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병영블루스

醉月 2010. 3. 26. 08:55

뻬치카를 아십니까?

 - 육군 중령 김종해  

겨울을 준비하는 병영은 바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최전방의 초소에는 월동유(越冬油)에서 ‘1종’으로 불리는 쌀과 비상 부식 추진에 이르기까지 가히 전투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짧은 여름의 땡볕이 수그러진다 싶으면 밀물처럼 곧바로 닥쳐오는 것이 전방의 겨울이었다. 참 희한한 일이었다. 어째서 후방에는 산조차 만산이 홍엽으로 흥청대고 있는데 유독 전방에만 이르게, 망설임도 없이 겨울이 몰려와 자리 잡고 앉아버리느냐는 것이다. 해야 될 일은 왜 그리도 많은지, 김장 준비에 무 저장고까지. “1인당 정확하게 1루베짜리 개인호를 판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루베라는 단어가 처음 겨울을 맞는 신병들이나 막노동 아르바이트 한 번 안해 본 축들이야 그게 세제곱미터의 일본식 줄임말이라는 것을 알리 만무하면서도 무작정 한 겨울 내내 자기가 먹을 무 구덩이를 팠던 기억이 새록새록 돋을 것이다. 심지어 아직 채 잎이 마르기도 전인 싸릿대까지 훑어 싸리비를 만드는 일도 장난이 아니었다. 거기에다 자매결연 학교 운동장을 쓸 싸리비까지 조달하자면 이웃부대의 산등성이까지 벗겨내야 겨우 할당량을 채울 지경이었다. 겨울을 버티기 위한 겨우살이 준비에는 간부 병사 가릴 겨를도 없었다.

 

그리고 숨을 돌릴 때쯤해서 진짜 겨울이 닥쳤다. 그 긴 야전의 겨울은 낭만과는 애당초 무관한 계절이었다. 오히려 생존의 영역에 준거하는 단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삭막함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임무수행과 혹한극복이라는 중첩된 상황타개의 현장에도 따스한 온기는 있었다. 80년대까지, 혹은 길게는 90년대 말까지 겨울의 병영은 그 녀석으로 인해 그나마 사람 살만한 주거지로 화할 수 있었다. 그 따스한 이름은 바로 ‘뻬치카’였다.


뻬치카(Pechka)! 사전적으로 이야기하면 러시아와 만주를 비롯한 극한(極寒)지방에서 쓰는 난방 장치로 돌, 벽돌, 진흙 따위로 만든 벽난로를 일컫는 용어. 어떤 이는 ‘페치카’라고도 부르지만 가장 어울리는 용어는 ‘뻬치카’여야 한다. 근거는 있다. 병영에 ‘뻬당’은 있었어도 ‘페당’이라는 직책과 용어는 결코, 어떤 부대에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한국 병영의 뻬치카는 러시아와 만주의 그것과는 형태나 난방 방식 자체가 달랐다. 혹, 강변의 경치 좋은 카페 같은 곳의 벽에서 아직 소녀적 취향이 남은 신사 숙녀 분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뻬치카’를 상상한다면

“아니 올시다”이다. 그런류의 뻬치카야말로 원시적 극한지방의 뻬치카 형태다. 병영의 뻬치카는 온돌식을 가미한 말 그대로 획기적 발명품이었다.

 

보통 30명 단위의 소대 막사를 기준으로 1개 정도를 설비하는데 내무반(지금은 생활관으로 부른다) 한켠에 거의 침상의 세로길이 크기만 한 2세제곱미터 정도로 설치되었다. 원시적 뻬치카는 내부에서 직접 불을 지피지만 병영 뻬치카는 내무반 밖에 화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원리는 밖에서 지핀 불기가 뻬치카의 불길을 따라 순환하며 뻬치카를 구들처럼 덥히고 거기에서 발산하는 열로 내무반을 따뜻하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뻬치카가 자리한 내무실의 바깥이 뻬치카의 화구자리요 뻬당들의 일터였다.


