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 맛이야!|강화식당 회무침]
일 때문에 러시아 연해주를 방문하는 일이 잦다. 초기에는 호기심으로 느끼한 러시아 음식을 잘도 먹었는데 서너 차례 먹다 보니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고 답답해진다. ‘주간동아’에 칼럼을 연재하기로 한 뒤 바로 연해주에 갈 일이 생겼다. 닷새 일정을 끝내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 1년 내내 똑같은 우리 국적기의 맛없는 기내식을 튜브 고추장으로 범벅을 해 식도에 밀어넣으며 ‘뭘 쓰지?’ 고민하다가 비행기에서 내려 가장 먼저 먹고 싶은 것을 쓰기로 했다. 그랬더니 내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것이 ‘집밥’이었다. 집에서 먹는 밥만큼 맛있는 게 어디 있겠는가. 그 다음에 ‘강화식당’의 개운한 회무침이 눈앞에 떠올랐다.
‘강화식당’은 네댓 차례 넘게 가본 곳이다. 그런데 갈 때마다 헤맨다. 가로등도 없는 컴컴한 뒷골목에 들어앉아 있는 탓이다. 경기도 일산 정발고등학교 담벼락까지만 찾으면 그 다음은 쉬운데, 초행인 사람은 반드시 전화(031-905-1083)를 하고 갈 일이다. 골목을 헤매다 보면 강화식당이란 간판보다 ‘밴댕이 전문’이라고 쓰인 돌출간판이 먼저 눈에 띈다.
제철 생선 사용 … 밥에 비벼 먹어도 그만
이 식당은 컨셉트가 분명하다. 강화에서 나는 식재료로만 음식을 해서 낸다. 밴댕이를 비롯해 준치, 병어, 전어, 꽃게, 조기 등의 해산물로 회, 회무침, 매운탕을 하고 반찬으로는 돌게장, 순무김치, 미역무침이 항상 나온다. 밥은 반드시 강화 교동 쌀로만 한다. 개성 없이 매장 넓이나 고급 인테리어만으로 밀어붙이는 일산의 여느 식당들에 비하면 마케팅에서 한 수 위다. 고객들에게 잊히지 않는 강렬한 이미지를 심는 게 식당 생존 전략의 기본임을 강화식당 주인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음식을 빼면 이 식당은 가관이다. 주류회사에서 주는 광고전단을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데다 카운터 옆에는 잡동사니가 쌓여 있어 창고를 방불케 한다. 허름한 시골 동네 식당 수준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감수된다. 음식이 맛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식당에서 주로 먹는 것은 ‘회무침비빔밥’이다. 회로 썰어넣는 생선은 밴댕이나 전어, 병어 또는 준치로 그때그때 다르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계절에 따라 싸고 많이 나는 생선으로 회무침을 하는 듯이 보인다. 어떨 때는 밴댕이에 전어가 섞여 있기도 하고 병어가 들어 있기도 하다. 회는 얇게 저미고 양배추, 상추, 오이, 당근, 깻잎 따위를 채썰기 해 새콤 매콤 무쳐 내는데, 그 맛이 여느 회무침처럼 단지 새콤 매콤한 것만이 아니라 약간 고소한 향내가 어우러져 입 안을 즐겁게 한다.
고소한 향내의 정체는 회무침 조금 한다는 식당들이 흔히 쓰는 콩가루가 아니라 들깻가루다. 간혹 들깻가루를 쓰는 식당에서 큰 실수를 하는데, 오래 묵어 기름 절은 냄새가 나는 들깻가루를 써서 음식 맛을 다 버려놓는 것이다. 강화식당에서는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아직 없었다.
회무침을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고슬고슬한 밥에 쓱쓱 비벼 먹으면 예술이다. 강화 교동에서 지은 추청쌀(아키바레)만 쓴다는데 밥알이 하나하나 살아 있고 고들고들하면서 찰져 회무침과 비벼도 밥이 떡지지 않는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검정쌀의 달착지근한 향내가 회무침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듯하므로 그냥 흰밥을 내놓는 게 어떨까 싶다.
여기까지만 해도 나는 100점을 줄 수가 있는데 한 가지 기찬 서비스 음식이 따라 나온다. 바로 돌게장이다. 꽃게 비슷하면서 껍데기가 단단하고 조그만 강화도 돌게를 간장에 푹 삭혀 내놓는다. 보통의 게장 전문점에서는 간장을 연하게 하고 오래 삭히지 않아 게의 싱싱한 맛을 강조하지만 강화식당의 게장은 살이 흘러내릴 정도로 푹 삭혀 발효음식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게다가 게장 그릇이 비면 끝없이 리필해주는 여주인의 넉넉한 인심도 좋고.
공항에서 냅다 달려 강화식당에 앉아 느끼한 러시아 음식 기운을 다 밀어낸 뒤에야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며칠 후 사진 건질 양으로 다시 가서 회무침을 또 먹었는데 여전히 맛있었다. ‘밴댕이 문화사’를 줄줄 읊어대던 남자 주인이 최근에는 보이지 않아 좀 섭섭하기는 했지만
연재 첫 회에 “음식 맛있게 하는 식당이 왜 그리 없는지”라고 투정을 했더니 주변에서 말들이 많다. “자네 입이 너무 짧은 탓”이라며 좀 너그럽게 음식 대할 것을 주문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용케 맛없는 식당만 찾아다니는 모양”이라며 맛있다고 소문난 식당 명단을 줄줄 외는 이도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내는 식당이야 왜 없겠는가. 나도 잘 안다. 일본에서도 좀처럼 맛볼 수 없는 최고의 일식을 내는 식당이 이 땅에 있으며, 황토밭에 잔설 남아 있듯 하얀 지방질이 붉은 살코기에 켜켜이 박혀 씹는 건지 녹는 건지 알 길 없는 최상의 쇠고기도 있다. 그러나 가격이 문제다. 한 접시에 20만원이 넘는 회나 갈비 한 대에 6만원 하는 쇠고기를 두고 ‘맛있다’고 추천하면 나는 더 큰 야단을 들을 것이다. 이런 ‘최고급’(가격에서!) 식당들은 맛없으면 욕해야 할 집들이지 맛있다고 추천할 집들이 아닌 것이다.
사실 음식 맛은 재료에서 판가름이 난다. 좋은 재료로 맛 내는 일은 쉽지만 나쁜 재료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절반의 성공’만 이룰 뿐이다. 그러면 “좋은 재료를 골라 음식을 내면 될 것 아니냐”라고 말하지만 이 재료의 가격 차이란 게 만만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가령 광어 한 마리만 놓고 보더라도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식당에 도매로 팔리는 광어가 그 질에 따라 다섯 배는 차이가 난다.
그러니까 음식점 추천을 하려면 이런 것도 따져야 하는 것이다. ‘음, 한 접시에 20만원짜리 회인데 광어는 최상급이 아냐. 주방장이 칼질을 잘하든 못하든 이 집은 아니야. 돈이 얼만데…. 음, 한 접시에 2만원짜리 광어회인데 적어도 3kg는 됨직한 광어를 썼군. 질이 그다지 좋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주인이 물건 사오는 노하우가 있는 것 같네. 그래, 일단 점수 줬다’ 이런 식으로.
내가 찾는 식당들은 극히 서민적인 곳들이다. 비싼 음식일수록 맛에서 실패할 가능성이 적은 것은 사실이나 그 돈 주고 갈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싶은 것이다. 재벌도 갈 수 있고 재벌집 운전기사도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식당, 그중에 맛있는 식당, 이런 식당들이 너무 없어 투정을 부리는 것이다.
요즘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집사람과 밤마실이 잦다. 일산이 ‘외식 천국’이라고 하지만 둘이서 가볍게 술 한잔 하면서 요기할 수 있는 곳은 드물다. 외식 트렌드의 경연장이라는 라페스타를 헤매다 참 괜찮은 집을 발견했다. 일본라면 전문점이라 해서 라면만 파나 했더니 자잘한 안줏거리도 있고 마실 만한 술도 있다. 가격도 만족스럽다. 비싸야 1만원 내외다.
사진은 6000원짜리 고등어초회다. 주인장에게서 추천받은 메뉴다. 짜릿한 게 숙성 솜씨가 있다. 잘 차린 일식집에서만 먹다 이런 조그만 선술집에서 대하니 더 맛깔스러웠다. 이어 1만원짜리 꼬치(오뎅)를 먹었는데 약간 육중한 듯하면서 달지 않은 국물에 내용물도 실했다. ‘이거, 요리 솜씨가 장난 아닌데’ 하면서 배가 이미 불렀지만 시험 삼아 크로켓(5000원이었나 6000원이었나)을 시켰는데 이도 합격점이다. 돼지고기 누린내를 잡았고, 튀김옷에 개운하고 달콤한 채소 향이 확 풍긴다.
두둑해진 배를 두드리며 주인과 잠시 방담을 나누었는데 라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방송에도 몇 차례 나가 라면 요리 솜씨를 뽐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주방 위에 방송 출연 사진을 걸어놓았다. ‘에이, 이 집도 언론 플레이 하는 곳인가’ 하고 마이너스 점수 주고 나오는데 문밖에는 방송 출연했다는 어떤 표시도 없다. 이런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나면 가슴까지 따뜻해진다. 다음엔 라면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상호가 ‘담뽀뽀’인데 한글보다 일본어가 커서 먼저 눈에 들어온다. 라페스타 공영 제4주차장 바로 곁에 있다. 전화 031-903-0757. 오후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영업한다. 담뽀뽀는 일본어로 민들레라는 뜻이다.
최근에 담배를 끊었다. 바깥으로는 맛 칼럼니스트로서 좀더 민감한 미각을 지녀야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쇼’이기도 하고, 안으로는 아내와 아이들의 강력한 제재를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데 담배를 끊고 난 뒤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주머니에 은단, 자동차 앞좌석에 껌·사탕 등이 늘 비치되어 있다. 이런 대체품 없이 담배 끊은 양반들을 보면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온다. 10분이 멀다 하고 담배를 물고, 쥐고 하던 손과 입이 하는 일 없이 잘 버텨준다는 게 신통하기까지 하다.
요즘의 내 밥벌이 공간은 종로구 누하동이다. 근처에 사직공원이 있고, 옆 동네가 청와대와 연결되는 효자동이다. 서울 한복판이란 게 실감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단층 민가가 좁다란 골목길 양편으로 닥지닥지 붙어 있고 조그만 재래시장도 있어 점심 먹고 산책 삼아 동네 한 바퀴 돌아보는 맛이 남다르다. 사무실을 빠져나와 옥인시장 골목을 통과해 효자동 길 따라 경복궁역으로 가서는 우회전해 사직공원 쪽으로 해서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 내 산책 코스다.
담배를 끊어서 그런지, 아니면 따스한 봄 햇살 때문인지 예전 산책 때에는 보이지 않던 온갖 군것질거리들이 눈에 들어와 나를 괴롭힌다. 방금 밥을 먹었는데도 침을 삼키면서 주전부리를 힐끔거리는 내가 스스로 민망스럽기까지 한데, 그 덕에 수없이 그 앞을 지나치면서도 몰라보았던 조그만 과자가게를 발견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30년 넘는 내공 … 내 입맛에 꼭 맞아
경복궁역에서 사직공원 쪽으로 가는 길에 육교가 하나 있는데 그 바로 곁에 센베이 가게가 있다(센베이는 일본말이고 우리말로는 전병인데, 전병이라고 하면 맛이 안 난다. ‘센베이’에는 민족감정 이전에 어린 시절의 애틋한 향수가 묻어 있는 까닭이다). 웬만한 주의력이 아니고서는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곳이다. 상호는 ‘내자땅콩’이라 붙어 있고 유리창 너머로 센베이가 쌓여 있는데 전혀 과자가게 분위기가 아니다. 게다가 부업으로 하는 듯한 부동산 간판까지 붙어 있으니.
사무실에서 담배 대체품으로 먹어도 괜찮겠다 싶어 가게 문을 밀고 들어서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좁은 가게 안쪽으로 꽤 낡아 보이는 센베이 제조기가 보인다. 그 앞에 그 기계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할머니가 앉아 계시고.
“어? 센베이를 직접 만드세요?”
“모나카, 하스 같은 것은 받고 센베이하고 강정은 다 만들지요.”
“할머니 혼자서요?”
“센베이 만드는 게 뭐 어렵나? 30년도 넘게 만들었는데….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34년 됐네.”
센베이에 매혹돼 어머니 치맛자락 붙잡고 칭얼거리던 그때쯤부터 있던 가게라. 맛도 그럴까? 이것저것 든 센베이 한 봉지를 5000원 주고 샀다. 내 입만을 믿을 게 아니다 싶어 사무실 직원들에게 나눠주었다. 맛이 좋단다. 여느 센베이와 달리 반죽이 잘 부풀어올라 바삭하고 씹은 뒤 입에서 부드럽게 녹는다. 특히 그다지 달지 않아 내 입맛에 꼭 맞다. 센베이에 붙은 땅콩은 기름에 전 냄새 없이 고소하다. 강정도 같이 사왔는데, 사무실 직원도 나도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이 원고를 쓰기 위해 센베이를 다시 사러 갔는데 명함을 준다. 주소가 내자동이고, 경복궁역 1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고 적혀 있다. 전화는 02-730-7239. 내 몸에 니코틴이 완전히 제거되기 전까지 당분간 이 집 센베이가 내 책상 위에 놓여 있을 듯싶다
도시에 살다 보니 계절 감각이 무뎌졌다. 해마다 반복되는 일임에도 제때에 이르지 않은 것을 찾다 몇 주 지나면 되겠지 하고는 깜빡 때를 놓쳐 후회하기 일쑤인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정확하게 때를 맞혔다. ‘주간동아’ 독자들은 복이 있다.
개나리·진달래가 꽃봉오리를 매달 즈음, 그러니까 3월이면 나는 점봉산 자락에 사는 아무나한테 전화를 한다. 봄나물에 관한 칼럼을 쓸 양으로. “산나물 나왔어요?” “아니, 아직 이르지요. 5월 초는 돼야 나옵니다.” ‘아, 그렇구나’ 하고 그즈음 다시 전화해야지 하다가 산나물이 다 억세졌을 때에야 ‘아, 산나물 칼럼 안 썼다’ 하고 후회한 게 한두 해가 아니다. 올해는 운 좋게 전화한 날이 4월25일자 발행 ‘주간동아’ 마감일이다. 독자들이 봄나물 여행계획을 짜기에 딱 좋은 시기에 칼럼이 나가는 것이다.
높은 산이 있는 지역에서는 다들 제 땅의 산나물이 최고라고 주장한다. 이 산, 저 산 산나물을 먹어보면 사실 다 맛있다. 그러나 “최고!” 하고 엄지손가락을 세워줄 만큼은 아니다. 내 입맛에 따른 최고의 산나물을 꼽자면 점봉산의 것이다. 웃자란 듯 큼직해도 아삭 하고 씹힌 뒤 입 안에서 사르르 녹으면서 강렬한 향을 뿜어내는 면에서는 점봉산 산나물을 따를 것이 없다.
점봉산 산나물이 유독 맛있는 데는 까닭이 있다. 점봉산은 설악산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산이라 흔히 내설악의 하나로 여기지만 설악산과는 산세가 완연히 다르다. 설악산은 삐죽삐죽 온통 돌로 채워져 있지만, 점봉산은 여자 젖무덤 같은 우아한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완만한 능선마다 커다란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는데 이 나무들 아래가 산나물이 자라기에 딱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적당히 습한 땅에서 적당히 볕을 받아 자라는 산나물이라 크게 자라도 억세지 않고 향이 깊은 것이다.
몇 해 전 점봉산 산나물을 취재하기 위해 산나물꾼들과 산막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다. 챗목이라는 구역이었는데 ‘채(나물·菜)’가 많이 나는 ‘목(좁은 지역)’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온갖 산나물을 먹으면서 나물 맛을 익혔는 바, 해마다 봄이 되면 그때 그 맛이 기억나 입 안에 침이 고이는 것이 있으니 바로 곰취다. 첫 맛은 쌉싸래하고 중간에는 특유의 진한 향이 진동을 하며 마지막에는 깔끔하게 떨어지는 맛. 그래서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
특유의 진한 향 일품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아
점봉산에 갈 수 없는 처지라면 전화로 주문해 먹을 수도 있으나 산나물이란 게 따서 한나절만 지나도 향이 많이 달아나 그 참맛을 즐기려면 현장에 가는 것이 가장 좋다. 챗목에서 하룻밤 같이 묵었던 산나물꾼은 산나물 전문점으로 돈 벌어 외지로 나가 더 큰 식당을 하고 있는데, 요즘은 점봉산 산나물을 제대로 뜯는지 알 길이 없어 추천할 만하지 모르겠다. 점봉산은 유전자보호림으로 지정돼 있어 산림청의 입산허가증이 없이는 산나물을 뜯으러 산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점봉산 자락에 있는 동네가 인제군 기린면 진동1리인데 이 마을의 30여 가구 농민들은 입산허가를 받아 산나물을 뜯는다.
오랜만에 진동1리에 전화를 했더니 지난해부터 산나물축제도 한다면서 초대를 한다. “작년에는 자매결연한 도시 지역 몇몇 분들만 초대를 했는데 올해는 규모를 늘려서 산나물 뜯기 체험, 요리대회 같은 행사도 열 겁니다. 산나물도 맛있지만 진동리 계곡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2시간 정도 트레킹도 하고 물고기 잡기도 할 예정이니 봄나들이 삼아 꼭 한번 오세요.”
진동1리 산나물축제 추진단장인 최성규 씨의 초대 말이다. 축제일은 5월13~14일이다. 최 단장에게 전화하면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으며, 산나물 택배도 가능하다. 016-761-5870.
솔직히 난 삼겹살을 좋아하지 않는다. 먹는다고 해도 두어 점이 고작이다. 5할이 기름인 삼겹살이 불판에서 구워질 때 나는 기름 냄새에 난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 먹고 나면 속도 뻑뻑하니 버겁다. 기름 많은 음식을 즐기지 않는 식성 탓도 있다.
내가 삼겹살을 처음 먹은 것은 20여 년 전이다. 서울 생활을 한 지 5년쯤 됐을 때였는데 고향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을 앞에 두고 참 신기해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기름 많은 돼지고기를 얼려 얇게 썬 뒤 불판에 굽는다는 조리법 자체가 왠지 어색했다. 된장 푼 물에 삶으면 그만인 부위인데 싶었던 것이다. 그때 삼겹살은 대중적인 음식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숱하게 삼겹살을 먹었다. 회식한다고 하면 으레 삼겹살을 먹는 것으로 여겼을 정도다. 1990년대 중반에는 대패삼겹살이 크게 유행했는데 종이짝 같은 돼지고기가 기름에 튀겨지듯이 구워져 내 입맛에는 영 맞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는 갖가지 삼겹살이 등장했다. 솥뚜껑을 비롯해 자갈, 맥반석, 옥돌 등 숱한 불판이 선보였고, 삼겹살도 포도주, 솔잎 진액, 된장으로 숙성하는 방식이 유행했다. 개중 내 입에 맞는 삼겹살이 나타났는데 비스듬히 놓인 돌판에 삼겹살을 깔고 그 위에는 버섯, 아래에는 양파·감자·두부, 그 더 아래에는 김치를 놓고 굽는 방식의 삼겹살이다. 삼겹살이 질릴 때쯤이면 버섯, 감자, 두부, 김치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일이다. 그렇다고 이를 찾아가며 즐기지는 않는다. 어쨌든 삼겹살은 삼겹살이지 않은가.
돌판 삼겹살이 외식 시장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90년 후반 경기 고양시 화정동 뒷골목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한때 ‘화정 똥돼지’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요즘은 삼겹살 음식점 중 절반 이상이 이런 방식으로 삼겹살을 내는 것으로 안다.
맛깔스러운 반찬 솜씨 … 공짜 멸치육수 국수 일품
나는 삼겹살을 좋아하지 않지만 우리 집 식구들은 좋아한다. 그것도 엄청! 그래서 일주일이 멀다 하고 먹으러 갈 때도 있다. 나로서는 고역이지만 식구들이 다들 맛있어하는데 어쩌겠는가. 요즘 세상에 가족 외식 메뉴를 결정할 수 있는 가장이 어디 있기나 한가?
삼겹살에 대해서는 나보다 한 수 위라는 자식놈들과 아내의 평가에 따르면, ‘108@돌삼겹’이 가장 낫단다. 간판의 108이란 돼지는 6개월짜리가 가장 맛있는데 이때 몸무게가 108kg 나가 그렇게 붙였단다. 내가 보기에도 이 집 삼겹살은 질이 한결같아 마음에 든다. 또 같이 나오는 반찬이 한솜씨 하는데 주방 찬모가 아니라 식당 주인 어머니의 솜씨라고 들었다. 사실 내가 이 집에서 만족스럽게 먹는 것은 삼겹살이 아니라 공짜로 나오는 국수다. 멸치육수로 국물을 내는데 아주 개운하다. 상품 멸치를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공짜 국수를 이 정도 신경 쓰는 집이라면 추천할 만하다. 그외 반찬도 예사로운 솜씨가 아니다.
내 식구들의 명예(?)를 걸고 이 집을 추천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한번 상에 오른 음식은 절대 다시 내지 않는다. 이를 어떻게 믿냐고? 내가 겪은 일화다.
상추를 너무 조금씩 줘 서빙 아주머니에게 짜증을 낸 적이 있다. “아주머니, 상추 좀 넉넉히 주면 안 돼요?” 남으면 씻어서 다시 내면 그만이지 싶어 한 말이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아주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장님한테 혼나요. 손님들 먹을 만큼만 내라고 하셨거든요.” “….” “저희는 한번 손님상에 오른 음식은 무조건 버려요. 물론 상추, 깻잎도요.” “그런 거야 씻어서 다시 내도 될 텐데….” “사장님이 절대 용납 안 하세요.” 이렇게까지 하는 삼겹살집을 나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일산 홀트아동복지회관 건너편 대로에 있다. 전화번호 031-911-1108.
요즘 막회가 유행이다. 막회를 즐기는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네마다 한두 곳씩 막횟집이 있는 것 같은데, 예전처럼 막회 먹으러 종로로 마포로 일부러 나가지 않아도 돼서 좋다. 막회는 어느 집이나 맛 내는 솜씨가 비슷해 눈에 띄는 대로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먹어도 크게 실망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막회에 관련된 글들(기사나 인터넷에 올라 있는 음식평 등)을 보니 몇 가지 오해가 있는 듯하다. 막횟집들이 너나없이 영덕, 포항, 울진, 강구 등 경북의 해안 지명을 쓰고 있어 막회가 경북 향토음식으로 잘못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애초 막회는 한반도 모든 바닷가에서 흔히 먹던 음식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에 보면 조선시대 수병들이 생선을 된장에 찍어 날로 먹는 장면이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그랬을 것이다. 된장이야 삼국시대부터 있어온 음식이고 초고추장은 당시에 없었을 테니 말이다(고추는 임진왜란 이후 재배됐다).
내 고향 마산에서는 생선회용 막장을 따로 담갔는데, 된장에 고춧가루가 조금 들어간 것이었다. 이 막장은 생선회와 매운탕에만 쓰고 다른 음식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뭉툭뭉툭 썬 회를 막장에 찍어 먹거나 잘게 썬 채소 위에 회를 놓고 막장으로 척척 치대 먹었다. 이른바 막회다. 여기에다 물을 부으면 물회가 되며, 밥이나 국수를 말아 먹기도 했다.
예전에는 다들 생선회를 이렇게 먹었다. 우리는 가끔 잊는다. 한반도 역사상 온 민족이 굶지 않게 된 것이 3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논밭이 없는 어촌은 더 가난했다. 선주가 아니고서는 끼니 때우는 일도 버거웠다. 그러니 생선회를 먹어도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끼니로 먹었을 것이다. 그게 요즘의 막회다.
어촌에서 아무렇게나 먹던 회 … 우리 민족 미각의 결정판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도시에서 생선회는 귀한 음식이었다. 양식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횟감이 무척 비쌌고, 그 격에 맞게 고급 일식집에서나 회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다 90년대 들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광어와 우럭 양식이 일반화되고 물고기를 살려 보관하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대중적인 횟집들이 곳곳에 생겨났다. 그런데 음식 내는 스타일은 일본식을 따랐다. 그래야 고급스러워 보인다고 식당 주인들은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온전히 일본식을 따른 것도 아니었다. 생선을 너부데데하게 썰어 무채 위에 깔고 고추냉이(와사비)와 간장을 함께 내놓는 것은 같았다. 그 옆에는 막장과 초고추장을 올려 우리식 맛을 볼 수 있게도 했다. 또 상추, 깻잎, 풋고추, 마늘을 내놓아 일식에 우리의 쌈 방식을 가미했다.
2000년대 들어 우리는 ‘미친 듯이’ 회를 먹고 있다. 대형 횟집에 앉아 두툼한 광어와 우럭을 쌈 싸먹는 가족의 모습은 일상화됐다. 1980년대 후반 붐이 일었던 ‘고기 뷔페’를 연상시킨다.
최근 막회가 유행하는 것을 보면 이제 회에 대한 한풀이가 대충 끝나감을 느낀다. 회를 물리도록 먹게 되면서 더 이상 고급 음식으로 여기지 않게 되고, 따라서 어촌에서 아무렇게나 먹는 회에 대해서도 ‘한번 먹어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간혹 이런 말을 듣는다. 생선의 그 여린 생살 맛을 제대로 보려면 두툼하게 썰어서 고추냉이를 곁들여 간장에 찍어 먹는 일본식 회만한 것이 없다고. 맞는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미각은 낱낱의 맛을 즐기려는 일본인들의 미각과 큰 차이가 있다. 비빔밥이 좋은 예인데, 나물 하나하나를 간을 해 대접에 밥과 함께 썩썩 비벼 먹는 민족이다. 그러니까 입 안에서 온갖 맛이 요동을 치게 해 그 맛의 충돌을 즐기는 것이다. 막회를 비벼놓고 보면 가관이다. 양파, 돌미역, 미나리, 부추, 마늘, 풋고추에 초고추장이나 막장까지. 이렇게 강한 음식 재료들 속에서 언뜻언뜻 입 안을 치는 생선의 여린 생살 맛을 즐기는 우리 민족! 정말 뛰어난 미각을 지니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지난해 가을부터 종로구 누하동에 사무실을 마련해 일하고 있다. 경복궁역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곳인데, 서울 한복판에 이런 동네가 있나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예스럽다.
직장인에게 일터의 위치는 집 위치만큼 중요하다. 하루 중 최소 8시간은 지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동네에 사무실을 내기로 한 데에는 지척에 있는 조그만 재래시장이 한몫했다. 평소 재래시장 구경하는 것을 즐기는 나에게 너무 좋은 사무실 입지 조건이었던 것이다.
효자동 쪽 큰길에서 누하동 방향으로 길게 난 골목 시장인데, 이름은 통인시장이다. 가게는 100여 개 되는 것 같다. 조선시대에도 있었던 장이 아니었나 싶을 만큼 낡고 허름한 가게들이 올망졸망 붙어 있어 골목을 걷다 보면 지방 소도시의 오일장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데 그 정겹던 통인시장이 올봄에 확 바뀌었다. ‘아케이드’라는 천장을 달았고 간판도 싹 바꿨다. 종로구청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국비, 시비, 구비를 보태서 재래시장을 개선하는 사업의 하나라고 밝히고 있다. 내 눈에는 이게 ‘개선’인가 싶다.
기름떡볶이·소머리국밥 등 세월 건너 입맛에 착착
지방에 갈 일이 있으면 나는 꼭 재래시장을 둘러본다. 그 지방의 음식이나 사람들의 기호를 가장 짧은 시간에 확인할 수 있는 장소로 이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재래시장들이 통인시장처럼 ‘개선’ 사업을 하는 통에 둘러보는 재미를 빼앗기고 있다. 개선 사업을 한 재래시장은 전국 어디를 가나 똑같이 생겼다. 똑같은 아케이드에 똑같은 크기와 색상의 간판들! 사진에서 ‘통인시장’이라는 간판만 가리면 전국의 ‘개선’ 재래시장은 겉모양이 다 같다. 이런 몰상식한 일을 누가 기획하고 진행하는지 한심할 따름이다. 상인과 소비자 모두 편리하게 하기 위해 하는 사업인 줄은 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시장마다의 개성은 살리면서 개선할 생각은 왜 안 하는지.
통인시장 음식 이야기를 하려다 엉뚱한 세설만 늘어놓았다. 각설하고.
통인시장에는 음식점이 예닐곱 있다. 백반에 국수, 순댓국, 소머리국밥, 감자탕, 김밥 등을 판다. 반년 동안 이 재래시장 골목을 왔다갔다하면서 이 음식 저 음식을 맛보았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통인시장 음식 중 추천할 만한 것을 꼽자면 가장 먼저 떡볶이다. 고춧가루 양념을 한 조그만 가래떡을 프라이팬에 달달 볶아서 내놓는데, 이런 떡볶이는 통인시장에서 처음 봤다. 이사 온 지 며칠 안 돼 이 떡볶이를 사다 아이들에게 먹여봤더니 반응이 별로다. 대부분 “느끼하다”는 평가다. 내 입에도 안 맞는데 이상하게 떡볶이 가게는 늘 문전성시다. 주요 고객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성이다. 가게 할머니는 50년 전부터 이 떡볶이를 팔았단다. 통인시장에서 가장 전통과 개성 있는 음식이 아닌가 싶다.
두 번째는 ‘옛날 통인 감자탕’. 그런데 난 이 집에서 감자탕은 안 먹는다. 소머리국밥과 수육이 보통 솜씨를 넘어서 이 음식들에 푹 빠져 지낸다. 개운한 국물에 야들야들 잘 삶긴 머릿고기가 술술 넘어간다. 이를 냄비에 양껏 담아 술안주로도 내는데 소주 안주로는 이만한 게 없다. 수육도 한없이 부드럽다. 잡냄새 없는 깔끔한 고기와 고소한 기름 냄새가 입 안에 가득 퍼지며 스르르 녹아 없어진다. 20년 넘게 장사를 했다는데, 손님은 거의가 동네 어른들이다.
‘옛날 통인 감자탕’은 이제 내 단골집이 돼간다. 점심이건 저녁이건, 편하게 대해도 되는 손님이 오면 꼭 이 집으로 모신다. 지금까지 이 집을 거쳐간 10여 명의 내 손님 중 맛없다고 불평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시장 골목 중간쯤에서 옆으로 난 골목 안에 있다.
옛 멋은 잃었지만 서울 한복판에 있는 재래시장을 구경하고 소머리국밥이나 수육에 약주 한잔 걸친 뒤 통인시장 명물 떡볶이 한 봉지 사들고 가는 ‘밤마실’을 추천하고 싶다
흔히들 음식 맛은 정성이라고 한다. 젖 뗀 뒤 40여 년간 음식을 먹어본 경험에 의하면, 지극히 맞는 말이다. 어린 시절 받았던 생일상, 장모님이 처음 차려준 밥상 등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내 시각과 미각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정성 들인 음식을 늘 받기만 한 나는 정작 남에게는 그렇게 해준 적이 없다. 가족을 위해 가끔 요리를 하지만 맛을 내기 위해 기교는 부릴망정 정성을 담았다고는 할 수가 없었다. 음식에 정성을 들인다는 말의 참뜻을 몸으로 느낀 것은 지난해 가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 맞는 설 차례상에서였다. 셋째인 우리 집은 전을 맡았는데 시장에서 재료를 사는 것부터 시작해 달걀 입힌 옷이 두꺼울까 얇을까, 너무 지져질까 설익을까, 밤새 쪼그리고 앉은 다리에 쥐가 나고 허리가 끊어질 듯해도 음식에서 한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세상일이라는 게 참 요상한 것이, 살아생전에는 외식 한번 함께 하지 않다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야 음식 냄새나 맡으실까 싶은데도 이렇게 지극 정성을 다하다니…. 하여간 요즘 내 생각에는 정성 들이는 음식 가운데 제일은 제사음식이다.
일곱 가지 나물 위에 탕국 얹어 ‘쓱쓱’ 기막힌 맛
어버이날 즈음해서 고향 선친묘소를 다녀왔다. 묘소 앞 푸른 바다는 여전히 잔잔했고, 어머니는 또 한번 목놓아 우셨다.
돌아오는 길에 경남 진주를 경유한다. 지나는 길이니 진주 음식 한번 먹자고 시내로 들어섰다. 진주 관광안내 팸플릿에 향토음식으로 진주비빔밥과 진주냉면, 진주교방음식, 진주헛제삿밥이 소개돼 있었다. 진주비빔밥과 냉면, 교방음식은 이미 맛을 봤던 터라 헛제삿밥집으로 향했다. 헛제삿밥은 안동의 서너 집이 향토음식으로 낸다. 이 음식은 6·25전쟁 이후 가세가 기운 종가의 며느리들이 집에서 해먹던 제사음식을 광주리에 이고 “제삿밥 사이소” 하며 행상을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안동이고 진주고 헛제삿밥의 유래에 대해 “기름진 음식을 먹고 싶어진 조선시대 양반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꾸며 음식을 해먹었다”는 ‘설’이 마치 정설인 양 여기저기 소개되고 있는데, 이건 우스갯소리일 뿐이다. 조선시대 양반이 지켜야 할 덕목 중 하나가 염치인데, 제 배 불리자고 돌아가신 조상 팔아먹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주에서 헛제삿밥을 파는 집은 딱 한 곳. 3대째 하고 있다는 전통을 내세우는데 중간에 잠시 다른 음식장사를 하다가 자리를 옮겨 ‘다시’ 헛제삿밥을 내기 시작한 지는 6년이 됐다고 한다. 제사음식은 자세히 보면 집집마다 조금씩 다르고 크게 보면 모두 비슷비슷하다. 제사음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었는지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음식도 내놓고 있다.
음식에 대한 정성이야 제 조상 제사상 차리듯 했겠냐만은 깔끔한 전이며 잡내 없는 생선찜이 먹을 만하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나물비빔밥. 일곱 가지 나물에 밥을 올리고 탕국을 넣어 비볐다. 단, 여기에 고추장을 넣으면 맛이 없어진다. 간장이 제격이다. 그런데 이 집에는 간장조차 넣지 않는다. 쓱쓱 비벼 맛을 보니 간장을 넣지 않아도 간이 맞다. 나물과 탕국의 간이 강하기 때문이다.
남의 집 제사음식을 앞에 놓고 우리 집 제사음식과 비교해 맛이 어떻다는 둥 떠들어가며 먹다가 문득 한 가지 허전한 구석을 발견했다. 제사음식이면 반드시 나야 하는 냄새, 그게 나지 않았다. 향내가 없었다. 그래서 ‘헛’제삿밥인가? 예전에 먹어본 바에 의하면, 안동헛제삿밥에서도 향내를 맡을 수가 없었다. 이 글을 쓰면서 진주헛제삿밥 관련 글들을 보니 안동은 헛제삿밥을 향토음식으로 적극 키워 ‘재미’를 보고 있는데, 진주는 그렇지 못하다는 불평들이 눈에 띈다. 안동과 차별화하고 진주 향토음식으로 키우는 전략으로 향내를 이용해보는 것은 어떨까? 진주 인근에 예부터 전통 향 제조업체들이 있었다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그에 앞서 제사음식 아닌 것은 상에서 과감히 없애는 일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남의 제사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꼴인가?
지난주, 제사음식에 관한 글을 쓰고 난 뒤 주위 사람들에게 “댁네 제사음식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니 다들 할 말들이 많다. 전 한 가지만 두고도 배추전이 있어야 제사음식이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음식은 듣도 보도 못했다는 이가 있고, 제상에 닭을 올리는 집이 있는가 하면 생선이라고는 조기만 달랑 올리는 집도 있다. 이를 크게 분류하면 지역색이 나오고, 잘게 나누면 집집이 다 다르다.
지난주에 소개한 진주헛제삿밥 상차림에서 안동 상차림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을 찾자면 상어고기가 있느냐 여부다. 안동에서는 상어고기를 찌거나 부침을 해서 제상에 올리는 데 비해 진주에서는 올리지 않는다. 내 고향 마산에서도 상어고기를 제상에 올리는 집안은 드물다.
상어고기를 제상에 올리는 지역은 안동, 영주, 영천, 봉화, 청송, 의성 등 경북 내륙지방이다. 이 지역에서는 상어고기를 돔배기, 돔배, 돔배고기 등으로 부르며 제상에 반드시 올려야 하는 음식으로 여긴다. 또 귀한 손님이 왔을 때도 이 음식을 낸다.
경북 내륙지방이 원조 … 강렬한 향에 군침 절로
10여 년 전 경북 내륙지방의 한 오일장에서 상어고기를 처음 접하고 ‘한반도에 이런 음식도 있다니’ 하고 퍽 놀랐다. 상어고기 한 점을 젓가락으로 발라 입에 넣자 암모니아 냄새가 코끝을 때렸다. 그전까지만 해도 생선에서 암모니아 냄새가 나는 것은 홍어밖에 없는 줄 알았다. 홍어와 달리 살코기가 퍽퍽해 첫 입에는 결코 맛있다고 느낄 수 없었다.
경북 내륙지방에서 상어고기가 주요 제사음식으로 쓰이게 된 것은열악한 물류 사정 때문이다. 경북 해안지방에서 내륙까지 해산물을 실어 나르려면 이틀은 꼬박 걸렸다. 그래서 제상에 올릴 수 있는 어물은 말리거나 소금에 절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개중에 상어는 쉬 상하지 않아 해안과 내륙을 오가는 상인들에게 꽤 인기 있는 품목이었을 것이다. 상어가 쉽게 상하지 않는 이유는, 상어는 배설물을 피부로 배출하는데 오줌에 들어 있는 요소가 암모니아 발효를 일으켜 상하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이는 홍어가 발효되는 것과 똑같다.
이후 경북 내륙지방을 여행하면서 상어고기를 여러 차례 먹게 되었는데, 암모니아 향이 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요즘에야 두어 시간이면 닿는 거리이니 상어가 발효될 시간이 없는 것이다. 처음 먹은 상어고기에 대한 인상이 강했던 때문인지 암모니아 냄새 없는 상어고기는 별다른 매력이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이든, 평소에 보이지 않던 것도 관심이 생기면 눈에 띄게 마련이다. 안동이나 진주의 헛제삿밥이 아니더라도 각 지역의 제사음식이 음식점 메뉴로 올려지는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싶어 그런 사례가 또 없나 살피다가 우연히 서울 한복판에서 ‘귀한’ 상어고기를 접하게 되었다.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뒤 ‘김씨도마’(02-738-9288)라는 식당이다.
이름 뒤에 ‘~도마’라고 되어 있어 일본식 횟집인 줄 알았는데 경북 지역의 토속 음식을 내는 식당이다. 곰국수, 메밀묵, 문어, 수육 따위가 주요 메뉴인데 그 한 귀퉁이에 ‘돔배기’가 떡하니 적혀 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상어 살코기와 껍질, 그리고 껍질로 만든 묵 세 가지를 내왔다. 놋그릇에 담아 내놓은 모양이 영남 양반집 손님상처럼 보였다. 찍어 먹으라고 조선간장도 함께 냈다. 장소가 서울인지라 ‘본토’인 경북 내륙지방의 ‘정통’ 상어고기 향을 살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첫 입에 나는 녹다운이 되고 말았다. 살코기에서 푹 삭힌 홍어찜만큼 강렬한 향이 뿜어져나온 것이다. 껍질은 향이 적었으나 특유의 씁쓸한 맛이 침샘을 자극했다. 껍질묵은 버터 향이 살짝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이 묘한 느낌을 주었다.
