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1962년 미 대사관 기밀문건

醉月 2010. 3. 23. 08:44

1962년 미 대사관 기밀문건
‘한국 군부 내 주요 파벌 분석 및 구성원 명단’

기획·황일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 번역·최요섭│서울대 국사학과 석사·한미관계사│

“5·16 이후 파벌 문제 민간으로 확산…젊은 세력들 다시 정변 일으킬 것”

 

◆ 편집자의 말

1961년 5·16군사정변과 1979년 12·12쿠데타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당시 군부 내에 얽히고설킨 파벌과 사조직 문제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속한다. 공식 지휘체계 대신 출신지역이나 기수 같은 사적인 유대감으로 뭉친 세력의 존재가 군사쿠데타의 핵심동력이었다는 것이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만주와 일본, 광복군 출신이 한데 얽힌 초기 한국군의 복잡한 인적 구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이로 인해 형성된 군 내부의 학연·지연 중심의 조직문화가 세대를 넘어 오랫동안 이어졌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문건의 작성자인 필립 하비브 전 주한 미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 1971년 주한 미대사로 부임할 무렵의 사진이다. 5·16군사정변은 미국으로서도 사전예측이 불가능했던 돌발변수였다. 한국의 지배세력이 하루아침에 교체되는 이 초유의 사태를 맞이해, 당시 주한 미대사관은 가능한 모든 채널을 동원하여 새 지배세력의 주요 인사들과 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분석하기 시작한다. 1년 남짓의 시간이 지난 1962년 8월, 주한 미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이던 필립 하비브는 한국 군부 내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변수가 파벌주의라고 결론짓고 이를 36쪽에 달하는 장문의 기밀전문에 담아 본국에 송신한다. 박정희 등 군사정변의 주도세력은 물론 정일권, 백선엽, 이형근 등 당시 군부의 핵심 실력자들과 그들이 이끌고 있는 주요 파벌을 해부한 보고서였다.
‘신동아’는 40여 년간 미공개 상태로 잠들어있던 문제의 보고서를 단독으로 입수했다. 마상윤 가톨릭대 국제학부 교수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찾아낸 보고서에서는 한국군의 초기 파벌을 크게 네 그룹으로 구분하고 있다. 정일권의 함경도파, 백선엽의 평안도파, 이형근 그룹, 그리고 일본파다(이 가운데 만주군사학교 출신이 주축을 이루는 함경도파와 평안도파를 묶어 만주파로 통칭하기도 한다). 여기에 이범석이 이끄는 민족청년단 계열 등을 부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들 주요 파벌의 발생과 당시의 규모, 그 장성급 구성원들의 면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꼼꼼히 분석하면서, 보고서는 한국 군부의 지도급 인사들이 구성원의 만연한 부패나 비리를 덮어주고 승진 등 인사문제에서 특혜를 주는 식으로 자기 파벌을 관리해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보고서는 전체적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지만, 이 가운데 특히 흥미를 끄는 부분은 5·16군사정변의 원인을 파벌관계에서 찾는 대목이다. ‘젊은 대령들’로 불리는 중간그룹 장성들이 파벌에 얽매인 선배들의 부패와 지연에 따른 인사로 불이익을 받게 되자 선배들을 제거하고 적체된 진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변을 일으켰다는 설명이 대표적이다.
이와 함께 군사정변 이후 기존의 파벌세력이 정리되면서 새로 기수별 파벌구도가 펼쳐지고 있다고 전한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4년제 정규교육 코스를 밟은 젊은 장교들이 선배들에 대해 갖고 있는 불신과 불만을 새로운 갈등요인으로 지목한 분석은, 먼 훗날 신군부가 12·12쿠데타를 일으키게 되는 이유와 배경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랍다. 김종필이 창설한 중앙정보부가 5·16 주도세력 내부의 갈등을 촉발하는 고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도 마찬가지다.
주지하다시피 1961년 이래 1990년대 초반까지 30여 년 동안 군부는 한국의 지배세력으로 막강한 권력을 유지했다. 군사정변 이후 군부의 세력과 파벌구도가 정치계와 재계에까지 뻗어나가고 있음을 우려하며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설명하고 있는 보고서 속의 문장 은 30여 년의 시간 동안 고스란히 현실이었다. 참고로 보고서를 작성한 필립 하비브 당시 참사관은 1971년 주한 미대사로 다시 한번 서울에서 근무한 뒤 1976년 국무부 차관,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의 중동특사로 활약하며 미국 외교의 핵심인물로 성장한다. 주한대사 시절 그가 지었던 정동의 ‘하비브 하우스’는 현재도 미대사관저로 쓰이고 있다.
25쪽의 본문과 파벌 구성원 명단을 정리한 7개의 첨부문서로 돼 있는 보고서 전문을 번역, 게재한다. 문장은 사료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되도록 직역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나 직책, 기관이나 부대명은 영어 표기를 그대로 옮긴 뒤 자료를 확인해 최대한 바로잡았지만, 일부 원문의 오기(誤記)가 남아있을 수 있다. 혜량을 당부드린다.

   

◆ 기밀전문

수신 : 워싱턴 국무장관

발신 : 서울 미대사관

일시 : 1962년 8월17일

제목 : 한국 군부 내 파벌주의

요약

1. 한국 군부 내 파벌주의(factionalism)는 대한민국 내부에 존재하는 가장 복잡한 정치 군사적인 사안 중 하나로서, 그 역사는 1945년 조선경비대 창설 혹은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북한 출신 장교들의 유대가 약해지고 있으며, 현 정부 및 정부 내 최근 선임자들은 초기의 한국인 장교 선임자 집단 중 하나만을 제외하고 모두 해체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1945년에서 1960년을 특징짓는 일종의 파벌주의가 점차 변화하고 약화하는 경향을 잘 설명해준다. 이러한 가운데 새로운 현상이 이들 세력을 대체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선임 및 기타 장교들이 제거되고 군부가 정치에 깊이 관여하는 과정은 심각한 파벌투쟁에 새로운 지점을 마련했다. 심지어 경제 분야에서는 국영기업의 주요 간부 상당수가 전·현직 장교들로 채워지면서 군의 파벌주의가 경제 분야와 긴밀하게 연결되기에 이르렀다. 민간인 집단이 현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서 스스로 군내 파벌에 유착하려고 시도할 가능성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실제로 군부의 무력에 의한 현 정부의 타도 현 상황에서 실행 가능성이 매우 높은 유일한 전복의 수단으로 보인다. 군 내부에서 정권 타도세력이 만들어진다면 이는 파벌적인 기반에서 조직될 것이기 때문에, 군부의 파벌주의에 대한 연구는 한국의 정치 군사적인 미래를 전망하는데 매우 중요하며 심지어 경제적인 분야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주제다.

 

역사적 배경

2. 파벌주의는 16세기 초반 혹은 이전부터 한국에 광범위하게 존재해왔다. 파벌주의를 규정하고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파벌주의는 비교적 통신이 양호한 작은 나라에서 고도로 집중된 통치형태 및 권위적인 정부의 전통, 그리고 적은 수의 주요 관직에 대한 심한 경쟁과 관련이 있다. 중앙정부는 한국 내 모든 것을 통제하되 심지어는 서울 밖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까지 간섭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 및 지방의 주도권은 발휘될 수 없고 야심의 목표는 막강한 권력을 쥔 중앙정부를 통제하는 데 집중돼 있다. 이러한 욕망은 관료 특히 인사권 중에서도 관직 분배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세력 및 파벌의 조직 형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인의 삶에서 매우 끈질기게 존재하는 현상 중 하나인 파벌적 형태는 이씨 왕조의 붕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일본이 자신의 통치기구를 통해 이용했으며, 지난 4세기의 상당기간에 그러했던 것처럼 1945년 이래 군과 민의 삶에서 중요했다. 현재 상황에서 파벌주의는 가까운 미래에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5·16군사정변의 주도세력. 가운데 선글라스를 쓴 인물이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이다.

3. 대부분 한국 파벌주의는 전통적으로 문관 계급 내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군-민 파벌주의는 한국에서 뿌리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뿌리는 한국의 근대 혹은 중세 역사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군사 쿠데타인 1170~80년 정중부의 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사건은 문관이 지배적인 이전 정부의 일시적인 붕괴 및 두 차례에 걸친 문관에 대한 대량학살을 초래했다. 비록 이씨 왕조가 한 장군에 의해 수립되었지만, 조선은 문관들에 의해 강력하고 철저하게 518년간 지배되었다. 이 시기 전체를 통틀어 상급 관료는 문관과 무관 사이에 불화가 있었고, 일부 가문들은 현명하지 못한 문관의 지배에 분노했을 뿐 아니라 문관 파벌이 전통적인 조선의 군부세계에 상습적으로 침투하는 것에 분개하면서 ‘무관의 가문’을 선택했다. 이러한 전통은 현재의 상황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가문들의 일부, 특히 유재흥 예비역 중장, 김정열 전 공군참모총장 및 국방장관, 신응균 예비역 중장(현 독일대사)과 같이 유명한 인물들이 속한 가문은 자신의 군사적 전통을 조선왕조에서 일본 정부로 옮겼고, 이후에는 새롭게 창설된 한국군 내에서 자리를 잡았다. 이들 소수 집단은 과거와 연약하지만 배타적인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으며, 본질적으로는 현재 한국군의 가장 중요한 세력집단의 중심인 소위 ‘일본파’와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다. 이러한 파벌의 지도자는 조선왕조에서 외무대신을 역임한 고 이하영 자작의 손자로 국방장관을 지낸 이종찬 예비역 중장인데, 그는 문관 가문 출신으로 앞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

   

정의

해방 전 중국에서 활약한 미 OSS 요원들과 광복군 대원들의 기념사진. 앞줄 가운데가 이범석 대장이다.

4. 파벌주의는 일반적으로 세력 간의 권력투쟁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선 다소 모호하고 정확하지 않은 용어다. 현재의 개념과 단절적일 수도 있지만, 조선왕조 시기와 비교했을 때 적합하거나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는 세력들을 포함하고 있다.

 

5. 군에서 가장 일상적인 용어로서 파벌은 일정 지역 출신의 인물이라거나 혹은 자신의 가문이 그러한 지역과 오랜 유대를 가지고 있는 지역적인 개념의 세력으로 특징지어진다. 특히 지역적 파벌 중에서도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의 파벌만이 오랫동안 자주 언급되어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6. 파벌은 또한 특정 장교들이 주요 훈련교육을 받았거나 훈련 기간에 긴밀한 유대가 형성된 일부 지역 혹은 학교를 대표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세력이 바로 소위 만주파(만주지역 군관학교 출신)로서, 백선엽과 같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혹은 졸업했거나, 아니면 대부분은 박정희, 이한림, 이주일 등과 같이 첫 두 해는 만주군관학교에서, 이후에는 도쿄에 있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나머지 2년을 보냈다. 도쿄에서 생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장교들의 근본적인 유대는 만주에서 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만주파’라는 용어는 때로는 만주군관학교 출신이 아닌, 만주에서 오랫동안 실제로 거주한 이들에게 적용되기도 한다. 그 예로 제5군단장 출신 임충식 중장, 고 김창용 중장(만주군 사병출신), 강영훈 예비역 소장, 김응수 예비역 중장 등, 혹은 기타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 관동군에서 복무한 이들, 또는 원용덕 중장의 경우처럼 만주군관학교 교관을 역임한 이들도 있다. 강영훈, 민기식(제1군사령관), 안광호(워싱턴 주재 육군 무관) 등은 만주군에 복무하지 않았고, 만주에 위치한 일본 민간대학을 졸업한 학도군사훈련단(ROTC) 장교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만주파’의 일원으로 포함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지역적인 유대보다는 기관적인 유대가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연속적이고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서 만주군관학교 졸업생 중에 만주와 인접한 함경도 출신이 상당수 혹은 다수를 이루고 있고, 따라서 이러한 파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함경-만주파’라고 일컬을 수 있게 된 것이다.

 

7. 다음으로 중요한 지역 출신 파벌로는 ‘일본파’가 있는데 이들은 일본의 주요 군사학교(일본육사, 도요하시보병학교, 항공학교 등)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장교 출신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가끔 일본 민간대학에서 학도군사훈련단(ROTC) 과정을 수료한 이들과 관련 있는 장교들(예를 들어 현 공군참모총장 장성환 중장의 경우)은 ‘학도장교’ 집단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들 역시 ‘일본파’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몇몇 경우에서, 이들 장교 역시 일본에서 태어났거나(유재흥) 혹은 성장했다(신응균).

