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박동운의 列國志 兵法

醉月 2009. 9. 29. 08:57

춘추전국의 인간관계와 전략전술 부패·내분, 민심 무시한 수도이전으로 몰락한 周왕조

고대 중국의 대변혁기였던 춘추전국시대는 혼란과 불안의 시대, 그야말로 난세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상당수 지식인도 어지러운 세상사를 개탄하며 춘추전국시대를 떠올린다. 난세를 헤쳐나간 중국의 인학(人學) 고전 ‘열국지’를 오늘의 시각으로 다시 읽으며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이 시대, 가슴에 새길 교훈을 찾아본다 

혼란과불안의 시대를 난세(亂世)라고 한다. 중국의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가 대표적이다. 역사적으로는 중국 고대사의 대변혁기에 해당하는 약 500년간의 난세를 가리킨다(B.C. 770~221).

오늘날 한국에서도 일부 지식인들은 세상사의 어지러운 현실을 개탄하면서 자주 전국시대를 거론한다. 또 언론사들은 ‘춘추필법(春秋筆法)’을 표방하는데, 이는 나라의 정통성을 수호하면서 대의명분을 밝히고 시비와 선악을 가려나가겠다는 자세의 다짐인 것 같다. 나아가 일반 서민들은 적응해야 할 객관적 정세의 사태발전에 대한 판단이 매우 어렵다는 데서, 가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고 푸념한다. 이른바 ‘불확실성의 시대(Age of Uncertainty)’로 일컬어지는 난세의 답답한 분위기를 적확하게 묘사한 ‘민중의 예술적 표현’이라 할 만하다. ‘uncertainty’는 불안과 불신 그리고 인생의 허무 등 함축적 의미를 지닌 단어다.

난세의 특징은 혼란과 불안의 소용돌이, 즉 위기의 연속이다. 그러니 기성의 권위와 질서, 도덕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처음엔 명분과 체면을 고려하지만, 나중엔 이나마 돌볼 겨를이 없어진다. 살아남기 위한 각박한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곧 ‘춘추’가 ‘전국’으로 이행하는 셈이다.

원래 춘추란 ‘봄’과 ‘가을’의 합성어로, 시간의 경과, 계절의 변화, 시대의 변천 등을 뜻했다.

춘추는 또한 특정한 역사책을 지칭한다. 즉 공자가 편집·수정했다는 노(魯)나라의 국사책이라고 오랫동안 인식돼왔고, 한국의 유학자들도 그렇게 믿어왔다. 이 책은 용어 선택 하나에도 철저하게 시비를 가렸다. ‘춘추필법’이란 성어(成語)가 여기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중국 역사학자(대만해협의 양안에 걸쳐) 가운데 이를 공자의 집필이라고 고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애독서였다고 한다.

 

시대 변천의 착잡한 전주곡

역사적으로 춘추시대는 주(周) 왕조의 평왕(平王)이 수도를 섬서성에서 하남성으로 옮긴 소위 ‘동천(東遷)’ 이후, 국세(國勢)가 급전직하로 추락해 멸망으로 치닫게 된 시기를 말한다.

이어진 전국시대는, 한족(漢族) 사회에서 구심점이 없어진 후 약육강식이 벌어지고 그것이 7대 강국간의 경쟁적 상극(相剋)으로 정리됐다가 끝내 진(秦)왕조의 시황제(始皇帝)에 의해 이른바 ‘천하통일’이 달성되기까지 피비린내 나는 전쟁시기를 가리킨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인권이 크게 유린당해 인명이 파리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시대는 한족의 정신문명이 훌륭하게 다져진 시기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공자와 맹자, 노자, 장자, 손자, 오자, 한비자 등이 모두 이 시대 사람이다. 그후 각 시대에 출현한 것은 이들 사상의 계승 또는 변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동시에 과학기술 분야의 발명·발견도 눈부셨다. 광석에서 쇠붙이를 골라내는 야금술과 철제공구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도 춘추시대 초기의 일이다.

그러한 발전의 비결은 부단한 전란의 와중에서도 다양한 경쟁 주체가 존재했으며, 그들간에 능력 본위로 인재를 모으려는 경쟁의식과 시장경제적 사고활동이 가동한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는 개인미신 독재체제가 ‘가문 조작’으로 세습전제를 일삼고, ‘계급투쟁’을 표방해 노동귀족이 횡행하는 한편에 수백만이 굶어죽었으나 단 한 사람의 국제적 학자도 나오지 못한 북한의 사례와는 판이하다.

그런데 춘추·전국시대에 역사적 행동단위였던 제후의 나라들은 흔히 ‘동주열국(東周列國)’이라 통칭된다. 이러한 명칭은 주 왕조가 비록 동쪽으로 천도한 후 멸망했으나, 유교적 정통성의 표식인 종주권의 구심점다운 지위를 보유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물론 오늘날에는 그다지 설득력 있는 칭호로 여겨지지 않는다.

한편으론 역사소설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의 성립 경위를 보면, 원래 명(明)나라 사람 여소어(余邵魚)가 역사책에 민간설화를 섞어서 ‘열국지전(列國志傳)’을 썼고, 그것을 명말(明末)의 풍몽룡(馮夢龍)이 정정해 ‘신열국지’로 고쳤으며, 청(淸)나라 때의 채원방(蔡元放)이 손질해 ‘동주열국지’로 펴냈다고 한다.

필자는 그러한 문학작품의 묘사를 참고하지만, 난세의 처세술과 전략·전술의 논거로는 정사(正史)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중시했다. 아울러 현대의 관련 연구를 섭렵하고자 노력했으나 한계를 느꼈다.

   

난세의 최우선 과제는 ‘살아남기’다. 싸울 바엔 이겨야 하고, 승산 없는 싸움은 애당초 하지 말아야 한다. 양면작전(兩面作戰)은 패망의 길이다. 더구나 우유부단이나 무지몽매로 싸워보지도 않고 굴복해 망국노 신세를 자초하는 짓은 어불성설이다. 난세에 살아남으려면 비스마르크의 갈파대로 ‘자기의 경험뿐만 아니라 타인의 경험에서도 교훈을 찾아낼 줄 알아야’ 한다.

 

유왕(幽王)의 봉화 장난과 최후

주 왕조는 초창기에 섬서성의 서안(西安) 부근을 본거지로 삼고 광대한 중원(中原) 일대를 지배하면서 위세가 대단했다. 왕조 창건자와 역대 군주들이 현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12대 유왕(幽王)에 이르러 암매한 폭군이 행패를 일삼다 급기야 왕조가 일단 멸망하고 말았다. 유왕 자신도 전란의 와중에 살해당했다. 그의 아들인 평왕이 등극해 수도를 하남성 낙양(洛陽)으로 이전했으니, 그후가 동주이고, 곧 춘추·전국시대다. 유왕까지는 서주(西周)라 부른다.

유명한 영국인 로렌스(Lawrence of the Arabs)가 전제군주들을 비교연구한 것에 따르면 현명한 군주와 암매한 군주 의 차이는 지극히 간단명료하다. 즉 현군(賢君)은 자기의 행복이 ‘타인들의 호의’에 의존한다는 도리를 헤아린다. 반대로 암군(暗君)은 소위 ‘가문’이 좋아서 특권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든지, 또는 혼자 잘나서 호화방탕을 일삼아도 된다는 식으로 착각하다 패망한다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유왕이 그러한 유형의 암군이었다.

유왕은 즉위 4년 만에 군대를 동원, 제후의 나라인 포(褒)국을 공격했다. 고분고분하지 않으니 본때를 보여준다는 것이었는데, 원래 멸망할 통치자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일 벌이기를 좋아한다. 이에 공포에 질린 포후가 평화를 애걸하면서 궁중에 있던 보물과 미인들을 모조리 바쳤는데, 그중에 천하절색인 포사가 있었다. 유왕은 열일곱 살의 미인 포사를 얻자 바로 매료됐다. 포사는 2년 후 아들을 낳았는데 백복(伯服)이라 이름지었다.

유왕은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포사를 왕후로, 백복을 태자로 삼았다. 앞서 유왕은 신후(申后)를 왕비로, 그 소생인 의구(宜臼)를 태자로 세웠는데, 모두 폐하고 내쫓다시피 했다. 이에 격분한 왕후의 부친, 즉 의구의 외조부인 신후(申侯)가 이 일로 진언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도리어 유왕의 미움을 샀다.

새 왕후 포사는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자라 기구한 운명으로 웃음을 잃은 터였다. 유왕은 사랑하는 왕후에게 웃음을 되찾아주려고 여러모로 애썼으나 별무효과였다. 이에 눈치 빠른 간신 석부(石父)가 유왕에게 기발한 아이디어를 진언했다.

예나 지금이나 간신의 첫째 무기는 아첨이고, 그 전제조건은 통치자의 암매(暗昧)다. 석부의 착상에 의하면, 유년기의 불행 때문에 웃음을 잃은 포사를 웃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기발한 부조리로 세상 사람들을 당황망조(唐慌罔措)케 하는 엉뚱한 일을 벌이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론 국왕이 무사태평을 누리면서도 봉화(烽火)를 올려 제후들을 급거 소집한 뒤 그들로 하여금 ‘만화적 풍경’을 연출케 한다는 것.

유왕은 석부의 진언을 채택, 한 여인을 웃게 하려고 비상시가 아닌 데도 봉화를 올리게 했다. 깜짝 놀란 각지의 제후들은 급거 기병과 보병을 거느리고 국왕을 수호하기 위해 서울로 달려왔으나 와보니 아무 일도 없었다. 이들은 실망과 허탈과 불신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한편 제후들이 허둥지둥하며 당황하는 장면을 바라보던 포사가 드디어 웃음을 지었고, 포사의 웃음을 본 유왕은 크게 기뻐했으며 간신에게 큰 상을 내렸다. 공사(公事)를 그르친 시초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포사의 얼굴에서 다시 웃음이 사라지자 유왕은 더 크게, 더 빈번히 봉화를 올리게 했다. 제후의 군대가 더 많이 모여들었으나 역시 허사였다. 속임수가 거듭되자 제후들의 국왕에 대한 불신이 커져만 갔다. 이솝(Aesop)의 우화를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포사의 미소도 잠깐으로 그쳤다. 한편 신후는 왕비였다가 쫓겨 돌아온 딸과 태자였던 외손자를 받아들이면서

국왕에 대한 불만과 반감의 골이 깊어만 갔다.

유왕은 새 구상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대군을 준비하되, 작전계획이 작성되는 대로 신후를 정벌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정의 작전계획 수립이란 게 새어나가기 쉽고 시간도 더디게 마련인 법. 전투에 아마추어인 문관들의 어설픈 발언이 잦고, 관여자가 많기 때문이다. 또 보고나 회의, 통달 과정이 번거롭고 스피치 라이터 선정 등 거쳐야 할 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보가 비밀 루트를 통해 신후의 진영에 속속 전달됐다.

   

신후와 서융군의 선제공격

그러면 유왕군의 침공에 맞설 신후군의 대응책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병력 면에서 신후군은 유왕군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열세였다. 게다가 전쟁이 장기화하면 유왕을 불신하는 제후들도 결국은 국왕인 종가를 편들어주는 추세로 흐르게 될 터였다.

하지만 유왕군의 약점도 허다했다. 그들은 즉각 동원이 어려워 군사행동의 지체가 불가피했다. 근위군이라 해도 폭군의 행패 아래 군기가 문란하고 사기가 추락했으며 방비가 산만했다. 결정적으로 제후들이 유왕을 믿지 않았다.

이에 비해 신후군은 단결이 공고했고, 소수 병력의 이점을 살려 즉각 동원과 신속 투입이 가능했다. 게다가 이웃 이민족 서융(西戎)군을 동맹군으로 끌어들일 계획도 갖고 있었다. 섬서성 서부 인접한 곳에 거주하던 서융군은 유목민답게 상재전장(常在戰場)의 태세를 갖췄으며 즉각 투입이 가능했다.

결국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전략·전술의 대지침으로 ‘선발제인(先發制人)’ 전법이 채택됐다. 먼저 행동하며 선수를 써서 주도권을 장악, 적군으로 하여금 여기저기 대응하기에 바쁘게 만들었다가 간단히 섬멸한다는 것이다. 전투의 시간과 장소를 아군 마음대로 선택, 적에게 불의의 기습을 가하는 이점을 살리겠다는 계산이다.

나아가 승리한 뒤에는 신속히 제후들에게 연락해 사정을 설명하고 이해를 촉구하며, 공동 추대로 원래의 태자 의구를 새 국왕으로 즉위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외래 세력인 서융군은 그들이 노획한 전리품과 함께 철수케 한다. 이러한 정략(政略)은 일견 근사했으나 끌어들인 외국 군대는 간단히 물러가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급기야 군사행동이 벌어지고 보니 유왕군의 붕괴는 예상외로 빨랐다. 물론 유왕은 봉화를 올렸지만, 제후들은 ‘두 번 속지 세 번은 안 속는다’며 어느 누구도 구원하러 달려오지 않았다. 근위군 또한 난폭한 독재자를 위해 개죽음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뿔뿔이 흩어져 살길을 찾아 탈출하느라 바빴다. 서융군은 쉽게 궁전을 점령하고는 유왕과 포사가 낳은 태자 백복을 무참히 죽였다. 많은 재물과 귀중품을 약탈하고 포사까지 전리품이라며 납치했다. 그러고는 방화를 일삼아 궁전 일대를 폐허로 만들었다. 나중에는 승리감에 도취해 궁을 떠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신후가 제후들에게 통첩을 보내 합세해서 서융군을 몰아내자고 제의했다. 그래서 진(晋)·위(衛)·진(秦)·정(鄭) 등 4개 제후국 군대가 힘을 모아 가까스로 서융군을 축출했다. 신후와 여러 제후가 상의하여 원래의 태자인 의구를 새 국왕으로 추대했으니, 그가 곧 평왕이다.

 

종법제와 분봉제

하지만 이질적 문화를 가진 다른 종족의 무력, 즉 서융군의 침공과 궁전 유린은 결코 일시적 사변이나 군주의 교체를 가져온 단순한 전란이 아니었다. 실로 그 충격은 중국인의 문화생활을 규제해온 통일천하 질서에 대한 중대 타격이며, 제도면의 변혁을 촉진하는 일대 전환으로 번져나간 것이다.

공자가 춘추시대의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 옛날 황금시대의 기축(機軸)사상과 생활규범으로 되돌아가자며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가르친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하지만 그 변란의 부정적 영향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중국을 비롯, 한국을 포함한 세칭 유교문화권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원래 주 왕조의 국가 질서를 떠받친 두 개의 큰 기둥은 종법제(宗法制)와 분봉제(分封制)였다. 이 제도적 기틀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뿐 아니라, 멀리 한반도의 가족제도에도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종법제란 부계가장제와 장자상속권을 핵심으로 가족 성원들의 신분을 구분해 그 고하(高下)와 친소(親疏)를 차별하는 가족제도 규범이다. 이 질서체계에서는 대종(大宗·본가 또는 종가)과 소종(小宗·분가)의 구별이 엄격하다. 대종은 시조 아래 장자 장손 또는 그 정통 후대로 이어지는 가부장이 재산권·상속권을 장악한다. 그 특권으로 관혼상제의 주재권을 보유하며, 나아가 일족의 유사시에는 동원·명령권까지 행사한다.

소종은 장자 외의 아들과 첩의 소생 내지 그 후대들의 계통이다. 소종의 내부에서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다시 대종과 소종의 구별이 진행된다.

이러한 가족제도의 질서체계는 왕가로부터 제후 및 대부(大夫) 내지 사인(士人), 더 내려가서 서민으로 뻗어가는데, 그 복잡다단한 계통의 정점에 국왕이나 황제, 즉 최고통치자가 있다. 그래서 종법제의 붕괴는 군주의 권위상실에서 비롯된다. 고대 중국의 경우 종법제는 춘추시대에 약화되다 전국시대에 보편적으로 이완되고 말았다. 그후 내실 없이 형식화된 채 명분상 위선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주변 국가의 민법 한구석이라든지, 선량하고 소박한 서민들의 가족생활에서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분봉제란 국왕의 자제들과 특출한 공신에게 영토를 나눠주고 세습적으로 통치권을 행사케 하면서 제후의 신분을 부여하는 제도다. 교통·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광대한 천하를 다스리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제후들은 특권을 누리는 대신 조정에 공물을 바치고, 천자가 주재하는 제사 등 중대 행사나 회의에 참가한다. 대공사의 징용에도 협력해야 하고, 특히 전시에는 군대를 이끌고 참여해 천자의 지휘를 받을 의무가 있었다. 한국은 분봉제가 아닌 중앙집권 관료제였다.

   

무리한 수도이전으로 주 왕조를 멸망케 한 평왕의 사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타산지석의 교훈을 준다. 사진은 헌법재판소의 수도이전 위헌 결정이 나온 이후인 2004년 10월28일, 서울시의회가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개최한 ‘수도이전 반대운동 보고대회’.

그러한 통치제도 밑에서 태평성세라면 이른바 ‘하늘 아래 왕토 아닌 곳이 없고, 어디를 가나 왕신 아닌 사람이 없다(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고 할 정도로 정세가 안정됐다. 그러나 이러한 국세도 춘추시대에 흩어지더니 전국시대엔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난세가 도래한 것이다.

 

 

평왕의 수도 이전

새로 즉위한 평왕은 옛 궁전의 폐허를 보고는 처량한 감회를 금치 못했다. 가슴을 때리는 통탄과 부조리로 얼룩진 과거사의 기억들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부왕(父王)은 맞아죽고, 포사는 끌려가고, 평왕 자신이 어린 시절 모친인 왕후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던 온갖 보물은 서융군에게 약탈당했다. 웅장했던 궁전은 깨진 기왓장만 남긴 채 자취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평왕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이 서울 호경(鎬京·오늘의 섬서성 장안현)엔 애착을 둘 수 없다… 그러니 수도를 이전해야 하는데, 천도(遷都)의 목적지는 일찍이 정을 두었던 낙읍(洛邑·하남성 낙양시)이다. 한마디로 동천(東遷)이다’라고.

그러나 평왕의 수도 이전은 개인의 감상적 동기에서 출발했다. 당시의 수도권, 즉 관중(關中) 인민들의 동의나 납득이 없었고, 게다가 제후나 중신들과 진지하게 토의하지도 않았다. 결과적으로 천도 이후 중국은 왕조의 쇠퇴와 민생의 절망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동주열국시대는 춘추전국시대라고 불린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심과 안보였다. 당시의 전통적 수도권인 관중의 인민들은 평왕이 수도 이전을 한다고 하자 이른바 ‘기민(棄民)의식’으로 몸을 떨었다. 군주가 자기들을 버리고 떠나려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한 배신감과 분노의 정서는 급기야 ‘비협력’을 만연시켰고, 나중에는 반항과 보복심리로 번졌다. 게다가 수비대로 남은 군인들마저 왕실이 떠나간 땅을 사수하려 들지 않았다. 이래저래 관중은 당시에 퍽 이색적인 제후였던 진(秦)국의 근거지로 변했다. 후일 진군은 낙양을 점령하고 주 왕조를 멸망시켰다.

이 대목에서 또 하나 떠올려볼 만한 일이 있다. 기원전 200년 무렵의 일로, 한(漢) 왕조의 창건자 유방(劉邦)이 관중을 근거지로 활용해 항우(項羽)를 패망시키고 천하통일을 이룩하자 정도(定都)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중론은 결국 관중이냐 낙양이냐 하는 양자택일로 집약됐다. 이때 루경(婁敬) 등 소수의 식자가 관중을 주장했다. 안보에 유리하고 근거지로서 탁월한 조건을 갖췄으며 민심수습도 순조로울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들은 전통적 수도권의 거대한 인구를 상기시키면서 그 민심을 얻기 위해 덕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다수파는 낙양을 지지했다. 그들은 각 지방의 제후들이 수도 왕궁으로 찾아드는 거리상의 평준화 따위를 강조했다. 당시 대신들 중엔 관동(關東) 출신이 많았는데, 이렇게 보면 다수 의견은 애향심이니 지역감정에다 근시안적 이해타산으로부터 출발한 셈이다. 부질없는 명분을 꾸미고는 낙양을 선택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유방은 끝으로 자신이 가장 존중한 참모장 장량(張良)의 견해를 물었다. 그러자 장량은 루경의 주장대로 관중이 좋겠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안보와 민심인데, 왜 하필이면 관중 근거지를 버리고 방어하기 곤란한 사면수적(四面受敵)의 지형을 가진 낙양으로 천도하겠냐는 것이었다. 유방은 이에 동의했다.

현대의 인문지리학에서도 인간의 정치·경제·문화활동과 수도 문제의 관련을 지극히 중시하며 특히 안보태세와 의식형태에 유의한다. 일반적으로 수도는 정치의 중심이고 경제의 핵심이며 문화의 보금자리이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수호되고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마땅하며 협소한 이해타산에 치우칠 바가 아니라고 한다. 숱한 토론을 거쳐 여론이 납득할 만한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도리 때문에 고대 중국의 유방조차 그토록 신중을 기하면서 언로(言路)를 개방한 것이다.

마침내 한 왕조의 수도는 관중의 함양(咸陽)으로 낙착됐는데, 건의한 공로가 크다고 하여 루경은 낭중(郎中)으로 임명됐다. 왕가의 성씨도 하사했다(루경을 유경(劉敬)으로 고쳐 불렀다).

 

유방이 주는 교훈

다시 앞서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평왕의 수도 이전으로 주 왕조의 운명은 재기나 부흥이 아니라 쇠퇴와 몰락을 향해 걸음을 재촉한 꼴이 됐다. 형식적으로는 서주의 멸망이 동주의 개막으로 이어졌지만 후자는 첫 걸음부터 도피적인 방향을 설정, 일을 그르친 것이다. 왕조 창시(創始)의 전통적 근거지를 포기하다시피 하고 진이라는 이색적인 제후국에 내맡겼으니 돌이킬 수 없는 오류라 하겠다.

 

朴東雲 ● 1921년 평북 신의주 출생
● 경성제대 법학부 졸업
● 고려대, 동국대 등에서 정치학 강의. 한국일보 논설위원, 샘터사 편집위원 역임
● 現 북한연구소 이사
● 저서 : ‘통치술’ ‘민족사상론’ ‘정치병법’ 등

하지만 중국인은 실패와 좌절로 얼룩진 처량한 운명이라도 자포자기하지 않고 수용하는 인내심과 포용력을 가졌다. 대세에 순응하면서도 거꾸로 섭취·동화해 강화할 줄 안다. 난세를 살아남아 억세게 자라는 그 슬기로운 생명력의 비결과 경험은 두고두고 우리의 연구대상이 아닐 수 없다. 

 

‘자주노선’의 기수 鄭나라, 후계자 분규로 무너지다 춘추전국의 인간관계와 전략전술

춘추전국시대 제후국인 정(鄭)나라의 수장 장공(莊公)은 왕가의 측근임에도 동주(東周) 왕실에 맞서 자주외교를 펼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뛰어난 정치가적 자질을 보이던 장공 역시 자신과잉증에 사로잡혀 후계문제를 매듭짓지 못한 결과 그의 사후 정나라의 운명은 신임했던 측근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만다. 권력의 비정한 속성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천도(B.C. 770) 후 동주(東周) 왕실의 권위를 거듭 추락시킨 것은 제후들의 ‘자주노선’이다. 그 선구자는 제후국인 정(鄭)나라의 장공(莊公)이었다. 귀족 서열을 따지는 위계로 보면, 세 번째인 백작(伯爵)에 해당했으니 왕실과 퍽 가까운 혈통이었다.

당시 귀족의 작위는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의 등급으로 구분했는데, 후세에 일제가 이를 모방하기도 했다. 얼른 보아 왕가에서 분가한 제후국이 감히 왕가, 즉 종가에 맞서 자주노선을 추구했다니 퍽 고약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나, 비정한 권력의 세계는 원래 그런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군주 혹은 독재자, 개혁자는 신변 안전을 위해 우선 측근부터 경계해야 한다.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는 야당세력에 대한 사찰은 그 다음의 일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왕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는 자신의 측근 파우사니아스에게 시해당했다.

현대에 와서도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기가 직접 중용한 동향이자 동문·동지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저격당해 파란 많은 이승을 하직했다. 부언한다면, 경호 책임자를 고를 때는 절대로 권세를 즐기거나 오만하거나 질투심이 매섭거나 주의력이 산만한 자를 기용하지 말아야 한다.

정나라 장공의 부친은 무공(武公)이고, 모친은 무강(武姜)으로 장공은 그 장남이다. 동생은 공숙단(共叔丹)이라 불렸다. 그런데 장공은 거꾸로 태어난 아이였다. 발이 머리보다 먼저 나왔으니 모친의 산고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반면 아우는 순산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 무강은 장공을 몹시 싫어했으며, 공숙단을 편애했다. 자고로 형제 중 한쪽을 편애하면 어김없이 그들 사이에 불화와 투쟁이 초래되게 마련이다.

 

편애가 빚은 형제싸움의 비극

나아가 무강은 공숙단을 태자로 세우려 무공에게 자주 진언했으나, 무공이 들어주지 않았다. 무공이 사망하자 종법대로 장공이 즉위했다. 그러자 무강이 장공에 대해, 아우 단에게 제(制)라는 요지를 영토로 떼어주라고 강권했다. 장공은 거절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제 지방은 군사적 요충지입니다. 그 점이 화를 불러 이전에 제를 수비하던 혁숙이 적군의 집중공격을 받고 전사했지요. 다른 고을이라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수비 시설이 견고하다는 경성(京城)을 내주시오.”

이 대화에서 젊은 장공의 두뇌활동이 보통 이상이며 이에 맞서 거절의 이유를 역이용하는 무강도 비상한 여성임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장공은 모친의 요구를 계속 거절할 수 없어서 아우 단을 경성의 영주로 삼았다. 그러자 대부(大夫)인 제중(祭仲)이 장공에게 간하였다.

“수도가 아닌 고을임에도 성벽의 길이가 300장(丈)을 넘으면 국가에 해롭습니다. 종래의 제도를 볼 적에 성벽이 아무리 길다 해도 수도의 3분의 1을 초과해서는 안 됩니다. 보통 고을이라면 5분의 1, 작은 고을이면 9분의 1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경성의 성벽은 유별나게 길어서 고래의 제도에 위반합니다. 그대로 방치하다간 후회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친의 각별한 소망이시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모후님의 바람엔 한계가 없습니다. 이쯤에서 막아야합니다. 모두 들어주시면 안 됩니다. 자칫하면 나중엔 손을 쓸 수 없게 됩니다. 잡초는 발호하고 나면 제거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주공의 귀한 동생에게 과오의 기회를 제공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다지 걱정할 것 없겠지. 좋지 못한 행위를 꾸미는 놈은 반드시 자멸하게 마련일세. 좀더 두고 봅시다.”

그러는 동안 공숙단은 정나라 서부와 북부의 인민들로 하여금 장공에게 등을 돌리고 자기에게 귀순하게 만들었다. 대부이며 공자인 려(呂)가 장공을 꾸짖듯이 간하였다.

“두 사람의 주공을 섬겨야 한다면 인민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대체 어쩔 셈입니까. 만약 아우님에게 양보하실 생각이라면 저도 그쪽으로 귀순하겠습니다. 양보가 아니라면 아무쪼록 화근을 뿌리뽑아야 할 것입니다. 인민이 두 마음을 품지 않도록 조치하셔야 합니다.”

“최후 수단에 호소할 필요는 없겠지. 좀더 두고 보면 그쪽에서 스스로 화난을 뒤집어쓸거야.”

드디어 단은 형과의 공유지마저 완전히 자신의 영지로 전변시키는 등 영토확장에 동분서주했다. 자봉(子封·공자 려의 자(字))이 거듭 말하였다.

“이제 손써야 할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그의 영지가 넓어지면 세력도 커집니다.”

   

그러나 장공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민심은 부정을 일삼는 자로부터 이탈하게 마련이다. 그는 영토를 확대했으나 자멸하고 말 것이다.”

급기야 단은 성곽을 수리하고 물자를 적립하며 무기를 손질하여 보병에서 병차까지 모든 전투준비를 마쳤다. 언제라도 나라의 수도를 습격할 태세를 갖춘 것이다. 그리고는 무강이 성내에서 내응(內應)할 수순까지 짜놓았다.

한편 장공은 아우 단과 모친 무강이 주고받은 모략의 밀서를 증거로 압수하자 즉각 대응 행동을 취했다. 공자 려로 하여금 병차 200승을 포함한 2000 병력을 인솔하고 선제공격으로 경성을 급습케 했다. 때를 같이해서 경성 주민들이 단을 배반하고 일제히 귀순, 협력해왔다. 마침내 단은 외국으로 망명했다가 모친을 원망하면서 자살하고 말았다.

장공은 모친 무강을 지방의 고을로 이사가게 하면서, “이승에서는 다시 만날 생각이 없소. 저승 가면 황천(黃泉)길에서나 만날까요”라고 단언했다. 민심은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노(魯)나라 은공(隱公) 원년의 일이라고 춘추(春秋)에 썼으니 서기로 치면 기원전 722년의 사건이다.

 

때를 기다리는 참을성

군사 문제가 얽혀 있고, 모친마저 편파적으로 개입한 그 착잡한 형제 분규를 해결한 장공의 솜씨에서 무엇보다 높이 평가할 것은 그의 슬기로운 정치 자세다. 한마디로 때를 기다리는 참을성이다. 그는 무려 22년을 기다렸다. 또 시기적인 성숙을 확인하는 조건 형성의 지표로서, 민심의 향배와 여론의 지지를 중시했다는 사실을 평가할 수 있다.

나아가 행동개시 시기가 무르익었음을 보자 번개처럼 달려들어 적을 일거에 협공·섬멸했다. 대기할 때는 신중했으나 기회 포착엔 신속·과감했다.

아울러 그때그때 사태 발전에 따라 신하와 참모들의 진언을 들으면서 유사시에 중용할 인재를 미리 내정해 두었으니이 또한 장공의 우수한 정치가적 자질을 말해준다.

종래의 ‘춘추필법’에 의하면, 형을 섬기지 않고 탈권을 노린 아우 단의 잘못이 크다. 하지만 형인 장공도 동생을 훈계·인도하여 정도를 걷게 하는 대신 토벌하여 파멸시켰으니 역시 규탄당해야 마땅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도덕적인 설교라 하겠다. 권력의 생리와 정치의 심리를 외면한 비현실적 설교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성인이라면 애당초 권력의 세계에 뛰어들거나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정치에도 이상이 있고, 정치가는 목적과 목표를 설정한다. 그러나 이에 접근하기 위해 힘을 겨냥하는 현실정치 자체는 어차피 현실적 이익을 앞세우게 마련이다.

중국사에 대서특필되는 명군인 당(唐) 태종 이세민은 형제를 향해 활을 쏘았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현군 솔로몬 대왕도 이복형을 막다른 처지로 몰아갔다. 이상은 우러러보고, 현실은 바로 보아야 한다. 정나라 장공은 형제분규가 낙착되자 모친과 화해하고 다시 모시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장공이 운용한 병법은 이른바 ‘잡기 위한 놓아두기’의 계략이다. 한문으로는 ‘욕금고종(欲擒故縱)’으로 쓴다.

오늘날 경찰의 상투적인 수사기법 중에 범인을 알고도 모른 체하고 당분간 놓아두면서 미행과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 범인의 접촉대상과 행적을 살펴 그 조직을 일망타진하든지 여죄를 추궁하려는 것이다.

군사에서는 적의 기도를 알고도 모른 체하여 적의 경각심을 해이 또는 마비시켰다가 불의에 기습하는 작전이 있다. 정치에서는 적의 실태(失態)와 태만을 은근히 부채질하여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한 뒤 결정적으로 민심이 적으로부터 이반하게 만든다.

낚시에서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우선 미끼를 던져주고 유혹했다가 달려든 것을 낚아 올린다. 대어가 힘을 내어 도망가려 하면, 우선 릴의 낚싯줄을 풀어주었다가 나중에 힘이 빠질 때 끌어올린다. 장사를 보아도 성공하는 사람은 우선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에 주력했다가 나중에 판매실적을 올린다.

 

‘잡기 위한 놓아두기’

‘잡기 위한 놓아두기’ 또는 풀어주기라는 전략전술 아이디어는 인간을 치밀하게 관찰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착상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독서인들은 그 고안의 출처가 중국 고전인 ‘역경(易經)’ 혹은 ‘노자(老子)’라고 설명한다.

   

‘역경(주역)’을 보면 수괘(需卦·‘需’는 기다림을 의미한다) 제5에 상응한 계시가 있다. 사태진행의 앞날이 험난할 것으로 느껴질 때는 가장 좋은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며 마음 편히 대기하라는 것이다. 즉 행동할 시기가 성숙하지 않았다면 서둘러 다투지 말고 때를 기다리는 게 좋다고 한다. 잘 먹고 잘 자되, 조용히 원칙을 지키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가르친다. ‘주역’은 책의 성립연대로 보아 장공도 읽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노자’ 36장은 유사한 철학을 말하면서도 한층 더 구체적이다. ‘상대방의 행동반경을 줄이려면, 우선 당분간은 그의 마음대로 뻗어나가게 하라’고 했다. 사실 뻗을 대로 뻗으면 무리하게 되고 지장이 생기게 마련이다. 국가간 전쟁에서도 ‘공세(攻勢)의 한계’를 예견해두는 법이다. 들떠서 한계를 넘어서면 보급이 닿지 않고 역량 투입도 어려워 패전을 초래한다. 히틀러처럼 자신과잉증에 걸리거나 성격이 경망하여 ‘힘의 한계’를 모르고 ‘밀어붙이기’나 일삼다가는 결론이 좋지 않다.

이어 ‘노자’는 말한다. ‘상대방을 약하게 만들려면 당분간 강하게 해주어야 한다. 쇠퇴시키려면 당분간 융성하게 만들어준다. 빼앗고자 하면 당분간 내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將欲弱之, 必固强之, 將欲廢之, 必固興之, 將欲奪之, 必固與之).’ 요컨대 ‘노자’는 전쟁에 이기고,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를 통일하려면, 우선 상대방을 세워주고 나서 넘어뜨리는 것이 비결이라고 가르친다.

이 책의 저작 시기로 미뤄 장공은 ‘노자’를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장공은 개인심리는 물론 사회심리에 밝아 인간성의 미묘한 기미를 헤아리고 있었다. 반면 공숙단은 혈기만 왕성해서 몇 차례의 성공에 들떠 있었다. 한계를 헤아리지 못하고 밀어붙이기를 일삼았으니 승패의 가름은 보나마나했던 것이다.

 

다수와 싸우는 소수의 전술

장공은 퍽 오래도록 아우의 반란 가능성에 신경을 썼고 이에 대비하느라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구체적으로는 천도 후의 동주 왕실을 찾아가 조하(朝賀)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경사(卿士)로서 국왕의 측근에서 나라 일을 거드는 직책에 충실할 수 없었다.

한편 동주의 평왕은 천도 후에 야릇한 고독감과 초조감을 떨치지 못하는 가운데, 장공을 못마땅히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장공의 말 못하는 속사정을 알 리 없었다. 그에게 절망한 평왕은 새 대안 찾기에 골몰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장공은 급거 낙읍의 궁전을 찾아가 문안을 드리면서 평왕의 의도를 알아 내려고 애썼다. 그러자 평왕은 장공을 위무해주면서, 정녕 자기를 믿을 수 없고 안심하지 못한다면 서로 인질을 교환하자고 제의했다. 자기는 태자 고(孤)를 인질로 보내겠다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신중치 못한 경솔한 처사였다. 국왕과 신하 사이에 대등한 인질 외교를 벌이겠다니 말이 아니었다. 이는 예법에 어긋난다. 그뿐더러 국왕 스스로 권위를 떨어뜨리는 그 경망한 처사로 부정적 영향이 미칠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하기야 평왕은 그렇게 결정하고 나서는 후회막급으로 배꼽이 뒤집힐 뻔했다. 얼마 후 평왕은 심장마비 같은 증세로 급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인질로 갔다가 부왕의 급서로 돌아온 태자 고가 즉위했다. 바로 주(周)왕조의 환왕(桓王)이다. 환왕은 부왕의 급서와 임종에 입회하지 못한 모든 책임이 정의 장공에 있다고 여겨 그를 증오했다. 그래서 조정 내 장공의 역할을 박탈하고 냉대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장공이 분노할 차례였다. 그 열화 같은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대부인 제족(祭足)이었다. 제족은 장공에게 “우리측도 만만치 않다는 실물 교훈을 보여주고, 일찌감치 견제할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진언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제족 자신이 사병을 거느리고 주왕의 직할 영토에 들어가 논밭에서 수확물을 거둬간다는 것, 그리고는 주왕이 격분하되 대응하지는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만약 사태가 의외의 방향으로 비화하면 자기에게 책임을 전가하라고 했다. 장공이 묵인했다.

드디어 주 환왕은 격분을 가누지 못해 장공을 토벌키로 결심했으며, 제후들의 군대를 동원하되 국왕 자신이 친정(親征)했다.

운동에 관한 뉴턴의 제3법칙에 의하면, 무릇 ‘작용이 있으면 같은 강도의 반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그 상호작용이 거듭 치솟으면, 이른바 ‘에스컬레이션’으로 대결의 치열성도 솟구친다. 내가 이렇게 하면 상대는 어떻게 나올까, 그리고 변수는 무엇인가를 정보기관에만 내맡기지 않고, 스스로 큰 테두리에서 판단하고 미리 내다보는 것이 정치가와 사령관의 통찰력(insight)이다.

장공은 통찰력 면에서 탁월했으며, 동시에 민의수렴을 위한 지혜 집중에도 우수했다. 식견과 지능이 뛰어난 인재들만 골라 작전회의를 제때에 개최했다. 부족한 사람들이 떠들면 인재들이 침묵하기 때문이다.

   

정나라는 춘추전국시대에 독립·자주노선을 최초로 표방한 국가였다. 오늘날 한국에선 한미동맹 강화를 주장하는 ‘동맹파’와 자주노선을 중시하는 ‘자주파’간의 갈등설이 끊이지 않는다. 사진은 2004년 11월 칠레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

정세를 분석해보면 적군은 왕사를 비롯 채(蔡), 위(衛), 진(陳) 등 세 나라 제후군이 합세했다. 병력은 많으나 약점도 컸다. 명장이 없는 오합지졸(烏合之卒)을 방불케 했다. 하기야 오합지졸이라도 쉬운 싸움에 공명을 세울 기회가 많아 보이면 제법 달려들 것이다. 또 그들은 환왕의 앞보다는 주로 좌우에 포진해 있게 마련이다.

대응 작전은 환왕이 타고 앉은 병차를 집중 공격해 결판을 낸다는 것. 우선 덩치만 크고 허약한 진나라 군대를 쳐서 혼란의 파급 효과를 극대화한다. 왕사를 고립시키고 나서 이를 집중공격한다는 것이다. 작전치고는 일등 작품이다. 알렉산더 대왕도 소수 병력으로 적의 대군을 칠 때 이와 유사한 작전을 구사했다.

주 환왕의 병차를 목표로 집중공격을 퍼부을 때의 일이다. 정군의 축담 장군이 쏜 화살이 환왕의 왼쪽 어깨에 꽂혔다. 삽시간에 혼란이 극대화됐다. 근위군은 왕을 에워싸고 우왕좌왕하며 후퇴하기에 바빴다. 제후군들은 그 기미를 알아채자 뿔뿔이 흩어져 싸움터를 빠져나갔다. 왕군의 결정적인 대참패였다. 사기충천한 정군 장병들이 급거 추격에 나서려 했다.

 

‘자주노선’의 명암 쌍곡선

그러자 장공은 재빨리 ‘상황 끝’을 선포했다. 필승의 추격을 급정거시킨 것이다. 곧이어 푸짐한 예물을 실려 사죄사를 환왕한테 보냈다. 사죄의 글월도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자기가 죽을 죄를 지었다는 것, 가문을 지키고자 자위하다 보니 뜻밖에 옥체에 상처를 입게 해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라는 것, 조정의 노여움을 초래한 거동을 일삼은 대부 제족에겐 반드시 형벌을 가하겠다는 것… 미흡한 물자를 보내드리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면 사죄하는 입장에서 천만분의 1이라도… 등등.

환왕은 글월을 읽자 가까스로 체면을 세운 양 정식으로 철수 명령을 내렸다. 정나라를 토벌할 생각을 영원히 접은 것이다. 제후들도 멋쩍게나마 그 정도로 납득하고 돌아갔다. 이 정도면 약소국의 ‘자주외교’로서 합격이다.

그 후 장공은 환왕을 활로 쏜 축담이나 음모를 꾸민 제족 등에게 공개적으로는 표창하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는 푸짐하게 논공행상을 했다. 특히 제족을 일등공신으로 대우했는데, 나중에는 제족의 권세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게끔 되고 말았다.

이 사건이 천하대세에 끼친 영향은 상상 이상으로 지대했다. 우선 왕실의 권위가 완전히 실추됐다. 따라서 제후 열국에 행동 자유가 주어지는 계기가 됐다. 즉 독립·자주 노선이 보급됐다. 그 선구자가 바로 장공인 셈이다.

물론 독립국가 사이에 방치된 자유는 ‘침략의 자유’와 더불어 ‘멸망의 자유’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독립·자주와 자유 분위기 속에서만, 신경지의 개척과 활발한 발명·발견, 그리고 창조와 발전이 가능하다. 이런 진취적인 면에 대한 고려 없이 고식적인 평화와 정체만을 일삼다가는 비참한 멸망에 이르고 말 것이다. 그것이 민족 기초사회의 흥망과 인류 문명사회의 진퇴에 관한 법칙성이다.

 

강유상제(剛柔相濟)의 계략

그런데 정 장공이 주 환왕을 격퇴한 슬기로운 전후수습의 방식은 병법상 ‘꿋꿋함과 부드러움을 아울러 쓰는 꾸밈새’, 즉 ‘연경겸시(軟硬兼施)’의 계략 또는 ‘강유상제(剛柔相濟)’의 계략이라고 하는데, ‘굳음과 무름을 때에 맞춰 번갈아 쓰는 꾸밈새’란 뜻이다.

이 계략의 묘미는 상대방을 치되 그 체면을 세워주는 데 있다. 그래야만 승리를 공고히 할 수 있으며, 상대방을 오래도록 순종시킬 수 있다. 중국인의 사고방식에 깊은 인상을 남긴 전통적 계략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승리 후 당시장제스(蔣介石)가 영도하던 중국정부는 패전한 일본에 대해 배상을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 그뿐더러, 천황제를 유지하려는 일본의 희망에 힘을 보태주기까지 했다. 이러한 정책결정에 대해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毛澤東)도 동의했으며, 중국 정치인치고 어느 누구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바 없다. 중국인의 유연한 양면적 사고방식과 포용·동화의 문화전통을 말해주는 실례다.

그런데 인간심리의 본령과 그 동태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건 대동소이하다. 우선 잘났건 못났건 자기제일주의이다. 이러한 심리는 생리적 욕구와 마찬가지로 부단히 운동하거나,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 조건이 변화하면 반응하고, 도전에는 대응한다.

연경겸시(軟硬兼施)의 계략 운용에서 특히 유심할 것이 있다. 꿋꿋함과 부드러움, 굳음과 무름, 엄격함과 관대함은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집착할 것이 아니라 번갈아가며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경험적 교훈은 이미 언급했다. 엄하기만 하면, 원망이 늘고 자발적 협조가 없어진다.

   

한편 관용에 치우치면 으레 태만하거나 문란해진다. 그래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도 집권 후 정치질서가 어지러워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단속을 강화하다가 결론이 어설프게 되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정치심리의 기미는 원칙적으로 알 수 있다지만, 운동의 방향 설정에서 순서와 조정의 문제가 남는다. 특히 새로운 집권이나 부임에 즈음해선 당장 결정할 양자택일의 문제가 제기된다.

①선엄후관론(先嚴後寬論) : 마키아벨리는 강조하기를, ‘우선 자기 입장을 수호하기 위해 잔인하게 행동하되, 그 후에는 꼬리를 끌지 않고, 되도록 준민(浚民)들을 보살피는 것’이 현명하다고 했다(‘군주론’ 8장).

②선관후엄론(先寬後嚴論) : ‘손자병법’은 가르치기를, ‘사병들이 아직 친근하게 따르지 않는데도 징벌을 일삼으면 그들이 심복하지 않으므로 쓰기 어렵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손자’ 행군편).

손자가 말한 ‘심복’의 조건은, 현대라면 이념과 기대 그리고 임무부여라고 해석함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어떤 직에 새로 취임하면, 원칙적으로 행동하며 말을 적게 하여 개인적 자질을 불가측의 것으로 남겨두는 것이 위신을 증대하는 길이다.

중용(中庸)의 선택이 있다지만 운동에는 변화과정의 비축을 의미하는 휴식은 있으나 정체(停滯)는 없다. 정체는 일찍이 아이젠하워가 갈파한 대로 후퇴나 파멸을 초래한다.

 

후계자 분규와 정(鄭)의 몰락

정(鄭)나라는 장공 때 제법 ‘자주적’인 ‘중원의 패자’로 급부상해 위세를 떨쳤으나, 그가 기원전 701년에 병사하자 급전직하 형편없는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가장 큰 원인은 후계자 분규였는데, 그 내분에 간휼한 권신 제족이 개입하여 문제를 더욱 복잡다단하게 만들었다.

후세의 일이지만, 중국의 독재자 마오쩌둥은 후계자 문제를 가리켜 “우리 당과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가장 중대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또 “제국주의 예언자들은 소련에서 일어난 변화를 논거로 삼아 이른바 ‘평화적 이행’에 관한 희망을 중국당의 제3대 혹은 제4대 사람들에게 걸고 있다”고 경고했다(‘인민일보’ 1964년 7월14일자).

하지만 그가 1976년 9월9일 사망하자, 한 달도 못 된 10월6일에 벌써 ‘4인방 소탕’ 등 새로운 권력투쟁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1978년 12월에 열린 11기 3중 전회 이후로는 ‘개혁과 개방’ 노선이 대다수 중국인의 환호 속에 마침내 공식화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덩샤오핑(鄧小平)과 그 추종자들이 추진해온 시장경제와 폭넓은 개방정책은 이미 불퇴전의 것으로 정착되었음을 헤아리게 한다.

본디 독재정권이 후계자 문제를 유루(遺漏) 없이 해결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이 반드시 충족돼야 한다고 알려져 있다.

①독재자가 생전에 후계자를 확정짓고, 의문의 여지가 없도록 공지해야 한다.