이 음식에는 막걸리가 딱 어울릴 것 같은데, 하필 막걸리가 떨어져 22도짜리 안동소주와 함께 먹었다. 안동소주는 항상 마시고 난 뒤 단내가 돌아 부드럽게 넘기지 못했는데 상어고기의 향이 워낙 강해 그냥저냥 먹을 만했다. 막걸리에 상어고기 한 점 하러 곧 다시 찾아야 할 것 같다
10여 년 전 전원생활자를 위한 월간지를 만들고 있을 때였다. 원양어선을 가지고 있는 몇몇 업체들이 참치회를 본격적으로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가격이 약간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고기에 물린 직장인들 사이에서 참치회는 꽤 인기가 있었다. 나도 회식과 필자 접대 등의 핑계로 일주일이 멀다 하고 참치회를 먹곤 했다.
처음엔 참치회가 다 같은 줄 알았는데 한 접시에 놓인 회도 색깔이며 맛이 참 다양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주방장을 불러 이것저것 물었다. 그런데 주방장은 “이건 뱃살이고, 저건 등살, 요건 꼬릿살...” 하면 될 것을 “이건 주도로, 저건 가마도로, 요건 아카미...”라고 한다. 일본에서 건너온 음식문화이니 이름을 그들 식으로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지만, 당최 몇 번을 들어도 자꾸 이름을 잊는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누가 잡지쟁이 아니랄까봐, ‘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참치 부위 이름 외우기가 힘들 것이다. 이걸 기사로 내면 독자들이 좋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비자가 모르면 속을 수 있는 생선 많아
다음 날 부랴부랴 참치 전문가를 찾으니, 참치잡이 배를 탄 적도 있고 수협 기관지 등을 통해 수산물 전문 글쟁이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 국내에 유통되는 참치 종류와 각 참치의 부위별 이름, 그리고 그 맛의 차이 등에 대한 취재를 의뢰했다. 원고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 사람이 쓴 기사를 품에 넣고 다니며 익힌 뒤, ‘초자’들 앞에 놓고 전문가로 행세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그때부터 난 맛 칼럼니스트로서의 ‘자질’ 같은 걸 가지고 있었다. 음식 앞에 놓고 괜히 아는 체하는 못된 습성의 인간!)
원고는 참치잡이 배 선원 출신답게 충실했다. 온갖 종류의 참치 사진과 그 특징, 그리고 부위별 이름과 맛 등에 대해 취재를 해왔는데 8페이지는 족히 될 분량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원고를 뒤적이며 이것저것 점검을 하는데....
-우리가 흔히 먹는 참치의 종류는 무엇인가요?
“90%는 황새치와 청새치, 돛새치 같은 것이고 다랑어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겁니다.”
-아니, 참치라고 하는 게 다랑어 아닌가요?
“원래 참치는 참다랑어만을 말하는 건데, 업체에서는 다랑어와 새치를 모두 참치라 하고,
다랑어에는 참다랑어·눈다랑어·황다랑어가 있으며….”
-아니, 그러니까 우리가 참치횟집에서 먹는 참치가 참치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엄밀히 말해서 참치가 아닙니다. 업체에서 그렇게 말하니 참치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그 기사는 게재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고 말았다. 이후 내가 스스로 참치회 먹으러 가는 일은 없었다. 참치회와 마주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경우에도 거의 먹지 않았다. 난 속고는 못 사는 성미다.
요즘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진짜 참치, 그러니까 참다랑어(일본말로는 혼마구로라고 함)를 가격이 좀 나가기는 하지만 먹을 수 있는 횟집이 많다. 소비자들이 참치에 대한 정보를 웬만큼 알고 있어 주방장이 속이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는 사람 앞에서는 속이지 못하는 것이다.
오래전 일이고 이제는 사정이 달라져서 참치를 예로 들었지, 요즘도 생선회는 소비자들이 속을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의도적으로 속이지는 않지만 소비자들이 잘 알지 못하면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다반사다.
횟집마다 다금바리 모양새가 제각각인 이유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하고, 수산물 도매시장에서는 양식 참복이 흔한데 왜 아직 참복 요리가 그렇게 비싼지 알지 못한다. 명색이 맛 칼럼니스트인데도 내가 먹는 것이 참돔인지 능성어인지 구별 못할 때도 있으니 원!
인터넷을 검색하다 생선회에 대한 ‘살아 있는 정보’를 공유하는 카페를 발견했다. 개설된 지 얼마 안 돼서 정보는 많지 않지만 카페지기가 아마추어답지 않은 견문을 지니고 있는 듯하며, 생선회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정보 교환하기에는 딱 좋아 보인다. 나도 최근 가입했다. http://cafe.naver.com/ssfish.cafe
얼마 전 한 라디오 방송작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신의 프로그램에 출연해 맛집을 소개해달라는 제의였다. 그런데 오전에 전화하고는 오후에 방송이란다. 게다가 1회인지 고정 출연인지도 아직 모르겠단다. 일단 해보고 나중에 결정하려는 듯한데….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승낙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단순히 음식과 식당 소개하는 거라면 하지 않겠다. 그런 정보는 여행전문가가 더 많이 안다. 나는 어느 지역 음식이 왜 맛있고 왜 유명해졌는지, 그리고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썰’을 푸는 사람이니 거기에 맞춰 방송하겠다”고 주문을 했다.
드디어 방송 시작. 진행자는 나와 인사를 나누고 곧장 맛 칼럼니스트라는 내 직함에 대한 질문을 했다. “맛 칼럼니스트니까 음식은 공짜로 드시겠네요?” 엉겁결에 나는 “아니,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라고 답했지만 순간 머리가 핑 돌았고, 이후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날 만큼 기분이 상했다.
맛 칼럼니스트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지가 10년 가까이 된다. 활동 초기만 하더라도 음식 전문 필자는 네댓 명밖에 없었다. 요즘은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필자까지 포함하면 수십 명에 달할 것이다. 그들 중 공짜로 음식 먹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아는 필자들 중에는 없다. 간혹 음식점에서 매체를 섭외해 홍보 기사를 써달라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나,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전에 내게도 이런 취재 의뢰가 간혹 있었다. 한두 번 하고는 아니다 싶어서 안 한 지 오래다).
묵과 시원한 국물의 환상적 배합 … 신김치·김으로 맛 첨가
음식 전문 필자들이 공짜로 밥을 먹으리라는 생각은 그 라디오 진행자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초면에 다짜고짜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니 말이다. 그럴 때면 그들에게 혹시 문화평론 등을 하는 이에게도 이런 질문을 하는지 되묻고 싶다. “영화, 공짜로 보십니까?” “출판사로부터 책을 공짜로 받겠네요”….
음식 전문 필자가 공짜로 밥을 먹을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화돼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매체에 실리는 음식점 관련 글 대부분이 칭찬 일색이라서가 아닌가 싶다. 식당 주인과 음식 전문 필자 간에 모종의 커넥션이 있지 않나 하는…. 그러나 모든 필자들이 그럴 것이라고 여기지는 마시라. 그날 라디오 진행자는 정치 칼럼도 곧잘 쓰는 모양인데, 지지 정당으로부터 뭔가 대접을 받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나는 믿는다.
사람은 하루 세 끼를 먹는다. 나는 아침 외 두 끼는 거의 외식을 한다. 대부분 사업상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다. 그들을 만날 때 나는 가능한 한 취재 대상이 될 만한 음식점을 고른다. 한 번 간 집은 아주 맛있는 집이 아닌 한 다시 가지 않는다. 그리고 늘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이거다’ 싶으면 일단 사진부터 찍는다. 주인, 종업원 가리지 않고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 취재를 하는데, 그들은 그저 나를 말 많은 손님 정도로 알지 자신들이 취재당하는 줄도 모른다. ‘주간동아’에 연재를 하려면 이런 식으로 일주일에 음식점 하나는 취재해둬야 한다. 사실 이런 작업은 상상 밖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일이다. 돈벌이도 안 되고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 일을 하는 이유는? ‘재미나서’다.
나이 탓인지 작은 일에도 삐쳐 푸념이 많다. 각설하고, 묵밥 맛있게 하는 음식점이나 소개하고자 한다.
묵밥은 묵을 채썰어 시원한 국물을 붓고 신김치, 김, 오이 따위를 올려 먹는 음식이다. 묵은 보통 메밀묵이나 도토리묵을 쓴다. 광화문 교보빌딩 뒤 ‘미진’의 메밀묵은 오랜 전통에도 어쩐지 ‘신세대 느낌’이 강하다. 입에서 힘없이 흩어지는 메밀묵 때문에 식감이 떨어진다는 사람도 있으나 메밀 함량이 높으면 원래 그렇게 힘이 없다.
정릉 아리랑고개 인근에 있는 ‘봉화묵집’은 ‘미진’보다 전통은 짧지만 오히려 전통스런 맛을 내는 집이다. 묵은 도토리묵을 쓴다. 매끌매끌한 묵의 식감은 좋으나 국물을 조금만 넣어 시원하게 들이켜는 맛은 없다. 두 집 다 내 입에는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서울에서 먹자면 그래도 이 두 집이 가장 낫다.
라디오 방송에서 겪은 일 때문에 푸념을 하다가 문득 묵밥이 먹고 싶어진 것은 왜일까. ‘묵사발’이 연상된 탓일까? 속 푸는 데 이만한 음식이 없기 때문일까?
나는 일산 신도시에 산다. 일산 사정에 밝지 않은 사람들은 일산 주민들을 퍽 부러워한다. 그럴듯한 식당들이 참 많다는 것이 이유다. 겉보기에는 확실히 그렇다. 상업지구에는 3~4층 통째로 식당들이 들어선 건물이 즐비하고, 주거지에는 잘 꾸며진 녹지 사이사이에 아담한 식당들이 줄줄이 있다. 인테리어는 또 어찌나 멋진지!
그러나 나는 일산 음식점들의 솜씨를 그다지 믿지 않는다. 일산에 수년간 살면서 맛있다고 소문난,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는 식당들을 두루 둘러보고 내린 결론이다. 솔직히 잘나가는 식당일수록 음식은 ‘엉망’이다. 등심에다 참기름과 조미료 뿌려 구워내는 식당이 일산 최고의 고깃집으로 여기저기 분점을 내고 있으며, 숙성되지 않아 생밀가루 냄새 풀풀 나는 칼국수를 30분 넘게 줄을 서 먹는 데가 일산이다.
일산 주민들의 미각 수준이 떨어져서 그런가? 꼭 그렇지는 않다. 식당이란 게 참 묘해서 한번 맛있다고 소문나면 그 식당 음식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맛있는 줄 알고 먹는 것이다. 다른 지역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으나 일산이 유독 심해 보이는 이유는 신도시이기 때문에 식당들이 아직 소비자들로부터 정확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솜씨보다는 인테리어 등 다른 요인으로 인한 뜬소문 등이 작용해 그렇지 않은가 싶다.
그래서 일산에 사는 나는 괴롭다. 식구들과 외식하러 나가봤자 나는 입이 퉁퉁 불어 돌아온다. 특별히 음식 가리지 않고 먹는 내 식구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음식 투정하는 가장 앞에서 음식이 입에 제대로 들어가겠는가. 초딩 막내는 음식점에 들어갈 때마다 늘 내게 당부한다. “아빠, 그냥 먹어요, 네?! 입맛 없어지잖아요.”
며칠 전 오랜만에 일찍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서 전화를 했다. 6시 조금 넘은 시각이었는데 식구들이 동네 식당에 앉아 있다. 나 빼고 외식 나간 것이다. 보나마나 이런 생각들이었을 것이다. ‘아빠하고 가봤자 맛있게 먹지도 못한다. 차라리 우리끼리 먹자.’ 사실 나도 그 자리에 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집밥’이 최고다. 그런데 둘째가 간곡하게 불렀다. “아빠 일루 오세요.” 둘째는 딸이다. 집밥보다 나는 딸이 더 좋다.
일산 홀트복지회관 입구에 ‘백두산 숯불갈비’(031-915-8855)라는 식당이 있다. 전에 ‘동경갈비’인가 하는 간판을 달고 영업했을 때 쇠갈비를 두어 차례 먹어본 적이 있는 식당인데 육질은 괜찮았으나 그 외 별다른 매력을 발견하지 못했었다. 주인은 그대로이고, 음식점 이름을 ‘백두산’으로 바꾸고 돼지갈비를 메뉴에 추가했다(이름은 정말 잘 바꾸었다. 갈빗집이 ‘동경’이라니!).
식구들은 나 없이 포식을 한 눈치고, 불판 위에 고기 두어 점이 남겨져 있었다. 고기가 두툼하고 거무스레한 것으로 보아 쇠갈비인 줄 알았다. 그런데 냄새는 돼지갈비다. 자리에 앉자마자 한 점 씹었다. 돼지갈비가 맞다. 그런데 두께가 4cm는 돼 보이는 두툼한 돼지고기가 입 안에서 스스로 녹아내리듯 씹혔다. 돼지갈비라면 의당 입 안 전체를 때리는 양념의 들척지근한 맛도 없었다. 고소한 고기 맛에 이은 가볍고 개운한 양념 맛. 예사 솜씨가 아니다.
불판에 있는 ‘찌꺼기’ 고기나 먹지 하다가 1인분을 추가했다. 부위는 갈비 한쪽, 목살 한쪽이다. 스테이크 수준의 두께에 격자무늬 칼집을 냈다. 굽기 전 양념을 맛봤더니 흐릿한 간장 맛에 과일의 달콤함, 양념 채소들의 상큼한 향이 적절하게 배합돼 있었다. 서빙 아주머니한테 이것저것 물었다. “양념은 주방장님의 노하우예요. 두께도 주방장님이 고집해 이렇게 두꺼운 거고요. 새로 오셨는데 이 메뉴에 대한 고집이 대단하세요.”
사실 돼지갈비는 서민 음식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싸구려 부위를 대충대충 양념해 파는 집이 대부분이다. 간장과 양념이 불에 타는 냄새만으로도 입 안에 침이 돌 정도이니 잘하는 집, 못하는 집 구별하기도 사실 어렵다. 그런데 이 집 돼지갈비는 고기를 발라내는 데도 일단 품격이 있고 맛에서도 절대 저급하지 않다. 1인분 맛있게 먹고 난 다음 주방 쪽을 보니 이렇게 써 있다. ‘목초액과 천연양념에 5일간 숙성한 돼지갈비’.
계산하고 나오는데 8시가 넘었다. 아직 소문이 나지 않았는지 식당 안이 썰렁하다. 맛없는 집이 더 장사가 잘되는 이상한 동네 일산이라지만 이 정도 맛이면 일산 사람들 호응을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몇 주 전에 밝혔듯이 맛 칼럼니스트 일은 취미다. 맛 칼럼 쓰는 일이 본업이 될 수 없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그중 가장 큰 것은 원고료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음식 관련 글을 쓰는 많은 사람들의 사정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만약 맛 칼럼을 써서 웬만한 월급쟁이만큼 번다면 나는 당장에라도 본업으로 삼을 것이다. 취미가 본업이 될 수 있다면 그것처럼 행복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오늘은 내 본업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써도 될까(간접광고로 읽힐 수 있으므로) 퍽 고심했는데, 글 내용이 칼럼 성격에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돼 밀어붙이기로 했다.
내 본업은 발해농원㈜대표이사다. 발해농원은 러시아 연해주에 4억2000만 평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는 영농법인의 생산물을 가공하여 국내에 유통하는 업체다. 연해주 농장에서는 국내에서 파견된 일꾼과 일제강점기부터 그곳에서 살고 있는 고려인, 현지 러시아인이 함께 일하고 있다. 농장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콩, 밀, 귀리, 옥수수, 메밀, 쌀 등이다. 대부분 러시아 현지에서 소비되고 일부 국내로 수입하고 있는데, 국내 농산물 중 자급률이 극히 떨어져 외국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는 농산물을 중심으로 수입량을 늘려나가고 있다.
발해농원에서 주력 농산물로 삼고 있는 것은 콩이다. 연해주가 콩의 원산지라서 농약과 비료를 치지 않아도 농사가 잘되기도 하거니와 국내 콩 자급률이 7%밖에 되지 않으므로 우리 자본과 인력으로 운영하는 해외 농장에서 콩을 들여오는 일이 국가적으로도 이익일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발해농원을 설립하면서 먼저 콩 가공식품에 대해 연구했다. 간장, 된장, 청국장, 두유, 두부 등. 사실 한국의 식품산업 수준은 선진국에 든다.
콩 음식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부터 챙겼는데, 그게 두부다. 10여 년 음식 취재를 하면서 빼놓지 않고 가보는 식당이 손두부집이다. 두부 맛이야 다 비슷비슷하리라 생각하겠지만 집집이 다 다르고, 한 집 두부도 그때그때 다르다. 어떤 콩이냐에 따라, 콩을 불리고 삶고 짜는 기술에 따라, 간수에 따라 맛이 제각각이다. 내가 두부를 좋아해서 그런지 맛있는 두부를 만났을 때의 희열은 대단한 것이었다. 강원 내린천 민박집, 경남 합천 송씨네, 강릉 초당동 할매집의 두부 맛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 안에 침이 고일 지경이다.
그런데 이런 두부는 그 식당에 가서나 맛볼 수 있는 것이지 시중에서는 구할 수가 없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갓 만든 두부 맛을 공장 시판 두부가 어찌 쫓아갈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가마솥 걸어놓고 두부 만들어 팔 수는 없는 노릇이고 해서 일본에 가보았다. 일본의 시판 두부 종류는 우리보다 훨씬 다양하다. 1인당 두부 소비량이 한국의 2배에 이르는데, 그들은 주로 생으로 먹고 우리는 요리에 넣어 먹고 하는 차이에 따른 결과이지 싶다.
하여간 우리보다 두부 종류가 많은 일본에 며칠 머물면서 두부만 먹고 다녔다. 그러다 내 입을 놀라게 한 두부를 발견했다. 콩의 맛과 향을 최대한 살린 두부, 이때까지 어디에서도 맛보지 못한 두부였다. 포장지에 ‘全粒(전립)’이라고 써 있었는데 콩을 미세분말로 만들어 그대로 굳힌 두부라고 설명돼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 자료를 찾으니 콩을 미세분말로 갈아 만든 두부를 일본에서는 전립두부라고 하고 우리 식품공전에는 전두부(全豆腐)라고 기록돼 있었다. 이 전두부를 만드는 기술은, 여기저기서 개발했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으나 일본에서 맛본 그 두부를 실현해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일본의 전립두부가 국내에 소개된 지 10년이 넘었다는데 아직 대량생산 설비를 완성시킨 기업이 없었다. 기술은 말이나 글로써 주장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 기술이 실현돼야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1년여 콩 분쇄기술 확보에서부터 전두부 대량생산 설비까지 온갖 실험을 하며 완성해나갔다.
전두부 시판을 앞두고 나는 소비자 만나는 일을 즐기고 있다. 서울 본사 사무실 앞을 무료 시식 쇼룸으로 꾸며놓고 전두부 요리를 내고 있는데, 맛있어하는 그들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하다. www.bohaifarm.co.kr에 자세한 약도가 있다. ‘주간동아’ 독자에게는 무료로 전두부 한 모씩을 드리겠다. 02-737-0720.
메밀은 본디 가을에 거둬 겨우내 식량으로 삼는 곡물이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 논밭이 적은 산간지방의 주요 작물이었다. 메밀로 만드는 음식으로는 메밀밥, 메밀죽, 메밀묵, 메밀전(부꾸미) 등이 있는데, 요즘 들어 내가 가장 많이 먹는 것이 메밀국수다. 메밀국수는 (평양)냉면, (춘천)막국수, 일본의 소바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모두 겨울 음식이었는데, 차게 먹는다는 특징 때문에 요즘은 여름 음식이 되었다.
여름이면 나는 한동안 메밀국수에 ‘미쳐’ 지낸다. 더위에 지친 위장을 시원하게 달래주는 음식으로 메밀국수만 한 게 없기 때문이다. 냉면, 막국수, 소바 가리지 않고 메밀국수면 다 좋다. 그러나 제대로 된 메밀국수를 만나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 메밀의 약간 까칠한 촉감과 아릿한 향을 최대한 살려낸 개운한 육수! 즉, 면과 육수의 조화가 메밀국수 맛의 포인트다.
내 입을 만족시키는 메밀국숫집은 냉면으로는 서울 충무로의 ‘필동면옥’(02-2266-2611), 영주 풍기의 ‘서부냉면’(054-636-2457), 막국수로는 강원 고성의 ‘백촌막국수’(033-632-5422), 소바로는 아쉽게도 없다. 종로1가에 ‘겐조앙’이라는 최고의 소바집이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문을 닫았다. 막국수는 봉평 ‘진미식당’이 한때 참 맛있었는데, 몇 년 사이 면발이 달라지고 육수도 달아져 아쉬움이 크다. 을지로3가의 ‘을지면옥’과 의정부 ‘평양면옥’은 필동면옥 집안사람들이 운영한다는데 내 입에는 필동면옥보다 못하다.
내가 메밀국수에 맛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소바를 먹어본 뒤부터다. 처음엔 짜면서도 톡 쏘는 시원한 장국 맛으로 소바를 먹었다. 그러다 어느 해 일본에 출장을 갔는데, 100여 년 된 소바집에서 제대로 된 일본식 소바를 맛보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장국에 면 끝만 살짝 적셔서 먹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면 장국 맛은 보조 역할만 하고 면 맛이 중요해진다. 면발이 너무 딱딱해 내 입에는 맞지 않았지만, 메밀국수 맛의 포인트로 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냉면이건 막국수건 소바건 면 맛에 관심을 두고 먹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의 메밀국수에서는 싸구려 밀가루 냄새가 났다. 그리고 메밀국수의 면이 대부분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메밀은 거의 들어가지 않고 색깔만 그럴듯하게 낸 것들이었다.
그래서 ‘진짜 면’을 찾아나섰다. 메밀이 어디에서 생산되었는지에 따른 맛 차이, 저장 기간에 따른 맛 차이, 껍질을 깐 메밀과 그렇지 않은 메밀의 배합 비율에 따른 맛 차이, 밀가루 비율에 따른 맛 차이, 면 뽑는 당일 날씨에 따른 맛 차이 등 메밀국수 맛을 내는 데 수많은 변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면을 뽑기 전 메밀 자체의 맛은 또 어떤지 생으로 먹어보기도 하고 가루를 내 더운 물에 타 먹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얻은 결론은? 싱겁게도 이 세상에 똑같은 메밀국수 맛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냥 그때그때의 메밀국수를 즐길 뿐. 앞에서 추천한 메밀국숫집들은 적어도 면 맛을 살리는 데 웬만한 경지에 이르렀고, 그 면 맛을 잃지 않으려면 육수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아는 곳들이다.
내가 소바를 먹는 방법은 이렇다. 먼저 면만 입 안에 넣어 맛을 본다. 그 다음 장국 맛을 따로 본다. 면이 충분히 맛있으면 무, 파, 고추냉이는 넣지 않은 채 장국에 면을 아래 절반 정도만 적셔 먹는다. 생밀가루 냄새가 풀풀 나는 가짜라면? 무, 파, 고추냉이를 있는 대로 넣고 훌훌 말아 한두 입에 먹어치운다.
냉면 먹는 방법도 있는데, 먼저 육수가 닿지 않은 면을 두어 가닥만 집어 입 안에 넣고 꼭꼭 씹은 뒤 육수를 한입 들이켠다. 육수와 면의 바탕 맛을 알아두기 위함이다. 그러고 난 다음 입 안에 넣을 수 있는 최대한의 양을 넣고는 양 볼이 터지도록 씹는다. 오래 씹을수록 맛의 깊이가 더해가는 게 냉면의 매력이다. 물론 겨자와 식초 등을 넣지 않는 게 더 낫다.
막국수는? 막국수는 양념이 너무 많다. ‘막’이라는 말 때문에 마구 섞어 먹어야 제 맛이 날 듯하지만, 경험으로 비춰볼 때 김·깨·참기름 등은 최대한 적게 넣는 것이 면과 육수 맛을 살리는 방법이다.
며칠 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한 사람이 운영하는 ‘평양관’이라는 식당에서 냉면을 먹었다. 본토는 아니지만 제대로 된 평양냉면 맛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밍밍한 닭 육수와 미끄덩한 면발에 이만저만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평양에서 제대로 된 메밀국수 맛을 볼 수 있는 날이 언제나 올는지.
블라디보스토크는 사업상 자주 드나드는 곳이다.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면 2시간 반 걸린다. 지역적으로는 동양권에 들고 예전에 우리 민족의 땅이었지만, 러시아가 근래 100여 년간 지배하면서 서양문화를 좇고 있다. 중심 거리에는 독일 상인들이 지었다는 고색창연한 유럽식 건축물 사이사이에 ‘로맨틱한’ 레스토랑이나 카페 따위가 자리잡고 있다.
처음엔 호기심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비싸다는 레스토랑에도 가보고 부둣가 서민 식당에도 가보았지만 특별하게 맛있다고 할 만한 음식도, 러시아식이라고 차별화할 만한 음식도 별로 없었다. 여기서 먹어본 음식 중에 참 맛있었던 것은 ‘곰새우’다. 크기는 서해안 대하만하고 생긴 것도 쏙 비슷하다. 달고 고소한 맛이 갑각류 중 최고이지 않나 싶다. 블라디보스토크 어시장에 가면 삶은 곰새우를 무게 단위로 파는데 여기에 칼칼한 러시아 맥주를 한 잔 걸치면!
블라디보스토크에도 한국 음식점들이 있다. 현대호텔(서울 계동 현대사옥과 똑같이 지어놓았다. 블라디보스토크 풍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멀쑥함이란!) 지하에 있는 한국 음식점은 한국 사람들로 항상 만원이다. 느끼한 러시아 음식보다 낫기는 하지만 국내 호텔 한국 음식처럼 밋밋하고 개성 없기는 마찬가지다. 또 하나 큰 한국 음식점이 있다고 들었는데 시간 내서 가볼 만한 곳 같지 않아 상호도 기억에 없다.
배추와 부추, 돼지고기로 채운 만두도 일품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북한 음식점도 있다. 물론 북한 사람들이 운영한다. 상호는 ‘평양관’인데 중국에도 똑같은 음식점이 있는 것으로 안다. 아리따운 북한 여성 접대원이 “동포 여러분, 반갑습네다~” 하고 인사한다. 음식보다는 민족 비극이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감상을 더 맛보게 하는 식당이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수차례 드나들면서 평양관은 의식적으로 가지 않았다. 평양에서 제대로 된 평양음식 먹을 기회가 곧 올 것이라고 믿고 그때까지 참아보자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6월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평양관에서 저녁을 먹어야 했다. 일 관계로 연해주로 초대한 분이 평북 박천 출신이라 이국 땅이지만 고향 맛 느껴보시라고 평양관으로 모신 것이다.
여러 음식을 먹었는데 한결같이 실망스런 맛이라 일일이 적기는 그렇고, 내 입에 ‘아, 이게 북녘 음식이겠구나’ 하고 느낀 음식 두 가지만 들겠다.
먼저, 만두다. 남쪽에서는 북한 만두 하면 큼직한 왕만두를 떠올리게 마련인데 평양관 만두는 중국집 물만두만하다. 만두피가 두툼한 듯하지만 숙성이 잘돼 입 안에서 스르르 녹는다. 속은 배추와 부추, 돼지고기만으로 채웠다. 적당히 익혀 배추가 살캉살캉 씹히고 부추 향내가 돼지고기 맛과 잘 어우러졌다. 접대원에게 맛있다고 칭찬하자 눈웃음을 치면서 “만두는 남조선보다 맛있지요”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다음은 김치다. 위 사진을 보면 그냥 배추김치 같지만, 자세히 보면 김치 국물이 꽤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자박자박한 게 숟가락으로 떠먹어도 될 정도다. 이 물기 덕에 ‘남쪽’ 김치보다 한없이 시원하고 개운한 맛이 난다. 북녘에 고향을 둔 어른이 서울 을지로의 한 평양냉면집에서 냉면을 먹다가 했던 푸념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냉면 맛은 다 좋은데 김치가 영 아니야. 물기가 자박자박 있는 김치여야 시원한 맛이 나고, 이걸 냉면 위에 올려 먹어야 제맛인 법이거든. 냉면에는 온갖 신경 다 쏟는 것 같은데 김치는 왜 대충대충 하는지 모르겠네.” 서울의 평양냉면집으로는 ‘필동면옥’이 그런대로 북한 김치 맛을 낸다.
김치를 북한에서 가져오는지 여기서 담그는지 접대원에게 물어보지를 못했다. 평양소주에 얼큰해진 일행이 접대원에게 노래를 시켜 ‘반갑습니다’ ‘휘파람’ 따위 노래들로 음식점 안이 가득 찼고, 그 간드러진 북녘 여성의 목소리 때문인지 울컥해진 나는 음식에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10여 년간 농어촌을 돌아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은 농어민이 그들 손으로 생산을 해도 최상품은 그들 몫이 아니라는 점이다. 돈을 벌어야 하니 좋은 상품은 내다 팔고 질 떨어지는 하품만 먹게 되는 것이 농어민의 현실이다.
어촌의 경우 도시 시장에서 볼 수 없는 생선들이 빨랫줄에, 채반에, 담벼락에 널린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도미, 조기, 명태, 대구 같은 생선은 내다 팔고 이름 모를 이상한 생선들이 밥상에 올랐던 것이다. 최근 도시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물메기(물곰)가 그 대표적인 생선으로, 도시 사람들은 요즘에야 먹게 되었지만 예전엔 어부들만 먹었다.
이런 생선 중 요즘 눈에 자주 띄는 것이 ‘삼숙이’다. 지역에 따라 삼숙어 또는 삼식이라고도 하는데 표준어는 뭔지 모르겠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아귀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머리가 크고 가시와 지느러미가 길게 나 있으며 피부는 꺼칠꺼칠 끈적끈적해 보인다. 징그럽게 생겨 이걸 어떻게 먹나 싶기도 하다.
찬물에 헹군 맹탕의 맛 ... 물회로는 괜찮을 듯
내가 삼숙이를 처음 먹었던 것은 8년 전쯤이다. 전북 부안 변산반도에 출장을 갔다가 하룻밤 묵게 되었는데, 초저녁부터 마신 술로 속이 엉망이라 해장국이 먹고 싶었다. 변변한 식당조차 없는 변두리 어촌이어서 여관 주인 아주머니에게 구걸하다시피 해서 해장국을 얻어먹었는데 그게 삼숙이탕이었다. 삭힌 홍어에서 나는 암모니아 향이 가볍게 나면서 시원한 국물 맛이 속풀이에 딱이었다. 이튿날 아침 주인 아주머니에게 물으니, 삼숙이라는 생선을 말린 뒤 끓여낸 탕이라고 했다. 그때 삼숙이 얼굴은 보지 못했다.
그 다음 해였을 것이다. 동해안 어느 어시장에서 삼숙이를 대면하게 되었다. 시커먼 것이 엄청 못생겨, 변산반도에서 먹었던 그때 그 시원한 생선인지 의심이 갔다. 그 동네에서는 삼숙어라고 불렀다. 그러다 얼마 후 강화도에서도 이 생선을 다시 발견했다. 여기서는 삼식이라고 했다. 경남지방에서도 이 못생긴 생선을 만났는데 역시 삼식이라고 했다. 한국 어느 바다에서나 잡히고 예전부터 어부들이 흔히 먹던 생선이었던 것이다. 표준어가 뭔지는 몰라도 내가 이 생선을 처음 맛보았을 때 들은 이름이 삼숙이니 그냥 삼숙이라고 부르고 있다.
어촌 사람들은 삼숙이를 탕으로 먹을 때가 가장 낫다고 말한다. 말린 것은 암모니아 발효가 일어나 홍어탕 비슷한 맛이 나며, 생삼숙이는 가볍고 개운한 국물맛을 낸다. 내 입에는 양쪽 다 해장 음식으로 참 좋았다.
그런데 이 삼숙이가 최근에는 회로도 팔리고 있다. 나는 사실 탕에 들어간 생선 맛으로 처음 맛봤기 때문에 회로 먹으면 별 맛이 없을 것 같아 처음에는 회를 아예 먹지 않았다. 그런데 삼숙이회를 파는 식당이 점차 늘어나 혹시나 내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싶어 딱 한번 맛을 보았다. 내 예측이 맞았다. 맛이 어떠냐 하면 ‘찬물에 헹군 광어 맛’ 정도! 쉽게 말해 맹탕이었다.
또 어느 식당에서는 물메기도 회로 쳐서 팔고 있다. 이도 삼숙이회 맛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삼숙이나 물메기나 굳이 회로 먹는다면 새콤달콤 시원하게 물회로 말아먹으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선회를 엄청 좋아한다. 생선이 싱싱하기만 하면 가리지 않고 회를 쳐서 먹으려고 덤빈다. 그러나 날로 먹어야 맛있는 생선이 있고, 구이나 탕으로 해야 제 맛이 나는 생선이 있는 법이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물메기처럼 삼숙이도 도회지 식당에서 큰 인기를 끌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 소비자들은 워낙 호기심이 강해 새로운 뭔가가 나타났다 싶으면 줄을 서서 먹으려고 드니 말이다. 그러나 삼숙이가 인기를 유지하려면 회로 내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맹탕의 맛을 누가 지속적으로 찾겠는가. 사실 꾸덕하게 말린 삼숙이로 탕을 끓이는 것이 가장 맛있는데, 대부분 생으로 쓰는 것 같기도 하다.
이름만큼 못난, 한때 어촌에서조차 홀대받았던 삼숙이가 상경해서 출세할 수 있을지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할 듯하다.
예전에 이 칼럼에서 밝혔듯이 나는 삼겹살이 싫다. 그런데 삼겹살을 자주 먹는다. 저녁 술자리에 삼겹살만한 게 또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아무 데서나 먹지는 않는다. 삼겹살도 이것저것 따져 맛있는 집으로만 먹으러 다닌다. 삼겹살 맛에 대해 평가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기의 질에 치중한다. 그러나 삼겹살이란 게 물퇘지(돼지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살 속에 물이 차는데, 이런 고기를 구우면 물이 흘러내리고 냄새도 심하다)만 아니면 거의가 비슷한 질을 가진다. 당연히 고기의 질보다 중요한 것은 굽는 방식이다.
학창 시절 과학시간에 배웠던 열역학을 기억하는가. ‘열의 이동 방식에는 대류, 전도, 복사가 있다’는 명제도 떠오를 것이다. 고기를 굽는 방식도 이 열역학 안에 있다. 즉 대류, 전도, 복사라는 열의 이동 방식에 따라 고기를 굽는 것이다. 여기에서 대류란 열원에서 나오는 뜨거운 공기에 고기를 익혀내는 것을 말한다. 전도란 구이판에 올려 굽는 방식이며, 복사란 열원에서 방사되는 열이나 전자파로 고기를 익히는 방식을 말한다. 대류와 복사는 불의 종류에 따라 어느 방식이 주가 되고 보조가 되기도 하는데, 대체로 가스는 대류 방식, 숯이나 연탄은 복사 방식으로 굽는다고 볼 수 있다.
고기의 질보다 굽는 방식이 더 중요
삼겹살을 굽는 방법 중 가장 흔한 것은 구이판을 이용한 전도다. 그 다음이 숯불을 이용한 복사와 가스불을 이용한 대류다. 직화로 구울 때 가스불보다 숯불로 굽는 삼겹살이 더 맛있다는 사실은 경험상 누구나 알고 있다. 이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숯불로 구우면 열과 원적외선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순식간에 삼겹살의 속까지 익어 육즙이 고기 안에 온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맛이 살아 있게 된다. 그러나 가스불은 복사가 극히 적게 일어나 삼겹살을 일시에 익히지 못해 육즙이 빠져나옴으로써 맛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 가스가 새는 것을 쉽게 알기 위해 가스에 독특한 냄새를 집어넣는데, 이 냄새가 삼겹살에 배어 맛을 떨어뜨린다. 반면에 숯은 타면서 독특한 향기를 삼겹살에 더해 맛을 더 좋게 한다.
자, 그렇다면 숯불에 굽는 삼겹살이 가장 맛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다!? 불행히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 특히 건강에 좋지 않을 수도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이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석쇠+숯불, 불판+숯불, 불판+가스불 등 세 가지 방식으로 조리한 결과를 예전에 발표한 적이 있는데, 육류를 직접 불에 구우면 발암물질이자 환경호르몬인 벤조피렌이 많이 생성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석쇠와 숯불을 쓴 돼지고기의 평균 벤조피렌 함량이 2.9ppb(ppb는 10억분의 1)로 가장 높았는데, 이는 유럽연합이 정한 훈연식품의 벤조피렌 허용 기준(1ppb)의 3배 가까이 되는 수치다. 그러나 불판 위에 놓고 구운 돼지고기의 벤조피렌 함량은 0.02ppb(불판+숯불), 0.004ppb(불판+가스불)로 극히 낮은 수준이었다.
여기에 숯불이 위험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국내 음식점에서 사용하는 숯의 대부분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수입한 것인데, 나무에 불을 지펴 굽는 숯이 아니라 톱밥 등을 태워 굳힌 조형탄이다. 이 숯에는 화공약품이 섞여 있다. 숯의 화력을 높이기 위해 바륨이라는 물질을 넣는데, 이것의 독성이 상당히 높다고 알려져 있다.
숯불구이에 또 하나 딴지를 걸자면, 숯불의 향이 진정한 고기의 맛을 즐기는 데 방해가 된다. 고기 냄새를 숯불 향이 잡아버리기 때문이다. 삼겹살 특유의 맛을 즐기자면 숯불구이를 피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삼겹살 맛의 포인트는 돼지 지방이 불에 타면서 내는 고소함과 적당히 익은 고기의 쫄깃한 촉감이다. 두툼한 삽겹살은 숯불이나 연탄불로 구워야 식감이 살아난다. 그런데 이 방식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하니, 내가 권하고 싶은 방식은 전도열로 굽는 것이다. 두꺼운 고기판을 사용하면 복사열도 함께 얻을 수 있다. 얼린 삼겹살을 얇게 썰어 불판에서 잽싸게 구워 먹는 방식이 내가 보기에는 최상이다. 흔히 대패삼겹살이라고 불리는 얇은 고기가 제일 좋다.
최근 삼겹살 가격이 올라 ‘금겹살’이라 불린다. 게다가 장마라 상추 가격도 만만치 않다. 이럴 땐 수입 냉동 삼겹살을 얇게 썰어 구운 뒤 파채를 곁들이면 어떨까 싶다. 원가 때문에 걱정하는 삼겹살집 주인장분들의 견해는 어떠신지….
냉면 하면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평양냉면이다. 구수하고 개운한 양지머리 육수에 야릿한 메밀면의 조화! 내 입에 맞는 으뜸 냉면 역시 평양냉면이다. 그 다음으로 꼽는 게 함흥냉면인데, 난 솔직히 이 음식에 왜 냉면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음식만 놓고 보자면 함흥비빔면이 딱 맞는 이름이다. 쫄깃한 함흥식 감자면에 찬 육수를 붓는다면, 이게 함흥냉면이지 싶다. 사실 이런 식의 냉면이 많으므로, 굳이 나누자면 ‘찬 육수+메밀면’은 평양냉면, ‘찬 육수+감자면’은 함흥냉면, ‘매운 다대기(다진 양념)+감자면’은 함흥비빔면으로 불러야 옳을 것이다.
30여 년 전 남쪽 바닷가 내 고향에는 냉면집이 딱 하나 있었다. 상호가 ‘함흥 어쩌구’였는데 질긴 감자면에 맑은 육수를 부어 냈다. 메밀면으로 만든 냉면을 맛본 것은 서울 올라와서의 일이다.
그렇다면 저 남녘에서는 북한식 냉면이 유입되기 전까지 냉면을 먹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시원한 육수에 밀국수를 말아 먹었다. 식당에서 먹은 기억은 없고 어머니가 해준 밀국수 냉면은 기억하고 있다. 멸치로 육수를 내고 열무김치와 달걀 지단, 무채, 파 따위로 고명을 올렸다.
