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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에 담장이 없는 것이 특징인 윤증 고택. 윤증의 후손이 직접 관리하는 장독들이 볕을 쬐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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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門家(명문가)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필요하다. 당대에 반짝했다가 아들, 손자 代(대)에 가서 형체도 없이 사그라지는 집도 많다. 명문가는 역사가 필요한 것이다. 검증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검증기간이 필요한가? 필자가 보기에는 최소한 100년은 지나야 한다. 100년이면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3대가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그 사람의 觀相(관상)을 고치려면 최소한 3대는 노력해야 고쳐진다는 말이 있다. 1대만 노력해서는 불가능하다. 祖父(조부) 때부터 노력해서 아버지를 거쳐 손자 대까지 노력해야만 좋지 않은 관상이 좋은 관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본다. 그만큼 성격이나 타고난 기질을 바꾸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명문가는 역사가 오래된 집이고, 역사가 있다 보니 古宅(고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일단 어느 집안이 역사가 있는, 수백 년 된 고택을 보유하고 있으면 그 집안은 명문가다. 명문가를 판단하는 가장 확실한 물적 증거는 바로 고택 소유 여부다. 자존심 강하고 명예를 중요시하는 집안 고택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은 첫째, 재력이 있음을 말해준다. 대지 4950㎡(500평)~3300㎡(1000평)에다가, 50~60칸 규모의 韓屋(한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재력을 상징한다. 둘째, 이러한 규모의 고택은 조선시대에 아무나 소유할 수 있는 집이 아니었다. 재력도 재력이지만, 그 집안의 先代(선대)에 유명한 인물을 배출했어야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고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윗대에 유명한 조상을 두었음을 말해준다. 예를 들어 퇴계 이황과 같은 조상을 두고 있으면, 그 후손들은 고택을 아직까지 지키고 있기 마련이다. 선대의 카리스마는 그 집안을 유지시키는 정신적인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손들이 조상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연히 처신에 조심하기 마련이다. 셋째는 고택이 있는 후손들은 남다른 자존심이 있다. 자존심이 있는 집안 후손과 없는 집안 후손은 행동거지에 큰 차이가 있다.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처신을 해야 할 때에 이 자존심이 작동한다. 어지간한 이해타산보다는 자존심을 택하는 결정이 그것이다. 사람은 자존심이 없으면 당장 눈앞의 이익을 쫓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 주변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망신당하기 마련이다. 거주하기가 편리한 아파트로 이사 가지 않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아직까지 전통 한옥에서 거주한다는 사실 자체가 자존심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명문가는 이 자존심이 있는 집안이다. “자존심이 밥 먹여 주나?” 하고 물을지 모르지만, 명문가는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 밥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집안이다. 넷째는 풍부한 문화적 전통이다. 집안의 족보에 대해서도 해박하다. 예를 들면 7대조 할아버지가 어떤 집안하고 혼사를 했고, 그 할아버지의 외가 쪽 조카가 벼슬을 해서 지방으로 발령이 났는데, 그 지역에서 나온 특산품 붓으로 쓴 글씨를 병풍으로 만들었고, 그 병풍에 써진 글씨의 내용이 소동파의 ‘赤壁賦(적벽부)’ 내용이라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윗대 조상의 역사와 일화를 소상히 알고 있다. 집터와 묘터를 감별하는 風水(풍수), 집안 내의 친척관계와 다른 집안과의 婚脈(혼맥) 등을 꿰뚫는 譜學(보학), 한옥의 재료와 건축방법에 관한 古建築(고건축), 유교와 불교의 古典(고전), 漢詩(한시), 먹을 만한 음식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다. 