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반야용선의 터, 관룡사(觀龍寺)

醉月 2009. 4. 29. 21:07
소나무 숲이 만든 푸른 물결 위
용선대는 바다로 나아가는 한 척의 배,,,  

꽃이 피어야 봄이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고 하여도 꽃이 피지 않으면 겨울인 것이고 바람이 차고 몸에 냉기가 흘러도 꽃이 피면 봄이 왔다고 느껴진다. 3월 중순을 넘어 봄맞이 길로 나선 아른 아침은 아직 겨울 같은 날이다.

해마다 조급하게 봄맞이를 하였던 터라 찬 아침 공기가 가로막는 길 위에서 봄을 맞으러 가는 길이 불안정하다. 아침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가지산 빗겨 얼음골을 지나면서 햇볕이 두터우면 호박소(沼)에 들러 경쾌한 물소리를 듣겠지만 오늘은 을씨년스럽다 싶어 지나쳤다. 밀양을 거쳐 창녕에 도착할 때까지 차는 드물었다.

◇ 창녕의 봄 ⓒ 들찔레

관룡사를 오르기 전 먼저 겨울 색이 완연한 우포늪을 찾았다. 이미 물안개 거둔 아침 우포는 쓸쓸했다. 멀리 사지포 제방 아래로 물에 발을 담근 왕버들이나 내버들이 연둣빛 싹을 틔운 모습을 제외한다면 겨울 모습이 완연하고 물오리와 몇 몇 떠나지 않은 고니가 슬쩍 사람소리에 고개를 들어 쳐다본다.

이런 줄 알면서도 굳이 이른 아침에 우포를 찾은 이유는 두 가지인데 그 중 하나는 4월말이 되면 쪽지벌 군데군데 피는 자운영 군락이나 오뉴월에 매자기, 생이가래, 가시연꽃, 자라풀이 자라 수면을 덮는 장관을 상상하는 일이 즐겁기 때문이다.

◇ 우포늪에도 봄기운이 돌고 ⓒ 들찔레

또 다른 하나는 창녕이 물과 불이 상생하는 땅이기 때문에 관룡사가 위치한 불의 땅 화왕산(해발 757m)을 오르기 전 물의 땅 우포에서 출발해봄직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창녕 사람들은 화왕산이 있어 물의 범람을 막을 수 있었고, 우포가 있어 화왕산의 화기를 누를 수 있었다고 믿어왔다. 따라서 땅이 녹아 물이 모이는 곳에서부터 봄맞이를 하는 것도 좋을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포에서 관룡사를 가기 위해서는 창녕시가지를 거쳐야한다. 창녕은 제2의 경주라고 부른다. 한 때 빛별가야라 불리던 시절의 유적뿐만 아니라 진평왕 이후 신라에 편입된 뒤에도 많은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하나의 군 단위에서 이렇게 많은 유적들을 보유한 곳이 드물며 특히 신라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서 제2의 경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국보로 지정된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와 술정리 동삼층석탑(국보 34호), 그 곁의 하병수가옥, 그리고 보물로 지정된 창녕석빙고(보물 310호)와 영산 석빙고(사적 169호), 영산만년교(보물564호) 가 있으며 가야시대의 고분군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창녕 읍내를 지나칠 때면 꼭 술정리 동삼층석탑을 들르게 되는데 발굴 중이라 흙무더기 사이에 옷을 벗은 듯 서있는 탑이 외롭게 보이고 탑 뒤의 하병수가옥에는 늘 계시던 할머니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동네 주위를 서성이는 내 꼴도 쓸쓸해 보였는지 어느 집 담 너머 핀 목련이 바람에 몸을 흔들며 ´쯧쯧´하고 혀를 찬다.

◇ 봄 빛 완연한 영산만년교 ⓒ 들찔레

내친걸음으로 뒤돌아보지 않고 읍내를 떠나 영산만년교로 향한다. 관룡사에 올 때면 늘 만년교나 인근 영산석빙고 옆의 토끼풀 무성한 땅에 앉아 쉬게 된다. 영산만년교는 동네 개울 위에 무지개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돌다리로 남산에서 흘러내린다 하여 남천교(南川橋) 혹은 원님이 다리를 고쳐 주었다고 하여 원(院)다리라고 불리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무지개다리로 드는 선암사 승선교, 흥국사 앞 무지개다리, 전남 벌교의 무지개다리 등에 비해 영산만년교는 전체 길이가 13.5m, 폭이 3m로 작고 소박하다. 또한 위압적이지 않아 친근감을 준다.