‘뻬당’이란 오묘한 발음의 용어는 ‘뻬치카 당번’의 줄임말이다. 뻬치카 당번이야말로 ‘짬밥’의 경륜을 의미하는 바로미터였다. 물론 최상급 고참은 뻬당직을 수행하지 않는다. 간부들의 눈이 없을라치면 누런색 깔깔이를 걸치고 양지쪽에 앉아 하품이나 해대는 동물원의 늙은 사자처럼 뻬치카 옆자리에서-뻬치카의 옆자리는 순찰 나온 간부
들은 물론, 지휘감독이나 순시를 나온 아주 높은 지휘관들이 내무반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찾는 VIP 지정석이기도 했다- 느긋하게 TV시청을 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계급이니 분탄검댕을 묻힐 이유가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정확하게 말해 뻬당을 졸업한 군번이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아무튼 뻬당의 반열에 들어서는 순간 는 내무실의 중고참 이상의 위상을 획득했다고 봐야 하며 약간의 주의력과 토막잠을 감내할 능력만 된다면 그것 또한 훌륭한 직책이었다. 뻬당들은 모든 내무반원들의 난방을 책임진다는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함으로 인해
그 외의 어떤 임무도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되어 있었고 심지어 단체 얼차려까지도 열외였다. 당연히 불침번, 교육훈련은 물론 그 어떤 사역에도 동원되지 않는 특권적 지위를 향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긴 겨울 내내 뻬당들의 진짜 얼굴(요즈음 인터넷 용어로 ‘생얼’)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항상 막장에서 금방 나온 채탄부같은 검은 얼굴과 대물림이 되었던 뻬당복의 검게 반질거리는 -결코 늦은 봄날 역 대합실에 쓰러져 있는 노숙자의 묵은 잠바에 뒤지지 않는- 그 헌신의 상징으로 말미암아서였기 때문이다. 그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생사를 가를 만큼의 신중과 고도의 노하우를 가져야만 임무수행이 가능하기도 했다. 병사들이 직접 손으로 벽돌과 흙, 또는 시멘트로 만들었기 때문에 뻬치카에 따라 최상의 열효율을 내기 위한 여건은 각각 달랐다. 어떤 내무반은 지글지글 끓고 있는가 하면 어떤 내무반은 죽어라 때도 물에 빠진 놈 콧등처럼 냉랭했던 것이다. 그러나 뻬치카의 부실을 탓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뻬당의 능력 탓이었다.

 

뻬당들은 뻬치카의 ‘성능’이 아니라 ‘성깔’을 알아야 길들일 수 있었고 그 뻬치카가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관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면 뻬당 탓을 하는 내무반원들의 원성도 영 억지만은 아니었단 이야기가 된다. 뻬치카에는 보통 11월 중순 어간에 불을 지피면 이듬해 4월 중순까지 탄을 올린다. 하지만 뻬치카에 탄을 마냥 올릴 수도 없었다. 보급된 탄은 한정되어 있었고 수요는 무한대, 시그마로 발산하고 있었으니 수요와 공급의 양을 조절하지 못하면 꽃샘추위에 동사할 지경이 되기도 했으니 정해진 양으로 최대의 효과를 창출해야 하는 능력이야말로 진정한 뻬당의 능력이었다. 이 대목에서 분탄창고 털이 경험을 보유한 노병들도 상당하리라 여겨진다. 뻬치카의 성능을 좌우하

는 가장 큰 요인은 당연히 연료의 질이다. 그 중 분탄과 황토의 비율, 물의 양 등 원자재의 혼합능력이 첫 번째 요인이된다.


통상 뻬치카의 연료로는 분탄과 황토 혹은 마사토를 9:1 비율로 배합하여 사용했다. 그 과정 또한 오묘하다. 단순하게 설명하면 분탄창고에 그득 쌓인 분탄을 화구로 가져와 밀가루 반죽처럼 이긴 다음 삽으로 적당히 떠서뻬치카에 밀어 넣고 일정한 두께로 평탄하게 한 후 구공탄 구멍처럼 구멍을 숭숭 뚫어 놓으면 된다. 그러나 이게 처럼 쉬운 게 아니다. 부대에 따라서는 분탄 따로 황토 따로 보관했다가 그때그때마다 믹서해서 사용하는 부대도 있고, 반죽한 재료를 틀에 넣고 조개탄처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석탄반죽을 조금씩 올려 석탄 덩어리를 불덩어리로 만든 뒤 다시 석탄반죽을 그 위에 모두 덮고 끝부분에 불구멍을 하나 정도만뚫어 놓으면 불길이 그 구멍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뻬치카 안으로 빨려 들게도 한다. 어떤 상태로 불을 지피던 씨앗불의 강도를 정확하게 측정하여 -물론, 어림짐작일 뿐이다- 가장 적당량을 밀어 넣어야만 불이 꺼지지 않고 겨울을 온전히 날 수 있었던 것이다. 불씨를 꺼뜨리면 화목으로 다시 밑불을 지핀 후 새로 피워야 했기 때문에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일련의 행위야말로 시간과 물질과 인간이 완벽한 삼위일체를 이룰 때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예술이었다. 뻬치카의 불 지피는 방법이야말로 도제식으로 전수되는 그 내무반만의 독특한 전통이었다. 이 도제식 교육의 전수자를 일명 ‘뻬조’라고 불렀다. ‘뻬당보조’의 줄임말을 직책으로 부여받은 고참 일병급 병사는 말 그대로 간택된 차세대 난방총책이었던 것이다. 함에도 뻬당의 많은 특권 중 일부분에 한해 조금씩 간만 보았지 아직 그들은 뻬당과 같은 완전한 열외의 참맛을 즐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야밤에 비로소 빛을 발하는, 단잠과 맞바꾼 몇 가지 특권을 향유할 수 있음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기도 했다.


