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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일 칡서 전수자 안중선씨

醉月 2009. 2. 3. 16:29

국내 유일 칡서 전수자 안중선씨

육두문자 날리던 괴짜 道人 "칡의 생명력으로 우주의 氣 담는다"
병든 할아버지와 살며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친구를 돕기 위해 아이스케이크통을 들고 나선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배자(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 공장과 양산 공장을 하는 소문난 부자였지만 소년은 돈이 없었다. 구두를 닦고 아이스케이크를 판 돈을 보탰지만 결국 친구의 할아버지는 굶어서 돌아가셨다. 소년은 빨리 독립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출로 이어진 소년의 방황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맥이 끊긴 ‘칡서’를 세상에 들고 나온 안중선(63·동양칡서연구소장)씨. 그는 미래를 예언한 역술서 ‘천기누설’을 지은 도인으로 더 알려져 있다. 특이한 이력만큼 그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부잣집 장남 자리를 박차고 나온 그는 신문팔이부터 시작했다. 신문뭉치를 들고 전차에 올라 벙어리 흉내를 내면 사람들이 제법 큰돈을 주었고 수입이 괜찮았다. 학비를 내고도 남았다. 부자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혼자 벌어 학교를 다녔던 그는 자식들에게도 “스스로 벌어 쓰고 배우라”고 가르친다.

▲ 칡 붓을 들고 작품 위에 앉아있는 안중선씨. / photo 이구희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안씨는 “어느 때부터인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시작했다. 누가 교통사고가 날 것이라고 하면 얼마 후에 그런 일이 벌어졌고 누가 몇 년 안에 망할 것이라고 하면 정말로 그렇게 된 사람이 다시 찾아오더라”고 말했다. 그런 그가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아무에게도 이해 받지 못하고 이상한 사람 취급만 당하던 그가 선택한 것은 도피였다. 서울대 철학과 2년을 중퇴하고 베트남전에 뛰어들었다. 제대 후에 그의 진짜 방랑이 시작된다. LA로 건너가 종교심리학을 배우다 다시 유럽으로 건너갔다.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하면서 터키로 이집트로 돌아다녔다. 먹고사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생활비가 떨어지면 거리로 나섰다. 노트르담 대성당 앞 광장에서 낯선 동양인이 이상한 기공 자세를 취하고 서 있으면 깡통에 돈이 수북이 쌓였다고 한다. 짓궂은 사람은 코에다 고액권을 꽂고 가기도 했다. 그렇게 생긴 돈을 들고 퐁네프 다리로 달려가 노숙자들 밥을 사줬다. 또 돈이 떨어지면 다리 한가운데 도로를 차지하고 앉았다. 입에 장미꽃을 물고 요가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 장미꽃 통이 금방 지폐더미로 가득 찼다. 그는 “같은 공간에서 남들은 하지 못하는 조금 특이한 행동을 하면 돈을 버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라고 말한다. 한곳에 정착 못하는 그는 다시 로마로 건너가 성악을 배우고 무대에도 서게 된다. 그러나 동성애자였던 극장장은 그에게 노래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 자리를 박차고 나온 그가 다시 떠난 곳은 인도 갠지스강.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에서 시체를 태운 물을 마시며 드디어 17년간의 방랑을 끝내고 귀국을 결심한다.

오랜 거리 생활로 몸은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고 여전히 세상은 자신을 알아주지도, 이해해주지도 않았다.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고 사는 재미도 없었다.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절박한 상태에서 그가 매달린 것은 역학이었다. 세상을 떠돌면서 혼자 공부한 이론을 바탕으로 사주팔자, 운을 여는 방법 등을 설명해 놓은 ‘천기누설’(1985년)이란 책을 내놓게 됐다. 천기누설은 한때 대학가에 역학 바람을 일으키며 구통도가(도가의 아홉 가지 과목) 대학생 연합회가 결성되기도 했다.

