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점입가경 전작권 전환 논쟁

醉月 2009. 7. 21. 08:12

점입가경 전작권 전환 논쟁
워싱턴서 ‘연기’ 역설한 기무사령관 vs‘합의 준수’ 총력방어 나선 주한미군사령관

 

 김종대│D&D Focus 편집장 jdkim2010@naver.com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논란이 고스란히 살아 돌아왔다. 예비역 단체들과 보수층을 중심으로 제기된 2012년 전환일정 연기 주장이 북한의 강경행보와 맞물려 탄력을 받은 데다, 군 내부에서조차 일부 고위 관계자들이 ‘자가 발전’에 나서고 있다.
전환일정 재검토를 약속했던 청와대는 기존합의를 준수해야 한다는 워싱턴의 단호한 입장 앞에서 곤혹스러워하는 중. 문제는 사안이 이렇듯 떠도는 동안 한국군의 미래를 고민하고 준비하는 작업은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잠시 옛이야기를 더듬어보자. 때는 1992년 8월21일 오후. 6공화국의 마지막 기무사령관인 서완수 중장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정례 업무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노 대통령의 의지로 추진되고 있던 평시작전통제권(평작권) 환수의 문제점을 보고했다.

서 사령관은 평작권 환수가

▲육군참모총장 등 군 지도부 내부에서조차 이견이 있고

▲우리 군의 준비 및 작전수행태세가 미흡하며

▲평작권 환수시 북한의 오판 가능성과 함께 강경태도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는데다

▲한미 군사동맹 관계에 차질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그는 ‘평시작전통제권을 1993~95년 기간 중 한국군이 환수한다’는 1991년 11월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의 합의는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기무사령관의 보고내용이 알려지면서 김종휘 당시 외교안보수석은 격분했다. 그는 기무사령관의 대통령 보고 배후에 군 예비역 장성과 현역들에게 작전권 환수 반대를 사주하는 로버트 리스카시 당시 한미연합사령관이 있다고 믿었다. 리스카시 사령관이 기무사령관 집무실에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대통령 보고가 이루어졌다는 점이 그 정황증거였다.

청와대는 즉시 합참 전략본부에 반박대응을 지시했다. 당시 천용택 중장이 이끄는 합참 전략본부와 그 산하 군사전략과장 김관진 대령, 미주전략과장을 맡고 있던 권안도 대령이 주축이 되어 참모총장과 주요 지휘관들에게 작전권 환수의 당위성을 설득했다. 요즘 말로 하자면 군 내부의 ‘자주파’들이었던 셈이다. 이들이 기무사의 따가운 시선을 무릅쓴 결과 이필섭 합참의장, 김진영 육군총장 등 군 수뇌부는 평시작전권을 반드시 환수해야 한다는 데 의견통일을 이룬다. 창설된 지 얼마 안 된 합참조직의 중견 장교들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기무사의 ‘반란’을 진압한 것이다.

평시작전통제권 환수 논의는 1990년 한미군사위원회에서 “평시작전통제권은 1993년까지, 전시작전통제권은 1995년까지 환수하자”는 안을 미국 측에 제시한 것이 시초였다. 당시 미 국방부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12·12 쿠데타 이후 제기된 ‘작전권을 갖고 있는 미군이 전방병력의 이동을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속내를 품고 있었다. 넌-워너 법안에 의해 주한미군 병력이 축소되고 ‘한국방위의 한국화’가 이루어지는 안보상황도 작전권을 한국에 되돌려주고 싶어한 이유였다.

 

Envisioned와 Decided

애초 미국 측은 1991년 1월1일부로 한국에 평작권을 전환할 의도가 있음을 내비쳤다. 몇 번의 협상을 거친 후 양국은 1991년 11월 23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 “1993~95년 기간 중 평시작전권을 한국군이 환수한다”는 데 합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마저 성에 차지 않았던 노태우 대통령은 전시작전권까지 염두에 두었을 때 되도록 빠른 시기에 평작권을 환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92년 1월28일 노태우 대통령의 국방부 연두순시 발언이다.

“우리의 자주적 방위역량과 태세를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의 기본바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금년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는 평시작전통제권을 1993~95년 중 환수하도록 한 기존합의를 구체화하여 최단 시일 내에 찾아올 수 있도록 협의해야 합니다. 가급적 1993년 초에 환수하는 것이 바람직할 듯한데, 잘 검토해보기 바랍니다.”

문제는 리스카시 한미연합사 사령관이었다.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은 “리스카시가 총독 행세를 한다”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리스카시의 주한미군사령부는 평시작전권을 1996년에, 전시작전통제권은 2000년 이후에 한국으로 전환하자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992년 5월부터 시작된 주한미군과의 평작권 환수 협상이 진전을 보지 못했던 것도 이 같은 리스카시의 집요한 반대 때문이었다. 국군의 날인 1992년 10월1일 오전 11시30분,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은 도널드 그레그 당시 주한 미대사와 리스카시 사령관을 청와대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당시 이 일에 관여했던 관계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이 자리에서 김 수석의 발언은 초강경이었다.

