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삼국지를 읽으면 사람이 보인다_조조의 처세술

醉月 2010. 3. 31. 08:55

시경(詩經)시대로부터 청조말기까지 중국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역활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시(詩)다. 그에 비하면 소설의 경우는 그다지 높지 않고 작품수 또한 적다. 그러나 그 중국의 역대 소설 중에서 고금을 통한 걸작으로 후대에 인정을 받고 있는 소설은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로 이른바 4대 기서(四大奇書)이다. 기서(奇書)라고 일컬어지는 만큼, 이들 소설은 모두가 테마나 수법에서 좀 독특하다.  

<서유기>는 '손오공'이라는 원숭이 보스가 나타나서 큰 난동을 부리는 팬태스틱한 이야기이다. <수호전>은 108명의 영웅호걸이 등장하여 악질 관료를 단죄하는 내용의 영웅담이다. 이는 봉건시대의 압제에 시달린 중국 인민의 한없는 꿈을 이 소설을 통하여 펼치고 있다. <금병매>도 권선징악을 호소한 이야기인데, 미묘한 남녀 관계를 말하면서 포르노식의 묘사를 하고 있는 게 다른 소설과 비교해 특이하다.  

이상 세가지 책에는 픽션이 많은 것에 비해 <삼국지연의> 만은 삼국시대의 역사 사실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개개의 인간의 움직임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서, 위, 촉, 오 삼국의 흥망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중국인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삼국지연의>를 옛날 이야기로 듣고 자랐으며, 강담(講談), 연극, 학교 교육 등을 통해서 스토리나 영웅들과 사귀고 있다. 이런 점들을 보아 중국인의 교양 형성에 있어서 <삼국지연의>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돼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주의 교육으로 자라난 중국대륙의 청년들은 서유럽의 정치가나 군인 이야기는 잘 모를 것이다. 또 반공 교육을 받은 대만의 중화민국 학생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학생만큼 마르크스나 레닌에 관해서는 잘 모를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이라면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영웅호걸의 이야기는 잘들 알고 있다.  

<삼국지연의>가 왜 이렇게 인기를 얻고 있는가? 이는 한마디로 말해서 이 책이 인간학의 보물창고이기 때문이다.  

<삼국지연의>는 인간의 본능, 선의의 악의, 이에 바탕을 둔 정치적인 거래, 전략, 처세술의 지혜 등을 여지없이 펼쳐준다. 독자는 이런 점에서 박수갈채를 보내고 인생의 무정함을 슬퍼하며 때로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손에 땀을 쥐기도 한다. 게다가 그것이 생생하며 현대에서도 현실미를 갖고 있으니 놀라울 뿐이다.  

현대사회는 하이테크놀리지와 인간적인 것이 뒤엉킨 복잡한 시대이다. 한편으로는 고도한 과학성을 추구해야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복잡해지는 인간관계를 잘 처리하기 위하여 현대인은 선인들의 경험이나 전통적인 교훈을 살려가지 않으면 안 되게 돼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삼국지연의>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는 인간학이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리라.  

- 지은이 -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처세술을 삼국지의 조조, 손권, 유비를 통해 알아본다. 여기에 잇는 자료는 "삼국지를 읽으면 사람이 보인다 (松本一男 지음, 이주영 옮김, 이목출판, 1995년 12월 10일 초판발행, 6,000원)" 에 나오는 자료로서 독자 여러분들은 이 책을 한권 구입하여 자기의 가까운 곳에 놓아 두고 자주 읽어 봄으로써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처세술을 익히기 바랍니다.>

 

1. 큰일을 이룰만한 기량을 가지고 있는가?
     감당할 수 없도록 방탕한 자식이 어찌 천하를 휘어 잡으리..  이 세가지의 조건이 강렬한 지도력을 발휘시킨다.

2. 만사를 제치고 올라서는 '장래가 두려운 남자'의 행동방식
    자신의 명령을 철저화 하기 위해서 조조는 무엇을 했는가?  '뭔가를 하는 남자'는 여기가 다르다.

3. 거부된 지도자, 요구된 지도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카리스마적 결합력' 인간의 성쇠에도 이유가 있다.

4. 고양이를 쫓아내기 위하여 마당에 호랑이를 집어넣지 말라
     집안 싸움에 외부 세력을 이용하지 말라.  '힘'에 대하여 정면 충돌을 해서는 안된다.

5.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재치를 가지고 있는가?
     절도가 없는 인간은 가치가 없다.  어떠한 경우라도 냉정하게 대응할수 있는 담력을 지니고 있는가?

6. 항상 '냉철하게 '일'을 실행할 수 있는가?
     한번 나쁜 일을 시작한 바에는 끝까지 - 이렇게까지 냉철해 질수 있는가.  남을 배반해도 남에게 배반당하지 말라.

7. 우유부단을 버려라, 결단 뿐이다
    스스로 나서는 자에게 승리의 기회가 주어진다.  복합세대가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이유

8. 강자를 쓰러뜨리기 위한 '심리전쟁'
     강자를 타파하는 이 한 수  인간은 애증에 따라서 쉽사리 배반한다는 것을 잊지마라.

9.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사람을 어떻게 움직이는가?
     부하의 좋은 의견은 주저없이 채택하라.  '조삼모사(朝三募四)'에 사람이 움직이는가? 분별력이 확실한 남자에게는 사람이 따른다.

10. 모든 전투는 톱의 기량으로 결정된다
      수하에 병사가 적을 때에는 유격전을 노려라.  '소'가 '대'를 누르기 위한 무기는 무엇인가?

11. 남자로서의 낭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가?
      도리에 어긋나지 않으면 길은 반드시 열린다.  비정과 관용의 마음을 동시에 겸비하고 있는가.

12. 추상열일 속에 따스함을 지니고 있는가?
      신상필벌에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는가  멸망하는 조직, 살아남는 조직

13. 본심과 겉치레는 철저히 구분하여 사용하라
      마음에 꼭 드는 인물은 결점이 있어도 등용하라.  이용 가치가 없는 사람을 당신은 자를 수 있는가  

      명문을 내세우는 한편, 실리를 얻을 수 있는가

14. 자신에게 어울리는 종막을 고할 수 있는가?
      끝없는 욕망을 어디에서 누르는가  장례식이 끝나는 대로 상복을 벗어라

15. 자신의 목표를 향해 오로지 전진할 수 있는가?
      사적인 감정을 버리고 사람의 기량을 헤아릴 수 있는가  권력에 빠지지 않고 직무를 다할 수 있는가  결속하여 강건해 질 자신이 있는가.

 

01. 큰 일을 이룰만한 기량을 지니고 있는가?

감당할 수 없도록 방탕한 자식이 어찌 천하를 휘어 잡으리..
화중평야의 한복판을 차지하는 서주부근은 한나라 시대에는 패현이라 불리우고 있다.  
이 지방은 비옥한 토질의 혜택으로, 예나 지금이나 농업이 성하다. 한나라 시대에는 정치나 지리학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것은 이곳이 한나라 왕조의 창시자인 유방의 출신지였기 때문이었다.  
한나라 왕조 12년, 천하를 통일한 고조 유방은, 회남지방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 가던 길에, 고향인 패현에 들러 마을의 장로와 죽마고우들을 불러서 천하통일의 축하연을 베풀었다.  
연회석상의 고조는 젊은이들이 연주하는 민요소리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나그네 고향을 그리네'라고 혼잣말을 하며 스스로 붓을 들어 시를 지었다.  

  大風起兮 雲飛揚,  큰바람이 일어 구름이 비양하고,
  威加海內兮 歸故鄕,  위세가 천하에 더하여져서 고향에 돌아오니,
  安得猛士兮 守四方.  어찌 용사를 얻어 사방을 지키지 않을손가

이것이 그 유명한 '대풍가(大風歌)'이다  

고조가 죽은 후에도 패현 사람들은 타지역 사람들에게는 없는 자부심을 가졌으며, 이 지방에서는 한나라 왕실을 좌우할 만한 정치가나 군인이 많이 나왔다. <삼국지> 영웅의 한 사람인 조조도 이 지방의 출신이다.  
후한 순제의 무렵, 권세가 극에 달한 환관 중에 조등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조등은 한나라를 창건할 때의 공신인 조삼의 자손이다. 어지간한 인물로서, 당시 한나라 왕조의 제일인자 격인 신하라는 의미에서 '천하의 명사'로 불리우며, 황제의 신뢰도 두터웠다. 이 조등의 손자가 조조이다.  
조조, 자는 맹덕, 별명은 길리이며 어렸을 때의 이름은 아만이라고 했다. 패현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는 유년시절을 보냈으나 감당할 수 없는 방탕아이기도 했다.  
<위지무제기>에는 '태조는 젊어서 부터 동작이 날쌔고, 눈치가 재빠르며, 권모술수가 뛰어났으나, 임협 방탕하여 수양을 닦지 못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조조는 단순한 방탕아가 아니라, 학문과 무예가 뛰어나 있었다. 특히 검술, 병법, 시작에 있어서는, 이 지방의 젊은이로는 그에 비견될 자가 없으리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무렵 하남에 허자장이라는 역술인이 있었다. 관상장이의 대가이기도 한 허자장은 매월 초하루 (월단)에 인물 비평 강좌를 열어 대단한 호평을 받고 있었다. 지금도 인물평론을 가리켜 '월단', 혹은 '월단평'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젊었을 때, 조조는 연줄을 대어 허자장에게 운세를 물어본 일이 있었다. 이 대가는 조조를 한번 언뜻 보더니, '그대는 치세의 능신이고, 난세의 간웅일세' 라고 평했다. 세상이 안정되어 있을 때라면 유능한 신하이지만,

일단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나쁜 꾀가 많은 영웅이 된다는 것이었다.  

간웅이란 단순한 영웅도 예사로운 악당도 아니다. 권모술수에 능하고 평범한 사람을 솎여서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는 강렬한 개성의 소유자를 말한다. 중국의 3천년 역사에서 이 평언에 꼭 들어 맞는 인물은 첫째로 조조이고, 둘째로는 모택동일 것이다.  

이 세가지의 조건이 강렬한 지도력을 발휘시킨다.

예전 중국의 민중들 사이에서는, 조조는 정평난 악인으로 여겨 졌었다. 예를 들면, 경극에서 조조역의 얼굴 분장은 흰색으로 바탕칠을 한다. 경극의 전통적인 색채 감각에 따르면, 납빛에 가까운 흰색은 사악의 상징이다. 이와는 반대로 관우는 빨강, 장비는 검은 빛깔이 바탕색으로 되어 있다. 빨강은 충성심, 검은 빛깔은 사나움을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조조가 중국 민중에게 나쁜 지혜에 뛰어난 난세의 간웅으로 취급되는 것은 주로 나관중이 쓴 역사소설 <삼국지연의>의 덕분이다. 나관중은 명나라 시대의 작가인데, 촉나라의 제왕 유비가 한나라 왕실과 같은 유씨 성을 따른데서 촉한을 정통파로 하고, 위나라의 조조는 신하의 신분으로서 황실을 배반한 불충한 자로 해석하였다.  

이때문에 촉나라의 사람들은 예를 들어 유비, 제갈공명, 관우, 장비 등은 모두가 인, 의, 예, 지, 신, 그 위에 용기까지 갖춘 정의의 선비로 그려지고, 라이벌인 위나라 쪽은 조조를 비롯한 일족의 무리들이 모두 피도 눈물도 없는 사악한 사람들로 그려지고 있다.  

행인지 불행인지 <삼국지연의>는 수백년래의 초 베스터셀러로서, 중국에만 그치지 않고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한자문화권의 국가에도 미치고 있다. 때문에 이들 나라의 민중들은 조조라 하면 곧 '아, 그 악독무도한 간웅 말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역사에 밝은 학자나 문인들 사이에서는 조조는 천하를 통일한 지조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예컨데, 북송의 대표적인 시인 소동파, 남송의 유학자 주자, 근대 중국 작가의 최고봉이라고 불리우는 노신 등은 모두가 조조를 높이 평가하였다. 현재의 중화 인민 공화국에서는 조조를 용맹 과감한 무인, 권모술수가 교묘한 정치가, 용병에 뛰어난 전략가, 시재가 있는 통치자로 평가하고 있다.  

<삼국지연의>의 해석에 따르면,  
정립 (셋이 서로 팽팽히 맞섬) 하고 있던 삼국은  
'위나라 - 하늘의 때를 얻었다. (기회)'  
'오나라 - 유리한 지형을 얻었다. (장소)'  
'촉나라 - 사람의 화합을 얻었다. (팀워크)' 로 구분된다.  
원래 이 사고방식은 <맹자> (공손축 편저) 의  
<天時 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에 의거하고 있다.  

실제로는 세사람의 지도자 중에서 조조의 리더쉽 솜씨가 가장 뛰어 났다. 천시, 지리, 인화의 세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었으므로 해서 위나라가 결국 천하를 거머쥐게 된 것이다.  

맹자의 이 장의 논리도 일국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위정자는 '화합'을 중시해야 함을 강조한 것으로서 기계적으로 기회, 장소, 팀워크라는 세가지 요소의 장단점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천하를 다루는 것은 결국 아수라장이기는 하나, 남자 본연의 대사업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러한 큰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기회, 장소, 팀워크가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조건이 되는 셈이다. 전국 시대에 있었던 천하를 제패하기 위한 싸움은 현대 사회의 비지니스의 싸움과도 상통한다. 비지니스 사회에서 큰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이 세가지의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는가 하는 것이 키포인터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02. 만사를 제치고 올라서는 '장래가 두려운 남자'의 행동방식

자신의 명령을 철저화 하기 위해서 조조는 무엇을 했는가?  

집에서 감당할 수 없는 망나니꾼이 되어 버린 조조는 18세가 되자 조정으로 나아 갔다. '과거'라는 관리등용제도가 아직 없는 시대여서, 조정에 출사하기 위해서는 연줄이 필요했다. 환관 조등의 손자인 조조에게는 이 연줄이 있었던 것이다. 한나라 영제의 희평 3년 (174), 조조는 즉시 '랑'에 임명되었다. '랑'이라는 것은 엘리트 코스의 유자격 관리이다.  

후한의 유자격 관리의 임명제도는 각 지방에서 한 해에 한 명씩, 효렴 (효행을 하며 마음이 깨끗한 자) 한 청년을 추천받아서, 그들을 우선 '랑'에 임명하는 제도였다. 형식상 조조도 효렴한 자로 추천된 것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망나니꾼이며 천하의 방탕아가 효렴이라 하니, 이 추천제도도 연줄과 가문 여하에 달려 있었던 모양이다.  

임관한 이듬 해에 조조는 그 무예와 병법의 지식을 인정받아, 낙양현의 현위로 승진했다. '현위'란 경찰서장과 판사를 겸한 직책으로, 무장한 부대를 지휘하여 그 현의 치안유지를 담당하는 동시에 범죄자를 처벌하는 권한을 가지는 관리이다.  