 

8. 세 번째 지역 출신 파벌은 ‘중국파’다. 이들은 만주파 또는 일본파 출신보다는 유대감이 약한데, 이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기관이 아닌 넓은 지역적인 유대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인은 중국 내 군사기관의 발전수준이 상당히 낮은 데 있다. 따라서 중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장교들은 소규모의 여러 교육기관을 거쳤는데, 이들 기관 중 일부는 자신의 거주지역 내에 있는 지역 군벌(warlords)이 설립한 것이었다. 중국파 장교들 중 극소수만 동급생이 있고, 그들은 대부분 훈련기간에 서로 알지 못했다. 그들이 받은 교육에 대해 만주군 및 일본군 출신들은 일본 교육기관에서 배운 것에 비하면 체계적이지 못하고 수준 이하라고 평가했다. 동급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 세력의 연령 또한 매우 다양하며, 이들 중 몇 명은 이범석 혹은 현 외무장관인 최덕신 예비역 중장과 같이 연로하거나 혹은 이미 퇴역했다. 이범석 장군은 자신의 강한 개성으로 중국파를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부 중국파 장교들이 복무한 바 있는 광복군에서 지대형(지청천)이 죽은 후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파 장교들은 이범석의 주위에 세력을 형성하는 추세다. 이들이 현재 강한 유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유대는 통상 ‘족청파(조선민족청년단파)’라는 또 다른 세력 아래에 있다. 이와 같이 중국파는 영향력 있는 파벌을 형성하기에는 응집력이 너무 느슨하고, 육군참모총장을 배출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다만 김신이 공군참모총장이 되었고, 만일 손원일을 포함한다면 해군참모총장 1명을 추가할 수 있다).

 

9. 위에서 언급한 지역파벌은 특정 세력을 함축하는 의미를 전달한다. 최상단에는 일본파가 있다. 이들은 일본 점령의 수혜자들이었으며, 그 부친이 일본장교였거나(신응균, 유재흥), 또는 일본 점령의 혜택을 받은 세력에 속했거나(이종찬), 아니면 매우 우수했기 때문에(정래혁) 일본은 이들이 일본군의 출세 코스를 누리도록 허용하였다. 이들은 현재 혹은 미래의 일본군 지도자인 자신들의 옛 동료 혹은 친구들처럼 일본군 장군이 되길 희망했다. 그들은 전 법률 및 내무장관 이호 또는 전 내무장관 김형근처럼 일본 내 일류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민간인 지도자들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연약하나마 유대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은 대부분의 다른 한국인 세력보다는 일본 출신 세력과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다. 그 다음 세력은 만주파, 그중에서도 특히 도쿄로 건너간 이들이다. 개개인으로 봤을 때 연령과 애국심 인격 등은 존경받을 만하지만 군 장교로서 중국파는 명성을 얻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장교들은 모두 어느 정도 한국군 장교 집단 내에서는 명망세력이다. 이들은 해방 이전에 훈련을 받았는데 일본 및 만주파 장교들이 이러한 훈련을 해방 이후부터 군사학교에 4년제 학제가 설립되기까지(첫 졸업자는 1955년에 나왔다) 한국 내에서 훈련받은 장교들보다 상당히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보다 명망이 낮은 세력은 소위 학병 또는 학도군사훈련단(ROTC) 출신으로 이들은 한국(국방부 박병권, 부참모장 김영배), 일본(전 참모총장 장도영, 현 참모총장 김종오) 혹은 만주(강영훈, 김응수) 등의 민간대학에서 학도군사훈련 교육을 받았다. 그보다 낮은 명망세력으로는 일본군 사병 출신이었다가 한국군으로 들어온 장교들이 있다. 송요찬, 백인엽, 김진위, 유양수, 이후락, 김창용, 임충식, 함병선 등이다.

하지만 학생장교 및 사병출신 장교들은 파벌로 형성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한국 육군의 파벌세력을 좌우하는 명망가 집단을 부각시키기 위해 언급될 뿐이다. 대체로 1945년에서 54년까지 졸업한 한국 육군 내 동기졸업생 장교들은 모두 충분한 훈련기간을 거치지 못했고, 또 그렇게 인식되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명망세력가로 발돋움하지 못했다. 1955년 이후 졸업생을 배출한 4년제 군사학교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명망세력과 명망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이해집단이 한국군에 새롭게 출현했다. 현재 구 파벌세력들은 덜 언급되는 반면 동기졸업생들로 구성된 집단이 점차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10. 위에서 언급한 지역파벌세력들이나 동기졸업생 집단들과는 별개로, 선임장성들 주변에 집단을 형성한 사적 파벌들이 종종 언급되긴 하지만, 이들은 주로 지역파벌의 대안을 제시할 때만 논의되는 경향이 있다. 정일권(함경도)은 가장 응집력 있는 집단을 주도할 뿐 아니라 만주파 내에서 연장자이기 때문에 만주파의 수장으로 간주되고 있다. 백선엽은 평안도파의 수장으로 알려져 있다. 전 육군참모총장인 이형근은 사적인 파벌세력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군사 장교집단 중 족청그룹이 있다. 이들은 이범석 장군 또는 그가 이끌고 있는 청년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과 연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장교들이 온건세력(원용덕) 또는 민주세력들과 가깝다는 소문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중도적인’ 혹은 ‘민주적인’ 파벌의 개념으로 묶을 수 있을 만큼의 수적인 장악력을 담보하고 있지 못하다. 마지막으로 현재 혁명적인 집단의 핵심이 되는 장교들은 ‘혁명파’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역시 소수집단이다.

 

주요파벌들의 특징과 역량

11. 위에서 모든 세력에 대해 언급했지만 그중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파벌은 2개 정도로 함경도파와 평안도파다. 중국파는 충분한 응집력을 가지고 있지 않고 현재 대부분 퇴역했다. 일본파 역시 퇴역의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고 심지어 수적으로 소수여서 주요 장교 수는 20명도 안 되는 수준이다. 만주군관학교 출신 집단은 지난 보고서에서 파악한 결과 본래 60여 명으로 구성된 엘리트 선임장교 집단이지만,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9명에 불과하다. 더구나 소위 만주파에 속한 장교들 대부분은 함경도 혹은 평안도파에도 속해 있는데, 대부분은 전자에 속해 있어서 함경도파가 점차 보강되고 있는 실정이다.

 

12. 북부 파벌의 막강한 역량과 북부 출신 장교들의 중요성 때문에 우리는 우선적으로 이들의 뿌리부터 살펴봐야 한다. 아주 오래전 국경에 살던 북부지역 사람들은 남부지역에 비해 무관의 전통을 더욱 발전시켰고 이는 여전히 종종 회자되고 있다. 조선시대, 문관뿐 아니라 고위 무관은 정책에 따라 남부지역 출신이 많았다. 북부사람들은 조선왕조의 문관 중심의 세계에서 대부분 밀려났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모험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그들이 택할 수 있었던 직업은 남부사람들이 천대했던 것들이었고, 북부인들은 남부에 비해 상업과 군에 대한 반감이 훨씬 덜했다. 더욱이 1931년 이래 일본은 조선 북부지역과 인접한 만주에서 병력증강을 꾀하고 있었다(만주의 GNP는 몇 년간 연 25%의 증가세를 보였다). 전술한 대로, 일본의 군사적인 지원으로 인한 군사적인 증강은 곧바로 한국인 장성들을 배출한 민간 혹은 군사훈련학교의 수립과 만주 내 교육기관 설치로 이어졌다. 따라서 일본의 통치하에 있는 만주국에 북부 출신 인물이 더욱 많이 참여함에 따라 한국군에서 북부 출신의 지도력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로 인해, 1년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상황은 남부 출신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육군 장성 자리에 오른 젊은 박정희에게 독특한 지위를 부여했다. 그는 압도적으로 우월한 북부 출신들(만주파가 우세를 점한) 사이에서 누구도 차지할 수 없었던, 파벌들을 중재하는 영예로운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만주파 장교들은 여전히 북부지역 파벌 중 최상위 자리를 점하고 있다.

 

13. 지연과 학연은 파벌들을 결합시키게 마련이고, 유대를 강화시킨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우리는 한국군 내에서 남부파벌에 대한 북부파벌의 압도적인 역량을 설명하기 위해 예의주시해야 한다. 남한이라는 공간에서 북부 출신들은 뿌리가 없고 연고가 없는 이방인들이다. 그들은 친가와 처가의 대가족을 데리고 내려왔기 때문에(향후 엄청난 부패의 한 원인이 된다), 가난한 그들은 생계유지에 대한 욕구가 크다. 이러한 욕구가 그들을 한데 결속시켰고, 그들은 조직을 통제하기 위해 자신들의 지역적인 연대를 이용했다. 그리고 즉시 남한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일상적이었고, 그 영향력은 남한 내 기업뿐 아니라 군사정부하에서는 북부 출신이 장악한 관료조직 그리고 경찰에까지 미쳤다. 그들의 성공과 영향력은 남한에서 매우 크고 영향력이 있는 두 개의 조직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서울의 동대문 상업계, 그리고 한국군이다. 만주파 내 북부 출신 인물들은 지도층을 형성했지만 그 수는 미약했다. 그들의 지위는 기타 장교들 및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의 인물들로 인해 부각되었다. 이후 만주파의 장교들은 다른 이들보다도 강력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자신들보다 더 큰 지역파벌의 지도급 인사로 발돋움했다.

 

만주파

14. 두 개의 주요 파벌인 함경도파와 평안도파를 설명하기에 앞서, 만주파를 매우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 주제는 특별한 설명을 요하는데, 이는 중요할 뿐 아니라 상당히 어렵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모든 문제는 비밀을 요하는 사실의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비밀 혹은 비밀해제가 된 정확한 역사가 없다는 것이 이상하다.

 

15. 만주의 일본 교육기관들은 일본 육군이 아시아 본토에 대해 일정수준 자치권을 행사하기 위한 정책의 직접적 결과다. 1920년대 후반, 일본 육군은 아시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팽창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관동군의 기구 및 남만주철도 경계임무를 이용했다. 관동군의 야망은 만주, 중국 북부, 몽골에 거대하고 반자치적인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관동군은 일본 내각의 통제에 분노하고 있었으며 일본 의회의 통치를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따라서 관동군은 되도록 독립적으로 행동하고자 노력했다. 이를 위해 관동군은 자신이 직업 및 훈련조직을 가동하기로 결정했다.

 

16. 1932년, 관동군은 만주를 점거한 즉시 장쭤린(張作霖)이 설립한 목단의 중국군관학교를 인수하고 6개월 과정의 장기 장교훈련과정을 개설했다. 첫 3개 학년이 수료한 1년 반 이후, 본 과정은 2년 과정으로 개편되었는데, 이는 도쿄에 있는 일반참모학교(the General Staff College)의 과정과 상당히 흡사했다. 4개월의 기본훈련, 14개월의 정규수업 및 6개월간의 현장실습훈련이 그것이다. 1939년 전쟁의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일본 육군은 확대 개편된 4년 과정을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새로운 수도 신경(新京)에 개설했다(실습 포함). 목단군관학교 및 강사들은 9기 이후 신경으로 자리를 옮겼다. 본래 1939년도 입교생들은 신경에서 2년 과정을 거친 후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해 도쿄 일반참모학교에서 2년 과정을 거칠 예정이었다. 하지만 미국과의 전쟁이 발발한 이후 과정은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마지막 기수는 신경에서 1년, 도쿄에서 2년 과정만을 이수했다. 따라서 기수들의 문제와 유대감은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17. 만주군관학교는 관동군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1년에 600여 명이 배출되는 졸업생은, 주로 졸업과 동시에 일본군 예비부대 소위로 임관하는 일본군 장교와 관동군 소위로 임관하는 일본군 장교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관동군 내에서 복무하는 동안 열심히 경험을 쌓아서 진급하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명령을 받는데, 이를 통해 이들은 정규 일본군 및 출세코스로부터 어느 정도 격리된다. 정규 일본군 장교들은 물론 이들을 약간의 거리감을 두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명예학도는 도쿄 일반참모학교와 관계를 끊을 수 있다는 조항이 이 둘 간의 유대를 형성했다. 다만 하나의 암시는 분명하다. 순수한 만주군관학교 출신은 도쿄 출신보다 한 단계 아래라는 사실이다.

 

18. 관동군의 이해는 한편 국제적이다. 대동아공영권의 이상에 발맞춰 관동군의 수뇌부는 아시아에서 일본의 이익을 위해 복무할 일종의 국제군을 꿈꿨다. 이를 바탕으로 그들은 관동군 장교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일체화된 민족(associated peoples)’ 안에서 우수한 청년들을 뽑는 방식을 도입했다. 초반에 목단군사학교는 장쭤린이 구상한 대로 만주에서 차출한 중국군 장교가 지휘하는 만주-중국군 개념을 반영했다. 중국인이 아닌 장교들은 중국어 입학시험을 통과한 후에만 입학이 허용됐는데, 일례로 300명 지원자 중 한 명의 일본인만이 4기 입학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다. 한국인은 지휘관 과정 입학이 거의 허용되지 않았는데, 김응조 예비역 준장만이 유일하게 중국군 장교로 등록하여 과정을 이수했다. 그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그 후 5기부터는 한국인의 등록을 장려하였다. 그럼에도 이는 중국어를 알고 그 부대원과 대화가 가능한 이들을 대상으로 했다. 따라서 이를 위해 모든 졸업생은 관동군 안에서 중국어를 익혀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인이 상당수 증가함에 따라 목단과 신경 군관학교는 매년 상당수의 중국인과 약간의 몽골인, 만주인(선발 가능할 경우), 한국인 및 소수의 백계 러시아 장교(쑹가리 부대와 철도기술 업무를 위한)를 훈련시켰다. 한국인 참여자는 1934년 최소 2명에서 1939~41년 13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19. 만주 간부후보학교(OCS)와 군사학교가 한국인들을 일본의 야망인 만주와 아시아제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유일한 도구는 아니다. 일본은 또한 대련의 기술학교, 케노쿠(Kenkoku)로 불리는 최우등생들이 등록하는 대학, 그리고 광명이라고 불리는 간도 지역 거주 한국인을 위한 중·고등학교 등을 설립했다. 첫해에 예비역 소장 김응수는 학생장교였다. 케노쿠는 학생장교인 예비역 중장 강영훈, 제1군사령관 민기식, 워싱턴 주재 육군무관 안광호 준장, 그리고 예비역 병참장교 중장 정진환(이형근 장군의 사위)을 배출했다. 광명고등학교가 특별히 주목된다.