쫄깃한 면과 시원한 해물육수 … 최근 들어 전문점 늘어
밀국수 냉면은 우리 집에서만 해먹던 음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경남지방에서 시작해 최근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가야밀면’이 밀국수 냉면이다. 해물로 육수를 내고 건면에서 생면으로 바뀌긴 했지만 밀국수를 마는 것은 똑같다.
그런데 대중매체는 이 밀면을 소개하면서 평양냉면이 남녘으로 건너와 변화를 일으킨 것이라고 한다. 이는 잘못된 얘기다. 밀면은 평양냉면과는 맛의 포인트가 완전히 다른 음식이다. 평양냉면은 육수와 면의 조화로운 향을 중시하는 음식인 데 비해, 밀면은 쫄깃한 면의 식감과 시원한 해물육수에 맛의 포인트가 있는 음식이다. 평양냉면이 한국 냉면의 대명사라 하더라도 전국의 냉면을 모두 여기에 비유하면 곤란하다.
밀면 전에, 그러니까 조선시대부터 남녘 지방에서 이름을 날렸던 냉면이 있는데 바로 진주냉면이다. 면은 메밀을 쓰고 육수는 해물로 내며 여기에 고명으로 육전을 썰어 올린다. 육전의 부침기름 때문에 평양냉면에 비해서 한참 무거운 맛을 낸다.
진주 인근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이런 진주냉면에 평양냉면이 섞인 묘한 냉면을 접하게 되는데, 두툼하고 매끄러운 ‘메밀+감자면’에 닭으로 육수를 내고 고명으로 육전이 오르는 냉면도 있다. 시원하고 개운한 냉면을 기대하고 갔다가는 육중하고 투박한 냉면에 적응하지 못한 채 두어 젓가락 께적거리다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지방 사람들은 곱배기에 육전을 추가해 올려 먹는다.
출퇴근하며 오가는 길에 ‘가야밀면’이라는 간판을 단 가게가 새로 생겼다. 사실 남쪽 지방에서도 밀면을 맛나게 먹어본 적이 없어서(맛있다고 소문난 집에서도 그랬던 것을 보면 밀면이 내 식성에 맞지 않는 듯하기도 하고) 관심 밖이었는데 매일 이 집 간판을 보게 되니 호기심이 발동했다. 혹 이 집은 날 만족시키지 않을까?
해물육수는 감칠맛이 깊었으나 들이켤 때 목에 턱턱 걸릴 정도로 개운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면은 그 자리에서 눌러 뽑아 쫄깃하기는 하지만 아무런 향이 없었다. 갖은 양념을 한 다대기를 푸니 개운함과는 거리가 더 멀어졌고, 면은 단지 쫄깃한 식감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듯했다. 밀국수로 내는 냉면의 한계인가?
지금은 없지만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 ‘고바우’라는 분식집이 있었다. 이 집에서는 멸치와 다시마로 낸 육수에 열무김치를 넣은 뒤 사나흘 숙성시켜 썼는데, 건면과도 아주 잘 어울렸다. 벌컥벌컥 들이켤 때 목걸림도 없었다. 밀면이 평양냉면만한 위치에 오르려면 육수와 면에 대한 연구를 한참 더 해야 할 듯싶다
오래전 음식 공부를 할 때였다. 요리 방법과 용어 등을 익히기 위해 고등학교 가정 교과서를 읽는데 ‘계삼탕’이라는 음식이 나오는 게 아닌가. 내가 알지 못하는 요리인가 싶어 살펴보니 삼계탕의 다른 이름이었다. 물론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다. 그래서 주변의 ‘고등교육’을 받은 여자들에게 물어봤다. “혹시 계삼탕이라는 음식 아세요? 가정 교과서에 나와 있던데….” 대입과 관련 없는 과목이어서 그런지 다들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음식에 이름을 붙이는 기본적인 원칙은 주요 재료(주재료와 보조재료)와 조리법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계삼탕을 놓고 보면 닭이 주재료이고 인삼이 보조재료, 요리방법은 ‘탕’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를 삼계탕이라고 부르고 있다. 닭보다 인삼을 강조한 것인데, 이렇게 음식 이름을 고쳐 부르는 까닭은 대부분 그 음식으로 심리적인 만족감을 얻으려는 의도다. 개장국을 보신탕이라 이르고, 닭야채볶음을 닭갈비라 하며, 김치찌개를 김치전골이라 부르는 이유와 같다. 그 큰 탕그릇 안에 달랑 한 뿌리 들어갔을 뿐이지만 몸에 좋은 인삼이 있음을 강조하여 보신했다는 느낌을 주려는 전략인 것이다.
백과사전 등에 나와 있는 삼계탕 요리법은, ‘내장을 꺼낸 닭의 뱃속에 깨끗한 헝겊으로 싼 찹쌀·마늘·대추 등을 넣고, 물을 넉넉히 부은 냄비나 솥에 푹 삶아 고기가 충분히 익었을 때 건져낸다. 인삼을 헝겊에 싸서 국에 넣고 푹 고아 인삼의 성분이 우러나게 한 뒤 소금으로 간을 맞춰 국물만 마시거나, 국물에 양념한 고기를 넣어 먹기도 한다. 그러나 인삼을 찹쌀 등과 함께 넣어 고면 닭뼈에 인삼의 영양분이 스며들어 인삼의 영양분이 감소된다’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요즘 삼계탕은 이렇게 요리되지 않는다. 부재료로 녹각(사슴뿔)에 밤·황기·당귀·잣 따위가 추가되는 것은 기본이고, 전복이며 낙지가 들어가는 삼계탕도 있다. 특히 삼계탕 국물을 낼 때 온갖 것이 동원된다. 닭만으로 국물을 내면 개운한 맛은 있어도 어쩐지 깊이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닭발, 사골, 곡물 등 넣어 닭 고유의 맛 못 살려
요즘 삼계탕용 닭은 보통 27일짜리를 쓰는데, 이걸 아무리 오래 고아봤자 진한 맛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닭발을 흔히 쓴다. 닭발을 함께 넣고 푹 고면 국물 색깔이 약간 짙어지며 입술에 찐득한 것이 느껴진다. 어느 집에서는 사골 국물을 쓰기도 하며 곡물을 갈아 넣는 데도 있다. 복날 장사진을 이루는 식당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국물에 ‘손’을 댄다.
사실 난 고민스럽다. 온갖 것을 넣은 삼계탕을 사람들이 다 맛있다고 하니 ‘맛있는 삼계탕’으로 인정해야 할지, 아니면 닭 고유의 맛을 살리지 못했으니 ‘사술을 부린 삼계탕’이라 해야 할지 고민이다. 이건 삼계탕만의 문제가 아닌데, 닭발로 국물을 낸 순댓국, 양지 국물로 만든 추어탕, 아몬드와 땅콩 국물로 만든 콩국수 등 원래 그 맛의 음식보다는 다양한 방법으로 입맛을 ‘속이는’ 음식이 더 큰 인기를 끌고 있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대략 난감’인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닭고기에 대해서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한 마디 거들었다.
“생각을 해봐라. 27일짜리 닭이 닭이니? 영계?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따스한 춘삼월에 알에서 깬 병아리가 복날에 이르렀을 때에야 먹기 좋게 자라는데, 이를 영계라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적어도 3개월짜리는 돼야 제 맛이 나고, 이것으로 삼계탕을 해야 하는 거지. 때문에 요즘 삼계탕 국물에 온갖 것을 넣는 것은 사술이라기보다는 고육지책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을 거야.”
그런 닭으로 끓인 삼계탕 어디 없을까?
“양계장에는 없고 시골 마당에서 자라는 걸 잡아야 하는데, 그렇게 귀한 영계가 네 몫으로 돌아올 게 있겠어? 내년 봄에 병아리 사서 직접 키워.”
초복날 삼계탕집에 갔다가 길게 늘어선 인파에 놀라 그냥 돌아왔다. 다음 날 혹시나 하고 또 갔다가 더 길어진 줄에 질려 뒤돌아서는데 내 입에서 이런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에이, 그깟 엉터리 삼계탕.”
일반인들이 맛집을 찾는 방법은 거의 비슷하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또는 인터넷을 검색해서 찾는다. 그러나 맛 칼럼니스트는 이런 식으로 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남이 해놓은 것을 재탕, 삼탕하라고 맛 칼럼니스트가 있는 게 아니다. 맨땅에 헤딩을 해야 한다. 자, 나의 헤딩법이다.
첫째, 현지인에게 물어라. 한 지역에서 식당에 관한 정보를 누가 가장 많이 알고 있을까. 당연히 음식업중앙회 같은 단체의 지부가 첫째일 것이다. 그러나 지부가 지역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자칫 지역 업주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경우 정확한 정보를 알기 어렵다. 그 다음으로는 지자체의 위생계 직원이다(문화공보실 직원도 정보량이 많지만, 음식업체 관리는 위생계에서 하므로 더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공무원들의 태도가 예전과 달리 매우 친절하다. 이런 질문이 가장 효과적이다. “위생계 직원들은 어느 식당에서 밥 먹나요?”
휴일이라 관공서가 쉰다면 시장통의 큰 가게 주인에게 묻는 것도 요령이다. 물을 때는 꼭 이런 식으로 해야 한다. “신문이나 방송에 난 데 말고, 이 동네 사람들이 자주 가는 곳을 알려주세요.”
둘째, 작은 식당일수록 음식 맛이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묘하다. 식당이 크면 음식 맛도 더 좋은 줄 안다. 내가 사는 일산 신도시에서는 식당들의 규모 경쟁이 그야말로 가관이다. 수백억 규모의 식당도 있다. 그런데 거기서 정작 무얼 파느냐 하면, 설렁탕과 싸구려 회, 동네 배달 전문 식당 수준의 중국음식이다. 주인 말이 이렇다. “뭔가 있어 보여야 손님이 온다고.” 정말 손님은 미어터질 만큼 많다. 도대체 식당을 먹으러 가는 건지, 음식을 먹으러 가는 건지.
현지 사람들에게 물어보거나 재래시장에서 찾아라
어떤 요리사에게 “하루 저녁에 요리사 한 명이 받을 수 있는 손님의 수로 몇 명이 적당한가”를 물은 적이 있다. 최선을 다해 음식을 내놓을 수 있는 손님의 수를 말하는 것이다. 일식이든 양식이든 한식이든 하나같이 “두 테이블, 그러니까 여덟 명 정도”라고 말했다. 미리 해놓은 음식을 공장에서 찍듯이 내는 음식, 대형 식당들 대부분이 그렇다. 요리하는 사람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음식이 정말 맛있는 음식이고, 이런 음식은 규모가 작을수록 맛볼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셋째, 나 잘났다 동네방네 떠드는 식당은 피하라. 언론매체가 선정한 맛있는 집, 방송 출연 따위의 글을 닥지닥지 붙여둔 집은 일단 ‘꽝’이다. 물론 신문이나 방송에 소개된 집들 중에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는 음식점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식당들은 한마디로 수준 이하다. 신문과 방송 관계자들도 나름대로 맛있는 집이라고 판단해서 취재를 했을 것이므로 입맛 차이일 뿐이지 싶겠지만, 순수한 취재보다는 기사형 광고를 신문에 게재한 뒤 이를 이용하는 음식점, 또 맛보다는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특이한 점 덕에 방송된 것을 맛있는 집으로 선정됐다고 홍보하는 음식점이 더 많다. 음식을 정말 잘하는 집은 신문이나 방송에 나고도 이를 알리지 않는다. 경험상, 음식 잘하는 사람들은 참 겸손하다.
넷째, 시장의 ‘먹자골목’을 찾아라. 우리나라의 모든 것이 그렇지만, 음식 맛의 획일화는 심각한 문제다. 바로 서울 중심의 획일화다. 경상도에 가도 서울 음식을 먹고 전라도에 가도 서울 음식을 먹게 될 때가 흔하다. 특히 ‘모범업소’ 같은 간판이 붙은 지방 대형 식당들의 음식은 대부분 서울화돼 내가 지금 어디에서 밥을 먹는지 착각하게 될 정도다.
식당에 대한 정보 없이 어디를 가게 되었다면, 근처 시장을 찾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재래시장이면 어디든 ‘먹자골목’이 있는데, 이곳 음식들은 아직 중앙화되지 않은 맛을 낼 확률이 높다. 특히 시장 귀퉁이 조그만 좌판에서는 그 지역에서도 사라져가는 향토 음식을 발견할 수도 있는데, 이게 진짜 최고의 맛이다.
다섯째, 문화적 미맹에서 벗어나라.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색맹이라고 하는 것처럼 맛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을 미맹(味盲)이라고 한다. 이는 생리적 이상 때문인데, 선천적으로 음식 맛을 느낄 수 없다니 불쌍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문화적 미맹’도 있다. 항상 먹는 것만 먹으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또 제 입에 맞지 않으면 맛없는 음식으로 여긴다. 이런 문화적 미맹 탓에 지방마다 식당마다 특색 있는 맛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진정한 미식가는 어떤 의미에서 악식가이기도 하다. 새로운 맛에 대한 도전정신이 없으면 맛있는 식당을 코앞에 두고도 지나칠 수밖에 없다. 우연히 지나치는 식당 간판에 ‘닭대가리꼬치구이’ 같은 메뉴가 써 있으면 무조건 들어가서 먹어보라. 이게 맛있는 집 찾는 최상의 요령이다.
올해는 피서 가기 힘들 것 같다. 무슨 일이 이다지도 많은지…. 8월 들어 해외출장이 2건이나 잡혔고 하루 걸러 상담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내 사정을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휴가 떠날 때마다 한 마디씩 던진다. “동해로 피서 가는데, 어디서 뭘 먹어야 제대로 먹었다는 소리를 들을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원한 동해바다가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동해라…, 일단 먹을거리가 참 많은 곳이다. 속초 중앙시장의 지하 어물전에 있는 싱싱한 광어와 놀래미, 문어, 개조개, 홍게가 가장 먼저 떠오르고, 고성 백촌 막국수 맛은 여전한지 궁금하다. 그리고 불판 위에서 탁탁 소리를 내며 벌어지는 명주조개 향이 아직 코끝에 남아 있는 듯 생생하다. 하지만 그 많은 먹을거리 가운데 동해 하면 너나없이 첫손에 꼽는 것이 바로 오징어다. 일단 싸서 좋다. 그러나 동해에서 ‘오징어 요리’를 찾으면 곤란하다. 오징어볶음이라든지 오삼불고기니 하는 것은 없다. 싱싱한 오징어는 생으로 먹는 게 가장 좋기 때문이다.
어? 아니다. 오징어 요리가 하나 있기는 하다. 오징어순대! 그러나 이것도 오징어를 맛있게 먹기 위해 개발한 요리는 아닌 듯하다. 오징어순대는 오징어라는 재료보다는 순대라는 음식 요리법에 포인트가 있기 때문이다. 북녘 지방에서는 소나 돼지의 창자, 명태, 오징어 따위로 순대를 만들어 먹었는데, 이 음식이 6·25전쟁 이후 동해안 지역에 정착한 북녘 피난민들에 의해 번져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속초 아바이마을에 가면 오징어순대가 주요 음식으로 팔리고 있는데 드라마 ‘가을동화’가 인기를 얻기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7~8년 전만 해도 이 동네에는 아바이순대를 내는 음식점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오징어를 별다르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말씀? 꼭 그렇지도 않다. 오징어회도 칼질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동해안으로 피서를 가면 오징어회를 조금이라도 더 저렴하고 싱싱하게 먹기 위해 인근의 어항을 찾게 마련이다. 수족관이나 ‘고무 다라이’에서 쉭쉭 고개를 내미는 오징어들! 오징어를 고를 때는 일단 붉은빛을 띠는지 살펴본다. 싱싱한 녀석은 도마에 올려놓았을 때 번쩍번쩍 제 몸 색깔을 바꾼다. 오징어는 크기에 따라서도 맛이 다르다. 보통 작은 것이 연하고 맛나다고 생각하는데, 잔챙이들은 살이 무르고 고소한 맛이 덜하다. 큰 오징어를 얇게 채를 쳐야 맛이 난다. 작은 오징어밖에 없다면 큼직큼직하게 써는 것이 요령이다.
얇게 채 쳐서 채소와 버무려 먹으면 ‘맛 그만’
오징어회를 먹을 때는 그냥 초장에 찍어 먹는 것보다 오이, 상추 같은 채소들과 버무려 먹는 게 더 맛있다. 한 입 가득 넣고 자근자근 씹어 먹는 맛이라니! 여기에 시원한 물을 부으면 물회가 되는데, 난 꼭 밥을 말아 먹는다. 밥이 초장의 자극적인 맛을 순화시키기 때문이다. 요즘 오징어막회나 물회에 콩가루를 넣는 집이 간혹 있다. 고소한 맛을 더하기 위해서인 듯한데, 그럴 경우 고소함은 더해질지 몰라도 콩가루의 텁텁함 때문에 본래의 맛이 오히려 사라진다. 차라리 땅콩가루나 아몬드 가루를 넣는 게 나을 듯하다.
말린 오징어도 있다. 약간 꾸덕하게 말린 오징어를 피데기라고 하는데, 상인들이 파는 피데기구이 중에는 완건 오징어를 물에 불려 쓰는 것도 있으므로 바닷가 덕장에서 어민과 직거래하는 것이 좋다. 말린 오징어 중에 정말 맛있는 것은 배에서 잡아올리자마자 내장을 빼고 갑판에서 말리는 ‘배오징어’다. 배오징어는 색깔이 거무스레한 것이 특징이다. 뭍에서 말리는 오징어들은 대부분 냉동 수입품을 녹여 건조한 것이므로 오징어 특유의 향이 배오징어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 배오징어보다 한 수 위의 맛을 내는 게 ‘울릉도 당일 오징어’다. 밤새 잡은 오징어를 새벽녘에 부두에서 배를 딴 뒤 건조한 것이다. 그날 잡아서 말리는 것이라 포장에 ‘당일’이라고 써 있다.
오징어와 비슷해 속아 사는 것 중 하나가 한치다. 오징어보다 다리가 짧다는 점을 빼면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 한치는 작은 것은 맛이 약하고 씹는 촉감이 좋질 않다. 그러나 큰 것은 오징어보다 낫다. 시장에서 큰 한치가 보이면 한 마리 사다가 양념구이를 해 먹어보라. 정말 맛있다. 숯불 바비큐이면 더할 나위 없고.
피서도 못 가면서 동해 오징어 타령이나 하고 있자니 심사가 꼬인다. 늦여름에라도 동해안에 가서 오징어물회 한 대접 먹고 와야겠다
일제강점기 때 내 외할머니는 일본에서 반찬가게를 하셨다. 물론 일본 반찬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일본에서 청년기를 보내셨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 한식과 일식이 묘하게 ‘짬뽕’된 음식을 먹고 자랐다. 이런 얘기를 주위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대부분 “와, 맛있는 음식 많이 먹어봤겠네”라며 일식 정찬을 떠올리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어렸을 때 내가 받은 밥상은 소박하다 못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는 상차림이었다. 작은 밥공기에 3분의 2쯤 담긴 밥(당시만 해도 다른 집에서는 주발 고봉밥이었다)과 장아찌나 김치, 국, 생선구이나 조림, 늘 이런 식이었다.
흔히들 ‘일본 음식’ 하면 가장 먼저 깔끔하고 화려하게 꾸며진 음식을 떠올린다. 우리나라에 있는 일식집이 대부분 ‘요리’를 내는 식당인 까닭이다. 하지만 일본 여행을 여러 차례 하면서 이런 호화로운 음식을 몇 번 대접받긴 했지만, 이런 일은 일본인들에게도 드문 일이라고 들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에 있는 일식집 음식은 애초 ‘요리’ 중심으로 일반에게 알려졌다. 요정 문화 탓이다. 일제강점기, 평범한 일본인들의 가정식이 우리 음식문화에 침투할 기회는 별로 없었던 반면, 도시 곳곳에 자리 잡은 접대 공간인 요정들은 고급 요리로 한국 상류층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이렇듯 요정을 기반으로 하여 국내에 자리 잡은 요리 중심의 일식은 호텔과 고급 일식집으로 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일본 서민음식이 국내에 들어올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 고도성장기에 이르기 전까지만 해도 외식을 할 수 있는 층이 거의 없었던 데다 민족감정 탓도 있었다. 1960년대 들어 일본식 돈까스가 서울 명동을 중심으로 하나 둘 생겼고, 80년대 들어서는 우동과 메밀국수 전문점이 생겨났으며, 90년대에는 노바다야키라는 선술집 및 일식 라면집이 번져나갔다.
정성 깃든 음식문화 빠진 채 음식만 들여오나
나는 일식은 좋아하지만 국내 일식집의 음식은 별로 즐기지 않는다. 특히 사시미(회) 중심의 일식집에서 나오는 음식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다. 마죽, 계란찜, 냉회, 샐러드, 찜, 구이, 스시 어느 것 하나 그 집만의 개성을 느낄 수 있는 게 없다. 그저 폼만 잡았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최근에 생긴 일본 음식점들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음식점에서 내는 음식은 일본 어느 지방의 음식이다”라고 맛의 차이를 강조한다. 이런 경향은 일본 음식점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어떤 나라, 어떤 지역의 음식을 즐기는 방식에서 ‘그 나라의 무슨무슨 음식’ 하는 식으로 우리 기호가 차츰 다양해지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나는 보통 1년에 두어 차례 일본에 간다. 그러면 직업 탓인지 취미 때문인지 음식점을 순례하게 된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 중심가의 주요 자리는 서양식 패스트푸드점과 일본 프랜차이즈 점포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번화가 뒤로 들어가면 작은 식당들이 올망졸망 있는데, 1식3찬의 소박한, 일본 서민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상차림을 내는 식당이 의외로 많다. 나는 대부분 이런 식당에서 음식을 먹는다. 번화가 식당들과는 달리 그네들의 음식에 대한 정성을 오롯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교토를 여행하다가 요정 골목을 가게 됐다. 오랜 목조건물들이 수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듯했다. 여기 상차림은 어떨까 궁금하기는 했지만 가격이 만만찮을 것 같고 또 마침 대낮이라 차 한 잔만 하기로 하고 요정에 들어갔다(요정은 밤에 술과 음식만 파는 것으로 아는데, 낮에도 차 같은 가벼운 음식을 판다).
여름이라 차림표에 녹차아이스크림, 냉팥죽, 냉말차 같은 시원한 음식들이 있었다. 나는 냉팥죽을 시켰다. 물에 불려 삶은 팥이 빙수 아래 깔려 있고 그 위에 구운 떡이 올려져 나왔다. 어떻게 삶았는지 팥이 조금도 으깨지지 않고 입 안에 넣으면 스르르 녹아내릴 정도로 부드러웠다. 팥을 다뤄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렇게 만들려면 불 조절을 하며 몇 차례나 물을 갈면서 삶아야 한다는 것을. 놀라운 것은 일본 뒷골목 아무 음식점에나 들어가도 이만한 정성의 음식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일본 음식점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일본 외식업체의 브랜드만 빌려오는 것이 아니라 일본 본사가 한국에 직접 진출하기도 한다. 일본에서 맛본 그 정성을 느낄 수 있으려나 싶어 일부러 물어물어 찾아가보지만 결과는 항상 실망스럽다. 일본 음식만 들여올 것이 아니라 그네들의 음식문화도 함께 가져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10년 전 전국을 돌아다니며 향토음식에 대해 취재하던 때다. 당시 나의 이런 일은 눈에 띄는 작업이 아니었다. 매체에서는 식당을 소개하는 단문 기사들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향토음식의 유래나 문화적 해석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런 내 글을 보고 관심을 나타낸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사진작가인 고 김수남 선생이었다. 김수남 선생은 1970년대부터 한국 무속 사진을 찍기 시작해 80년대 들어서는 아시아 지역의 무속을 카메라에 담는 작업을 했다. 그의 작품은 예술성을 넘어 인류학적 가치도 인정받았는데, 카메라맨의 섬세한 관찰력을 기반으로 하는 그의 글은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의 중간에서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선생과는 필자와 편집자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러다가 인생의 스승으로 삼고 싶다는 마음에 선생이 부르면 어디든 마다 않고 달려갔다. 물론 대부분 술자리였다. 선생은 술을 퍽 즐겼는데 술자리에서 그를 당해내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선생이 어느 날 나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물회·고등어회 등 신선한 해산물에 딱 어울려
“네 취재 내용하고 글은 참 마음에 드는데 말야, 사진이 영 아니야. 나도 글하고 사진을 함께하고는 있지만 이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거든. 지순이랑 호흡 한번 맞춰봐라. 너는 글 쓰고 지순이는 사진 찍고.”
김 선생에게 백지순이라는 ‘수제자’가 있었는데, 그를 내 작업 파트너로 제안한 것이다. 아시아의 민속 가운데 무속 부문을 이미 섭렵한 김 선생이 자신의 수제자에게 아이템으로 던진 것이 바로 음식이었다. 아시아의 민속음식! 꽤 흥미로운 주제임이 틀림없었고, 한국 음식을 그 시작으로 사진작가와 공동작업을 한다는 점도 훌륭할 듯했다.
이후 1년가량 나는 백지순과 함께 공동작업을 했다. 선생 말마따나 분업을 하게 되니 작업이 훨씬 수월했고, 원고 수준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보기에도 좋았다. 그러나 단점도 있었다. 둘이 움직이니 비용은 배로 드는데 원고료를 사진과 글 따로 쳐서 준다는 매체가 드물었던 것이다. 고전을 계속하던 끝에 공동작업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백지순과 함께 작업을 할 때였다. 김 선생은 내가 쓰는 모든 글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던 듯했다. 어느 글에선가 내가 ‘제주 음식은 맛이 없다’고 했는데 김 선생이 이를 보고 발끈했다. 그는 6·25전쟁 중 제주도로 이주해 오래 살았던 탓에 스스로 제주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고향 음식’을 맛이 없다고 했으니 화가 날 법도 했다. 내가 제주 음식을 맛없다고 한 이유는 ‘재료 그 자체로 맛있는 신선한 해산물이 널려 있으니 따로 이런저런 요리 방법을 궁리하지 않는다는 점, 제주에서는 여자들이 바깥일과 집안일을 다 하다 보니 부엌에 오래 있을 시간이 없어서 요리하는 데 크게 신경 쓰지 못한다는 점’ 등에서였다. 그러나 김 선생의 의견은 달랐다.
“제주 토장 알아? 육지 된장 하고 달라. 이 토장을 물에 푼 뒤 싱싱한 생선 넣고 후루룩 마시면 속이 쏴아~ 하고 풀리는 게 최고지. 생선 없으면 말야, 여기에 그냥 밥 말아 먹어도 맛있어. 이거 하나만으로도 육지의 모든 음식보다 맛있다고 장담할 수 있어.”
그날 나는 김 선생과 설전을 벌이다가 결국 함께 제주도에 가서 제주 음식이 맛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김 선생과 백지순, 제주도의 또 다른 사진작가와 사흘 동안 제주 이곳저곳으로 음식을 먹으러 다녔다. 물회와 몸국, 고등어회, 갈치회, 보리빵 등등. 그런데 취재를 하면서 우리는 제주 음식이 맛있네 맛없네 따지는 일을 하지 않았다. 음식 먹는 자리마다 술이 올라 여기가 제주도인지 서울인지 구별이 안 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하나는 기억한다. 자리물회 먹는 자리였던 것 같다.
“술 마시고 난 다음에 꼭 이게 먹고 싶단 말야. 그래서 집에서도 된장 푼 물에 밥을 말아먹기도 해.”
러시아 연해주에 머무느라 선생의 부음을 몇 개월이 지난 뒤에야 접했다. 김 선생 때문인지 요즘 자주 자리물회를 먹는다. 제주 토장이 아니니 그 맛은 나지 않지만 말이다.
“선생님, 제주 음식 맛없다고 한 거 죄송합니다. 그동안 접었던 백지순과의 공동작업도 다시 한번 궁리해보겠습니다.”
어떤 일이든 ‘경지’와 ‘깨우침’이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득도의 경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아주 작은 일들에도 제각각의 깨우침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 그게 그렇구나”라며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바로 그 순간이다.
나는 자잘한 깨달음으로 인해 인생이 퍽 즐겁다. 일종의 감각 확장 같은 것인데,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즐거움을 설명하기란 어렵다. 사진에 몰두하다가 문득 빛의 세상이 눈에 확 들어온 순간, 수년간 문법적 오류를 범하지 않는 글쓰기에 매달리다가 어느 순간 그놈의 문법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글을 척척 써 내려가고 있는 나를 발견한 순간 같은 것을 말한다. 이런 종류의 깨달음은 그리 귀한 것이 아니다. 음악을 하는 이들에게 물어봤더니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꽤 있었다. 어느 한순간 소리의 세계가 확 열리는데, 그때의 희열로 눈물을 펑펑 쏟기도 한다고 했다. 그 깨달음의 세계는 알 수 없지만 몸서리쳐지는 희열은 어떤 것인지 짐작이 된다.
원재료 최대한 살려 조리해야 최고의 맛
일본 만화 가운데 ‘맛의 달인’이란 작품이 있다. 최고의 맛을 찾아나선 신문기자 지로와 미식가 아버지 우미하라가 요리 대결을 펼쳐나가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지로와 우미하라가 닭고기 요리로 대결을 펼치게 되면 먼저 가장 맛있는 닭고기부터 찾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먹는 닭고기의 대부분은 좁은 닭장에서 인공사료를 먹이며 대량 사육된 것임을 확인시켜 주고, 진짜 맛있는 닭고기는 자연 상태에서 천연사료를 먹고 자란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 다음에 닭고기 맛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요리법을 연구하고 시식회를 열어 우열을 가린다.
몇 해 전 ‘맛의 달인’을 탐독하면서 지로 방식으로 맛의 세계를 깨우쳐 나가기로 작심한 뒤 음식재료 공부에 몰두한 적이 있다. 가령 ‘최고의 김치’를 상정하고 그 작품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먼저 고추부터 따진다. 고추는 경북 영양 고추가 최고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양에서 생산된다고 다 영양 고추는 아니다. 영양 고추의 명성은 영양군 수비면의 ‘칼초’라는 토종 고추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재 ‘칼초’는 병충해에 약해 수비면에서도 몇몇 농가만 재배하고 있다. 맏물 고추가 좋으니 첫 수확 때를 맞추어 수비면에 가서 ‘칼초’를 구해온다.
다음은 ‘칼초’를 말려야 한다. 햇볕에 말려 태양초로 만들자고? 아니다. 고추는 그늘에서 말려야 때깔도 곱고 향도 강해진다.
젓갈은 어떤 것이 좋을까. 멸치젓? 새우젓? 까나리젓? 전남 섬마을에 가면 멸치와 새우, 진파리(넙데데한 국물용 생선)를 섞어서 2년 정도 삭힌 젓국이 있다. 이 지역에서는 멸치젓, 까나리젓, 새우젓 등을 다 담그는데도 이것을 최고로 친다. 내 정보로는 이 젓이 최고다.
소금은? 천일염을 쓰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천일염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다. 온도가 높을 때 만들어진 소금은 짠맛이 강하다 못해 쓴맛이 난다. 한여름 것은 안 좋다는 말이다.
다음은 배추, 무, 마늘, 장독 등을 고르는 일과 어느 정도의 소금에 배추를 얼만큼 절이고, 양념 비율은 또 어떻게 하며, 어디에서 어떻게 숙성시킬 것인지….
이렇게 하면 ‘최고의 김치’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최고의 김치가 곧 내게 맛의 세계를 열어주는 열쇠가 될 수 있을까. 만화 ‘맛의 달인’도 이런 방식에 대해서는 극히 부정적이다. 에피소드마다 최고의 맛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함을 강조한다.
임지호라는 요리사를 잘 안다. 여덟 살에 가출해 중국집 배달원으로일하면서 맛의 세상에 입문했다. 그는 맛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맛에는 순수한 맛과 변형된 맛이 있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요리는 자연을 해치지 않으면서 먹는 사람들에게 그 재료의 원초적인 맛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수한 맛입니다. 순수한 맛은 순수한 마음과 통합니다.”
30여 년 동안 온갖 것을 먹고 먹이면서 어떤 맛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의 맛 세계는 ‘순수의 소통’이었다.
맛을 삶의 주제로 삼아 일한 지 10여 년. 솔직히 난 아직 맛이 뭔지 잘 모르겠다. 맛에 어떤 경지가 있는지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고…. 맛이니 깨우침이니 경지니 하는 말을 할 때마다 내 귓전을 때리는 생생한 소리가 있다. “맛칼럼니스트? 입맛 까다로운 사람을 그렇게 부르나?” 현재로서는 그게 맞는 말이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땐 아이스크림이라는 말도 없었다. 막대기에 깡깡 얼린 찝찔한 팥물의 아이스케이크도 참 귀했다. 여름밤 “아이스께끼~” 하고 외치는 소리가 얼마나 달콤했던지…. “이번 딱 한 번만”이라며 엄마랑 손가락을 건 뒤 10원짜리 종이돈 들고 대문 박차고 나가면서 외쳤던 “아이스께끼 아저씨~.”
‘투게더’였다. 아이스크림이 가족 사랑을 표현하는 먹거리임을 알려준 것이. 한겨울 벽난로 옆에서 온 가족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그 텔레비전 광고를 중년이라면 대부분 기억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송창식이 부른 “온 가족이 함께~”로 시작하는 투게더 CM송도 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두 해 전 이탈리아 아이스크림 브랜드를 직수입해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는 사람을 알게 되어 아이스크림 시장을 엿보게 됐다. 구멍가게 아이스크림은 초딩용이고, 중딩 이상은 30여 가지 다양한 아이스크림이 진열되어 있는 전문점을 애용했다. 대딩이나 직딩은 이탈리아나 미국에서 수입된 고급 브랜드의 아이스크림이 자신들에게 맞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가면 온갖 브랜드의 아이스크림을 만날 수 있다. 맛보다는 폼, 그러니까 아이스크림이 액세서리 같은 구실을 하고 있었다. 청춘들의 현란한 옷차림과 아이스크림의 색깔이 어찌나 똑떨어지던지. 최근 스타벅스가 여성의 허영심을 자극해 장사한다며 말이 많은데, 브랜드 아이스크림 소비 행태도 자세히 보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유 대신 물 넣어 제조 “이렇게 개운할 수가”
두 해 전 그 여름, 나는 중년의 몸으로 젊음이 넘치는 압구정 로데오 거리를 현란한 색상의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채 누볐다. 그 거리에서 내 몸이 생경한 것은 세월 탓이라 여기면 그만이었으나, 당최 그놈의 아이스크림 맛에 적응할 수 없어서 난감했다. 맛칼럼니스트로서 장수하려면 입맛의 세대차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이거늘. 어찌나 달던지 두어 숟갈에 혀 천장이 간질간질해질 정도였다. 또 향신료 때문에 한 종류를 먹고 나면 다른 아이스크림 맛을 도저히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때 그 거리에서 아이스케이크 장수를 만났다면 달려가 뽀뽀라도 해주었을 것이다.
최근 한 지인에게 연락을 했는데 쑥스러울 정도로 나를 반겼다. “선생님, 요즘 저 ‘닥터 로빈’이라는 다이어트 음식 전문점 컨설팅하고 있어요. 오셔서 한번 맛보세요.” 음식에 대한 특출난 식견을 가진 사람이 무슨 ‘장난’을 하나 해서 바로 달려갔다. 강서구청 사거리에서 가장 큰 건물 1층의 식당으로, 귀뚜라미 보일러 본사 건물이었다. 회사 ‘귀뚜라미’가 ‘닥터 로빈’이란 브랜드로 외식사업에 뛰어든 것이었다. 보일러 회사가 외식사업이라?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한국 외식산업도 꽤 파이가 커져 이제 큰 자본이 뛰어들 만한 사업거리가 되었구나 싶어 한편으론 반가웠다.
다이어트 음식점답게 별별 음식이 다 있었다. 식욕을 억제하는 커피, 대체감미료를 넣은 케이크 같은 것들이었는데, 단 음식을 워낙 싫어하는 내 입에는 딱 좋았다. 게다가 열량을 대폭 줄인 음식이라고 하니 배가 터지게 먹으면서도 심리적 압박감이 덜했다(요즘 배가 나와 음식량을 줄이는 중이다).
음식 자랑에 열변을 토하던 지인에게 “다 좋다고 하지 말고, 딱 하나 내세울 만한 것 있으면 말해봐” 했더니 망설임 없이 “아이스크림!”이란다. “물 베이스 아이스크림 들어보셨어요? 아이스크림은 공기의 예술이라잖아요. 지방을 치대 자잘한 공기방울을 집어넣는 게 아이스크림 제조의 포인트죠. 그게 대부분 유지방인데, 저희는 우유 대신 물을 넣어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요. 살 안 찌는 대체감미료도 넣고요.” 에이, 그렇게 해서 맛이 날까 싶었는데 이것저것 퍼 날라 맛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렇게 개운할 수가 있나?! 아이스크림이 사르르 녹으면서 천연 재료의 향이 입 안에서 잠시 퍼지더니 마지막에는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은 여기 사장님(‘귀뚜라미’의 따님이라고 들었다)이 매일 아침 직접 만들어요. 판에 치대면 더 쫄깃해지는데 다음엔 일찍 와서 더 다양하게 맛보세요.” 두 해 전 압구정동에서 내 입에 맞는 아이스크림이 이젠 없다며 투정한 뒤 아이스크림을 끊었는데, 여기 아이스크림이라면 가끔 맛 보러 다닐 만하지 싶다.
개념이란 사고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하는 구실을 한다. 그런데 이 개념이 경우에 따라 전혀 엉뚱한 형식으로 정립되어, 단어가 가리키는 사물에 대해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된장’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메주로 간장을 담근 뒤에 장물을 떠내고 남은 건더기”라고 적혀 있다. ‘메주’는 “콩을 삶아서 찧은 다음 덩이를 지어서 띄워 말린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니까 된장은 대부분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콩으로 만든 그 무엇’이라는 개념을 가진다.
그런데 식품에 대한 규격을 정해놓은 ‘식품공전’에 실린 된장의 정의는 다르다. “된장이라 함은 대두, 쌀, 보리, 밀 또는 탈지대두 등을 주원료로 하여 식염, 종국을 섞어 제국하고 발효 및 숙성시킨 것 또는 콩을 주원료로 하여 메주를 만들고 식염수에 담가 발효하고 여액을 분리하여 가공한 것을 말한다”라고 적혀 있다. 이를 다시 두 가지 식품유형으로 구분해서 ‘한식 된장’은 “한식 메주에 식염수를 가해 발효한 뒤 여액을 분리하거나 그대로 가공한 것을 말한다”라고 정의하며, ‘된장’은 “대두, 쌀, 보리, 밀 또는 탈지대두 등을 주원료로 하여 제국한 뒤 식염을 혼합하여 발효 및 숙성시킨 것 또는 메주를 식염수에 담가 발효하고 여액을 분리해 가공한 것을 말한다”라고 정의한다.
그러니까 우리 머릿속에 있는 된장이라는 개념에 대해 ‘식품공전’은 ‘한식 된장’이라고 국한시키고 있는 데 비해 ‘된장’은 의외로 쌀, 보리, 밀 또는 탈지대두(콩에서 콩기름을 짜고 난 찌꺼기) 등으로 만들어진 것도 포함하고 있다.
