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편완식이 만난 ''이 시대의 풍류''

醉月 2009. 9. 14. 08:30

북한강변서 ''자연의 삶'' 사는 이광재씨

이 시대의 멋을 나름대로 만들어 사는 이들이 있다. 삶의 계산법이 달라 때론 외골수나 괴짜로 치부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신나고 흥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점에서 자신과 주변을 진정 사랑할 줄 아는 이들이다. 세상 물정과는 비켜가는 삶 같지만 그 속에서 진정한 나를 발견한다. 풍류란 이런 것이 아닐까. 이들의 진솔한 삶 속으로 들어가 본다.


산자락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집도 사람도 사위의 정막 속으로 빠져드는 밤이다. 방 안의 촛불만이 덩그러니 자연의 시간을 거스를 뿐이다. 한 남자가 촛불 앞에서 긴 명상에 잠겨 있다. 이따금 멀리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소리와 산짐승의 울부짖음조차도 명상음악이 되는 밤이다. 지난 20년간 전기도 안 들어오는 북한강변 산속에 은둔해 사는 이광재(70)씨 삶의 풍경이다.
대학 중퇴 후 이씨는 3개월 비자를 들고 미국에 건너가 36개주를 떠돌았다. 알래스카에서 겨우 시민권을 얻어 일본을 상대로 한 수산물 무역으로 입지를 굳혔다. 한땐 녹용 사업에 손댔다가 실패하고 송유관 매설 잡부로 일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잘나가는 사업가였던 그가 50대에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산에 들어와 사는 이유는 뭘까. “어느 날 불현듯 제 삶의 ‘총생산’을 한번 저울질해 봤습니다. 돈을 좇는 불나방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30여년의 여생에 필요한 돈을 헤아려 봤다. 계산기를 두드려 보니 그럭저럭 살아가기엔 부족함이 없다는 판단이 섰다. 과감히 사업을 청산하고 1970년대 말부터 눈여겨보아 두었던 경기도 가평과 접경인 춘천시 남산면 방하리 북한강변 산속에 터를 잡았다. 삽과 곡괭이로 자신만의 공간을 일구는 재미에 푹 빠져 산다.
“누구나 돈과 명예, 권력 등이 삶의 총생산인 양 앞만 보고 달려가기 십상이지요. 눈앞에 보이는 수치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잃어버리고 사는 삶이지요.” 그는 대안경제학자 헤이즐 앤더슨의 경제 논리와 삶의 논리가 결코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숲이 사라지고 골프장으로 바뀌는 순간 GDP(국내총생산)는 증가하지요. 국부의 척도로 사용되는 GDP에서 중요한 것은 생산물과 서비스의 시장가치뿐입니다.” 마치 사람의 성공 척도가 돈과 권력인 것처럼. 잘된 것과 잘못된 것을 가리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온갖 동식물의 보금자리이자 지구의 허파 구실을 하는 숲은 GDP 계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삶에서 중요한 가치들도 마찬가지지요.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들을 찾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는 산속 생활에서 야생 딸기 하나를 따서 아내의 입에 넣어주는 행복 하나를 주웠다. 그는 집앞 강가에 선착장 하나를 손수 만들었다. 보트와 제트스키 등을 갖추고 스킨스쿠버까지 즐긴다. 그는 자칭 ‘20대 레저스포츠맨’이다. 쿼터바이크로 산을 오르기도 한다. “나와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일들이지요. 삶의 희열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20년 세월을 손수 가꾼 터전은 이젠 제법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다. 그는 찾아오는 모든 이들과 자신의 공간을 공유한다. 자연이 준 것이기에 모두의 것이라는 논리다. 작은 방도 몇 개 마련해 묵어 가도록 배려하고 있다. 다만 음식과 간단한 침낭, 쓰레기봉투만 준비하면 된다. 전기가 안 들어오기에 여름엔 반드시 아이스박스에 음식을 담아 와야 한다.

누구나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발길이 이곳으로 이끌렸다면 그것도 인연이 아니냐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을 개작해 읊는다. 행여 이곳에 오시려거든/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오라// 앞산 구름 바다에 빠지려면/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라…. 행여 이곳으로 오시려거든 그런 마음을 가지라는 뜻일 게다.
◇인적 없는 비포장 도로를 한참 달려서야 다다를 수 있는 이광재씨의 삶의 터전. 땅을 파는 일이 자연과 노는 일이라는 이씨에게 유일한 친구는 아이들 관상용으로 키우는 타조와 사슴이다.

속 모르는 주위에선 배나 펜션 영업을 하면 큰 돈을 벌거라며 아까워하는 이들도 있다. 사업을 그만두고 5년간 사업파트너로부터 돈 되는 사업이 있으니 다시 함께 일하자는 유혹도 수없이 받았다.
“땅을 파다가 땀이 나면 제트스키로 물과 바람을 가르고, 물속에 풍덩 뛰어드는 맛을 그들이 알겠어요.” 그가 선착장에 앉아 강 너머 산을 바라본다. 변화무쌍한 안개 그림을 음미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풍경에 빠져든다. 심심할 틈이 없다. 겨울철 언 강 위로 뛰어가는 노루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처음엔 그도 이곳이 답답했다. 머리 위로 나는 여객기만 봐도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다. 두세 달이 지나니 자연에 순치돼 갔다. 이젠 밖에 나가기가 싫다. 집 주위에 심어놓은 배나무와 자두나무조차도 솎아내기가 아깝고, 정원의 잔디도 왜 깎아야 하나 스스로 반문한다. 자연 그대로가 좋은 것이다. 전기가 없으니 자연의 리듬에 자연히 맞춰 살게 된다.
어느 해 장마 때 토사와 함께 흘러 내려온 괴석을 그는 방 안에 모셔놓고 있다. 그 앞에 초똥(촛농)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 부처님 모습 같아 그렇게 한단다.
“저에게 온 물건이니 제가 거둔다는 차원에서 보호하는 것이지요.” 불교경전도 읽고 명상에 빠지지만 특별한 종교의식으로 행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외롭지 않으냐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누구나 외로울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외로움은 자기를 들여다보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요즘엔 트럭과 포클레인까지 구입해 재미 삼아 자연과 놀고 있다.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로 근사한 폭포도 만들 예정이다.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꿈을 꿀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다. 그에게는 미국에서 자립해 사는 딸 둘과 아들 하나가 있다. 모두 미혼이다. 손자 손녀를 기다리는 마음도 담겨 있는 듯하다.
방문자들은 5×7m 크기의 대형 국기와 성조기가 마주보고 함께 펄럭이는 모습에 의아해한다. 3개월마다 교체하는 비용만 70만원이 든다니 괴상한 취미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이다. 마치 한국과 미국의 국경지대를 연상시킨다. “과거사를 무시하는 풍조에 나름대로 일침을 가해 보는 퍼포먼스지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모 대통령이 강원도 초도 순시 때 상공에서 산속 국기가 뭔지 수행원에게 물었다. 내막을 모르니 답할 수가 없었다. 이후 공무원들이 나타나 당장 국기를 내리라고 으름장을 놨다. 그는 김일성이 초도 순시 중이냐고 맞받아쳤다.
“꿈은 꿈꾸는 자의 몫입니다.” 그가 산속 생활을 결행하게 된 배경이다. 어린 시절 추억도 그 언저리에 위치하고 있다. 원산 명사십리를 말 타고 달렸던 기억이 어제 일같이 생생하다. 부친은 원산 아래 성진에서 제련소를 운영했다. 수송 수단으로 말과 우마차를 500여대 가지고 있었다.
그가 말한다. 그는 지금 인생이라는 ‘더 큰 사업’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김평부씨 "자연의 속도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게 좋다”
나는 이 시대의 순수를 꿈꾼다. 세상은 날더러 물정 모르는 소리라 타박하지만 나는 그래도 순수가 좋다. 그렇다고 세상의 때를 탓할 생각도 없다. 세상이 날더러 때를 닦는 걸레가 돼라 하면 기꺼이 그리하리라. 나의 순수는 세상의 흰 캔버스이고 싶다. 사람들이 마음껏 때를 묻힐 수 있게 해 주리라. 누가 뭐래도 나는 나의 내면에 하얀 캔버스를 준비하련다. 그곳에 나만의 순수한 영혼을 그려 보련다. 행여 나의 순수가 편협과 배타의 모습이 될까 두렵다. 산바람과 산새에게 그것을 경계케 하리라.

경기도 고양시 북한산 자락 산 속에 17년간 홀로 살고 있는 김평부(46)씨의 ‘삶의 노래’다. 저녁 무렵 찾아간 그는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문 앞에서 대금연주 삼매경에 빠져 있다. 두 칸 남짓한 방 안엔 다기(茶器)와 그가 즐겨 읽는 책들이 한켠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간단한 취사가 가능한 아궁이 벽난로와 장구과 북 등 국악악기도 눈에 들어온다. 그가 차 한 잔을 권하며 대금산조 가락으로 손님 대접을 한다.

산중에 홀로 사는 이유가 뭘까. “그저 좋아서지요.” 그의 대답이 의외로 싱겁다. 한때 그는 인사동에서 필방을 운영했다. “몇년 장사를 해 봤는데 제 길이 아니다 싶었습니다.” 가게를 때려친 후 그가 자리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평소 단소 등 국악기에 마음을 빼앗긴 그가 대금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선택한 곳이다. 밤이건 낮이건 마음껏 대금연주를 할 수 있는 외딴 산속을 일부러 택했다. “제 유전인자에 이끌려 온 셈이지요.”

그가 20대 초에 만난 ‘큰 인연’도 한몫 했다. “평생 민족운동을 하시던 분이었습니다. 절실한 마음으로 무언가에 매달릴 수 있는 삶만이 진실하고 진정한 ‘참살이’라고 하셨지요.”

그에게 절심함의 대상은 바로 대금가락이었다. 전문 전공자도 아니고 밥벌이도 아니니 주변에선 그를 만류했지만, 스님과 국립국악원 선생님들을 일일이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

“삶도 누구나 홀로 걸어가듯 음악도 결국엔 독공(獨功)의 단계가 필요하지요. 산속 생활은 진짜 제것을 만드는 수련과정이라 할 수 있지요.”

이번엔 밥벌이가 궁금해졌다. “굳이 많은 것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면 하늘이 다 먹여 주시는 것 같아요.” 이젠 제법 그에게 대금을 배우겠다며 찾는 이들도 있고 산사음악회 등에서 그를 불러주기도 한다. 쌀과 반찬이 떨어질 만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그에게서 대금을 배우는 이들이 채워 준다. 실상 그의 산속 생활엔 돈이 그리 많이 필요치 않다.

그는 대금을 분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나무와 함께 숨을 쉰다고 말한다. 들숨과 날숨이 바람이 되고 바람이 음악(소리)이 되기 때문이다. 요즘 그는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마저도 나름의 대금산조류로 풀어내려 씨름을 한다. 대자연의 호흡이 음악이 아니던가. 악학궤범에서도 음악은 자연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한밤중 소쩍새의 울음소리에 애간장을 녹이며 숱한 밤을 지새기도 했다. 그러면서 소쩍새의 울음 어법이 대금주법과 같다는 것도 알게 됐다. 북한산 마루에 달이 휘영청 뜨면 떠나간 님도 떠올려 본다. 그래선지 그의 대금산조에선 애절함과 정한이 물씬 묻어난다.

◇방문 앞에 정좌하고 앉아 대금 연주 삼매경에 빠진 김평부씨. 그는 산바람 새소리에서도 대금가락을 줍는다고 말한다.

어느해 봄날엔 집을 비우고 나간 사이 소쩍새 한 마리가 방안에 들어와 빈방을 지키고 있었다. 잡아도 버둥거리지 않아 몸을 다쳤나 아무리 살펴봐도 이상이 없었다. 날려보내 준 며칠 후 그 소쩍새가 다시 방에 찾아들었다. 괴이하다 싶어 섬뜩한 생각까지 들었다. 다시 숲으로 보내고 얼마나 지났을까. 아침에 방문을 열고 나가니 새 털이 문 앞에 수북이 떨어져 있고 저만치에 소쩍새 한 마리가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다른 들짐승에 당한 모양이었다. 그날 밤 짝을 잃은 소쩍새 한 마리가 방문 앞에 날아와 밤새 구슬피 울었다. 대금으로도 쉽게 잡아낼 수 없는 소리였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애절한 곡조의 전형을 거기서 봤다.

“소쩍새는 아마도 이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익숙한 대금가락을 듣기 위해 왔다가 낭패를 당했는지도 모르지요.” 날려보내 줘도 주변 나무에 한참 앉았다가 가는 폼이 범상치 않았다. 소쩍새도 그와 같은 공간을 공유해 살고 있는 이웃이었던 것이다.

그의 산속 생활은 자연의 속도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행위다. 숲 속 생활은 그의 삶의 속도까지 늦췄다. 찬찬한 삶은 평소 스쳐 지나쳤던 나무들의 꽃과 땅의 움직임까지 보이게 해줬다. 느린 것을 보기 위해선 더 느려져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지극한 단순함과 자유도 자연 속에서 일궈낼 수 있다. 예술과 문학의 근원도 자연과 접하면서 얻어지는 영감이다. 꽃이 피고 단풍이 지고, 눈이 내리면 그것을 어떻게 느꼈고 생각했는지 그 모든 것을 많은 사람들이 잊고 산다. 흙을 만지고 그 속에서 자라면서 벌레는 어떻게 생겼고 꽃과 나무는 어떻게 변해 갔는지 느꼈던,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는 반문한다. 흙과 숲이 부재한 삶에서 과연 제대로 된 감수성과 미감을 발동시킬 수 있을까. 그는 자연과의 친밀성이 사라지고 그런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 서글프다.

“흙이라는 것은 그저 한갓 흙이 아니지요. 흙을 밟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흙이라는 자연풍경이 인간에게 허용하는 놀라운 자연의 감수성과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갖지 못합니다.”

그가 이 시대의 순수를 꿈꾸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을 환기시켜 주기 위해서다. 이제사 산속 생활을 만류했던 시인이자 출판사 경영자인 형님도 “네가 제일 잘사는 것 같다”고 인정해 준다.

“산속 생활을 통해 제가 터득한 것은 우리 음악이 자연을 읽는 명상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음악과 명상이 만날 수 있는 그 지점이 바로 이 시대가 요청하는 풍류지요.”

그는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가 다소 불편하다. 대금은 어쩌면 그와의 숙명적 만남인지 모른다. 대금 제작용 대나무는 외피에 쌍골이 있는 것이 쓰인다. 정상적인 대나무가 아니다. 대금의 한(恨)의 소리가 거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영화 ‘서편제’가 겹쳐진다. 아버지는 딸을 득음(得音)의 경지에 이르게 하기 위해 딸의 눈을 멀게 했다. 딸의 가슴속에 한을 담기 위해서다. 눈먼 딸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득음을 하게 된다. 임종 전 아버지는 딸에게 묻는다. “누가 너의 눈을 멀게 했는지 아느냐”고. 그러나 딸은 이미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내가 너의 눈을 멀게 했지만, 네 노래에는 한이 없구나”라며 눈을 감는다.

그렇다. 그의 대금소리에도 한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다. 먼 동이 트자 명상에 잠겨 있던 그가 북과 장구를 치며 몸을 푼다. 장구와 북의 울림이 몸의 파장과 궁합이 맞기 때문이다. 음의 성질이 강한 대금은 몸이 풀린 오후에 주로 잡는다. 한을 넘어서는 순수, 김평부류의 대금산조가 어렴풋이 그려진다.

“순수를 위하여 떠도는 하찮은 티끌이라 해도 좋습니다. 다만 작은 울림이었으면 합니다.” 그의 진양조 대금가락이 단호한 듯 애달프다.

 

지리산 소리꾼 김소현씨
사람들을 위해 노래하지만…그 놀이판엔 못끼는 '영원한 이방인'
왁자한 사람들이 썰물처럼 떠나갔다. 휴가철 소리를 듣기 위해 찾았던 이들은 온데간데없고 소리꾼만이 홀로 폐교에 남겨졌다.소리꾼은 그래도 그들의 희로애락을 노래한다. 그들의 영혼을 위무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들의 일원이 되지는 못한다. 함께한 놀이판에서조차도 영원한 타자다. 어쩌면 그런 숙명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리꾼은 사람들의 내부에 있지도, 외부에 있지도 않은 경계인이다. 그러기에 자유로울 수 있고, 세상에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세상과 멀어지지 않을 수 있다. 경계에 있기에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북적대는 사람들의 ‘흥’ 속에 있지만 뒤돌아서면 슬픈 현실을 홀로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삶이 힘겨울 때 소리꾼의 소리에 귀를 연다. 그럼에도 소리꾼은 늘 혼자가 된다. 사람들이 나누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소리꾼이게 한다.

섬진강 건너편으로 화개장터와 지리산을 넘겨다볼 수 있는 구례군 간전면 중대리 거석마을엔 자그마한 폐교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운동장 앞으로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이곳에 지리산 소리꾼 김소현(48)씨가 살고 있다. 섬진강변을 10여년간 떠돌다 1년 전 이곳에 정착했다.

전남 영광이 고향인 그는 10대 때 소리를 배우려고 남원의 강도근 선생 문하에 들어간다. 10년 전 스승이 타계하면서 이 산 저 산을 떠돌았다. 생전에 스승은 그에게 “목을 잘못 타고났다”고 했다. 뛰어난 목이 아니라는 말은 그에게 그 어떤 꾸지람보다 충격이었다.

20대에서 30대 후반까지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어가며’ 배운 소리가 아닌가. 라면 하나와 막걸리 한 통으로 하루 끼니를 때운 적도 많다. 잘 먹지 못하니 몸도 아프기 시작했다. 소리를 1년 가까이 할 수 없게 되자 세상을 버릴 생각까지 했다. 소리를 그만두면 인생을 그만두는 것이기에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득음(得音)을 위해 스승의 발자취를 따라 지리산과 섬진강변은 물론 전국의 명찰을 주유했다.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인근 산속에 움막을 짓고 목 만들기에 나섰다. 이른바 독공이다. 소리를 어느 정도 배운 이들이 혼자 깊은 산속이나 절에 들어가 수련하는 것을 말한다.

목을 만들기 위해 성대를 혹사하는 과정이다. 목은 붓고 터지면서 상처투성이가 됐다. 피를 토하기도 했다. 어느 해부터인가 탁하면서도 맑은 맛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생전에 스승이 그토록 바랐던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데가 있는 소리다.

이제야 판소리 등 우리 소리가 왜 거칠고 탁한 소리에 가치를 부여했는지 가슴으로 느낀다. 어쩌면 우리 소리는 목의 상처를 딛고 나온 소리다. 아픔의 미학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상처가 발효된 곰삭은 소리다.

산 허리에 달이 걸리자 폐교를 찾아온 이들을 위해 그가 한 가락을 뽑는다. 폐교 앞마당 평상이 무대가 된다. 그의 소리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깃들어 있다. 모든 희로애락을 주물러 가시는 듯하다. 너그러움이 깃든 슬픔이다. 증오와 분노마저도 풍진이 되는 카타르시스다. 판소리에서 슬픔이 밴 소리를 ‘애원성’이라 하여 최고로 치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명창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에게 배워야 한다는 말이 있다. 많은 이들의 독특한 ‘목’을 배워 목이 다양해야 명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판소리의 동편제 고장인 지리산과 섬진강의 ‘목’을 배운다고 말한다. 그가 지리산 소리꾼으로 남고자 하는 이유다. 1993년에 결혼한 아내도 같은 스승 밑에서 소리 공부를 한 박정선씨다. 중학교 3학년인 딸도 소리 길을 가고 있다.

결혼 후에도 그는 산속에 들어가 100일 공부를 다반사로 했다. 당시 서너 살짜리인 딸이 산에 한번 다녀오면 훌쩍 커버리곤 했다. 한번은 1년 만에 귀가했는데 아빠를 알아보고 ‘아빠’ 하고 달려드는 모습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아빠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자신의 욕심만 차리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산속 생활은 겨우 살아가는 거지나 다름 없는 모습이다. 한때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남원에서 소리품을 팔아 살아가기도 했다. 요즘도 유명세가 없다보니 산속 폐교에서 찾아오는 문하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구례 하동 광양 진주 등에서 40∼50명 정도가 공부하러 간간이 들른다.

◇폐교 운동장에 앉아 먼산을 바라보고 있는 김소현씨. 그에게 산과 물은 소리의 스승이다.

최근 들어선 소리를 듣기 위해 일부러 찾아와 하루를 묵고 가는 이들이 늘고 있다. 초중고생과 선생들을 대상으로 한 외부 강연도 많은 인연들을 만들어 주고 있다.

호남평야를 닮은 서편제가 잔잔하고 부드러우면서 애절해 여성적이라면 지리산을 닮은 동편제는 거칠고 담담하고 거세 남성적이다. 동편제의 지킴이를 자부하는 그는 폐교에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편히 쉬고 배울 수 있도록 공간을 꾸며 놓았다. 밤늦도록 한바탕 소리마당을 벌이고 사람들은 많든 적든 십시일반 놀이값을 내고 떠나면 그만이다. 수려한 경관에 다실도 마련돼 있어 찾아오는 이들은 누구나 차 한잔을 대접받는다. 가족단위로 판소리를 듣기도 하고 직접 배워볼 수도 있다. 감상과 체험을 동시해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겐 감성적 공간이고 어른들에겐 각박한 세상을 잊고 숨 한 번 크게 쉬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소리꾼 김소현씨는 말한다. 그저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그는 딸과 아내는 이곳 생활이 힘들 것이라며 별이 쏟아지는 밤에 많은 별 이야기를 해주는 것으로 미안함을 대신하고 있단다.

폐교엔 달이 세 개 뜬다. 하늘과 연못과 마음에 뜨는 달이다. 그가 달밤에 계곡물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소리를 한다. 현실이라는 삶이 고달파도 계곡물을 보면 그냥 소리가 하고 싶어진다. 홀로 있어도 소리가 절로 나온다. 계곡물 소리에 목을 풀고 손님 찾아오면 차 마시고 소리를 해주는 것이 일상이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해도 소리를 하며 살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를 위로한다. 때론 자신만 위로받고 웃고 사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 되묻기도 한다. 인생을 잘 살고 있다고 자신하지는 않는다. 사실 그동안 통쾌하게 웃어본 기억이 없다. 남들 보기엔 신선같이 여유롭게 사는 것 같아 보이지만 늘 삶이 슬프다.

삶이 화나고 슬프기에 즐겁고 멋지고 아름답게 웃으려고 한다. 목을 깨야 하는 소리꾼은 슬픈 운명의 존재다. 그러기에 매력도 있다. 언젠가는 담담하면서도 멋있는 소리의 세계에 당도하리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문하생들 중엔 함께 갈 수 있는 큰 제목들도 발견돼 행복하다. 내가 못 가면 지리산과 섬진강을 닮은 아이들이 대신 가줄 것이다. 그 어느 도시 속 유명 선생보다도 지리산과 섬진강은 건강한 소리를 가르쳐 준다.

섬진강을 끼고 있는 지리산 자락은 차밭이 좋다. 차가 있어 글이 있고 소리가 있다. 지리산 소리꾼 김소현씨의 소리가 그 속을 바람처럼 흐른다. 풍류다.

 

"음식 만드는 것도 마음자리 제대로 놓는 참선”
지리산 황토선방 주인 이강영씨

권투선수를 하다 접고 서예를 했다. 일필휘지. 불교의 참선과 일맥상통 한다는 생각에 수도승 같은 생활을 하다 지리산에 정착했다. 새벽 3시면 온가족이 가부좌를 하고 참선을 한다. 인간도 자연이기에 그 리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토종먹거리 된장을 제대로 담가 먹을 수 있게 해준 것도 자연이다. 아름아름 된장 주문이 심심치 않게 들어오면서 생활비가 돼준다. 하지만 초심을 잃지 않도록 일정량을 한정하고있다. 자칫 된장이 주인이 돼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살고 싶어 산중에 터 잡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갑갑해서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느냐고. 그러면 이렇게 말해 줍니다. 용틀임하는 희열을 아느냐고. 일탈을 꿈꾸는 지인들이 찾아옵니다. 된장찌개에 산나물만 놓인 소박한 밥상이 좋다고 합니다. 더 많은 이들을 위해 장독대를 넓혔습니다. 소리꾼도 화가도 맛으로 모입니다. 토종의 맛이 풍류를 불러온 것입니다. 사람답게 살게 하는 맛입니다.

경남 함양 지리산 자락 600여m 고지에 자리한 견불(見佛)마을. 아담한 황토집 세 채가 나란히 산 아래를 부처처럼 내려다보고 있다. 신라 때 견불사가 있던 땅이다. 하나는 살림집, 또 하나는 선방, 나머지 하나는 된장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주인장은 10년 전 서울에서 서예학원을 운영하다 그만두고 이곳에 내려와 3년간 손수 황토집을 짓고 사는 이강영(48)씨.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는 이 깊은 산속에 들어와 사는 걸까.

경기도 평택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젊은시절 한때 넘치는 기운과 진취적인 성격을 주체할 수 없어 권투에 몰입한다.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로 글러브를 벗어던진 어느날부터인가 아무 이유 없이 붓글씨가 쓰고 싶어졌다. 치닫는 성정에 무조건 붓을 들었다. 치솟는 힘이 내면으로 잦아드는 기분을 처음으로 맛보았다. 여섯 명의 서예선생을 거쳐 마지막에 초정 권창륜 선생을 만나 10년간 사사했다. 서예대전에 입선하고 서예학원을 운영하면서 오히려 진정한 글씨 쓰기보다 형식과 명리에 휩쓸려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아니다 싶어 공모전에 나가는 일부터 접었다.