 

20. 예측건대 모든 면에서 함경북도의 건너편인 두만강의 북쪽 가에 있는 간도에 설립된 광명 초중등학교와 같이 일본이 군사적인 완벽성을 체계적으로 추구한 곳도 없다. 불안정한 한국인의 상황을 통제할 뿐 아니라 더욱 충성스러운 한국인을 육성하고 반항적인 이들의 활동을 더욱 잘 파악하기 위해서, 만주에 주재한 특수 일본정보부대는 규슈 미야자키현 출신의 히타카라는 한국어를 구사하는 일본인을 교장으로 임명하여 한국인을 위한 중·고등학교의 설립을 지원하였다. 최근까지 주한 유네스코(UNESCO) 책임자였던 장내원은 이 학교의 영어교사였다. 광명학교는 특별히 재능 있고 유능하지만 가난한 한국인 소년들을 위하여 함경북도의 학제를 채용하여 학생들에게 본 학교에서 수업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제공했다. 그들이 졸업하면 상당수가 경찰에 채용됐고, 그중 일부는 아직까지도 경찰에서 활동하고 있다(남북한 모두 마찬가지다). 하지만 최우등 학생들에 대해서는 특히 신경에 위치한 군관학교에 입학하도록 격려했다. 정일권 장군(대사)은 도쿄로 건너간 이후 목단에서 수업하도록 위탁받았다. 신경의 1회 졸업생인 한국인은 모두 광명 출신이다. 강문봉을 포함한 많은 다른 이들은 이후 광명에서 왔다. 따라서 만주파 안에는 광명 졸업자가 특별히 응집력 있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들의 존재는 만주파 내에서도 함경도파의 주도적인 세력이고, 한국군 내에서 전체 함경도파의 역량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정일권, 박임항, 윤태일, 김동하, 이한림, 강문봉, 방원철, 이기건, 최주종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21. 미래의 역사가들은 일본군의 후원하에 진행되는 매우 역동적인 만주의 경제(수년간 연평균 25%의 GNP 성장률을 보인)의 비전이 박정희 장군과 김동하의 혁명에 대한 이상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론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그 역동성을 한국에 이식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볼 근거가 충분하다.

 

22. 정확한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현재 기록할 수 있는 목단과 신경의 한국인 졸업생 다수를 명부에 올릴 필요가 있다. 논평을 곁들인 상당수의 명단을 첨부문서 1로 함께 보낸다.

 

23. 이 기록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만주군 장교의 상당수가 자신의 고향인 북쪽에서 남쪽으로 넘어왔거나 해방 이후 남한 내에 거주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반공적인 만주군 내에서 반공주의를 교육받았다. 게다가 정일권같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이들은 북한에서 권력을 잡은 이들에 의해서 자신이 친일파이자 제국주의자로 낙인찍혔음을 간파했다. 다른 직업과 뿌리 그리고 고향이 남한에는 없었기 때문에, 이들 장교들은 군정이 수립한 새로운 경비대에 몰려들었고 그 안에서 그들은 최대의 엘리트 전문인 집단을 형성했다.

   

24. 이와 동시에 몇 명은 은거하고 있고 또 몇 명은 북한군에서 장교로 활동하고 있거나 광명 졸업생일 경우에는 경찰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임항, 방원철, 김목은 모두 인민군으로 몇 년간 활동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8군 지휘관인 최주종 장군은 남한에 와서 경비대 장교가 되었다가 변절해 북한군 장교가 되었다가, 다시 변절하고 남한군 장교가 되었다.

 

25. 만주-함경파벌을 좀 더 살펴보면 부패문제도 파악할 수 있다. 부정부패의 문제는 실제로 한국군 전 기간에 걸쳐서 모든 선임 계층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하지만 부패와 관련하여 상당수의 장교를 포함하는 다른 그룹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이 문제는 파벌주의의 핵심 문제에 닿아 있다. 파벌은 다른 성원들과 경쟁하기 위해 만들어지며 효율적인 파벌의 지원만이 박임항과 같은 장교가 북한에서 넘어오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또는 최주종, 김동하, 강문봉과 같은 경력을 가진 장교들 혹은 양국진, 황호진, 안광호(워싱턴 주재 무관), 또는 그의 형제인 안광수 현 로스앤젤레스 주재 총영사 등이 보호받고 군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만주-함경파벌은 오랜 과정을 거치면서 이러한 기능을 수행했고, 그 지도자인 정일권과 백선엽은 모두 자신들의 군사적 국가적 임무에 덧붙여서 자기 파벌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기 파벌의 성원들이 파벌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면 위법행위를 하더라도 이들을 보호하고 계속 활동하게 할 뿐 아니라, 처벌을 받을 경우 복권시켜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직무유기를 했거나 최주종, 황호진, 안광수가 저지른 범행에 대해 파면한 뒤에 복권을 시켜준 사례-모두 정일권 참모총장이 지시함-는 그 점을 적절히 설명해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부패와 그것이 야기한 보호의 필요성은 파벌, 그중에서도 특별히 만주-함경파벌을 먹여 살렸는데, 그러한 보호가 파벌에 대한 충성심을 더욱 강고하게 만들었다.

(안광수의 사례는 극명하다. 그는 전군을 통틀어 가장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다. 적의 공격을 받고 퇴각할 때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직무를 유기했다. 도망쳤을 뿐 아니라 자신의 고향집에 숨어들어가 몇 달간 칩거했고 1950년 매우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았을 때 숨어 있었고, 심지어는 군의 지프를 자신의 자가용이라는 핑계로 유용했다. 안광수가 군법회의에 회부될 처지가 되었을 때, 당시 참모총장이던 이종찬은 그를 군법회의에 회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는 전쟁 초반 퇴각하기보다는 자결을 택했던, 일본군에 복무했을 당시 자신의 동료 장교였던 안광수의 부친을 존경했기 때문이었다. 이종찬은 안광수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서 손찌검한 것으로 문제를 처리했다. 정일권은 참모총장이 된 뒤에 안광수를 복권시켜주었다.)

 

26. 마지막으로 함경-만주파벌은 (선임장교들의) 은퇴로 인해 세력이 상당히 약화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목단 출신 장교들은 현재 송석하를 제외하고 모두 은퇴했다. 신경 그룹에서는 2명의 대령을 포함해 9명의 장교가 남아있다. 따라서 만주파 장교들은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 중인 다수의 동료가 있고 유대감도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지만 모두 10명에 불과하다. 해병대 안에 지휘관으로 활동하는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만주파의 유대감은 다른 부대에 비해 비교적 강고하게 존재하고 있다.

 

강문봉

함경도파와 정일권

27. 함경도파는 비록 만주파와 긴밀히 연결돼 있지만, 본 문서에서는 정일권 장군의 사적 지도력하에서 중요한 지역적 관점으로 고려될 것이다.

28. 함경도인은 완고하고 조직적으로 사고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북한의 경찰체제를 장악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들은 남한 경찰 내에서도 중요하다. 그들은 한국군 내에서 그들의 인척과 지역의 규모를 떠나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초기 군사영어학교 1학년 과정(1945년 8월)은 함경-평안 출신 장교들이 주도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전자가 우월했다.

   

정일권

29. 1950년까지 군이 평안도 파벌의 최고 지도력하에 있을 때, 1948~50년 기간부터는 특히 만주-일본파 장교들의 지도력하에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1949년 12월 이래로 참모장 대리로 근무하던 함경도파의 수장 정일권 장군은 1950년 7월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전쟁에서 가장 중요했던 기간을 거쳐 1951년 6월까지 재직했고, 한 사단과 2군단을 거친 후 1954년 2월 참모총장으로 재임명되었고, 1957년 퇴임하기 전까지 합동참모본부 의장으로 재직하였다. 그는 그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장교들과 같이 파벌적인 성향이 있었다. 그는 다른 장교들에 비해 오랫동안 군의 중요한 변화의 시기에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따라서 그는 기타 한국군 장교들에 비해서 임무, 지도, 진급, 사면 등의 지시를 하달하는 직위의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다. 모든 측면에서 그는 적어도 은퇴하기까지 한국군의 지도적인 인물이다. 그의 강력한 지지자들은 강문봉 예비역 중장, 이한림 예비역 중장, 박임항 예비역 중장, 황호진 예비역 준장, 공국진 예비역 준장, 김병삼 예비역 준장, 김전경 장군, 송석하 소장(국방대 총장), 김형일 예비역 중장, 임부택 예비역 중장(전라남도 나주 출신), 김영배 중장(부참모장), 최창언 중장(3군단장), 이주일 중장(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윤태일 중장(서울시장), 박현수 예비역 중장, 임선하 예비역 중장 등이 있다. 그의 파벌은 함경도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최홍희 중장 또는 이성가 중장과 같은 일부 함경도 출신 장교들은 가깝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적대적이다. 그의 파벌 중 일부는 임부택의 경우처럼 함경도 출신이 아니다. 송요찬 총리는 현재 그와 가깝다. 또한 그의 영향력은 선임장교들에게 한정되어 있다. 그에게 충성스러운 전 동료들은 현재 경제기획위원회, 총리실, 외무부, 군내 다른 직위, 민간 관료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의심의 여지없이 군복을 입은 적 없는 민간인들 역시 그의 파벌의 외곽에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정 장군은 민간인으로서 남한에서 실제로 살아본 적이 없고, 이곳에 근거지를 둔 가정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 민간인과의 관계는 그리 친밀하지 않을 것이며 일부 유명한 함경도 출신 사업가들은 그와 안면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군부와 민간사회에서 이와 같은 충성심과 이후 그들이 만든 충성심의 고리는 필요할 때 강력한 정치활동의 매체로 남게 된다. 정의 명성은 퇴색되지 않았다. 그는 사적으로 확보한 돈은 적지만 자금을 동원할 수 있고, 자신의 동료들을 보호해주고, 도와주며, 잘못을 용서해줌으로써 국가에서 더 낳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수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개인의 공적 이미지, 그의 국내외적 명성, 그리고 강력한 함경-만주파에서의 주도적인 위치 등을 고려할 때, 정일권은 아마도 군부에서 박정희 의장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이며,

군의 파벌 지도자에 대한 충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기제를 보유하고 있는 인물일 것이다.

 

평안도파와 백선엽

(위) 1963년 5월 이른바 ‘쿠데타 음모 사건’ 공판에서 법정으로 끌려가는 김동하, 박임항, 이규광. (아래) 1950년 10월 동평양에서 작전을 지휘하는 백선엽 장군.

30. 한국군의 첫 4성 장군이자 한국군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 직을 보유했던 백선엽 장군은 정일권의 파벌에 필적할 수준으로 한국군 안에서 거대한 파벌을 이끌고 있다. 1957년 11월에 작성된 명단에는 백선엽 그룹 안에 장성이 40여 명이나 포진해 있다. 백선엽은 평양 출신이고 한국 내에서 평안도 출신 중에서 선임 장교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평안도 그룹을 이끌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31.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평안도가 함경도보다 장교를 덜 배출했고, 학연을 통한 결속력이 약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유력한 평안도 출신 장교인 장도영은 백 장군의 파벌에서 조금 이탈해 있는데다 자신의 그룹을 이끌고 있기 때문에, 평안도 그룹은 함경도 그룹보다 응집력이 덜하다. 정일권이 이끄는 함경도 그룹보다 백선엽 지도력하의 그룹은 완결성이 떨어지며 백의 지도력에 의지하는 장교집단은 지역적인 경계에 다소 덜 매여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32. 백선엽 자신은 장교들의 충성심을 유발하는 데서도 정일권에 비해 한수 아래인 지도자다. 그는 한국군의 우수한 전술가일 뿐 아니라 인력과 파벌을 잘 통제할 수 있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주요 경쟁자인 정 장군과 같이, 백선엽은 혜택과 진급, 적절한 사면 등의 방법을 통해 자신의 파벌적 역량을 축적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부패는 어느 경우에서도 팽배해 있었지만 백 장군은 다른 참모총장들보다도 더욱 부패한 것으로 유명했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자질은 그의 파벌 성원들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들 중 다수는 송요찬이 1959년 추방되었을 때, 혹은 직접적으로는 혁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는 부패사건으로 인해 함께 숙청되었다. 이 파벌의 공적인 이미지는 이러한 요인으로 인해 손상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백은 공적으로는 잘 알려졌던 반면, 정일권보다 덜 정치적이었고 그보다는 약간 더 과묵했지만 솔직했다. 정과 같이 그는 남한에서 민간인으로 살지 않았고, 가정을 꾸리지도 않았다. 평안도 출신 민간인 집단이 일반적으로 함경도 출신의 민간인 혹은 경제지도자들에 비해 중요도나 조직적인 측면에서 떨어지긴 하지만, 백은 그들과 거의 접촉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기타 민간인 혹은 경제지도자들과도 거리를 두고 있다. 분명히 그는 민간인과의 관계를 어느 정도는 잘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기록을 통해서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 그는 기독교와 긴밀한 연계를 맺고 있지 않은데, 이 점이 그가 자신의 지역 동료들의 중요 집단과 관계를 맺을 때 불리한 요소로 작용한다.