야밤에 일어나는 은밀한 즐거움 중 으뜸은 라면요리의 완성, ‘뽀글이’(뽀글이를 라면봉지에 물을 부어 만들어 먹는 라면이라고 하지만 정식으로 끓이지 않는 모든 병영라면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한다)의 음미였다. 병장이나 하사쯤 되어야 끓여먹던 반합라면을 시간이나 계급과 전혀 무관하게 합법적(?)으로 끓여 먹을 수 있었고 또 윗선에서는 뻬당들의 그 즐거움을 묵인해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혹 신임 간부가 일직을 서다가 불법으로 간주하여 무력화시켰다손 치더라도 이내 바로 끓여다 주는 일종의 뇌물인 야밤의 반합라면과 김장김치에는 같은 공범이 되지 않을 도리가 없었고 그 은밀한 즐거움을 같이 즐기지 않는 눈치 없는 뻬당이야말로 괘씸죄를 적용받아야 마땅한 인사가 되곤 했던 것이다.

 

뻬당의 권한이 마침내 빛나는 광휘가 되어 번득이는 순간이 야밤의 뽀글이였던 것이다. 혹자는 반합 속에 라면 3개를 끓일 수 있다고도 했고 또 어떤 이는 5개까지도 끓인다고도 했다. 아마 라면죽 수준이었을 것이다. 뻬치카에 끓이는 반합라면은 엄청난 전방위 화력에 힘입어 반합을 화구에 투입하기 바쁘게 끓기 시작했고 라면 2개(당시 군대라면은 한 봉지에 2개씩 들어 있었음)를 끓이는 시간은 5분이면 충분했다. 뿐만 아니다. 반합에 건빵과 부속품인 별사탕까지 넣어 만든 건빵탕은 선험적으로는 건빵이 풀려 풀죽처럼 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쫄깃한 건빵이 온전한 모양을 갖춘 채 달싹하고 고소한 향내를 풍기며 홰를 동하게 했다. 뻬당이 라면이나 건빵을 끓이는 시간과 일치된 불침번도 그날만큼은 결코 지루한 불침번은 아니었다. 기꺼이 야밤의 만찬에 동참할 수 있었으므로.


그러나 진짜 내무반의 불침번은 십자매였다. 내무반마다 뻬치카 옆 새장에서 밤낮으로 병사들을 지키던 이 앙증맞은 십자매는 결코 정서순화를 위한 애완용이 아니었다. 분탄을 때는 뻬치카의 특성상 균열에 따른 가스 유출은 내무반 병사 전원을 위험하게도 만들었다. 그래서 막장 탄부가 십자매를 들고 갱도에 들어가듯 바로 그렇게 목숨을 바쳐 가스를 감지해 내던 가스감지기였던 것이다. 가스에 민감한 십자매의 슬픈 운명으로 말미암아 병사들의 안녕을 담보할 수 있었다. 함에도 병사들은 그러려니 했다. 간혹 여린 마음을 가진 병사가 눈에 띄면 십자매 사료담당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뻬치카와 뻬당과 십자매, 그리고 분탄은 이제 없다. 기록상으로는 홍천의 시동에 위치한 모 대대가 1999년까지 뻬치카를 땐 기록이 남아 있으며 그 후로는 전설이 되었다. 십자매의 애처로운 눈길을 찬찬히 봐주지 못한 메마름이 가슴 아프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뻬치카의 따스함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빼치카야말로 삭풍 속에서도 대한민국 군대의 전투력을 보존한 일등공신임을 부정할 수 없다. 대한민국 군대의 겨울은 바로 뻬치카와 함께한 시간이었다.

