이군 - 어째서 관우는 무신이라 계속 불리우고 있는가

13. 불리한 줄 알면 때를 기다려라
      한번 믿은 부하는 끝까지 믿어라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할 때와 참고 견디어야 할 때

14. 승리하기 위하여 인내를 지속할 수 있는가?
       협곡에 포진하는 군대는 패한다.  적이 치기를 기다린다 - 급전이 반드시 이득만은 아니다.

15. 사적인 정을 버리고 마지막까지 분명한 사리판단을 하라
      준마도 늙으면 둔한 말만 못하다  정당성을 존중함으로써 분쟁의 씨를 없애라  

01. 손자의 병법 -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어필시키는가

사람을 뜻대로 움직이는 손무(孫武)의 솜씨  

동서양을 불문하고, 국가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3분의 1 정도는 전쟁의 역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유사 이래 전쟁은 끊일 날이 없었으며, 따라서 전략이나 전술이나 군대를 통솔하는 방법에 관한 연구는 예전부터 계속되어 왔다.  

중국에서 병법서의 고전으로서 유명한 책으로 <손자>가 있다. 본고장인 중국에서는 물론 <손자>는 세계 각국에서 읽혀져 왔으며, 일본에서도 상급 무사의 교양서로서 중시되어 왔다. 예를 들면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기치인, <風林火山>은 이 책의 다음과 같은 군쟁편에서 인용한 것이다.  

兵以詐立, 以利動, 以分合爲變者也.  
故其痴風, 其徐如林, 浸掠如火,  
不動如山, 難知如陰, 動如雷霆  

<손자>는 유럽에도 전해졌다. 나폴레옹이 이 책을 늘 곁에 두고 읽었던 일은 유명한 이야기며, 제 1차 세계대전에 패한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는 만년에 가서,  

"내가 만약 20년 전에 <손자>를 읽었더라면, 그렇게 무참하게 패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고 탄식했다는 것이다.  

<손자>의 연구서와 주석서가 많이 있는데, 현존하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조조가 쓴 <魏武注 孫子>이다. 이 책은 수천 년에 걸쳐서 연구가 다 마쳐진 고전인데, 그 성립 연대와 저작자는 아직 분명치가 않다. 일반적으로는 이 책은 손씨 성을 칭하는 고대의 두 사람의 병법가 중에 한 사람이 썼던지, 아니면 손씨 가문에 전해진 많은 병법가들이 공동으로 저술한 책이라고도 되어 있다.  

저자의 한 사람으로서 추측되는 사람은 공자와 거의 같은 시대의 손무(孫武),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일족으로 맹자와 같은 시기에 활약한 손빈이다.  

손무는 지금의 산동성에서 태어나, 강남에 있던 오나라의 왕인 합려에게 병법을 지도하는 역활을 맡았다. 채용될 때의 일화가 있다.  

오나라의 왕인 합려는 손무를 접견하자,  

"손선생, 그대의 책은 다 읽었네. 이치에 맞는다고는 생각되는데, 그러면 그대로 병사를 움직일 수 있는지의 여부는 의문이네. 여기서 한번 시험적으로 병사를 움직이는 법을 보여주지 않겠나."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기는 궁정이라서 병사는 없지만 궁녀들이 많이 있다. 여자 아이들을 써서 훈련을 할 수 있는가."  

"아주 간단한 일이지요. 그 대신 소인이 제 마음대로 해도 괜찮겠습니까."  

"상관없다. 어떤 수단을 써도 괜찮다."  

그래서 손무는 궁녀 180명을 궁전의 안뜰에 나란히 세우고, 그들을 두 개 부대로 나누고 왕이 총애하는 궁녀 둘은 각각의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손무는 미녀들을 둘러보며,  

"너희들은 네 몸의 좌우의 손과 가슴 등을 알고 있는가."  

"물론이지요."  

궁녀들은 깔깔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좋다. 그러면 내가 우라고 호령하면 자기의 오른손을, 좌라고 하면 왼손을, 앞이라고 호령하면 가슴을 보라. 그리고 뒤라고 호령하면 뒤를 돌아보라. 이것이 명령이다. 군대의 명령이라는 것은 아무리 간단한 것이라도 위반하면 처벌을 받는다. 그 중에서도 각 부대의 대장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갑절의 책임을 지우도록 하겠다."  

손무는 이상과 같은 것을 끈덕지게 몇 번이고 설명한 후, 북을 치며,  

"왼쪽!"  

하고 호령하였다. 그러자 대장을 비롯한 미녀들은 낄낄 웃어댈 뿐, 아무도 왼손을 보지 않는다. 계속하여,  

"오른쪽!"  

하고 명령을 내렸으나, 역시 마찬가지로 명령을 들어주지 않는다. 거기서 손무는 목청을 높이어,  

"그렇게 몇 번이나 설명을 했는데 명령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병사들이 지휘자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은 대장의 책임이다."  

그렇게 말하자마자, 허리에 찬 칼을 빼들어 단칼에 좌우에 있던 여대장을 쓰러뜨리고 말았다.  

이렇게 한 다음에 북을 치고 호령을 내린 즉, 궁녀들은 좌라 하면 좌, 우라 하면 우, 무릎을 꿇으라 하면 무릎을 꿇고, 달리라 하면 달리는 등 일사불란 한 행동을 취했다. 이젠 웃는 사람도 없고 기침소리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다. 손무는 왕의 앞으로 나아가서,  

"이 여자 아이들은 이미 휼륭한 병사입니다. 한번 명령을 내리셔서 시험해 보십시오. 임금님이 생각하시는 대로 휼륭히 움직일 것입니다."  

오나라의 왕은 못마땅하여 오만상을 찌푸린 얼굴로,  

"이제 됐다. 너의 지휘의 장점을 잘 알았다."  

오나라의 왕으로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도 좋다고 말한 이상, 총애하는 궁녀 두 사람을 족였어도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손무의 병법의 엄격성을 알았으니 채용을 거절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손무는 오나라 왕의 병법 지도자로 채용되었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병법'에 있다.

이것은 손무의 자기 선전의 교묘성을 말해 주고 있다. 전국시대의 일이니까 자천 타천의 병법가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효과적으로 선전하여 좋은 관직을 얻는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손무의 이 도깨비탈을 무색하게 하는 선전방법이 오나라 왕의 마음을 잘 휘어잡은 것이다.  

젊은 비지니스 맨에게 있어서 자신의 능력이나 특기를 기업의 상사에게 이해 시킨다는 것은 손쉬운 일이 아니다. 예컨데, IBM의 신규채용자는 천 명 이상이나 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일류 대학의 출신자들이었다. 천 명이나 되는 신인들 가운데서 경영자나 상사의 눈에 뜨이도록 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심한 경쟁 속에서 어떻게 하여, 자신의 특기를 이해시키느냐 하는 것은 직장인에게 있어서 최대의 연구 과제이다. 비지니스 맨이 된 사람이 출세를 하려면, 우선 자신을 잘 선전하고 더욱이 그런 일이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마음이 넓은 오나라 왕이었기에 다행이지, 도량이 좁고 평범한 군주였더라면 손무의 목은 그대로 있지 못했을 것이다. 정보 분석에 능한 손무는, 사전에 오나라 왕인 합려의 인간성을 연구해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나라 왕의 마음을 휘어잡는 가장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이것이야말로 병법인 것이다. 현재와 같은 입사시험에 있어서, 그러한 기상천외한 방법을 취하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볼 일이자만, 적어도 수많은 응모자 가운데서 어떻게 하면 자신을 잘 드러나 보이게 하는가는 취직 전선에 있어서 최대의 과제일 것이다.  

손무는 그 후, 오나라에 정착하였고, 자손들은 대대로 병법의 지도역을 직업으로 삼았다.

자신의 역량을 어떻게 인정받는가  

한나라 왕조의 말기, 손무의 후손으로 손견, 자를 문대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지금의 절강성 부춘현에서 태어났다. 조조보다는 한 살이 아래이고 유비보다는 다섯살이 위이다.  

17세 때, 아버지를 따라서 전단강을 여행하는 도중에 해적 일당과 부딪혔다. 해적 일당들은 약탈한 금품을 강가에서 분배하고 있었다. 육지를 가는 사람들도, 강 위의 배들도 무서워서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했다. 그것을 보고 손견은 벌떡 일어나,  

"아버님, 도적놈들을 물리치고 오겠습니다."  

"안 된다. 도저히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저 보고만 계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손견은 긴 칼을 손에 들고 근처의 강가로 뛰어갔다. 그곳에 서자마자 무언가 호령을 하고, 긴 칼로 지휘를 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 뒤에는 병사들이 늘어서서 해적들을 포위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거 큰일났군, 관군들이 온 모양이다."  

멀리서 손견의 모습을 본 해적들은 당황하여, 쏜쌀같이 도망치고 말았다. 손견은 그 중에 한 녀석을 쫓아가서 목을 베었다. 아들의 용맹함에는 아버지도 깜짝 놀랐다.  

과연 손무의 자손인만큼 손견은 용감하고, 그 위에 책략이 풍부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는 용맹을 떨치게 되어 도읍지 경찰부대의 지휘관으로 채용되었다. 그 무렵, 오나라에서는 야적과 해적이 판을 치고 있었는데, 손견은 경찰부대를 이끌고 각지를 전전했으며, 떠돌이 도적단들을 정벌한 공으로 현(縣)의 부지사로 승진하였다. 가는 곳마다에서 백성들이 원하는 소리들을 모아서 들었으므로, '강남에는 손견이라는 강한 영웅이 있다.' 라는 소문이 나돌게 되었다. 손견도 역시 선조인 손무처럼 자신의 역량을 인장받는데 성공한 것이다. 

 

02. 스테이터스 심벌에 구애되지 말라

'벌 閥' 의식의 폐단을 극복  

한나라의 중평 원년(184년), 손견이 28세 때, 황건의 난이 일어났다. 그때, 하비현의 부지사였던 손견은 조정의 명령에 따라 토벌군에 참가하여, 우장군인 주준군의 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황건적의 평정에 손견은 눈부신 무훈을 세웠다. 특히, 출신지인 강남에 가까운 형주를 진압하는데 공이 있었다 하여, 오정후로 봉하여졌다.  

그러나 공훈을 세우는 것에 비하여, 토벌군의 자리는 손견에게 있어서는 편한 곳이 못 되었다. 아직 나이가 젊은 손견은 싸움이나 전투에는 강하지만, 교제에 있어서는 고립되고 있었다. 그것은 출신지와 파벌의 관계에 의한 것이었다.  

중국은 넓다. 유럽같으면 10여 개의 나라가 될 넓은 땅을 하나의 국가가 통치하고 있으므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기 전에는 나라 전체의 연대감이 희박하였다. 전에 제국주의 침략자로부터, '중국인은 작은 나라의 국민만큼 애국심이 강하지 못하다.'라고 지적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 대신에 향토나 출신지에 대한 애착심이 강렬하며, 동향 의식이 비상할 정도로 강했다. 한어(漢語)는 크게 나누어 북경 관화(표준어), 오어, 광동어, 복건어, 객가어의 5대 방언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방언이란 명색 뿐이고, 이들 언어는 상호간에 전혀 통하지 않으므로 차라리 외국어나 같다고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즉, 중국이라는 나라는 실제로는 몇 개의 국가로 분리되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렇게 광할한 땅을 하나로 통합시킨 국가 의식보다도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같은 향리의 인간이다 라고 하는 의식 쪽이 강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닌 듯 싶다. (그러나 이것은 혁명 전의 중국을 말하는 것이므로,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어지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국가의 통일에 힘을 써서, 국민 전체의 공통 의식을 고양시키고, 공동 언어인 '보통어'를 보급시키고 있으므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민족주의나 이데올로기보다 차원이 낮은 동향의식은 일본사회에도 있다. 명치 유신에서 대동아 전쟁 전까지, 육군에서는 야마구치현 출신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으며, 해군의 상층부에는 가고시마현의 출신자가 많았다.  

그보다도 더욱 차원이 낮은 것이 학벌이나 문벌의 의식이다. 이 경향은 관료와 경제계의 일부에 강하다. 대장성은 동경대학 법학부 출신자가 아니면 출세를 못한다든가, 매스컴 계통의 엘리트는 와세다대학 출신자가 많다든가, 재벌계열의 회사에는 게이오대학의 출신이 강하다는 등의 얼토당토 않은 생각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오히려 사회 발전에 방해가 되는 것이다.  

'그는 출신이 좋다.'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넌센스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남의 샅바를 매고 씨름을 할 수는 없다  

황건적을 토벌하는 관군은 주로 북방어를 쓰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의 북방어는 현대의 북경 관화계 (소위 만다린이라는 것)이며, 양자강 이북에서 황하유역까지의 넓은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특히 장교들 가운데에는 하북, 하남, 산서, 산동, 안휘 출신의 사람이 많았고, 오(吳)의 방언을 사용하는 이남의 사람은 적었다. 액센트가 강한 오의 방언을 쓰며, 먼 강남에서 찾아온 손견이 여기서 화북인의 동향의식의 벽에 부딪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화북색이 강한 관군 안에 있으면서, 강남 출신의 손견은 아무래도 고독해질 수밖에 없었다.  

관군에 있어도 출세를 못할 것이므로 슬슬 고향으로나 되돌아갈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도성인 낙양에서는 동탁의 전횡이 극성을 부리고, 한나라 왕실의 측근으로부터는 각지의 영웅과 군벌에게 동탁 정벌의 밀서가 전해지고 있었다. 화북의 여러 영웅들은 원소를 맹주로 받들어 동탁 정벌의 연합군을 결성하였다. 혈기왕성한 손견은 당장 이 연합군에 가담하였다.  

동탁 정벌의 원정군은 각지의 혼성 부대이고, 총대장인 원소가 무능하므로 단결력이 약했다. 장군들은 남의 샅바로 씨름을 하려드는 타산성이 강하여, 앞장서서 진겨하려고 하지 않았다. '쳇, 화북의 인간들은 패기 없는 녀석들 뿐이야...'라고 생각한 손견은 같은 고향 출신의 병사로 구성한 부대를 이끌고 선봉으로 나섰다. 그런데 낙양의 동쪽을 지키는 요충지인 사수관에서 동탁의 부대장인 화웅(華雄)에게 진로를 저지당했다. '화웅, 뭐하는 녀석이야...' 손견은 정보, 황개, 한당, 조무 등의 사천왕을 이끌고 싸움을 걸었다. 하지만 동탁의 수하에서는 여포와 비견되는 용감성을 떨치는 화웅을 당할 수가 없었고, 또 원정군이라 양식을 넉넉하게 보급하지 못하여 크게 패배하였다. 손견도 가장 신임하는 조무의 희생으로 겨우 살아나서 도망쳤다.  