   

5·16 축하 기념식에 참석한 장도영 중장(왼쪽)과 박정희 소장.

33. 비록 장도영이 백의 개인집단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지만, 그는 전반적으로 평안도파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는 그가 서열 2위의 장성일 뿐 아니라 서울 내 응집력 있는 평안도 출신 민간인 집단-특히 자신이 속해있는 영락교회-과 강력한 유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그의 부친과 모친의 가정은 북한 지역의 기독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 파벌은 따라서 장도영과 그의 조직의 와해와 더불어 더 큰 타격을 입었다. 현재 그 파벌에는 대령급에 해당하는 유능한 장교가 많이 있지만 이를 잘 지도할 수 있는 장성급 인사는 없는 것 같다. 따라서 평안도 파벌은 지도력상의 난제에 봉착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조직의 잠재 가능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장도영과 그의 세력이 숙청된 뒤에 이 사건이 자극제가 되어 위험한 대응이 촉발될 가능성이 있었던 상황이 벌어졌지만, 장도영, 송찬호 준장 및 박치옥 대령 등이 석방되면서 긴장이 해소되었다. 장교들을 경제계 심지어는 정부 부서에 배치하는 문제 역시 평안도 그룹과 구성원의 인재들에게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평안도 출신의 군부 및 민간 집단 사이에 공식적인 연관이 거의 없었던 반면, 기타 북쪽 지역 집단에 비해 평안도 출신 인물들, 특히 서울 내에 있는 강력한 정치집단과 그들의 응집력과 상조에 대한 우월한 감각은 유사시에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최근의 역(逆)쿠데타 시도가 보여준 바와 같이, 평안도 파벌은 서북청년단이 잔존한 지역으로 수천 명의 무직자 및 불완전 고용자들 가운데에서 군부와 연합할 수 있는 매우 강력한 핵심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형근

34. 세 번째로 한국군의 4성 장군을 거쳐 1956년 7월부터 57년 봄까지 참모총장을 지낸 뒤, 현재 필리핀 대사로 재직 중인 이형근은, 파벌에 관하여 이야기하자면 전반적으로 한국군 내 주요 개인조직 중 가장 약하다고 볼 수 있다. 야심 차고 결단력이 있으며 유능한 젊은 장교인 그는 김종필과 같은 지역인 충청남도 공주의 명망가문 출신이다. 그는 1942년 도쿄 일반참모학교를 졸업했다. 따라서 집안, 지역, 학력 등 모든 요소를 고려해볼 때 그는 일본파에 속한다. 일본인과 가까운 그는 자신의 연줄을 통해서 주일대사가 되고자 한다. 하지만 이후, 그는 주영대사로 발령되었다.

 

이형근 그룹

35. ‘바위(Rocky)’라고 불리는 그는 성공적인 파벌 지도자로서는 적어도 두 가지 결함을 지니고 있다. 그는 모든 선임 한국군 장교들과 민간의 지도급 인사들을 매우 싫어했고 그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 또한 그는 매우 거만하고 자신의 부하들에게 지나친 요구를 한다. 따라서 그는 다른 파벌과 연합해 자기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보다는 함경도의 정일권과 평안도의 백선엽의 파벌이 그에게 대항해 결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참모총장으로서 그는-다소 분명하지만 능숙하지 못한 방법으로-정일권파와 백선엽파를 와해시키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고, 이후 그들의 미움을 샀다. 배경적으로는 그는 일본파임에도 그들과 긴밀하게 활동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되길 원했던 작은 나폴레옹과 같이 주요 파벌들에서 떨어져서 활동하는 경향을 보였다.

 

1959년 6월 신임 미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매그루더 장군을 영접하는 김정열 국방장관.

36. 모든 주요 장성 중 이형근은 실제 관련성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평가할 수 없지만 이범석이나 족청과 매우 가깝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일부 남한군 장교들, 특히 일부 족청 장성들은 이형근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북쪽지역 그룹과 다소 거리를 두는 듯한 경향이 있다. 이와 관련된 장성들의 명단은 첨부문서 5에 수록되어 있다. 현 국방부장관, 제1군사령관 및 참모총장 대리, 그리고 5~6군단장은 그와 가까운 것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이는 이 장군에 대한 현 정부 일각의 특별한 친밀감보다는 군 지휘관 직위에 대한 남쪽지역 장교들의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37. 군부 가문과 두 차례 결혼했고 남한에서 자신의 위치를 잘 유지한 그는 민간인들과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으며, 1958년에서 1961년에 퇴임 후 서울에서 거주하는 동안 더욱 많은 것을 축적했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민간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기록이 없고, 이형근이 민간인 사회에서 거의 존경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다수일 것 같지는 않다.

   

일본파 (첨부문서 6 참조)

이기붕 국방장관(옆모습)에게 취임인사를 하는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왼쪽)과 정일권 전 총장.

38. 일본파는 작지만 긴밀히 짜인 선임 육군 공군 장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남부지역의 비교적 좋은 사회적 배경과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일본의 군관학교 및 비행학교 또는 일본의 매우 우수한 교육기관에서 교육받을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일본파는 따라서 일본과 이전에 맺은 긴밀한 관계를 통해 형성된 위치를 누리고 있다. 어느 누구도 이 집단의 구성원이 일본의 이익을 위해 자국의 이익을 희생했다고 비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본의 주장에 대해 일정하게 동의하고 친밀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가족은 일반적으로 일본의 정권에 협력-일부는 미온적이었을지라도-했고 그 조직의 몇몇 구성원은 일본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성장했을 뿐 아니라 군사교육도 받았다. 유재흥 대사와 신응균은 현재 한국어보다 일본어가 더욱 유창하다. 이러한 관계의 성격은 역설적이지만 핵심성원과의 관계는 매우 공고하다.

 

39. 하지만 그 조직의 역량을 평가할 때 중요한 것은 유대감을 형성한 원인보다는 조직의 친밀함과 능력, 국가 업무에 대한 경험, 그리고 파벌 성원 간의 연관성이다. 이들 장교의 숫자는-제시된 명단을 보더라도- 아마 그리 많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이 은퇴해 20명이 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파는 다른 집단에 비해 참모총장, 전 국방장관, 대사들이 많이 포진해 있다. 이 조직에는 비록 핵심성원은 아닐지라도 현재 합참의장도 포함되어 있다. 이 조직의 지도자인 예비역 중장이자 현 이탈리아 대사 이종찬은 정직하고 권위가 있을뿐더러 약 8년간 육군대학 총장으로서 현재 한국군에서 활동 중인 모든 선임 장교를 가르쳤을 뿐 아니라 이들의 은사였다. 그의 의형제인 예비역 중장 김정열에 의하면, 그 조직에는 다른 주요 인사가 있다고 한다. 그는 국방장관에 오래 재직하는 동안 후원과 친절을 아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승만 내각에서 감옥에 가지 않은 유일한 장관이었고, 자유당에서 주요한 인사가 어려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현재는 민주당 내에서 매우 중요한 민간인이며 향후 주요 직위에 오를 만한 후보자다. 다른 주요 인물은 유재흥 대사(전 제1군사령관)이며 그는 이종찬과 김정열의 또 다른 의형제다. 김창규 예비역 중장은 그가 지휘관으로 있던 공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서울 토박이에 경기고 졸업생으로 다수의 군인 및 민간인과 연줄이 닿아 있다. 참모총장을 지낸 최영희 예비역 중장은 일본파에서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다. 제1군사령부 부사령관 정래혁 중장은 유력한 합참의장 후보자다. 법무장관과 내무장관을 지낸 이호는 도쿄대를 졸업한 민간인 집단의 주도적 인물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인물인 김종오 참모총장은 육군의 뛰어난 지휘관이다. 박정희 의장은 그의 능력에 점차 의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독일대사 신응균 등을 포함해 이 모든 인물은 군사 및 민간부문을 주도하는 데 정직과 능력으로 비교적 높은 명성을 계속 누리고 있다.

 

40. 수적인 제한이 있던 데다 다수가 은퇴한 상황에서, 일본파의 육군 내에서의 세력은 대체로 소장파 장교들 또는 아직 파벌 내 핵심적인 성원이 아닌 참모총장을 통해서 행사되어야 한다. 파벌 내 주요 인사들을 다시 권력 안으로 불러들일 상황이 도래한다면 그들의 배후에서 군을 재편성하기 위한 기반은 아직도 분명히 남아있다. 일일 작전 현안에서 또는 부차적인 사안에서, 일본파는 공군 내에서의 어느 정도를 제외하고는 결정적인 군사력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군사작전권 이외의 분야에서 일본파의 세력과 가능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증대되고 있다. 첫째로 남한 출신 장교들이 점차로 육군의 주도권을 차지하고 있고, 북부지역 출신 파벌은 은퇴로 인해 점차 약해지는 자신들의 세력을 재충전하기 위한 만족스러운 방안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은 현 상황에서, 일본파는 존경받는 남한군 장교집단이다. 이러한 자격을 가진 일본파는 남한군 장교들을 재편성하는 잠재적인 구심점 구실을 할 수 있고, 이들 외에 혁명파를 제외한 다른 파벌 가운데서는 민족청년단 세력 정도가 그에 필적할 만한 세력 중심점이 될 역량을 갖고 있다. 둘째로 사회적으로 주도적인 남부지역 파벌로서 이들은 북부 출신에 비해 더 낫고 민간인과 폭넓게 접촉하고 있고, 일본파의 하나로서 도쿄대와 같은 일본의 유수한 대학에서 교육받은 많은 민간인의 공명에 일정 부분 의지하고 있다. 분명한 점은, 이 집단이 받은 일본에서의 고등교육이 상위 민간인 집단 내에서는 매우 우월한 평판을 유지해준다는 것이다. 중요한 민간인 집단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일본파는 전 내무부 장관 김형근, 현 한국은행 총재 민병도, 이호 등과 같은 민간인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민간인 세력 가운데 이 집단은 자유당 내에서 훨씬 존경받는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종찬을 통하여 신민당과도 다소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더욱이 이 조직은 재직 중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도전할 수 있었던 유일한 관리를 자파의 수장으로 세우고 있다. 이 조직은 민주당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알려지지 않았고, 조직원은 민주당 정권 시절에 대부분 권력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향후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하는 시기에 이 집단의 세력규모는 민군(民軍)의 독특한 권력 결합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남부 출신 파벌이 있나

41. 특히 현 정부의 등장 이후, ‘남부 파벌’ 혹은 심지어는 ‘경상도 파벌’, ‘충청도 파벌’ 같은 용어의 사용이 점점 빈번해지고 있다.

 

42. 보고장교에 의하면 이러한 용어는 비교적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않고, 응집력의 차원에서도 북부, 일본 또는 만주 파벌에 필적하지 못한다.