 

병영블루스_ 문선대의 추억

 

 

문선대의 추억

'운산 철수 후 군단예비가 되어 전쟁발발 4개월 만에 처음 휴식을 취했다. 추수를 마친 때라 우리는 햅쌀을 구해 떡을 해 먹을 수 있었다. 이때 사단 정훈부 연예대와 코미디언 김희갑이 무희들과 위문공연을 와서 추위에 오돌오돌 떨면서 춤추던 모습도 생각난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 나오는 1950년 11월 문선대(文宣隊)의 공연 장면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90년대 중반까지 건실하게 버티던 사단급 제대의 문선대(90년대에 들어 군사령부에서 통합되어 운영하기도 했다)는 삭막한 병영에 불어 넣은 한줄기 은은한 화장품 냄새요, 문화를 표방한 스트레스 발산의 최고 무대였다. 5,6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TV 조차 변변찮던 시절, 혹 TV가 있다하더라도 겨우 한정된 채널에 그마져도 난시청지역이 대부분이던 7,80년대까지의 병영은 유일한 라이브 무대랄 수 있는 문선대 공연의 황금기였다.


-무대 뒤에서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얼추 연배 순으로 나열해 보자. 고 이주일 선생, 탈랜트 신충식 선생, 가객 장사익 선생, 유인촌 장관, 김병조 교수, 탈랜트 이계인, 김성찬, 개그맨 김정식, 김종석, 박수홍, 김재동, 유재석, 김대희, 가수 클론 등등......의 공통점은 뭘까?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모두 현역시절 문선대 출신이다. 아마 연예계의 웬만한 인물들치고 왕년에, 문선대에 몸담지 않은 이들이 오히려 소수일지도 모르겠다. 나열된 인물들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문선대의 연주자나 가수, 사회자로 현역시절을 뜨겁게 달군 인물들인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해군의 낙도홍보단 출신 김건모 등을 포함하면 문선대 출신의 면면은 더 넓어질 수밖에 없다. 문선대원은 아무나 될 수도 없었지만 의외로 깜짝 스타가 발굴되기도 한 일종의 연예계 진출의 관문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문선대는 부대에 따라 편성이 달랐다. 사단 정훈부소속 비공식 파견 형태로 상시 운용되거나, 군악대 등에 소속시켜 그 또한 거의 상시 운용되기도 했으나, 대체로 평시에는 소속대에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사단에서 년 1-2회 편성하여 연습 후 1-2개월간 순회공연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였다. 혹, 사회에서 이름 꾀나 날린 연애인들이 입대라도 하면 그는 십 중 팔구 이등병 때 일찌감치 사단 문선대에 선발되어 남들이 보면 '딴따라'나 하다가 제대하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문선대는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사단정훈참모는 연중 부관부와 접촉선을 유지하며 연애인 출신이 입대하길 목 놓아 기다리고 있었고 각급 부대장들이나 예하대 정훈장교들의 정보력을 총동원하여 인재발굴에 혈안이 되다시피 했다. 설사 그렇게 선발해 왔다고 하더라도 기존 멤버들과 손발도 맞추어야하고 무명의 고참 연주자나사회자가 있다면 선뜻 교체도 힘들었다. 군대는 '짬밥순'이라는 불변의 철칙을 넘어 연애계의 지고한 서열을 함부로 무너뜨리고는 기존 맴버들의 반발로 순조로운 공연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문선대에 선발이 되었다고 해서 느긋한 예술가의 품위는 예시당초 그들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군기는 군인의 기본이라지만 그 기본적인 군기에다 연예계 기강까지 더해져 결코 만만한 내무생활이 아니었던 것은 물론이다. 거기에다 연주 실력이 고참 맘에 들지 않기라도 하던지 쓸데없는 애드립으로 혼자 튀기라도 할 때면 '용'되는 것이 아니라 '왕따'에다 거의 투명인간 취급을 해 버리는 보이지 않는 멍석말이도 횡행하는 잔혹함까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내부적으로 잔혹하기만 했겠는가. 연주자들이라는 공동의 감성을 바탕으로 배타적 전우애는 특공대를 능가했고, 공연 간에는 공연복으로 불리는 사복을 착용할 수 있다는 특권과 공연부대원들로부터 억압(?)을 당하지 않도록 모조리 군복에는 병장 계급으로 '마이가리'를 한다든지 하는 따위의 불문율의 특권도 있기는 했다. 혹, 통 큰 공연부대장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야간회식이나 격려금 명목의 촌지도 있어 그 또한 쏠쏠한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외부에서는 여자가수들만 영입되는 관계로 1달이 넘는 공연기간 중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는 행운아도 나오곤 했다.