 

1994년 12월1일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한국군의 평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신고하는 이양호 합참의장(앞쪽)과 육해공군 작전지휘관.

“필요하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말이 안 통하는 주한미군과 협의하지 않고 워싱턴 당국자와 직접 협상할 것이다. 나는 이미 7월에 워싱턴에 갔을 때 스코크로프트 백악관 안보보좌관, 울포위츠 국방부 정책차관, 릴리 부차관보에게 작전통제권에 대한 우리 정부의 기본입장을 전달했고,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다.”

다른 선택이 없었던 리스카시 사령관은 절충을 시도했다. 그가 제시한 비밀문서에는 ‘늦어도 1994년 이내에 평시작통권을 한국 측에 환수할 것을 고려(Envisioned)하며’라는 문구가 있었다. ‘고려’라는 표현이 리스카시 사령관의 술수라고 판단한 김 수석은 사인펜으로 ‘Envisioned’라는 단어에 빨간 줄을 긋고 그 위에 ‘Decided(결정)’라고 써 넣었다. 그러나 다시 유심히 보니 문장 앞에 ‘Barring Military emergency(군사적 비상사태가 없다면)’이라는 표현이 눈에 띄었다.

“평시 작통권을 주면 주는 것이지 무슨 조건이 필요한가?”

이렇게 되물은 김 수석은 이 구절에도 역시 빨간 줄을 그어 삭제했다. 전시든 평시든 전제조건을 달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상기된 얼굴의 리스카시 사령관은 모자를 집어 들고 일어나 사무실을 나갔고, 그레그 대사가 허둥지둥 그 뒤를 쫓았다. 세 시간이 흐른 오후 3시30분,

김종휘 수석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리스카시를 완전히 굴복시켜 평작권 환수 합의를 이뤄냈다고 보고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크게 기뻐했다.

 

기무사령관과 DIA 국장의 회동

그 후 17년의 시간이 지났다. 2009년 4월28일, 김종태 기무사령관은 정보기관끼리의 교류와 친선 도모를 위해 워싱턴으로 날아가 마이클 메이플스 미 국방정보국(DIA) 국장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김 사령관은 2012년 4월에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을 전환받기로 한 노무현 정부 당시의 양국 간 합의에 문제점이 있다고 거론했다.

▲예비역 장군들이 전작권 전환 및 연합사 해체를 반대하며 서명운동을 전개하는 등 한국 내 이견이 상존하고 있고

▲북한의 로켓 발사로 안보위기가 고조된 상황에서 전작권 전환을 추진할 경우 국민의 안보불안이 고조되며

▲우리 군의 단독작전 행사를 위해 준비기간이 더 필요하다는 입장을 개진했다.

 

메이플스 국장의 답변은 간명했다. “전시작전권은 한국이 달라고 해서 준 것인데 이제 와서 그런 주장을 하면 어쩌자는 거냐”는 이야기였다. 5월 중순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당분간 전작권 문제를 거론하지 않기로 한 청와대와 국방부 지침과 달리 일부 관계자들에게서 ‘전작권 전환 일정을 연기해야 한다’는 발언이 통제되지 않은 채 나오고 있다”고 필자에게 밝혔다. “이렇게 되면 미국 측으로 하여금 정부 간 합의마저 준수하지 않는 한국 정부를 불신하게 만들어 향후 전작권 전환 문제를 논의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였다.

노무현 정부가 자주국방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은 2003년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부터였다. 당시의 경축사 가운데 자주국방에 관한 핵심 부분만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자주독립 국가는 스스로의 국방력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10년 내에 우리 군이 자주국방의 역량을 갖출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우리 국군은 6·25전쟁을 거친 이후 꾸준히 성장해 능히 나라를 지킬 만한 규모를 갖추었음에도 아직 독자적인 작전수행 능력과 권한을 갖지 못하고 있다. 6·25전쟁에서 미군은 수많은 젊은이의 목숨을 바쳐 우리의 자유를 지켜줬고, 오늘날까지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고 있으나, 우리의 안보를 언제까지나 주한미군에 의존하려는 생각도 옳지 않다. (국군의) 정보와 작전기획 능력을 보강하고 군비와 국방체계도 그에 맞게 재편해나가겠다.”

 

전환 준비 주도했던 이상희 장관

‘자주’와 ‘주권’을 표방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설은 상당부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발언과 닮아 있다. 이러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주국방 구상에 따라 조영길 당시 국방장관은 F-15K 전투기 추가도입, 핵추진 잠수함 건조, 지대공 미사일 도입 등 전력현대화를 골자로 한 ‘자주국방 추진계획’을 2003년 노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에 노 전 대통령은 기획예산처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복지예산 1조5000억원을 국방비로 전용하도록 조치하는 등 자주국방에 필요한 비용이 먼저 배정되도록 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노무현 정부는 역대 정권 중 가장 높은 국방비 증가율을 기록한 정부가 되었다.