사수관에서의 패배는, 언제나 자신 만만하던 손견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적의 화웅은 관우라는 무명의 무장에게 격파당하여, 동탁군은 모조리 붕괴되고 말았다. 그 10일 전, 동탁은 제왕을 받들고 장안으로 떠났으며, 낙양은 빈 껍데기가 되어 남아 있었다. 아득히 먼 낙양을 돌아보면, 2백여 년 계속되어 왔던 도읍은 검은 연기와 진홍빛의 불꽃으로 휩싸여, 과거의 영광도 한자락의 꿈으로 화하고 말았다.

굴러 들어온 '보배'는 자신의 몸을 망치게 한다  

군대를 재정비하고, 사수관에서 하룻밤과 낮을 강행군하여, 선참으로 낙양에 입성한 손견은, 제일 먼저 성 안을 치우는 일과 불을 끄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틀이 걸려서 불을 다 껐을 무렵 원소가 지휘하는 본부대가 겨우 성 밖에 도착하였다.  

폐허가 된 궁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있던 손견이, 깨어진 기와와 자갈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궁중의 뜨락을 거닐고 있자니,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가 큰소리로 외쳤다.  

"저기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무엇일까요?"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오래된 우물 속에 무엇인지 이상하게 반짝거리는 물체가 있었다. 손견은 그 병사를 시켜서, 낡은 우물을 치우게 했다. 병사는 숨을 헐떡이며 우물 속에서 관녀의 시신을 끌어올렸다. 한 눈에도 고귀한 여인으로 보이며, 옷차림도 훌륭했고, 죽은 얼굴이라도 아름다웠다. 가녀린 목에 비단주머니가 걸려 있었으므로, 손견은 그 주머니를 풀어서 그 안을 살펴보았다. 금으로 만든 사슬로 단단히 묶은 작은 상자가 들어 있었다. 뚜껑을 열고 보니 순금으로 테두리를 한 아름다운 경옥으로 만든 인감이었는데, 예날 전서체로,  

壽命於天 (수명어천 - 목숨을 하늘로부터 받으니)  
旣壽永昌 (기수영창 - 주어진 목숨이 영원히 창성하리라.)  

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손견은 긴장하여 몸이 부들부들 떨려옴을 느꼈다. '이것은 참으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전국의 옥쇄...' 그야말로 시조인 유방 이래로 수백년 동안 전해져 내려온 대한제국(大漢帝國)의 황제의 인장이며, 이것을 가지는 자만이 왕조의 계승자임을 의미하고 있었다. 아직 젊은 손견이 옥쇄를 손에 들고 몸이 떨린 것도 무리가 아닌 듯싶다.  

손견은 발견 현장에 있던 부관과 병사들에게 함구령을 내린 후, 즉시 전체 부대에 출동 준비를 명령하였다.  

다음날, 손견은 성 밖의 총사령부로 가서 원소를 만났다. 그는 낙양성 성내의 정리와 질서 유지의 일들이 일단락 지어진 것으로 보고하고, 이어서,  

"그리고 원소님, 낙양의 점령작전도 끝났고, 소인의 임무도 마치었으므로 휴가를 내주시기를 바랍니다."  

"휴가를 내달라고? 그것은 또 무슨 말인가. 낙양 선참의 공을 세운 그대가 좀더 있어주지 않으면 곤란한데."  

"아니올시다. 사수관에서의 전투 이래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생각이 들어서 일단 고향으로 돌아가 정양을 할 생각입니다."  

원소는 입이 비틀어 올리며 빈정대듯이,  

"그래, 상태가 나쁜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겠지. 그대는 이 나라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옥쇄를 독차지 하려고 고민하고 있는 것이지."  

뜻밖의 말에 손견은 안색이 변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손견, 우리들이 군병을 일으킨 큰 뜻을 그대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나라에 전해지는 보물이 손에 들어왔거든 그것을 사령부에 신고하고, 역적인 동탁을 친 다음에 폐하께 반환해 드리는 것이 신하된 자의 도리가 아닌가. 그것을 몰래 독점하고, 더구나 그것을 고향으로 가져가려고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소견이군."  

안색이 창백해진 손견은 그래도 시치미를 떼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요. 나라에 전해져 내려오는 옥쇄가 어째서 소인에게 있다는 말씀입니까."  

"시치미를 떼서는 안 되지. 그대가 어제 저녁, 우물에서 옥쇄를 건져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네."  

"소인으로서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도 시치미를 뗄 작정인가. 그러면 증인을 데리고 오지."  

"증인?"  

손견이 미심쩍은 얼굴을 하고 있자, 원소는 막료에게 명령하여 한 사람의 병사를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찬찬히 보니 어젯밤에 우물을 치웠던 그 병사가 아닌가! 발끈해진 손견은, 이내 허리에 차고 있던 큰 칼을 빼어들어 잽싼 솜씨로,  

"이놈, 배신자!"  

하고 그 병사를 베어 죽였다. 일순, 장내의 모든 사람이 일어섰다.  

원소도 칼을 빼어들고,  

"너야말로 반역자가 아니냐."  

하고 대들었다. 까딱하면 칼질이 오가려고 할 때에, 막료들이 당황해서 사이에 끼어들어 원소를 말렸다. 그들은 무예자로서는 손견의 솜씨를 잘 알고 있었으며, 우두머리인 원소로서는 도저히 맞설 수가 없다고 생각햇던 것이다.  

"언제든지 생대해 주겠소."  

손견은 모멸찬 한마디를 내뱉고는 기세등등하게 물러나가, 그날 중으로 부하들과 함께 고향으로 떠났다.  

봉건시대의 중국에서는, 옥쇄는 가장 권위있는 신분의 상징이며, 주술력과 동등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천하 제패의 꿈을 가진 손견이 옥쇄를 발견하여, 흥분하고 그것을 독점하려고 한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손견의 이 당돌한 행동이 그의 신세를 망치게 한 원인이 된 것이다.  
  
허영에 구애되면 실질적인 것을 잃는다  

현대의 사회에도 신분의 상징은 있다. 자동차로 말하면 BMW는 현대적이며 부유한 젊은이, 벤츠는 기업의 경영자, 링컨이나 캐딜락처럼 기름을 뿌리고 다니는 대형차는 폭력단 두목의 신분을 상징한다. 어린애 장난같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평범한 사람은 그러한 허영된 상징에는 약한 법이다. 월급장이에게 있어서는 사택의 넓이나 책상의 크기까지도 일종의 스테이스 심벌이 된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러한 형식적인 상징에 너무 구애되는 것은 절대로 득이 되는 일이 아니다. 근대 사회에서는 각 개인의 능력, 식견, 개성과 노력이 직업인으로서 대성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지, 큰 책상에 앉는다든가, 넓은 아파트에 산다든가, 외국산의 차를 탄다든가 하는 것으로써, 그 인간의 일생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스테이스 심벌에 동경심을 가지고, 자신도 그것을 가질 수 있는 신분이 되겠다고 스스로 분발하고 노력하는 것은 무방하다. 그러나 그것에 지나치게 구애되면, 실력사회를 이겨내는 일은 어려워진다. 특히 젊은 사람이 이런 공허한 상징에 사로잡히는 일은 더없이 어리석은 짓이다.

 

03. 지혜로운 한 마리의 양은 한 마리의 늑대보다 낫다

저돌적으로 맹진하는 타입은 이 점이 약하다.  

오나라 출신의 병사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끌고, 손견은 오로지 고향으로 향하였다. 이미 원소로부터 각지의 현령과 수비 사령관에게, 손견이 옥쇄를 가지고 도망쳤으니 발견하는대로 즉시 체포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어 있었다.  

손견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하남평야를 남하하여, 영천, 남양, 번성, 등의 현성을 모조리 점령하고, 호북성에 도달하였다. 호북성의 중심은 형주이고, 이곳을 공략하면 장강이 가깝다. 형주에는 토착 군벌인 유표가 버티고 있었다. 이 유표라는 사람은 군벌로서는 B클래스이지만,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욕과 야심이 강하여, 중앙의 관료나 장군들과 자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때문에 관군 상층부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원소의 명령을 중시하여, 여기서 손견을 체포하든지 죽이든지 하여 옥쇄를 탈환하려고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형주에서 유표가 저항선을 펴고 있다는 것을 듣고, 손견은 격분하였다.  

"유표 그 늙은이가 내 갈길을 방해하겠다는 건가? 분수를 모르는 자로군."  

손견은 선두에 서자, 단숨에 적의 본거지인 양양을 포위하였다. 성 안에서 유표는 작전회의를 열었다. 참모인 여공이 이렇게 말했다.  

"손견은 강남의 맹호라고 불리우는 만큼 확실히 강하고, 더구나 병법에 밝으며 용병술이 능란합니다. 그러나 저돌적으로 맹진하는 타입이어서, 사려가 깊지 못한 것이 결점입니다. 이 허점을 찔러 깊숙이 유인하여, 혼자가 되었을 때, 복병을 숨겨두었다가 일제히 공격하면 아무리 강하다해도 중과부적이라 반드시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그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다. 그대에게 작전권을 맡기겠다."  

라고 유표는 말하며, 활을 잘 쏘는 저격수를 선발하여 여공의 지휘하에 움직이도록 하였다. 여공은 야음을 타서, 성 밖의 산중에 저격병을 대기시키고 날이 밝아지자 수백기의 기마대를 이끌고, 손견의 진지를 향하였다.

스탠드 플레이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때마침 손견의 본진에서는 병사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전날 밤의 돌풍으로 본진의 대장기를 꽂는 깃대가 부러진 것이었다. 출진에 즈음하여 대장기의 깃대가 부러지는 것은 '불길한 조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막료들은 일단 철퇴할 것을 진언하였다.  

"철퇴를 한다고? 허튼소리들 하지말라. 큰 바람으로 인해 깃대가 하나, 둘 부러졌다고 해서, 일일이 걱정하는 녀석이 있는가. 이 손견에게는 그런 미신이 통하지 않는다."  

그 때, 척후병으로 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방금 성으로부터 기마대가 공격하러 나왔습니다. 우리 본진을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다."  

"알았다. 나의 뒤를 따르라. 단숨에 성을 공략해 보이겠다."  

손견은 이렇게 외친 후, 애마를 집어타고 힘껏 박차를 가했다.  

무예 중에서 마술은 중요한 과목이다. 과연 병법가인만큼 손견의 기마술은 출중하였다. 순식간에 부하들을 떼어버리고, 어느새 혼자서 적군 속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적군의 대자으로 보이는 여공을 발견하자 좌우의 잡병들을 쓰러뜨리고, 일 대 일로 승부를 걸었다.  

여공 쪽은 처음부터 싸울 생각이 없었다. 또한 일 대 일로 대하면 강남의 맹호라고 불리우는 손견을 당해낼 리가 없었다. 여공은 쏜살같이 달아났다.  

"도망치지 말라! 적에게 등을 보이다니 비겁하다."  

손견은 즉각 여공을 쫓아갔는데, 교묘하게 산 속으로 유도당하여 있었다. 사방이 보이지 않는 잡목림까지 쫓아갔을 때, 갑자기 여공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비겁한 녀석, 어디로 사라진거야...' 말을 멈추고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펴보고 있는 손견을 겨누어, 숲 속에 숨어있던 저격병들이 일제히 활을 쏘았다. 솜씨좋은 여러 명의 저격수들이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서 화살을 퍼 부었던 것이다. 아무리 손견이 강하다 해도 견디어 낼 수는 없었다. 그의 몸은 고슴도치처럼 되어버렸으며,  

"원통하다."  

한마디를 남기고 말에서 떨어져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37세 였다.  

개인적인 격투는 별개로 하고, 집단적인 전투는 개개의 체력이나 강성만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집단의 종합력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근대전이 되면 될수록 이 경향은 강해진다. 아무리 무술이 출중한다고 해도, 냉정을 잃고, 저돌적으로 맹진하면 팀 워크가 잡혀있는 집단에게는 패배하고 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훌륭한 무술가였던 손견의 죽음이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기업의 업무 전개는, 스포츠를 예로 들면 축구나 야구 같은 것이며, 절대로 테니스이 싱글 매치처럼 개인기를 겨루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서는 개인의 스탠드 플레이는 금물이다. 팀 워크가 잘 되어 있는 기업이 살아 남으며, 개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우수해도 팀 워크가 나쁜 기업은 절대로 발전하지 못하는 법이다.

 

04. 믿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엄격하게 구별하라

죽마고우야말로 진짜 보배이다  

자신의 힘을 과신하고, 저돌적으로 맹진했다가 요절한 손견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당시 특히 유명한 것이 장남인 손책과 차남인 손권이었다.  

손책의 자는 백부, 부친인 손견이 황건적을 토벌하기 위하여 출정했을 때에, 겨우 열 살이었던 손책은, 모친과 함께 서현으로 이사를 가서 우연히 그 지방의 호족인 주씨네 곁에 살게 되었다. 주씨네 집에는 같은 나이의 주유(周瑜)가 살고 있었다. 거기서 두 소년은 죽마고우가 되었다. 훗날, 손책이 죽은 후에는 손권의 군사(軍師)로써, 일생을 손씨 형제를 위하여 전력을 다했다.  

부친 손견이 뜻하지 않은 죽음을 당했을 때, 손책은 18세의 훌륭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고향인 곡아에 부친의 뼈를 묻은 후, 손책은 단신으로 장강을 건너 부친의 친구인 원술에게로 가서 몸을 의탁하였다.  

용감성이 평가를 받아 일꾼의 우두머리로 발탁되었지만, 결국은 식객 신세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원술은 도량이 좁은 사람이라. 옛 친구의 아들이라고 해서 특별한 대우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식객 신세라도 고맙게 생각하라'는 듯이 손책을 턱짓으로 부리고 있었다.  

손책은 번민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달이 밝은 안뜰에서 산책을 하던 손책이 편편차 못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 때 뒤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도련님, 어쩐 일이십니까."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의 옛 부하로서 지금은 원술을 섬기고 있는 정보(程普)였다.  

"내가 변변치 못한 탓으로, 아버지의 뜻을 계승하지 못하고 남의 나라에서 식객 노릇이나 하고 있는 것이 한탄스럽구나."  

부친 손견의 사천왕의 하나로 손꼽히던 정보는 목소리를 낮추면서,  

"그러시다면 원술님에게서 병마를 빌려, 강남으로 진군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미흡하나마 불초 정보도 달려가겠습니다. 선친님의 부하도 꽤 있으니, 그들도 주인댁을 다시 부흥시키는 일을 위해서라면 달려올 것입니다."  

손책은 충신 정보의 말에 감격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저 인색한 원술이 쉽사리 병마를 빌려주겠느냐고 걱정하였다. 원술을 납득시킬 조건이 없겠는가 하고, 여러 가지로 생각하던 손책은 무릎을 딱 쳤다.  

