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천년 고찰 "도봉사"

醉月 2009. 1. 21. 12:56

고려 현종은 왜 절간에 앉아 대장경 6천 권만 새겼을까?

 

대웅전 앞에 '卍'자, '0'자 새겨놓은 천년 고찰 '도봉사'

   이종찬 (lsr)

 

도봉사 도봉사는 고려 4대 광종 때인 서기 968년에 혜거국사(惠居國師)가 처음 세운 절이다 

 

 

우리나라 곳곳에는 절이 유난히 많다. 이는 서기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진나라 사람이었던 '순도'와 '아도'가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들어온 뒤부터 백제(384년 침류왕 1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와 신라(527년 법흥왕, 이차돈 순교)에도 잇따라 불교가 들어오면서 국교로 뿌리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불교는 삼국 모두 국가에서 숭상하고 보호하는 종교가 되어 승려와 절 등은 이천년에 가까운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불교를 믿고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 마음 속 기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문화재청에 등록된 국보나 보물, 유형문화재 대부분이 절이나 절 주변에 있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도봉산 허리춤께 만장봉을 밑그림으로 삼고 있는 도봉사도 마찬가지다. 도봉산을 오르다 언뜻 도봉사를 바라보면 요즈음 새롭게 생긴 절인 것처럼 보인다. 이는 오랜 역사 속에서 겪은 전쟁과 화마로 여러 번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건물을 1961년 2월 벽암스님께서 법당과 부속건물을 옛 모습 그대로 새롭게 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절은 천 년을 훌쩍 넘긴 오랜 역사를 대웅전에 있는 철불좌상과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에 아로새겨 놓고 있다. 이는 도봉산을 오르다 화려한 단청 때문에 그리 오래된 절이 아니라고 쉬이 여겨 은근슬쩍 그냥 스쳐 지나가서는 안 되는, 고려시대 우리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그런 이름 높은 절이란 그 말이다. 

 

  
▲ 도봉산 도봉산은 북한산 줄기에 있는 도봉이다. 근데도 왜 지자체와 사람들은 도봉산이라 부를까
ⓒ 이종찬
도봉사

  
▲ 김수영 시비 도봉산 자락에 있는 김수영 시비
ⓒ 이종찬
도봉사

 

김수영 시 '풀'을 읊으며 홀로 찾은 천년 고찰 도봉사

 

"풀이 눕는다 /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 풀은 눕고 / 드디어 울었다 /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 다시 누웠다 //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 발목까지 / 발밑까지 눕는다 /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 모두

 

18일(일) 오후 2시. 오랜만에 도봉산을 오른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앞, 나그네가 가족들과 함께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 살 때는 일요일만 되면 도봉산에 가다시피 했다. 그렇다고 도봉산 꼭대기까지 자주 올랐다는 것은 아니다. 이제 마악 걸음마를 하는 두 딸을 데리고 거기 도봉산 자락에 있는 김수영 시비에 자주 가곤 했었다.

 

그 시비 앞에서 시인 정희성 선생을 만나기도 했고, 그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막걸리를 기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땐 도봉사가 나그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난 일요일에도 하마터면 도봉사를 그냥 지나칠 뻔했다. 근데, 절 들머리에 용트림을 하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한 모습을 지닌 붉은 소나무가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렇게 이끌려 더듬게 된 절이 천년 고찰 도봉사(도봉구 도봉 1동 494 )다. 도봉사는 고려 4대 광종 때인 서기 968년에 혜거국사(惠居國師)가 처음 세운 절이다. 하지만 이 절 또한 오랜 세월을 지켜오면서 전쟁과 화마를 끝내 비껴가지 못했나 보다. 몇 번이나 불에 타 없어졌다가 불과 50여 년 앞에서야 겨우 제 모습을 갖추었다.  

 

  
▲ 도봉사 절 들머리에 용트림을 하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한 모습을 지닌 붉은 소나무
ⓒ 이종찬
도봉사

  
▲ 도봉사 용인가? 소나무인가
ⓒ 이종찬
도봉사
 

 

저 금빛 찬란한 석가여래좌상이 철불좌상 그림자인가

 

도봉사 절 마당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것이 대웅전 앞 돌계단을 사이에 끼고 비스듬이 드러누워 있는 네모 진 뜰에 초록빛 나무를 다듬어 새긴 '만'(卍) 자와 '0'자이다. 왼쪽은 차고(찰 卍) 오른쪽은 없다? 재미있다. 만자와 0자가 마치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읊조리고 있는 듯하다.

 

알록달록 단청이 화려한 대웅전과 지붕에는 입에 여의주를 물고 으르렁거리는 용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 용들은 부처님을 모신 이 곳에 아무나 들일 수 없다는 듯이 눈 부릅뜬 채 속세를 당당하게 굽어보고 있다. 대웅전 안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51호(2002년 8월 16일)로 지정된 석가여래철불좌상이 있다.

 

대웅전 삼존불상 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있는 이 철불좌상은 이 절을 세운 혜거국사가 모셔온 고려 초기 가장 큰 철불(높이 118cm)이다. 이 철불좌상에 얽힌 사연도 파란만장하다. 이 철불은 일제강점기(1937년쯤) 때 일본인이 보관하고 있었던 것을 광복이 되면서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자명사에 모셨다.

 

하지만 도시계획으로 자명사가 철거되자 이 철불좌상을 이 곳 도봉사로 다시 모셔왔다고 안내자료는 밝히고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이 철불은 지금 국보로 지정받기 위해 문화재청 심사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나그네 눈에는 대웅전 안에 모시고 있다는 철불좌상은 보이지 않고, 금빛 찬란한 석가여래좌상만 보이는 것이 웬일일까. 