 

43. 따라서 그 용어들은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비록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남부 출신 장교가 북부 파벌에 포함되기는 매우 어렵고, 북부 파벌 지도자들이 파벌의 중심에 위치한 개인에 대한 충성의 상호작용에 그들과 더불어 공명하기란 더욱 힘들다. 하지만 일본파와 결합된 소수의 선임 장교집단을 제외하고 남부 출신 장교들 사이에 ‘남부’라는 지역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 상당한 응집력은 보이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소수이고, 일본파를 제외하고 사회적으로 별 영향력이 없는 신분이다. 적어도 초기에는 지역적 기반을 바탕으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출신의 장교들이 파벌을 형성하기에 수적으로 충분하지 않았고 이들 지역 간에 유대감이란 것이 남부에 기반을 둔 파벌을 형성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친밀하지도 않았다. 일본파 및 송요찬과 같이 사병 경력을 가진 별 볼일 없는 남부의 장교들 사이에 있는 사회적 교육적 격차는 단합보다는 의구심과 적대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현재 남부 출신 장교들은 더욱 중요해지는 반면 북부 파벌은 약화되고 있지만, 파벌의 연줄은 남쪽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 드리워져 있다. 누군가는 같은 지역 출신의 장성들, 일례로 정래혁 중장, 유양수 소장, 장지량 같은 전라남도 출신 인사들 사이의 우정과 유대를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파벌’이란 용어에 적용시키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구 군부파벌의 현재 역량

44. 선행 연구를 통해 주요 구 파벌의 공식적인 힘은 군부 내에서 상당히 감소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했다. 이러한 와해는 한국 육군의 창군(創軍) 장교들이 모두 사라짐으로 인한 것이다. 군 장교의 숙청은 1959년 송요찬 참모총장에 의해 시작되었고 군사혁명이 각 파벌 내 핵심집단의 다수를 제거-유대감을 덜 중요시하는 젊은 장교들 또는 파벌과 긴밀하게 협조하지 않은 장교들을 제외하고-한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속도로 진척되고 있다. 장교들의 제거는 한국군 내에서 파벌의 축소를 가져왔다. 파벌로부터 독립적이고 적대적이었던 송요찬 전 총리는 이러한 과정의 주요 행위자다. 전반적으로 이러한 작업은 능숙하게 처리되었다. 부패사건으로 제거된 장교들 안에 일부 뛰어난 장교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훈련과 경험에서 일부 불가피한 희생을 치르면서 경쟁력과 훈련의 수준은 이전보다 향상된 것으로 관측된다. 영관급 7500여 명의 육군 장교 또는 상급 장교들은 미국이나 한국의 군사학교에서 교육받았고, 소장 장교들의 기초교육은 지난 10년간 상당한 발전이 있었다.

 

45. 한반도 분단 이후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옛 지역적 충성심은 누그러졌다. 북한에서 자신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가 월남한 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시작한 장교들은 이전의 유대감을 매우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육사 1기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는데 첫 4년간 그러했을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입학한 대부분의 장교들은 모두 전후 남한에서 새 출발했을 무렵, 경력보다는 출생지역과 성장의 유대감을 계속 생각했다. 미약하긴 하지만 여전히 눈에 띄는 지역적 파벌주의는 5~9기 아니라 심지어 전쟁이 시작되었을 당시 임관한 젊은 육사 장교들-여전히 북한을 잘 기억하고 있고 그곳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던-중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지역적 유대감은 주요 인물들이 거의 남지 않게 되자 점차적으로 약화되었다. 이 기간에 들어온 장교들은 어린 시절에 북한을 떠나 남한의 환경 속으로 완전히 융합하여 그들의 선배들을 엮어주었던 유대감을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 중 소수만이 파벌 내 선임장교들 아래서 훈련을 받았고 파벌주의가 부과한 임무에 대한 경쟁심을 기억할 뿐이다. 젊은 장교들은 주로 정일권 또는 백선엽의 부하로 자신들을 분류하지 않는다. 구 군사영어학교 장교들이 110명에서 5명 이하로 줄어들고 1~4기 졸업생의 상황도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되면서, 지역적 파벌주의는 대체로 군에서 사라지고 있고 파벌주의의 후계자들은 선배와는 다른 여러 방법으로 자신들을 조직화한다.

 

46. 이러한 목표는 혁명의 이면에 있는 추진력의 하나로, 이는 근본적으로 5~8기 졸업생인 중간그룹 장교들에 의해 추동됐다. 이들은 선배들의 지역적 유대의 힘을 더 이상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로 인해 발생한 돈과 친인척 등용으로 얼룩진 부패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감정을 그들의 선배를 제거하고 오랫동안 적체된 진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발판으로 이용했다. 이렇듯 변화하는 상황의 결과는 최고위원회 및 오늘날 군부의 지배층 안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파벌적 유대감은 여전히 이주일 부의장, 박임항 중장, 김동하 소장, 김윤근 준장, 윤태일 서울시장으로 대변되는 구 함경-만주그룹을 결속시키고 있다. 하지만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계급에 의해 유대감을 맺고 있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내 핵심그룹, 선배 장교들에 반대하는 이들로 대표되는 8기 소장파 장교는 지역적인 연고로 조직되지 않았다. 선임장교, 특히 파벌세력과 북쪽 출신 세력들을 몰아내기 위한 분위기는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최근 박임항 중장이 제거되었는데 향후에는 기타 선임장교들과 북쪽 출신 장교들이 제거될 것으로 보인다.

   

이후락과 김종필(왼쪽).

47. 하지만 군부 내 파벌의 제거는 파벌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주의가 요망된다. 한국의 역사는 한 국면에서 파벌그룹들을 제거하기 위한 시도가 종종 다른 곳으로 이들을 옮겨놓는 상황을 초래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한국인들은 자신의 사적 집단의 충성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여기에 투자한다. 그들은 이를 일종의 보험으로 여긴다. 점차 노쇠해가는 중국파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파벌의 지도자들과 성원들은 명성과 경험을 갖춘 비교적 젊고 야망 있는 자들이다. 그들 중 다수는 한국 경제의 모든 영역에서 자리 잡고 있고, 그들의 능력뿐 아니라 그들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에 대해서도 현 정부는 인지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계속될 것이며 실제로 현 정부의 민정이양 과정에서 유일하게 중대한 방해물이 될 것이다. 문민화하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파벌이다.

 

48. 경제계와 민간에 강력한 파벌세력이 자리를 잡는 것은 모든 군사지도자가 정치활동을 위해 경제 및 민간부문에서 강력한 기반을 구축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질 것이다. 그러한 기반은 이전에는 그리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는데, 이는 예비역 군부지도자들이 선거에서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점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하지만 향후에는 그러한 활동을 위한 기반이 충분히 제공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분간 적어도 몇 개 부문에서는 군사정부가 이를 허용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과거 군부지도자의 다수가 향후에 정치지도자가 될 것으로 보이며, 파벌에 대한 적대감과 과거의 경쟁은 향후 정치적 경쟁에서 다시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예상이 들어맞는다면 정일권과 백선엽 각자는 자신들이 노리는 총리의 자리에 뛰어들 것이며, 파벌의 보상제도는 한국 정부의 관직에까지 확대되면서 안정적인 관료정치 및 부패추방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볼 때 미국과 협조하는 데는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구 지도자들은 대부분의 혁명지도자들보다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개선될 것이다.

 

기수의 문제

49. 군부 내의 기존 지역적 파벌이 점차 쇠퇴하면서 한국군 내부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조직화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지난해까지는 옛 개념들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의 새로운 조직질서 형성에 의견의 일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진공상태 속에 육군(사관학교)의 기수 개념이 새로운 구분 기준으로 갑자기 소개되었다. 과연 이러한 개념이 유효한가.

 

50. 이는 16년 동안 한국 군사훈련이 거친 주요한 단계의 관점에서 보면 유효하다. 세 단계로 거칠게 구분할 수 있다. 매우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 미국 또는 유럽의 제도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세력 내에서 기수 간의 경쟁 혹은 파벌주의는 존재한다.

 

51. 첫 단계는 한국군에 들어오기 전에 일본, 만주, 또는 광복군에서 경험을 쌓은 이들로 입교하기 전에 사병 경험이 있는 자들이 압도적이다. 1기(1946년 6월15일, 53명 졸업)는 영어학교 과정 중에 영어 자격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이들로 구성되었다. 2기(1946년, 193명 졸업)는 사병 출신이 더욱 많다. 3기 또한 사병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은데(1947년 4월19일, 300명) 이들은 육사 간부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전복 시도에 영향을 받았고 여순사건 중에 다수를 잃었다. 4기(1947년 9월10일, 107명 졸업) 또한 사병 출신이 다수다. 이들 첫 네 기수 또는 졸업생도들은 광복 이전 한국에서 형성된 집단으로 구성되었다. 대체로 이들은 지도자와 성원의 측면에서 파벌의 중추를 형성했던 장교들이다(장교 졸업생들에 관해서는 첨부문서 3 참조).

 

52. 5기의 시작과 함께 정책은 변화했고, 1947년 9월부터 9기(1950년 1월14일)까지 졸업생들은 경비대 출신의 전도유망한 사병 출신 혹은 한국 내 민간대학 졸업생 중에서 차출된 후보생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했다. 이 기간에는 민족청년단이 극성기에 있었고, 청년단 사병 출신인 젊은이들이 입학했다. 5기와 6기는 2~4기와 입학정책 경험을 공유했는데, 당시 정책은 보안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좌익세력 중 상당수를 입학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들 기수의 졸업생들은 졸업 이후에 내부에 좌우익의 분화가 있음을 탐지했고, 졸업생 일부는 남산에 포 부속품을 설치해놓고 대통령궁을 겨냥한 훈련을 했다. 좌익의 침투는 7기에서 거의 소탕되었고 다만 그중 5명만이 영향을 받았다. 다행히도 한국으로서는 실제로 이들 장교들은 살해되거나 1948년 초가을 여순사건 발생 또는 이후에 발각되었다. 이들에 대한 숙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한국전쟁에서 모든 부대가 공산주의자들의 침투에 노출됐을 것이고 전복활동으로 인해 패배하고 말았을 것이다. 군부 내 좌익세력을 색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한 공산주의자 첩자에 의해 영향을 받은 인물이 바로 박정희라는 젊은 장교였다.

   

53. 이 기간에 발생한 다양한 긴장사태는 육사의 역사에 독특한 명물이었던 8기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들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 시작된 첫 기수다. 8기는 여순사건과 신임 참모총장인 채병덕 대령의 지휘하에 개선된 보안체계로 무장하여 반공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한 이후에 출현했다. 외세의 후견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지도력으로 시작한 첫 기수였다. 마침내 경비대를 확대하여 한국군으로 개편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과 여순사건 이후에 장교들 내부에서 만들어진 유대감에 고무된 8기생의 숫자는 전례 없는 규모였고, 특별히 우수한 대학 졸업생으로 구성되었다. 1949년 1월부터 5월23일 사이에 졸업한 6개 집단의 장교는 모두 1801명이나 된다. 이 기수는 규모가 매우 크고 각기 다른 분대로 파편화되었으며, 훈련 중에 모든 동기가 서로 다 알기에는 기간이 너무나 짧았다. 게다가 각 분대는 분대 내에서만 유대감을 가졌기 때문에 8기 전체가 유대감을 공유하진 못했다. 그럼에도 우수한 장교들에 의해 지도부가 형성되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집단은 공통의 목표를 공유하게 된다.

 

54. 세 번째 그룹은 정의하기가 훨씬 용이하다. 1955년에 4년제 정규 육사후보생-1949년에 시작했지만 전쟁으로 휴학했던-으로 들어온 이들이 졸업하기 시작했다. 이 그룹과 그 선배 간의 갈등은 매우 첨예하다. 그들의 선배들이 3~6개월의 교육과정을 이수한 반면, 이들은 4년간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상당히 나은 훈련을 받았고 엄선된 인물이었다. 이들은 자신들 고유의 독특한 전통을 세웠다. 그들은 그들 선배들을 낙인찍었던 거의 모든 단점을 깨끗이 벗어버리기로 단호히 결심했고, 부패와 파벌주의를 척결하겠다고 매일 선서했다. 그들은 지나치게 금욕적이었다. 일례로 가장 성실한 한국 장성 중 한 사람이 그들에게 특별히 담배를 보내왔지만 단 한 명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졸업할 무렵 군 지휘부는 그들의 청렴함을 인정하면서 그들을 모두‘골치 아픈’ 자리에 배치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선배들(8기를 포함하여)이 모두 부패했고 비전문적이라고 생각한다는 불평불만이 나왔다. 한 관측자는 이들이 “마치 다른 한국인들을 지배했던 조건과 기준은 거의 접하지 않고 그저 무인도에서 훈련 받은 존재들과 같다”고 평했다.

 

55.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크게 세 단계 또는 그룹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그룹은 선임 장교들로서 이들은 강고한 지역적, 파벌적 뿌리를 갖고 있고 한국 내 혹은 외국의 후견하에 훈련을 받았다. 두 번째 그룹은 완전히 한국적인 기반에서 훈련을 받았고, 지역적인 파벌성은 약하지만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다. 세 번째 그룹은 거의 8배 정도 오랜 기간 훈련을 받았고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만을 가지고 있으며, 혁명에 대한 광적인 열정을 가지고 (군사정부가 금지하기 전까지) 동기 간의 끈끈한 유대감을 매년 동창회를 통해 표출했다. 8기만을 하나의 그룹으로 간주한다면 이들 그룹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8기 이전에 졸업한 이들은 2104명, 8기 졸업생은 1801명, 8기 이후 졸업생은 2300여 명. 이들 중에는 전쟁 이전 혹은 개전 당시 졸업한 841명이 있다. 물론 부상과 은퇴로 모든 그룹 내 성원의 숫자가 줄었는데, 앞의 두 그룹은 반 이상 줄었다.