"그렇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겨주신 '전국의 옥쇄'를 맡기기로 하자."  

"그것 참 좋은 생각이올시다. 그러나 원술은 교활한 인간이니까 어지간히 단단한 약속을 받지 않으면, 훗날 돌려받지 못할 염려가 있습니다."  

하고 정보가 걱정스러워 하고 있었는데, 젊은 손책은,  

"원술님도 일국의 주군인데, 아직 젊은 나를 속이지는 않을 게요."  

하며 전적으로 안심하고 있었다.  

다음날, 손책이 부탁을 하러가자 과연 원술은 싱글벙글하며 좋아 하였다.  

"그 유명한 물건을 지니고 있었는 줄 몰랐네. 나는 별로 가지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 잠시 맡아 두겠네. 병사 3천과 말 5백 필을 빌려줄 테니, 그것들을 이끌고 강남으로 돌아가게. 돌아가신 아버님의 뜻을 이어 독립하는 날에는 빌려준 병마와 교환으로 옥쇄를 돌려 주겠네."  

이리하여 손책은 밀려받은 군병력을 이끌고 정보, 황개, 한당, 주치, 여범 등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부하들을 데리고 장강을 건넜다.  

마침 그 무렵, 어릴 때의 친구인 주유가, 그의 숙부인 주상이 단양의 태수가 되었으므로, 양자강 남쪽 연안인 단양에 머물고 있었다. 이웃 마을까지 진군해온 손책은 주유에게 편지를 보내어 사정을 설명하였다. 주유는 즉시 부하들을 데리고 손책을 마중하러 왔다.  

손책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자네가 있으면, 나에게는 범에 날개를 다는 격이네."  

이리하여 손책은 주유의 협력을 얻어, 남쪽 연안의 각 도시를 하나하나 점령하여, 드디어 고향인 곡아로 입성하였다.  

이와같이 주유는 손책의 오른팔로써, 오나라의 창건에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손책과 주유는 이교(以橋)라고 하는 유명한 자매를 아내로 맞이하여 동서지간이 되었다.

무엇이 보배인지 항상 자문하라  

장남인 손책은 아버지를 닮아 용맹스러웠다. 무사 가문의 큰 아들이므로 어려서부터 무예 십팔기에 관하여 철저한 가르침을 받았다. 강남 사람으로서는 드물게 7척이 넘는 큰 체격의 사나이로, 검술과 완력은 아버지 이상으로 강했다.  

우저성의 태수 유요를 공략했을 때의 일이다. 손책은 성문 가까이까지 말을 몰고 가서 큰 소리로 도전하였다.  

"강동의 손책이 여기 와 있다. 내로라 하는 자는 나오라!"  

즉시 성문에서 기마대가 뛰쳐나왔다. 도전에 응한 것은 우미라고 하는, 오랑캐 출신의 몸이 새카만 무술가였다. 손책은 상대에게 부딪힐 정도로 접근하자, 우미가 내미는 창을 잡아 끌었다. 그 강한 힘에 우미는 말에 탄 채로 끌려왔다. 손책은 말에 걸터서서 마치 무우라도 뽑아내듯이 적을 부둥켜 안고 그대로 말을 달렸다. 이것을 본 적의 진영에서 또 하나의 기마병이 등 뒤로 다가서서 커다란 쌍날을 가진 창을 내동댕이 치듯이 던졌다. '이젠 즉사로구나?..'  

가까이에 있던 손책의 부하는 엉겁결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과연 무예의 달인인 손책은 무난히 쌍날창을 피하며, 왼손에 잡고 있던 창으로 적장을 단숨에 찔러 죽여 버렸다. 번능이라는 무예가였다.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와서, 옆구리에 끼고 있던 우미를 땅바닥에 내동대이 치고 보니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불과 몇 분 사이에 한 사람은 목을 조여 죽이고, 한 사람은 창으로 찔러 죽인 것이었다. 우미도 번능도 이름난 무예가였었다.  

이어서 손책은 성 안으로 돌격하여, 강남에서는 비할 데가 없다는 적장 태사자(太史慈)를 생포하였다. 이 싸움으로 유요는 멸망하고, 태사자는 손책에게 항복하여 부하가 되었다.  

이리하여 손책은 강남의 주요 도시를 공략했는데, 그가 너무 강하였으므로 어느덧 '강남의 작은 패왕'이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 패왕이란 유방과 천하를 다투었던 초나라의 항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고대의 중국에서는 가장 유명한 용사로서, 그 힘은 산을 움직이고, 그 기백은 천하를 삼킨다고 칭송되었었다. 손책은 발산개세(拔山蓋世)의 용기를 가진 '초나라의 패왕'에 다음가는 호걸이라는 찬양을 들었던 셈이다.  

차남인 손권, 자는 중모이며, 형인 손책보다 일곱 살이 아래이다. 형인 손책은 체격이 크고 미남자였으나, 동생인 손권은 중간 키에 살이 알맞게 찌고, 턱이 네모지며 큰 입에 형형한 안광으로 보기만 해도 의지가 강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권이 출생하였을 때, 부친 손견은,  

"이 녀석은 고귀한 생김새를 하고 있다. 장래에 큰 인물이 되겠구나."  

하고 기뻐하였다고 한다.  

어느날, 한나라 왕실의 칙사가 찾아왔다. 그때, 칙사인 유원은 따라온 부하에게 이렇게 감상을 말하였다.  

"손씨 집안의 네 아들들은 제각기 훌륭하게 생각되는데, 관상학적으로 헤아려 보응 한, 다소 운이 부족해 보인다. 다만 차남인 손권만은 예외이다. 그 아이는 얼굴 모양, 골격, 전체적인 분위기 등등, 보통 사람이 아니다. 왕위에 오를 관상이다. 수명도 제일 길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차치하더라도 그 아이만큼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손권은 무예 중에서 실기보다는 이론적인 병법에 능했다. 무가의 사람치고는 드물게 유학이나 문학을 좋아 했으며, 형과는 달리 만사에 신중하고 남의 의견을 존중하였다.  

형이 강동의 여러 고을을 평정했을 때, 동생은 15세의 나이가 되었으므로 손책은 손권을 자신의 곁에 두었다. 형은 자신과 성격이 다른 동생을 귀여워하며, 일찍부터 후계자로서 생각하고 있었다.  

건국의 대업이 시작되자 손책은 많은 공물과 함께 원술에게서 빌린 3천의 병사와 5백 필의 말을 돌려주면서 맡겨둔 옥쇄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원술은 오나라의 사신을 일견하고 공물을 받은 후,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전국의 옥쇄? 그것은 너의 주군인 손책이 살려준 사례의 뜻으로 나에게 준 물건이다. 이제 와서 돌려달라니, 억지 트집도 유분수지. 썩 물러가라!"  

하며 사신을 쫓아보냈다. 역시 정보와 사람들이 걱정하던 그대로였던 것이었다. 법률도 없고, 힘 앞에서는 도덕도 무색한 전국시대이다. 이렇게 되고 보면 힘으로 탈환할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원술은 옥쇄를 가지고 있는 것을 구실로, 황제로 부를 것을 참칭하였다. 화가 난 손책은 그 행위를 비난하는 서한을 보내고 원술과의 인연을 끊었다. 마침 북동쪽에서는 조조가, 남동쪽에서는 유비와 여포가 원술과 싸움을 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손책은 주유의 건의에 따라 조조랑 유비와 동맹을 맺고, 남북으로부터 원술을 공격하였다. 원술은 곡창지대인 강북의 대평야를 영유하고, 풍부한 물자와 방대한 병력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싸움은 장기화 되었다. 2년 후, 겨우 조조와 유비에게 멸망되었으며, 대대로 내려오는 전국의 옥쇄는 원술에게서 조조의 손으로 옮겨졌다.  

건안 5년(200년), 조조가 관도의 전투에서 원소와 싸우고 있던 무렵, 손책은 전쟁터에서 자객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당했다. 그 상처는 깊었다. 죽을 때가 임박한 것을 짐작한 손책은 주유, 장초 등 측근을 불러 놓고,  

"지금 북방은 소란한 와중에 있다. 우리 강남은 차지하고 있는 땅의 위치가 유리하고, 군대는 정예함을 자랑하고 있다. 이 두가지 점을 살린다면, 언젠가는 천하를 누릴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는 모쪼록 동생을 세워서 돌보아주기 바란다."  

라고 유언을 남기고, 손권에게 인수를 넘겨주면서,  

"군대를 인솔하여 적과 대결하며, 천하를 겨루는 싸움이라면 내가 너보다 나을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신하를 중용하여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며, 나라를 지키는 일에 있어서는 네가 한 수 위이다. 내가 죽은 후에는 주유나 장초 등의 의견을 잘 듣고, 오나라를 잘 다스리도록 하라. 당부한다."  

라고 말하고, 그날 밤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아직 26세의 젊은 나이였다.  

주유와 손권은 손책에게 있어서는 양쪽 팔과 같은 존재였다. 한쪽은 죽마고우인 동시에 같은 자매와 결혼한 동서지간이기도 하고, 한쪽은 피를 나눈 동생이다. 손책이 군사를 일으킨 후,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강남의 각지를 영유하고, 오나라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주유의 활동이 기여한 바가 크다. 또 지방 정권의 하나에 불과했던 오나라가 이윽고 셋이서 맞서는 삼국의 하나로 성장한 것은, 천재적 전략가인 주유와 수성의 명군인 손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손책은 요절했으나, 훌륭한 가족들이 곁에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일찍부터 이 두사람의 가족을 높이 평가하여 자기의 분신으로서 대접했던 손책도 톱으로서는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05. 부하를 믿지 못하는 리더는 자멸한다.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눈, 부하의 장점을 아는 눈  

19세의 어린 나이로 일국의 톱이 된 손권에게 있어서, 앞날은 다난했으나 유일하게 힘이 되었던 것은 부모 형제들이 좋은 지반과 인재를 많이 남겨준 일이었다. 부모가 아무리 좋은 유산을 남겨주어도, 그것을 쓸 능력이 없으면, 결국 신세를 망칠 수도 있기는 하지만.  

손권은 부모 형제가 남긴 유산을 완벽하게 이용하였다. 특히 대대로 손씨 가문을 섬겨왔던 신하들을 잘 활용하였다. 정권을 인수하자, 손권은 우선 형인 손책의 수하에 있다가 남겨진 신하들을 중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형의 죽마고우이며 동서지간인 주유에 대해서는 스승으로 대우하였으며, 군사의 대권을 위임하였다. 또 하나의 참모인 장초는 재상으로 삼아서 행정을 맡겼다.  

주유의 친우로서 노숙이라는 뛰어난 인재가 있었다. 다른 가문으로 벼슬자리를 얻어 가려고 하는 것을 주유가 막아, 손권에게 그를 천거하였다. 손권은 즉시 자리를 마련하여 노숙을 초대하였다. 손권이 말했다.  

"이제 한나라 왕실은 기울어지고, 천하는 극도로 어지러워지고 있으나, 나는 아버지와 형님이 다하지 못한 꿈을 실현시키기를 염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야심가인 간신들을 없애버리고, 한나라 왕실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 그대와 이처럼 알게 되었으니, 어떤 방법이 있는지 가르쳐 주기를 바라오."  

그러자 노숙은 솔직한 의견을 토로했다.  

"황송하오나 소인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역신을 제거하여 한나라 왕실을 다시 부흥시킨다는 것은 이 즈음의 영웅 호걸의 대의명분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르신의 순수한 마음은 잘 이해합니다마는, 실제로 한나라 왕실의 재부흥은 이미 바랄 수 없고, 도읍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조조를 배제하려며는, 무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취할 길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이곳 강남의 땅에 강대한 나라를 세워서 스스로 제위에 오르시어, 천하를 장악하시는 일 아니겠습니까."  

손권은 이 말에 감동하였다. 노숙이 지적한대로, 이미 한나라 왕실의 재부흥은 바랄 수도 없었다. 시대는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스스로 일국의 제위에 오를 생각이 없다면, 천하를 다툴 자격이 없을 것이다.  

손권은 즉시 노숙을 채용하여 참모장으로서 후대하였다. 그로부터 형주의 전선에서 전사할 때까지, 군의 책략을 꾸미는데 뛰어난 노숙은, 손권의 대외 전략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손권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 손권은 머리를 조아리고, 치욕을 참고, 재능이 있는 사람을 믿으며, 계략을 존중하고, 구천과 같은 기이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빼어난 인물이다.-  

구천은 춘추시대의 월나라의 왕이다. 간난 신고를 견디어내고 숙적인 오나라의 왕 부차를 멸망시킨 경위는 와신상담의 옛이야기로써 유명하다. 분명히 손권은 구천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조아리고 기회를 기다린다는, 인내성이 강한 성격을 지녔으며, 적재적소에 사람을 등용하고, 기략 계수를 존중하였다. 때문에 오나라를 한층 더 발전시키고, 수성의 명군이라 불리웠던 것이다.  

또한 손권은 부하를 잘 믿고, 인재를 키우는 데에 능란하였다. 손권은,  

"사람은 누구나 다 장점과 단점을 지니고 있다. 각자의 장점을 발전시키고, 작은 결점에는 눈을 감아주는 것이 지도자된 사람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부하의 마음을 휘어잡고 키우는 리더는 이런 점이 다르다

손권의 부하 가운데에 여몽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원래는 건달패였지만,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군대에 들어가 장군으로까지 승진하였다. 언젠가 손권은, 갖은 고초를 다 겪어내고 성공한 여몽 같은 장군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들도 장군이라는 지위에 올랐으니 무술에만 매달리지 말고, 앞으로는 정식으로 학문을 익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아무래도 군무를 담당하는 사람은 전투나 훈련에 쫓겨서, 도무지 책을 읽을 틈이 없습니다."  

라고 여몽이 변명을 하자, 손권은 계속하여,  

"별달리 자네들에게 학자가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야. 기초적인 학문을 익혀서, 자기 자신의 식견을 높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바쁘다고 한들 나만큼이야 하겠나. 나는 진중에 있어도, 군무를 보는 틈틈이 되도록이면 책을 읽도록 하고 있다. 여하튼 일군의 지휘자가 된 이상에는, 병법서라면 <손자>와 <육도>, 역사책으로서는 <좌전>, <국어>, 그리고 <전국책>, <사기>, <한서>의 삼사는 읽어 두는 것이 좋아. 반드시 득이 될 것이다."  

이 말에 분발하여 여몽은 학문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공부에 열심이었던 그는 곧 병법학자로서도 일류가 되었다.  

어느 날, 전선 사령관인 노숙이 임지로 가는 도중, 오래간만에 여몽을 찾아갔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놀라웁게도 여몽은 예전과 달리, 서투른 학자 못지 않은 지식인이 되어있는 게 아닌가.  