일필휘지. 분별심 없이 일념으로 써내려가는 경지에 가보고 싶어졌다. 글씨의 한 획은 결국 정신을 한데 모은 한 점의 확장이 아니던가. 불교의 참선과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다 싶어 선지식을 얻기 위해 해인사 송광사 범어사 등 전국 사찰을 순례했다. 수도승도 하기 힘들다는 하루 만배를 열흘간 행하기도 했다. 며칠 밤 참선으로 지새워도 오히려 긴 휴식을 취한 듯 기운이 샘솟았다. 이즈음 해인사 원당암에 기거하는 혜암 스님을 만나게 된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스님은 그의 참선 공부를 인정하고 유발(머리 깎지 않는) 상좌로 받아들였다. 혜암 스님이 유발 상좌를 둔 것은 그가 처음이다.

얼마 후 서예학원을 접고 두 남매와 아내를 이끌고 산속에 들어가 참선하며 살겠노라 하니 스님은 크게 기뻐하셨다. 혜암 스님 열반 4년 전의 일이다. 스님은 세상일 버리고 지리산에 공부하러 갔다고 주변에 자랑을 하셨다. 원당암에서 생활비를 보태주겠노라 했을 정도.

내가 내마음의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길에 도움은 방해가 될 것 같아 한사코 만류했다. 700만원 달랑 들고 지리산에 들어왔다. 수입 한푼 없어도 자연 그 자체가 ‘큰 수익’이었다. 아이들의 심성교육에 자연 만한 것이 없고, 맛을 나눌 수 있는 토종 먹을거리인 된장도 제대로 담가 먹을 수 있게 해 준 것도 자연이다.

◇된장 항아리에 기대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참선 중인 이강영씨. 그도 된장 항아리도 모두가 참선승이 되는 풍경이다.

콩 가마솥 아궁이에 장작불을 붙인 그가 지그시 눈을 감는다. 끊는 소리만 들어도 이젠 삶아진 정도를 알 정도다. 참선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만드니 먹어 본 이들이 한결같이 마음 편해지는 음식이라 말한다. 음식맛은 마음씨에서 나오게 마련. 이제는 심심치 않게 아름아름 된장 주문이 들어온다. 하지만 초심을 잃지 않도록 일정량을 한정하고 있다. 자칫 된장이 주인이 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지 표명의 하나로 상표도 선(禪)농원이라 붙였다.

최근엔 인근 민가에서 예부터 해먹던 옻된장과 옻술도 만들고 있다. 전통적인 방법을 계승하고 이칠용 문화재전문위원에게 자문까지 받았다. 옻의 탁월한 항암 효과로 요즘 새롭게 주목받는 식품이다. 된장 고추장 간장은 기본 재료인 메주를 우리 콩으로 빚어 황토방에서 띄우고, 직접 만든 죽염으로 버무려 3년간 숙성시켜 만든다. 청정하고 잡균도 적어 사람 건강에 좋다는 해피밸리 해발 600∼700m의 지리산 중산간 지역의 바람과 햇볕, 그리고 맑은 물이 음식에 맛을 더한다. 직접 만든 죽염 젓갈과 청국장도 단골 밥상 메뉴다. 죽염은 각종 영양소 흡수를 돕고 공해물질을 해독해 주는 효과가 있다. 그렇게 좋다는 백령도산 소금을 8년간 간수를 빼서 된장을 만들어도 죽염으로 만든 된장 맛을 따르지 못한다.

그에게 음식 만드는 일은 참선의 연장이다. 음식에 사랑을 담는 것은 자신의 마음자리를 제대로 찾아 가는 노정이다. 그는 아내가 죽염 멸치액젓을 넣어 정성으로 버무린 열무김치에서 아내 사랑의 마음자리를 찾는다.

황토 선방에 앉아 녹차 한잔을 마셔본다. 창너머론 하늘과 산이 넓게 어우러져 펼쳐져 있다. 눈만 맡겨도 마음 크기가 저절로 커지는 호연지기 풍광이다. 꼬불꼬불 아래로 난 길을 따라 이웃들이 바짝 업드려 있다. 마치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이다. 지리산이 그 속에 사는 이를 굶기는 법이 없는 어머니 산이란 말이 떠올려진다.

밤 9시, 이씨 가족 모두가 잠자리에 든다. 산중에서 보는 밤하늘의 별이 유난히 밝다. 도시에서 맛볼 수없는 사위의 어둠이 솜처럼 평온한 밤이다. 새벽 3시쯤 사람 인기척에 눈을 떠보니 선방엔 이미 불이 켜져 있다. 부부와 10대 남매 자녀가 나란히 가부좌를 하고 앉아 참선에 몰입했다. 만물이 숙면할 때 숙면하고 만물이 생동할 때 생동하는 것이다. 인간도 자연이기에 그 리듬에 따라야 가장 효율적이라는 설명이다. 세상에서 얘기하는 아침형 인간이니 저녁형 인간이니 하는 말들은 습관의 노예가 된 인간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선방의 죽비 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른다. 일념은 모든 것을 다 풀리게 만든다. 비료부대를 풀 때 실 한 고리를 풀면 슬슬 풀리듯이. 참선은 순도 높은 금을 만드는 일과 같다. 쓰임에 따라 합금이 잘되는 금이다. 어떤 상황, 어떤 사람을 만나도 구애됨이 없이 모두에게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연과도 하나되는 진정한 자유인의 삶이다. 그에게서 그런 모습을 본다.

오후에 한 무리의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산나물과 된장, 삼겹살과 옻술이 상차림으로 올려지면서 절로 놀이판이 만들어진다. 소리꾼은 신이 났는지 판소리 대신 북 장단에 뽕짝을 불러 젖힌다. 화가는 그런 모습을 신명나는 붓질로 화폭에 옮긴다. 시인도 시심을 풀어 냈다. 귀와 눈이 즐겁다. 너나할 것 없이 어깨가 춤을 춘다. 그도 그 속에 끼여 자연의 리듬이 됐다. 폐쇄된 참선의 공간에서 열려진 풍류의 공간으로 그가 나왔다. 넘나듬에 구애됨이 없는 모습이다.

한바탕 어우러짐이 끝나고 사람들은 토방에 눕는다. 그가 산 아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한 편의 시구 같은 자화상이다.

“부귀영화는 화로 속에 떨어지는 한 송이 눈꽃과 같고/ 다문박식과 뜻 이룬 공명 또한 헛것에 지나지 않네/ 세상일 벗어난 대장부 홀로 가는 길은/ 적적하고 묵묵하고 또한 담담하다.”

욕심은 채워지지도 않지만 버려지지도 않는다. 이런 욕심의 속성을 알고 다스리는 것이 바로 참선이다. 음식으로 말하면 삭히는 일이다. 그와 헤어져 산을 내려오는데 불연듯 그의 말이 되뇌어 진다. 마음을 삭힐 것인가 썩힐 것인가. 콩을 제대로 삭히면 된장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부패해 썩지 않는가. 우리네 인생도 그러하리라.

 

곽연근씨 "타악리듬에 내 신명을 풀어넣는다”
 ◇아프리카 타악기인 젬베를 분선처럼 안고있는 곽연근씨. 그는 아프리카 리듬에서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다.
둥∼둥∼, 덩다∼구다따∼구다다따∼, 쿵쿵따∼쿵따∼. 심장이 박동한다. 몸이 요동친다. 원초적 리듬이다. 한 사나이가 관람석 뒤편에서 공연을 벅찬 감회로 지켜보고 있다. 그의 눈가엔 이슬이 맺혔다. 지난달 국악원 우면당에서 있었던 국악타악그룹 ‘고고앙상블’ 정기연주회장의 모습이다. 국악에 세계 민속음악을 흡수해 리듬을 만들어 온 지 5년 만의 공연무대다. 주인공은 월드리듬 탐닉자로 불리는 곽연근(43)씨.

그는 이날 연주된 곡 ‘국악 타악기를 위한 월드리듬 스케치’를 작곡 구성했다. 봄바(아프리카), 막숨, 발라디, 사히디(중동), 와왕코(쿠바), 삼바 바주카타(브라질), 재즈(미국) 등의 리듬을 국악장단에 조합하여 구성했다. 아프리카, 중남미, 중동 등의 민속 리듬으로 국악에 파워를 불어넣는 작업이다. 마치 하얀 도화지 위에 장단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여러 나라의 장단과 국악의 장단을 함께 스케치해 우리 음악의 미래를 그려보는 일이다.

장단이 몸에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무언의 메시지다. 여기까지 그는 숙명처럼 끌려왔다. 중학 시절부터 귀에 음악을 달고 다녔다. 사우디에서 일하고 돌아온 아버지가 소니 스테레오 카세트를 사온 게 큰 전환점이 됐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음악을 들으며 얼마나 많은 꿈과 상상을 했는지. 그맘때면 갖게 되는 감수성이기는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수많은 것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기쁨, 슬픔, 억울함, 궁핍감, 용기, 분노, 사랑, 아름다움, 감사, 그리움, 황홀함, 외로움, 편안함, 죄스러움, 영광 등등. 이런 것들을 연주로 풀어내고 싶어서 고교 시절엔 그룹사운드에 가담했다. 기타를 치고 있었지만 아무도 드럼을 맡으려 하지 않아 스틱을 운명처럼 잡았다. 대학에선 아예 셋 드럼 솔리스트를 작정하고 클래식 타악을 공부했다. 이즈음 미국 드러머의 대부인 앨런 도슨에 빠져들었다. 대학 졸업 후 당장 그의 곁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경제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차선책으로 그의 수제자인 미즈노 오사미를 사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막노동에서 배달, 트럭운전 등 궂은일을 해가며 3년가까이 미즈노 선생(메이트 뮤직스쿨 ‘앨런 도슨 드럼 스쿨’ 수학) 밑에서 음악성을 담금질했다. 공부를 마치고 앨런 도슨을 만나기 위해 보스턴으로 가려는 참에 그의 타계 소식이 전해졌다. 하는 수 없이 행선지를 뉴욕으로 바꿨다.

아르바이트로는 좋다는 사립학교에 다닐 수 없어 브루클린 ‘퀸스 컨서베이터리 오브 뮤직’에서 대학과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다 보니 편안하게 제대로 잠잔 기억이 없는 5년간의 긴 고행의 과정이었다. 재즈에 빠져들면서 자연스럽게 아프리칸 타악 커리귤럼에 매료됐다. 아프리카 리듬이 가지고 있는 강렬한 음악적인 힘에 함몰되어 갔다.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큰 재즈와 남미 음악이 아프리카 리듬을 도입하면서부터 음악적인 힘이 생긴 것을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아프리카 리듬의 매력은 세계 모든 리듬에 스며들어 월드 리듬의 근간이자 원류로 자리매김 했다는 점이다.

그 원동력은 아프리카 리듬 그 자체가 ‘마음’이기 때문이다. 마음 가는 대로의 음악이다. 그러기에 자유롭고 규칙이 없고 다양하다. 아프리카 음악은 콘서트장에서 연주되는 것이 아니고 늘 함께하는 그들의 일상의 삶인 것이다. 일상 속에 누가누가 춤 잘 추나, 북을 잘 치나가 관건이다. 자연스레 깊이 있는 삶의 표현으로 발전되어 왔다.

아프리카 음악을 알게 된 것은 음악 인생에서 대전환점이 됐다. 음악은 마음의 언어라는 것을 가슴으로 깨닫게 해주었다. 아프리카 음악은 지극히 언어적이다. 연주와 동시에 연주자가 의도하고 살아 왔던 삶의 메시지가 바로 전달되는 느낌이다. 의사소통의 묘미를 알게 해주었다. 연주인에게 이보다 더 좋은 가르침이 있겠는가. 클래식 타악기와 재즈 드럼을 전공했지만 아프리카 리듬을 접하면서 그제서야 국악 장단이 마음으로 들려왔다. 테크닉성이 강한 서양음악과 달리 국악과 아프리카 음악은 호흡과 마음적인 표현에 있어 닮은 점이 많다.

주눅 들게 만들었던 미국음악의 파워도 그 근저엔 아프리카 음악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브라질 쿠바 리듬도 아프리카 리듬이 유입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귀국하자마자 아프리카 리듬을 공부해 보겠다는 이들을 모아 아프리칸 타악그룹 ‘쿰바야’를 결성했다. 세계의 리듬이 용광로처럼 녹아든 우리 혼과 얼이 담긴 우리 음악을 창조하고 발전시켜 나아가기 위해서다. 매주 목요일이면 일곱 단원은 방배동 음악공간인 ‘삐아띠홀’에 모여 연구도 하고 공연도 한다. 한편으론 한양대와 단국대에서 국악 타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아프리카 타악과 리듬론’을 가르치고 있다. 몇몇 훌륭한 연주자가 있다고 해서 한국 음악의 위상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자칫 그것은 음악 생산국이 아닌 단순 소비국으로 전락되는 것이다.

요즘엔 문화적 완제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소명의식이 사로잡혀 있다. 미국이 음악강국으로 가는 과정을 일단은 답습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리카 리듬을 비롯한 월드 리듬을 체계적으로 소화해 미국 음악을 만들어 낸 교육 프로그램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뮤지션들이 유명해진 다음에 만들어진 것은 어쩌면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있게끔 한 프로그램을 들여와야 그들을 넘어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월드 리듬이 그 해답이다. 각 나라 뮤직션을 수용해 미국 것을 만들었듯이, 아프리카 중동 브라질 쿠바 인도 등의 월드 리듬을 우리 식으로 소화해내는 것이 우리 음악의 진정한 경쟁력이 될 것이다. 그냥 가져오는 것은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한 사람의 끼나 연주력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 음악이 월드음악의 주류에 진입하기 위해선 많은 연구서들과 노력들이 병행돼야 한다.

국악이 전통 고수냐 새로운 창조로 갈 것이냐 하는 것은 헛된 고민이다. 월드 리듬을 소화해내 우리 스타일로 만들어내면 그만이다. 그 단서가 서서히 가시화되고 있다. 아내와 아이들에겐 경제적으로 넉넉한 남편, 아빠가 되어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짜릿한 행복감이 몰려온다. 중학교에 다니는 딸아이도 종종 쿰바야 그룹에 합류한다. 요즘엔 내가 이렇게 행복할 수 있나 꼬집어 보기도 한다. 초정공연도 늘고 있다. 전문학교 수준의 학교 설립도 꿈 목록에 추가했다. 이에 대비해 셋 드럼 미국프로그램과 아프리칸 타악 커리큘럼도 완성 과정에 있다. 이미 타악의 기본서라 할 장단악(리듬학 전 3권)을 완성하고 출판을 기다리고 있다. 당장은 돈이 안 되니 선뜻 나서는 출판사를 못 만났다. 타악기의 리듬 개념이 일거에 들어와 드러머는 물론 국악 하는 이들에겐 교과서 같은 책이라 오히려 주변에서 출판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미국 대학에서 재즈앙상블과 첫 합주를 할 때 교수가 한 말이 요즘에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1950, 60년대를 풍미한 재즈뮤지션 아트 블레키의 곡을 비슷하게 연주하려 무던히 애를 썼다. 연주가 끝난 뒤 교수는 잘했다고 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를 던졌다. 아트 블레키는 그렇게 치고 싶었지만 너는 어떻게 칠 것이냐고. 그것이 바로 재즈정신이자 전통과 창조를 모두 만들어가는 미국음악의 힘이었다.

아프리카 타악기 젬베를 수없이 손으로 두드리다 보니 이젠 손가락마저 아프리카인들을 닮아가고 있다. 그저 좋아서 해온 일이다. 한국 음악에 힘을 불어넣는 영원한 연주자로 남고 싶을 뿐이다. 사람들이 그의 연주에 귀를 기울인다. 아프리카 초원으로부터 마사이족 전사가 바람결로 걸어오는 느낌이다. 용맹스러운 한국 음악의 전사 같은 모습이다.

 

산수채집 전국 유랑하는 화가 박병춘
"우리 풍경속에서 '나'를 찾고 '우리 회화'를 찾는다”
 ◇절벽이 어우러진 강변 모래밭에 화폭을 펼친 화가 박병춘. 그에게서 자연은 감동을 채집하는 이야기 보따리다.
미국 뉴욕 화랑가를 순례하며 내 그림이 서구화법의모방에지나지않는다는반응에 참담함을 느꼈다. 우리다운 것,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뭘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주말이면 붓 들고 산과 들로 나섰다, 풍경 속에 추상과 구상, 과거와 현재가 다 녹아 있었다. 20여년 동안 국내는 물론 인도, 그리스, 네팔, 일본, 미국 등을 배낭에 화구를 걸머지고 떠돌았다. 그곳의 다채로운 풍경에서 다양한 준법에 눈을 떴다. 세계성을 띤 모필의 울림을 만들어 내는 여정이다.터득한 산수풍경 준법과 기질적인 표현주의가 만나 ‘박병춘표’ 그림이가시화되고있는것이다.

오늘도 그는 떠난다. 지프는 그림도구들과 침낭으로 가득하다. 움직이는 작업실이다. 강원도 영월 주천강변 모래밭에 화폭을 펼쳤다. 기암절벽과 물이 어우러진 풍경은 붓이 불러들이는 대로 화폭에 뛰어든다. 가을 햇살에 새하얀 소녀 얼굴이 된 백사장에 누워 하늘을 본다. 시리도록 푸른 허공은 끝 간 데 없이 알 수 없는 곳으로 자꾸만 이끈다. 지난 20년간 화가 박병춘(41)은 그렇게 전국을 유랑했다.

산골 밭에서 고추와 들깨를 수확하던 아낙들이 그에게 손짓하며 알은체한다. 그림 하나 놓고 가라고 성화다. 수없는 발걸음에 친정 동생 대하듯 한다. 해가 서산에 지고 암벽에 어둠이 깔린다. 검은 실루엣이 병풍처럼 둘러칠 즈음 서둘러 화구를 챙겨 강변 느티나무 아래 ‘들골’ 민박집으로 향했다. 여주인이 토종닭을 삶아 놓고 반긴다. 밭에서 방금 뽑은 배추 고갱이에 된장을 발라 밥을 싸 먹으니 세상사 부러울 게 없다. 장작 난로에 삼겹살을 구워 닭다리에 곁들이니 색다른 맛이다.

도회지에서 우연히 이곳을 찾았다가 반해 정착했다는 여주인의 손맛이 예사롭지 않다. 지나가는 객들에게 간단한 전통차를 파는 다실 한켠엔 차 재료로 쓰일 말린 야생초와 꽃들의 향기가 코를 자극한다. 골동 가구들과 옛 물건들 머리 위론 산수화들이 나란히 전시장처럼 걸려 있다. 이곳을 찾은 화가들이 남기고 간 흔적이다. 박병춘의 산수 스케치도 그 속에 끼어 있다.

가족처럼 밥상을 마주한 ‘영월의 전도연’이라는 여주인의 그림 안목은 말동무가 돼준 화가들의 귀동냥으로 전문가 수준이다. 박병춘의 산수 풍경에 대해 ‘가슴에서 숙성된 토종 된장 맛’이라 평할 정도. 전시가 열리면 서울전시장도 마다 않고 찾는 박병춘의 골수 팬이 된 이유다. 물과 산을 벗삼아 사니 산수풍경에 일가견이 없을 리 없다. 이젠 마음풍경을 일구며 산다고 한다. 박병춘의 풍경도 그러하리라. 오랜 동지처럼 세상살이와 그림 이야기를 하다 보니 밤은 벌써 깊어졌다.

◇작품 ‘검은 풍경’. 풍경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작가의 자화상이다.

백 년은 족히 넘었을 법한 민박 고택의 황토구들방에 누우니 바로 눈이 스르르 감긴다. 창호에 고풍스러운 장롱 등이 조선시대 어느 주막집을 방불케 한다. 시간을 거슬러 조선시대 과객이 된 기분이다. 꿈 속에서 주모가 술 한잔을 권한다. 여독이 좀 풀린 것 같아 갓 쓰고 길을 나서려는 참에 기상을 알리는 수닭의 울음소리로 꿈을 깼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정겨움이다. 박병춘 작가는 분명 꿈 속에서 겸재 정선이 되어 금강산을 헤맸을 것이다.

여주인이 청국장을 끓였다며 아침을 들라 한다. 옹기에서 꺼낸 시원한 김치 맛에 밥 한그릇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고 행장을 꾸려 정선 예미로 향했다. 예미는 가을날 산등성으로 난 길이 아련한 곳이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저만치 가고 있을 것만 같은 풍경이다. 고랭지 채소밭과 어우러져 박병춘의 길풍경을 만들어 준 곳이다.

정선 민둥산에 올랐다. 하늘거리는 바람과 가을빛이 만들어 내는 억새 풍경이 은빛 바다다. 저만치 산 아래 길이 아득하다. 애뜻한 추억들도 그 한켠을 부유한다. 마음 따라 사시사철 각기 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켜켜이 그런 감동들을 화폭에 담아 본다. 주위에선 그 정도면 이제는 나다니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똑같은 감동을 카피하면 감동은 사라지게 마련. 전통 한국화의 현실이다. 대상으로서의 풍경과 끝없는 놀이를 통해 대중에게 늘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서야 하는 것이 환쟁이의 숙명이다. 한 획을 긋고 우주를 논하는 양하는 시대는 지났다. 즉흥성보다는 축적된 감동을 선택했다. 작은 붓질로 쌓인 울림을 추구한다. 생각과 경험이 버무려진 표현으로 감동을 만들고 싶다.

거대담론보다 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이 우리 그림으로 보이게 하는 첩경일 수 있다. 동양의 섬세한 모필이 현대성과 맞닿는 지점이다. 모필 연마엔 자연처럼 좋은 것이 없다. 자연은 모필처럼 부드럽기 때문이다. 박병춘의 산수 채집 화첩 작업은 당연한 귀결이다. 필력, 파묵, 발묵의 고루한 담론을 깨뜨리고 있다.

스스로 역마살이 끼었다고 말하는 박병춘은 그동안 국내는 물론 인도, 그리스, 네팔, 일본, 미국 등을 배낭에 화구를 걸머지고 떠돌았다. 그곳의 다채로운 풍경에서 다양한 준법에 눈을 떴다. 세계성을 띤 모필의 울림을 만들어 내는 여정이다. 터득한 산수풍경 준법과 기질적인 표현주의가 만나 ‘박병춘표’ 그림이 가시화되고 있는 것이다.

2002년 전시도록을 들고 뉴욕 첼시 화랑들을 순례하며 그림을 당당히 펼쳐 보이기도 했다. 돌아온 반응은 유럽에서 공부했느냐는 거였다.

참담한 심정으로 귀국한 후 ‘나를 보자’는 차원에서 산과 절을 다니며 우리 풍경 속에서 나를 찾아 나섰다. 풍경 속에 추상과 구상, 현재와 과거가 다 녹아 있었다.

그는 정선은 고향 하늘의 어머니 같은 땅이라 말한다. 언덕 아래 강, 너와집, 다랑논 등 그 자체가 고향이다. 영월은 볼 때마다 다르고 숨겨진 곳이 많은 곳이다. 아기자기한 동네와 절벽이 많아 매력이다. 청송은 바위가 크고 거칠어 남성적이다.

울진 불영계곡은 산수화의 통념을 벗게 해준 곳이다. 거대한 바위와 장대한 기암절벽이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정선 소금강 절벽, 울진 절벽, 청송 주왕산의 다양한 바위 생김새들을 스승 삼아 바위 골격을 익히고 산수화 준법을 배웠다. 특히 영월 절벽은 매우 매력적이다. 널찍하고 커다란 면에 결과 선이 다채롭다. 다양한 준법이 녹아 있어 나름의 필법을 수련하기에 제격이다.

붓을 세워 긴 선과 짧은 선을 교차해 그린(중봉필법) 바위는 대리석을 칼로 파낸 듯한 모습이다. 탄력 있는 철선 같은 강인한 필선이다. 인도의 명상도시로 잘 알려진 오르차에 일주일 머물며 건즈언덕에 오른 적이 있다. 동그란 접시처럼 언덕 아래 풍경이 다 보이는 곳이다. 겨울 마른 초원 위에 바짝 업드린 활엽수의 모습이 마치 라면발을 연상시켰다. 그 모습을 그린 붓질을 보고 사람들은 ‘라면준’이라 했다. 한 관람객이 제주 오름에 오르면 그런 풍경을 볼 수 있다고 귀띔해줘 제주로 바로 달려 갔다. 삼나무 숲이 그대로 라면준으로 보였다. 쌈지스페이스에서 12월 4일까지 열리는 박병춘의 ‘채집된 산수’전엔 아예 라면 3000개를 라면회사에서 협찬받아 제주오름 풍경 설치작업을 해 놓았다.

그는 말한다. 자연에서 배운 모필 준법으로 당당히 세계미술시장을 호령하겠노라고. 그는 오늘도 덧없는 구름처럼, 흐르는 물 따라 길 위에 있을 것이다. 그의 발걸음에 구름빛도 함께하리라.

 

사진작가 안영상 아프리카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싶다

◇케냐 마사이마라 인근의 마사이족마을에 들른 안영상씨. 사진은 그곳 마사이족 청년이 찍어준 것이다.
사람들은 사진작가 안영상(55)을 두고 ‘아프리카 신’이 내린 남자라고 부른다. 10여년째 홀연히 아프리카로 사라졌다간 서너 달 만에 모습을 드러내곤 해서 하는 말이다. 왜 그리 자주 아프리카에 가느냐고 물으면 아프리카가 자신을 부른다고 말한다. 서울 그의 누하동 한옥집을 찾았을 때도 그는 아프리카로 떠날 짐을 싸고 있었다. 나이 오십을 넘긴 남자가 배낭 하나 달랑 둘러메고 이번엔 케냐 나이로비 인근의 마사이족 마을에서 한동안 기거할 예정이다.