이 같은 국방 중시정책에 탄력을 받아 조영길 당시 장관은 전시작전권을 가급적 조속히 미국으로부터 전환받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전시작전권 전환계획’을 2004년 노 전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원래 조 전 장관은 2003년 4월과 6월 청와대에서 열린 ‘자주국방 토론회’에서 전작권 전환 추진에 반대했지만 결국 전시작전권 전환의 첫걸음을 떼는 주역이 되었다.

2004년 7월 윤광웅 국방장관이 부임하고 나서도 대통령과 국방장관은 전작권 전환 시기를 2009년경으로 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뒤이어 2005년 이상희 합참의장이 부임하고 난 뒤 윤광웅 당시 장관은 합참의장 건의에 따라 대통령을 설득해 전환 시기를 2012년으로 연기하도록 입장을 바꾼다. 현재 국방장관인 이상희 당시 합참의장이 “2012년이 전작권 전환시기로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하며 합참 내에 전작권 전환을 준비하는 TF를 구성해 전환계획을 주도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전작권 전환의 당위성을 군 간부들에게 교육하는 등 핵심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2008년 2월5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주재로 열린 대통령직인수위원회 3차 국정과제 보고회의.

이날 인수위는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의 적정성 평가 및 보완’을 새 정부 중점과제에 포함시켰다.

노 전 대통령과 윤 전 장관, 이상희 전 합참의장은 미국과 협상을 앞두고 청와대에서 전작권 협상 대책회의를 개최하면서 ‘2012년 전작권 전환’에 대해 완전한 공감대와 의견 일치를 이룬다. 결국 이들이 주역이 되어 국방부는 2006년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 ‘2012년 3월15일’로 전작권 전환일정에 최종 합의하게 된다.

미국으로부터 작전권을 전환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전통적으로 한국의 보수주의 대북 강경론자들의 지론이었다. 1968년 1·21사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미군이 책임지고 있는 지역을 통과해 서울까지 침투했음에도 워싱턴이 한국이 요청한 대북 응징을 거절하자 격노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의 대한(對韓) 방위공약의 진정성을 의심한 박 대통령은 미국에 전면적인 작전통제권 환수를 요구했다. 전에 없이 악화된 한국의 대미(對美) 감정을 접한 미국은 한국에 특별 군사원조를 제공하며 작전권 환수 요구를 무마해야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양상은 크게 달라진다. ‘한국방위의 한국화’를 외치며 국방태세의 자주화를 도모하던 1990년대와 ‘자주국방’을 외치며 전시작전권을 전환받으려는 2000년대의 작전권 전환 논리는 그 구조가 여러모로 닮아있다. 남북관계에서 화해와 협력을 도모하고, 자주외교를 통해 중국, 러시아 등과 균형적 관계를 도모하며, 국방 자주화를 이루고자 했던 노태우, 노무현 양 정부의 안보정책은 분명 이전에 비해 진보적이었다. 더 이상 한미관계에만 국가의 운명을 맡길 수 없으므로 우리 스스로 남북관계에서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주변국과 공동의 번영을 이루는 새로운 시대를 앞서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으로의 전환이었다. 주권국가의 상징인 작전권은 ‘한반도 정세를 우리 스스로 주도해보자’는 결의의 상징이었고 국가 생존을 위한 대전략 차원의 변화였다.

진보 성향 대통령이 관리하는 정치적 의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대통령은 작전권 전환을 통해 군의 전략적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키려는 계기를 창출했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노태우 정부에는 ‘장기국방태세발전연구’, 일명 ‘818계획’이 있었다. 노무현 정부에는 ‘818계획’의 기본 프레임을 거의 그대로 계승한 ‘국방개혁 2020’이 있었다. 이들 계획은 우리 군에 면면히 이어져온 국방선진화의 담론을 구체화하는 작품들로, 자주적 방위태세 구현을 위한 거시적 국방기획이자 군의 자기혁신운동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자주화의 흐름을 기무사가 견제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국방기획 및 정책에 밝은 중견장교들이 국방태세 자주화의 의지를 고취하며 ‘자주국방 세력’을 형성했다면, 기무사는 항상 미국과의 밀월관계를 통해 ‘연합방위 세력’을 형성해 대응하려 했다. 한국 안보의 핵심방책이 연합방위력이냐,

자주국방력이냐를 둘러싼 자주파와 동맹파의 대립 속에서 한국군의 정신사는 ‘자주국방’과 ‘연합방위’ 사이를 요동쳤다.

 

“한국에서 ‘이상한 말’ 들었다”

노태우 정부가 추진했던 작전권 전환은 김영삼 정부에 들어와서는 1994년 평시작전권 환수 이후 더 이상 논의가 이어지지 않았다.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거듭되는 안보불안과 핵 위기 속에서 주한미군의 추가 감축과 작전권에 대한 논의는 묻혔다. 김영삼 정부와 유사하게 북한과의 대화보다는 대북 강경정책을 선호하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최근 들어, 노무현 정부 시절의 전시작전권 전환 추진을 재검토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공교롭다.