"아니, 자네 다시 봐야겠군. 자네는 무술에만 통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새 우수한 전략가가 되어 있었군. 오하의 아몽으로 취급할 수 없게 되었구려."  

그러자 여몽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선비는 헤어져서 삼일이 되면, 그 때는 당연히 괄목상대(刮目相對 눈을 비비고 상대와 대면함. 남의 학식이 부쩍 는 것을 일컬음) 해야만 하지 않았소."  

이것이 두 속담의 출처이다. '오하의 아몽'이란, 오나라의 마을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건달패인 여몽을 가리키는 말로, 지금도 학문과 교양이 진보하지 못하는 인간을 말한다. 두 번째의 괄목상대라는 말은, '선비가 된 사람은 일진 월보하는 것이다. 삼일을 만나지 못했을 때는 눈을 잘 비벼 뜨고 상대를 보라. 그러지 않으면 망신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손권이라는 인물은 조조와 같은 강렬한 개성을 지니지 않았으며, 유비만큼의 인덕도 없지만, 절대로 평범한 그릇은 아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군웅할거하는 세상에서 지방 정권에 불과했던 오나라를 삼대 강국의 하나로 키워내지 못했을 것이다.  

대중의 인기를 얻을만한 재능이 없는 손권이, 그렇게도 위대한 제왕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부하를 잘 신뢰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데에 열성적이었기 때문이다.  

기업을 경영하는데 있어서는 톱이 꼭 우수한 탤런트라야 할 필요는 없다. 자신에게 능력이 없더라도 부하를 신뢰하고, 젊은이를 잘 키워서 우수한 인재를 손발처럼 쓰면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만을 과신하고, 만사를 자신이 손수 하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러한 톱 아래에서는, 부하는 기가 죽어 버리고, 조직은 정체하여 발전이 없어진다. 중국어에서는 이것을 '일수포변(一手包弁)'이라고 한다. 서투른 리더십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06. 일생일대의 대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때

무슨 일이 있어도 비관론에 현혹되지 말라  

관도의 결전에서 강적 원소를 격파한 후, 조조는 화북을 통일하고, 다시 관 밖의 오환을 정벌하였다. 양자강 이북에서는 이제 적대할 새력이 없다. 조조는 비로서 눈을 남쪽으로 돌렸다.  

건안 13년(208년) 6월, 정승이 된 조조는 대군을 동원하여 형주의 유표를 공략하였다. 유표는 식객인 유비 등과 함께 저항하였으나, 갑옷의 소매를 한 번 스쳐가는 정도로 쉽게 상대를 물리쳤으며, 조조군은 순식간에 장강의 연안에 도착하였다.  

그 무렵, 자상(紫桑)에 있던 오나라의 손권에게 조조로부터 친서가 왔다.  

-이번에는 나는 칙명을 받들어, 남방을 정벌하였다. 형주의 유씨 일족이 저항하였으므로 응징할 군대를 파견한 즉, 유표는 죽고, 후계자인 유종은 항복하였다. 이제 우리 군대는 80만을 헤아리며, 장강에서 수군 훈련에 여념이 없다. 한번 강을 건너가서, 장군과 함께 수렵이라도 즐기고 싶소이다. 나의 군문에 항복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의향이 어떠신지.-  

이 편지에 손권의 부하들은 놀라서 얼굴빛이 변하고, 제각기 비관적인 말들을 꺼내었다.  

"조조는 황제를 받들어, 대의명분을 내걸고 진군하고 있습니다. 거역하면 조정의 역적이 될 것입니다."  

"유표의 군대가 궤멸되었으며, 그 수하의 수군과 선박들은 모두 조조에게 제압되었습니다. 용맹을 자랑하는 위나라 군대가 이것을 이용한다면 장강을 건너는 것은 간단합니다. 위나라의 군대가 강남에 상륙하면 우리 나라는 잠시도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조조는 악덕 무도한 효웅이요. 게다가 수십만이라는 병력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전력적으로 보아도 도저히 맞서 겨룰 수 없는 상대입니다. 항복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문무의 제관들이 입을 모아 항복하기를 권고하는 가운데에서, 유독 노숙만이 불쾌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잠자코 있었다.  

손권이 잠시 휴식할 것을 선언하고 자리를 뜨자, 노숙이 뒤를 따랐다. 별실에서 손권은 노숙의 손을 잡고 그에게 물었다.  

"그대도 모두와 같은 의견인가?"  

"아닙니다. 소인은 다릅니다. 여러 장군들의 생각은 너무나 패배주의적이고, 그래서는 나라를 망칩니다. 신하와 군주의 입장은 틀립니다. 우리들이라면 항복을 하더라도 조조가 우대를 할 수도 있겠지요. 최소한 죽이거나, 옥에 가두거나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주님께서 항복을 하신다면, 조조는 군주님의 재능을 두려워하여 냉대할 것이 뻔합니다. 일이 잘못되면 목숨을 빼앗길 것이요, 잘 돼봐야 강남에서 쫓겨나, 몸을 의지할 곳도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제발 그 무리들의 바보스럽고 비열한 비관론에 현혹되시지 말기를 당부드립니다.  

노숙은 거기서 한숨을 돌리고,  

"어떻겠습니까? 군사전략에 정통해 있는 주유장군의 의견이라도 들어 보시는 것이..."  

"참으로 잘 말씀해 주시었소. 나도 모두의 의견에는 불만이었소."  

손권은 그날의 회의를 중지하고, 급히 주유를 소환하였다. 파양에 나가 있던 주유는 급히 행군하여 자상으로 돌아와, 손권의 대본영 회의에 참석하였다.


아무리 강대한 적이라도 반드시 약점이 있다.  

손권이 주최하고 문무백관이 열석한 긴급회의 석상에서, 주유가 의견을 발표하였다.  

"조조는 한나라 정승의 이름을 도용한 도적이올시다. 군주께서는 견줄 자가 없는 지략과 무용을 지니신 위에, 부친과 형님에게서 계승한 광대하고 공고한 지반과, 충성스럽고 용맹한 인재를 갖추고 계십니다. 이곳 강동의 땅은 험조하며, 경제력도 풍부합니다. 이와같은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계시는 군주님이야말로 천하에 웅비하셔야지, 조조 따위의 무리에게 의지할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역적놈이 스스로 재앙 속으로 뛰어든 지금, 항복을 운운한다는 것은 언어 도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주유는 무기력한 소리를 하는 여러 장수들을 노려본 후에, 위나라 군대의 약점을 이렇게 분석하였다.  

1. 위나라 북쪽은 완전히 수습된 것이 아니라서, 후환의 염려가 남아 있다.  
2. 북방에서 자란 위나라 군대의 병사들은, 원래 물 위에서의 전투에 약하며, 서둘러 훈련을 했다고 하여도, 어릴 때부터 물과 친숙한

    오나라의 군대에 비할 바가 아니다.  
3. 먼 중원에서 이끌려 온 위나라 병사들은, 먼 길을 행군해 왔으므로 지칠대로 지쳐 있으며 풍토도 맞지 않아, 지금 병자가 속출하고 있다.  
4. 대체로 원정군의 결함은 보급선이 너무 길다는 데에 있다. 위나라 군대도 군량과 말의 여물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5. 앞으로 겨울철을 맞이하는 장강은 계절풍이 불어댄다. 도하작전은 용이하지가 않다.  

결론으로서 주유는 목소리를 높여 이렇게 말하였다.  

"이러한 병법상의 금구를 무시하고, 조조는 오나라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역적놈을 칠 절호의 기회입니다. 소인에게 정병 3만을 맡겨 주시면, 반드시 조조를 격파해 보이겠습니다."  

주유의 논리정연한 분석으로 손권은 굳은 결신을 하였다.  

"주유장군, 잘 말해 주었소. 조조가 쓰러지든가, 내가 패하든가, 이제야말로 결전의 시기이오."  

라고 말을 마치자마자 허리에 찬 칼을 뽑아들어, 눈앞에 있는 책상의 귀퉁이를 잘라내면서, 전원에게 날카로운 어조로 외쳤다.  

"알았나? 앞으로 다시 항복론을 주장하는 자가 있으면, 이 책상과 똑같은 운명이 될 것으로 생각하라."  

손권의 이 결연한 태도로, 오나라는 거국일치의 태세를 갖출 수가 있었다. 평소에는 온화하고 부하의 의견에 귀를 잘 귀울여 주는 손권, 자칫하면 우유부단하다는 소리를 들을 이 젊은 주군에게 있어서 이것은 일생일대의 대결단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일단 유사시에 톱이 취해야 할 태도를 잘 말해 주고 있다

 

07. 잊지 말라, 적의 적은 자기편이다.

의도는 달라도 일치점을 찾으라  

그해 7월, 신야, 장판의 전투에서 일패 도지한 유비는, 얼마 되지 않는 부하를 이끌고 하구로 피신해 있었다. 하구는 같은 장강의 북쪽 연안이지만, 위나라 대군이 머물고 있던 적벽보다도 백 킬로쯤 하류에 있다.  

하구에 도착하자, 군사인 제갈량 공명은 주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조조에게 이기기 위해서는 강남의 손권을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소인이 오나라로 찾아가서 구원을 부탁하고 오겠습니다."  

이때, 손권은 그곳에서 다시 3백 킬로 떨어진 자상에 포진하고 있었다. 홀몸으로 자상에를 간 제갈량은 손권을 만나, 손권과 유비가 동맹을 맺어 조조에게 대항할 것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유비쪽은 패잔한 무리로서, 병력다운 병력이 없었다. 이런 무리와 손을 잡아봐야 별로 크게 얻을 것이 없겠다고 생각한 손권은 태도를 보류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때에 조조로부터 항복을 권고하는 편지가 왔으므로, 손권은 주유의 건의로 대항하여 싸울 것을 결심한 것이다.  

그해 10월, 주유는 3만의 수군을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하구와 적벽의 중간 지점으로 나아갔다. 오나라 군대가 도착하기를 이제나 저제나 하고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던 유비는, 뛰어오를 듯이 기뻐하며 즉시 주유의 진영을 방문하였다.  

"주장군, 잘 와주셨습니다. 이제는 조조란 자가 언제 공격해 오더라도 안심할 수 있습니다."  

유비는 주유를 위로한 후 말을 바꾸어,  

"그런데 장군의 병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3만명이올시다."  

"뭐, 3만? 조조군의 80만이라는 것은 선전이라고 치더라도, 적어도 10여 만은 됩니다. 3만은 좀 적지 않을까요?"  

"아니지요. 물 위에서의 싸움은 육지와 다릅니다. 3만이면 충분합니다. 유비님은 이 사람이 조조를 쳐부수는 것을 마음놓고 구경만 하십시오."  

이 말을 듣고 유비는 주유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탄복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적은 병력으로 조조의 대군에게 이기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2천의 병사를 이끌고, 후방에서 대기할 것을 제의하였다. 즉, 전개되는 전투의 상황을 지켜본 후에 이쪽의 태도를 결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주유는 유비의 이런 기회주의적인 태도에 불만이었으나,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유비는 조조의 적이다. 오나라가 당면해 있는 대적도 조조이다. 다시 말해서 유비는 오나라에게 있어서는 적의 적, 즉 자기 편이 되는 셈이다. 자기 편은 소중히 해야 한다. 더욱이 유비에게는 병력은 없지만, 우수한 부하가 많다. 특히 제갈량 공명이 작전의 귀재임을 주유는 잘 알고 있었다. 주유는 진중으로 공명을 찾아가 위로하고, 작전상의 충고를 받아, 그 지모를 최대한으로 이용하였다.

머리는 이렇게 써라 - 적의 무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
  
어느 때, 주유는 공명에게 지혜를 빌렸다.  

"공명님, 물 위에서의 전투에서는 어떤 무기를 주로 사용하는 게 좋을까요?"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소. 활과 화살을 많이 갖추는 것이 제일이지요."  

"과연, 육박전과는 다르니까. 그런데 우리 군대에는 화살이 부족합니다. 10만 개 정도쯤 더 있으면 좋겠는데, 지금부터 만들자니 때가 늦겠고..."  

공명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 사람에게 묘안이 있습니다. 맡겨 주시면 3일 만에 10만 개의 화살을 마련하겠습니다."  

"...?"  

다음 날, 공명은 짚으로 만든 인형을 늘어 세운 배를 많이 준비하여, 한밤중에 안개가 끼인 것을 이용하여 적벽에 있는 조조의 진지 근처로 접근시켰다. 타고 있던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자 위나라 진영에서는,  

"야습이다!"  

하고는 궁수들을 강변으로 동원하여, 무턱대고 활을 쏘아 대었다. 제갈공명은 빗발치듯 날아오는 화살 속을 몇번이나 배를 왕복하도록 시킨 후, 돌아왔다. 날이 새고 보니 배 위의 인형들은 적의 화살로 고슴도치처럼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여 손쉽게 10여만 개의 화살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적벽의 건너편 연안에 빽빽히 떠있는 위나라 군대의 배들을 바라보며, 주유는 어떻게 공격을 해야 좋을지 고민하였다. 생각 끝에 주유는 공명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공명님, 적의 거대한 수군을 눈앞에 두고, 확실한 전법이 있으면 가르쳐 주십시오."  

"아니아니, 주 장군은 강동에서 첫째가는 전략가인데, 이 사람이 가르치다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정보에 의하면 적들은 배의 선수와 선미를 쇠사슬로 묶어서 안정을 꾀하고 있습니다. 접근하기에도 용이하지 않고, 비록 우리 쪽이 적의 선열로 돌격하여도 끊어 놓기가 불가능합니다. 이런 수상의 요새와 같은 적진을 쳐부수기 위해서는 단 하나밖에 작전이 없다고 생각됩니다만, 용병에 능란하신 공명님께도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글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면 두 사람이 각각 생각을 적어서 서로 보이도록 하시지요."  

거기서 필기도구가 준비되고, 주유도 공명도 각각의 손바닥에 작전 방법을 적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펴보니, 예기치 않게 두 사람이 다 '불(火)'이아고 써놓고 있었다.  

"이것 참."  

주유도 공명도 무의식 중에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주유는 공명의 천재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 사람을 적으로 돌리면 무서운 상대다 되리라고 통감하고 있었다. 또 유비, 관우, 장비만 하더라도 장래에 오나라에게 있어서 강력한 적이 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조라고 하는 공통의 대적을 상대로 하고 있는 이상, 유비군은 자기 편이다. 그렇게 달관한 주유는 공명을 손님으로 모시고, 오히려 저자세로 나가 그의 작전 방법을 이용했던 것이다.  