 

56. 실질적으로 군사정변은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룹 간의 감정다툼으로 인해 발생한 갈등의 결과다. 5~9기는 경험과 연령에서 자신들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1~4기 선배들이 모든 고위직을 독점할 때 자신들은 전쟁기에 선배들 밑에서 더 많이 부상당하면서 중간 간부 수준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오랜 좌절과 불만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결과는 1960년 9월24일에 소규모이지만 5, 7, 8기생들이 일으킨 ‘젊은 대령들의 반란’이다. 이는 봉쇄되었고 그 그룹은 이후 혁명을 도모하는 핵심세력으로 변모하게 된다. 7기는 불행하게도 중도에서 제외되었는데, 이는 그중에 강한 성격을 가진 김동복 대령이 구속되어 기밀을 누설한 이후 김종필 대령이 7기를 불신하여 그들을 계획에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젊은 대령집단은 권력을 잡은 이후 1961년 7월3일 선배들이 대거 물러나는 상황에서 자신의 그룹 안에서 1기를 제거하고 중간 세력을 승진시키기로 계획했다. 이것이 쿠데타의 원래 계획 뒤에 숨어있는 가장 중요한 계획이었다. 이러한 계획의 구체적인 결과물로는 계급에서 특정연령을 초과하는 장교들은 은퇴하도록 명기한 새로운 인사법이 있다.

 

잠재적 파벌구조

57. 현재, 4년제 육사 졸업생이라는 세 번째 그룹은 여전히 자신들의 선배인 ‘젊은 대령’들의 업적에 만족하고 있다. 그들에게 대항하려는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4년제 졸업생 중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자마자 동조하는 이가 많았지만, 사실 이들 중 대부분은 군부의 정치개입이 상당히 부정적인 것으로 교육받았고 쿠데타는 불필요하고 잘못된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관점은 조금이나마 여전히 남아있는데, 만일 상황이 허락된다면 제1그룹에 대해 제2그룹이 반발했던 전례가 결국 제2그룹에 대해 제3그룹이 비슷한 형식으로 반발하도록 초래하는 심각한 상황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파벌의 전면적인 폭발을 막는다면 민정 이양이 예정된 시기 전에 상황이 그리 심각해질 것으로 예상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일 5~8기 장교들이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하면서 부패할 경우 4년제 육사 졸업생들이 들고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한데 1960년 쿠데타보다 한층 심각할 것이다. 젊은 청교도들과 5~8기 간의 불화는 중간 세력들이 선배들과 절연한 방법보다 모든 측면에서 훨씬 첨예하기 때문이다.

   

1961년 5월19일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5·16 환영행진.

58. 군사혁명과 군사정권은 새로운 양상의 파벌구조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파벌들은 아직 정부에 대한 군부의 개입을 위해 단결하지는 않은 것 같다.

 

59.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한국군은 각기 다른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쿠데타 세력, 쿠데타에 반대하는 세력, 다수의 중립적인 장교들이다.

 

60. 첫 번째 그룹인 권좌에 오른 쿠데타 세력이 소수라는 사실은 현 상황에서 잠재적으로 위험한 요인 중 하나다. 쿠데타 계획에 실제로 참여한 세력들은-쿠데타가 시작하기 전에 빠져나온 세력들을 포함하더라도-군 장교들 중 소수 분파에 불과했다. 그 숫자는 정부 구성 이후 쿠데타 그룹이 주요 직위에 초청한 이들에 의해 어느 정도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모와 영관급만 보더라도 아직까지 소수다.

 

61. 쿠데타 반대세력은 쿠데타가 발생한 이후 퇴역한 다수의 장교를 포함하고 있는데, 투옥된 이들과 특히 군사정권에 의해 와해된 그룹도 포함되어 있다. 전에 1군에서 활동한 참모장교들, 전 헌병, 군 안에 있는 은퇴 정치인의 친척, 평안도 및 - 추측이지만 - 함경도 파벌 등이 있다. 이들은 다수의 능력 있고 강력한 세력이다. 여기에는 전에 있던 파벌들의 모든 지도자와 이들의 핵심 추종세력이 포함되어 있고, 또한 1961년 5월16일 이래로 숙청 혹은 피해를 본 장교들의 사적 추종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많은 부패한 장교들과 달리 이 집단은 - 현 군사정부집단보다 훨씬 많은 - 혁혁한 전과를 거둔 선임 장교들과 한국전쟁 시기에 명성을 쌓은 참모장교 다수를 포함하고 있다.

 

62. 쿠데타를 지지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은 장교집단 - 가장 많다 - 은 모든 소장파 장교를 포함하여 실제로 4년제 군사학교를 졸업한 참모 및 졸업생(이들 지도자들 중 일부는 이한림 장군 충성파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 육군대학의 장교 및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대부분의 장교 다수를 포함하고 있다.

 

63. 초기에 지배그룹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그러한 분할 또는 잠재적인 분할이 왕성한 파벌주의로 번지는 일을 예방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1962년 6월, 심각하고 매서운 파벌투쟁이 발생했다. 함경도파는 중앙정보부의 권력과 활동을 놓고 8기 중에서 김종필 대령과 그의 동맹세력들을 공격하기 위해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여타 장교들과 결합했다. 이들 사이에서 현재 발효된 휴전은 일시적이다. 중정은 파벌의 쟁점으로 남을 가능성이 있고, 이전의 경험을 참고하자면 위의 상황과 같은 갈등의 양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첨예하게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의 주요원인은 옛 습관에 있다. 급격한 변화는 부정과 탄압을 낳아 그들 스스로 반동적으로 변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지배집단은 자신의 지지 세력에게 일자리를 제공했고, 일자리가 적은 상황에서 박탈감을 느낀 이들이 보상받은 자보다 더욱 많았다. 군부세력을 민간, 정치, 경제계의 직위에 대거 영입해 파벌 예방이라는 장기적인 목표를 달성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중립적인 장교들 다수는 추가 어디로 기울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울 것이다. 박정희 의장은 이러한 요인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그런 그가 파벌들을 매우 신경 써서 직위를 안배하고 호의를 베풀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그의 정실인사는 그가 권좌에 남아 있는 한 계속될 것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경제계에서 다소 주목할 만한 발전을 제외하고는 점차 상황이 어려워 질 것으로 보인다.

 

64. 파벌투쟁의 추가적인 가능성은 쿠데타에서의 주요 역할이 훼손되었다고 생각하는 해병대에 있다. 해병대 내 선임장교들 - 이들은 상당한 실력자들이다 - 은 거의 대부분이 함경-만주파인데, 이들 세력의 쇠퇴가 해병대의 불만을 촉발할 우려가 있다.

 

65. 또 하나의 문제 지점은 7기에 있다. 이들은 본래 8기가 그랬던 것처럼 ‘젊은 대령들’ 내에서 커다란 문제를 갖고 있었다. 이들의 참여는 한 인물이 투옥된 이후 배제됐고 이로 인해 7기는 엄청난 자신감의 상실을 맛보았다. 그중 유병현 준장만이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부자연스럽게 등용되어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조치로는 지난번 인사에서 소수만이 승진한 7기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고, 이들은 8기생들이 상관보다 더 승진한 것에 대해 비난했다.

 

66. 또한 앞선 전문 463에서 지적한 대로, 이범석 장군이나 그의 옛 청년단체 족청과 연합한 다수의 장교를 숙청함으로써 극단적인 조치에 의존하는 불만세력들도 생겨났다.

 

해병대, 공군, 해군 내 파벌주의

67. 해군, 공군, 해병대 내 파벌주의는 본 연구의 범주 안에 포함되진 않지만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파벌주의는 해병대 안에서 두드러지는데, 대부분의 선임장교들이 함경도-만주 파벌이며 지휘관들은 남부 출신 장교들을 싫어한다. 일반적으로 해병대 내에서 북부 출신이 누린 이전의 강력한 헤게모니는 남부 출신 소장파 장교들의 계급이 높아지고 영향력이 증가함에 따라 약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중요한 요소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내 함경-만주 파벌의 최고참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인 김동하 소장이 위기 시에 최고위원회 내에서 자신의 파벌투쟁을 위해 해병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할 경우, 그는 여전히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해병대 내 파벌세력을 가지고 있다.

   

68. 북부 출신 장교들의 지도력과 파벌주의는 공군과 해군 내에서 훨씬 미약하다. 공군에서의 지도력은 남부 출신 일본파 그룹이 계속적으로 그리고 매우 강고한 수준으로 장악하고 있다. 유일한 예외가 중국파 출신 장성인 전 참모총장 김신 중장이다. 현 참모총장인 장성환 중장은 선임자 대부분에 비해 그룹 내에서 중심에 있지 못한데, 이는 그가 공군이나 해군사관학교가 아닌 일본의 일반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부참모장은 공군 내에 깊이 자리를 잡은 일본파의 일원이기 때문에, 일본파 선임장교들이 은퇴해 해방 이전 경험이 없는 소장파 장교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상황이 도래해야만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지역별 파벌구도를 대신할 기수별 파벌 등은 아직 없다.

 

69. 해군은 개인적 기호와 충성심에 따라 직위를 쟁취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 안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전통적인 파벌집단은 없다. 현재는 모두 은퇴한 원래의 선임장교들은 예전에 일본 해군 또는 상선대에서 복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독특한 조직을 편성했다; 그들이 떠난 이후 힘의 공백이 생겼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산산이 흩어진 지역적 유대를 바탕으로 해군사관학교 1기생으로 자신의 경험을 쌓아나간 장교들은 해사를 중심으로 모였다. 따라서 해군은 한국군 내 권력투쟁에서 가장 소외되어 있고 공군과 함께 혁명의 중심에서 상당히 유리되어 있다.

 

결론

70. 한국군 내 파벌주의는 지난 17년 동안 주요한 쟁점 중 하나였다. 송요찬 장군과 군사정부하에서 그것을 근절하려는 노력이 있었음에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는 휴지기인 것 같아 보이고, 권위 있는 소식통은 지금이 한국사를 통틀어 파벌이 가장 약한 시점인 것 같다고 평했다. 하지만 파벌은 근절된 것이 아니라 지난 2년간 군내에서 무리를 이루고 있던 상황에서 분리되는 방향으로 점차 변화하고 있다고 보는 게 옳을 듯하다. 몇 가지 특징이 드러나고 있는데, 새로운 파벌들이 구체화되고 있지만 군사정부는 지금까지는 새로운 파벌이 구체화되는 것을 막는 데 분명히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군사정부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은 권력에 대한 경쟁 파벌들의 등장을 예고한다. 최근 중정의 권력투쟁은 그러한 파벌이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며, 새로운 파벌의 형성을 장기간 막을 수는 없는 상황이 온 것 같다. 정계와 재계에서 군부가 차지하는 위상을 감안할 때 이러한 파벌의 의미는 단순히 군부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인 중요성을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혁명 이후 파벌주의를 연구하는 것은 군사학보다는 정치학의 영역에 속한다. 이는 주로 육군에 대한 연구다. 해군은 커다란 파벌투쟁에서 고립되어 있고, 공군은 일본파가 확실히 통제하고 있으며 해병대는 함경-만주파가 지배하고 있다.

 

71. 육군 내 전통적인 구 파벌들은 정일권의 개인적인 지도력하에 있는 함경-만주파의 장교들과 백선엽의 사적 지도력하에 조직된 평안도 출신이 다수인 장교들이 지배하고 있다. 다른 파벌들은 이종찬을 중심으로 조직된 일본파와 이형근-충청도파가 있다. 이들 파벌은 몇 년 전 시작된 연속적인 ‘숙청’의 결과로 군내에서 대부분 와해되었지만, 1959년 이래로 상당한 속도로 다시 일어나고 있다. 다만 예전에 강력했던 북부 출신들의 유대감이 쇠퇴하면서 이 파벌들이 완전히 소생하거나 장기간 군부 내에서 강력하게 생존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하지만 그들을 결속시켰던 충성심은 - 여전히 젊은 구성원들과 더불어 - 장차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정치계나 경제계로 이동할 것으로 관측된다. 파벌은 한국에서 끈질기게 생존한다. 남한의 민과 군에서 모두 힘을 보유한 파벌인 일본파는 그중 한 세력이다.

 

72. 파벌이 가진 가장 큰 위험성은 5월 군사정변 같은 전복의 과정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민간정부를 전복시켰다는 것 외에도, 쿠데타 집단은 한국군의 최상위를 선임 4개 기수가 쥐고 있던 상황을 뒤엎어버렸고 5~8기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하지만 5~8기 장교들은 그들의 선임장교들보다 경쟁력이 있지도 않고, 다만 조금 덜 부패한 정도다. 그들이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고 운도 따르지 않는다면, 그들은 장기적으로 몇 차례의 반란을 맞닥뜨릴 위험을 안고 있다. 훈련과 성실도에서 그들의 선배보다 뛰어난 4년제 육사(1955~62년) 졸업생들이 다시 뒤엎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 장교들은 현 상황과 낮은 직위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반란의 뚜렷한 징후는 현재 없다. 파벌 간 불화의 또 다른 원인은 혁명에 불참했거나 혁명으로 인해 추방된 장교 다수의 불만이 장기화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러한 불만은 직위를 얻는 데 소외된 박탈감으로 인해 증폭되었다. 위의 사실과 결합하면 잠재적인 불만세력은 구 파벌의 잔존세력, 해병대, 7기, 이한림 휘하 제1군사령부의 전 참모장교, 일부 헌병 및 족청세력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진압행동이 일본파와 같은 다른 집단에 대항해서 취해질 경우 새로운 불만세력이 발생할 것이다.