그무렵, 한나라 왕조는 재해, 전염병, 농민봉기, 도적단, 외적의 침략이라는 난문들이 겹쳐진 위에 재정의 위기로 말미암아 국력이 극도로 피폐해져 있었다. 도읍지를 한걸음 나서면 조정의 위력은 미치지 않았고, 소란스럽기가 그지 없었다.  

그런 위험한 세상에서 무력을 쥐고 있는 공안부대의 지휘관, 게다가 사법권까지 갖는 현위라는 관직은 대단한 것이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지방장관 (현령) 보다도 무서운 지위였다. 젊고 야심에 찬 조조에게 있어서 이 요직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낙양현에 부임하자 조조는 곧 사방의 문을 개수하고, 문의 좌우에 떡갈나무로 만든 굵은 몽둥이를 세워 두었다. 그리고, 성문 출입에 관한 공안조령을 써서 높이 붙여 놓고, 이를 위반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고 공고하였다.  

얼마지나지 않아, 어차피 대단치 않을 것이라고 깔보고서, 조령을 위반하는 자가 나왔다. 그러자 조조는 성문 옆에 세워 두었던 떡갈나무 몽둥이로 위반자를 때려 죽였다. 그 이후에는 법을 어기는 자가 생기면 부하에게 명령하여 모조리 박살을 내었다. 상대가 얼마나 유명한 인물이건, 권력자의 자제이건, 지방의 호족이건 간에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뒤에서 손을 쓰든가 하면, 그 사람마저 처벌하였다. 부임한 지 수개월 만에는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던 고관의 숙부도 한밤중에 성문을 기어 오르려다가 박살을 당하였다.  

"어처구니 없는 놈이 나타났구나 ....!?"  

사람들은 새로 부임한 현위의 준엄함에 벌벌 떨었다. 그리고, 그 이후 낙양현에서는 경솔하게 공안조령을 어기는 사람이 없어 졌다.  

'뭔가를 하는 남자'는 여기가 다르다.

모난 돌이 정맞는 법이다. 공정 준엄만으로 경찰장관을 감당해 나갈 수 있었다면, 한나라 왕조는 그렇게 부패한 끝에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청년장교 조조의 엄정하기 그지 없는 자세는 민중이나 병사의 지지를 얻었지만, 한편으로는 조정의 고위 관리들에게 반감을 샀다.  

비슷한 일이 현재의 사회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공정하고 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며,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민중의 편에 서는 사람. 예를들면, 쾌걸 조로와 같은 인물은 일종의 이상상으로서, TV나 영화에는 등장하지만, 현실의 정치에서는 좀체로 존재하기가 어렵다.  

민주주의가 정착된 선진 국가라면 몰라도 전제주의 국가나, 전체주의적 국가, 또는 독재자가 군림하는 사회에서는 이런 종류의 공정의 싹은 반드시 잘리워 지고 마는 법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이롸 같은 공정의 싹을, 그대로 나라를 지탱하는 교목으로 키우려는 것이 민주사회의 민중운동이라 하겠다.  

고관들에 있어서 점차 방해자가 되기 시작한 조조는 2년 후에는 낙양현에서 멀리 떨어진 돈구현의 지사로 전출되었다. 형식상으로는 영전이었다. 허나 기실은 '공손히 따돌림을 당했다.' 는 것이 진상이다.  

돈구의 현지사가 되어서도 조조는 다름없이 엄정하고 신상필벌의 행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도읍지인 낙양과 달리, 억지를 부리는 고관의 패거리들이 없었기 때문에 일하기가 쉬웠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민중들 사이에 돈구의 젊은 현령님은 능란하고 공평하다는 소문이 나 돌았다. 어느 사이에, 돈구현이 하북과 하남 일대에서는 모범적인 현이 되었다. 이 평판은 이윽고 조정에도 알려 졌다.  

그후, 곧 조조는 다시 조정에 차출되어 의랑으로 임명되었다. 의랑이라는 것은 천자의 자문역이며, 조의에 참석할 수 있는 요직이다. 젊은 나이로 이 지위에 취임한 것은 조조라는 사람이, 장래가 두려운 점은 있으나 그 실행력과 용기가 대단하다는 점이 인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후생가외 (後生可畏)' - 앞으로 발전해 나아갈 젊은 사람은 그 장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만큼, 함부로 대해서는 아니 될 두려운 존재.  

<논어>에 있는 이 말은 원래는 다음 세대를 칭찬하는 말이다. 그 반면에 '장래가 두렵다.' 는 뜻도 지니고 있다

 

03. 거부된 지도자, 요구된 지도자 - 황건적의 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카리스마적 결합력'

강대한 한나라 왕조를 멸망시켰던 중요한 단서는 '황건지란'이라고 불리우는 농민 봉기 운동이다. 동시에 이 동란은 풍운의 뜻에 불타는 영웅 호걸이 천하로 진출하는 기회가 되어, 그럭저럭 통일되어 있던 국가가 분열하여 서로 싸우는 난세의 개막이 되어 지기도 했다.  

황건의 난은 후한의 영제 주평 원년 (184년) 에 발발했다. 여러해 동안 쌓인 수탈과 기근 때문에 파산한 화북의 농민들은 화북의 농민들은 장씨 형제를 우두머리로 하여 하북, 하남, 산동의 8개 현에서 일제히 봉기하였다.  

교조인 장각, 장량, 장보의 삼형제는 특수한 주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부적을 뛰운 물을 마시게 하고, 주문을 외우면 이상하게도 병이 나았다. 극도의 불안에 떨며 굶주림과 전염병에 시달리는 가난한 농민들 사이에서 장씨 형제는 구세주로서 모셔지고, 신자는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불어 났다.  

당시, 조정은 고관과 환관과의 권력 싸움의 장소로 변해 있어, 파산한 농민의 문제 따위는 위정자들의 안중에도 없었다. 장씨 형제의 종교조직은 그러한 정치적 불안 속에서 수십 만명으로 팽창하고 있었다.  

봉기에 앞서 장각은 이런 노래를 유행시켰다.  

"창천 (蒼天 - 한나라 왕조)은 이미 죽었네.    항천 (黃天 - 농민)아! 일어서자. 때는 바로 갑자년일세."  

봉기한 농민들은 황색을 자신들의 심벌 컬러오 하고 있었다. 신성한 황색의 헝겊이 있으면 칼로 잘리워도, 화살이 꽂혀도 죽지 않는다고 믿은 농민들은 전투시에는 반드시 황색의 헝겊으로 된 머리띠를 동여매고 기세를 올렸으므로 '황건적'이라고 불리운 것이렀다.  

종교로 지탱되는 민중폭동이 과학적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적이나 교의를 유대로 단결된 것은, 동서고금에 공통된 현상이다. 태평천국군, 백련교도, 권비, 홍창비 대도회 등, 청나라 말기의 종교 폭동이나 민중봉기는 모두 이런 종류의 카리스마적인 결합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를 애먹인 '일향종'의 폭동도 이런 종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호메이니 종사가 이끄는 이란혁명에서도 이러한 종교적 결합이 간과할 수 없는 요소로 여겨지고 있다.  

생활을 지키기 위해 궐기했고 게다가 종교적인 유대를 결합의 원천으로 삼는 빈농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 기세는 강대하여 썩을대로 썩은 관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솟아오른 불길은 바로 요원의 불길처럼 순식간에 화북일대에 번졌으며 도읍인 낙양에도 미치게 되었다.

인간의 성쇠에도 이유가 있다.

놀란 조정은 즉시 중신회의를 열고, 황보숭을 좌군사령, 주준을 우군사령으로 임명하여 토벌군을 급조 편성해서 황건적과 싸우도록 명했다. 이때, 관군에 참가한 것이 나중에 중원에서 사슴을 쫓던 삼국의 영웅들이다.  

조조는 황보숭 군대에, 유비, 관우, 장비의 삼형제는 주준의 군대에 참가했다. 그밖에도 하북의 명문 원소, 원술, 산서의 용맹한 영웅 동탁, 강남의 용장 손견 등도 모두 각 부대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조조는 전쟁터에서는 항상 붉은 갑옷을 입고, 붉은색의 군기나 작은 깃발을 등에 꽂고 있었다. 황건적의 노란빛 사람들 속에서, 진홍빛의 젊은 무사의 활동은 눈부셨으며, 드디어는 '관군에 조조가 있다."는 소리가 전선에 울려 퍼졌다.  

종군한 영웅들의 분투도 있었고, 장비와 기동력이 나은 관군은 곧 기세를 만회하여 각지에서 황건적을 물리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천공장군 장각이 전사하여, 지공장군 장보와 인공장군 장량의 두사람이 뒤를 이었으나, 동생들에게는 형과 같은 카리스마적인 마력이 없어, 반란군의 기세는 점차 약화되어 수년 후, 몹시 창궐하던 황건적도 평정되었다.  

하나의 왕조의 불이 꺼질 때에는, 그 종말을 촉구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것을 처리하기 위해서 초야에서 현인 영걸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사건은 해결되는데, 이번에는 그 해결에 공을 세운 영웅들이 기성정권을 쓰러뜨리는 혁명가로 변신한다. 이것이 역사의 법칙인 것 같다. 한나라 왕조, 황건지란, 토벌관군에 참여한 영웅들은 이 삼자의 전형이다. 단지 중국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도 마찬가지고, 일본에서의 명치유신도 이와 똑같은 현상이다.  

국가뿐만 아니라, 기업의 성쇠에도 이 원리는 해당된다. 최근 일본에서는 자주 '기업 생명 30년 설'이 나돌고 있는데, 한 기업의 성쇠는 분명히 30년 정도를 주기로 하고 있다. 아무리 큰 기업이라도 30년이 지나면 전환기를 맞이 한다.  

경영환경, 경제의 성쇠, 국제관계, 사회풍조 등을 보아도, 백 년이고 이백 년이고, 같은 상태로 발전하는 기업이란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전환기에 선 기업의 생사 여부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그때에 삼국시대의 영웅이나 명치유신의 지사와 같은 낡은 전통과 무사 안일주의의 경영을 근본적으로 병혁시키는 혁명적인 인재의 유무에 따라서, 그 기업은 한층 더 발전하느냐, 아니면 용두사미가 되어서 멸망하느냐가 결정되어 지는 것이다.

 

04. 고양이를 쫓아내기 위해서 마당에 호랑이를 집어넣지 말라.

집안 싸움에 외부 세력을 이용하지 말라.  

황건의 난이 수습되자, 조조는 논공행상에 따라서, 노서 (현재의 재남) 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곳에서 더 엄정하고 준열한 정치를 베푼 조조는, 업적을 평가받아 다시 하북성의 태수로 임명되었다.  

황건의 난은 일단은 수습이 되었으나, 한나라 왕실의 위엄은 여전히 미치지 못했다. 궁중에서는 환관 (내시) 들이 판을 치고, 고관들은 권력싸움에 분망하여 정치는 극도로 피폐해지고 있었다.  

그 무렵, 상층부의 무능과 부패에 불만을 품은 중견 관리들이 결속하여 혁명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중평 5년 (188년), 기주의 장관 왕분 등이 의결하니, 황제가 하북성으로 행차한 틈을 타서 근위부대를 습격하여, 지금의 황제인 영제를 몰아내고, 환관과 황후인 하씨 일족을 일망타진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왕분의 동료 가운데 주 라고 불리우는 패현 출신의 장교가 있었다. 주는 동향이라는 친분으로, 이 혁명에 무용의 명성이 높고, 더구나 하북성의 군권을 쥐고 있는 조조를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의 참여를 요청하였다. 주의 설득에 조조는 이렇게 답하였다.  

"황제의 추방을 계획하다니 대단한 배짱이다. 나는 황제에게서 은덕을 입은 일이 없으며, 더욱이 하진 (황후의 오빠. 원래는 고깃간 주인에 불과했으나, 여동생이 황후로 들어가자 궁중의 실권을 제멋대로 쥐고 흔들었다.) 이나, 환관에게는 아무런 의리를 지킬 일이 없다. 지금과 같은 정치가 계속되는 한, 한나라 왕조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때문에 자네들의 의기도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그 계획에 참여하지 않겠다. 그런 엉뚱한 행동은 상당한 준비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는 것인데, 자네들의 준비는 만전을 기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몰락했어도, 한나라 왕실에는 아직 강한 힘이 남아있다. 유감스러우나 자네들의 계획은 실현될 수 없다고 생각되네"  

과연 왕분 일당들의 계획은 정부측에 사전에 발각되어, 주모자들은 자살을 하거나 체포되어서 죽임을 당하거나 했다.  

하북성의 태수에서 조조는 또 다시 낙양으로 소환되어, 근위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거기서 조조는 다시 한번, 어느 정치적 책동에의 가담을 권유받았다.  

중평 6년 (189년) 영제가 병으로 죽고, 그의 아들 유변이 불과 17세의 나이로 뒤를 이었다. 매부인 영제가 죽고 나니, 자신의 위치가 위태롭다고 생각되었는지 고깃간 출신의 재상 하진은 궁궐 안의 환관들의 세력을 일소하려고 결심하여, 지방의 군벌들과 젊은 장군 들에게 협력을 구하였다.  

이때, 조조는 이렇게 말하며 하진에게 반대를 하였다.  

"환관이라는 것은 옛부터 있어왔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필요한 존재입니다. 무력이 없는 그들을 진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일부러 각지의 무장들을 도성으로 불러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고양이를 쫓아내기 위하여 호랑이를 마당에 집어넣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하진의 음모가 전해지자 먼저 영제의 미망인인 황태후가 분노를 표시했다. 황태후도 지방의 군세를 도성으로 불러 들이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한편, 환관들은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우선 하진을 죽여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황태후에게 부탁하여 하진을 궁궐로 불러 들였다.  

육친인 여동생의 부름에, 하진은 아무런 의구심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내전을 찾았다. 그랬더니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자객에게 피습되어 눈깜빡하는 사이에 목을 잘리우고 말았다.  

그때, 궁궐 밖에서는 하진의 부름을 받은 원소 등, 지방의 여러 장군 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혈기에 찬 청년 장교들은 궁궐 안에서 내어 던져진 하진의 목을 보고 흥분하여 궁중으로 들이 닦쳤다. 그 후부터는 처참한 아수라장이 계속된다.  

궁중으로 돌입한 병사들은 환관을 닥치는 대로,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참살하였으며, 늑대가 되어 궁녀들에게 덤벼 들었다. 참살, 폭행, 약탈, 생지옥으로 변한 궁궐에서 황제와 그의 동생인 진류왕 만은 간신히 성 밖으로 빠져 나갔다.  

때마침 성 밖에 있다가 황제와 진류왕을 보호항 것이 산서의 군벌인 동탁이었다. 동탁은 황건적을 평정한 공으로 서량의 장관이 되어 있었는 데 하진의 격문으로 병사를 이끌고 상경하여, 한걸음 늦게 낙양성 밖에 도착하였다가, 이때 피난해 온 황제의 일행을 만난 것이었다.  

동탁은 선천적으로 난폭하였고, 게다가 힘이 세었다. 완력이 강하여 활집을 말의 양쪽에 달고 달리면서 좌우 어느 팔로도 쏠수가 있었다. 더욱이 그것이 백발백중하므로, 전쟁터에서 자주 그런 아슬아슬한 재주를 보여 적군의 간담을 서늘케 만들었다.  