②그리고 생전에 인사권을 넘겨줘야 한다.

③후계자가 군대와 정치경찰 및 핵심 조직을 장악토록 도와줘야 한다.

그런데 정나라의 장공과 마오쩌둥은 자신과잉증에 걸려 자기가 급사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고, 나중에는 이럭저럭 주저하다 이승을 떠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특히 장공의 경우 관례상 장남이 태자였으나 차남이 더 똑똑했다는 데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종법상의 고려와 현실정치 간의 모순을 풀기 어려웠다. 게다가 자신이 젊을 때 장남으로서 겪은 형제싸움의 심층심리가 미묘하게 작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어차피 모순이 심각하게 얽히면 한국의 속담대로 ‘갈 데까지 가야 한다’는 도리를 되씹게 된다

 

‘안정’에 뿌리박고도 신경지 개척한 子産의 정치·외교력 춘추전국의 인간관계와 전략전술

국제적 요충지에 자리한 약소국의 정치와 외교는 어떠해야 하는가. 쉽지 않은 과제다. 하지만 정나라의 정치가 자산은 명쾌한 처신으로 내치와 외치를 조화시켰다. 공자도 탄복한 자산의 언론관과 통치술, 외교 역량. 일러스트 이우정

약소국으로 전락한 정(鄭)나라를 한계상황에서 구출하고, 결국 국가 위신을 빛낸 역사적 인물이 있다. 다름아닌 자산(子産)으로, 그는 춘추시대 제일의 외교가로 손꼽히거니와 공자(孔子)도 탄복해 마지않은 위대한 정치가다.

우선 슬기롭고 활짝 트인 자산의 언론관부터 살펴보자. 자산이 정나라의 국무총리급 고위직인 ‘집정(執政)’에 재임할 때의 일이다. 정나라 사람들이 자주 향교에 모여 정치의 잘잘못을 비판했다. 그러자 연명이라는 관리가 나서서 향교의 폐지를 건의했다. 이 말을 들은 자산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치도 않은 말일세. 그들은 하루 일을 마치고는 거기 모여앉아 그때그때의 정치적 득실을 논의하는 것일 뿐이야. 우리는 거기서 좋다는 것을 시행하고, 나쁘다는 것을 고쳐나가는 것이 옳지. 그렇게 활용하면 언론이 스승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게 돼. 규제란 어불성설이야. 선철(先哲)은 여론을 경청해서 좋다는 것을 실천하라고 가르쳤으나, 결코 반대의 처사로 원한을 사라고는 가르친 바 없네.

설사 못마땅한 언론이 있다 해도 당장 중지시킬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흐르는 강물을 막는 꼴이야. 고이고 고였다가 큰물이 되어 둑을 무너뜨리는 날에는 피해가 더욱 막심하여 우리도 손쓰지 못할 걸세. 언론탄압으로 사태를 악화시키기보다는, 미리 적당히 물꼬를 터주고 흐르게 해야 한다. 언론의 비판을 귀담아들어 약으로 삼는 것이 합당할 걸세.”

연명이 경청한 뒤 말하였다.

“저는 오늘 비로소 성심으로 모실 분을 만났구나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잘못 생각했습니다. 말씀대로 실천하면 반드시 온 나라가 보람을 입게 될 것입니다. 어찌 소수 관료만 덕 보는 데 그치겠습니까.”

후일 이러한 자산의 정책을 전해들은 공자는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이렇게 평가했다. “그와 같은 언론관으로 미루어 자산에 대해 많은 것을 헤아리고 내다볼 수 있다. 앞으로 어느 누가 자산을 혹평하더라도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春秋左氏傳, 襄公三十一年. 中華書局, 春秋左傳注 1101∼02쪽)

 

언론자유 창달한 정치가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이미 언론자유 옹호의 참뜻을 천명했으니 자산과 공자가 다시 한번 우러러보인다. 또 그러한 가르침을 충심으로 받아들여 실천할 줄 알던 당시의 양심적 선비(우수한 공무원) 역시 높이 칭찬받을 만하다.

그런데 춘추전국시대에 ‘정치 규범’으로 널리 읽힌 ‘서경(書經)’은 이미 ‘하늘은 백성의 눈으로 보고, 백성의 귀로 듣는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고 썼다. 환언하면 ‘하늘의 뜻은 여론에 반영된다’는 것이다.

서구의 고대에도 같은 취지의 정치적 양식이 확고했다. 라틴의 격언은 ‘민중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Vox populi, vox Dei)’라고 했는데, 영어로는 ‘The voice of the people in the voice of God’이다. 이 격언은 각국어로 번역되어 서구사회에 널리 보급됐다. 오늘날 동구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국민여론 존중이 인류의 통념으로 정착되는 가운데, 여론 형성의 모체가 되는 신문방송 매체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 역시 세계적 양식으로 당연시된다. 그런데도 일부 정치세력이 비록 본의는 아니라 해도 언론을 백안시하는 듯한 모습을 비친다면 이는 세계의 여론과 후세의 역사 앞에 중대한 과오가 된다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떤 집권세력은 일부 언론매체, 특히 몇몇 상업지가 마치 국민의 염원과 동떨어진 이기적이고 자의적인 보도와 논평으로 자기들의 개혁성향을 비판하니 방치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상업지는 정부 지원이 아니라 시장원리에 따라 존재한다. 독자, 즉 구매자 없이는 생존하지 못하며 광고수입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니 언제나 자의적일 수 없으며 항상 국민의 성향에 민감하다.

그뿐인가. 언론마다 사시(社是)가 있고 이에 어긋나면 국민이 외면하니 탈선적 이기주의도 대체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국민의 목소리’를 알기 위해 관용차보다 택시 타기가 권장되는 것도 비슷한 이치다.

어떤 집권자는 이른바 ‘좋은 신문’과 ‘나쁜 신문’의 편 가르기를 즐겼는데, 이는 특권의식으로 국민의 선택 자유를 대체해보려는 부질없는 시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스티드(H.W.Steed)는 일찍이 ‘좋은 신문이 자유를 누리려면 나쁜 신문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신문학의 격언을 제시했던 것이다.

 

권력자와 언론의 불협화음

어떤 집권자는 언론의 차원 높은 정치적 시비 가름엔 질색을 하면서도, 중·하급 공무원층에 대한 부패 폭로와 비리 적발 등에는 제법 흥취를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이른바 ‘행정적 민주주의’를 제시하면서 고위층에 대한 비판은 용허하지 않지만, 일반 공무원에 대한 비판은 관용하겠다는 뜻을 비친 바 있었다.

   

그러나 ‘떡고물’을 챙기는 사람은 위에다 바치는 한편 자기 몫도 챙기는 법이다. 안 바치면 집권자가 먼저 알고 처단하니까. 언론보도는 그 다음인 것이다. 즉 권력형 비리는 상하간에 불가분의 상호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자기만을 보도권 밖에 두려고 권력을 휘두른 사람은 으레 밝혀지길 몹시 두려워하는, 그 자신의 비리를 은폐하고 있었다.

때로는 일부 사회지도자들이 ‘데모를 해야 두각을 나타내고 출세할 수 있다’는 천박하고 편면적인 현실파악하에 경솔한 행동을 일삼기도 했다. 이에 대해 집권측 실무자들은 그러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의 정치적·행정적 책임은 덮어둔 채, 원인요법 대신 혼란의 책임을 언론보도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나아가서 어떤 강력한 집권자는 임기 말에 그의 실정(失政)이 속속 판명되고 보도되자 언론을 지목하면서 자기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든다’고 나무랐다. 그 말은 반성능력의 결핍을 통감케 하지만, 다른 한편 그러한 피상적 관찰에도 전연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무릇 언론사도 일제의 지배나 독재의 철권통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환경적응 방식을 시의(時宜)에 맞게 조정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전부냐 무(無)냐’ 식의 태도는 슬기로운 생존전략이 아니다. 최후의 결전이 아니라면 간단히 떠들 바 아니다.

물론 생존전략은 결코 노예적인 처지에서의 안주를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제 구실을 다하기 위해 참아가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즉 국민의 알 권리에 봉사하기 위해, 어렵지만 당장은 참아가며 필요할 때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린다. 이를 위해 우회할 수도 있고, 비원칙적 사안에 대한 일시적 타협도 고려한다.

그렇다면 언론이 본연의 존재의의를 밝히고자 기다리는 중대 시점은 언제인가.

하나는 독재자의 임기말 등 권력에 누수현상이 생길 때다. 또 하나는 일제 패망 등 역사적 전환기다. 끝으로 국운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이르렀을 때나 국민주권 원리가 완전히 무시당할 때 등 초비상 시국이다. 그 지경에 이르면 언론은 상응한 각오를 가다듬고 국민 앞에 밝힐 것을 밝힌다. 춘추시대의 자산은 그러한 언론의 힘을 언론의 긍정적 계몽가치와 더불어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고대의 선각자이니 더욱 위대한 정치가적 자질이라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정나라의 자산에 비견될 현대 미국의 정치가로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이 있다. 미국 독립선언의 기초자이자 제3대 대통령인 그도 한때는 ‘언론의 피해자’라고 탄식한 바 있다. 일부 신문의 부정확한 보도와 비우호적 논평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지성인답게, 나중에는 ‘자유로운 신문을 여러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사회에서는 만사가 안전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신문은 인간 정신을 계발하여 합리적·도덕적·사회적 인간을 형성하는 최량의 도구다’라고 갈파했다. 일부 ‘옹졸한 야심가’나 ‘기회주의 정치인’과는 그릇이 다른 것이다.

 

자산의 정치적 업적

정치가의 역사적 업적에 대한 평가는 결코 오늘의 척도로 측량될 것이 아니다. 그가 활약했던 국가사회의 역사적 환경과 시대적 요청 및 제약성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원래 춘추시대에는 고작해야 관습법이 있었을 뿐 성문법은 없었다. 일반적으로 관료들의 자의에 의해 정치·행정이 운용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 만큼 자산의 성문법 창시는 당시로서는 실로 놀랄 만한 생산적 개혁이었다. 그래서 국내 기득권층의 반대가 심했고, 심지어는 다른 제후국의 집권자들로부터 내정간섭에 가까운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자산은 백성을 보살피고 여론을 경청하면서 주저하지 않고 개혁을 단행했다. 현대적 용어로 말하면 ‘인권옹호’와 ‘법치발전’으로서, 이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이다.

또한 자산의 온갖 개혁은 모두 민생에 직결된 것이고, 여론의 요구를 광범하게 수렴한 것이었다. 민생과 아무 관련 없는 소위 ‘겉치장 개혁’에는 애당초 손을 대지도 않았다.

자산은 특히 인재의 발굴, 육성과 등용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강점 본위의 인사를 했다. 결점의 거론은 거의 논외로 했다. 또 인재를 등용할 때는 여론을 참작하며 단독으로 결정하든지, 우수한 측근하고만 상의했다. 부족한 사람들과 상의하면 질투심과 ‘자리 지키기’ 심리가 작용해 자칫 우수한 인재를 놓칠 수도 있어서다.

자산의 그러한 내치 정돈으로 사회가 안정되고 민생이 뚜렷이 향상됐다. 약소국 나름으로 국력이 증강했으며, 외세 침략 또한 특기할 것이 없었다. 한마디로 국민이 태평성세를 누릴 수 있었다. 그가 기원전 522년에 병으로 서거하자 정나라의 모든 국민이 통곡했다고 한다.

   

정술(政術)은 강유(剛柔)의 배합

고대 중국 정나라의 정치가 자산은 유연한 언론관을 갖고 있었다.
사진은 2001년 8월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 실시 1주년을 맞아 ‘자유언론 탄압 규탄대회’를 갖고 있는 자유시민연대 회원들.

앞서 이 글의 제2회(‘신동아’ 2005년 2월호 450쪽)에서 정나라의 장공(莊公)이 구사한 ‘잡기 위해 놓아두기’ 계략을 풀이한 바 있다. 그 유연한 사고활동이 자산에게도 자연스럽게 계승됐다. 자산의 슬기로운 정치자세에서 우러나온 정술(政術)의 기본은 강유(剛柔, 꿋꿋함과 부드러움) 또는 관엄(寬嚴, 관대함과 엄격함)을 번갈아 사용하는 데 있다.

이는 통치술에서 반드시 파악돼야 할 정치심리의 으뜸이니 독자께선 꼭 기억해두시기 바란다. 공자도 다음에 언급할 바와 같이 매우 중시한 바 있다. 일부 정치인들의 위선적 언사에 현혹되어 정치심리를 몰각하다가는 서로간에 이로울 것이 없다. 우선 고전에서 ‘타인의 경험’을 배워야 한다.

자산은 중병으로 병석에 드러눕게 되자 후계자로 내정된 자대숙(子大叔)을 불러 말했다.

“내 뒤를 이어 국정을 맡을 사람은 당신이다. 일반적으로 정술(政術)은 엄격함과 관대함을 병용하지만, 문제는 집권 직후의 선택에 있다. 유덕한 성인(聖人)이라면 취임 초부터 관대한 정치로 백성의 마음을 얻을 수도 있겠으나, 우리처럼 범상한 위정자라면 차라리 엄격한 편이 슬기롭다. 예를 들어 불은 뜨거워서 백성들이 멀리서 바라보며 두려워하므로 타 죽는 사람이 적다. 그러나 물은 유약해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깔보고 장난치다 익사하는 경우가 많다. 관대한 정치란 물과 같다. 얼른 보면 손쉬운 방법 같지만 기실 몹시 어려운 통치방법이니 주의해야 한다.”

수 개월 후 자산이 서거하자 자대숙은 정권을 인수했다. 그는 성격이 부드러운 사람이라 차마 엄격한 자세로 다스릴 수 없어 매사에 관용 위주로 정치를 펼쳐나갔다. 그랬더니 범법자와 도둑이 늘고, 특히 조직범죄가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제서야 자대숙은 후회했다.

“내가 처음부터 자산의 말씀을 따랐더라면, 사태가 이토록 악화되지는 않았을 터인데….”

자대숙은 부득이 무력을 사용해서 범법조직들의 소굴을 토벌했다. 군경이 그들을 전원 소탕함으로써 사회질서가 어지간히 회복되었지만 희생은 몹시 컸다. 공자가 그러한 사건, 특히 자산의 경고를 전해듣고서 말하였다.

“옳거니, 정치란 자산의 말과 같다. 만약 정치가 관용에 치우치면 인민은 방종해진다. 엄격하게 다스려 고쳐나가며 바로잡아야 한다. 한편 엄격한 정치 때문에 인민이 해를 입게 되면 이번엔 관용으로 완화한다. 관대로 엄격을 조율하고 엄격으로 관대를 조율하면 비로소 화합정치가 이루어진다.”(春秋左氏傳, 昭公 20년)

공자는 ‘논어’에서도 정치가로서 자산을 최대한으로 찬양했다. 처신이 신중했고, 인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역이 공평했다는 것이다(論語, 公冶長).

 

요충지 약소국의 두 가지 급선무

자산의 외교적 업적은 전환기에 강대국들의 틈에 놓인 약소국의 생존과 독립, 국가적 존엄성을 슬기롭게 지켜낸 것으로 집약된다. 오늘날에도 시사적으로 참고가 될 만한 많은 경험적 교훈을 남겼다.

본시 서주(西周) 왕조의 종법제(宗法制)하에서는 외교가 없었고, 종주국에 대한 종속국(제후국)의 예의와 충성, 그 대가인 보호 등 상하관계만이 있을 뿐이었다. 바꿔 말하면 종적(縱的)인 예의(禮儀)질서의 세계였다.

그러던 것이 수도이전 이후 동주(東周) 왕조의 권위와 통제력이 실추되고, 제후국들의 자주·독립 노선이 활발해짐에 따라 비로소 실질적인 외교활동이 싹텄다. 자산이 바로 이 시기의 대표적 외교활동가다.

원래 외교란 평등한 주권국가들이 공존하는 국제사회의 성립을 전제로 한 대외관계 조정이다. 목적은 국가이익의 주장과 관철이고, 방법은 설득, 타협, 협박이다.

그 배경에는 종합적인 국력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것은 군사력, 경제력, 정치력, 민족성, 국민의 사기와 단결, 인구, 자원, 지리적 위치, 전통과 대의명분, 국가적 공신력, 동맹관계, 지도자와 외교관의 자질과 매력, 그리고 국제여론에 대한 호소력 등이다. 자산은 그 가운데서 약소국이 활용할 수 있는 위력 또는 영향력의 요인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상하관계에는 그다지 구애될 바 아니라 해도 대·소(강·약)관계의 엄존과 그 상쇄요인, 나아가서 호혜적 상생(相生)조건의 형성은 항상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자산의 조국 정나라는 중원(中原)의 전략적 요충에 위치했다. 강대국인 진(晋)국과 초(楚)국의 세력이 대치하는 접점이고, 서방 강대국인 진(秦)국의 동방 출구이기도 했다.

그러한 국제전략 요충에 위치한 약소국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했다. 하나는 평화로운 환경 조성이다. 만약 과대망상적인 허장성세를 일삼는다면 주변세력들에게 ‘위험지대’라는 인식을 심어 필연적으로 그들의 개입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다 내전이라도 발발하면 어김없이 국제분쟁으로 번지고 말 것이다. 다른 한편 강대국들을 이간시키는 잔재주 모략을 일삼는다면 급기야 약소국의 내란이 국제화하면서 외세로 인해 국토가 초토화되고 말 것이다.

또 하나는 내부단결이다. 만약 국론분열이 격화되면 필연코 어느 한 쪽이 외세를 끌어들이려 할 것이다. 이러한 사태발전 양상은 어느 나라건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국민적 합의가 없는 ‘개혁’의 무리한 강행은 의외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춘추시대에도 내란국의 분할 점령이니, 위험지대에 대한 이른바 탁관(託管, 신탁통치)이니 하는 사례가 나타난 바 있다. 강대국들의 내정간섭은 예나 지금이나 약소국의 국론분열과 내분에서 비롯된다.

자산은 국제전략 요충에 위치한 약소국 생존의 두 가지 급선무, 즉 평화환경을 조성하고 내부단결을 이루기 전에는 외국의 초청이 있어도 방문외교에 나서지 않았다.

한편 여론의 확실한 지지 없는 개혁에는 그야말로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오늘날에도 식자들은 정치를 가리켜 ‘가능사의 예술’이라고 부른다.

도약을 위해서는 안정된 발판이 필요하다. 그 안정은 불필요한 새로운 일을 되도록 벌이지 않는 데서 자연스레 다져진다. 이것이 자산이 헤아린 도리다.

 

신의 있는 외교

‘춘추’는 원래 노(魯)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그런데도 막상 노나라의 일보다는 정나라의 국제관계와 국내정치 및 인물 동향에 대해 더 많이 쓰고 있다. 약 3대 1의 비중이다. 그만큼 국제전략 요충에 자리한 약소국인 정나라의 일은 중원 제후국들의 총체적 관심사였다는 얘기다.

이는 오늘날 태평양 너머 멀리 있는 초대강국 미국이 세계전략의 요충지인 한반도에 기울이는 비상한 관심도를 연상케 한다. 2004년 11월20일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칠레 산티아고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을 때 북핵 문제를 가리켜 ‘vital issue’라고 표현했다. 이는 단순히 ‘중요문제’라는 뜻이 아니다. ‘사활적 문제’ 또는 ‘지극히 중요한 문제’, 곧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라도 꼭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뜻이다. 그러니 기분에 좌우되는 미봉책이나 기회주의적인 대응책으로 다룰 문제가 아니며 깊이 있게 연구하되, 우선 한·미 양국이 동맹관계에 있으니 한결같은 목소리를 내야 하고 불협화음은 삼가는 것이 좋겠다는 함축이었다.

그렇다면 춘추시대에는 어땠을까. 중원의 전략적 요충에 자리하여 진(晋)과 초(楚) 양대 강국의 틈에 끼인 정나라는 번번이 두 강대국의 침입을 받았다. 그래서 자산이 등장하기 전 역대 집권자들은 두 나라의 눈치를 보는 기회주의 외교노선을 채택했다. 가령 아침에 진군이 쳐들어오면 거기 붙었다가 저녁에 초군이 들어서면 다시 다른 세력을 따르는 이른바 ‘조진모초(朝晋暮楚)’ 노선이었다. 그것이 ‘약소국 생존의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산은 국내정치의 분규요인을 수습한 뒤에야 국제정치로 중심을 옮겨갔다. 우선 종전의 외교노선부터 고쳐나갔다. 자산의 새로운 발상은 국제정치에도 신의가 필요하며, 잔재주나 기회주의를 자랑거리인 양 착각하다가는 유사시에 어느 쪽으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고립되어 끝내 패망할 것이라는 인식에 입각해 있었다.

자산은 또 강대국들의 국정에 대한 조사연구를 폭넓고 깊이 있게 수행한 뒤 외교정책을 입안했다. 그들의 현실적 요청과 그 역사적 근거를 정확히 파악하고, 정나라가 줄 수 있는 이점이 무엇인가를 헤아렸다.

진(晋)나라의 경우 당시 자주노선을 걷고 있었으나, 원래 주(周)왕조로부터 분기된 한족의 나라이고 예법과 습관도 정나라와 같았다. 그러니 대의명분을 세워줄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정나라 인민은 진과의 기존 동맹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른 한편 초나라는 원래 남방의 이민족 국가로 문화적 동화가 진행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중원 제후국들에 의해 이단시되며 소외당했다. 그래서 중원 사태에 대한 참여는 물론, 대국으로서 인정받길 갈망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리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어 설령 중원으로 진군하더라도 보급선이 길어서 오래 있지 못하고 철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정나라의 대초(對楚) 외교는 그들의 소외감을 풀어주고 대국으로 대접해주는 것으로 설정됐던 것이다.

이 경우 정나라는 쌍방간 오해가 생기거나 불쾌감이 들지 않도록 더욱 성실하게 행동하며 강대국을 납득시킬 필요가 있었다. 자산의 새 외교노선은 진나라와의 기존 동맹관계를 중시하면서 외교적 관례에서 벗어나지 않고 신용을 확보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설정했다. 다음으로 초나라와의 화친을 꾸준히 도모하며 무역관계와 민간외교를 확충해나가야 했다. 이러한 외교노선은 흔히 ‘종진화초(從晋和楚)’ 계략으로 불린다.

이는 얼른 보아 조선시대의 외교 기조를 연상케 한다. 조선의 외교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 하여 대륙의 중국 왕조에 대해 신례(臣禮)를 취하는 한편 일본에 대해서는 비록 격이 낮다 해도 통신사를 보내고 일부 무역거래를 허용하는 식이었다.

자산의 외교정책 노선은 ①신의(信義)의 고수 ②기본수요에 대한 형평성 있는 봉사 ③성실과 신용을 바탕으로 한 관민합동의 홍보 노력에서 돋보였다. 무엇보다도 신용이 첫째였다.

 

기회주의 중립외교의 위험성

서구에서는 일찍이 마키아벨리(N. Machiavelli, 1469∼1527)가 ‘군주론’에서 신의를 망각한 기회주의 ‘중립외교’의 위험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근시안적 중립주의는 파멸을 초래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의 동맹외교는 신의로 지켜나가야 하며, 다른 한편 북측의 동맹관계도 현 단계에서는 이해되는 바가 없다. 반도의 분단된 남부가 해양 편이고 북부가 대륙 편임은 자연스러운 생존욕구에 부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맹 자체는 상호간에 비난할 바 아니다. 앞으로 자유민주 통일이 현실적 일정에 오른다면 그때 새 국제관계 조정에 적극적 요인으로 활용될 수 있을는지 연구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춘추 5覇’ 제나라 환공의 탁월한 통치철학 “먹고살 걱정이 없어야 개혁도 한다” 훌륭한 인재를 활용하려면 통치자 자신부터 훌륭해야 한다. 개혁정치에 성공하려면 분명한 목표설정과 국력집중이 필요하다. 기량 큰 군주로 숭앙받는 제나라 환공, 티끌만한 질투심도 없이 자신보다 나은 인재를 천거한 포숙, 부민화 정책을 통해 민생안정을 이끈 관중. 이들이 엮어낸 제나라의 부흥 이야기. 일러스트·이우정

키가 작은 통치자는 본능적으로 키가 큰 인재를 꺼린다는 말이 있다. 이는 보통 사람에겐 어쩔 수 없는 인간적 약점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고 활용한 통치자라면 먼저 그 통치자 자신이 훌륭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철강왕 카네기(A. Carnegie·1835∼1919)는 자신의 묘비명에 ‘여기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쓸 줄 알던 사람 잠들다’라고 쓰게 했다. 협력자에 대한 감사와 자기 자신의 부각, 그리고 인류에 대한 교훈을 아울러 남긴 셈이다. 이와 같은 이치를 염두에 두면 제(齊)나라 환공(桓公)과 관중(管仲)의 인간관계를 읽어나가기 쉬울 것이다.

원래 제나라는 서해로 뻗은 산동반도의 북부와 황하 하류 평원지대를 겸유함으로써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 유명한 태공망(太公望·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이자 공신)이 봉함을 받았던 동방의 전략적 요충지로 알려져 있어 주 왕조의 제후국들 중에서도 은연 중 위신이 높았다.

그러나 무지몽매한 제14대 군주 양공(襄公)이 즉위하자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음란하기 그지없는 무도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누이동생과도 통정(通情)했다고 한다. 어리석은 ‘가문 타령’으로 자기의 무능을 변호하고 악행을 합법화하려 했으나, 이런 일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난세에 더욱 절실한 親友

양공은 살인과 공포와 정보정치로 그럭저럭 정권을 유지했지만 결국 측근의 손에 제거되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포악한 독재자는 측근의 유력자에게 살해당하기 십상이다. 양공도 믿었던 심복인 두 장군에게 살해당했는데, 그들 역시 다른 대신(양공의 종제)에게 죽임을 당했다. 삽시간에 대혼란이 전국을 엄습했다.

당시는 군주를 태양으로 여기던 때로, 그 자리를 하루도 비워두기 곤란했다. 그런데 양공에겐 아들이 없었고 배다른 두 동생이 있었을 뿐이다. 공자(公子) 규(糾)와 공자 소백(小白)이 그들이다.

두 공자는 양공의 포악무도함을 보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일찌감치 각기 자기의 사부(師傅·스승 겸 후견자)와 함께 외국으로 망명했다. 공자 규는 외조부의 나라인 노(魯)국으로 갔는데, 그의 사부는 관중과 소홀(召忽)이었다. 한편 공자 소백은 이웃한 거(퀎)국으로 갔는데, 사부는 포숙(鮑叔)이었다. 포숙은 관중의 가장 가까운 친우다.

이들 사부의 선정은 양공과 공자들의 선친인 제나라 희공(僖公)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처음 사부 발령이 발표되자 포숙은 병을 빙자하여 출근하지 않았다. 그가 맡은 소백이 나이가 어린 편이고 서자 출신이라 장래성이 없을 것으로 보아 실망했던 것이다. 그러자 관중과 소홀이 그를 찾아갔다. 관중이 앞일을 내다보며 말했다.

“양공의 타계 후에 제나라를 안정시킬 군주는 두 공자 외에 다른 대안이 없네. 그런데 난세의 사태 진행은 현재의 위계질서대로 나가는 게 아니지. 앞으로 누가 등극할지는 알 수 없네. 나는 공자 소백을 유망주라고 내다본다네. 그 분은 잔재주를 피우지 않고 대소고처(大所高處)로부터 사물을 파악하며 기량이 크네. 인물의 도량이 거대하기 때문에 잘 이해하기 어려울 뿐이지. 미래를 예측하건대, 설령 공자 규가 집권한다 해도 나라일이 어렵게 되면 다스려 나가기 어려울 것 같아. 그때야말로 공자 소백을 받드는 포숙 자네가 나서서 정치안정을 위해 헌신분투할 시기라고 보네.”

관중이 계속 말하였다.

“우리는 임명된 직분이야. 우선 모시는 분을 받들어 충성을 다하며 사생을 초월해야지. 그러나 더 나아가서 국가이익과 민생안정에 이바지한다는 포부를 가지면 좋으리라 생각하네.”

포숙은 관중의 그 같은 충고에 따라 출근해서 공자 소백에게 충성을 고했다. 이로써 장차 어느 공자가 집권하든 사부인 두 친구가 서로 비호하고 천거할 사상적 준비가 갖춰진 셈이다. 이러한 친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 성실해야 하며, 허영과 거짓말 같은 잔재주는 어불성설이다.

   

군주다운 기량, 사심 없는 천거

변전무쌍한 난세의 정국 추이는 주마등과 같았다. 결정적 시각의 도래가 의외로 빨랐고, 상상 이상으로 더욱 첨예화했다.

폭군으로 악명을 날리던 양공이 시해되자 사촌 아우인 공손무기가 등극했으나 반년도 못 되어 역시 이승을 하직했다. 그동안 공자 규는 노나라로, 공자 소백은 이웃 거나라로 도피 중이었다. 공석인 군주의 자리를 메우고자 급거 소집된 중신회의의 다수 의견에 따라 거나라의 소백에게 영접의 사신이 파견됐다.

영국의 처칠은 “난세에는 중앙무대 가까이 위치해야 유리하다”고 갈파한 바 있다. 공자 소백으로 말하면, 가까이 있을뿐더러 의젓한 생김새에 기량이 크다고 알려져 있었으니 조건이 매우 유리했다.

한편 그러한 정보를 접한 노나라도 가만있지 않았다. 나이로 보아도 공자 규의 즉위가 당연할뿐더러, 무엇보다 이 기회에 제나라에 친노(親魯)정권을 수립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노나라 장공(莊公)은 군대를 풀어 공자 규의 귀국을 서두르기로 결심했다. 이때 관중이 계산해보니, 거나라가 제나라 수도에 더 가까우므로 소백이 먼저 귀국해 즉위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관중이 직접 수십량의 병차로 쾌속 선발대를 편성했다. 서둘러 인솔하면서 본대에 앞서 출발했다. 그래야만 공자 소백의 귀국 행렬을 중도에서 차단할 수 있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관중의 선발대가 급행하여 즉묵에 도착해보니 벌써 공자 소백 일행이 통과중이었다. 관중이 달려가 장유(長幼)의 순서와 현재의 병력 대비 등을 이유로 귀국 중지를 호소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설득 실패를 자인하듯 관중은 고개를 떨구고 자기 진영으로 되돌아가는 듯했으나, 갑자기 돌아서더니 공자 소백을 향해 활을 쏘았다. 소백은 크게 소리지르며 차중에서 뒤로 쓰러지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측근들이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한참 지켜보던 관중은 암살 성공을 확신하며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뒤따라오던 본대에 경위를 보고하고, 여유 있게 천천히 제나라 수도를 향했다.

한편 공자 소백은 관중이 멀어지자 멀쩡하게 상반신을 일으킴으로써 주위를 놀라게 했고, 또한 기뻐 어쩔 줄 모르게 했다. 관중이 쏜 화살은 소백의 허리띠 장신구를 맞히고 옆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공자 소백의 그런 계략은 ‘임기응변 죽음 꾸미기’라고 불린다. 한자로는 ‘수기응변 양장중전지계(隨機應變 佯裝中箭之計)’다. 하여튼 임기응변의 순간적인 연극과 슬기로운 연출은 공자 소백의 신속하고 탁월한 두뇌회전을 말해준다. 후세의 일이지만 삼국시대의 제갈공명도 ‘죽음 꾸미기(裝死)’를 역용했다. ‘삶 꾸미기(裝生)’ 계략을 유언하여 자신의 사후에 적군을 격퇴한 것이다.

공자 소백 일행은 연극에 성공한 후 발길을 재촉해 제나라 수도에 입성했다. 그러고는 백관만민의 축복 속에 즉위했는데, 이것이 곧 제나라 환공(桓公)의 등장이다. 기원전 685년의 일이다.

한편 노나라의 방대한 병력은 공자 규를 호송하며 천천히 위의를 갖추면서 뒤늦게 국경을 넘어서야 비로소 즉위 사실을 알게 됐다. 후회막급이었으나 자기 딴에는 대의명분이 있었고 병사들에 대한 체면도 세워야 했다. 억지로 공자 규를 내세워 일전을 시도했으나 결과는 노군의 대참패였다. 제군은 거꾸로 노군을 추격하며 국경을 넘어섰는데 사령관 포숙 명의로 최후통첩을 보냈다.

“공자 규는 당신들 노나라의 육친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노군측에서 처분하시오. 그러나 관중과 소홀은 제나라 출신의 원수이니 우리측이 인도받아서 처단하겠소(春秋左氏傳, 莊公 10年).”

결국 공자 규는 자살했고 소홀은 순사(殉死)했다. 살아남은 관중의 신병은 포숙이 인수해 당부라는 곳에 이르러서는 결박을 풀었다. 그러곤 귀국하자마자 환공에게 보고하고 건의했다.

“관중은 저와 비교도 안 되게 우수하며, 천하에 둘도 없는 정치적 재능을 가졌습니다. 그를 대담하게 등용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를 활로 쏜 적이 아닌가.”

“그럴수록 거룩하고 폭넓은 기량을 천하에 보이셔야 합니다. 과거에 구애하면 소인에 불과합니다. 관중을 보좌역으로 기용하시기 바랍니다.”

환공이 끄덕이며 포숙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환공은 관중을 일거에 상국(相國)으로 임명하여 국정을 맡겼다. 이를 전해들은 국민은 환공을 우러러보았고 또한 포숙을 존경했다. 환공은 오늘날까지도 기량이 더없이 큰 위대한 군주로 숭앙된다. 그리고 포숙은 티끌만한 질투심도 없이 자기보다 나은 인재를 공정하게 천거했다는 데서 훌륭한 참모장으로 존경받고 있다.

   

‘경제’ 다음이 ‘정신’

고대 중국 제나라의 환공과 관중은 분명한 목표설정과 국력집중으로 개혁정치를 성공시켰다. 사진은 2003년 3월 경기도 과천시 중앙공무원연수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참여정부 각료와 청와대 인사들.

관중은 환공의 신임과 포숙의 우정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충성과 실무에 최선을 다했으며, 마침내 제나라를 천하제일의 부강국으로 부상시켰다. 환공이 춘추5패의 선두주자로 등장할 수 있도록 훌륭하게 보좌한 것이다.

개혁정치를 성공시키려면 목표를 분명하게 설정하고 국력을 집중시켜야 한다. 과녁 없이 활을 마구 쏘아대듯 이것저것 일을 벌이는 정책적 낭비로, 이렇게 해서 개혁을 성공시킨 사례는 역사상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제나라 재상직을 맡은 관중에게 국정목표와 정책순위 결정은 지극히 명백했다. 난세 수습과 부강한 조국 건설의 최우선 과제는 국민을 잘살게 하는 것이다. 즉 부민화(富民化) 정책을 통한 민생안정이다. 그밖에 다른 것은 파생적인 것이다.

그는 정면으로 깨우친다. “정치의 최우선 과제는 국민을 잘살게 하는 데 있다(治國之道, 必先富民).” 이어서 부연한다. “민생이 안정되면 다스리기 쉽지만, 경제가 파탄되면 혼란이 불가피하다(民富則易治也 民貧則難治也, 管子, 治國篇).”

나아가서 민생안정을 전제로 한 인간의 도덕의식 향상과 민성(民性) 순화가 정치의 목적으로 제시됐다. “인간이란 먹고 사는 데 걱정이 없어야만 비로소 자주정신과 도덕적 가치에 눈뜨게 된다(衣食足而知榮辱… 管子, 牧民篇).”

오늘날로 말하면 민주정치 안정의 경제적 조건을 말하면서 정신적 조건 형성을 내다보게 한 셈이다. 사실 신생국의 젊은 지성들이 지난날 강력한 독재정권에 맞서 희생적으로 용감히 싸워나갔던 근본지향도 그것이 아니었는가. 도덕적 가치에 눈뜬 자주적 인간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민주정치는 성립할 수 없다. 그 자주적 인간 육성의 으뜸이 바로 민생안정이고, 이를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올바르고 슬기로운 시장경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관중의 정치적 실천에서 보는 신경지 개척은 무엇인가. 수천년 전의 일인 만큼 시대적 제약성은 면치 못했으나 착실한 동시에 매우 진취적이었다.

당시는 농업입국일 수밖에 없었으나 때마침 수공업자들에 의해 철제 농구가 새로 제작될 무렵이었다. 관중은 농업생산력을 증강코자 각국의 수공업자뿐 아니라 상인들에게도 철제 농기구 도입과 관련하여 특전과 자유를 부여했다. 따라서 상공업자들의 자본과 기술이 제나라로 물밀듯 유입됐다.

관중은 또 농민의 생산의욕을 고무하고자 세제개혁을 단행했다. 종전의 세제가 관료들의 징세 편의 위주로 되어 있던 것을 뜯어고친 것이다. 신개척지와 척박한 땅에서 일하는 농민들은 특별하게 보살폈다.

제나라의 입지조건은 내륙의 제후국들과 달랐다. 해안국의 특징을 살려 제염업과 어업을 진흥시켰으며 내륙을 향한 유통구조를 개선했다. 이는 외국 상인들의 자발적 참여 의욕을 북돋웠다.

행정관리 분야에서는 인재 선발 및 등용의 합리성과 활성화를 보장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에 걸쳐 진행일지처럼 공과표를 만들도록 했다. 필요할 때 언제라도 이유 있는 천거가 가능하도록 안배한 것이다. 또 사회안정과 정부시책의 효율적 시행을 위해 주민들의 무작정 상경과 정처 없는 유동인구화를 제한했다. 출생지와 생산활동지를 연결했을 뿐 아니라 사회복지와 방범조직, 징용과 병력동원을 서로 연관되도록 엮어놓았다. 이러한 조직화는 사회일탈을 예방하는 동시에 주민들로 하여금 보람과 이익을 아울러 헤아리게 한 것이다.

 

관중의 외교정책

관중의 외교정책은 목표와 명분, 그리고 방법이 지극히 간단명료하고도 짜임새가 있었다. 목표는 제 환공으로 하여금 제패(制覇)케 하는 것, 즉 제후들을 대표하는 우두머리 패자(覇者)의 지위를 누리게 하는 것이다. 힘의 뒷받침이 있어야 정의가 관철된다는 것이다.

그 명분은 이른바 존왕양이(尊王攘夷)였다. ‘존왕’이란, 당시의 주(周) 왕실이 유명무실한 존재로 약체가 되어 있었으나 단결에는 중심이 필요하므로 우선 받들면서 제후들이 힘을 합치자는 것이다. ‘양이’란 주변 이민족들이 아직껏 중국 문화에 동화되지 않은 채 중원을 유린코자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그들의 침략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는 외교를 뒷받침할 실력을 갖추는 일이다. ‘종합 국력’을 증강하고 국부병강(國富兵强)해야만 제후국들이 복종하며 동원에 호응한다. 둘째, 외교에서도 신의를 굳건히 지켜야만 제후국들이 믿고 따라온다. 한번 맺은 약속은 이유를 막론하고 꼭 지켜야만 제후국들이 심복(心腹)할 것이며, 그들의 자발적 적극성을 오래도록 지속시킬 수 있다.

   

바로 그 점, 신의의 준수로 표현되는 정직하고 겸허한 자세가 관중 외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기원전 681년의 일이다. 제와 노의 무력충돌에서 제나라가 승리했다. 패배한 노 장공이 수읍(遂邑)을 할양하겠으니 화의하자고 요청해왔다. 제 환공이 응낙하여 가(柯)라는 곳에서 평화회담이 열렸다. 단상에 양국 수뇌가 착석하고, 신하인 중진 장군들은 단하에 착석할 참이었다. 바로 그 순간에 단하에 있던 노나라 장군 조말(曹沫)이 단상으로 올라왔다. 자신의 주공에게 무언가 귀띔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방향을 돌려 환공에게 단도를 들이대며 “빼앗은 영토를 반환하시오!” 하고 외치는 게 아닌가.

환공은 그 위급한 순간에 “알았다, 그렇게 하지” 하고 약속했고, 조말이 단도를 버리고 단하의 신하 자리로 돌아갔다. 나중에 환공이 생각하니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전쟁에 승리한 만큼 조말을 없애버리라고 요구하기로 했다. 물론 강박된 약속은 저버릴 생각이었다. 이때 관중이 달려와 말했다.

“협박을 당한, 위급한 상황의 약속이긴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고 이미 말씀하신 겁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상대방을 죽이면 신의에 어긋납니다. 일시적 분풀이에 불과합니다. 그 결과가 알려지면 제후들의 불신을 초래하며 백해무익합니다.”

환공이 관중의 간언을 수긍하고 조말과 약속한 대로 빼앗은 땅을 고스란히 노나라에 반환했다. 이 소문이 전해지자 제후들이 한결같이 제 환공의 처사를 높이 평가했다. 신의를 지키는 큰 인물이라며 그를 우러러보았던 것이다. 이때의 일을 계기로 2년 후 열린 회맹(會盟) 때 모든 제후들이 환공을 맹주(盟主)로 모셨다. 즉 환공이 처음으로 중원의 패자(覇者)로 등장한 것이다.

 

신의를 지킨 환공

외교를 뒷받침하는 실력, 즉 유사시에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종합 국력’의 요인은 무엇인가. 관중에 의하면 8대 요인이 있으니, 즉 ‘재(財=경제), 공(工=기술), 기(器=생산기구), 정교(政敎=정치와 선전), 선사(選士=군인의 소질), 복습(服習=군사훈련), 편지천하(遍地天下=국제문제의 조사연구), 기수(機數=시기 장악과 객관적 조건의 활용)’이다(管子, 七法, 제6).

이는 고대의 탁견이다. 그러나 현대 중국의 사회과학자들은 더 많은 요인을 거론한다. 크게는 정치, 경제, 군사의 세 가지 분야로 구분한다. 정치적 요인으로는 사회정치제도, 대내외 정책, 사회의식 형태, 정쟁의 성격규정, 정당·정부·군대·인민의 단결 정도, 국제적 지원을 든다. 경제적 요인으로는 생산력의 발전수준과 가동 정도, 교통운수, 과학기술, 인구, 영토, 전략물자의 비축, 경제적 잠재력 등에 주목한다. 군사적 요인으로는 군대의 양과 질, 군사지휘관들의 능력, 군사 사상과 전략·전술, 무기장비, 후방 보급 등이 중요 관심사다(社會科學大辭典, 北京, 1990).

미국과 서구의 학계 관심도 대동소이하지만, 지리적 위치나 천연자원, 인구의 교육훈련, 리더십, 공업력, 민족성, 국민적 사기, 외교의 질, 정치의 질, 연구의 질에 주안점을 둔 것이 관심을 끈다.

 

후세의 웃음거리 된 ‘송양지인’

관중·포숙 등 충신들이 병사한 뒤 제 환공도 기원전 643년 이승을 하직했다. 곧바로 다섯 공자 간에 후계자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 추잡한 권력투쟁 속에 환공의 시체가 60일간이나 방치되어 악취로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고비로 제나라의 패업은 엉망이 됐으며, 영원히 물 건너가고 말았다.

그 소동의 와중에 이웃 송(宋)나라 양공(襄公)한테 피난 가 있던 태자 소(昭)가 송나라 등 몇몇 나라의 후원으로 귀국하여 그럭저럭 등극했으니, 곧 제나라 효공(孝公)이다.

한편 송 양공은 그러한 개입의 성공에 힘입어 제나라의 패업을 자기가 계승하고자 하는 뜻을 품었다. 실력의 뒷받침 없이 야심만 부풀어오른 양공의 모습을 보자 크게 걱정한 공자 목이(目夷)가 진언했다.

“우리나라는 약소국인데도 분수를 모르고 제후의 맹주가 되고자 하니 화난을 초래할까 우려됩니다.”

그러나 양공은 듣지 않았고, 외교무대에서도 ‘공작’의 가문이라고 큰소리치며 대접받기를 즐겼다.

송나라의 라이벌은 남방의 신흥 강대국인 초(楚)나라였다. 그런데 이웃 정나라가 초나라에 공물을 바치는 등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지 못한 양공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으로 쳐들어갔다.

   

한편 초나라는 정나라의 지원 요청을 받자 대군을 파견했는데, 사령관은 군주가 아닌 대신이었다. 되돌아선 송군이 홍수(泓水)를 사이에 두고 초군과 대치했다. 기원전 638년의 일이다. 대사마(大司馬)의 직책을 맡았던 목이가 거듭 양공에게 간했다.

목이 : “초군이 침공하는 명분은 정나라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정나라와 화친하면 초군은 개입할 명분이 없어져 철수할 것입니다.”

양공 : “환공의 패업을 계승할 우리가 초나라에 좌지우지될 수는 없다.”

목이 : “초군의 병력과 장비가 우리를 능가합니다.”

양공 : “우리에겐 대의명분이 있으나 그들에겐 인의(仁義)와 도덕이라는 무장이 없다. 송나라는 공작의 나라인데 정나라는 자작의 나라이니, 가문에서도 우리가 우월하다. 더구나 지금 적군의 사령관은 군주도 아닌 대신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한 문답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결전의 날이 밝았다. 초군이 도하(渡河)할 참이었다.

목이 : “도하를 시작한 적군을 강물 속에서 격멸합시다. 적군 병력이 아군보다 우세합니다.”

양공 : “아군은 정정당당한 인의의 군대인데, 어찌 상대방이 수중에 있을 때 습격한단 말인가.”

이윽고 초군이 도하를 마치고 나서, 대열의 정돈을 서두르고 있었다.

목이 : “지금이 최후의 돌격 기회입니다.”

양공 : “군자는 적의 약점을 치지 않는다. 어찌 대열 정돈을 마치지 못한 적을 칠 수 있단 말인가. 작은 이익에 현혹되어 대의를 망각해선 안 된다.”

드디어 초군이 전투대형을 갖추고 부서 할당을 마친 다음에야 비로소 송 양공이 진격의 북을 쳤다. 양군의 격돌 속에 송군이 완패하여 병력의 8, 9할을 상실했다. 양공 자신도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 목이가 결사적으로 구출했다.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 패주했다. 한편 초군은 추격·섬멸 작전이 이번 임무는 아니라며 전리품만 챙겼다.