강적을 격파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이나 프라이드를 억누르고, 적의 적을 통째로 활용한다. 여기에 희대의 전략가, 주유의 진면목이 있었던 셈이다.  

 

08. 지혜를 다 짜내라, 길은 거기에서부터 열린다.

몸을 내어던짐으로서 살아날 길도 열린다  

주유와 공명이 작전을 짠 다음 날, 제일선으로부터 오나라 군대으 노장인 황개가 사령부를 찾아왔다. 황개라고 하면 손견의 사천왕으로서, 황건지란의 토벌에 참여했던 노련한 장수이며 3대에 걸친 군주를 섬기고, 지금은 가장 늙은 장군이다. 눈썹까지 온통 희어지고, 당연히 퇴역하여 손자와 놀고 있을 나이이지만, 조조가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특별히 지원하여 방위군에 참가한 것이었다. 황개는 후배인 주유에게 이렇게 말했다.  

"적군은 병력은 많으나, 우리에게는 병력이 별로 없소. 서로 오랫동안 대치하게 되면 적은 수군을 훈련시키고 있으므로, 우리 쪽이 불리하게 되오. 주장군, 기습작전을 펼쳐서 일찌감치 불살라버려야만 하오."  

"불로 공격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적의 배에 불을 붙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황개는 목소리를 낮추어 낮추어 말하였다.  

"내가 항복을 하겠다고 속이고 적의 선단에 접근하는 것은 어떻겠소."  

"하지만 그것은 위험합니다. 장군님께 그렇게까지 하시게 해서는 죄송하지요."  

"아니오,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하고 시켜주시오. 몸을 내어 던짐으로써만 살아날 길이 열린다고도 하지 않소."  

황개는 품 속에서 조조에게 보내는 밀서를 꺼내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손씨 가문을 삼대에 걸쳐 섬겨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 군주는 애송이 주유에게 완전히 농락당하고 있으며, 우리들 대대로 내려온 신하들은 그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만 하더라도 중과부적이라는 것이 명백하므로, 모두 각하에게 항복해야 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그것을 주유와 노숙이 무모하게 대항하여 싸울 것을 주장하여, 젊은 우리 군주를 현혹시킨 것입니다.

나는 이같은 오나라에 더 있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정작 전투가 시작되면 나는 선봉으로서 각하가 계시는 곳으로 달려 가겠습니다. 잘 알고 있는 주유를 물리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승리하는 날에는 모쪼록 관대한 처분을 바라오며,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래서는 장군님 혼자만 나쁜 사람을 만들게 되는데요."  

"아니, 괞찬소. 나는 내 몸을 죽여 국난을 구하고 주군의 은덕에 보답하고 싶소이다."


물량에 의지하지 않는 주도면밀한 통찰력이 강자를 쓰러뜨린다.
  
밀서는 어부에게 맡겨져서, 조조에게 전달되었다. 조조의 진영에서는 황개의 밀서를 둘러싸고 찬반 양론이 제기되었으며, 참모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배와 배를 쇠줄로 이어 놓는 것은, 배의 출렁거림을 감소시키고, 병사들의 멀미를 방지하는 데에는 명안이겠지만, 만일 불이 붙는다면 연달아서 불이 붙어, 대참사를 일으킬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황개가 선봉으로 우리 군대에 접근하는 것은 경계해야만 합니다."  

그러자 조조는 활달하게 웃으며,  

"그대는 아직 공부가 부족하다. 아는바와 같이 우리 군대는 북쪽 연안에, 적군은 남쪽 연안에 배를 띄워 놓고 있다. 지금은 11월이라 계절풍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불고 있다. 화력으로 공격을 하면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적은 스스로 불을 뒤집어 쓰게 되지 않겠는가. 아무리 주유가 용병이 서투르다고 해도, 바람의 방향을 무시하고 화공을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닐 것이오. 황개가 선봉장으로 우리 쪽으로 달려 온다는 것은 신용해도 좋을 것이오."  

그 판단은 원칙적으로는 틀리는 것이 아니었지만, 예외가 있다는 것을 이 고장 사람이 아닌 조조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매년 11월 말에는 2, 3일 동안 계절풍이 아닌 동풍이 분다. 주유와 공명은 그날을 기대하고 있었다.  

건안 13년 11월 20일, 이상하게도 그 날은 풍향이 변하고 있었다. 바람이 남동쪽의 방향으로 불고 있었다.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주유 쪽은, 수십 척의 작은 배에 마른 풀섶으로 쓸 나무를 산더미처럼 싣고, 생선 기름을 뿌려서 충분히 배어들도록 하였다. 주유는 황개에게 그 작은 배의 부대를 지휘하도록 하고, 자기 자신은 약 2백 척의 배에 정병을 싣고,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정오 가까이에 황개가 지휘하는 작은 배들이, 위나라의 선단 근처에 도달하였다. 공격 개시를 알리는 돌화살과 동시에 황개는 배의 속도를 올렸다. 노장군 자신이 깃발을 올리고, 선두에 서서 전진하였다.  

"남쪽 방향에 선단 나타남!"  

조조 측의 파수병이 외쳤다.  

"적의 깃발 표식이 무엇이냐?"  

"청룡 무늬 깃발에 황개라고 크게 쓰여 있습니다. 선두에 버티고서 있는 사람은 늙은 장군입니다."  

"황개가 항복해 온 것이다. 활을 쏘지 말라!"  

사전에 조조에게서 황개와 내통한 정보를 받아서, 알고 있었던 수군의 지휘관은 안심한 얼굴로 명령하였다. 위나라 군대의 산단 바로 앞에까지 다가갔을 때, 황개는 별안간 점화의 신호를 보냈다. 불길은 작은 배로부터 위나라의 선단으로 번져갔다. 진홍빛의 불꽃과 남동풍이 위나라의 수상 요새를 휩쌌다. 오나라의 수병들은 자기들의 배가 적군의 선단 한복판으로 돌입한 것을 확인하자 앞을 다투어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거대한 선단으로 번져간 불길은 순식간에 퍼져서 주변은 아비규환의 도가니로 변했다. 그 뒤편으로부터 주유가 지휘하는 오나라의 돌격대가 쳐들어 갔다. 이리하여 십수만이나 되는 위나라의 수군은 순식간에 궤멸되었으며, 북쪽 연안에 있던 조조는 간신히 도망쳐 전쟁터를 벗어 났다.  

적벽의 전투는 약소한 병력이 거대한 병력을 철저하게 때려 눕힌 전투로서 유명하다. 전략에 능통하다는 조조도, 주유의 국한된 지역의 기상 조건까지 감안한, 주도면밀한 작전과 황개의 구국살신의 지혜에는 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월남전쟁때 미군은 병력, 화력, 장비의 면에서 월맹군이나 북한군보다 훨씬 우수했었다. 산이 평지가 될만큼 포탄을 퍼붓고, 제2차 대전 때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지만 결국은 승리할 수 없었다. 어째서인가? 그것은 현지의 지형, 기후, 기상,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지 못하고, 물량만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이었다.  

조조는 강남의 민심, 장강의 지형, 적벽 부근의 기상 조건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오나라 백성들의 기대를 한몸에 짊어지고 있었던 주유는, 국한된 지역의 예외적인 기상까지도 계산에 넣어 작전을 세웠다. 소(소)가 대(대)를 삼킨 진짜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09. 천하 삼분의 계 - 정략을 우선시킨다

희대의 전략가가 생각해낸 세력 신장의 계략  

적벽에서의 대승리는 오나라의 세력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지금까지 떠돌이 신세로 조조에게 쫓기고 있었던 유비의 주종관계에 커다란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옛 전쟁터였던 적벽의 북방에는 세 개의 중요한 성이 있었다. 그곳은 하구(지금의 武漢市)와 그곳에서 3백 킬로 떨어진 곳에 있는 남군(지금의 沙市), 남군의 북동쪽 3백 킬로 지점의 양양(지금의 襄樊市)이다. 이 세 요충지는 하나의 직가가 이등변 삼각형을 형성하고 있다. 이 삼각 지대의 평야는 중원과 하남이나 강남을 연결하는 중요한 지역으로, 위나라가 중원을 공략하기 위해서도, 또한 오나라가 북상하여 중원을 겨눌 때도 먼저 확보해야만 할 중요 거점이다, 이 지역을 삼국 시대에는 형주라고 부르고 있었다.  

적벽에서 대승리를 거둔 이후, 유비는 형주를 장악하였다. 이것이 오나라에게 있어서는 별로 재미가 없는 일이었다. 오나라로서는 유비가 형주를 지배하고 있는 한, 북쪽으로의 출구가 닫혀져 있는 상태가 되므로 국방상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전의 동맹자와 분쟁을 일으키면, 조조에게 어부지리를 차지하도록 할 뿐이다. 손권으로서는 유비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형주의 권익을 조금씩 이양해 받는 것이 가장 상책이었다.  

어느 때, 남군의 성 안에서 한숨 돌리고 있는 유비를 향하여, 군사인 공명이 이렇게 말하였다.  

"군주님, 형주를 점령했으니까, 이제는 당연히 서쪽으로 눈을 돌려서 위나라와 오나라가 손을 대지 않고 있는 촉지방으로 세력을 뻗쳐야 합니다."  

공명은 예전부터의 지론이었던, '천하 삼분의 계'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촉에 대한 침공을 결심한 것이다. 공명은 말을 계속하였다.  

"촉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후환의 염려를 끊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북방의 위나라는 적벽에서의 패전으로 당장은 출동할 여유가 없습니다만, 오나라는 다릅니다. 지금은 노나라와의 사이에 확고한 우호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리라고 생각됩니다."  

"과연, 그대의 말이 맞소. 한마디로 화목해야 한다고 말로는 하지만, 무언가 구체적인 행동이 없어서야..."  

"이 사람에게 묘안이 있습니다. 황송하오나 군주님과 손권이 친척관계가 되면, 두 나라의 화목은 간단히 이루어 집니다."  

"뭐, 손권과 친척이 된다고? 즉, 정략 결혼을 하라는 것인가."  

여자를 좋아하는 유비는 싱글벙글하였다. 수년 전에 첫째 부인인 미씨 부인을 잃고, 최근 반년 전에 감씨부인을 잃어서, 지금은 홀아비로 푸념이나 하는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황송하오나 군주님의 신변을 돌보아 드릴 분이 꼭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어서 입니다.이것은 군주님 혼자만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주군의 아들인 아두를 위해서도, 또 우리 군대 전체를 위해서도 중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의 영명하신 주군, 그리고 한나라 황실의 혈통을 이으신, 주군님이 황후가 되실 분은 그에 응당하게 알맞는 혈통이어야 합니다. 즉 제왕의 배우자는 유서있는 가문의 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손권의 여동생님은 전국시대의 명가인 손자의 적자로 내려온 분이며, 당대에 드문 총명한 재원이라고 듣고 있습니다. 주군님을 위해서 내조의 공을 세우기에는 적합한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 그 여인에 대해서는 나도 듣고 있소. 그러나 손권이 허락하겠는가?"  

"저에게 방책이 있습니다. 형주를 오나라에게 양도한다는 방책을 내십시다."  

"형주를 오나라에? 결혼 예물로서는 좀 비싼데."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주군님께서 촉 지방에 안주할 땅을 얻으신 때에는 곧 반환하겠으니, 그때까지 형주는 잠시 빌려두겠노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주군님이 손권과 우호를 유지하고 있는 동안은 저쪽에서도 당장 돌려달라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후, 이 희대의 전략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주군을 바라 보았다. 아주 마음에 없는 것도 아닌 유비는 빙긋이 웃으며,  

"그래, 그러면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손권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아들이도록 할까.  

하고 자기 멋대로의 이유를 내세워, 공명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여우와 너구리의 서로 홀로서기  

그 얼마 후에, 유비로부터 정중한 구혼장과 수교서가 손권에게 보내어져 왔다. 젊은 나이에 나라를 계승한 탓인지, 아니면 타고난 성격이 원만한 탓인지 손권은 중대한 국책을 결정할 때에는 반드시 중신들의 의견을 듣는다는 전국시대로서는 희귀한 민주적인 기풍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도 즉시 중신회의가 열렸다. 중신들은 유비가 제시한 조건에 활기를 띄웠다. 형주라는 군사상의 요지를 피를 흘리지 않고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오나라에게 있어서는 더 바랄 수도 없을 만큼 좋은 일이며, 하물며 적으로 돌려 놓으면 귀찮을 유비와 인척관계를 맺게 되니, 오나라는 평안하고 태평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 정략 결혼에 응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단 한 사람, 신중한 것이 주유였다. 주유는 이렇게 말했다.  

"유비와 공명은 상당한 책사들인데, 결혼과 교환 조건으로 형주를 양도한다는 것은 본심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촉 지방으로 진출함에 있어서, 우리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어 놓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싶소. 그래도 유비가 무릎을 끓고 청혼해 온 것은 환영해야 할 일이오. 유비를 불러다가 여기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하고, 가능한 한 형주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하면 어떻겠소."  

손권은 주유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유비에게 편지를 보내어 혼례를 치르기 위하여 급히 강남 땅으로 오도록 요청하였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이 인정되지 않는 시대에는 정략결혼은 위정자가 흔히 사용했던 책략의 하나였다. 거기서는, 순수하고 신성해야만 하는 결혼에도 개인의 애정 따위는 문제 밖의 일이었으며, 모두가 정치적 투쟁의 도구로서 여겨졌다. 특히 거래 도구로 쓰여진 여성은 참으로 가련하였다.  

흉노와의 수교에 이용된 왕소군은 한나라 시대의 정략 결혼의 아름다운 제물로서 너무나도 유명하다. 최근의 역사 속에 조선조의 이왕비 전하, 만주국 황제 부걸 부인 등도 이러한 가련한 희생자였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다시 말해 정략을 애정에 우선시킨다는 부조리한 논리가 인간을 불쌍하게 만든 것으로 더없이 통탄한 일이다. 

 

10. 온정만으로는 일을 그르친다

큰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주군까지도 속인다.  

건안 14년 가을, 유비는 조운을 데리고 병사 5백 명을 인솔하여 남군에서 배를 타고, 손권이 있는 건업(지금의 남경)에 도착하였다.  

11월의 길일에 유비는 그 땅에서 손권의 이복 여동생인 손씨 부인과 혼례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신랑측으로서는 조운 혼자만이 들러리로 참석했을 뿐이었지만, 신부측에서는 혼인 당주인 손권을 비롯하여 오나라이 문무 백관이 다 모여서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였다.  

"처남 매부지간이 된 이상에는 이 오나라를 자신의 나라처럼 생각하고 천천히 쉬었다 가도록 하시오."  