얼굴에 그러한 소양이 풍긴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도 화제가 풍부하여 대화를 잘 이끌어 간다. 다섯째는 신중하다는 점이다. 수백 년 된 고택을 지금까지 유지해 오기까지는 수많은 난관이 있었기 마련이다. 기복 없는 집안이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이런 난관에 부닥쳐서 어떻게 대처를 하느냐이다. 대처에 특별한 비결은 없다. 오직 신중해야 한다. 신중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얼굴과 행동에서 두 가지로 나타난다. 우선 얼굴빛이 온화하다는 점이다. 온화한 얼굴빛을 띠려면 감정이 절제되어 있어야 한다. 감정이 가라앉아 있어야 가능하다. 감정이 흥분되어 있으면 얼굴이 온화할 수 없다. 온화할 수 없으면 대인관계나 일 처리할 때에 쓸데없는 마찰을 야기할 수 있다. 또한 얼굴빛이 평온하면 상대방에게 호감을 준다. “아! 이 사람은 인격자구나, 믿을 만한 사람이구나!”하는 인상을 준다. 좋은 첫인상은 상대방에게 이득을 주지 않고도 호감을 주는 방법이다. 신중하다는 것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선뜻 확답을 하지 않는 스타일을 가리킨다. 시간을 갖고 결정을 내린다. 처음에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는 신중한 장점으로 전환된다. 명문가 후손들은 대체로 얼굴빛이 온화하고 결정을 내릴 때는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하는 공통점이 있다. 여섯째는 積善(적선)하는 습관이다. 명문가들의 공통점이 바로 이 적선에 있다. ‘積善之家 必有餘慶(적선지가 필유여경)’을 믿는다. 증조부가 이것을 믿었고, 조부가 믿었고, 부친이 믿었으니 자기도 믿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적선을 해야만 집안이 잘된다는 믿음은 그 효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종교적인 믿음에 가깝다. 명문가 후손들은 ‘적선지가 필유여경’이 종교적 신념이다. 안동 학봉家와 영양 주실 趙씨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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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양군 일월면에 위치한 주실 마을. 주실 조씨 가문이 400년 넘게 살아온 곳이다. | 그동안 만나본 명문가 후손들과의 접촉 경험을 소개하면 이렇다. 안동에 가면 鶴峰(학봉) 집안이 있다. 고택이 잘 관리되어 있고, 집안에 영업용 냉장고 크기만한 냉장고가 두 개나 있다. 왜 이렇게 가정집에 큰 냉장고가 두 개나 있는가? 손님접대 때문이다. 집안에 지나가는 손님이 오더라도 그냥 보내지는 않는다. 종이컵에 커피라도 한잔 타 준다. 하루 이틀 묵어 가는 손님들이 불시에 찾아올 때를 대비해서 그 반찬거리를 미리 장만하고 있어야 한다. 냉장고가 필요한 이유는 순전히 접빈객 때문이다. 요즘은 호텔이나 여관에서 손님을 재우지만, 이 학봉가는 사랑채에서 자도록 한다. 밥상 차리고, 이부자리 준비하고, 다과 접대하려면 일이 많다. 그러자면 얼마나 고생이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봉가는 집에서 손님을 재운다. 밖의 숙박업소에 손님을 재우는 것 하고, 자기 집에서 재우는 것은 접대 받는 손님 측에서 볼 때 인상이 확연히 다르다. 이렇게 손님 접대하면 돈이 생기는가? 돈도 안 생긴다. 오직 집안의 家風(가풍)이자, 명예 때문이다. 학봉가의 가풍과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 돈과 노력을 들이는 것이다. 이 집의 셋째 아들이 50대 후반이다. 대기업의 부사장을 지내고 지금은 수원에서 전자업체 대리점을 한다. 어느 날 강연을 끝내고 필자는 서울 강남의 고속버스터미널로 가야 했다. 밤 11시30분 막차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가야 하는 일정이었다. 이 후손은 저녁 10시쯤에 고속버스터미널까지 필자를 태워다 주었다. 그리고 본인은 수원 집으로 내려가는 줄 알았다. 필자는 막차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표를 끊고 1시간 반 정도를 밤늦은 시간에 터미널에서 빈둥빈둥 무료하게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표를 끊고 10분이나 흘렀을까. 수원으로 내려간 줄 알았던 이 후손이 손에 땅콩과 구운 오징어를 들고 엉금엉금 터미널에 다시 나타나는 것 아닌가. 나는 깜짝 놀랐다. “조 선생님, 차 시간이 남아서 심심할까 봐 이야기나 나누다 가려고 다시 왔습니다.” 그는 11시25분까지 터미널에서 오징어를 같이 먹으면서 놀아주다가 필자가 30분 버스를 타는 것을 보고 수원으로 향했다. 