곡선이 주는 부드러움과 여유는 우리나라 미를 나타내는 보편성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반원형의 다리가 아래로 흐르는 물결에 반사되면 물결 속에도 또 하나의 다리가 놓이게 되고 마침내 완전한 하나의 동심원을 이루게 된다. 물 위에 달이 차듯 마음에도 원이 주는 완전함이 내재되어 세상을 보는 눈이 긍정적으로 변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더구나 개천 주변에 가득한 노란 개나리와 물 위에 드리운 수양벚나무의 가지에 핀 꽃잎이 아침과 달리 완연한 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윽고 내내 불안했던 마음에 평정함이 찾아온다.

제대로 된 봄기운 맞아 평정을 찾은 마음을 안고 화왕산 관룡사 길을 오른다. 멀리 병풍바위가 두른 산 아래 서면 사방으로 푸른 소나무 울울(鬱鬱)하고 산으로 부는 바람에 등이 떠밀려 잰 발걸음에 숨결이 빨라진다.

◇ 관룡사 돌장승 ⓒ 들찔레




















일주문도 없는 절 집 가까이에 이르면 먼저 사람을 반기는 것은 길에서 빗겨나 서 있는 두 기의 돌장승이다. 아마도 원래의 절 오르는 길은 장승 사이로 나있었겠지만 차가 다니는 새 길이 나면서 원래의 길은 흔적만 남고 묵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절집 앞에 있는 대표적인 돌장승으로는 남원 실상사 앞에 있는 네 기의 돌장승을 들 수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상주 남장사 앞의 웃고 있는 돌장승을 좋아한다. 이곳 돌장승은 관모를 쓰고 있느냐 아니냐로 남녀를 구분할 수 있는데 툭 튀어나온 큰 눈, 주먹코, 앙다문 입술 사이로 튀어나온 이빨 같은 모습들이 재미있다. 이렇게 남, 여를 구분하여 돌로 만든 돌장승의 대표적인 예는 익산의 동고도리, 서고도리석불이 있다.

돌장승은 마을의 수호한다거나, 마을을 향하는 나쁜 기운을 돌리거나 막아주는 역할 한다는 민간신앙의 일부다. 그래서 돌장승은 흔히 벅수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절 앞의 돌장승도 실은 민간신앙과 불교가 결합된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 일주문을 대신하는 관룡사 석문 ⓒ 들찔레

장승과 인사를 나누고 들어서는 절집은 산지에 놓여있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우러르는 모습으로 계단을 올라야 한다. 덤벙덤벙 돌계단을 오르면 용선대와 더불어 관룡사의 상징이 되어버린 작은 석문(石門) 하나를 만나게 된다. 겨우 사람 키 높이를 넘고 두 사람 정도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더구나 아무 장식이 없이 어느 시골 동네의 돌담에 붙어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는 작은 출입문 같은 모습임에도 화려한 단청을 두른 여느 큰 일주문보다 머리를 조아리게 만든다.

앙드레지드는 그의 소설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힘쓰라’고 하였다. 인생의 힘든 고통을 이기고 극복하라는 뜻이겠지만 종교에서의 그 의미는 달리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기독교의 경우 터키 카파도키아의 괴뢰메 지역, 초기 교회들의 출입구는 모두 허리를 숙여야만 드나들 수 있다. 심지어는 식당을 드나드는 문도 그렇다. 이는 수양하는 동안은 밥도 배불리 먹지 말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슬람교의 경우 모스크의 출입문도 작다. 문 위에는 줄을 걸어놓아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도록 만든 곳들도 많다. 유교의 경우 서원을 드나드는 문 또한 좁고 작은 경우를 더러 본다. 도포자락 손으로 쥐어 땅에 끌지 말고 조심해서 들어와 학문에 임하라는 뜻이다.

이곳 관룡사의 작은 석문은 일주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이는 허리 숙여 겸양하고 하심(下心)하라는 부처님의 뜻이 숨겨져 있으리란 생각이다. 아울러 반야용선의 배를 타는 출입구라는 생각도 한다.