콩 외 쌀, 보리 등 다른 재료 들어가 진짜 된장 밀어내
자, 그럼 지금 주방으로 가서 된장통에 적혀 있는 원료를 한번 살펴보자. 대부분 콩 이외에 여러 곡물이 표기되어 있을 텐데, 그중 제일 많은 것이 밀이나 탈지대두다. 이번에는 집안 식구들에게 “된장을 무엇으로 만드는지 아는 사람?”이라고 질문해보자. “바보 아냐?”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나처럼 음식 칼럼을 쓰는 이진랑 씨가 두 해 전 전국의 ‘한식 된장’ 제조자를 취재한 뒤 ‘된장의 달인들’이란 책을 낸 적이 있다. 그의 취재 뒷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이다. 그가 최근 들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요즘 다들 힘들다고 난리예요. 비싼 국산 콩 사다가 메주 쑤고 수십 단지 담가 봤자 팔리질 않으니까. 식품 대기업들이 된장 전쟁이라며 덤 마케팅이다 뭐다 해서 막 뿌려대는 바람에 소비자들의 입맛이 바뀌고 있어요. 달착지근한 공장 된장에 한번 맛들이면 한식 된장은 자연히 멀어지고…. 이러다 진짜 된장은 아예 사라지는 게 아닌지 걱정이에요.”
‘식품공전’에 나와 있는 된장의 정의를 누가 내렸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단지, 콩 이외의 다른 재료로 만드는 된장이 돈이 되다보니 그 돈을 벌려는 사업자들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라고 짐작할 뿐이다(된장에 들어가는 ‘밀 가공품’의 가격이 1kg에 200원이라는 말을 들었다. 국산 콩 1kg은 요즘 도매가로 2500원 정도 한다).
내가 된장의 개념을 정립한다면 이렇게 하겠다. “된장 : 콩으로 만든 메주에 식염수를 가해 발효한 뒤 여액을 분리하거나 그대로 가공한 것을 말한다.” “된장 맛 소스 : 콩 이외에 쌀, 보리, 밀 또는 탈지대두 등을 원료로 하여 제국한 뒤 식염을 혼합해 발효 및 숙성시킨 것을 말한다.”
몇 년 전 김치의 세계식품규격(Codex)을 놓고 일본과 한판 힘겨루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김치의 제조법에서 젖산이니 구연산이니 하는 것을 첨가해도 된다고 합의해 ‘순수 발효식품’으로서의 김치에 흠집을 냈다. 된장도 세계식품규격을 정해야 할 날이 곧 올 것이다. 그때 우리는 ‘식품공전’을 앞에 놓고 큰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된장은 콩으로 만드는 게 아니었나? 일본 미소와는 뭐가 다르지?”
며칠 전 이진랑 씨와 ‘한식 메주’를 만드는 고려전통식품(www. ksdo.co.kr, 061-383-6209)의 기순도 씨를 찾아뵙고 된장의 앞날에 대해 이런저런 걱정을 하다가, 그 걱정의 시초에 ‘식품공전’이 있지 않나 싶어 식품업계에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을은 냄새로 다가온다. 출근하려고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면 싸한 향이 가을임을 알린다. 여름내 머금었던 물기를 분사하면서 내는 나무들의 무채색 향 같기도 하고, 따가운 햇살이 하늘을 말리면서 증발시키는 파르스름한 향인 듯도 하다.
가을 냄새에는 달콤함이나 감미로움이 없다. 건조하고 서늘하여 여름내 들떠 있던 오감을 오그라뜨린다. 그래서인지 가을이면 기름지고 향이 강한 음식을 찾게 된다. 가을 때문에 빼앗긴 감각을 음식으로 채우려는 것이다. 다행히 가을에는 먹을 것이 많다. 찬바람에 이는 외로움을 먹는 것으로 채우라는 자연의 뜻이지 싶다.
지금도 그렇지만 작은형과 나는 낚시광이다. 내 고향 바다는 가을이면 전어를 불러들였다. 물때를 잘 만나면 두어 시간 만에 한 주전자의 전어를 잡을 수 있었다.
찬바람 때문에 외로움 음식으로 채우기 제철
이맘때면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노량진 수산시장에 갔더니 전어가 싱싱하더라. 회 쳐서 냉장고에 넣어뒀으니 퇴근하면서 들러라.” 작은형과 내가 잡았던 고향의 그 전어 맛이 어땠는지 아직 여쭤보지 못했다. 오래 떠나 있으면, 돌아갈 일이 없으면 고향은 아픔이다.
내 고향의 가을 바다에는 전어보다 더 맛있는 생선이 있었다. 꼬시락이라 불리는 물고기로, 망둥어 종류의 하나다. 뼈째 썰어 채친 채소와 함께 초장에 버무려 먹었다. 바닷가에 꼬시락 파는 횟집이 즐비했는데, 1970년대 후반 그 망할 놈의 공해 때문에 다 사라졌다. 최근 강남 고급 횟집에서 내 고향의 꼬시락을 받아다가 고가에 판다는 소문을 들었다. 고향 사람들 말로는 오염된 앞바다에서 잡은 거라 안심하고 먹을 것이 못 된다고.
사라진 고향의 가을 먹을거리가 또 하나 있다. 청포도다.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탓에 향이 깊어 다른 지역의 청포도보다 가격이 두 배는 더 나갔다. 그런데 창원공단이 들어서면서 청포도밭도 모두 사라졌다.
고향의 가을 음식 이야기만으로 책 한 권을 쓸 듯하지만, ‘나는 뭐 고향 없나?’ 하는 독자들을 위해 지역을 옮겨야겠다.
초여름부터 나오지만 옥수수는 가을 먹을거리며, 역시 가을에 먹어야 제 맛이 난다. 단맛을 강화한 신품종들이 많지만 향에서는 강원도 토종 찰옥수수만한 것이 없다.
언제부터인지 강원 산골의 가을 음식으로 송이를 최고로 친다. 차진 촉감과 은은한 솔향이 분명 맛있는 버섯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20여 년 전만 해도 송이는 그리 귀한 존재가 아니었다. 오일장 주막 장국밥 가마솥에 둥둥 떠다녔던 것이 송이였다. 일본인들이 송이를 보면 ‘환장’을 하는데, 그 미각을 좇아 송이의 몸값이 오른 게 아닌가 싶다.
우리 조상들은 ‘일 능이, 이 송이, 삼 표고’(지역에 따라 ‘일 능이, 이 표고, 삼 송이’라고도 한다)라고 해서 능이를 최고로 쳤다. 강원도 여행 중에 혹 ‘능이전골’이라 쓰인 간판을 보게 되면, 밥때가 아니더라도 무조건 맛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가을 서해안은 뭐니 뭐니 해도 대하다. 전남에서부터 경기 북부까지 해변이며 포구며 온통 대하가 깔린다. 자연산은 극히 일부고 거의가 양식이다. 자연산으로는 전남 영광 법성포 앞바다의 것을 최고로 친다. 대하를 잡은 후 보관 문제 때문인지 자연산은 냉동이 대부분인 것이 아쉽다. 자연산이 맛있다지만, 나 같으면 살아 있는 양식 대하를 선택할 것이다. 달콤한 생살 맛에 입맛을 한번 들이면 굽거나 찐 대하는 ‘저급’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가을의 맛 중에 사과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요즘 사과에는 향이 없다. 달기만 하다. 당도 15도가 기본이다. 이 정도면 거의 설탕을 퍼먹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난히 단맛 나는 과일을 좋아하고 시거나 향이 강한 과일을 싫어해 그런 품종만 심은 탓이다. 이 때문에 사과의 왕이라 할 수 있는 홍옥이 사라졌다.
배도 있다. 그래그래, 배는 먹골배가 최고다. 밤도 있네? 밤은 역시 산밤이 최고. 에, 도토리묵도 있구나. 속껍질 안 깐 도토리로 쑨 그 쌉싸래한 맛. 응? 추어탕을 빼먹었다고? 기름이 잔뜩 오른 미꾸라지를 푹 고아 우거지에 된장 풀고…. 가을, 정말 먹을 것이 지천이다.
가을 맛 중에 이것 하나만은 빼놓지 말아야겠다. 밥이다. 사시사철 매일 먹는 밥이지만, 가을에 먹는 밥이 최고다. 막 도정한 햅쌀로 가마솥에 한 밥, 가을에 먹을 만한 음식 중에 이만한 것이 또 있을까 싶다.
밥맛의 포인트는 깨끗함이다. 그래야 국과 반찬의 강하고 깊은 맛을 순화시키고 때로는 북돋아준다. 그러고 보니 스스로 비어 있어 주변을 더 욕망케 하는 가을을 꼭 닮은 맛이다
나는 소주를 잘 마시지 않는다. 소주의 독특한 향이 음식 맛을 죽이기 때문이다. 삼겹살쌈이나 매운탕같이 마늘, 된장, 고춧가루 등 양념의 맛이 강한 음식에는 소주가 그런 대로 어울리지만 회라든지 수육 같은 ‘심심한’ 음식에는 소주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주로 청주를 마신다.
그런데 요즘 소주가 변했다. 20도 정도의 도수에 쓴맛도 거의 없다. 소주엔 청주의 부드러움은 없지만, 나름의 깨끗한 뒷맛은 있다. 나는 청주를 버리고 20도짜리 소주를 두어 달째 마시고 있다. 이게 한국 음식과 잘 어울릴 수 있나 하고.
우리나라에 소주가 들어온 시기는 고려시대 몽골에 의해서다. 그 전까지 우리 민족은 곡물에 누룩을 넣어 발효시킨 막걸리, 그리고 여기에 용수를 박아 떠올린 맑은 약주를 마셨다. 이 약주를 소주고리에 넣고 불을 때서 증류한 것이 소주다. 그래서 소주의 ‘주’ 자는 한자로 술주 자가 아니다. 가끔 술자리에서 소주의 ‘주’를 한자로 쓰는 내기를 한다. “주 자 제대로 쓰면 내가 술값 내고, 틀리면 네가 술값 내는 거야.” 상대방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것도 못 쓸까봐”라면서 ‘酒’라고 턱 쓴다. 그러면 내가 이기는 것이다. 소주의 한자는 ‘燒酎’다. 불 기운으로 두 번 거른 술이란 뜻이다. (지금까지 나의 승률은 100%다. 독자 여러분도 술자리에서 내기 한번 해보시길.)
전통 소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안동소주, 문배주 등이다. 이들 술은 명주에 든다. 이외에 알려지지 않은 소주들도 있다. 예전 집에서 몰래 내린 밀주인데, 이런 술들이 꽤 있다. 전국을 돌며 음식 여행을 할 때 이 밀주들을 찾아 마시는 일을 했는데, 사실 그다지 만족스러운 맛은 아니었다. 소주 내리는 기술이 간단치 않은 까닭이다. 불과 물, 알코올의 ‘생리’를 완벽하게 파악해야만 단내 나지 않고 역겹지 않으면서 부드럽고 순한 소주를 내릴 수 있다. 전문가들 의견으로는 소주 내리는 공력이 적어도 20년쯤 되어야 “소주 좀 내릴 줄 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음식 바뀌니 술도 바뀌어 … 독한 소주 “캬” 소리 그리워
이런 밀주들 중에 내 입에 최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 법성포 소주다. 전남 영광군 법성포는 고려시대 몽골의 해양 전진기지 노릇을 했는데, 그때 몽골인으로부터 소주 내리는 비법을 전수받아 아직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동네 사람들의 말로는 네댓 집에서 소주를 내린다고 한다. 밀주이니 내놓고 파는 집이 없어서 법성포 포구 근처 식당들을 배회하며 ‘집에서 내린 소주’를 찾아야 한다. 서너 번 이 술을 맛봤는데, 이만한 소주는 정말 드물다. 낮은 불에 천천히 내려서인지 단내가 전혀 없고, 깨끗하게 넘어가며, 뒷맛이 깔끔하다. 또 술기운이 저 아래 단전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와 좀처럼 머리까지 치지는 않는다. 좋은 술은 아래에서 기운이 올라오고 나쁜 술은 가슴, 더 나쁜 술은 머리에서부터 올라온다. 만취 후 다음 날 아침이 가뿐한 것도 이 술의 매력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런 전통 소주를 거의 마시지 못한다. 비싸기도 하거니와 소주 내리는 집도 드문 까닭이다. 우리가 주로 마시는 것은 ‘공장 소주’다. 이들 소주는 ‘숯에서 몇 번을 걸러 순하다’고 광고하지만 라벨을 자세히 보면 이것저것 ‘조미료’를 넣어 독한 맛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한 민족이나 국가가 지니고 있는 음식문화의 절정은 술이라고 말한다. 그 술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에 어울리는 음식과 함께 있어야 의미가 있다. 한때 한국의 술은 막걸리였다. 김치나 된장에 풋고추만 있어도 맛있는 술이었다. 그러니까 채식에 어울리는 술이다. 최근의 한국 술은 소주다. 육식이나 짜고 매운 음식과 어울려 그렇게 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최근 두어 달 동안 20도짜리 소주를 줄곧 먹으며 소주 회사의 마케팅이니, 여성 음주문화의 변화 등 ‘순한 소주 시대’에 대한 여러 원인들을 들었다. 다 일리 있는 말들이다. 그러나 맛칼럼니스트로서의 내 시각은 이렇다. ‘음식이 바뀌니 술도 바뀌는 것’이라고. 육류에서 해산물로, 강한 맛에서 순한 맛으로 한국인이 즐기는 음식이 바뀌어가고 있다는 방증이 아닌가 싶다. 이런 흐름이라면 ‘독한’ 전통 소주는 맥을 더 못 출 것으로 예상돼 한편으로 서운한 감정이 일기도 한다.
한국 사람 대부분은 붉은 살 사이에 하얀 기름이 실처럼 촘촘히 박혀 있는 상강육을 최고의 고기로 여긴다. 마치 서리가 내린 상강(霜降) 모습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정육점에서도 상강이 잘된 고기가 제일 비싸다. 서울 강남의 잘나가는 식당들도 하나같이 상강육을 쓰고 있음을 강조한다.
‘상강’이 맛있는 쇠고기의 조건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육식문화가 발달한 서양에서는 상강을 그리 높이 치지 않는다. 반면 일본은 상강육에 대한 선호도가 매우 높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생각 없이 일본 음식문화를 좇은 결과가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내기도 한다. 과연 상강육이 맛있는 쇠고기일까?
같은 음식을 내는 식당들을 거의 동시에 취재해 비교하는 일이 간혹 있다. 한번은 같은 스타일의 고깃집을 10분 간격으로 가서 맛보기도 했다. 서울에서 등심 주물럭으로 꽤 이름난 집들인데, 두 집 음식을 연이어 먹어보니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단 두 집 다 숙성 쇠고기를 쓴다는 점은 같았다. 빛깔로 보아 일주일 정도 숙성시킨 듯했다. 쇠고기는 싱싱할수록 맛있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 정도도 고기를 잘 아는 식당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맛 차이는 상상외로 컸다.
일정 기간 숙성하면 ‘붉은 고기 감칠맛’ 더 풍부
먼저 ㄱ집. 이 집 등심은 고기 질이 한결같지 않았다. 어떤 것은 곱게 상강이 되었으며, 어떤 것은 기름이 전혀 없어 목살이 아닌가 싶었다. 등심도 세부 부위에 따라 상강도가 달랐다. 그런데 상강된 고기든 상강되지 않은 고기든 다 맛있었다. 오히려 기름이 적은 고기가 감칠맛이 더 났다. 상강육이 부드럽다는 장점은 숙성육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기름 없는 고기도 충분히 숙성시키면 그만큼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름이 고기 맛을 방해하기도 했는데, 기름은 고소한 맛만 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느끼함을 내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상강육의 미감이 떨어졌다.
다음은 ㄴ집. 이 집 등심은 겉보기에는 최상의 것이었다. 유백색의 기름이 붉은 살 사이에 촘촘히 박혀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입에 침이 돌았다. 고기 질도 한결같아 ㄱ집보다 나았다. 그러나 숯불에 구운 고기를 한 점 먹고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소해야 할 기름은 느끼함만 주었고, 붉은 고기 맛은 맹탕에 가까웠다.
독자 여러분도 ㄴ집 같은 상강육을 먹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맛있을 것 같은데, 실상은 영 아닌 경우 말이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그 이유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우리의 입맛에 대해 점검해보자. 상강육을 구우면 고소한 냄새부터 난다. 기름이 불길에 타면서 입에 침이 절로 고인다. 또 기름이 많다 보니 부드럽다. 고소하면서 부드러운 맛! 이게 상강육의 맛이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에서의 쇠고기 선호도는 부드러움과 고소함에 치중되어 있고, 따라서 상강이 잘된 고기가 최고의 고기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쇠고기 맛에는 고소함과 부드러움밖에 없을까? 내 경험으로는 진짜 쇠고기 맛은 ‘붉은 고기의 감칠맛’에 있다. 이 맛은 싱싱한 쇠고기보다 일정 기간 숙성한 고기에서 더 풍부하게 느껴진다. 쇠고기를 0℃ 전후에서 보관하면 카텝신이라는 자체 효소의 작용으로 육질이 부드러워지고 새로운 맛을 더하는데, 이를 숙성이라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숙성육을 파는 정육점이나 식당은 거의 없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소비자들의 기호 탓이 가장 크다. 싱싱함과 고소함, 부드러움을 쇠고기 맛의 ‘기본’으로 여기는 까닭에 숙성육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소 한 마리에서 나오는 상강육의 양은 매우 적다. 운동량이 많은 부위일수록 기름이 적은데, 상강육은 운동량이 거의 없는 안심이나 등심 같은 부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상강육이 비싸게 팔리니 축산농민들은 상강도를 높이기 위해 소에 별별 사육방법을 다 동원한다. 고단백에 고지방 사료를 먹이는 것은 물론이고, 맥주를 먹이고 마사지까지 시킨다. 인공적으로 다른 부위에도 기름이 끼게 하여 상강육을 얻는 것이다. 이런 소가 과연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육식을 선호하는 서양인들은 우리와 달리 기름이 거의 없는 붉은 고기의 맛을 즐긴다. 그들과 우리의 입맛 차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잘못 길들여진 미각으로 인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쇠고기 맛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또 그 왜곡된 미각으로 인해 건강하지 못한 소를 키우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고 말이다.
나는 남녘 바닷가 소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바다가 있고, 어시장이 있었다. 30여 년 전만 해도 내 고향 바다는 맑디맑았다. 고향을 떠난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어릴 때 먹고 자란 이 ‘바닷것’들의 강렬한 향이 온몸 구석구석에 배여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바닷것들은 식탁에 오르면 벌써 그 맛이 변한다. 다듬고 씻고 조리하는 과정에서 그 향을 잃는 까닭이다. 내 기억 속 최초 바닷것의 맛은 굴이다. 바위에 닥지닥지 붙어 있는 굴을 돌멩이로 깨뜨려 날름 핥으면, 찝찌름한 맛에 이어 ‘화~’한 굴향이 요동을 치다가 달콤함이 잔잔하게 밀려온다. 그 맛에 한번 중독되면 굴 껍데기 때문에 생채기가 나는지 밀물이 들어와 바다에 갇히는지도 모르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조개구이집들이 번창 중이다. 어릴 적 고향에선 조개가 반찬용이었지, 조개 그 자체만을 요리로 즐기지는 않았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조개구이가 별미였다. 바다 옆 유리공장에서 나오는 폐유리가 구이판이었다. 유리병이 되지 못한 유리 덩어리에 남은 열은 나무를 대면 불이 날 정도로 강렬했다. 불기운이 조금 잦아들면 여기에 조개를 올렸다. 조개는 올리자마자 ‘딱!’ 하고 벌어진다. 그 진하디진한 조개 육즙의 맛이란! 요즘 조개구이집에서는 이 맛을 느낄 수가 없다. 아마 수족관에 오래도록 담겨 있어서 맛이 다 빠진 탓이리라.
어릴 적 강렬한 향 몸에 남아 불쑥불쑥 입맛 자극
‘청소년’ 소리를 들을 무렵부터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것들이 꽤 다양해졌다. 큰 바위 밑을 뒤져 해삼을 건지고 뻘 속을 헤집어 낙지를 잡기도 했다. 대부분 그 자리에서 먹어치웠는데, 해삼이며 낙지는 이가 안 들어갈 정도로 딱딱했다. 원초적인 맛 바로 그것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는 낚시를 했다. 세 살 위인 작은형과 망둥이, 놀래미, 전어 같은 ‘잡어’들을 잡았는데 가끔 숭어 같은 ‘고급 어종’을 낚을 때도 있었다. 이를 바로 회쳐서? 하지만 집에 가져와 비늘 치고 배 따서 말린 뒤 찌거나 구워 먹었다.
나는 생선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식으로 찜이나 구이를 꼽는다. 회가 최고 아니냐고? 회도 맛있지만 바다향을 느끼기에는 약하다. 생선을 구덕구덕하게 말리면 바다향은 더 은은해지고 감칠맛은 깊어지는데, 이를 굽거나 찌면 그 향과 맛이 한결 좋다.
생선을 깨끗이 손질한 다음 굵은 소금을 뿌려 생선 몸 안에 있는 잡물을 뽑아내야 구이든 찜이든 맛이 난다. 반드시 채반에 널어 생선에서 나오는 물이 바깥으로 떨어지게 해야 한다. 빨래 널듯 말리는 것도 같은 이유다. (어물전에선 비닐봉지에 생선을 담아 소금을 팍팍 뿌려주는데, 이를 그대로 냉장 보관하면 맛을 버린다. 하루 정도 채반에 널어두었다가 냉장 보관하는 것이 좋다.)
중학교 때 바닷것들에 대한 탐험이 더욱 과감해졌다. 물속으로 들어가 확인(?)한 뒤 잡으려 들었다. 작은형과 나는 ‘잠수 2인조’였다. 커다란 고무 튜브에 살림망, 작살 등 도구를 챙겨 배를 타고 약간 먼 바다로 나갔다. 바다 바닥에 돌덩이가 많을수록, 수초가 잘 자라는 곳일수록 먹을 수 있는 바닷것들이 많았다. 회맛이 최고라는 작살고기! 그러나 어린 우리들의 작살에 맞아주는 물고기는 아주 드물었다. 꽃게는 참 많이 잡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났다. 어머니는 서울 시장판의 바닷것들을 하나같이 ‘못 먹을 것들뿐’이라고 하셨다. 갈치, 조기, 고등어, 임연수어가 전부이고 그나마 냄새 풀풀 풍기는 한물간 것들만 즐비했다. 시장의 바닷것들을 보면 항상 고향 생각이 났다.
서울 생활 20여 년. 그동안 이 도시의 먹을거리들이 참 많이도 바뀌었다. 80년대 고도성장기에는 온통 갈비와 삼겹살만 먹어대더니, 90년대에는 광어회로 잔치를 벌였다. 근래에는 다종다양한 바닷것들을 먹기 시작했다. 전어, 짱뚱어, 쥐치, 주꾸미, 개불, 물메기 같은 허접한(?) 것들에서도 깊은 맛이 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하다.
양수가 바닷물과 비슷하다는 말을 들었다. 인간의 생명 근원이 바다에 있다는 증거일 게다.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양수를 온몸으로 맛본다. 바닷것이 당기는 것은, 그러니까 내가 바닷가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리라.
우리가 흔히 먹는 국수는 칼국수, 냉면, 막국수, 라면, 자장면, 짬뽕, 우동, 스파게티, 온면, 비빔국수 등이다. 최근에는 이탈리아 파스타 전문점, 일본식 우동, 태국식 해물국수, 말레이식 튀김국수 등을 파는 식당들도 속속 생겨나 음식의 세계화를 실감할 수 있다.
국수란 밀가루, 메밀가루, 감자 녹말 등을 반죽해 얇게 민 뒤 가늘게 썰거나 국수틀에 넣어 뽑거나 길게 늘인 음식을 말한다. 이 국수가락을 말리면 건면이 되고, 그냥 먹으면 생면, 기름에 튀기거나 열풍에 말리면 즉석면이 된다.
국수가락 만드는 방법은 대개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밀대로 반죽을 밀어 칼로 써는 방법이다. 우리의 칼국수, 일본의 소바(메밀국수), 이탈리아의 파스타(밀가루로 만드는 이탈리아 음식의 총칭. 스파게티와 마카로니도 파스타의 일종) 중 일부가 이렇게 만들어진다. 재료와 반죽 솜씨에 따라 그 쫄깃쫄깃함이 달라진다. 요즘에는 반죽을 납작하게 만들어 국수를 써는 기계가 일반화되어 손으로 썬 칼국수 맛을 보기가 어렵다.
둘째, 밑에 구멍이 숭숭 뚫린 국수틀에 반죽을 넣어 눌러 뽑는 방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칼국수 외에 모든 국수를 이 방법으로 뽑는다. 이 방법이 자리를 잡은 데는 국수 재료와 관련 있다. 반죽을 밀대로 밀어 칼로 썰거나 잡아 늘이려면 밀가루처럼 끈기가 있는 재료여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밀가루가 귀해서(밀 재배 북방 한계선은 충청남도를 넘지 못한다) 메밀가루에 녹두 녹말 또는 감자 녹말 등을 넣거나, 녹두 녹말에 밀가루를 넣은 반죽이 주종을 이루었기 때문에 국수틀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반죽을 늘여 국수가락을 뽑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다시 중국식과 일본식으로 나뉜다. 중국식은 반죽을 양옆에서 잡고 바닥에 탁탁 쳐서 늘인 후 반으로 접어 다시 늘이는 방법이다. 예전엔 중국집에서 흔히 볼 수 있었으나 고된 훈련이 필요한 이 기술을 배우는 사람이 없어서 한때 인간문화재만큼이나 귀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수타면 붐이 일면서 기술자들이 많이 늘었다.
일본 소면은 한 덩어리의 반죽에서 한 가닥의 국수를 뽑아낸다. 반죽을 둥그런 홈에 밀어넣어 길쭉하게 만들고 이를 다시 좁은 홈 속에 넣는 방법을 되풀이하는데, 마지막엔 두 개의 막대기에 국수가락을 빙빙 둘러 감은 후 막대기를 잡아당겨 늘인다. 이 과정에서 국수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두어 시간 단위로 숙성시킨다. 반죽에서 국수가 완성되기까지는 아홉 시간이 걸린다. 국수 만드는 방법 중 가장 정교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외국 국수 밀물 … 국수 대접하는 결혼식도 보기 힘들어져
최근 일본식은 물론 이탈리아식, 태국식, 말레이식 등 외국 국수가 속속 국내로 진출하고 있는 반면, 우리 음식문화에서 국수의 의미는 점차 퇴색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국수는 혼례 및 손님맞이용으로 귀하게 여겨지던 음식이다. 특히 혼례에서 합환주와 함께 신부와 신랑이 국수를 나눠 먹게 함으로써 국수가락처럼 길고 오래도록 금실 좋게 살라는 뜻을 새기게 했다. 하객들도 같이 국수를 먹으며 백년해로를 기원했다. 또 서울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면 칼국수를 내놓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모든 풍습이 사라졌다.
음식은 문화다. 파스타에는 이탈리아 문화가, 우동에는 일본 문화가, 해물국수에는 태국 문화가 묻어 있다. 우리는 음식만이 아니라 그 문화를 먹는 것이다. 각국의 음식을 다양하게 먹음으로써 우리의 문화가 풍성해질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 음식문화는 지켜가면서 그들의 문화를 즐겨야 하지 않을까. 가을이 깊어지면서 청첩장을 자주 받는다. 국수를 혼례 음식으로 내놓는 결혼식에 가보고 싶다.
우리 부부는 전통혼례를 올렸다. 결혼한 지 20년 가까이 돼가는데 그때 전통혼례를 두고 참 말이 많았다. 집안 어른들은 너나없이 전통혼례에 반대했다. 그 다음에는 혼례 음식을 두고 설전이 벌어졌다. 나는 전통을 지켜 국수로 하자고 하고, 어른들은 갈비탕은 내야 제대로 접대하는 거라고 하고…. 이도 우겨서 국수로 정했다. 내 자식놈들 결혼식도 그렇게 시킬 예정이다. 그런데 이놈들이 내 말을 들을까 걱정이다. 내 결혼식 이후 전통혼례에 가본 적도 없고 국수를 대접하는 집도 못 봤으니 말이다
오피스타운에는 반드시 복집이 있다.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그런대로 편안하게 밥을 먹으면서 대화할 수 있는 식당으로 딱 알맞기 때문이다. 이 칼럼의 연재 제의를 받고 ‘주간동아’ 편집장과 첫 미팅을 한 자리도 서대문 네거리에 있는 복집이었다. 편집장이 장소를 정했는데 맛은 ‘중상’ 정도는 되었다. 만약 그때 우리가 만난 복집이 무척 맛있는 집이었다면(나는 사실 그 집 상호도 몰랐다) 내가 주눅이 들어 글을 잘 못 쓸까 봐 일부러 배려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실 웬만한 복집은 다들 ‘중상’은 된다. 맛내는 것이 그다지 복잡하지 않고 복 하나만 다루니 노하우 축적이 쉽기 때문이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복국 맛없다고 소문난 집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복을 끓여 그릇에 담아내면 복국, 냄비에 담아 끓이면 복지리, 이를 맵게 끓이면 복매운탕이라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들을 모두 복국이라고 불러도 크게 상관없을 듯하다. 복국은 경남 해안 도시에서 크게 발달한 음식이다. 특히 마산과 부산의 복국이 유명하다. 스타일은 대동소이하다. 부산권 중에서 최근 복국이 맛있기로 소문나기 시작한 곳이 있는데, 바로 기장이다. 어디서부터 유래했는지 알 수 없으나 기장에서는 ‘대복’이라는 단어를 상호로 사용하는 집들이 많다. ‘대복집’ ‘대복국’ 이런 식이다. 큰 복을 쓴다고 해서 붙인 이름인 듯도 하다. 마산의 복국과 굳이 구별하자면 육수맛이 진하고 상에 놓이는 반찬이 풍성하다는 점이다.
싱싱한 해산물로 차린 반찬 … 멍게무침 특히 인상적
학교 선배가 오랜만에 전화를 해왔다. “교익아, 집사람이 복집을 냈는데 말야. 네가 와서 평가 한번 해줘야겠다.” 이 선배의 처가는 압구정동에서 30여 년 고깃집을 했는데 장모의 손맛 덕에 이름이 꽤 났었다. 가끔 그 집에서 고기를 먹곤 했지만 어디에 소개한 적은 없다. 이미 이름나 있고 장사 잘되는 집을 소개해봤자 종업원만 힘들고 손님들도 더 불편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미리 “맛있으면 이번에는 제 칼럼에 한번 쓸게요”라고 말한 뒤 가게를 찾아갔다.
선배 부인이 낸 복집은 영동 세브란스병원 후문에 있는 ‘기장 대복국’이었다. 개업한 지 서너 달은 되어 보였다. 선배가 음식 자랑에 열을 올린다(선배는 다른 사업을 한다). “너 우리 장모님 솜씨 알잖아. 집사람도 못지않거든. 원래는 장모님 가게의 분점을 내려다가 기장에서 복국 맛보고 반해서 이거 하기로 했어. 장모님하고 집사람이 기장에서 제일 잘나가는 복집에 몇 개월 동안 취직(위장취업?)해서 노하우를 전수받았고, 여기에 우리만의 노하우가 더해졌어. 재료는 다 기장에서 그날그날 받아. 맛있지?”
평소 맛있는 식당이 있으면 기억해뒀다가 꼭 나에게 알려주는 선배인데, 은근슬쩍 맛 칼럼니스트인 나보다 더 뛰어난 미각을 지니고 있음을 자랑한다. 아내가 식당을 하니 자랑이 한도 끝도 없다.
복국 육수맛이 진하다. 대부분 조개나 북어 따위로 육수를 내 혀끝에서 도는 감칠맛 정도로 끝나는데, 이 집은 뭔가 입 안 전체를 감싸고 도는 달콤한 향이 있다. 굴 같기도 하고…. “여러 해물을 넣어. 우리만의 노하우이니 말해줄 수는 없고.” 복국 국물로는 무겁지 않나 싶었는데 한김 오르고 나자 콩나물과 복 등에서 나오는 맛으로 국물이 한층 개운해졌다. 계속 들이켜도 당기는 맛이다.
복국도 복국이려니와 찬이 독특했다. 생다시마, 멸치젓갈, 반건조 갈치조림, 멍게무침 등등 기장에서 매일 받는 해산물로 만든 것들이다. 특히 멍게무침이 예술이다. 싱싱한 멍게를 아침에 따서 무쳐내는데, 특유의 쓴맛을 잡아 입 안에 향이 진동한다. 액젓으로 무쳤기 때문인지, 무르지도 쪼그라들지도 않았다.
“선배, 이 음식 내 칼럼에 써도 되지?” “어어! 그래서 불렀어. 여기 위치 때문인지 점심에는 맛있다고 소문이 나서 자리가 없는데 저녁은 좀 한산해. 있는 대로만 써.” 늦은 시간인데도 손님이 절반 이상 들어 있었다. 선배 욕심이 과한 것 아닌가!
나오는 길에 멍게무침과 갈치조림을 싸달라고 했다. 식당 음식이란 게 대부분 집에 가져와서 먹으면 맛이 덜하다. 맛있게 느껴지라고 간을 강하게 하는 탓이 크다. 그런데 멍게무침을 먹어본 아내가 감탄을 한다. “이야, 그 선배 대박나겠다. 멍게무침 어떻게 한대? 이거 배우러 같이 한번 가자.” 복국맛 보고는 또 어떤 평가를 할지…. 02-574-5811.
1. 일본에는 ‘일본 라면’이 없다
라면은 일본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생라면 식당이 간판에 ‘일본 라면’이라는 말을 적고 있다. 그런데 일본에 가면 라면은 온통 ‘중화 라면’뿐이다. ‘일본 전통 라면’은 없는 것이다. 즉, 라면에서 전통은 ‘중국식’이다.
인터넷 백과사전 등에는 라면이 중국 건면에서 유래했으며 이것이 기름에 튀긴 유탕면으로 변화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인스턴트 라면에만 해당할 뿐이다. 일본 라면은 원래 생면으로 조리한다. 진한 고기국물이나 구수한 된장국물, 깔끔한 소금국물에 가느다란 생면을 말고 그 위에 고기조림, 야채, 김 따위를 올려 먹는 음식인 것이다. 이와 비슷한 스타일의 중국 음식을 찾자면 우육탕면이 있다. 인스턴트 면만 따지기보다 국물과 고명 등의 스타일까지 감안한다면 라면의 원조는 중국의 우육탕면이 분명하다.
얼마 전 동경 뒷골목에서 라면을 먹다가 이런 생각이 번뜩 들었다. 한국에 동경식 라면집을 내면서 일본에서처럼 ‘중화 라면’이라고 간판을 달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일본 라면이 중국에 갔다가 다시 한국에 들어온 라면’ 정도로 여기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을 다른 음식에도 적용해보면 퍽 흥미롭다. 자장면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음식이지만, 한국에서 일반화되어 있다. 최근 일본에서도 자장면이 인기다. 일종의 한류인 셈이다. 한국을 다녀간 일본인들은 한국의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었기 때문에 한국 음식인지 중국 음식인지 헷갈릴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와본 적 없는 일본인들은 일본의 한국 식당에서 자장면을 먹을 것이니 간판에 ‘중화’라고 적어놓지 않으면 이를 한국 음식으로 여길 게 분명하다.
자장면이 일본에서 대중화된다면 일본의 라면집이 대부분 ‘중화 라면’이라고 간판을 달아놓았듯이 ‘한국 자장면’이라고 적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자장면은 일본인들에게 한국 음식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라면을 일본 음식으로 여기듯이 말이다.
2. 한국인 주식은 라면?
20여 년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사실 여부나 출처를 확인할 수는 없다. 너무 그럴듯하고 실감이 나서, 풍문이라고 해도 라면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인식을 짐작할 수 있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어떤 고고학자가 난지도를 조사했대. 난지도는 대한민국 서울의 쓰레기장이잖아.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이 난지도를 조개무덤쯤으로 여기고 발굴조사를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후손 입장에서 난지도를 뒤진 거야. 그럼 20세기 후반 서울 사람들의 생활상이 나오지 않겠어? 20세기 후반 서울 사람들의 주식이 뭐로 나온 지 알아? 라면이야. 음식과 관련된 쓰레기 중에 라면봉지가 제일 많았나 봐. 음식쓰레기는 다 썩었으니까….”
3. 라면에 달걀 푸는 법
나에겐 자식이 셋 있다. 똑같은 모유와 밥을 먹고 자랐는데도 이놈들의 입맛은 제각각이다. 첫째는 특별히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고, 둘째는 고기라면 사족을 못 쓰지만 푸성귀는 싫어한다. 막내 이놈이 가장 독특하다. 어릴 때부터 간장게장, 백김치 같은 ‘노친네 음식’을 즐긴다.
집에는 라면을 사두지 않는다. 인스턴트 음식을 줄이기 위한 방책이다. 그러나 애들은 아무리 말려도 안 된다. 라면을 먹고 싶다고 졸라대면 그때 먹을 양만 사오게 한다. 어느 일요일 점심때의 일이다. 특식으로 라면을 먹자며 난리였다. 라면 맛본 지 몇 주나 되었다고 하기에 승낙했다. 한 냄비 끓여 다 같이 먹나 했더니 그게 아니다. 집사람이 막내의 라면을 먼저 끓여주고 그 다음에 첫째, 둘째의 라면을 각각 끓이는 것이 아닌가. 같은 브랜드의 라면이어서 더욱 의아해하던 나에게 던진 아내의 푸념.
“입맛이 제각각이라 라면에 달걀 푸는 법이 다 달라요. 첫째는 라면이 다 끓고 난 다음에 달걀을 넣는데 노른자를 깨뜨려서는 안 되고, 둘째는 라면이 끓을 때 다른 그릇에 푼 달걀을 천천히 부으면서 휘휘 저어야 해요. 그리고 셋째는 다 끓고 난 다음에 달걀을 넣고 젓가락으로 깨뜨려야 해요.”
인스턴트 라면에 달걀을 넣는 방법만으로도 맛 차이가 난다는 게 나로서는 무척 신기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라면 요리법을 검색해보면 인스턴트 라면으로 얼마나 다양한 ‘장난’을 치는지 정말 놀라울 뿐이다. 인스턴트 음식이 아이들에게 획일화된 입맛을 강제하는 만큼 먹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맛의 세계가 있는 것일까.
몇 달 전 이 칼럼을 통해 발해농원에서 전두부(콩을 통째로 곱게 갈아 굳힌 두부)를 만든다는 얘기를 언뜻 내비쳤다. 소비자 선호조사니 샘플링이니 하는 것을 통해 나온 반응이 워낙 좋아 사실 나는 요즘 기분이 ‘업’되어 있다. 일본 식품 전문가도 일본 전두부보다 낫다고 평가했으니 한국의 맛 칼럼니스트로서 기쁘기 한량없다. 이는 모두 우리의 기술 덕분이라 여기고 있는데 발해농원의 한 협력업체에서 시시때때로 딴죽을 건다.
“전두부가 맛있는 것은 당신네 기술 덕만이 아니오! 우리가 공급해주는 콩이 좋아서 그런 거지. 다른 콩 갖고 한번 만들어보시오, 그 맛이 나나.”
‘자연과 콩’이라는 회사인데, 콩 수확량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종자에 어떤 물질을 코팅해 재배하는 방식이다. 발해농원에서 운영하는 연해주 농장의 콩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이 회사 기술을 도입해 콩 재배를 하고 있는데 콩 수확량이 확실히 늘었다. 그런데 이 회사의 기술로 재배한 콩은 맛까지 달랐다. 사실 이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나였다.
종자에 특이물질 코팅해 재배했더니 쓴맛 없고 뛰어나
모 농협에서 자신들도 전두부를 생산해보겠다며 샘플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들이 보내온 국산 콩으로 전두부를 만들었는데 맛이 영 이상했다. 비리고 쓰고, 어떤 사람은 화학약품 냄새까지 난다고 했다. 콩이 상한 것 같아 농협에 다시 콩을 보내달라고 했지만 새로 보내온 콩도 마찬가지였다. 공장에서는 난리가 났다. 설비에 잘못이 있는지, 응고제에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없어 몇날 며칠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다 다수확을 위해 종자 처리한 국산 콩으로 전두부를 만들어보았다. 그랬더니 제맛이 났다.