5월초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특별대표의 방한을 수행했던 미 국무부 고위인사는 최근 한 모교 동문을 만나 “한국 국방부 관계자로부터 4월말에 이상한 말을 들었다”며 “한국 정부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있다”고 도움을 청했다. 그 ‘이상한 말’이란 다음과 같다.

“전시작전권 전환은 한미 양국 공히 다음 정권으로 미루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한국은 오바마 대통령이 연임해 8년 동안 집권할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오바마 행정부가 끝나고 한미 양국에 새 대통령이 등장한 2017년이 전작권을 전환받기에 가장 적당한 시점이다. 만일 오바마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중에 반드시 전작권 전환을 성사시키겠다고 한다면 임기가 끝나기 직전인 2015년이 되어야 한다는 게 우리 생각이다.”

미국 측 고위인사는 우리 국방부 고위관계자가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를 거론하며 꺼낸 발언내용에 당황스러워했다고 한다. 정치논리만으로 전작권 전환시기를 2015년 이후로 연기하자고 언급하는 것은 한국의 일방주의적 행태에 불과하다는 시각이었다는 것이다.

 

아마추어는 협상 불가

전시작전권 전환에 관한 재협상을 하려면, 우선 미국 측과 미래 안보위협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양국의 공동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동맹의 미래상에 대해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전작권 전환 시기를 조정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면 그때 거론하는 것이 순서다. 그러나 이런 전제를 무시하고 국방부 고위 관계자가 ‘나도 한칼 있다’는 식으로 미국에 건너가 불쑥 전작권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일일까. 이러한 국방부 고위관계자들의 돌발행보는 동맹 문제에 있어 노무현 정부 시절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협상력을 크게 축소시키는 역효과를 초래한다는 우려가 나올 수밖에 없다. 앞서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필자에게 “열 받았다”고까지 표현한 이유다.

그렇다면 대통령후보 시절 “미국과 전시작전권 전환시기를 재검토하겠다”고 공언했던 이명박 대통령의 생각은 무엇일까. 이 대통령은 당선 이후 전작권 문제에 대해 “지난 정부의 합의를 준수한다”는 입장으로 180도 돌아섰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2008년 1월11일 당선자 신분으로 국방부를 방문해 김장수 당시 국방장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일이었다. “우리가 먼저 전작권 재협상을 거론할 경우 정상 간에 합의된 사항을 번복한다는 점에서 외교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고, 향후 주한미군 변환과 기지이전, 방위비분담금 협상에서‘요구자 부담 원칙’에 따라 막대한 비용을 떠안아야 한다”는 게 그 골자였다. 돈 문제에 민감한 이 대통령에게 김 전 장관의 설명은 주효했다.

김 전 장관의 설명은 최근 예비역 장군들이 “전작권을 전환하면 한국군의 단독작전 수행능력을 갖추기 위해 첨단 현대무기를 추가 도입해야 하기 때문에 천문학적 예산이 소요된다”는 주장과 대칭된다. 전작권 전환시기 재검토를 둘러싼 찬반 양론이 모두 ‘예산부족’을 그 근거로 내세우고 있음이 흥미롭다.

5월31일 이상희 국방부 장관(왼쪽)과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오른쪽)이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에서 열린 제8차 아시아안보회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5월말 청와대 자문모임의 결론

그러나 4월5일 장거리 로켓 발사와 5월25일 2차 핵실험 등 북한의 강경행보가 이어지자, 한나라당과 예비역 장성들은 일제히 전작권 합의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한미 공조가 절실한 안보위기 상황에서 한반도 안정의 핵심 억제력이자 상징인 한미연합사가 해체될 경우 북한에 한미관계 이완이라는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어 감당할 수 없는 위기가 초래된다는 것이 핵심논리다. 한나라당은 5월27일 고위당정협의에서 “정부에 전작권 전환 재검토를 적극 당부했다”고 당 대변인을 통해 발표했다. 예비역 장성들은 6월4일 프레스센터에서 ‘북핵 폐기, 한미연합사 해체반대 1000만명 서명 보고대회’를 열고 “6월16일 한미정상회담에서 전작권 전환일정을 연기해달라”고 정부에 공식 요청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6월 정상회담에서 전작권 문제를 거론하지 않기로 심증을 굳힌 듯하다. 5월말 이 대통령은 보수층의 전작권 재검토 요청을 한미 정상회담에서 거론해야 할지를 두고 자문을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응한 청와대 외교안보라인과 전문가들은 “한미 양국군이 전작권 전환에 대한 전략적 이행계획(Strategic Transformation Plan·STP)의 진척상황을 올해부터 평가하기로 되어 있으므로, 그 평가결과를 근거로 미국 측과 전작권 문제를 논함이 옳다”며 “10월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 이전까지 전작권 문제를 거론하지 말아야 한다”고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청와대의 신중한 자세는 6월 정상회담에서 전작권 문제가 논의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예비역 장성들에게 실망과 분노를 안겨줄 가능성이 크다. 이미 일부 보수언론은 5월 북한과 대화를 시도하려는 이 대통령에 대해 ‘변절’이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구사하며 비판한 바 있다. 애초에 지지층에게 약속한 대로 북한을 더 강하게 압박하고 한미동맹을 강화하라는 주문이었다. 최근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는 이 대통령이 이 같은 압력을 과연 견뎌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전작권 자체의 논리가 아니라 지지층을 달래야 한다는 ‘정무적 판단’이 개입될 소지가 여기서 나온다.