짐이래야 카메라와 옷가지 몇 벌이 전부다. 고등학교 국사교사였던 그는 40세를 넘긴 어느 날 10년간의 교직 생활을 접고 혈혈단신 아프리카로 떠났다. “열정과 아이디어가 고갈된 상태서 교단에 선다는 것이 더 이상 용납이 안 됐습니다.” 그에겐 인생의 안식년이 절실했다. 나머지 인생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아프리카 선교 현장에 교사가 필요하다는 소리를 듣고 저의 소용됨을 그곳에서 다시 한번 발견하려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아프리카로 떠났다.

하지만 그는 한 달도 못 버티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교육이 선교 수단으로 전락하는 모습이 싫었습니다.” 그는 한동안 드넓은 초원을 하릴없이 바라보며 시간을 죽였다. 어느 순간부턴가 저만치서 알 수 없는 기운이 그를 이끌었다. 무작정 그는 대학 시절 답사여행하듯 카메라를 들고 달려나갔다. 아프리카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아프리카가 저의 온몸을 샤워해주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지요.” 비로소 그는 처음으로 사진을 통해서 세계와 소통한다는 말을 가슴으로 이해했다. 

“사람들은 아프리카를 ‘우리와 다른 무엇’으로 바라보지요. 그러다 보니 동물의 왕국처럼 가난과 전쟁과 에이즈의 왕국으로만 이해하려 합니다.” 그는 아프리카는 아프리카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할례가 대표적인 사례다.

“인간 생명의 핵심인 그곳에 왜 고통스러운 짓을 하는가 처음엔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나중에 고통마저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그는 현대인들이 가능한 한 고통에서 벗어나려 하기에 불행해지고, 삶의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통을 받아들이면 행복해진다는 것을 아프리카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난과 병, 그런 것들이 뭐 대수입니까.” 다소 황당한 소리 같기도 하지만 그런 눈으로 보면 삶 자체는 아름다운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준 축복이다.

“할례식 때 고통을 참는 게 아닙니다. 할례축제로 완벽한 릴랙스(이완) 상태에 들어가 고통을 못 느끼지요.” 그가 마사이족 할례 사진에 ‘할례 굿’이라 제목을 붙인 이유다. 할례 때 아이들은 무의식의 상태가 되어 쓰러진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쓰러진 아이를 할례 장소까지 직접 들어서 옮긴다.

“아프리카인들은 고통조차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선교는 그 사람들이 그 사람답게 살게끔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는 아프리카 사람을 우리답게 살게 하는 것은 또 다른 오만이라고 일축한다.

“행복지수로 보면 아프리카는 선진국입니다. 좋고 나쁨을 가르는 경계마저 초월한 이들이지요.” 불교에서 고통을 일게 한다는 분별심이 없으니 불행이 없는 것이다. 그는 아프리카는 ‘인간’만이 있다고 말한다.

마사이족장에게 이름을 하사받을 정도로 그는 아프리카인이 다 됐다. 아프리카를 찍기 위해 아프리카인이 된 것이다. 그는 대상과 충분히 교감될 때 셔터를 누른다. 대상과 일치된 순간이 바로 ‘결정적 순간’인 것이다. 호기심 가득한 여행자로서의 단순한 ‘순간들’이 아니다.

“사진은 관념성이 강한 회화보다 현실성이 있어 매력이 있습니다. 제 사진의 기록 속에는 제 감성, 그리고 제가 느꼈던 아프리카의 자연과 그네의 삶이 담겨 있지요.” 그에겐 역사와 사진은 기록이라는 차원에서 같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협동농장을 꾸리며 여생을 보낼 소망을 품고 있다. 몇 해 전 마사이족이 그를 자신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며 만여 평의 땅을 주며 같이 살자고 했을 때 결심한 일이다. “마사이족이 방목해 기르는 소는 질겨서 헐값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소를 팔기 한 달 전에 농장으로 데려와 비육하면 백인 농장처럼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지요.” 그는 소규모로 생산된 농산물을 한데 모아 도매상에 팔 수 있도록 유통 시스템도 구상하고 있다. 더불어 한국의 농사법도 가르칠 예정이다. 아프리카인들과 하나된 ‘결정적 순간’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런 점에서 사진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처음 아프리카에 그가 갔을 때 현지인들은 그를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어디서 왔느냐,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하늘을 가리키며 “저기서 왔다”고 대꾸했다.

어이없어 하며 그들은 “그런데 여기는 왜 왔어”라고 되묻는다. 그럴 때면 그는 “그건 내가 옛날 저기서 살 적에 여자 천사와 사랑에 빠졌지. 그 사랑이 들통이 나서 하늘께서는 여자를 이 땅으로 쫓아 버렸지 뭐야. 그 뒤로 나는 그녀를 그리워하다가 그녀를 찾아 나섰지.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그녀를 찾고 있어. 자네들도 혹시 그녀를 보거든 내가 찾고 있다고 꼭 좀 전해줘”라고 대답한다. 그 뒤로 그를 보면 “어이 천사! 아직 못 찾았어?”라며 알은체한다. 어쩌면 그는 진정한 자신의 반쪽을 아프리카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아닐까.

그는 아프리카의 밤을 사랑한다. 그들에겐, 이 밤만이 유일한 것이다. 미래 때문에 고민하지도, 과거로 인하여 고통받지도 않는다. 단 한번의 화려한 숨쉬기와 황홀한 밤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아프리카 땅에 와서야 순간의 빛을 낚을 줄 알았던 모네나 햇빛이 너무나 눈부셔 삶을 깨뜨릴 수 있었던 카뮈, 그리고 시간이 풀어내는 삶의 매듭을 어슬렁거리며 따라가는 아프리카인을 꿈꾼다.

그는 한국에 나와 있을 땐 영락없는 왕백수다. 마치 초원에서 추방된 수사자 행색이다. 그는 아프리카 말고는 무엇을 크게 염두에 두고 사는 것 같지 않다. 늘 몽환적인 뉴에이지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아니면집으로 찾아온 친구들과 대화를 즐기거나 막걸리를 마시는 일이 전부다. 격식을 차리지 않는다는 점에선 자유인에 가깝다. 생활은 교사인 아내가 책임지지만 하나도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다. 아내는 그래도 아프리카에서 만났던 한 여인처럼 먼 길을 떠나기 전에 푹 잠을 자라며 진정효과가 있는 재스민 꽃잎을 잠자리에 뿌려줄 줄 아는 여인이다.

그는 한량에 가까운 인물이다. 하릴없이 빈둥거리면서 책이나 읽으며 소일하기를 즐긴다.

“삶에서 때론 빈둥거림의 여백이 유용하지요. 백수 홍수시대가 그리 나쁜 현상만은 아닙니다.” 그에게서 빈둥거림은 ‘진정한 자아’를 생산하기 위한 충전이다. 현실의 삶에 매달리는 것만큼이나 유용하리라 믿는다. 왕백수 원조를 자처하는 그는 분명 삶의 방랑자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찰음식연구가 정산 스님 신앙·음식·그림은 하나

◇주방에서 채소와 나물을 손질하고 있는 정산 스님. 그는 “그림이 눈을 즐겁게 하는 평면예술이라면 음식은 입을 즐겁게 하는 조형예술”이라고 말한다.
음식점 문을 들어서니 바로 불상이 손님을 맞는다. 음식상 위론 연꽃등이 두둥실 걸려 있다. 분홍색, 보라색, 흰색, 붉은색, 노란색 등이 부처님 오신 날의 산중 사찰을 방불케 한다. 종업원들이 주방에 음식 주문하는 방식도 특이하다. 작은 종소리를 쳐 알리니 아우성은 사라지고 산사의 은은한 울림만이 공간을 가른다. 승복을 입은 이가 주방에서 나물을 다듬고 있다. 세상엔 사찰음식전문점 ‘산촌(山村)’ 대표 ‘김연식’이라는 속명으로 더 잘 알려진 사찰음식연구가 정산(61) 스님이다. 그는 매일 새벽 4시면 참선을 마치고 주방에 들러 하루의 음식 장만을 시작한다.

정산이 사찰음식과 인연의 끈이 닿은 것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엔겐 어머니이 세 분 계셨다. 생모는 늘 판소리 춘향가 가운데 한 대목인 쑥대머리를 ‘흥얼타령’ 삼아 부르셨다. 어린 마음에 그것이 슬프고 짠하게 다가왔다. “어머니는 울고 계신다 생각했지요.” 그는 노래 부르는 어머니에게 슬퍼진다며 울지 말라고 애원했다. 어린 마음에 가정이 평탄치 못한 것이 한이 됐던지 그는 초등학교 2∼3학년부터 집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디를 가야 스스로 밥 먹고 옷 입고 공부할 수 있는가 생각을 해봤지요. 하지만 답이 안 나왔습니다.” 그는 어느 해 설날 여수 흥국사 너머에 따로 살고 계신 새어머니를 찾았다. 외로우시겠다는 생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돌아오는 길에 사찰 개울가에 핀 버들강아지에 이끌려 암자에 이르게 됐다. 기웃거리니 장독에서 된장을 만지고 있던 한 젊은 스님이 “ 절에 왔으니 절을 하고 가라”며 법당으로 안내했다.

 그는 스님에게 왜 여기에 왔느냐고 물었다. “스님이 공부하러 왔다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어요. 이제 집을 나와서도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생겼다 싶었던거지요.” 그는 그때부터 용돈을 모아 비상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무늬의 연을 손수 만들어 구멍가게에 팔기도 했다. 될 수 있으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절로 탈출할 결심을 했다.

 비록 그는 초등생이었지만 우울한 마음을 책으로 달랬다. 테스, 폭풍의 언덕,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이 그가 당시 즐겨 읽었던 책들이다. 초등학교  졸업 후 그는 집을 떠났다. “새벽까지 짐리 부스의 노래 ‘나는 가야만 하리’를 듣고 집을 나섰지요.” 조숙했던 그는 우선 전남 대흥사로 향했다. 전남 고흥에서 미술선생으로 재직하던 천경자씨가 쓴 수필집에서 읽은 기억이 떠올라서다. 동백숲을 스치는 잿빛 승복의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잿빛 승복과 떨어진 동백이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으로 수필에서 묘사된 제주 정방사를 찿았다. 정방폭포의 타는 듯한 칸나꽃, 그리고 절 종소리가 들려 따라가 보니 상류에 정방사가 있었다는 얘기다. 풍랑으로 목포에서 3일간 머문 끝에 제주에 당도했다. “제주일주도로변에 핀 야생 수선화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어요. 차가 멈춘 틈을 타 한아름 꺾어 향을 맡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만큼 무척 감성적인 소년이었다. 
◇여인의 손톱을 물들이는 매니큐어가 스님의 손에선 꽃이 되기도 하고 나비가 되어 날기도 한다.

 정방사 주지스님은 어린 것이 공부하러 왔다는 말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지 절 기거를 허락했다. 1년여 세월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정방사에 한 객승이 찾아든다. “그분은 다짜고짜 저에게 왜 여기에 왔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공부하러 왔다고 하니 ‘너 말 새끼’냐며 자신을 따라오라며 부산 범어사로 데려다주었어요.”

 그는 그곳에서 불교재단인 해광중학교에 입학해 공부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절일을 하고 학교에 갔다. “절일이래야 음식과 옷 만드는 일이 전부였지요.” 그는 공양간에서 3년간 행자 생활을 했다. 당시 범어사 선방엔 이북 출신의 명허 스님이 계셨다. 호랑이같이 무서워 별명인 맹호스님으로 불렸다. “명허 스님이 자주 이런저런 절음식이 있었다는 얘기를 하셨습니다. 아쉬워 하시는 것 같아 없어진 절음식들을 묻고, 만들어 들였더니 너무  좋아하셨어요.”

 사실 사찰음식은 궁중과 민간 음식과 달리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이 없다. 불교에서 오욕의 으뜸으로 식욕을 들고 있기에 구전되는 것이 전부다.

 “이러다간 사찰음식이 사라질 것 같아 전국 사찰을 돌며 기록을 시작했습니다. 기록을 종합해 부산대각사에서 절음식 공개강좌를 처음으로 열었지요.” 그는 바로 조계종 총무원에 가 사찰음식 교육을 위해 방 하나를 달라고 했다. 40년 전 당시로선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27년 전 인사동에 사찰음식전문점 ‘산촌’을 차렸다. 지금까지 그동안의 성과를 종합해  3권의 사찰음식 책도 집필했다. 내년엔 명허 스님한테 듣고 복원한 북한의 사찰음식 책을 펴낼 예정이다. 이미 지난여름 북한의 묘향산 보현사를 방문해 청운 스님에게 원고를 감수 받은 상태다.

 요즘엔 그는 그림에 심취해 있다. 어쩌면 천경자 선생의 수필에 언급된 절에 이끌렸듯이 그림에도 필이 꽂히고 있는 것이다. “금색과 은색을 즐겨 쓰는 천 선생은 영혼과 죽음의 세계를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는 초등생 시절부터 담임선생으로부터 그림공부를 권유받았다. 제일 부러운 사람이 극장 간판장이었다. 절에선 지필묵과 크래파스를 가지고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사찰음식점을 차린 후 천 선생을 한번 꼭 만나고 싶었다. 제자 이숙자 선생의 전시 때 선생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고 말았다. “김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에서 직접 대면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동경하던 대상을 좀더 극적으로 만나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이지요.”

 그는 후에 선화랑 김창실 대표에게서 전화번호를 알아내 천 선생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통화됐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터져나온 말이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짝사랑했어요, 만나고 싶어요’였지요. 선생님도 당황하셨는지 경계하듯이 ‘사람 만나기 무서워요’라며 전화를 딱 끊으셨어요.” 그는 자신의 인생에 한 축이 돼준 분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튀어나갔는지 알수가 없었다. 주둥이 좁은 물항아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처럼 두서 없이 던져진 말이지만, 어쩌면 최대한의 존경의 의미였을 것이다.

 “이젠 천 선생님의 그림의 길에 이끌리고 있는 것 같아요.” 그는 인사동 공화랑에서 19∼25일 매니큐어로 그린 그림 전시를 연다. 5년 전 어느 날 깨진 도자기를 접착력이 강한 매니큐어로 붙이는 과정에서 생각해낸 재료다.

 “의외의 무늬가 생겨 이거다 싶었지요. 물감을 하나 새로 발견했다는 생각에서 나무와 접시 등에 매니큐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주변에서도 매니큐어로 그림을 그리는 이는 없을 것이라며 전시를 권유했다.

 “음식은 저에게 조형예술이고 그림은 평면예술이지요. 저에겐 서로 별개의 일이 아닌 보완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제  초등학교에 막연히 꿈꿨던 그림쟁이의 꿈을 실현한 기분이다. 전시를 앞두고 풍선처럼 마음이 붕 떠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산촌 음식점을 ‘산촌사’라 부른다. 한켠엔 그림작업실이 있고 윗층엔 사찰음식을 가르치는 조리실과 함께 법당이 있다. 그에게서 신앙과 음식과 그림은 하나다.

 “사람이 먹는 음식을 장만하는 행위나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나 결국 둘 다 부처의 마음, 을 찾아가는, 즉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지요.”

 그의 그림엔 고향 여수 흥국사 개울가에 피었던 버들강아지도 등장한다. 화면 속 화려한 꽃들은 맛깔스런 음식 맛이다. 동산 불교대학 사찰음식문화학과 학과장도 맡고 있는 그는 전국 유명 사찰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공양간 손맛’을 후학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가 운영하고 있는 ‘산촌’은 1986년 ‘뉴욕타임스’에서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을 맑게 하는 음식’으로 소개된 바 있다. 지난해엔 월스트리트저널에서 ‘아시아 톱10’ 레스토랑으로 꼽기도 했다.

 풍류란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삼매경이다. 그가 그런사람이다.

민화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화가 이정옥씨 조선시대 민화, 벨벳 위에서 춤추다

◇20년간 민화의 현대화에 앞장선 이정옥 화가는 “민화작업을 할수록 에너지가 넘친다”고 말한다.
 민화가 어느 틈엔가 우리의 생활공간에서 사라져 버렸다. 오래 살고 복을 누리며 건강하고 평안함을 기원하는 수복강령의 염원을 담은 ‘생활부적’ 같은 존재였던 민화. 그 민화를 이 시대의 공간 속에서 다시금 살려내려는 이가 있다. 지난 20여년간 화가가 민화를 그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친여자 소리를 들으면서도 민화의 흥취에 빠져 사는 이정옥(56)씨를 두고 하는 말이다.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대학시절 민화에 마음이 꽂혀 5년만 민화를 그려보겠다고 시작한 일이 오늘에 이르렀다. 최근 인사동에서 열린 전시회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민화 관계자들이 모두 다녀갈 정도로 관심을 모았다. 그들 틈엔 화가들도 많았다.

몇년 전부터는 민화를 현대화한다는 기치를 내세운 젊은 작가의 전시회, 민화를 재현하는 작가의 전시회, 민화 실기교육 등 다양한 행사가 붐을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고민은 민화를 어떻게 현대생활에 접목시키느냐는 과제였다. 생활회화인 민화가 현대에도 계속 생명력을 가지려면 조선의 생활이 아니라 지금의 생활 속에서도 꽃을 피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씨는 이 문제의 해결방안을 벨벳에서 찾았다. 벨벳은 70, 80년대만 하더라도 ‘비로도’라 하여 한복과 같이 최고급 혼수예단으로 사용했던 천이다. 여기에 민화를 프린트하면 부드럽고 입체적인 느낌이 나며 고급스러워 귀티가 난다. 벨벳만이 갖는 질감의 표현이다.

작가는 평소 자신이 그린 민화를 벨벳에 찍어 소파, 방석, 커튼, 의자의 장식 천으로 사용하면서 민화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벨벳을 사용하는 이유는 민화를 고급스럽고 따스하게 보이기 위함이다.

전통 창호문과 민화를 한데 어우러지게 만든 벽체 패널은 현대 주거생활에 어울리는 ‘신(新)병풍’으로 불릴 정도로 호평을 받고 있다. 색채가 화려한 화조화를 중심으로 톤에 변화를 주었다. 장식성을 최대한 되살리되 지나치게 번잡함을 피해 색조를 조정한 것이다. 민화처럼 장식적이고 벨벳처럼 고급스런 분위기의 조화는 아파트의 벽체 패널 장식으로 새롭게 거듭났다.

이씨는 민화 속의 맑고 명랑한 정서를 사랑한다. 서양화를 전공한 그가 민화로 전환하게 된 것도 이러한 매력 때문이다. 전통 민화의 재현은 원본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맑은 기운을 투영하는 작업이다. 이 때문에 같은 작품을 재현하더라도 작가마다 느낌이 다르게 마련이다.

그는 강렬한 주제를 선택하고, 시원하게 확대된 화면을 선호하며, 생동감 넘치게 표현한다. 그가 즐겨 그리는 전통민화 ‘계력도’는 유교의 원리를 도식화한 다이어그램에 채색하고 화조로 장식한 그림이다. 유교 하면 어렵고 딱딱한 사상이라고 지레 멀리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은 우리의 사고를 통쾌하게 깨부순다. 무거운 사상을 밝고 명랑한 민화로 환원시킨 것이다. 전통민화가 보여주는 생각의 전환이 놀랍다. 민화만이 가능한 착상이다.

사실 강렬한 민화와 고급스러운 벨벳은 물과 기름처럼 어울릴 것 같지가 않다. 이씨는 이를 자연스럽게 연결시켰다. 그의 상상력이 과거와 현재, 부드러움과 강렬함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얻은 결실이다. 고급스런 벨벳 위를 정열적인 가슴으로 자유롭게 춤추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서양화를 하면서 늘 한국만이 가지는 한국정신의 원류에 갈급했다. 어느 날 우연히 굿당에서 본 기원과 바람이 담긴 무속화(무신도)에 그것이 녹아 있음을 직감으로 깨달았다. 5대째 내려오는 기독교 집안의 딸로서는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산사와 절터를 찾아다니면서 강한 땅 기운을 체험하기도 했다.

대학원에선 아예 무신도로 석사학위를 받자 주위에선 그를 두고 무병에 든 여자가 아니냐는 소리까지 했다. 그는 무신도에서 민화의 원형을 보았다. 3등신의 후덕한 모습은 전형적인 한국인의 얼굴이었다.

그는 민화가 일본 등에 싸구려로 팔려가는 공예품으로 전락되는 현실이 싫었다. 민화만큼 탁월한 회화성과 정서적 순화, 행복감을 주는 그림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화를 하면서 늘 새로워야 한다는 창조의 강박관념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세상의 온갖 십자가를 다 짊어진 양 이마에 두 개의 주름을 새겼다. 하지만 민화를 접하면서는 그 자체가 행복이었다. 그는 그동안 도자기, 나무, 무명천, 삼베 등 여러 소재에 민화를 그려오면서 실험을 해왔다. 주거공간 속으로 민화를 다시금 재위치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민화작업은 하면 할수록 에너지가 넘친다고 말한다. 하루종일 같은 자세로 앉아 있어도 몸이 거뜬하다. 작업을 거른 날엔 오히려 몸이 아프다. 민화작업에서 알 수 없는 에너지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민화작업은 단순히 보고 베끼는 과정이 아니다.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는 좋은 기운을 얻는 행위다. 행복을 만드는 의식인 셈이다. 그는 하루 평균 3시간 정도만 수면을 취하면서 민화를 그리고 있다. 돈이 되는 일이 아니지만 ‘민화 병’에 걸렸으니 어찌할 도리도 없다. 민화에는 인간이 아름답게 살고자 하는 모든 것이 집약돼 있다. 그런 마음의 기운이 사람들을 편케 만든다.

민화 작업을 위해 대구 교외에 살고 있는 이씨에게 민화를 그리는 일은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다. 그림 따로 사람 따로가 아니라 사람도 그림이 되고 그림도 사람이 된다.

그는 전통방법대로 민화를 그려서 컴퓨터에 입력한 후 없어진 선이나 색 보정작업을 거쳐 특수프린팅을 한다. 민화의 기본 그루터기를 그는 중시한다. 유한한 인간에게 오랜 세월 축적된 것이 오히려 예술적 효용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그는 민화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일을 했다면 앞으론 민화를 배태한 원초적인 자원으로 ‘무신도’를 화폭에 소화해 낼 작정이다. 그는 고려불화도 민화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다. 민화를 하대하고 깔보는 이들에게 신명나는 복수(?)를 하고 싶다.

그는 이제 장지 위의 민화가 아니라 서양화 재료를 가지고 캔버스위에 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민화에 대한 짝사랑’을 화폭에 자유롭게 풀어내려 한다. 그 속에서 이 시대의 한국화를 모색해 보려 한다.

사람들은 이제 그를 미쳤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정옥이니깐 해냈다고 찬사를 보내고 있다. 과연 이정옥이란 소리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젠 민화가 그를 사랑할 차례다. 민화가 주는 맑은 에너지로 ‘이정옥표 화폭’을 펼쳐내리라.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묵묵히 지켜본 남편과 아이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의 탄성이 잇따라 터져나오고 있다. 진정성이 담긴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길게 돌아서 온 길이다. 뭔가 만족스런 그림을 그릴 것만 같다. 민화가 더 사랑해 달라면 이것마저도 양보할 생각이다. 그림은 결국 내가 즐겁고 보는 이가 즐거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결코 내 욕심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다. 화가냐 민화작가냐, 그것은 그리 중요치 않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마음껏 붓질을 하고 싶을 뿐이다. 민화에 빠져버린 그림쟁이면 족하다. 민화 속에서 노니는 영원한 풍류객이어도 좋다.

'산수 마음그림' 그리는 목판화가 김억 “상실의 시대… 풍경속에 이상향 향한 꿈·동경 담아”

◇가끔은 도시가 그립다는 김억씨. 그가 나무 전봇대를 기둥 삼아 손수 지은 목조주택 툇바루에 앉아 앞산을 바라보고 있다.
장돌뱅이들이 예전에 진천장과 안성장을 오갔을 길목인 차령산맥의 자락에 그가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야트막한 산줄기가 감싸돌고 그 아래로 은물결이 잔잔한 저수지들이 이곳저곳 흩어져 있다. 말을 먹이고 지나는 길이라 하여 마둔호수라 이름지어진 저수지 끝자락 산등성이를 오르면 그를 만날 수 있다. 얼마 안 있으면 진달래 개나리 산벚 영산홍 살구 복숭아 싸리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꽃비가 내리는 곳이다. 과수원 배꽃과 마당 언저리의 벚꽃은 금방이라로 꽃망울을 터뜨릴 것만 같다. 봄꽃이 진 뒤 신록의 산빛은 꽃보다 더 싱그럽다. 5월이 되면 산빛은 초록의 스펙트럼을 뿜어낸다. 바람은 산빛을 너울너울 흔들어 녹색의 군무를 추고 그도 마음의 허리춤을 풀어 놓는다.