다수확을 위해 처리한 콩과 일반 콩을 번갈아가며 생으로 맛보았다. 종자 처리한 콩은 땅콩처럼 고소한 반면, 일반 콩은 비린내가 쑥 올라왔다. 콩에서 이런 차이가 나다니! 그때까지 발해농원에서 전두부를 만들 때 종자 처리한 콩만을 사용해 그 차이를 몰랐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전두부를 만들 때 콩의 씨눈을 제거한다. 씨눈에는 이소플라본이 다량 함유돼 있는데 이것이 쓴맛을 내기 때문에 제거하는 것이다. 두유회사에서도 씨눈을 제거해 두유를 만든다. 모 두부회사에서도 씨눈을 제거한다고 들었다. 맛 때문에 이소플라본을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발해농원에서는 씨눈을 제거하지 않고 전두부를 만들어도 맛있어서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친김에 모 대학 교수에게 종자 처리한 콩과 일반 콩의 성분 비교를 의뢰했다. 결과는 예측한 대로였다. 종자 처리한 콩은 콩 비린내를 내는 헥사날 성분이 일반 콩보다 3분의 1 가량 적었다. 이 정도 차이만으로도 맛에서는 큰 영향을 미친다. 음식에서 느껴지는 이미(이상한 맛), 이취(이상한 냄새)는 여러 성분이 뒤섞여 나는 것으로 그중 한 성분만 줄여도 사라진다. 그러니까 비린내 성분이 적어 이소플라본의 쓴맛이 크게 작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두부가 일반 두부보다 이소플라본 함량이 3배나 많지만 쓴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처리 콩의 맛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나지만 신이 난 업체는 ‘자연과 콩’이다.
요즘 식품업계에 전두부 홍보하러 다니면서 ‘자연과 콩’의 처리 기술도 함께 알리고 있다. 맛있는 음식을 소개하는 맛 칼럼니스트로서의 역할도 있고 해서다.
‘자연과 콩’ 대표는 농업언론계에서 꽤 촉망받는 기자였다. 그가 사업을 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그가 신문사를 나와 콩 다수확 재배 기술을 보급하는 일을 하고 있다. 잘나가던 직장을 때려치우게 한 것은 콩이었다.
“유전자 변형 콩은 제초작업 등의 생산비를 줄이고 다수확을 하기 위한 것이잖아. 이를 이길 수 있는 길은 유전자 변형 콩보다 생산성을 더 높이는 것이고. 이 기술이면 되겠다 싶어 일생을 걸기로 했지.”
그의 기술로 콩을 재배하면 평균 2배 정도 수량이 는다. 게다가 맛까지 차별화되니 콩 관련 사업자로서도 이 기술이 널리 보급되기를 바랄 뿐이다.
주변 사람들은 맛 칼럼니스트로서의 내 미각을 의심한다. 맛있는 음식과 맛없는 음식을 가려낼 줄은 알고 쓰느냐는 것이다. 나를 설핏 아는 사람들은 더 그런다. 거의 매일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감별하는지 의아해한다.
나는 음식을 가려 먹는 미식가가 아니다. 그렇다고 뛰어난 미각을 타고난 것도 아니다. 10년 넘게 맛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남달리 특출난 뭔가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 뭐가 잘나서 맛칼럼니스트인가. 지금까지 공부해온 음식 맛 이야기를 좀 할까 한다.
애초에 나는 배추, 무, 마늘, 사과 등이 품종과 재배방법, 재배지에 따라 맛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 유통과정까지 아우르는 전문기자가 되고 싶었다. 그때 ‘농민신문’을 다녔는데, 3년 정도 전국을 돌았더니 스스로 농산물 전문기자라고 여길 만큼 지식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농산물로 만드는 최종 결과물인 음식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관련 서적을 훑었다. 당시엔 음식 전문필자 두서너 명이 맛있는 식당을 소개하는 책이 전부였다. 그 책을 들고 음식점을 찾아다녔다. 몇 달도 안 되어 나는 이 책들을 버렸다. 대체 무슨 기준으로 음식이 맛있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집들이 절반을 넘었던 것이다. 보통의 입맛을 지니고 있을 뿐인 내 입에 이러니….
그때부터 내가 공부하는 장소는 책상이 아니라 식탁으로 바뀌었다. 음식을 그냥 먹지 않고, 소 되새김질하듯이 콩나물 하나도 꼬장꼬장 맛의 포인트를 찾아나갔다.
까탈스럽게 최상의 맛 따지다 욕도 많이 먹어
예를 들어 김치찌개가 있다 치자. 먼저 머릿속에 최상의 김치찌개를 떠올린다. 김치의 발효와 익힘 정도에 따른 아삭함과 물렁함의 조화, 유산균의 상큼함과 육수 및 각종 양념의 어울림, 두부의 촉감과 익힘 정도…. 최상의 김치찌개가 그려졌으면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잘되었는지가 아니다) 따진다. 맛이 최상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 원인이 재료에 있는지, 조리방법에 있는지를 따진 뒤 어떻게 하면 최상의 맛이 날지에 대해 궁리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감도 잘 오지 않는 데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이런 짓거리를 한다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때 제일 확실히 효과를 거두는 방법은 맛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과 그 자리에서 토론하는 것이었다. 그럼 “이거 두부 간수를 안 빼서 텁텁한 거야” “두부는 찌개 다 끓고 난 다음, 내기 바로 전에 넣어야 안 흩어지고 국물이 탁해지지 않지” 등등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생각만큼 쉬운 공부는 아니다. 맛을 본답시고 김치찌개 국물을 연거푸 떠먹는 것만으로도 동석한 이들의 핀잔을 들을 수 있다. “사람이 까탈스럽기는, 쯧쯧.”
그러나 공부의 효과는 엄청났다. 실제로 이렇게 해보면 여러분도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음식을 먹는지 말이다.
나와 함께 한정식집에 갔다고 생각해보자. 식탁에 앉자마자 나는 이런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할 것이다.
“아, 여기는 코스로 나오는 한정식집이군요. 요즘은 한상차림이 거의 없어졌죠. 초반 음식은 밥과 같이 먹을 일이 없다 보니 간이 많이 약해졌어요. 전채요리로 탕평채가 나왔네요. 탕평채 맛과 모양을 내는 일은 참 어려워요. 청포묵의 은은한 때깔을 살리려면 간장을 많이 넣어서는 안 돼요. 그렇다고 소금으로 간을 하면 쓴맛이 나고요. 그래서 어중간한 맛이 나는 게 보통이죠. 한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장맛이에요. 그런데 한정식집 가운데 직접 장을 담그는 곳이 얼마나 될까요? 그러니 식초 담그는 집은 아예 생각도 못해요. 자, 이제 음식 재료도 따져볼까요. 사실 좋은 재료만 확보해도 음식 맛은 확연히 달라져요. 여기 돼지고기수육이 있네요. 어떤 집들은 자신만의 비법 양념을 넣고 끓였다면서 자랑하지만, 돼지고기 자체의 풍미는 느낄 수 없을 때가 많아요. 좋지 못한 돼지고기 냄새를 잡으려니 잡다한 양념이 들어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죠. 집에서 최상급의 돼지고기 목살을 사다가 된장, 생강만 넣고 끓여보세요. 얼마나 맛있는지. 이건 도라지인데 향이 없네요. 시장에서 깐도라지를 사다가 물에 담가놓으니 향이 다 달아난 거예요. 식당에서 생도라지 사다가 까서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죠? 아무리 때깔을 내고 온갖 양념으로 버무려도 재료 그 자체가 시원찮으면 맛이 날 리가 없어요. 너무 까다롭게 군다고요?”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나와 음식을 먹을 때 되도록 음식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입맛 다 떨어지기 때문이다. 맛 칼럼니스트 행세를 하고 다니면 이래저래 욕먹을 일이 많다
지난 호 ‘주간동아’ 커버스토리는 ‘디지털족 음식남녀 행복찾기’였다. 인터넷 공간에서의 음식에 대한 열기는 정말 대단하다. 맛 칼럼니스트인 나도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온갖 식당을 섭렵해 시시콜콜 음식평을 올리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음식 전문가가 따로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면서 한국에서도 인터넷 공간 속의 ‘비전문적인’ 음식전문가들을 잘 조합하면 ‘미슐랭 가이드’ 같은 미식비평 잡지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미슐랭 가이드’에서는 미식가의 나라 프랑스에서 100여 명의 평가단이 비밀리에 식당에 잠입, 취재해 점수를 매긴다. 이 책에 이름이 오르면 그 식당은 그야말로 세계적인 식당이 된다. 그만큼 독자가 신뢰할 만한 객관적인 평가를 한다는 말인데, 점수는 별의 수로 나타낸다).
이런 생각은 나만 한 것이 아니었다. 몇 년 전 식당 소개를 전문으로 하는 모 사이트 측으로부터 ‘맛 평가단을 조직해 점수 매기기를 하려고 하는데 동참할 수 있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흔쾌히 하겠다고 답했다. 평가단 면면을 살펴보니 웬만큼 객관적인 평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 이 기회에 한국판 ‘미슐랭 가이드’를 만드는 거야” 라고 다짐했다.
맛 평가는커녕 툭하면 요리사 교체가 현실
그러나 며칠 지나면서 과연 한국판 ‘미슐랭 가이드’가 가능할까라는 고민에 빠졌다. 평가단의 미각 수준이 못 미더워서가 아니었다. 우리가 평가할 식당의 수준에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수시로 주인과 주방장이 바뀌는 데다 주방장보다는 잡일하는 주방 아주머니들의 솜씨에 따라 그날그날 맛이 달라지는 우리나라 식당의 음식을 평가한다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다.
사례1) 술 한잔 하고 귀가하는 길에 가끔 들르는 동네 해장국집이 있었다. 맑고 개운한 국물에 신선한 선지, 냄새 없이 깔끔하게 손질한 내장이 깊은 맛을 냈다. 점수로 치면 청진동 유명 해장국보다 50점은 더 줄 수 있는 맛이었다. 어느 방송사에서 맛있는 해장국집을 찾는다기에 이 집을 적극 추천하고 그날 저녁에 확인차 가보았다. 그런데 헉, 이럴 수가! 냄새나는 탁한 국물에 선지도 시원찮고 내장도 질겼다. 다음 날 그 집 추천을 취소했다.
몇 달 후 그 집을 다시 찾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주방장과 주인, 종업원 모두가 낯설다. 주인이 바뀌었냐고 물으니 아니란다. 주인과 주방장이 바뀌어도 단골을 잃지 않으려고 아니라고 발뺌하는 식당이 많다. 얼마 되지 않아 그 식당과 똑같은 상호의 해장국집이 두어 블록 건너에 새로 생겼다. 그 새 식당에 옛날 주인이 앉아 있었다.
사례2) 라면을 비롯해 일본의 서민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서울에서는 드문 일식집이 있었다. 주인이 일본인이라 우리 입맛에 맞추려 하지 않고 그들의 토속적인 맛을 고집하는 게 무척 신선했다. 라면만 따지자면 서울에서 최고의 점수를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신장개업’을 했다. 예전의 선술집 분위기를 잃어 아쉬운 데다 맛도 그 맛이 아니었다. 그 집을 나오면서 물어보니 주인이 바뀌었단다. 가게 이름은 그대로였다. “예전 주인이 노하우를 다 전수하고 갔어요.” 음식맛이란 게 노하우 전수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음식 장사하는 사람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사례3) ‘옛날 자장면’으로 유명한 중국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분점을 내려는 사람이 찾아와 주인과 상담을 하고 있었다. 주인 왈, “주방장은 걱정 마세요. 낙원동 인력시장에 가면 널린 게 중국집 주방장이에요. 하루하루 ‘땜빵’해도 돼요. ‘우리 집은 이런 스타일로 음식을 낸다’고 코치만 하면 딱 그 맛이 나와요.” 하기야 자장면 맛 달라졌다고 투정할 손님이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 외식업계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지만 손님은 이런 속사정을 잘 모른다.
그 장소에 그 상호면 항시 같은 음식이 나오는 줄 안다.
최근 어느 출판사에서 단행본 출간 제의가 들어와 10여 년간 취재한 식당 목록을 놓고 확인 작업을 했다. 하지만 절반 이상이 문을 닫았거나 주인이 바뀌고, 나머지도 옛날 그 음식맛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식당 목록은 그래도 음식 잘하기로 꽤 이름난 식당들이었는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미슐랭 가이드’의 별 달기 권위는 100년이 넘는 역사에 100여 명이나 되는 익명의 평가단이 내린 객관적인 시식평이 아니라, 맛과 전통을 목숨처럼 여기는 요리사들의 장인정신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판 ‘미슐랭 가이드’? 지금으로 봐서는 참 요원한 일이다
처음 가는 음식점에서 나는 차림표를 들고 꼬치꼬치 묻는 버릇이 있다. 만둣국이라면 “육수는 뭘로 내나요? 북한식인가요? 피는 어느 정도 얇은가요? 부추는 넣나요?” 등을 묻는다. 동행자가 있다면 속으로 이렇게 비웃을 수도 있다. “그래, 맛 칼럼니스트다 이거지? 차라리 부추는 몇 센티미터로 잘라서 넣고, 피는 두툼하게, 육수는 진한 사골국물로 팔팔 끓여주세요라고 주문하지 그러냐? 아니, 그냥 갖다 주는 대로 먹을 일이지.”
그럴듯한 레스토랑이 아닌 평범한 음식점에서는 이 못난 버릇을 나도 버리고 싶다. 그러나 차림표만 봐서는 내가 주문한 음식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어서 자꾸 묻게 된다.
음식에 이름 붙이는 원칙은 주재료, 조리법, 완성된 모양새, 먹는 방법 등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일 뿐이다. 수많은 변칙 음식 이름이 있고, 또 음식 작명 원칙에 따른 이름이라도 부재료와 변형된 조리법 등으로 이름과 실재에 큰 차이를 보이는 일이 허다하다.
주문한 음식 예측 가능해야 제대로 된 식당
‘된장찌개’라는 음식 이름은 ‘된장’이라는 주재료와 ‘국물을 적게 넣고 바특하게 끓인 음식’이라는 조리법이 설명되어 있어 음식 작명 원칙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먹는 된장찌개는 ‘된장찌개’라는 주재료+조리법으로는 모두 표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좀더 친절한 해물된장찌개, 버섯된장찌개, 된장뚝배기라는 이름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된장찌개는 거의 모든 음식점에서 취급한다. 그래서 된장찌개를 시켰는데 김치찌개가 나오지 않는 한, 해물이 들어갔든 냉이가 들어갔든, 뚝배기에 담겨 나오든 냄비에 담겨 나오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문제는 같은 이름의 음식이라 해도 그 음식으로 즐길 수 있는 맛의 요소들이 완전히 다른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매콤새콤 비벼 먹는 냉면과 시원 담백하게 말아 먹는 냉면, 구수한 된장이 기본이 되는 전라도식 추어탕과 육개장처럼 양지머리가 기본인 서울식 추어탕이 좋은 예다. 또 김치와 돼지고기 맛의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북한식 만두가 있는가 하면, 시원한 배추나 부추 맛을 강조하는 만두가 있고 각종 고기를 맛의 중심에 두는 만두도 있다. 비빔밥도 익힌 나물로 비비느냐 생채로 비비느냐에 따라 추구하는 맛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데 식당들은 차림표에 이를 친절하게 설명해놓지 않는다.
서울살이 초창기 때 일이다. 경상도식 추어탕밖에 모르고 살다가 서울에서 아주 유명한 추어탕을 먹으러 갔다. 첫 숟가락에 속이 울렁거렸다. 완전히 기대 밖의 맛이 났기 때문이다. 미꾸라지 맛이라곤 전혀 없이 쇠고기 국물 맛이 확 나는 이 맹탕 같은 국의 정체가 뭔지 실로 난감했다. 그래서 주인을 불러 “이게 추어탕 맞냐”고 따졌다. 옆자리 손님들은 ‘이 맛있는 음식을 두고 왜 저러지?’라는 듯한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요즘도 간간이 식당 주인과 싸우는 일이 있는데 바로 냉면 때문이다. 차림표에는 분명 ‘평양냉면’이라고 적혔는데 면을 먹어보면 질긴 감자녹말로 된 집이 허다하다. 물냉면은 평양냉면, 비빔냉면은 함흥냉면이라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평양식 냉면은 메밀로 면을 뽑고 여기에 찬 육수를 부으면 물냉면이 되고, 양념장을 넣고 비비면 비빔냉면이 되는 것이다. 함흥냉면은 감자녹말로 면을 뽑고, 마찬가지로 물냉면과 비빔냉면으로 구별한다. 그러니 처음 가는 식당에서는 냉면 하나도 이것저것 물어보고 주문할 수밖에 없다.
비빔밥도 그렇다. 익힌 나물을 넣고 비비는 비빔밥과 생채를 넣고 비비는 비빔밥은 분명 다른데도 이를 구별해 파는 식당은 별로 없다. 설렁탕과 곰탕도 구별이 모호하며, 잔치국수도 멸치육수와 사골육수를 구분해놓지 않는다. 막회는 얇게 썰어 펼쳐놓기만 하는가 하면, 아예 채소와 함께 비벼 나오는 집도 있다.
식당마다 내놓는 음식에 개성을 유지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손님이 주문하는 음식이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있게 해주어야 제대로 음식을 하는 식당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아무리 작은 식당이라 해도 문 옆에 음식 모형을 진열해놓는데 이를 배웠으면 좋겠다. 그것이 어렵다면 차림표에 좀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면 좋지 않을까. 가령 이런 식이다. “된장국 : 바지락과 마른 새우로 낸 육수에 된장을 풀어 두부와 냉이를 올린 국”. 손님 주제에 요구사항이 너무 많은가.
나는 세상의 어떤 일에든 제각각 ‘경지’와 ‘깨침’이 있다고 믿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득도의 경지가 아닌 “아하, 그게 그렇구나”라며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그 순간!
10여 년 전 어느 가을날 강원도 백담사 계곡에 단풍 사진을 찍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맨눈보다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 단풍을 본 시간이 더 많다 싶을 정도로 하루 종일 사진 찍기에 몰두해 있었다.
오후 5시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내가 있는 곳은 산 그림자에 덮였고, 반대쪽 계곡은 가을 햇살에 단풍잎이 반짝이고 있었다. 무척 아름다워 카메라를 들이대고 셔터를 눌러댔다. 줌인을 한 파인더 속의 단풍잎이 반짝거렸다. 그런데 거리를 맞추자 단풍 빛깔이 변했다. 셔터에서 손을 떼고 파인더 속 단풍을 가만히 바라봤다. 햇빛과 바람에 따라 단풍잎의 빛깔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 순간 ‘이것은 단풍이 아니라 빛이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내가 카메라로 찍는 것은 단풍이라는 물체가 아니라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단풍이 발하는 빛이었다!
한 입에 뻥 강렬한 희열 느끼는 날 기다려
두근두근 가슴 저 아래에서 밀려오는 희열! 내 눈에는 그때부터 빛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고, 그 빛의 세상은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세상과 확연히 달랐다. 그날 저녁 백담사 계곡 밑 한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도 내 눈에는 온통 빛만 보였다. 전구 불빛만으로도 ‘빛의 천국’이었다. 내 눈길은 이 물체가 지금 어디에서 들어온 빛을 어떤 방향으로 반사하고 있는지에 온통 쏠렸다. 그 다음에는 빛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림자에도 명암이 있었으며 차가운 빛과 따뜻한 빛, 거친 빛과 부드러운 빛, 칙칙한 어둠과 경쾌한 어둠이 제각각 눈에 들어왔다. 그날 밤 마침내 다다른 결론은 ‘세상은 빛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내 앞에 새로운 세계가 열렸던 것이다.
빛에 대한 깨달음 이후 나는 사진과 그림을 보는 눈이 확 달라졌다. 나처럼 빛을 본 사람의 사진과 그림이 눈에 띄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 이 사람도 빛을 보았구나. 그 희열도 맛보았겠구나. 그 희열의 잔상을 표현하려고 이렇게 찍고 저렇게 그리고 했구나.’
빛은 어느 한순간 내 가슴에 퍽 차고 들어왔지만, 글쓰기는 참 지루하게 스멀스멀 내 안으로 기어 들어왔다. 희열 같은 것이 없었음에도 내게는 분명한 경지에 오르는 일이었다.
대학 졸업 후 글쓰는 일을 밥벌이 수단으로 삼기로 작정했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기본부터 익혀야겠다는 생각에 고등학교 국어 문법책부터 펼쳤다. 한글이지만 무슨 놈의 문법 용어가 외국어보다 더 어려운지…. 그래서 한 단계 더 내려가 중학교 문법책을 봤다. 다시 고등학교 문법책, 문법 참고서, 작문법 등등을 읽었다.
멋모를 때 그렇게 잘 써지던 글도 문법 공부를 하고 난 뒤부터는 한 문장을 쓰는데도 바들바들 손이 떨렸다. 바른 문장에 대한 지식이 조금씩 쌓이면서 더 큰 괴로움을 겪었다. 책을 읽을 때도 문법적으로 오류가 없는지 문장을 ‘뜯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글쓰기에 대한 고통을 3년 넘게 겪었다. 그러니까 내 머릿속의 글감을 문법적 틀에 맞춰 쓴다는 의식을 하지 않아도 문법적 오류 없이 글이 술술 나오게 하는 데 꼬박 3년이 걸린 것이다. 이후 내 글은 문법에서 자유로워졌으며, 글을 쓰면서 멈칫하는 경우는 논리 전개의 어려움을 겪을 때뿐이다.
나와 내 동료들의 경험에 비추어, 이런 막힘 없는 글쓰기는 분명 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이 경지에 오르는 일은 자기 스스로도 언제 그랬냐 싶게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다. 그냥 글을 쓰다 보니 어느 순간 문법을 의식하지 않는 나를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이건 희열이 있는 일도 아니어서 어느새 그렇게 된 나를 덤덤히 바라보게 될 뿐이다.
이러한 자잘한 깨달음들로 인해 나의 인생은 퍽 즐겁다. 일종의 감각의 확장 같은 것인데,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즐거움을 설명하기란 참 어렵다. 이런 종류의 깨달음은 그리 귀한 것이 아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꽤 있었다. 어느 한순간 소리의 세계가 확 열리는데, 그때의 희열로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다고 한다. 그 깨달음의 세계는 알 수 없지만, 몸서리쳐지는 희열은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간다.
맛에 대해 공부하면서 가끔 맛에도 어떤 경지가 있으며, 그 경지에 오르면 강렬한 희열을 느끼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아니면 글쓰기처럼 희열 없이 부지불식간에 어느 경지에 올라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맛을 삶의 주제로 삼아 일해온 지 10여 년. 솔직히, 나는 아직 맛이 뭔지 잘 모르겠다. 맛에 어떤 경지가 있는지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가끔 맛의 한 경지에 오른 듯한 분들을 만나기는 하는데, 내 느낌에는 아직 아니다. 무슨 만화 같은 이야기냐고? 내가 일상에서 너무 나갔나….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말하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할 수 있다.’ 서양에서 전해지는 격언으로, 100%는 아니지만 정말 맞는 말이다. 좋아하는 음식 하나로 그 사람의 출생지, 가족 관계, 가정환경, 성격 등을 대충 맞힐 수 있다. 이 말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고 싶다면, 먼저 옆에 있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라고 묻는다. 그런데 만일 답을 들었는데도 얼른 감이 오지 않으면, 왜 그 음식이 좋은지 하나하나 이야기를 풀어보는 게 좋다. 같이 살면서도 잘 알지 못했던 ‘숨겨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의 음식 기호를 읽어내듯, 한 지역 또는 한 나라 사람들의 음식 기호를 분석할 수 있다. 짜고 매운 음식을 먹는 경상도 사람, 향신료를 범벅해서 먹는 인도 사람 하는 식으로 말이다. 여기에 음식을 먹는 방법이나 예절 따위를 엮고 그 주변부의 정치·경제·사회적 요소들을 가미해 분류, 체계화하면 ‘음식문화’가 된다. 즉, 음식에는 어느 지역 당대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으며, 이를 잘 선별해 먹으면 문화를 섭취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음식을 문화로 이해하거나 바라보지 않는다. 배를 불리거나 세 치 혀의 감각을 충족시키는 물건쯤으로 여긴다.
고기, 채소 넣고 푹 끓이는 신선로 같은 전통음식
우리는 문화를 뭔가 고급스럽고 전통적이며 격식 있는, 겉보기에 그럴싸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음식문화’ 하면 조선시대 궁중음식을 떠올리기 쉽다. 물론 이런 음식들에도 일정한 몫이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 몫이 그리 크지 않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궁중음식을 만들고 먹었던 사람들이 대체 얼마나 될까?
몇 년 전 한국 전통음식 연구가가 궁중음식에 대한 책을 출판했다는 신문기사를 읽다가 충격을 받았다.
“아름다운 우리 음식은 점점 잊히는 반면 뼈다귀해장국, 부대찌개, 쇠머리국밥 등 국적 불명의 경박한 음식들이 우리 식탁을 대신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국적 불명의 경박한 음식? 뼈다귀해장국, 부대찌개, 쇠머리국밥은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던가. 그의 말대로라면 이런 음식들은 ‘우리 음식’이 아니라는 말인데….
먼저, 뼈다귀해장국과 쇠머리국밥부터 생각해보자. 설렁탕은 임금님도 드셨다고 하는데, 그와 비슷한 이런 음식이 조선시대에 없었을까? 문헌으로 전하는 옛 음식은 권력자들의 음식이다. 민중은 자신들이 먹는 음식을 글로 남기지 못했다. 글로 남겨진 것만 ‘전통’이자 ‘우리 것’이라는 생각은 큰 잘못이다. 김홍도의 풍속화 ‘주막도’에 나오는 장국밥도 민중이 먹던 음식이니, 그럼 국적 불명이고 경박한 음식인가.
내가 보기에 조선시대 궁중음식, 즉 그 전통음식 연구가가 책에 실었다는 효종갱, 열구자탕, 석탄병, 석류탕, 수정회 같은 음식은 오히려 ‘죽은 음식’이다. 조선시대에는 조선시대 음식이 있고, 21세기 대한민국에는 또 다른 음식이 있는 것이다.
부대찌개는 국적이 불분명하다는 말이 맞지 않을까? 그렇다면 먼저, ‘전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전통이란 ‘양식과 정신’, 즉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다. 예를 들어 신선로를 전통음식이라 함은 신선로라는 음식 자체가 전통이라는 말이 아니라, 신선로라는 음식을 조리하고 먹는 양식과 정신이 우리 전통음식의 그것(양식과 정신)에 합치한다는 의미다.
전통적 시각으로 신선로를 다시 보자. 신선로는 탕류다. 탕은 우리 전통 조리양식 가운데 하나다(고기와 채소를 넉넉한 물에 넣어 푹 끓여먹는 음식이 탕이다). 그래서 신선로는 전통음식이다.
이제 부대찌개를 보자. 재료는 서양에서 온 것이라 해도 고기와 채소를 넉넉한 물에 넣고 푹 끓이는 탕이라는 우리 전통 조리법에 합치하는 음식이다. 그래서 부대찌개는 우리의 전통음식이라 할 수 있다.
한때 많은 사람들을 답사여행으로 이끈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지닌 미덕은, 저만치 있던 ‘박물관 지식’을 ‘일상의 지식’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신라의 돌탑’을 ‘대한민국의 돌탑’으로 여기도록 하기 위해 그는 돌탑에 대한 자잘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돌탑을 쌓은 신라인의 마음이 1000년 후 현재 우리의 마음과 다름없음에 눈뜨게 했다. 그 눈뜸의 도구는 사랑이다. 그는 책에 이렇게 썼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건 전과 같지 않다.” 음식을 문화로 읽기 위해서도 이런 사랑이 필요하다.
과메기철이 돌아왔다. 해산물 음식을 파는 식당들은 이제 겨울이면 으레 과메기를 낸다. 20년 전만 해도 포항에나 가야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인데 짧은 시간에 참 많이도 퍼졌다. 게다가 굽거나 찌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생선이라며 먹기 거북해하던 사람들이 다수였는데, 요즘 보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과메기가 이렇게 크게 확산된 데는 ‘짜배기’가 한몫했다. 꽁치를 반으로 갈라 내장을 발라낸 뒤 말린 것을 짜배기라고 한다. 꽁치를 통으로 말린 것은 ‘통말이’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통말이밖에 없었다. 통말이를 먹기 위해서는 머리를 떼고 내장과 껍질을 제거해야 하는데, 이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질려버리고 만다. 축축하고 미끈거리는 촉감에다 손에 남는 비릿한 냄새까지, 바닷가 출신인 나조차 처음에는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이에 비해 짜배기는 그냥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기만 하면 된다.
요즘은 전부 꽁치 짜배기 … 구룡포 덕장 장관
짜배기가 시각적으로 거북하지 않고 먹기 편하기는 한데, 맛 차이는 크다. 통말이에 맛들인 사람들은 짜배기를 ‘가짜’ 취급한다. 그런데 서울에서 통말이를 먹을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예전 조흥은행 본사 바로 옆 뒷골목에 있던 포항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조그만 식당에서는 통말이만 고집했는데, 요즘도 장사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근처에서 밥벌이하는 분들은 한번 찾아가 보시길….
그렇다면 과메기의 고장 포항에서는 통말이를 쉽게 찾을 수 있을까. 꼭 그렇지도 않다. 포항에서도 온통 짜배기다. 과메기 제조자 처지에서는 말리는 시간이 열흘 정도 단축되니 그렇게 하는 것이다. 짜배기는 네댓새면 마르고 통말이는 보름은 걸린다.
과메기 맛을 좀더 알고 싶다면 포항 바닷가 덕장을 찾는 게 좋다. 겨울이면 포항은 온통 과메기 말리는 덕장으로 가득한데, 제대로 맛을 내는 덕장은 바닷가 바로 옆에 있다. 바닷바람을 직접 맞으면서 말려지는 과메기가 진짜다. 그 맛 차이에 대한 설명은 포항 사람들이 더 잘 알므로 현지에서 듣는 게 더 실감나고 나을 듯싶다.
그런데 일부 포항 토박이들은 꽁치로 만든 과메기를 가짜라 한다. 진짜는 청어로 말린 음식이란 것이다. 청어로 말린 게 과메기인 것은 맞다. 과메기의 어원은 관목(貫目)인데, 사전에도 말린 청어를 관목이라고 적고 있다.
겨울철 농가에서는 부엌 살창에 청어를 걸어 말렸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굴뚝으로 빠져나가지 않은 연기가 살창으로 나가는데, 여기에 청어를 걸어두고 훈제했던 것이다. 특히 솔가지로 불을 때면 솔향이 청어에 배어 향긋한 맛이 일품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훈제법을 이용한 과메기를 연관목(烟貫目)이라 불렀다.
과메기가 말린 청어였던 시절이 끝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청어 과메기는 흔했고, 포항 과메기가 맛이 있다 하여 임금에게 진상되었다. 청어가 근해에서 거의 잡히지 않게 된 것은 광복 즈음부터라고 한다. 1971년 다시 풍어를 보이는가 했지만 이도 잠시. 포항에서 청어 과메기 찾기란 장생포에서 고래고기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리고 상인들 말로는 포항 사람들도 더 이상 청어 과메기를 찾지 않는다고 한다. 맛이 꽁치 과메기만 못하다는 것이다. 진상까지 되었다는 청어 과메기가 꽁치 과메기보다 맛이 없다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언제부터 꽁치가 청어 흉내를 내며 과메기란 이름을 갖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구룡포 사람들은 40여 년 전부터 꽁치 과메기를 먹었다고 하고, 죽도시장 사람들도 그즈음이라고만 할 뿐 정확하게 고증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겨우내 먹을 음식으로 청어를 소금에 절여둔다. 우리나라 김장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초겨울 인사로 이웃들에게 “김장 얼마나 했니” 하듯 이들은 “올해는 청어 몇 동이나 절였니” 하고 인사할 정도다. 이 청어를 양파나 절임채소와 함께 날로 먹는데, 비릿하고 물컹한 느낌이 꽁치 과메기보다 한참 심하다. 그런데 이 청어절임에 한번 입맛을 들이면 환장하게 된다고 한다. 나도 여행 중에 서너 차례 청어절임을 맛본 적이 있는데, 가끔 그 맛이 그리울 때가 있다. 꽁치에 밀려 사라져간 청어 과메기 맛은 또 어떨지 사뭇 궁금하다. 어디 파는 데 없나?
학창시절 사계절이 뚜렷해서 좋다는 우리 땅 예찬을 들으면 “에이, 애국심 때문에 근거 없이 하는 소리지”라고 했다. 특히 찬바람 씽씽 부는 겨울이 무려 4개월 넘는다는 사실이 어린 내게 ‘우리 땅은 거친 곳’이라는 편견을 각인시켰다. 전국의 맛집을 찾아다닌 지 10여 년. 이제야 서서히 깨닫고 있다. 이 땅의 겨울이 얼마나 따스하고, 우리에게 풍성한 맛을 얼마나 많이 베푸는지를….
땅은 얼고 초목은 숨을 죽여 산야에서 얻을 것은 없다. 대신 삼면의 바다는 겨울에 들어서면 참으로 맛난 것들을 내놓는다. 그래서 겨울 음식을 먹으려면 바다로 가야 한다. 서해, 남해, 동해 어느 바다든 좋다.
서해부터 훑자.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홍성에서 빠져 서산으로 향한다. 끝없이 펼쳐진 갯벌에 칼바람…. 을씨년스럽기만 하다고? 여기에서 맛난 것이 얼마나 많이 나는데! 먼저 굴이 제철이다. 생굴, 굴밥, 굴구이…. 제대로 먹자면 간월도가 제격이다. 간월도 인근 굴은 잘고 단단하며 향이 강하다. 생으로 초장에 비벼 먹어도 맛있지만, 그 향을 더 강하게 즐기려면 굴밥이 낫다. 저녁에 술 한잔 하자면 조개구이를 권하고 싶다. 조개류도 겨울에 제 맛이 난다.
바다 음식이야말로 겨울철이 제 맛 … 지역마다 전통의 맛 ‘여전’
조개를 더 맛나게 먹으려면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더 내려가 변산반도로 향한다. 채석강을 보고 내소사에 들러 변산온천에서 몸을 푸는 코스가 제일이다. 변산반도 일주도로를 돌다 보면 백합죽, 바지락죽을 판다는 간판들이 즐비하다. 조갯살의 은근한 감칠맛이 쌀알 하나하나에 박혀 들어갈 정도로 푹 끓인 죽. 특히 아침엔 이만한 음식이 없다.
이제 남해다. 해남, 완도에는 이른 동백이 만발했겠다. 여기 굴은 서해안 굴과 조금 다르다. 바다 깊은 곳에서 키우는 석화가 있다. 한입 가득 겨울바다 향이 퍼진다. 이 길로 하동과 통영을 지나 남해, 마산을 잇는 해안도로들이 겨울 바다의 또 다른 매력을 풍긴다.
마산에 이르면 아귀찜이 먹을 만하다. 이미 전국적인 음식이 되었지만, 마산아귀찜은 아귀를 덕장에 걸어 겨울 찬바람에 바짝 말린 후 이를 물에 불려 요리한다. 그래서 물컹한 느낌은 없고 쫄깃쫄깃한 씹는 맛에 아귀의 향도 강하다. 마산 오동동에 대여섯 곳의 아귀찜 전문점이 있다.
바로 옆 진해는 대구로 유명하다. 진해만은 대구의 산란지로 2월쯤이면 살지고 알밴 대구들이 잡힌다. 1970년대 이후 대구 어획량이 부쩍 줄어 생대구 한 마리 값이 20여 만원씩 나가기도 했는데, 근래 들어 값이 큰 폭으로 내렸다는 소문이다.
마지막으로 동해다. 여름만 하겠는가 싶지만, 겨울 동해도 나름의 멋과 맛이 있다. 특히 눈 덮인 설악을 뒤로한 속초의 겨울은 여름보다 더 많은 맛거리를 선사한다. 대부분 속초에 가면 대포항이나 동명항을 찾는다. 회를 먹으려는 것이다. 지금은 회보다 생선구이가 낫다. 특히 속초항에 가면 양미리가 엄청 잡히는데, 겨우내 속에 알을 꽉 채우고 있어서 지금 아니면 그 감동적인 맛을 만끽할 수 없다. 속초항에서 갯배를 타고 청초호를 건너면 아바이마을에 갈 수 있다. 몇 년 전 텔레비전 드라마 덕에 유명해진 곳이다. 이곳에 가면 냉면, 오징어순대 등 북한 음식들을 맛볼 수 있다. 북한 겨울 음식으로는 도루묵찌개가 있는데, 아바이마을에는 없고 청초호 건너편 중앙시장 먹자골목에 가면 국물 맛이 시원한 도루묵찌개를 먹을 수 있다.
속초 아래로 쭉 내려가면 삼척 지나 울진이 나온다. 여기에서는 대게가 기다린다. 죽변항에 가면 대게를 싸게 맛볼 수 있다. 식당에선 러시아산과 북한산을 함께 넣어두고 파는데, 러시아산보다는 북한산이 낫고 북한산보다는 울진산이 낫다. 러시아와 북한산은 맛이 흐리고, 장도 검은 데다 향이 적고 맛도 짜다.
더 내려가면 포항인데, 지난 호에 소개한 과메기가 유명한 곳이다. 죽도시장이나 구룡포시장에 가는 것도 좋다. 멋스런 대규모 과메기 덕장을 보려면 죽천으로 가야 한다. 포항 시내에서 경주 쪽으로 가다 보면 죽천 가는 지방도로 이정표가 나온다. 이 도로를 따라 곧장 가면 죽천리라는 바닷가 마을에 이른다.
겨울 음식도 아니고, 해안 지역도 아니지만 겨울이면 꼭 소개되는 음식이 황태다. 강원도 인제 진부령 근처의 태백산맥 서쪽 사면에 황태 덕장들이 있는데, 3월까지 눈 쌓인 명태를 구경할 수 있다. 황태는 지금보다는 3월 넘어 나오는 햇황태를 사는 것이 낫다. 강원 동해안 가는 길에 잠시 들를 수 있는 곳이니 황태찜이나 구이, 황탯국을 맛보는 것도 또 다른 겨울 여행의 묘미다.
우리 음식문화에서 탕반(국밥, 장국밥)을 빼놓을 수 없다. 끓인 국에 밥을 말아먹는 것이 탕반이다. 일상적인 밥상만 해도 밥 옆에 국이 따르므로, 탕반 먹을 준비를 늘 하고 있는 셈이다.
탕반이 발달한 이유는 이것이 우리 입맛에 맞기 때문이라기보다 먹을 것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의 ‘잡학사전’ 이규태 씨는 탕이 적은 재료로도 여러 사람을 배불릴 수 있는 음식이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가령 쇠고기 한 근을 구우면 한 사람만 만족스럽게 먹을 수 있지만 쇠고기 반 근에 무나 배추시래기, 콩나물, 고사리 따위의 채소를 듬뿍 넣고 탕을 끓이면 쇠고기 맛이 나는 건더기와 국물로 네댓 사람, 경우에 따라서는 열 사람도 만족스럽게 먹을 수 있다. 탕반이 발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탕반 중 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음식이 설렁탕이다. 싼 가격에 든든한 포만감을 주는 음식으로 이만한 것도 없다.