 

73. 현재의 휴지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내 파벌구도가 민간으로 확대될 가능성은 현 정부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위험요소 중 하나다. 이전의 군내 파벌들은 현재 민간세력까지 잠식하고 있다. 공표된 민정이양 예정일 이후에도 현 정부가 권력을 보유하려고 시도할 경우 현 정권을 몰아내기 위한 민군 파벌 연합의 위험도는 증폭될 것이다. 그러한 연합은 전현직 군부 인사들로만 구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권력을 향한 투쟁이 막 시작되고 있는 상황에서, 민간인 세력은 군의 통제를 자신들의 진로에 중대한 걸림돌로 생각하고 있다. 민간인은 군의 통제를 감시하기 위한 거의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가 바로 파벌이다. 중정과 군부는 분명 그러한 상황을 파악했고 이 같은 움직임을 신속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군의 통제에 대한 의심과 고민, 극심한 우려를 계속해서 낳을 것이다. 한층 더 심각해진 파벌주의의 가능성은 군사쿠데타와 군부 지배의 가장 심각한 유산이 될 것이다.

담당자들과 관련자들을 위해

필립 C. 하비브

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

   

◆ 첨부문서 1

대사관 A-108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한국인 장교

(공식적인 군관학교 기록은 입수되지 않았거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기록과 개인의 회상은 항상 일치하지 않고, 이미 언급한 대로 기수의 상황은 복잡하고 변동이 심하다. 따라서 기수에 의해 장교들을 일람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위의 기록은 현 상황과 회고를 통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것임을 밝혀둔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1931~32년 목단사관후보학교(OCS) 단기 과정을 이수한 첫 세 기수에서 한국인은 없다. 한국군 장교였던 김종호 예비역 준장-백두진 전 총리의 처남-은 만주군에서 초반에 사병으로 복무했고 1932년에는 만주에 있는 재무관련 학교를 졸업했지만 그는 엄격하게 말하면 목단의 정규 졸업생은 아니다. 이씨 성을 가진 대위 한 명이 이 시기에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해방 이전에 일본군 장교와의 말다툼 끝에 자살했다.

4기, 1933년 입학

4기에서 가장 잘 알려진 현존하는 장교는 김응조 예비역 준장이다. 그는 해방 이후 전북경찰서장이었고, 미군정기에는 주요 고문 및 경찰 내 권위자 중 한 명이었다. 한국전쟁기에 군에 참가하여 포항에서 근무했고 이후 태백에서 게릴라 소탕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한 감리교 목사가 이른 아침에 자신의 집 근처에 있는 교회 종을 울렸다는 이유로 구타했다고 미국 선교사가 불만을 제기하여 해고되었다. 이후 그는 양양에서 국회의원 활동을 했다. 그는 현 정부 초기에 박정희 의장과 이주일 부의장을 접견했고, 그린 공사와의 연락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함경도-만주 파벌이 배출한 ‘중량급 정치가’ 중 한 명이다. 그는 명민함에도 불구하고 고압적인 행동과 잘난 체하는 성격으로 인해서 최근에는 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그가 정규 기갑과정을 이수한 유일한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양국진 예비역 중장의 형은 4기 재무과정을 이수한 뒤 몽골의 일본군에서 첩보업무를 했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 곧바로 몽골인들에 의해 보복살인당했다. 이에 덧붙여 4기 보병과정에는 4명의 한국인 장교가 있다. 3명은 해방 이후 자연사했고, KE라고 불리는 한 사람은 유엔군사령부 정보참모부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현재는 일본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기, 1937년 만주에서 졸업했거나 도쿄로 옮겨가 1940년 졸업

1. 김일환 예비역 장군(1955년 9월 퇴역)은 대한탄광주식회사를 성공적으로 경영하고, 이후 상공부, 내무부, 교통부 등을 거치며 장관으로 근무하다가 4월 혁명이 발발하자 체포되어 잠시 수감되었다. 그는 능력이 있고, 이승만 정부의 각료 중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현 정부가 다시 불러들일 가능성이 있다. 만주에서 재무교육을 받았다.

2. 김석범 해병대 중장(1959년 10월 퇴역)은 해병대사령관 및 최고위원회 고문이다. 정직하고 성실하지만 다소 꼼꼼하고 공격적인 그는 현재 귀속된 중공업회사의 사장으로 있다. 함경도 사람인 그는 남부 출신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신현준 해병대 중장(1960년 퇴역), 또 다른 해병대 지휘관인 그는 현재 미국에서 수학 중이다. 다정다감하며 친근감 있는 장교다.

4. 송석하 소장, 국방대학원장, 오랫동안 복무해왔지만 당분간 그 직을 유지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5. 윤춘근 중장(1962년 진급 적체로 퇴역). 이한림과 박임항 밑에서 제1군사령관 부관 역임. 현재 수협회장.

6. 최경만 예비역 준장. 현재 중앙제분 군 파견 감독관. (어떤 기록에는 그가 1935년 졸업생으로 되어있다.)

7. 문용채 예비역 준장(1959년 초 퇴역), 헌병장교였던 그는 공금 유용으로 인해 송요찬 당시 합참의장이 해고한 헌병장교다.

   

8. 문이종(1959년경 퇴역). 몇 차례 병력이 있는 문 중령은 그의 기수 중에 장성이 되지 못한 유일한 인물이며, 화를 잘 내고 무례하며 이후 퇴역했다.

9. 김홍준 소장, 한국의 최선임 병참장교로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지프가 한강에 빠지는 사고로 사망했다.

10. 김백일 중장, 한국군 창설멤버인 그는 한국전쟁기에 강원도에서 안개로 인한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유족은 한국군 참모총장이 비공식적으로 부양을 책임지고 있다.

11. 정일권 장군, 현 주미대사, 함경도파의 수장이자 합참의장 2회 역임. 정은 일반적으로 위의 동기라고 알려져 있지만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는 1938년 만주에서 졸업한 뒤 1940년 도쿄에서 졸업한 것으로 되어있다. 졸업 이후 현장 경험을 쌓은 뒤 대위로 선발되어 도쿄 일반참모대학에 파견되었는데, 그곳에서 최우등생으로 졸업하여 일본 천왕이 특별히 표창장을 내린 바 있다. 광명학교 졸업생이자 만주-러시아 국경과 닿아 있는 함경북도 경원의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인 가정에 반 입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기, 1939년 졸업

현재 명단에 있는 6기 장교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중 한 명인 권석필 중령은 1950년 6월28일 공산주의자들이 서울을 차지하기 전에 그의 상관들이 한강다리를 폭파할 때 사망했다. 당시 권 중령의 지프는 사전에 공지하지 않고 폭파한 다리 위에 있었다.

7기, 1940년 졸업

13명의 장교가 있는데 불행한 운명의 기수다. 한국군 내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혹은 유일하게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이상열 예비역 대위는 남쪽 지역 출신인 2명의 만주군 장교 중 한 사람이다. 이 대위는 진해(그는 그 부근에서 출생했다)에서 작은 사업을 하고 있고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그곳에서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한 적이 있다. 다른 한 장교는 여성철 전 포병장교로 장제스(蔣介石)의 군대에서 복무했고 현재는 대만에서 작은 사업체를 경영하고 있다.

다른 장교들은 불행한 운명을 맞았다. 그중 7명은 북한에서 살았거나 그곳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들 중 한 사람이 공군 장교 백성환이다. 일부는 김일성에 대항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죄목으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몇몇은 해방 직후 며칠 만에 남한으로 비행기를 타고 왔다. 그들은 독립지도자이자 일제가 8월15일 이후 하지 장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자신들의 권한을 이양하고자 했던 여운형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여운형은 소련과의 타협과 협상을 통해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7기는 여운형의 ‘군 참모’로 잘 알려져 있었다. 이와 함께 여성철은 남쪽에 머물려면 군에서 떠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2~3명이 북에서 탈출했고 이후 쿠데타의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나머지 인사들도 모두 체포되었고 아마도 여순사건 이후 김창룡 중장에 의해 처형되었을 것이다. 처형된 이들 중에는 최남근 당시 대구 연대장과 김창룡에 의해 피살된 오 소령도 포함되어 있다.

1940년 만주에서 졸업한 이들과 함께 명단에 올라와 있는 사람으로 석주남 예비역 소장이 있다. 그는 통상 위 세력들과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이후에 추가되었다. 1959년 4월 송요찬 장군의 숙청기에 부패혐의로 옷을 벗은 전 헌병사령관이다. 이후 그는 한의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지 않는다.

8기, 1941년 졸업

백선엽 예비역 장군, 현재 프랑스대사로 재직 중인 그는 평안파의 지도자다. 1941년 12월 졸업하였고 전에 일본군에서 2년간 헌병대 사병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평양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헌병대에서 계속 복무하여 장교가 되었고 한국군에서 가장 주목받는 제1군사령관이며, 합참의장과 한국의 첫 4성 장군을 역임하고 만기 제대했다. 한국군 내 3대 최고지휘관 중 한 명이며, 부패에 연루되어 있지만 나머지 두 명의 4성 장군보다 더 능력 있는 지휘관이자 전투사령관이다.

목단 출신의 모든 장교 - 그들의 교관인 원용덕 예비역 중장을 포함하여 - 가 송석하 소장을 제외하고 모두 퇴역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그들은 은퇴 이후에도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 첨부문서 2

대사관 A-108

신경만주군관학교(1939~1945)

1기, 한국장교 13명, 1939~1942년

1. 박임항 중장, 건설부 장관, 최근 제1군사령관 및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원. 신경 출신 장교 중 가장 뛰어난 한 명으로 알려진 그는 1946~1948년에 북한군에서 소령 및 부대 행정장교가 되었고, 1948년 남한으로 넘어왔다. 한국군 내 만주군관학교 선배들의 지지에 힘입어 군에 참여하도록 허용될 때까지 수원에 있는 민족청년단 학교에서 가르쳤다. 이후 그는 고속 승진을 했다. 1942년 도쿄 일반참모학교 수료.

2. 이주일 소장,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및 함경도파 지도자. 뛰어난 지휘관으로 평가받진 않지만 끈기와 기억력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2년 도쿄 일반참모학교 수료.

3. 김동하 중장(한국해병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 명민함과 청렴함과는 거리가 먼 그는 1960년 이종찬 국방장관에 의해 해임되었고 쿠데타 이후 군에 복귀했다. 그는 일본육사 정규과정에 발탁되지 않았다. 만주파 내의 열혈 투사다.

4. 윤태일 소장, 서울시장, 뛰어난 지도력이나 청렴함과는 무관하지만 고집 센 공병장교다.

5. 방원철 대령, 1961년 10월 국립경찰 첩보국장에서 해임. 방 대령은 북한에서 거주하다가 1948년 말에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로 인해 진급이 다소 지체되었다. 그는 도쿄에 차출되지 않았다.

6. 이기건 예비역 준장, 1958년 9월 군에서 쫓겨난 다소 기이한 경력을 지닌 야망 있고 똑똑한 장교. 이 의장과 장 총리를 접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위에 적이 너무 많아 지금까지 군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노력 중이다.

위에 덧붙여 2명의 재무장교가 있는데 한 명은 김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병참장교로 복무하다가 준장으로 퇴역했다.

2기, 1943년 졸업

이 기수는 한국인 중에 거의 없다. 박동균 예비역 소장은 하얼빈 의무군관학교를 수학한 바 있고 신경군관학교는 1943년에 졸업했다. 그는 현재 태창방적회사 고문으로 재직 중이다.

3기, 1944년 졸업

1. 박정희 장군,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자 대통령 권한대행. 우등졸업생인 그는 일본육사를 졸업했다.

2. 이한림 예비역 중장, 육군 제1군 사령관, 육사 교장을 오랫동안 지낸 까닭에 4년제 육사를 졸업한 4~5개 기수가 그를 상당히 추종함. 도쿄일반참모학교 수료, 박정희의 뒤를 잇는 성적으로 졸업.

또한 본 기수에는 다음의 두 사람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3. 김목, 육군 제1군사령부 공병대 대령. 북한에서 거주했고 한국전쟁 이후 남한으로 내려왔다. 도쿄에 발탁되지 않았다.

4. 연씨 성을 가진 대위, 몇 년 전 타계.

   

4~5기(전쟁으로 1945년 졸업)

1. 최주종 소장, 8사단장이자 전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 한국군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장 논쟁적인 선임장교 중 한 명. 1945년 소위에 임관한 이후 한국에서 군생활 시작한 뒤 군용담요 2개 트럭분을 팔아치웠다. 처벌을 피하기 위해 북한으로 탈주한 뒤 1950년 인민군에 입대하여 중령 직위까지 승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탈주를 시도하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탈주 혹은 석방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 중에 남한으로 내려와 한국군 대위로 임관했다. 대령까지는 고속 승진했지만 야전에서의 나쁜 성과로 인해 중령으로 강등되었다. 31예비사단장으로 재직 중에 그의 부대는 부대정비검열에서 나쁜 성적을 받았다. 최 소장의 기록은 함경-만주파벌의 한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파벌의 유대감을 위해서는 최 장군과 같은 위원을 계속적으로 보호해야 하며, 그와 같은 기록으로 인한 명성 때문에라도 그 집단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싸워야 할 필요가 있다. 최 장군은 광명 출신이며 도쿄에서 유학했다. 그는 또한 이범석 장군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다.

