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갈매기의 꿈

醉月 2008. 8. 29. 07:49


살다보면 온갖 고통과 번뇌, 없는 사람 없습니다.
다만 그것들은 다스리지 못해 자기도 남도 해치는
독(毒)으로 만드는 사람과, 자기 안에서 잘 다스리고 녹여
향기(香氣)로, 활력(活力)으로, 삶의 에너지로 만드는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 향기, 그 활력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은 월요일도 화요일도,
좋은 일도 궂은 일도 다 즐겁습니다
세상이 가벼워지고 있다.
따사로운 봄 햇살에 무거운 겨울 외투를 벗어 던지듯,
삶이라는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싶게,
어깨를 짓누르던 짐을 일제히 내려놓기로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것 같다.
그만큼 밝아지고 있고,
그만큼 경쾌해지고 있다.
  “햇살이 이리 좋은데,
   모두 나와서 그 감촉을 피부로 즐겨 보아요.
   숨은 코로만 쉬는 게 아니잖아요.”
   합창이나 하듯이 모두 모두 가벼운 옷차림들이다.
   노출이 심한 것은 몇몇 스타들만이 아니다.
   동네 산책길에서도 아슬아슬 잠자리 옷을 입은 여인들을 어렵잖게 만날 수 있다.
   벗음의 정도를 내 욕망의 충동과 별도의 항목으로 칠 수 있는 순간들에는,
   참 시원하다고 감탄하곤 한다. ‘그러면 그렇지,
   인간이 천사들처럼 되는 날이 다가오고 있는 거야.
   천사들은 잠자리 날개옷을 입잖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삶의 짐이 몰라보게 가벼워져 버린 이 세상을 진정으로 축하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무겁고 칙칙한 외투를 뒤집어쓴 채,
   인류는 무던히도 고투해 온 게 사실일 것이다.
   삶이란 힘들게 싸워서 쟁취하지 않으면 먹이조차 제대로 구할 수 없다는 것이 기본 윤리 강령이었고,
   생존에의 불안과 염려가 일용할 양식이었다.
  ‘너희들은 원래부터 죄진 자들’이라는 가르침 속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 속에서, 자유의 날개를 묶인 채 신음해 왔다.
    한없이 투명해지고 한없이 가벼워지는 오늘날의 이 증상을,
    오랜 세월 묶여 왔던 해묵은 것들에서 인류가 마침내 해방되고 있다는 신호로서 받아들인다면,
    지나친 비약이 될까?
    비약이 아니기 위해서는 기나긴 말이 필요하겠지만,
    아무리 낮춰 잡아도,
    가벼움은 무거움의 반대말이다.
    밝음은 어둠의 반대말이고,
    투명함은 칙칙함의 반대말이다.
    그러니 이 시대는 옷차림만 보더라도 무겁고 답답하고 칙칙했던
    지난날을 벗어 던지고 있음을 어렵잖게 헤아려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다.
벗어던져야 할 무거운 외투들이 아직도 지구 사회를 그늘로 뒤덮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구 시민의 삶이 경제 위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 틀리지 않는 진술이라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헤아려 보아야 한다.
아직도 먹이가 가장 큰 문제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제, 갈매기 조나단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고깃배에서 빵조각 따위나 얻으려고 설쳐대는 일이란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우리 갈매기들은 빵조각에 울고 웃는 그런 새가 아니라구!   나는 자유를 누리는 새가 되어야 해!”
  “형제들이여, 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해답을 찾는 일이 과연 무모한 행동인가요?
    수천 년 동안 우리 갈매기들은 물고기 대가리나 찾아 헤맸을 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보다 더 귀한 것을 발견했어요.”
  “내가 슬픈 것은, 혼자 지낸다는 외로움 때문이 아니야.  그건 다른 갈매기들이, 

날아오를 때의 기쁨과 영광을 믿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야.
    왜 그들은 마음의 눈을 뜨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내겐 하루하루가 기쁨이고 즐거움인데,
    왜 다른 갈매기들은 그걸 알지 못할까.
    행여 먹이를 얻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고,
    간신히 먹이를 얻고 나서도 그걸 빼앗길까봐 걱정하곤 하지.
    쉽게 화를 내고,
    불만으로 뾰로통해져 하루를 그냥 넘겨 버리곤 해.
    그러다 보니 사는 게 지겨워지고!
    옳아, 맞았어. 그들이 오래 살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야.
    기쁨으로 나날을 채우지 못하기 때문이야.”
   