감칠맛과 구수한 국물맛 내기 까다로운 요리
그런데 설렁탕의 유래가 재미있다. 조선시대 임금은 서울 동대문 밖 선농단에서 한 해 농사가 잘되게 해달라며 봄마다 제사를 올리고, 친히 논을 갈았다. 선농단에는 농사의 신인 신농씨와 후직씨가 모셔져 있다. 제단 위에는 생쌀, 생기장과 함께 죽인 소와 돼지가 통째로 올려졌다. 제사가 끝나면 무쇠솥에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지었으며, 소로는 국을 끓이고 돼지는 삶아 썰어놓은 뒤 구경꾼 가운데 60세 이상 된 노인들을 불러다가 먹였다. 이 탕을 백성들이 선농탕이라 불렀고, 세월이 지나면서 설농탕→설렁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설렁탕은 넓게 보면 곰국 또는 곰탕의 한 부류다. 1800년대 말에 나온 ‘시의전서’에는 곰국, 곰탕의 옛 이름인 고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다리뼈, 사태, 도가니, 홀때기, 꼬리, 양, 곤자소니, 전복, 해삼을 큰 솥에 넣은 뒤 물을 많이 붓고 뭉근한 불에 푹 고아야 맛이 진하고 뽀얗다.” 이때까지도 설렁탕이란 이름은 없었다. 1900년대 초반에 곰탕과 설렁탕을 구별하기 시작했다. 1940년에 나온 ‘조선요리’라는 책에는 곰국, 육개장, 설렁탕, 장국을 구분해서 적고 있다. 곰국(곰탕)은 “사태, 쇠꼬리, 허파, 양, 곱창을 덩어리째 삶아 반숙이 되었을 때 무, 파를 넣은 뒤 간장을 조금 넣고 다시 삶는다. 무르도록 익으면 고기나 무를 꺼내어 잘게 썰어 열즙(熱汁)에 넣고 후추와 파를 넣는다”라고 했으며, 설렁탕은 “쇠고기의 잡육, 내장 등 소의 모든 부분의 잔부를 뼈가 붙어 있는 그대로 하루쯤 곤다”라고 했다.
현재 식당에서는 곰탕과 설렁탕의 구분이 점점 없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온갖 잡부위를 넣어 끓이는 설렁탕은 뼈가 많이 들어가 국물이 뿌연데, 어떤 곳에서는 곰탕만큼 맑은 국물을 내기도 한다. 여러 부위를 넣으면 잡냄새가 나므로 이를 피하기 위해 쇠머리, 뼈, 양지머리, 사골만 넣고 끓인 것을 설렁탕이라 부르기도 한다.
곰탕과 설렁탕 맛의 깊이 차이는 고기 맛을 알아야 느낄 수 있다. 입에 착 달라붙는 감칠맛에 구수함이 섞이고 여기에 개운한 맛까지 어울리는 곰탕과 설렁탕을 끓이기 위해서는 먼저 재료가 좋아야 한다.
다음은 끓여내는 기술이 중요하다. 곰탕과 설렁탕을 제대로 한다는 식당의 주방장들은 나름대로 노하우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 뼈와 고기를 끓이는 시간을 달리하고 뼈 국물에 고기 국물을 더하는 기술에 따라 맛 차이가 크게 난다. 특히 뼈와 고기 외에 쇠기름이 중요한데, 마지막에 기름덩이를 넣고 끓여 맛의 깊이를 더하는 기술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그 주방장, 설렁탕 맛의 ABC는 아는구나”라는 말을 듣는다.
이런 식으로 따져 맛있는 곰탕, 설렁탕 집을 찾아가 봤지만 대부분 낙제점 수준이었다. 내 입에는 의외로, 설렁탕 전문점도 아닌 ‘벽제갈비’의 설렁탕이 추천할 만하다. ‘벽제갈비’ 설렁탕 담당 조리장에게 몰래 받아온 설렁탕 조리법이다. 설렁탕, 결코 간단한 요리가 아니다.
2. 이후 6시간을 더 끓이면 육수가 4분의 1로 주는데, 이때 물을 보충한다.
3. 위의 육수에 양지 5㎏, 우설 1개, 갈비에 붙은 살을 넣고 끓이다가 30분이 지나면 쇠기름 2㎏을 넣는다. 1시간 30분 후 갈비에 붙은 살, 2시간 30분 후 양지를 각각 꺼낸다. 우설은 3시간 후 꺼낸다. 이때도 핏물과 찌꺼기 걷어내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4. 우설을 꺼내고 30분 후 쇠기름 2㎏을 추가로 넣는다. 이 상태에서 6시간을 끓인 뒤 우지, 사골, 잡뼈를 모두 꺼낸다.
나는 외식을 즐기지 않는다. 집에서 먹는 음식이 제일 맛있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아내의 음식 솜씨가 뛰어난 것은 아니다. 음식 맛의 기본은 재료와 정성인데, 아무리 잘하는 음식점이라고 해도 내가 직접 고른 재료보다는 못할 것이고, 정성도 그보다 더 들어갔을 리 없기 때문이다. 외식을 즐기지 않는 맛 칼럼니스트가 말이 되느냐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먹는 음식도 음식이니 맛 칼럼 쓰는 데 크게 지장은 없는 편이다. 대한민국 보통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나는 맛 칼럼니스트라는 일과 관계없이 하루에 한두 끼는 외식을 한다.
“맛 칼럼니스트라고? 거창하게도 이름 붙였다. 풀어 쓰면 ‘입 짧은 사람’ 아니냐?” 친구녀석이 내 직업에 대해 비꼬듯이 한 말이다. 맞다. 난 입이 무척 짧다. 맛없는 음식은 상을 엎어버리고 싶을 만큼 까다로운 입맛과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직장인들과 나 같은 맛 칼럼니스트의 차이점은 음식에 대한 까다로움 정도의 차이다. 따라서 평범한 직장인들도 얼마든지 맛 칼럼니스트 정도의 식견은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맛·친절도·위생 항목 담긴 음식평가표 만들고 점수 매겨
사내식당이 있는 회사에 다닌 적이 있다. 점심때면 정말 고역이었다. 대량으로 해대는 음식이니 맛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아침 일찍부터 음식을 마련한 탓에 나물은 물러터진 데다 국은 졸고 밥은 미지근하기 일쑤였다. 나는 이 사내식당 음식을 ‘여물’이라 불렀다. 주인(사주)이 열심히 밭 갈라고 소(직원)에게 주는, 그래서 맛은 상관없이 오로지 영양분만 따져 내는 곳. 규모가 큰 대부분의 사업장에는 이런 여물 배급소가 있다.
직장인들 중에는 여물 배급소가 없는데도 꼭 여물을 찾아 먹는 이들도 있다. 제 입에 맞는 음식점 한두 곳을 정해두고 줄곧 그 집만 가는 사람들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시키는 음식도 한두 가지뿐이다. 사시사철 된장찌개만 먹든가 김치찌개만 먹는다. 나는 이런 이들을 ‘문화적 미맹(味盲)’이라고 부른다. 색맹처럼 생리적 이상으로 맛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미맹이라고 하는 만큼, 의식적으로 다양한 맛을 거부하는 이들을 ‘문화적 미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미맹 노릇한다고? 딱 한 시간뿐인 점심시간에 이것저것 따질 여유가 어디 있냐고? 사실 그렇기도 하다. 식당까지 가는 데 10분, 주문하고 기다리는 데 10분, 밥 먹는 데 20분, 사무실로 돌아오는 데 10분, 화장실 가거나 커피 마시는 데 10분.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에 나오는 노동자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여물만 먹을 것인가? 회사 근처 식당들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자. 몇 곳이나 가봤는가? 아마 대부분 열 손가락을 두 번 정도 접다 말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번 해보자. 동네 맛탐험을 해보는 것이다. 이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맛 칼럼을 썼던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먼저, 함께 점심 먹을 동료들을 구하라. 기왕이면 아예 식도락 동호회를 만드는 것이 낫다. 의외로 ‘한 미식 합네’ 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회원은 7명 내외가 좋다. 회원이 많으면 번잡해진다. 이건 경험이다.
다음에는 직장이 있는 동네의 지도를 하나 구하라. 구 단위 정도가 좋다. 되도록 큼직한 것으로. ‘우리만의 맛지도’를 작성하기 위한 것이다. 또 음식평가표를 만들라. 평가 항목은 맛, 친절도, 위생, 계절성, 가격 대비 맛, 재방문 의사 등등 알아서 정하고 총점을 낸다. 이 총점으로 별표를 매기고 맛지도에는 식당 이름과 주요 메뉴, 별표를 적는다.
이후에는 식당을 찾아다니는 요령이 필요하다. 일주일에 하나씩 주제 음식을 정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법 중 하나다. 이번 주에는 ‘돈가스’로 정했다면 그 동네의 돈가스집을 하루에 한 군데씩 돌고 평가를 하는 식이다. 한 음식을 두고 여럿이 집중적으로 먹게 되면 그 음식에 대한 각종 정보가 쏟아지고 서로의 평가를 들으면서 맛에 대한 감각을 배울 수 있다. 가령 돈가스를 일주일 동안 여러 명이 함께 먹고 평을 나눴다면 맛있는 돈가스의 조건들 - 돼지고기의 두께, 튀김옷의 까칠한 정도, 튀김기름과 온도, 소스 등등 - 에 대해 통달하게 될 것이다.
일주일에 5곳이면 1년이면 260곳의 식당을 대상으로 맛탐험을 할 수 있다. 이 정도면 ‘우리 동네 맛집지도’ 책이 한 권 나올 수 있는 분량이다. 여기에 요즘 너도나도 다 가지고 있는 디지털카메라로 사진까지 붙이면 금상첨화다. 혹시 모르지 않은가? 나 같은 맛 칼럼니스트가 한 명 더 배출될지.
시루떡의 김 속에는 어린 시절의 향수가 있다. 그러나 시루떡의 맛은 언제나 그 향수를 배반한다.”
이어령 씨가 ‘문장대백과사전’에 쓴 글이다. 시루떡의 김 속에 어린 시절의 향수가 있다는 말에는 대한민국 성인들 대부분이 고개를 끄떡일 것이다. 그러나 시루떡의 맛이 그 향수를 배반한다는 말에는 적어도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사실 식은 시루떡은 담백하기만 할 뿐 별 맛이 없다. 하지만 김이 오르는 시루떡은 그 맛이 무엇에 비길 바가 아니다. 따끈따끈할 때는 쌀의 전분이 당화되어 그 맛이 달기까지 하다. 폭신폭신한 듯하지만 두어 번 씹으면 찰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팥고물의 고소함까지 더해지니 그 맛이 가히 일품이라 할 만하다. 이어령 씨도 이 맛을 알 것이다. 아마 ‘식은’ 시루떡 맛에 배반을 느낀 것이 아닐까 싶은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삼국시대 초기의 시루가 꽤 많이 전시돼 있다. 반면 솥은 거의 없다. 그 시기 주요 끼니는 밥이 아니라 떡이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도 떡 관련 일화가 전해진다. 남해왕이 죽자 노례와 탈해가 서로 왕위를 놓고 양보하는데, 탈해가 성지인(聖智人)은 치아가 많다고 하니 떡을 물어 시험하자고 제안한다. 그때가 서기 17년이니 2000년 전쯤의 일이다.
공동체 정서 상징하는 떡, 이제는 명절 음식
‘떡 해먹을 세상’이란 속담이 있다. 세상을 절구로 찧고 메로 쳐 떡으로 만들어 먹는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꼴이 떡을 해 굿판을 벌일 지경이라는 의미다. 마을 일이 잘 되지 않으면 굿판을 벌여 액막이를 했고, 그 주된 음식이 떡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이다. 아이가 ‘푸세식’ 화장실에 빠져도 액을 푼다고 떡을 돌렸다. 또 아이를 낳으면 삼칠일 지나 시루떡을 돌리고 백일이면 수수떡을 돌리고 돌에는 백설기를 돌렸다. 이사를 와도 떡을 돌려야 ‘된 집안’이란 소릴 들었고, 대갓집에서는 추석에 머슴들에게 송편을 한 아름씩 안겨야 덕 있는 양반 대접을 받았다. 떡이란 곧 가족끼리 먹는 밥과 달리, 지역공동체 구성원들이 나눠 먹는 음식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예들이다.
요즘 떡을 안 먹는 까닭은 떡을 나눠 먹던 지역공동체의 해체에 그 첫째 원인이 있지 않나 싶다. 최근엔 이사를 와도 떡 돌리는 집을 보기 어렵고, 백일이라고 수수떡을 보내오는 집도 없다. 공동체사회가 사라지니 떡의 사회적 의미도 사라지고 떡 먹을 일도 없어지는 것이다.
나는 씨족마을 출신이다. 경남 마산시 진전면 임곡리가 그 마을이다(임곡[林谷]은 일제강점기에 개명한 것인데, 원래 이름은 ‘숲실’이다. 숲이 있는 동네라는 말이다. 행정명으로는 어쩔 수 없이 임곡이라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여전히 숲실이라 부른다. 참 정감 있는 이름인데…). 족보를 보면 임진왜란 이후부터 이 마을에 황씨네들이 모여 살았다. 고향이라지만 부모님이 일찌감치 객지 생활을 하셔서 이 마을에 갈 일이라고는 시제를 모시기 위해 3~4년에 한 번 정도밖에 없다.
숲실에 가면 그 특유의 냄새가 먼저 나를 반긴다. 햇살 받은 흙벽 냄새 같기도 하고 군불 지핀 아궁이 냄새 같기도 한…. 고향에 사시는 종친들 몸에서도 이 냄새가 나는데, 친척이라는 반가움 이전에 이 냄새로 인해 그분들이 더없이 살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시제는 한나절 내내 절하다가 끝난다. 솔직히 좀 지겹기도 한데, 간소화하자고 건의를 드리고 싶지만 매년 오는 것도 아닌데 그 정도도 귀찮아한다고 어른들께 꾸지람만 들을까 싶어 만다. 점심 먹고 또 절하다가 오후 3시쯤에야 마무리한다. 먼 길을 가야 하는 내게 고향분들은 뭐라도 하나 챙겨 보내려 하신다. ‘검정 봉다리’에 음복 음식을 넣어주는데 이때 꼭 들어 있는 게 떡이다.
이 떡은 식어도 맛있다. 고향 냄새 덕이다.
공동체 정서를 일깨우는 음식으로서의 떡을 먹을 기회는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외에는 거의 없다. 간혹 결혼식이나 회갑 피로연 상차림 한구석에 떡이 오르기도 하는데, 가까스로 남아 있는 우리네 공동체 정서를 대변하는 것 같아 오히려 서글퍼 보이기까지 한다.
요즘 나는 떡가게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한두 봉지는 꼭 사들고 들어온다. 그러나 이를 다 먹는 일은 거의 없다. 주방에서 이리저리 구르다가 냉동실에 처박힌다. 그런데도 또 떡집을 지나치면 꼭 떡을 사들고 온다. 내가 고픈 것은 떡이 아님이 분명한데…. 이어령 씨 역시 내 심정 같았건만 이를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아이들과 텔레비전을 보자면 버겁다. 요즘 뜨는 연예인 이름 하나, 유행가 제목 하나 제대로 외우지 못하니 ‘노땅’ 대접받기 일쑤다. “요즘 에이치오티는 잘 안 나오네” 했다가 그날 내내 왕따를 당한 적도 있다. 연예인들이 ‘떼거리’로 나오는 퀴즈 프로그램을 할 때는 창피를 당하지 않기 위해 왕따임을 자처, 산책이라도 나가는 편이 낫다. 세대가 다르니 관심사가 다를 뿐이라고 위안해보지만 가장의 권위에 대한 손상은 지대하다.
그런 나에게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마음껏 발휘할 기회가 가끔 주어지는데, 바로 가족과 외식을 할 때다. 특히 중국집은 우리 세대에게는 수십년의 내공이 쌓인 곳이지만 아이들에게는 미답의 음식이 즐비한 곳이다. 길어봤자 두어 시간이지만, 가장으로서의 ‘위신’을 세우기에 딱 좋은 장소다. 뭘로 폼을 잡느냐 하면 바로 중국음식 이름 해제다. 고작 음식 이름 풀이를 해준다고 아이들이 신기해할까 싶겠지만 한번 해보시라. 의외로 효과가 크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국내의 중국집에는 두 종류가 있다. 구한말에 들어온 화교 또는 한국인들이 한국화한 중국음식을 내는 집과 최근 중국 본토에서 들어온 진짜(?) 중국음식을 내는 집이다. 후자에서 내놓는 차림표는 정말 읽기 힘들다. 중국식 한자로 쓰여 있는 데다 음식도 모두 생소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다. 이런 집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자장면-한자로 炸醬麵인데, 이 정도 한자는 외웠다가 아이들 앞에서 쓰는 것이 좋다. 장(醬·춘장)을 작(炸·볶는다)해서 만든 국수라는 뜻이다.
삼선자장면-삼선(三鮮)이라는 말은 세 가지 재료를 말한다. 그러니까 기본적인 자장에 세 종류의 재료가 더 들어갔다는 뜻이다. 삼선이라 하면 보통 새우나 해삼, 전복, 표고 따위를 말한다.
유니자장-유니는 한자로 肉泥다. 육(肉)은 돼지고기이고 니(泥)는 ‘갈다’라는 뜻이다. 즉, 돼지고기를 갈아서 만든 자장면이 유니자장이다.
짬뽕-일본어에서 온 말이다. ‘한데 뒤섞는다’라는 뜻의 잠퐁(ちゃんぽん)이 어원이다. 15세기 일본 나가사키 지방에서는 동서양의 문물이 마구 뒤섞였다. 이때 한 중국인이 서양에서 들어온 음식재료와 중국음식의 재료들을 한데 섞어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냈다. 동서양의 각종 해물과 채소를 기름에 볶다가 육수를 붓고 끓인 뒤 면을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데 뒤섞는다’는 뜻의 짬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기스면-
한자로 鷄絲麵이다. 계(鷄)는 닭, 사(絲)는 가늘게 썰거나 찢는 것이니 채썬 닭고기를 넣은 국수라는 말이다.
탕수육-
한자로는 糖醋肉이다. 당(糖)은 엿이고 초(醋)는 식초이니 설탕과 식초로 단맛과 신맛을 낸 돼지고기(肉)라는 뜻이다. 주재료에 따라 탕수에 여러 단어를 붙일 수 있는데, 도미를 녹말에 튀겨 달고 신 소스를 뿌리면 탕수어가 되고 쇠고기를 사용하면 탕수우육이 된다.
유산슬-
한자로 溜三絲이다. 유(溜)는 녹말 물을 끼얹어 걸쭉하게 만드는 것, 삼(三)은 세 가지 재료, 사(絲)는 가늘게 써는 것을 말한다. 세 가지 재료란 고기, 해산물, 채소인데 보통 돼지고기와 해삼, 새우, 죽순, 표고 등을 쓴다.
마파두부-
麻婆豆腐라고 쓴다. 마파가 뭘까? 마(麻)씨라는 성을 가진 노파(婆)다. 그러니까 마씨 할머니가 발명한 음식이라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동파육-
東坡肉이라고 쓴다. 송나라의 문장가이자 미식가였던 소동파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소동파가 황주로 좌천당했는데 그 지역에서는 돼지를 많이 쳤더랬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그 흔한 돼지고기로 제대로 요리를 해먹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해 직접 칼을 들고 요리를 개발했다. 돼지고기를 각종 향신료와 양념에 재워 장시간 푹 찌는 요리다. 어떤 중국집에서는 돼지고기찜이라 써놓기도 한다.
오향장육-
五香醬肉, 향(五香)이 나게 장(醬)에 조린 돼지고기(肉)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오향의 정체는? 회향, 계피, 산초, 정향, 진피다. 족발로 하면 오향장족, 쇠고기로 하면 오향장우육이 된다. 오향장육을 조리다 보면 어릿한 묵 같은 것이 생기는데 이를 짠슬이라 한다. 장육에 짠슬을 올리고 고수(중국말로 향차이, 서양말로 코리안더)를 곁들여야 제 맛이 난다.
깐풍기-
한자로는 乾烹鷄로 쓰며, 계(鷄)는 닭고기다. 그렇다면 깐풍은 조리법? 맞다. 한자로 건팽(乾烹)이란 국물 없이 마르게 볶는 것을 의미한다. 돼지고기로 하면 깐풍육, 새우로 하면 깐풍새우가 된다.
라조기-
역시 닭고기 요리이며, 라조(辣椒)는 고추다. 그러니까 ‘고추가 들어간 매운 닭요리’라는 뜻이다. 닭고기를 녹말에 묻혀 튀긴 뒤 죽순, 양송이, 표고 등을 함께 넣고 맵게 볶은 요리다. 물론 라조육도 있고 라조우육도 있다.
소설 ‘요코 이야기’로 말들이 많다. 책 내용이 전쟁 가해자 일본을 피해자(그것도 한국에 의한!)처럼 인식하게 하기 때문이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참으로 터무니없는 소설이 아닐 수 없다. 그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힘든 세월을 보냈는지 세상에 잘 알려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일본이 전쟁 피해자라는 내용의 소설이 미국 어린이들에게 읽히고 있으니 말이다.
한편에서는 민족이나 국가를 떠나 전쟁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일인지를 고발한 훌륭한 ‘다큐멘터리’라는 시각도 있다. 이런 소동 중에 나는 문득 오래전에 읽은 ‘우동 한 그릇’이란 소설이 떠올랐다. ‘요코 이야기’가 외국인들의 역사의식을 왜곡하고 있다면 ‘우동 한 그릇’은 일본인의 감성적 민족주의에 한국이 함께 눈물 흘리는 격이어서 한국인으로서는 더 경계해야 하는 책이 아닌가 싶다. ‘우동 한 그릇’이 스테디셀러가 되는 한국의 이상한 풍토에 대해 언젠가 짧은 글을 썼더니 왜 그런 감동적인 동화에 민족감정을 덧입히느냐고 힐난했다.
한국 정서에 맞게 의도적 오역 가능성 매우 커
‘우동 한 그릇’의 신화는 이런 일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1997년 2월 일본 국회 예산심의위원회 회의실에서 질문에 나선 공명당의 오쿠보 의원이 난데없이 뭔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대정부 질의 중 일어난 그의 돌연한 행동에 멈칫했던 장관들과 의원들은 낭독이 계속되자 그것이 한 편의 동화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야기가 반쯤 진행되자 여기저기에서 훌쩍거리며 손수건을 꺼내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기더니 끝날 무렵에는 울음바다를 이루고 말았다.”
‘우동 한 그릇’은 언뜻 보면 일본의 한 가난한 가족의 이야기다. 해마다 섣달그믐이면 두 아이를 데리고 우동가게를 찾아 우동 한 그릇을 시켜 나눠먹는 가족이 있었다. 이를 딱하게 생각한 식당 주인은 연말이면 항상 빈자리를 남겨두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장성한 아이들이 성공해 어느 연말 이 식당에 나타난다는 줄거리다.
그러나 그 속내를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동화와 많이 다르다. 전쟁에서 패한 뒤 피폐한 경제상황을 이겨낸 일본인들 스스로를 대견해하는 소설이다. 일본인들이 당시 그토록 울었던 것은 버블경제 붕괴로 온 국민이 고통스러워하던 상황에서 ‘전후의 가난도 이겨내지 않았느냐’ 하는 위안의 메시지가 이 책에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한국에서 이 책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내겐 아이러니로 보일 뿐이다. 일본인들은 섣달그믐에 시절식으로 소바를 먹는다. 소바의 면발처럼 길게 오래 살자는 뜻에서 이날 소바를 먹어야 이듬해 복이 있다고 한다. 소설 원문을 본 적은 없지만 내용에서 유추해보면 소설 속 가난한 가족이 섣달그믐 식당에 와서 시켜 먹은 음식은 우동이 아니라 소바임이 분명해 보인다. 소바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메밀국수가 된다. 그런데 왜 우동이라고 번역한 것일까. 번역가의 잘못일까?
아마도 의도적인 오역이 아닐까 싶다. 소설 제목을 ‘메밀국수 한 그릇’이나 ‘소바 한 그릇’이라고 제대로 번역하면 느낌이 와닿지 않는다. 메밀국수나 소바는 우리에게 친근감이 없는 음식이다. 반면 우동은 따뜻한 국물에 든든함이 느껴지고 서민적인 음식이라는 이미지가 절로 떠오르지 않는가. 때문에 ‘우동 한 그릇’이라는 제목 하나만으로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 짐작하게 된다.
소설이 단지 이야기 전달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배경이 되는 시대와 지역 문화를 담고 있는 것이라 여긴다면, 이런 오역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 될 수도 있다. 가령 한국의 소설 중 떡국을 주 소재로 해서 쓰인 책이 있다고 하자. ‘우동 한 그릇’과 비슷한 서정이 담긴 설날 아침, 온 가족이 떡국을 먹으면서 가족의 유대를 다진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제목은 ‘떡국 한 그릇’. 그런데 일본에서 이 소설을 번역할 때 떡국은 일본인들에게 생소하니 좀더 친근한 한국 음식인 ‘삼계탕 한 그릇’이나 ‘불고기 한 접시’ 등으로 번역한다면 어떨까.
‘소바 한 그릇’을 읽고 일본인들이 눈물바람을 일으킨 것은 섣달그믐에 온 가족이 모여 복을 기원하며 소바를 먹는 문화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동 한 그릇’을 읽고 눈물바람을 일으킨 까닭은 대체 무엇일까. 이런 문화적 정서를 공유하지 않고도, 줄거리만으로 충분히 감동적인 소설이라 그런 것일까. 혹 남이 우니까 자신도 덩달아 우는 감정의 전이에 따른 것은 아닐까. 속내야 어떻든, ‘요코 이야기’처럼 이야기 자체만으로 충분히 감동적인데 나의 감성이 유독 모자라 그럴 수도 있고
농협 출신 한 인사와 술자리에서 쌀 소비량 감소에 대해 걱정하다가 이런 말이 나왔다.
“재수 없다는 뜻으로 쓰이는 ‘밥맛이다’라는 말 말이야. 드라마니 개그니 방송 프로그램마다 쓰더라고. 원래는 ‘에이, 밥맛 없어’ 하는 게 바른말인데 언제부터 ‘밥맛이야’로 바뀌었는지 모르겠어. 이런 말도 쌀 소비량 줄이는 데 일조하지 않았는지 몰라. 밥이 원래 맛없는 것처럼 들리잖아.”
그분의 말 뒤에 나는 엉뚱한 사설을 붙였다. “예전에 비하면 밥이 맛없지요. 온통 전기밥솥으로 밥을 하니…. ‘밥맛이다’라는 말은 아마 전기밥솥 나오면서 생긴 신조어일 겁니다.”
그분은 언어습관을 말하는데 나는 맛타령이나 하니 이런 동문서답도 없을 것이다. 나는 밥맛에 대한 장광설을 풀고 싶었지만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농민, 농촌 문제 걱정하며 다들 한마디씩 하는 자리에서 밥맛이나 따지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속으로 했던 장광설을 다시 푼다면….
재수 없다는 ‘밥맛’ 전기밥솥 탓 아닐까
할머니들에게 들으니, 예전엔 아이가 젖 떼고 말을 시작하기 전에는 밥을 먹이고 고기는 먹이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밥맛을 들이기 전에 고기맛부터 알면 고기만 찾는다는 겁니다. 고기가 귀했던 시절이라 그런 말을 지어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제가 생각하기에 아이 때부터 밥맛을 들이려는 조상님들의 지혜가 아니었나 합니다.
밥은 아무 맛이 없는 것 같지만, 한국 사람들은 밥맛에 민감합니다. 벼의 품종, 정미 정도, 물의 질과 양, 불의 종류와 세기, 밥솥의 종류 등에 따라 맛이 다 다르고, 이 제각각의 밥맛을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림짐작으로 맞힐 수 있는 것이 우리 민족이죠.
밥하는 기술도 그리 간단한 게 아니지요. 먼저 쌀에 붙은 겨와 때를 없애기 위해 쌀을 씻는데, 이때 재빨리 헹궈야 합니다. 시간을 끌면 물에 녹은 겨가 쌀에 스며들어 밥에서 겨 냄새가 나거든요. 깨끗한 물을 붓고 두세 차례 빠르게 휘저어 10초 이내에 버리기를 반복하는데, 물이 맑아질 때까지 합니다. 씻기가 끝나면 쌀을 물에 담가 쌀의 내부까지 물을 침투시킨 뒤 불에 올려야 합니다. 겨울철에는 최소 1~2시간, 여름철은 30분 이상 담그지요.
밥이 끓고 난 다음, 그러니까 요즘 너도나도 다 쓰는 전기밥솥으로 치면, 스위치가 탁 하고 소리를 내며 ‘취사’에서 ‘보온’으로 자리이동을 하고 난 다음 10~15분 뜸을 들여야 합니다. 뜸들이기가 끝나면 솥 안 가장자리를 따라 주걱으로 돌려가며 재빨리 섞어야 합니다. 이것은 여분의 수분을 증발시키고, 밥알이 뭉개지지 않고 서게 하며, 솥 안의 밥맛을 균일화하기 위한 것이지요.
갓 지어낸 밥은 정말 맛있습니다.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고 촉촉한 물기가 배어 있는 밥! 고소하고 달콤한 향이 나며, 입 안에 넣었을 때 밥알이 낱낱이 살아 있음이 느껴지고, 혀로 밥알을 감았을 때 침이 괴면서 단맛이 더해지며, 무르지도 단단하지도 않게 이 사이에서 기분 좋은 마찰을 일으키는 밥! 밥맛은 윤기, 향기, 맛, 끈기와 단단함에 의해 결정됩니다. 혀뿐만 아니라 오감을 통해 밥맛을 느끼지요.
사실 이 정도의 밥은 요즘 전기밥솥이 있어 누구든 합니다. 씻지 않아도 되는 쌀이 나오고, 불리고 뜸들이는 시간까지 계산해 조리하는 전기밥솥이 있으니까요. 예전 무쇠솥에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지을 경우에는 불 보는 눈이 거의 신의 경지에 이르러야 맛있는 밥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밥물이 끓어 넘칠 것 같으면 솥뚜껑에 물을 부어 숨을 죽여야 하고, 뜸들일 때를 맞추어 아궁이에서 불을 빼고, 결정적으로 솥뚜껑을 여는 마지막 순간을 정확히 알아야 맛있는 밥이 됩니다.
우리 음식은 밥과 반찬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둘이 입 안에서 서로 어우러져야 맛이 완성되지요. 김치와 장아찌, 젓갈 등 반찬이 대체로 짜거나 맵고 강렬한 맛이 나는 것은 밥과의 어울림을 염두에 두고 조리하기 때문입니다. 즉, 밥이 밑반찬들의 강렬한 맛을 잠재우면서 그 밑반찬들이 품고 있는 깊은 맛을 끄집어내는 것이지요.
밥이 맛없으면 아무리 좋은 반찬이 수십 가지 놓여도 제대로 된 맛을 즐길 수가 없게 됩니다.
제 집은 최근 전기밥솥을 버렸습니다. 밥맛 없다고 제가 자꾸 투정하니까, 그 이유가 전기밥솥에 있다고 내내 불만을 토로하니까, 집사람이 조그만 무쇠솥으로 끼니때마다 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밥맛이다’라는 잘못된 언어습관을 바로잡는 것만큼이나 전기밥솥으로 밥맛 버리는 일을 줄이는 것도 쌀 소비 촉진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어떠세요?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으니까 30년 정도 전의 일이다. 당시 수학 선생님과 퍽 친했는데 진해 가덕도로 전근 가셔서 친구 녀석과 인사할 겸 해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가덕도는 진해에서 부산 넘어가는 길에 있는 제법 큰 섬이다. 근래 들어 부산 신항만이 들어선다 어쩐다 해서 상당히 개발됐지만 그때만 해도 시외버스를 두어 차례 갈아타고 다시 조그만 배를 타야 갈 수 있는 외진 곳이었다.
나고 자란 곳이 마산이라 바닷것에 그리 낯설지 않은 나였는데 그 섬에서 생전 처음 보는 물고기를 발견하고는 매우 신기해했다. 길쭉한 물고기가 담에 주렁주렁 매달린 채 말려지고 있었다. 당시 내 고향 마산에서 이런 식으로 말리는 물고기는 대구, 명태, 아귀, 가자미 등이었다. 하여간 이 이상하게 생긴 물고기는 그 후 20여 년간 나와 전혀 인연이 없었다.
그리고 10년 전쯤인가. 강원도 삼척 어느 포구 식당에서 ‘곰칫국’이란 것을 처음 맛보았다. 신 김치와 콩나물, 무를 넣고 끓인 생선국인데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생선 살과 시원한 국물 맛에 한입에 반하고 말았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곰치의 몸을 확인했는데 그게 바로 가덕도에서 본 물고기였다.
‘물메기’의 진해 사투리…맑게 끓여 먹어
이후 강원도 바닷가에 갈 일이 있으면 일부러 곰칫국을 찾았는데 주문진과 삼척 외에는 이를 내는 식당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이듬해, 경남 남해 어시장에서 우연히 이 물고기를 발견했다. 여기에서는 ‘물메기’라 불렀으며, 강원도에서처럼 국으로 해먹었다. 그해 전남 목포에서도 이 물고기를 발견했는데 목포에서는 국 외에 회로도 먹었다.
곳곳의 물메기 요리를 맛보고 다녔지만 이 물고기가 전국화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겨울 한철 나오는 데다 이것만 전문적으로 잡는 어부도 없고 생김새가 그다지 맛깔스럽지 않으며 식감도 느끼기에 따라서 콧물 들이마시는 듯해 깔끔 떠는 도시 사람들이 찾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런데 내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한 해가 다르게 물메기탕 내는 식당이 늘어났다. 도미, 광어 등 고급 생선에 물린 소비자들의 입맛 ‘일탈’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2월 중순 집안일로 진해에 갈 일이 있었다. 진해 큰집에 일가친척 몇몇이 모였는데 막내숙부가 “여기까지 왔으니 속천항에 가서 미거지미역국 한 그릇 먹고 가자”고 제의했다. 미거지? 여기 사투리로 물메기를 미거지라고 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물메기가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미역어(迷役魚)라고 기록되어 있다는데 어원이 같지 않나 싶다.
진해 사람들은 회를 먹으러 보통 속천항에 간다. 막내숙부가 진해에 오면 반드시 찾는 집이라면서 그곳으로 다들 데리고 갔다. “내가 추천하는 집이라기보다는 진해문화원장이 추천하는 집이라고 해야 할 거다. 그이가 내 동창인데 진해에 오면 항상 여기서 회 먹고 미거지미역국 먹었다.”
도다리와 감생이(감성돔의 경상도 사투리) 막회 한 접시 먹고 미거지미역국을 시켰더니 안 된단다. 미거지미역국은 특별주문 요리인 듯한데 진해문화원장이나 데려와야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미거지국을 시켰다. 강원도 곰칫국과는 사뭇 달랐다. 무, 대파, 마늘만 넣고 맑게 끓였다. 강원도에서는 신 김치를 넣고 끓인다고 했더니, 한 입맛 하는 막내숙부가 “그렇게 하면 미거지의 시원한 맛이 나나?” 하고 반문했다. 사실 남해안에서는 도미, 광어, 대구 가릴 것 없이 맑은 국으로 끓이는 게 대세다. 이 맛 한번 들이면 매운탕은 못 먹는다. 회로 배를 불렸는데도 한 대접을 모두 비웠다. 속 저 안쪽까지 시원하게 내려가는 국물 맛으로 온몸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 시원한 미거지국에 강한 포인트를 줄 수 있는 음식이 하나 따라 나왔는데, 갈치젓갈이다. 갈치 속으로 담근 것이 아니라 갈치를 통째로 소금에 절여 숙성시켰다가 잘게 잘라 양념한 것이다. 톡 쏘는 맛은 갈치속젓보다 적고, 황석어젓처럼 생선 살이 발효되면서 나는 뭉근하고 깊은 향내가 있었다.
계산하고 나오면서 갈치젓갈을 조금 얻었다. 한 공기 분량도 안 되지만 나 혼자 가끔 꺼내 먹으면 1년은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숙부, 숙모 눈치보면서, 진해에 갈 일이 또 언제일까 싶어 두고두고 먹으며 그 잔잔한 바다나 떠올려보려고 한 짓이다
음식 관련 글을 쓰다가 식당을 차리거나 고용 사장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식당에 대한 폭넓은 견문으로 대박을 터뜨릴 것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주목했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성적은 생각 밖으로 저조했다. 현재 그들의 식당이 잘되고 있다는 소문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나도 식당을 개업하라는 숱한 유혹을 받는다. 동업을 제안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내 자그마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면 적어도 쪽박은 차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앞서는 것이다. 나도 맛만으로 승부를 걸 수 있는 일이라면 이런 유혹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외식사업은 복잡한 요소들이 참 많이 작용한다. 외식 트렌드를 알아야 하고 입지 선정, 메뉴와 인테리어 컨셉트, 손님 접대 요령 등 따져야 할 요소들이 참 많다.
그래서 맛 칼럼니스트는 ‘맛있는 음식’에 집중할 뿐, ‘장사 잘되는 식당’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도 내 경험에서 한 수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있으면 농담 삼아 이런저런 말들을 들려주기는 한다.
“손님을 끌려면 먼저 그들의 식당 선택 기준을 표준화, 계량화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외식 컨설팅 관련 자료를 보면 이런 평가표들이 있긴 합니다. 왼쪽에 맛, 인테리어, 입지, 친절도, 위생, 유행성, 가격 등의 항목을 만든 뒤 오른쪽에 점수를 매겨 기준표를 작성하는…. 그런데 제 경험에 따르면 소비자들은 아주 의외의 기준으로 식당을 선택하기 때문에 평가표가 현실성이 전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곳 그 식당’ 입이 아닌 머리에서 만족
경기도 일산에 있는 식당들을 예로 들면, 그곳에는 수도권 베드타운답게 3~4인 가족이 3만원 정도 들여 즐겁게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들이 많습니다. 이곳저곳의 식당을 돌아다니며 맛을 따져보고 친절, 위생, 인테리어 등을 살펴보다 ‘손님 많은 식당’의 결정적인 요인이 뭔지 한마디로 축약한 적이 있습니다. 일산에서 장사 잘되는 식당은 뭐가 다를까요? 바로 규모입니다. ‘일산에서는 식당이 크면 뭘 하든 잘된다’입니다. 메뉴를 따지지 않습니다. 칼국수든 삼겹살이든 생선회든 설렁탕이든 일단 식당 규모가 크면 맛, 친절 따위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더군요.
물론 까닭이 있습니다. 베드타운에 사는 30, 40대 소시민들에게 그럴듯하게 차려놓은 대형 식당이 주는 ‘위안’이 크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일산 소시민들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지만, 상류층이 다니는 고급 레스토랑에는 가지 못해도 중산층으로서 이 정도 규모의 식당에는 들락거릴 수 있다는 위안을 얻는 것입니다. 일산의 대박 식당 주인들은 이런 소비자의 심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5000원짜리 칼국수를 팔아도 귀에 이어폰을 꽂은 유니폼 입은 종업원이 발레파킹을 하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휴게실을 따로 두며, 그럴듯한 회원카드를 발급합니다.
일산 사람들의 식당 선택 기준을 염두에 두고 ‘손님들은 식당에서 무엇을 먹을까’를 생각해봅시다. 음식? 아닙니다. 그 식당이 주는 이미지를 먹는 것입니다. 맛만 따진다면 문닫아야 할 집이 수두룩한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식당이 잘되려면 소비자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물론 입지에 따른, 즉 그 지역의 주요 소비자에 따른 이미지 창출이 중요합니다.