 

샤프 사령관의 철통방어

최근에는 주한 미대사관과 한미연합사령부에도 한국 정부의 진의를 확인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미국 측은 국가 간 합의를 일방적으로 뒤흔든다는 건 용납하기 어렵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워싱턴은 한국군 내에서 전작권 재협상 논의가 불거지는 것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몇 가지 의미 있는 조치를 취했다.

 

그 첫 번째는 한국군의 작전능력을 ‘무조건 칭찬하기’다. 지난해 한미 합동군사연습인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 전후에 미군 관계자들은 한국군의 작전능력에 대해 갖가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연습 직후 월터 샤프 주한미군사령관은 미군 전문지인 ‘성조’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연습에서 한국군은 전시에 정책의 우선순위를 결정해야 하는 상당히 어려운 과제를 받았지만 전쟁을 관측하며 적절한 결정을 내렸다”고 평가했다. “한국은 북한과 전쟁을 이끌어나갈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말도 이어졌다. 더불어 그는 “전작권 전환 과정이 예상보다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미연합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 한국군 장교는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나는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인 줄 알았는데, 모든 미군 장교의 말이 완벽하게 한 방향으로만 통제되는 것을 보면 흡사 독재국가 같다. 개인 의견은 전혀 없이 오직 한국군을 치켜세우라는 본토의 지침에만 충실하다. 올해 8월에 있을 군사연습에서도 미국은 틀림없이 대규모 ‘립 서비스부대’를 한국에 보낼 것이다.”

 

두 번째로는 월터 샤프 한미연합사령관이 국회와 성우회 등을 상대로 직접 홍보에 나선 일을 들 수 있다. 이미 올해 초 샤프 사령관은 재향군인회와 성우회에 전작권 전환의 당위성을 설명했고, 국회 국방위원회 여야 의원들이 일본의 유엔사 후방기지를 시찰하도록 했다. 이는 다분히 연합사가 해체돼도 후방에서 충분히 지원할 수 있다는 점을 납득시키기 위한 ‘전작권 마케팅 전략’이었다. 이 조치는 즉각 효력을 발휘해 이명박 대통령이 4월 외교안보 자문위원과 만난 자리에서

“국회의원들이 시찰한 유엔사 후방기지가 굉장하다고 들었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세 번째는 북한의 재래식 전면전쟁 위협을 평가 절하하는 전략이다. 1월 방한한 미 국방정보국(DIA) 관계자들은 한국 국방부가 북한의 특수전 위협을 상향 조정하는 등 북한의 재래식 전면전 수행능력을 높게 평가하는 데 반대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펜타곤에서 그러한 한국 정부의 위협 판단에 절대로 동의해주지 말라는 지침을 받았다”고 실토했다. 이러한 정보 갈등으로 인해 북한의 지상전 위협을 2년 전에 비해 상향 조정했던 국방부의‘2008국방백서’는 당초 발간 예정시점이었던 1월을 한 달 이상 넘기고 2월말에야 빛을 보았다.

 

한미군사연습에서 드러난 난맥상

이후에도 한미연합사는 북한의 재래식 전쟁능력에 대해 “전면전 수행능력이 급격히 쇠퇴하고 있다”며 한국 국방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북한의 특수전 병력에 대해서도 한국군 국방백서가 18만명이라고 기술한 것과 달리, 샤프 사령관이 3월19일 미 상원에 제출한 보고서는 그 반도 안 되는 8만명에 불과하다고 적시하고 있다.

2008년 6월3일 서울 용산 한미연합사에서 열린 한미연합사령관 이취임식에서

월터 샤프 신임 사령관(왼쪽)과 버웰 벨 전 사령관이 경례를 하고 있다.

네 번째는 한국 국방부를 압박해 “전시작전권 전환에 대한 기존합의를 준수한다”고 재확인함으로써 재협상이 없도록 이중삼중의 대못질을 하는 작업이다. 5월30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8차 아시아안보회의에서 양국 국방장관이 회담을 갖고 2012년 4월17일로 예정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시기를 재확인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리언 라포트 전 한미연합사령관은 미 육군 4군단장 출신으로 군단장 당시 한국군 1군사령부에 배속되어 한미연합군사연습을 수행해본 경험이 있다. 다음 연합사령관이었던 버웰 벨 전 사령관은 미 육군 3군단장 출신으로 역시 한국군 3군사령부와 호흡을 맞춰 전시연습을 수행한 적이 있다. 군단장 시절부터 한국군과 합동작전을 경험했던 이들은 주한미군사령관으로 부임한 이후 해외에서 유일하게 재래식 전면전 교리가 완벽하게 보존돼 있는 연합사를 수호하려고 했고, 그 이면에는 도널드 럼스펠드 당시 국방장관에 저항하며 4성 장군 직위를 유지하려는 미 육군의 이해관계가 적지 않게 작용했다.