 

  
▲ 도봉사 알록달록 단청이 화려한 대웅전과 지붕에는 입에 여의주를 물고 으르렁거리는 용들이 차지하고 있다
ⓒ 이종찬
도봉사

  
▲ 도봉사 이 절은 몇 번이나 불에 타 없어졌다가 불과 50여 년 앞에서야 겨우 제 모습을 갖추었다
ⓒ 이종찬
도봉사

 

석등에 올려진 예수 같기도 하고 성모 마리아 같기도 한 저 얼굴은?

 

2층으로 지어진 대웅전 앞마당에는 독특한 모습을 띤 5층 돌탑이 하나 우뚝 서 있다. 여의주 모양을 띤 받침돌을 등에 업고 있는 돌짐승이 새겨진 돌탑 아래 석굴 앞에는 석등이 두 개 놓여 있다. 돌탑을 머리에 이고 있는 석굴 안에는 어깨에 불꽃 모양을 띤 광배를 매단 돌부처가 가부좌를 틀고 있다.  

 

돌탑 뒤 대웅전 왼 편에도 신기한 모습을 하고 있는 석등이 하나 있다. '빈자일등'(貧者一燈)이라고 새겨진 네모 진 받침돌 위에는 코끼리 한 마리가 등에 석등을 올린 채 긴 코를 하늘로 한껏 치켜 올리고 있다. 석등 위에는 용 네 마리가 입에 여의주를 문 채 온 몸을 칭칭 감고 있고, 그 용 위에 왼 손에 물병을 든 성자가 우뚝 서 있다.

 

예수 같기도 한 그 성자 머리 위에 긴 천을 둘러 쓴 여자, 언뜻 성모 마리아를 닮은 여자 얼굴이 올려져 있다. 독특하다. 나그네는 지금껏 한반도 곳곳에 있는 여러 절을 돌아다녔지만 이렇게 희한하게(?) 생긴 석등은 생전 처음 보았다. 대체 이 석등에 무슨 깊은 뜻이 담겨 있을까.  

 

빈자일등(貧者一燈)이란 가난한 사람이 밝힌 등불 하나란 뜻이다. 이는 물질보다 정신이 더 소중하다는 뜻이다. 근데, 빈자일등과 이 성자들은 어떻게 이어지는 것일까. 예수 같기도 하고 성모 마리아 같기도 한 이 성자들도 모두 부처처럼 '빈자일등'이라는 그 말일까. 아니면 모든 종교는 '빈자일등'이란 그런 뜻일까.  

 

  
▲ 도봉사 용들이 지키고 있는 도봉사 대웅전
ⓒ 이종찬
도봉사

  
▲ 도봉사 돌탑을 머리에 이고 있는 석굴 안에는 어깨에 불꽃 모양을 띤 광배를 매단 돌부처가 가부좌를 틀고 있다
ⓒ 이종찬
도봉사

 

거란군 침입 때 헌종이 피난해 정사를 돌보던 도봉사

 

도봉사에 얽힌 역사를 살펴보자. 안내자료에 따르면 고려 제4대 광종은 도봉사를 세운 혜거스님을 국사로 모신다. 그리고 광종은 국사(國師) 제자가 되어 절을 아홉 번 올린다. 서기 971년 10월 21일에는 광종이 여주 고달사와 희양산 봉암사, 양주 도봉사 세 곳을 '전통을 지키는 절'이란 교지까지 내렸다.

 

그때부터 불교에서는 찬유스님이 머무르는 고달사와 긍양스님이 머무르는 봉암사, 혜거스님이 머무르는 도봉사를 특별선원으로 삼았다. 그 뒤 고려 제8대 현종은 거란군 침입으로 개경(開京)이 무너지자 도봉사로 피난해 정사를 돌본다. 이때 현종은 이곳 도봉사에서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大藏經) 6천 권을 새긴다. 이 때 새긴 대장경 6천 권은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

 

<고려실록>에는 "혜거스님 속성은 노씨이며, 자는 홍소이다. 말년에 혜거스님이 국사에서 물러나 도봉사로 돌아올 때 승려와 신도가 물결처럼 모여들었고, 스님들은 부처님을 영접하는 선악을 갖추었다. 그때 법구경을 쓴 깃발이 구름처럼 날리고, 나팔과 소라소리가 우뢰와 같이 진동하며 선종 교종 등 천 여명이 도봉사로 영접했다"고 씌어져 있다.

 

이는 혜거스님(899~974, 75세) 비문인 '고려구수주부화산갈양사변지무애원명묘각흥복우세혜거국사법휘지광시홍제존자보광지탑비명병서'(高麗國水州府花山葛陽寺辨智無碍圓明妙覺興福祐世惠居國師法諱智光諡弘濟尊者寶光之塔碑銘幷序)가 세상에 드러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 도봉사 금빛이 칠해져 있는 저 석가여래(가운데)가 철불좌상인가
ⓒ 이종찬
도봉사

  
▲ 도봉사 돌탑 뒤 대웅전 왼 편에도 신기한 모습을 하고 있는 석등이 하나 있다
ⓒ 이종찬
 도봉사

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도봉사. 도봉사는 긴 역사 속에서 전쟁과 종교분쟁, 화마로 여러 번 사라질 뻔 했으나 1961년 2월에 벽암스님이 법당 및 부속 건축물을 옛 모습 그대로 다시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2006년 절 건물과 땅이 경매에 붙여지는 등 참으로 고통스런 세월을 되풀이하고 있어 안쓰럽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