이 홍수 싸움을 계기로 종전에 ‘남방의 야만국’으로 천대받던 초나라는 중원 진출의 발판을 굳혔다. 많은 제후국들이 국가의 생존을 위해 초국의 보호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한편 송 양공의 시대착오적인 가문타령 내지 실력의 뒷받침이 없는 외교와 도덕에 의한 전략·전술 규제는 천하의 웃음거리가 됐다. 이른바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고 타기(唾棄)당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춘추시대 두 번째 패자(覇者), 진 문공의 국가경영학 군정합일(軍政合一), 정평민부(政平民阜), 개방 인사로 내실 성장

험하디 험한 후계자 다툼 속에 여러 인접국을 유랑하며 집권의 순간을 기다려온 진나라 문공. 굶주리고 박대받던 19년 세월이 그에겐 현군(賢君)의 자질을 쌓는 값진 자양(滋養)이었다.
그는 이를 토대로 집권하자마자 다채로운 국력 배양책을 쏟아냈는데, 특히 ‘초재진용(楚材晉用)’이란 성어가 생길 만큼 개방적인 인사정책은 그의 치하를 더욱 번성케 했다. 일러스트 이우정

망명과 유랑 19년에 지칠 대로 지친 노구를 가까스로 추슬러 귀국하고는, 즉위하자마자 안정을 되찾고 신경지를 개척하며 부강조국을 이룩한 정치가가 있다. 춘추시대 두 번째 패자(覇者)로 등장한 진(晉)나라 문공(文公)이다. 그 성공의 비결엔 현대인도 배울 점이 많다.

원래 진나라는 고대 한(漢)족이 주로 모여 살던 중원(中原)의 제후국치곤 퍽 강대한 편이었다. 그러나 헌공(獻公) 재위시에 후계자 선정문제를 둘러싼 자중지란이 심화되면서 국세가 급속히 추락하고 말았다.

헌공도 중년까지는 퍽 똑똑한 편이었다. 그러나 아내를 여읜 뒤 그 자신 전쟁을 즐기며 정복지에서 소수민족 미인들을 ‘전리품’으로 수탈해 궁중에 들여놓고 익애(溺愛)하면서부터 탈선과 오판이 잦았다. 일찌감치 찾아든 노망끼 탓인지도 모른다.

특히 여산에 살던 융족 일부를 정복해 그곳의 미인 여희 자매를 얻어 몹시 사랑하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여희는 아들 해제(奚齊)를 낳았고, 그 동생은 아들 탁자(卓子)를 낳았다. 이에 앞서 헌공은 이미 선처와의 사이에 태자인 신생(申生)과, 둘째 중이(重耳), 셋째 이오(夷吾)를 뒀는데, 세 아들 모두 착하거나 똑똑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한편 여희는 야만족 출신으로 배운 것은 없었으나 머리가 좋았다. 그녀는 자기 소생인 해제로 하여금 태자가 되게 하여 정복자의 나라를 거꾸로 탈취하고자 결심했다. 그 기초공사로 우선 헌공에게 최선의 봉사를 다해 사랑을 받는 동시에 유력한 대신들을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노력엔 빈틈이 없었다. 그 바탕 위에 전형적인 궁중 음모 3단계 작전을 구상했다. 냉정하게 병법적 시각에서만 평가한다면, 단기적으론 성공작이었다.

우리 조선왕조 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시도가 있었다. 앞으로도 유사한 시도가 있을는지 또한 알 수 없으니, 정치적 경각심을 갖도록 머리의 체조 삼아 읽어나가기 바란다.

 

궁중 음모 3단계 전략

[제1단계-라이벌 따돌리기]

여희는 자기가 낳은 해제를 새 태자로 결정할 생각이 헌공에게도 없지 않음을 알았다. 그러나 태자 후보 경선에 나설 경쟁자들이 만만찮음을 관측했다. 라이벌들을 먼 곳으로 따돌려 경쟁력을 약화시킬 필요성을 통감한 것. 그래서 유력한 안보담당 대신들을 뇌물로 매수해 헌공에게 건의케 했다.

“우리 진나라의 사활적 요충지는 곡옥(曲沃), 포(蒲), 굴(屈)인데, 나라를 수호하려면 유능한 공자님을 각기 현지에 거주시켜 다스리게 하는 방법이 있을 뿐입니다.”

헌공이 그 진언에 따라 태자 신생을 곡옥, 둘째 중이를 포, 셋째 이오를 굴에 보내 거주케 하면서 군사와 행정을 총람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살게 한 것이다(中華書局, 春秋左傳 註, 北京, 2000, 上 239쪽).

그런데 영국의 처칠은 “무대 가까이 있어야 등장할 기회가 많다”고 갈파한 바 있다. 음모를 방지하고 자기 세력을 심어두기 위해서도 최고 통치자 가까이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라에 정치 중심지가 둘 있다면 먼 곳을 선택하는 것이 불리하고 위험하게 마련이다.

 

[제2단계-주적(主敵)의 제거]

적은 하나여야 한다. 공격할 때는 중점을 설정하고 거기에 힘을 집중 투입해야 한다. 이곳저곳으로 정신이 흩어지면 지고 만다. 양면(兩面) 작전은 패망의 선택이자 바보짓이다.

여희는 그 점을 잘 헤아리고 있었다. 세 공자가 합세(合勢)하지 않도록 유의한 것이다. 우선 태자 신생을 부추겨 간계에 말려들게 했다. 신생이 거주하는 곡옥의 전통음식을 헌상하면 부군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진상 음식이 도착하자 여희는 남몰래 음식에 독극물을 섞었다. 헌공이 식사하려 하자 여희가 말리면서 먼저 시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한 조각을 개에게 던졌더니 먹자마자 개가 쓰러졌다. 이어 노예에게 먹어보라 했는데 역시 죽고 말았다. 여희는 통곡하면서 말했다.

   

“태자께서는 어찌하여 그렇게 잔인하실까요.”

그래도 헌공은 “증거도 없는데 설마…” 하고 결론내기를 주저했다.

태자의 측근은 여희의 작란(作亂)이니 즉각 변명하자고 했다. 혹자는 외국 망명을 건의했다. 그러나 착하디 착한 태자 신생은 고민 끝에 고령의 아버지 헌공이 여희와 더불어 편안하게 여생을 마치시길 연원한다면서 자살하고 말았다(司馬遷, 史記, 晉世家).

 

[제3단계-‘공범’조작과 잔적 소탕]

포와 굴에 각기 움츠려 살다 그러한 정보를 접한 두 공자는 어찌할 바를 몰라 걱정이 태산 같았다. 수도의 동향을 알아보고자 탐문꾼을 파견하기도 했다.

한편 여희 측에서는 이를 역이용하며 잔적(殘敵) 소탕전략을 세웠다. 헌공이 철저한 조사를 엄명하자 여희는 매수한 정보원들을 시켜 “나머지 두 공자인 중이와 이오도 독살 음모를 미리 알고 있었으니 공범임에 틀림없다”고 보고하게 했다.

이에 헌공이 분노하여 군대를 보내 포를 쳤다. 공자 중이는 가까스로 도주하여 적(翟)으로 망명했다. 망명과 유랑 19년의 어설픈 출발이었다. 헌공은 또 굴을 쳤다. 공자 이오는 양(梁)으로 망명했다.

마침내 후계자 교체 음모로 빚어진 만성적 국정혼란의 시기가 개막됐다. 늙은 군주가 후처를 사랑하고 그 소생을 태자로 삼으려면 혼란이 생기게 마련이다. 어느 왕조에나 흔히 있을 수 있는 부정적 사례다. 현대의 ‘인민공화국’이라 해도 권력세습에 집착하면 유사한 사태 발생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론형성층과 유대 못해

여희의 음모로, 국내에서는 해제의 즉위 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기적 성공에 불과했다. 외국으로 망명한 ‘대안’들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국내라고는 하지만 여희의 매수 작전은 귀족 관료사회의 일부에 그쳤던 것이다. 우선 군대를 장악하지 못했다. 또 반대세력 탄압에 활용할 정보기구도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 특히 여론형성층과 이해일치(利害一致)라는 유대를 설정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었다. 그러니 유사시에 국민의 외면과 방관, 지배층 내부의 혼란이 초래될 것은 자명했다. 헌공은 그 와중에 불안과 고민을 가누지 못한 채 노환으로 병석에 드러눕게 됐다. 하루는 심복이라고 믿어온 중신 구식(苟息)을 불러 말했다.

“나는 해제를 후계자로 작정했으나 아직은 어려서 여러 대신이 심복지 않고 있다. 즉위 후 반란이 있을까 걱정된다. 경은 해제를 옹립하고 수호할 수 있겠는가?”

구식이 대답했다.

“안심하십시오. 결심이 섰습니다.”

그러나 구식은 결심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세 판단이나 조건 형성은 제시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헌공은 그 말만 믿고 구식을 재상으로 임명해 해제 옹립을 부탁했다. 헌공이 사망하자 외국에 망명 중인 중이를 영입하려는 세력과 이오를 옹립하려는 세력이 뒤질세라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중이 영입파인 리극(里克)이 상중(喪中)의 해제를 궁중에서 시해했다. 구식이 해제의 동생 탁자를 즉위시키고 헌공의 시신을 매장했다. 그 다음달에 리극 등은 탁자도 시해하고 말았다. 동시에 구식도 순사했다.

승리감에 도취한 리극 등이 중이한테 특사를 파견, “영립(迎立)할 것이니 속히 귀국해 즉위하소서” 하고 권유했다. 만약 당신이 중이의 처지에 있었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중이는 얼씨구나 하지 않았다. 깊은 생각 끝에 사퇴하면서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나는 부군의 뜻을 어기며 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래서 부군이 서거하셨어도 장례에 참석지 못했습니다. 그런 내가 어찌 귀국할 수 있겠습니까. 대부(大夫)께서 아무쪼록 다른 공자를 옹립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숙고를 현대식으로 해석하면 이렇다.

“일부 대신들이 군주를 두 사람이나 죽이고 나를 새 군주로 옹립하려 한다. 이 마당에 곧바로 귀국하면 그들이 피 묻은 손을 들어 나를 환영하겠지만, 결국 나 역시 암살당하든지 그들의 괴뢰가 되고 말 것이다. 국민이 따르지 않고, 국제적으로도 평가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귀국하면 불안만 가중될 뿐 소신을 펼 수 없겠다. 즉위하고 싶지만 현재는 그 시기가 아니다….”

   

19년 유랑 끝 62세에 즉위

흠결 없는 인사는 국가경영의 전제 조건이다. 사진은 3월7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이헌재 부총리의 사표수리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는 김종민 청와대 대변인.

결국 리극 집단은 이오 옹립파와 합세하여 양에 있던 이오를 맞아들이기로 했다. 이오가 귀국을 서두르자 측근들이 말렸다. 길은 멀고 국내에도 반대세력이 있으니 우선 요소요소를 회유하고 무마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 방법은 외교적 공약(空約)과 국내용 정치공약(公約)의 남발이었다.

그래서 이오는 이웃 강대국인 진(秦)나라의 목공에게 특사를 보내면서 친서와 선물을 지니고 가게 했다. 자신의 귀국을 보호해주면 즉위 후 하서(河西) 땅을 헌상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중국어 발음으로 진(秦)은 ‘친’, 진(晉)은 ‘진’). 그리고 국내의 리극에게는 즉위하면 분양의 땅을 쪼개어 봉하겠노라고 공약했다.

그러나 혜공(惠公)이라 칭하며 즉위한 이오는 자기 파벌의 확장과 근위대 및 정보기구의 강화에 급급했다. 배신과 파약의 연속이었다. 리극에겐 자살을 강요했고 그후에 잔당을 모조리 숙청했다. 그 꼴을 보고 국민이 심복하지 않았다.

나아가 경솔한 혜공은 은인의 나라인 진(秦)을 치려고 했다. 두 나라 군사가 한원(韓原)에서 크게 싸웠는데, 진군이 대승했다. 혜공은 포로로 잡혀 압송당했다. 배신자라고 처형당할 뻔했다.

혜공은 가까스로 풀려나 귀국했으나 대신 인질로 태자 어(퀩)를 보냈다. 그리고 자기 파벌의 중신들과 모략을 꾸몄다. 우선 ‘제후들이 외국에 망명 중인 중이를 귀국하게 한 뒤 즉위시키려 하니 불안하다’는 이유로 암살단을 파견했다. 중이는 그 소식을 듣고 거처를 동방의 대국인 제나라로 옮겨 피신했다. 인질로 갔던 태자 어는 비밀리에 도주하여 귀국했다. 그후 혜공이 죽자 태자 어가 즉위했으니 회공(懷公)이라 칭했다.

천하가 혜공·회공 부자의 잔꾀와 배신으로 가득찬 정보 공작과 파당정치를 혐오했다. 특히 서쪽 대국인 진(秦)나라 목공은 망명 중인 중이를 찾아내어 무력으로 귀국시킨 다음, 즉위시키기로 결심했다. 드디어 진(晉) 내부에 잠재하는 내응세력과 합작하여 회공을 죽였다. 그후 중이는 귀국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곧 진(晉) 문공(文公, BC 697∼628)이다.

유랑생활 19년의 고초 끝에 62세에 즉위한 것이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초고령의 기적적인 정계 등장이었다. 문공이 즉위함으로써 진(晉)나라는 지리했던 다년간의 국정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유례없는 고령의 즉위였으나, 문공의 등장은 ‘준비된 집권’이었다. 그는 정처 없이 떠도는 부평초마냥 적(狄), 제(齊), 위(衛), 조(曹), 송(宋), 정(鄭), 초(楚), 진(秦) 등 여러 나라로 거처를 옮기면서 때론 굶주리고 때론 모욕을 참아내면서 아슬아슬하게 위험을 피해 다녔다. 도피에만 급급한 허송세월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각국의 다양한 정치현실을 심도 있게 비교 연구했다. 나아가 귀국에 대비해 미리 정책 청사진의 대강을 마련했다. 적재적소에 등용할 인재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귀국하자마자 시행착오 없이 즉각 효율적인 국정을 펴나갈 수 있었다. 그는 우선 구시대 정치의 폐해가 혼란과 불신에서 비롯된다는 데 착안했다. 그러니 새 정권의 급선무로 안정과 신뢰가 부각됐다. 신경지 개척은 그 다음의 일이다.

 

‘소외권’ 포용, ‘경력파’ 무시

국내 정치에서는 우선 안정과 화합, 신뢰와 협동을 표방했다. 한편으로 집권 초창기엔 기득권층의 저항을 극소화할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지지세력을 급속히 요직에 등용하여 새 정권의 통치기반을 공고화할 과제도 부각됐다.

당시의 기득권층은 궁정 안팎의 종실 귀족과 대부(大夫)들, 특히 벼슬을 이용해 토지를 불법 점유한 무리였다. 문공은 그들의 재산에 섣불리 손대지 않았으며, 과거의 죄악을 묻지도 않았다. 설령 민원대상이 있어 지지세력이 분통을 터뜨리는 경우에도 정책적으로는 ‘과거사 규명’을 하지 않았다. 만부득이한 사안이라도 단계적인 각개격파의 원칙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지지세력의 요직 등용은 신(新)정권의 화급한 자위적 요청이기도 했다. 문공은 집권 즉시 망명 시절 줄곧 자기를 따르며 지켜준 충신들을 모두 중용했다. 도중에 멀어진 사람들이라 해도 적어도 당분간은 충성할 것으로 보고 한때의 유감을 접고 등용했다. 새 인재 등용에서는 그동안 구(舊)정권에서 푸대접받았거나 무대접으로 취급된 ‘소외권’ 인사들을 대담하게 기용했다. 또 군소집단(현대 용어로는 정당 결성 이전의 이익단체나 서클 등)을 포섭하고 단결시키는 데 유의했다고 한다(中國改革史, 河北敎育出版社, 石家莊, 1997, 20쪽).

   

한편 자신의 무능을 탓하진 않고 ‘가문’ 타령을 하는 인물, 과거 독재자에게 아부해 얻은 벼슬을 다시 내세우는 이른바 ‘경력파’ 인물들은 무시했다. 능력제, 공적 중시의 인사정책을 편 것이다. 이와 관련, ‘숨어 사는 인재’들을 발견하는 대로 천거하라고 국가기관에 지시했다.

군대 개혁에서도 인사정책을 중시했다. 능력과 업적, 공훈 위주의 승급을 관철했다. 군복무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군정합일(軍政合一) 정책을 썼더니 행정효율이 크게 향상됐다는 기록이 있다. 군복무자들을 각급 공무원으로 수시 전용한 것이 사기 고무와 효율 향상에 고루 이로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과거 박정희 정권의 초기 인사정책을 연상케 한다. 나아가 수시로 군대를 시찰해 작전 연구와 군사훈련을 점검했다고 한다. 그 결과 한동안 흩어졌던 군기가 바로 서고, 전투력이 눈부시게 향상됐다.

경제개혁에선 ‘공정한 정치로 민생경제를 활성화한다’는 ‘정평민부(政平民阜)’ 정책을 기조로 삼았다. 우선 부질없는 각종 규제를 철폐했다. 부패관료의 수뢰수단을 일소했고, 경제발전의 대로를 활짝 터놓았다. 오늘날에도 정부가 큰길을 닦고 전기·수도·가스만 끌어오면, 나머지는 민간이 알아서 잘해나가는 법이다. 졸렬한 ‘행정지도’는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

문공은 이어서 조세경감, 채무탕감, 빈민구제, 취업확대, 상공진흥 등에 걸쳐 ‘나라의 보살핌’을 실감케 했다. 정치안정과 경제부흥을 비롯한 내실화 작업이 일단락되자 부강한 나라, 탄탄한 국력을 여러모로 실감할 수 있게 됐다. 그러한 바탕 위에 문공은 ‘패자(覇者)의 꿈’을 키워 나갔다. 그러자면 신의 있는 외교,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대의명분 그리고 군사적 우세에 관한 국제적 확인이 필요했다.

 

秦 따돌리고 楚 누르기

당시의 열국 정세를 볼 때 여러 제후국 중에서 패권 경쟁에 나설 만한 강대세력으로는 제(齊)·진(秦)·초(楚)·진(晉)의 4개국뿐이었다. 그중 제나라는 초대 패자였던 환공(桓公)과 명재상 관중(管仲)의 잇단 사망 이후 지저분한 후계 싸움과 간신배의 발호로 말미암아 급속히 약화되고 혼란에 빠져들어 경쟁권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이제 문공이 패자가 되는 길은 진(秦)을 따돌리고 초(楚)를 누르는 방안으로 요약됐다.

다행히 문공은 망명·유랑 과정에 그 나라들에서 따뜻한 대우를 받아 군주들과 우호적인 신의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티끌만한 불신이나 적대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진(秦)나라는 문공의 귀국과 즉위에 지극히 호의적이었으며 3000명의 병력으로 호송해주기까지 한 은의가 있었다. 다만 그 인구 구성이 한족(漢族) 일색이 아니라 서주(西周)의 잔여세력과 융이라는 이민족이 합세한 나라라는 데서 이단시되기는 했다. 중원의 패자가 되기엔 시기상조의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초나라는 중원의 한족 문명에 동화되었지만 원래 남쪽의 야만족 출신으로 여겨지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나 망명 중이던 중이(문공)를 환대했고, 동등한 제후격으로 대접해준 은의가 있었다. 더욱이 초 성왕(成王)은 문공에게 “귀하가 귀국해 즉위한 후에는 무엇으로 과인의 호의에 보답해주시겠소?” 하고 물은 적이 있다. 이에 대해 문공은 “만약 부득이 싸움터에서 회전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때 군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저의 군대를 3사(三舍·90리)에 걸쳐 후퇴시키겠습니다” 하고 약속한 바 있다. 공인의 약속은 신의로 지켜야 한다. 초는 중원 진출에 매우 적극적이며 조급해했다.

한편 중원의 약소 제후국인 진(陳)·채(蔡)·정(鄭)·허(許) 등은 국가안보를 강대세력인 초에 의존하고 있었다. 송(宋)나라도 초를 두려워하여 속국이 되다시피 했으나 문공 통치하의 진(晉)의 부흥을 보자 그 밑으로 들어가 보호받고자 했다.

초나라는 그러한 송의 표변에 분개했다. 성왕이 직접 출정하여 응징하고자 약소 동맹국들인 진·채·정·허 등의 무력을 합쳐 송나라로 진격했다. 송나라는 진(晉)에 긴급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문공은 대책회의(안보회의)를 소집했다. 장군 선진(先軫)이 출병 방침을 건의하면서 세 가지 이득을 말했다. 첫째는 문공 망명 기간에 호의로 접대해준 송나라를 구원함으로써 은의에 보답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부흥한 진(晉)나라의 위세를 제후들에게 시위하고, 셋째는 그 바탕 위에 패자로 우뚝 선다는 것이다. 그 건의는 이의 없이 채택됐다.

 

‘간접적 접근’으로 승리

구체적인 방법론으로는, 호언(狐偃)이 전략상 아군은 송나라로 직행하지 말고, 먼저 초나라와 긴밀한 관계인 조(曹)와 위(衛)를 치자는 우회전략을 말했다. 그러면 초가 그들을 구원코자 자연히 송나라에 대한 포위작전을 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 전략 역시 채택됐다.

   

이 우회적 전략은 현대에 와서도 영국의 군사평론가 리델 하트가 극구 평가하는 ‘간접적 접근(Indirect approach)’과 발상이 동일하다. 반면에 수뇌부의 직선적 사고방식은 대체로 패전과 망국을 초래한다.

행동 개시 직전에 문공은 동쪽의 제와 서쪽의 진에 걸쳐 소외감 없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포석을 잊지 않았다. 동주 왕조에 대해서도 사전에 양해를 구했다. 문공의 명령이 하달되자 진(晉)은 삽시간에 조나라와 위나라를 석권했다.

급보에 접한 초나라 성왕도 송나라의 점령지에서 대책회의를 열었는데, 대신들 사이에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자옥(子玉) 장군이 진 문공의 무례를 규탄하며 결전을 주장했다. 그러나 성왕은 문공이 선정을 베풀어 국력을 배양한 데다 그 배경에 서쪽의 진과 동쪽의 제라는 강대 세력이 있음을 감안했다. 요컨대 성급한 결전을 원치 않았다. 계속 송에 대한 포위공격 태세를 유지하면서 진과의 타협적 화해를 모색하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성왕 자신은 귀국했다. 정세가 불리하니 결전을 회피해야 한다는 판단은 옳았으나 일부 요행심리와 체면유지 등에 이끌려 명확한 엄명을 내리지 못한 점은 그의 과오였다.

한편 자옥은 왕명에 따라 진과 타협하여 강화를 모색해보려 특사로 원춘(펲春)을 문공한테 보냈다. 문공이 조나라와 위나라에서 철군하면 초군도 송나라에서 철군하겠다는 교환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대해 문공의 측근인 선진 장군은 적장 자옥을 결전으로 유인하기 위해 오만한 그를 격분시켜 판단을 그르치게 만드는 세칭 ‘격장법(激將法)’이란 계략을 쓰자고 했다. 조와 위에는 영토반환을 조건으로 초와 단교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했다. 또 자옥이 보낸 특사를 감금했다.

격분한 자옥은 초군을 주력으로 삼아 중앙에 배치하고, 정·허·진·채 등 겁 많은 속국 병력을 우익에 배치하여 진격을 개시했다.

한편 문공은 호언의 계략에 따라 ‘퇴피삼사(退避三舍·90리 퇴각)’를 단행했다. 표면상으로는 문공 망명시에 초 성왕이 베푼 우대에 보답하여 신의를 지킨다는 것. 그러나 군사적으로는 문공의 진군이 미리 차지한 유리한 지형 안으로 초군을 유인한 것이다. 즉 아군의 우세한 병력을 집중 배치한 싸움터까지 피로한 적을 깊이 끌어들여 격멸한다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이른바 성복(城?)싸움은 기원전 632년 초여름에 전개됐다. 쌍방 병력은 비등했는데 합계 3만명 정도였다. 진군은 우선 초군의 약점인 우익의 잡군을 맹공하여 파급 효과를 넓혀나갔다. 그리고 적의 주력을 포위망으로 유인해 퇴로를 끊고 측면 공격으로 섬멸했다. 결과는 문공의 완승이었다. 초군의 장군 자옥은 가까스로 싸움터를 빠져나갔으나 곧 자살하고 말았다.

 

東周 몰락의 반면교사

그 무렵 동주(東周) 왕실은 이미 유명무실할 정도로 쇠락해 있었다. 중국 역사학자들의 통설에 의하면 ‘서주(西周) 정권의 급격한 몰락은 왕실의 동쪽을 향한 수도 이전과 동시에 발생했다’는 것이다(常金倉, 窮變通久, 瀋陽, 1998, 237쪽). 일반적으로 수도 이전은 쇠락의 길을 달리려는 꼴이라고 알려져 있다.

필자도 동감이지만 예외적 경우도 없지 않으니 ▲점령 공고화 ▲신경지 개척에 해당되는 진취적 발상이라면 달리 평가할 수도 있겠다(예를 들면 이스탄불, 워싱턴, 브라질리아 등).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중심적 근거지 포기에 따른 경제 동요와 안보 약화 ▲기민의식(棄民意識)에 따른 많은 인구의 지지 포기 ▲국론분열의 반영구화 등을 감안해 신중할 필요가 있다. 현대에 발생할 만한 특수한 문제로는 ▲‘두 집 살림’과 근무조건 악화 ▲노조활동의 이상 기류 ▲부동산 투기풍조의 새 양상 ▲행정효율 저하와 맞물린 노동생산성 저하 ▲권위와 권능에 걸친 불신의 심화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문제 상황은 어느 누구라도 감당하기 어렵다. 따라서 문제는 줄여나가야 한다. 부질없이 늘릴 일이 아니다.

하여튼 주(周) 왕실의 양왕(襄王)은 성복싸움의 결과를 보자 역학관계와 대의명분을 고루 감안해 정식으로 진의 문공을 패자(覇者)로 임명했다. 그후 진나라의 영도적 우세는 약 100년간 지속됐다. 군사력과 경제력에 보태어 국제적 공신력이 컸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개방적이고 공정한 인재등용 덕분이다.

‘초재진용(楚材晉用)’이라는 성어(成語)가 있다. 자국의 인재가 타국에서 쓰인다는 뜻이다. 원래의 뜻은 인재의 출생은 초국이 많으나 그 등용은 진국이 많다는 것이다(春秋左氏傳, 襄公, 二十之年). 지역감정이나 가문 타령, 당파 성향 등에 구애하지 않는 개방적 인사정책이 진 문공의 성공 비결이었다.

 

패업 이룬 楚 장왕, 내실 다진 秦 목공의 공통점 통치자의 눈과 귀로 직접 겪은 인재, 적재적소 중용

‘오랑캐’라 업신여김을 당하면서도 중원 제패를 꾀한 초나라 장왕은 결국 패업(覇業)을 달성했다. 일개 제후국 군주에 불과하던 진나라의 목공은 중원 한족의 배척에도 불구하고 국력 배양을 이뤄냈다.
그 비결은 손숙오와 백리해라는 유능한 인물의 등용에 있었다.

덩치는 큰데 따돌림을 당한다면? 참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그 이유가 ‘남쪽의 야만국’이라고 하니 더욱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서둘러 문명 개화와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여, 거꾸로 오만한 중원의 제후국들을 정복하고자 분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로 춘추시대 초(楚)나라 이야기다. 초나라는 장왕(莊王) 때에 이르러 명실상부한 중원의 패권국으로 등장했다.

 

중원을 노린 이질적 세력

원래 초나라는 장강(長江) 중류의 비옥하고 광대한 평원(오늘의 후베이성과 후난성 일대)에 자리잡은 나라였다. 그러나 중원(中原)의 한(漢)족과는 민족이 달랐다. 언어가 통하지 않고, 풍속과 습관이 전혀 달랐으며, 정치와 제도도 동떨어져 있었다. 한족은 그들을 ‘남만(南蠻·남쪽의 야만인)’으로 불렀다.

종족 구성도 다양했는데, 알려진 것만도 60여 개에 달한다. 하기야 중원의 한족도 생리적으로는 혼혈민족이고, 문화적으로는 복합국가다. 그래서 한족의 종합적인 확대판이라 할 현대의 중화민족은 외국인을 볼 때 생리적 특징은 거의 문제삼지 않고, 다만 문화를 중시한다.

그런데 황하 유역의 중원과 장강 유역의 초나라 사이에는 인적 왕래와 문화 교류를 가로막을 만한 자연적 장애가 별로 없었다. 날을 이어 해를 거듭하며 동화작용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런데 문명의 흐름은 도로나 하천을 따라 선진에서 후진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초나라는 남방에 위치하면서도 중원과 교통하는 데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다. 또 역대 군주들이 국력 증강을 위한 문화교류에 매우 적극적이었는데 그중 웅거(熊渠)는 군주로 등극한 뒤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 초나라는 중국과 민족을 달리한다. 그들의 칭호와 제도에 구애할 이유가 없다. 앞으로 왕(王)이라 호칭한다.”

당시만 해도 중원에서 주(周) 왕실만이 왕의 칭호를 썼고, 제후국의 군주들은 ‘공(公)’ 칭호에 만족해야 했다. 웅거의 왕(王) 호칭은 매우 이례적이었으나 국내용에 그쳤다.

그후 초의 무왕(武王)이 공언했다.

“지금 중원의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켜 서로 침략하고 학살하고 있다. 우리 초나라는 지금은 소외당하고 있으나 나름의 군대를 가졌다. 그 힘으로 중국의 정치에 참가하련다.”

그러고는 국왕의 칭호를 대외적으로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약소국들은 초나라의 무력을 두려워해 대체로 고분고분했다.

한편 수도를 이전한 이후 주 왕실은 이미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장왕의 ‘소리 없는 3년’

초의 장왕이 즉위한 것은 기원전 613년의 일이다. 집권 후 3년간 아무런 정치적 호령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매일같이 연회를 마련하고는 음악 반주 속에서 만취할 뿐이었다. 그러면서 포고했는데, ‘감히 임금의 행태를 고치도록 간언하는 자가 있으면 용서 없이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운명공동체인 나라 꼴이 빗나가는 것을 보다못해, 죽음까지 각오하고 간언하는 동족 신하가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루는 오거(伍擧)가 궁중으로 들어와서 말했다.

“수수께끼를 말씀 드리고자 참내(參內)했습니다. 새가 언덕 위에 앉아 3년이나 날지도 않고 소리내지도 않습니다. 모두 궁금해하는데 무슨 새일까요?”

장왕이 대답했다.

“그 새는 한번 날아오르면 하늘 높이에 이를 것이다. 한번 소리내면 뭇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 그러니 오거는 그만 물러가라.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잘 알고 있다.”

그후 수개월이 지났으나 장왕의 음락(飮樂)은 더욱 기승을 부릴 뿐 고쳐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소종(蘇從)이 참내하여 간언했다.

장왕 : “그대는 포고를 모르는가?”

소종 : “제 일신을 희생해서라도 전하의 현명을 깨우칠 수만 있다면 본망(本望)입니다.”

   

이때부터 장왕은 음락을 딱 끊고 주위의 간언을 경청하며 나라를 다스렸다. 오거와 소종에게 정치의 실무를 맡기고, 다른 한편 음락과 방종을 부추기며 아부하던 수백명의 간신을 처단했다. 국민은 크게 기뻐했다.

장왕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 그는 집권 직후엔 결코 일을 서둘러 벌이지 않았다. 더구나 새로운 구상으로 개혁에 착수하는 마당에 낡은 중진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 등 구정권의 인적 구성을 답습하지 않았다. 새로 등용할 인재들을 식별하려면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인재들을 자기의 눈과 귀로 직접 고험(考驗)했다.

고급 인재의 등용을 중앙정보부나 인사위원회 등을 통한 천거에 전적으로 의존하면 그렇게 천거된 인재들은 지기지은(知己之恩·자기를 알아준 은혜)을 느끼지 않는 법이다. 더구나 동의하지 않는 사업이나 원치 않은 부서에 인재를 배치하는 짓은 후일 파멸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고려 왕조 말엽에 우왕과 최영이 오판하여 자신들과는 정세 판단이 근본적으로 다른 이성계를 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한 대표적인 예다.

 

개혁 지향과 인재 갈망

내치와 외교는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 국내 개혁이 성공하려면 외교적 안정이 필수적이다. 다른 한편 국제무대에 진출하려면 국내 정치의 내실화와 국력 배양이 선행돼야 한다.

현대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은 이 미묘한 상호의존 관계를 슬기롭게 파악하고 그에 훌륭히 적응함으로써 ‘개혁과 개방’을 통한 현대화 작업에 성공했다. 미국 및 일본과의 외교관계에서 신의를 정립하고, 그것을 당면한 국가 이익에 일치시켰다. 다른 한편 구소련이나 베트남과 빚어진 일시적인 불편한 관계는 감내했다.

춘추시대에는 초나라 장왕이 그와 같은 탁월한 본보기를 남겼다. 장왕의 목적은 중원으로 진출하여 패자(覇者)로 등장하는 것이었다. 이때 라이벌은 진(晉)이었다.

한편 서쪽의 강국 진(秦)의 불신 대상은 진(晉)이지 초가 아니었다. 자연스레 남쪽의 초나라와 서쪽의 진(秦)나라가 사실상의 연맹관계를 이룰 수 있었는데, 그 실현을 위해 장왕은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맞서 중원의 진(晉)은 고립을 피하고자 동쪽의 강국 제(齊)나라와 합작을 꾀했다. 그후 진(晉)은 동남방의 신흥 강국인 오(吳)나라에 접근한다.

이 무렵 장왕은 외교적 안정에 힘입어 국내 정치의 개혁에 주력했는데, 문제는 인재 등용이었다. 하루는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장왕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측근들이 까닭을 묻자 장왕이 말했다.

“예로부터 어진 선비를 스승으로 맞으면 훌륭한 왕이 되고, 똑똑한 사람을 벗삼으면 처세에 걱정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회의에 참석해 들어보면 여러분의 능력이 나보다도 못한 수준이니, 어찌 나라의 흥망이 걱정되지 않겠는가.”

때마침 솔깃한 소식이 전해졌다. 기사(期思)라는 변두리 고장에 지혜로운 선비가 피난 와서 살고 있다고 했다. 이름이 손숙오(孫叔敖)인데, 그가 친척과 마을 사람들을 설득, 동원하여 대규모의 관개·수리 공사를 해서 농업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켰다는 것이다.

장왕은 지체 없이 그를 초청하여 대화하고는 곧바로 영윤(令尹)이라는 최고 관직에 임명, 국정을 맡게 했다. 영윤은 초나라 관직의 특별한 호칭으로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손숙오의 국정 개혁

손숙오가 펼친 행정지도 특징은 아무리 좋은 사업일지라도 서둘러 벌이지 않고, 사업의 필요성을 납득시키고 협력자를 모으기 위해 교육과 홍보를 선행했다는 점이다. 화합정치, 상하일치의 요체다. 쓸데없는 금지와 규제를 없애고, 모든 일이 막힘없이 진행되게끔 풀어주고 완화해 나갔다. 그리하여 인민이 저마다 스스로 적극성을 발휘하며 안거낙업(安居樂業)했던 것이다.

수공업과 상업에 걸쳐 ‘사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평판이 생겨나며 초나라 경제는 눈부시게 성장했다. 공무원은 청렴했고, 기강이 바로 섰으며, 도둑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史記, 循吏列傳)

손숙오는 정치가이자 기술자였고 경제인이었다. 나아가 군사적 감각이 탁월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오늘날 어떤 정치인이 “정치가 전공이라 군사도 모르고 경제도 모른다”고 공언했는데, 이는 태만한 자의 무책임한 발언일 뿐이다.

   

손숙오의 군제(軍制) 개혁에서는 군기의 확립, 점호의 제도화 외에 행군과 작전에 걸친 편제의 개선이 돋보였다. 특히 군주 직속의 전차부대를 두개의 광(廣)으로 나누어 각기 전차 30량씩 배치했다. 량마다 갑사를 뒀음은 물론이고 별도로 보졸 100명을 붙였다. 보졸은 또 두 개의 편(編)으로 구분했는데, 한 개의 편에 50명씩 배당했다. 이는 중원 제후국들의 병제에서 전차 1승(乘)당 75명인 것에 비해 25명이 많은 것이다. 요컨대 구분대 단위로 수적인 우세를 형성했다. 군사 심리에 미치는 영향력도 한결 강했다.

무릇 전투 단위, 특히 본격적 전략 단위의 병력은 기동의 민활성을 해치지 않는 조건에서 양적으로 많은 편이 유리하다. 예컨대 중일전쟁(1937~45) 당시 일본군의 사단병력 표준은 1만2000명이었다. 반면 중국군의 사단병력은 1만명이었다.

중·일 양군의 사단병력이 마주칠 때 일본군 사단장은 싸움의 주도권 장악부터 생각했다. 하지만 중국군의 사단장은 주도권 장악은커녕 상부 단위에 의존해 눈치보기에 급급했다.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패의 귀추는 보나마나 했다. 이 점에서도 손숙오의 군사적 감각은 장제스(蔣介石)보다 우수했다고 하겠다.

손숙오는 유난히 ‘정책의 일관성과 연속성’을 강조했다. 정책이 조석으로 변한다든지 집권자가 ‘말 바꾸기’를 일삼으면 ‘시장 혼란’과 ‘민심 불안’이 초래된다는 것이었다. 손숙오의 내실화를 통한 국정개혁은 마침내 초나라를 부강대국으로 만들었다. 구호뿐인 ‘강성대국’과는 판이했다.

이제 초나라 장왕도 강대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중원의 정치에 개입할 참이었다. 그런데 종전의 패자(覇者)들은 예외 없이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명분으로 삼고 등장했다. 즉 주(周) 왕실을 모시고 받들면서 문화가 다른 오랑캐들의 침략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그러면 초나라도 그 명분론을 따를 것인가. 아니었다.

우선 역사의식이 달랐다. 초나라가 오랜 세월을 두고 중원의 제후국들에 의해 ‘오랑캐’로 간주되어 왔으니 반항 심리가 없을 수 없다. 다음으로 초나라의 강대국화는 결코 주 왕실의 작위 수여나 가문의 여택(餘澤) 혹은 비호 때문이 아니었으며, 오직 자수성가의 개혁 노력 덕분이었다. 그래서 장왕은 최소한 주 왕실과 대등한 관계를 원했다. 한편 주 왕실도 힘의 논리상 초나라 군주의 ‘왕’ 칭호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장왕이 ‘질서 안정’을 구실로 대군을 이끌고 중원으로 출병, 동주의 수도인 낙양 남쪽의 낙수 강기슭에 도달했다. 내친 김에 주 왕실에 대해 위세를 과시하고자 열병식을 거행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깜짝 놀란 주 왕실은 대부(大夫)인 고위 관료 왕손만(王孫滿)을 특사로 파견해 초의 장왕을 위문케 했다. 장왕은 왕손만에게 질문을 던졌다.

“주 왕실의 보물로 정(鼎)이 있다는데 그 크기와 무게를 알려주시오.”

일반적으로 ‘정’이란 고대 중국의 세발솥을 말한다. 여기에서 세발솥은 예로부터 주 왕실에 전승하는 통치 권력의 상징인 국보를 지칭한다. 장왕이 그 크기와 무게를 물은 것은 기성 통치권력의 실체를 경시하며 천자의 권위를 빼앗기 위한 야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왕손만이 대답했다.

“정이라고 하는 국보의 참 무게는 도덕적 권위와 천명(天命)에 있는 것이지, 물품 자체의 중량이 아닙니다. 비록 주 왕조의 덕행은 쇠퇴했다 해도 아직 천명이 뒤바뀔 정도는 아닙니다.”

왕손만의 외교적 수사는 당시의 보편적 윤리가치인 ‘덕(德)’과 ‘천(天)’에 입각한 걸작이었다.(春秋左氏傳, 宣公 3년, 史記, 楚世家) 현대어로 번역하자면, 혁명의 성공은 무력과 경제적 조건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여론의 지지와 객관적 정세의 유리한 배합을 필요로 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장왕은 그 말을 듣자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당시의 국제여론과 역학관계를 고루 감안해 철군령을 내리고 귀국했다. 그렇다고 패권자가 되려는 꿈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요즘도 ‘정립(鼎立)’이란 단어가 쓰인다. 세발솥마냥 세 세력이 맞선다는 뜻이다(일례로 ‘삼국 정립’). ‘정담(鼎談)’이라고도 한다. 세 사람이 둘러앉아 진행하는 좌담을 가리킨다. 셋이 하나 되면 다양성이 보장되면서도 높은 단계의 화합이 기대된다고 한다.

   

세발솥의 크기와 무게

춘추시대 중기 이후, 북방의 황하 유역에는 진(晉)을 중심으로 한 사실상의 중원 연맹이 형성되어 있었다. 다른 한편 장강 중류에는 초(楚)를 맹주로 하는 남만(南蠻) 연맹이 형성되어 양극 대립 시대를 맞고 있었다. 그 남북 세력의 교차지대에는 약소국인 송(宋)·정(鄭)·진(陳)·채(蔡)가 중간지대를 형성했다.

이 약소국 중에서 주제 넘게 남북간의 이른바 ‘조정자 역할’이니 ‘평화의 중재자’ 등을 자처하는 송(宋)나라가 있어 한때나마 주목되기도 했다. 그러나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대국들의 비웃음이나 받을 뿐이었다. 어쩌다 일시적으로 평화협정 체결에 성공한 사례가 발견되기도 하나, 그것은 그 시점에 강대국들이 소강상태를 원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리고 송나라의 대부가 국제적 지명도와 개인적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외교적 조정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鄭)나라를 포함한 대다수 약소국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진이건 초건 강대국들은 덕을 쌓는대신 무력으로 싸우고 있다. 그러니 먼저 위협해오는 편에 복종할 뿐이다. 진과 초는 신의가 없으니 우리도 신의를 지킬 필요가 없다’.(春秋左氏傳, 宣公 11년)

그래서 정나라는 초의 장왕이 대군을 이끌고 가까운 진릉에 와서 패권자의 권위를 내비치며 회맹(會盟)을 소집하자 진(陳)과 함께 참가해 복종했다. 그러나 초군이 귀국하자 다시 진(晉)나라에 붙어버렸다.

분개한 장왕은 정나라의 국도를 포위하여 3개월간 맹공을 퍼부었다(기원전 597년). 정나라는 진(晉)에 원조를 요청했으나 오지 않아 결국 항복했다. 그 직후에 도착한 진군은 정나라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작전회의가 열렸다. 당시의 진나라 야전군 편제는 문공(文公)의 유제를 답습하고 있었다. 즉 상·중·하의 3군으로 구분하되, 중군의 주장(主將)이 3군의 총사령관을 겸했다. 3군 모두 주장 아래 부장(副將)을 두었고, 별도로 각 군에 대부(大夫)·사마(司馬)·법관을 두었다. 이러한 편제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 그것도 문공(文公)처럼 권위 있는 영도자가 총사령관 겸 중군 주장을 직접 맡아본다면 통제에 지장이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엔 중구난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패전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아닌게아니라 총사령관인 순임부(荀林父)는 지원 대상인 정나라가 초군에 항복했으니 도와줄 것도 없게 된 만큼 회군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군의 부장이 즉각 반대하며 나섰다. “조국 진나라는 천하의 패권국인데 지금 철군한다면 그 체면이 서지 않는다”며 어리석게 ‘결사반대’를 외쳤다.

하군의 주장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화평론과 주전론이 격론을 벌이는 가운데, 협동작전의 역할 분배조차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주전파가 감정적인 작전에 돌입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필의 싸움이 남긴 교훈

다른 한편 초 장공은 일사불란하게 전투준비를 갖춘 대군을 이끌고 진군을 공격했다. 진군의 중군과 하군이 붕괴와 패퇴를 일시에 겪으면서 북쪽으로 도망가고자 황하 기슭에 몰려들었다. 병사들이 다급하게 배에 타는 과정의 혼란과 자중지란으로 손해가 대단했다. 이 전역(轉役)은 지명에 따라 ‘필의 싸움(필之戰)’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진군은 패퇴했을망정 전멸하지는 않았다. 사태 진행을 관망하면서 고스란히 살아남은 부대도 적지 않았다.

그후 장왕은 대군을 이끌고 송(宋)나라로 쳐들어가 9개월 만에 송나라의 항복을 받아냈다. 송나라가 고분고분하지 않고 ‘중재자적 역할’을 운위했기 때문인데, 손을 들자 초 진영에 다시 편입시켰다. 약소국이 ‘중재자 역할’을 자임할 때 주의할 선례를 남긴 셈이다.

초 장공이 병사한 후 2년이 지난 기원전 589년, 초나라 주최로 촉나라 땅에서 회맹이 소집됐다. 모두 12개국이 참가했는데, 약소국뿐만 아니라 강대세력인 진(秦)과 제(齊)도 출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었다.

마침내 초 장왕의 중원 제패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물론 초나라와 진(晉)나라의 반목과 쟁패전은 그후에도 계속됐다. 기원전 546년에 이르러 비로소 초·진(楚晉) 양국간에 효과적인 정전협정 이 체결되어 세력권을 양분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단시되던 남만(南蠻) 세력의 중원 진출은 성공했다. 여기서 중원 중화문명의 포용과 확장 능력을 엿볼 수 있다. 패배하더라도 포용, 동화, 확장하는 보편주의 에너지를 평가하게 된다.

   

秦 목공의 서융 제패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진(秦)나라는 중원의 서쪽에 있는 일개 제후국에 불과했다. 비록 동방으로 진출하여 패권국이 되고자 하는 야망이 없지는 않았으나 번번이 제지당하고 말았다. 다만 그 좌절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고 서쪽으로 눈길을 돌려 뒷날의 근심을 없앴고, 나아가 근거지를 강화하고 확대하는 내실화 작업에 성공했다.

이 내실화 작업의 선두 기수가 현명한 군주 목공(穆公)이다. 목공의 노력에 바탕을 두고 전국시대 말엽에 이르러 진시황(秦始皇)에 의한 천하통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원래 진국의 통치계층과 핵심인구는 중원의 한(漢)족 계통이지만, 국민의 약 반수는 이민족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사기(史記)는 ‘진국으로 말하면 융(戎)과 적(狄) 등 이민족의 풍속을 혼합해 가져서 매우 난폭했으며, 인의와 도덕은 뒷전으로 밀려났다’고 썼다.(之國年表) 즉 중원의 한족에 의해 이단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편견을 극복하는 것도 결국은 실력을 배양하기 나름이고, 또 문화적 동화 노력에 좌우될 것이었다.

진나라 목공의 통치술에서 우선 평가할 것은 인재 중시인데, 이는 진나라의 전통으로 뿌리내렸다. 특히 외국 출신 인재를 대담하게 등용한 점이 돋보였다. 백리해(百里奚)의 중용에서 보는 바와 같다.