손권의 그런 말을 듣고서는 유비도 마구가내로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유비는 젊은 손부인과의 신혼 생활에 폭 빠져서, 좀처럼 형주로 돌아가려 들지를 않았다. 어느덧 그 해도 저물고, 건업은 설을 맞이하여 즐거운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평화가 계속되고 있는 오나라에서는 백성들의 생활이 형주보다 훨씬 안락했다. 건업의 성 안뿐만 아니라, 성 밖의 농민들의 얼굴에도 생기와 회색이 넘치고 있었다. 그것은 설날이라는 이유에서만이 아니었다. 유랑과 유격의 생활을 계속해 온 유비로서는,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이 그렇게도 즐겁고, 오나라 사람들과의 생활이 자신이나 다른 군벌들 백성의 살림살이와 비교하여 얼마나 안일함과 행복에 가득 찬 것인가를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형주의 공명에게서 유비의 귀국을 재촉하는 편지가 몇 번이나 보내져 왔지만, 유비의 답장은 항상 함흥차사였다. 화가 치밀고 속을 끓이던 공명은 조운에게 지령서를 보냈다.  

아무런 할 일도 없어 매일 병사나 훈련시키고 있던 조운은, 공명에게서 지령서가 오자 즉시 유비를 알현하였다. 조운은 공명의 지시대로, 조조가 20만의 병력을 이끌고 형주 북방에 박두하고 있으니, 즉시 귀국하겠노라고 했다.  

"뭐, 조조가 병사 20만을 이끌고 공격해 왔다고!"  

깜짝 놀란 유비는 버럭 큰소리를 쳤다.  

"그 정보는 정확한 것인가. 공명이 착각한 것은 아니겠지?"  

"군사님의 지령서에는 화급 극비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공명이 직접 내게 말하지 않는 것인가?"  

조운은 잠시 잠자코 있다가 과감히 말을 꺼냈다.  

"군사님은 저에게 귀국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아마 주군님은 이곳을 떠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지요."  

"..."  

고민과 불안으로 목소리조차도 나오지 않는 유비의 눈 앞에, 갑자기 아름다운 옷차림의 손부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옆방에서 주군과 부하가 주고 받는 대화를 듣고 있었던 것이었다.  

"주군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글쎄, 조운만을 우선 먼저 보내놓고 나는 좀더 상황을 보고서 태도를 결정하도록 하겠네."  

그러자 손부인은 눈을 크게 뜨면서,  

"안 되십니다. 주군께서는 일국의 주인이십니다. 위급 존망의 시기에, 군주가 혼자서 국외에 계신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처사이옵니다."  

"그러나 그대 문제도 있고..."  

"주군님, 저에 관해서는 꺼리실 것이 없습니다. 저는 군인 가정에서 태어난 몸이라 전쟁에는 놀라지 않습니다. 일단 출가한 이상에는 주군님을 따라 어디를 가든, 처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당장 조장군과 함께 형주로 돌아가도록 하시지요."  

유비는 탄복을 할 뿐이었다.

단 한번의 찬스에는 철저하게 비정하라

다음 날, 손부인은 남편 대신 오빠를 찾아가, 공명에게서 온 편지 내용을 이야기하고 곧 떠나겠다고 말했다.  

"내게는 그런 정보가 들어와 있지 않은데. 조조에게는 대규모의 군사 행동을 일으킬 여유가 아직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공명이 꾸며낸 일이 아닌지."  

손권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령 그 정보가 정확하다 하더라도 형주에는 공명을 비롯하여 관우, 장비 등 용맹스러운 장수들이 즐비하게 있다. 간단히 위나라 군대에게 패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니, 좀더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한편으로 손권은 측근을 모아놓고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러자 강경파인 주유가 이렇게 주장하였다.  

"유비는 혼례를 마쳤슴에도 불구하고 약속한 형주의 양도를 실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원래 그 사람은 유명한 간옹이어서, 언제까지나 주군님의 비호 아래 온순하게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恐蛟龍得雲雨, 終非池中物也 교룡이 구름과 비를 만나면 결국은 연못 속의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지금 처치를 해두는 편이 무난합니다. 최소한 감금해 두지 않으면, 언제 도망을 갈지 모릅니다. 부디 조심을 하시는 게 중요합니다."  

형인 손책의 때부터 동서이자 후견인이기도 했던 주유는 사양할 것이 없었다. 결론적으로는 만일 손권 자신이 처치하기가 난처하다면, 유비 부부의 신병을 자기에게 맡겨달라고 요청하였다.  

손권은 거기에서 곤란한 지경에 처했다. 주유의 강경론을 받아 들이지도 못한 채, 여동생이 울면서 애원하는 바람에 결국은 유비가 형주로 돌아가는 것을 묵인하였다. 정에 여린 것이 손권의 약점이었으며, 이것이 큰일을 그르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비록 여동생의 남편이 되었건, 사위가 되었건 간에 사자의 몸을 파먹는 벌레라고 알았으면 감연히 잘라버리는 것이 톱이 취할 길이다. 이럴 때에, 조조였더라면 주유의 진언대로 화근을 뿌리뽑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1월 15일 대 보름날 밤, 놀이를 하며 마신 술로 사람들이 만취되어 있는 한밤중을 틈타서, 유비 부부는 조운을 데리고 건업을 탈출하여 형주로 쏜살같이 도망쳤다. 밤낮 없이 행군을 계속하여 자상까지 간신히 이르렀을 때, 일행은 주유가 파견한 장흠, 서성, 정봉의 추격대에게 뒤를 따라 잡혔다. 이제는 끝이로구나 하고 체념한 조운은,  

"주군님 어서 부인을 모시고 작은 배로 건너편의 강가로 건너가십시오. 저는 여기에서 적을 막겠습니다."  

그러자 손부인이 가로 막으며,  

"안됩니다. 추격대의 인원이 많으므로 이대로는 도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는 우리에게 맡겨주세요."  

손부인은 조운에게 명령하여 따라오는 병사들을 분산시키고,스스로 말에 올라 언월도를 휘두르며 선두에 섰다. 잠시 후, 모습을 나타낸 추격대는 유비의 앞에서 언월도를 창은 휘두르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장흠, 서성, 정봉 등 세 사람이로군. 기세가 등등한 모습인데, 어쩐 일들이시오. 유황숙님을 전송이라도 하려고 나왔는가."  

"저, 그게 아니옵고..."  

장흠은 말에서 내려 머리를 깊숙이 조아리며,  

"실은 명령을 받고 모시러 왔습니다. 모쪼록 지금 곧 건업으로 돌아가시도록 하십시오."  

"명령이라니? 누구의 명령이란 말이오."  

"네, 주장군님의 명령입니다."  

"이보시오, 장흠. 나를 어찌 알고 있는가. 나는 주군님의 단 하나뿐인 여동생이고, 유황숙님은 그의 매부가 되시는 분이오. 우리들은 주군님의 허락을 받고 형주로 가는 길인데, 그것을 주유 같은 자가 방해를 하다니,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굳이 데려 가려거든 완력으로 잡아가라!"  

"그것은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오빠의 명령이 아닌 이상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 이 이상의 일을 벌인다면 그대들은 반역죄를 범하게 되는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손부인은 그렇게 말하고서 유비와 조운과 함께 배에 올랐다. 때마침 강 저멀리에 선단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드디어는 주유 자신이 쫓아온 것인가 하고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으려니, 그것은 형주의 수군이었다. 걱정을 하고 있던 공명이 보내어서 마중을 나온 부대였다. 추격자들은 수수방관만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 장면도 경극에 나오는 긴요한 부분이다. 결국 손권은 온정에 사로잡혀 큰일을 그르친 것이다. 

 

11. 지금까지 남이 못했던 일에 도전하라

남을 얕보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무사히 형주로 돌아온 유비는 즉시, 영토 회복 선언을 하고 주둔하고 있던 오나라의 장수와 병졸들을 모두 쫓아내어 돌려 보냈다. 건업에서는 유비가 약속을 위반한 것을 알고, 야단 법석이었지만 행차 후의 나팔소리에 불과했다.  

"내가 뭐라고 했나. 유비나 공명은 그렇게 얕볼 자들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나."  

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분해하던 주유는 곧 새로운 전략을 제안하였다.  

"이렇게 된 이상, 형주는 여동생 부부에게 일시적으로 빌려준다고 선언하는 일입니다. 그리하면 유비는 안심할 것이고, 조조를 비롯한 세상 사람들은 군주님의 큰 도량에 감복할 것입니다. 공명은 예전부터 촉의 땅에 눈을 돌리고 있었으므로 형주가 안정되면 필경 유비에게 권하여, 촉을 공략하러 나갈 것입니다. 그 틈을 타서 저는 가동부대를 이끌고 삼각형의 정점인 양양을 공격하여, 거기서 형주에 압력을 가하여 되찾도록 하는 것입니다."  

손권은 찬성하고 즉시 유비에게 편지를 보내, 새로운 근거지를 찾을 때까지, 형주를 빌려주겠노라고 선언하였다.  

수개월 후, 총사령관의 직위를 사임한 주유는 임지인 강릉을 떠나, 2만의 정병을 이끌고 비밀리에 양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호한가석(好漢可惜) - 의협심 강한 남자를 애석해 한다고 했던가...  

장정의 도중, 파구라는 땅에서 병을 얻어 너무나 덧없게도 36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주유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손권은,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떨어뜨릴 정도로 놀랐다. 국장을 치르며, 손권은 주유의 관 곁에서 소리를 높여 울었다. 그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치 않은 부하가 없었다. 오나라에서는 첫째로 손꼽히는 전략가였던 주유는, 손권에게 있어서 사이좋은 친척이며, 존경하는 선생이며, 무엇이라도 상의할 수 있는 형님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강경파의 지도자인 주유가 죽음으로써, 오나라의 대외 방침은 방향을 바꾸었다. 촉과 연합하여 위나라에 대항할 것을 기본적인 원칙으로 정하고, 유비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한편 오나라와 수교한 유비는 형주의 수비를 관우에게 맡기고, 자신은 사천을 공략하기 위하여 원정길에 올랐다. 건안 19년(214년), 유비는 성도를 점령하여 이 땅에 촉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유비가 촉에 새로운 근거지를 개척하자, 손권은 형주를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때마침 제갈량 공명의 친형인 제갈근이 오나라에 있었으므로, 손권은 그를 사신으로서 촉으로 파견하여 형주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유비는 이렇게 회답하였다.  

"우리 쪽은 촉나라 통일에 겨우 성공했을 뿐이며, 가까운 시일 안에 북서쪽의 양주를 공략할 예정입니다. 양주를 평정하는 날에는 북쪽의 위협이 없어집니다. 그 때는 형주를 귀국에 양도하겠습니다."  

보고를 받은 손권은,  

"나와의 약속을 지연시킬 생각인 것이다. 게다가 빌린 것을 양도한다니 주객이 전도되도 유분수지, 역시 주유가 충고했던 대로 그 때 유비를 죽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며 분해하였다.  

손권은 화전 양면의 태세를 취했다. 총사령관인 노숙에게 명령하여 병사 3만 명을 형주의 남쪽 근방에 배치하는 한편, 제갈근과 제갈량이 형제인 관계를 이용하여 끈질기게 촉과 교섭을 계속하였다.

배짱을 가지고 적에게 대처하라  

형주 지역의 남동부에서 촉나라 군대와 오나라 군대가, 각각 3만 여의 병력으로 서로 대치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였다. 촉군의 대장은 관우, 오군의 대장은 노숙, 양쪽 다 당대의 유수한 용장과 지장. 여기서 싸움을 하면 쌍방이 상처를 입는다. 그렇게 되면 좋아할 사람은, 화북에서 눈을 번뜩이며 지켜보고 있는 조조 뿐이다. 이 때문에 오나라도 촉나라도 서로 접전을 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장강의 남쪽 연안인 육구에 도착한 노숙은 맞은편 연안인 하구에 있는 관우에게 편지를 보내어 협의를 호소하였다. '협의 장소는 육구의 강기슭. 상호 경비병은 백미터 이상의 거리를 둔다. 시종은 3명, 휴대하는 무기는 칼 한 자루만. 회견 책임자는 양쪽의 대장끼리만. 일시는 촉이 지정한다.'라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뭐, 노숙이 나와 담판을 짓겠다고? 그렇다면 이쪽으로 찾아오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육구로 나오라고, 건방진 놈!"  

자존심이 강한 관우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응하지 않으면, 비겁한 자라고 웃음꺼리가 될 것이었다.  

관우는 시일을 지정한 후, 배를 준비하여 육구로 갔다. 애용하는 언월 청룡도를 지니고 노숙의 진영으로 들어갔다. 처음으로 대면하여 인사를 마친 노숙은 당장 형주를 돌려 달라고 머리를 숙였다. 관우는 오만한 태도로,  

"귀하는 지난 해에 있었던 적벽에서의 대전을 기억하고 계시는가. 그 전투는 귀국의 존망이 걸린 결전이었는데, 그 당시 우리 촉나라는 유황숙님을 비롯해서 전군이 피투성이가 되어 활약하였소. 그 덕택으로 조조를 물리쳤으며, 오나라는 살아나게 된 것이오. 말하자면 은인이기도 한 우리 촉나라에 대해서, 이제와서 형주를 돌려달라고 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는 이야기로군요."  

"관우장군, 장군들의 적벽에서의 활동과 형주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형주는 원래 오나라의 영토였습니다. 적벽의 대전 때에 귀국은 영토도 없이 곤란에 처해 계시는 것을, 우리 주군님이 은정을 베풀어 잠시 빌려준 땅입니다. 때문에 유비님과 우리 주군님의 여동생이 결혼을 하실 때에도 유비님은 돌려주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제 귀국은 광대한 천부(사천성의 별칭)를 영유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형주는 필요치 않을 것이오. 어서 약속대로 돌려 주기를 바랍니다."  

"..."  

오로지 무예 하나의 길만을 걸어온 관우는 원래 이론에는 서투르지만, 약속에 관해서는 의리가 깊은 사람이었다. 노숙의 논리 정연한 이야기에 '그것도 일리가 있구나...'하고 생각하여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탄복만 하고 있어서는 교섭 당사자로서의 입장에 체면이 서지를 않았다. 이에 관우는 갑자기 못마땅한 듯 잔뜩 찌푸린 얼굴로,  

"형주를 영유한 경위에 관해서는 지금 여기서 논쟁을 해봐도 소용 없는 일이오. 현실적으로 우리 쪽에서 점령하고 있는 토지를 무작정 돌려달라고만 해도 무리한 처사요. 끝내 하겠다면 무력으로라도 빼앗아 보지 그러시오."  

"관우 장군, 그래 가지고는 이야기가 안 됩니다. 빌려준 토지를 약속한 대로 돌려달라고 하는 것뿐이지, 절대로 무리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 주군께서는 형주 전체가 아니라, 우선, 그 삼군만을 돌려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게 양보하는 겁니다. 아무쪼록 들어주십시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관우의 부관인 주창이 끼어들었다.  