황제를 받든 동탁은 니 호기를 놓치지 않고, 거기서 곧장 궁궐로 들어가 순식간에 도성을 제압하고, 궁정의 권력을 일신에 모았다. 어느덧, 궁정의 안팎을 막론하고 도성에서는 동탁파가 아니면 사람 축에 들지를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바로 조조가 말했듯이, '고양이를 내쫓기 위해서 호랑이를 마당에  집어 넣은' 결과가 된 것이다.

'힘'에 대하여 정면 충돌을 해서는 안된다.

민주주의에 익숙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군인 출신의 독재자는 서로 비슷한 성격을 가지는 법이다. 무엇이나 우격다짐으로 해결하려 한다. 의논이나 설득을 몹시 싫어 한다. 성급하며 자기 본위로 개혁을 결단한다. 지성이나 도덕을 싫어한다... 등등이 그 공통된 특성이다. 타이라노 기요모리, 오다 노부나가, 진시황제, 동탁, 장개석, 프랑코, 히틀러, 스탈린, 아민, 마르코스, 박정희 등이 모두 이러한 타입의 독재자 들이다.  

언젠가 동타은 문무백관들 앞에서, 지금의 황제를 폐하고 동생인 진류왕을 새 황제로 모시겠다는 말을 꺼내었다. 현재의 황제는 몸이 약하여 나라 일을 거의 돌보지 봇한다. 한편 진류왕은 영명한 위에 지극히 건강하니, 한나라의 황제로는 이 분이 최상이라고 설명하였다.  

출석자 가운데는 근위대장인 조조도 있었다. 그 대단한 조조도 동탁의 대담한 제안에는 깜짝 놀랬다. '신하로서 황제의 교체를 주장하다니, 분수에 지나친 짓을 하는 놈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을때, 곧 궁전의 한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동탁님, 그것은 무례한 일이요. 찬탈의 야심이 있는 것이라고 오해를 받을 것이요."  

형주의 장관인 정원이었다. 이 사람은 원래 유학자 였었는데, 정의감이 강한 근황가 (황제를 위하고 나라 일에 힘씀) 로 알려져 있었다.  

"뭐라고, 그 목소리는 정원인가. 이 동탁의 성의를 찬탈이라고 부르는 이상에는 그 나름의 각오도 있으렸다."  

몹시 화가 난 동탁은 칼자루에 손을 대고, 서슴없이 장원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때, 정원의 뒤쪽에 서 있던, 키가 하늘을 찌를 듯이 커다란 사내가 정원을 감싸듯이 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 거한은 큰 창을 오른 손에 쥐었는 데, 그 자세에는 빈틈이라고는 한 치도 없었으며, 몸 전체에서는 살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동탁도 무예에 통달한 사람이라, 상대가 어느 정도의 인물인지는 잘 알 수 있었다.  

'이 녀석은 어떤 놈이지?'  

일순 주저하고 있으려니, 곁에 있던 부하 이유가 두 사람 사이에 끼였다.  

"그러한 중요한 국사는 좀더 냉철하게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오늘은 두 분 다 일단 물러나 주십시요."  

그리고 동탁에게 귀뜸을 했다.  

"나리, 상대가 만만치가 않습니다."  

이때, 정원을 감싸고 있던 사람이 여포 이다. 여포는 자를 봉선이라 하며, 출신은 분명치가 않다. 형주 장관인 정원의 수양아들 겸 보디가드 였는데, 좌우간 힘이 강한 사나이로 알려지고 있었다.  

<삼국지연의>에는 관우, 장비, 손견, 손책, 동탁, 여포, 화웅, 안량, 문추, 조운, 장료, 전위, 서황, 태사자, 정보, 황개, 주유, 마초, 위연, ... 등등, 이런바 일기 당천의 무예가가 얼마든지 나온다. 그 주에서도 어쩌면 이 여포가 가장 강했으리라 말하고 있다.  

그 증거로 언젠가 호뢰관 이라는 곳에서, 유비, 관우, 장비의 삼형제가 여포 한 사람과 일전을 벌였는데, 결국 이기지 못하였다. 유비는 별도로 하고, 청룡도를 잡으면 당대 제일이라고 불리우던 관우와, 18척이나 되는 창을 휘두르는 호용 무쌍한 장비가 동시에 달려 들어도 여포를 물리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훗날, 여포는 조조의 계략에 걸려 들어서, 술과 마취약에 취해서 깊이 잠들어 버린 동안에 피습을 당하여 붙잡히고 말았다. 이때, 괴력의 소유자인 여포는 특별히 만든 명주실로 손과 발을 묶이고, 그 위에 굵은 새끼줄로 칭칭 얽어 매여 졌다. 잠이 깬 여포가 노발대발하여 난동을 부리니 새끼줄은 끊어 쪘으나 명주실은 더욱 피부 속으로 파고들어 그 대단한 괴물도 어쩔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은 한꺼번에 두 가지 재주를 부여해 주지는 않는다. 강한 것은 힘과 몸뿐이고, 여포의 마음과 두뇌는 약했다. 그것을 기화로 삼은 동탁은 적토라는 명마와 금과 은으로 여포를 매수했다. 절도가 없는 여포는, 천리를 달린다는 명마와 큰 돈에 현혹되어, 서슴없이 양아버지인 정원을 죽이고 동탁의 편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방해자를 처치하자, 동탁은 원소 등 군신 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강제로 황제를 폐위시키고, 진류왕을 내세웠다. 그가 한나라 최후의 황제인 헌제이다.  

일개 조직의 내부 분쟁에 즈음하여, 외부의 힘을 이용하면, 반드시 행랑방을 빌려 주었다가 안채까지 빼앗기는 경우를 맞게 된다. 이것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철칙이다.  

 

05.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재치를 지니고 있는가.

절도가 없는 인간은 가치가 없다.  

조조는 재주있는 문인이나 용맹으로 이름높은 무장을 좋아했으며, 대적하여 쓰라림을 당했던 상대라도 투항해 오는 유능한 적장은 후하게 대우를 해 주었다. 그러나 여포만은 잡는 즉시로 그 목을 치고 말았다. 아무리 용맹스럽다 해도 이렇게 절도가 없으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적토마는 동탁에서 여포, 조조의 차례로 주인이 바뀌고 또 다시 조조로부터 관우에게 증정되어 오랫동안 관우의 애마가 되었다.  

헌재도 원래는 총명한 인물이 었으나,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제위에 오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스폰서인 동탁에게는 머리를 들지 못했다. 그것을 기화로 삼아 정승 겸 대장군이 된 동탁은, 독재로 나라의 정치를 하며, 제멋대로 행세를 부리면서 사실상의 왕으로 도성에 군림하고 있었다.  

동탁의 불손하기 짝이 없는 행태가, 궁정의 옛 신하와 다른 군벌의 반감을 산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중에서도 원로 대신인 왕윤은 삼대에 걸쳐서 황제를 섬겨왔던 터였으므로 동탁을 몹시 싫어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물리쳐야 겠다고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런 왕윤에게 고향으로 돌아간 화북의 명문인 원소로 부터 밀서가 보내져 왔다.  

원소는 일단 낙양으로 진입을 했었지만, 동탁의 무법과 폭거에 분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버린 것이었다. 밀서에는 동탁을 응징해야만 한다는 것, 만약 왕윤이 거병을 한다면 즉시 정예한 군대를 이끌고 낙양을 공격하겠다는 취지가 쓰여져 있었다.  

왕윤은 어느날, 생일 잔치를 한다고 하여, 옛 신하들을 집으로 불러 모아 놓고 원소의 밀서를 보이면서, 동탁을 타도할 방법을 의논하였다. 그러나, 모인 사람들은 늙은 문관들 뿐이어서, 분개하고 슬퍼할 수는 있어도, 저 강력한 동탁을 토벌하는 방안은 전혀 합의가 되지 않았다.  

마침 그때, 옛 신하 가운데의 한 사람이 조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우리들 처럼 칼자루를 쥐어본 일도 없고, 병사들을 움직여 본 일도 없는 사람들이 아무리 의논을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오. 조조를 불러서 그의 의견을 들어 보는 것이 어떻소?"  

"조조라니, 그 사람을 신용할 수 있겠소?"  

하고 왕윤이 묻자, 그 옛 신하는 대답하였다.  

"조씨 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조정의 신하이며, 조조는 기골도 있고, 경우가 밝고 도리에 어긋남이 없는 인물이올시다. 추호도 역적의 편을 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조조가 불리워져 왔다.  

왕윤의 저택으로 온 조조는, 나란히들 앉아있는 옛 신하들이 탄식과 함께 푸념들만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휼륭한 어르신네들이 많이 모여 계시면서 도대체 눈물과 푸념으로 동탁을 공략하실 생각이신가요."  

하고 빈정거렸다.  

왕윤을 비롯한 무리들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제야말로 이 조조에게 맡겨 주십시요. 마침 소인은 동탁으로 부터 효기교위 (기습부대 사령관)로 임명할 테니 와달라는 청을 받고 있습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가서 놈을 박살내겠습니다. 왕윤께서는 유명한 보도를 가지고 계셨지요? 그것을 빌릴 수 없겠습니까?"

어떠한 경우라도 냉정하게 대응할수 있는 담력을 지니고 있는가?

왕윤에게서 명도를 빌려받자, 조조는 다음 날 아침 동탁의 저택으로 문안을 갔다. 바로 그 때, 동탁은 아직도 잠자리에 있었다. 그 곁에는 보디가드인 여포가 지키고 있었다.  

'이 녀석이 골치거리로군'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동탁이 큰 소리로,  
"오! 맹덕인가, 사령장을 받으러 빨리 오라고 했는데, 꽤나 늦었군."  
"네, 소인에게는 좋은 말이 없어서, 효기교위라는 영예로운 직위를 주시는데 비루먹은 말을 타고 오기에는 황송하옵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까지 말을 찾느라고 본의 아니게 늦어 졌습니다."  
"그래 좋은 말이 있던가."  
"그게 어디, 그리 쉽게 있겠습니까."  
"뭐야, 그 정도의 일을 가지고, 빨리 말할 것이지. 나는 고향인 산서에서 좋은 말을 많이 가지고 왔지. 봉선아, 마굿간에 가서 적당한 말을 한 필 찾아오너라."  
방을 나서는, 바윗돌처럼 듬직한 여포의 등을 바라보면서 조조는 마음 속으로,  
'됐다, 지금이 찬스다...'  
거대한 체구에 몹시 살이 찐 동탁은,  
"거기서 잠시 기다리고 있게."  
하면서 침대에 누운채 등을 돌렸다. 그 순간, 조조는 허리에 찬 명검에 손을 대었는데, 그 보다도 빨리 동탁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맹덕, 무슨 짓인가!"  
과연 무술에 단련된 동탁인지라, 전날 밤 잠을 안 자고 여색을 탐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허점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차, 큰 일 났구나 ...'  
하고 생각했으나, 그 점은 역시 조조라서 얼굴색 하나 변함없이 무릎을 꿇고 앉으며 칼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이번에 큰 은덕을 베풀어 주신 위에, 명마까지 하사해 주시니 황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것은 조씨 가문에서 대대로 물려 오는 명검이온데, 감사의 뜻으로 정승님께 받치고자 하오니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동탁은 그 검을 받아 손에 들고 들려다 보았다. 과연 대단한 명검이었다.  
그 때, 여포가 들어 왔으므로, 조조는,  
"천천히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이에 소생은 말을 시승해 보겠습니다."  
라고 말을 하고는, 마당으로 나서 여포가 끌고 온 말을 집어타고는, 채찍을 한 번 휘두른 후에 서둘러 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무래도 상황이 좀 이상스럽다고 느낀 동탁이 곧 부하를 시켜서 알아 보니 조조는 자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막바로 낙양성 밖으로 도주해 버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놈이 그러니까 나를 죽이려고 왔었던 게로구나 ...!'  
진노한 동탁은 즉시 체포령과 인상착의를 적은 문서를 전국에 돌리고 조조의 목에 순은 천 냥의 상금이 걸리었다.  
경극의 공연물 가운데 하나인 '착방조'라는 것이 있다. 이를테면 유명한 고전극인데,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후의 조조의 일련의 행동을 테마로 한 것이다. 조조라는 인간의 임기응변의 모습, 침착성, 용기, 잔학성, 자기 중심주의 등을 엿 볼수 있는 공연물로서 중국의 대중들의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南史, 梁宗실전>에 ' 吾自臨機制變, 勿多言' (오자임기제변, 물다언)이라는 말이 있다. 무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군병을 다스리는 마음가짐을 말한 것인데, 곤경에 처했을 때 침착성을 잃지 않고 임기응변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은 전쟁 뿐만이 아니다.  

일상적인 비지니스에서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객관의 정세는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천변만화하는 시대에 있어서는, 언제 어떠한 돌발사고가 일어날지 예측하기가 어렵다. 어떤 때라도 당황하지 말고, 현재상황에 따라 대처한다. 그것이 비지니스 전쟁을 이겨내는 요령이기도 하다.

 

06. 항상 냉철하게 '일'을 실행할 수 있는가.

한번 나쁜 일을 시작한 바에는 끝까지 (이렇게까지 냉철해 질수 있는가.)

운좋게 낙양을 빠져나온 조조는, 변장을 하고 곧장 고향으로 향했다. 그런데, 운이 나쁘려니, 개봉에 가까운 현성에서 붙잡혀, 형령 앞으로 끌려 나갔다. 이미 이 지방에도 인상착의서가 나돌았던 것이다. 현령은 진궁이라는 사람으로서, 전에 낙양에서 근무한 바가 있었다. 때문에 조조의 얼굴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대는 조맹덕님이시지요. 보시오, 이처럼 체포령과 인상착의서가 와 있습니다."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체념한 조조는 ,  

"누군가 했더니 진궁이 아닌가. 후배인 그대에게 붙잡힌 것도 무슨 인연인 게로군. 자네 하고픈 대로 처형해 주게."  

"아닙니다. 실은 소인도 동탁의 못된 소행에는 분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선배님의 이번 의거에 대해서는 오히려 경의를 표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진궁은 조조의 포승을 풀어주며, 자신의 일을 버리고 행동을 같이하고 싶다고 제의하였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지금의 안휘성 근처에까지 이르렀다. 여기까지 오면, 조조의 고향인 패현이 멀지 않다.  

"이 지방에는 나의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은 여백사 라고 하는 유력자가 있는데, 그 사람을 찾아가 보자."  

두 사람은 여씨의 집을 찾아갔다.  

"여, 맹덕이 아닌가. 잘 도망쳐 왔군. 벌써 이 지방에도 자네 문제가 알려져 있는데, 어찌된 일인가 하고 내심 걱정하고 있던 참일세."  

여백사가 기꺼이 맞아 들이면서,  

"오늘 밤은 밤새도록 마셔보세. 나는 이웃 마을에 가서 좋은 술을 사 가지고 올테니, 우선 좀 쉬고 있게나."  