2. 강태민 준장, 광명학교 및 일본육사 졸업. 9사단 및 3군단 부군단장, 백선엽 추종자. 1950년대 후반 결핵으로 은퇴, 경상북도에 있는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가서 생활하다가 1960년경 사망.

3. 장은상 소장(한국전쟁 중 대구에서 병사)

4. 예관수 예비역 대령, 헌병대 대령이자 족청단원인 그는 이 이유로 승진이 차단되었고 이를 비관하여 은퇴했다.

5. 강문봉 예비역 중장, 전 군사령관. 1억5000만환의 불법자금을 조성한 육군 내 우수한 소장파 장교 중 한 명이다. 정일권과 가까운 그는 1956~57년 오랫동안 논쟁이 된 재판에 회부되었고 1956년 1월30일 김창룡 암살혐의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1960년까지 대구형무소에서 영어생활을 했다. 현재는 워싱턴 시애틀에서 수학 중이지만 향후 국면에 따라 다시 정계에 등장할 가능성이 있고, 본인 역시 이를 희망하고 있다.

만주군관학교 졸업식 장면.

6. 김윤근(해병대) 준장,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 2차 세계대전 시기 도쿄에서 단기간 수학. 만주군에서 사병으로 복무한 몇 명은 실제로 장교들과는 긴밀한 관계에 있지는 않지만 만주파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들 중에는 임충식 5군단장, 김성은 해병대 사령관(만주파 소장파세력의 지도자), 김용남 예비역 해군 중장(현 대한해운 도쿄지사장), 이용 준장(강원도지사), 윤수현 예비역 준장(현 한국전력 감사관) 등이 있다.

◆ 첨부문서 3

A-108

군사영어학교(1945~46), 조선경비사관학교(1946~51), 육군사관학교 일련변호, 명칭, 임관일시 및 장교 수

244명 후보생은 전쟁시 단기 훈련을 받고 임관했다. 기수당 175명인 4년제 기수(1955~1962년 졸업)들은 총 1378명에 달하며 이들은 모두 실제로 복무 중이다.

한 기수가 초급반부터 최종반으로 구성된 경우가 있고, 이 경우 같은 기수 안에서도 졸업 시기가 다르다. 동기의식은 각기 나뉜 그룹 안에서만 존재한다. 예를 들어 8기의 1~4그룹은 8기 구성원에 대해 동기의식을 거의 느끼지 않고 있다.

   

◆ 첨부문서 4

대사관(서울) A-108

정일권-함경도-만주 그룹

강문봉 예비역 중장, 전 2군사령관, 현재 미국에 거주, 곧 귀국 예정

박임항 중장, 전 1군사령관, 건설부 장관

이한림 예비역 중장, 전 1군사령관, 현재 무직

임선하 예비역 중장, 현 태창섬유 고문 겸 이사

이주일 중장,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김동하 소장, 해병대사령관 겸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

임부택 예비군 소장, 전 1군단장

송석하 소장, 국방대학 총장

황호진 예비역 준장, 육군 1군사령부 부참모장, 현재 무직

김병삼 준장, 각료

홍국진 예비역 준장(김창룡 암살혐의로 수감)

최창언 중장, 3군단장

윤태일 소장, 서울시장

최 석 예비역 중장, 현재 미국에 거주, 군단장 역임, 혁명 이후 체포되어 퇴역

박현수 예비역 준장, 전 6군단 전투사령부 부사령관, 1961년 3월7일 퇴역.

조채미 예비역 준장(4·19혁명 당시 군사령관)

박기평 소장

이기건 예비역 준장, 1958년경 지휘인사참모학교에서 부정행위로 퇴역

최주종 8사단장

안광호 준장, 워싱턴 주재 무관, 그의 동생인 안광수 예비역 대령은 로스앤젤레스 주재 총영사

윤종근 예비역 소장, 전 1군 부사령관, 현 수협회장. 1962년 3월28일 퇴역

이치형 예비역 준장, 국가재건운동 부의장, 1962년 여름 퇴역

안종호 준장, 예비역 사무담당

이형석 예비역 소장, 전 제3군사지구 사령관, 퇴역

이명재 예비역 소장, 국방부 법무국장, 1961년 7월3일 퇴역

최경남 예비역 준장, 1960년 11월20일 퇴역

한당욱 준장, 전 3군단 부사령관. 1961년 7월3일 퇴역

이현진 소장, 국방부 총무국장

이정석 예비역 준장, 전 20사단장, 1959년 4월30일 퇴역

박종민 예비역 준장, 전 제1군사지구 사령관

소병기 예비역 준장, 1961년 7월3일 퇴역

유근창 소장, 국방부 인력국장

* 본 목록과 기타 그룹에 대한 목록은 최종적인 성격을 갖지 못한다. 어떤 인물이 어느 파벌에 속했는지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 첨부문서 5

대사관(서울) A-108

백선엽-평안도 그룹

백인엽 예비역 중장, 백선엽의 동생, 최대의 불법축재사건으로 현재 수감 중

석진암 예비역 소장(중국에서 의약사업 중)

김점곤 예비역 소장, 전 국방부 차관,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

문형태 소장, 3군단장

양국선 예비역 중장

장창국 2군사령관(훈련기간을 통해 일본파와 연줄이 닿아있지만, 그와 부인은 출생상으로 확고한 평안도파이며 그는 백낙준의 아들과 처남매부 사이)

박종준 소장, 보병학교 교장

유흥수 예비역 소장, 대한탄광회사

하갑정 예비역 소장, 자유당 정권 말기 수개월간 방첩대(CIC) 대장, 자유당 선거에서 중요한 역할 담당

이백유 예비역 준장, 1958년 7월 퇴역

유양수 예비역 소장, 국가재건최고회의 경제위원회장, 백과 그리 가깝지 않다. 전라도 출신

안동선 예비역 준장, 1961년 7월3일 퇴역

김종순 소장, 정보참모부 차장보

이상국 예비역 준장, 쿠데타 당시 31사단장, ‘반혁명’ 혐의로 수감 중

김채현 예비역 준장, 1961년 7월3일 퇴역, 중정과 가깝고 김상국 주일공사의 친척임

김동빈 중장, 육군전투훈련사령관

이덕준 예비역 소장, 전 군단장 및 농협회장, 현 정부 산하 수출회사 경영, 1960년 11월 퇴역

황 엽 소장, 정보참모부 차장

김안일 준장, 육군본부 근무 중

함병선 예비역 중장, 현재 무직, 불법축재혐의자, 1961년 7월3일 퇴역

원태섭 준장, 1916년 7월3일 퇴역

이성가 소장, APR시코 대사 및 전 육군대학 총장, 1962년 3월28일 퇴역

정인택 준장, 정보참모부 방첩대, 1961년 7월3일 퇴역, 부패사건 연루

백남권 예비역 소장, 부정축재로 유명, 수감 중, 병참부대 장성, 1960년 10월 퇴역

백선진 예비역 소장, 쿠데타 첫달에 재무부장관, 장도영의 사람, 부패혐의로 1961년 7월3일 퇴역

김희준 준장, 작전참모부 차장보

김완용 예비역 소장, 국방부 재산처리국장. 자유당 및 정일권(함경도파)과 긴밀한 것으로 알려짐

이치엽 준장, 1959년 봄 퇴역

이 효 예비역 준장, 1960년 6월 퇴역, 전 감사보, 현 한국아마추어선수협회 부회장

송효순 준장, 1961년 7월3일 퇴역

서종철 소장, 인사서무참모부 차장보

   

◆ 첨부문서 6

대사관(서울) A-108

이형근 그룹

민기식 중장, 1군사령관

임충식 중장, 5군단장

김영배 중장, 참모차장

김계원 중장, 전 6군단장, 현재 국방부 차관

박병권 예비역 소장, 국방부 장관, 족청 단원

이원상 예비역 준장(열성지지자)

이후락 예비역 준장, 국가재건최고회의 대변인, 1961년 2월 퇴역

정진환 예비역 소장(처남 혹은 매부)

김병길 예비역 준장, 병참장군, 혁명 이후 체포되었다가 1961년 7월3일 퇴역

유성열 예비역 소장, 이범석 쪽 사람, 1956년 퇴역, 현재 사망

권 준 예비역 소장, 1957년 퇴역

장준권 신병훈련소 소장

최규정 소장

정래혁 중장, 전 MCI, 현 6군단장(실제로 일본파), 이형근파의 일원

박승훈 예비역 준장, 1957년 퇴역

이창종 소장, 6관구사령관

이춘경 예비역 준장, 1959년 4월 퇴역

* 이들과 연줄이 있는 평안도사람 김은 현재 한국중석회사의 감사관 겸 중역이다.

   

◆ 첨부문서 7

대사관(서울) A-108

일본파

이종찬 예비역 중장, 전 참모총장, 이탈리아대사, 1960년 퇴역

김정열 예비역 중장, 전 공군참모총장 및 국방부 장관, 1957년 퇴역

신응균 예비역 중장, 독일대사, 1959년 9월 퇴역

유재흥 예비역 중장, 전 1군사령관, 태국대사, 퇴역

김창규 예비역 중장, 전 공군참모총장, 1960년 7월 퇴역, 현 한국중석회사 사장

김종오 장군, 합참의장, 일본의 민간대학 ROTC 장교, 사관생도다운 위엄이 부족

정래혁 중장, 상공부 장관

최영희 예비역 중장, 전 참모총장, 터키대사, 1960년 10월7일 퇴역

장덕창 예비역 중장, 전 공군참모총장, 1959년 퇴역

장창국 중장, 2군사령관(백선엽과는 평안도 동향친구)

장성환 소장, 공군참모총장

신상철 소장, 공군, 1962년 10월18일 퇴역, 현 베트남대사

이형근 예비역 장군, 전 참모총장, 경력상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본 파벌과는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다

박원철 준장, 공군사관학교 교장

장지량 예비역 준장, 정보참모부 부참모장, 공군, 전 한국중석회사 사장

최경록 예비역 중장, 2군사령부 참모장, 전 일본군 상사, 따라서 핵심그룹의 일원은 아님

김석원 예비역 소장, 전 일본군 대령(장기), 7~8년 전 퇴역 후, 국회 신민당 의원으로 활동

채병덕 중장, 첫 육군참모장(1950년 7월 사망)

강호련 예비역 준장, 공군, 쿠데타 이후 결혼 문제로 퇴역

기 타

이종찬 인척 장교(일본파가 아닌 경우도 있음)

김응수 예비역 소장, 전 6군단장, 미국에서 수학 중

김정평 예비역 준장, 1953년 10월 퇴역

신운봉 장군

이소호 소장, 부참모장보, 병참

   (끝)

◆ 첨부문서 7

대사관(서울) A-108

일본파

이종찬 예비역 중장, 전 참모총장, 이탈리아대사, 1960년 퇴역

김정열 예비역 중장, 전 공군참모총장 및 국방부 장관, 1957년 퇴역

신응균 예비역 중장, 독일대사, 1959년 9월 퇴역

유재흥 예비역 중장, 전 1군사령관, 태국대사, 퇴역

김창규 예비역 중장, 전 공군참모총장, 1960년 7월 퇴역, 현 한국중석회사 사장

김종오 장군, 합참의장, 일본의 민간대학 ROTC 장교, 사관생도다운 위엄이 부족

정래혁 중장, 상공부 장관

최영희 예비역 중장, 전 참모총장, 터키대사, 1960년 10월7일 퇴역

장덕창 예비역 중장, 전 공군참모총장, 1959년 퇴역

장창국 중장, 2군사령관(백선엽과는 평안도 동향친구)

장성환 소장, 공군참모총장

신상철 소장, 공군, 1962년 10월18일 퇴역, 현 베트남대사

이형근 예비역 장군, 전 참모총장, 경력상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본 파벌과는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다

박원철 준장, 공군사관학교 교장

장지량 예비역 준장, 정보참모부 부참모장, 공군, 전 한국중석회사 사장

최경록 예비역 중장, 2군사령부 참모장, 전 일본군 상사, 따라서 핵심그룹의 일원은 아님

김석원 예비역 소장, 전 일본군 대령(장기), 7~8년 전 퇴역 후, 국회 신민당 의원으로 활동

채병덕 중장, 첫 육군참모장(1950년 7월 사망)

강호련 예비역 준장, 공군, 쿠데타 이후 결혼 문제로 퇴역

기 타

이종찬 인척 장교(일본파가 아닌 경우도 있음)

김응수 예비역 소장, 전 6군단장, 미국에서 수학 중

김정평 예비역 준장, 1953년 10월 퇴역

신운봉 장군

이소호 소장, 부참모장보, 병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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