◇ 관룡사 대웅전 ⓒ 들찔레

이른 봄 드문드문 작은 키의 홍매화가 봄의 전령임을 알려주는 절 마당에는 점차 기온이 올라 넓은 볕살이 골고루 퍼지고 있었다. 관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의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신라 8대사찰의 하나로, 내물왕 39년(서기 394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고 진평왕 5년(서기 583년) 증법(證法)이 중창하고 삼국통일 후 원효가 중국 승려 1,000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대도량(大道?)을 이루었다고 한다.

당시 원효가 제자 송파와 함께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다 갑자기 연못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절 이름을 ‘관룡사’라 하고 산 이름을 구룡산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중심건물 대웅전(보물 제212호)은 1965년 보수공사 때 나온 문서에서 영조 원년(서기 1401년)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에 불 탄 것을 광해군 7년에 고쳐지었다고 한다. 년대가 확실한 건물로서 조선 초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재미있는 사실은 대웅전이라 해놓고 사실은 대적광전에 모셔야할 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 관룡사 약사전, 지붕이 아래 공간에 비해 무척 무거워 보인다 ⓒ 들찔레

두 해 전 이곳에 왔을 때는 사월초파일 봉축행사를 한참 준비하던 때였다. 대웅전 앞부터 온 절 에 등을 달아놓아 절의 이모저모를 살피고 감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특히 임진왜란 때도 타지 않고 남은 유일한 전각인 약사전(보물 제 146호)은 주우를 둘러싼 등에 가려 주심포양식의 건물 특색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오늘도 약사전 외벽에는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이 약사전은 앞, 옆 각각 한 칸 씩의 작은 전각으로 측면에서 보면 사람 人자 모양이며 대들보 위에 2중의 우미량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주심포계 건물의 특징이다. 밖의 처마도리와 가장 가운데의 마루도리는 둥근 굽도리로 중간의 중도리는 납도리로 짜 넣어서 무게를 감당하는 힘을 극대화시킨 구조다. 따라서 지붕이 훨씬 크고 무거운 구조인데도 아래 기둥들이 끄떡없이 무게를 잘 지탱하고 있다.

◇ 주심포계 건물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약사전 측면 ⓒ 들찔레

또한 약사전 내부의 특징 중 하나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19호) 뒤로 53불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흔히 삼천불전이니, 천불전이니 하는 것들이 있지만 시대적으로는 그것 이전의 양식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53불이 그려진 대표적인 절이 금강산 유점사라고 한다, 약사전에 후벽에는 사군자를 그려 넣었는데 예술적인 가치가 그렇게 커 보이지는 않지만 나름 소박한 멋이 있다. 아마도 이곳 약사전을 찾는 사람들이 사시사철 사군자처럼 건강하라는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닐까 짐작한다.

◇ 약사전 석조여래좌상과 소박한 3층석탑 ⓒ 들찔레

약사전 앞에는 작은 삼층석탑 하나가 놓여있다. 작은 전각에 잘 어울리는 비율의 탑이기는 하나 군데군데 이끼가 끼고 더러는 부서져 내리는 모습의 이 탑은 고려시대의 것이다. 불교를 국교로 삼은 시대의 것이지만 대체로 고려의 탑은 신라에 비해 작아지고 단순화된다. 그러나 이 작은 약사전 작은 적각 앞에 다보탑 같이 크고 화려한 탑이 어울릴까? 소박하게 가족과 조상의 안녕을 기원하던 우리 백성들의 모습이거나 아직은 설익은 행자승 하나가 전각 안의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는 모습 같아 보인다. 이럴 때는 탑이 꼭 화려하거나 커서 좋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절 뒤 산길로 길을 잡는다. 오늘 이 절을 찾아온 가장 큰 의미로 반야용선의 상징인 용선대를 오르기 위해서다. 우포늪은 창녕에서 가장 낮은 곳이다. 낮은 곳에서 한 발 한 발 걸어 이곳 관룡사에 오고 또 산길을 걸어 용선대를 올라간다. 보잘 것 없이 버려진 땅에서 봄기운을 맞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배를 보러 가는 길, 이렇게 나를 뒤돌아보며 힘겹게 하루를 걷는 것 그것이 오늘 하루를 사는 의미일지 모른다.