"토지는 덕있는 사람에게 붙는 법이지요. 형주는 인덕이 높은 우리 주군님이 다스리고 계시니, 그것으로 되었지 않습니까."  

"입을 다물라. 나는 관우 장군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무례하지 않느냐!"  

노숙은 큰소리로 꾸짖었다. 그러자 관우는 벌떡 일어나 주창을  노려보며,  

"바보같은 녀석! 네가 쓸 데 없이 말참견을 할 바가 아니다."  

이어서 노숙 쪽을 향하여,  

"실례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천하 국가에 관련된 문제이니, 저같이 무예밖에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오늘은 이만하고 물러가겠습니다."  

하고 강기슭으로 나아갔다. 노숙을 비롯한 오나라의 장수들은 어안이 벙벙할 뿐이어서, 누구 한 사람도 이를 말리지 못했다. 안월 청룡도를 옆구리에 끼고 걷는 관우의 모습에는, 한 치의 허점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 군대의 배에 올라타자, 관우는 곧바로 강기슭을 떠나 북쪽 연안으로 돌아가 진지를 굳게 지켰다.

체면이 서도록 시시비비를 가려서 임하라

경극의 공연물 중의 하나로 '단도부회 - 단판 승부의 교섭을 하다'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이 때의 관우와 노숙의 회담을 소재로 다룬 것이다. 연극에서는 관우가 이론으로서 맛설 수 없다고 생각하자, 오른손에 청룡도를 들고 왼손에 노숙을 부둥켜 안고서 강기슭으로 급히 나가, 왼손을 떼는 것과 동시에 배에 올라타고 가버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과장된 표현인 것이다. 아무리 관우가 노숙보다 힘이 장사라해도 그런 곡예를 허용할 정도로 오나라 군대의 장병이 멍청하지는 않았으리라.  

양쪽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동안에, 위나라 군대가 한중에서 촉나라의 북부로 진격하여 왔다. 이 지경이 되고 보니 형주문제를 논할 계제가 아니었다. 유비는 황급히 강화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때, 오나라 대표로 나온 사람이 형인 제갈근이고, 촉나라의 대표는 아우인 제갈량이었다. 두 사람은 공식 석상에서 회견만할 뿐으로, 형제로서 사적으로 만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양쪽 대표 모두가 사사로운 정은 일체 개입시키지 않고, 형주의 동쪽 삼군을 오나라에 돌려주고 서쪽의 삼군은 촉나라가 영유하는 것으로 타결지었다. 덕분으로 유비는 조조와의 대결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고, 손권은 체면을 유지하게 되었다.  

오나라와 촉나라의 현안으로서, 지금까지 누가 시도해도 성공하지 못했던 어려운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한 것은, 제갈 형제가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시시비비를 가린 교섭태도의 덕분이었다

 

12. 항상 변함없는 충절과 긍지를 지녀라

이윽고 시대는 각 영웅들의 즉위 러시로 돌입한다.  

건안 21년(216년), 조조는 위나라의 무왕이 되었다.  
건안 24년(219년), 유비는 촉나라의 한중왕을 칭하였다.  
건안 25년(220년), 헌제는 선양의 형태로 제위를 조비에게 물려줌으로써, 4백 여년을 이어온 한나라 왕조는 멸망하고 말았다. 조비는 위왕조의 문제라고 창하고 연호를 황초로 고침과 동시에 망부인 조조에게 위나라의 무제라는 시호를 부쳤다.  

건안 26년(221년), 한나라 왕조가 멸망하고, 조비가 즉위하여 문제라고 칭한 데에 자극을 받아, 유비는 성도에서 황제 즉위의 전례를 올리고 한나라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하였다. 장남인 유선을 황태자로 지명하고, 연호를 장무로 고쳤으며, 유비는 소열제라고 칭하였다.  

위나라와 촉나라가 각각 독립해서 그 우두머리가 즉위하여, 황제가된 것을 보고, 오나라에서도 손권이 제위에 오르도록 청하는 하부에서의 요망이 일어났다. 229년 손권은 제위에 오르고 대제라고 칭하였다. 즉위를 한 것은 가장 늦었으나, 손권의 재위기간이 23년간으로 가장 길었다.  

유비가 천부에 신천지를 구한 이후, 형주는 줄곧 관우가 지키고 있었다. 관우는 결국 8년여나 형주의 수비 사령관으로서 버티고 있었으며, 그 세력은 오나라에게 있어서나 또 위나라에게 있어서나 무시할 수 없게끔 되어져 있었다. 건안 22년(217년)에는 오나라의 전선 사령관인 노숙이 병사하고, 관우의 존재는 손권에게 있어서 더욱더 두통거리가 되었다.  

노숙의 후임으로 손권은 여몽을 임명하여 육구에 주둔시켰다. 전임자였던 노숙은 관우와 친교도 나누며 분쟁을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함께 협력하여 북방의 조조에게 대항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임 사령관은 생각이 달랐다. 이제 오나라의 첫째로 꼽히는 전략가가 된 여몽은 이렇게 상신했다.  

"관우는 둘도 없는 용장이며, 더욱이 영토 확장주의자입니다. 한편 조조도 천하의 효웅이오나, 그는 적벽에서의 패전 이래, 군대를 재건하는 데에 정신을 빼앗겨 지금 당장 장강 연안까지 남하해 올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이 기회에 조조와 손을 잡아 남북에서 관우에게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군사와 외교 방침의 180도 대전환이었다.  

건안 24년(219년), 관우는 3만의 병력을 이끌고 하구에서 북상하여 위나라 영내로 침입해, 조인이 지키고 있는 번성을 공략하려 노리고 있었다. 허도의 조조는 당황하여 우금에게 병력을 주어 구원병으로 보냈다. 관우는 북벌에 즈음하여, 남방에 있는 오나라의 태도를 경계하여 병력의 일부를 하구에 남겨둘 작정이었다.  

이것을 알아챈 여몽은 손권에게 전선 사령관의 교체를 제기하였다.  

"관우는 우리 군대를 경계하느라 다수의 경비 부대를 남길 작정으로 있습니다. 이 기회에 나는 병을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전선 사령관을 사임한 것으로 합니다. 관우는 단순한 사람이므로 제가 없으면 안심이라고 생각하여, 경비부대를 남겨두지 않고 전체 병력을 투입하여 북방정벌에 나설 것입니다. 그때에 이쪽에서 총동원하여 급속히 장강을 건너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오나라와 위나라가 남북에서 협공하면 승리는 틀림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손권은 걱정스레 물었다.  

"그대 대신에 전선에서 군대를 지휘하여 관우와 맞겨룰 장수가 있겠는가?"  

그러자 여몽은 주저하지 않고, 젊은 무장 육손을 추천하였다. 그 이유로서,  

1. 육손은 이름이 알령져 있지 않으니 관우가 경계하지 않을 것이다.  
2. 육손은 작전상의 통찰력이 깊으므로 중임을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이다.  
3. 육손은 성격이 온화하지만, 부내의 지도력이 우수하다.  

는 등의 점을 들었다.  

육손은 손권과 인척 관계도 되며, 아직 젊어서 국외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국내에서는 그의 능력이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손권은 여몽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육손을 후임의 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충신은 불사이군 - 어째서 관우는 무신이라 계속 불리우고 있는가

한편 관우 쪽에서는 여몽이 건업으로 돌아갔다는 일이 알려지자, 완전히 안심하고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경비 부대도 남기지 않은 채, 북으로 대거 진출하였다.  

때마침 가을의 강우기에 들어서 장마가 계속되었다. 관우군은 번성을 포위하고 물로 공략을 하며 위나라의 군대를 괴롭히고 있었다. 우금이라는 장군은 장료, 하후돈, 악진 등과 함께, 조조의 신임이 두터운 노련한 장군이었으나, 홍수와 성 안의 전염병 발생으로 말미암아 뜻대로 전투를 계속하지 못하고 드디어 관우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번성을 빼앗긴 것은 위나라로서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관우가 수행하는 질풍 신뢰의 작전 상황을 보아,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이 있는 허도도 위험하겠다고 걱정한 조조는 도읍을 낙양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사마중달의 반대로 중지하고, 그 대신에 사신을 오나라로 파견하여 손권에게 남쪽으로부터 출병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손권은 여몽에게 출병을 명령하였다. 신병으로 인해 은퇴한 것으로 되어 있던 여몽은, 3만의 정병을 인솔하고 전선인 육구에 도착하자, 육손과 협력하여 장강을 건너 병력이 적은 형주의 남부를 제압하였다. 그리고 관우의 가족이 살고 있는 성인 남군을 점령하고 그 가족들을 포로로 삼았다.  

사태가 급변한 것을 알고 깜짝 놀란 관우는 번성에서 철수하여, 곧바로 남하해서 남군으로 향하였다. 그러자 조조는 위나라 군대의 장군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서황에게 추격하도록 하였다.  

위와 오, 양쪽 군대로부터 남북에서 협공을 당하는 형태가 돼버린 관우군은 남군으로 입성하려던 것을 단념하고, 그 서부인 맥성에 진을 쳤다.  

보름 후, 맥성은 위와 오나라의 양쪽 군대에게 이중, 삼중으로 포위되었다. 작은 성이라서 양식도 떨어지고, 지원군이 올 전망도 없었다. 이대로 수수방관만 하며 죽음을 기다리기보다는, 깨뜨리고 나가서 피로 물든 길이라도 열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한 관우는 각오하였다. 때마침 막료인 주창과 아들인 관평이 장강으로 빠져나가는 샛길을 발견하고, 관우에게 그곳을 통하여 도망가서 권토중래(捲土重來 한번 패했다가 세력을 회복하여 다시 쳐들어옴)를 기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자 관우는,  

"대장부라는 자가 샛길로 살금살금 도망쳐 가는 야비한 짓을 해서야 되겠는가. 이렇게 된 이상은 정문으로 당당히 나아가 싸울 뿐이다."  

라며 거절하였다.  

다음 날, 불과 2백의 기마병을 이끌고 나선 관우 부자는 오나라 군대의 번장이 이끄는 병력에게 말과 함께 붙잡히어 손권 앞으로 끌려 나갔다.  

손권은 관우의 무술과 용맹을 아깝게 생각하여 항복할 것을 권했다. 그러자 관우는 가슴을 펴고 대답하였다.  

"나는 유황숙님과 도원에서 결의를 맺은 이후, 그 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몸이다. 잔소리말고 죽여라!"  

손권은 그래도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막료들이 입을 모아 반대하였다.  

"늑대는 절대로 사육해서 길들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조조도 이 사람을 체포했을 때 죽이지 않았었기 때문에 극심한 일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관우는 늑대와 같습니다. 살려 두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관우 부자는 침착한 태도로 죽음에 임하였다. 손권은 관우의 목을 조조에게 보냈고, 시신은 제후의 예를 갖추어 정중히 매장하였다. 건안 25년(220년) 정월, 조조는 낙양에서 관우의 목을 인수하였다. 생각 탓인지 관우의 목은 조조를 향해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 그 보름 후인 정월 23일에 조조가 죽었다.  

관우는 58세로 떠났는데, 그의 생애는 전부가 유비를 위해 바쳐진 것이었다.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는 삶은 한편에서는 무사도의 도덕이지만, 중국에서는 꼭 그렇지도 않다. 중국의 역대, 특히 전란 시대의 무인들은, 포로가 되어 상대가 섬길만한 인물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두 군주라도 섬기고 있다. 그런 속에서 끝내 의리를 지킨 관우의 생애는 한층더 빛이 나는 것이다. 관우가 지금도 '관제사당'에 모셔지고 있고, 무예의 신, 상업의 신으로서 숭배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13. 불리한 줄 알면 때를 기다려라

한번 믿은 부하는 끝까지 믿어라  

건안 26년(221년), 유비는 성도에서 황제를 칭하는 즉위식은 거행하고 연호를 '장무'라고 바꾸었다. 이렇게 해서 한나라 왕실의 정통을 이어 제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유비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의동생인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손권을 응징하는 일이었다.  

유비는 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하여,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로 침공해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공명과 조운을 비롯한 군신들이 일치하여, 동방정벌을 반대하였다. 조운은 유비를 제지하며 이렇게 말했다.  

"폐하, 나라의 적은 조조이지 손권이 아닙니다. 위나라만 멸망시키면 오너라는 자연히 폐하께 머리를 숙여올 것입니다. 위나라를 그대로 두고 오나라와 싸움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라의 적을 치는 것은 대의적인 명분이 서는 일입니다마는, 동생 분의 원수를 갚는 일은, 말하자면 사적인 일입니다. 그와 같은 일로 먼 오나라까지 원정을 가시면 되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됩니다."  

또한 참모인 공명도,  

"한나라의 역적을 치기 위한 것이라면, 폐하의 원정이 명분이 서겠습니다마는, 손권을 응징하기 위한 일이라면 적당한 장군을 파견하셔도 되는 일입니다."  

라고 말하여 유비 자신이 원정길에 나서는 것을 반대하였다. 단 한사람, 유비의 출진을 촉구한 것은 장비였다.  

"우리들 세 사람은 도원에서 생사를 맹세하고, 그 후 35년간 관우 형은 폐하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손권, 그자를 쳐서 죽은 관우 형의 원한을 풀어야 합니다."  

하고 장비는 열을 올리며 주장하였다.  

한쪽은 정론이고 다른 한쪽은 개인적인 감정이었으나, 결국 유비는 개인적인 감정으 편을 들어 오나라에 대한 원정을 결단하였다. 또 그것이 '인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불리운 유비의 특성이기도 했다.  

유비에게서 출진 명령을 받고 흥분한 장비는, 부하인 범강과 장달에게 3일 이내로 전군의 갑옷을 흰 상복으로 준비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두 장군이 날짜를 좀 늦추어 달라고 요청하니 장비는 노하여,  

"내 명령을 못 듣겠단 말인가! 만약 하지 못하면 죽으리라."  

라고 말한 후, 두 사람을 소나무에 동여매고는 죽도록 때렸다. 범강과 장달은 그날 밤, 장비의 침실로 숨어 들어가 술에 만취되어 정신없이 자고 있는 장비를 암살한 후 오나라로 도망쳤다.  