그가 수원 집에 들어가면 아마 새벽 1시가 다 될 것이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이런 대목에서 수백 년 명문가 후손의 처신이 드러난다. 터미널에 내려만 주고 돌아가도 하등 결례가 아닐 텐데도 불구하고 다시 오징어를 사 들고 돌아와 손님이 막차까지 타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 이러한 매너는 가풍에서 우러난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학봉 집안의 가풍이 봄바람 같은 가풍은 아니다. 이 집안은 수백 년 동안 ‘寧須玉碎 不宜瓦全(영수옥쇄 불의와전)’의 가풍을 지켜 왔다. ‘차라리 부서지는 옥이 될지언정, 온전한 기왓장으로 남지 말라’는 뜻이다. 깨지더라도 할 말은 해야 한다. 영남의 南人(남인) 집안들이 조선 후기 200년 동안 노론들에게 압박을 당할 때 가장 앞에 서서 노론들에게 저항을 한 집안이 바로 이 집안이다. 그러다 보니 벼슬도 별로 못했다. 학봉을 제외하고는 요즘 차관보에 해당하는 參議(참의) 벼슬까지가 올라갈 수 있는 한계였다. 영양의 舟室(주실) 마을에 400년 가까이 살아온 趙(조)씨 집안도 역시 학봉 집안처럼 강경한 가풍을 지니고 있는 집안이다. 시인 趙芝薰(조지훈)이 이 ‘주실 조씨’다. 趙東元(조동원), 趙東一(조동일), 趙東杰(조동걸) 교수를 비롯해 교수를 많이 배출한 집안으로 소문나 있다. 주실 조씨들 역시 노론정권에 대해서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래서 ‘劍南(검남)’으로 불렸다. ‘칼 같은 남인’이란 의미다. 이 검남의 400년 내려온 가훈이 ‘三不借(삼불차)’다. 첫째 財不借(재불차),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리지 않는다. 둘째 人不借(인불차), 사람을 빌리지 않는다. 즉 양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셋째가 文不借(문불차),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 不借(불차)를 하면 인생이 피곤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집안의 자존심을 지켰다. 조지훈의 ‘지조론’이 유명한데, 알고 보면 조지훈의 ‘지조론’도 집안에 내려온 가풍을 소개한 셈이다. 여수 봉소당과 해남 녹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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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에 있는 고산 윤선도 종가 ‘녹우당’(사적제 167호).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언제든 곳간을 여는 것이 이 집의 가풍이다. | 전남 여수에 가면 鳳巢堂(봉소당)이라는 택호가 붙은 집이 있다. 鳳(봉)자가 붙은 지명이나 집은 그 근방에 바가지, 또는 철모처럼 생긴 둥그런 산봉우리가 포진해 있다. 둥그런 봉우리는 대개 봉황의 머리로 보기 때문이다. 봉소당도 집 앞의 봉우리가 둥그렇고, 그 너머로 여수 앞바다가 보인다. 영화 <가문의 영광>에 나왔던 집이기도 하다. 영광 김씨인 이 집은 100년 동안 여수에서 가장 부잣집이었다. 일제시대에는 이 집안의 사촌형제 28명이 모두 일본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재력과 머리가 있던 집이었다. 지금도 여수에서 제일 부잣집이다. 이 집 후손과 함께 여수시장 내에 있는 ‘용서대’(큰 서대) 요리를 잘하는 식당으로 가던 중이었다. 시장통을 통과하다 보니 생선 좌판을 깔고 장사를 하는 10여 명의 아주머니들 앞을 지나가야 했다. 이 집 후손은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그 비린내 나는 앞치마를 두른 아주머니들과 일일이 안부를 물었다. “작은 아들 결혼은 했느냐?” “대학 졸업한 막내는 어디에 취직 했느냐?” 그뿐만 아니라, 구면인 어떤 생선장수 아주머니하고는 포옹도 마다하지 않았다. 포옹을 하다 보면 옷에 생선 비린내가 배기 마련이다. 이러다 보니 시장통 50m를 통과하는데 약 30분이 걸렸다. 나는 만석군 집 아들이 시장통 아주머니들과 일일이 손을 잡으면서 지나가는 이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여수는 6·25 이전에 혹독한 여순반란 사건을 겪었던 곳이다. 이 집이 돈 많은 地主(지주)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여순반란 사건 때도 인명피해가 없었다. 평소에 지역민들에게 인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난리가 나면 이데올로기는 껍데기이고, 실제로는 평소에 쌓인 개인 감정을 정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 집은 우익이었지만, 평소에 많은 적선을 해 놓았기 때문에 좌익들도 차마 이 집안을 공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적선하는 가풍이 60대 후반인 이 후손에게도 계승되고 있었다. “나 돈 있어!” 