 

반면 월터 샤프 현 사령관은 군단장을 거치지 않았다. 주로 미 합참 참모부서에서 시스템 분석과 군사변혁에 몰두해온 전형적인 ‘혁신파’다. 이러한 샤프 사령관의 색깔에 대해 연합사 안팎에서조차 ‘해외에 전개돼 있는 대규모 미군을 구조조정하려는 펜타곤의 의도에 복종하는 예스맨’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주한 미 지상군을 설거지하러 온 사령관’이라는 소문도 줄곧 따라다녔다. 샤프 사령관이 최근 워싱턴의‘전작권 재논의 원천봉쇄’작전에 적극 나서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샤프 사령관의 의도적인‘한국군 작전능력 칭찬하기’가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만 살펴봐도 확인할 수 있다.

주한미군에 소속된 한 한국인 군무원은 지난해 8월 한국군이 주도해 실시한 을지프리덤가디언 군사연습에서 충격적인 일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 설명을 그대로 옮긴다.

 

“우리가 개념적으로 알고 있던 미국의 지원전력은 연습에 전혀 연계되지도 않고 오지도 않았으며, 그럴 계획도 없었다. 괌에 배치된 글로벌호크를 투입해야 할 군사상황이 발생했는데도 미국은 ‘작전반경 밖’이라며 투입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계획상으로는 미군의 지원전력으로 알고 있던 것이 사실은 허상에 불과했다. 제대로 된 지원이 실행되지 않자 한국군이 필요로 하는 정보의 양이 급격히 감소했다. 지원전력이 대부분 허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군 수뇌부는 큰 혼란에 빠졌다.”

또 다른 관계자는 지상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한다. 미8군의 자체계획은 적용됐지만 유사시 증원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미 지상군은 상당부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에 프리덤가디언 훈련의 명목은 함께 싸운다는 의미보다는 ‘한국군을 훈련시켜준다는 것’에 가깝다. 이러한 연합연습 운영방침은 이미 전작권 전환이 결정됐던 벨 사령관 시절부터 정착됐다고 한다. 해체될 운명의 식물사령부인 연합사에서 미군은 뒷짐만 지고 한국군 훈련을 지켜보겠다는 것이다. 이런 그림은 어쩌면 ‘한국군 주도-미군 지원’이라는 전작권 전환 이후의 실상을 보여주는 풍경일 수도 있다.

 

심화하는 하드웨어 집착

이러한 현실은 연합사 해체가 한국에서의 전쟁억제력을 약화시킨다는 예비역 장성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근거가 된다. 한반도 유사시 자동개입이 보장되지 않는 현 한미상호방위조약하에서 본국에 증원전력을 요청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연합사령관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미국의 한반도 개입은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게 되므로 미국의 증원전력 지원은 단지 ‘가능성’에 머무를 것이라는 시각이다.

 

그러나 전시작전권 전환 일정이 연기된다고 해서 이미 떠난 미군이 되돌아오고, 없던 증원전력이 새로 배치될 수 있을까. 한반도에서 철수한 아파치 헬기가 되돌아올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회의적이다. 이미 미국은 자체계획을 통해 한반도에서 발을 빼고 있는 상황이다. 전작권 여부와 관계없이 한반도 방위에서 미국의 부담을 줄이겠다는 워싱턴의 의지가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한국군의 심각한 상황은 더욱 우려스럽다. 한반도 전구(戰區)에 대한 전체적인 전략을 기획하고, 이를 바탕으로 작전계획을 수립하며, 이를 연습하고 실험을 통해 검증하는 핵심 시스템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6월 중 대통령 재가를 받을 예정인 국방개혁 기본계획에서도 이러한 소프트웨어에 대한 투자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 여전히 전차와 장갑차의 개수에 집착하는 하드웨어 접근이 주종을 이룬다. 빈약한 합참의 워게임 장비로는 사건을 작전부대에 전파할 수 없고 지휘통제에도 문제가 발생한다. 통합적으로 정보를 처리하고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은 아직도 요원하다. 더욱이 이러한 심각한 상황이 미군 측의 립 서비스에 묻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런 구조 때문에 지난해 군사연습이 종료되고 난 뒤에도 그 교훈은 제대로 도출되지 않았다. 이상희 국방장관은 오히려 “핵심전력은 미군이 지원해주기로 했다”는 발언을 이어갔다. 2006년 럼스펠드 장관이 말한 ‘연계전력(bridging capability)’을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하며 “계속 미군에 의존하겠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한국군 주도로 작전을 수행하라”며 핵심전력의 지원 우선순위에서 한국을 하향조정한 상태다. 지난해 8월의 군사연습이야말로‘연계전력’이란 말은 검증되지 않은 수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기회였음에도, 이상희 장관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른바 연계전력 문제에 대해 연합사 출신의 한 예비역 대령은 “새빨간 거짓말이며, 안보상황을 호도하는 기만논리”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연계전력’이라는 미명하에 한국군이 갖추어야 할 핵심전력은 차례차례 국방개혁 기본계획에서 삭제되거나 연기되고 있다. 미래 한국군의 눈과 귀, 신경과 혈관, 정밀한 타격력을 구성할 핵심 전력은 예산부족을 이유로 확보가 요원해지고, 그 대신 복고풍의 지상군 전력에 편중된 계획이 국방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재등장했다.