조조와 진궁은 하라는 대로 방에서 쉬고 있었는데, 여백사가 좀체로 돌아 오지를 않았다. 술을 사러 일부러 이웃 마을까지 가는 것도 이상하다 하고 있던 차에, 집 뒤쪽이 갑자기 소란스러워 졌다. 여러명의 남자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면서,  

"빨리 잡아서 죽여라, 도망치잖나!"  

라고 불온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그 순간, 조조는 허리에 차고 있던 큰 칼을 빼어들고 뒷마당으로 쫓아나가 불문 곡직하고 거기에 있던 다섯 명의 남자들을 베어 죽였다.  

"손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아들 녀석들이 돼지를 잡으려고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몹쓸 일이!!!"  

하며, 여백사의 아내가 대성통곡을 하였다. 찬찬히 둘러보니, 정말로 돼지가 한 마리가 나 뒹굴고 있었다. 조금 전의 소란은 돼지를 잡으려고 그랬던 것이었다.  

"맹덕님, 너무 성급하게 일을 벌리셨군요."  

진궁은 벌벌 떨고 있었다.  

"아차, 나라는 놈이, 잘 확인도 하지 않고 ..."  

조조도 입술을 깨물면서 후회를 했지만, 금방 타고난 냉정함을 되찾아 칼자루를 고쳐 쥐고, 그곳에 서 있던 여백사와 아내와 두딸을 모조리 죽이고 말았다. 그 번개처럼 재빠른 솜씨에 옆에 있던 진궁도 말릴 틈이 없었다.  

"뭣하는 짓입니까?"  

얼굴색이 창백해진 진궁이 책망을 하자,  

"이 바보야, 죽이려면 다 죽여야 뒤에 탈이 없지 않겠는가. 자, 어서 도망가자."  

두 사람은 서둘러서 말을 끌어내어, 무인지경으로 변한 여백사의 집을 뒤로 하고,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2리 정도 갔을 때, 술독을 싣고 돌아오던 여백사와 하인을 마주치게 되었다.  

"아니, 맹덕 어쩐 일인가. 이렇게 술을 사가지고 돌아 오는 길인데."  

"아저씨, 저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져 있습니다. 폐를 끼칠 것 같으니 실례하겠습니다."  

"무슨 말인가. 이 여백사가 숨겨주는 사람은 관가에서도 간단히 손을 대지 못하네. 그쯤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매정한 소리 말게나."  

"그렇습니까. 그러면 호의를 받아 들려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길을 비켜섰다. 여백사가 앞으로 나가는 순간, 조조는 언제 칼을 빼었는지, 여백사를 죽이고 그 칼을 돌려 하인까지도 베고 말았다.

남을 배반해도 남에게 배반당하지 말라.
  
불과 30여 분 사이에 남녀 열 사람을 죽여서, 날이 형편없이 되어 버린 칼을 빼들고, 악귀처럼 가로막아 서는 조조의 모습에 진궁은 기겁을 하며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맹덕님, 당신은 정말로 무서운 사람이올시다. 먼저 일은 착각을 했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다고 해도, 이것은 너무나도 끔찍한 처사올시다."  

"그대로 집으로 돌려보내면, 그저 잠자코 있지 않을 게다. 늙은이를 슬프게 할 뿐이야. 죽여 주는 것이 오히려 자비를 베푸는 것이야."  

"그런 이치도 닿지도 않는 소릴랑 그만 두시오. 사람의 목숨이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요."  

조조는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 진궁을 냉담하게 쳐다 보았다. 그리고서, 경극의 '착방조'에서 쓰이는 유명한 대사를 읊었다.  

"알겠나? 천하를 다투는 자가 비록 사람을 배반하는 일은 있어도, 사람에게 배반을 당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이 유명한 대사는, 조조가 피도 눈물도 없는 대악당이라고 불리우게 되는 원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  

그러나 비정함에 철저한 조조는, 그의 본심을 분명히 했을 뿐이므로, 이것을 나쁘게 해석하는 사람이 어중간한 감상주의에 빠져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권모술수와 비정함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전국시대의 아수라장이나 정치의 세계에서는, 바로 배반을 해도 배반을 당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현대의 정치가들도 겉치레적인 말만 하지 말고, 조조와 같이 태도를 분명히 하는 편이 정직해서 좋을지도 모르겠다.  

조조의 비정함에서 현대인은 하나의 교훈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일이라는 것은, 하는 이상에는 철저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중간한 것이 가장 나쁘다.' 라는 것이다.  

살인은 극단적인 예이지만, 기업이 하나의 프로젝트를 수행함에 있어서도,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은 하나의 정책을 실시하는 데에 있었어도, 철저하게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자세가 중요하다.  

행정 개혁이나 교육 개혁이나, 또는 무역 마찰의 완화를 위한 행동 계획에 있었어도, 현재 대다수 위정자들이 하는 일에는 예외와 비고가 많기 때문에 항상 용두사미로 끝나는 것이다.  

한때 유행했던 '퍼포먼스'는 예술의 세계에서 만이 아니라, 실제의 삶 속에서 살려야만 할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정쩡한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07. 우유부단을 버려라, 결단 뿐이다.

스스로 나서는 자에게 승리의 기회가 주어진다.  

너무나 냉혹함에 두려움을 느낀 진궁은, 도중에서 조조와 절교하고 각각 개별적인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조조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하는 편이 오히려 홀가분 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조조는, 곧 타도 동탁의 깃발을 올리게 된다.  

초평 원년 (190년), 화북 일대의 영웅 군벌들은 일제히 동탁 토벌의 깃발을 들었다.  

화북에서 제일가는 명문가의 자제이며, 발해의 태수가 되어있던 원소는 하북, 그의 사촌으로 예주의 태수인 원술은 하남, 병법가 손자의 후손인 손견은 개봉, 백마대를 편성하여 관외의 이민족들에게서 '백마장리'라고 두려움을 받고 있던 공손찬은 선서, 기주의 태수 한복은 업 (하남의 북부), 제남의 태수 포신은 산조 (하남과 산동의 경계)에서 군병을 일으켰다.  

각 부대는 연합군을 조직하고, 총대장에는 이름이 알려진 귀공자 원소를 뽑았다. 이때, 조조는 병사 5천명을 거느리고, 산조의 포신군에 참여하여 분무장군 이라는 사령을 받았다. 유비 삼형제는 공손찬의 진영에 들어가 있었다. 토벌 연합군의 세력은 20만이라고 일컬으며, 즉시 낙양을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였다.  

낙양의 독재자 동탁은, 제후들이 거병하여 행동을 개시했으며, 이미 그 선발대의 군대가 사수관에 박두했다는 연락을 받자, 곧 부하인 맹장 화웅 에게 병사 5만을 내주어 사수관을 방어토록 하였다.  

사수관 공격의 선두에는 손견이 나섰다. 강남 제일의 무장이며, 선조 대대로 병법에 통달해 있던 손견은, 조무, 정보, 황개 등의 무장들을 이끌고 맹공격을 가했으나 화웅을 당하지 못하고, 가장 믿었던 용장 조무가 자기를 대신하여 전사하니, 허둥거리며 패퇴하여 돌아왔다. 그 뒤에도 다른 부대에서 자신있는 용사가 몇 명이나 도전했자만 모두 패하고 말았다.  

'손견, 패배하다!' 라는 연락을 받은 여러 장군들은 얼굴빛이 변했다. 원소는 작전회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했으나, 화웅이 너무 강하였으므로 출석한 여러 장군들은 기세가 오르지를 않았다. 그때, 말석에 있는 유비를 따라온 털보 사내가 자신이 상대를 하겠노라고 나섰다.  

"그대는 누구인가?"  

원소가 묻는 말에 공손찬이,  

"소인의 부하, 유비의 부관인 관우라 하는 자올시다."  

바로 그때, 총대장의 사촌인 원술이 큰소리로 꾸짖었다.  

"삼가하라, 지금까지 소문난 용장들이 몇 명이나 죽음을 당했다고 하는데, 듣지도 못하던 놈이 덤벼 들어서 무엇을 어찌할 참인가. 하급 무사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쫓아낼 것이로다!"  

그러자 곁에 있던 조조가,  

"잠시 기다리시오. 이 사람이 제법 자신이 있는 모양이니, 한 번 보내 보고서 패배하고 돌아오면 그때에 가서 쫓아내도 되지 않겠소."  

라고 말리면서, 관우에게 따끈한 술 한 잔을 권하였다.  

"곧 돌아올 것이니, 술은 돌아와서 마시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간 관우는, 얼마 안되어 적장 화웅의 목을 베어서 들고 들어왔다. 조금 전에 조조가 권하던 따뜻한 술이 식을 사이도 없었다.

복합세대가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이유

낙양의 동탁은 화웅이 패배했다는 급보를 받고 동요하였다. 응원군을 사수관으로 보내는 동시에 여포에게 3만의 군사를 주어서, 호뢰관의 수비를 견고히 하게 하며, 낙양을 버리고 장안으로 도읍을 옮길 계획을 세웠다. 이때, 유비들 삼형제가 호뢰관을 공격하였으나 결국 여포를 물리치지 못하였다.  

동탁이 낙양에서 철수하여 장안으로 향할 때야말로 절호의 찬스였다. 궁정의 비전투원들을 다수 거느리고, 느릿느릿 행군하며, 여포를 비롯한 이름난 용장들은 모두 전선에 나가 있다. 기습부대를 써서 동탁의 본진을 치면, 섬멸시키는 것은 어려울 게 없을 것이다. 다시 없는 기회라고 깨달은 조조는 즉시 직속 상관인 포신을 통하여 원소에게 동탁의 본진을 습격하도록 진언하였다.  

한나라 시대, 관직의 최고 지위는 사마, 사도, 사공의 셋이며, 이를 삼공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원씨 가문은 4대에 걸쳐서 삼공을 배출한 가문으로 절대적인 파벌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 종가의 아들인 원소는, 좋은 가문 이외에 넓은 영지, 풍부한 경제력, 우수한 수하들을 거느린 청년 장교였다.  

결코 바보는 아니지만, 이러한 명문의 자제 들에게는 공통된 결점이 있다. 그것은 자칫 결단력이 둔화된다는 점이다. 현재의 정치가 중에 가문이 좋고, 엘리트 관료에서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 가운데 이런 타입이 적지 않다.    

또한, 동서고금은 불문하고 연합군이라든가, 동맹군은 병력과 장비 면에서는 단독군보다 나으나, 복합세대이기 때문에 총사령부는 통솔력이 약하다. 각 부대는 자기의 세력을 온전히 보전하기에 바쁘고, 되도록이면 남의 샅바로 씨름을 하려드는 결함이 있다.  

중세 유럽의 십자군, 제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군은 이 좋은 예이다. 노르망디 상륙의 대작전이 성공한 것은 아이젠하워 라는 작전과 통솔의 천재가 있었다는 것과, 나치스에 대한 위기감이 유럽 제국의 유대를 극한에 이르도록 강화시켰기 때문이다.  

동탁 토벌의 연합군에게는 그와 같은 강한 연대감도 없고, 맹주인 원소는 통솔력이 부족하며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다. 또 총대장의 공격 명령이 없는 이상에는 아무도 자진하여 동탁을 습격할 생각이 없다. 때문에 조조가 아무리 열심히 주장을 해도, 아무도 찬동하는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절치 부심하던 조조는 일만의 병사를 이끌고 단독으로 결행을 하여, 서쪽으로 나아가 동탁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일만 정도의 병사로는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개수 일촉 (쉽게 상대를 물리침), 조조군은 완패했고, 조조 자신도 적의 화살에 맞아 낙마하여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것을, 부하 장수인 전위의 도움으로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다.  

조조가 패하여 와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을 무렵, 원소는 유주의 장관이며, 한나라 왕실과 혈연관계가 있는 유우를 찾아 황제로 추대하여 동탁이 섬기는 헌제에 대항하려 하였다.  

여러 장군들이 모두 동조했으나 조조 혼자 그 꾀임에 빠지지 않았다. 황제를 섬기고 있는 것이 역신인 동탁이라고 해서, 정통에 대항하여 새로운 황제를 만드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계획은 결국 조조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때문에 원소는 조조를 미워했으며, 조조 역시 원소를 더욱더 경멸하게 되었다.  

전쟁, 정치, 사업의 여하를 불문하고, 일반적으로 투쟁이라는 것에는 지도자의 결단이 중요하다. 톱이 우유부단하여 정책 결정이나 행동 개시를 좀처럼 하지 않고 우물쭈물 하면, 모처럼의 기회를 상실할 뿐만 아니라, 부하는 기가 죽어 버리고 만다. 리더쉽의 최대의 위기는 톱이 우유부단한 시점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08. 강자를 쓰러뜨리기 위한 심리전쟁

강자를 타파하는 이 한 수  

조조의 패전, 주전파의 한 사람인 손견의 탈락, 거기에 톱인 원소의 무능함 때문에 연합군의 기세는 오르지 않아, 모처럼 거병했던 동탁 토벌은 실패로 끝났다.  

이러한 정세는 동탁의 전횡 무도를 더욱더 조장하였다. 장안 일대를 완전히 장악한 동탁은 변두리의 미현에 거성을 지었는데, 이 거성이 장안에 있는 궁전보다 더욱 휼륭할 정도였다.  

동탁은 평소에는 미현에서 정치를 하며, 문무백관들을 그곳으로 오게 하였다. 허수아비 헌제에게는 아무런 실권도 없어 장안의 궁궐에서 유폐된 것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동탁의 분수에 지나친 행태는 그래도 참을 수 있었으나, 한나라 왕실의 옛 신하들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은 언제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공포 정치였다.  

여하튼 동탁은 악독 무도한 위에, 여포라고 하는 끔찍한 살인 청부업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동탁은 즉시, '반역군과 내통한 혐의가 있다.' 라는 구실로 여포에게 처형을 명령한다.그러면 살인을 하는 것이 세 끼니의 밥보다 더 좋다는 단세포의 사내는, 무조건 사람을 죽였던 것이다. 헌재와 함께 장안으로 옮겨온 옛 신하들은, 이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사도인 왕윤도 역시 동탁의 무법 무도에 떨면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에 걸맞지 않게, 경골한인 그는 두려움을 느끼는 이상으로 역신인 동탁에 대하여, 끝없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낙양에 있었을 때에도 조조에게 동탁의 암살을 부탁한다든가, 지방의 군벌과 연락을 취하여 동탁 타도 운동을 추진한다든가 하였으나 일이 성취되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언젠가는 헌제도, 그리고 나 자신도 동탁 일파에게 죽임을 당하리라 ...'  

이렇게 생각하니, 안절부절 못할 지경이었다.  

왕윤에게는 초선이라고 하는 예쁜 시녀가 있었다. 원래는 서역의 여자로 어렸을 때에, 노예로 낙양에 끌려온 것을 왕윤이 사들인 아이였다. 눈이 좀 푸르고 콧날이 오똑한 이 계집아이를  왕윤은 자기 딸처럼 귀여워 하면서 키웠고, 초선도 주인을 잘 따랐다.  