온갖 틀과 잣대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꿰어 맞추려 드는
지구촌의 갖가지 이상한 풍속도에 반기를 든 채 젊은 날을 보낸 자라면,
아마도 갈매기 조나단의 발언에 박수라도 치고 싶은 통쾌감을 맛보지 않았을까.
이 푸른 별에서의 삶이 너무도 기이하고 낯선 나머지,
자기 신세가 유배당한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의문부호를 품어 본 자들은,
조나단의 소외감과 외로움에 함께 부둥켜안고 울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러나 “갈매기 조나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뜻을 품어라! 야망을 품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구닥다리 교사들이
아전인수(我田引水)인 줄도 모르는 채 가장 즐겨 인용하는 대목인
“높이 나는 갈매기가 멀리 본다”는 경구가 이 작품의 키워드라고 한다면,
“갈매기 조나단”은 기존의 틀과 잣대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
그저 아름다운 한 편의 문학 작품에 지나지 않게 되고 만다.


“난다는 것은 갈매기들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우리들의 됨됨이 자체입니다.”


숱한 오역본, 조나단의 진짜 얼굴은?
높이 나는 갈매기가 더 멀리,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면,
조나단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 리처드 바크는 삶이라는 것을 도대체 얼마나 멀리 보았던 것일까?
거기에 대한 궁금증은 불행하게도,
숱한 오역본들에 의해 우리 독자들에게 닫혀져 버린 감이 없지 않다.
다음의 구절을 보자.
  “조나단, 먹이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에 눈을 뜨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삶을 살아 봐야 해. 
    천 번의 삶,
    아니 만 번의 삶을 거쳐야만 해.
    조나단,
    그러고 나서도 완전함이 있다는 것을 알려면 또 수백 번이나 다시 태어나서 살아야 해.
    그뿐인 줄 알아?
    그 완전함을 찾아내서 드러내 보이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깨달으려면
    또다시 수백 번이나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어야 해.
    뛰어넘어야 울타리가 있는데도 뛰어넘지 않으면 다음 세상에서도 그 울타리는 어디로 가지 않아.”
 
윤회 전생의 개념이 없이는 옮길 수 없는 말들임이 분명하다.
평면적이고 직선적이고 일회적인 삶에 익숙한 기존의 관념에 원문을 끼워 맞추려고 애썼던
번역자들의 고심이 어떠한 뒤틀림을 낳았는지는,
굳이 사례를 들어서까지 증명하고 싶진 않다.
영한 대역본에서조차 이런 구절들에 쩔쩔맨 나머지 엉뚱한 기형아를 낳았다는 흔적이 역력하니,
우리 독자들이 만난 것은 조나단의 진짜 얼굴이 결코 아닌 것이다.
 
숱한 번역본이 나왔음에도,
번역자가 가진 렌즈의 한계 때문에 리처드 바크가 내다보았던 비전들을 축소, 왜곡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왜 열광하는지 영문도 모르는 채 우리 독자들도 덩달아 갈매기들의 날개짓에 환호하고 열광했던 셈이다.
그러니, 렌즈가 비틀리고 왜곡되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출 수가 없다는 것을 실감하기 위해서라도,
‘갈매기 조나단’은 다시 만나야 할 필요가 있는 작품이다.
 
왜곡되고 비틀린 것이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인류의 역사 전체가 송두리째 그런 왜곡과 비틀림의 연속인 것을.
어찌하여 오늘날에 와서야 ‘있는 그대로의 진정한 나 찾기’ 운동이 그렇게도 열심히 벌어지고 있는가?
그 동안의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니었음을 절대 긍정하는 말이 아닌가?
 