본시 백리해는 중원의 약소국 우(虞)나라에서 대부(大夫)라는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조건이 나빠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다 우나라가 멸망하자 노예 신분으로 전락해 진(晉)나라에 끌려갔다가 초나라로 도망쳤다. 초나라에서도 다시 잡혀 남녘 바닷가에서 말을 키우는 늙은 목동 신세로 사역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고가 있어 목공한테 온 공손지(公孫枝)라는 우나라 출신 명사가, 백리해에 대해 ‘불우하지만 특출한 인재’라고 찬양했다. 이에 목공이 수소문 끝에 백리해를 찾아내고는 거액의 보상금을 지불하고 그를 모셔왔다. 당시 백리해는 칠십을 넘은 고령자였으나 목공은 몇 마디 말을 나눈 뒤 대번에 중용했다.

백리해의 참모 역할에 힘입어 진나라 목공이 달성한 통치의 업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周) 왕실이 이른바 수도 이전이니 동천(東遷)이니 하면서 버리고 떠난 관내의 잔류민(소위 주여민, 周餘民)으로 하여금 완전한 진인(秦人) 의식을 갖게 하여 핵심 세력으로 삼았다.
▲철제 영농기구의 보급과 관개시설을 확충해 농업생산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켰다.
▲융인(戎人) 거주지역으로 근거지를 확대하고, 민족평등 정책과 새로운 인재등용으로 효과적인 동화정책에 성공했다.
▲농경지 개척을 군사둔전(軍事屯田)과 결합해 상재전장(常在戰場) 태세를 강화했다.
▲토지 소유는 군주가 직접 관할하고 관리를 각지에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다. 즉 분봉제(分封制)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의 통제력을 강화했다.
▲군사적 공훈을 감안한 관리 임명과 ‘신상필벌(信賞必罰)’의 보급으로, 정치 불신을 일소하고 군의 사기를 드높였다.
▲외국 출신 고관의 수효를 본국 출신보다 많게 했고, 또 이 사실을 천하에 홍보했다.

요컨대 진(秦) 목공은 당면한 중원 제패보다, 먼 앞날의 통일천하를 바라보고 국력을 기르는 데 주력했다. 그러자면 유치하고 부질없는 허영심을 버리고, 국정의 내실화 작업에 전념할 필요가 있다. 하기야 목공의 노력은 그의 사후에 일시 흩어지기도 했으나, 뿌리내린 정치제도와 전통적 작풍은 전국시대 중엽 이후에 다시 진작됐다

 

오자서와 합려의 쿠데타 드라마 복수는 나의 것, 야망은 너의 것

파란 많은 오(吳)와 월(越)의 항쟁은 ‘오월춘추(吳越春秋)’로 잘 알려져 있다. 두 나라가 국제무대에 등장하기까지는 외국에서 망명한 인재들의 기여가 컸다. 특히 모순으로 가득 찬 초나라에서 결사 탈출한 책사 오자서(伍子胥)와 오나라의 불우한 공자 합려(闔閭)의 만남은 쿠데타의 결행으로 이어져 난세의 국가 운명을 좌우했다.

초(楚)나라가 오직 중원의 사태 진행에만 신경을 곤두세운 채 내실을 홀시(忽視)하고, 후고(後顧·뒷날의 근심)를 생각하지 않는 동안 장강 하류 동남방에선 이변의 요인들이 자라고 있었다. 곧 신흥 강국인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의 급성장이다.

본시 오나라의 지배계층은 주(周) 왕실의 분기(分岐)이고, 그 백성은 북방의 중원에서 이주해왔다고 한다. 문화적으로 개명된 편이고, 오늘의 장쑤성(江蘇省) 남부와 저장성(浙江省) 북부의 비옥한 평원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편 월나라는 저장성 중남부를 중심으로 발달한 나라인데, 지배계층은 역시 중원에서 이주해왔고, 신민은 한족과 원주민의 혼합체였다. 오와 월은 언어가 동일했으며 다 같이 개명한 편이었다.

그러나 지배계층이 달랐고, 지리적으로도 양립하기 어려웠다. 월이 중원을 엿보려면 앞을 가로막는 오를 없애야 했고, 한편 오가 후고의 염려를 덜려면 월을 쳐 없앨 필요가 있었다. 파란과 곡절이 많은 오·월 간의 상극과 항쟁, 흥망과 성쇠는 ‘춘추(春秋)’와 ‘사기(史記)’에도 상세하게 기술되었지만 따로 ‘오월춘추(吳越春秋)’가 유명하다.

오·월이 국제무대에 등장해 득세한 데에는 내부적 요인 외에 외국에서 망명해온 인재들의 작용이 자못 컸다고 한다. 우선 모순과 원한으로 가득 찬 초나라를 결사 탈출해 오나라로 빠져나온 오자서(伍子胥)와 오나라의 불우한 공자 합려(闔閭)의 만남에서 이야기 전개가 본격화한다. 난세엔 제도의 운영보다 인간의 만남이 더 크게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

하기야 낭만적이거나 계산적인 인간관계 설정이 전혀 불가능한 민족이라면 일찌감치 절망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은 예부터 소심한 일면이 있는 반면에 때가 오면 인재들이 웅비할 줄도 알았다.

 

楚 平王의 과오와 간신의 음모

국가 쇠망의 원인은 ▲군주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왕실의 내분 ▲간신의 발호 ▲충신의 원죄(寃罪), 즉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라는 것이 춘추전국을 보는 중국 사가(史家)들의 통설이다. 춘추시대의 초(楚)나라 평왕(平王) 때도 그러한 모순이 심각했다.

평왕은 교활한 성격을 지닌 이기주의자였으나 바보는 아니었다. 장남 건(建)을 태자로 세우자 그 가정교사 겸 고문 격으로 태부(太傅)에 오사(伍奢), 소부(少傅)에 비무기(費無忌)를 임명했다. 오사는 충신이지만, 비무기는 악독한 아부형 간신이다.

건이 열다섯 살 때 좋은 혼처가 있어 진(秦)나라의 공녀(公女)를 맞아들이기로 했다. 공녀는 천하절색의 미인이었다. 공녀가 도착해 동서남북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이에 평왕은 재빨리 그녀를 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태자를 위해서는 따로 제나라 공녀를 영입했다. 이때 간신 비무기의 진언과 아부가 큰 구실을 했다.

진나라에서 온 공녀가 아들을 낳았으니 곧 평왕의 차남인 진(珍)이다. 이들 새 모자에 대한 사랑이 깊어갈수록, 태자 건 모자에 대한 애착은 식어갔다. 그 기미를 알아차린 비무기는 흉계를 꾸몄다. 우선 태자 건과 그 태부인 오사를 수도에서 격리시켰다. 두 사람을 국경에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 성부로 보내면서 안보를 굳건히 다질 필요가 있다는 구실을 내걸었다. 임지로 가면서 태자 건과 태부 오사는 비무기의 음흉한 모략을 간파했고, 혐오를 금치 못했다.

   

한편 비무기는 태자 바꾸기와 오사를 제거하기 위해 새 모략을 꾸몄다. 이번에는 ‘반란 음모’ 의혹이었다. 표면상 다른 구실로 오사를 중앙으로 불러들였다가 아예 없애버린다는 흉계였다.

비무기는 평왕에게 “건 태자님은 성부에서 강대한 병력을 장악하고 계신 데다 제후들과 자유롭게 교제하고 있는데, 최근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사님과 공모하여 제후의 병력을 빌려 우리 수도를 공략할 음모가 진행 중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고 했다. 평왕은 이 말에 속아 넘어갔다.

원래 인간은 자신을 기준으로 남의 의중을 추측하는 성향이 있다. 평왕도 협작·사기·음모를 즐겨온 사람이다. 평왕은 불안을 참지 못하자 오사를 소환하여 심문했다.

오사 : “국왕께서는 어찌하여 또다시 뱃속 검은 소인의 참언에 넘어가 장남이신 태자마저 의심하는 과오를 거듭하시렵니까.”

직설적 화법이었다. 평왕은 아픈 데를 찔린 데다 노망이 들었던지 즉각 오사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고는 때마침 수도에 용무 연락차 출장을 와 있던 성부의 사마(司馬) 분양(奮揚)을 불러들여 은밀히 명령을 내렸다.

“태자가 불온하니 즉각 없애버려라.”

분양 : “삼가 어명에 따라 처치하겠습니다.”

그러나 분양은 양심상 태자 건을 죽일 순 없었다. 속히 도망가라고 건에게 알려줬다. 건은 황급히 송나라로 망명했다. 일을 그르치자 간신 비무기는 평왕에게 또 귀띔했다.

“태자의 모략 참모이던 오사는 투옥했으나, 오사에겐 두 아들이 있습니다. 모두 현명하다는 평판이니, 그대로 두면 새 음모를 꾸밀 것이고 나라에 몹시 해롭겠습니다.”

오사를 미끼로 두 아들을 불러 처치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평왕은 오사에게 사신을 보내 아들을 수도로 불러오면 살려주겠다고 유혹했다.

오사 : “형인 자상(子尙)은 너무 착하여 부르기만 하면 즉시 상경, 속아 넘어갈 것입니다. 그는 부자가 모두 처단당한다 해도 반드시 올라올 것입니다. 그러나 아우인 자서(子胥)는 성격이 강인하고 앞일을 뚜렷이 내다보기 때문에 절대 상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소용없는 일이라 부르지 않겠다고 했다. 평왕은 더욱 불안해져서 왕명으로 그 형제를 불러보았다. 형제는 의논했다. 자서가 단언했다.

“속아서 상경하면 아버지와 우리는 일망타진당할 것이 뻔하지요. 외국으로 탈출해 복수의 계략을 세웁시다.”

자상 : “아들 된 도리상 같이 죽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봐야 한다. 안 가면 효도에 어긋난다. 나는 간다. 그러나 너는 살아남아 아버님과 나의 원수를 갚아다오.”

자상은 조용히 결박당해 상경했고, 부자는 참살됐다.

 

구사일생의 탈출

오자서는 피눈물로 복수를 맹세하며 도주했다. 우선 태자 건이 있는 송(宋)나라로 갔다. 대우는 좋았으나 송나라에 내란이 일어나 기댈 수 없게 됐다. 다음으로 정(鄭)나라를 찾았다. 호의를 보였으나 약소국이라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정나라는 원래 초나라와 가까워 난처한 처지였다. 그래서 이번엔 초나라와 대치 중인 강대국 진(晋)나라를 찾아갔다.

진나라 군주는 경공(傾公)으로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태자 건 일행을 몹시 위험한 모험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즉 망명객들이 정나라로 다시 돌아가 조용히 내응(內應)을 준비하고 있다가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정나라로 진격할 터이니 그때 부하들을 시켜 성내에 방화하고 성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그러면 현재 초나라의 속국처럼 되어 있는 정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고스란히 태자 건에게 주겠노라고 했다. 그후 합세하여 초나라에 압력을 가해 건을 왕위에 오르게 할 수 있다고 유혹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은 매장된 히틀러(사진)의 시신을 훼손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에서 그와 같은 적에 대한 복수심은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모략에 가담하라는 위험천만한 제의였다. 그러나 당시 태자 건은 정처 없이 떠도는 부평초 신세였고, 망명과 유랑의 역경에 놓여 있었다. 정상적인 환경이 아니다. 가장 허약한 처지에서 가장 강력한 유혹에 직면한 셈이다. 게다가 그 제의를 거절하면 생명이 위협당하는 상황이었다.

오자서도 처지가 마찬가지였으나 결국은 역경에 졌다. 태자 건과 오자서 일행은 적당한 구실을 마련해 정나라로 다시 돌아갔다. 정나라에서는 이들을 종전처럼 보호하고 믿어줬다.

그러나 차질이 생겨 정나라 사직당국이 다시 조사하는 과정에서 태자 건이 진나라 군주에게서 받은 비밀 서신이 발견됐다. 건은 체포되어 살해당했다.

한편 오자서는 건의 어린 아들 승(勝)을 데리고 재빨리 탈출해 오나라로 향했다. 관헌의 추적은 집요했다.

탈출하는 길은 멀고 험난했다. 고갯길 관문에서는 체포당할 뻔하다가 관리들의 욕심을 이용한 속임수를 써서 가까스로 빠져나오기도 했다. 망망한 강을 앞에 두고 강기슭의 갈대밭에서 없는 배를 찾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던지 한 척의 쪽배가 나타났는데 늙은 어부가 노를 젓고 있었다. 사정하니 태워줘서 강을 건넜다. 내릴 때 오자서가 허리에 차고 있던 보검을 풀어 어부에게 주려 했으나 받지 않았다. 오자서는 감동하여 어부에게 머리를 숙여 절하고 헤어졌다.

무릇 중국인은 다양하다. 개중에는 도둑과 협잡꾼도 적지 않다. 그러나 공자나 부처 같은 사람도 반드시 발견하게 된다. 역시 하늘이 낸 위대한 민족이다.

오자서는 도중에 앓기도 하고 구걸도 하면서 가까스로 오나라 서울(오늘의 장쑤성 쑤저우(蘇州) 부근)에 도착했다. 매일매시 죽음과 순간순간 직면해야 하던 험난한 탈출 여정이 끝난 것이다. 오자서의 다음 과제는 처세술의 지혜를 최대한 발휘해 권력에 접근해 복수 준비에 활용하는 일이었다.

 

붙어서 크는 지혜

중국의 속담은 가르친다. “이름 없고 힘 없는 젊은이가 크려면 장래성 있는 유력자에게 의지하고 붙어야 한다”고. 이를 ‘고인발가(퇜人發家)’라고 한다.

중국의 성어(成語)에 ‘세민오치(細民惡治)’란 말도 있다. 하층의 못사는 서민은 치세(治世)를 싫어한다는 뜻이다(韓非子). 잘 다스려지고 평화로우며 질서 있는 세상이라면, 좀처럼 신세를 고쳐 벼락부자가 되거나 감투를 쓰게 될 기회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난세라야 위험하지만 기회도 있다는 발상이다. 실제로 고대 중국은 그러했다. 예컨대 주원장(朱元璋)은 거지 스님으로 난세를 헤엄치다 황제가 되어 명(明) 왕조를 창건했다.

그것도 요령은 단 한 가지, 장래성 있는 유력자에게 붙어서 크는 데 있었다. 그러자면 큰 인물을 만날 운이 있거나 사람을 알아볼 줄 알아야 한다. 그것도 정상급 인물이어서는 안 된다. 본시 기득권자는 무력자에 대해선 흥미도 없고 수요도 없다. ‘장래성’을 가려내는 안목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러면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인 춘추시대로 회귀해본다.

   

오자서는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오나라 수도에 당도했으나 망명객 떠돌이 신세에 불과했다. 가진 것이라곤 복수의 일념과 검증받지 않은 정치적 수완뿐이었다. 복수를 위해서는 힘이 필요한데 왕족 가문도 아니고 더구나 이방인이란 불리한 조건을 어이할 수 없는 터였다. 결국 그는 오나라 왕족 중 ‘장래성 있는 유력자’를 찾고, 현재의 불우한 야심가를 도와주면서 자기의 유용성을 십분 증명해 ‘붙어서 크는 길’을 모색했다. 그 협력대상 인물이 바로 합려(闔閭·당시는 공자 광(公子 光))다.

본디 오자서는 정치에 뜻을 둔 만큼 관상으로 사람의 앞을 내다보는 상술(相術)의 기본을 터득하고 있었다. 상술은 비록 운명의 세부는 알 수 없다 해도 성격의 대강과 운명의 흐름은 짐작케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합려를 보아하니 왕족답게 뜻이 클 뿐 아니라 마음속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야심을 간직하고 있었다. 게다가 폭발 직전의 불평불만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는 표정이었다.

무럭무럭 키워온 야심

공자 광(후일의 합려 왕)은 당시의 오왕 료(僚)와는 사촌 사이다. 그러나 내심 왕위 계승권의 정당성이 혈통으로나 능력으로 보아 자기에게 있는데도 유동적 조건이 불리해 지금 자기가 억울하게 신하노릇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때가 와서 자신이 쿠데타를 단행하거나 혹은 료왕이 중대한 실정을 저지르는 등 상황이 급변하면 주저할 것 없이 스스로 왕위에 오른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로선 료왕이 국정 전반을 다스리고, 공자 광은 군사 작전을 맡아 보고 있었다.

한번은 오자서가 초나라 왕손을 모시는 망명 지식인의 신분으로 료왕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평범한 료왕은 오자서를 접견했을 뿐이지 등용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공자 광은 오자서를 친근하게 대하고 친분을 돈독히 하면서 그의 생활을 여러 모로 보살펴주었다.

물론 오자서는 공자 광의 비상한 판단력을 높이 평가했다. 나아가 쿠데타를 통한 집권 가능성까지 예측했다. 오자서는 광과 친교와 신뢰관계를 돈독히 하면서도 자신은 일단 서울을 떠나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양 은거생활을 하는 척했다. 그러면서도 독서와 사색으로 지략과 쓸모 있는 인재를 찾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루는 산책을 나갔다가 젊은이들의 싸움판에서 보기 드문 사나이를 발견했다. 용감하고도 침착하며, 슬기롭게 참을 줄 아는 의젓한 사나이였다. 한마디로 장사였다. 오자서가 뒤쫓아가 통성명을 하니 전제(專諸)라고 했다. 그도 소문을 통해 오자서를 알고 있었다. 둘은 서로 예의를 지켜 깊이 교제했다. 그런 뒤 공자 광에게도 소개했는데 극진한 우대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史記, 剌客列傳). 대장부는 성심껏 후대하여 의리를 되씹게 하면, 일조유사시에 목숨을 내던지며 보답한다.

오자서는 또 요리(要離)라는 인물을 발견하여 깊이 교제했다. 요리는 용감하고 침착했으며 슬기로웠다. 지혜가 뛰어난 반면 체격은 빈약했으나 그것은 용도에 따라 구애할 바 아니었다. 소문을 듣고 오자서 스스로 예물을 들고 요리를 찾아가 교제를 청했다(吳越春秋).

겉으로는 난세에 보기 드문 용기와 의지를 겸비한 인재를 찾아 교제하는 것이 삶의 보람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공자 광의 쿠데타를 돕는 대행 준비였던 셈이다. 인간은 고독할 때 자기를 알아주고 성의껏 도와준 은의를 잊지 못하는 법이다. 우수한 인재일수록 그렇다. 지혜는 자본이지만 정서는 추진력이다. 이성과 감정을 아울러 갖춘 사람이 참 인재다.

 

오왕 합려의 등장

오자서가 망명한 지 5년 후 초나라에서는 원수인 평왕이 죽고 새로운 태자 진(珍)이 즉위하여 소왕(昭王)이라 칭했다.

그러나 오자서의 복수엔 문제될 것이 없었다. 소왕을 없애고 평왕의 시체를 모독하면 그만이라는 식이었다. 더욱이 소왕은 태자 교체의 불미한 경위 때문에 국민의 신망을 얻지 못했다. 반면 오나라에서는 초나라의 그러한 내부 혼란을 틈타 진격을 개시하자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오자서에겐 공자 광을 오나라 왕으로 등극시키는 쿠데타가 급선무였다. 거사에 방해가 되는 인물이 둘 있었다. 한 사람은 계찰(季札)인데, 료왕과 공자 광의 숙부인 데다 그에 대한 국민의 존경이 사실상 국왕을 능가했다. 또 한 사람은 료왕의 장남 경기(慶忌)인데 용감하고 현명했다. 오자서는 이들을 제거하는 대신 국외로 나가 있도록 계략을 꾸몄다.

   

계찰을 문화사절로 내보내 제후국들을 자유롭게 친선 방문케 했다. 또 경기는 위(衛)나라에 특별 대사로 나가 있게 했다. 그리고 종묘에서 열린 어전회의에서는 중론에 따라 초나라를 침공하기로 의결했다. 다만 총사령관 격인 공자 광은 갑작스러운 신병을 이유로 본대의 출발을 늦췄다. 애당초 료왕이 군사(軍事)를 전적으로 광에게 위임하고, 친위대만 장악한 것은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선발대는 료왕의 친동생인 다른 두 공자가 인솔하고 출발했다. 그러나 선발대는 초군에 의해 퇴로를 차단당해 돌아올 수 없고 연락이 두절된다. 료왕은 완전 고립됐다.

다음으로 오자서는 극비리에 쿠데타 때에 자객으로 쓸 전제를 데리고 와서 공자 광에게 맡겼다. 광은 말했다.

“정통성 있는 내가 오왕이 되어 조국을 부흥시킬 날이 도래하고 있다. 자네만 믿는다. 료왕을 제거해주게.”

전제 : “그동안의 보살핌을 의리로 갚겠습니다. 다만 저에겐 노모와 어린 자식이 있습니다.”

광 : “걱정 말게. 내가 전적으로 봉양과 양육을 책임지겠다. 며칠 후 료왕이 우리집에 올 텐데 그때 단행해주게.”

그 직후 공자 광은 급성 병이 치유됐다고 널리 알렸으며, 료왕을 만나 속히 출정해 두 공자를 구원하겠다고 맹세했다.

이어 료왕에게 완쾌와 출정을 자축하며 사기를 고무할 필요가 있으니, 자택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고 싶은데, 그날 료왕이 잠깐 참석해주면 모두 감분(感奮)할 것이라고 간절한 희망을 밝혔다. 료왕은 출석에 동의했다.

연회가 시작되어 술잔이 돌기 시작하자 광은 잠깐 자리를 떴고, 때마침 전제가 커다란 요리반(盤)을 두 손으로 받들고 공손히 료왕 앞에 놓았다. 전제는 먼저 방향을 가다듬는 솜씨를 보이다가 커다란 생선요리 뱃속으로 손이 가더니, 단도를 꺼내들고 순식간에 식탁을 넘어뛰어 료왕의 가슴 깊이 박았다. 깜짝 놀란 료왕은 도망가려 했으나 전제는 놓아주지 않았다. 일순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근위병들이 달려들어 칼을 들고 전제를 찌르고 치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한편 자리를 떴던 광의 신호에 따라 지하실에 숨어 있던 복병들이 일제히 뛰어나와 저항자들을 모조리 참살하거나 꿇어앉혔다.

드디어 공자 광이 의장병을 갖추고 왕궁에 들어가서 즉위했는데, 이후 그를 오왕 합려(闔閭)라고 불렀다.

반항은 극소수의 일시적 소동으로 끝났다. 사람들은 이날의 소동을 왕위 계승권 문제를 에워싼 왕실의 내분이라고 체념했으며, 합려 왕의 권위와 지명도가 높아 묵인해줬다. 그 근본은 군사력 장악에 있었다.

왕실의 큰어른 격인 계찰이 외유 중 쿠데타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했다. 합려가 자세를 낮추며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왕위를 삼가 계부 앞에 바치겠노라고 했다. 계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국가 유지를 위해 소란을 잠재우기로 결심했다. 합려의 왕위 계승권 주장에 일리가 있으며, 특히 군사력을 완전히 장악한 점을 감안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올 것이 왔다’는 식의 정세 판단인데, 그러한 사후 추인은 앞으로도 유사한 모방 사례 출현에 길을 터놓는 꼴이 되게 마련이다.

 

치밀한 뒤처리

쿠데타의 사후 수습, 즉 거사 후의 국정 안정을 위해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떨떠름한 걱정거리는 죽인 료왕의 장남 경기(慶忌)가 위(衛)나라에 건재하다는 사실이었다. 용기와 지혜를 높이 평가받는 그가 복수와 탈권을 노릴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런 염려를 그대로 두고는 합려 왕의 초나라 정벌은 불가능했다. 위나라에 경기의 신병 인도를 요구해봤자 거부당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해결의 길은 암살뿐이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오자서는 미리 포섭해둔 요리(要離)를 데려왔다. 합려 왕이 대면해보니 작은 키에 풍채도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오자서가 극구 찬양해 마지않는 장사란다.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온갖 것을 희생할 대장부라고 했다.

오자서와 요리가 공동으로 작성한 계략은 치밀하고도 잔인했다. “요리가 시해된 료왕을 위해 복수하고자 합려 왕 암살을 기도한다. 체포령이 내려지고 외국으로 망명하는데, 그의 처자가 체포되어 반역자의 가족이라 해서 공개 처형된다. 요리가 해외를 유랑하며 합려 왕의 죄악을 선전한다. 그런 다음 위나라로 경기를 방문한다. 경기는 요리를 동지로 믿고 등용한다. 복수를 위한 지원군이 조직되면 함께 조국 오나라로 향하는데, 행군 도중 요리가 경기를 암살한다”는 꾸밈새였다.

그후의 사태는 계략대로 전개됐다. 경기는 목숨을 거두면서 부하들에게 포박된 요리를 가리키며, “나름대로 의리를 지킨 용사다. 죽이지 말고 오나라로 돌려보내 그의 오왕에 대한 충성을 천하에 알리도록 하라”고 했다.

그의 지시는 이행됐다. 요리는 하늘을 우러러 자기의 인생을 정리하며 개탄했다.

“나는 무고한 처자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개인적 의리를 지킨다고 대의명분 없이 합려를 위해 일했다. 이는 윤리상 부당하다. 고작해야 새 임금을 위해 옛 임금의 태자를 죽였을 뿐이니 인의(仁義)가 아니다. 그러고도 부귀한 신분이 된다면 천하의 선비들 앞에 면목이 서지 않는다.”

그러고는 자살의 길을 택했다. 요리는 용감하고 의리를 헤아릴 뿐만 아니라 착하고 슬기로운 대장부였다. 다만 그의 가치관은 시대적 제약성을 면치 못했다. 동시에 그의 심리적 갈등은 양심적인 인간이 고민할 수 있는 영원한 모순을 생각케 한다.

한편 새로 즉위한 오왕 합려는 쿠데타의 최대 공로자인 오자서를 행인(行人)에 임명했다. 고대 관명으로, 고문 겸 특사 직함이다. 외국 출신에게 부여하는 최대의 신임이었다. 오자서는 후일 상국(相國)에 올랐는데, 최고 고문인 셈이다. 이제 오자서는 초나라에 대한 복수전 개시의 든든한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복수 또는 보복의 윤리적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전통적으로는 ‘정의의 실천’이고, ‘민족정기의 표현’이라 알려져 있다. 예컨대 소련군은 베를린을 점령하자 적국의 수령 히틀러의 매장된 시체를 다시 파내서는 군홧발로 짓밟고 거듭 불태워 그 재를 하수구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라틴(Latin)의 철인은 관조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복수는 최대의 쾌감이라고 말한다”고. 이 문제에 대해선 다시 언급키로 한다

 

오(吳)·초(楚) 전쟁의 희비 쌍곡선 전략전술로 압승, ‘복수무정’에 자멸 

오(吳)·초(楚) 전쟁의 그늘진 교훈은 실패작으로 그친 오군의 점령 통치다. 복수심으로 불타던 오왕 합려와 오자서는 초나라에 대한 보복에 광분해 참된 승리를 얻지 못했다. 보복심리는 대국적인 건국이념과 국가이익의 차원에서는 결코 바람직한 발상의 기조가 될 수 없다.

복수를위해 쿠데타를 도운 오자서(伍子胥)는 합려왕이 집권하자곧바로 초나라를 칠 준비에 착수했다. 상대는 천하의 강대국이니 전쟁을 하려면 우선 인재들의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었다.

때마침 초나라에서 백비(伯?)라는 사람이 망명해왔다. 그는 자신이 귀족 출신이자 중신의 가문으로 부친이 간신 비무기의 참언으로 평왕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외국으로 탈출해 복수할 길을 모색하던 중 오나라에 오자서가 있음을 알고 의지하면서 협력하고자 찾아왔다고 했다. 오자서는 백비가 자신과 가문이나 복수 성향이 같을 뿐 아니라 정보통이라고 보고 적극적으로 천거했다. 합려왕은 백비를 대부(大夫)로 중용했다.

그러나 오자서는 백비의 가문과 성향, 지식만 중시했지 근원적으로 중요한 ‘성격’을 도외시했다. 이는 큰 잘못이었다. 이 점을 걱정한, 오자서의 친구이자 벼슬이 대부인 피리(被離)라는 사람이 하루는 자기 집에 연회를 벌여 그를 초대해서는 다른 내객들이 돌아가자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건넸다.

피리 : “경은 백비와 퍽 친밀하게 교제하시는데, 무슨 특별한 사유라도 있으신지….”

오자서 : “소생의 부형이 초나라 왕실에 의해 살해당했는데, 백비도 그 부친이 초나라 왕실에 살해당했습니다. 그러니 보복 성향이 동일하고, 다같이 망명해온 객신입니다.”

피리 : “알겠습니다. 그러나 오 선생을 위해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소생의 눈에는 백비가 경계해야 할 인물로 비칩니다.”

오자서 : “어떤 점을 경계해야 합니까?”

피리 : “관상에 의하면, 백비는 사나운 매의 눈매를 가졌습니다. 애당초 의리나 인정, 충성이나 은덕과는 거리가 먼 자아본위, 수단불문의 잔인한 눈초리입니다. 게다가 걸음걸이를 보니 호랑이 걸음 치고도 보폭이 지나칩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뇌물이건 참언이건 서슴지 않고 무한대의 욕심을 추구하리라고 봅니다.”

오자서 : “그렇습니까? 하지만 소생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오자서의 오류는 오직 성향과 가문과 능력에 치중하여 가장 중요한 요소인 성격, 즉 사람됨의 인격구조를 무시한 데 있었다. 후일 그러한 오류 때문에 오자서는 파멸을 자초하고 만다(吳越春秋, 闔閭內傳 第四).

 

능력보다 사람됨이 먼저이거늘…

이른바 ‘성향’이 같으면 그만이라고 하여 ‘개혁 성향’이니 ‘복수 성향’이니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가 나중엔 파벌 싸움과 숙청에 골몰한다. 그런가 하면 ‘가문’이 충성을 보장한다며, 소위 ‘가정 성분’이니 ‘계급 성분’을 스탈린식으로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 결과는 소련 붕괴나 세습독재 파탄일 뿐이다.

반면 미국에선 구두닦이 소년이던 존슨이 대통령이 됐다. 영국에선 보수당과 자유당을 왔다갔다해서 ‘변절 시비’에 휘말렸던 처칠이 수상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렇듯 근본적인 문제는 애국심이 굳건한 성격과 능력에 달려 있다. 결코 피상적 성향이나 가문 따위에 구애해선 안 된다. 더구나 현대의 가문 타령은 무능한 자의 우대 요구에 불과하다. 애당초 상대할 바가 아니다.

   

성격은 행동을 결정한다. 그 결정의 본질은 선택이다. 인생행로의 기로에는 여러 가지 선택지가 아른거린다. 학과의 선택, 직업의 선택, 직장의 선택, 배우자의 선택, 나아가 공격과 방어, 퇴각의 선택 등에 즈음하여 어느 하나의 선택지를 골라잡아야 한다. 그래서 영국의 케인스는 “성격이 운명을 좌우한다”고 가르쳤다.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는 숫제 “성격이 운명이다”고 갈파했다.

그럼에도 오자서가 가문과 성향을 강조해 백비와 같은 간신배를 천거한 것은 중대한 과오였다. 물론 군사 분야에서 ‘노력하는 천재’ 손무(孫武)를 발견해 천거한 것은 특기할 만한 성공작이다.

손무는 성격과 능력 양면에서 걸출한 군사가였으며, 이미 훌륭한 저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손자병법’은 오늘날에도 세계적인 명저로 손꼽힌다. 폭넓고 깊이 있는 전례(戰例) 연구에 입각해 인간 심리와 투쟁의 논리를 집약적으로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 드높은 수양의 경지에 도달해 지저분한 야망에 좌우되지 않았으며 진퇴가 깨끗했다. 합려왕의 대초(對楚) 전쟁 준비와 실전에 걸쳐 오자서와 더불어 공헌한 바가 자못 컸다.

 

오자서와 손무의 협력

오왕 합려는 즉위하자마자 전쟁 준비에 들어가 장비와 보급은 오자서에게 맡기고 전략·전술은 손무에게 위임하다시피 했다. 합려왕 자신은 국력 배양에 힘쓰면서 훌륭한 인재를 등용해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케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의 경청 능력임을 헤아리고 있었다.

오자서의 장비 개선과 보급 창달 노력에서 높이 평가할 것은 수전(水戰) 중시와 함선 개량이다. 우선 그가 설계한 선체(船體)는 재래식과 달리 폭이 좁은 대신 앞뒤가 길고, 뱃머리와 선미가 높았다. 적의 화살 공격과 화전 공세에 의한 피해를 극소화하고 속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선상의 돛대와 키(舵)를 없앴다. 획기적인 착상이었다.

대신 선체를 상하 2개 층으로 나누고, 하층에는 좌우 두 갈래로 노를 젓는 사공을 배치했다. 상층에는 전투병력만 포진했는데, 모든 병사로 하여금 단검을 차게 했다. 사병의 무기 가운데 활과 세모창이 돋보였다. 세모창은 길이가 사람 키의 두 배 이상이었다. 아래층에는 전체 승원의 3분의 2(약 50명)가 배치됐고, 위층에는 전투요원 32명이 대기했다. 각기 맡은 임무가 명백해 거리낌없이 본분을 다할 수 있었다. 기타 육전병력도 혼란 없이 수용하여 신속히 전선으로 수송할 수 있었다(楊泓·李力 文武之道, 315쪽, 伍子胥 水戰兵法, 香港, 1991).

한편 손무는 전쟁이란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며 동맹외교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때마침 박식한 손무에게 솔깃한 정보가 입수됐다. 당시 당(唐)나라와 채(蔡)나라가 표면상으론 초나라의 속국이나 속으로는 초나라 수뇌부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고 있다는 정보였다. 두 나라 군주들은 소국답게 대국을 섬긴다며 초나라를 예방하면서 왕에게 예물을 바친 바 있었다. 그런데 왕족 출신의 대장군 자상(子常)이라는 교양 없는 욕심꾸러기가 귀한 가문의 자신에게도 왕과 똑같은 예물을 바치라고 강요한 것이다. 이외에도 무례한 협박이 많았다고 한다.

손무는 오왕에게 두 나라에 대한 비밀포섭 공작을 벌이자고 건의했다. 합려왕은 동의했고, 물밑 동맹외교는 마침내 성공했다.

손무가 노린 것은 대초 전쟁의 개시에 앞선 군사전략적 포석이었다. 즉 현대 용어로 ‘전략적 기습(strategic surprise attack)’이다. 적이 대비하지 않는 의외의 지점과 방향에서 아군 주력이 진격을 개시함으로써 압승을 거두는 것이다.

이는 독일군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로 진격할 때 독·불 국경선이 아니라 중립국인 벨기에의 영토 통과했던 경우를 방불케 한다. 유사시에 오나라 군대 주력은 비밀 동맹국인 당나라와 채나라의 영토를 통과하는 전략적 우회를 강행하려는 것이었다. 즉 오자서가 준비한 수로를 이용한 함선 수송으로 대군을 투입하려 했다.

오자서와 손무는 나아가 오·초?결전에 앞서 ‘후고(後顧)의 염려’를 없애자고 건의했다. 즉 초나라의 속국이며 오나라에 적대적인 이웃 월(越)나라에 대한 예방적 일격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에 동의한 합려왕이 출병하여 월왕 윤상(允常)에게 통격(痛擊)을 가했다. 비록 월나라를 정복하지는 못했으나 최소한 오·초?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뒤에서 장난질을 하지 못할 정도로 그 전력을 파괴한다는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이에 더하여 오군은 오·초 접경지대에서 소규모의 무력충돌을 자주 일으켰다. 물론 초군을 피폐시키려는 기도가 깔려 있었다. 나아가 초군 수뇌부의 주의를 오·초 접경지대로 이끌어 이를 고착화함으로써 앞으로 실시할 전략적 우회의 기습 효과를 한층 높이려 한 것이다.

한편, 아무리 부패했다 해도 초군 수뇌부가 무위도식만 일삼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오자서와 백비 등이 잇따라 탈출해 오나라로 가서 복수전을 획책한다는 정보를 접하고는 그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했다.

결국 원인이 간신 비무기의 참언과 군신(君臣) 이간의 부정적 작용에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군부의 요청에 따라 비무기와 그 가족 연루자들을 일망타진하고 숙청했다. 또 오자서를 따라 오나라로 망명했던 옛 태자 건의 아들 승(勝)을 비밀리에 설득해 다시 초나라로 귀환케 했다. 그러나 전쟁 준비 차원에서는 그다지 의미 있는 조치가 되지 못했다.

 

백거(柏擧)의 결전

드디어 기원전 506년 겨울, 결전을 위한 대진군이 개시됐다. 오군을 주력으로 당나라와 채나라 군대가 합세한 연합군은 오왕 합려의 호령에 일사분란하게 따랐다. 목표는 초나라 서울인 영(텽).

그러나 동원 가능한 총병력 면에서 초나라가 우세했다. 이에 대해 오나라는 탁월한 전략·전술과 병력의 질적 우세로 맞서 이기려 했다. 우선 오군 주력은 ‘전략적 대(大)우회’를 감행, 동맹 약소국 영토를 통과하여 수로를 타고 대별산(大別山)을 돌아 초나라가 예기치 못한 측배(側背)에 갑자기 출현했다. 남부전선에 전면 포진한 초군의 주력부대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주동적으로 새 북부전선을 형성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오군의 주력은 함선으로 회하(淮河)를 서진하다 그 흐름이 크게 물굽이를 이루는 곳, 즉 회예(淮汭)에 집결한 다음 하선하여 강을 따라 행군, 한수(漢水)의 기슭에 도달했다.

초군 수뇌부는 깜짝 놀라 대책회의를 열었다. 수도 방위를 위해 오군 격퇴가 급선무였다. 총사령관은 부패하고 무능한 영윤(令尹)인 자상(子常)이었으나 부사령관은 군사를 아는 똑똑한 좌사마(左司馬) 심윤술(沈尹戌)이었다.

심윤술의 정세판단에 따르면 당시 초군의 약점은 병력 분산이고 오군의 약점은 전략적 우회에 따른 길고 방만한 보급선이었다. 그러므로 초군은 분진합격(分進合擊) 방식으로 병력을 집중해야 하며 이를 위해 우선 심윤술 자신이 북방을 돌아 그곳 병력을 모아서 오군 함선이 집결해 있는 회예를 화공으로 소각하겠다. 한편 본대는 한수 우안에 포진해 수도를 방어하면서 당분간 단독 출격을 삼가고 자기의 화공 성공을 협공 개시의 신호로 삼아 오군을 합격, 섬멸하자고 제의했다.

뛰어난 작전 구상이다. 총사령관 자상도 처음에는 그 건의에 동의해 심윤술이 북쪽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대기 중 사황(史皇)이란 심복 부하가 자상의 귀에 속삭거렸다.

“심윤술의 작전을 따르면 이기더라도 큰 공은 심윤술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병력도 적지 않으니 화공을 기다릴 것 없이 강을 건너 적군을 칩시다.”

결국 자상은 사황의 유혹에 넘어갔다. 완전한 승리를 위한 조건 형성을 기다리지 않고, 단독 출격을 결심한 것이다. 한수를 건너 진을 쳤다가 소별산과 대별산 사이에서 세 차례나 공격해봤으나 이기지 못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시일이 갈수록 초군은 밀리고 말았다. 11월19일에는 백자산(柏子山)과 거수(擧手) 사이의 평야에서 대진하게 됐다. 이것이 백거의 결전이다.

 

수도를 점령하다

아침에 왕제인 부개(夫槪)가 합려왕을 찾아와서 말했다.

“적의 대장군 자상은 비겁하고 탐욕스러운 놈이어서 도대체 장병 사이에 위신이 서지 않습니다. 사기가 엉망입니다. 그러니 제가 선봉에 서서 자상의 본군으로 뚫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보병이 도망칠 것이고 따라서 전군이 동요할 것입니다. 그때 국왕께서 전군을 들어 공격하세요. 적군 궤멸은 틀림없습니다. 오늘은 제가 선봉에 서겠으니 하명해주십시오.”

   

그러나 합려왕은 혈기가 지나친 모험이라고 보아 허가하지 않았다. 한편 왕제 부개는 이상야릇한 용기에 들떠서 직속 장병에게 외쳤다. “오늘 내가 목숨을 내놓고 분전하면 반드시 적을 격멸하고 초의 서울을 점령하게 될 것이다. 틀림없다. 장병 여러분도 내게 목숨을 바치고 대공을 세우라.”

그러고는 직속부대 5000명을 거느리고 독단으로 돌격을 개시했다. 적군의 붕괴는 예견한 그대로였다. 먼저 적의 보병대가 흩어져 도주하더니 전차대도 방향을 돌렸다. 오왕 합려는 그 광경을 바라보다 승기의 도래를 확신, 전군에 총돌격을 명령했다.

반면 초군은 군사조직이 아니라 오합지졸에서 도망꾼 집단으로 변모했다. 초의 사령관 자상은 퇴각에 도망을 거듭하며 멀리 정나라로 도주하고 말았다. 애당초 부패분자, 욕심꾸러기를 가문만 믿고 총사령관에 임명한 것부터 잘못된 처사였다. 초나라 소왕(昭王)은 장강으로 빠져나가 배를 얻어 타고는 우선 동정호 기슭의 갈대밭에 숨었다.

왕제 부개가 독단적으로 돌격했음에도 합려왕이 승기를 포착해 전군 총돌격을 명령한 것은 전투의 원칙이자 군사의 상식에 부합한다. 본시 유럽의 강대국 군대와 구 일본군은 동일한 싸움터에 투입된 병력의 어떤 일부가 독단이건 우연한 상황에 의해서건 돌격을 이행하면 여타 부대도 함께 돌격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왔다.

한편 구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군대는 인근의 어느 한 구분대가 독단에 의해서나 사전연락 없이 돌격을 시작하면 보고도 모른 체하고 합세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러다 결국은 각개격파 끝에 총체적 패망을 자초했다. 장제스 군대의 속물 장교들은 2500년 전 합려왕의 상식에도 미달한 우매한 무리였던 셈이다.

백거의 싸움에 대한 후일담이 남아 있다. 자상에게 그릇되게 건의했던 대부 사황은 패전을 확인하자 “심윤술의 현명한 계략을 방해하여 전군을 패퇴케 한 책임은 내게 있다”고 뉘우치면서 후미에 남아 싸우다 자상을 대신해 전사했다. 반성할 능력이 있는 사람의 훌륭한 최후였다. 심윤술 자신은 사태가 절망적으로 전개되자 중도에 회군하여 자살함으로써 전사의 길을 택했다.

오군의 추격전은 순풍에 돛을 단 듯했다. 초나라 수도에 가까운 청발천(淸發川)에 이르자 적군이 강을 건널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선봉에 있던 왕제 부개가 추격을 중지시키면서 말했다.

“건너가게 하라, 먼저 건너간 적군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방심한다. 뒤따른 적군은 자기들도 살고 싶다고 도주에 전념하고 싸울 마음이 없어진다. 그러니 적군이 절반쯤 건너갔을 때를 기다려 추격을 개시하면 아군은 최소 희생으로 최대 전과를 거둘 수 있다.”

 

실패작에 그친 점령 통치

부개는 ‘손자병법’을 읽었거나, 아니면 당시의 군사 상식인 경험적 교훈을 집약하면서 벌써 그 지보(至寶)에 이른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군사심리에 대한 통찰력을 갖춰야만 훌륭한 지휘관이 될 수 있는 법이다.

마침내 오군은 백거의 결전에서 승리한 후 10일간의 추격 끝에 초나라 수도 영을 점령할 수 있었다.

오왕 합려와 그의 군대, 그리고 동맹국의 무력은 초나라 수도를 점령하자 모든 것을 전리품처럼 취급했다. 애당초 점령 후 준비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두드러진 것은 정복자의 자세와 보복의 만행뿐이었다.

우선 숙사 분배에 눈독을 들였는데, 왕궁과 공족 및 관료의 저택을 몰수해 오국의 신분을 기준으로 삼고 군공(軍功)을 아울러 감안한다면서 모두 분배했다. 저간에 허영심과 군공 자랑으로 말미암은 불평불만, 심지어 노골적 내분도 적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부녀자 분배에 광분했다는데, 특히 왕후를 비롯한 공족과 중신들의 처첩이 각종 보물과 함께 쟁탈 대상이 됐다.

하기야 오자서의 주요 관심은 복수였다. 부형의 원수로 지목했던 평왕(平王)의 묘소에서 시신을 끌어내어 채찍으로 300번 치고 갖가지 모독을 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소련군이 베를린 점령 후 히틀러의 소각된 시신을 다시 파내서 모독하던 보복 광경을 방불케 한다.

   

나폴레옹은 탁월한 군사가이자 현명한 정치가였다. 그러나 고대 중국의 오왕 합려는 군사에선 초나라를 이겼으나 정치엔 졌다.

이러한 만행을 목격했거나 소문으로 들은 초나라의 민·관·군이 격분해 치를 떨면서 보복과 반항을 위해 결집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국제 여론도 좋을 까닭이 없었으니, 초나라에 대한 동정과 함께 부흥 원조의 방책이 모색되기 시작했다.

오군의 점령 통치는 종국적으로 실패작이었다. 참 정복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항력이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참 승리도 아니었다. 심복을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실패작과 대조되는 뚜렷한 성공작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 적용한 점령정책이다.

미국은 일본을 점령했지만, 말썽 많은 천황제에는 손대지 않았다. 그 대신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시장경제, 사회적으로 인권 옹호와 미국식 생활양식을 보급하고 미일 동맹을 맺어 군사적으로 일본을 보호하면서 평화와 번영을 묵묵히, 그러나 실감 있게 도입·육성했다.

마침내 대다수 일본인으로 하여금 ‘져서 좋았다’는 친미의식을 가다듬게 했다. 나아가 미국은 최소한 100년에 걸쳐 ‘가장 믿을 수 있는 동맹국’을 확보한 것이다.

 

초나라의 저항

한마디로 보복심리란 대국적인 건국이념과 국가이익의 차원에서는 결코 바람직한 발상의 기조가 될 수 없다. 결국 합려왕의 오군도 초국 점령을 지속할 수 없는 중대 난국에 직면하여 부득이 철군하고 말았다. 초나라 저항세력의 재결집과 궐기, 이웃 진나라의 군사적 개입, 월나라의 배후 위협, 왕실의 무원칙한 권력 암투 등 내우외환이 격화된 때문이었다.

하지만 보복은 개인생활과 사회윤리의 영역에선 그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예부터 정직하고 정의감이 강한 사람은 선악·시비의 가름이 명확했다. 부당한 피해를 당하면 반드시 보복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물론 국가질서가 정립된 나라에서는 국법의 집행이 사적 제재를 대행한다.