 

2007년 2월 전직 국방장관 등 역대 군 수뇌부들이 서울 신천동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중회의실에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합의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다련장포(MLRS) 도입에 총 29조원을 투입해 64만발의 로켓포를 보유하고 차기자주포에도 10조원이 투입된다. 포병전력에만 약 40조원을 쏟아 붓겠다는 것이다. 신형 전차에 9조원, 미국제 아파치 직구매를 포함한 헬기 214대 도입 등 재래식 지상군 페스티벌은 끝이 없다. 반면 해군의 차기잠수함(KSS-Ⅲ), 글로벌호크 무인정찰기, 합동공대지순항미사일(JASSM) 등 정보작전의 핵심전력들은 줄줄이 순연됐다. C4I 등 지휘통제를 위한 시스템 구축도 여전히 미흡하다.

 

이상희 장관은 최근 육·해·공군의 합동성 강화와 관련해 “자군 이기주의에 빠지지 말라”고 각군 본부에 지시한 바 있다. 해·공군의 일부 장교들은 “지상군 위주로 기본계획을 수립해놓고 우리더러 자군 이기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거냐”며 울화통을 터뜨린다. 반면 이 장관은 명백히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핵심전력 공백에 대해서는 여전히 연계전력이라는 한마디로 처리해버렸다. 그러나 국방부는 우리가 미국에 의존할 수 있는 연계전력이 무엇인지 그 목록조차 국회에 설명하지 못하고 있고, 우리가 설정한 연계전력이 실제로 가능한지 그 목록을 미국으로부터 검증받은 적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리무중 미래 한국군 군령체계

전략의 기획과 작전계획 수립, 군사력 소요를 검증할 수 있는 검증체계와 같은 군사력 운용의 핵심 소프트웨어에 대한 대책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것은 6월말 대통령 결재가 예정돼 있는 국방개혁 기본계획도 마찬가지다. 기본계획은 앞으로 합참의 구조가 1차장 산하에 합동작전본부, 2차장 산하에 전략기획본부와 전력발전본부를 편성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합참 조직개편안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미래 한국군의 작전지휘를 규정하는 한국형 군령체계가 무엇인지 혼선을 겪었다. 합참의장과 합동군사령부의 임무나 기능관계, 대통령 보좌와 작전부대 지휘라는 중첩된 업무를 합참 차원에서 어떻게 조정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를 둘러싸고 국방부의 전작권 전환 TF와 이상희 장관 사이에도 상당한 이견이 표출되고 있는데다 주한미군사령부와도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형 군령체계’라고 할 만한 속 시원한 답이 없는 상태에서 과연 전작권 전환이 제대로 준비될지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합참에 새로운 조직을 창설하는 계획은 마련됐지만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각 군의 전략과 전력을 조정하고 통합할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한 투자는 여전히 미흡하다. 각 군에서도 병과별로 경쟁적으로 무기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있으되 전투 모의실험과 소요검증을 할 수 있는 인력과 전문성은 준비되지 않았다. 이렇게 군 조직을 개편하고도 시스템이 없어서 과거와 일하는 방식이 달라질 게 없다면 전작권 전환 준비는 공염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94년 평시작전권을 환수할 당시 그 주축은 합참의 전략본부였다. 또한 청와대에서는 김희상 장군과 이상희 대령, 윤일영 중령, 장광일 중령 등이 포진해 이를 이끌었다. 이들은 작전권 문제를 작전 자체의 영역을 초월한 큰 틀의 국가전략 차원에서 접근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한 관계자의 말이다.

 

“전작권 전환에 관한 제반 업무는 작전본부에서 대부분 수행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로 인해 작전본부 장교들 사이에서는 ‘왜 우리가 일을 다하냐’는 불만이 팽배해 있다. 전략분야 장교들은 ‘도대체 누구의 통제를 받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혼란스러워한다. 중장기 군사기획을 지도하는 제대로 된 리더십이 없다 보니 작전본부와 전략본부 사이에서도 혼선이 늘었다.”

 

작전병과의 폐쇄성

이러한 흐름은 전시작전권 전환이 마치 작전만 잘하면 해결되는 것으로 왜곡돼 있음을 보여준다. 작전권은 작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 전략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 야전 작전 위주로 인사가 편중되면서 작전이 전략과 기획까지 압도해버리는 현상이 심화됐다.