하고 거들먹대기 좋아하는 猝富(졸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처신을 하고 있었다. 역사의 풍파를 겪으면서 지역사회의 인심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리고 그 인심을 얻으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실전체험을 통해 철저하게 배운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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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의 내림손맛을 잇는 종부 김은수씨(右)와 남편 윤형식씨. | 이 후손이 필자에게 한 말 가운데 잊혀지지 않는 말이 있다. “살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온 적이 여러 번입니다. 과거에 별다른 생각 없이 그 사람 일을 제가 도와줬을 뿐인데, 그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잊지 않고 제가 어려울 때 그 배로 저를 도와줬습니다.” 해남에 있는 해남 윤씨 집안인 綠雨堂(녹우당)도 마찬가지다. 이 집 후손은 70대 중반이다. 온건한 인상을 풍기면서도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아주 신중하다. 500년 집안을 유지해온 경륜이 풍긴다. 500년 동안 얼마나 많은 환란을 겪었겠는가? 윤씨 후손은 말을 할 때에도 절대 극단적인 이야기는 삼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아무리 미워도 “섭섭합니다”라고 말하지, “그 놈 나쁜 놈이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6·25 때는 윤씨들이 한쪽에서는 경찰서장도 하고, 한쪽에서는 공산당 도당위원장도 했다. 집안 간에 서로 좌우익으로 갈렸어도 극단적인 행동이나 언사는 내뱉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이 하는 말이 “엎어져도 윤가요, 뒤집어져도 윤가다”라는 말이다. ‘三開獄門 積善之家(삼개옥문 적선지가)’가 이 집안의 가풍이다. 조선시대에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이 돈이 없어 세금을 못 내는 경우가 있었다. 세금을 못 내면 감옥에 가두었다. 해남 윤씨들이 그 옥에 갇힌 사람들의 세금을 세 번이나 대납해 주고 감옥 문을 열어주었다 해서 생긴 고사성어다. 충남 논산의 윤증 집안 충청도 논산에 가면 明齋(명재) 尹拯(윤증) 집안이 있다. 명재 고택은 담벼락이 없는 점이 특징이다. 대문과 담벼락이 없으므로 내방객이 곧바로 사랑채에 진입할 수 있는 구조다. 이 집은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겠다는 의도가 내포돼 있다. 감출 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다. 그러니 올 사람은 다 와서 봐라. 이 정도가 되기까지는 이 집안 사람들이 얼마나 公的(공적)인 삶을 살았는지 짐작이 간다.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 받을 일은 하지 않는다가 철칙이다. 조선시대에 누에 키우는 일이 고소득 작목이었을 때에도 이 윤씨 집안은 뽕나무를 키우지 않았다. 주변의 서민들 수입원을 양반가 부잣집인 윤씨들이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문중의 결정 때문이었다. 집안의 어른인 명재의 제사상도 크기가 정해져 있다. 가로 90㎝, 세로 60㎝ 정도밖에 안 된다. 제사상이 작으니까 올라가는 제사음식도 몇 가지 안된다. 제사를 단출하게 지내야 한다는 명재의 유언이 있었다. 50대 중반인 이 집안 후손도 역시 표정은 온화하고 결정은 신중하다. 필자가 가끔 놀러 가면 이 후손은 빈손으로 보내지 않는다. 하다못해 된장 한 그릇이라도 꼭 필자의 손에 쥐여서 보낸다. 찾아오는 손님을 빈손으로 보내지 않는다. 줄 거 없으면 찬물 한 대접이라도 대접한다는 신조다. 충청도에서 지금까지 알아주는 양반집이다. 명문가 집안 사람들은 행동 하나하나에 절제가 내포돼 있다. 그 절제에서 온화함과 신중함이 나온다. 그리고 이 절제가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로부터 하나하나 지적을 받으면서 축적되어 온 예법이다. 유년시절에는 ‘부모가 왜 자식들에게 이렇게까지 까다롭게 하나!’하는 원망이 있었지만, 중년이 되고 보니까 비로소 그 이유가 이해되더라는 고백을 공통적으로 한다. 명문가의 후손들이 윗대로부터 배운 가장 핵심적인 처세법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인심을 얻어야 한다’는 것으로 압축된다. 인심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를 고민하는 사람만이 집안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 명문가와 非(비)명문가는 아마 이 대목에서 분기되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