자칭 ‘산수 마음그림’을 그린다는 김억(53)씨가 이곳을 찾아든 것은 10여년 전의 일이다. 행정구역상으론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석하리다. “서울에선 그림에 집중할 수 없었어요. 더 이상 미루면 안되겠다 싶어 빈손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는 미술학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작업을 했었다. 처음엔 진천의 한 폐교 교실 한 칸을 빌려 그림을 그렸다. 얼마 후 지금의 장소에 집을 손수 짓고 터를 잡았다. “학원을 정리한 돈을 아내에게 주고 3년만 버티라고 말했지요. 그것이 5년이 되고 7년이 되면서 아이들과 아내마저도 시골생활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아내는 인근 시내에서 가게를 꾸려가며 버팀목이 돼 주고 있다.
◇화양구곡 능운대

그는 앞산 마루에 휘영청 달이 뜨는 날이면 툇마루에 나앉아 멍하니 달빛 풍경을 마음속에 스케치한다. 마음은 어느새 달빛과 손잡고 풍경 속을 노닌다. 그는 이곳에 내려오면서부터 해가 지면 졸린다고 말한다. “해 뜨고 달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인체시계가 자연에 맞춰진 것 같아요. 자연과 함께 그림에도 변화가 왔습니다.” 그는 지리에 대한 공감각이 트이면서 풍경판화를 시작했다. 책도 많이 읽게 되면서 인문학적 지식도 쌓여 갔다. 강과 길, 특산물 등 고지도의 인문지리적 요소에 흠뻑 빠져들었다. 1980년대 수묵화운동을 벌였던 목판모임 ‘나무’에서의 활동경험이 자산이 됐다.

그는 전국을 돌며 관조의 풍경을 담았다. 화양구곡 고산구곡 등 특정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내용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구곡은 주희의 무이구곡에서 비롯된 자연관이다. 풍광이 빼어난 곳을 찾아 정자를 짓고 은둔하며 학문을 닦고 인품을 도야하는 은일의 사상이 담겨 있다. 거처가 자리한 주변 경관들을 아홉개로 나누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아가며 자연의 경치를 찬미하는 방식은 그림에선 구곡도로, 시에선 구곡가로 발전했다.

사람은 땅을 딛고 살며 땅에서 나는 먹을거리들로 생명을 유지한다. 그러기에 그 땅을 닮아가게 마련이다. 그는 산과 물을 바라보며 무위를 관조한다. 그러다 보면 마음의 그릇이 가득 채워지는 포만감을 느낀다고 한다.
◇화양구곡 암서재

끝 간 데 없이 굽이치는 산봉우리와 물은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감동으로 물들이게 마련이다. 하이데거가 장소는 인간의 깊이를 위치시켜 준다 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지형적 세계공간을 사유를 통해 이해하고 그것을 넘어가고자 한다. 어린 시절 저 산 너머엔 누가 살고 있을까 하는 호기심 같은 것이 초월의 계기, 상상력을 키워 예술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어느 시대나 예술가들은 ‘여기’서 ‘저 너머’를 내다보는 몽상적인 존재들이 아니었던가.

그는 요즘 잘 산다는 의미를 새롭게 되씹어본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지리적 공간, 장소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잘 산다는 것은 ‘의미를 머금고 있는 장소’들이 드넓게 퍼져 있는 세상에서의 삶이다. 지리학자 에드워드 랠프가 지적했듯이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다.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림지도라 할 수 있는 김억의 목판화는 그런 몸짓이다.

한눈에 조망해 볼 수 있는 전통산수화의 부감 시점은 자신의 공간을 열린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제격이다. “고양된 공간감 속에서 우리는 시각의 해방감을 맛보게 됩니다.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를 접했을 때 느껴지는 경이감 같은 것이지요.”

사람들은 그를 두고 ‘이 시대의 김정호’라고 말한다. 지도가 갖는 의미는 지리적 이해를 높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리적 환경에 대한 상세정보를 주는 것을 넘어서서 더 높은 삶의 질을 향유하려는 무의식의 욕망을 자극한다. 이상향을 향한 꿈과 동경일 수 있다.

그의 그림지도에는 물의 발원지와 경유지, 산맥의 뻗어나가고 이어짐, 옛길과 도로들, 사찰, 서원, 촌락들이 고지도처럼 그려져 있다. 인간 실존의 공간인 것이다. 우리의 도덕적, 지적, 정신적 토대가 만들어지는 근원적 자리다. 도산구곡 화양구곡 옥화구곡 선유구곡, 그리고 명옥헌 소쇄원 식영정 세연정과 같은 남도의 정자나 원림들, 운주사 선운사 내소사 내원사 같은 사찰들, 월출산 월악산 금강산들이다.

그는 우리가 점점 장소 상실의 시대로 밀려가고 있다고 우려한다. 위락시설로 채워지는 관광지, 거대 쇼핑몰, 대단위 아파트 밀집지역 같은 ‘가짜 장소들로 이루어진 가짜 세계’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이버공간과 같은 무장소의 출현도 현대인이 직면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장소의 상실은 고향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심성을 키우는 모태의 상실이지요.”

그는 말한다. 진정한 장소감은 심오한 인격이나 정체성이 길러지는 근본 바탕이라고. 장소 상실로 실존의 밀도가 희박해지고 삶은 얇아지고 빈곤해진다는 것이다. 옛길이 만남과 소통의 장소였다면 요즘 도로들은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경관을 토막내고, 지나가는 장소들의 원초적 장소감을 해체시키고 파괴한다.

“자연경관이란 단순한 자연의 물리적 현상을 넘어서서 자아와 교감하며 자아를 저 깊은 곳으로 데려가는 그 무엇입니다. 잃어버린 근원적 장소감과 이상향에 대한 꿈과 동경을 아스라하게 환기시켜주지요.”

수려한 산과 들은 사람을 심미적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산수인물양육론이 태동하는 배경이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산수는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하는 것이라 했다. 기름진 땅과 넓은 들에 지세가 아름다운 곳을 가려 집을 지으라고 권했다. 그리고 십리 밖, 혹은 반나절 길쯤 되는 거리에 경치가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 매양 생각날 때마다 찾아가 시름을 풀고 유숙한 다음 돌아올 수 있는 곳을 장만해 둔다면 이것은 자손 대대로 이어갈 만한 것이라 했다. 산수는 사람 됨됨이의 태생적 근거로 작용하는데, 바로 거기에 풍수지리학이 위치하게 된다.

10여년간 전국을 떠돌며 이 땅을 감지했던 그는 요즘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내달 중순에 단동 집안 등 요동지역의 고구려문화유적을 답사해 목판화에 담을 예정이다. 고구려의 땅과 산수에서 고구려인의 기개를 길어올릴 작정이다. 그의 책상엔 전성영씨의 ‘천리장성에 올라 고구려를 꿈꾼다’와 서길수 교수의 ‘고구려역사유적 답사’ 책이 놓여 있다.

저녁노을이 앞산을 시뻘겋게 달군다. 그가 든 찻잔으로 낙조가 뛰어든다. 무심한 풍경이다.

'흙으로 시를 굽는 도예가' 이종수 맑은 詩心이 '달을 품은 어머니'를 만들게 했다

◇도예가 이종수씨가 가마 옆 생활공간인 수졸재 툇마루에 앉아 있다. 50년 가까이 흙과 씨름해 온 그의 모습이 흙을 닮았다.
사진=안영상 사진작가

산빛이 초록이다./나는 오늘도 수졸재(守拙齋) 툇마루에 앉아/상념에 젖어 본다./이곳 충남 금산군 추부면 용지리 산속에/가마터를 잡은 지도 어언 10년이 지났다./형님은 낮은 자리를 지키면서 겸허히 살아가고자/하는 집주인의 의지를 담아 수졸재라 했다지만/과연 그런 세월이었는가./어쩌면 옹졸한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의 집이란/뜻에서 그런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을까./나는 졸(拙)이 좋다./아무 미련이 없는 경지가 아닌가./74세 도예가 이종수란 이름이 헛되지 않았는지/요즘에야 부쩍 되돌아보게 된다./언젠가 이 세상 훨훨 털고 떠나는 나의 뒷모습이/앞산의 저녁노을처럼 아름다웠으면 한다.

서울에서 대학교수직(이화여대)을 던져버렸던 그해를 떠올려 본다. 어린 자식들 철 나기 전에 결행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내린 모진 결정이었지만 도예가의 길을 가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만의 호젓한 길을 가고 싶은 마음도 한몫 했다. 어찌 갈등이 없었겠는가. 나의 심정은 시가 됐다. “황홀과 불안이 내 마음 안에서 맞서 있는데/ 오늘도 가슴팍 깊은 곳에 보석을 담고 싶은 욕망은 꿈 속을 더듬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시울이 뜨겁던 그 어느 날 잔설의 여운은 짙게 묻어 있을 것이다.”

아내에게 한마디 했다. 100년도 안 되는 한세상 이래도 저래도 갈 길 있는데, 탄탄대로보다 이왕이면 먼 길을 가고 싶다고 했다. 이즈음 지인 초청으로 이뤄진 유럽여행도 결심을 더욱 굳히게 만들었다. 유럽의 다양한 예술을 보면서 충격이 컸다. 여행 후 내린 결론은 대학교수도 작가도 중요하지만 두 가지 역을 하는 데는 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어느 한쪽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거라는 혼돈에 빠져들었다.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이 도예의 길이다. 

◇장미 얼음꽃이 피어오르는 듯한 문양을 가진 작품 ‘겨울 열매’. 잔설과 보석의 결정체 같은 모습이 이채롭다.
고향인 대전 갑천 변에 가마터를 잡았다. 동심의 추억이 깃든 곳이다. 신탄진을 다녀오다 강변에 내려가 등목을 하던 곳이고 노을이 물든 저녁 무렵 두루미 떼가 먹이사냥을 하던 수묵화 같은 풍경을 지닌 곳이다. 물속에서 손을 뻗으면 물 위를 날던 잠자리 날개가 손에 부딪히고, 모래 한 줌을 움켜쥐면 좁쌀 같은 조개가 셀 수 없을 정도로 잡혔다.

당시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은 내가 교수직을 떠난 후에도 2년이 넘게 후임을 채용하지 않고 비워두고 있다가 사람까지 보내, 전업 작가 생활이 정말 힘들면 복직하라는 전갈을 보내왔었다.

고속철도 공사로 쫓겨나기 전까지 찾는 이 별로 없는 이 외딴 가마터엔 묘하게도 스치는 시인들이 많았다. 박용래 박희선 신정식 조재훈 임강빈 시인 등이 입 상대가 돼주었다. 이미 고인이 된 박용래 시인과는 가마 옆에 멍석을 깔고 함께 누워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소설가 최상규의 손을 이끌고 오기도 했다. 어느 날 밤인가 12시가 넘어 누군가 대문을 두들겼다. 술이 만취돼 들어서면서 “보고 싶어 왔다. 왜! 잘못이냐”라며 해맑게 웃던 모습이 선하다. 그는 술에 취해도 말이 틀리지 않는 사람이다. 박재삼 시인은 그를 가리켜 세상에 그 같은 사람은 다시는 나오지 못한다고 했다. 좋은 것을 봐도 슬픈 것을 봐도 울 줄 알았던 눈물의 시인, 정한의 시인이었다. 한번은 신정식 시인이 또 눈물이라며 핀잔을 주자, 그는 “왜 내 눈물이 어떻단 말인가”라며 “눈물이 사라진 사람은 다 끝난 사람”이라 했다.

동학사 들르는 길에 박목월 시인이 술 한 병 사들고 박용래 시인을 찾아 정담을 나누고 가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박희선 시인은 박용래 시인을 광활한 대지 위에 야생마를 타고 한없이 달려가는 스타일이라 평했다. 박목월 시인은 저녁 어스름이면 자신은 아래로 내려오고 그이는 위로 올라간다고 했을 정도로 전국 절간이 그를 밥먹여 주었다. 소설가 이문구는 그를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 불렀다.

시인과 도예가는 방편이 다를 뿐 보는 눈과 생각, 호흡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람도 자칫 오염되기 쉽다. 그들의 순수가 나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나에겐 보배롭고 보석처럼 귀한 이들이었다. 불쑥 찾아와 산보 나가자고 재촉했던 박용래 시인. 그는 그럴 땐 대부분 큰 원고를 끝내고 살 붙이는 것만 남았을 때다. 걷는 도중에 나눴던 이야기나 풍경은 글이 됐다. 

나는 시인들의 맑은 시심을 흙으로 빚었다. 불 뼈다귀와 흙의 맥을 시인의 마음으로 깨쳐 나갔다. 야트막한 산이 에워싸는 추부 가마에 불을 지펴 본다. 참나무 등걸에 앉아 있는 산비둘기 소리, 계곡물과 바람 소리,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조차 스쳐가는 잔설처럼 그릇에 녹아 든다. 얼음이나 눈이 녹다 만 ‘잔설의 여운’ 같은, 어찌 보면 겨울 열매 같은 결정체가 그릇을 이룬다. 들여다보면 흡사 다이아몬드가 연상되기도 하고, 장미꽃이 피어 오르는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달항아리 모습의 그릇을 두고 사람들은 ‘달을 품은 어머니’라 칭하기도 한다. 1986년에 처음으로 한 점이 만들어졌지만 몇 년 걸려 해걸이를 해가며 몇 점씩 나올 뿐이다. 좋은 작품은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니다. 축구선수가 공을 잡아도 매번 골을 넣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가능성을 가지고 부단히 노력만 할 뿐이다. 최근 명품 찻사발을 상품처럼 양산해 내려는 욕심이 도예계를 멍들게 하고 있다. ‘가짜’가 범람하는 이유다. 

◇전통장작가마에서 초벌 구이를 끝낸 그릇을 꺼내 들고 있는 이종수씨.
이즈음 나는 나의 도자기를 어디로 몰고 갈 것인가 생각을 해본다. 조선 도자를 펄쩍 뛰어넘을 수도, 또 제자리에 머무를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절벽 같은 대문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흡족할 만한 대답이 아직 나에게는 없으며, 또한 그것이 앞으로도 계속 공부해 나가야 될 문제일 것 같다. 세계를 조심스럽게 곁 보면서 다만 그 문을 열어젖힐 열쇠는 어디까지나 우리 역사의 발판 위에서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고 믿는다.

친구인 조각가 최종태가 나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서쪽으로 달려가는데 혼자서 동쪽을 향해서 가는 사람이라고. 뒤도 안 돌아보고 열심히 가는 사람, 그 등 뒤에 환한 석양빛을 보는 듯싶다고 했다. 그것이 나의 모습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예술은 작품에 역사의식, 시대성, 영원성을 투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인간이 하는 예술의 영역은 한계가 있다. 완벽한 작품은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완벽함에 좀 더 가까이 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예술은 한자로 예(藝) 자와 술(術) 자가 결합된 단어다. 술(기술)은 배울 수 있을지라도 예의 영역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다. 기를 배워서 예의 영역은 혼자서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예술은 결국 혼자서 가는 길이다.

전통 장작가마를 고수하는 이유는 우선 내가 익숙해서 그렇다. 나름의 노변(爐變·불의 조화)의 스릴을 즐기는 장점도 있다.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영역, 빈 여백 같은 존재가 매력이다. 전통과 현대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 같은 것이다. 어딘가 닮았지만 다른 무엇이 아들에겐 있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전통 추종이나 전통 단절 모두 순리를 거스르는 행위다.

나는 흙으로 시를 굽은 시인이고 싶다. 흙과 물, 바람과 불을 벗 삼아 살아온 지난 세월은 나에겐 풍류였다. 25일∼8월3일 대전시립미술관 초대전.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명상음반 만든 황원스님, 세계가 하나되는 천상의 선율 타고 東茶頌이 퍼지다

◇황원 스님이 자신의 수행도반인 예불이의 털을 손질해 주고 있다. 스님은 사람을 극진히 반기는 예불이의 모습에서 자비를 본다.
사진작가 안영상
 휘영청 달빛 아래 한 스님이 서 있다. 산 그림자가 깊은 침묵을 머금은 밤이다. 스님은 사무치게 시린 가슴을 안고 오늘밤도 고운 임을 그리워 하는 것일까. 법당 문을 나서 탑돌이 하듯 달밤을 서성거린다. 애뜻함과 아련함이 공존하는 명상적 풍경이다. 10대에 산에 들어와 이제 속세 나이 쉰이 됐다. 지천명의 나이다. 하늘의 뜻을 알아 그에 순응하거나, 하늘이 만물에 부여한 최선의 원리를 안다는 뜻이 아닌가. 마흔까지는 주관적 세계에 머물렀으나, 쉰이 되면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세계인 성인의 경지에 들어서야 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암자 곁을 흐르는 차가운 계곡물에 들어가 몸을 씻은 스님이 바위에 결가부좌를 튼다. 여전히 요동 치는 마음속 불기운을 잠재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문재 시인의 시 ‘물의 결가부좌’가 독경처럼 들려온다. “…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 개의 달이 빠져 나와도 끄덕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도 있느냐/ …구름은 높은 만큼 깊이 비치고, 바람은 부는 만큼 잔물결 일으키고, 넘치는 만큼만 흘러넘치는, 고요하고 깊고 오래된 물의 결가부좌가 오늘 같은 열엿샛날 신새벽에도 눈뜨고 있느냐/ …달빛이 뒤돌아서는 소리…, 물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결가부좌 트는 것이 보이느냐.”
◇흙내음처럼 살고 싶다는 황원 스님에게 명상음반 제작은 흔쾌하고 통쾌한 세계로 자신을 안내한 선세계에 대한 화답이다. 그는 “명상도 모르면서 명상음악을 만든다”고 질책했던 스승 정일선사가 생전에 음반 제작비를 지원해 주었다고 털어 놓았다.
사진=안영상 사진작가

 경기 가평 북한강변의 가일미술관에서 산쪽으로 난 길을 오르면 화야산 자락의 고동산이 아기를 품듯 에워싼 땅이 있다. 그곳 작은 암자 ‘약불선사’에 명상 음반을 제작하는 황원 스님이 기거한다. 예전에 산판일을 하던 이들이 머물렀던 집을 꾸려 요사채로 삼고 옆에 불단을 모시는 법당을 꾸렸다. 커다란 괘불이 내걸려 있지 않았다면 전형적인 산촌 민가의 모습이다. 스님들이 흔히 말하는 ‘토굴’ 참선도량이다. 장작을 피우는 아궁이가 있는 공양간엔 작은 의자들이 놓여 있고 지인 화가들이 가져다 준 그림들이 걸려 있어 ‘산골 갤러리 카페’ 풍경이다.

사람 셋이 누우면 족할 요사채 방엔 찾아오는 이들과 차를 나누는 찻상이 놓여 있다. 차담을 나누다 밤이 깊으면 스님은 아랫목을 손님에 내주고 찻상을 경계 삼아 윗목에 잠자리를 잡는다.

이른 새벽 아침공양을 마친 스님이 야생 차를 내 놓는다. 햇차의 첫 잔을 우려 놓고 손으로 온기를 느끼고 코로 향을 들인다. 차를 사랑하는 이들은 첫 잔에 쉽게 입을 대지 못한다. 사랑하는 여인의 입술을 앞에 둔 듯 가슴 뛰며 머뭇거려지는 설렘이 있기 때문이다. 황원 스님의 지기인 정일근 시인은 그런 설렘이 좋다고 했다.

정 시인은 황원 스님이 만든 음반 우리나라 차의 노래 ‘동다송(東茶頌)’을 처음 받아들고 그런 설렘을 느꼈다고 한다. 차를 좋아하고 선의 길을 가는 이가 만든 음악엔 분명 다선일미(茶禪一味)의 맛이 스며들게 마련이다. 음반 동다송에는 모두 11곡의 연주곡이 담겨있다. 연주곡 제목들도 한편의 시 같다. ‘황옥, AD48, 차’ ‘흐르는 강물처럼 찻잔에 담긴 달이 가네’ ‘초의의 꿈’ ‘차꽃이 핀 아침’ ‘대나무 잎에 맺히는 이슬로 차를 달이며’ ‘풀리는 찻잎처럼’ ‘차와 구름의 집 다운재’ ‘향 바람에 나리니’ ‘눈 내리는 밤에 찻물이 끓는다’ ‘명선하는 완당’ ‘차 한 잔의 대자유’ 등의 타이틀 곡이다. 음반의 큰 제목은 초의 선사의 동다송에서 빌려왔지만, 음반 속에 담은 정신은 이 땅의 차에 대한 모든 것을 서사적이고 서정적으로 담고 있다.

황원 스님은 우리 차의 시초를 ‘가야차’로 본다. 신라 흥덕왕 3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겸이 차나무 씨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은 것을 차 재배의 시작으로 보지 않고,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배를 타고 오면서 차를 가져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음반 동다송 첫 연주가 ‘황옥, AD48, 차’다. 그 연주 속에는 망망대해 2만5000리 바닷길을 건너오는 허황옥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런 웅장한 서사시가 음악으로 펼쳐진다.

황원 스님이 그동안 만들어 온 음악은 뉴에이지 계열의 ‘월드 뮤직’이다. 스님이 생각하는 월드 뮤직은 ‘세계적인 음악’이 아니라 ‘세계가 하나 되는 음악’이다. 신화와 역사, 과거와 미래, 동양과 서양의 경계가 없이 하나가 되는 음악이다. 신시사이저, 전자기타, 해금, 대금, 거문고, 장구 소리가 하나가 되어 거대한 강물처럼 흘러간다.

‘풀리는 찻잎처럼’ ‘눈 내리는 밤에 찻물이 끓는다’는 음악이 아니라 아름다운 서정시다. 정일근 시인은 찻잔에서 연초록 참새 혓바닥이 풀리는 소리가 들리고, 소리 없이 눈이 내리는 밤에 우주의 소리로 끓는 찻물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음반 동다송의 대미를 장식하는 ‘차 한 잔의 대자유’에선 그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가슴이 꽂히는 지루하지 않음은 필시 동다송의 음률이 사람의 호흡과 같이 숨 쉬기 때문일 게다.

정 시인은 개인적으로 ‘차와 구름의 집 다운재’를 즐겨 듣는다. 다운재는 울산에 있는 그의 차실 이름이다. 가끔 들러 차를 마시고 가는 황원 스님이 다운재에서의 차향을 기억하며 우정으로 음악 하나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멀리 여행을 떠날 때는 음반 동다송을 챙겨 간다. 어디서든 그 연주를 듣노라면 그의 차실 다운재에서 차를 마시는 것과 똑같은 즐거움을 느낀다고 한다.

음반 동다송엔 모두 56분54초의 연주가 담겨 있다. 초의 선사가 17편의 시로 동다송을 완성했다면, 황원 스님은 56분54초의 음악으로 새로운 동다송을 완성한 셈이다.

완당 선생이 초의선사가 차를 보내준 답례로 ‘명선(茗禪)’이란 글씨를 써 보냈다고 한다. 정 시인에겐 음반 동다송이 ‘명선’이다. 56분54초의 황홀한 명선이라 할 수 있다. 음반 작업은 스님이 프로듀서를 맡아 각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만든다. 현대음악에서 국악, 외국 민속음악까지 장르와 지역을 넘나들며 조화를 꽤한다.

10여장의 음반 중 ‘유라시아의 아침’은 우리 민족의 시원으로 달려간다. 스님은 민족의 시원이나 신화의 사유 체계 속엔 명상의 세계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제3세계 민속음악 속에도 시원과 신화가 녹아 있어 명상음악으로 활용하기에 제격이란다.

10대에 그룹사운드 활동 등 음악에 심취해 있던 스님은 어느 날부터인가 선세계에 빠져들어 머리를 깎게 된다. 흔쾌 통괘하게 오랜 웅어리가 확 뚫리는 맛을 느꼈다. 그는 선방에서 스승 정일 선사에게 혈기방장한 20대 초까지 종아리를 맞아가며 참선 수행을 했다. 매몰찬 스승의 회초리를 맞고 돌아서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퉁퉁 부은 종아리엔 보석을 흩뿌려 놓은 듯한 환희가 박혔다. 사실 선이란 질서를 바로잡는 행위다. 질서가 무너질 때 망상에 빠져들게 된다. 스승과 제자. 부모와 자식, 국가와 사회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질서가 무너질 때 어김없이 내리쳤던 스승의 회초리가 오늘도 스님은 그립다.

소리는 모든 것 위에 존재하며 질서를 아우른다. 명상음악이 자리하는 위치다. 깊는 침묵의 명상도 긍극의 소리를 듣기 위한 것이다. 어쩌면 음악에 빠져 있던 그가 명상에 빠져든 것은 자연스런 일인지 모른다.

스님은 부처님 오신 날 암자에서 펼쳐지는 명상음악 공연 무대를 꾸미느라 분주하다. 이번 공연엔 산(山)명상음악연구가 신현대씨도 참여한다. 산의 깊은 적막에서 건져 올린 명상음악이 소개될 예정이다. 이 밖에도 명상춤과 국악도 선보인다.

심성이 남도 황토 빛깔을 닮았다 하여 황토 스님으로 불리는 황원 스님이 서울 나들이를 갔다가 돌아오자 삽살개가 반갑게 맞아 준다. 법당으로 스님을 이끌고는 방석 위에 턱 하니 앉는다. 마치 스님이 없는 동안 자신이 예불을 올렸다는 듯한 행동이다. 그제야 밥을 달라고 밥그릇으로 달려간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스님은 아예 삽살개에 ‘예불’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예불이는 버려진 것을 주워다 기른 놈이다. 이젠 암자의 수행도반이 된 셈이다. 산문 밖이 온통 초록이다. 초록빛 깨침이다.

토종생태세상 꿈꾸는 홍석화씨, 토종이 숨쉬는 세계, 靑山을 찾아 바람같이 물같이…

◇토종생태마을의 샤먼을 꿈꾸는 홍석화씨는 “탐욕스러운 글로벌스탠더드의 종착점은 갈등과 전쟁”이라며 “토종의 특수성만이 세계를 먹여살리고 평화를 만든다”고 강조한다.
〈사진=안영상 작가 제공〉

‘밤 깊은 무대 뒤에 /분을 닦는 이쁜이/제 팔자 남을 주고/남의 팔자를 배우나/오늘은 카추사요/내일은 춘향이/가리라 정처 없이/가리라 정처 없이.’ 서울 안국동 한 허름한 건물 지하에 위치한 사랑방에서 지난날 유랑극단 단원들 사이에서 불려졌던 구성진 노랫가락이 흘러나온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20년 가까이 전국을 유랑하며 ‘토종 생태마을’을 꿈꿨던 홍석화(60)씨. 그가 좋아 모인 이들이 그가 특별히 법제한 막걸리와 노랫가락에 취해 밤을 잊어 가고 있다.