식당의 이미지 창출은 전혀 의도되지 않은 데서 성공을 거둘 수 있고, 온갖 마케팅 기법을 동원했음에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운칠기삼’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식당을 열고도 말아먹는 것을 여러 차례 봐온 경험이 있어 하는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소비자들은 어느 식당의 이미지를 그릴 때 ‘그곳의 그 식당’이라고 하지, ‘그 식당의 그 음식’으로 머리에 새기지는 않습니다. 혜화동 기사식당 골목에 대박난 왕돈까스집 아시죠. 식당 주인은 그 골목을 벗어나면 자신의 왕돈까스가 팔리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분점을 내달라며 돈을 싸들고 찾아와도 꿈쩍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명한 일입니다. 또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누구 누구네 식당’ 하는 식으로 인적 요인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프랜차이즈나 분점으로 크게 확장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대박 식당과 쪽박 식당의 가장 큰 차이는 절대 음식 맛에 있지 않습니다. 손님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던져주고 그 이미지를 먹게 함으로써 심리적으로 얼마나 큰 만족감을 느끼게 하는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으며 만족을 느끼는 곳은 입이 아니라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자, 제가 식당 컨설팅을 할 수 없는 이유를 아시겠죠. 맛칼럼을 쓰면서 ‘식당 해서 돈을 벌려면 음식 맛이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니 이율배반도 이만한 것이 없지 않을까요.”
내가 처음으로 쥐포를 먹어본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1960년대 말이나 70년대 초) 때였다. 달콤하고 고소하지만 약간 콤콤한 냄새가 나는 이 건어물의 맛은 참으로 신비로웠다. 당시 오징어, 오징어껍질, 멸치, 가오리포, 건홍합 등이 내 군것질거리였는데, 쥐포는 설탕과 조미료를 가미한 탓에 그 달콤함으로 이들과 사뭇 달랐다.
언제 누가 이런 생선포(설탕과 조미료를 바른!)를 만들었는지 새삼 궁금해져 쥐포에 관한 자료를 찾았다. 그러나 인터넷 어디에서도 쥐포의 역사는 찾을 수가 없었다. 한때 쥐포의 최대 산지였던 삼천포나 여수로 취재를 가야 마땅하지만, 쥐포 하나 때문에 그 먼 길을 나설 수도 없어 어릴 때 겪은 일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해볼 뿐이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마산이다. 바닷가와 어시장에서는 온갖 생선을 말렸다. 냉장고가 귀한 시절이었으니 바닷가인데도 싱싱한 생선이 상에 오르기보다 소금에 절이거나 말린 생선이 조리돼 오르는 일이 더 많았다. 우리 형제에게 군것질거리로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가오리포였다. 꾸덕꾸덕하게 말린 가오리(홍어가 아니다. 손바닥 서너 개 펼진 정도의 가오리!)를 연탄불에 구워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이건 집에 늘 있었던 것 같다.
시대 바뀌었어도 최고의 군것질거리로 인기
쥐포는 느닷없이 등장했다. 어느 기억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는 시장 좌판에서 어머니가 쥐포를 사준 것이고, 또 하나는 누군가 우리 집에 나무상자에 든 쥐포를 가져다줘 두고두고 먹었던 일이다. 그때 일을 내 형들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나무상자에 든 쥐포 있제? 그기 일본에 수출하던 거 아이가. 처음에는 우리나라 사람들 쥐포 안 묵었다. 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선포 말리는 데 설탕 바르고 미원 바르는 거 본 적 있나? 그냥 말려서 묵는다 아이가. 일본애들은 생선포를 달달하게 설탕 발라 묵는 모양이더라. 하여간에 마산하고 사천하고 삼천포, 여수 이런 데서 쥐포 말려 일본 수출하는 집들이 있었다. 그란데 한번은 그 수출하는 쥐포가 상해서 클레임이 걸리뿐 기라. 와, 생선포 습기찬 데 오래 두모 쿰쿰한 냄새 나잖아. 수출하는 건어물집에 큰일이 난 기라. 되돌려받은 그놈의 쥐포를 버릴 수도 없고. 그래서 수출하다가 클레임 걸렸다는 말은 쏙 빼고 시장에다 뿌렸다 안 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묵나 어떠나 볼라꼬. 근데 그기 대박을 친 기라. 니 알제? 마산 시내가 천지삐까리로 쥐포 풀렸던 거. 그래, 니는 잘 모를 끼다. 내가 막 중학교 들어갔을 때고 니는 아직 엄마 치마 붙잡고 코 질질 흘리고 다닐 때니까.”
해장국으로 유명한 서울 종로구 청진동 골목에서 10여 년 밥벌이를 했다. 술꾼 친구들은 내 밥벌이 장소를 마냥 부러워했다. “야, 거기 해장국 끝내주잖아. 매일 술 마셔도 근처에 해장 음식 있으니 좋겠다.” 하지만 모르고 하는 말이다. 10여 년 동안 청진동 해장국을 먹은 것은 열 손가락에 꼽는다. 물론 매일 술을 마시다시피 했는데 그렇다.
소의 선지와 각종 내장에 우거지 넣고 끓여내는 청진동 해장국은 내 입에 너무 무겁고 거칠다. 이 음식이 객관적으로 해장에 좋고 맛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해장 음식에 대한 기호 차이는 생각 밖으로 크다. 피자에 콜라를 마셔야 해장이 된다는 사람도 있고 크림 범벅의 스파게티로 속 푸는 사람도 있다. 순전히 내 입맛, 아니 술에 찌든 위장에 맞는 해장 음식을 몇 가지 추천한다.
개인별 기호 천차만별 … 위장 달래는 느낌으로 조리
해장 음식으로 난 냉면을 최고로 친다. 메밀국수에 신 김치, 편육을 올려 한입 가득 넣고 씹다가 시원한 육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면 아무리 술독 오른 위장이라도 녹아내리게 마련이다. 북녘 출신 어르신네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할 것이다. “암, 해장엔 냉면이 최고지. 냉면 먹기 전에 메밀국수 삶은 물을 쭉 들이켜는 것만으로도 속이 풀리지.”
그렇다고 모든 냉면이 해장용으로 좋은 것은 아니다. 육수는 최대한 가벼워야 하고 약간 찝찌름한 맛이 나야 한다. 이때 곁들이는 김치는 물이 질척질척한 북녘식이 어울린다. 이런 조건을 갖춘 집으로는 충무로의 ‘필동면옥’을 들 수 있다. 전날 밤 울화 치미는 술자리로 속이 뒤틀려도 편육 반 접시에 냉면 한 그릇이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는 표정으로 이 집 문을 나서게 된다.
해장 음식, 그 두 번째는 다슬깃국이다. 다슬기는 민물고둥을 말하는데 올갱이, 고디 등의 사투리로도 불린다. 다슬기는 전국 어느 개천에서나 잡히며, 따라서 지방마다 다양하게 국을 끓여 먹었다. 경상도식, 전라도식, 충청도식 등으로 다슬깃국 끓여내는 방식이 다 다르다는 말이다.
다슬깃국이 해장국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되는데, 된장 푼 물에 다슬기를 푹 삶아낸 뒤 우거지나 부추 등 채소를 넣고 끓여내는 충청도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가볍고 시원해서 속 푸는 데 그만이다. 충청도가 석권하고 있는 이 다슬깃국 시장에 ‘무뚝뚝한’ 경상도 다슬깃국으로 술꾼들의 위장을 달래고 있는, 서울에서는 드문 식당이 있다. 인사동 좁은 골목 끝에 자리한 ‘풍류사랑’이란 곳이다. 술맛, 음식맛에 주인장의 입심까지 좋아 이 집은 문화계 인사들로 늘 북적거린다.
해장 음식 세 번째는 묵밥이다. 멸치나 사골로 우려낸 육수에 메밀묵이나 도토리묵을 채쳐 넣고는 쫑쫑 썬 신 김치와 김을 올려내는 음식이다. 여기에 밥을 말아 먹기도 한다. 이 음식의 가장 큰 장점은 아무리 숙취가 심해도 눈 딱 감고 후루룩 입 안에 밀어넣기 시작하면 어느 틈엔가 한 그릇 다 비워지고 속이 확 풀린다는 것이다. 미끌미끌한 묵이 부담 없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거칠고 둔탁한 묵밥을 즐기려면 정릉 아리랑고개 인근에 있는 ‘봉화묵칼국수’가 낫고, 가볍고 때깔 있는 음식을 찾으면 광화문 교보빌딩 뒤편의 ‘미진’이 좋다. 두 집 다 메밀묵밥인데 아쉽게도 서울에서는 도토리묵밥을 제대로 하는 집이 없다.
네 번째 해장 음식으로 대구볼때기탕을 소개하고 싶은데, 내 오랜 단골인 청진동 ‘부산뽈테기’가 재개발 바람에 폐업해 아쉬움이 크다. 그래서 난 집에서 가끔 대구지리를 끓인다. 커다란 대구머리를 구하면 금상첨화일 텐데 서울에서는 구할 방법이 없다. 중간 크기의 대구를 구해 멸치 육수에 대파, 무, 마늘, 소금만으로 맛을 낸다. 대구는 양념을 최소화하는 것이 맛내는 비법이다. 이는 차게 해서 먹어도 속이 확 풀린다.
사실 전날 술자리가 즐거우면 아침에 따로 해장 생각이 들지 않는다. 세상 시름 토하는 술자리일수록 다음 날 해장 음식이 당긴다. 그래서 해장 음식들은 대부분 속이 시원하게 내려가는 기분이 느껴지도록 조리되는 것 같다.
꽃이 피어도 그냥저냥이다. 도시의 찌든 삶이 자연을 저만치 떨어뜨려놓은 게 분명하다. 며칠 전 지방 출장을 갔다가 매화를 보고도 ‘아, 벌써 봄이구나’ 하고 만다. 예전 같으면 꽃잎을 따다 연한 녹차에 올려 온몸으로 그 향을 음미했을 텐데….
몇 해 전 요리사 임지호 씨 음식점에서였다. 밥을 다 먹고 차 한잔 마시려고 마주 앉았는데 임지호 씨가 자랑하듯 천주머니 하나를 들고 나왔다. 안에는 한지로 곱게 싼 매화 꽃잎이 들어 있었다.
“남쪽 바닷가에 갔는데 마침 매화가 만발했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서 하룻밤 잤지요. 새벽에 해무가 조용히 깔렸는데 그때 꽃잎 몇 장을 땄습니다. 매화는 해뜨면 향이 옅어져요. 그걸 방바닥에 깔아 말렸습니다.”
녹차와 함께 우려낸 매화는 남쪽 바다 향까지 담고 있었다. 잠시 스쳐가는 듯한 봄을 조금이나마 연장하려고 꽃잎을 말렸던 것일까. 난 매화보다 그의 풍류에 취해 지난 봄날들을 추억했더랬다.
약간의 단맛과 새콤함 … 꽃향기 즐기는 행위
고향 뒷산은 돌산인 데다 습한 골이 많아 봄이면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었다. 형들을 따라 새벽운동 삼아 뒷산을 자주 올랐는데 그때 진달래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특별한 맛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은은히 퍼지는 향은 아직도 내 입 안에 남아 있다. 이걸 흔히 화전으로 부치는데 기름과 불기운으로 모양만 그럴듯할 뿐 향은 다 달아나 봄을 오롯이 느끼기에는 미흡하다.
이처럼 먹을 수 있는 꽃이 많다. 국화 진달래 호박꽃 잇꽃 딸기꽃 아카시아꽃 동백꽃 민들레꽃 복숭아꽃 살구꽃 연꽃 목련 장미 제비꽃 난꽃 유채꽃 등꽃 귤꽃 등등. 10여 년 전부터 이 꽃들로 음식을 만들어내는 식당이 생겨났는데 꽃을 먹는다는 게 어색한 일인지 장사가 잘된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다.
꽃을 먹는다고는 하지만 그 꽃에서 우리가 얻는 감각은 혀로 인한 게 아니라 대부분 코를 통해 들이는 것이다. 앞에 거론한 ‘식용 꽃’을 하나하나 음미해보면 약간의 단맛과 새콤한 맛 정도만 있을 뿐 대부분의 맛 요소는 입천장 너머 콧속으로 올라오는 향이다. 그러니까 꽃을 먹는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꽃의 향을 즐기는 행위인 것이다.
벚꽃이 필 때면 진해가 군항제로 온통 난리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40여 년 전에도 진해는 벚꽃이 피면 난리가 났었다. 지금은 군항제라 불리지만 그때는 ‘벚꽃장’이라 했다. 벚꽃 피는 무렵에 열리는 난장이라는 뜻이다. 이때면 여인네들은 벚꽃보다 화사한 한복을 차려입고, 그보다 더 화사한 양산을 받쳐들고는 봄나들이를 나갔다(아마 일본 풍습이 전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어린 내게 벚꽃장은 참으로 흥분되는 행사였다. 곡마단을 볼 수 있고 솜사탕이나 사이다 같은 별스런 군것질거리를 먹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어른들은 벚나무 밑에 자리 펴고 싸온 음식과 술로 낮부터 거나하게 즐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나 싶다.
청소년기부터는 벚꽃장에 갈 일이 없었다. 진해 군항제라는 전국적인 행사로 바뀌면서 ‘가봤자 고생만 한다’고 어른들도 가지 않았고 나도 덩달아 가지 못했다. 그러니까 진해 벚꽃은 어릴 적 잠시 본 이후 40여 년간 사진이나 텔레비전에서 볼 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벚꽃만 보면 설레고, 왠지 그 아래에서 뭔가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어릴 적 기억으로는 벚꽃장에 먹을 것 파는 장사치들이 난장을 벌였는데 그때 먹었던 음식은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솜사탕과 사이다가 전부다.
어머니의 도시락 음식도 김밥이었는지 유부초밥이었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그런데 그날 벚꽃이 흩날리면서 뿜어냈던 향은 오롯이 내 몸에 배어 있다. 벚꽃의 향은 흐려서 언뜻언뜻 코끝을 스치고 말 뿐이다. 그런데 꽃잎이 바람에 와르르 떨어질 때 그 속에서 눈 감고 꽃바람에 몸을 맡기면 그 여린 향이 온 우주를 감싼다. 남녘에서 올라오는 벚꽃 소식에 식욕이 자꾸 돋는 것은 그 옛날 벚꽃장에서 먹었던 것이 흩날리는 꽃바람이었기 때문일까.
뜨거운 국물에 고기나 채소를 살짝 익혀 먹는 음식을 샤브샤브라고 한다. 발상지는 일본이다. 몽골 민족이 세계 정복자로 군림할 때 군사들이 투구에 물을 끓여 고기를 익혀 먹었는데, 이것이 고려시대 한반도로 들어왔고 임진왜란 때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샤브샤브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어떤 사람은 한반도의 전통조리법 토렴이 고려시대 몽골로 전해지고 이것이 유럽(퐁듀 같은 음식을 염두에 둔 듯하다)으로, 아시아로 퍼졌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는 억지에 가깝다. 토렴은 음식 이름이 아니라 더운 국물로 찬 음식을 데우거나 데치는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 이런 조리 방식이 고대 한반도에만 존재했다는 것은 무리다. 이처럼 조리 방식의 유사성으로 음식의 유래를 따지면 세계 모든 음식의 발상지는 아프리카가 될 것이다. 지구상 최초의 현생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출발했고, 그들이 처음으로 불을 사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앙냄비에 홍탕·백탕… 봄 입맛 돋우는 데 최고
불이 있고 음식을 담을 수 있는 도구가 있으면 굽거나 찌거나 끓이는 등의 조리법은 다양하게 개발될 수 있다. 따라서 세계 각지에서 각각의 민족이 나름의 방식으로 조리법을 발전시켰을 텐데, 이것이 조리기구나 식재료의 유사성 때문에 서로 비슷해 보일 뿐인 것이다. 샤브샤브 같은 음식은 중국에도 있고 태국에도 있고 베트남에도 있고 인도네시아에도 있다. 그런데 이게 다 한반도의 토렴에서 발전한 음식이라고 하는 것은 상상력이 좀 지나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훠궈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다 샤브샤브 같은 ‘더운 국물에 살짝 익혀 먹는 음식’의 유래가 한반도라는 근거 희박한 ‘설’이 정설처럼 떠돌아 몇 마디 하게 됐다).
훠궈(火鍋)는 끓는 국물에 고기, 해산물, 채소 따위를 살짝 익혀 먹는 중국 음식이다. 중국 왕실 음식이라는 설도 있고 쓰촨 음식이라는 말도 있지만, 중국 각지에 다양한 훠궈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에 훠궈가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5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최근 훠궈가 급격하게 번져나가고 있는데, 그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음식점은 동교동의 ‘불이아(弗二我)’다.
근처에 일터가 있어 개업 당시부터 무슨 음식점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발길은 하지 않았다. 주변의 평가가 그다지 식욕을 자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한 국물의 둔탁한 샤브샤브! 일본식 가벼운 맛을 좋아한다면 맞지 않을 겁니다.”
이런 평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중국 음식은 느끼하다’는 선입관 때문이었는지 처음 방문했을 때는 몇 점 먹다 말았다. 그러나 음식을 내는 모양새가 퍽 마음에 들었고, ‘젊은 여성들한테는 잘 맞겠다’ 싶었다. 태극 모양의 냄비에 빨간 육수와 하얀 육수를 담아내는데, 그 냄비를 ‘원앙냄비’라고 해 ‘불이아’라는 상호와 더불어 묘한 이미지를 자아냈다. 무엇이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즐기는 젊은 여성들에게는 코드가 딱 맞는 세팅인 것이다. 여기다 각종 소스가 올라와 한자리에서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었다.
두 번째 가서야 이 음식의 매력을 깨달을 수 있었다. 20여 가지 재료를 넣고 만들었다는 그 둔탁한 육수는 쇠고기 양고기 본래의 맛에 독특한 향을 더해 제3의 맛을 창조했다. 이건 일본식 샤브샤브에는 없는 미덕이다. 그래서 먹는 방식을 바꿔봤다. 고기와 채소 따위를 건져 소스에 찍어 먹기보다는 국물까지 앞접시에 담고 약간의 소스를 풀어 찌개 먹듯 하는 것이다. 국물 맛을 더 강하게 즐기는 방식이다.
정식을 시키면 원앙냄비와 쇠고기, 양고기, 청경채 등 채소, 버섯, 감자, 무, 언 두부, 만두, 당면 등이 나온다. 소스가 다양한데 처음에 제 입에 맞는 것을 찾기 위해서라도 모두 달라고 하는 것이 좋다. 물론 추가요금이 있다. 저녁나절에는 늘 만석이었다. 그러니 예약은 필수!
일산에 산 지가 몇 년인데 나만 모르고 이웃들은 다 아는 음식점이 있었다. 그것도 한때 출퇴근하던 길에 자리한 식당이다. 지나는 길이라 간판이 안 보여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명색이 맛 칼럼니스트인데 나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게으름 탓인 듯해 좀 놀랐다.
일산은 아주머니들의 세상이다. 수도권 중산층의 베드타운답게 평일 낮 음식점들은 아주머니들이 점령한다. 식당 주인들은 이들 일산 아주머니를 ‘꼬시기’ 위해 평일 점심메뉴 할인을 기본으로 서비스한다. 그래서 일산 아주머니들은 동네 음식점 정보에 빠삭하다. 가끔 아내가 이웃과 전화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 거기 그 집은 양만 많지 맛은 아니더라. 어디에 시푸드 뷔페가 생겼는데 꽤 괜찮더라고. 점심은 할인되니까 이번 모임은 거기서 하자” 등의 식당 정보가 오간다.
600회 반죽으로 쫄깃한 맛 각별 ‘입에 착착’
며칠 전 아내와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밖에서 점심을 먹게 됐다. 정말 이럴 땐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집 근처 음식점들은 대부분 섭렵한 데다 맛있다고 단골로 삼은 집이 정해져 있으니 달리 갈 만한 곳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바로 그때 아내가 하는 말 “어, 있다. 동네 엄마들이 다 이 집 가봐라 하더라고. 이산포IC 나오는 길에 있는 메기매운탕집인데 우리만 안 갔나봐요.” “거기 메기매운탕집이 있었나?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는데….”
과연 있었다. 자유로 이산포IC를 빠져나오자마자 오른쪽으로 GS주유소가 있는데 그 샛길로 들어서니 ‘메기 일번지’라는 큰 음식점이 나왔다. 이런 곳에 식당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어떻게들 알았는지 넓은 주차장엔 차 댈 데가 없을 만큼 손님이 많았다. 보아하니 일산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호수공원이나 파주 쪽으로 바람 쐬러 나왔다 들르는 외지인도 꽤 돼 보였다.
메뉴는 메기매운탕, 참게매운탕, 메기구이 같은 민물 음식이다. 종업원 말이 양어장을 직접 운영한다고 한다. 메기매운탕으로 시켰다. 대, 소밖에 없는데 소자를 앞에 두고 질려버렸다. 그다지 많이 먹지 않는 우리 식구들 양으로 따지면 5인분은 돼 보였다(매운탕이나 찜집에 가면 이게 늘 불만인데, 왜 인분으로 팔지 않을까. 대, 중, 소 3단계는 그나마 이해할 수 있지만 대, 소만 있는 것은 대자를 4인분 기준으로 보면 2인분은 팔지 않겠다는 말밖에 안 된다).
메기 위에 미나리, 깻잎 등 채소가 올려지고 그 위에 자잘한 민물새우가 듬뿍 놓였다. 김이 오르자 채소부터 먹으라고 친절히 알려준다. 국물이 둔탁하지 않은 게 마음에 들었다. 대부분 메기매운탕은 특유의 흙내를 제거하기 위해 양념을 강하게 하는데 이 집은 최대한 가볍게 육수를 냈다. 메기 살도 잡냄새 없이 깨끗하다. 양식한 메기를 맑은 물에 며칠 둬 잡내를 제거한 게 아닌가 싶다.
웬만큼 먹었을 때쯤 수제비를 내왔다. 반죽 덩어리째 가져와 종업원이 그 자리에서 뜯어 넣는데 보통은 손님이 직접 하는 것 같았다. “이 집의 매력은 수제비래. 그것도 무한제공. 이런 거에 아줌마들이 깜빡 넘어가잖아!”
반죽이 아주 차지다. 첨가물을 넣지 않고 이만큼 치대려면 보통 노고가 들어가는 게 아니다. 식당 벽에 직원용이라며 이렇게 써 있다. “공고 수제비 반죽 횟수 1다라 600번, 2다라 1200번 남자직원 쉬는 날 각각 200번 추가. 정해진 횟수는 반드시 이행하시기 바람.” 다른 벽면에는 손님용으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너무너무 힘들게 직접 손으로 만든 손수제비 반죽입니다. 집에는 가져가지 마십시오. 부탁드립니다(더욱 쫀득하게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메기매운탕집인데 메기 자랑보다 수제비에 대한 ‘주의사항’이 더 눈에 띄어 신기했다. 이 때문인지 수제비가 쫄깃하고 밀가루 풋내 없이 깔끔한 게 입에 착 붙었다.
집에 돌아와 원고 쓰자고 인터넷 검색을 하니 두어 차례 방송 탄 집이었다. 그렇다면 일산 이웃들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소문난 집이란 말인가. 신문 방송 나간 집은 다루지 않기로 내심 정했는데, 하여간 난 이 집은 몰랐다는 것으로 스스로 변명 삼고 만다. 매운탕은 몰라도 수제비 하나는 예술이다.
1980년 부모님은 평생을 사시던 바닷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주했다. 자식을 서울로 유학 보내고 자리를 잡으면 부모가 뒤따라 상경하는, 지방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전형적인 방식의 이주였다.
부모님은 서울살이에 꽤 적응력이 필요했다. 경상도 사투리로 인한 이웃간의 사소한 오해에서부터 서울 사는 친지집 방문까지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특히 입맛 까다로운 두 분은 서울 시장의 음식재료에 대해 늘 불만을 토로하셨다.
“아이고, 이놈의 서울 시장에는 묵을 께 없더라. 괴기(경상도 바닷가에서는 생선을 ‘괴기’라 한다)가 다 썩은 거뿐이고. 마산서는 묵지도 않는 생선(임연수를 말함)을 안 파나. 예서 더 이상 못 살겄다.”
제철 해산물 천국 … 보고 즐길 거리도 풍성
당시만 해도 냉장유통이 잘 되지 않던 시절이라 서울 시장의 생선들은 내 눈으로 봐도 맛이 간 것들뿐이었다. 평생 싱싱한 생선만 드신 두 분께 그런 생선들이 눈에 들 리 없었다. 그래서 장보러 갔다가 푸성귀만 잔뜩 사오시는 날이 다반사였다. 그때 어머니는 싱싱한 생선 고르는 법과 손질하는 법을 반복해서 들려주셨는데 아마 자식들에게 고향의 맛을 잊지 말라는 당부의 뜻이 있지 않았나 싶다.
“싱싱한 생선은 눈깔 빛깔이 맑고 투명하다. 아가미는 선명한 붉은색이고, 아가미 위를 눌렀을 때 핏물이 나오지 않아야 한다. 비늘이 쉽게 떨어지지 않아야 하고, 무엇보다 비린내가 나지 않아야 한다. 비린내는 오래된 생선일수록 심하다. 한 번에 다 먹을 수 없으면 손질해서 둬야 하는데, 그냥 냉장고에 두면 잡내가 나서 못 먹는다. 비늘 치고 내장 빼고 굵은 소금 뿌려서 채반에다 말려라. 하루쯤 둬서 생선에서 잡내나는 물이 빠지면 소금 탈탈 털어 냉장고에 넣어둬라.”
그로부터 몇 년 지나서야 부모님은 서울에서도 싱싱한 생선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셨다. 노량진 수산시장이었다. 버스로 30분 정도 걸렸는데 어머니는 이 거리도 멀다 하셔서 아버지가 장보는 날이 많았다. 아버지는 자전거로 노량진 수산시장에 다니셨다. 이런 날에는 꼭 부모님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야야, 니 아부지 노량진 갔다 오셨다. 전어가 싱싱하더라. 회쳐서 냉장고에 넣어뒀으니까 퇴근길에 꼭 들러라.”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는 노량진 수산시장을 주로 회식 장소로 이용했다. 동료들은 처음엔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생선 고르고 식당 찾는 게 번거롭고 일반 횟집과 가격도 별 차이 없으면서 ‘밑반찬(쓰끼다시)’까지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한두 번 맛들이고 나니 이젠 그들이 먼저 가자고 나선다. 길게 늘어선 활어가게 둘러보는 재미도 있는 데다 산 낙지 조금, 왕새우 조금, 멍게 조금씩 입맛에 맞게 메뉴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노량진 수산시장 마니아들 중에는 단골가게를 정해두기도 하지만 사실 생선의 질과 가격은 거의 비슷하다. 나는 따로 단골을 두지 않았다. 상인들이 붙잡든 말든(호객행위가 좀 심한 편이다) 요즘은 어떤 생선이 먹을 만한지 일단 훑어보고 몇 가지 메뉴를 정해 가격협상에 들어가는 것이 유리하다(이때 주차권을 꼭 받아야 한다. 상인들 말로는 2만원어치 이상 사면 한 시간짜리 주차권을 준다고 한다).
채소와 양념, 매운탕 내는 식당은 활어가게 앞 건물의 2층과 지하에 즐비하다. 이 역시 이들 식당 중 어디가 낫다고 하기 어렵다.
일본 도쿄를 여행하면 반드시 구경할 곳으로 쓰키지 수산시장을 꼽는다. 여기에는 골목골목 싸고 맛있는 초밥집들이 있고 규모도 노량진 수산시장보다 크지만, 보고 즐길 거리는 노량진만 못하다. 도쿄 쓰키지 시장을 보고 나면 더더욱 서울 한복판에 노량진 수산시장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알게 된다.
나는 철마다 노량진 수산시장에 간다. 제철에 나오는 싱싱한 해산물을 맛보기 위해서다. 또 여기만 가면 갯내음으로 고향 바다에 와 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해진다. 내 아버지도 그 먼 길을 자전거로 다닌 것을 보면 싱싱한 생선 구하자고 그러신 것만은 아닌 듯하고
예전에 일했던 모 월간지에서 보리밥 잘하는 식당들을 소재로 기사를 써달라는 원고청탁을 받았다. 하지만 흔쾌히 허락하고는 고민에 빠졌다. 보리밥 잘하는 식당이라? 청탁자 의도는 보리밥 잘 짓는 식당을 말하는 것 같은데, 보리밥 맛있는 집이 ‘보리밥을 잘 지어 맛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보리밥 맛의 요소 중 보리밥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까?
사실 보리밥을 먹으면서 반찬을 곁들이는 법은 거의 없다. 이렇게 말하면 열에 열은 그럼 어떻게 먹냐고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 것이다. 보리밥엔 갖가지 나물과 고추장, 참기름, 된장 또는 청국장 등이 따라야 한다. 그러니까 식당에서 그냥 ‘보리밥’이라고 차림표에 써놓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보리비빔밥이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보리밥 맛있는 식당을 뽑는 기준은 보리밥을 잘 짓는 게 아니라 나물과 된장찌개(청국장) 등을 얼마나 맛있게 요리하느냐다.
이런 식당은 의외로 많다. 사실 대부분의 보리밥집들은 웬만큼 맛을 낸다. 된장과 참기름, 고추장 등 보리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몇 가지 요소에 집중하면 맛에서 거의 실패하지 않는 게 보리밥이다.
나물과 된장찌개 등 부재료가 맛 좌우
원고청탁을 받고 사흘쯤 뒤에야 이런 생각이 드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쓴다고 해놓고 보리밥에 대해 써야 할지, 나물이나 된장국 따위에 대해 써야 할지 되묻는다는 것은 맛 칼럼니스트로서뿐만 아니라 거절하려는 핑계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며칠 끙끙거리다 결국 원고를 썼다. 대한민국 보리밥집의 대명사인 영월 장릉보리밥집을 비롯해 일산 신도시의 폼나는 보리밥집, 남산의 ‘퓨전’보리밥집 등등.
그런데 기사를 쓰면서 정말 아쉬웠던 것은 내가 먹은 보리밥 중 최고라고 여겼던 집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는 점이다. 종로 피맛골 홍도식당과 청주 육거리장터의 리어카 보리밥이다. 홍도식당은 내가 몇 차례 소개해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는데, 순박한 노부부가 그들의 인생을 담아 내놓는 것 같은 투박함에 매료돼 혼자서도 가끔씩 가던 곳이었다. 지금은 재개발로 사라졌다.
청주 육거리장터 보리밥은 10여 년 전 내가 지면을 통해 소개한 후 방송에도 여러 번 나갔는데, 할머니들이 집에서 한 보리밥과 나물, 된장국을 리어카에 싣고 와 장터에서 팔았다. 값은 1000원이었고 그릇을 들고 장바닥에 앉아 먹어야 했다. 그러나 1000원이라는 값과 장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먹어야 한다는 특별함 때문이 아니라, 참으로 맛있었다. 대접에 아무렇게나 퍽퍽 담아주는 보리밥이었지만 집에서 금방 한 밥에 집된장, 집고추장, 집참기름 등으로 맛을 내니 어찌 그 맛이 깊지 않을 수 있겠는가(보리밥 식당 중 집에서 직접 된장, 고추장 담그고 참기름 짜는 집이 얼마나 되겠는가). 지난해 청주에 갈 일이 있어 리어카 보리밥 한 그릇 먹자고 육거리 시장바닥을 뒤지며 할머니들을 찾았다. 그러나 장터 사람들은 그 할머니들이 언제 사라졌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의외로 보리밥 맛있게 먹는 요령을 모르는 것 같다. 보리밥은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맛 차이가 크다. 쌀밥처럼 밥 먹고 반찬 먹는 식으로 먹으면 특유의 촉감과 냄새 때문에 반 공기도 들기 어렵다. 보리밥은 비벼야 한다. 고추장도 좋고 강된장이나 청국장도 좋다. 여기에 여러 나물을 섞을 수 있는데 그렇다고 가짓수가 많을수록 더 맛있어지는 것은 아니다. 잘 익은 열무김치나 콩나물, 고사리 등 기본 나물만 있어도 충분히 맛이 난다. 또 하나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참기름이다. 제대로 짠 참기름 두어 방울은 모든 나물의 ‘하자’를 감출 수 있다. 비빌 때는 젓가락을 쓰는 게 좋다. 숟가락으로 비비면 밥알이 눌리거나 깨지면서 맛이 덜하게 된다. 젓가락으로 살살 비비면 나물과 밥이 의외로 잘 섞인다.
다 비볐으면 한 숟갈 듬뿍 떠서 입 안 가득 넣고 씹어야 제 맛이다. 우걱우걱.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미끌하고 거친 촉감은 나물들로 인해 감춰지고 특유의 냄새는 고추장이나 된장, 참기름 향에 묻히면서 구수한 맛이 입 안 가득해진다. 입 안의 보리밥을 다 넘겼으면 바로 다시 한 숟갈 밀어넣어 중간에 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입 안에서 벌어지는 쉼 없는 맛의 충돌을 즐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원한 숭늉 한 사발 들이켜면서 불룩해진 배를 확인하는 재미, 이게 보리밥의 진짜 맛이다.
육즙이 풍부하고 도톰한 돼지고기에 튀김옷을 입혀 기름에 바삭하게 튀겨내고, 여기에 겨자소스를 얹은 양배추를 곁들여 먹는 돈가스. 이젠 세대를 가리지 않는 대중적인 음식이 됐다. 특히 프랜차이즈 돈가스 전문점이 부담 없는 가격으로 젊은이들의 입맛에 맞춰가며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돈가스는 일본에서 건너왔다. 그렇다고 일본 전통음식은 아니다. 서양의 포크커틀릿이 일본식으로 변형된 것이다. 커틀릿이란 얇게 저민 고기에 밀가루와 달걀, 빵가루를 묻혀 튀기는 요리를 말한다. 돼지고기를 튀기는 방식은 서양이나 일본이나 같을 것이다. 그러나 돈가스는 이제 서양 음식으로 보면 안 된다.
서양의 고기요리는 고기가 덩어리째 접시에 올라오고 이것을 포크와 나이프로 잘라 먹는다. 그러나 돈가스는 고깃덩어리가 젓가락으로 집어 먹을 수 있게끔 잘라져 나온다. 여기에 수프 대신 일본식 된장국, 빵 대신 밥, 샐러드 대신 채소절임 등이 나온다. 철저히 일본식으로 바뀐 것이다.
싸고 푸짐한 한 끼 음식 … 돼지고기 질이 맛 60% 좌우
일본에서 돈가스가 일반에게 소개된 것은 1910년경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도 돈가스를 내는 음식점이 있었을 것이다. 광복 이후에도 서양풍의 음식점에서는 돈가스를 냈다. 이때는 돈가스와 포크커틀릿이란 이름을 섞어 썼으며, 음식 형태는 포크커틀릿이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수프와 샐러드가 나오고 고기는 통째 접시에 올려져 포크와 나이프로 먹었다.
1960년대 서울 명동에 일본식 돈가스 전문점이 생겼다. 최초의 돈가스 전문점은 지금도 성업 중인 ‘명동돈까스’다. 서양풍의 여러 음식을 내는 경양식점과 달리 돈가스만 나오는 음식점이 등장한 것이다. 고기가 잘라져 나오는 등 지금의 돈가스와 같은 형태다. 68년 역시 명동에 개업해 그 자리에서 맛을 지켜오고 있는 ‘서호돈까스’도 있다.
돈가스는 돼지고기에 밥, 양배추샐러드, 국이 나오니 영양뿐 아니라 포만감에서도 큰 만족을 주는 음식이다. 그런 까닭에 돈가스 전문점은 젊은이들이 붐비는 거리에 주로 들어선다. 돈가스의 이런 장점(싸고 푸짐하다)이 극적으로 반영된 곳이 기사식당이다. 기사식당의 손님들은 대체로 입맛이 보수적이다.
여기에 서양풍 아니면 일본풍 돈가스가 들어가 ‘선전’하고 있는 것은 ‘싸고 푸짐하다’는 돈가스의 미덕 덕분일 것이다.
기사식당 돈가스는 손님 입맛에 더 맞추기 위해 독특한 조리법을 만들어냈다. 돼지고기를 방망이로 두들겨 아주 널찍하게 편 뒤 튀겨냄으로써 시각적으로 풍성하다는 느낌을 준다. A4 용지 크기만하다 해서 ‘A4 돈가스’로 불리기도 한다.
돈가스 맛에 끼치는 비중을 따지면 돼지고기가 60%, 튀김옷 20%, 튀김용 기름이 20% 정도 된다.
고기요리는 뭐니 뭐니 해도 고기가 맛있어야 한다. 연한 육질에 육즙이 풍부한 돼지고기를 향기로운 기름에 바삭하게 튀겨낸 돈가스는 소스 없이도 충분히 맛있다. 물론 여기에 튀겨내는 솜씨도 있어야 하지만 이런 기술은 기본적인 것이라 실수하는 집이 거의 없다. 맛있는 돈가스집이란 곧 최고의 돼지고기를 쓰는 집을 말한다. 그러나 그런 집을 찾기가 쉽지 않다. 돼지고기가 그날그날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돼지 중 물퇘지라는 것이 있다. 사육 중 스트레스를 받아 고기에 물이 차고 냄새가 나는 돼지를 말한다. 물퇘지 고기로 튀기면 튀김옷과 고기 사이가 뜨면서 물이 생긴다. 또 물퇘지는 기름기 많은 삼겹살보다 등심과 안심의 육질이 안 좋다. 더 큰 문제는 대부분 돈가스집 주인들이 물퇘지가 뭔지도 모른다는 데 있다.
나도 한때 돈가스를 퍽 즐겼는데 요즘은 거의 먹지 않는다. 같은 집이라도 그날그날 돈가스 맛이 다르니 행여 실망할까봐 발길을 줄이는 것이다. 음식 맛을 결정하는 첫째 요인이 재료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 듯하다.
육즙이 풍부하고 도톰한 돼지고기에 튀김옷을 입혀 기름에 바삭하게 튀겨내고, 여기에 겨자소스를 얹은 양배추를 곁들여 먹는 돈가스. 이젠 세대를 가리지 않는 대중적인 음식이 됐다. 특히 프랜차이즈 돈가스 전문점이 부담 없는 가격으로 젊은이들의 입맛에 맞춰가며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돈가스는 일본에서 건너왔다. 그렇다고 일본 전통음식은 아니다. 서양의 포크커틀릿이 일본식으로 변형된 것이다. 커틀릿이란 얇게 저민 고기에 밀가루와 달걀, 빵가루를 묻혀 튀기는 요리를 말한다. 돼지고기를 튀기는 방식은 서양이나 일본이나 같을 것이다. 그러나 돈가스는 이제 서양 음식으로 보면 안 된다.
서양의 고기요리는 고기가 덩어리째 접시에 올라오고 이것을 포크와 나이프로 잘라 먹는다. 그러나 돈가스는 고깃덩어리가 젓가락으로 집어 먹을 수 있게끔 잘라져 나온다. 여기에 수프 대신 일본식 된장국, 빵 대신 밥, 샐러드 대신 채소절임 등이 나온다. 철저히 일본식으로 바뀐 것이다.
싸고 푸짐한 한 끼 음식 … 돼지고기 질이 맛 60% 좌우
일본에서 돈가스가 일반에게 소개된 것은 1910년경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도 돈가스를 내는 음식점이 있었을 것이다. 광복 이후에도 서양풍의 음식점에서는 돈가스를 냈다. 이때는 돈가스와 포크커틀릿이란 이름을 섞어 썼으며, 음식 형태는 포크커틀릿이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수프와 샐러드가 나오고 고기는 통째 접시에 올려져 포크와 나이프로 먹었다.
1960년대 서울 명동에 일본식 돈가스 전문점이 생겼다. 최초의 돈가스 전문점은 지금도 성업 중인 ‘명동돈까스’다. 서양풍의 여러 음식을 내는 경양식점과 달리 돈가스만 나오는 음식점이 등장한 것이다. 고기가 잘라져 나오는 등 지금의 돈가스와 같은 형태다. 68년 역시 명동에 개업해 그 자리에서 맛을 지켜오고 있는 ‘서호돈까스’도 있다.