그리고, 이제 나이가 18세로, 정숙하고 아름다운 숙녀의 모습에 이국적인 분위기가 보태어져, 일견 불망의 미인으로 성장하여 있었다. 왕윤은 이 미녀를 이용하여서, 동탁을 멸망시킬 계획을 은밀히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초선도 역시 존경하는 은인을 위해서라면, 몸을 희생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인간은 애증에 따라서 쉽사리 배반한다는 것을 잊지마라.
  
왕윤은 유명한 갑옷장이에게 의뢰하여 특제의 갑옷을 만들게 하여, 살짝 여포에게 전해 주었다. 이를 기쁘게 생각한 여포는 어느날, 왕윤에게 답례를 하러 갔다. 은근히 기다리고 있던 왕윤은 여포를 방으로 불러들여 술을 대접하면서,  

"여포 장군님, 이즈음 참다운 영웅이라 할 사람은 당신뿐이올시다. 당신은 정말로 장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는 없는 휼륭한 식견을 갖추고 계십니다. 우리 조정의 기둥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당신 같은 분이지요."  

하고 겉치레의 말을 늘어 놓았다. 단순한 여포는 역겨운 이 아첨을 간파하지 못하고, 기분이 매우 좋아져서 술잔을 거듭 들었다.  

적당한 시기를 가늠하여 왕윤은 손바닥을 쳤다. 그러자 아름답게 몸치장을 한 초선이 방으로 들어왔다.  

"허어...."  

너무나 아름다운 초선의 모습에 여포는 입을 딱 벌린채, 넋을 잃고 바라다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소인의 시녀올시다."  

"초선이라고 하옵니다. 잊지 말아 주세요."  

하며, 여자는 수줍음이 담긴 아름다운 눈으로 여포를 쳐다 보았다.  

"장군님, 이 몸, 초선은 힘이 센 사람을 몹시 좋아 하므로, 평소 장군님을 흠모하여 한 번만이라도 뵈었으면 하고 원해 왔었습니다."  

"허어, 정말인가."  

촌뜨기 같은 여포는 얼굴을 붉혔다. 왕윤은 빙긋이 웃으면서,  

"오늘 밤은 편히 쉬고 가십시오. 장군님을 만나게 되어 초선도 필시 기쁠 것이옵니다. 이제 젊은 두 사람에게 맡기고, 미욱한 늙은이는 이만 물러 가겠습니다."  

하고 왕윤은 눈치있게 방을 나갔다.  

다음날 아침, 왕윤은 돌아 가려는 여포를 보고,  

"어떠셨습니까? 초선이 마음에 드셨는지요?"  

"고맙소. 감격적인 하룻밤을 지내었소."  

"마음에 드신다면 평생에 배필이 되어 주셨으면 하는데, 어떠실런지요."  

"허어, 그것은 바라지도 못했던 행운이군요. 그리된다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당신의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해드리겠소이다."  

"그러시다면, 가까운 장래에 길일을 택하여 혼례를 올리도록 하시지요. 모쪼록 언제까지나 사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소."  

회색이 만면해진 여포는, 커다란 체구를 굽히며 몇번이나 사례의 말을 되풀이 하였다.  

며칠 후, 왕윤은 이번에는 동탁을 자신의 저택으로 초빙하여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문관의 집에 오는 것이었으므로, 그날, 동탁은 보디가드인 여포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 좋은 술과 안주에 흡족해 하며 기뻐하는 동탁의 곁을 문득 말할수 없이 아름다운 여인이 지나갔다. 동탁의 취한 눈에 비친 것은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저 아이는?"  

"예, 정승 대감, 소인의 시녀로 있는 초선이라는 아이올시다."  

"그래. 참 어여쁘구나! 마치 선녀 같구려. 나는 난생 처음으로 저런 미인을 보았네."  

수줍어 하고 있는 초선을, 동탁은 억지로 옆에다 끌어다 앉혀 놓고,  

"어떤가, 이 아이를 나에게 주지 않겠나."  

"그것 참으로 황송하신 말씀을. 마음에 드신 것만 하여도 더 없는 영광이온데, 다만..."  

"무엇이냐?"  

"이 아이에게는 이미 정해진 사람이 있습니다."  

"정해진 사람이라니? 그런 것은 아무래도 괜찮다. 아니면 달리 휼륭한 남자가 있으니까, 내 말은 못 듣겠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당치도 않습니다. 실은 이 아이는 여포 장군께 드리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뭐, 여포에게..."  

동탁은 커다란 배를 움켜쥐고 껄껄 웃으대면서,  

"여포에게는 내가 말을 할 테니 상관없네. 쇠뿔도 단김에 빼란다고, 지금 곧 데리고 가겠네."  

그렇게 말하면서 초선을 껴안듯이 자신의 마차에 태우고, 대단히 흡족한 기분으로 돌아갔다.  

뒤에 남은 왕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됐다. 성공이다."  

며칠후, 왕윤은 여포의 숙소를 찾아갔다. 여포는 안색을 바꾸며, 애용하는 두 가닥짜리 창을 들고 왕윤에게로 덤벼들었다.  

"왕사도, 나에게 약속을 해 놓고서 초선을 정승에게 바치는 것은 대체 무슨 짓이오! 잘도 이 여포를 농락했군 그래."  

"아, 아닙니다. 감히 어떻게, 이런 늙은이가 당신 같은 용자를 속이겠소. 경위는 천천히 말씀을 드리겠으니, 그 위험한 창은 거두어 주시오."  

그러면서 왕윤은 초선이 여포 장군과 약혼을 했노라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동탁이 그것을 무시하고 강제로 끌고 가버린 것이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하였다.  

"그래, 내 여자를 강제로 빼았아 갔다구..."  

주먹을 움켜쥐며, 분한 듯이 발을 동동 구르는 여포를 향해, 왕윤은 그를 선동하는 말을 계속하였다.  

"여장군, 어떻게 해서든 불쌍한 초선을 살려 주십시오. 초선은 당신을 그리워 하면서 매일 울고 있습니다."  

수일후, 동탁은 초선을 데리고 거성인 미현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보기드문 미인에게 정신없이 빠져버린 그는 평소의 신중함을 잃고, 아주 방심한 상태에 있었다. 그는 여포의 질투와 적개심을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고, 더욱이 왕윤이 여포를 부추기고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일, 동탁은 성대한 전송을 받으며 저택의 문을 나섰다. 아버지와 딸만큼이나 나이가 차이지는 미녀를 데리고 있었다. 그녀는 초선이었다.  

"정승 대감의 이번 마님은 정말로 고웁다...."  

전송하는 하인과 군중들은 선망도 동경도 아닌 뜨거운 시선을 동탁과 초선에게 던지고 있었다. 왕윤은 여포의 귓전에 대고, 격정된 어투로 속삭였다.  

"장군, 지금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초선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알았소. 저 늙은 놈, 죽여 버릴테다!"  

질투심에 제 정신이 아닌 여포는, 급히 발걸음을 옮겨 동탁의 마차로 다가갔다.  

"아, 여포 아닌가? 웬일이냐. 이제 떠나야지."  

동탁은 거리낌없이 말했다. 이때조차도 그는 여포의 미쳐버린 눈빛을 알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곁에는 새파랗게 질린 초선이 곧 쓰러지기라도 할 듯한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수구리고 서 있었다. 그 가냘픈 모습은, 여포의 광분한 질투의 불길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어들고,  

"동탁, 감히 내 여자에게 손을 대다니!"  

"무, 무얼 하는 게야!"  

깜짝놀라서 몸을 피하려고 하는 동탁의 머리위에서, 여포의 칼이 번쩍 빛을 내자, 그의 거대한 몸집이 무너져 내렸다.  

"여포, 감히 나를 배반하다니, 이 원한은 잊지 않으리라..."  

이것이 최후의 말이 되었으며, 어깨로부터 가슴께까지 비스듬히 베어진 동탁은, 그대로 숨이 끊어 졌다. 향년 54세. 한 시대의 사납고 용맹스러웠던 영웅은 자신이 고용하고 있던 살인 청부업자에게 간단히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동탁, 여포의 초선을 둘러싼 삼각의 굴레는 하나의 교훈을 남기고 있다. 그것은 인간은 애증에 의하여 아주 쉽사리 배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여포와 같이 절조가 없고, 단순한 사람은 질투로 미치면 부모라도 죽일 수가 있다. 톱이 되는 사람은 부하의 배반을 운운하기 전에, 비록 프라이버시에 속하는 일이라도 항상 신변을 깨끗이 하는 일이 중요하다.

 

09.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사람을 어떻게 움직이는가.

부하의 좋은 의견은 주저없이 채택하라.  

동탁의 죽음은, 화북지방에서 군웅활거하는 정세를 더욱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속에서 착실하게 실력을 키운 것은 하북, 산서, 발해를 확보하고 있던 원소와 산동, 안휘, 하남의 중간지대를 근거지로 한 조조이다.  

이 양대 세력 사이에서 달랑달랑 하니 시간을 벌면서, 조그만 영토를 서로 다투고 있었던 게, 원술, 여포, 유비, 장막, 포신, 유표, 장수... 등의 여러 군벌들이었다.  

동탁은 더없이 전횡무도하기는 했으나, 조정을 받들어 모시고 강권을 발휘하고 있었으므로,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래도 한나라 왕실의 위신이 아직은 남아 있었다. 그런데, 강한 독재자가 죽자 황제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각지에서 황건적의 잔당들이 다시 날뛰기 시작하였다.  

동탁이 죽은 이듬해, 조조는 산동에서 황건적의 잔당을 토벌하고, 포로 수 만명을 영입하였다. 그의 지휘하로 들어간 이 농민부대는 '청주병'이라고 불리웠다. 농민의 장정들을 중심적인 핵으로 하여 특별히 훈련되며, 장비도 좋고 사기도 높은 이 '청주병'은 훗날 조조 휘하의 주력군이 되었으며, 각지의 전투에서 압도적인 강성을 자랑하는 정병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조조라는 남자는 냉혹하고 자기 본위이지만, 부하의 좋은 의견은 서슴치 않고 받아들인다. 그 무렵, 청주군에서 항복해온 장군의 한 사람인 모개가 이렇게 진언하였다.  

"천하를 취하려면, 다음과 같은 원칙을 필요로 합니다.  

  첫째, 천자를 받들어 모실 것. 이로써 군병을 일으켜 거사하는 대의 명분이 섭니다.  

  두번째, 농민 출신자를 병사로 쓸 것. 이로써 인심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백성의 대부분은 농민이며, 농민이야 말로 강한 병역의 원천입니다.  

  세번째, 영내의 농업을 진흥 시킬 것. 이로써 경제력을 높이며, 군비를 강화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세가지 원칙에 충실하는 한, 어르신네처럼 영명한 자질과 강대한 역량을 가지신 분은 반드시 천하의 패권을 거머쥘 수 있을 것 입니다."  

조조는 즉각 이 진언을 받아 들였다. 조조가 실시한 존왕봉제, 농업진흥, 둔전병제도, 경제력중시, 부국강병, 인재등용..... 등의 제반정책은, 천하를 거머쥐기 위한 원칙의 구현책이었다.

'조삼모사(朝三募四)'에 사람이 움직이는가 
 
산동과 하남의 경계지대에 근거지를 두고, 여러 군벌들과 싸우던 무렵은 조조에게 있어서는 숨돌릴 사이도 없이 괴로운 시기였다. 매일매일이 전투와 정치투쟁의 연속이며, 전쟁터에서 적과 벌이는 임기응변의 진퇴는 별도로 하더라도, 부하들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온정이란 일체 소용이 없고, 자기 편에 대해서도 술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때로는 냉혹 비정한 측면도 보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느 때, 조조는 거성을 적에게 포위당하였다. 성안의 식량은 날로 줄어들고 사기도 갑자기 쇠퇴하여 졌다. 조조는 군량을 관리하는 장교를 호출하여, 무슨 대책이 없겠는냐고 물었다. 그 부하가 하나의 계략을 짜 내었다.  

"되의 양을 적게 하십시다. 각 부대에 배급할 때에 그것으로 곡물을 되면, 자못 충분히 있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그렇게 하면 병사들의 불만도 적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음, 바로 조삼모사라고 하는 것이로군."  

조조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 옛날, 저공이라는 왕이 애완용 동물로서 원숭이를 많이 키우고 있었다. 아침에 세개, 저녁에 네개씩 칠엽수의 열매를 먹이로 주고 있었다. 매일매일 똑같은 방식이었으므로, 원숭이들은 그래가지고는 충분하지가 않다고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했다. 거기서 하나의 꾀를 생각해낸 저공은 이번에는 아침에 네개, 저녁에 세개씩 칠엽수의 열매를 주기로 하였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대우가 개선된 것으로 알고 조용해 졌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잔꾀를 써서 문외한이나 담당 외의 사람을 속이는 일을 중국에서는 '조삼모사'라고 하게 되었다.  

고전에 밝은 조조는 이 말을 상기하며 쓴웃음을 지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상했던 바와는 달리 곧 병사들 사이에서 총대장인 조조가 부하들을 속여서 양식을 줄이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조조는 제안을 했던 관리 장교를 호출하여,  

"이번만큼은 자네가 죽어줘야 하겠네. 그렇지 않고서는 병사들을 수습할 수가 없겠네."  

"당치도 않습니다.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보기 싫다. 살신성인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세."  

그렇게 말을 마치자마자, 한 칼에 베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서는 그 목을 진중의 여러 사람들 눈에 띄게 해 놓고,  

"이 군량 책임자는 고의로 되를 작게 하여서, 관용의 양식을 부정으로 유출하였으므로 군법에 따라 처형하였다. 우리 군대에서는 급식의 분배를 공평하고 적정하게 유지하고 있다. 여러 병사들은 상사를 믿고 동요하지 않도록 하라."  

그 이후, 병사들은 불평을 하지 않게 되었다.

분별력이 확실한 남자에게는 사람이 따른다.  

조조는 모개의 진언에 따라, 병사로 농촌 출신자를 채용하여, 농업진흥에 마음을 쏟고 있었으므로 행군할 때에도 부하들에게,  

"보리밭을 짙밟아서는 안된다. 위반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  

라고 엄명을 내렸다. 조조 자신도 밭근처를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행군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조조의 애마가 아차하는 순간에 보리밭으로 뛰어들어가, 수확을 목전에 둔 보리를 무참히 짓밟아 버리고 말았다. 조조는 군법관에게 자기가 범한 죄에 대해서 소견을 물었다. 난처해진 군법관은,  

"존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옛 말이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으나 조조는,  

"그래서는 안 된다. 규칙을 만든 사람 자신이 그것을 위반했는데도, 그것을 불문에 부쳐서는 아랫사람들에게 지키도록 할 수가 없다."  

라고 말하면서, 칼을 꺼내어 자신의 머리칼을 자르고 밭 주인에게 다액의 보상을 해 주었다.  

성격적으로는 냉혹하고 비정한 조조를 부하들이 따르는 것은, 이와 같이 항상 공사를 구분하고 솔선수범했기 때문이다.  