그가 서울에 다시 나타난 것은 1년 전이다. 그동안 지인의 다락방에서 지내다 두 달 전 이곳에 거처를 잡았다. 그는 서울대 치의예과 68학번. 학번은 있지만 졸업장은 없다. 낙제와 구제를 수없이 거듭하다 결국 도중하차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치과의사엔 뜻이 없었고 다만 철학도가 되고 싶었다. 당시 미국 유학 중인 큰누나가 장문의 편지까지 보내며 가로막고 나서는 바람에 일이 그리 됐다.

자연히 전공은 팽개치고 야구 연극 등 동아리 활동에 빠져들게 된다. 마당굿과 그것의 원형인 마을굿에 심취해 있던 어느 날 그는 오지마을에서 돌아오는 길에 길섶에 핀 들꽃에 눈이 꽂혔다. 야생꽃을 공부하면서 동식물의 종자문제 심각성을 각성한 그는 아예 ‘한국의 토종 101가지’라는 동식물도감을 펴냈다. 영국이 제국시대 식민국가의 ‘토종’을 거머쥐어 미국보다 여전히 종자 분야에서 우위를 확보하는 것은 그에겐 끔찍한 현실이었다. 내친김에 이 땅의 토종 먹거리를 찾아 나서 ‘한국의 토종기행’이란 책과 세상살이 차원에서 접근한 ‘토종문화와 모듬살이’ 책도 냈다. 그에게 ‘토종과 생태’는 삶의 화두다. 토종생태마을의 꿈을 아예 소설 ‘청산에 살어리랏다’에서 구체화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가 뒷간을 잃어버리면서 문제가 생겼다고 말한다. 그가 토종 생태의 첫 단추로 뒷간을 꼽는 이유다. 예부터 “자기 똥을 3년 안 먹으면 죽는다”는 말이 있다. 그는 이 말을 “잿간 변소의 거름이 곡식과 채소를 기르고, 그런 것을 3년 안 먹으면 병이 생긴다”는 말로 반추해 해석한다. 그가 한때 전국의 사찰 해우소와 재래식 변소를 탐방하고 사진전까지 연 이유다. 뒷간을 생태의 핵심고리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의 토종 뒷간론은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진짜 재래식 뒷간엔 냄새가 전혀 없소. 돌 덩어리만 두 개 달랑 놓고 재나 겨를 사용하는 뒷간, ‘푸세식’이전의 뒷간을 말하는거요. 그 재나 왕겨 등이 발효작용을 하기에 냄새라고 해봐야 그건 발효 냄새지 똥냄새가 아니우. 우리 선조들도 물로 씻어낼 줄 몰라서 수세식을 안 한 게 아니오. 음양오행설을 보면 배설물인 토(土)와 물, 즉 수(水)가 서로 상극이라 피했던 거지. 그리고 잿간 변소는 얼마나 멋진지 아우? 벽도 없고 지붕도 없어 그냥 사방이 탁 틔어 있는, 말 그대로 열린 변소야. 볼 일을 보면서 별이 총총한 하늘도 보고, 이 얼마나 아름답수!”

 

그는 토종생태마을을 현실화하기 위해 거처도 시골로 옮겼다. 하지만 지난 세월 농촌이 점점 어려워지는 현실에서 그는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문제의 열쇠를 쥔 이 시대의 대로마제국인 미국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글로벌스탠더드는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이고, 지역 토종은 모두를 살리는 상생의 길이다.

그에게 아메리카대륙 토종의 상징은 인디언 샤먼이다. 우리의 무당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은 80∼90%가 ‘약초박사’들이다. 대부분 30대 중반까지는 세속적인 삶을 살다가 각성해 샤먼이 된다. 그들을 만나보기 위해 그는 ‘인디아 루트’ 탐방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서울에 올라와 당분간 머물고 있는 것도 이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토종생태문화가 새로운 시대의 대안적 삶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포크음악의 황제 밥 딜런은 늘 전국순회공연 땐 그의 사부인 인디언 추장을 동행했다. 사실 히피문화의 정신적 바탕은 불교와 인디언 샤먼이다. 밥 딜런의 그런 배경은 가수이면서도 시를 쓰게 했고,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까지 했다.

그는 캐나다에서 인디언 샤먼을 만난 적이 있다. 독수리 깃털로 그의 몸을 스치고는 몸상태를 단번에 파악해 내는 능력을 체험했다. 그리곤 인디언 관계 서적들을 탐독했다. 그에겐 인디언문화(토종문화)가 문명의 그루터기로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것들이다. 인디언 사상의 핵심은 ‘대지가 어머니’. 그는 몽골리안의 천지인(天地人) 사상의 뿌리를 거기서 본다. 그는 토종을 관통하는 정신세계를 샤머니즘으로 보고 있다.

밤이 깊어지자 차 한잔을 나눈 그가 아메리칸 인디언인 블랙 엘크의 아침기도문을 읊조린다. ‘동쪽의 조용한 어둠의 정령이여 우리에게 그 고요함과 온화함과 같은 통찰력을 주십시오/북쪽에 사는 눈쌓인 산과 빙하의 힌빛 정령이여 우리에게 그 청결함과 시원함 그리고 겨울을 나는 동식물 같은 튼튼함을 주십시오/동쪽의 아침해가 떠오는 붉은 빛의 정령이여 우리에게 오늘도 새로운 힘과 지혜를 주십시오/남쪽의 생명을 기르는 황금색 정령이여 우리에게 생명을 기르고 지키고 열매를 맺게 하는 힘을 주십시오/우주의 별들 태양 달 아버지인 하늘이여 늘 우리를 지켜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우리가 우주의 모든 것과 조화롭게 살아 갈 수 있도록 어머니 대지여 늘 우리를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우리가 당신의 아이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당신을 상처 입히지 않고 더럽히지 않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당신을 통해 하나로 이어진 모든 생명에게 오늘이 보람 있는 하루이도록/그리고 제 안의 크나큰 신비가 좋은 만남과 결실로 이어지도록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생물에게도 우리가 기쁨이자 선물이기를 기도합니다.’

샤먼은 의사이자 마음을 치료하는 카운슬러였다. 정치도 했다. 홍석화씨는 이것들이 분열되면서 그런 능력들을 인간들이 차츰 잃어 갔다고 말한다. 노래방이 생기면서 노래가사를, 휴대전화가 생기면서 전화번호를 기억 못하듯이. 그 빈자리를 영미의학이 글로벌스탠더드라는 이름 아래 자리를 잡았다는 얘기다. 의학뿐 아니라 광범위한 영역에서 남북미대륙은 물론 중남미, 아프리카 등의 토종을 주목하는 것은 인류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자산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는 이런 난제들을 어거지로 풀려 하지 않는다. 현학적인 논리를 펴지도 않는다. 한데 어우러지는 놀이에서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다고 믿는다.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둬’ 버리면 물처럼 흐를 것이라 확신한다. 인디언 루트 탐방이나 한 달에 두 번씩 마련하는 사랑방 놀이판은 다만 그 물꼬를 트는 작업이다.

어떤 걸림도 없는 그에게도 아픔은 있다. 토종생태마을을 꿈꾸며 낭인처럼 보낸 세월은 가족에겐 고통이 됐다. 어느 해쯤엔가 집에 들렀을 때 일어난 일이다. 토종생태먹거리인 약초효소병을 집에 가져 왔는데 한밤중 폭발해 버렸다. 유리창문이 박살났을 정도였다. 아내가 방문을 똑똑 노크했다. “이젠 나가 사시지요”라는 말 한마디에 그는 그 길로 집을 나와 유랑객이 됐다.

그는 “지금이라면 자존심을 조금 굽혀서라도 집을 나오지 않았을 것인데”라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아내에겐 미안하기 그지 없지만 언젠가는 토종에 방목된 삶을 이해해 줄 것이라 확신한다.

한바탕 놀이판이 끝나자 그가 두릅 데친 것과 숫덩이와 효소, 된장, 녹차를 넣은 막걸리를 듬뿍 내놓는다. 돼지고기도 원두커피 가루를 넣고 찐 것이다. 한마디로 음식의 독을 제거하고 약이 되도록 법제화한 것들이다.

“예전엔 퇴역한 한의사들이 그런 법제 전통을 이어갔지만 요즘엔 거의 사라지고 없어. 서양의학 스탠더드 지식이 주범이지. 대체의학이란 것도 결국은 토종을 찾자는 얘기야.” 그에게 토종의 부활은 삶의 질 제고다.

그에게 ‘청산’은 토종이 숨 쉬는 생태 세계다. 청산이 그에게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한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은 평화세계다. 그 청산의 그루터기에 토종이 자리하고 있다.

10년째 우주화첩기행 장은경 화백

◇코끼리 같은 형상의 칠읍산이 창너머 풍경을 이루고 있는 작업실에선 장은경 화백마저도 풍경이 된다.
안영상 사진작가
칠흑같은 어둠 속에 그가 앉아 있다. 그 앞에 반딧불이가 유영하듯 날아다니고, 하늘엔 별똥이 사선을 긋는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캄캄한 밤이면 전등을 모두 끄고 밖으로 나앉는다. 바위 위에 정좌해 별을 바라보던 그가 깊은 명상에 빠져든다. 영락없는 참선 스님의 모습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가 일어나 숲의 어둠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다.

경기 양평 칠읍산을 맞보는 산자락에서 10년 가까이 우주와 마주 서서 작업하고 있는 장은경(60) 화백. 그에게서 이곳은 우주와 접선하는 소통 공간이다. 불빛은 눈앞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 만들지만, 어둠은 보이지 않는 그 너머 무한 세계로 안내한다. 그에게서 도심의 불빛에 길든다는 것은 우주와의 연결통로를 잃는 것이다. 모든 형상과 색을 품어버리는 어둠이 결국 그의 시야를 그 너머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이를 블랙홀 이론이라 했다.

그는 문명을 상징하는 전깃불이 인간의 우주 소통 능력을 약화시킨다고 말한다. 그가 산중에 자리를 잡은 이유다. 무한함을 상상할 수 있는 곳에서 무한한 우주를 볼 수 있다는 논리다. 도심 불빛이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의 천적이듯 전기불은 그에겐 우주 사유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깊은 밤 앞산 저 멀리, 달빛이 산 그림자를 드리우는 날이면 세속의 욕망은 어느 새 소리없이 흩어지고, 금방이라도 해탈의 문이 열리는 듯한 환상 속으로 빠져든다. 손이 닿을 것만 같은 그의 어깨 위로 북두칠성이 걸려 있다. 요즘 그는 자신이 가야 할 사후 세계가 하늘에 떠 있는 어는 별나라가 아닌가 느껴질 때가 많다. 깨달음 같은 것이다. 고대부터 내려오는 북두칠성의 신화가 그의 우주 사유 체계 속에서 생명력을 얻고 있는 것일까. 망자들이 칠성판에 누워 북망산에 가지 않는가. 칠성이 바로 북두칠성이 아닌가.

그는 별의 색깔이 사파이어에서 분홍까지 그렇게 다양하다는 것도 산속에 들어와서야 알게 됐다. 별구경을 하면서 인간은 신으로부터 우주여행에 초대된 자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주여행 길에 그리는 화첩기행이라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지구를 타고 우주를 구경하고 있는 것이지요.”
◇갤러리 서종 개관10주년 기념 초대전(11∼17일 인사아트센터)의 출품작 ‘시간과 공간, 그리고 유희’.

그가 이런 생각을 굳힌 것은 이집트 시와 사막지대 여행을 통해서다. 사막의 밤하늘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돔구장 같은 하늘에서 주먹만 한 별들이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 밤 기온이 섭씨 3∼4도로 떨어져 쌀쌀했지만 노천 온천에 몸을 담그고 별구경을 하고 있자니 문뜩 제가 지구별을 탄 우주여행자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때 작업공간을 밤하늘을 구경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야 겠다고 결심을 했지요.”

황금빛 사막과 웅장한 바위산의 협주, 하얀 모래 위에 섬처럼 떠 있는 오아시스는 그에게 우주로 열린 통로처럼 다가왔다. 눈부신 석회암의 물결인 백사막, 검은 피라미드 같은 흑사막, 시나이 반도의 거대한 협곡은 수도승의 사원처럼 거기에 있었다. 그리스도교를 비롯해 이슬람교, 유대교에서도 성스럽게 여기는 영적인 땅이라는 것이 실감됐다. 모세가 하나님께 십계를 받은 산으로 알려져 모세의 산으로 불리는 시나이산도 위치하고 있다.

낙타를 타고 가면서 바라보는 사막의 일출과 일몰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낭만적이다. 해가 뜨고 질 때 햇빛을 따라 점점 색이 바뀌거나 달빛에 빛나는 사막의 풍경은 내면의 세계로, 우주의 세계로 침잠하게 만든다.

그 이후로 그는 인도 중국 태국 라오스 베트남 유럽 미국 중남미 아프리카 등의 오지여행에 나섰다. “때묻지 않는 자연풍광이야 말로 우주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입니다. 인디언 샤먼의 능력도 우주(자연)와의 소통 결과물이지요.”

그는 오늘도 우주를 그린다. 우주의 시이자 우주의 노래다. 다시 말해 그에게 그림은 우주 여정 그 자체다. 화폭은 시간과 공간, 그 너머를 기웃하고 있다. 우주의 감성을 화폭에 옮겨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지 풍광에서 우주의 숨결을 듣는다. 황토빛 오솔길에서 고향의 정겨움이 떠올려지는 이치다. 산업화 과정에서 직선화 된 도로에선 그 맛을 건져 올릴 수 없다.

“우주는 모태 같은 존재 입니다. 자연이 하잔 대로 이리저리 굽어지는 길과 산천에서 안온함을 느끼는 이유죠.” 그에게 지구별 우주여행은 마음의 고향길이다.

그는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무조건 행복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우주여행에 초대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주에 눈을 돌리기 전엔 제 삶은 한 폭의 추상화 같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소득은 저 자신과의 만남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에게 우주는 그를 들여다보는 거울이 됐다.

사실 별을 보고 우주와 인간을 논했던 점성학은 고대 서양에서는 모든 학자들의 필수 과목이었다. 철학과 과학, 수학, 의학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학자들이 별의 움직임을 관찰했고,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점성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의사가 아니라 바보다”라고 말하며 제자들에게 점성학을 배워 ‘환자에게 흉한 날’을 파악하게 했다. 르네상스기까지 천문학자들은 대부분 점성가이기도 했다. 행성의 궤도와 운동법칙을 밝혀낸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도 유명인의 미래를 점쳐주고 당시 유행하던 ‘별점달력’을 만들어 돈을 벌기도 하는 등 ‘일류 점성가’로 이름을 떨쳤다. 전성기를 누리던 점성학은 르네상스기를 지나며 과거 점성학이 설명해 주던 분야를 실험과학이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자연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다른 의사과학(擬似科學)과 달리 점성학은 오늘날에도 귀중한 유산으로 여겨지고 있다.

“별과 우주에 대한 상상력은 인간에게 동화 같은 존재 입니다. 거기서 얻는 영감은 신이 인간에게 주는 지구별 여행의 가이드북이나 마찬가지죠.

그의 여행수첩에 깨알같이 적혀 있는 시구 하나가 눈에 들어 온다. ‘하나에 모두 있고/ 많은 데 하나 있어/ 하나가 곧 모두요/ 모두가 곧 하나이니/ 한 티끌 작은 속에/ 세계를 머금었고/ 낱낱이 티끌마다/ 세계가 다 들었네/ 한없이 긴 시간이/ 한 생각 찰나이고/ 찰나의 한 생각이/ 무한한 긴 영겁이네.’

저녁 무렵 그가 뻐꾸기가 울지 않는다고 걱정을 한다. 늘 제시간에 맞춰 울어 주던 놈이었다. 산속에 사니 새와 별도 한가족이 된다.

티베트 요가 수행자 길연, 음악과 영화가 흐르는… '엔터테인먼트 명상'을 아십니까

◇명상가 길연씨가 오디오시설이 갖춰진 일산의 티베트요가그룹 명상센터에서 음악명상에 잠겨 있다. 인도 기차여행을 통해 영어를 통달했다는 그에게서 명상은 기쁜 세상에 대한 눈뜸이다.
산사의 목탁 소리가 산속 깊은 계곡을 흘러내리듯 명상음악이 마음 길을 따라 흐른다. 한 남자가 텅빈 마루방에 앉아 깊은 명상에 빠져 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각종 영상비디오물이 쌓여 있는 시렁에서 영화 한 편을 골라 튼다. 티베트 요가 수행자 길연(52)씨의 음악과 영화가 있는 명상 풍경이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두고 엔터테인먼트 명상가라고 부른다.

“인간은 이 세상 잔치에 초대된 손님들입니다. 명상은 그 축제를 진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지요.” 그에게선 음악과 영화, 심지어 각자의 분야에서 일을 즐기는 것도 명상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질병을 앓거나 아플 때면 “아… 아…”, “음… 음…”, “아이고, 아이고” 하는 신음 소리를 입을 통해 몸 밖으로 표현한다. 신음 소리를 추적해 들어가면 그 근원지는 상처나 질병의 부위다. “아픈 사람들이 입을 통해 신음을 내는것은 소리를 통해 자기자신을 치료하고자 하는 자연발생적인 현상입니다. 하나의 치료 음악이라 할 수 있지요.”

아기가 배가 고플 때면 자기자신의 비어 있는 위장을 쥐어짜 배고픔에서 오는 고통의 사운드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소리를 듣고 달려가 젖을 물린다. 명상이 바로 그런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도 이와 똑같은현상이 일어난다. 상대방에게 무엇인가 원할 때면 아기가 우는것처럼 “자기야 배고파. 밥먹으러 가자”는 말소리에 위장을 진동시키는 사운드가 곁들여진다. 그러면 상대로부터 쉽게 사랑의 응답을 얻어낸다.

“누군가 간이 안 좋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모든 말소리에서는 간이 고통스러워하는 진동이 스며들게 마련입니다. 이 같은 고통의 사운드는 간을 소리, 음향을 통해 스스로 치료하려는 자연의 메카니즘이기도 합니다. 간을 스스로 치료하려는 사운드가 언어를 통해 몸 밖으로 나가면, 그 사운드가 간이 안 좋은 다른 누군가의 몸에 닿는다면 그 사람에게서도 똑같은 치료 효과가 일어납니다.”

바로 이런 연유로 몸이나 마음이 아픈 환자들이 서로의 질병이나 아픔을 통해 금방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론 몸이 아픈 사운드 하나가 상대방을 사랑에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가수가 자기자신의 몸이나 마음의 고통을 노래에 스며들게 할 수 있다면 흥행대박은 따놓은 당상입니다.” 
◇1993년 인도의 오쇼명상공동체에서 도반들과 수련을 함께하고 있는 길연씨(화살표). 그는 이곳에서 티베트 요가 창시자를 만나 사사했다.

실제로 비틀스도 이런 맥락에서 인도 음악에 관심을 가졌다. 시타르(Sitar)라는 인도의 현악기를 그들의 명곡 ‘노르웨이의 숲’ 도입부에 사용함으로써 대중음악의 방향과 소리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인도 신비주의와 음악에 열렬한 구애를 시작했고, 급기야 초월명상법을 창안한 인도 수도승을 직접 찾아 나섰다. 1960년대를 풍미했던 영화배우 미아 패로, 포크가수 도노번, 비치보이스의 마이크 러브 등 수도원을 방문한 이들과의 만남으로 이어졌고, 인도의 신비주의를 전 세계에 다시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티베트 요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이용해 몸과 마음의 평화를 유도한다. 고대 한의학의 산물인 신체의 혈 자리를 통해 치료의 진동 사운드가 쉽게 몸속의 고통스러운 부분으로 닿게 하는 것이다. 티베트 요가에선 이 세상의 모든 음악을 사람의 몸을 치료하는 24개 장기관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행복은 꿈의 회복에 있다고 말한다. “이 세상은 꿈의 세계지요. 철학적인 면에선 꿈의 세계(마야)는 허망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존적인 의미에서는 몸의 건강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낮에 불만족스러워했던 것들을 밤의 꿈에서 충족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불만족스럽고, 불행하고, 슬픈 상태로 잠자리에 들어도 아침에 깨어나면 행복하고 상쾌해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죠. 꿈을 꾸지 못한다면 건강과 행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인간은 꿈을 꿀 뿐만 아니라 꿈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동물이다. 사람들은 문명의 발달로 세상이 시끄럽고 복잡해지면서 꿈을 잃어버렸다. “현대인들은 영화를 제작함으로써 자기 마음대로 꿈을 만들어내게 됐습니다. 밤에 꿈이 부족한 사람들로하여금 낮에 캄캄한 극장 안에서 꿈꾸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잠시 동안 삶에 대해 만족하거나 행복해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영화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꿈의 세계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인간의 한계적인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건들을 영화는 단 2시간으로 축약해 되돌아보게 할 수도 있다. 그에 따르면 요즘 극장가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 ‘둠스데이’는 광우병의 프리온 단백질과 유사한 바이러스가 가까운 미래에 어떤 일로 발전될 수 있는지 ‘꿈 같은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지 루커스와 스필버그의 ‘인디아나존스3’에서는 인간 무의식 세계에서 접근할 수 있는 환상적인 여인의 자궁 속으로, 하나의 꿈을 통하여 단돈 8000원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루커스는 영화 ‘스타워즈’를 통해 우리를 자신의 머리와 가슴, 그리고 단전의 세계로 안내한다. 스타워즈 1편에서는 죽음의 별인 데스스타를 통해 인간 브레인, 즉 대뇌가 가지고 있는 세계에로 이끈다. 스타워즈2는 제다이 기사의 마스터인 요다를 통해 가슴, 심장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리고 스타워즈3는 제다이 기사 스카이워커의 아버지 데스베이더를 통해 증오와 분노로 가득한 단전의 세계로 초대한다. 게다가 증오와 분노의 세계로부터 어떻게 하면 자유와 평화를 얻을지 그에 대한 도가적인 해답도 깃들어 있다.

“영화를 통해 제가 발견한 놀랄 만한 사실은 스필버그, 루커스, 임권택 같은 거장들이 영화를 만들 때 그들의 상상력만으로 작업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거장인 이유는 영화를 만들 때 우주와 교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다소 황당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는 거장들은 의식이 때마다 쏟아져 들어오는 전기자기장의 변화나 지구, 땅에서 일어나는 전기자기장의 무드 변화와 밀접하게 교신하면서 작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내면세계는 태양과 지구의 무드와 한치의 오차 없이 함께 움직인다는 얘기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꿈의 세계와 접속하는 코드를 지니게 됩니다.”

길씨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중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 그는 서울 명문중 입학시험에 고배를 마시면서 인생 항로가 바뀌게 된다. 재수 과정에서 그는 도서관에서 학업보다는 동화책에 빠져들었다. 그에겐 꿈의 세계였다. 한때는 미군부대에서 음악 활동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는 마리화나에까지 손을 댄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마약 경험은 깨달은 사람들이 가 있는 의식의 경지를 힘 안 들이고 힐끗 훔쳐보는 것이지요. 약효가 떨어지는 순간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하는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는 마약을 ‘거짓으로 깨닫게 하는 약’이라고 말했다.

20대의 어느 날 그는 길거리를 걷다가 음반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인도음악에 운명처럼 빨려들었다. 그때부터 인도 요가와 명상 관련 책들을 섭렵했다. 내면에서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명상책을 썼다. “제가 썼다기보다는 들려오는 소리들을 그저 기록한것 뿐입니다.” 이런 이력으로 그는 불교방송의 명상음악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30대 후반에 그는 홀연히 인도로 떠났다. 오쇼명상공동체에 들어가 10년 가까이 지냈다. 그는 거기서 티베트 요가의 창시자 디라지를 만나게 된다. 그가 사사한 것은 옛 티베트 사원에서 라마승들의 해탈을 열어주던 비밀스런 명상의식이었다. 이른바 티베탄 펄싱 요가(Tibetan Pulsing Yoga)다.

티베트 요가는 인간의 몸과 마음의 모든 문제가 육체 어느 부위에서든 에너지가 원활하게 흐르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데 기인한다고 본다. 가장 근원적인 에너지 정체는 성 에너지가 활성화되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심장에서 뛰는 맥박을 통해 강력한 생체 전기의 흐름을 생성시키고, 그 에너지를 신경조직 속으로 보내 손상되어 있는 전기적 걸림돌들을 제거한다. 이렇게 해서 고통이나 아픔을 주던 침체된 에너지를 용해시키는 치유의 에너지로 변형시킨다.

“소풍 가기 전 날 어린아이의 설렘 같은 그런 감각을 회복해 주는 것이 명상입니다. 이 세상 축제를 진정하게 즐기는 것이지요.”

