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어어령의 다시 읽는 한국시_22

醉月 2009. 10. 11. 09:39

   조지훈「승무」僧 舞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
    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고이 접어서 나빌레라./파르라니 깎은 머 리/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우리가 애송하고 있는 조지훈의
「승무」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는 곧바로 그 시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세 가지 정보의 회로속으로 들어간다.

처음에는 「얇은 사」 「고깔」 「박사」와 같은 의상 정보에 관한 것이고, 다음은 「나빌레라」의 비유어에서 보듯이 나비와 같은 자연물에관한 정보, 그리고 마지막에는 「파르라니 깎은 머리」의 그 신체 정보이다.

 

  셰익스피어의 「기저귀」와 「수의」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인생의  기호로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이 시에서도 의상은 인간의
「미와 진실」을 드러내는 중요한 문화코드로작용한다. 반복형으로 강조된 「얇은 사」와「박사」는 우리가 보통때 입고 다니는 「두터
운 무명」 옷감의 재질과 대립하는 것이고,「하이얀」 빛깔은 삶의 쾌락을 나타내는 색동옷과 대칭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절제와 정화를
나타낸다. 그래서 그것들은 「남성에 대한 여성」 「속에 대한 성」 「축제에 대한 제례(祭儀)」의 탈중력상태의 문화코드를 형성한다

그리고 1연과 2연에 나오는 고깔은 은유와 환유의 각기 다른 비유의 양상을 통해서 「자연코드」와 「신체코드」에 연결된다. 즉
1연의 「나빌레라」는 고깔을 나비에 비유한것으로, 얇고 하얀 천의 재질이 나비의 나래와 동일시되고 그 형태는 나비의 모양과 결합
된 은유이다. 의미만이 아니다. 부드러운 순음과 유음이 겹친 「나빌레 라」의 기호표현(어감)은 무엇인가 가볍게 나부끼고 있는 것과 관련된 의태어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1연의 그 비유의 구조가 「고깔은 나비이다」라는 유사성에 의해 이루어진 「은유」인데 비해서,2연의 그것은 「고깔을 머리에 쓰다」의 근접성으로 구성된 환유이다. 말하자면 왕관이 그것을쓴 왕을 상징하듯이 「고깔을 쓴 삭발한 머리」는 바로 여승, 승무를 추는 무희를 나타내는 환유적 상징물이다.뿐만 아니라 신체의 최상 부를 가리키는 머리는 당연히 그 최하위에 있는 발과 대립되는 신체어로서 땅에 대한 하늘,육체에 대한 정신,쾌락에 대한 금욕,감정(발산)에 대한 이성(억제)을 나타내는 문화적 코드이다. 더구나 「파르라니 깎은 머리」는 승려라는 신분만이 아니라 금욕적인 탈속의 의지를 강화해 준다.


  단순하게 말해서 고깔의 의상코드가 나비의 자연코드와 합쳐진 것이 춤(무)이며, 삭발한 머리의신체코드와 결합한 것이 불교(승)이다. 그러니까 「의상=자연=신체」의 세 코드가 은유와 환유의 시적 장치를 통해서 하나로 수렴되고 승화된 것이 바로 그 「승무」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조지훈의 「승무」를 읽는다는 것은 그 첫머리에 제시된 고깔(의상)­나비(자연)­머리(신체)의관계가 어떻게 선택, 결합되어 진전되어 가는가를 추적하고 밝히는 일이기도 하다.