어느 더운 여름날, 조조의 군대는 행군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음료수는 없고, 부근에는 우물도 개울도 보이지 않았다. 갈증을 호소하며 낙오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말 위에서 그것을 보고 있던 조조는 커다란 목소리로,  

"모두들 저쪽 산을 보라. 저곳에는 유명한 살구밭이 있다. 달콤한 살구가 잔뜩 열려 있어서 갈증을 풀어 줄 것이다. 기운을 내서 나아가자."  

그 말을 듣자마자 병사들은 입 안에 침이 돌고 기운이 솟아났다. 이렇게 하여 부대는 물이 있는 곳까지 다다를 수가 있었다.  

조조가 부하를 조종하는 교묘함은 대충 이러한 상태였다. 진퇴의 묘수가 비상하다는 것, 비정한 것, 농민을 소중히 여겼다는 것, 용의 주도하다는 것, 임기응변의 묘, ... 이런 점에서도 조조와 모택동은 닮아 있다.  

모택동은 철저한 실리주의자로, 흥정을 하는 데에 능숙하며 손해를 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는 사전에 충분히 조사를 하고, 주도 면밀하게 준비를 한 다음에 행동으로 옮긴다. 이 점은 그이 저서인 '중국 혁명 전쟁의 전략문제'에서 다시금 주장되고 있는 일이다. 또, 모택동이 부하를 조정하는 술수는 교묘하기는 하지만, 뷰티부르조와적인 온정은 추호도 없다.

아무리 충실한 부하라도 때로는 서슴없이 잘라버린다. 1930년 12월에 일어난 '부전사건'으로 이립삼 계열의 당원 4천여 명을 처형한 것이나 (역주;1928년~30년 이립삼이 중국 공산당의 실권을 장악하고 극좌 모험주의 정책을 취한 것이 비판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심복이었던 유소기, 팽덕회, 주은래, 임표, 주덕, 등소평 등등, 많은 장정의 동지들에 대한 냉정한 처사 등은 그 좋은 예이다.

그 위에 모택동의 정책은 때에 따라 좌우로 크게 흔들리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경우, 무원칙하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객관적인 정세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가 출석한 중경 교섭에서의 천변만화하는 흥정은 바로 모택동식 임기응변의 모습을 충분히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서 조조나 모택동과 같은 비정한 리더는 찾아볼수 없다.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우던 일본의 마스시타 코노스케(松下行之助)는 전에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일단 유사시에는 아끼는 부하를 해고할 수 있는 것이 참다운 의미의 훌륭한 경영자이다."  

대부분 조조나 모택동과 같은 비정한 리더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고, 오히려 의리와 인정을 주로 생각하는 온정주의 쪽이 우선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비지니스계에서 어려운 경쟁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이처럼 온정이 넘치는 경영방식 만으로는 앞으로의 시대를 혜쳐 나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10. 모든 전투는 톱의 기량으로 결정된다.

수하에 병사가 적을 때에는 유격전을 노려라.  

조조가 화북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원소와의 싸움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신흥세력인 조조와 대군을 거느린 명문가인 원소로서는, 사전의 평판으로는 말할 것도 없이 원소가 유리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백마와 관도의 전투에서 원소는 조조에게 패하고 말았다.  

건안 5년(200년), 원소는 이윽고 조조와의 대결을 결의하였다. 헌제를 받들어 허(許)에 도읍을 정한 이후, 조조의 위신과 권력은 점점 높아져서, 지금은 바야흐로 역적을 소탕하는 관군의 대장군이 되어 있다. 지금 그 싹을 잘라 버리지 않으면, 곧 터무니없이 큰 나무로 성장할지도 모른다. 질투와 초조감 때문에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는 원소도 결국 궐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해, 4월 원소는 가장 신임하고 있던 안량에게 병사 20만을 맡겨서 황하의 남쪽 기슭에 있는 백마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안량은 이민족 출신의 무예가로서 기마전에 빼어난 기량을 지니고 있었다. 중국이 검법과는 틀리는 독특한 검술을 쓰고, 재빠른 몽고산 말을 몰면서 종횡무진으로 뛰어 돌아 다니는 그 솜씨에 거의 모든 사람은 목이 날아가고 마는 것이었다.  

위나라의 외성이었던 백마성은 순식간에 유린되어, 조조가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점령당해 있었다. 원소군은 병력과 장비가 모두 압도적이며 더구나 그 지휘관은 이름난 장수 안량이다. 정면으로 부딪혀서 성을 공격해 봐야 승산은 적다. 조조는 참모장인 순유의 의견에 따라 유격전을 취하기로 했다. 적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어떻게든 안량을 이끌어내서 한 판 승부를 겨룬다. 원소군 제일의 맹장을 죽이면 적의 대군은 동요하고, 그 기회를 타서 총공격을 할 것을 기도하였다.  

성 밖의 조금 높은 언덕에 진을 친 조조는, 전에 여포 아래에서 무용을 떨쳤던 송헌과 위속, 두 사람을 파견하여 안량을 도발하였다. 먼저 송헌이 안량과 한판 승부를 벌렸다. 그러나 검술과 기마술의차이는 뚜렷했으며, 송헌의 목은 안량의 손에 걸려 하늘높이 날아가고 말았다. 이어서 위속이 맞서 나갔다. 몇 차례 맞붙어 보았지만, 위속도 역시 안량에게 잘리우고 말았다.  

대장 둘이 잘리웠다는 보고에 조조는 혀를 찼다.  

'이렇게 된 이상에는 직속의 무장을 내보내자. 어떻게든 한판 승부로 저 안량 놈을 잡아 죽여야 할 텐데...'  

그래서 직속 무장이 몇 사람이나 덤벼 들었으나, 목표로 하는 상대를 쓰러뜨리는 사람은 없었다. 조조의 수하에서는 가장 강하다고 하는 서황조차도 안량의 칼에 쓰러질 뻔 하고서 패퇴하였다.

'소'가 '대'를 누르기 위한 무기는 무엇인가?

'서황, 패함'이라는 소문을 듣자, 전군이 아연 실색하였다. 타개책에 고심하고 있는 조조에게 정욱이 진언하였다.  

"장군님, 안량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그래, 그게 누구냐?"  

"장군님의 손님인 관우 장군이올시다."  

"관우! 과연 그 사람이라면 이길 수 있겠다. 그러나 관우는 나의 부하가 아니다. 게다가 그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구나."  

"이런 계제에는 별 도리가 없습니다. 이 이상 더 아군의 희생을 낼 수는 없습니다."  

즉시 도성으로 사신이 파송되었다. 관우는 조조가 보내준 적토마(이전에 여포가 타던 애마)에 올라 타고서, 언월청룔도를 드고 달려왔다.  

관우는 상객으로 대우를 받고 있었다. 배짱이 큰 조조는 관우의 재능을 아껴서 될 수만 있으면 자신의 부하로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로 포로 취급을 하지 않았다. 이 당시의 관우에 대한 조조의 대우는, 예컨데 '三日小宴, 五日大宴 - 사흘 만에 작은 연회, 닷새 만에 큰 연회'이라고 하여 고전 예술극인 경극에서 까지 이야기꺼리가 되어 있을 정도이다.  

"승상대감, 지금까지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안량의 목을 베어오리다."  

그렇게 말하고서 관우는 적토마에 올라 타고 출진하였다. 화웅을 죽이고 올 때와 마찬가지로, 곧 돌아와 안량의 목을 조조에게 바쳤다.  

"관우장군, 참으로 대단한 솜씨요. 고맙게 생각하오."  

조조는 관우의 손을 잡고 깊이 머리를 숙였다.  

후방인 황하의 북쪽 기슭에 진을 치고 있던 원소는 선봉장인 안량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곧 황하를 건너서 관도로 진출하였다. 관도는 백마성보다 더 남쪽에 있었다. 즉, 원소군은 우회하여 적군의 후방으로 나가, 조조군을 황하로 몰아 넣으려 한 것이었다. 조조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배수의 진'이었다. 그리고 이 관도의 전투가 양쪽 군대의 마지막 결전이 되었다.  

조조군의 본진을 향하여, 원소는 문추를 선두로 세워 단숨에 공격을 가했다. 문추는 원소군 안에서는 안량과 비견되는 맹장이었다. 이민족은 아니었지만 역시 기마전에 능숙하며, 특히 말 위에서 쏘는 화살은 백발백중이었다. 그는 앉아서 쏠 수 있는 작은 활과 양날 검을 가지고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는데 검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즉, 검을 맞대기 전에 적은 활의 표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추도 역시 관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유명한 명장들을 잃고, 조조군의 기습과 각개 격파의 전술로 혼란 상태가 된 데다가, 작전 지도상의 미스마저 겹쳐진 원소군은 드디어 전체가 붕괴되어 총대장인 원소는 맨몸뚱이만으로 황하를 건너서 멀리로 달아 났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실의 속에서 죽었으므로, 수백년 동안에 결쳐 내려온 명문은 어이없이 멸망하고 말았다.  

백마와 관도의 전투는 소(小)가 대(大)를 제압한 전쟁으로써 유명하다. 힘이 약한 조조군이 자신보다 수 배나 강한 원소군을 격파한 것은, 전술적으로는 기습전의 성공, 가장 강한 적장을 먼저 쓰러뜨려 기선을 제압하고, 정보수집의 묘... 등에 따른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결국은 조조와 원소라고 하는 두 톱의 기량의 차이가 승패를 결정했다고 해도 좋겠다.  

'왕좌지재(王佐之材)'라고 불리우던 순욱은 원소를 단념하고 조조에게로 달려가서, 훗날 조조의 최고의 브레인이 된 인물이다. 이 순욱이 조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승패가 군주의 기량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역사에 비추어 보아도 분명합니다. 결단력, 식견, 임기응변의 묘, 통솔력 등으로 보아, 두 분의 총대장 사이에는 극단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결국 이것이 천하를 겨루는 결전의 향방을 정한 것입니다."  

전투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리더의 기량의 크고 작음이다.

 

11. 남자로서의 낭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가.

도리에 어긋나지 않으면 길은 반드시 열린다.  

백마와 관도의 전투에서 관우가 활약하고 있을 무렵, 유비는 적의 편인 원소의 진영에서 식객 노릇을 하고 있었다. 용감무쌍한 안량도, 활의 명수인 문추도 털보 장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전선으로 부터의 보고를 듣고, 유비는 섬뜩하였다. 그 털보 장군은 관우임에 틀림없을 것이었다. 그것이 폭로되면 원소에게 죽임을 당하리라고 생각한 유비는, 몰래 조조의 진중에 있는 관우에게 편지를 보내고, 자신은 전란을 틈타서 원소의 진영을 떠나 중립지대로 피싱하였다. 유비가 보낸 밀서는 무사히 관우의 손에 건네어졌다.  

원래 관우의 인물과 용맹에 반해서 후대하고 있던 조조는, 더욱 더 관우를 놓치지 않으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관우 자신은 오랫동안 섬기려는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조조는 예전부터 관우와 사이가 좋은 장수 장료에게 명령하였다.  

"나는 관우와 같은 부하를 원하네. 한번 자네가 관우의 본심을 물어보아 주지 않겠나."  

장료가 군주의 의향을 전하자 관우는 한숨을 쉬면서,  

"승상의 마음씀은 뼈에 사무치도록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인은 유비님에게서 깊은 은덕을 입었으며, 목숨을 던질 것을 맹세한 몸입니다. 유비님 이외의 분을 섬길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소인은 언젠가는 떠나가야 합니다. 전부터 승상을 위하여 뭔가 하는 일을 하여, 베풀어 주신 호의에 보답한 후에 떠나갈 생각이었습니다. 이제야말로 그 때가 왔다고 생각됩니다."  

장료는 그대로 조조에게 전달하였다.  

"음, 과연 관우로구나. 신하의 도리를 그렇게까지 관철하려 하다니, 참으로 훌륭하구나."  

라며 조조는 무척이나 감동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이젠 말릴 수가 없겠구나...'  

전투가 끝남에 도성으로 돌아온 관우는, 조조가 보내 주었던 금품에 봉인을 한 다음 작별의 편지를 남겨 놓고, 유비의 두사람 부인을 데리고 탈출하였다. 관우가 도망친 것을 알고 술렁거리는 조조의 장군들에게 조조는 조용히 깨우쳐 주었다.  

"쫓아가서는 아니 된다. 관우는 입은 은덕을 갚아 주었다. 그것도 역시, 군주에게 충절을 다하는 사나이의 삶의 모습이다."  

곧 관우 일행은 무사히 유비와 재회하였다. 그 후, 8년이 지나 조조는 적벽의 전투에서 완패하고 간신히 전선을 이탈하였다. 소수의 패잔병을 이끌고 화용도라는 언더게 이르렀을 때, 퇴로를 촉나라 군대에게 차단 당했다. 더구나 촉군의 지휘관은 관우가 아닌가. 그래서 이젠 다 살았구나 하고 체념한 위나라 군병들을 관우는 말없이 통과시켜 주었으며, 조조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하였다.

'남에게 인정을 베풀면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온다.'  라는 말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비정과 관용의 마음을 동시에 겸비하고 있는가.

원씨 일족을 멸망시킨 후, 조조는 각지의 소수 군벌을 정리하여 화북을 통일하였다. 건안 12년(207년), 장성 이북으로 진출하여 그 지방에서 넓은 토지를 차지하고 세력을 떨치고 있던 기마민족인 오환을 공략하여 그 땅의 선우(禪于)왕을 죽였다.  

오환을 정벌하기 전에 있었던 일로 이런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때, 오환의 선우왕으로 부터 위나라로 우호 사절이 파송되어 왔다. 그 무렵, 위나라와 오환은 일촉족발의 관계에 있었다. 표면상으로는 우호를 맺기 위한 사절이라지만, 실제로는 적진의 동정을 살피려는 간첩단이라는 것을 위나라에서도 잘 알고 있었다. 드디어 알현할 때가 되자, 조조는 군대 안에서 가장 위풍이 당당한 부하를 대역으로 하여 자신의 자리에 앉도록 하고, 자신은 부관의 옷차림으로 대역의 옆에 서 있었다. 오환 측의 사신도 위풍이 아주 훌륭한 사내여서, 기라성처럼 늘어선 조조의 막료들 사이를 겁내는 기색도 없이 당당하게 걸어가 대역인 사람 앞에 서자,  

"조맹덕 대장군 각하를 배알하는 영광을 베풀어 주셔서 황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라고 말씀을 올리며 깊이 머리를 숙였다. 그의 태도는 당당했고 이따금 훔쳐보듯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날 밤, 조조는 훈련이 잘된 염탐꾼을 침입시켜서 사신들을 감시하도록 하였다. 배당되어진 방에서 오환의 사신들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탓인지, 사신은 조조를 알현한 인상을 말하였다.  

"적의 대장인 조조는 몸집만 컷지 대단한 인물은 아니다. 정말 그 남자가 조조라면 위나라는 그리 두려울 것이 없다. 오히려 그 곁에 서 있던 부관이 수상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 남자는 누구일까?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염탐꾼은 즉시 그 말을 조조에게 보고하였다.  