우리잡곡 살리기 운동본부 김규동 회장

김규동씨가 조 수수 등이 심어져 있는 토종잡곡밭의 작황을 살펴보고 있다. 그는 여름 햇살에 이삭들이 영글어 가는 모습을 보면 자신의 분신이니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보듯 대견스럽다고 한다./사진=안영상 사진작가
강원도 원주 치악산 남쪽 자락. 조 수수 동부 피 기장 등 잡곡류가 심어진 밭들이 옹기종기 누워 있다. 예전엔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정겨운 풍경이다. 간혹 나이 든 이들이 길을 지나다 향수에 빠져 밭이랑을 서성거리기도 한다. 자녀들을 이끌고 와 일일이 잡곡 이름을 알려주며 옛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부모들도 있다. 잡곡 밭이 잊혀진 옛이야기가 돼버린 것이다. 최근 들어선 그래도 ‘잡곡이 약곡’이란 인식이 확산되면서 토종잡곡을 구하기 위한 도회지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한 남자가 한여름의 따가운 햇살 속에 익어가고 있는 조 이삭들을 대견스러운 듯 어루만지고 있다. 지난 세월 미친놈 소리를 들어가면 우리 토종잡곡을 지켜온 우리잡곡살리기운동본부 김규동(64) 회장이다. 그는 20년 가까이 양봉으로 번 돈을 토종잡곡 보존에 쏟아부었다. 누구든 토종잡곡을 알기 위해 찾아온 이가 있으면 만사 제쳐 놓고 잡곡밭 현장강의도 마다하지 않는다. 잡곡씨를 원하는 이가 있으면 서슴없이 나눠준다. 그러면서 가져간 잡곡씨 종의 숫자만큼 새로운 토종을 찾아 올 것을 주문한다. 그렇게 해서 얻은 토종잡곡도 있다.

돈도 안 되는 일이니 주위 사람들이 이해할 리 만무다. “바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요. 하지만 저는 제 삶에 의미있는 일 하나를 찾은 것으로 이미 큰 것을 얻었습니다.”

김 회장에겐 토종잡곡에 매달리게 한 사연이 있다. 삼척지방의 차조가 특이하다고 하여 종자를 구입하여 재배하던 중 서울에서 열린 직거래 장터에 가지고 나갔다. 강원도가 원산지인 잿빛 어른차조를 처음 보는 차조라 하여 수입산으로 몰아 판매를 못하게 했다. “참담한 심정이었지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한없이 울었습니다. 제가 토종을 지키지 않는다면 훗날 우리 스스로 우리 잡곡을 퇴출시키는 시대를 맞게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는 650종에 이르는 토종잡곡을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집했다. 조의 경우 80종 가운데 48종을 힘겹게 확보했다. 못 찾은 것은 멸종이 된 것이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다.

“잡곡은 종류마다 성분이 다릅니다. 먹을거리에 큰 도움이 안 되는 조그만 이삭의 잡곡까지 선조들이 왜 심었겠습니까.” 그는 그것들이 반드시 민간요법의 약재로 쓰였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실제로 조와 기장류는 위에 좋고 녹두와 동부는 해독과 신진대사를 촉진시켜 염증과 어혈을 풀어주는 데 사용했다. 요즘엔 수수염색 옷이 아토피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인기다.

“일제 36년과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잡곡민간요법들이 사라져 갔습니다. 더 늦기 전에 약이 되는 토종잡곡을 되찾아 보존해야 합니다.” 그는 우선 표본도감을 만들려고 한다. 개인으로선 방대한 작업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토종잡곡은 수천년 전부터 우리의 팔도강산 어느 곳에서나 농약과 비료 없이도 잘 자라, 우리 민족의 건강과 삶의 주체로 계승 보전되어 온 보물입니다.”

게다가 세계 각국은 생물다양성협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생식물의 생태계보전과 작물재래종의 보전을 의무화하고 있다. 유용물질의 생산 수단뿐 아니라 품종개량에 토종의 역할이 중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김 회장의 토종잡곡 종자 헌팅은 1990년도부터 시작됐다. 주말이면 전국을 정처없이 떠돌았다. 가을엔 밭을 돌아다니면서 구했다. 밭 주인을 찾아 잡곡의 이름을 알아내는 일도 쉽지가 않았다. 어떤 땐 주인을 못 찾아 이삭 몇 개를 우선 자르고 돈을 이웃에 맡기기도 했다. 후에 연락처를 알아내 잡곡 이름을 어렵게 알아낸 것도 많다.

봄과 겨울엔 전국 5일장을 누볐다. 대부분 할머니들이 손수 농사를 지어 시장 한편에 쪼그리고 앉아 팔고 있는 희귀 잡곡들이 타깃이었다. 한번은 ‘갓끈 동부’가 TV에서 소개되는 것을 보고 즉시 달려가 한 알에 500원씩 600알을 사온 경우도 있다. 

김규동씨가 그를 찾아온 사찰음식전문가 정산 스님(오른쪽)과 잡곡섭생연구가 한명준씨(가운데)와 잡곡밭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치악산 남쪽 자락은 중앙선 철도와 맞닿아 있어 한국전쟁 이후 서울지역 가옥 복구를 위한 주요 목재 공급지였다. 자연히 나무가 베어진 산자락엔 잡곡재배 화전농이 번성했다. 서울로의 운송도 용이해 전형적인 잡곡재배 주산지가 됐다. 1970년대 초 국가의 화전민 정리 정책 이후 잡곡재배면적이 급감돼 왔다.

“토종자원은 이제 유전자원 확보라는 차원에서 다뤄져야 합니다.” 김 회장은 여름 휴가철과 가을 들녘에 60∼70대의 노인들이 조 율무 기장 등의 이랑에 들어가 향수에 젖어 만져보고 먹어보며 넋을 놓고 서 있는 모습을 종종 본다. 기성세대에겐 어린 시절 고향의 유전자를 불러다 주고 있는 셈이다.

토종잡곡 씨앗은 땅위에 그냥 뿌려놔도 자연 상태에서 자기 힘으로 발아하여 살아남는다. 더구나 다음 생의 자기 후손이 잘 자랄 수 있게 흙을 만들어 놓고 죽는다고 한다. “3년이 지나면 아무리 우거진 잡초 밭이라도 모두 이기고 자기 무리의 땅으로 만들지요. 원래 곡식은 잡초보다 강했지만 개량, 교배되면서 잡초를 이기지 못하게 됐습니다.”

김 회장은 토종잡곡의 여러 성분과 성질에 근거해 하나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잡곡을 어린나이부터 먹으면 체질이 개선되고 1대를 이어서 더 먹으면 나쁜 유전자까지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고혈압 가계인 자신의 집안에서 본인과 자녀의 모습이 실증적 자료가 되고 있다.

관계 전문가의 연구가 활발해졌으면 한다는 김 회장은 전통 토종잡곡의 약재 사용뿐 아니라 친근한 건강 먹을거리로서 ‘잡곡피자’를 제안한다. “잡곡의 종에 따라 각기 다른 영양과 맛, 향이 있음으로 과학적인 분석을 통하여 우리 몸에 맞게 개발한다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봅니다.”

전통의학에서도 잡곡에 대한 관심은 예로부터 있었다. ‘황제내경’에도 곡식만으로 병을 치료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문구가 있다. 곡식은 사계절의 정기가 맺어진 열매로, 다음해에 싹이 틀 수 있는 생명력이 그대로 살아 저장돼 있어 식품으로서는 가장 좋은 것이라 했다. 황제내경의 오운육기 편을 보면 ‘어떠한 병의 있으면 맛에 의해 처방하라’고 밝히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전통의학을 하는 이들은 잡곡을 맛으로 분류하여 민간요법에 쓰게 했다.

“전통의학에서 원초적인 기본 맛으로는 신맛, 쓴맛, 단맛, 매운맛, 짠맛에 떫은맛을 하나 더해 육미(六味)로 꼽으면서, 이 다섯가지 맛을 오장과 연관시켰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맛을 가진 팥은 간에, 쓴맛을 가진 수수는 심장에, 단맛을 가진 기장은 비장에, 매운맛을 가진 현미는 폐에, 짠맛을 가진 검정콩은 신장에 좋다는 식이다. 떫은맛을 가진 녹두는 영양과 성장 호르몬의 요소가 풍부해 성장기의 어린이나 청소년 그리고 노약자 환자에게 좋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사람의 오장 육부가 균형이 안 맞으면 병이 생긴다고 합니다. 오장육부에 대응하는 6가지 맛과 기능을 가진 대표적인 육곡을 동비율로 쌀과 혼합해서 잡곡밥을 지으면 건강에 좋을 수밖에 없지요.”

잡곡은 소박한 밥상도 가능케 해준다. “육미잡곡밥 한 공기면 영양면에서나 생리기능면에서 균형과 조화가 맞는 만족할 만한 식사가 됩니다.” 미국의 자연주의자 소로는 1년 중 2개월만 노동을 하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음을 체험으로 입증한 바 있다. 아마도 우리에겐 잡곡 같은 먹을거리가 그 같은 삶을 가능하게 해 줄지도 모른다.

“잡곡은 식품가공수출의 아이템에도 기반 콘텐츠가 될 수 있습니다. 분식장려 운동이나 혼식장려 운동을 했던 것처럼 우리나라 잡곡(약곡)밥 먹기 운동을 하면 농촌경제 살리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맛은 어쩌면 본능적이며 순리적인 것이다. 오장육부가 건강하면 정신도 맑고 맛 감각도 좋다. 그러나 오장육부가 건강하지 못하면 정신도 흐려지고 맛도 잘 모르며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맛이 없다고 느낀다. 맛을 읽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건강을 잃은 것이고 더 나아가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근 음식의 맛을 잘 모르겠다면서 미각 장애를 호소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많은 현대인들은 온갖 약품과 보약 또는 방부제로 몸이 이미 오염돼 있거나 조미료나 기타 식품 첨가물로 입맛이 마비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맛의 회복이 건강의 단초라는 얘기다.

한 예로 수박에는 단맛 외에 이뇨작용을 돕는 짠맛인 지린내 나는 맛이 들어 있다. 사탕을 먹은 후에 수박을 먹으면 이 지린내 나는 맛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입에 대자마자 아무 맛도 없는 맹탕 맛을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사탕의 단맛 때문에 입맛이 마비되어 수박의 진짜 맛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위암으로 투병하는 환자에게 식초에 담근 콩이 건강에 특효가 있다고 하여 아침저녁으로 먹게 하는 사람들도 맣다. 하지만 위장이 허약하여 생긴 위암에는 신맛이 극약이라, 환자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싫어서 진저리가 나는데도 누가 좋다고 하니까 억지로 먹는 바람에 위장이 더 나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김 회장은 귀리의 경우 콜레스테롤 수치를 줄여 고혈압에 좋은 잡곡으로 추천한다. 이와 더불어 그는 “벼룩기장이 만약에 당뇨에 좋은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면 5조원 이상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연구결과를 그는 학수고대하고 있다.

“우리 잡곡에는 우리 조상들의 삶이 서려 있습니다. 이 땅의 햇살과 이 땅의 물과 바람으로 키워 낸 먹을거리는 우리들의 생명이자 자존심이지요.” 수천종에 달하는 토종잡곡은 개방화의 바람을 타고 쏟아져 들어오는 수입농산물에 밀려 점차 설 땅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굶어죽어도 종자는 머리에 베고 죽었다는 선조들의 이야기는 이 시대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김 회장이 관리하고 있는 토종 잡곡밭에 식구들이 하나둘 늘어가고 있다. 두과류는 메주콩 11종, 밥밑콩 15종, 나물콩 15종 덩굴콩 19종, 팥은 적두 그루적두 등 9종을, 동부는 각씨동부 등 6종을, 그리고 녹두는 올녹두 그루녹두 등 8종이 자라고 있다. 깨과는 참깨가 8종, 들깨는 1종이 보존되어 있다. 박과는 호박 오이 수세미 박 등 6종이 보존·전시되고 있다. 가지과는 긴자주감자 등근자주감자 등 4종, 아욱이과는 각각 목화 1종, 메밀 1종을, 그리고 약료작물은 율무 결명자 등 4종을 보유하고 있다. 화본과는 보리 밀 각각 1종, 조는 올조를 비롯하여 26종, 수수는 찰수수 등 25종, 기장은 찰기장 등 5종, 옥수수는 황옥 백옥 등 16종을 재배하고 있다

“웰빙도 참살이도 결국엔 먹을거리에서 비롯됩니다. 토종잡곡은 약곡으로 그 중심에 있습니다.” 김 회장에겐 죽는 날까지 잡곡 밭에서 오래도록 일하는 것이 희망이자 행복이다. 잡곡밭은 이제 그의 인생무대나 마찬가지다. 잡곡 밭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고 싶다는 그의 말에서 무대인생같이 한 가지 자신만의 길을 찾은 이의 멋스러움이 묻어난다.

귀농15년차 前 노동운동가 전희식, “어머니 품같은 자연… 치매도 낫게 하더라”

◇전희식씨가 노모를 모시고 사는 세 칸짜리 산골집 툇마루에 앉아 시골생활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에게서 시골생활은 모든 생명체가 존엄해질 수 있는 생태환경을 체득해 가는 장이다.
한 발 나가면 계곡물이요, 눈을 뜨면 산이다. 나비와 산새들이 날아들고 바람마저 푸르다. 텃밭에서 따온 토마토를 곁들여 마시는 차맛도 별미스럽다. 호박잎과 깻잎으로 부친 전을 입안 가득 넣으니 온몸에 풋풋한 풀향이 감돈다. 자연의 냄새다. 전북 장수 남덕유산 자락에 둥지를 튼 귀농 15년차 전희식(50)씨의 ‘귀거래사’ 풍경이다. 완주군에 터를 잡아 농사를 짓고 있지만 2년 전 80대 노모가 치매에 걸리자 직접 수발을 들기 위해 이곳의 빈집을 따로 구해 손질하고 어머니를 모셨다. 20년째 비어 있던 100년도 넘은 세 칸 집이지만 온돌과 황토벽이 마음을 푸근케 해준다. 11남매를 키워냈던 집답다. 산길을 한참 올라 산자락에 나직이 업드린 집에 비안개라도 드리우면 별세상이다.

예전엔 30가구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살던 산골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뜰과 마당에 있었던 호두와 감, 뽕 나무만이 당시를 가늠케 해 줄 뿐이다. 전씨는 주변 수풀을 헤치고 텃밭들을 다시 일궈 자연농법을 실천하고 있다. 사람의 손길을 떠나 야생으로 자란 감나무와 뽕나무 잎을 채취해 만든 차는 자연의 엑기스나 다름없다.

생태 농부를 자부하며 살아가던 전씨는 3년 전 어느날 서울 큰형 집에 들르면서 큰 자괴감에 빠진다. 외딴방에서 기저귀를 차고 지내던 어머니가 막내인 그에게 “오줌 누는 데가 따갑다”며 옷자락을 잡고 놓지 않았다. 그날 그는 벌겋게 짓무른 어머니 아랫도리와 하얗게 세어버린 체모를 보고 울었다. 자식 키우면서 똥걸레를 빠신 햇수만큼은 다 못하더라도 5년 정도는 그의 인생을 잘라 어머니에게 바치기로 했다. 아내와 두 남매도 이해를 했다. 사시사철 두 평 남짓한 방에서 밥도 받아먹고 똥오줌도 방에서 해결하는 것은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편할지 모르지만 노모의 남은 인생을 가두는 것이라 여겼다. 농약과 항생제를 범벅해 키우는 일부 시설재배농과 양계농이 연상됐다. 생태자연농업이 뭔가. 농약과 제초제는 물론 비닐 시설에 가두지 않고 키우는 농법이 아닌가. 생태인간도 못 되면서 생태농업을 한다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파란 하늘과 철 따라 피고 지는 꽃, 산새들의 지저귐이 바람결에 실려오는 것을 어머니가 느끼고 보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눈이 내리는 날엔 신문지에 눈을 담아 어머니 손에 털어 놓았다. 심리적 수치심을 덜어 주기 위해 어머니의 기저귀도 없애기로 했다. 어머니에게 기저귀를 채워 놓는 것은 ‘똥오줌도 못 가리는 애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스스로 자인케 하는 처사라 여겼다. 음식 섭취와 배뇨시간의 상관관계를 면밀히 살핀 뒤, 때맞춰 변기를 대령하는 두 달간의 노력 끝에 배뇨감각이 회복된 것은 물론 당신 스스로 안방 뒷문을 열고 나가 전용 뒷간에서 똥오줌을 볼 수 있게 됐다.

늘 방안에 앉아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괴로워했을 어머니는 요즘엔 그럴 시간이 없다. 전씨가 그럴 틈을 주지 않는다. 채소를 다듬는 등 잔일거리를 일부러 만들어 맡긴다. 노인들은 스스로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한없이 위축돼, 생산적인 일을 하게 해 자신감을 되찾게 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의 이런 노력들은 어머니의 예전 일부 기억이 회복되는 효과로 나타났다. 

◇어머니 간식거리인 깻잎 전을 만들기 위해 전희식씨가 비가 내리는 가운데 텃밭에서 자연농법으로 키운 깻잎을 따고 있다.
치매 노인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히기 일쑤다. 그럴 땐 일부러 양말에 구멍을 내 어머니에게 슬쩍 내밀면 어머니의 분노는 어느 새 사라지고 바느질에 집중한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지 못할 때 끼어드는 것이 망상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전씨는 지난 삶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 치매라고 여긴다. 그러기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지난 3년여 동안 수많은 관련 책과 자료를 탐독하고, 노인 요양시설에서의 도우미 활동 결과 얻게 된 결론이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어루만지는 데 좋다는 동물치료를 위해 고양이와 닭도 키우게 하고 있다. 밭일에도 어머니를 대동한다. 일광욕 효과뿐 아니라 일은 더뎌도 짜증과 울화 푸념할 시간을 없애기 위해서다. 이런 경험들은 ‘똥꽃’(그물코)이란 책으로 지난3월 출간됐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존엄’이다. ‘관리’라는 명목으로 우리 사회가 노인에게 얼마나 많은 무례와 무시를 범하고 있는가. 전씨는 집을 들고 날 때도 언제나 어머니에게 큰절로 인사를 드리고 정상인에게 하듯 모든 일을 고한다. 그래도 원거리 외출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역정이 나 있다. 과자 등을 내밀며 한동안 달래야 풀어지곤 한다. 집을 찾는 방문객에게도 거부감이 심해 같은 방법으로 누그러트린다. 치매노인에게 역정도 당당함의 표현이기에 반가운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전씨가 강조하는 치매노인 치유는 관리나 치료의 대상이 아닌 삶의 주체자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치매노인 앞에서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이 비웃거나 무시, 개탄하는 것은 물론, 말이나 행동을 교정해 주려는 것도 삼가케 한다. 그로인해 좌절하고 그러다가 끝내는 언제나 부정당하는 자신마저도 포기하는 것이 바로 치매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포기한 삶의 틈새로 끼어든 이물질이 치매라는 것이다.

어머니의 황당한 말에도 늘 “아∼그래요” 하지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는 전씨는 노인 요양시설의 일률적인 환자복과 식단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뭘 입을까, 뭘 먹을까 ”스스로 결정토록 해 주어야 한다는 소신이다. 그는 집에서도 늘 어머니에게 “뭘 입으시겠냐, 뭘 드시겠냐’며 묻는다. “밥 먹지 뭘 먹어, 입던 옷 입지 뭘 입어”라는 뻔한 답이 반복돼도 그는 또 여쭌다. 삶의 주체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공동 육아 같은 생태공동양노를 모색하고 있는 전씨는 또한 치매노인의 신비로움에 주목한다. 과거 현재 미래가 혼재되고, 의식과 무의식은 물론 현실과 꿈, 상상을 넘나드는 모습은 환타지 콘텐츠로 손색이 없다는 얘기다. 때론 선승의 법문같이 다가오기도 한단다.

전씨는 원래 노동운동가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 모진 고문으로 몸과 마음이 피폐된 어느 날 그는 문득 삶의 본질을 찾아 출가를 결심한다. 행자생활을 1년 가까이 했지만 처자가 있는 몸이라 출가를 접고 버금가는 환경으로 산골을 선택했다. 지난 삶은 체제, 제도, 권력집단 등 외재적 변수로 문제를 파악하는 데 익숙한 시절이었다. 외부의 적에게 치닫다 보니 자아 고갈에 직면했다. 그에게 시골생활은 내면으로 향하는 삶의 방식의 선택이다. 은퇴 후 전원생활 같은 것이 아니다. 그에게서 귀농은 단지 직업을 농업으로 바꾸는 일이 아닌 삶의 패러다임을 전면 전환하는 것이다. 끝없는 소유와 욕망에 사로잡혀 인생을 소진하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자연농법으로 생산된 채식 위주의 먹거리와 대체의학 등을 통한 건강 유지는 의료비를 제로에 가깝게 만들었다. 생활비도 도회지의 20% 정도면 충분하다. 올해엔 자연농법으로 키운 감자로 수백만원을 벌었다. 그의 집과 농토는 사람 건강에 가장 좋다는 해발 600∼700m에 위치해 있다.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지요. 내면의 자기 시간으로 움츠러들기엔 제격이지요.” 그는 청정하게 살아가는 데 가장 좋은 조건이라 했다. 농한기에는 국악과 영화 풍수학 등 각종 단체에서 마련하는 강의를 듣는다. 그는 전주영화제에도 출품을 한 아마추어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문화 놀이 노동이 하나되는 일체의 삶을 그는 꿈꾼다.

앞산은 시시각각 변화는 산수화다. 그는 요즘 왠지 혼자 있는 시간마저도 충만감으로 벅차다. 자연과 통했다는 통쾌감이다.

자전거 여행가 차백성씨, 영혼마저도 자유롭게… 두바퀴로 세계를 누빈다

◇도심 공원에 자전거를 끌고 나온 차백성씨. 자전거 세계일주를 목표로 삼고 있는 그에게 자전거는 원초적 자유의 분신이나 다름없다.
봉급쟁이들은 늘 꿈꾼다. 조직의 틀을 훨훨 벗어던지고 한번쯤은 자신의 인생에 스스로가 매니지먼트가 되겠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 꿈을 자꾸만 잡아맨다. 자전거 여행가 차백성(57)씨는 49세이던 2000년 겨울, 고심 끝에 넥타이를 풀었다. 어릴 적 자전거로 세계를 누비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대우건설 상무이사 명함을 버렸다. 있어 봐야 몇 년 더 회사 생활을 하겠나 싶었고, 한번 사는 인생 ‘다리 힘이 더 빠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세계를 두 바퀴로 달리기’로 마음먹었다. 길게 보면 그것이 더 소중하리란 판단에서다.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기란 쉽지 않은 법.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지만 하나를 얻기 위해선 하나를 버려야 하는 것이 세상사의 자명한 이치가 아닌가.

‘한 남자의 평생 소원’이란 명분에 아내와 아이들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회사 상무보다 자전거 여행가가 더 자랑스럽다며 오히려 격려까지 해줬다. 가정을 위해 25년간 직장생활에 충실해 온 가장에 대한 배려였다. 씀씀이를 줄여서라도 충분히 수고한 자에게 떠날 자격을 부여한 셈이다.

비로소 그는 자신만을 위한 시간의 여정에 올랐다. 자전거 세계여행의 첫 목표는 미국 서부 해안. 바다를 원없이 바라보며 마음껏 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꼬박 한 달을 달려서 샌디에이고에 도착했다. 멕시코 국경에 섰을 땐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시애틀에서 샌디에이고에 이르는 서부 해안도로 3000km. 차씨는 꼬박 30일간 하루 평균 100km를 내달려 ‘도전’에 성공했다. 길, 바람, 고독과의 싸움이었다. 바닷가 야영지 텐트 위로 별이 총총 영글고, 그리운 이의 얼굴들이 그 속에 알알이 박힌다. 밀려가는 파도에 달빛마저 술렁일 즈음, 밤의 적막 속에 파도 소리만 가슴속을 파고든다. 보물섬을 탄생시킨 빅서도 그 중간 여정에 들어 있다. 폐결핵을 앓았던 스코틀랜드 작가 스티븐슨이 산자수명한 빅서에 잠시 머물렀을 때 바다를 바라보며서 받은 영감으로 쓴 것이 ‘보물섬’이다.

서부개척사와 인디언 수난사를 포커스로 삼은 두 번째 코스에선 1804년 발족한 ‘루이스와 클라크 탐험대’의 통역으로 21개월간 8000km 탐험 대장정에 참가했던 인디언 여인 새커거위아와 1870년대 인디언을 몰살하려는 미 기병대에 맞서 싸웠던 인디언 전사 크레이지 호스의 흔적을 찾아 미국 중서부 대평원을 달렸다. 하늘과 구름, 눈, 비, 빙하, 강, 산맥 등 변화무쌍한 자연 앞에 자전거는 일엽편주였다. 인간 존재의 메타포로 다가왔다. 차씨는 앞만 보고 질주했던 삶을 비로소 관조케 된다.
◇차백성씨가 쓰가루 해협을 건너 홋카이도 하코다테 항으로 가기 위해 아오모리 항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다.

대평원에 들어서면 자전거 여행자는 한 점으로 흡수된다. 방랑의 센티멘털을 맛보기에 제격이다. 헤르만 헤세의 시 ‘흰구름’의 구절이 저절로 떠올려진다. “오, 보아라/ 잊혀진 아름다운 노래의 조용한 멜로디 처럼/ 푸른 하늘가를 계속 떠도는 흰 구름을/ 긴 여행 속에/ 방랑의 슬픔과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흰 구름을 이해할 수 없으리/ 나는 태양과 바다와 바람을 사랑하듯/ 정처 없이 떠도는 힌 구름을 사랑한다./ 고향 없는 자에게 그것은 /누이며 천사이기에…”

하와이 제도의 오하우와 마우이 섬에서는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 플랜테이션 빌리지와 푸우이키의 한인 공동묘지도 찾았다. 이민 선조들의 아픈 과거의 흔적 속에서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다. 노을이 물드는 와이키키 해변을 달렸다. 수평선 너머로 스러지는 낙조에 추억의 창이 열리며 어디선가 귀에 익은 노랫가락이 바닷바람에 실려왔다. “사랑이란 즐겁게 왔다가 슬프게 가는 것/ 훌라 춤에 흥겹게 기쁨도/ 모래알에 새겨진 사연도/ 파도에 부서지는 이 순간/ 하와이언기타에 목 놓아 나 여기 웁니다.