 

  

-할리우드를 누비다(?)

7,80년대의 사단급 제대 편제에는 문화장교라는 직책 자체가 아예 없어 그 또한 차출된 인솔장교에게 맞길 수밖에 없는데 이 인솔장교의 애환 또한 만만찮은 것이었다. 참모야 일반적인 참모책임을 지면되지만 공연이 펑크 난다든지 공연이 매끄럽지 못해 피공연부대로 부터 욕이라도 먹을라치면 그 몇 배로 사단참모들로부터, 말 그대로 '쪼인트'가 날아가는 치도곤을 당하기도 했던 것이다. 비슷한 또래의 문선대원들 -그들이 누군가? 기성무대에 서기도 전에 벌써 대한민국 최고의 뮤지션인 듯한 착각에 빠져 버팅기기부터 먼저 배우는 슈퍼 울트라 짱 고집불통들 아닌가?- 구슬려야지, 참모 눈치 봐야지, 군대 밥으로는 한참 고참인 행정관 훈수들어야지, 제 밥그릇 챙길 짬조차 변변하게 없던 눈물의 고행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무튼, 근근이 팀을 구성하고 나면 이젠 악기부터 준비해야 했다. 80년대까지 정훈에 몸담은 고참 정훈장교들 치고 '할리우드'를 모르는 이는 없다. 할리우드는 서울 할리우드 극장 주변에 산재된 악기점과 음파상, 그리고 다방들까지 통칭하는 '딴따라'계의 일반명사다. 할리우드에는 공연에 관한한 안 되는 것도, 없는 것도 없다. 악기판매는 물론, 악기 랜탈, 음향장비 랜탈, 심지어 주변의 다방에 가면 손님의 절반이상이 '사장님'들로 불리는 1인 프로모터들이 있어 가수 섭외는 기본이고 예산에 맞추어 프로그램까지 짜준다. 소위 '삼마이'로 불리는 고만고만한 가수들의 몸값도 기간에 따라서나 혹, 음반이라도 낸 가수, 팝송을 소화하는 가수, 문선대 사회자와 손발을 맞출 수 있는 사회능력을 구비한 가수 정도만 구별하면 거의가 정찰가격에 가까웠다. 거기에다 무용수를 쓴다거나 예산에 여유가 있어 '아다마'로 불리는 이름이 알려진 가수라도 끼이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기도 하지만 그건 예산상의 차이가 있을 뿐, 내용이야 사실 오십보 백보였다.


악기도 입맛이 까다로운 팀원이라도 있을라 치면 꼭 특정 악기를 준비해달라고 떼를 쓴다. 대원들이야 예산사정을 알 턱이 없는 지라 겨우 힘들여 사단참모에게 건의라도 하는 시늉이라도 내야 된다. 그 결과는 백퍼센트 '꼭 실력 없는 것들이 연장타령해요'라며 거절이다. '그 봐, 안 된다잖아'가 할 수 있는 표현의 한계점이다. 할리우드 업자들이나 '사장님'들도 은근히 고가의 장비나 소품을 권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간에 문외한인 참모나 인솔장교의 입장에서야 그게 그것일 뿐 결코 현혹되는 법이 없었다. 그 불만을 잠재우고 색소폰 리더 몇 개, 기타 줄 몇 개, 심지어 드럼 스틱 몇 개식으로 준비가 끝나면 음악 따고, 섭외가수 악보 받아 연습 후, 드디어 공연이다. 할리우드 출신의 여가수와 할리우드 출신의 악기와 할리우드 출신의 음향기기를 들고 이제 문화에 굶주린 땀내 나는 병영의 한복판으로 향하는 길은 설레임 그 자체였다. 그 시절 할리우드가 없었다면 공연은 더 힘들었을 수도 있고, 연중 찾아대는 문선대 덕분에 할리우드도 혜택을 못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할리우드와 문선대는 공생관계를 넘어 공동체였다는 표현이 적확할 것이다.