'음, 무서운 관찰력을 지닌 자로구나. 이대로 살려 보내서는 안되겠구나...'  

조조는 곧바로 자객을 풀어서 사신을 죽였는데,  

"적이지만 훌륭한 사람이다."  

라고 말하며, 그 시신을 정중히 오환에게 돌려 보내면서, 선우왕에게 편지를 보냈다.  

'귀국의 사신은 위나라 왕을 모욕하였으므로 하는 수 없이 죽였다. 그러나 이 사신은 훌륭한 사람이다. 따라서 시신을 정중히 돌려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즉시 오환을 정벌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  

이와 같이 조조의 마음에는, 관용성과 냉혹성이 동거하고 있었다. 난세에서 천하를 다투는 것은 먹느냐 먹히느냐의 싸움이며, 무심코 적에게 인정을 베풀다가는 자기가 죽임을 당하고 만다. 때문에 비정하고 가혹함에 철저하여야 만 한다. 다만 공평하게 말해서, 어느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는, 조조는 관용을 베푸는 편이었다. 항복해 온 적의 장수라도 능력이 있는 자는 우대하며, 자신을 괴롭혔던 상대를 용서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어 죽였을 때도, 적이지만 훌륭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정중히 장사지내고, 유족에게 은덕과 상을 베풀었다.  

피흘림과 살인이 전국시대의 예사로고는 해도, 조조의 경우에는 거기에서 일종의 남자의 로맨티시즘을 느낄수 있다. 역사가 중에는 이런 '비정한 사람에게도 때로는 눈물이 있다.' 는 식의 낭만주의를, 조조가 천하를 거머쥐게 된 이유의 하나로 보는 사람도 있다

 

12. 추상열일 속에 따스함을 지니고 있는가.

신상필벌에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는가  

화북을 통일한 후, 건안 7년(202년), 조조는 오래간만에 고향인 패현으로 돌아갔다. 고향의 마을에서는 이전의 방탕아가 이제는 천하를 거머쥐었다고 해서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옛벗을 어찌 잊을소냐!  

조조는 옛 친구들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어디를 가나 낯익은 얼굴은 볼 수가 없어, 어느 가정에서나 전쟁의 희생자를 내고 있음을 알았다. 고향의 젊은이들은 모두 조조의 군대에 가세하였으며, 오랫동안의 전쟁에서, 혹은 죽고, 혹은 부상을 당했던 것이다.  

그 당시의 일이니, 시골의 마을인 패현의 인구도 적었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 일손의 태반을 잃었으니 대단힌 일이었다.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故-한 장군의 공명은 여러 병졸의 희생으로써 이루어진다.)  

드물게 감상적이 된 조조는, 다음과 같은 포고를 내었다.  

"나는 천하의 만민을 위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나의 휘하로 달려온 우리 마을의 장정들은 거의 전사했으며, 이제는 거리를 걸어다녀도 낯익은 사람을 만나볼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폐부를 찌르는 듯한 슬픔이며, 희생자 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휼병 조치를 취하기로 한다.  

- 나의 군대에 참가하여 전사한 자로, 후계자가 없는 가정에서는 그 친척으로 후계자를 세우도록 한다.  
- 전사자의 가정에는 일률적으로 좋은 밭을 부여하며, 경작용의 소를 지급한다.  
- 유족의 자녀를 위한 교육기관을 설치한다.  
- 전상자 및 그 가족의 생활은 모두 관에서 보장한다.  
- 향토에 충렬사당을 건립, 전사자를 이곳에서 모시도록 한다.  

이와 같은 조치는, 전쟁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하여 애석해 하는 나의 태산같은 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이 이것을 알아 준다면 나도 마음 편하게 그 사람들과 황천에서 만날수 있으리라."  

이 포고문은 조조 자신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우두머리가 된 사람으로서 부하에 대한 배려를 잘 나타내고 있다. 고향 사람들에 대한 선전의 마음도 다소는 있었을 것이지만, 숙적과의 혈전에서 가까스로 승리한 단계에서, 이렇게 섬세하고 빈틈이 없는 휼병 조치를 시행한데 대해서는, 과연 대장군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조는 군률에 엄격했고, 위반하는 부하는 용서없이 처벌했지만, 신상필벌을 제일로 하여 엄격한 대신 보살핌도 잘 했다. 그 후에도,  

"논밭도 없고, 자립할 수 없는 유족이나 전상자에 대해서는 관에서 지급하는 식량이 끊어지지 않도록 각 현령은 특별히 유의하라. 나의 뜻을 어기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  

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건안 8년(203년), 조조는 영지 내에 다음과 같은 부흥정책을 제정하였다.  

- 감세정책 ; 조세는 묘(30평)당 곡물 네 되, 한 가구당 명주 두 필, 솜 두 근으로 하고, 그 이상의 세금이나 노역은 금지했다.  

- 교육정책 ; 각 군마다 학교를 만들고, 5백 호마다 시학관을 두었으며, 학문이나 무예에 뛰어난 청소년은 서울로 관비 유학을 보냈다. 이렇게 해서 육성된 젊은이가 훗날, 위나라의 왕조를 지탱하는 인재로 성장하였다.  

- 산업정책 ; 특히 농업생산을 장려했다.  

이처럼 정치가로서의 조조는, 추상열일(秋霜烈日) 속에서도 현실 사회에 맞는 선정을 베풀었다. 군인 출신자의 인물로서는 드물게 행정수완이 있는 톱이었던 것이다.

멸망하는 조직, 살아남는 조직
  
한나라 왕조는 바야흐로 멸망의 지경에 처해 있었다. 창시자인 고조 이래, 그토록 강대함을 자랑했던 대한제국이, 어째서 그렇게 맥없이 붕괴되려 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관료의 무능과 부패의 탓이라고 조조는 통감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부하에 대하여, 민중의 공복이어야 함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현령과 군수 등, 지방 장관이 부임할 때에 조조는 다음과 같이 훈시하였다.  

"그대의 봉록은 백성의 고혈이다. 아래로 백성을 학대하기는 쉬우나, 위로 하늘을 속이기는 어렵다. 그대의 봉록은 결국은 민중의 고혈을 짠 세금에서 나오는 것임을 잊지 말라. 그러므로 백성의 이익이 되는 일만을 생각해서 정치를 행하라."  

천하의 군웅이 서로 다투는 속에서, 위나라가 천하를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위정자 조조의 공복 정신이 열매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조조의 훈시는 <서경(西經)>에서 인용한 것으로, 중국에서는 공복 정신의 원형이 되었다. 도대체 공복 정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조조가 적절히 훈시한 바와 같이, '관은 백성이 키우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을 착각하여, '백성은 관이 키우는 것'이라고 한 것이 소위, 관존 민비의 사고방식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사상이 왕성하게 피어 나고 있는 요즈음, 그러한 시대착오적인 관료나 정치가는 적어졌지만 그래도 가끔씩 우쭐거리는 머저리들이 나온다.  

자기는 '선량(選良)'이니까 민중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정치가, 금방 관리 냄새를 피우려 드는 공무원, 권력과 금전에는 약하면서 서민에게는 강한 관료, 무기력, 무책임, 무사안일, 이른바 '삼무주의'의 관리 근성... 등이, 지금도 때때로 매스컴을 풍성하게 하는 일이 있다. 모든 관료나 정치가는 <서경>의 이 격언을 아침 저녁으로 외워서, 반성의 양식으로 삼는 겸허함이 필요하다.  

어느 나라에서나 관료조직과 행정기구는 커지면 커질수록 낭비와 불합리가 눈에 띄고, 정부의 지도력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폐단도 커진다.  

지금이야말로, 너무나 비대화된 관료조직과 행정기구는, '퍼킨슨의 법칙'을 적용할 필요도 없이, 민주주의와 인권옹호의 양식에 따라 근본적으로 메스를 가해, 개혁되려고 하고 있는 시대이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남북의 어느 쪽이든 관계없이, 전 지구적으로 일고 있는 관료 세력 축소의 물결을 막으려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13. 본심과 겉치레는 철저히 구분하여 사용하라

마음에 꼭 드는 인물은 결점이 있어도 등용하라.  

그 무렵, 유비는 호복성의 군벌인 유표의 식객이 되어, 형주에서 심심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영주인 유표는 유비를 극진하게 대접해 주고 있었지만, 여하튼 식객의 신세라서 할 일이 없었다. 북방의 효웅인 조조는 화북의 평정과 오환을 정복하기에 바쁘고, 강남의 패자인 손권도 오나라를 건국하는 일에 힘이 겨웠다. 때문에 위나라와 오나라의 완충지대인 장강의 중류지역에는 평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헤아려 보니, 유비가 형주에 온 지도 벌써 3년이 지났고 그 전에 원소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시기를 합치면, 칼을 들고서 말을 타고 싸움터를 달릴 기회가 오랫동안 없었던 셈이 된다. 덕분에 유비의 허벅지에도 군살이 붙고 말았다.  

'아, 이래가지고는 몸이 무디어지고 말겠다. 전쟁터에서 솜씨를 발휘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유비는 개탄하고 있었다. 이것이 '비육지탄'이라는 고사성어의 어원이다. 현재는 전쟁터와 관계없이 자신의 힘을 내보일 기회가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건안 15년(210), 조조는 역사상 유명한 '구현령'과 '술지령'을 발표하였다. '구현령'이란 인재등용의 성명서이다. 조조는 이 속에서,  

'천하의 인재는 위정자가 적극적으로 찾아내지 않으면 그리 쉽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인재등용에 있어서는, 청렴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든가, 충성심이 증명되지 않으면 채용하지 않는다든가, 또는 신분이 낮아서 못 쓴다든가... 등등의 조건을 붙여서는 안된다. 마음에 드는 인물이 있으면 다소의 결점이 있더라도, 또 자신의 취향에 맞는 타입이 아니더라도, 여하튼 등용하고 볼 일이다. 그 능력에 따라서 부하를 쓸 수 있는지의 여부가 지도자로서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조조는 철저한 인재등용주의, 적재적소주의로 사람을 잘 가려서 썼다.  

조조가 신뢰하는 부하로 '곽가'라는 사람이 있었다. 두뇌가 영민한 사람으로, 여포와의 대결에 있어서, 오환을 정벌하는 데에 있어서, 그는 정확한 판단과 냉철한 전략으로 조조를 도왔으며 대단한 공로를 세웠다. 조조는,  

"나의 대업을 성취시킬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곽가뿐이다."  

라고 하면서, 소중히 대하였다. 그런데 이 곽가라는 수완가는 여자에 대한 버릇이 나빠 늘 말썽을 일으키고 있었다. 조조의 측근에 진군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어서, 곽가가 추문을 일으키면 그것을 회의석상에서 비판하였다. 그런데 곽가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이 자리는 천하 국가의 대사를 토의하는 장소이다. 그런 사적인 문제를 거론할 곳이 아니오."  

라고 도리어 정색을 하고 나서는 판이었다. 이럴 때 조조는 쓴웃음을 지었을 뿐, 곽가를 책망하지는 않았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결점이 있는 법이다. 그것은 그것대로 소용이 있는 게 아닌가.'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한 한편으로는 진군의 성실한 성격도 높이 평가하였다.  

곽가는 오환을 정벌한 후에, 지나치게 주색을 탐했던 탓인지, 38세로 요절하고 말았다. 훗날, 적벽에서 일패도지(一敗塗地)를 했을 때, 조조는,  

"곽가가 살아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패하지는 않았을 것을..."  하며 탄식했다고 한다.

이용 가치가 없는 사람을 당신은 자를 수 있는가

이와 같이 조조는 마음에 드는 인재는 매우 후대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정해진 원칙이 있다. 그것은 상대편에게 이용 가치가 있을 동안에만 후대한다는 것이다. 사용자의 입장에서 보아, 얻을 것이 있을 동안은 좋지만, 이용 가치가 없어지든가, 혹은 사용자에게 있어서 도리어 지장이 된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지금까지의 공적을 무시하고 거리낌 없이 잘라 버렸다. '왕좌지재'라고까지 칭송되었던 선비인 순욱이 원소의 곁을 떠나 조조에게로 달려갔을 때 조조는 손수 진영의 문까지 마중을 나와 손을 잡으며,  

"당신같은 우수한 참모는 내게 있어서, 옛날 자방(子房 유방의 공신 장량)과 같은 존재이다."  

라며 기뻐하였다. 과연 순욱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아, 조조를 보필하여 관도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출사하여 10여 년, 순욱은 최고로 우수한 참모로서 조조를 위하여 진력하였다. 그런데 훗 날, 한나라 왕실에 대한 정책에서 순욱은 주군과 대립하였다. 진실한 근황주의의 지사였던 순욱은 조조가 황후를 살해하였을 때,  

"신하로서의 충절을 견지하여, 황실에도 그에 상응하는 경의를 표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한 폭거를 하면 반드시 역신이라고 비난당할 것입니다."  

라고 간절히 진언하였다.  

'이제 이 사람은 나의 일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한 조조는, 순욱을 자살로 몰아넣었다.  

'건안의 칠자(七子)' 가운데 한 사람인 공융인 공자의 20대 손으로, 당대 제일의 유학자로 알려져 있었다. 건안 원년(196년), 조조가 헌제를 받들어 허(許)로 도읍을 옮겼을 때, 공융은 조조에게로 불리워 가서 의전을 담당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조정의 회의에 있어서는, 항상 올바른 말을 하여 황실과 정승과의 관계를 잘 조화시켰으며, 조조의 학문적 조언자로 활약하였다. 그런데, 이 위대한 유학자도 결국은 조조가 왕위 찬탈의 뜻을 실행함에 있어서 방해가 되기 시작하였다. 건안 13년, 공융은 조조의 명령에 의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조조에게 이용당할대로 이용당한 공신이, 마지막에 버림을 받든가, 죽음을 당한 예가 적지 않다. 인재등용에 있어서도 본심과 겉치레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문을 내세우는 한편, 실리를 얻을 수 있는가

'술지령'은 조조가 자신의 충성심을 천하에 선양한 문장이다. 그는 그 문장 속에서, 조씨 가문은 대대로 한나라 왕조를 섬겨온 충신으로, 황실에 충성함을 가훈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조조에게 있어서는 한나라 황실에 충절을 다하는 것만이 삶의 보람이며,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왕위를 찬탈한다는 마음은 있을 수 없다라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중국의 우스갯소리에, '이 땅에 은 20냥 없슴'이라는 것이 있다.  

머리가 조금 모자라는 사나이가 마당 한 구석에 은 20냥을 숨겨 놓고 도난을 당할까봐 걱정이 되어 '이곳에는 은 20냥을 파묻지 않았습니다.'라는 팻말을 세워 놓았다. 이렇게 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조조의 '술지령'은 바로 이 우스갯 소리의 유래가 된 것이다. 중원에서 정권 다툼을 벌여 성공한 뒤, 50세가 훨씬 넘은 조조는, 드디어 천명을 알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에게 있어서의 천명이란, '조씨 가문을 왕실로 만든다.'라는 것이었다. 헌제는 이미 완전한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사실상의 지배자인 조조가 황제의 제위를 빼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거기서 조조는 본심을 숨기기 위해 이 '술지령'을 발표하고 더불어 제위 찬탈의 사전 공작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조조는,  

"충근 근황이 나의 신조이다. 절대로 황제는 되지 않는다."  