차씨는 최근 자전거 하나에 의지에 북미대륙과 하와이 7000km를 질주한 이야기를 묶어 책 ‘아메리카 로드’(미래인)를 펴냈다.

그의 자전거 바퀴는 멈춤이 없었다. 북미에 이어 서유럽, 아시아를 넘나들었다. 이런 그에게 사람들은 ‘바이크 차’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인터뷰를 위해 신문사로 나오라고 하자 그는 편집국에 미국 중서부 여행에 동반했던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편집국 사상 자전거를 몰고 사무실까지 들이닥친 이는 아마도 그가 처음일 게다. 그는 여행 중에도 자전거를 방에 함께 들여 잠을 잔다. 한번은 미국에서 숙소 주인이 자전거를 방에 들여놓을 수 없다고 했을 때 그는 “여행 중 자전거는 아내와 같은데, 아내를 밖에 두고 편하게 방에서 잘 수 없다”고 버텄다. 그러자 숙소 주인은 “와이프 요금은 받지 않겠다”며 조크로 승락한 적도 있다. 차는 10년이 훌쩍 넘은 중형차를 몰면서 자전거는 럭셔리급이다. 그가 가진 자전거 5대의 값은 중형차 서너 대보다 비싸다.
◇일본 홋카이도 최북단 소야미사키의 땅끝마을 표지탑에 오른 차백성씨.

차씨는 자전거의 묘미, 매력은 몸의 리듬에 가까운 느림에 있다고 말한다. 자동차에 비해 많은 것이 눈과 가슴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생체의 미학’이다. 캐나다 로키산맥의 만년설과 호수가 어우러진 풍경을 달릴 땐 수채화에 흡수되는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 그 질주의 묘미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세상을 누린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자연풍광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통해 “본능과 질서에 채워진 족쇄를 풀고,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 말라”고 말했다. 카잔차키스가 잠든 지중해 크레타 섬도 들렀다. 자유를 향한 몸짓에 무작정 이끌렸다. 아마도 자전거 여행의 유전자도 바로 ‘자유’가 아닐까. 자유에 지칠 때면 질서로 돌아온다. 질서는 매여 있는 일상이다. 여행은 돌아올 홈베이스가 있을 때 의미가 있게 마련. 생활이 권태로울 때쯤 그는 다시 여장을 꾸린다. 야구에서 홈베이스를 다시 밟기 위해 1루 2루에 진루하는 것 처럼.

차씨의 자전거 사랑은 원초적이라 할 수 있다. 두 바퀴를 몸의 일부로 삼아 어디든 달려갈 수 있다는 데 본능적으로 끌리고 있다.푸른 바다만 바라보아도 가슴이 뛰고, 그 너머 미지의 세계가 있으리라 믿었던 그였다. 그래서 한때는 선원이 되려고 해양대학 진학을 꿈꾼 적도 있다. 대우건설 시절 아프리카 수단, 나이지리아 등에서 10년을 근무하면서도 폭양 아래서 자전거를 탔다. 누구나 어린 시절, 세발자전거에서 바퀴 하나를 떼어내고 아슬아슬한 두발자전거 타기를 시도한 적이 있을 것이다. 몇 번이나 넘어지고 무릎이 깨지는 아픔을 겪다가 마침내 두 바퀴를 굴려 나아갔을 때의 짜릿함, 그 희열감을 어른이 되어서도 가슴속에 간직하며 살고 있는 이가 차씨인지도 모른다. 어디론가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 이끌려 틈만 나면 자전거 안장에 그는 오른다..

그는 까까머리 고등학교 시절 자전거로 서울서 대구를 3박4일 동안 꼬박 내달린 전력이 있다. 가족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비포장인 추풍령고개를 넘고, 빗속에서 빵으로 끼니를 때우며 감행한 ‘거사’다. 무엇인가 이뤄냈다는 짜릿한 성취감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김찬삼씨의 세계일주 배낭 여행기를 읽은 후부터는 자전거 세계여행의 로망을 키웠다.

그의 자전거 여행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일본의 시모노세키∼히로시마∼니가타를 거쳐 홋카이도의 최북단인 와카나이까지 2500㎞를 이미 달린 바 있는 그는 또 하나의 거사를 준비하고 있다. 내년 1월 초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희망봉까지 1만3000㎞ 아프리카 대륙 종단에 나선다. 매일 100㎞를 달려도 휴식시간까지 계산하면 6개월 정도 걸리는 일정이다.

동유럽 자전거 여행도 추진하고 있는 그는 틈틈이 한국의 동서남해의 바닷가 도로를 달린다.특히 시원한 바다와 어우러지는 7번 국도의 영덕 구간과 영화 ‘서편제’를 촬영했던 청산도(전남 완도)는 그가 좋아하는 한국의 자전거 길이다.

여행은 여행지에 사는 사람 혹은 여행 온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차씨는 그들을 통해 세상의 창과 자신을 들여다보는 창을 본다.그 창을 통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그 속에서 자유롭게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바퀴가 흐르면 풍경도 지나가고 사람도 지나간다. 잠시 정을 나누었던, 세상에서 다시는 보지 못할 얼굴들일 수도 있고 마지막 발걸음의 장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모든 것과 모든 순간이 소중함으로 다가온다. 여행을 통해 이별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만남과 헤어짐은 별개가 아님을 알게 해준다. 삶과 죽음도 그럴 것이다.

여행은 그래서 인생을 풍요로게 해준다.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공간적으로 넓은 삶을 살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오래 사는 삶’이라는 것이 차씨의 공간적 수명론이다.

바람을 가르며 떠나는 자전거 여행. 시속 20km, 생체속도이기에 온 몸이 열리는 짜릿한 여행이라는 것이 차씨의 자전거 여행 예찬론이다. 자동차론 놓치고 마는 대자연의 풍경과 바람, 길의 운치를 자전거는 고스란히 느끼게 해준다. 자신은 물론 지구의 건강까지 지켜주는 자전거. 그 위에 올라 그는 오늘로 페달을 밟는다.

현실에 매몰되고, 타협하고 비굴해진 모든 이들에게 그는 꿈을 가지라고 말한다. 그래야 삶이 당당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꿈은 꿈에서 끝나면 꿈이 아니라고 그는 강조한다. 그에게서 꿈과 현실은 자전거의 앞바퀴와 뒷바퀴의 관계다. 자전거를 타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으로 석양이 붉게 탄다. 정열은 끝간 데 없이 희망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는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니라 꿈을 살아가는 이다.
 
길 위의 시인 이용한, 가을, 높고 외로운 산마루 찾아 … 발길에 나를 맡겼다
 
◇흙 돌담길의 정겨움이 남아 있는 전통가옥을 찾은 이용한씨가 유년시절 친구들과 뛰놀던 고향마을을 떠올려 보고 있다.
내게 오라 한 적도 없는 길들이 눈앞에 펄럭인다. 꽃피는 숲길이 발목을 잡아끌기도 한다. 봄에는 남도의 향긋한 바람이 나를 부른다. 가을이면 외롭고 높은 산마루가 그리웠다. 그럴 땐 길에 나를 맡겼다. 그 길 떠남과 돌아옴의 윤회는 필경 그리움과 기다림의 몸바꿈이 아닐까.

지난 10여년간을 그렇게 떠돌았던 나, 이용한(40)을 사람들은 길 위의 시인이라 치장했다. 스치는 바람결에도 나는 바람난 남자가 됐다. 슬그머니 두메산골이며 바닷가에 스며들었다. 숨어살기에 때 묻지 않은 순박한 애인을 그곳에서 포옹했다. 길 위에서 나는 나무와 바람을 보았고, 구름과 언덕과 달빛에 눈시울을 붉혔다. 가슴으로 다가가 감응하려 했다. 때로는 다리가 아팠고, 어느 땐 마음이 아팠다. 10년간의 풍찬노숙에 나는 곤하고 더러는 망가졌다. 그것은 떠도는 자가 감당해야 할 어쩔 수 없는 지불금이었다. 어딘가에 내가 만나지 못한 행복한 풍경이 존재하는 한, 나는 또 그것을 만나기 위해 야금야금 길을 먹어치우는 ‘길의 미식가’가 됐다.

나의 떠남은 어쩌면 운명처럼 다가왔다. 충주댐 건설로 중학교 2학년 때 고향집을 가슴에 묻으면서 갈 수 없는 귀향의 머나먼 방랑이 시작됐다. 오지마을의 옛집기행 등 사라져가는 이 땅의 서정과 풍경을 찾아나선 것은 수몰된 고향집을 찾아나선 무의식적인 몸짓이란 생각이 든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시인이 된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정처없이 떠도는 여행가가 됐다. 대학 땐 시를 쓴다는 사명감으로 교문과 거리에서 시대적인 부조리와 대치했고, 졸업 후에는 겨우 들어간 직장에서 노조활동으로 3개월 만에 잘렸다. 다시 들어간 잡지사 근무 시절 나는 시인으로 등단(실천문학 신인상 수상)하고, 시집도 출간했지만, 타고난 역마살과 방랑벽을 억누르지 못해 스스로 출근하지 않는 인생을 택했다. 그때부터 보편적인 삶에서 이탈을 했다. ‘길 위의 시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지난 12년의 세월이 그랬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나선 것은 아니었다. 어디론가 떠나서 헤매고, 떠돌고, 때로 주저앉아 하염없이 초승달을 받아 적다 보니, 방랑이란 것이 조금씩 내 안으로 들어와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씩 더 먼 곳으로 떠났으며, 더 외롭고 낯선 곳으로 나를 내몰았다.

여행에 관한 한 나는 이제껏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자 했다. 알려진 곳보다 버려진 곳을 떠돌았고, 명승 절경보다는 언제나 외로운 풍경에 심취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했다. 역마가 호구지책이니 얼마나 행복하냐고 누군가는 말한다. 하지만 이제껏 방랑이 나를 먹여살리진 못했다. 이런저런 책을 내고, 짤막한 잡문을 써 번 돈은 고스란히 길에 뿌려졌다. 시 쓴다는 놈이 잡문이나 쓴다고 어지간히 욕도 먹었다.
◇삼척 무건리 오지마을 답사길에 나선 이용한씨. 그는 산골 여행에서 너와집 굴피집 등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련함을 글로 기록했다.

방랑 10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내고, 나이 40이 되어서야 혼인이란 걸 했지만, 그것이 오랜 떠돎의 면책이 될 순 없었다. 보편적이고 무난한 삶을 바라는 이들에겐 나의 모든 행적이 불편부당한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들어선 길이 잘못된 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설령 잘못 들어섰다 해도 너무 늦었고, 너무 많이 왔다. 나에게 인생과 여행과 길과 시는 뒤엉킨 한 몸이고 한 뿌리다. 그것은 내가 택한 운명이고 비극이다. 그래야 한다면 그래야 한다. 여행하는 시인이든, 시 쓰는 여행가든 아무래도 좋다. 좀더 나는 떠돌 것이고, 좀더 나는 미안할 것이다. 좀더 희박하고, 좀더 건조한 곳에서 좀더 나는 시달릴 것이다. 아직도 나는 궁극의 방랑에 도달하지 못했고, 여전히 역마살의 운명 앞에 기진해 있다. 기약할 수도 없고, 안도할 수도 없다. 그래도 이렇게 길 위에 서는 것이 썩 나쁘지는 않다. 저자와 독자로 만나 배필이 된 아내도 그것을 이해한다. 서두르지 않아도 인생은 충분히 짧지 않은가. 정처없는 시간의 유목민으로 모두를 초대하고 싶다.

나는 어느 겨울날 ‘길의 미식가’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어 보았다. 다시 난 길 떠날 것이다/여긴 비릿하지도 않고 덜컹거리지도 않으며 갸륵하지도 않다/ 난데없는 풍랑으로 며칠씩 섬에 발이 묶이고, 눈길에 미끄러진 애마를 시골 카센터에서 ‘야매’로 고치면서/ 다시 난 편서풍에 몸 맡길 것이다/ 아무래도 난 한계령 사스레나무가 알량한 연애보다 좋고/ 왕피천 노을이 충무로 극장보다 좋다/새벽 6시의 바닷바람에 난 미칠 것이고, 어느 날 송계 동문쯤에서 주저앉을 것이다.

길은 언제나 세상의 은밀한 곳으로 나를 인도해 주었다. 오랜 옛날부터 시인들이 길에 탐닉한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늘 우리의 숨겨진 모험심과 메타포를 자극한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방랑’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감식안’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로드무비’가 된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하거나 조금 더 불행할 뿐이다.

나는 볼 수 없는 것들을 길에서 발견하고자 했다. 아니 길에서 쓰고자 했다. 그 길에서 나는 옥수수대궁을 스치는 바람을 받아 적었고, 벼랑에 걸린 초승달을 보았다. 하지만 훌쩍 떠난다고 해서 여행이 모든 것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때때로 아무런 소득도 없이 몸만 고되고, 정신이 아픈 것. 이 외롭고 낯선 세상에 던져졌다는 느낌. 그럼에도 삶은 가는 것이고, 가고자 한다면 세상은 가는 자의 몫이다. 누군가 “그 길에서 당신은 무엇을 얻었는가?”라고 묻는다면, 아직 나는 분명하게 대답할 수가 없다. 아직 나는 가야만 하는 길 위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 펴낸 여행에세이집 ‘은밀한 여행’(랜덤하우스)에서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석탄가루가 날리는 도계의 저녁 여인숙에서, 팽목 항구에 나앉은 바닷가 민박집에서 나는 몇 번이나 나의 역마살을 탓했다. 도마령 길목의 상촌 굴다리 눈길에서, 폭설을 뚫고 기어이 올라간 윗면옥치 길 위에서 한번 더 나는 부딪히고 미끄러졌다. 그렇지만 나는 자꾸 비릿하고 덜컹거리며 갸륵한 곳으로 가야만 했다.”
◇내년부터는 세계오지여행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이씨가 티베트 조캉사원 앞에 섰다.

여행이란 그저 길에게 나를 맡기고, 바람과 구름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다. 숲에서, 바다에서, 낯선 도시에서 무언가를 가져오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거기서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아도 이미 많은 것들은 머리와 가슴속에 들어와 있다. 굳이 수첩에 적지 않아도 마음이 모든 것을 받아 적는다. 마음이 받아 적은 것들은 언젠가 시가 되고, 산문이 되고, 행복한 기억이 된다. 설령 무언가가 되지 않더라도 여행은 여행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시인 프로스트는 “참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라고 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은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의 한 페이지만을 읽었을 뿐이다”라고 했다. 새겨볼 만하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나는 집에 있다는 것에 절망을 느꼈다. 나의 삶을 보내야 할 곳 가운데 지구상에서 이보다 나쁜 곳은 찾아보기 힘들 것 같았다”고 쓰고 있다.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머물고 있을 때는 늘 떠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괴테는 유럽 전역을 떠돌았으며, 랭보는 마지막으로 아프리카를 여행했다. 김훈은 자전거 여행을 통해 ‘문장의 힘’을 얻었고, 김시습은 젊은 시절 10여년 동안 방랑시인으로 방방곡곡을 떠돌았다.

현대시인 중에도 유난히 여행을 통해 시적 영감을 얻고, 여행을 주된 시의 테마로 끌어온 시인들이 적지 않다. 황동규의 ‘몰운대행’이나 조정권의 ‘산정묘지’, 최승호의 ‘고비’, 이생진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 등이 단편적인 예에 속한다. 또한 김명인이나 기형도, 송재학, 신대철, 함성호, 박정대, 박용하, 임동확, 황학주 등 이름을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인들이 여행과 기행을 통해 수많은 시와 시집을 만들어냈다.

사실 그동안 내가 해온 여행은 주로 두메를 헤매고 섬을 떠도는, 무수한 시간을 길에다 버려야 하는 여행이었다. 때로 차를 저만치 버려두고 하루종일 걸어야 했고, 느닷없이 들이닥친 태풍으로 선창가 민박집에서 며칠 동안 비오는 바다만 바라보기도 했다. 지나고 나니 그게 다 추억이고 힘이다. 땅은 가는 곳마다 그곳의 몸짓과 표정을 감추고 있지만, 어떤 특정한 장소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게 마련이다. 가령 그곳에서 잊을 수 없는 문장을 얻었다면 더욱 그렇다. 나에게는 정선 같은 두메가 그렇다. 이마를 스치는 선연한 바람과 미각을 자극하는 냄새와 산천과 천연함이 뒤범벅된 순진한 시골. 사북 지나 고한에서 만난 폐광촌의 저녁은 아팠고, 정암사 계곡의 물소리는 오래오래 귓전에 부딪혔다. 오대천이며 임계천이며 소금강 물줄기를 다 모아 흐르던 조양강 물길은 나를 이리저리 이끌었다.

정선의 산굽이 강굽이마다 들어앉은 웅숭깊은 마을에서 피어오르던 밥 짓는 연기에 나는 내내 눈이 매웠고, 순진한 추억에 젖었다. 하지만 정선에서의 날들은 조금씩 개발과 변화 앞에서 무너져갔다. 어떤 것들은 사라지고, 어떤 것들은 잊혀져갔다. 풍경의 무너짐 앞에서, 그러니까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단어를 동원한다는 것이 무의미했다. 풍경의 감동을 이야기하기도 어려운데, 풍경의 무너짐을 이야기하기란 더더욱 난감한 일이다. 어쩌면 나는 진부하고 느린 추억의 껍데기 같은 기록을 위해 시간낭비에 불과한 여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시골의 천연함은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에 나오는 ‘문명의 쾌적함’에 늘 묻혀버린다. 언제나 도시의 논리에 시골의 가치는 묻혀가고 있다.

구불구불 이어지던 고샅길은 고속도로에게 멸망했고, 산자락을 에둘렀던 다랑논은 공장에게 패배했다. 커다란 나무는 베어졌으며, 나무에 깃든 신성성도 함께 잘려나갔다. 개발 앞에서는 모든 옛것이 진부한 것이었으며, 모든 자연이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었다. 이런 현실이 지금껏 과거와 현재, 개발과 자연의 행복한 공존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인간의 일생을 “짤막한 섬광이지만, 충분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우리를 빚어낸 흙과 우리 영혼 사이에는 신비한 접촉과 이해가 존재한다고. 순진하게도 나는 아직 그 말을 믿고 있다. 이 땅에는 아직 내가 보지 못한 신비로움이 존재하고, 내가 만나지 못한 행복한 풍경이 기다릴 것이라고. 그것은 내 삶의 시가 되고, 문장이 되고, 영혼이 될 것이라고. 이제껏 여행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래전에 읽은 톰 브라운의 ‘자연에 미친 사람’에 나온 한 구절을 중얼거려본다. “신비는 빵 부스러기로 이어진 길처럼 남아 있다. 우리의 마음이 그 자취의 주인을 향한 길을 야금야금 다 먹어치우기 전에는 그 신비는 우리 속에, 내내 우리의 일부로 있다. 우리가 먹어치운 모든 신비의 자취들은 우리 자신의 자취 속으로 옮아들어간다. 인간은 자기 앞의 신비들을 먹으면서 세상을 사는 법이다.”

몇년 전부터 나는 해외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티베트의 차마고도와 몽골의 오지 알타이에 이어 올겨울엔 인근에서 나체족을 볼 수 있는 라오스의 루앙 프라방으로 떠날 예정이다. 지난여름 이미 10일간 사전답사를 끝냈다. 그곳 사람들은 우리가 문명이란 이름 아래 잃어버린 여유와 낭만을 몸에 넣고 살고 있다. 혹자는 황량하고 피폐함을 말하지만 나는 거기 그런 것이 있어 좋다.

근대디자인박물관장 박암종

묵은 그리움처럼…살며시 다가온 디자인, 숨은 감성 찾아 떠난 30년 여정,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보물

◇‘디자인 사제’라 불리는 박암종 근현대디자인박물관장(선문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이 전시품인 우리나라 최초의 흑백 TV ‘VS-191’ 옆에 섰다. 마포구 창전동에 위치한 박물관엔 디자인 학도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가을이 왔습니다. 저는 이즈음 정태현 시인의 ‘가을’을 읊조려 봅니다. “꽃보다도 진한/ 향기로 젖어온다// 끝없이 깊은 하늘은/ 천상이라도 보여 줄듯/ 마음을 홀리고// 서늘한 대기는/ 스산한 기운으로/ 뼈 속 마디마디 파고들어// 왠지 모를 사무침에/ 젊은 가슴도/ 단풍같이 멍이 들고// 떨어진 낙엽은/ 영혼 위에/ 겹겹이 쌓여// 가을은/ 까닭 없이/ 넋을 낚는다.” 김초혜 시인의 ‘가을의 시’처럼 정 시인의 시는 저의 묵은 그리움을 흔들어 줍니다. 아마도 디자인도 저에겐 그런 존재로 다가섰습니다. 제 속에 숨어 있던 감성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는, 저의 내면으로 향하는 여정이었던 것이지요.

마셜 매클루언은 모든 미디어는 인간 신체의 확장이라 했습니다. TV와 전화가 시각과 청각의 공간을 확장시켰던 것처럼 말입니다. 디자인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요. 인간 생활에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보다 신속·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시각디자인, 인간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보다 완전하게 생산하기 위한 제품 디자인, 인간 생활에 필요한 공간을 보다 적합하게 하기 위한 환경 디자인 등이 그렇지요. 결국엔 ‘인간의 확장’이란 생각이 듭니다. 인간에 대한, 아니 저 자신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디자인이 무엇이냐고. 그러면 저는 “디자인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근원이요, 디자이너는 미래를 가리키는 나침반”이라고 답합니다. 그 중심엔 ‘인간’이 있지요. 제가 오랜 세월 디자인이란 한 우물만 팠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디자인과 만나 디자인과 함께 생활한 30여년간의 시간, 그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입니다. 그 보물이 만들어지는 동안 저는 많은 것을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그 수집은 제 생애 최고의 행복이 됐습니다. 이제 저의 행복 보따리를 하나씩 풀어 갈 작정입니다. 근대디자인박물관을 세운 것도 그런 이유에서지요.

디자인이란 마지막까지 달려갈 만한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제 인생에서 디자인이라는 한 우물은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또한 최고의 인생을 위한 문이기도 했습니다. 디자인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진공관식 라디오 A-501. 단아하며 약간의 곡선을 첨가해 유연함도 동시에 갖추고 있는 우리나라 디자인사의 기념비적인 제품이다.

수많은 디자이너의 삶도 추적해 보았습니다. 창의성을 가진 인간의 기본 욕구는 언제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나침반이 됐습니다. 그들의 발자취를 찾아 나섰던 여행의 종착지엔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우리를 감동으로 이끌고 지혜를 주는 나침반을 거기서 만났습니다. 최근 펴낸 ‘디자인 생각’(안그라픽스)은 그런 것들을 주워 담은 결과물입니다.

저는 좋은 디자인과 나쁜 디자인, 유능한 디자이너와 무능한 디자이너의 차이는 ‘생각’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생각의 차이’를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헨리크 토마셰프스키가 “나는 내 작품 모두에 만족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영감을 추구하기 위해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 같은 거장의 작품을 감상한다. 이것은 창조를 향한 나의 부단한 노력이다”라고 말했던 것에 공감합니다.
◇공산품 관허 1호로 등록해 우리나라 근대 화장품 1호가 된 박가분.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직의 부인 정정숙이 사은품으로 만들어 배포하다 예상 밖에 인기를 끌자 상품화했다. 앙징스럽고 예쁜 상자 속에 넣어 팔아 당시 여인들의 구매 대상 1호가 된 제품이다.

저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명언도 좋아합니다. “형태와 기능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가장 능률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제품은 그 형태 또한 뛰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반대로 아름다운 형태의 제품은 가장 효율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기능을 우리는 자연에서 얼마든지 찾아내 활용할 수 있다. 자연은 형태와 기능의 가치가 가장 완벽하게 조화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디자인도 마찬가지이다. 디자인에서의 형태와 기능은 둘이 아닌 하나로 추구되어야 한다.”

피트 몬드리안의 말도 근래 들어 가슴에 절절히 파고듭니다. “예술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인간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작품이 최종 목표일까. 그렇지 않다. 미의 가치가 잘 구현된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은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진 창작 주체, 즉 인간이 있기에 가능하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창작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를 만들어 내는 인간이다. 예술의 최종 목표는 창작 행위를 통해 조화와 균형을 갖춘 완전한 인간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은 만인이 공감하는 예술을 창조해 낸다. 예술의 최종 목표는 인간 완성이며, 완성된 인간이 만든 예술은 인간을 정화하는 능력을 가진다.”

저는 한국의 디자인 역사를 찾기 위해 4년간 국내 디자인계에 영향을 끼친 원로 디자이너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사라져가는 디자인 사료를 발굴, 정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자연스럽게 지난 3월 국내 최초의 디자인박물관인 근현대디자인박물관 설립에 이르렀지요. 요즘엔 ‘한국디자인 120년사’와 ‘한국디자인 원형 탐구’를 집필 중입니다.