◇ 화왕산 병풍바위와 푸른 물결 이루는 소나무 숲 ⓒ 들찔레

반야용선(般若龍船)!, 이는 중생을 고통 없는 피안(彼岸)의 세상으로 건너게 해주는 배를 뜻한다. 이 배를 용이 호위하므로 반야용선이라 부른다. 이 용선은 반야(般若), 즉 지혜를 의미하는 것으로 지혜를 깨달아 피안에 도달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이곳 관룡사의 본사인 통도사 극락보전 측벽에 그려진‘반야용선 접인도’는 반야용선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용선(龍船) 앞 선두에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합장을 하고 서 계시고 맨 뒤쪽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육환장을 들고 서 있다. 지장보살은 현실세계에 남아 중생들을 구제하도록 부처님으로부터 명받아 지옥이든 천상이든 고통 받는 중생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서 구원하는 분이다. 배 중앙에는 여러 신분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표정으로 극락(極樂往生)한다는 기대감에 젖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배 중앙에는 탑의 상륜부와 같은 지붕이 있는 건물을 있으며 배 아래로는 푸른 파도가 이는 바다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 통도사 반야용선 접인도 ⓒ 들찔레

반야용선은 바다를 통해 건너야 하는 것임에도 용선대는 산 위에 있다. 아마도 산이 겹겹이 쌓인 모습이거나, 구름이 깔린 모습 또한 바다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생살이 자체가 하나의 항해라고 보면 산 위에 올라 제 살 던 세상을 관조하는 것 자체가 ‘반야의 길‘이 어떠하리라는 어렴풋한 상상을 가능하게 해줄지 모른다. 이곳 말고도 대개의 절집 뒤에는 소나무가 많지만 특히 이곳 관룡사에서 만나는 소나무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푸른 바다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소나무를 보면 살아있는 뭇 생명들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푸른 물결이 떠오른다.

◇ 용선대 석가여래좌상 ⓒ 들찔레

물론 반야용선의 터로 이곳 관룡사 용선대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절집이 다 반야용선이며, 절집내의 중심당우인 대웅전이 다 반야용선이다. 그러나 그 중 대표적으로 반야용선의 의미를 부각시킨 곳들로 해남 미황사 대웅전, 여수 흥국사 대웅전, 밀양 대적사,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절터 전체를 배로생각하고 절집을 구성한 대표적인 예로는 화순 운주사를 들 수가 있을 것이며 경주 남산 금오산 정상 부근의 연화대좌는 이곳 용선대와 가의 동일한 뜻의 장소일 것이다.

절에서 멀지는 않으나 산길을 걷게 되면 잠시 숨이 고르지 않고 숨이 차기 마련이다. 인생살이가 다 그럴 것이다. 힘들수록 땅을 보고 걷게 되는데 사람들이 지난 길에 앙상한 뼈같이 혹은 도르라진 정맥 같이 무성한 뿌리들이 드러나 있다. 이 나무뿌리들이 길을 내어주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났을까? 용선대에 올라 극락세계를 가기를 갈구하는 사람들의 발걸음들이 이렇게 뿌리를 땅위로 드러내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나무뿌리의 얽힘은 어쩌면 우리 인간들의 번민이 꼬인 모습이지 싶기도 하다. 내 마음에 얽힌 여러 번뇌의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숨 가쁘게 걷는 뿌리길이다.

◇ 피안의 세계를 응사히는 용선대 석가여래좌상 ⓒ 들찔레

마침내 소나무 숲이 만든 망망대해 위에 하나의 배가 있고 앞으로 응시하는 부처님, 통일신라 후기 9세기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가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을 만난다. 풍만한 얼굴에 작은 미소를 머금은 모습은 봄맞이 나들이 나온 나에게 ‘애달게 살지 말라’는 한 말씀 하시려는 듯 보인다. 소나무 바다 위네 연꽃 대좌가 양감 있게 조각 되어있고 무궁한 공중 위에 떠 있는 듯 앉은 모습이 멀리서 보면 새털처럼 가벼워 보인다.

◇ 멀리서 본 용선대 ⓒ 들찔레

이 불상이 처음 조성되었을 때는 소나무 숲과 광배역할을 하는 불상 뒤의 병풍바위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 의해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현재의 불상은 정면에서 왼편으로 약 90도 돌려 놓여 있어 병풍바위가 광배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아쉽다. 세상 살면서 보고 듣고 하는 일 중에 아쉬운 것이 하나 둘 이겠는가? 만은 병풍바위에 등을 기댄 부처님의 상호를 언젠가 다시 보기를 희망할 뿐이다.

[배강열 칼럼니스트] 배강열 칼럼니스트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