라고 명백히 밝혔다. 역사는 확실히 그대로 움직였다. 그러나 그 대신에 조조는 그의 아들인 조비를 선양의 형식으로써 황제로 만들기 위해 손을 썼다. 본질적으로는 역적인 신하이면서도 어디까지나 충근 근황의 명분을 세우려고 하였다. 여기에 책략가로서의 본래의 특성이 있는 것이다.  

건안 19년(214), 황후 복씨는 조조에게 반역의 뜻이 있음을 알고 노하여, 친정 식구들과 조조를 죽일 모의를 꾸몄다. 그러나, 궁정의 안팎은 모두 조조 측의 비밀 경찰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 행동은 즉시 조조에게 알려졌다. 노발대발한 조조는 황후의 부친인 복완을 비롯한 일족의 무리들을 죽이고, 몸소 궁전으로 뛰어들어 숨어 있던 황후 복씨를 끌어내었다. 너무나 방약무인한 행동에 헌제는,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대성통곡을 하였으나, 조조는 들은 척도 않고 황후를 감옥에 처넣고 말았다. 보름 후, 조조는 황후 복씨를 죽이고 자신의 둘째 딸을 헌제에게 강요하여 새로운 황후로 맞이하도록 하였다.  

'구현령'과 '술지령'은 문장은 당당하고 휴률하지만 겉치레에 불과하며 조조의 본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동서 고금을 불문하고 겉치레와 본심을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은 위정자의 상투 수단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조조만큼 냉철하고 비정하게 나누어 쓸 수 있는 것은 드문 일이다.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조조는 고금의 대 정치가였던 셈이다. 

 

14. 자신에게 어울리는 종막을 고할 수가 있는가

끝없는 욕망을 어디에서 누르는가  

적벽의 전투가 끝난 지 수 년, 천하의 형세는 점차 굳어져 갔다. 오나라의 손권은 양자강 이남을 완전히 제압하여, 서쪽의 동정호에서 동쪽의 동지나해, 북쪽의 양자강에서 남쪽의 민(복건)과 월(광동)에 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손에 넣어, 판도의 크기에 있어서는 위나라와 견줄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한편, 유비는 위나라와 오나라의 틈을 겨냥하여 장강 상류로 진출해서 촉(사천)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어느덧 오나라와 촉나라의 동맹관계는 깨어지고, 두 나라는 호북성의 형주 부근에서 세력 다툼을 하느라, 작은 충돌을 거듭하고 있었다. 유비는 형주의 수비를 관우에게 맡기고, 자신은 제갈공명 등과 함께 사천성의 중심지인 익주(성도)에 본진을 두었다.  

촉나라와 위나라가 세력을 경합한 지역은, 하남성 남서부, 사천성 동북부, 감숙성 남부에 걸치는 광대한 범위이다. 이곳은 진나라 말기와 한나라 초기에는 중원이라 불리웠던 지역이며, 이곳을 제압하는 자가 천하를 제압한다고 하였다. 중원의 중심지가 한중(漢中)이다. 그 당시 한중에 있었던 자가 장로라고 하는 토착민의 군벌이었다.  

건안 20년(215), 조조는 손수 군대를 이끌고, 한중으로 출격하여 장로의 군대를 무찌르고, 그 여세를 몰아 촉나라의 제일선 부대를 격파하였다. 한중을 점령하는 이 전투에서, 참모로서 급속도로 두각을 나타낸 것이 성을 사마라고 하며, 이름은 의, 자를 중달이라고 하는 젊은 무장이다.  

사마의는 하남성 온현 출신의 뛰어난 인재였다. 그는 처음에 지방의 관리였는데, 인재를 초치하는 데에 열성적인 조조에게 발굴되었다. 위나라에서는 우선 태자인 조비의 무관이 되고, 그 후 조조의 막료가 된 사람이다.  

한중에서 대승리를 거둔 때를 이용하여 사마의는 조조에게 진언하였다.  

"장군님, 지금 촉군은 몽땅 무너져서 익주로 퇴각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진격하시면, 숙적인 유비의 숨통을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익주를 공격할 명령을 내려주기 바랍니다."  

조조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사람이란 만족함을 모른다. 이미 감숙을 손에 넣었는데, 또 촉까지 욕심을 내는가."  

인간의 욕망에는 끝이 없지만, 이번에는 무리하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는 것이었다.  

이렇듯 젊은 사마의를 억제시키는 조조에게서 역사는 그의 원숙미와 노경을 보여주고 있다.

장례식이 끝나는 대로 상복을 벗어라  

건안 25년(220)의 정월, 조조는 전선을 시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옛 도읍지인 낙양에서 병이 들어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병상에서 조조는 각지에 포고문을 돌려서 명의를 찾도록 하였다.  

그런 가운데, 금성 출신의 화타라는 유명한 의사가 있었다. 당대 제일의 국수(國手 이름난 의사)라는 평판을 듣고 있던 화타는 조조의 맥을 짚어보더니,  
"유감스럽습니다마는 대왕님의 병세는 어떤 약을 써도 소용이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약으로 치유되지 않는다고?"  

조조는 병상에서 허덕이며,  

"그대는 천하에서 제일가는 명의라고 하는 사람이 아닌가. 무슨 수가 없겠는가."  

"있습니다. 우선 마취약을 드신 후에, 예리한 작은 칼로 머리를 절개하여 깨끗이 씻어 냅니다. 그렇게 하면 병은 열흘이면 완치되겠습니다."  

"뭐라고, 너는 나를 죽일 작정이냐!"  

"당치도 않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소인은 전에 관우 장군의 오른쪽 팔의 뼈를 깍아내고 독이 묻은 화살촉을 적출해 내어서 고쳐드린 일이 있습니다. 그와 비교하면 대왕님의 병은 가벼운 편입니다. 소인에게 맡겨 주십시오."  

"팔은 절개해도 목숨에 관계가 없지만, 머리는 그렇지가 않다. 그러고 보니 너는 촉나라에서 파견된 첩자로구나."  

조조는 대단히 화가 나서 화타를 죽여 버렸다.  

화타는 실재했던 인물이며, 자는 원화이고, 한방 의학의 원조라고 불리우는 명의이다. 이 일화의 진위는 고사하더라도 (화타에게 진찰을 받았던 것은 훨씬 전의 일이라는 설도 있다.) 중국에서는 2천여 년이나 전에, 이미 외과적인 수술과 마취가 행하여 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서 약을 쓴 보람도 없이, 조조는 낙양에서 객사하였다.  

"천하는 아직도 평정되지 않았는데, 여기서 쓰러지다니 애가 끊어지는 심정이다. 이것도 천명이겠지. 나의 장례식은 되도록 간소하게 하여, 요란스레 야단을 떨지 않도록 하라. 입관을 시킬 때에는 군복을 입혀주기를 바란다. 절대로 용포(황제의 옷)를 입히지 말고, 금은보화를 함께 넣지 않도록 하라. 매장이 끝나는 대로 군대는 상복을 벗고, 갑옷과 투구로 차림을 갖추어, 적의 침공에 대비하라. 전체 장수, 병사, 관리들은 평화로운 시대에도 전쟁의 대비를 소홀히 하지 마라. 또 생전에 내가 한 말을 한 마디도 잊지 말고 준수하라. 나는 하늘에 있으며, 항상 너희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리라."  라고 유언을 하고 있다.  

임종을 할 때에는 평소 소중히 여기고 있었던 명향과 옥기류를 시녀들에게 나누어주며,  

"내가 죽은 후에는 이 보물들을 처분하여 바느질이나 하면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도록 하라."  라고 당부하였다. 향년 66세.  

과연 천하의 패자답게, 그에게 어울리는 조용하고 담담한, 큰사람의 죽음이었다. 

 

15. 자신의 목표를 향해 오로지 전진할 수 있는가

사적인 감정을 버리고 사람의 기량을 헤아릴 수 있는가

일대의 영웅이었으며, 무장으로서도 위정자로서도 당대의 일류였던, 그 대단한 조조도 후계자 문제에 대해서는 꽤나 고심하였다.  

변씨가 낳은 조비, 조창, 조식 중에서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아버지의 입장으로서 조조가 가장 사랑한 것은 셋째 아들인 식(植)이었다. 잔인하지만 자신이 믿는 사람에게는 정이 두텁고, '횡삭의 시인(영웅이 진중에서 시를 지을만큼 글을 좋아하고 풍류를 안다는 뜻'이라고 불리우는 일이 무리가 아닐만큼, 문학과 예술에 남다른 이해를 지녔던, 이른바 낭만주의자였던 조조는 그 이중적인 성격을 이어받은, 천재 시인인 조식에게서 자신의 분신을 찾아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음이 따뜻하고 정열적인 조식을, 냉정하고 현실주의자인 조비보다 조조가 더 아꼈던 것도 무리가 아닌 듯 싶다.  

그러나, 결국 조조는 개인적인 감정보다도 장유유서에 따라, 장자인 조비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조조는 자신이 다 이루지 못한 야망을 후계자의 손으로 달성시키고 싶었다.  

'왕위를 찬탈한다'라는, 신하로서 가장 욕된 일을 강행하기에는 조비가 지닌 비정한 성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조비는 자를 자환이라 하며, 아버지를 닮아 냉정하고 가혹한 성격이었다. 문제라고 참칭하며 조비가 즉위한 후 실시한 것은, 후계자 다툼에서 자신을 지원해 준 신하들에 대한 논공행상과, 반대파에 대한 철저한 탄압이었다. 동생인 조식파의 중진인 정의 형제의 일족을 몰살시킨 것을 비롯하여, 전에 조비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말했던 자와, 후계자 경주에서 적의 편에 섰던 자는 모두 처형하였다. 가혹한 탄압은 육친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친아우인 조창과 조식도 형이 가하는, 유형 무형의 압력에 의해 불우한 생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우수한 2대째 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사인 <삼국지>의 편자 진수(陳壽)가 조비를 '넓은 아량이 부족하다.'라고 평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 냉철하고 가혹한 성격에 의한 것이다.

권력에 빠지지 않고 직무를 다할 수 있는가

그 무렵, 한나라 왕조의 최후의 황제인 헌제는 완전히 허수아비가 되어 있었다. 황실 대대로의 가신임을 의식하고 있던 조조까지는, 그래도 한나라의 황제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으나, 새로이 위나라의 왕이 된 조비는 더욱 드라이한 사람이어서 '존황경제(尊皇敬帝)'라는 유명무실한 도덕만으로 한나라의 황제를 남겨두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딱 잘라서 결론을 짓고 있었다. 아버지인 조조가 죽자, 조비는 선양이라는 형식으로, 헌제를 퇴위시키고 스스로 즉위하여 위나라의 문제라고 참칭하였다. 이리하여 광무제로부터 172년 동안 계속되어 왔던 후한의 왕조는 멸망하고, 여기에 위(魏)라는 새로운 왕조가 탄생한 것이다.  

조비의 강성함과 가혹함은 왕위 찬탈이라는 형태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육친에 대해서도 용서없이 발휘되었다.  

즉위식의 제반 행사도 끝나고 일단락이 지어진 무렵, 문제는 문무백관 앞에서 자가 자건인 동생 조식에게 이렇게 명령하였다.  

"자건, 그대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부터, 시에 대한 재주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대와는 형제이지만 군신의 관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명령을 내리겠다. 이 자리에서 일곱 발자국을 걷는 동안에 시를 하나 지어보라. 만약 하지 못하면 죽음을 택해야 하니라."  

조정에 가득한 군신들은 문제의 가혹한 명령에 깜짝 놀라, 괴괴하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였다. 조식은 형을 향하여 말했다.  

"시의 제목을 주시오."  

"그래, 제목은 '형제'가 좋겠다."  

"알겠습니다."  

이미 오늘의 일을 각오라도 하고 있었는지, 조식은 항거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 일곱 걸음째에서, 조식은 형이 있는 쪽을 돌아보고서 가볍게 한번 예를 올리고 낭랑하게 시를 읊기 시작했다.  

煮豆燃豆其 (자두연두기 - 콩을 삶는데 콩깍지를 태우니)  
豆在釜中泣 (두재부중읍 - 콩은 솥 속에서 울고 있구나)  
本是同根生 (본시동근생 - 본래는 뿌리를 같이 하여 생겨 났는데)  
相煎何太急 (상전하태급 - 서로 볶아댐이 어찌 이리 심하고 급한가)  

시를 다 읊고 났을 때, 동생의 창백한 얼굴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형은 위로의 말 한마디도 없이 불쾌하다는 얼굴로 자리를 떴다.  

그런지 얼마되지 않아, 도성의 사람들은 왕의 동생인 조창과 조식이 각각 먼 곳으로 추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또 몇 해가 지나, 창과 식은 불우한 속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조비의 강한 질투심과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은 많은 역사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생각컨데, 조비라는 사람도 왕위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조식 등에 대해서 이렇게 까지 가혹한 처사는 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인간의 심리는 높은 지위에 오르면 누군가에게 추월 당할 것이 걱정스러워지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권력자는 자신보다 명성이나 인기가 있는 사람을 몹시 싫어 한다. 비록 그 사람이 육친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간에 허용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살펴보면 권력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흉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결속하여 강건해 질 자신이 있는가.  

유교적인 도덕관이 지배했던 옛 중국에서는, 횡적인 관계보다 종적인 순서를 중시하였다. 이 때문에 부모와 자식 간의 단절이나, 형제 사이의 확고한 아집은, 다른 나라에 비하여 많지 않다. 교육적인 격언으로서, 이른바,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한다.'라고 하는 예가 많다. 삼국 시대로 말하면, 손책과 손권, 제갈근과 제갈량, 사마의와 사마부는 의좋은 형제로 유명했으며, 의형제이기는 했어도 유비, 장비, 관우의 세 사람도 아름다운 우정과 절도로 맺어져 있었다. 조씨 형제와 같은 예는 봉건 중국 사회에서는 희귀한 일이었다.  

그렇게 사이가 나쁜 조씨 형제라 하더라도, 서로의 항쟁에는 하나의 제동 장치가 있었으니, 그것은 '형제란 집안에서 싸우는 일이 있더라도, 밖에서 공격을 받았을 때에는 서로 도와서 막는다.'라는 것이다.  

궁전 안에서 혹은 나라 안에서 아무리 심하게 싸우고 있더라도 일단 위나라 이외의 촉나라와 오나라에 대해서는 조씨 형제는 결속하여 공동의 적과 싸우고 있다. 이런 점들이 유교적인 도덕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민족성에서 오는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여하튼 한(漢)민족은 이 격언과 같은 전통을 지니고 있다. 8년 간의 항일전쟁에서 일본이 중국에 대하여 행한 중국 모략 공작이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했던 것은 이와 같은 한나라 민족의 전통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