그러나 사회통념에 의해 극악범죄라고 지탄받는 죄행이 상응한 공법상 처벌을 받지 않고 있다고 관찰되는 날에는 어떤 사태가 초래될 것인가.

해당 범행은 늘어나고, 그에 대한 사적 제재 또한 사회통념에 의해 수긍되면서 증대하게 마련이다. 마침내 국법질서가 문란해져 망국의 나락을 향해 급진전하고 말 것이다. 사회통념이 납득하지 않는 형벌 완화론은 국법질서를 붕괴로 이끈다. 본시 인간의 유전적 요인은 매우 다양하다. 게다가 인격 형성에 작용하는 인간관계와 문화환경은 결코 한결같지 않다.

더구나 한국인의 ‘한(恨)’은 부당한 피해로 말미암은 오랜 원한이 적극적 행동으로 발산되지 못하고 내면에 눌려 사무치면서 전승·만연돼온 탄식 어린 음성적 공격 감정이다.

몽테뉴는 갈파한다. “분노는 압살할 때 내공(內攻)한다”고. 이어서 설명한다. “감정이란 발산시켜 털어놓으면 풀어진다. 그 칼끝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바깥을 겨냥해야 한다.”(Montaigne, Essais, 제2권 제31장)

무릇 응어리진 내향적 잔인성은 본디 순박하며 밝고 깨끗하던 민족성을 좀먹는다. 발산되지 못한 ‘한’의 울적 형태가 세칭 ‘물귀신 근성’이니 ‘지저분한 당파 싸움’ 등으로 타락한다. 우리 겨레는 민족사의 불행을 넘어 슬기로운 새 화합의 길에서 ‘본바탕 되찾기’를 이뤄야 할 것이다(필자, 民性論, 서울, 1982, 샘터사, 제7장).

   

나폴레옹의 지혜, ‘軍政합작’

중국의 현대사 연구자들은 춘추시대의 백거 싸움에 보이는 ‘전략적 대우회’의 성공작을 거듭 높이 평가해 마지않는다. 사실 초군의 주의를 남부전선으로 유인·고착시켜 놓고, 약소 동맹국 영토를 통과해 적군의 북부 측배에 출현, 기습적 승리를 거둔 걸출한 전략은 병법가 손무의 위대한 공적이다.

그러나 손무가 한 일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적아(敵我) 쌍방에 걸친 정치공작과 심리작전을 포함한 점령정책은 오왕 합려의 몫이었다. 그리고 합려는 군사에 이겼으나 정치엔 졌다.

중국의 연구자들은 손무가 구상한 전략적 우회 작전을, 그로부터 2000년 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진출 때 구상한 알프스 산맥 통과에 비교하기를 즐긴다.

나폴레옹은 1796년 5월 대담한 우회 전략을 채택, 알프스 산맥을 통과해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도달함으로써 오스트리아군의 배후에 진출해 기습적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니 손무와 나폴레옹은 군사적 발상의 기조에서 시대의 현격한 차이를 넘어 난형난제 격인 근사성을 느끼게 한다(中國歷代軍事戰略, 北京, 2003, 제1편, 제3장).

그러나 나폴레옹은 탁월한 군사가이자 현명한 정치가였다. 그는 승리 후 점령정책에서 정복자가 아닌 해방자의 자세를 취했다. 그가 1796년 5월 밀라노에서 프랑스의 이탈리아 전선군 장병에게 보낸 훈시문의 일부를 소개한다.

“장병 여러분! 우리는 모든 나라 인민의 벗이고, 특히 지금은 브루투스나 스키피오를 비롯한 모범적 위인들의 후예인 이탈리아 인민의 벗이다. 일찍이 세계를 통일한 대로마제국의 유적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여러 세기에 걸친 압정 때문에 노예화됐던 이탈리아 인민의 마음속에 옛 로마인의 늠름한 기상을 일깨워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승리한 우리들이 맡아서 이룩할 사업이다. 그래야만 우리의 승리는 후세의 역사에 획기적으로 부각될 것이다.”

뛰어난 군사가이자 정치가인 나폴레옹은 만인이 우러르는 사령관인 동시에 적국의 포로들마저 존경하며 따르는 따뜻한 인정가였다. 언어의 마술사이기도 했다.

반면 고대 중국의 손무는 군사적 재능에 있어선 나폴레옹에 손색이 없었으나 정치적 발언권이 없었다. 게다가 합려왕은 스탈린에 가까웠고, 오자서는 복수의 집념자로 돋보였을 따름이다.

 

월왕 구천의 복수와 오왕 부차의 몰락 ‘와신상담’앞에 무너진 ‘2세 심리’의 부조리 합려왕의 뒤를 이어 오나라 군주가 된 부차왕은 후계자의 지위를 확보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 그의 허영심은 아버지의 원수인 월나라 구천왕에게까지 인자하다는 명성을 얻으려 할 만큼 지나친 자아 현시욕으로 이어져 결국 망국을 부채질했다.

오군이 수도를 점령하자 혼비백산한 초나라 소왕(昭王)은 변장·변성명하여 여기저기로 벽지를 찾아 숨어 지냈다. 그런대로 시간이 흐르자 최초의 충격에서 차츰 벗어나 정신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뿔뿔이 흩어졌던 패잔병들도 비록 소단위로 분산된 형태이긴 했으나, 오군의 만행 소식을 듣고는 다시 뭉치려는 기색을 보였다.

하루는 소왕의 소재를 찾아 헤매던 중신 신포서(申包胥)가 남루한 옷을 걸친 채 만나러 와 구국방안을 건의했다. 자기가 서북방의 강대국인 진(秦)나라를 방문해 공식적으로 지원요청을 하고, 그 나라 대군을 빌려 국내에서 재편 중인 저항세력과 합세하고 싶으니 재가해달라는 것이다.

소왕은 즉각 허가했다. 신포서는 증명서류를 휴대했을 뿐 마차 같은 최소한의 준비조차 없었다. 하여튼 신포서는 진나라 수도에 도착하자 진왕 애공(哀公)에게 초국 소왕의 애절한 지원요청을 전달했다.

신포서 : “지금 잔인무도한 오군이 초나라 수도를 점령하여 학살과 약탈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탐욕스러운 오나라가 초나라를 완전 평정해 귀국과 접경하게 되면 귀국에도 적지 않은 외환거리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 위급한 시각에 즈음하여 말씀드리건대, 초나라는 절대로 전 영토를 오나라에 탈취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바엔 자모님의 출신국인 귀국에 헌상하고 싶습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 하루 빨리 출병하셔서 이 영토를 차지해주십시오. 만약 대왕께서 오군을 격퇴한 후 거룩하신 인자함으로 초나라의 존립을 허락해주신다면 초나라는 대대손손 대왕님의 속국이 되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春秋左傳, 定公 四年).

애공 : “말씀을 경청했소이다. 특사께서는 우선 숙소로 가셔서 휴식하시오. 생각해보고 협의한 후 회답하리다.”

신포서 : “소신의 주군께서는 지금 유랑하는 신세로 몸을 편히 쉴 장소마저 없으신데, 소신이 어찌 숙소에서 안락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벽에 기대어 통곡했다. 울음소리가 밤낮을 이었는데 7일간 물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드디어 진나라 애공은 신포서의 일편단심 순정에 감동해 출병을 결심했다. 전차 500승에 병사 약 5만명을 출동시켰다.

 

형세 역전과 오군의 철수

한편 오왕 합려는 이 정보를 듣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런데 충격은 이것 하나에 그치지 않았다. 본국에서도 지급 경보가 날아든 것이다. 이웃한 월(越)나라 윤상(允常) 왕이 오군 유수 병력의 허약함을 틈타 대거 침입해 약탈·교란 행위를 자행했다는 것이다.

오군의 급선무는 당장 눈앞에 출현한 진나라 대군을 격파하는 것이었다. 양군은 직(稷)에서 격돌했는데 오군이 크게 패했다. 이때 선본대를 이끌고 돌진하던 왕제 부개까지 참패했는데 그는 면목이 없었던지 본영으로 복귀하지 않고 본국으로 무단 귀국했다. 게다가 자립해서 왕위에 올랐다. 누군가 국왕이 초나라 원정으로 출타 중이니 왕위를 비워둘 수 없다고 꼬드긴 모양이었다.

더하여 오나라의 동맹국 중 당나라가 초군의 급습으로 수도를 빼앗기고 그 군주가 살해당했다.

또 다른 동맹국인 채나라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궁지에 처한 오왕 합려는 대책회의를 거쳐 귀국을 결정했다. 대신 오자서와 손무, 백의 등을 초나라 땅에 남겨두고 뒷수습을 감당케 했다. 귀국한 합려는 부개를 토벌했다. 쫓기던 부개는 어제의 적이던 초나라로 망명하여 항복했다.

초나라는 그를 받아들여 보호하는 고등 정책을 썼다.

한편 오자서와 손무 등이 지휘한 잔류 부대는 전선을 축소했다. 수도 영을 포기하고 동정호 동쪽의 소택지대를 사이에 두고 적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본국 지리에 밝은 초군이 우회해 화공으로 엄습해왔다. 오군은 거듭 대패해 모두 본국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결국 합려는 초나라의 태반을 일시 점령할 수 있었으나, 전면철수로 마침표를 찍은 꼴이다. 오직 오자서만이 전쟁국면을 이용해 개인적 복수를 했을 뿐 합려는 대전략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원인은 우선 후고(後顧)의 염려를 국내와 국경에 남겨둔 채 원정에 나섰다는 데 있었다. 다음으로는 점령정책과 개입예방 대책의 부재를 들 수 있겠다.

   

그러나 합려가 강대국인 초나라를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었던 위세와 권위의 후광이 국내외에 걸쳐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역할 분담에 바빠 한때 흩어졌던 오자서와 손무 등 두뇌집단(싱크 탱크)이 많은 경험을 쌓고 다시 밤낮으로 일당에 모여 앉게 된 강점이 있었다.

초군이 보복에 나서자 오군은 수륙 양쪽에서 맞받아쳐서 이를 격파했다. 공포에 질린 초나라는 후퇴해 수도를 200km나 떨어진 곳으로 이전시켰다.

한편 북방의 제나라가 비우호적인 동향을 보이자 합려는 정벌 계획을 세웠다. 역시 공포에 질린 제나라는 화친정책으로 전향했다.

그러한 위세를 믿은 합려는 노경에 접어들면서 사치스러운 유락생활에 빠져들었다. 그러는 동안 태자 파(波)가 병사했다. 왕실의 급선무로 새 태자 선정 문제가 부각됐다.

 

후계자 문제와 ‘2세 심리’

계승 순위의 상식으로는 죽은 태자의 동생인 부차(夫差)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합려의 눈은 달랐다. 부차는 ‘우둔한 편이고 착하지도 않다(愚而不善)’고 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신민이 우러러보며 따르지도 않을 것이고, 국가 유지가 곤란하리라고 걱정한 것이다.

합려의 견해는 간단명료하면서도 정확했다. 예나 지금이나 군주 또는 집권자의 자질로는 ‘슬기롭고 착하다’면 그만이다. 경력이니 학력이니 모친이니 업적 등을 따져봤자 ‘지도자 선출의 오류’로 연결될 따름이다. 국민의 불행과 정치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는 것이 고작이다.

하기야 슬기롭지 못하고 약간 ‘우둔한 편’으로 분류되는 사람이라도 자위본능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대처하려 한다. ‘눈치보기’의 능력만은 나면서부터 갖추고 있다. 부차도 부왕이 후계자 지명, 즉 태자 옹립에 관해 자기를 평가절하하고 있다고 느끼자 대책 마련에 나섰다. 부왕을 수시로 만나고 신임도 두터운 오자서에게 아부해 도움을 얻고자 결심했던 것이다.

단순한 부탁이 아니라 자기가 태자가 될 수 있도록 진언해주면 일생 그 은혜에 보답하겠다느니, 나라의 절반을 할애해도 좋다느니 하며 백방으로 오자서의 마음을 흔들었다. 마침내 오자서는 그 결사적인 열의와 정성에 지고 말았다. 오자서야말로 군주나 그 유망주의 호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겪지 않았던가. 하루는 합려왕의 자문이 떨어졌다. 오자서가 부차를 천거했음은 물론이다.

합려 : “부차는 총명하지 못한 데다 착하지도 않다. 그가 국왕으로 등극하면 국운이 위태로울까 걱정이다.”

오자서 : “황공하오나 혹시 성급하게 사려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현명하고 인자하십니다. 그리고 예부터 후계자 선정을 에워싼 분규를 예방하려면 순서를 고려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합려 : “경의 진언을 경청하는 뜻에서 재고해보지.”

합려는 뾰족한 대안도 없는 터라 결국 오자서의 건의를 수용하고 만다.

이 경우 합려의 오판은, 비록 부차에게 부족한 점이 많더라도 오자서를 비롯한 중신들이 호의를 갖고 보좌하면 큰 탈이 없을 거라는 헛된 희망으로 요약된다. 새 군주와 중신 사이의 모순, 중신 상호간의 암투 가능성은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오자서는 2세 후계자의 심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오자서는 부차가 국왕이 되면 그를 천거해준 자기의 은혜를 깊이 명심하여 행동할 것이라는 부푼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2세 심리’라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후계자 경쟁을 뚫고 집권한 2세는 자기의 등극은 자신이 우수하거나 최소한 운세가 좋아서 이뤄진 것이지, 결코 어느 누구의 은혜나 덕분 때문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된다. 이는 권력의 자체 확인, 그리고 집권 후에도 좀처럼 가시지 않는 압박감과 불안감에서 벗어나려는 욕구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심리다. 요컨대 ‘2세 심리’에서 은혜란 명심 대상이 아니라, 망각 대상이 되고 만다. 이러한 심리적 편향을 극복하는 힘은 오직 슬기로움에서 샘솟을 따름이다. 부차는 바로 그러한 지혜가 모자랐다. 합려가 일찍이 걱정한 바와 같다. 그러한 결함이 망국(亡國)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애병필승(哀兵必勝)의 도리

그 무렵 이웃 월나라에서는 국왕 윤상이 죽고, 아들 구천(句踐)이 왕위에 올랐다. 한편 오왕 합려는 이에 편승하여 월나라를 정벌코자 수만 대군을 동원했다. 소식을 듣고 격분한 구천은 오나라를 향해 진군했다. 취리라는 곳에서 양군이 격돌했는데 결과는 오군의 참패였다.

전투의 와중에 월나라의 한 대부(大夫)가 오군의 본영을 습격, 세모창으로 합려왕의 신발을 뚫고 엄지발가락을 잘랐다. 합려는 아픔을 참으며 수도 가까이로 후퇴했다. 겨우 전투대형은 재정비했으나, 부상이 악화된 합려는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그는 새 태자인 부차를 머리맡으로 불렀다.

합려 : “월군이 아버지를 살해했음을 잊지 말아라.”

부차 :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3년 안에 꼭 복수하겠습니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 수도 고소성(지금의 쑤저우·蘇州)을 점령, 옛 치욕을 갚았다. 사진은 쑤저우의 4대 정원 중 하나인 줘정위안(拙政園).

부차는 장례를 마치자 곧 복수전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우선 군사력 강화에 전념하여 병력을 증강했다. 백비(伯?)를 태재(太宰·국무총리)로 임명해 내정을 맡겼다.

그러한 정보를 접한 월나라엔 위기감이 감돌았다. 구천왕은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월나라엔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이른바 가문이니 지방색이니 출신국이니 벼슬·경력에 구애하지 않는 대담하고 개방적인 인사정책 덕분이었다. 예컨대 지능과 통찰력이 뛰어난 범려와 조직 구성에 탁월한 문종은 초나라 출신이다. 또 박식하여 모르는 것이 없고 계획 수립에 유능하다고 알려진 계연은 진(晉)나라 출신이었다. 회의 벽두에 구천왕은 말한다.

“오나라 부차왕이 우리나라를 치고자 전쟁준비에 몰두하고 있다는 정보다. 앉아서 침략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제공격해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 유리하리라 생각한다. 경들의 생각은 어떤가?”

이에 대해 범려는 개전 시기가 적당치 않다고 신중론을 폈다. 현재 적은 아군이 그들의 선왕 합려를 죽였다고 적개심에 불타 일치단결해 있으니, 아군의 선제공격은 적군의 적개심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적 진영에 모순이 발생하고 적개심이 가라앉기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감이 넘치는 월나라 구천왕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는 선수를 쳐야 한다며 출병을 명령했다. 이 작전회의는 한편으로 선제공격론과 다른 한편으로 애병필승(哀兵必勝) 및 모순발생(矛盾發生)을 위한 대기론 등 모든 지혜를 짜낸 것이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국왕의 권위로 이를 밀어붙였으니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원래 선제공격론은 준비로 무준비 상태의 상대를 치고 싸움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희생을 극소화하고 전과를 극대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당시 오군은 이미 패퇴의 혼란을 수습하고 전투대형을 재정비했으며, 오직 전력증강에만 몰두했다. 게다가 국왕의 전사를 복수하려는 단결심과 적개심으로 일치단결했다.

애병필승의 도리는 춘추시대 철학자 노자(老子)가 갈파한 군사 상식이다. 즉 대등한 병력으로 싸울 때는 비장감과 정의감, 분노심 내지 위기의식으로 충만한 측이 이긴다는 것이다(老子, 69장). 철학자도 그토록 군사에 달관했는데, 정치인이 모른다면 말이 되겠는가.

 

생존을 위한 최악의 항복

양군은 부초(夫椒)에서 격돌했는데, 결과는 오군의 대승과 월군의 참패였다. 구천왕은 패잔병 5000명을 수습해 자국 수도에 가까운 회계산(會稽山)에 올라 한숨을 놓으려 했다. 그러나 오군이 곧 추격해와 회계산을 포위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것이다. 구천왕은 범려에게 호소한다.

구천 : “경의 진언을 듣지 않다 이 궁지에 몰렸다. 어쩌면 좋을까?”

범려 : “앞으로 군심(軍心)과 민심(民心)을 얻어 운명을 새로이 개척해야 합니다. 당장은 오나라와 화친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왕에게 특사를 파견해 예의를 높이고 자세는 낮추고 예물을 바치면서 탄원해야 합니다. 만약 오왕이 허용하지 않는다면 대왕께서 몸소 신하가 되고 부인께서 오왕의 비첩이 되겠다고 애원해야 합니다. 그렇게까지 나가면 결국 오왕이 허용할 것입니다.”

월왕 구천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특사의 적임자로 대부(大夫)인 문종을 불러 사명을 설명하고 오왕 부차의 본영으로 보냈다. 문종은 오왕 부차에게 푸짐한 헌상품을 바치면서 구천왕 부처가 신(臣)·첩(妾)이 되길 원하니 항복을 허가해달라고 애원했다. 부차는 용서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나, 옆에 있던 오자서가 부차에게 강한 눈짓 신호를 보내 문종을 일단 자리에서 뜨게 한 후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월나라를 대왕께 주시는 형세입니다. 예부터 하늘의 뜻을 어기면 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부차왕은 특사 문종을 다시 들어오게 하고 “용서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문종이 절망과 낙담 끝에 돌아가서 보고했더니 구천왕은 흥분해서 ‘필사적 반격’으로 인생 최후를 빛내겠다고 외쳤다.

문종은 범려와 거듭 의논했다. 오나라 부차왕의 측근 태재(수상 격) 백비가 부패한 간신이니 그를 이용해보자는 데 합의했다. 구천왕의 묵인하에 문종이 다시 오왕 본영을 찾아갔는데, 이번엔 고귀한 보물과 더불어 동행한 미녀들을 백비에게 고스란히 바쳤다. 백비의 주선으로 다시 오왕을 만날 수 있었다.

“저의 주인 구천을 용서해주십시오. 월나라 왕실의 모든 보물을 헌상하고 스스로 오나라로 가서 신하가 되어 기꺼이 인질 노릇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용서하지 않으시면 모든 보물을 불태우고 처자를 죽인 뒤 결사대 5000명으로 돌격하겠다는데, 그 경우엔 대왕께서 승리하셔도 손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소신은 그 점도 걱정하고 있습니다.”

   

옆에 있던 백비도 말을 보탰다.

“구천이 항복해서 신하가 되겠다니 차제에 인덕을 베푸셔서 천하에 대왕의 명성을 떨치시는 것이 장래를 위한 투자가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러한 사태 진행을 뒤늦게 전해들은 오자서가 달려와서 외치듯 강조했다.

“지금 월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으면 후회막급의 엄청난 사태가 도래할 것입니다. 구천은 현군이고 그 신하 문종과 범려는 뛰어난 양신(良臣)입니다.”

찌푸린 얼굴을 하고 오자서의 말을 듣던 부차왕의 표정에 혐오와 증오의 빛이 완연했다. 드디어 선언했다. “나의 결심은 확고하다. 구천을 용서한다”고. 구체적으로는 구천의 조명(助命)과 월나라의 존속이었다. 조건은 구천이 몸소 오나라 왕실에 와서 신사(臣事)와 인질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부차왕의 그러한 결심은 권력세계의 이른바 ‘2세 심리’ 분석의 제2단계에 해당하는 허영심과 자아 현시욕의 발로다. 아버지의 원수인 적국의 왕에 대해서까지 인자하다는 명성을 천하에 퍼뜨리고 싶은 것이다.

제1단계는 후계자 지위 확보를 자신의 능력과 천운으로 돌리면서 은혜를 망각하는 것이다. 이번은 제2단계다. 제3단계는 거들먹거리는 원로, 공신의 배제(내지 숙청)다. 끝장을 보는 제4단계는 독자적인 신경지 개척의 시도다.

여기서 2단계인 허영심과 자아 현시욕을 평가한다면 한마디로 어리석다. 명성이니 위신은 남이 세워줘야 가치 있는 것이지, 스스로 세워보려고 연출하다간 가련한 멸시나 초래할 뿐이다. 끝내 멸망으로 이어지고 만다.

 

와신상담의 ‘시범 케이스’

오군이 본국으로 철수하자마자 월왕 구천은 항복 조건의 이행에 착수했다. 구천왕은 지능이 우수하고 성질이 각박했다. 따라서 의지력이 강했으며 인내력이 비상했다. 이러한 인격구조라면 반드시 큰일을 해낼 수 있는 법이다.

구천은 문종을 유수로 본국에 남기고 국내정치를 맡겼다. 구천왕 부처는 군사와 병법에 능한 범려를 대동하고 오나라로 갔다. 목표는 전면적인 굴종과 적극적인 봉사로 부차왕의 신임과 안심, 동정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마구간에서 일할 때는 청소까지 즐겼다. 목장으로 옮겨지자 역시 일을 찾아하며 막노동하는 데도 모범을 보였다. 보통 사람들이 꺼리는 불결한 뒤처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부차왕은 감동하고 안심하여 2년 후 구천왕이 월나라에 귀환해도 좋다고 허가했다. 그러나 구천은 마음속 깊이 숨긴 복수의 일념에 불타는 동시에 방심하지도 않았다. “회계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다짐과 함께 평소에 섶나무 침대 위에서 잤다. 또 곰쓸개의 쓴맛을 핥으며 고생한 과거를 되새겼다. 이 유명한 고사에서 유래한 성어가 바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다.

구천은 패전의 아픔을 딛고 국가를 부흥시키기 위해 경제 성장과 인구 증가에 주력했다. 국방·외교 정책은 오국을 자극하지 않는 방향에서 조심스럽게 축소 조정했다.

오나라 군신의 환심을 사고 그들이 경각심을 갖지 않도록 계속 조공·뇌물 공세를 폈다. 부차왕이 궁궐을 증축하고 싶어한다는 소식을 듣자 수천명의 기술자를 동원해 전국의 명목(名木)을 베어 헌상했다. 미녀들을 선발해 예의범절을 가르친 다음 부차왕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때마다 오나라 왕실에서는 오자서가 부차왕에게 간하여 경각심을 환기하고자 애써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오자서를 보는 부차왕의 눈빛은 혐오에서 증오로 변해갔다. 나아가 부차왕은 자신의 위력과 덕망으로 하여 후고의 염려가 없어졌다고 정세를 오판해 북방 진출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요컨대 오나라 부차왕의 꿈은 천하의 패권장악으로 부풀어올랐던 것이다. 필요한 것은 군사적 위력이고, 더하여 대의명분이 요구됐다. 그런데 약소 제후국들은 본시 위세에 눌리고 기회주의에 좌우되니 그다지 문제될 바 아니지만, 라이벌 강대국인 제(齊)나라는 달랐다.

제나라의 왕족과 중신 간에 추잡한 파벌이 형성되어 거듭 국왕이 시해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이는 부차왕으로 하여금 제나라로 출병해 군신(君臣)의 분수를 바로잡고 질서를 회복한다는 춘추시대적 대의명분을 부여하는 꼴이 됐다. 드디어 부차왕은 기원전 488년 제나라 토벌을 위한 동원령을 내렸다.

   

오자서의 비극

오자서는 부차왕의 중원 진출에 반대했다. 배후에 복수를 노리는 월나라라는 후고의 염려를 남겨둔 채 대군을 북방으로 진출시키다간 커다란 변고를 당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부차왕은 이를 듣지 않고 출정하여 대승을 거뒀다. 그후 기원전 486년과 485년에도 다시 중원으로 출병했는데 연전연승이었다. 개선하면 월나라에서 축하의 특사가 찾아오곤 했다. 부차왕은 더욱 자신을 굳히면서 오자서를 불신하고 증오했다.

그후 부차왕은 오자서를 제나라에 특사로 보냈다. 오나라엔 영토적인 야심이 없고 오직 대의명분만이 관심처라며 영향력을 확대할 것, 그리고 제나라의 국정을 현지에서 파악해올 것 등의 임무를 부여했다.

오자서는 제나라로 출발하는 사절단 일행에 자기 아들을 데려가면서 말했다.

“나는 여러 차례 부차왕에게 간언했으나 듣지 않으니, 머지않아 오나라는 멸망할 것이다. 나 자신은 오나라와 운명을 같이할 의리가 있다. 그러나 너에겐 그러한 의리가 없다. 무익한 죽음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가문이라도 존속시키자.”

그러고는 제나라에 가서 그곳의 대원로인 포숙(鮑叔)에게 아들을 맡기고 보살펴달라고 부탁한 뒤 돌아왔다.

한편 백비는 사절단에 붙여둔 밀정에게서 그 사실을 보고받자 얼씨구나 하면서 부차왕에게 밀고했다. 오자서는 통적(通敵)으로 단정됐다. 부차왕이 오자서에게 단도를 보내 자살을 강요했다.

“부차여! 너의 부친의 쿠데타를 도와 즉위시킨 사람은 바로 나다. 너 또한 나의 천거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느냐. 그런데 간신의 말만 듣고 나를 죽이니 배은망덕 아니냐.”

오자서는 격정적인 성격 그대로 과격한 말을 남기고는 자살했다.

그후 기원전 482년, 부차왕이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황지(黃池)라는 곳에 제후들을 회합시키고 숙망의 패주(覇主)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본국에 남겨둔 수비군은 매우 미약했다. 바로 그때였다. 월나라의 구천왕이 전국의 병력을 총동원해 오나라의 후방으로 침입하고는 수도 고소(姑蘇)성을 점령하며 태자와 수장을 죽였다.

 

회계산의 치욕을 갚다

부차왕의 황지 본영에 급보가 도달했다. 부차왕은 그 소식이 널리 알려지면 불리하다고 보아 무고한 보고자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인정머리 없는 이러한 잔인성과 전우애의 결핍은 후일 정세가 불리한 것이 알려지면서 오나라의 사기를 일거에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하여튼 정보를 은폐하는 수법으로 패주 자리에 올라선 부차왕은 급거 회군했다. 그러나 국력은 소진됐고 민력은 피폐했으며 사기는 추락하여 도저히 월군을 이길 수 없는 현실을 알게 됐다. 하는 수 없이 앞으로 월나라의 주권을 존중하겠다는 강화조건을 제시했다.

월군도 귀국한 오군의 주력을 단번에 섬멸할 수 없음을 알고 강화에 응해 일단 본국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2년 후인 기원전 473년 다시 대군을 일으켜 오나라를 침범했다. 오군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붕괴했다. 부차왕은 양산(陽山)에 도피했다가 월왕에게 항복을 받아달라고 애원했다. 월왕 구천은 불쌍하게 여기고 허용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범려가 간했다.

“지난날 회계산의 치욕을 회상합시다. 지금은 하늘이 오나라를 월나라에 주셨습니다. 역사적 교훈을 망각할 수 없습니다.”

강화가 거부되자 부차왕은 앞서 죽은 오자서에게 면목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 월군은 부차를 매장하고 간신 백비를 처단했다(史記, 越王句踐世家).

오나라의 멸망은 후계자를 잘못 선출하면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를 말해준다. 동시에 2세 심리의 부조리가 빚는 비극을 되씹게 한다.

 

범려의 처세, 손자의 병법 ‘시기적절한 퇴진’으로 명철보신(明哲保身)

오군과 벌인 전쟁에서 대승한 월나라의 두 공신은 각기 다른 운명을 맞았다. 범려는 탁월한 처세술로 승승장구한 뒤 은퇴의 시기까지 잘 선택해 영웅으로 남았다. 반면 문종은 자신의 거취를 두고 우물쭈물하다 월왕 구천에게 자살을 강요당했다. 두 사람의 상반된 운명은 난세를 살아가는 처세의 차이에 있었다.

오나라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한 월왕 구천(勾踐)은 대군을 이끌고 계속 북상하여 회하(淮河)를 건너 서주(徐州)에 이르렀다. 그는 제(齊)와 진(晋)을 포함한 여러 제후국에 통지문을 보내 회맹(會盟) 의식을 거행했다. 이때 주왕(周王)에겐 푸짐한 공물(貢物)을 보냈다. 주의 원왕(元王)이 특사를 보내 축하하고 패자(覇者)임을 공인해줬다(史記, 越世家). 이로써 월왕 구천은 ‘춘추5패’의 마지막 주자로서 중국사에 특필대서됐다.

그 성공의 그늘에 있던 양대 공신은 전선군의 총사령관 격인 범려(范?)와 후방을 맡아온 보급 총사령관 격의 문종(文種)이다. 그러나 구천왕은 공신의 안전을 보장하고 그 노후를 보살필 만큼 도량이 크지 못했으며, 의심 또한 많았다. 그래서 범려는 일찌감치 국외로 탈출했고, 문종은 국내에 남아 있다 자살을 강요당하고 말았다.

월나라도 6대 후에는 초나라 군대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만다. 난세를 살아가는 지식인, 처세술과 인생론 내지 진퇴(進退)의 철학에 관심을 갖는 한중일 삼국인들은 오늘날도 당시 범려의 거취와 지혜를 거듭 음미하거나 성찰의 자료로 삼곤 한다.

범려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 상장군(上將軍)답게 당당한 위세를 누리게 됐으나 이에 연연하는 속물이 아니었다. 그는 국가의 장래와 자신의 향후 처세에 대해 깊이 숙고했다.

“정상에 오르면 반드시 내리막이 따른다. 올라가면 떨어지고, 흥하면 망한다. 이는 하늘의 법칙이다. 개인으로 말하면, 드높은 명성은 오래도록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할 바가 못 된다. 번성의 영속을 망상하다간 재난에 부닥뜨린다.

게다가 구천이라는 군주를 보아하니, 비록 고생을 같이할 수는 있으나 안락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성격은 아니다. 이래저래 되도록 빨리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올라가면 떨어지고, 흥하면 망한다

월군이 본국으로 개선한 후 범려는 탈출 준비를 마쳤다. 그러고는 30년에 걸친 군신(君臣)관계의 정을 못 잊어 월왕 구천에게 이별의 서신을 남겼다. 요지는 “이제 군왕께서 설욕을 마치고 패권을 장악하셨으니 소신도 미력이나마 신하된 보좌의 책임을 다하려고 애써온 보람을 느끼게 된 시점입니다. 떠나감을 하량해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구천왕은 그 서신을 읽고 깜짝 놀라 급히 만류하는 답장을 써서 특사를 보냈으나, 범려는 이미 출발한 뒤여서 도로(徒勞)에 그쳤다. 범려는 몸에 지니기 편한 보석 등만 챙기고 모든 가족과 시종을 인솔하고는 배를 타고 해상으로 사라진 것이다.

범려 일행은 산둥반도를 돌아 발해로 북상했다가 제나라에 상륙했다. 당국의 허가를 받아 해안에 정착한 그는 범려라는 이름을 ‘치이자피(?夷子皮)’라 고쳐 부르며 생업을 농사로 전환했다. ‘치이자피’란 말가죽 자루처럼 자유롭게 여러 모로 쓰일 수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연구와 노동을 결합한 협동적인 다각 영농이 성공하여 범려는 수년 내에 호부로 대성했다고 한다(史記, 貨殖列傳).

소문이 전국에 퍼지자 제나라 조정은 범려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그는 재직기간 중 치적을 많이 쌓았다. 그러나 뒤늦지 않게 다시 사직했다. 오래도록 고위직에서 존명을 누려서 좋을 것이 없다는 성찰의 결과였다. 거의 모든 재산을 여러 사업에 기부하고, 수고를 많이 한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사라지듯 정처 없이 떠나간 것이다.

   

그러나 범려는 도(陶)라는 고을에 이르자, “이곳은 교통의 중심지이고 유통기지로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그곳에 멈췄다. 이번엔 상업과 농업을 결합해 역시 수년 내에 천하의 거부로 알려지게 됐다. 후세에 도주공(陶朱公)이란 이름이 부호의 대명사가 된 연유가 여기에 있다.

범려의 인생 행각이 현대에 남기는 경험적 교훈은 무엇인가. 우선 그는 탁월한 정치가이자 군사가였으며 보기 드문 경영자였다. 생각건대 범려는 고대인이기 때문에 비록 현대 교육학의 이념인 ‘전면적 발달’은 아니라 해도 일반 교양에 관심을 갖고 다방면으로 독서하고 사색했던 지성인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는 또한 “공을 이루면 그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이른바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처세 철학을 터득하고 실천한 모범을 보였다. 이 점은 좀더 부연할 필요가 있겠다.

 

주역의 교훈과 중국 지성인

노자(老子)는 난세를 살아가는 선비의 처신을 이렇게 가르쳤다. “공을 이루면 자리를 떠나야 한다. 그것이 하늘의 도리다”고(功遂身退, 天之道. 老子, 9장). 역사적 과제의 수행, 시대적 요청의 해결, 정권의 당면 수요 충족 등이 일단락되면 더는 욕심내지 말고 뒤늦지 않게 물러서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계를 지닌 과도적 존재인 인간답게 자기실현(self-realization)이나 역할기대(role expectation)를 인지할 수 있다면, 그 정도에서 물러나는 편이 슬기롭게 살아남는 길이라는 일깨움으로 해석할 수 있다.

모든 경우에 한계를 헤아리고, 결코 미련을 두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처세의 담백함은 난세에서 살아남는 요체다. 현대 중국의 사학자 한조기(韓兆琦)에 따르면, 춘추시대의 범려가 바로 그러한 노자 사상으로 무장했다는 것이다.

예부터 중국에서는 권세나 지위에 연연치 않는 은퇴의 용기를 사군자다운 미덕이라고 찬양해왔다. 문제는 은퇴의 시기 선택이다. 범려의 경우 ‘장기 집권은 결과가 좋지 않다(久處尊名不祥)’는 행동강령에 충실했다고 한다(韓兆琦, 史記題評, 越世家, 北京, 2000).

이에 대한 ‘반면교사’의 사례를 문종의 실패에서 찾을 수 있다. 범려는 월나라를 떠나면서 문종에게 비밀서신을 보냈다. “쏘아댈 새가 사라지면 좋은 활이라도 사장되며, 사냥할 토끼가 없어지면 사냥개마저 삶아 먹지요. 게다가 월왕의 관상을 보아하니 목이 길고 새 주둥이 꼴이오. 환란을 같이할 수는 있으나, 안락을 함께할 사람됨은 아니오. 귀하도 시기를 놓치지 말고 떠나심이 어떠하겠소?”

그래도 문종은 망설이며 설마 했다. 그러나 나중엔 그도 신병을 가장하면서 출근하지 않았다. 그러자 간신배가 문종의 모반 가능성을 참언했다. 결국 잔인하고 의심이 많은 구천왕은 문종에게 자살을 강요했다.

이런 문종과 대조적으로 부각되는 범려는 오늘날도 중국인들에게 ‘이상적 인간상’으로 경애받고 있다. 슬기롭고 도량이 활짝 트인 큰 인물이며, 천하를 활보한 자유인이라는 것이다. 어디를 가건 큰돈을 벌고 벼슬을 하며, 재산을 아낌없이 뿌리는가 하면, 관직에서 제때 물러날 줄도 알아 난세를 훌륭하게 살아낸 처세술의 능수라는 것이다.

무릇 은퇴는 그 시기가 중요하다. 앞서 범려가 노자의 은퇴사상으로 무장했다는 사학자의 견해를 소개한 바 있다. 여기서는 그가 은퇴의 성패에 있어 으뜸으로 중시한 시기 측정에 주역(周易)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는 점을 첨언하고 싶다. 주역은 춘추시대에 유난히 부각된 제1의 교양서적이었다.

주역은 그 첫머리에서 ‘정상에 오르면 내리막을 바라볼 뿐이니 위험하다(亢龍有悔)’고 가르친다. 마루턱에 이르면 더 욕심내지 말고 내려서는 것이 안전하다고 한다. 범려가 언제나 명심하고 실천한 그대로다.

또한 주역 33괘는 은퇴 문제만 전문적으로 다루면서 일깨워주는 바가 많다. 우선 시기의 선택이 중요하니, 최후의 갈림길에 이르기 전에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다고 한다.

다음으로 은퇴 후에는 자기의 종전 주장이나 권위 등을 전혀 내비치지 말아야 한다(신임 집권자의 불만을 사게 되는 까닭이다). 은퇴한 이상 자신의 안락이나 추구하지 실무에는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 특히 권위 회복의 유혹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 거듭 명심할 바는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범려의 실천은 이 같은 조목들에 어긋남이 없었다.

   

은퇴의 시기를 헤아린 손무

손무는 은퇴 시기를 절묘하게 헤아린 군사가였다. 손무의 초상화.

춘추시대가 낳은 세계적 군사가 손무(孫武)의 인생항로에서 보는 출처진퇴(出處進退) 또한 슬기롭기 그지없다. 특히 은퇴의 시기 측정 면에서는 우러러보일 정도다.

그는 원래 제나라에서 출생했으나 내란에 말려들어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오나라로 단신 탈출했다. 오늘날의 저장성(浙江省) 부춘강변에 정착해 농사를 지으면서도 전쟁에 대한 자타(自他)의 관찰과 경험을 집대성하여 불후의 명저 ‘손자병법’을 남겼다.

근처에 초나라 망명객인 오자서(伍子胥)가 살고 있었는데, 친교가 깊었다. 후일 그의 소개로 오왕 합려를 만나 장군으로 임명되어 초나라를 격파하는 전쟁에서 탁월한 군공을 세웠음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런데 손무는 개선 후 오래지 않아 현직에서 깨끗이 사퇴하고 다시 은거생활로 돌아갔다. ‘자아실현’을 일단락지은 다음에는 뒤늦지 않게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실천에 옮긴 것이다. 이로써 그는 안전할 수 있었고, 정계에 저항감을 남기지 않고 후세에 길이 빛나는 인물이 됐다.

그의 사후 약 100년이 지나 제나라에 남긴 후손 중에서 손빈(孫?)이라는 위대한 군사가가 출현하여 ‘손빈병법’을 썼다. 오늘날도 출신지인 산둥성 혜민현에는 ‘손자 고원(故園)’이 남아 있고, 양측에 손무서원과 손무박물관이 건립되어 관광 명소로 유명하다.

한편 손무가 거주하던 오늘의 저장성 부양시에는 ‘손권고리(孫權故里)’라는 관광지가 보존되어 있다. 삼국지의 영웅 손권의 고향이라고 해서 여러 가지 시설이 있는데, 그 손권이 바로 병법가 손무의 후손이라고 정사(正史) 삼국지는 밝히고 있다.

애당초 권력과 지위에 집착하거나 명성과 평판에 과민하면 비속할뿐더러 위험해진다. 그러한 바깥 치장은 자아실현을 위한 내실화 노력과는 판이하다. 식자들의 빈축을 사다가 만인에게 외면당하게 마련이다. 오늘날 장기집권의 비참한 종장(終章)이라든지, 일부 정치인의 ‘신문과 벌이는 신경전’에서 보는 바와 같다.

 

손자병법의 특징

손자병법의 저작·성립 연대는 춘추시대 후기라고 알려져 있으니 지금부터 약 2500년 전이다. 저간에 세월의 유수에 따라 많은 것이 변천했다. 특히 인류가 인류를 대량 살상하는 군사전쟁과 막다른 생존경쟁의 승패에서 그러했다. 본시 무기가 달라지면 투쟁기법도 변화하고, 전쟁의 형태도 상이해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아득한 옛날인 기원전 770년∼기원전 403년이라는 시대적 제약성을 면치 못했을 ‘전쟁의 예술(The Art of War)’에 관한 저작이 21세기의 오늘날까지 중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거듭 숙독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현대의 통설은 명백하다. 손자병법은 결코 단순한 전쟁기술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우승열패(優勝劣敗)라는 자연현상의 유추에 기초해 사회현상을 간단히 해명하려는 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기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인간성’의 본질적 양상에 대한 예리한 통찰에 입각하여 경쟁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행동의 원리를 찾아보려는 개연적 법칙성의 탐구 노력이다. 이 경우 온갖 사물과 현상은 결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는 ‘만물유전(萬物流轉)’의 철학적 사유가 뚜렷하다.

스스로 변화하고 발전하며 운동할 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관계에서 위상이 바뀌고 상호 전환하는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쟁과 대결과 경쟁에는 언제나 허다한 모순이 존재하며, 대(大)와 소(小), 강(强)과 약(弱), 실(實)과 허(虛), 공(攻)과 수(守), 정(正)과 기(奇) 등 모순이 상호 전환될 수 있다. 형세가 불리하더라도 전화위복을 위해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두뇌를 유연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전쟁은 희생이 크므로 피해야 한다. 하물며 바보천치나 떠벌이처럼 패배할 게 뻔한 싸움을 시작해선 안 된다. 그런데 승패는 체력이 아니라 지혜로 가름된다. 그리고 전쟁의 지혜란, 평시와 달라서 ‘비정상적 수법의 적용’ 즉 궤도(詭道)에 좌우된다. ‘비정상적 수법’이란 단순한 ‘속임수’에 그치지 않는다. 그 이상으로 손자가 중시한 것은 현대 심리학과 행동과학에서 자주 거론하는 ‘동기부여’ 또는 ‘유인 조성(Motivation)’이다. 이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아군측이 의도하는 행동을 취하게 만드는 ‘밖으로부터의 자극’ 즉 유인(誘因)의 제공이다. 바꿔 말하면, 상대방이 이쪽에서 바라는 특정한 행동을 보이게 하는 심리적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쪽의 약점을 부풀려 보여줌으로써 상대방이 다른 함정의 가능성을 고려치 않고 서둘러 덤벼들게 하는 포석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손자는 슬기로운 작전이나 기획은 절대로 어느 한쪽으로 쏠리거나 빠져들지 말아야 하며, 언제나 이해와 명암의 쌍방 가능성을 고루 염두에 둬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기야 그러한 경우의 오판도 군왕의 성격 나름이어서 쉬 고치지 못한다. 따라서 만전을 기하려면 창의성에 신중함까지 지닌 참모진을 붙여둘 필요가 있다. 그래도 측근의 조언을 듣지 않으면 ‘갈 데까지 가는 것’이니, 참모나 고문도 큰 의리가 없다면 제때에 퇴장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손무의 전쟁 연구는 인성(人性) 탐구와 결부됐다고 할 수 있다.

 

‘피전(避戰)’ 아닌 ‘신전(愼戰)’

춘추시대의 손자병법이 전국시대에 더욱 폭넓고 깊이 있게 보급되면서 오늘에 이르는 동안 영향이 컸던 몇 가지 대목을 간추려 본다.

손자병법은 우선 평화를 옹호하고 전쟁을 삼가는 ‘신전(愼戰)’을 기조로 삼는다. 그러나 결코 평화를 구걸하며 비겁도 마다하지 않는 이른바 ‘피전(避戰)’ 사상으로 흐르지 않는다. 전쟁은 막는 것이지 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부 정치인들은 언필칭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전쟁은 피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런 자세는 전쟁의 위협 상황에서는 노예적 굴복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비겁한 심리의 표현에 불과하다. 호전(好轉) 세력 앞에서 중립을 표방하면 동맹의 파괴와 상대방의 멸시를 초래하므로 전쟁을 예방하긴커녕 도리어 그것을 부채질하게 된다.

그러면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우선 억지력을 갖춰야 한다. 손자의 설명을 인용한다면, ‘상대방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방심하는 대신, 우리의 억지력 준비를 자체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無恃其不來, 恃吾有以得也)’는 것이다(九?篇).

다음으로 상대방의 언동에 대해 감정적 대응을 일삼아선 안 되며, 불필요한 자극을 줘서도 안 된다. 손자의 현명한 표현을 인용하면, ‘집권자는 냉정해야 하며, 분노로 개전하지 말아야 한다. 또 장군은 이해득실을 따져야지 감정으로 싸워서는 안 된다(主不可以怒興師, 將不可以툘而致戰…火攻篇).’

셋째로 냉정하고 침착하면, 대치 중이라도 여유 있게 교류와 협상을 진행할 수 있다. 그래야 희생 없이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손자가 갈파한 바 ‘싸우지 않고 적군을 굴복시킨다(不戰而屈人之兵…謀攻篇)’는 것이다. 곧 실력을 배경으로 하되, 경솔하게 상대방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 평화적인 문제 해결이다.

세계사에 특기할 모범적 사례가 동서냉전을 종식시킨 서방측의 ‘평화적 이행’ 전략에서 발견된다. 20세기 중엽 이후 공산주의의 팽창 위협에 따른 동서냉전에 서방측은 소리 없는 군비경쟁과 부분적인 국지전쟁으로 대응했다. 한편 교류와 협상, 원조와 홍보의 방법으로 20세기 말엽에는 소련 붕괴와 동유럽 변혁에 작용함으로써 평화적 문제해결에 성공했던 것이다.

 

전쟁 승패를 가름하는 ‘오사칠계’

손자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기본 요인으로 먼저 오사(五事), 즉 승리의 5가지 결정적 조건을 들었다.

①도(道)란 국론통일과 국민단결이 가능한 정치를 말한다.