-"Forever with you"의 끈적임 그리고 삭풍

문선대는 연병장에서만 한다? 정답은 'X'다. 문선대 무대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 곳이 최전방 GOP꼭대기에 걸터앉은 초소 앞마당이든, 심지어 내무실 안이던, 식당 한구석이든 가리지 않는다. 한 쪽에선 김치냄새와 어우러진 밥 찌는 냄새가 진동을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무대도 없이 막대기로 병사들의 진출 한계선만 그어 놓고 여가수 내지는 무용수의 옷 갈아입을 막 하나만 있으면, 심지어 그런 장소조차 여의치 않을 땐 인솔장교가 고개를 돌린 채 들고 서있는 모포 한 장의 공간만 허용되어도 무대는 섰다. 모진 바람 속에서 가수의 목소리보다 더 세차게 빨려드는 바람 소리에도 병사들은 '키메라'처럼 진한 화장의 여가수가 추위에 닭살이 돋아도 어깨선을 드러낸 무대복 차림으로 그 앞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금을 지리곤 했다.


음담패설 개그는 기본이요 사회를 함께 보는 여가수와 하춘화의 "영감" "왜 불러"를 개사한 만담식 노래는 단골 레파토리였다. 매들리로 엮는 디스코 타임이 되면 인솔장교나 사회자는 여가수들에게 쏟아지는 병사들의 짓궂은 장난을 막느라 진땀을 쏟았고 함에도 불구하고 섭외된 여가수들은 즐거워 못살겠다는 듯 웃어줬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문선대의 하이라이트는 속칭 '솔로'로 일컬어지는, 반라의 무희가 의자 하나를 달랑 놓고 벌이는 스트립 댄스였다. 그 배경음악으로는 어김없이 색소폰 음악의 영원한 고전, 'Forever with you'가 흐르고 병사들은 반쯤 넋이 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스트립 댄서들은 하나같이 두터운 뱃살을 자랑하곤 하여 최소한 동사의 위험은 줄어들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장면에서 약간은 거만하게 앉았던 대대장님이나 연대장님도 새삼스럽게 선글라스를 쓴다거나 헛기침을 하곤 했다. 


이제 일류가수와 KFN이 녹화까지 하는 국방홍보원의 '위문열차'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 옛날 최전방 GOP에서 만끽하던 문선대는 그 날에 불었던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리던 문선대의 추억은 노병들의 청춘 속에는 여전히 함께하고 있다. 그것은 문화 콘텐츠가 아니라 그 자체가 병영문화였던 것이다

 

전설로 사라져간 화랑담배 연기- 김종해

 

 

아무래도 노래 이야기로 시작해야 될 듯싶다. 1950년 9.28서울 수복 후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의 감격에 차 있을 때 그 감동과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비장미를 함께 아우른 전쟁가요 하나가 온 나라를 뒤덮었다.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이 부른 ‘잘 자라 전우야”가 그것이다.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낙동강까지 후퇴한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함으로 낙동강을 뒤로하고 추풍령을 넘어 북으로 전진한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그리고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를 부르며 전진했던 것이다. 피난살이의 고달픔도 고달픔이지만 이제 북진한다는 환희의 이면에 쓰러져간 사람들을 기억한다는 휴머니티가 깔려 더 비장하게 만든 노래 ‘잘 자라 전우야’는 군가풍임에도 불구하고 공전의 히트를 넘어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이 노래의 백미는 바로 노랫말 속의 ‘화랑담배 연기’다. 전우애의 상징이요 마초적 기질의, 소위 말하는 ‘군바리’의 대명사 화랑담배야말로 연기조차 사라지지만 그 소멸과 화랑담배라는 존재의 어울림으로 심금을 때렸던 것이다.

 

 

낭만의 담배
지금처럼 담배가 천대받던 시절도 아니었고 오히려 담배 못 피우는 남자가 좀 모자라는 듯한 취급까지 당하던 시절이었으니 군에 보급된 담배야말로 애당초 남자의 필수품 중 필수품이었다. 더욱이 애연가들이야 밥은 굶어도 담배는 굶을 수 없다는 일념(?)으로 담배를 피워 댔지만 모든 것이 궁핍하던 시절, 담배인들 풍족했을 리 만무했다. 사회에서는 담배배급제가 시행되어 번호표를 타기 위해 길게 줄까지 서곤 했고 심지어 피난시절엔 길에 떨어진 꽁초를 주워 모아 다시 궐련으로 재생한 사제담배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질이야 따질 겨를이 없었을 터이지만 그나마 군에서는 보급품으로 지급이 되니 군대야말로 그나마 안 피우던 담배까지 무슨 손해라도 보는 양 너도 나도 피워 댔고 지금의 50대 이상 연배들 중에는 상당수가 군에서 인을 박은 ‘군초’(軍草) 출신들이었던 것이다. 일부는 그 보급 담배를 좁은 관물대 안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가 휴가 때 고향 아버지에게 갖다 드리는 눈물겨운 효심도 발휘케 한 화랑담배였다.