근본적으로 작전파트는 D+10까지를 주된 대상으로 하는 업무에 치중하게 마련이다. 전략은 D+15, D+30, 그 너머를 내다보는 군사력 운용을 구상해야 한다. 야전 작전에 업무가 치우치면 열심히 작전을 하기는 하는데 왜 하는지, 도대체 이 삽질은 어떤 건물을 짓기 위한 것인지, 그 방향을 놓치고 만다. 미래를 준비하는 기획이 경시되고 현존 위협에만 주목해 눈앞의 작전만 잘하자는 풍조가 만들어진다. 장차 한반도에서 어떤 전쟁이 벌어질지, 그에 어떻게 대비할 것인지에 대한 전망의 결여, 철학의 빈곤이다.

 

주한미군의 경우 기획을 담당하는 J5 참모가 장기 부대정책을 수립한다. 파워가 가장 막강한 부서다. 현행 작전을 준비하더라도 장기적 전략에 기초해야 하고, 섬세한 프로그램 속에서 진행하는 게 당연시된다. 이 파트에서 뛰어난 전문가들의 역할이 보장된다. 그러나 우리는 J3라고 할 수 있는 합참 전략기획부장이라는 직위를 새로 만들면서도 작전과 전략을 섞어버리는 개념혼선을 겪고 있다.

 

지난 4월 군 정기인사에서는 기획과 정책분야 장교들이 진급에서 떨어지거나 제대로 보직을 받지 못했다. 예측 가능한 인사시스템이 급속히 붕괴되어 군심(軍心)이 이반되는 와중에 뛰어난 정책기획 분야 자원들이 줄줄이 고배를 마신 것이다. 야전 작전을 배려하기 위한 동기에서 출발한 이러한 인사 파행은 국방 전반에 ‘전략의 결핍, 작전의 비만’을 초래하고 있다. 청와대 국방보좌관을 역임한 한국안보문제연구소 김희상 이사장의 지적은 주목할 만하다.

 

“역대 정권마다 미래를 설계하는 기획통이 경시되고 현행 위협에 대한 대응만을 고민하는 작전통을 키우는 경향이 있었다. 우리 군의 큰 병폐다. 더 큰 문제는 작전병과의 폐쇄성과 매너리즘이다. 이미 정해진 작전계획상에서 어떤 기동을 준비할 때, 이것이 돌파냐 공격이냐는 용어와 개념을 갖고 밤새도록 논쟁을 한다. 그런 형식 논쟁이 전쟁을 준비하는 자세라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정책가, 기획가들을 경시하는 풍조는 그러한 고정관념에서부터 나온다.”

 

미래를 보는 눈

전작권 전환 시기를 아무런 근거도 없이 당기거나 미루는 논의는, 국가안보를 증진하기 위한 진지한 고민의 결과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정쟁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최근 예비역 장성들이 노무현 정부가 내세운 ‘자주’또는 ‘주권’이라는 용어를 ‘친북좌파의 감상주의’라고 공격한 것도 거꾸로 ‘우파의 감상주의’라는 혐의를 벗기 어려워 보인다. 좌파가 자주의 논리에 감상적으로 경도됐다면 우파는 언제나 미국이 우리를 지원할 것이라는 환상에 경도돼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특히 보수층의 전작권 전환 반대 논리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우선 최근의 북한 핵 문제 등 안보위기를 이유로 전작권 전환 시기를 연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분명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를 역으로 뒤집어 위기가 해소되면 당장 전작권을 가져와도 괜찮은 것일까. 만약 올 하반기에 북미 간에 대화가 시작되고 한반도에서 해빙의 흐름이 조성된다면 그런 논리가 설 자리가 있을까.

 

둘째 군의 선진화를 위한 핵심전력과 시스템은 소홀히 취급하면서 ‘준비가 덜 되었으니 나중에 전작권을 가져오자’는 식의 주장은 누가 보기에도 궁색하다. 자주적으로 무엇을 해보려는 결의와 자신감, 준비가 부족한 것이 전작권 전환을 연기하자는 주장으로 비약한다면 이는 우리 군에 대한 패배주의와 비관주의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셋째, ‘친북좌파 노무현이 한 일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식의 이념적 접근은, 과거 정부에서 계승할 것은 계승하고 수정할 것은 수정하면서 지혜롭게 국방을 관리해나가는 자세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 같은 정치논리가 과연 국민의 지지를 받을지도 의문이다.

자주가 중요하냐 동맹이 중요하냐는 질문은, 직사각형의 면적을 구하는데 가로가 중요하냐 세로가 더 중요하냐를 따지는 것과 다름없는 소모적 논쟁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군 정신사(精神史)의 가로축과 세로축에 자주와 동맹이 각기 하나의 변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두 가치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다. 여기에는 장기적인 안목의 대전략과 거시적인 기획이 필요하다. 그러나 최근 전작권 전환을 둘러싼 논쟁에는 그러한 노력 없이 정치구호만이 난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