②천(天)이란 때를 만나고 기상조건이 좋아야 한다는 것

③지(地)란 지리적 조건

④장(將)이란 지력을 비롯한 신의·인자·용기·엄격 등 지휘관의 자질

⑤법(法)이란 기강이다.

나아가 칠계(七計), 즉 7가지 비교사항을 놓고 거듭 피아간의 실정을 검토하라고 했다.

①집권자의 민심 장악

②장군의 능력

③천시와 지리에 걸친 쌍방의 이해

④명령에 대한 준봉의 정도

⑤병력의 수량

⑥병사의 훈련

⑦상벌의 공정성이다(計篇).

다만 오늘날에 와서는 문명의 변천에 따라, 전쟁이란 종합 국력의 대결이라는 관점이 우세하다. 특히 경제력, 과학기술력, 국제관계와 외교력, 조직과 사상에 걸친 동원력 등이 중시된다. 손자의 고전적 계시와 함께 냉철하게 비교·검토해야 한다.

   

장군의 선용과 수양

유사시에 국가 안보와 국민의 안전을 좌우할 장군의 위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손자는 장군의 자격 요건으로 5가지를 들었다. ①지혜(智) ②신의(信) ③인자(仁) ④용기(勇) ⑤엄격(嚴)이라는 자질 조건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지혜를 첫째로 꼽은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計篇).

옛날의 무지·무능한 왕조라면 우선 ‘체력이 강하고 무예에 능하니 장군감이다’고 했는데, 이는 유치원 수준의 발상에 불과하다. 현대에 와서는 이른바 ‘혁명적 기개’가 크니 등용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자칫하면 모험성의 찬미로 이어지고, 종국엔 패망으로 연결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집권자는 ‘개혁 성향이 같으니 등용한다’는데, 이 경우는 파벌정치에 대한 집착이기 때문에 결국 고립 속의 실패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

손자는 장군의 으뜸 과업으로 ‘적정 파악과 군대 장악이 훌륭하면 백전백승한다’는 유명한 갈파를 남겼다(知彼知己, 百戰不殆…謀攻篇). 적정(敵情) 파악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적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장군은 무자격의 극치’라고 지적했다(用間篇). 또 군대의 장악에 관해서는 사상적 일치와 사병을 돌보는 사랑의 정신에 바탕을 둔 군기 확립을 들었다(行軍篇).

그런데 정세란 고정불변하지 않으며 사물과 현상은 유동적인 명암 양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장군의 슬기로운 정세 판단은 반드시 이해 쌍방을 고루 감안해야 한다(智者之慮 必雜於利害)’고 손자는 가르친다(行軍篇). 게다가 적장과 그 참모진도 가만있지 않는다. 예외 없이 아군의 허약한 점을 탐색하며, 특히 장군의 인간적 약점을 이용하여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다.

일찍이 손자는 ‘군사는 비정상적 방법의 운용’이라 갈파했다(兵者詭道也…計篇). 그 비정상적 방법에는 폭력과 속임수가 포함되며, 동기부여라는 심리학적 수법이 포함된다. 동기부여란 어떤 생활체의 성격이나 체험을 감안하여 그에게 외부로부터 특정한 자극을 주어, 그 대상으로 하여금 우리측이 바라는 행동을 취하게 하는 심리적 조작을 말한다. 물론 손자는 2500년 전 사람이기에 이러한 심리학 소양이 없었다.

그러나 천재적인 군사학자였으므로 탁월한 통찰력으로 그러한 심리학적 현상까지 슬기롭게 고찰할 수 있었다.

손자는 장군들에게 ‘5가지의 위험한 심리적 함정’, 즉 오위(五危)가 있다고 지적한다.

①필사(必死)의 결의는 군인다운 용기이기는 하지만, 한편 장래를 길게 내다보지 못하는 용기의 성급한 표출은 무익한 전사를 재촉하는 꼴이다.

②꼭 살아남으려는 인내심은 역시 지휘진에 요청되는 자질이지만, 한편 생환에 집착하면 비겁자의 우유부단에 흐른다. 우물쭈물하다 포로로 잡히기 쉽다.

③분노에 일어서고 결단이 빠른 것은 군인다운 자질이지만, 한편 장군마저 성급하다면 급기야 적의 모욕적 도발에 직면하여 앞뒤를 계산 못하고 진격하다 함정에 빠진다.

④인격이 결백하고 염치가 고상하다보면 평소엔 우러러보이지만, 전시에는 적의 치욕적 매도에 당면할 때 명예를 지킨다고 격분하다 모략에 걸려들거나 섬멸당하기 쉽다.

⑤백성을 사랑하고 부하를 아끼는 인자한 마음은 윗사람다워 존경받는 인격이지만, 한편 전시에도 사랑에 지나치게 구애하면 승리 없이 지치고 쇠약해져 적의 번거로운 작란에 말려들기 쉽다.

이러한 장군의 위험한 성격적 결함은 평시라면 ‘성격상 모순’에 해당한다. 한자로는 오위(五危)가 필사(必死), 필생(必生), 분속(忿速), 결렴(潔廉), 애민(愛民)으로 표기된다.

무릇 인간을 판단할 때에는 긍정적인 면만 보고 장래의 유용성을 속단할 것이 아니다. 명암 양면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손자병법의 여타 전략·전술 분야는 차후의 각론으로 미룬다.

춘추시대는 낡아빠진 가문과 대의명분에 대한 숭상을 퇴색케 했다. 그 대신 실력 본위의 패권 경쟁, 나아가 민족적 대융합·대교류를 가져왔다. 그 연장선 위에 ‘전국시대’가 도래한다. 난세의 진일보한 ‘자아발견’ 노력이 전개되는 것이다.

 

전국시대 열리다 난세의 개혁자로 떠오른 조양자·문후·서문표 전국시대는 부단한 전란의 시대이자 대변혁의 시대였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살아남기 위한 자유경쟁이었다. 약육강식의 난세에도 사회는 한층 더 발전했으니, 이는 남다른 지혜로 국리민복을 일군 통치자들에 힘입은 바 크다. 총명한 처신으로 외세를 물리친 조양자, 성실하게 인재를 대우한 문후, 미래지향적 개혁으로 후세의 귀감이 된 서문표가 그들이다.

중국역사에서 전국시대(戰國時代)는 통일국가가 명분 없이 분열되어 서로 싸우던 난세로 알려져 있다. 도덕보다는 실력 본위로 갈라서 약육강식이 횡행하던 시대이니, 사회·문화도 보잘것없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현대 중국에서는 그 밝은 측면도 자주 거론된다. 낡은 명분에 구애하지 않는 ‘다양성 속의 자유경쟁’으로 발전이 한층 빨라졌다는 것이다.

그 시대구분도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견해로 엇갈린다. 하나는 기원전 475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라는 주장이다. 다른 견해는 기원전 403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로 잡는다.

그런데 기원전 475년은 명목상 천하를 다스린다는 주(周) 왕조의 분가이기도 했던 강대국 진(晉)나라로부터 그 신하 격인 한(韓)·조(趙)·위(魏) 3가(家)가 반란을 일으켜 주가(周家)를 멸망시키고 영토를 분할한 해다. 또한 기원전 221년은 서북지방의 강대국 진(秦)나라에 의해 천하통일이 이뤄진 해다.

한편 기원전 403년은 쇠락한 주 왕조가 마지못해 한·조·위 3가의 주가 분할이라는 하극상을 합법화하고, 그들 3가를 제후국으로 승인한 해다. 이는 주 왕조가 대의명분과 존재가치를 스스로 포기한 행위였다. 한국사에 비유한다면, 김일성 집단이 스탈린의 허락을 얻어 300만명 이상의 동포를 희생시킨 6·25전쟁을 합리화한 것과 마찬가지다. 과오 자체도 중대하지만, 과오에 대한 공식적 합법화도 이에 못지않게 부당하다는 것이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국제정치와 윤리학의 공통적 견해다. 춘추시대에도 도덕은 문란했지만, 전국시대 이후의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 사학의 통설은 전국시대를 기원전 403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로 구분한다. 이 기간에 부당한 전쟁을 통한 약육강식이 성행하면서 이전 춘추시대 초기에 약 140개, 말기에 약 40개를 헤아리던 제후국의 수는 크게 줄었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진정한 독립을 누린 제후국은 ‘전국(戰國) 7웅’이라 불리던 연(燕)·제(齊)·조(趙)·한(韓)·위(魏)·초(楚)·진(秦)의 7개국뿐이다. 그중 한·위·조가 ‘신흥 3국’에 해당한다. 진(晉)나라를 분할한 이들 3국의 발흥과 공인이 곧 ‘전국시대의 개막’으로 지칭된다.

 

지백의 오판과 패망의 길

원래 진(晉)나라는 주(周) 왕조의 친척 격으로, 영토가 광대했으며 기원전 632년에 남방의 대국 초(楚)를 격파한 후로는 중원의 패권자로서 약 100년 동안 위세를 떨쳤다. 그러다 춘추시대 말기에 와서는 주공(周公)이 벙벙해진 반면에 중신들이 똑똑하여, 그 중 지(知)씨·범(范)씨·중행(中行)씨·조(趙)씨·한(韓)씨·위(魏)씨의 존재가 두드러졌다.

주공의 중대한 과오로는 중신들에게 영토와 군대를 나눠주고 세습시킨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것보다는 재정적으로 대우를 잘해주면서 그들을 원로원 같은 자문기구에 포함시켜야 좋았을 것이다. 쓸모가 있더라도 한 직위에 오래 두지 않고 예비역이 되게 했다가 전쟁 등 유사시에 다시 현역으로 복귀시키는 영국식 방법을 활용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주공에겐 그만한 지혜나 상식이 없었던 모양이다. 고작해야 출공(出公) 때 횡포가 심한 네 중신을 치고자 외세인 제나라와 노나라의 힘을 빌리다가 사전에 모의가 탄로 나는 바람에 출공이 외국으로 도주하다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애공(哀公)이 즉위했으나, 사건 처리를 주도했던 지(知)씨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 당주가 지백(知伯)이란 사람이었는데, 영리하긴 했으나 총명하지 않았고, 인정미가 없어 덕망이 신통치 않았다.

지백은 우선 주공 측과 사이가 좋지 않은 범씨와 중행씨를 쳐 없애고는 그 영토를 병합했다. 다음으로는 나머지 중신인 한·위·조 3씨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우선 한씨에게 사신을 보내 일부 영토의 할양을 요구했다.

이에 분개한 한씨의 당주 한강자(韓康子)는 그러한 요구를 즉각 거절하려 했는데, 재상인 단규(段規)가 침착하고 슬기롭게 간언했다.

   

“두 가지 대응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토 할양을 거절하는 것인데, 지백의 성격은 거만하고 잔인하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를 침공해올 것입니다. 다른 한편 우리가 응낙하면 지백은 우쭐대며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영토 할양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면 거절당하는 경우도 생길 것인데, 지백은 그 나라를 침공할 것입니다. 그런 사태 속에 우리는 재난을 모면하면서 정세의 변화를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일시적인 할양이 좋겠습니다.”

이에 동의한 한강자는 사신을 보내 1만호의 현을 바쳤다. 지백은 기뻐하며 위나라에도 사신을 보내 영토를 요구했다. 위환자(魏桓子) 또한 처음엔 분개해 거절할 생각이었으나, 재상의 건의를 수용해 역시 1만호에 해당하는 1개의 현을 헌상했다. 이에 재미를 붙인 지백은 나머지 조나라에 대해서도 같은 요구를 했으나 이번엔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조양자(趙襄子)는 총명하고 기개 있는 수재였다. 비굴하게 평화를 구걸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똑똑한 가신 장맹담(張孟談)을 불러 의논했다.

“지백이 쳐들어올 텐데 어디를 근거지로 삼아 방어하는 것이 좋을까.”

“일찍이 선군(先君)께서 윤택에게 진양성(晉陽城)을 관리케 하셨습니다. 윤택이 선정을 베풀어 조세를 감면하고 복지 향상에 노력한 결과, 그곳 백성이 윤택을 따르고 조씨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조양자가 알아듣고 곧바로 거처를 진양(오늘의 산시성(山西省) 성도인 타이위안(太原)으로 옮긴 뒤 농성을 준비했다. 현명한 군주라야 현명한 신하를 둘 수 있는 법이다.

 

적 水攻 역이용해 승리

지백은 자체 병력 외에 한·위의 원병까지 동원해 공격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도록 진양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지백은 조군(趙軍)이 탈출할 수 없도록 포위 대형을 넓히는 동시에 진수(晉水)라는 냇물을 막아 성 안으로 흘러들게 했다. 포위 작전은 3년 동안 이어졌으나 조군은 항복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나무 위에서 살며, 나뭇가지에 솥을 매달고 취사하는 형편이 됐다. 식량도 바닥나기 시작했고, 성 안엔 절망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조양자는 고민 끝에 다시 장맹담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장맹담이 새 계략을 말하자, 모든 실행을 그에게 맡겼다.

어둠이 짙어가자 장맹담은 홀로 작은 배를 타고 증명서만 감춰 휴대하고는 한군과 위군의 본영을 차례로 찾아갔다. 한강자와 위환자를 직접 만난 것이다.

“입술이 사라지면 이가 시리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지백이 지금 조군을 치고 있지만, 조씨가 망하면 다음 차례가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백은 사납기 그지없습니다. 만약 모의한 비밀이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는지 상상만 해도 무섭습니다.”

“그럴수록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저만 알고 있고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디데이’는 다음날 밤으로 약속됐다. 장맹담이 순서를 결정하고 돌아오자 조양자는 재배(再拜)로 맞이했다. 다음날 밤 약속시각이 되자, 한과 위의 병사들은 저수지의 둑을 지키던 지백군 보초에게 살그머니 접근해 갑자기 달려들어 쳐 없앴다. 동시에 넘치도록 물을 담은 둑을 터서 난데없는 홍수가 지백 진영을 휩쓸었다. 지백군은 어쩔 줄 몰라 아우성 치며 낭패와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 순간 좌우에서 한군과 위군이 기습공격을 해왔다. 때를 놓치지 않고 진양의 성문이 크게 열리더니 조양자가 정면에서 전력투구식 총공격을 개시했다. 어두운 밤에 혼란을 틈타 순간적으로 감행한 결사적 기습이었다.

당황망조하여 어쩔 줄 모르던 지백군은 여기저기로 몰리다 순식간에 섬멸당했다. 지백 자신도 사로잡혀 겹겹이 묶이고 말았다. 적의 수공(水攻)작전을 역으로 이용한 기습작전의 승리로 역사의 흐름이 바뀐 것이다.

참살된 지백의 두개골은 약간의 가공을 거쳐 승리한 조양자의 술잔으로 둔갑했다. 또 지백의 모든 영토는 조·한·위 3국에 의해 남김없이 분할됐다.

망한 것은 지백에 그치지 않았다. 진(晉)나라 공실의 운명 자체도 문제였다. 정공(靜公)은 무능하여 ‘가문 타령’만 일삼았는데, 영토가 한·조·위에 의해 분할되면서 궁전에서 쫓겨나 서민 신분으로 전락했다.

종가 격인 주(周) 왕실은 이 같은 현실을 수십년 동안 인정하지 않았으나, 결국 기원전 403년에 한·조·위를 제후국으로 공식 승인하고 말았다. 이는 곧 전국시대의 개막을 뜻한다. 대의명분을 완전히 무시한 채 실력 본위의 할거상태에서 서로 싸우는 전란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전국 7웅

나아가 주(周) 왕조가 진(秦)군의 점령으로 멸망한 것은 기원전 256년의 일이다. 그후 진제국의 통일천하(기원전 221년) 수도는 과거에 주 평왕이 ‘수도 이전’을 위해 버리고 떠났던 옛 수도의 터에 다시 정착하게 됐다.

전국시대는 부단한 전란의 시대인 동시에 대변혁의 시대였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살아남기 위한 자유경쟁이었다.

 

개혁의 선두주자, 위(魏) 문후(文侯)

전국 7웅은 진(秦)·초(楚)·제(齊)·연(燕)과 한(韓)·위(魏)·조(趙)를 일컫는데, 이미 본 바와 같이 뒤의 세 나라는 신흥국이다. 신흥국은 급성장이 필요하기 때문에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 기득권층의 반항도 적다. 더욱이 세 나라는 중원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교육·문화 수준이 높고, 교통이 편리했다.

그 선두주자로서 유명한 군주가 위나라의 문후(文侯)다. 장기집권 50년(기원전 446~396년) 동안 유능한 개혁가인 이회(李 또는 이극(李克))·오기(吳起)·서문표(西門豹) 등을 등용해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우수한 지도자만이 우수한 인재를 알아보고 쓸 수 있는 법이다.

문후는 겸손하고 성실하게 인재들을 대우했다. 자신의 체면이나 선입견에 구애하지 않고, 인재들의 견해나 건의를 폭넓게 받아들이는 경청(傾聽)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또 나라 안팎에 걸친 신용을 생명처럼 중시했다. 그의 인품과 성격, 수양에 관한 소문이 퍼지자 외국에서도 많은 인재가 모여들었다.

문후는 특히 외교의 으뜸이 재치가 아니라 신용임을 헤아렸다. 국방 면에서도 평화를 구걸하는 식의 아부로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억지력이 중요함을 인식했다. 우선 그는 과감하고 현명한 개혁정치가인 이회를 중용하면서 개혁의 제1 과제인 기득권층의 세습적 특권과 ‘가문주의’의 횡포를 배제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건 개혁의 최고 반대자는 기득권층이게 마련이다. 다만 그 대응책은 불필요한 ‘과거 뒤지기’로 불안과 불만을 확대하는 데 있지 않다. 새로운 인사정책과 상벌제도에서 무엇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성과주의를 관철하는 데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위 문후는 전국시대의 선두주자로 평가된다.

경제정책에서는 현재의 소강상태에 안주하거나 선심성 행사를 자랑하지 않았다. 불시에 닥칠 수 있는 절량(絶糧)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도록 양곡 비축과 관개시설 개선에 노력을 기울였다. 법제 면에서는 중국 최초의 성문법 제정이 돋보인다. 이 법은 사회 안정에 크게 이바지했다.

 

서문표의 개혁과 미신 타파

위 문후는 새 인재 서문표를 등용하고 그동안 골치 아팠던 난치구인 업(킌)에 부임시킨 뒤 믿음직한 호위대를 거느리게 했다. 서문표가 현지에 도착해보니, 주민들의 얼굴에 생기가 없고 뭔가 겁에 질린 듯한 절망감이 감돌았다. 그는 식자층과 노년층을 모아놓고 물었다.

“이곳 주민이 가장 고통받는 사연은 무엇입니까?”

“마을 앞을 흐르는 저 강 속에 강물 대감, 아니 용왕님이 계셔서 우리는 매년 처녀를 바쳐야 합니다. 그 행사로 주민들이 딸을 빼앗기고 비용까지 대야 해 모두 고통을 당합니다.”

“조금 더 설명해보시오.”

“용왕님이 매년 장마철에 홍수를 조절한답니다. 색시가 마음에 들고 정성이 깃들어야 홍수 피해를 줄이거나 쉰다고 합니다. 그 비용은 관청과 유력자들이 조달하는데 세금으로 할당됩니다. 금액의 2∼3할은 행사비용으로 쓰지만, 나머지는 그들과 무당들이 나눕니다.”

“색시를 바치는 절차는 어떻소?”

“그때가 되면 무당이 가가호호를 돌며 어여쁜 처녀를 찾아냅니다. 데리고 가서는 몸을 씻기고 비단옷을 입혀 대기시킵니다. 사당 같은 것을 지어놓고 그곳에 살게 합니다. 10여 일 후에 예쁘게 장식한 그 사당에 처녀를 싣고 강물에 띄웁니다. 처음엔 떠 있다가 한참 흘러가다 가라앉고 맙니다. 그런 풍습이니 똑똑한 딸을 둔 가정은 깊은 밤에 멀리 도망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이곳의 인구는 줄고 모두 가난합니다. 그렇지만 오랜 구전에 따르면, 색시를 강물에 바치지 않으면 그 뒤탈로 큰 홍수가 밀어닥쳐 집은 떠내려가고 사람들이 빠져죽는다고 합니다. 이래서 이런 풍습을 버리지도 못한 채 고통받고 있습니다.”

   

서문표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그 행사 때 예전처럼 유력자와 무당들이 처녀를 강기슭으로 데려오게 하시오. 그리고 내게 꼭 알려야 하오. 나도 나가서 송별하지요.”

드디어 그날이 왔다. 서문표가 통지를 받고 나가보니, 지방의 유력자와 공무원, 그리고 70세 가까운 무당 할머니와 그 제자들, 구경꾼 등 수천명이 나와 있었다. 서문표가 말했다.

“강물 대감께 바칠 신부를 데려오라. 과연 예쁜지 아닌지 보고 싶다.”

나타난 처녀는 비록 비단옷을 입었으나, 얼굴 혈색이 죽은 사람 같았다. 화장도 소용없고 겁에 질려 여기저기 눈치를 보며 요행이라도 바라면서 치떠는 모습이었다. 서문표는 한번 쳐다보곤 즉각 외면하면서 무당들과 유력자들을 향해 단언했다.

“이 처녀는 어여쁘지 않다. 수고롭지만 무당께서 강물로 찾아들어가 양해를 빌고, 새로운 미인을 찾아내 머지않아 바친다고 말씀해줘야겠소.”

그리고는 즉각 호위병으로 하여금 무당들의 우두머리를 물속으로 던져버리게 했다. 한참 있다가 이번엔 “무당님의 귀환이 늦는 것 같다. 이번엔 제자들이 들어가 재촉해보시오” 하고 주문했다. 그리고는 무당들의 간부 격 제자 세 명을 잇따라 물속으로 던져 넣었다. 서문표는 잠깐 기다리다가 다시 말했다.

“무당님과 제자들은 아무래도 여자들이니 강물 대감이 두려워 양해를 구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이번엔 유력자들이 나서야 할 것 같다.”

즉각 병사들이 달려가 표면에 나서기를 즐기던 유력자 한 사람을 골라 좌우로 부축하며 떠밀기도 하면서 강물 속으로 던졌다. 한편 서문표는 강기슭에서 경건한 자세를 취하며 강물 속에서 올 회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 광경을 경악 속에 지켜보던 모든 유력자와 공무원의 얼굴빛이 청회색으로 변했다. 다음엔 자기 차례가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숨을 공간도 없었다. 서문표가 말했다.

“이제 됐소. 강물 대감이 통신사를 되돌려 보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목격했으니 여러분은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이 일이 있은 후, 업 지방의 뿌리깊은 미신은 완전히 타파됐다. 서문표는 결코 유해무익한 ‘과거사 따지기’ 등으로 조직적 반항을 자초하지 않았다. 오직 그 자신의 지혜와 용기로써 기습적 방법을 통해 미래지향적 개혁을 성공시켰던 것이다.

 

‘둑 쌓기’ 대신 ‘물 빼기’

나아가 서문표는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개혁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이천수백년 전만 해도 세계를 앞장서서 이끈다는 중국에서조차 ‘홍수대책’이라고 할 만한 것은 ‘둑 쌓기’밖에 몰랐다. 그러나 서문표는 획기적 방법인 ‘물 빼기’에 착상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홍수예방 대책을, 농업 증산을 위한 ‘물 대기’, 즉 관개시설에 활용했다.

한국의 경우 약 50년 전의 일이지만, 어떤 공무원은 여의도 수해대책을 걱정하는 질문에 답변하면서 둑 쌓기와 포플러나무 심기 등의 구상을 운위해 식자들을 낙담케 한 바 있다. 현대에도 그런 꼴이니, 이천수백년 전에 물 빼기를 추진한 서문표의 구상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다행히 오늘의 한국은 제방 보수, 수로 굴착, 댐 건설 등과 함께 도로 및 가옥 붕괴 방지 등에 유의하고 있다.

앞으로도 기상조건의 변화, 산업입지 확대, 취업의 다양화, 관광·체육 진흥 까지 감안한다면 또 다른 새 구상이 있을 수 있겠다. 예컨대 경인운하 개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 비현실적인 수도이전론 대신에 충남 서북부 개발에 크게 이바지할 대규모 토목공사로 그곳 주민의 소득을 뚜렷이 향상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옛날 이야기로 돌아가자.

서문표는 물 빼기에 물 대기를 겸한 수로(水路)를 12개나 굴착했다. 힘겨운 공사인 만큼, 동원된 주민 사이에 일시적 불평도 적지 않았다. 서문표는 그들에게 홍수 예방과 농업 증산의 이득을 홍보했다. 장래의 보람을 위해 지금 수고해야만 두고두고 다음 세대와 후손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고 타일렀다. 그 보람은 명백했다. 주민들이 고향에 안거낙업(安居樂業)하면서 풍부한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미신 타파와 경제 발전에 걸친 서문표의 개혁은 성공작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이가 난세의 생존경쟁에 휘말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비한 이기주의에 쏠려 있을 때 자신의 생활미학을 관철하며 슬기롭게 신경지를 개척해나간 훌륭한 지방행정 장관이었다.

그러나 미래지향적 개혁에는 으레 기득권층의 저항이 거세게 마련이다. 게다가 적잖은 주민은 수로 개척에 대해 ‘교통 왕래만 불편하다’며 반대했다. 또한 민생 우선과 부패 퇴치에 노력하다보니 일시적으로 관청의 창고마다 양곡의 비축량이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일부 중앙관료들로부터 ‘유사시 대비 부족’이라는 비판을 듣게 됐다. 그 무렵엔 군주 측근에 붙어 사는 고관대작들에 대한 ‘상납’도 줄어든 것이다.

그와 같은 불평불만 세력이 합세하여 일부 여론의 오해가 초래된다. 간신배가 문후의 귀에 대고 서문표에 관한 험담과 참언을 속삭였다.

걱정이 된 문후는 몸소 현지 시찰에 나섰다. 영접한 서문표가 말했다.

“지금은 전국시대이고, 주공께서는 국가안보는 물론 천하의 패권을 바라보십니다. 그러자면 백성의 정치에 대한 신뢰 확보가 중요하고, 이에 기초를 둔 국민 동원 능력이 필요합니다. 소신은 그 견지에서 미력을 다해왔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서문표는 성두에 올라서서 북을 쳤다. 그러자 주민들은 너나없이 활을 등에 메고 창을 들고는 앞을 다퉈 집합했다. 두 번째로 북을 쳤다. 이번엔 백성이 수레 위에 곡식과 기타 보급물자를 가득 싣고 줄지어 모여들었다.

문후는 그 광경을 직접 보고는 칭찬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후 서문표는 이 무장력을 거느리고 연나라의 침략군을 간단히 격퇴하고 개선했다.

서문표의 개혁과 인격에 대한 명성은 천하에 울려 퍼졌고, 오늘날로 전승되고 있다. 그가 홍수 예방에 노력했던 강의 이름은 산시성의 장하(河)다. 현재도 그곳 주민들은 서문표를 기리며 회고한다. 현대의 개혁파 인물들이 참고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史記, 滑稽列傳 淮南子).

 

전국시대의 영재, 오기(吳起)의 생애 자존·공명·결단의 야심가, 중상모략에 무너지다

위(衛)나라에서 노(魯)나라로, 다시 위(魏)나라로, 마침내는 초(楚)나라로 ‘소속’을 바꿔가며 입신양명을 도모한 오기(吳起). 그는 출세를 위해 아내마저 살해하는 비정함을 드러내며 군사적 명성을 떨쳤지만, 결국 자신을 불신하는 세력에 의해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난세를 열심히 살아보려다 도중하차로 생을 마친 전국시대의 영재가 오기(吳起)다. 그는 병법에 탁월했고 저서도 남겨, 현대에 와서도 손자(孫子)와 병칭되는 오자(吳子), 바로 그 사람이다.

오기의 인생을 놓고, 군사에서는 우수했으나 정치에서는 참사했으니 이를 곧 그의 일변도적 자질로 속단한다면 ‘성급한 간단화’라는 오류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의 정치개혁 구상만 해도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했을뿐더러 통찰력과 짜임새가 돋보인다. 비극은 열악한 환경과 여의치 않은 조건 때문에 초래된 것이다.

그의 인생행로에서 말썽이 된 ‘가정파탄’에 대한 비참한 고민, ‘소속의 변경’을 에워싼 변절 시비도 간단한 논란대상이 아니다. 그의 역경과 인생론, 신조체계를 아울러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인생관에서의 ‘선택’ 문제와 ‘자기실현(self-realization)’ 문제는 21세기에 와서도 모든 지성인의 지속적 관심사로 부각되는 까닭에 따로 언급이 필요할 것 같다.

 

오기의 환경과 성격

오기는 전국시대 초기 위(衛)나라에서 태어났다. 위는 작은 나라였다. 오늘의 허난(河南)성과 산둥(山東)성 사이에 위치해 교통은 편리했으나, 주변 강대국의 멸시 대상이었다. 또 그 통치집단은 무사안일을 능사로 삼는 고식적인 사대주의자들이었다.

오기의 가정은 부유했는데, 부친은 벼슬에 실패하고 상인으로 성공했다. 성공의 비결은 밝은 인사성, 그리고 시비(是非)를 가리지 않는 처세술이었다.

오기는 나서부터 똑똑했으며 독서를 즐겼다. 자존심도 무척 강했다. 성장하면서 권력지향적인 공명심이 각별히 강해졌다. 시비 가리기에 명확했으며 결단력이 비상했다. 자존심과 공명심, 결단력으로 특징지어지는 그의 성격은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게 된다. 또 시비 가리기에 명확한 만큼 신의를 중시하고 행동이 엄격하며 정실에 좌우되지 않았다.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오기는 조국인 약소국 위나라에 계속 붙어 살다가는 뜻을 펼 수 없으며 인생의 보람도 찾지 못할 것이라 통감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문화생활을 즐기며 인재들을 사귄다고 가재(家財)를 탕진했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던 거리의 동년배들은 오기를 좋게 보지 않았다. ‘과대망상’이니 ‘방탕아’니 하는 조소도 들려왔다. 아내의 불평불만도 늘어났고 잔소리도 많아졌다. 결국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오기는 아내와 이별했다. 아내는 후회하며 돌아오길 원했으나 오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오기 자신은 안에서만 강하고 밖에 대해 약하다면 이는 비굴한 노예근성일 뿐 대장부답지 않다고 단정했다. 그래서 자기를 조소하거나 부당하게 시비하던 동년배 30여 명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결국 그는 사건에 대한 추궁을 견뎌내지 못하게 됐다. 오기는 위나라를 떠나 외국에 가서 공부한다는 명분으로 노모와 작별하면서 맹세했다.

“외국에서 대신이나 재상에 오르기 전엔 절대 위나라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아내 죽이고 전쟁에 대승

오기는 먼저 노(魯)나라를 찾아갔다. 대국은 아니지만, 공자의 출생국답게 문화가 발달했다. 유학(儒學)으로 이름난 증자(曾子)의 문하생이 되어 열심히 공부하면서 천하에 대한 시야를 넓혔다. 점차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마침 이웃 제(齊)나라에서 대부(大夫) 벼슬을 하던 인사가 노나라에 와 있었는데, 오기가 인재임을 알자 자기 딸과 결혼시켰다. 오기의 두 번째 아내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어느 날, 갑자기 고향에서 인편으로 속달이 왔다. 노모가 별세했다는 소식이었다. 오기는 비통에 잠겼다가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의 혼잣말이다.

‘고향을 떠날 적에 노모 앞에서 맹세하지 않았던가. 외국에 가서 대신이나 재상이 되기 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그러니 돌아갈 수 없다. 결심은 강해야 한다.’

오기는 아울러 자신이 죽인 동년배 연고자들의 보복 가능성도 감안했을 것이다. 오기는 슬픔을 딛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했다. 스승인 증자가 그 사연을 알고 오기를 불러 고향에 가서 모친상을 치르고 오라고 엄명했다. 유교에서는 효도가 으뜸 윤리다. 하지만 오기는 따르지 않았다. 분노한 증자는 오기를 파문하고 축출했다.

오기는 비통과 비난으로 더욱 고독해졌으나, 더 분발하여 병법 서적과 서류에 파묻혀 연구에 몰입했다. 유학과 멀어진 것을 기회로 법가(法家)의 통치술을 폭넓고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 때를 기다리며 준비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드디어 애타게 기다리던 기회가 찾아와 오기를 향해 미소 짓기 시작했다. 비상시국에 즈음하거나 위기의식이 팽배하지 않고서는 어느 군주도 오기와 같이 경력상 문제가 있는 영재를 즉각 발탁하기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런데 마침 이웃 제나라가 군대를 동원해 노나라를 침공해왔다. 삽시간에 3개의 성을 탈취했는데 노군은 연전연패했다. 병사들의 질에는 별 차이가 없었으나 사령관이 문제였다. “공자 왈”이나 되뇌며 ‘논어’만 읽던 노나라의 평범한 선비들은 제군을 막아내지 못했다.

위기에 처한 노나라 목공(穆公)이 이때 주목한 사람이 바로 오기였다. 지능이 뛰어나고 병법 소양이 풍부하다는 세평이 자자한 데다 오기는 성격과 풍채도 군인다운 특징이 있었다. 목공은 즉각 오기를 장군으로 임용하려 했으나 제동이 걸렸다. 오기의 아내가 제나라 고관의 딸이라니 어느 나라 편이 될지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기는 그 소식을 전해 듣고 깊은 고뇌에 빠졌다.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와 자신의 뜻을 펴고 돌아가신 어머니 앞에서 한 맹세도 지킬 참인데, 아내의 출신지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사라지게 됐으니…. 정신착란이라도 일으킨 듯 고민에 잠긴 오기는 넋을 잃은 상태에서 아내를 살해하고 만다. 그러나 자신의 공명심 때문에 무고한 아내를 죽인 행위는 어느 나라의 도덕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하여튼 노나라 목공은 안보가 위급한 데다 다른 대안도 없으니 오기를 장군으로 임명했다. 전선으로 달려간 오기는 상황을 파악한 뒤 침착하게 작전을 짰다. 우선 적 진영에 특사를 파견해 ‘약소국의 병력으로는 귀군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니 평화를 위한 담판을 하고 싶다’고 했다. 적군의 거만함을 조장하고 방심을 유도한 것이다. 동시에 노군의 전투대형을 바꿔 우익과 좌익에 걸쳐 정예부대를 배치하는 한편, 중앙에 노약자 부대가 모여 있게 했다. 적의 주력을 중앙으로 유도하면서 노군은 측익으로부터 맹공을 개시했다. 결과는 노군의 대승과 제군의 참패로 판가름 났다.

이에 앞서 오기는 그동안 연전연승을 자랑하던 제군의 관용 전법을 연구해뒀다. 본시 인간은 지난날 성공의 비결이라든지, 승리를 이끈 전법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법이다. 노군 사령관의 교체라는 조건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기는 그러한 적군의 심리를 역으로 이용해 대승을 거둔 셈이다.

급기야 노나라는 모든 실지(失地) 회복에 성공했고, 오기의 명성은 삽시간에 천하를 진동시켰다. 하지만 오기는 노나라에서 중용되지 않았고, 도리어 악질적인 중상과 간휼(奸譎)한 참언에 휩싸이게 됐다. 목공을 에워싼 측근의 소인배들이 경쟁적으로 중상과 참언을 일삼았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오기는 장군이 되고자 무고한 아내를 죽인 비정한 사내이니, 어찌 앞날의 충성을 믿을 수 있겠는가

▲원래 노나라와 위나라는 형제국으로 친목관계를 유지해왔는데, 만약 우리가 오기를 중용하면 위나라와의 관계가 파탄에 이를 것이다

▲오기를 중용해서 거듭 성공하면 다른 제후국의 질투심과 경각심을 자극하게 되어 그들이 앞을 다퉈 침범해올 것이다.

 

위(魏)에 바친 충성과 하서(河西) 통치

노나라 목공은 이러한 소인배들의 중상모략에 현혹돼 오기를 불신하고 냉대했다. 이러한 상황을 직시한 오기는 노나라에 더 머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는 탈출을 결심했다. 다음 행선지는 위(魏)나라였다. 때마침 위나라는 문후(文侯)가 집권 중이었는데, 뜻과 그릇이 컸다. 특히 부강국 건설을 위해 천하의 인재를 영입·중용하는 데 적극적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오기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문후는 이미 중용하고 있던 이극(李克)이란 인재를 불러 의논했다.

“오기는 어떤 인물인가?”

“오기는 공명심이 강하고 여자관계가 좋지 않지만, 병법과 용병술에 있어 그 이상의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주공에게 필요한 인재는 유능한 장군이지, 유덕한 공자님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사진)는 잦은 당적 변경으로 구설에 올랐다. 중국 전국시대의 영재 오기도 국적 변경 시비에 휘말렸지만, 그는 뛰어난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인물평을 들은 문후는 오기를 정중히 불러들여 직접 대화를 나누고는 중용키로 결심했다. 문후는 인재 등용에 있어 부질없이 회의를 소집해 자문하거나, 말단 정보원들의 보고서 읽기 등에 구애하지 않았다.

당시 위나라는 중원의 선진지역에 위치하여, 전국칠웅(戰國七雄) 가운데서도 강대한 편이었다. 또 문후는 개혁과 개방의 정치를 표방하면서 인재 등용이 국운을 좌우한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위나라엔 신흥의 기상이 왕성했다. 오기를 중용한 것에서 보듯이 소악(小惡)에 구애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대담하게 등용하고 특별대우와 신임하는 데도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임명식 거행에 앞서 성대한 환영 연회를 마련했는데, 문후의 부인이 직접 술을 따라 오기에게 바치기도 했다. 이어서 융숭한 의식을 거행하고 오기를 정식으로 대장에 임명했다. 전국시대치고도 휘황찬란했던 오기의 본격적인 군사적·정치적 생애가 시작된 것이다. 물론 오기는 감격에 겨워 위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무한충성을 바치고자 결심했다.

문후는 오기를 대장으로 임명하고는 잠시 군정을 파악하게 한 뒤 중대한 명령을 내렸다. 서쪽 강대국인 진(秦)나라에 대한 진공을 명령한 것이다. 목표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하서(河西)지구 점령이었다. 이 지방은 오늘의 산시성(山西)성과 산시(陝西)성의 경계를 흐르는 황허(黃河)와 산시성 서북부를 관통하는 뤄수이(洛水)의 중간지대인데, 그동안 위진 양국의 군사적 충돌이 빈번했다가 당시는 그 대부분이 진군의 점령하에 놓여 있었다. 진나라의 중원 진출 근거지 격이고, 위나라에 최대의 위협을 주는 곳이기도 했다.

오기는 위군 주력을 이끌고 진격을 개시해 2년에 걸쳐 적국의 5개 성을 함락시키며 하서지구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오기 병법의 요체는 적군 사령관의 심리 및 생태 파악이고, 다른 한편 아군의 군심 장악이다. 이는 슬기로운 통찰력과 크나큰 영도력을 전제로 한다.

기뻐한 문후는 새로운 행정구역으로 하서군을 설치하고는 오기를 태수로 임명했다. 군사와 더불어 정치도 일임한 것이다. 정치에서는 청렴의 본보기를 말없이 실천하면서 ‘변법(變法)’이라는 개혁을 단행해 사회 기풍을 신뢰와 화합 위주로 일신했다. 경제에서는 이른바 ‘지력지교(地力之敎)’를 펴나가 지방 실정에 맞는 개발정책으로 세금을 줄이면서 민생을 향상시켰다. 군사에서는 ‘무졸(武卒)’이라는 상비군을 창설해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는 동시에 그 가족들을 따뜻이 보살폈다.

오기는 일상생활에서 특권층 행세를 하지 않았고, 사병과 고락을 같이하며 검소했다. 언행이 자연스럽고 명확하며, 실정을 빨리 이해해 부하들이 우러러 봤다. 오기의 하서지구 통치 기간은 약 20년에 달하는데, 당시의 모든 기록과 문헌이 그를 찬양하고 있다. 그는 몸소 실천하는 모범을 통해 장교와 하사관에게 ‘부하 사랑’을 교육하기도 했다. 다음과 같은 일화도 전해진다.

한번은 한 병사가 종기로 고통을 겪는 안타까운 광경을 발견했다. 오기는 주저하지 않고 다가가 입으로 고름을 빨아냈다. 병상에 있던 병사의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 통곡했다. 이웃이 타일렀다.

“당신 아들은 병사에 불과하지만, 오 장군께서 친절하게 고름까지 빨아내 주셨는데, 감사 대신 통곡이 웬일이오?”

병사의 모친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이전에 오 장군이 그 애 아비의 고름을 빨아낸 일이 있었지요. 그러자 감격해서 오 장군을 위해 생명을 바친다고, 전선에 나가서는 형세가 불리해도 후퇴하지 않고 싸우다 전사했어요. 이번에는 아들까지 그렇게 되겠으니 슬퍼 우는 거요.”

 

야릇한 ‘2세 심리’와 탈출 구상

그런데 오기를 등용하고 신임하던 명군 문후가 세상을 떴다. 후계자는 무후(武侯)였는데 나이가 어렸다. 오기는 무후의 경험 부족을 고려해 간언과 건의를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판단은 ‘2세 심리’를 모르는 오판이었다. 2세 또는 후계자는 경험담이나 잔소리를 싫어한다. 아울러 오기 또한 인간이니 때로는 대상에 대한 심리적 통찰에서 실책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무후는 누나인 공주를 오기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는데, 오기는 이를 거절했다. 여복이 없다고 믿는 자학심리 같은 것이 의식의 심층에 자리잡은 데다, 공주가 가문만 믿고 남편을 업신여기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자존심이 손상된 무후는 오기를 불신했다. 그후 신설된 재상직의 주인공이 전문(田文)에서 공숙(公叔)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오기는 승진에서 소외당했다. 2세는 1세의 그늘에 안주하지 않고, 독자적인 권위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애쓰는 법이다.

   

무후가 오기를 보는 눈은 부정적 방향으로 치달았다. 처음엔 경원하다 싫어하게 되고, 이어서 불신으로 옮겨간다. 다음 차례는 경계심과 적개심인데, 이를 부채질하는 것이 소인배들의 참언이고, 일부 정보원들의 경박한 오보(誤報)도 이에 합세한다. 그리되면 인재가 멋쩍게 기대할 것은 억울하게 당하는 숙청뿐이다.

오기는 일하고 싶어도 일할 조건이 무너지고 신변에 위협마저 느끼게 되자, 위나라 탈출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적대국은 안 되겠고, 그러다 보니 장래성 있고 희망을 걸 만한 대상국으로 초(楚)나라가 부각됐다.

그동안 위국에 봉사하면서 서하지구를 점령·수비하는 동안, 오기는 큰 싸움을 76차례나 치렀다. 그중 전승은 64차례이고 나머지는 무승부였다. 패전은 한번도 없었고, 위나라를 위해 광대한 새 영토를 확보했다. 강대한 진(秦)군으로 하여금 동진(東進)을 체념케 하면서 위의 국가안보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러한 오기를 잃으면서 위나라는 급전직하 쇠망으로 치닫게 된다.

전국시대 초기 천하를 뒤흔든 오기의 명성은 한편으로 ‘유명세’처럼 그의 행동 자유를 제약했을 뿐 아니라 불필요한 질투심과 경계심, 적대의식을 초래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의 ‘이름 가치’는 시간 낭비가 따르지 않는 즉각적인 ‘투자 가치’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번에는 오기를 활용할 기회가 남방의 강대국 초(楚)나라로 넘어간 셈이다.

때마침 초나라에서는 인재를 갈망하던 도왕(悼王)이 집권하고 있었다. 그는 약 100년에 걸쳐 쇠약해진 국운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개혁이 필요하며, 개혁이 성공하려면 이를 구상하고 추진할 탁월한 인재가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도왕은 오기가 입국했다는 보고를 접하자 벌떡 일어서면서 좋아했다. 하늘의 도움이라 생각한 것이다. 오기를 상빈(上賓)의 예의를 갖춰 환영하고 곧바로 원()이라는 지방의 태수로 임명했다. 전략적 요충지를 지키는 동시에 초나라의 실정을 연구케 한 셈이다.

 

초나라의 정치개혁

1년 후에는 수도로 불러들여 초나라의 최고 군정장관 격인 영윤(令尹)으로 임명했다. 외국의 재상에 해당한다. 개혁을 주도하라는 의미였다.

오기의 개혁 목표는 부강한 초나라 건설이었다. 그 방법은 우선 가문주의에 안주하는 무능하고 부패한 기득권층, 즉 귀족과 왕족의 특권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군공(軍功)이 있는 군인 출신 신진 엘리트를 대량 등용해 요직에 두면서 국가와 사회의 중핵세력이 되게끔 육성하는 데 있었다. 그러자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오기는 불행히도 너무 일찍 이승을 떠나야 했다(오기의 개혁 작업은 3년으로 중단됐고, 그는 60세경에 사망했다).

개혁 작업에 들어간 오기가 맨먼저 착수한 것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방대한 영토를 차지했던 왕족·귀족들로 하여금 3세 후에는 모든 작위와 영지를 국가로 반환케 한다는 법령 제정이었다. 반환된 재산은 군공을 세운 군인과 행정 실적이 뚜렷한 공무원에게 분배한다고 했다. 이런 조치에 대해 “우리는 뭘 먹고 사느냐”고 항의하던 기득권층에게는 황지(荒地)와 미개지를 지정하여 개간케 하고, 정부가 그들의 최저생활을 보장해주기로 했다.

다음으로 쓸데없는 정부 부처와 자문기관을 폐지했고 무능한 관리를 파면했다. 절감된 예산은 복지와 군비에 돌렸다. 청탁 금지와 부패 퇴치에도 엄격했다. 군비 확장을 군인 보호와 병행했다.

개혁의 초창기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기원전 381년엔 남진(南進)의 탐색전을 벌이려던 진군을 간단히 격퇴했으며, 초나라의 맹방인 조나라를 침범하던 위군을 대패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했다. 몰락하던 기득권층의 반항이 뭉쳐지는 반면, 개혁 지지세력의 중핵화 작업은 더뎠다. 정보기구의 혁신·보강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다사다난했던 기원전 381년, 바로 그해에 갑작스레 불행이 닥쳤다. 개혁을 적극 지지하며 오기를 절대 신임하던 도왕이 돌연 병사한 것이다.