유비가 원정을 올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오나라에서는 육손을 방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전쟁에 대비하는 한편, 화해를 구하는 사신을 촉나라로 파견하였다. 바로 그 때, 남군의 태수를 맡고 있던 제갈근도, 아우인 제갈량과의 관계를 이용해서 유비에게 친서를 보내, 원정 계획을 단념하도록 권했다. 그러자 손권에게 제갈근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제갈근은 오나라의 녹을 받으면서, 유비와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습니다. 근은 량의 친형이니 너무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손권은 그 사람의 말을 상대도 하지 않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와 제갈근은 신뢰로 맺어져 굳은 약속을 주고 받은 사이이다. 그 사람만큼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손권의 장점은 이와 같이 한번 마음으로부터 믿어준 부하는 끝까지 신뢰했다는 데에 있다.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할 때와 참고 견디어야 할 때  

손권은 또 위나라의 문제 조비에게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다. 조비의 측근 중에서는, 손권을 원조하는 일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아버지를 닮아 냉철한 정치 판단력을 갖춘 조비는 이렇게 말했다.  

"궁조입회인인소민(窮鳥立懷仁人所憫 궁지에 몰린 새가 품 속으로 들어와도 인자한 사람은 이를 불쌍히 여긴다.)라는 속담도 있다. 손권이 머리를 숙이고 도움을 청해온 이상, 이것을 받아들여 오나라에 호응하여 촉나라의 배후를 치도록 하자."  

문제는 오나라의 원조 요청을 받아들이고, 손권에게 오나라 왕의 칭호를 수여하였다. 허도에서 즉시 건업으로 사신이 파견되었다. 위나라의 사신은 손권에 대하여 신하로서 복종한다는 증거로, 상아, 공작, 비취, 진주, 장명계, ... 등등의 남국 특산물을 바치라고 요구하였다.  

오나라의 신하들은 분개하며 진언 하였다.  

"문제의 태도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이 물품들은 어느 것이나 다 진귀한 것이며, 이런 공물을 바치면 오나라는 완전히 위나라의 속국이 되었다고 비웃음을 받을 것입니다. 당장 거절해야 합니다."  

그러나 손권은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옛날 한나라의 유방도 때가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항우에게 머리를 숙이고 신하로서 복종하겠다고 서약했던 일도 있지 않은가. 서쪽으로부터 유비의 대군이 몰려오고 있는 지금, 이 나라 백성들의 목숨은 오직 나의 인내 여하에 달려 있다. 위나라가 요구해 온 물품들은 나에게 있어서는 잡동사니 같은 것들이다. 지금은 허리를 굽히고 치욕을 참는 것이 군주된 자가 취할 길이다."  

바로 지금은 참아야만 한다고 생각될 때에는, 손권은 허세를 부리지 않고 인내로 견디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적벽의 전투처럼 결단이 요구될 때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처럼 객관적인 정세와 적군과 아군의 전력을 분석하여, 때로는 한 걸음 물러서고 때로는 두 걸음 전진한다는, 부드럽고 단단한 양면의 정략을 구분하여 사용했던 데에, 손권이 오나라의 정권을 오랫동안 안정시켰던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기업의 경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당대의 초일류의 경영자라고 불리웠던 사람들은 불리하다고 생각되었을 때에는 꾹 참고 자신의 힘을 축적하는 데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좋은 시기가 왔다고 판단 했을 때에는 모든 정력을 다 쏟아, 업무 확대에 노력하여 프로젝트를 완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때에 따라서는 레닌이 주창한 '일보 후퇴 이보 전진!'의 정책을 실행하였다. 때문에 그들의 기업은 고도 성장과 저성장의 파도를 뚫고 나아가 안정된 발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경영자가 된 사람은 경제의 정세, 자신의 전력, 시대의 흐름, 국제관계... 등을 파악하여, 객관적인 정세에 대응할 수 있는 경영전략을 세워야 한다. 전진해야 할 때는 전진하지만, 참아야 할 때는 꾹 참고 견딘다. 이것이 톱이 취해야 할 태도이다. 저성장기에 들어갔는데도, 아직도 고도 성장의 꿈을 쫓아 재정을 재정비해야 할 때에 여전히 확장을 외치고 있으면, 아무리 큰 기업이라도 반드시 실패하고 만다.  

 

14. 승리하기 위하여 인내를 지속할 수 있는가

협곡에 포진하는 군대는 패한다.  

육손, 자는 백언이라 하며, 오나라 명문의 출신으로 손책의 손녀를 아내로 맞았다. 어려서부터 병법을 배워 21세의 나이로 손권의 본진으로 나아갔으며, 젊은 부대장으로서 각지를 전전하면서 거듭되는 무훈을 세웠다. 218년, 여몽의 천거로 형주의 전선 사령관이 되어, 여몽과 협력하여 맥성에서 관우를 격파하였다.  

촉나라 장무 2년(222년), 유비가 이끄는 대군은 수륙에서 오나라 영토 안으로 진격하여, 노도와 같은 기세로 이릉에 당도하였다. 장강의 북쪽 기슭에 있는 이릉은 군사 요충지로서 이곳이 돌파되면 강릉, 하구까지는 일직선이 된다. 이릉을 지키고 있던, 오나라의 군대 유격 부대의 장교들은 유비군이 다가옴에 일제히 긴장의 빛이 띄었다.  

그런데 유비는 이릉의 바로 앞이까지 전진하자, 그곳의 협곡에 진영을 치고 머물었다. 원정의 피로를 풀고, 군을 재편성한 후 다음 공격으로 넘어갈 작정이었던 것이다. 유비군이 진격을 멈추고, 장기 주둔의 태세를 보였다는 정보는 당연히 후방에 있는 손권에게 보고되었다. 손권은 그 정보를 곧 동맹국인 위나라에 통보하였다.  

"유비의 대군은 장강을 따라 이릉까지 당도하였으나, 그 바로 앞인 좁다란 협곡에서 길게 장사진을 치며 주둔하고 있다."  

문제 조비는 니 보고를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유비는 병법을 모른다. 7백 리나 되는 거리에 걸쳐서 주둔할 진영을 구축하다니, 바보 같은 녀석이군. 병법에도 '습원이나 협곡에 포진하는 군대는 패한다.'라고 쓰여 있지 아니한가. 오나라 군대가 반격을 해온다면 여지없이 패할 것이다."  

반년 후, 과연 예언 그대로 되었다.

적이 치기를 기다린다 - 급전이 반드시 이득만은 아니다.
  
한편 육손은 조급히 서두르는 여러 장수들을 억제시키면서 전체 군대에게 이렇게 지시하였다.  

"적의 기세는 당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지만, 다행히 이릉 바로 앞의 협곡에서 진격을  멈추고 전열 정비에 열중하고 있다. 앞으로 얼마동안은 우리 쪽이 방심하지 말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며 정세의 변화를 기다리자. 이 일대가 평지라면, 대군이 전투를 개시하면 난전에 쫓기며 휘말려들 위험이 있으나,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는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적은 먼 길을 달려온 원정군이므로 보급에도 곤란함이 있을 것이다. 우리 군대는 차분히 좌정해 있다가. 적이 더욱 더 지치면 공격을개시하는 것이다."  

젊은 장군 중에는 총사령관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육손은 유비를 두려워하고 있다."라고 오해하여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육손은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렇게 기다리기를 반년, 초목도 태워버릴 듯한 무서운 호북의 여름이 왔다. 양자강 중류에 있는 이 일대는 내륙성 기후로, 여름은 섭씨 40도가 넘는 뜨거운 날이 계속된다. 중일전쟁 때에, 한구를 점령했던 일본군의 장병들도 그 심한 더위에 몹시 놀라 '한구에서는 여름이 되면, 전기줄에 앉은 참새들도 더위 때문에 뇌진탕을 일으켜 떨어진다.'라는 농담까지 하고 있었다.  

원정군의 병사들은 밤이 되면 겁옷을 벗어버리고, 큰 대자 모양으로 자고 있었다.  

'이제야말로 반격을 할 때이다.'  

  그렇게 판단한 육손은 전군에게 총공격을 명령하고, 좁고 긴 계곡에 진을 치고 있는 촉나라 군대에 대하여, 대대적인 화력 공세를 감행하였다.  

피로와 더위로 몹시 지쳐버린 촉나라의 병사들은 화력공세를 받고 잠시도 버틸 수가 없었다. 오나라 군대의 기습작전으로 촉나라 군대는 선박, 무기, 식량의 태반을 상실하고 많은 장병들이 죽음을 당했다. 패주하는 유비는 굴욕으로 몸을 떨며 이렇게 외쳤다.  

"나는 육손에게 설욕을 당한 것이다.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랴."  

육손은 이릉의 전투로 일약 유명해졌으며, 주유가 죽은 이후 가장 뛰어난 전략가로서 오나라 군대의 중진이 되었다. 손권은 육손에게 보국 장군의 칭호를 수여하고, 형주 장관으로 임명하였으며, 강릉후로 봉하여 그 공로에 보답하였다.  

후세의 전쟁사 연구가는 육손이 취한 이 전략을 '충분히 쉬면서, 적이 지치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라고 평하였다. 그리고 이 전략은 전통적으로 중국 군대의 특기가 되었다. 8년에 걸친 중일전쟁에서도 일본의 육군은 중국군의 이 전략에 말려들어 패했다고 말할 수 있다.

 

15. 사적인 정을 버리고 마지막까지 분명한 사리 판단을 하라

준마도 늙으면 둔한 말만 못하다  

한나라의 유향이라는 학자가 편찬한 역사책으로 <전국책 戰國策>이 있다. 전국시대의 주, 진, 제, 초 등, 12개국의 역사를 나라 별로 나누어서 저술한 것이다. '호가호위(狐假虎威 신하가 임금의 권위를 빌어, 다른 뭇 사람들을 위협하는 것을 이름)'라든가, '사족(蛇足)'등의 유명한 고사성어도 있으며,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예전부터 많이 읽혀지고 있는 책이다. 그 가운데의 <제책(齊策)> 에 '아무리 날랜 말도 늙으면 둔한 말만도 못하다'라는 격언이 있다. 어떠한 영웅 준재도 늙어지면 보통 사람만도 못하다는 뜻이며, 현대식으로 말하면 '노해(老害)'를 훈계하는 말이다.  

수성의 명군이라고 불리우던 손권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만년의 후계자 선정에서 이런 경향이 현저하였다. 오나라의 황태자로는 일찍이 손등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 황태자는 적오 5년(242년)에 부친인 대제보다 앞서 요절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분규의 씨가 생겨났다.  

손등이 죽자 손권은 왕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인 손화를 태자로 지명하였다. 그때, 손화의 나이가 19세로 차기의 후계자로서 연령, 인품, 재능이 모두 그저 그런 정도의 왕자였다.  

사람이 늙으면 같은 자식이라도 나이가 어린 쪽이 귀여운 것인지, 손권은 손화의 동생이며 아직 어린 손패를 더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손권은 손패를 노왕으로 봉하고 황태자와 동등한 대우를 부여하였다.  

기업도 마찬가지이지만, 차기 사장에 누가 되느냐 하는 것은 사원들의 최대 관심사이며, 사장의 의향에 대하여 유별나게 만감하다.  

'폐하는 패전하 쪽을 후계자로 삼고 싶은 모양이다.'라는 억측이 어느덧 퍼져 나갔다. 금새 신하들 사이에서 태자파와 노왕파가 생겼다. 양쪽의 파벌은 각자가 추대하는 왕자를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 서로 물고 늘어져, 비난과 중상모략, 간사하게 아부하며 따르는 무리들이 횡횡하였다. 그리고 서울인 건업에서는 어느 파벌의 편을 드느냐가, 중신들의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양쪽 파벌의 싸움과 선전 활동은 더욱더 에스컬레이트하여, 이윽고 피의 항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노왕파는 줄곧 술책을 꾸며 태자의 실각을 도모하고 있었다.


정당성을 존중함으로써 분쟁의 씨를 없애라

그 무렵, 군의 제일인자인 육손은 대장군 겸, 정승으로서 형주에 주재하고 있었다. 양 파벌의 소문은 형주에 있는 육손의 귀에까지 다다랐다. 원래 군인으로 정치적인 항쟁에는 흥미가 없는 육손이었으나, 정승을 겸하고 있는 이상에는 조정 안의 분쟁을 방치할 수도 없었다. 거기서 육손은 손권에게 상주하였다.  

"태자는 차기의 제왕이며, 국가 정통의 상징입니다. 한편 노왕은 일반적인 전하이며, 제위를 계승해야 할 지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태자 전하와 노왕 전하의 처우에는 엄연한 차이를 두셔야 함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정승인 육손의 누차에 걸친 상주에도 불구하고, 대제인 손권은 전혀 고치려 들지 않았다. 그러기는 커녕, 노왕파의 무리들이 육손을 배척하는 운동을 시작하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실각하고 말 것이다.'하고 두려워진 노왕파는 육손의 죄상을 조작하여, 손권에게 상신하였다.  

예전의 손권이었더라면 그런 중상모략에 귀를 귀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너무 나이가 들었다는 것과, 때마침 병상에 있었으므로 판단력이 둔해지고 있었던 것일까. 형주로 칙사를 파견하여 육손을 꾸짖었다.  

너무나도 한심했던 나머지, 육손은 죽음으로써 주군에게 간언하였다. 향년 63세였다. 육손이 분한 죽음을 한 후, 손권은 그의 충성을 재인식하고 심한 자책감에 사로 잡혔다. 그러나 사후 약방문에 불과했다.  

적오 13년(250년), 손권은 병상에서 최후의 기력을 다하여 이 문제를 처리하였다.  

"피를 나눈 형제가 그렇게도 추하게 싸우다니 한심스럽다. 이대로 가다가는 원소의 전철을 밟게 되겠다."  

라고 깨달은 손권은 태자 화를 폐적하며, 노왕 패에게는 자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 일당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그리고 그 대신으로, 만년에 총애하던 첩 비인 번부인에게서 낳은 손량을 황태자로 지명하였다. 그때 손량의 나이는 불과 8세였다.  

그로부터 2년 후, 손권은 71세에 세상을 떠났다. 아직 나이 어린 태자를 남겨 두고, 손권은 안심하며 죽지도 못하였을 것임에 분명하다.  

손권이 세상을 떠난 후, 오나라에서는 세 사람의 황제가 계속되었으나, 모두가 범용하여 시조의 후계자로서는 너무나도 됨됨이가 시원치 않았다. 오나라 천기 4년(280년), 제 4대의 마지막 황제인 손호는 진나라의 유명한 유학자이기도 한 두예장군이 이끄는 부대에게 건업을 내주고 포로가 되었다. 대제 손권이 황제로 즉위한 이래, 51년 동안 계속되어 왔던 오나라는 여기서 멸망하고 말았다.  

만년의 손권에게 있어 가장 큰 실패는 후계자를 선정함에 있어, 올바르게 도(道)를 세워 관철하지 못했던 점에 있다. 이 점에서는 후계자 선정에서 망설이면서도 개인적인 정보다도 정통성을 중시하여, 무조건적으로 사랑했던 세째 아들 조치가 아니라 장남인 조비를 세웠던 조조가, 일국의 톱으로서는 한 수 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