52세의 나이에 어린 시절을 뒤돌아보는 것은 흐믓하기 그지없습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7개의 별,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온갖 꿈을 꿨던 시절이지요. 밤하늘을 캔버스 삼아 마음 가는 대로 꿈을 그렸습니다. 구겨지고 바랜 책 속에 들어 있던 사진이나 그림들은 진귀한 ‘꿈의 나래’가 돼 주었습니다. 친구 집에 놀러 가서도 책만 있으면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술반에서 화폭과 씨름을 했습니다. 이런 이력들은 대학에서 에디토리얼디자인(편집 및 출판디자인)을 전공하게 만들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도 잡지사와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책과의 끈질긴 인연을 놓지 못했습니다. 책이라는 것이 흩어지고 널린 여러 자료들을 꿰고 매어서 만들어지는 것이니 디자인 사료들을 모아 디자인박물관을 만든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 같네요.
◇일제강점기에 제작돼 외국으로까지 수출됐던 기생 사진엽서. 오늘날의 모바일 화보 역할을 이때는 사진엽서가 대신한 꼴이다.

제겐 디자인 사료 수집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 놓게 만든 분이 계십니다. 현재 화봉책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 여승구 관장입니다. 그분은 매주 서너 번씩 인사동에 나가 책방에 들러 북헌팅을 하셨습니다. 1990년대 초 그분과 인사동에서 식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과 함께 책방 나들이도 나섰지요. 여 관장은 조선 말에 목판으로 제작된 부적용 월력 2부를 구하고, 그중 상태가 좋은 월력을 제게 주시면서 “박 교수! 한번 관심 가져 봐!”라고 콜렉션을 권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돼 디자인 사료 수집에 빠져들게 됐습니다.

한번은 공평갤러리에서 한국고서전이 열렸습니다. 전시에 ‘한·중·일 상표도안집’이라는 3권의 자료(스크랩형 책자)를 여 관장(당시 한국출판무역주식회사 사장)이 출품했습니다. 제가 유심히 들춰보자, 그분은 제게 다가와 “박 교수! 그 자료는 박 교수가 소장가로서 가장 적임자니 남이 가져가기 전에 얼른 가져가도록 하시오!”라며 구입을 권했습니다. 저렴한 가격에 구입해 살펴보니 1920∼30년대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상표도안자료와 잡지 표지, 라벨, 각종 인쇄물들이 수백장씩 붙어 있는 정말 귀한 자료였습니다. 심지어 물감으로 그린 원화도 붙어 있었습니다. 또 한 권이 있다고 해서 기꺼이 청해 손에 넣었습니다.

나중에 두 권의 자료가 더 있다는 소식에 여 관장님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그분은 “우리나라 디자인 역사에 대해 열심히 연구하라”고 격려까지 해주며 선물로 선뜻 내주셨습니다. 불모지로 남아 있던 광복 전 디자인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됐지요. 사람들은 이런 자료가 아직까지 남아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지요.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60여년의 한국디자인 역사를 발굴해 낸 셈이지요. 한국디자인 역사 연구의 기폭제 구실을 했습니다.

디자인 사료 발굴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고서점은 물론 경매참여, 딜러 등을 통해 적극 수집에 나섰습니다. 대구의 고서점 등 지방까지 뒤지며 20여년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한국디자인사의 골격이 되기에 충분한 자료들입니다.

근래 들어 디자인의 유용성이 증대되고 취업 문이 확대되면서 우리나라에서 한 해 배출되는 디자이너가 3만명을 넘어섰습니다. 이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물며 가까운 일본보다도 더 많은 숫자입니다. 하지만 이 많은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학교에서 서구 디자인사만을 배웠습니다. 서구 디자이너의 이름들을 줄줄이 꿰고 있으면서도 정작 우리 디자인에 대해선 까막눈일 수밖에 없지요.

박물관엔 제가 모은 사료들 중에서 엄선된 1600여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국내 최초의 사료들 위주로 꾸몄습니다. 힘든 일제강점기의 각종 디자인의 흔적들, 광복 후 어려웠던 시대의 애틋한 정이 묻어나는 디자인 제품들, 경제 개발에 목매던 시기의 땀에 흠뻑 젖은 각종 제품들, 가정의 꿈과 희망이 담긴 초기의 가전제품들, 생활의 여유가 생기면서 나타난 소비재 제품들을 비롯해 세계 속에 당당히 디자인의 능력을 과시하는 첨단 가전제품들, 올림픽과 월드컵에 관한 디자인 등 한국디자인 역사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감히 꿈을 꿔 봅니다. 근현대디자인박물관을 디자인 메카로 만드는 꿈이죠. 디자인 역사가 숨 2쉬는 열린 공간이 됐으면 합니다. 디자인의 최종 목표는 누군가 말했듯이 인간을 정화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인생과 삶도 디자인을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디자인하느냐에 따라 천양지차이니까요. 박물관에 들른 이들이 사찰에서 두 손 모으는 심정이 됐으면 합니다. 제게 디자인 여정은 제 삶을 성찰하게 해 줍니다. 디자인 그 이름을 위해 남은 생을 소진하리라 다짐해 봅니다. 디자인의 사제가 되렵니다.

'화려한 싱글' 사진작가 백지순이 사는 법, "현모양처는 싫다"… 당당하고 자유로운 '현대판 노라'

◇모계사회의 원초적 모성이 미래사회의 대안적 모델이 될 수 있음을 사진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백지순씨. 최근 그는 강릉의 종부와 종가음식을 카메라에 담는 작업을 했다.
42세 싱글라이프 여자 백지순. 사람들은 나를 요약해서 그렇게 인식한다. 조금 알았다 싶으면 나를 두고 또 다른 탐색전을 벌인다. 사진과 결혼했느냐는 질문은 그중에서도 단골메뉴다. 어쩌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사진기만 둘러메면 신이 나고 어느 남자보다 든든하니 어쩌랴. 이젠 운명이라 받아들이고 싶다.

이제 사진은 나의 발언이 됐다. 나의 심상을 즉각적으로 시각화한다. 거기에는 숙련된 기술에 의해서만 성립되는 그림에 대한 열등감이 해소되는 지점이 있다. 그 지점으로부터 나는 사진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어떤 상황에 대해 기록하고 싶은 욕망을 가장 잘 충족시켜 주는 것이 사진이라 생각한다. 어렸을 때 잘 그리고 싶었던 욕구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중학교 때 미술선생님의 아픈 말 한마디가 나를 사진으로 이끌었다. 밑그림은 잘 그리는데 색칠만 하면 왜 그 모양이나는 질책이 가슴에 한이 됐다. 대학 동아리활동에서 접한 카메라는 그런 나의 콤플렉스를 해소해 주었다.

■대학시절 만난 김수남 선생

19년 전의 일이다. 당시는 대학생들이 매일 거리로 나와 민주화 구호를 외치던 때였다. 물론 나도 민주화에 일조하는 사진작업을 하고 싶었다. 헬멧을 쓰고 시위현장에 나갔다. 어느 시점엔가 내가 비슷비슷한 사진만 만들어 내고 있는 모습이 싫어졌다. 대학 마지막 학기에 수강한 ‘김수남 사진’강좌는 나에게 ‘인간’의 앵글에 눈을 뜨게 해주는 계기가 됐다. 내셔널지오그래피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아시아 소수민족 사진을 끝없이 보면서 들은 타민족 문화 이야기들은 분명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단일민족으로 살아온 우리에게 소수민족의 다양한 풍속은 그야말로 문화충격 그 자체였다.

우리와 다른 민족에 대한 호기심은 점점 커져갔다. 졸업 후 김수남 선생의 조수를 자청했다. 아무나 조수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조수가 되기 위해 포트폴리오를 들고 나타난 나에게 김수남 선생은 “여자라서 힘들다”고 했다. 아시아의 오지를 집처럼 드나드는 분이라 이해는 됐지만 여자라서 못한다는 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오기로 버티니 선생은 하는 수 없이 암실 사용을 허락했다. 조수가 된 것이다.

■아시아 모계사회에 앵글을 맞추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환경이나 기아, 전쟁 등 인류가 직면한 문제와 공공의 선을 위한 작업을 하고 싶다. 하지만 한국여자로서 마음 한켠에 넘어서야 할 것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 가정에 여전히 저며 있는 남존여비 사상으로 인한 딸과 아들의 차별, 며느리와 아들의 불평등 대우 등에 대한 문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가정문제를 미시적 세계문제라는 관점에서 모계사회를 그 대안으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에데족 신부가 신랑을 이끌고 신방에 들어가고 있다. 에데족 여성들은 ‘결혼은 남편을 사오는 잔치’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아시아 소수민족의 굿과 민속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김수남 선생의 조수로 일하면서 하게 된 작업도 아시아의 모계사회에 관한 기록이다. 아시아에는 아직도 성과 재산을 어머니에게서 딸로 상속하는 모계사회의 풍속을 가진 소수민족이 있다. 중국의 모쒀족, 베트남의 에데족, 인도네시아의 미낭카바우족 등이다. 그곳의 여자들은 거침이 없고 당당하기에 아름답다. 현모양처가 되기 위한 조신함이 여자의 미덕으로 여겨져 딸이라면 다소곳한 여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기대와 시선으로 가득한 대한민국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다.

■떠나기 싫었던 루구호의 모쒀족 마을

중국 윈난성에 루구호수가에는 모쒀족이 모여 산다. 그들은 모계사회의 원형에 가까운 풍습을 갖고 있었다. 남녀는 결혼을 하지 않고 남자가 여자 집에 방문을 하는 ‘아주혼’을 한다. 축제나 여신제에서 젊은이들이 그들의 전통 춤을 추게 되면 남녀가 한 사람씩 손을 잡게 된다. 그때 옆 사람이 마음에 들면 손바닥을 긁어 마음을 드러낸다. 상대도 좋으면 역시 손바닥을 긁어 화답한다. 마음을 확인한 여자가 남자에게 집을 알려주고 서로 암호를 정해 밤에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방문을 한다. 암호를 대면 여자가 문을 열어주고 이들의 교제는 시작된다. 만남이 깊어지면 남자는 선물을 가지고 여자의 집을 방문해 어머니의 허락을 받게 된다. 그때부터 남자는 당당하게 밤마다 여자의 처소에서 밤을 보내고 이튿날 새벽에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아주혼’이다. 
◇중국 모쒀족은 ‘아주혼’이란 결혼풍습에 따라 남자가 밤에 여자의 집을 찾았다가 해가 뜨기 전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오른쪽 침대 곁에 있는 남성이 귀가 채비를 하고 있는 신랑이다.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하며 그곳 여자들과 친해졌다. 김수남 선생은“뒷골목을 알 때가 되면 그곳을 떠날 때가 된 것이다”라고 늘상 말하곤 했다. 나 역시 뒷골목도 잘 알게 되고 사람들과도 친해졌는데 그만 떠날 때가 되었다. 그동안 사귄 친구들에게 이제 돌아가야 한다고 했더니 가지 말라는 것이다. 손짓을 섞어가며 이제 돈도 떨어지고 필름도 다 되었다고 했다. 친구들은 자기들과 함께 노 젓고 말 타면서 돈을 벌면 되니 가지 말라고 한다. 루구호의 관광 수입원인 노 젓기와 말 타기는 남녀 구분 없이 한 집에서 한 명씩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데 번 돈을 모아 똑같이 나눈다. 공동생산 공동분배인 셈이다. 친구들이 함께 노를 젓고 말을 타자는 말은 나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긴다는 의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인간 내면을 소통시키는 그 무엇, 그 순간 그것은 나의 사진작업의 모토가 됐다.

■강릉의 종부와 종가음식

모계사회 작업 이후 강릉 종부와 종가음식이 카메라에 클로즈업됐다. 사라져가는 종부를 기록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찾아왔다. 부계사회에서 맏며느리로, 수십 년을 자신을 이루기보다는 한 가정과 가문의 그늘막이 되어준 존재가 종부가 아닌가. 요즘 대부분 종손은 집안의 얼굴로 잘 교육받고, 잘 교육된 여자를 만나, 괜찮은 연봉의 직업을 얻어 도시에서 거주한다. 그러니 젊은 종부는 그 명맥은 잇겠지만 그 역할에 있어서 어머니 대의 것과는 같을 수 없다. 종가를 유지하고 4대조 제사를 봉사하며 장과 술을 담그며 백여 가지의 식품을 관리하는 종부를 볼 수 있는 시간도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남자들이 시집살이를 하는 베트남의 한 에데족 가족. 가운데 당당히 서 있는 여성(어머니)의 모습이 이채롭다.

종부는 의식주 생활에서 보통 이상의 식견을 갖추어야 했다. 아니 맏며느리 생활을 하다보면 식견이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의식주생활 중에 오늘날까지 가정에서 사람의 손을 타야 하는 것은 식생활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음식의 근간인 된장, 고추장, 간장을 담고 제사에 쓰일 술을 빚으며 백여 가지의 먹을거리를 장만하려면 음식에 관한 대물림된 지혜가 절실히 요구된다.

일 년 동안 종부가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 종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종부와 종가음식이라는 주제로 작업을 하게 된 동기다.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나에겐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다. 음식을 보면 그 지역의 환경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기에 음식에 관한 관찰은 내게 매우 큰 흥밋거리다.

■새해 첫날부터 여자가

김수남 선생의 수십년지기인 강릉의 황루시 교수(민속학)는 작업에 큰 후원자다. 강릉에서 종가를 소개받기까지는 그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강릉시 노암동에 열두대문집이라는 별호가 있는 ‘김윤기가옥’도 그의 소개로 작업이 가능했다. 열두대문집을 찾던 날 마침 종부는 메주를 띄우고 있었다. 1차 작업을 끝내고 설에 와서 차례지내는 것도 촬영하겠다고 하고 돌아왔는데 정작 설 며칠 전 전화가 왔다. 촬영이 어렵다는 것이다. 지난번 방문 때 혹시나 무슨 결례를 한 것은 아닌가 고민을 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난감해 예정보다 일찍 강릉으로 내려 갔다. 열두대문댁의 종부인 심순옥씨를 직접 만났다. 바깥 어르신께서 새해 첫날부터 객이 드나드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첫 손님으로 여자가 오면 재수가 없다던 나라가 아니었나. 새해 벽두부터 여자가 촬영하겠다고 온다하니 그리 반길 일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종부에게 바깥 어르신이 좋아하시는 것이 무언지 알려달라고 해서 시내에 나가 전병을 사서 그 다음날 다시 찾아 갔다. 그 정성이 통했는지 끝내 촬영 허락을 받아 냈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가라는 속담이 왜 생겼는지를 실감했다.

■여자들이 지내는 제사, 신사임당제

심순옥 종부는 사회활동도 열심이다. 강릉 예림회에서 한때 회장을 맡은 인연으로 열두대문집의 동채를 예림회의 조리공간으로 사용토록 했다.

강릉 예림회는 사라져가는 전통 생활문화를 지키기 위하여 강릉에 소재한 전통가옥에 사는 집안의 딸과 며느리를 중심으로 구성된 단체다. 선교장을 지켜온 14대 종부이자 관동대 가정과 교수였던 성기희 선생도 기금으로 1백만원을 기부할 만큼 애정과 열정을 쏟은 단체다.

예림회에선 아주 이색적이고 재미있는 제사 하나를 주관하고 있다. 오죽헌에는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위해를 모셔놓고 초기에는 율곡제사만 지냈다. 이를 지켜본 예림회 회원들이 아들의 제사만 지내고 어머니 제사는 지내지 않는다는 것의 불합리성을 제기했다. 더구나 위패까지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예림회 회원들이 직접 나서서 제사를 지내자는 것이었다. 올해로 7회째인 신사임당 얼선양제는 그렇게 시작됐다.

■또 다른 작업 싱글우먼

나의 카메라 앵글은 자연스럽게 현모양처로 살기보다는 자아실현을 위해 공부나 일을 선택한 여자 싱글에 관한 작업으로 이어졌다. ‘싱글우먼’들의 이야기다. 정작 당사자들은 자아실현을 위한 당당한 싱글이 아니라 인연을 만나지 못해 결혼을 못한 싱글이라고 하지만 그녀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이 있다. 인생이 매 순간의 크고 작은 선택으로 이어져 있다면 그녀들은 결혼을 위한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다. 결국 사회적 결혼 적령기에 자아를 구현하는 방법을 선택한 셈이다.

성직자나 노예를 제외하고는 결혼에 의해서만 사회생활이 가능했던 중세의 봉건사회를 지나 1879년 헨리 입센의 소설에서는 노라가 집을 뛰쳐나온다. 아직도 노라가 귀가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노라가 요즘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애초에 가정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그런 결과물들을 오는 12월10일∼23일까지 갤러리 아트비트(02-722-8749)에서 보여 줄 작정이다.

나는 확신한다. 여인천하가 미래사회의 대안적 모델이 될 것이라고. 10여년간 아시아지역 모계사회 사진작업을 해오면서 내린 결론이다. 할머니와 어머니 중심의 모성은 그 어느 결집체보다 강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단단한 새의 둥지처럼 부부가 헤어지는 경우에도 아이들은 집을 옮길 필요가 없다. 이혼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 등 정신적 고통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중국 모계사회 출신인 한 수필가도 ‘모계사회 대안론’을 제시하고 있을 정도다. 모성만이 세계를 품을 수 있다. 여성시대 만만세다.

감성덩어리 조각가 김경민, 지지고 볶고 뒤엉킨… 사람 사는 이야기를 조각하다

◇우리네 삶의 모습을 풍자적 리얼리즘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김경민 작가. 삶에 대한 그의 따뜻한 조탁은 찌든 영혼마저 정화시켜 주는 듯하다.
작업실에 들어서자 인형 같은 자그마한 소품들이 남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이 각자 자기일에 열중이다. 독서 하는 여자, 전화하는 아줌마 등 우리네 삶의 단면들이란 걸 쉽게 포착할 수 있다. 남들 앞에 쉽게 드러내 보이지 않은 일상의 모습들도 유쾌하고 코믹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때론 거침없이 다가온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볼수록 날카로운 날이 가벼움 속에 숨겨 있다. 인간들이 품고 살아가야 하는 고충의 이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이 시대의 해학과 풍자라고나 할까. 작업실 여기저기에서 만나는 작품들에 웃고 빠져들게 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경기 일산 외곽에 위치한 조각가 김경민(38)의 작업실 풍경이다.

사람들은 그를 상큼, 발랄, 톡톡 튀는‘감성덩어리’라고 주저 없이 부른다. 새로운 감성의 자극제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의 자세가 그렇게 만들었다. 가장 주목받고 있는 젊은 조각가의 오늘은 키운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동네 미술학원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동화책을 읽어주며 그림을 그리게 한 가르침이 감성의 텃밭을 풍요롭게 했다. 요즘도 예술가의 길에 막막함이 느껴지면 그때를 떠올려 본다. 작업이 행복해지고 가슴이 따듯해지기 때문이다. 
◇‘달 따러 갑니다’

대학원 시절 남편인 조각가 권치규를 만났다. 같은 조각가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는 서로에게 언제나 힘이 됐다. 따로 데이트하거나 시간을 내서 차를 마실 필요 없이 모든 것이 작업실에서 이루어지는 참 편한 관계였다. 그런 우린 어느 새 결혼 10년차가 됐다. 이젠 둘은 함께 작업실을 쓰는 동료 작가이기도 하다.
◇‘돼지 가족’

세 아이도 태어났다. 일하는 여성에게 여러 명의 아이는 참으로 버겁다. 세상을 겸손하게 볼 수 있는 마음을 주려고 세 아이를 주셨나 생각해 본다. 실제로 자꾸만 세상을 만만하게 보려는 버릇을 경계하게 해준다. 작업을 끝내고 밤마다 아이들과 함께 누워 동화책을 읽는다. 그 속에서 작품이 떠오른다. 작품이 가족 속에서 걸어나오고 있는 셈이다. 결국 작품은 나의 이야기며 우리 가족의 이야기다.

나에게 행복은 세 아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뒤엉켜 사는 삶이다. 그걸로 행복을 조각한다. 또다른 갈망은 나에게 욕심이다. 지금 나에겐 ‘충분한 행복’이다.

작품 ‘돼지 가족’은 엄마의 등에 아빠 등 네 가족이 업혀 있다. 집안일을 모두 엄마만의 일로 넘기는 가족들의 야속함을 담았다. 집 안에만 들어서면 가족들은 모두 돼지처럼 게으름을 피우면서 엄마만 불러댄다. TV 리모컨만 들고 앉아 있는 남편, 엄마 밥 줘, 엄마 옷 줘 등 ‘엄마! 엄마!’ 풍경은 작품으로 태어났다.

때론 작업실 인근 신작로를 걸어 본다. 엄마는 엄마뿐인 줄 알았는데 나도 한때는 소녀였고 젊음을 만끽하던 아가씨 시절이 있었구나 하며 ‘시간의 강가’를 서성거려 본다. 풀냄새가 나는 오솔길을 따라 음악을 들으며 흥얼거리는 모양새는 영락없는 이 시대의 신세대다.

사회적 상황에도 가끔씩 눈길을 돌린다. 삶의 환경 차원에서다. 작품 ‘Yes Man’은 정치적 상황을 풍자한 내용이다. 권력자 앞에서 무조건 ‘Yes’만 말할 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작품의 주제가 뭐냐고 물으면 ‘사람 사는 얘기’라고 당당히 말하고 싶다. 낙천적이고 즉흥적인 성격이 풍부한 상상력의 나래가 돼준다. 인물들의 표정에서 그것들이 그대로 묻어나온다.

아이들이 잠들기 전 읽어주는 책속에서도, 서점의 잡지에서도, 신문에서도, 상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영감을 얻기 위해 나의 뇌가 호흡 하는것 같다. 이 시대의 감성을 주워 올리는 것이다.

조각가는 사물을 평면과 단면보다 입체화해보는 버릇이 있다. 그만큼 마음이 열려 있어 만나면 편해지는 것이 조각가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도 훌륭한 작가이기 전에 자랑스러운 어머니가 되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작업이 되고 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삶과 작품을 하나다.
◇‘굿모닝’

오늘을 제대로 사는 것이 좋은 작품이 된다는 것은 이제 신념이 됐다. 대학원 시절 친구의 자취방에서 하루를 묵은 적이 있다. 푹푹 찌는 8월 여름밤으로 기억한다.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도 없는 친구의 방은 ‘악몽’이었다. 밤새 잠에 들지 못하다가 아주 작은 미니냉장고 문을 열고 그 속에 발을 넣고서야 잠이 들었다. 그날 밤 꿈속에서 내가 미니 냉장고 보다 더 작아져 그 속에서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는 꿈을 꾸었다. 바로 다음날 만든작품이 ‘한여름밤의 꿈’이다. 이런 일상의 이야기가 작품으로 이어진다.

나는 한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습관이 있다. 걸어가면서 한손은 휴대전화를 받으며 귀에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손에는 먹을거리 들고 다니며 가방에는 정리되지 않는 잡동사니투성이다. 작품 ‘나의 애장품’은 이런 나의 습관을 담은 작품으로 내가 봐도 저절로 웃음이 터진다.

작품 ‘I like shopping’은 쇼핑 하러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모습이다. 소유 욕구를 만족시키는 작은 일상을 포착했다. 나는 요즘 ‘I don’t like shopping’이다. 가지는 것이 부담스럽고 버겁다는 생각이다

작품 ‘달 따러 갑니다’는 아빠가 긴 사다리를 들고 달을 따러 가는 풍경이다. “아빠 달 따줘.” “아빠는 널 위해 달도 별도 다 따주마.” 남편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무조건적 아빠의 사랑이 참 이쁘다.

작품 ‘낯선 천국’에선 남자는 걸레질을 하고 부인은 남자의 엉덩이에 앉아 독서 중이다. “내가 이 집 가정부야, 식모야? 결혼은 여자에게 아주 전속 식모계약서네? 아∼ 억울하다. 난 너의 비서도 종 노릇 하려고 결혼한 건 아닌데…. 내 희생만이 이 가족의 행복이야?”라는 나의 푸념들이 발단이 됐다. 다투고 괴로워한 우리네 여성의 속내다. 여자도 남자의 헌신 아래 행복을 누리는 삶이 당연한 시대가 오지 않을까 생각해 만든 작품이다.

요즘은 이런 생각을 한다. 여자와 남자를 떠나 인간의 사랑과 희생만이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며 좀더 세상을 안고 싶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도 반어적 화법으로 그런 것을 얘기하는 것 같아 반갑다.

나는 컬러가 좋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난 채색이 없는 조각이 답답했다. 컬러를 매치하는 일이 재밌다. 조각작품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화려한 원색이 좋다. 간단 명료 심플해서다.

어느 날 친구랑 지하철 환기구를 지나가다 친구의 공주 치마’가 뒤집어진 적이있다. 얼마나 우습던지. 그날밤 스케치로 그 장면을 그려 작품으로 깎았다. 상기된 친구의 얼굴이 어찌나 웃기던지.

나른한 오후 대학로 KFC 앞 버스 정류장에 가면 나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도, 아무리 세상이 빨라도 나만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나름한 오후가 거기에 있다. 대학로 한가운데 벤치에 벌렁 드러누워 뒹굴며 고민하고 낮잠자며 즐기는 ‘나만의 시간’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길에서 남녀가 부둥켜안고 키스하는 장면이 흔해졌다. 참 좋다. 포장하지 않은 자신의 표현이 아닌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의 솔직한 표현은 아름답고, 그런 세상이 고맙다. 나의 스케치 목록에 키스가 추가됐다. 숨어서 이루어지는 이중성은 정말 싫다.

형태와 내용이 재미있으면 모든 것을 스크랩한다. 그것이 신문이든 잡지든 사람들의 일상들을 모두 스크랩한다. 메모로, 그림으로 저장도 한다. 20대까지 정말로 많이 돌아다녔다. 비가 와서, 눈이 와서, 날씨가 너무 맑아서 등 이유도 가지가지다. 수업 빼먹기를 밥먹듯이 한 그 시절이 그립다. 이젠 내 감성의 호수로 남았다.

조각에서 ‘무거움의 허위’를 걷어내고 있는 김경민 작가는 리얼리즘의 또 다른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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