 

비극적인 인생 종장

드디어 기득권 세력이 조직적 반란을 일으켰는데, 오기가 국장(國葬) 준비에 바쁘던 무렵이었다. 궁전으로 난입한 반란세력을 피하는 위급한 순간, 오기의 머릿속에 최후의 지혜가 번쩍였다. 그는 도왕의 시체 곁으로 달려가 엎드렸다. 뒤쫓아온 반란군 귀족들이 오기를 향해 마구 활을 쏘아댔다. 무수한 활촉이 오기의 죽음을 재촉하는 동시에 도왕의 시체에도 수없이 꽂혔다. 반란세력은 오기의 시체를 끌어내어 토막냈다.

   

초나라 태자가 등극해 숙왕(肅王)이 되자, 제1호 칙명을 내려 오기를 죽이면서 선왕의 시체를 손상한 70여 귀족 가문을 모조리 족멸(族滅)의 극형에 처했다. 오기는 죽으면서도 죽은 국왕의 손을 빌려 개인적 보복을 완수한 셈이다.

“군자는 위험한 곳으로 가까이 가지 말라”고 유가는 가르치지만, 그것은 평시의 일이다. 위급할 때는 연루가 많을 곳, 위험한 곳을 찾아가는 것이 지혜롭다고 병가(兵家)는 가르친다.

오기는 불행했으나 슬기로운 인재였다. 희생 없이는 대공(大功)도 없다고 역사는 말해준다. 오기의 행적을 보면 과오도 뚜렷했으나, 그 연유의 대부분은 난세의 역경과 악조건으로 돌려야 할 것 같다. 공명심은 인간이 누구나 한때 갖는 것이지만, 능력과 운명에 따라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공인으로서 그의 생활을 바라보면 중국에서는 높은 평가만이 돋보인다. 유능한 군인이고 훌륭한 정치가에다 민감한 경제인을 겸했고, 일깨움이 많은 저서도 남겼다고 한다. 사마천(司馬遷)을 비롯한 거의 모든 중국인이 오기에게 동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중국인은 자기보다 못한 자를 지도자로 선출하지 않는다).

일부 외국인은 오기가 위(衛)나라에서 노나라로, 노나라에서 위(魏)나라로, 다시 초나라로 국적(또는 소속)을 바꿨다고 ‘변절 시비’를 제기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영국 총리 처칠도 ‘당적 변경’(보수당과 자유당을 왕래)으로 유사한 시비에 휘말렸다. 고대 중국 한(漢)제국의 최고 승상이자 최량의 충신으로 꼽히는 진평(陳平)도 위나라에서 항우 진영으로, 다시 유방 진영으로 소속을 옮겼던 인재다.

공명심은 자기실현으로 연결된다. 인간은 누구나 나서부터 갖고 있는 자신의 능력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는 생명의 동력이고, 발전의 원천이다. 나아가 능력이 뛰어날수록 자기실현 욕구도 강력하다고 알려져 있다. 보편성과 개별적 특징이 교차된 이러한 심리분석은 이승의 전국시대를 악착같이 살아남으려다 결국 비극을 통해 저승으로 떠나가버린 오기의 생애를 관조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대목으로 남는다.

 

상앙의 빛나는 개혁과 비참한 최후 ‘사자 기질’로 진(秦) 강대국화 도,‘여우의 지혜’ 없어 몰락

희생이 따르게 마련인 개혁의 참된 보람은 무엇인가. 개혁을 단행한 후에도 안전하려면 정권 장악까지 고집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어디까지 가려는 개혁인가. ‘첩의 아들’이란 불리한 출생환경을 지닌 상앙.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칙만 강조한 그는 결국 반대세력에 의해 파멸로 내몰렸다.

상앙은 획기적인 개혁을 완수하는 큰 성과를 남겼으나, 반대세력의 원한을 사는 바람에 참살당했다. 앞서 간 오기(吳起)의 도중하차 사례와는 다르지만 개인적 비극에 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상앙은 고대 중원의 개화되고 교통도 편리했던 약소국 위(衛)나라에서 기원전 390년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자(公子)였다지만, 상앙은 첩의 아들이었다. 그런 비정상적인 출생신분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특이한 성격은 그의 개인적 운명을 좌우했다. 나아가 그가 활약한 진(秦)나라의 역사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원래 동북아문화권(유교문화권)에서는 ‘첩의 아들’이라면 덮어놓고 백안시하고 소외하는 편견이 있었다. 능력과 사람됨은 무시한 채 멸시와 학대를 퍼부었던 것이다.

사회가 자기를 편견으로 대하고 차별대우하면, 억울하게 당하는 쪽은 어떻게 될까. 어려서부터 반항심이 자라게 마련이다. 또 그런 반감에 어울리게끔 사회의 부조리하고 어두운 측면만 더욱 눈에 띄게 되고, 지배계층과 추종세력의 부패와 무능, 무지와 우매만 돋보인다. 그에 대한 결과는 저항 혹은 탈출이다. 이 경우 정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편향된 각박함이다. 이웃에 대한 보살핌과 따뜻한 사랑의 정신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되면 새로운 저항이 심화되다 유사시엔 그에 대한 보복과 제재가 뒤따르면서 극한 상황을 빚고 만다.

상앙의 생애가 그러했다. 총명한 소년 상앙은 차별대우 속에서도 억세게 자라났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즐겼는데, 공자의 윤리철학보다는 법가(法家)의 현실정치론을 탐독했다. 청년기에 고향을 떠났는데, 행선지는 그때만 해도 열강 중 하나로 꼽히던 위(魏)나라였다.

상앙이 책 봇짐을 내려놓은 곳은 당시 위나라의 최고 벼슬인 상국(相國) 자리에 앉은 공숙좌(公叔座)의 집이었다. 공숙좌는 상앙이 비록 서자(庶子)이지만 공자(公子)의 아들이고, 지능이 뛰어나며 학식도 풍부하다고 판단해 그를 높이 샀다. 공숙좌 자신이 학식 있는 인격자였다. 그는 조국 위나라에서 등용하지 못한 인재들의 다음 행선지가 경쟁국인 진(秦)나라일 것이라고 전망하고 걱정스러워했다.

 

진(秦)나라에서 등용되다

그 공숙좌가 병석에 누워 중태에 빠졌다. 위나라 혜왕(惠王)이 문병차 찾아가 그 위독함을 알고는 걱정스레 물었다.

“만약 병석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으셔야 한다면, 그 시기에 국정을 대신 맡아볼 인재로는 누가 좋을까요?”

“제 문하생으로 상앙이란 인재가 있습니다. 청년이지만 지능과 학식이 탁월할 뿐 아니라 구상과 통찰력, 통솔력과 정치력을 아울러 갖췄습니다.”

공숙좌가 진언한 뒤 혜왕의 표정을 읽으니, 듣고 흘려버리는 무관심이었다. 아마도 실적이 없고 경험도 태무(殆無)한 백면의 청년을 중용한다면 그렇게도 인재가 없느냐고 천하가 비웃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공숙좌는 좌우 측근들을 물러나게 하고는 다시 진언했다.

“만약 군왕께서 상앙을 등용하시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를 없애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안전을 위해 외국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혜왕은 “알아듣겠다”고 하고는 궁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측근에게 말했다.

“상국이 연로하여 병석에 눕더니, 그 진언에 노망기가 짙은 것 같다.”

   

혜왕은 아무런 과오가 없는 상앙을 죽인다면 천하의 조소와 비난을 면치 못하리라고 우려했던 모양이다.

한편 공숙좌는 국왕이 자기의 두 번째 진언에는 동의한 줄 믿고 있었다. 맡고 있는 직책과 국가 이익을 고려해 부득이 진언했지만, 다시금 생각하니 상앙이 자못 측은했다. 그는 인간적인 고민에 빠졌다가 급히 상앙을 불러 말했다.

“국왕께서 내가 죽으면 상국 후임자로 재상에 임명할 인재가 누구냐고 물으셨다. 나는 그대를 추천했으나, 전하의 안색을 보니 응낙하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상국 된 처지에서 국왕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고, 신하에 대한 배려는 다음으로 돌려야만 했다. 따라서 전하께서 상앙을 등용하지 않겠다면 국가 안보상 걱정되니 없애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고, 전하께서는 응낙하셨다. 이제 그대는 서둘러 이곳을 떠나야 한다. 그대로 있다간 체포될 것이다.”

상앙이 대답했다.

“혜왕께서는 상국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신을 임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발상이라면 상국님께서 저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하신 두 번째 진언도 실행에 옮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고는 침착하고도 용의주도하게 출국을 준비했다. 상앙은 이미 서쪽 강대국인 진(秦)나라 효공(孝公)이 전국에 포고문을 내리고 현명한 인재를 찾아 등용하려는 포부를 밝힌 바 있음을 듣고 있었다. 효공은 선대인 목공(穆公)의 뜻을 이어받아 동쪽의 실지(失地)를 되찾고자 열망하던 영명한 군주였다. 상앙의 행선지는 당연히 진나라로 내정됐다. 그러나 무턱대고 거지꼴로 찾아가서 냉대 받기는 싫었다. 사전 연락과 거기에 상응한 소개장 등 격식을 차릴 필요가 있었다.

공숙좌가 죽은 후 마침내 진나라로 들어간 상앙은 효공이 신임하는 측근의 실력자 경감(景監)을 연줄로 삼아 접견을 신청할 수 있었다.

효공이 직접 상앙을 만나 대화했다. 상앙은 효공의 당면 수요가 무엇인가를 간파했다. 그러고는 우원(迂遠)한 덕치론(德治論)이나 까마득한 제왕술(帝王術) 대신 현실 조건을 감안한 실지 회복과 부강대국론을 폈다. 효공은 기뻐하며 그를 중용하기로 결심했다. 특히 위(魏)나라에 빼앗긴 하서(河西) 지방의 회복 작전 구상이 마음에 들었다.

하서 지방은 20세기에 마오쩌둥(毛澤東)이 근거지로 삼은 옌안(延安)이 위치한 지방이다. 봉건관료식 덕치론자인 장제스(蔣介石)가 후쭝난(胡宗南) 장군에게 명하여 대군을 이끌고 우매한 정면공격을 시도하다 실패한, 바로 그 일대다.

 

개혁 구상과 찬반 논의

상앙이 진나라에 입국한 것은 기원전 361년의 일인데, 실정 파악에 이어 개혁 구상을 정식으로 제출한 것은 기원전 359년이라고 한다. 청사진 작성에 2년이 걸린 셈이다. 개혁 구상의 대강이 알려지자 찬반 논의가 치열했는데 당초엔 반대쪽이 다수였다.

하기야 동서고금을 통해 다수파의 ‘여론’에 힘입어 보람 있는 개혁을 성취한 사례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영재는 언제나 극소수이게 마련이고, 나중에 그 성과를 즐길 사람은 국민 대다수다. 물론 부패하고 무능한 일부 당파의 이른바 ‘개혁’ 시도는 만화 같은 실패작에 그치고 만다.

국론이 분열되자 효공은 개혁안 채택 결정에 앞서 어전 회의를 소집하고 자유토론을 펴게 했다. 기득권층 귀족들이 반대파를 대표했는데, 종래의 법률·제도를 지켜야만 관리들이 사무에 익숙하고 백성이 생활에 안주하며, 국세(國勢)의 약화와 사회 혼란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상앙이 일어나서 일깨웠다.

“첫째, 지금 위군의 침범으로 하서의 실지가 수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당면한 현실은 국세 약화를 예방하는 것보다도 국방의 강화를 요청합니다. 또 매일처럼 도처에서 소요와 항의, 충돌이 일어나니 혼란을 예방하기보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새 질서가 필요합니다.

둘째, 사물 현상은 부단한 변화의 과정에 있습니다. 그 변화에 대응해 적응하려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개혁을 제때에 단행해야 합니다.

셋째, 역사에서 얻은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夏)나라 걸왕(桀王)과 은(殷)나라 주왕(紂王)은 지난날에 제정된 구법을 고수하다 멸망했습니다. 그들과 달리 상(商)나라 탕왕(湯王)과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구법에 구애하지 않고 개혁을 단행해 부강대국을 이룩했습니다.”

상앙의 주장은 적잖은 찬동 세력을 확보했다. 특히 효공은 경험적인 역사 교훈 인용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개혁의 결정은 내려졌다. 판단력 다음으로는 의지력이 중요한 법이다.

상앙이 주도한 개혁은 두 차례의 법 개정을 포함해 21년간 계속됐는데, 그 효과가 지대했다. 진나라의 국력이 유례없이 증강됐고, 국민은 안거낙업(安居樂業)했다고 한다.

   

획기적인 개혁 내용

상앙의 개혁은, 요컨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면서 낡은 사회의 낡은 제도 아래에서 침체됐던 국민의 ‘자각적 적극성’을 드높이는 데 있었다. 그러자면 새로운 기회를 늘리고 낡은 특권을 타파해야 했다.

우선 군공(軍功) 진급의 원칙을 제정했다. 다른 한편 관록(官祿) 세습제를 폐지했다. 군공을 20급으로 나누고 각 등급에 따라 작위와 관직, 주택, 처첩, 복장 등에 차등을 뒀다. 노예라도 전투에서 용감하면 평민이 됨은 물론이고 작위도 높여줬다. 반면 왕실 사람이나 귀족이라 해도 군공이 없으면 작위를 주지 않았고 부동산 소유를 금했다. 농업에서 생산량을 늘렸든지 새로운 땅을 개척한 경우에도 부역을 면제하고 우대했다.

이러한 새 조치는 즉효를 보여 진나라의 군사력과 생산력이 증강됐다. 토지의 자유매매를 허가해 귀족이건 농민이건 세금 부담을 평등케 했다.

또한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제를 수립하면서 노예를 소유한 영주들의 지방할거를 원칙적으로 제한했다. 관리를 중앙에서 임명해 지방으로 파견하고, 국왕에게 직속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조직적 동원력을 신속화하고 효율화한 것이다.

연좌제도 강행했는데, 5개 호구를 ‘오(伍)’, 10개 호구를 ‘십(什)’이라 부르면서 상호감시토록 하고 자유 이전을 금지했다. 범죄를 고발하지 않거나 범인을 숨겨주면 같은 죄로 다루어 엄벌에 용서가 없었다. 이 냉혹한 제도는 현대의 일부 공산국가도 모방하고 있다.

토지소유제 개혁에서 특기할 것은 노예사회적인 토지 국유제를 폐지하고, 봉건적 토지 사유제를 도입한 점이다. 이는 세법 개정과 더불어 소농(小農)경제 발전에 이바지했으니 진보적 의의가 크다고 평가되는 모양이다.

하여튼 진나라의 사회 기풍은, 평상시엔 농업생산을 즐기다 유사시엔 앞다퉈 전투에 뛰어드는 획기적 전환을 보였다. 국력 증대와 함께 천하무적의 군사강국이 출현한 것이다.

 

하서 수복 위한 배신적 기습

상앙은 정치가이면서 군사가와 외교가를 겸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현존 저서 ‘상군서(商君書)’ 중 3편이 군사관계에 관한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군사력만으로 부족하고, 정치력이 우선돼야 하며, 경제력도 중요하다는 사상이다.

기원전 344년에는 직접 진나라 특사로 위나라를 방문해 혜왕을 만났다. 과거사에 관한 회포를 풀면서 후대를 받기도 했다. 이는 외교전략상 혜왕에게 호의를 보이면서, 만약에 위나라와 제(齊)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진나라는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위나라의 예봉을 제나라로 돌리면서 개혁에 필요한 시간을 벌고자 했던 것이다.

그 3년 후에는 상앙이 진나라 대군을 통솔해 직접 위나라를 치고 하서의 실지를 완전 수복코자 했다. 이를 막으려 위나라는 공자앙(公子콾)을 사령관으로 하는 수비군을 급파했다. 일찍이 청년기의 상앙이 위나라에 체류했을 때 친분이 있던 사람이다.

상앙은 공자앙에게 인편으로 정중한 친서를 보냈다. 그 내용은 ‘지금 불행하게 대치 중이나 옛정을 생각해서 전혀 싸울 생각이 없다. 그러니 쌍방이 각기 주력을 후퇴시키고 중간의 안전지대에서 만나 회포를 풀면서 영토 분규의 평화적 해결책을 의논함이 어떻겠는가. 회견 장소로는 옥천산(玉泉山)이 좋겠다. 회신이 있으면 즉각 안전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었다.

순진한 공자앙은 기뻐서 이에 동의하고 옥천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회견 직전 정찰대를 시켜 알아본즉슨 부근의 진군은 전부 후퇴했다는 것이다. 약속 당일에 위군 측에서는 공자앙이 측근 약간명과 연회 석상에서 여흥을 도울 오락인원만 대동하고 지정 장소로 갔다. 상앙은 산기슭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공자앙은 상앙이 미리 진군의 무장부대를 분산시켜 부근 일대에 매복시켰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연회 도중 상앙이 잠깐 자리를 뜨겠다고 했다. 그러자 매복했던 진군은 일제히 연회장으로 달려들어 공자앙을 결박했다. 그는 후방으로 압송됐고, 진군은 손쉽게 하서의 모든 요충지를 점령, 장악했다. 진군은 계속 동진해서 위나라의 옛서울 안읍(安邑)까지 포위했다.

공자앙은 후회막급으로 혀를 깨물고 싶어했다. 위나라 혜왕은 대경실색 어찌할 바를 몰라 평화를 구걸할 뿐이었다. 상앙이 제시한 조건은 하나뿐으로 우선은 관대한 듯했다. 하서를 수복할 따름이지, 위나라의 다른 영토에는 한치도 손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진나라는 상앙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면서 어(於)와 상(商)에 영토를 갖게 하고, 이례적으로 후대했다. 또한 상앙을 상군(商君)으로 호칭했다.

한편 각국은 그 소식을 접하고 상앙의 비인간적 배신행위를 맹렬히 비난했다.

상앙은 정치개혁을 성공적으로 주도했을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대군을 통솔해 큰 싸움에서 5전5승했다.

비참한 말로

고대 중국의 인재 상앙은 마키아벨리(사진)가 ‘군주론’에서 말한 ‘사자의 기질’은 갖췄지만 ‘여우의 지혜’가 모자라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상앙은 ‘자기실현’ 노력에서는 유감이 없었겠으나, 그의 인생 종장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아니, 행복할 수 없었다. 당시엔 어느 나라든 동양식 전제군주 제도를 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살여탈(生殺與奪)의 대권은 군주 한 사람만이 틀어쥐고 있었다. 당시 동양에서는 헤겔이 갈파한 대로 군주를 제외하곤 모두가 사실상의 노예였다. 이는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제도이자 환경과 문화의 소산이었다. 자유민주주의를 애호하는 사상도 없었고, 인권을 옹호하는 가치관도 발견되지 않던 무렵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치개혁의 본궤도에 진입해 약간 대담해진 상앙은 중대한 실책을 저지른다.

한번은 태자가 개혁법령을 위반했다. 상앙이 말했다.

“법이 준수되지 않는 원인은 상류계층이 이를 무시하고도 무사하여 법 자체가 경시되는 데 있다.”

상앙은 태자를 처벌하고 싶었으나 군주의 후계자를 손댈 수는 없었다. 대신 그 측근인 공자건을 처형했고, 또 사부인 공손가를 문신(먹실 넣기)으로 벌했다. 소문이 퍼지자 뭇사람들은 공포심 때문에 개혁법령을 준수했다. 그러나 태자는 치솟는 분노와 원한을 가까스로 달래고는 집권 후에 보복키로 작심했다.

그 사건이 있은 지 5개월 뒤 효공이 사망했다. 태자가 즉위해 혜공(惠公)이라 칭했다. 그는 상앙에 대한 보복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때마침 공자건 일당이 상앙이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고 밀고했다. 상앙은 체포 직전 도주해 국경 부근에 이르렀다. 여관에 투숙하려 했으나, 상앙 자신이 제정한 법령에 따라 여권을 소지하지 않았다고 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앙은 정처없이 방황하면서 정신착란을 일으켰던지 판단력과 통찰력이 흐려져 허둥거리다 위(魏)나라로 들어갔다. 위나라 사람 또한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공자앙을 속이고 위군을 격파한 원한의 기억이 뚜렷했던 것이다. 부득이 다른 나라로 가려 했으나, 이번엔 위나라 사람들이 딴 생각을 품었다. 진나라로 상앙을 정식 송환해야지, 모호하게 방치하면 양국 관계가 악화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송환 절차가 시작되자 상앙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요즘의 치매증을 봐도 알 수 있듯, 정신이 오락가락하더라도 자존심은 살아 있고, 때로는 새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송환 절차 도중 상앙은 탈주했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자신의 봉지인 상(商)읍으로 숨어들어 친척과 시민을 규합해 부대를 편성하고는 정(鄭)나라로 출격했다. 혜왕은 정규군으로 이를 토벌하고 상앙을 사살했다. 그의 시체를 다시 수도로 끌고 가서는 본보기를 보인다며 포고문을 발표하고 거열형(車裂刑)으로 처리했다. 족멸(族滅)의 극형이 잇따랐다. 처참한 보복이었다.

역사가 사마천(司馬遷)도 상앙의 전기를 쓰면서 오기(吳起)의 경우와 달리,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 인간미가 결여된 잔인하고 무정한 성품이라고 규탄했던 것이다.

원칙을 지키는 것은 좋으나, 인간은 이성적 동물인 동시에 정서적 존재다. 원칙 위에 자리한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도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이론과 사생관

서구의 법가(法家)로 볼 수 있는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 쓰기를, 통치자가 조국의 자주독립을 수호하고 부강대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여하한 수단 방법을 선택하건 별로 구애할 바 없다고 했다. 그러니 여우의 지혜와 사자의 기질을 고루 배우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본시 인간은 사악하여 당신에 대한 신의를 충실히 지키지 않기 때문에 당신도 그들에 대한 신의를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자비롭다든지, 신의를 지킨다든지, 인정에 따뜻하다든지, 정직하다든지, 경건하다든지 하는 것을 여러 사람에게 느끼게 하는 일은 매우 필요하다’는 강조를 잊지 않았다(군주론, 18장).

   

야릇하게 덧붙인 그 보탬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현대 정치인들의 인간 관찰을 일반화해 요약해본다.

이 세상에 배신자들의 존재는 확실하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착한 사람들이 건재한다. 가장 많은 부류는 중간에서 흔들리는 유동 인구다. 이들은 비록 각자의 다양한 이해타산에 따라 이리저리 동요한다 해도 착한 사람을 우러러보거나 믿고 맡길 줄은 안다. 그리고 배신자니 악인이니 불리는 사람이라 해도 그 자신은 믿지 못할 사람을 모시거나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신뢰의 확보가 으뜸으로 중요하다. 정책 발표에서도 그렇고 인간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상앙의 경우는 후자에서 맹점이 지나쳤다. 각박한 성격 탓이다. 그것은 ‘첩의 아들’로 태어난 불행한 환경에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유전적 요인에 대해서는 참고자료가 없다.

나아가 극한 상황에 처한 상앙의 방황에서는 비장이 아닌 비참으로 얼룩진 판단착오의 징후가 감지된다. 그것은 인생관이 아니라 사생관(死生觀)의 문제로 귀착되는 것 같다. 일찍이 플라톤은 ‘철학은 사망의 연습이다’고 갈파했다. 진·선·미 연구와 관련해 당황하지 않고 죽음을 영접하는 자세를 가르친 것이다. 사망은 자기의 미학(美學)을 따르는 최후의 자유 선택이다.

이러한 점에서 서구인과 일본인, 아랍인은 죽음 앞에서 그다지 당황하지 않는다. 상앙은 그러한 자세를 정립하기에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던 것 같다. 사생결단의 위기에 즈음해 어쩔 줄 몰라 하고 갈팡질팡하다 인생론의 미학과는 거리가 먼 최후를 ‘타인의 선택’에 의해 맞이한 꼴이 됐으니 말이다.

문제는 산적해 있으나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은 신생국에서 개혁을 제창하려면, 플라톤의 가르침에 따른 사생관의 정립이 요청된다. 권력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우회적 접근’이 주는 교훈 병법의 대가 손빈, 라이벌의 간휼을 이겨내다

손빈은 한때 라이벌인 방연의 모함으로 배신을 당하고 위기에 몰렸으나 두 차례의 대전투를 치르면서 이를 극복해냈다. 자고로 질투심에 불타는 동문이나 동향은 멀리하는 게 이롭다.

질투심은 추잡하고 해롭다. 그러나 경쟁심은 고상하고 이로울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가르쳤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다. 정치학자에다 수사학(修辭學)의 대가이기도 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겨레의 착하고 훌륭한 선비들에게 주의를 환기하고자 한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일부 동문(同門), 동향(同鄕)이나 수양이 안 된 친구라면 결단코 멀리하라고 권고하고 싶다. 여기 소개하는 병법의 대가 손빈(孫?)만 해도, 젊어서 순진할 때 질투심에 불타는 동문을 간단히 믿었다가 크게 봉변당한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따르면 명성이나 권세를 좇는 야심가일수록 자기와 동등한 출신이라 생각하던 사람의 평판이 자자해지거나 지위가 높아지면 질투심이 심해진다고 했다. 야심만 컸지 지능이나 학식이 부족하니, 결국은 야비한 수단과 방법으로 상대를 깎아내려서 다시 동등하게 만들어야만 안심한다는 꼴이다.

손빈의 선조로는 제(齊)나라를 탈출해 오(吳)나라로 가서 병법의 대가로 명성을 떨친 손무(孫武)가 돋보인다. 그의 후손인 손빈은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착했으며 독서를 즐겼다고 한다. 자라서 훌륭한 스승을 찾게 됐는데, 때마침 솔깃한 소문이 식자들 사이에 자자했다. 귀곡(鬼谷)이라는 험준한 심산유곡에, 어디서 왔는지 점잖은 선비가 홀로 찾아들어 주변을 살피고는 은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명을 밝히지 않아 사람들은 그저 ‘귀곡선생’이라고 불렀다. 경력은 모르겠으나 정치와 군사에 관한 소양이 해박하고 심오하며, 난세의 철학을 터득하고 있음이 명백하다고 했다. 처음엔 고독을 즐기는 듯 보였으나, 차츰 난세를 수습할 영재를 만나면 골라서 교육한 다음 세상으로 돌려보낸다는 평판이 있었다. 바로 손빈이 찾던 스승이었다.

구름이 넘나드는 깊은 골짜기를 더듬어 찾아 올라간 손빈을 눈여겨본 귀곡선생은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거의 때를 같이해 위(魏)나라의 방연(龐涓)이라는 젊은이도 찾아와서 함께 병법을 공부하게 됐다. 그런데 방연은 영리하면서도 질투심이 강했다.

귀곡선생은 제자들을 평등하게 다루면서도 자연스레 손빈에게 더 큰 기대를 걸었다. 손빈 쪽이 더 현명하고 착했기 때문이다. 기억력과 두뇌 회전에 별 차이가 없는 듯해도 성정이 착해야만 미래에 대한 통찰이 공정할 수 있다. 영리하면 동작은 빠를 수 있어도 통찰력에서 뒤지게 된다. 또 착해야만 덕망이 높을 뿐 아니라 통솔력이 탁월하다. 반대로 질투심에 사로잡히면 간휼(奸譎)과 편견으로 흘러 사람들이 심복하지 않는다.

두 청년은 학업을 마치고 동시에 하산했다. 손빈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편 방연은 위나라로 귀국하자 재빨리 구직운동을 벌여 등용됐으며, 장군으로 승진했다. 위나라 혜왕(惠王) 때의 일이다.

당시의 제나라는 손빈의 조국이지만 군주인 환공이 우매한 탓에 국정이 문란해져 선비들이 희망을 걸기 어려웠다. 때마침 위나라의 방연에게서 초청의 친서가 날아왔다. 위나라 혜왕이 어진 사람을 예우하고 선비에게 겸손하니, 즉 예현하사(禮賢下士)할 줄 아니 이곳에 와보지 않겠는가 하는 내용이었다. 손빈은 응낙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방연의 모함과 손빈의 탈출

하지만 그러한 결심은 신중을 결(缺)하고 경솔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혜로운 사람도 한두 번 실수는 하게 마련이다. 손빈은 믿어서는 안 될 사람을 믿었던 것이다. 인간의 보편적 약점이지만, 만사가 여의치 않을수록 유혹에 빠져들기 쉽다. 또 신중함을 잃고 쉽게 ‘희망적 관측’에 쏠리기 쉽다.

동시에 착한 사람의 약점이지만, ‘선의적 해석’이라는 것도 있다. 정직한 자기를 기준으로 삼아 타인의 마음을 추측하다 판단이 어긋나는 것이다. 이번의 경우, 방연의 초대장은 질투심에서 비롯된 간휼한 모략이었다. 자기보다 우수한 잠재적 라이벌을 없애버려야 안심이 된다는 악랄한 발상이었던 것이다.

   

손빈이 위나라 수도 대량(大梁)에 도착하자 혜왕은 기뻐했다. 그럴수록 방연은 빨리 손을 써야겠다고 작심했다. 그래서 국가 안보의 책임자인 자신이 위나라의 파멸 위기를 재빨리 예방한다는 구실로 손빈을 체포했다. 그러고는 손빈이 위나라에 와 있던 제나라의 특사와 내통하고 동조자를 규합해 국가를 전복하려 한다는 죄명을 날조하여 그를 가혹하기 그지없는 빈형(?刑)에 처했다.

빈형이란 무릎뼈를 제거하고 얼굴에 큰 흉터를 만드는 형벌이다. 관습상 이런 형벌을 받은 사람은 영원히 공직에 오를 수 없으며, 국왕은 만나지도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후 방연은 손빈의 도주를 막고자 엄중한 감시망을 붙여놓았다.

손빈은 고통과 절망으로 최악의 상태에 빠졌고 정신이상을 가장해 살아남으면서 하늘의 도움과 우연의 배합을 기다렸다. 그런데 60억 인류의 지문이 각기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개성에 차이가 있고, 인간성도 한결같지 않다. 감시인 중에 동정하는 자가 생겼고 대화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그들의 정보에 의하면, 제나라에 새 군주가 즉위했는데 그가 위왕(威王)이고, 인재의 발견과 등용에 매우 적극적이라고 했다. 또 제나라의 새 특사가 이곳 대량에 도착했다고 알려줬다.

허점을 보아 감시망을 빠져나온 손빈은 제나라 특사를 만나 사정을 이야기했다. 특사는 이를 기특하게 여기고 또한 동정하여 손빈을 마차 한구석에 숨기고 제나라로 돌아갔다. 마침내 손빈이 풍부한 학식과 경험, 뛰어난 지능을 살려 전국시대의 중국 천하에 명성을 떨칠 역사적 기회가 온 것이다.

귀국한 손빈은 잠시 전기(田忌) 장군의 저택에 기거하게 됐다. 전기는 위왕의 친척으로 국방장관 격이었다.

 

마차 경주의 지혜

전기는 손빈을 자주 만나 군사와 정치에 관한 대화를 나누면서 그 지식과 경험, 통찰력에 탄복하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전국시대 중엽에 접어들면서 군대의 으뜸 병종도 과거식 전차를 에워싼 보병으로부터 기동력과 돌격성을 중시하는 기병으로 바뀌던 무렵이었다.

그런 새로운 풍조를 반영하듯, 운동경기에 돈을 거는 ‘내기’도 각종 경마로 옮겨갔다. 장교들 사이에선 ‘말 타고 활쏘기’가 유행했다. 그러나 왕족과 고급귀족들 사이에선 각자가 3대의 4두마차를 출장시키는 경주가 유행했다. 손빈도 몇 번 그 경주를 관람했다. 보아하니 쌍방이 출장시키는 각 3대의 마차는 상·중·하로 구분되는데, 동급이라면 말의 주력에 별 차이가 없었다. 물론 큰돈을 거는 내기이니 이겨야 좋다. 그래서 손빈은 꼭 이길 계략을 짜서 전기에게 건의했다.

“우리 측의 가장 느린 마차를 상대방의 가장 빠른 마차와 겨루게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측의 가장 빠른 마차는 상대방의 두 번째 빠른 마차와, 우리 측의 두 번째 빠른 마차는 상대방의 가장 느린 마차와 경쟁케 합니다. 그러면 합계해서 2대 1로 반드시 이깁니다.”

전기가 그의 건의를 따랐더니 어김없이 이겼고, 내기 돈을 크게 거둬들일 수 있었다. 국왕과 한 내기에서도 승리하니, 위왕은 그 비결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했다.

손빈의 그러한 계략은 20세기 들어 1940년대 이후에 발달하기 시작한 기획연구인 신흥학의 원칙과 완전히 일치한다. 예컨대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人工頭腦學)나 경영학의 ‘경영전략 연구’니 ‘기획 업무론’은 한결같이 성공을 위한 인력 및 물적 자원의 효율적 사용에 관해 ‘종합성 안목에서의 합리적 안배’를 강조한다. 쉽게 풀이하면 손빈의 경마 이론과 같다.

처음엔 수학자와 통계학자들이 이를 연구했으며, 과학기술의 새 분야로 간주되다 마침내 경영학과 군사학에도 운용되기에 이르렀다. 최근엔 무역 자유화와 농업보호정책 간의 모순과 당착에 대한 해결방안 모색에도 원용되고 있다. 다만 한층 더 폭넓고 깊이 있는 보상·보조·홍보 대책이 아쉽게 느껴진다.

다시 손빈의 고사(故事)로 돌아가서, 그의 발상을 볼 적에 뚜렷한 것은 ‘상대를 알고 스스로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고 가르친 손무의 일깨움에 대한 충실한 터득이다. 이는 적과 나의 ‘힘 관계’와 그 포치(布置)를 알고 변화의 가능성을 탐구한다는 뜻이다. 나아가 ‘상대방이 생각지 않던 방법을 채택해야만 대승을 거둘 수 있다(以奇制勝)’는 원칙에 대한 슬기롭고 대담한 실천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그래서 한국인도 익히 아는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 제갈량 또한 감탄하면서 이렇게 썼다.

“손빈의 그 실천은 바로 군사이론의 진수이지, 결코 단순한 경마이론이 아니다.”(兵說也, 非馬說也…. 諸葛亮集, 兵法).

마침내 위왕이 전기에게 필승의 연유를 묻자 전기는 손빈의 지혜라고 정직하게 찬양했다. 위왕은 손빈을 초대하여 만나기로 했다. 위왕과 전기 두 사람 모두 기량이 큰 대인이었다.

   

계릉의 싸움과 마오쩌둥의 격찬

‘우회적 접근’ 작전을 구사한 손빈의 전법은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사진)의 전법과 일맥상통한다.

손빈과 면담을 나누고 그 능력을 확인한 위왕은 그를 즉각 장군으로 임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손빈은 신체적 손상을 이유로 사절하고는 고문의 역할을 바랄 뿐이라고 했다. 위왕은 결국 그를 군사(軍師)로 임명해 장군인 전기를 돕게 했다. 당시 강대국으로 알려졌던 위(魏)나라 군대의 주력을 두 차례 상대하여 끝내 방연을 패망시켜 명성을 천하에 떨칠 기회가 마침내 도래한 것이다.

그 첫 번째인 ‘계릉의 싸움(桂陵之役)’은 기원전 354년에 개시되고 약 1년 후에 일단락됐다. 그해 가을 방연이 위군의 주력을 인솔하고 북상하여 조(趙)나라 수도 감단(邯鄲)을 포위 공격했다. 조나라는 동맹국인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제나라 위왕이 안보회의를 소집했더니, 구원 문제에서 찬반양론이 엇갈렸다. 반대론은 위험 부담과 준비 부족을 이유로 지금은 출병치 않고 위·조 양국의 공동 피폐를 기다려보자고 했다.

출병론은 동맹의 의리와 국제적 신뢰도를 강조했다. 동맹의 충실성이 국가이익과 직결된다는 주장이었다. 합리적인 차선책으로는 병력을 부분 출동시켜 송(宋)·위(衛)나라 같은 약소국과 협력하여 위나라의 남부 국경을 교란하면서 ‘제2 전선’을 형성해 체면을 세워보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결국 차선책이 채택됐다.

다음해 가을이 되자 조·위군 양측에 모두 피로의 기색이 엿보였다. 조나라의 구원 요청은 더욱 절실했다. 드디어 제나라가 본격적인 구조작전을 결정했다. 전기가 장군, 손빈이 군사로서 인솔하는 병력은 약 8만명. 이는 방연이 이끄는 적의 주력과 비등한 병력이었다.

전기의 당초 구상은 감단으로 직행할 결심이었다. 그러나 손빈이 말렸다. 아군이 먼 길을 고생스러운 직선 행군으로 달려가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많은 희생을 초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적군의 주력이 매우 황급해서 부랴부랴 서둘러 돌아오도록 적국 내 요충지를 향해 진군하자는 것이다. 행군 중 적당히 매복해 휴식하다가 적 주력이 바삐 도착하는 대로 이를 포착, 섬멸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다.

그러한 진군 목표인 적국 요충지가 바로 평릉(平陵)이다. 적국 수도 대량의 동북방 문호이고 불과 70리 거리다. 난점으로는 아군의 보급선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 그리고 평릉의 수비대가 비교적 강력하고 적군의 병력 증강도 용이하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었다. 이 점을 두고 방연은 손빈 측의 작전방침을 검토하면서 이른바 ‘군사를 모르는 놈들’이라고 얕보게 될 것이다. “아군은 적장의 그러한 거만한 오판을 역이용하는 것이 좋겠다. 아군의 부분 병력만 허장성세로 파견하여 평릉을 거쳐 대량으로 진격케 한다. 한편 아군 주력부대는 은밀히 북상해 계릉에서 대기하다 피로한 적군 주력이 도착하는 대로 이를 격멸한다”는 것이 손빈의 계략이었다.

그후의 사태 진행은 제군의 작전구상대로 전개됐다. ‘계릉의 싸움’은 제군의 대승과 위군의 참패로 끝났고, 거만한 방연은 포로로 잡혔다. 이 ‘계릉의 싸움’을 흔히 ‘위위구조(圍魏救趙)’ 전략의 승리라고 한다. 아군이 위나라로 진격하여 조나라로 진격했던 위군을 물러나게 한 전법이라는 것이다. 현대 용어로는 ‘우회적 접근(indirect approach)’에 해당한다. 이에 대한 리델 하트의 연구는 차후에 언급키로 한다.

손빈의 병법은 당시로서는 매우 참신한 발상이었다. 그는 저서에 ‘모두 다 아는 상투적인 작전방법으로는 이기지 못한다’고 썼다. 일반적인 작전법과 판이한 전법을 구상해야만 비로소 승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자면 사령관과 참모장이 우수해야 한다. 그리고 우수한 인재의 등용은 우수한 통치자에게만 기대할 수 있다. 반대의 경우라면 나라가 위태롭고 겨레가 고생한다.

마릉의 싸움과 방연의 자살

2000여 년 후에 태어난 현대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도 손빈병법을 극구 찬양하면서 그 전법을 활용하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예컨대 적군이 우리 근거지로 쳐들어와서 오래도록 주둔하는 경우라면, 아군은 일부 병력만 남겨 대항케 하고, 주력부대는 적군의 후방 근거지인 요충지대를 석권케 한다’(毛澤東, 抗日遊擊戰爭의 戰略問題, 1938. 選集, 제2권)

계릉의 싸움이 있은 지 2년 후 제·위 양국 관계는 완화됐고 교환조건을 붙여 방연이 송환됐다고 한다. 그러나 약 10년 후 다시 전쟁상태에 접어들었으니 곧 ‘마릉의 싸움(馬陵之役)’이다.

기원전 342년 위군이 한(韓)나라를 침공했다. 5전5패를 기록하면서 한나라가 긴급구원을 요청해왔다. 제군이 출동하게 되자 역시 전기가 장군, 손빈이 군사(軍師)를 맡았다. 위군 측은 그동안 군사적 실적을 올리면서 재기한 방연이 지휘했으며, 10만 대군임을 호칭했다. 신 태자(申太子)가 동행했는데, 감시를 겸해 실전 경험을 쌓게 한다는 취지였다.

   

한편 손빈이 책정한 작전방침은 종전과 같은 ‘우회적 접근’이고, 위나라 수도 대량을 향한 진군이었다. 인간이란 누구나 종전에 승리해 재미를 붙인 전법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고 답습하게 된다. 그 점은 조선시대의 이순신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성격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자 한나라를 공격 중이던 위군 주력도 수도 방위를 위해 회군했다. 사령관인 방연의 근성은 원래 그대로 거만하고 추잡했으며 전세(戰勢)를 희망적으로 관측했다. 돌아오면서 적군 동향에 관한 보고를 받아보니, 제군에 도망병이 많고 그 전력이 계속 약화된다고 했다.

이러한 인상은 손빈이 의도적으로 소문을 퍼뜨렸고, 또 거짓 조짐을 여기저기 나타냈기 때문이다. ‘희망적 관측’이 많은 적장을 ‘판단착오’에 빠뜨리고 빗나간 행동을 취하게 하는 ‘동기부여’의 일환이다.

드디어 방연은 제군을 얕보는 동시에 복수심과 공명심에 불탄 나머지 회군 속도를 최대한으로 높였다. 나중엔 방연 자신이 경기병 정예부대와 행군을 같이하면서 치중병과 보병부대를 아득하게 멀리 남겨놓았다.

한편 손빈은 진군 속도를 늦추다 마릉(馬陵)에 이르자 마침내 정지했다. 지도를 읽고 지형을 쳐다보며 계산하니, 황혼 무렵이면 방연이 쾌속부대와 함께 이곳에 도착할 형세다. 손빈은 매복을 결심했다.

마릉 일대는 좁은 골짜기에 도로가 구부러졌고 양측에 수목이 우거졌다. 한마디로 매복에 유리했다. 도로변 큰나무의 껍질을 깎아내고 ‘방연이 이 나무 아래서 죽는다’고 썼다. 선발된 궁수들을 충분히 배치하고는 ‘어두워지면 적군이 도착하여 나무에 쓰인 글을 읽고자 불을 밝힐 것이니 그때 집중 사격해 전멸시키라’고 명령해두었다.

아닌게아니라 방연이 도착하여 큰나무에 쓰인 글을 읽고자 횃불을 밝히니 그것을 신호 삼아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와 무수한 활촉이 방연의 전신에 꽂혔다. 위병이 잇따라 스러지면서 방연에게도 최후의 시각이 다가왔다. 방연은 “저놈이 명성을 천하에 떨치겠구나”란 한마디를 남기고는 자살로 지옥을 향해 떠나고 말았다. 태자 신(申)도 포로로 잡혔다.

이 ‘마릉지역(馬陵之役)’의 승리를 계기로 제나라는 제후국 가운데 1등 강국으로 부상했다. 한편 위나라는 2등국으로 전락했다. 그동안 서방 강대국인 진(秦)나라의 동방 진출을 막아온 방파제 구실을 상실한 것이다. 안으로는 인재 등용이 잘못되었고, 밖으로는 지정학에서 말하는 정면(正面) 선택을 그르쳤던 것이다. 진시황(秦始皇)이 위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기원전 225년의 일이다.

리델 하트의 가르침

손빈의 작전은 계릉의 싸움과 마릉의 싸움에 걸쳐 공통적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특징을 헤아리게 한다.

①적군 주력을 향해 직행하거나 정면공격을 시도하지 않는다.

②적 주력이 방치할 수 없는 요충지를 향해 진군하여 적 주력이 부랴부랴 달려오게 한다.

③우리가 바라는 때와 장소에서 싸움이 벌어지도록 유도한다. 그러자면 적장에게 어떤 이익이나 유혹을 던져주어 판단착오를 일으키도록 만든다.

이러한 전법은 바로 우리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발상을 연상시킨다. 충무공은 왜적의 주력을 향해 직행하거나 정면충돌을 꾀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지한 조정이 왜군을 대한해협에서 정면공격으로 막아내라고 명령할 때 일선지휘관으로서 맹목적으로 복종하지는 않았다. 조정이 충무공을 파면하고 후임자로 임명한 원균의 경우도 내심 정면충돌을 원치 않았으나, 벼슬과 감투에 집착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맹종하다 끝내 참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문제상황과 관련하여, ‘20세기 최고의 군사평론가’라고 지목되는 영국의 언론인 출신 리델 하트(Basil Liddell Hart, 1895∼1970)는 그의 명저 ‘전략론’(Strategy, 1967)에서 ‘우회적 접근’ 또는 ‘간접적 어프로치(indirect approach)’를 거듭 강조했다.

그는 저서 서두에 중국의 ‘손자병법’을 인용했다. 그리고 동서고금을 통해 ‘전략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간접적 어프로치의 운용 및 발전의 기록’이라고 썼다. 군사뿐 아니라 정치와 경영 내지 연애에 걸쳐 이 원칙의 적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요약한다.

적군 또는 대상의 정면을 향한 직선 운동이란, 상대방의 대응준비와 물리적·심리적 저항력을 강화해주는 어리석은 행동이 되게 마련이다.

   

한편 적군 전선의 측면을 우회하여 적의 배후를 향하는 운동은 행군 도중의 저항을 회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적장의 심리를 교란 혹은 당혹으로 이끌 수 있다. 즉 ‘판단착오’를 유발할 수 있는 반면에 아군은 효과적인 다음 포석을 강구할 여유를 갖게 된다. 이는 주도권 확보에 유리하다. 장군이라면 보통 사람 이상으로 배후의 위협적 동향에 대해 매우 민감하며 적장도 마찬가지여서 아군의 계략에 빠져든다.

하기야 적장의 두뇌회전이 빠르다면 신속한 배치 변경, 또는 정면 변경이 형성되기 때문에 아군의 우회적 접근도 결국 ‘직접적 어프로치’나 마찬가지 꼴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태의 발생을 예방하려면, 교란적인 행진에 앞서 다른 운동 또는 복수의 운동이 필요하다. 물리적 방법으로는 적의 병력을 여기저기 분산시키는 고안이 있을 수 있다. 심리적 방법은 사실이 아닌 인상을 주거나 허위의식 등으로 적장의 판단착오를 유발해 기습하는 것을 들 수 있다(손빈의 전법에서 관찰한 바와 같다).

여기서도 장군의 성격 문제가 제기된다. 거만하거나 경솔하지 말아야 한다. 속단의 함정에 빠져들기 쉽기 때문이다.

집요하거나 고집쟁이여도 안 된다. 사물과 현상은 유동적이며 정세 및 상황은 변화 내지 전화의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장군은 어렵지 않게 변경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계획을 가져야 한다. 한 가지를 포기해도 다른 것이 있다는 준비가 필요하다.

기회는 준비하는 사람에게 미소 짓는 법이다(리델 하트의 ‘전략론’ 중에서). 리델 하트의 그와 같은 ‘우회적 접근’ 또는 ‘곡선적 사고’ 전략은 발상의 기조에서 춘추전국시대의 손빈병법을 상기시킨다. 정치가인 마오쩌둥의 격찬도 참고할 수 있다. 더구나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전법에 깃들인 역사적 교훈을 명기할 필요가 있겠다.