‘사이비’라고 공격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명리학부터 세상에 대한 비판까지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거침없이 쏟아내는 그의 독설 강의를 듣기 위해 대학과 기업체 등에서 불러대기 시작했다. 동국대·원광대·상지대 등의 한의대에서 동양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때 강의를 듣던 한의대생 중 한 명이 지금 그의 부인인 도가한의원(서울 종로 피카디리극장 옆)의 신미재 원장이다. 열여덟 살 차이가 나는 신 원장과의 사이엔 5남매가 있다.

▲ 안중선씨의 작품
그가 칡서를 처음 만난 것은 열여덟 살 때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한 중국집에서 자장면 반죽을 치던 사람을 만났는데 범상치가 않았어요. 얘기를 들어보니 그의 아버지가 중국의 마지막 신관이었다는 겁니다. 단성사 옆에 있는 중국집을 소개해주고 그와 계속 만나면서 칡서의 존재를 알게 됐죠.”

국전 심사위원이었던 근당(謹堂) 양태동 선생으로부터 전통 서예를 배우고 재미로 칡서를 쓰다가 그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 가게 됐다. 그리고 작년 12월 인사동 갤러리 이즈에서 ‘알몸’이라는 타이틀로 칡서를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였다. 1월 3~8일까지는 일본 후쿠오카 ‘에루가라 호루(elgala hall)’에서도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일본 사람들이 기가 넘치는 칡서에 반해 난리가 났다”며 “일본 전시회를 다시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안씨는 “칡서는 원시시대의 자연환경을 영상으로 그려나가는 작업으로 우주와 오행의 기를 포함하고 있다”며 “거추장스러운 것은 벗어던지고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 지구에 달의 기운이 충만한 밤 11시~새벽 1시에 알몸으로 작업을 한다”고 했다.

칡뿌리로 만든 붓에 먹이 제대로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는 30분간 담가놓아야 한다. 종이도 보통의 서예종이가 아닌 두꺼운 창호지라야 한다. 칡서는 그 붓으로 한 번의 끊김 없이 일필휘지로 써내려 간다. 보통 2m짜리 한 작품을 그리는 데 5~8초가 걸린다. 작은 작품은 3초가 걸리기도 한다. 그야말로 단숨에 검정 먹물이 만들어낸 ‘생명의 춤’이 완성되는 것이다. 안씨는 “칡서의 묘미는 보는 사람과 각도에 따라 다양한 그림이 나온다는 것”이라며 “ 그림 속에서 자유로운 영혼과 염원이 만나 새로운 힘을 얻고 순수한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자는 의미에서 전시의 이름도 ‘알몸’이라고 붙였다”고 말했다. 한때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돈 보따리를 들고 찾아오기도 했지만 그 돈에 매이기는 싫었다. 작업실 월세를 걱정해도 지금이 훨씬 자유롭고 좋단다. 한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던 그의 삶이 칡서를 통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듯했다. 1월 14~20일 갤러리 이즈에서 앙코르 ‘알몸’전이 열린다.

칡서

모필(毛筆·짐승의 털로 만든 붓)이 발달하기 전 칡을 묶어 만든 붓으로 쓴 글씨를 말한다. 고대 신관(神官)들이 점을 친 후 국가의 운명 등 중요한 점괘를 칡붓으로 기록했다고 한다. 신관들이 쓴 칡서는 영험한 힘과 기(氣)의 흐름을 담았다고 해서 ‘기(氣) 서예’라고도 하고 원초적인 힘인 항문의 힘으로 쓴다고 해서 분체(糞體·일명 똥체)라고도 한다.

칡서의 종류에는 3가지가 있다. 글을 위주로 하여 그림의 형태를 표현하는 서화체, 그림 속에 글을 표현하는 기법인 화서체, 그림 속 그림을 나타내는 화화체이다.

칡붓은 1개 만드는 데 5~6개월이 걸린다. 칡의 결을 살리기 위해선 물에 불리고 살살 두드리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두드리는 강도를 잘 조절해야 결이 뭉개지지 않고 살아난다. 칡붓은 칡의 강인한 생명력을 담고 있어 쓰면 쓸수록 힘이 강해진다. 모필에 밀려 칡붓이 사라지면서 칡서의 맥도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