  신체코드로 볼 때 「파르라니 깎은 머리」가 3연에 이르면 「두 볼에 흐르는 빛」(얼굴)이 되고,5­6연에 오면 손과 발의 춤사위로 변한다. 그리고 다시 그 신체코드는 「복사꽃 뺨」과 「까만 눈동자」로 올라가 본래의 머리부분으로 돌아간다. 의상코드 역시 1연의 고깔이 5연에 오면 「소매는길어서 하늘은 넓고…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로 장삼과 외씨버선으로 바뀐다. 그러나 하늘로 비유된 그 긴 장삼과 사뿐히 위로 올린 외씨버선의 모양은 다시 하늘로 상승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물론 의상은 신체의 연장이고 또 춤사위와 관련된 것으로 「손­소매­장삼」에서 「발­버선­외씨 버선」으로 내려오는 신체기술과 동일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 볼에 흐르는 빛」처럼 의상의 환유체계로는 나타낼 수 없는 경우에서도 빈대에서 소리없이 녹아내리는 황촉불로 그 하강의 이미지를 지속시켜 준다. 촛불은 신체를 에워싸고 있는 「빛의 의상」이 된 것이다. 자연코드는 신체와 의상의 경우처럼 직접적인 인접성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서도 「나비­지는 오동잎과 달빛­별빛」의 순으로 역시 「상승 ­하강­상승」의 율동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오동잎 잎 새마다 지는 달빛」은 두 볼에 흐르는 빛과 빈 대위에서 소리 없이 녹아 내리는 황촉의 불빛과 삼중의 동심원을 그리면서 침하해 간다.신체의 빛,문화의 빛,자연의 빛… 이 세빛은 서로 다른 코드에 속해 있지만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운」소멸의 빛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그리고 그 빛들은 모두가 「먼 하늘 한 개 별빛」을 향해 합장을 한다.


  손이 소매가 되고 소매가 장삼으로, 장삼이 하늘로 바뀌어 가듯이 두 볼에 흐르는 빛은 촛불이 되고 그 촛불은 다시 떨어지는 오동잎 이파리마다 지는 달빛이 된다. 그러나 외씨버선이 하늘을 향해 위로 솟아오르듯이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지던 두 검은 눈동자는 먼 하늘의 한 개 별빛으로 향한다. 그 별빛은 촛불처럼 녹아 흐르지도 않고 달처럼 기울다가 소멸되지도 않는다. 무는 이렇게 세사에 시달리는번뇌와 복사꽃 육체의 들뜬 열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조용히 그러나 치열하게 날아오르는 몸짓인 것이다.

그것은 밤과 침묵 속에서 배어 나오는 빛이다.

 

  원래 승무라고 하면 고깔, 장삼과 함께 으레 법고가 나오게 마련인데 웬일인지 조지훈의 시에는 법고를 비롯해 모든 소리가 일절 배제되어 있다. 무성영화를 보듯이 시 전체가 말없이 녹는 황촉불같이 빛과 몸짓에 의해 연출된다. 이 침묵을 깨는 것이 마지막 귀또리의 울음소리이다. 묘사가 설명으로,즉 발신코드가 수신코드로 바뀌는 순간인 것이다. 승무의 아름다움이나 신비함, 그리고 그 성스러움
이 결정체를 이룬 「먼 하늘 한 개 별빛」을 지상으로 가져오고, 그 심연 속의 빛을 소리로 옮기면 승무의 마지막 연에 등장하는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가 될 것이다. 의상, 자연, 신체의 세 코드는 다같이 춤의 발신코드에 속해 있는 것이지만, 귀또리는 그 어느 코드에도 속하지 않는다. 의미론적으로는 나비와 달빛과 같은 자연코드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 기능을 보면 춤과는 직접
관계되지 않는다. 오히려 귀또리는 춤이나 춤을 추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감상하며 묘사하고 있는 시인과 관계된다. 발신코드 에서 고깔과 나비, 검은 눈동자와 별빛이 하나인 것처럼 수신코드에서는 귀또리­시인이 동격이 되는 것이다.

 

  밤하늘의 별빛은 너무 멀고 너무 조용해서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발밑에서 우는 가냘픈 귀또리소리에 의해서만 어둠에 둘러싸인 그 빛의 감응을 겨우 짐작할 수가 있다. 춤을굳이 언어로 바꿔놓은 이 시의 경우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승무의 진정한 메시지는 한국의 고전미나 불교의 열반을 나타내는 「승무」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의 의미는 그 침묵하는 것들을 귀뚜라미같은 가냘픈 소리로 옮기는데 있다. 「누가 춤을 보면서 춤과 춤추는 사람을 떼어낼 수 있는가」라는 유명한 말대로 「승무」의 세계는 번역 불가능한 것이다. 하늘의 별빛을 땅의 귀또리 소리로 옮기는 작업, 그것이 시인 조지훈이 평생을 두고 썼던 그 시의 의미였을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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