 

극과 극의 두 남자, 조괄과 굴원의 처연한 비극 변화를 읽는 눈, 천군만마가 그 안에 있다

누구나 궁지에 몰려 절망상태에 이르면 새로운 변화를 갈망한다. 심지어 전쟁도 불사하며 세상이 달라지기를 기원한다. ‘주역’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하지만 궁해도 변치 않고 옛 방식을 고집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다. 역사철학은 이런 사람에겐 멸망이 있을 뿐이라고 가르친다. 전국시대 말엽에 사라져간 6국의 운명이 그러했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에 걸친 500여 년의 천하대란 시기. 중원의 백성들은 그칠 줄 모르는 전란과 혹독한 학정(虐政)으로 어느 날 어느 순간에 죽을지 모를 운명이었다. 그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나을 바 없었다. 춘추시대 290여 년간 무려 483차례의 전쟁이 일어났으며 전국시대 들어서는 병력 투입 규모가 더욱 커졌다. 한번에 10만명 넘게 참전하는 경우도 흔했다. 유명한 ‘장평의 싸움(長平之役)’에서는 항복한 조(趙)나라 군사 40만명이 진(秦)나라 군사들에게 생매장됐다는 기록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사람들은 더 이상의 살육을 막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외족의 침략을 막아내려면 통일은 반드시 이룩해야 할 과제였다. 사람들은 통일이라는 평화적 환경이 조성돼야만 무거운 세금이 줄어들고 징용과 징병 부담도 가벼워질 것이라 믿었다. 내정의 부패와 부조리에 맞서 이를 시정하려는 노력과 부강한 조국을 건설하려는 개혁 시도 또한 통일 여론을 은근히 부추겼다.

전국시대 말엽 진(秦)을 제외한 6국에는 ‘가문타령’만 하면서 특권 세습에 안주하려는 기생(寄生)적 권위주의 집단과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채 고난의 생활을 영위하던 노예계층이 극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부패로 말미암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예계층은 근로의욕을 상실했으며 군대의 사기도 형편없이 추락했다.

하지만 진나라는 달랐다. 노예라 할지라도 황무지를 개간해 생산력을 늘렸거나 싸움터에서 공을 세우면 즉각 신분이 승격됐다. 그중에는 귀족에 가까운 영전을 보장받거나 장교 또는 관리로 등용되는 이도 있었으며 징용 면제와 같은 특전이 내려지기도 했다. 진나라에서 전 국민적으로 ‘자각적 적극성’이 팽배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전국시대 말엽 각국의 상황은 달랐지만 이래저래 팽창한 통일 여론은 대항할 수 없는 천하의 대세가 되어가고 있었다. 맹자(孟子)도 그런 기운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다만 그는 ‘피 보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 통일의 주인공 되기를 바란다(不嗜殺人者能一之…, 孟子, 梁惠王 上篇)’는 견해를 밝혔다. 종국에 통일의 업적을 달성한 진나라는 개혁을 거치면서 강한 국가가 됐으나 인자한 나라는 아니었다. 반면 진을 제외한 6국의 왕조와 특권층은 개혁에는 관심도 없고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기득권 유지와 세력 확대에만 매달렸다.

그후 통일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자 진의 각개격파 전략이 곳곳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만약 진을 제외한 6국 중 5개국이 연합·단결했거나, 혹은 초(楚) 한 나라만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렸어도 전세의 귀추를 속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는 당시 전국 7웅(七雄)의 병력을 대비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진(秦) : 정규보병 100만, 전차 1000량, 기마병 1만.
위(魏) : 정규보병 30만~36만, 후근부대 10만, 전차 600량, 기마병 6000.
조(趙) : 정규보병 수십만, 전차 1000량, 기마병 1만.
한(韓) : 정규보병 약 30만.
제(齊) : 정규보병 수십만 내지 대략 100만.
초(楚) : 정규보병 100만, 전차 1000량, 기마병 1만.
연(燕) : 정규보병 수십만, 전차 700량, 기마병 6000.
(楊寬, 戰國史 p.440, 中國歷代軍事戰略 上篇 p.104)

난세의 궁지에 몰려 절망스럽고 답답했던 보통사람들은 현 상태를 탈피할 변화, 즉 돌파구를 절실히 원했다. 그들은 그것이 곧 통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통일 자체를 열망했을 뿐 정작 그것이 ‘어떤 통일이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만약 통일이 시대적 요청에 부합하지 않고, 천하대란 대신 태평성세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모처럼의 통일이 새로운 난세의 시작이라면?’ 이러한 고민은 하지 못했다. 결국 진의 천하통일은 불과 15년을 넘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기원전 260년, 진나라와 조(趙)나라 간에 그 유명한 ‘장평(長平, 지금의 산시성 소재)의 싸움’이 벌어졌다. 단일 전역(戰域)에 투입된 병력의 동원수로 보아 전국시대 최대의 격전이었다. 대승한 진군은 여세를 몰아 동방으로 계속 진출하더니, 기원전 256년에는 항복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주(周) 왕조를 멸망시켰다. 실속 없이 정통성이니 종주권이니 주장하던 보수(保守)의 아성이 결국 무너져내린 것이다. 전국시대는 말 그대로 실력의 시대였다.

 

통일의 전주곡, ‘장평(長平)의 싸움’

당시 일부 군사개혁을 거친 조나라는 군사 동원력은 상당했으나, 외교에서 갈팡질팡하면서 국제적 신용을 잃고 고립을 자초했다. 더욱이 군주인 효성(孝成)왕은 자존심만 강한 ‘세대교체론자’로서, 이는 결국 진과의 싸움에서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다.

진나라의 20만 대군이 영토분규 중이던 상당(上堂)으로 침입해 그 일대를 점령했을 때의 일이다. 조왕도 주저하지 않고 20만 대군을 파견했는데, 전군의 대장은 유능하고 용감한 노장군 염파(廉頗)였다. 현지에 도착해 진나라 군대와 몇 차례 승패를 겨뤘으나 그 전과가 신통치 않자 염파 장군은 전선의 세력판도와 국내외 정세를 고려해 새로운 전략을 세우기에 이른다. 공격이 여의치 않으니, 방어 위주의 진지 구축으로 시간을 끌면서 판도와 정세가 변하기를 기다렸다가 기회가 오면 반공에 나선다는 책략이었다. 대치국면은 3년이나 지속됐고, 승패를 가름할 결전은 없었다. 답답해진 진왕이 유능한 승상인 범수(范)를 불러 대책을 상의했다. 범수가 말했다.

“적장 염파의 정세판단은 옳습니다. 우리 진군이 강하여 당장은 공격할 수 없으나 진군은 먼 길을 왔으니 지구전에 불리하고, 사정 변경이란 것도 있으니 진군이 피로가 누적돼 퇴각할 때를 기다려 공세를 취하자는 속셈이지요. 적장이지만 나름으로 현명한 판단입니다. 그러니 염파를 제거하기 위한 이간책을 써야겠습니다.”

진왕은 바로 막대한 금은과 재물을 뿌려 조 왕조의 권신들을 매수하고, 그들로 하여금 유언(流言)을 퍼뜨리게 했다.

“염파 장군은 늙어서 겁이 많아졌고 진군에 투항할 조짐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현재 진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는, 조나라가 최근 작고한 조사(趙奢) 장군의 아들 조괄(趙括)을 새 대장으로 임명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는 젊고 유능하며 용기가 탁월합니다.”

조왕은 조작된 ‘여론’에 금방 현혹돼 사령관 교체에 대한 유혹을 느끼게 됐다. 조사 장군은 침착하면서도 임기응변에 능한 명장이었다. 그러나 아들 조괄은 비록 소년시절부터 병서를 즐겨 읽고 군사문제에 정통했으나 중대한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경험이 부족한데다 탁상공론(즉 紙上談兵)만 즐겨하는 게 문제였다. 이를 눈치챈 조사 장군은 생전에 비록 자신의 아들이지만 조괄의 작전 지휘능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 한번은 조괄의 모친이 그 까닭을 묻자 조사가 이렇게 설명했다.

“전쟁이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 사안이니 엄숙하고도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런데도 조괄은 안이하게 군사를 말하고 있다. 앞으로 조나라가 그를 기용치 않는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나, 만약 등용한다면 그가 조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조왕은 잘못된 여론만을 믿고 조괄을 등용했다. 조왕은 그의 화려한 언변에 감탄한 나머지 20만 신병을 추가로 보강해주고, 진군의 격퇴를 명했다. “즉각 전선에 나가 염파 장군을 대체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조괄의 모친은 황급히 조왕에게 상서(上書)하고, “조괄을 장군으로 임용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조괄의 성질이 장군으로서 군심을 얻었던 그 부친과는 전혀 다릅니다. 부친은 조정에서 상여(賞與)를 주시면 모두 부하들과 사병들에게 나눠줬고, 임명된 직후부터는 온갖 정성을 군사에만 쏟으면서 가정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조괄은 등용되자마자 위세만 부리고 부하들을 돌보지 않습니다.”

그래도 조왕이 “나의 결정은 이미 내려졌고 변경할 수 없다”고 회답하자 조괄의 모친은 “그렇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나를 연좌시키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조왕은 이에 순순히 동의했다.

   

성공한 CEO는 비관주의자?

‘사기(史記)’에 나타난 조괄의 결점은 여기까지이지만 이후 그는 실전 경험이 녹아들지 않은 탁상공론을 펴고, 임기응변력 부족,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는 오만방자함, 이기주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현대 경영학의 잣대로 보면 조괄은 식견보다도 ‘성격’이 문제되는 CEO였던 셈이다.

미국과 일본의 CEO관(觀)에는 이미 상식이 된 통념이 하나 있다. ‘성공한 경영자’와 ‘실패한 경영자’에 대한 면접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공한 CEO는 거의 모두 비관주의자였다고 한다. 실패할 가능성을 미리 따져 이리저리 대비하는 성격의 소유자가 성공하는 CEO라는 것. 반면 ‘실패한 CEO’는 거의 모두 낙관주의자였다고 한다. 모험심과 투기성이 강해야 사업에 성공한다고 생각하고 ‘하면 된다’ 식으로 성공의 가능성만 낙관하는 스타일이다. ‘이것저것 재기만 하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며 일단 돌진하고 보자는 성격이다.

그래서 CEO의 기획실에서는 이른바 ‘복수 변화요인(multifactor)’ 추적을 중시한다. 유동적인 난세에 살아남기 위해선 환경조건의 변화 요인을 계속 추적, 기록하면서 잠정적으로 작성해놓은 전략과 계획을 빈번하게 재검토해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발사태 대응전략(contingency plan)’의 작성도 중요하다. 불확실성의 다원화 시대에는 경영전략도 과거처럼 한 가지 방안만 책정해 고수해서는 안 된다.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비하는 우발사태 대응전략을 마련해 유연하고도 신속하게 대응하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 소개하는 고대 조나라의 조괄은 자고자대(自高自大)하는 낙관주의자인데다 경솔한 세대교체론자였다. ‘성급한 일반화’를 즐기고 ‘경솔한 간단화’에 능한 성격적 문제아였다.

 

파격 人事가 불러온 재앙

여하튼 조괄은 새로 보강된 20만 신병 부대를 거느리고 의기양양하게 전선으로 향했는데, 이로써 그는 모두 40만~45만 대군을 통솔하는 대장군이 되었다. 같은 시각 이런 정보를 접한 진왕은 크게 고무돼 유능한 백전노장 백기(白起)를 새로 전선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병력도 보강해줬다. 하지만 사령관 교체 사실을 극비에 부쳐 발표하지 않았다.

반면 조괄은 전선에 도착하자 그의 신조인 세대교체론에 따라 우선 지휘관 인사 교체부터 단행했다. ‘새 시대는 새 인재를 필요로 한다. 구세대는 늙어서 용기와 기획력이 없으니 새 시대에 일할 자격이 없다’는 투였다. 그의 세대교체론 핵심은 연령의 차이를 절대시한 배타주의. 이는 노·장·청을 막론하고 동시대인, 동국인(同國人)이 더 중요함을 몰각(沒學)한 경솔한 발상이었다.

그의 파격적인 인사조치는 당장 두 가지 치명적 폐해를 초래했다. 우선 적정(敵情)은 물론, 아군의 실정을 아는 이가 별로 없었다. 전선에 도착한 지 한참이 지나도록 적진의 새 사령관이 백기로 바뀐 사실을 알고 보고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을 정도였다. 다음으로 군심(軍心)이 흩어졌다. 납득할 수 없는 풋내기가 지휘관이 되자 군사들은 더는 일할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상황이 이런데도 조괄은 인사 단행을 명분 삼아 부대 배치를 변경하고 자주 출격했다.

다른 한편, 진군의 대장 백기는 조나라 장수 조괄의 약점을 검토한 끝에 새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새 작전의 핵심은 거만한 적장의 판단착오를 유도하는 것. 진군이 마치 전투에 패배해 퇴각하는 것처럼 보여 적군을 진군의 주력 진지 앞까지 깊이 유인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조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동시에 그 보급선을 끊고 분할 포위해 철저히 섬멸한다는 방침이었다. 이를 위해 백기는 진군 기병대를 아군의 좌우측 끝에 배치했다가 퇴로를 차단하는 한편, 다른 기병부대로 하여금 조군의 중앙으로 돌진케 해 적군을 둘로 갈라놓았다. 더욱이 백기는 가짜 작전 명령서를 적군 진지에 흘려 조군의 판단착오를 유발하기도 했다.

 

“40만 모두 산 채 묻으라!”

결국 계략에 말려든 조군의 주력부대는 무모하게 적진으로 진격했고, 진군 주력진지 앞에서 포위당하고 말았다. 때를 같이해 진군의 기병대는 조군의 보급로 겸 퇴로를 끊었다. 전선 양쪽으로부터 압박해오는 진군의 포위망은 조군에게 위협을 가중시켰다. 궁지에 몰린 조괄은 인접한 제나라와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제왕은 손쉬워 보이던 양곡 차관마저 거절했다.

보급로와 양곡 배급이 끊긴 지 46일. 조군 진영에서는 굶주린 병사들 간에 식인(食人) 사태가 발생했다. 조괄이 금지령을 내렸으나 소용이 없었고 군기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다. 극한 상황에 빠져든 조괄은 조군을 네 개 단위로 개편해 진군의 포위망에 돌파구를 뚫고자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조괄 자신이 근위대와 함께 진두에 서서 돌진했으나, 비 오듯 퍼붓는 진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졸지에 총사령관까지 잃은 조군은 각 부대가 제멋대로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40만 대군이 샅샅이 흩어져버렸다.

   

전국시대 초나라 시인으로 난세를 비관해 자살한 굴원(오른쪽)과 그의 자살로부터 유래된 단오절(음력 5월5일) 머리감는 행사.

진군 대장 백기는 갑자기 고민에 빠졌다. ‘조나라 사람은 신용이 없고, 조나라 군대는 변심이 특징이니, 관대하게 송환하면 후환이 걱정된다. 분명 더한 혼란이 빚어질 것이다…차라리 항복한 40만을 모두 생매장하는 게 옳다….’ 백기의 이런 생각은 곧장 말로 바뀌었고, 잔인한 명령은 즉각 집행됐다. 종군한 어린이 240명만이 본국으로 송환되었을 뿐, 성인 장병 전부가 생매장되고 만 것.

진군의 이러한 처사는 후대에 장평의 싸움이 승리의 역사로 기록되지 않고 ‘대학살의 역사’로 남게 된 불씨가 되었다. 진은 그같이 잔인한 방식으로 통일을 성취했으나, 그 때문에 곧이어 신속히 멸망했다. 시대적 요청에 부합하는, 바람직한 천하통일은 한참 후인 한(漢) 왕조에 의해서 이뤄졌다.

 

통일 희비 예감한 선지자의 고뇌

통일 전야의 망국적 부조리, 폭력과 기만으로 도래할 통일, 그리고 천하대란의 재연에 대한 우려…. 이러한 절망적인 내일을 예측하며 고민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전국시대 말엽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 기원전 340~278)은 나그네로 방랑길에 올라 통일 이전에 자살했다. 그 길 밖에는 자신의 절망과 고민을 알릴 방법이 없었다. 노중련(魯仲連)이라는 고대 지성인도 있었다. 사심 없는 경세(經世)의 언론활동으로 최선을 다하다 진의 6국 정복을 보자 통일 후에 은거했다. 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세상을 떴는지 아무도 모른다.

조정의 부조리에 실망한 애국적 시인이나 양심적 선지자들은 유랑과 도피, 방랑과 은거로 생을 마쳤다. 다만 시인의 비애는 절망적인 국가의 장래에 대한 문제제기를 남겼으며, 한편으론 영혼의 일깨움으로 살아남았다. 우리에게 단오(端午)의 유래와 관련해 널리 알려진 굴원의 비극적 생애도 그러했다.

초(楚)나라 회왕(懷王) 때의 일이다. 국익의 타산에 능란하다고 자부하던 회왕은 국가간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의에 대해서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는 종전부터 우호친선 관계에 있던 제나라를 멀리하고, 국가이익 계산에 따라 새로이 진나라에 접근하려 했다. 그러다 제왕이 간곡한 친서를 보내오자 이에 감동한 나머지 일시나마 다시 뜻을 바꾸는 등 제 마음대로였다.

그후 진의 소왕(昭王)이 즉위해 초의 회왕에게 푸짐한 선물을 보내면서, 천하절색인 여자도 제공하겠으니 황극에서 회맹(會盟)하자고 했다. 유혹과 호기심에 이끌려 회왕이 회견장에 나갔더니 약속했던 대로 미인이 제공됐고, 더불어 진의 영토도 일부 할양받았다. 그러자 분노한 제나라 왕이 한(韓)·위(魏)군과 함께 초나라를 공격했다. 다급해진 회왕은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태자를 인질로 보냈다. 하지만 진나라로 간 태자가 도망쳐 돌아오자 이번에는 진나라가 공격해왔다. 위급해진 회왕은 이번에는 그 태자를 제나라에 인질로 보내면서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진왕이 초왕에게 친서를 보내 “최근의 불신을 씻고 역사가 오랜 우호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무관(武關)에서 회맹하고 싶다”고 했다. 회왕은 이를 두고 신하들과 대책을 논의했으나 ‘진을 믿을 수 없다’ ‘진의 노여움을 사서는 불리하다’는 등 격론만 무성했다. 결국 회왕은 “원래 나는 대국적인 국가이익을 가장 진지하게 생각해왔다. 외교에서는 정상회담이 중요하고, 절차와 체면이 상호 존중돼야 한다”고 결론 내리고 회맹장으로 나가기를 결심했다.

 

시인의 절망

자고로 유치한 영웅주의의 자고자대는 망조의 극치다. 일부 신생국의 여·야 지도자가 테러 정권을 상대로 ‘언제 어디서나 정상회담’을 응낙하고, ‘조정력을 발휘’하여 떨어진 인기를 만회해 보겠다고 하는 허망하고도 가련한 모험적 발상을 하지만 이는 결국 망조를 부를 수밖에 없다. 아닌게아니라 초나라의 회왕이 회담장에 나가보니 진왕은 나오지 않았고, 그 대신 사령관이 ‘모시러 왔다’며 사실상 회왕을 체포해 진의 수도로 압송했다. 회왕은 진나라에서 연금상태로 억류된 채 속국왕 취급을 받았다.

   

한편 국왕 납치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은 초나라에서는 진나라와 전쟁을 벌이자는 여론이 무성했다. 하지만 이는 승산이 없었고, 회왕의 신변안전 문제도 있고 해서 이럭저럭 시일만 보내는 상황이 계속됐다. 결국 제왕에게 애원해 그곳에 인질로 가있던 태자를 돌려받아 즉위시켰으니 그가 바로 경양(頃襄)왕이다. 회왕 자신은 진을 탈출하려다 다시 체포된 뒤 신병으로 객사하고 말았다.

그 무렵 제나라와의 친선 외교를 주창하며 초나라 조정에서 법령 등 공문서 작정에 종사하던 굴원은 개인적으로는 신의와 성실성을 인정받아온 신하였다. 하지만 그는 질투심 많은 소인배들의 참언(讒言)만을 믿은 회왕에게 항상 버림받았다. 무관 사건 때에는 극구 만류론을 개진했으나 회왕은 이를 무시했다. 굴원은 부당하게 소외당할 때마다 시를 쓰면서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그는 국왕의 반성을 바라면서 국가의 장래를 걱정했다.

하지만 그는 시종일관 다정다감한 애국시인이었을 뿐,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 방안을 제시할 수는 없었다. 경양왕 즉위 후에도 거듭된 참언으로 피해를 보고 좌천당하자 결국 굴원은 조정에서 사퇴했다. 왕가 출신이면서도 방황의 여로에 올라 장강변을 맴도는 나그네 신세가 된 것이다. ‘초사(楚辭)’라는 시집의 핵심을 이루는 작품 ‘이소(離騷)’도 바로 이때 나왔다. 초췌한 몰골로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목적지 없이 강변을 거닐던 굴원은 소리 높여 읊었다.

“세상은 혼탁하여 아는 이 없구나. 마음의 대화도 들어주지 못하니 어이 하리. 돌아가야지…희망도 두려움도 없거니 죽음이라도 찾아가야지….”

그러고는 돌덩이를 모아 안고 동정호(洞庭湖)로 흘러드는 멱라(汨羅)강 깊은 곳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때가 음력으로 5월5일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그날이 오면 굴원의 자살을 슬퍼하며 강물에 배를 띄우고 영혼이나마 달래보고자 음식물을 마련해 제사를 지냈다. 그후 단오절 행사는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펴졌다. 오늘날에도 단오절에는 호남성 멱라 강변의 굴원기념관에 수만명의 인파가 구름같이 모여 비애의 애국시인을 기린다.

 

그리고 2300년 후

굴원의 고사는 우리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 진이 초를 우롱하다 정복했듯, 100년 전 구한말 일본 군국주의는 조선 왕조를 멸시·우롱하다 강제병합했다. 혈맹관계이던 중국이 발 벗고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오늘날 형세는 퍽 달라졌다. 나폴레옹이 우려했던 ‘잠자는 사자’는 거듭된 자극으로 다시 눈을 뜨고 있고, 해양세력 또한 그 위세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 중간에 있는 나라는 어떠한가. 하나가 둘로 갈라져 통일의 기회를 거듭 놓치더니, 한편은 개인 우상화와 권력세습, 인권유린을 일삼고 있고, 다른 한편에선 기회주의와 과거의 정보정치 및 기득권 집착이 만연하고 있다. 앞으로도 외세의 이익에 의해 어떻게 이용당할지 속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세계사의 추세로 보아 명백한 사실이 하나 있다. 단일한 세계시장이 지구적으로 형성되면서, 개방된 시장경제가 계속 확대될 것이라는 점이다. 기아와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누구도 그 추세를 거스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결국은 인권 옹호 기조의 민주주의 정착이 요청되게 마련이다. 소련의 붕괴와 새 러시아의 등장, 그리고 동구의 변혁과 개방의 확대가 과거의 온갖 장벽을 넘어선 인류의 진로를 가리킨다.

우리는 이제 100년 전 ‘은자의 왕국(The Hermit Kingdom)’이 아니다.

 

진(秦)의 통일과 멸망이 남긴 교훈 일 벌이지 않고 쉬는 게 난세 수습 첫걸음

난세에서 살아남은 국민은 무엇을 바라는가. 난세의 위정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진시황의 중국 통일과 그 통일제국의 멸망은 이에 대한 답을 던져준다. 선군(先軍), 강권 정치로 통일한 지 15년 만에 무너진 진제국, 그리고 ‘국민과 더불어 휴식한다’는 ‘與民休息’ 정책으로 태평성세를 이룬 한(漢) 유방. 그들이 통일의 과제를 안은 한반도에 던지는 교훈은 무엇인가.

진시황(秦始皇·기원전 259~기원전 210)은 여러 나라가 할거하던 중국을 무력으로 통일한 선구자이자 중국 문화권 최초의 통일제국 창건자였다. 개인적 선악시비의 평판을 초월해 그가 역사에 특기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진이 중국을 통일한 해는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통일전쟁을 본격화해 6국(韓·魏·楚·燕·趙·齊)을 각개격파로 정복할 때까지 17년이 걸린 셈이다. 그는 이로써 500여 년 춘추전국의 난세에 종지부를 찍은 ‘영웅’이 됐다. 통일제국 진은 진시황 사후 15년을 넘기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지만, 그는 분단국가의 통일 여정에서뿐 아니라 통일국가의 멸망 과정에서도 중요한 시사적 교훈을 후세에 남겼다.

우선 춘추전국의 통일 과정을 보자. 6국이 멸망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많은 사람은 진시황의 무력을 첫손에 꼽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6국을 멸망시킨 주체는 6국 왕조와 신하 자신이었다. 그들은 전쟁 내내 ‘바보들의 행진’만 거듭했다. 침략자를 욕하는 것은 아이들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엉터리 지도자를 추대하고 맹종해온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 초나라의 애국시인 굴원(屈原)이 멸망 전야의 정치현실에 절망, 책임을 느끼고 멱라강에 투신자살한 것도 그 때문이다. 반면 진시황은 무력행사 이전에 항상 외교와 모략을 선행함으로써 희생을 극소화하는 동시에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개혁, 또 개혁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가 동방 진출을 본격화했을 때 이에 맞서 총동원 체제로 저항한 나라는 조(趙)와 초(楚)뿐이었다. 두 나라는 면적과 인구 등 모든 면에서 덩치가 가장 컸으나 지도부가 어수룩해 온 나라에 패배주의가 만연해 있었다. 나머지 나라들의 지도부는 부패와 무능, 기회주의에 찌들어 저항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멸망의 길을 걸었다. 전국시대 6국의 공통점은 간단명료하다. 한결같이 개혁에 실패한 국가라는 사실. 6국의 무지몽매한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욕심만 챙겼을 뿐 유능한 개혁 인재의 등용을 외면하거나 방해했다.

그에 반해 진은 지도부의 확고한 개혁의지 아래 생기와 의욕이 넘쳐흘렀다. 상앙(商?) 이래의 개혁 성공과 그 지속은 노력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회의 증대’를 확신하게 했고, 천하를 향한 ‘개방적 인재등용’의 길을 열었다. 진나라와 6국 사이의 이러한 대조는 향후 천하통일의 주인공이 과연 누구일지를 예언하고 있었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출현시킨 진제국은 고대 중국 문화권에선 최초로 중앙집권적 전제 군주제하의 통일 관료국가였다. 이는 중국과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특기될 만한 ‘대사건’이었다.

중국은 현재 한(漢)족을 비롯한 56개 민족을 아우르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이자 13억명을 거느린 세계 최다 인구 국가다. 국토의 총면적은 960만㎢로, 러시아와 캐나다에 이어 세계 3위. 중국은 이러한 양적 거대함 이상으로, 문화와 국민 자질의 질적 우수성 때문에 세계의 이목을 끈다. 이미 중국인은 나침반·화약·종이·활자 인쇄술이란 4대 발명품으로 인류문명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오늘날은 또 어떤가. 오랜 ‘정체의 잠’에서 깨어난 발랄한 기상으로 온 나라가 약동하고 있다. 미국 하원은 중국의 ‘초강대국’ 진입은 ‘예측’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진단한다.

이런 관점에서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한(漢)민족 고대사에 기록된 맹목적인 혼란과 불안의 연속, 즉 난세(亂世)에 종지부를 찍고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는 주(周) 왕조에서 시작되고 춘추전국시대에 갈피를 잃은 종법제(宗法制·문벌주의)와 분봉제(分封制·할거주의와 당파싸움, 지역감정 등)를 전국적 범위에서 타파하고 일소했다. 그 대신 군현제(郡縣制)와 율령제(律令制)를 실시했다. 이는 중앙에서 능력 위주로 관리를 선발 임명해 지방에 파견하고, 법률과 규칙 및 특명에 따라 일하게 하는 참신한 제도로, 오늘날 일부 국가에서 관찰되는 한(恨)풀이, 분풀이식 인사나 사찰, 정보정치에서 비롯된 정실 인사와는 판이했다.

   

진시황은 통일과 동시에 법과 규칙,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했고, 특히 문자 표기의 통일을 이룩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국어의 맞춤법을 통일하고 로마자 표기에서 나타나는 혼란을 정리해 후대 교육에 기여하는 것과 같았다.

 

공(功)이 더 큰 ‘희대의 폭군’

진의 통일은 한(漢)민족의 생활영역을 확대하고 국가의 경계선을 명백하게 했다. 이로 인해 백성에게선 ‘우리는 하나’라는 민족의식이 생겨났다. 외적을 막기 위한 국방관념도 정착됐다. 전국시대에 산발적으로 축조하다 중지된 만리장성을 보수하고 연결해 비록 토성이기는 했으나 제대로 면모를 갖춘 것도 바로 이즈음. 만리장성은 그후 명(明) 왕조 때 벽돌 등으로 개축됐다.

진시황은 산업과 경제의 중앙집권화에도 특별한 관심을 표명했다. 경제력을 수도권으로 집중시켜 일부 야심가들의 지방할거를 예방한 것. 지방의 부호들은 자신들의 수공업 시설을 정리해 서울로 이사를 와야 했다. 또한 각지의 목축업자와 광산 개발자 등 신흥재벌을 중앙으로 초청해 상여(賞與)를 베풀면서 조정의 의식이나 회의 등에 참석케 했다.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해 물자유통을 원활하게 한 지방 관료에겐 이를 그의 치적으로 인정했다. 변방의 이민을 장려하고, 이주민에 대한 보호에도 노력했다. 오늘날의 광둥성과 랴오닝성 지역에 농부들을 처음 이주시키고 농토를 개간케 한 주인공이 바로 진시황이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에 대한 호칭이 ‘차이나’ 또는 ‘시나’로 표기되는 것은, 역사상 처음으로 진(秦=Qin 또는 Chin)이 중국을 대표해 그 존재를 세계에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에서 진시황의 위대성은 그만큼 크다. 특히 마오쩌둥 이후 현대 중국에선 진시황의 역사적 역할을 유난히 높게 평가한다.

사실 마오쩌둥 이전의 중국과 조선 왕조는 진시황을 형편없이 폄하했다. 그는 항상 ‘희대의 폭군’으로 묘사됐으며, 그의 학정은 중국의 발전을 지연 또는 추락시킨 것으로 비난받았다. 그러한 ‘격하작전’에는 유학자들이 선두를 섰으며 관계(官界)의 위선적 왕도(王道) 정치론자들이 합세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진시황의 통일 정치에는 분명 공(功)과 과(過) 양면이 있다. 하지만 공이 더 컸다는 게 현대 중국인의 시각이다.

진시황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그는 어려운 환경을 매번 노력으로 돌파한 난세의 정복자였다. 그런 까닭에 그는 자기를 박해했거나 반대한 자들은 모조리 죄인으로 단정했고,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그는 혼란과 난맥 속의 시대 환경에서 기강을 확립하고 질서를 정립하려면 어쩔 수 없이 강권을 발동해야 한다고 믿었다.

결국 진시황의 통일제국은 15년을 넘기지 못했다. 짧은 정권수명은 독재와 강권, 그리고 정보정치의 공통적 말로이지만, 진제국의 멸망은 진시황의 개인적 실정(失政)에서 연유한 바가 컸다.

계속되는 난세에 지치면서 살아남은 한국인은 흔히 ‘어디를 바라봐도 제대로 되어 나가는 것이 없다’고 개탄해왔다. 피로곤비(疲勞困憊)한 그들에게는 새로운 동원보다 제자리를 찾아가기 위한 마음의 여유가 필요했다.

춘추전국 말기의 중국인 또한 그러했다. 옥스퍼드대가 펴낸 사전 해설에 의하면 ‘난세(turbulent days)’란 ‘정신 차릴 수 없는 돌연한 변화와 혼란의 연속, 그리고 국론 분열에다 드물지 않게 터지는 폭력사태가 거듭되는 세월’이라고 씌어 있다. 간명하고도 빈틈없는 설명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분열된 상태에 시달려온 사람들에게 태평성세의 안거낙업(安居樂業)을 보장하려면 새로운 ‘건설’에 앞서 우선 ‘휴식’부터 부여해야 한다.

독일 통일의 경우가 그러했다. ‘서독 헌법 체제로의 흡수’라는 형식으로 격동 없는 휴식을 우선 선택한 것. 한마디로 독일의 통일정치는 ‘보살핌의 정치’였다. 그것은 흡수 통일의 중심인 서독이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 사회복지가 결합된 사회국가(Der Sozial staat)였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선군(先軍) 정치의 전국적 확대를 의미했다. 곳곳에서 거대한 토목공사를 벌였으며 천정부지의 세금부담 증대, 징수와 징발의 남발, 무자비한 징용과 징병의 강행 등 서민들로서는 도무지 감내할 수 없는 부담을 계속 강요했던 것이다.

 

천하통일 15년 만에 ‘천하대란’

막다른 절망은 최후의 용기를 부르는 법.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진시황이 죽고 아들 호해(胡亥)가 2세 황제로 즉위하자(기원전 210년), 천하대란의 여명은 새롭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중국 산시성 시안에 있는 진시황릉 병마용. 진시황은 죽어서도 전쟁을 꿈꾼 것일까?

기원전 209년 7월 장마철에 징병돼 북쪽으로 끌려가던 농촌 청년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소문은 전국적으로 호응을 얻으며 삽시간에 퍼졌다. 9월에는 벌써 항우(項羽)와 유방(劉邦) 등의 세력이 등장했다.

진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천하통일 후 15년을 넘기지 못하고 기원전 206년 멸망했다. 그 다음해부터는 항우와 유방 간의 초한(楚漢)전쟁이 벌어져 3년을 끌었다. 진의 통일제국은 또다른 천하대란으로 이어지면서 합계 6년간의 난세를 초래한 셈이다.

진의 통일이 난세 수습에 실패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방이 창건한 한(漢) 왕조는 국민이 갈망해온 시대적 요청인 태평성세를 이룩했다. 그 비결은 바로 ‘국민과 더불어 휴식한다’는 이른바 ‘여민휴식(與民休息)’의 실천이었다. 이는 이미 왕조 초창기에 정책 기조로 확립된 것이었다. 한 왕조는 새 일을 벌이지 않았으며, 말 바꾸기를 하지 않았다.

서구의 현대 학자들은 ‘정치학의 어머니는 역사’라고 단언한다. 또 역사적 교훈을 존중하는 중국의 전통적 문장학에서는 ‘옛일을 말하면서 오늘의 시사 문제를 평론한다’는 이른바 ‘담고론금(談古論今)’을 중시한다.

춘추전국의 난세에 뒤이은 진시황의 통일천하 전후사는 21세기 남북통일을 앞둔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시사적 교훈을 던져준다. 시대환경의 변천과 입지조건에 따라 조금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자타(自他), 고금(古今)의 경험에서 배우지 못하면 유사한 과오는 언제든 되풀이될지 모른다.

 

오스트리아의 경험

일찍이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정치적 생애를 회고하면서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에서 배운다지만, 나는 남의 경험에서도 배우기를 즐겼다”고 갈파했다. 한국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기성찰’도 중요하지만 ‘주변관측’에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해야 할 시점이다. 반도국가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외교적 자세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분단이 타율적으로 진행됐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따라서 듣기에만 흐뭇한 ‘자주통일’ 구호에 현혹당하지 말아야 한다.

고대 중국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외세의 간섭 없이 이뤄졌다. 당시 통일에 필요한 조건은 두 가지뿐이었다. 중심 국가로서의 종합국력 증대, 특히 무력의 강화와 민심(民心) 장악이 바로 그것. 민심의 장악은 통일국가의 난세수습과 국정안정 과정에 있어 필수 조건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과 미국의 군사적 점령하에 분단됐던 독일어 사용국 오스트리아의 통일 과정을 분석해보자. 우선 그 나라의 좌우 정치인들은 ‘외세의 작용’이라는 분단 현실을 직시하고 성급하게 ‘자주통일’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 무렵 미·소·영·불은 오스트리아에 대해 전범국가인 독일제국과 같은 국가라는 의미에서 징벌적 성격의 ‘분할점령’을 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독일제국을 약화하기 위해 중립국으로의 분리 독립도 구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의 좌우 정치세력은 진정한 자주통일을 위해 한길에서 협력했다. 즉, 속으로는 자치능력을 배양하면서 밖으로는 외세를 자극하지 않고 체면을 세워줬고, 변화하는 국제 환경에 세련되게 적응하는 ‘솜씨’를 보였다. 그들은 일단 연합국과의 협상 대상을 단일화하기 위해 좌우 합작을 형성했다. 완전한 통일·독립에 앞서 사실상의 단일 정권을 수립한 것. 이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평화애호 중립의지’를 한결같이 홍보하고 또 법제화했다. 외교에서는 주변 세력의 어느 일방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있는 자세를 고수해 모든 이해 당사국으로부터 노여움을 사지 않았다.

이렇듯 슬기롭고 자주적인 정치환경 적응 능력 덕분에 오스트리아의 통일·독립은 1955년 5월 ‘1+4’의 합의로 실현될 수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광복 직후의 남북한은 제각기 ‘일변도 외교’와 ‘사상투쟁’의 고집스럽고도 우매한 경쟁에 몰두하고 있었다. 복수(複數)의 외세에 의한 민족해방이라는 희비 쌍곡선의 현실을 몰각하고 있었던 것. 결과적으로 한반도는 광복 직후, 냉전체제 돌입 직전의 시점에서 남북통일의 첫 번째 기회를 놓친 셈이다.

   

독일인의 지혜

그렇다면 독일의 경우는 어떤가. 독일의 국토분단은 애초에 복수의 외국 군대에 의한 분할 점령이라는 징벌적 의미가 컸으며, 독일의 재통일은 동서독 쌍방 주변국들의 한결같은 경계 대상이었다. 그후 미소의 ‘동서 냉전’이 표면화하면서 쌍방이 각기 자국 점령지역을 군사동맹의 전초 기지로 이용했다.

그러다 1989년 12월3일, 드디어 경천동지의 역사적 전환이 도래했다. 소련의 붕괴 기운과 동구의 대변혁을 배경으로 지중해의 말타 섬에서 회동한 미소 정상이 ‘냉전의 종식’을 공식 선언한 것이다. 이에 따라 소련 점령하의 동독과 미국 조종하의 서독은 각기 냉전시대의 이용 가치를 상실했다. 나아가 주변국들에 대한 ‘무해성’만 보장된다면 독일 통일도 마다할 바 아니라는 국제정치의 통념이 묵시적으로 성립됐다.

냉전 종식을 전후한 이러한 국제적 환경을 양독(兩獨) 정치인과 국민은 슬기롭고, 또 침착하게 이용했다.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재건, 개혁), 동구의 대변혁(자유화, 민주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서산낙일(西山落日), 냉전의 종식과 같은 객관적 통일조건의 성숙에 대해 양독 정치인들은 영토론과 민족주의의 포기, 주변국들에 대한 전방위적 친선외교로 응대했다.

우선 동독의 통일운동은 소련의 의심과 반발을 유발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동구 각국의 보편적 개혁운동과 보조를 맞춰 나갔다. 처음에는 통제된 계획경제의 관료주의적 비효율성을 문제 삼다가, 점차로 민주화·자유화 요구를 부각시켰다. 군중 동원에서도 결코 정당이 서둘러 표면에 나서지 않고, ‘연대(連帶)’나 ‘시민 포럼(Forum)’을 앞세웠다. 객관적 조건 형성을 보아가면서 점차로 통일운동의 깊이와 넓이를 심화·확대해나간 것이다.

 

한반도의 경우

한편 서독의 경우는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사회복지에 걸친 3위 일체 ‘사회국가’ 건설이라는 통일조건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이는 동독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매력적이고도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결국 독일의 통일은 ‘2+4(분단 쌍방에 더해 미·소·영·불)’의 납득과 합의조인에 따라 햇볕을 봤다. 1990년 10월3일의 일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해방’의 이름으로 분단된 나라의 통일이, ‘징벌’ 대상국가의 통일보다도 더 늦어지는가. 왜 동북아의 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나라는 냉전의 종식이라는 세계사적 전환기에 도래한 통일 기회를 놓쳐야 했던가. 당시의 시대 환경이 독일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었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분단 쌍방에 걸쳐 단결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즉 민족적 구심을 만들어낼 지혜와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부터 나무라야 할지 모른다. 한편으론 정치세력의 기득권 고수와 이기주의적 타산, 서민층의 지도자 선출 오류 등을 지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는 피상적 분석일 따름이다.

우리 겨레의 자치능력 부족과 같은, 이런 분석의 밑바닥에는 거듭된 민족적 비극으로 말미암은 ‘불행한 역사’가 가로놓여 있다. 이는 현재도 우리 모두가 딛고 서야 할 문제점이기다. 또한 그 이상으로 유의해야 할 점은 반도국가가 처한 지정학적 조건이다. 즉 해륙(海陸) 쌍방의 열강 대국들이 각기 이 반도를 바라보면서 간직해온 역사의식과 좌표인식이다. ‘역사’는 민족공동체가 잊지 못할 전쟁과 평화, 문화와 교류, 국책과 관행에 얽혀 있다. 한편 ‘좌표’는 개인의 처지와 인간관계처럼, 국가의 지리적 위치와 국제 관계에 결부되어 있다. 자타의 그 주체적, 객관적 조건이 얽히고설켜 한반도의 역사는 불행을 거듭해온 것이다.

오늘날 ‘이데올로기’적 대결로 점철됐던 동서냉전은 확실히 사라졌음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최근에도 일반 중국인과 러시아인은 북한의 편의를 돌보는 일이 마치 자기들의 당연한 의무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거꾸로 이런 역사의식과 좌표인식은 남한 동포들에게도 살아 있다. 비록 늘 자각하진 않더라도 잠재의식 속에 건재하다가 가끔씩 고개를 들고 작동한다. 고정불변은 아니겠지만 바로잡히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2+4’의 현실 인식과 자주정신

1945년 8·15광복은 잠깐 동안의 환희에 이어 오랜 기간의 고통과 비애를 맛보게 했다. 만약 앞으로 도래할 남북통일마저 그 모양으로, 순식간의 감격에 이은 새 난세의 개막과 더 큰 희생의 전란을 초래한다면 이 민족의 장래는 어찌 될 것인가. 부푼 기대가 실망으로 돌변하여 새로운 부조리와 상승작용을 일으킬 것을 상상하면 그 불행의 질과 양은 실로 엄청날 것으로 예견된다.

   

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은 서울 거리.

그러한 ‘마이너스 사태’의 발생을 예방하려면 이미 언급했듯 통일 직후의 정책 기조가 ‘휴식’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즉 보살핌과 조정의 정치가 필요하다. 민심이 통일에 기대하는 바는 난세 수습과 태평성세이기 때문이다. 절대 ‘새 건설의 시작’이니 ‘주체혁명’, ‘과거 따지기’ 등을 선행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인권유린과 기아(飢餓)정치의 ‘주체’가 통일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해서는 안 된다. 필요하다면 대국적인 동질화를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이때 집권세력과 정치인의 자질 문제는 특히 중요하다. 독일의 통일 과정을 보면 동서에 걸쳐 사심 없는 ‘공익 우선’의 경향이 뚜렷했다. 서독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동독 인민에 대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면서 통일 비용을 서슴없이 감내했다. 동시에 동독을 다스리던 사람들은 조국통일을 위해 그들의 권력, 지위, 특권, 체면 등 온갖 것을 주저 없이 내놓으면서 희생을 감수했다. 지도자 선출에서도 오류란 없었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통일과 독립, 또 이의 안정적 지속을 위한 외교적 필요조건은 과연 무엇인가. 그 답은 한반도의 역사적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반도국가의 내부단결과 자위태세가 만만치 않아서, 이에 대한 강대국의 침략시도가 자신들에게 막대한 지출·희생을 요구할 때다. 중국 수(隋)제국의 양제(煬帝) 후반기 한반도가 바로 그런 시기. 다음으론 해륙 쌍방의 외세가 국경 밖에서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세력균형을 설정할 때, 예를 들면 구한말 러·일 대결과 청·일 대결 국면 당시의 한반도와 같은 경우다. 그 외에 주변 강대국들이 각기 내란이나 분규에 바빠서 반도 진출에 엄두도 내지 못할 때, 주변 경합 세력 중 어느 일방의 침략이나 독주를 방관하지 않을 세계적 규모의 감시·견제가 가능할 때 등이다.

한편 한반도에는 안보를 넘보는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감시망이 있어야 한다. 위기의 도래에는 항상 선행하는 조짐이 있다. 모든 위기는 ‘관계’에서 조성되기 때문이다. 그 조짐을 제때 감지하기 위해선 동물의 촉각처럼 식견에 바탕을 둔 통찰력이 필요하다. 한반도의 경우에도 안보가 위협당했을 때는 항상 위험신호가 있었다. 대륙 혹은 해양의 열강 중 어느 하나만이 반도에서 독주하면 우리나라는 그 종속국이 되든지 또는 식민지가 되는 비운을 면치 못했다.

또한 반도에 들어선 복수의 외세가 경합했을 때 우리 조국은 그들의 싸움판이 되거나 국토 분단을 모면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반도국가의 정부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일변도 정책을 일삼으면, 소외된 다른 쪽의 개입 욕구를 부채질하게 된다. 따라서 어느 일방 세력의 안보 정책에 위배되거나, 그 명예 내지 가치관을 손상하는 감정외교는 절대금물이다. 유사시에 도움을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응징을 당하기 때문이다. 또 ‘자주성’이니 ‘중개’니 하면서 전시효과에 분주하다가는 분규에 말려들어 발뺌하기가 어려워지고 국제적 빈축을 사기 쉽다. 실속 없는 허영외교에 들뜨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독일의 통일조건 형성에서 으뜸으로 중시된 것은 ‘2+4’의 납득이었다. ‘2’란 분단 쌍방이고, ‘4’란 미·소·영·불이었다. 환언한다면 독일 통일은 서독의 흡수력 있는 내실 갖추기와 동독의 현실직시 등 지혜로운 민족의 자체 대응력과 다른 한편으로 역사적 현실의 파악과 순응 등 국제 환경에 슬기롭게 적응해 낸 합작품인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근 100년 민족사에 깃들인 겨레의 비원은 요컨대 ‘난세 수습’이었다. 곧 신뢰의 인간관계와 안정된 사회생활의 영위였다. 그리고 최근에 들려오는 ‘6’이란 결국 ‘2+4’가 아니던가. 오직 그 성원들과 객관정세의 유동성에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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