당대의 로맨티스트 공초 오상순의 절명에 뭇 문인들은 담배 향으로 애도를 했고, 몇 안 되는 이중섭의 사진 속에도 가장 이중섭다운 모습으로 복사에 복사를 거듭하는 사진이 담배를 무는 사진이고 보니 군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 흉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경륜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소년병까지 몰려 든 5,6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군대에서의 연장자는 오로지 계급이 으뜸이었으니 소년병들이야 아직 여드름자국이 수북했음에도 권련 한 대는 물어야 그래도 좀 어른스러워 보였을 터이고, 휴가라도 나갈라치면 사제담배 한 갑 정도는 일단 사고 보는 것이 순서였다. 그러나 어른들 앞에서는 맞담
배질을 할 수 없는 끽연의 미풍양속까지 줄기차게 지키는 우리나라의 풍토에서도 군대에서만은 고참과의 맞담배도 허용되었고 상관들 역시 부하들과 면담이라도 할라치면 맘 놓고 진솔하게 말하자는 무언의 언질로 귀한 고급담배부터 먼저 한 가치를 권하는 것이 통례였다.


혹독한 훈련 중에도 짬을 내어 ‘담배 일발장전’의 여유는 주었고, 보급된 화랑담배가 떨어지기라도 할라치면 금이야 옥이야 아껴 두었던 애인의 위문 보따리 속 담배 몇 갑은 그녀의 숨은 정성 이상으로 고마운 달콤함까지 녹아 있었다. 이
때 한 두 개피를 몰래 꺼내 나눠 피우는 눈물겨운 정경이야말로 전우애 중 으뜸 아니고 무엇이었을까나. 월남전의 와중에서도 수통 속에 담배를 박아 불빛은 막았다는 기발한 전설이 전해지는 것도 애연의 경지를 넘어서는 전설이다. 연기와 냄새의 지독함이야 아랑곳 하지 않았다는 말도 되니 이것이야말로 목숨을 걸고 피운 담배였다.

 

지금은 이마저도 완전히 폐지가 되었지만 한동안 버스나 비행기에 탑승하면 앞에서 절반은 금연석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흡연석이었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실소를 금할 수 없지만, 막힌 공간에서 절반이 뒤에서 담배를 피워대는데 앞에서 온전할 리 없건만 아무튼 그랬다. 군에서도 벙커로 된 내무실 안에서의 흡연을 금지한 눈치 없는 소대장은 기본권을 억제한다고 왕따가 되기 일쑤였고 결국 내무반 한편에 재떨이를 두어 한쪽에서만 담배를 피우게 했다. 이게 모두 ‘피우라고 준 담배를 못피우게 하는 것은 먹으라고 준 부식을 냄새 난다고 못 먹게 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는 그럴듯한 논리
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결과였다.