비상의 자유를 향한 갈매기 조나단의 날개짓 또한,
바로 그런 진정한 자아 찾기의 여정에 다름 아니다.
그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는,
1970년이라는 발표 시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뉴 에이지적인 사고 흐름의 한가운데에 놓을 수 있는 발언들이다.
  “난다는 것은 갈매기들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우리들의 됨됨이 자체입니다.
    자유를 누리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걷어치워야 합니다.
    종교적인 의식이든, 미신이든,
    난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생각이든…….”
  “나는 완전한 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언제나 어디에서나 자유로운 새다. 그것이 나의 참모습인 거다.”
  “너에게는 자유가 있어.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너 자신,
    참다운 너 자신이 될 자유 말이다.
    그 무엇도 너의 앞길을 방해할 수는 없어.
    이것이 위대한 갈매기가 되는 법이야.”
 
어둠은 별들이 반짝이는 무대 장치를 마련해 주기 위함이고,
새벽의 광휘가 가져다주는 기쁨을 배가시키기 위한 것이리라.
왜곡과 비틀림은 렌즈가 바로잡아졌을 때의 ‘환함’을 경험하기 위해서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틀린 렌즈를 조작한 자들은 자기들이 제공한 것이 올바른 렌즈라고 주장하면서,
굴절 없이 비추어 주는 렌즈를 억누르고 탄압한다.
모두가 다 자기 안의 넉넉함과 자유로움을 보아 버린다면,
렌즈 조작자들이 서 있는 권력의 자리가 더 이상 타당성을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틀린 렌즈를 제공받은 군중을 움직여 굴절 없는 렌즈의 ‘환함’을 경험한 이를 매도하거나,
추방하거나,
심지어는 십자가에 매달기까지 한다.

이런 어둠의 물결 속에서도 밝음을 향해 물살을 거슬러 헤엄쳐 간 이들이 있고,
그 ‘스승들’이 제시한 렌즈와 접속된 자들은,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를 보고 마시고 즐길 수 있었다.
 
“갈매기 조나단”은 지상의 덧없음과 슬픔 속에서도 한 줄기 하늘 기운의 밝음을 맛본 자가
어떻게 자기 안의 하늘을 가꾸고 키우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초월의 아름다움과 원리를 터득한 후 하늘로 간 ‘성자들’이 사랑과 연민을 품고 다시 하강하여,
이 지상을 먹이사슬의 고리로서만 묶어두려는 어둠의 세력들에 의해 갖은 억압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사랑의 씨를 뿌리고 가는지를 아름답게 보여주는 우화이다.
또한,
그 사랑의 씨가 어떻게 해서 어둠을 이기고 계속해서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지,
‘성자의 전형’을 제시해 준다.

윤회 전생을 작품의 배경으로 깔아놓음으로써 석가모니를 떠오르게 하고,
‘생각을 실현시키는 원리’를 말할 때는 예수를 연상시킨다.
시간과 장소의 초월을 언급할 때는 장자를 떠오르게 한다.
종교를 포용함과 동시에 뛰어넘으려는 ‘진리 지향성’의 뉴에이지적 흐름에 살아 있는
황금의 맥을 제시함으로써,
박수 갈채를 받았던 것이다.
 
세상은 더 환해지고 더 밝아지고 더 가벼워질 것이다.
유전자 지도의 완성은,
우리 자신에 대한 설계도나 밑그림이 밝혀진다는 이야기이고,
그것은 곧 그동안의 기나긴 세월 동안 지도도 없이 헤매어 왔다는 반증이 된다.
지도는 우리에게 여러 모로 유익할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지도를 손에 쥔다 할지라도,
영혼의 지도는 어찌할 것인가?
"감추인 것은 드러나리라"는 2천 년 전의 예언이 현실로 다가온다 할지라도,
내 눈의 비늘이 아직 떨어지지 않는 상태라면,
한없이 늘어난 수명도 진정한 기쁨으로 다가오지 못하리라.
내 안팎이 훤히 밝아지게 되는 날,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
우주를 무대로 하는 장대한 삶의 서사시를 어디에서 어떻게 쓸 것인가?
거기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갈매기 조나단”은 앞질러 속삭여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