한 달에 15갑을 주는 필터없는 화랑담배는 턱 없이 모자랐다. GP나 GOP에서는 투입 전 암암리에 담배 사재기가 공공연한 일이었고 그마저도 떨어질 때면 슬쩍, 자기의 사제담배 몇 갑은 소대원들에게 풀 줄 아는 눈치 빠른 소대장이야말로 인기’짱’이요 목숨 바쳐도 좋을 리더였던 것이다. 정, 담배가 없을 땐 ‘복불복’도 감행하여 피울 사람만 선정하기도 하는데 이런 방법도 있었다. 분대원이 담배 한 개피를 가지고 돌아가며 피우다가 재를 떨어뜨린 사람은 당분간 흡연계에서 침묵해야 했다. 분대장급 고참이라면 암암리에 눈치껏 후임병들이 조달을 했지만 상위 1%가 아니라면 한 번 탈락은 다음 담배가 들어 올 때까지 참을 수밖에 없었고, 또 이런 것들이 쌓여 하나의 추억도 만들곤 했던 것이다. 염치없는 간부가 병사들의 화랑담배를 얻어 피우는 것은 갈취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고 소원수리의 단골메뉴이기도 했다. 물론 담배가
떨어졌다거나 서로 나눠 피운다는 의미로 한 개피 피울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반드시 벌충해 주는것이 불문율이었고, 비흡연 사병의 담배는 골초 사병들에게는 샘물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후방에서 만들어 보내는 위문대에는 면수건과 칫솔 치약에다가 담배 한 갑 정도는 들어가야 최소한의 위문대 구실을 했다. 하도 담배를 ‘공공의 적’으로 몰아대니 말하기가 무엇하지만 대한민국 국군사에 화랑담배가 키운 전우애도 만만찮음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화석으로 남은 전우의 상징
화랑담배는 국군의 역사와 함께 했다가 경제성장과 더불어 사라진 쥐라기 공룡 같은 존재다. 이제 50대 이상의 남자들이 품고 있는 병영의 추억과 전쟁기념관의 한 켠에서나 흔적을 내 보이는 박제로 남아 있을 뿐이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제조된 최초의 궐련은 1945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모습을 보인 ‘승리’였다. 화랑담배는 1949년 5월 처음 선을 보인 이래 장장 32년간 5차례나 도안을 바꿔가며 나온 최장수 담배였다. 마지막 표지 디자인이 고구려 벽화를 이미지화한 것이었다.


필터를 달기도 하고 떼기도 했다가 종이 필터를 붙이기도했던 추억 속의 화랑담배는 1981년 12월을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게 무려 27억 갑을 넘겼다. 대한민국 남자의 흡연률 상승에 지대한 기여(?)를 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게 본다면 최소한 50대는 되어야 화랑담배를 구경했다고 할 수 있으나 아직도 화랑담배 운운하는 이유는 군납 면세 담배가 작년까지 건재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군납’이지 ‘화랑담배’는 아닌데도 말이다. 1981년, 화랑담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그 대체품으로 ‘한산도’가, 그리고 ‘은하수’가 보급되었다. 이때부터 연초구매비로 병사 1인당 이틀에 100원씩 현금으로 지급되어 개인별로 구매하게 했다. 그러나 보급시절과 다르지 않아 거의 전량을 일괄 구매한 후 흡연병사들이 추가로 염출을 하여 비흡연 병사에게 구매비를 되돌려 주는 변칙이 일상다반사였다. 담배의 질도 크게 나아졌다고는 하나 일반사회의 기준으로 보았을 땐 중간급 상표의 담배가 계속 공급되었다. 1990년 2월부터는 ‘백자’가, 1994년 11월부터는 ‘솔’이, 2000년 12월부터는 ‘88 라이트’가 보급되다가 ‘디스’를 끝으로 250원 짜리 군용담배마저 사라지게 된다. 보건복지부, 환경부, 노동부 합동으로 2005년부터 줄기차게 주장해 온 군용담배가 흡연을 조장한다는 주장에 의해 ‘쉬운’ 흡연에서 ‘어려운’ 흡연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지금은 각급부대가 금연교실을 운용하고 군병원에서도 금연보조제를 무료로 보급하는 한편, 금연병사에게는 마일리지를 적용하여 포상 조치까지 하는 등 금연운동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긴하다. 그러나 PX에서 판매되는 담배의 양이 줄어들었는지는 통계가 정확하진 않다. 확실한 것은 흡연병사들의 경우 얼마 안 되는 봉급을 다 틀어넣어도 담배 값에 턱 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결국 고향에 계신 부모님에게 담배 값까지 손을 벌려야 하는 폭이 확대되었단 사실이다. 금연은 권장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반대할 사람이야 있겠는가? 부모들도 이 기회에 내 자식이 금연을 해 줬으면 하는 맘이야 오죽하겠나. 그런 면에서 금연은 확산되어야 하겠지만 양지쪽에 옹기종기 모여 서서 시원하게 내뿜던 연기와 농 짓거리 대화의 시간은 정말 사라져간 전우처럼 사라져 버렸다.


“겨레의 늠름한 아들로 태어나 보람찬 길에서” “한 가치 담배도 나눠 피우고 기쁜 일 고된 일 다 함께 겪는 우리는 전우애로 굳게 뭉쳐진 책임을 다하는 방패”들이 나눈 전우의 상징, ‘화랑담배’는 이제 없다. 병사들의 할아버지 세대에서 아버지 세대로 이어지던 군대의 마초적 아이콘, ‘화랑담배고’(考)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