돈가스는 돼지고기에 밥, 양배추샐러드, 국이 나오니 영양뿐 아니라 포만감에서도 큰 만족을 주는 음식이다. 그런 까닭에 돈가스 전문점은 젊은이들이 붐비는 거리에 주로 들어선다. 돈가스의 이런 장점(싸고 푸짐하다)이 극적으로 반영된 곳이 기사식당이다. 기사식당의 손님들은 대체로 입맛이 보수적이다. 여기에 서양풍 아니면 일본풍 돈가스가 들어가 ‘선전’하고 있는 것은 ‘싸고 푸짐하다’는 돈가스의 미덕 덕분일 것이다.
기사식당 돈가스는 손님 입맛에 더 맞추기 위해 독특한 조리법을 만들어냈다. 돼지고기를 방망이로 두들겨 아주 널찍하게 편 뒤 튀겨냄으로써 시각적으로 풍성하다는 느낌을 준다. A4 용지 크기만하다 해서 ‘A4 돈가스’로 불리기도 한다.
돈가스 맛에 끼치는 비중을 따지면 돼지고기가 60%, 튀김옷 20%, 튀김용 기름이 20% 정도 된다.
고기요리는 뭐니 뭐니 해도 고기가 맛있어야 한다. 연한 육질에 육즙이 풍부한 돼지고기를 향기로운 기름에 바삭하게 튀겨낸 돈가스는 소스 없이도 충분히 맛있다. 물론 여기에 튀겨내는 솜씨도 있어야 하지만 이런 기술은 기본적인 것이라 실수하는 집이 거의 없다. 맛있는 돈가스집이란 곧 최고의 돼지고기를 쓰는 집을 말한다. 그러나 그런 집을 찾기가 쉽지 않다. 돼지고기가 그날그날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돼지 중 물퇘지라는 것이 있다. 사육 중 스트레스를 받아 고기에 물이 차고 냄새가 나는 돼지를 말한다. 물퇘지 고기로 튀기면 튀김옷과 고기 사이가 뜨면서 물이 생긴다. 또 물퇘지는 기름기 많은 삼겹살보다 등심과 안심의 육질이 안 좋다. 더 큰 문제는 대부분 돈가스집 주인들이 물퇘지가 뭔지도 모른다는 데 있다.
나도 한때 돈가스를 퍽 즐겼는데 요즘은 거의 먹지 않는다. 같은 집이라도 그날그날 돈가스 맛이 다르니 행여 실망할까봐 발길을 줄이는 것이다. 음식 맛을 결정하는 첫째 요인이 재료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 듯하다.
벌써 초여름 날씨다. 이런 날에는, 특히 지난밤 술 한잔 ‘거하게’ 했을 때는 시원한 막국수가 간절해진다. 가까운 곳에 만족할 만한 막국숫집이 있으면 더없이 좋으련만, ‘막국수 전문’이란 간판만 보고 들어갔다가 실망한 것이 수십 번이다. 강원도에나 가야 그 시원한 맛을 볼 수 있으려나.
국수 가락을 뽑는 방법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곡물 반죽을 양손으로 잡고 길게 늘어뜨리기를 반복해서 뽑는 방법. 중국집 자장면이 이렇게 만들어진다. 둘째, 반죽을 둥근 막대로 얇게 밀어 칼로 써는 방법. 칼국수 가락이 그렇다. 셋째, 반죽을 작은 구멍이 촘촘히 난 틀에 넣고 눌러 뽑아내는 방법. 칼국수를 제외한 우리나라 국수 대부분이 이 방식으로 뽑는다.
강원도 닮은 시원한 맛 … 속풀이에 제격
막국수는 메밀반죽을 틀에 넣고 눌러 뽑는 국수다. 이렇게 뽑는 이유는 자장면처럼 양손으로 잡고 늘리거나 칼국수처럼 홍두깨로 밀 수 있을 만큼 메밀반죽이 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메밀로 뽑은 막국수는 면이 약간 거친 듯하고 입에서 뚝뚝 끊어질 만큼 차지지 않다. 그런데 막국숫집 열에 아홉은 이런 면이 아니다. 미끌미끌하고 끈끈한 면발에 쫄면처럼 질기기까지 하다.
막국수 면은 메밀로 만드는 것이 상식이지만 실제 식당에서는 그렇지 않다. 메밀은 10% 정도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밀가루와 녹말로 만들어진다. 포장 판매되는 막국수 성분표에 메밀가루라고만 적고 그 함량조차 표기하지 않은 것도 있다.
메밀이 비싸 그런 것일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더 큰 원인은 우리의 편향된 입맛 때문인 듯싶다. 메밀이 30% 이상 들어가면 약간 까끌까끌한 감촉이 나고 면발에 찰기가 없어진다. 메밀 100%짜리 면은 입에서 뚝뚝 끊어질 정도로 찰기가 없다. 사람들 대부분이 이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쫄깃한 면발의 포로가 됐다. 인스턴트 면제품 광고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라면 칼국수 가락국수 등 어떤 면이든 쫄깃쫄깃한 면발을 강조한다. 옛날 중국집 자장면이나 가락국수 면발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요즘 면이 얼마나 질겨졌는지 잘 알 것이다.
한때 고속도로 휴게소 가락국수가 쫄면 면발처럼 질길 때가 있었다. 구수한 밀 향기는 나지 않고 이상야릇한 면발강화제 냄새만 풀풀 풍겼는데, 그놈의 첨가제가 어찌나 강한지 국숫발을 국물에 한 시간 둬도 불지 않았다. 휴게소에서 가락국수를 먹을 때마다 이 가락국수 공급업체가 망하기를 빌었는데, 정말 망했는지 요즘은 면발이 다소 좋아졌다.
면발 이야기가 길어졌다. 하여간 막국수 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쫄깃한 면발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먼저 까끌까끌한 감촉이 혀를 자극하다가 구수하면서 아릿한 메밀 향이 은은히 퍼지는 그 맛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막국수 맛의 포인트는 국물이다. 사골육수 닭육수 다시마멸치육수 등 다양한 국물을 시도하지만 막국수 국물의 기본은 동치미다. 동치미의 개운한 뒷맛을 따를 것이 없다. 동치미도 장난을 치지 말아야 한다. 단맛에 길들어진 요즘 세대를 의식해 설탕이나 사카린을 넣기도 하는데 이런 국물은 첫맛은 맛있게 느껴질지 몰라도 먹을수록 단맛이 목을 턱턱 막아 뒷맛을 버린다. 심심한 맛의 동치미가 없는 막국수는 ‘눈물 없는 여자’와 같다.
이러한 조건으로 내 입맛을 만족시켰던 막국숫집은 강원도 고성군의 백촌막국수, 속초의 실로암막국수, 봉평의 진미막국수, 홍천 장원막국수 정도다. 일산에 주문진의 동해막국수 분점이 들어왔는데 이상하게도 주문진에서 먹던 그 맛이 안 나 실망했다.
막국수 만드는 노하우를 배워왔다고 해도 물이 달라 그런 건지, 막국수는 역시 강원도에 가서 먹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막국수가 먹고픈 건지 동해 바다가 보고픈 건지 영 모르겠다. 어쨌든 막국수 한 그릇 들이켜면 속이 시원하겠다
두어 달 전 발신인이 ‘Jerry Cho’인 e메일을 한 통 받았다. 스팸인 줄 알고 지우려다 제목이 나를 찾는 듯해 열어봤더니, 고등학교 동창 녀석이었다. “저는 미국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조정래라고 합니다. 인터넷에서 음식 관련 글을 보다가 혹시나 해서 e메일을 보냅니다. 마산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는, 내가 알고 있는 황교익인지요”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통 기억나지 않았다. 동문회 사이트에 들어가 옛 앨범을 본 뒤에야 한때 퍽 친했던 친구였음을 알았다. 그 말썽쟁이가 목사가 됐다고? 그것도 미국에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 이후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e메일로 받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무척 고생했던 청소년기에서부터 맨몸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떠돌았던 청년기, 그리고 늦게 미국인과 결혼해 이제는 잘 살고 있다는 내용까지…. 지금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위스콘신에서 심심풀이로 쓰는 편지’라는 e메일을 받고 있다. 한국 지인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신앙편지로, 가끔 코끝이 찡해지곤 한다. 20년 넘게 타향살이를 하다 보니 온갖 것이 그리울 터였다. 그의 편지 중 먹을거리에 대한 글이 있는데, 제목은 ‘추억의 먹거리-조정래 목사’다.
쫀드기, 번데기, 물총주스 … 생각만 해도 군침 저절로
‘내가 어렸을 때는 모두 가난해서 먹을거리가 많지 않았다. 국민학교 4학년 때쯤 얼굴에 마른버짐이 꽃처럼 펴, 나 혼자 컴컴한 부엌에 앉아 흰 엿으로 얼굴을 꾹꾹 찍어 마른버짐을 떼내려 했던 기억이 있다. 대여섯 살 때, 설사를 자주 하는 나를 위해 어머니가 시장에서 벌건 수시떡(수수떡)을 사오셨던 기억도 난다. 또 크고 잘생긴 사과는 비싸서 살 형편이 못 돼 작고 흠 있는 사과를 사오셨는데, 그것조차 무척 맛있어 씨까지 다 먹었다. 우리 집 앞 구멍가게에서는 고둥, 수리매(오징어) 껍질, 술찌갱이, 뻥튀기, 풍개, 풋복숭아, 쫀드기, 번데기, 어묵, 팥떡, 팥떡볶이, 고구마튀김, 삶은 감자와 고구마, 물총주스, 찹쌀떡, 박하사탕, 월남방맹이, 떡볶이, 찹쌀도넛, 솜사탕, 진해콩, 카스텔라 등을 팔았다.
어머니가 봄에 쑥을 뜯어 만들어주셨던 쑥떡과 쑥털털이, 막걸리에 밀가루 반죽을 섞어 만든 빵, 도토리묵, 구운 은행, 돼지고기 분탕찌개, 멸치김치국밥, 알찌개, 토끼고깃국, 닭볶음탕, 고구마크로켓, 맛땅, 찐빵, 만두, 포장마차 핫도그, 닭발, 쥐포, 곰장어…. 또 선희 누나가 사카린을 약간 넣고 볶아준 쌀도 잊지 못한다.
그러다 해태, 오리온, 롯데라는 과자회사가 나왔다. 지금도 브라보콘, 맛동산, 뽀빠이, 자야, 티나 크래커, 알사탕, 에이스 크래커, 캐러멜콘, 새우깡, 칠성사이다, 오란씨, 환타, 연양갱이 생각난다. 알사탕 하나를 어금니에 문 뒤 반을 쪼개 동생 석래랑 나눠먹곤 했다. 내가 특히 좋아한 과자는 뽀빠이, 자야, 티나 크래커였다. 청소년 시절, 20원에 자야 한 봉지를 사서 바지주머니에 털어넣고 길을 걸으면서 먹으면 몹시 흐뭇해지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생 때는 50원 하던 티나 크래커가 내 입에 딱 맞았다. 누나가 티나 크래커 한 줄을 사주는 날은 천당에 간 듯한 기분이었다.
대학생 때는 주식이 라면이었으며, 개비 담배를 피우고 소주를 마셨다. 친구가 군대 갈 때 오히려 나에게 사준 마산 중성동 뒷골목 식당의 고갈비구이, 군대 철책선에서 야간근무를 마친 뒤 먹었던 푹 퍼진 라면, 강원도 인제 원통터미널 앞의 막국수, 원통시장에서 먹던 염소탕….
이렇게 풍성한 먹을거리를 제공해준 하느님 이하 부모님, 동료, 친구, 친척, 이름 모를 많은 은인들, 또 자신의 생명을 초개처럼 던져서 먹을거리가 돼준 사랑하는 동식물 자매형제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나도 앞으로 그들처럼 하느님의 뜻 앞에 순순히 목숨을 내놓아 만물의 먹을거리가 될 길이 있을까.
정래야, 우리가 먹었던 게 그냥 음식이 아니었던 거지?!
대한민국 사람들의 영원한 외식 테마, 쇠갈비! 나도 가족에게 한턱 ‘쏠’ 일이 있으면 쇠갈비를 먹으러 간다. 그러나 쇠갈비집 외식은 늘 불만으로 끝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비싼 돈 주고 왜 이런 ‘허접한’ 음식을 먹어야 하나 하는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날 때가 많다. 빈약한 쇠갈비뼈에 길게 이어 붙인 잡고기를 들출 때면 상을 확 엎고 싶고, 생갈비인데도 맛소금과 화학조미료, 참기름 따위를 뿌려 내는 집에서는 주인장의 멱살을 잡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나는 꾹 참고 먹는다. 모처럼의 외식인데 내 성깔 때문에 식구들 입맛까지 버리면 곤란하지 않은가.
쇠갈비가 가족 외식의 주요 메뉴로 떠오른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길게 잡아 30년이다. 쇠갈비집 역사는 경기 수원에서 시작한다. 수원에 화성 발안 출신의 이귀성 씨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는 1940년대 수원 영동시장 싸전거리에서 ‘화춘제과’라는 일본식 제과점을 운영했다. 광복 후 그는 ‘화춘옥’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해장국(갈비우거지탕)을 냈다. 해장국집은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좀더 돈벌이가 될 만한 메뉴가 없을까 궁리했고, 그렇게 해서 1956년 쇠갈비구이가 탄생했다. 식당 한쪽에 화덕을 만들고 여기에 길이 17cm 남짓의 커다란 쇠갈비를 구워 양재기에 담아 냈다. 손님들은 목로주점의 그것 같은 기다란 나무탁자에 앉아 종이로 쇠갈비뼈 양쪽을 잡고 갈비를 뜯었다.
수원 ‘화춘옥’이 원조집 … 비싸지만 고기 질은 천차만별
1956년이면 6·25전쟁이 끝나고 겨우 3년이 지난 시점이다. 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시대였다. 따라서 당시 쇠갈비구이를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이란 뻔했다. 부자이거나 고급 공무원, 장군 정도는 돼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수원보다는 서울에서 자동차를 타고 와서 먹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몇 차례 다녀갔다고 하는데, 박 전 대통령이 오면 숯불 연기를 피워 다른 손님들의 눈길을 피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장사 잘되는 식당 옆에는 반드시 같은 음식을 내는 집이 생기게 마련이다. 10여 년 만에 싸전거리에는 화춘옥을 중심으로 20여 곳의 쇠갈비집이 밀집하게 됐는데, 1970년대 말 재개발이 되면서 모두 도시 전체로 흩어졌다. 이즈음 화춘옥은 무슨 까닭에선지 문을 닫았다(몇 년 전 20년간의 침묵 끝에 이귀성 씨의 손자가 화춘옥을 다시 열었다.)
이후에도 화춘옥의 명성은 이어졌는데, 화춘옥에서 주방 일 했다는 사람, 지배인 했다는 사람 등이 식당을 차려 스스로 화춘옥 갈비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수원 토박이들이 꼽는 화춘옥 후계자는 1980년대에 문을 연 ‘화정식당’ ‘삼부자집’ ‘본수원갈비’ 등이다. 이 무렵 서울에도 유명 쇠갈비집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업계 종사자들에 따르면 서울의 쇠갈비집 주방장들은 대부분 수원 갈비집 출신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쇠갈비집 역사의 큰 줄기는 화춘옥에서부터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포천 이동갈비는 80년대 초에 시작된 음식이다. 이동갈비는 수원갈비와 달리 조각갈비다. 보통의 갈비 요리에서는 한 대인 것을 갈비뼈를 세로로 잘라 두 대로 만들었다. 이 조각갈비 10대를 1인분으로 계산한다. 이동갈비가 싸고 푸짐한 갈비의 대명사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한때 쇠갈비집은 극단적으로 비싸거나 싼 집으로 나뉘었는데 요즘은 그다지 차이가 없다. 소비자들도 약아져 턱없이 비싸거나 싸면 ‘뭔가 속임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이런 전반적인 가격 평준화가 오히려 나를 혼란스럽게 할 때가 많다. 같은 값의 쇠갈비인데 질에서 차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때로 고기 질을 믿을 수 있는 ‘벽제갈비’에 유혹되기도 하지만, 값이 비싸 온 가족이 맛있다고 먹어대는 날에는 내 주머니 사정으로는 감당이 안 될 것 같다.
근래에 가족 외식으로 소문난 쇠갈비집 몇 곳을 갔다 번번이 실망하고는 취재수첩을 꺼내 그간의 갈비집 목록을 들추었다. 그래서 가격과 질 모두에서 만족할 수 있는 쇠갈비집 세 곳을 추렸다. 수원의 화춘옥, 수원농협에서 운영하는 갈비고을, 포천의 김미자 씨네 이동갈비집이다(이 칼럼 나가면 가족들이 쇠갈비 먹으러 가자고 또 난리일 텐데…).
맛 칼럼니스트 가운데 와인에 푹 빠져 지내는 이가 있다. 와인은 그 종류만큼 제각각 개성적인 맛과 향, 색깔을 지니고 있어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그 오묘한 붉은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게 돼 있다. 그런데 그에게서 와인의 단점을 들은 적이 있다. 맵고 짜고 강한 맛이 나는 한국음식에 와인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점점 느끼게 되더라는 것. 이해가 가는 말이다. 술은 늘 음식과 함께하게 마련인데 서양에서 발달한 와인은 서양음식과 어울리지 한국음식과는 아무래도 좋은 화음을 낼 수 없을 것이다.
맵고 짜고 강한 맛이 나는 한국음식에는 어떤 술이 어울릴까. 막걸리? 아니면 소주, 약주?
와인은 과일 발효주이고 한국 술은 곡물 발효로 얻는다. 한국의 술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곡물을 익힌 다음 누룩으로 알코올 발효를 해 그냥 거른 막걸리, 용수를 박아 맑은 술만 떠낸 약주, 이 약주에 열을 가해 증류한 소주다. 고기를 구울 때는 소주, 생선회에 곁들일 때는 약주, 발효 음식에는 막걸리가 어울린다.
韓食과 우리 술은 ‘찰떡궁합’ … 다양한 의미 부여 필요
한국인은 대부분 취하기 위해 술을 마시지 음식 맛을 돋우기 위해 마시지 않는다. 또 와인쯤이나 돼야 음식과의 조합을 생각한다. 한국 술은 애초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았다.
전국을 돌아다니는 직업 덕분에 한국 술을 꽤 많이 마셔봤다. 그중 한국음식 맛을 훌륭히 이끌어내는 몇 가지 술을 소개한다.
전남 영광 법성포는 예전에 굴비보다 소주가 더 유명했다. 우리나라에 소주가 들어온 것은 고려시대 몽골에 의해서다. 법성포는 몽골의 해양 전진기지 노릇을 했는데 그때 몽골인에게서 소주 내리는 비법을 전수받아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소주 내리는 기술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불과 물, 알코올의 ‘생리’를 완벽하게 파악해야만 단내가 나지 않고 역겹지도 않은 부드럽고 순한 소주를 내릴 수 있다. 그러니까 소주 내리는 공력이 적어도 20년은 돼야 “소주 좀 내릴 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법성포 포구 근처 민가에서 몰래 담가 파는 소주를 맛볼 수 있다. 내가 맛보기에 이만한 소주는 드물다. 낮은 불에 내려서인지 단내가 전혀 없다. 깨끗하게 넘어가고 아랫배 저 아래에서부터 술기운이 올라온다. 40도 정도의 술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순한 맛이다.
프랑스에 와인이 있으면 우리에게는 막걸리가 있다. 와인 맛은 포도의 재배환경, 품종, 발효 조건 등에 의해 만들어진다. 막걸리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곡물과 물, 누룩, 발효 조건 등에 따라 집집마다 막걸리 맛이 달라진다. 와인과 막걸리의 차이점이 있다면, 와인은 그 다양한 맛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등급을 매겨 의미를 부여하는 데 비해 막걸리는 다양한 맛 차이를 “어, 그 맛 좋다” 정도로 끝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맛본 막걸리 중 최고다 싶은 것이 둘 있다. 경기 가평군 현리 시외버스주차장 건물에 밀주를 파는 식당이 있다. 몇 해 전 이 근처에 캠핑을 갔다가 맛을 보고 반해 이 길을 지날 때면 꼭 들러 한 병씩 사온다. 그때마다 맛이 거의 같다. 누룩 향이 적고 싸한 탄산가스가 풍부하다. 이 술은 엉뚱하게도 백숙과 잘 어울린다. 특히 토종닭의 퍽퍽한 살 맛을 부드럽고 감칠맛 나게 해준다.
둘째는 강원 영월군 주천면 법흥사 계곡의 ‘신라가든’에서 빚는 막걸리다. 첫 맛은 가볍지만 뒤에는 여러 가지 맛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법흥사 뒤 사자산 참나물, 곰취 맛이 깊다. 이 나물을 생으로 된장에 찍어먹고 막걸리를 들이켜면 입 안에서 환상의 조화를 부린다.
집에서는 경주법주를 즐긴다. 두툼한 일본식 생선회를 먹을 때 소주는 너무 강해 생선 맛을 다 죽인다. 그러나 경주법주는 생선회와 찰떡궁합이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으면서 깨끗하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생선살 맛을 돋운다(경주법주 홍보하는 거 아니니 오해 없으시길).
이 밖에도 다양한 한국 술이 존재하며 이에 맞는 한국음식도 얼마든지 있다. 혹여 한국 술과 한국음식의 조합을 실전적으로 탐구한 이들이 있으면 정보를 알려주길 바란다. 음식과 술은 나눌수록 맛있는 거니까.
‘주간동아’ 588호(2007년 6월5일자) 커버스토리에 중국산 캔 쇠고기로 만든 쇠갈비탕 갈비찜 꼬리곰탕 기사가 실렸다. 그날 ‘맛칼럼’에 쇠갈비구이에 대해 썼는데, ‘그놈의 쇠갈비 마음 놓고 뜯어야 할 텐데’라는 제목이 붙었다. 그 절묘함에 키득대다, 혹여 내가 소개한 식당들이 중국산 캔 쇠고기를 쓴 것은 아닌지라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중국산 캔 쇠고기를 쓴 식당 주인도 나쁘지만, 그런 사실도 모른 채 맛 칼럼을 썼다면 더 나쁘지 않겠는가.
외식업계는 그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과 바깥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접하는 정보가 엄청나게 다르다. 외식사업자용 식재료시장이 일반 소비자용 식품시장과 분리돼 있어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비밀의 ‘외식사업자용 식재료시장’을 자세히 알게 되면 사실 웬만한 식당에서는 음식 먹기가 꺼려진다.
외식사업자용 식재료값은 천차만별이다. 고추장 된장 같은 양념류는 5배 이상 가격차가 난다. 두부 어묵 같은 가공 식재료도 마찬가지. 이런 가격 차이는 중간상이냐 직거래냐는 유통과정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식재료 공급업체의 제품별 가격표에 이런 차이가 존재한다. 따라서 식당 주인은 같은 식재료 공급업체에서 최고가와 최저가 식재료를 선택할 수 있다. 저가 식재료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는지는 잘 모르지만, 가격차가 곧 질의 차이를 뜻한다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저질 재료에 홀딱 반하는 소비자 입맛도 유죄(?)
외식업계에 있다 보면 온갖 첩보를 접하게 된다. 어떤 식재료는 어떤 식으로 만드니 어떻다는 말들이 대표적이다. 저가 메뉴가 유행하면 반드시 이런 소문이 뒤따른다. 그리고 중국산 캔 쇠고기로 만든 음식처럼 대부분 사실이다.
한때 한 외식업체의 컨설팅을 위해 식재료시장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함께 일한 팀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메뉴와 가격은 정해져 있는데 내가 최고급 식재료를 요구하니 단가를 맞출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양을 줄였다간 야박한 식당이라 손가락질 당할 게 뻔하고.
식당은 보통 ‘3·3·3법칙’을 따른다. 식재료값 3, 인건비와 가게세 3, 이익 3이다. 가게가 정해지면 인건비와 가게세는 거의 고정이다. 따라서 식재료값에 따라 이익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식재료값이 4면 이익은 2가 되고, 식재료값이 2면 이익은 4가 되는 식이다. 식당을 하면서 저가 식재료를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기란 참으로 어렵다.
원가 부담 없는 최상의 식재료 확보! 노련한 식당 주인들에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학로 ‘레스토랑 張’은 내가 귀감으로 삼는 가게다. 그곳 지영랑 사장은 늘 “안 남는 장사 한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최상의 식재료에 적정한 가격을 무기로 20년간 대학로의 ‘명품 레스토랑’으로 자리잡고 있다. 비법은 단 하나, 사장이 직접 시장을 보는 것이다. 사실 가만히 앉아 식재료를 공급받으면 편하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질과 가격대의 재료를 구하기 위해서는 발품을 파는 것이 가장 좋다.
창업 초기 소규모 식당 주인들에게서 가끔 ‘張’의 지 사장 같은 의욕을 보기도 한다. 돈을 벌겠다는 욕심보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겠다는 의욕이 더 강한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의욕은 차츰 사그라진다. 내가 보기에 가장 큰 이유는 그렇게 해봤자 소비자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공조미료를 넣지 않고 손수 모든 음식을 만드는 조그만 식당이 손님에게 외면받는다든지, 그 비싼 봉평 메밀로 국수를 만들던 집이 어느 날 사라진다든지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이 외식업계의 현실이다.
이에 비해 밀가루 풋내가 풀풀 나는 칼국수, 조미료 범벅인 생고기, 물비린내 나는 생선회, 씁쓸한 맛의 중국산 미꾸라지로 만든 추어탕 따위를 내는 식당에 손님이 줄을 서고 있으니, 이 혼란의 외식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중국산 캔 쇠고기로 만든 조미료 범벅의 음식도 맛있다고 먹은 소비자들의 왜곡된 입맛에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며 ‘왕’시비를 걸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다
예전에 연립주택이 다닥다닥 붙은 동네에서 살 때였다. 집주인이고 세입자고 살림이 넉넉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이웃간 정만은 차고 넘쳤다. 남자들은 밥벌이 나가느라 얼굴을 익히기 어려웠지만 여자들은 누구네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헤아릴 정도로 친했다. 그러니 음식을 나눠먹는 일은 당연지사였다.
“당신, 고등어국 먹어봤어? 앞집 부산댁이 끓여온 건데, 글쎄 고등어로 국을 끓였지 뭐야. 세상에 이런 음식도 있나?” 딱 이맘때, 초여름 더위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서니 아내가 호들갑을 떤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아내에게는 그야말로 놀라움 자체였을 것이다. 그 비린 생선으로 국을 끓이다니. 난 일순 입 안에 침이 괴면서 “아니, 새댁이 고등어국을 다 끓일 줄 안단 말야?” 하면서 식탁으로 갔다. 내 예상이 맞았다. 고등어를 갈아서 우거지에 숙주 부추 고사리 들깻잎 파 등을 넣고 마늘 풋고추 산초로 향을 더한 경상도식 고등어국이었다. 이 얼마 만인가! 그 자리에서 한 그릇 다 비우고는 “아, 방아(배초향, 생선 비린내를 없애주고 향긋한 맛을 돋운다)가 없다. 그것까지 있으면 금상첨화인데” 하며 아쉬움을 표하자, 이 말을 아내가 새댁에게 전한 모양이었다. 일주일 뒤쯤 새댁이 고등어국을 다시 보내며 이 말도 전해왔다. “경상도에서는 방아를 넣는 게 맞는데 서울에서는 도저히 구할 수가 없네요. 이나마 맛있게 드신다니 고맙습니다.”
까다로운 조리 과정 … 속 시원한 맛 최고
모처럼 고향 음식을 먹게 해주었으니 내가 인사를 해야 마땅한데 오히려 맛있게 먹어줘 고맙다니 몸둘 바를 몰랐다. 그 후 동네를 떠나기 전까지 몇 차례 더 새댁의 고등어국을 먹을 수 있었다. 아내에게 요리법을 배우라고 닦달했건만 지금까지 고등어로는 조림과 구이밖에 못한다. 사실 고등어국은 싱싱한 고등어를 고르는 법부터 된장 푼 물에 살짝 익혀 믹서에 갈고 하는 조리 노하우가 쉽게 익혀지는 게 아니다. 자칫하면 비려서 먹지 못한다.
고등어국과 비슷한 음식이 추어탕과 장어탕이다. 고등어, 미꾸라지, 장어라는 주재료만 다를 뿐 조리과정이나 양념 만드는 법, 맛 포인트 등은 거의 같다. 즉 생선을 비린내 없이 곱게 갈아 탕으로 해서 먹는 음식이다. 산초나 계핏가루를 넣는 것도 같다.
내 고향에서는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면 이런 생선탕을 해먹었다. 땀이 나게 하고 속이 개운하게 풀리는 것이 보신탕보다 나은 음식으로 쳤다. 서울에서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은 추어탕뿐이다. 그런데 이것도 ‘서울식 추탕’이 대세가 되면서 경상도식 맛은 찾기가 어렵다. 경상도식으로 낸다는 추어탕집에서도 “방아 없어요?” 하고 물으면 주인장부터 서빙 아주머니들까지 날 조선족쯤으로 여긴다.
그러니 고등어국을 식당에서 먹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않는다. 아마 경상도에도 이런 국을 내는 식당은 없을 것이다. 집에서 흔히 해먹는 음식일지라도 고등어는 비리다는 선입견 때문에 손님들이 찾지 않을 것으로 짐작하고 메뉴에 올릴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 잘만 하면 추어탕보다도 나은데 말이다.
장어탕은 요즘 서울에도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전라도식이 강세다. 특히 여수 특산물로 갯장어가 널리 알려지면서 여수식으로 해야 전통인 듯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여수식은 장어를 토막째 끓이고 경상도에서는 갈아서 끓이는 점이 다르다. 그러니 여수식은 입 안에서 살살 녹는 장어 살맛을 즐기는 재미가 있고, 경상도식은 살이 국물에 풀어져 구수하게 후루룩 들이켜는 맛이 있다.
내 처지에서는 어느 식이 더 맛있다고 말할 수 없다. 당최 수도권에서 경상도식으로 끓이는 장어탕집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수 장어탕’이라고만 써 있어도 고향 음식처럼 반갑기만 하다.
여수식 갯장어 음식은 광화문의 ‘여수 한두레’가 꽤 괜찮은데 아쉽게도 장어탕은 하지 않는다. 그 밖에 여수식 장어탕을 내는 집은 여럿 있지만 특별히 맛있다고 추천하기가 어렵다. 맛이 다 비슷비슷하기 때문이다.
“모르고 먹는 게 약이야.”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다가 음식재료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동행이 있으면 가끔 하는 말이다. 식당 음식에 대해 신경 쓰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하고 있는데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가 때로는 얄밉기까지 하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사회에서 좋은 음식재료를 확보해 조미료 따위를 넣지 않고 음식을 만든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내 책상에는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이 놓여 있다. 먹을거리를 제 손으로 가꾸어 딱 그만큼만 먹고 산다는 것, 이게 참살이의 모범이라는 것은 다 안다. 그러나 니어링 부부처럼 살라고 하면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그래서 흔히 이런 식으로 절충한다. ‘최소한 패스트푸드는 먹지 말자. 유기농을 주로 먹자. 화학조미료는 쓰지 말자.’나도 이 정도의 삶밖에 살지 못한다. 좋은 줄 알면서 실천하지 못하는 인생이라니!
우리 아이들과 패스트푸드는 절대 안 먹기로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는다. 패스트푸드라는 게 한번 인이 박이면 끊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프라이드치킨 잉잉잉…, 피자 잉잉잉….” 징징거리면 안 사주고는 못 배긴다. 아이들보다 더 힘든 것은 아내다. 전화 한 통이면 다 해결되던 것이 이제는 일일이 간식 따위를 해서 아이들에게 갖다 바쳐야 한다. 그래서 가끔 내가 집을 비울 때면 아이들과 작당해 별별 것을 다 시켜먹는 줄 알면서도 아무 소리 하지 않는다.
우리 집 부엌에는 인공 식재료가 없다. 산분해 간장, 탈지대두가 들어간 된장과 고추장 등을 버리고 믿을 만한 곳에서 재래식으로 만든 것을 구해 먹는다. 집에서 만들 수 없는 소스류는 인공첨가물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을 골라 쓴다. 그런데 이 정도 일만으로도 퍽 힘들다.
집에서도 사정이 이런데 대중식당 가운데 이만큼 신경 써서 음식을 내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식당이야 식자재 원가를 낮춰야 하는 까닭도 있겠지만 인공조미료와 가공 식자재 맛에 길들여진 소비자의 입맛에도 원인이 있다.
정직한 음식 내는 식당 갈수록 줄어 ‘아쉬움’
양심적인 식당 주인이나 주방장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저희도 인공의 맛은 버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 음식은 손님들이 맛없다고 외면하는데 어떡합니까.” 이런 말을 들으면 정말이지 힘이 탁 풀린다.
그렇다고 니어링 부부의 ‘소박한 식탁’ 같은 음식을 내는 곳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집에서 장류를 담그고 제철 음식재료를 구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음식을 내는 곳이 있기는 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역사학자 박문기 씨가 운영하는 전북 정읍의 ‘백학관광농원’이다. 이 농원은 우리 민족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단군시대 이전의 역사와 민속 풍물 등을 배울 수 있는데, 그보다 더 관심이 간 것은 정직한 음식이다. 백학농원에서는 직접 농사지은 재료로 음식을 낸다. 차려내는 것은 집에서 먹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계절나물과 김치, 장아찌, 두부, 된장찌개 등등. 그러나 그 맛의 깊이는 분명 다르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맛이다.
요즘 우리 집 식탁에는 노지에서 무공해로 기른 상추 쑥갓 오이 고추 등이 오른다. 회사에서 가꾸는 텃밭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아이들이 이 채소들을 맛보고는 깜빡 넘어간다. 된장에 쌈싸 먹거나 찍어 먹을 뿐인데도 정말 맛있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유기농이라고 하지만 대부분 하우스에서 양액 먹고 자란 채소는 노지에서 햇볕 받고 자란 것과는 향이나 식감부터 다르다. 이런 자연의 맛은 인공이 스며들면 오히려 맛을 버린다.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은 어찌 보면 ‘최고의 밥상’이다. 그렇다면 맛 칼럼니스트인 내가 맛있는 식당을 찾아 헤매고 다니는 것이 진정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인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래도 백학농원 같은 곳이 전국 곳곳에 널려 있어 다 다니는 데만 몇 년 걸렸으면 좋겠다.
장마 지나면 피서철이다. 바다도 좋고 산도 좋지만, 중늙은이가 다 돼가니 계곡에 발 담그고 앉아 수박 참외 옥수수 등 여름 과실 먹는 재미가 최고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장흥, 송추 계곡도 좋다. 이런 계곡 근처의 음식점에 가면 늘 있는 메뉴가 바로 백숙이다. 나도 열에 아홉은 백숙을 먹는다(나머지 하나는 다들 짐작하는 바와 같이 개고기다).
백숙은 한자로 흰 백(白)에 익힐 숙(熟)이다. 그러니까 ‘고기나 생선 따위를 양념을 하지 않고 맹물에 푹 삶아 익힘. 또는 그렇게 만든 음식’이라는 뜻이다. 소 돼지 말 잉어 도미 같은 고기가 모두 백숙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소 돼지 말 잉어 도미 백숙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맑게 끓이는 육류로는 닭이 가장 맛있다. 흔히 닭으로 백숙을 만들다 보니 백숙 하면 닭백숙을 떠올리게 된 듯하다.
닭살 뜯고 난 뒤 닭죽도 일품 … 최근엔 닭한마리 유행
닭고기 맛은 쇠고기 돼지고기에 비해 그리 강하지 않다. 이게 매력이다. 은근하게 받는 구수한 맛과 감칠맛이 입맛을 당긴다. 이 맛은 고기 자체보다는 국물을 냈을 때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데, 그중 제일이 바로 백숙이다. 닭에서는 누린내가 좀 나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자극적인 향신료로 냄새를 충분히 잡을 것 같은 닭개장에서 누린내가 더 심하게 느껴진다. 오히려 맑게 끓인 백숙에서는 잡내가 덜하다.
닭살을 다 뜯고 나면 죽이 남는다. 닭 맛을 아는 사람들은 닭살보다는 이 죽에 정신을 못 차린다. 쌀알에 은근히 밴 닭고기의 구수한 감칠맛은 위장 저 아래에까지 스며든다. 닭과 함께 쪄낸 죽은 별로다. 쌀을 불려 슬쩍 김을 올린 죽이 제대로다.
닭백숙에서 한 단계 나아간 음식이 ‘닭한마리’다. 1960년대 동대문에서 시작한 음식이라고 하는데, 이제는 전국으로 퍼졌다.
‘닭한마리’는 고기 맛에 국물 맛, 그 국물에 요리되는 칼국수 맛까지 볼 수 있는 음식이다. 하나의 음식 재료로 한자리에서 이렇듯 다양하게 맛볼 수 있도록 고안된 음식은 드물다. 또 여기에 가래떡이나 감자 따위를 익혀 먹을 수 있으니 ‘닭한마리’ 음식 개발자는 참 다양한 맛을 즐기던 사람인 듯싶다.
동대문 닭한마리 원조집들은 신발을 들고 들어가야 할 만큼 사람들로 붐비지만, 몇 번의 방문 경험에 따르면 제 맛을 내는 집은 드물다. 식당 대부분이 누린내 없애는 방법으로 후추를 지나치게 많이 쓰고 있기 때문이다. 후추를 많이 쓰다 보니 누린내만이 아니라 닭고기 특유의 맛까지 잡아먹는다.
또 하나 ‘닭한마리’를 먹을 때 처음부터 양념장을 푸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시원하고 담백한 맛을 즐기고 난 후 강한 양념을 하는 것이 좋다. 물론 누린내 풀풀 나는 싸구려 닭일 때는 애초부터 양념장을 풀 수밖에 없겠지만.
닭백숙의 맛은 어떤 닭을 쓰느냐에 달려 있다. 야외에서 건강하게 기른 닭과 양계장에서 사료 먹여 기른 닭은 맛 차이가 크다. 그래서 다들 시골닭을 찾고, 식당들도 시골 토종닭임을 홍보한다. 황귀 당귀 엄나무 등의 부재료와 ‘가마솥에 삶았는가 찜통에 쪘는가’ 하는 조리방법에 따른 맛 차이는 그 다음 이야기다. 그러나 이놈의 시골닭에 대한 믿음은 부질없는 것이다. 요즘 시골에서 닭을 내놓고 기르는 집은 거의 없다. 설령 있다 해도 그게 식당으로 갈 확률은 극히 낮다. 도시에 살면서 가끔 고향에 찾아오는 제 집 식구 먹이기에도 빠듯하다. 식당에서 직접 기른다고는 하지만 휴일 하루에만 수십 마리씩 잡아낼 수 있는 농장을 가진 곳이 얼마나 될는지….
양계장에서는 사료에 비해 알 생산 능력이 떨어지는 산란계를 폐계라 해서 퇴출시킨다. 이 폐계를 받아다 마당에서 기르는 식당들이 있다. 폐계라 하면 좋지 않은 인상을 줄까 봐 이를 ‘시골닭’이라 해서 판다. 그러나 고기를 얻기 위해 양계장에서 내내 사료만 먹이고 키운 육계보다는 나아 보인다. 나 같으면 “폐계를 받아다 한 달 정도 놓아먹인 닭”이라고 하면 육계보다 더 믿고 먹을 텐데….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우리 집에는 늘 개가 있었다. 도사견, 스피츠, 진돗개, 푸들…. 결혼 후 분가해서도 개를 길렀다. 요즘은 요크셔테리어를 기른다. 식구들 모두 개에게 쏟는 애정이 대단하다. 나도 그렇다. 어쩌다 이놈들이 죽으면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슬픔에 잠긴다.
그런데 나는 개고기를 먹는다(우리 식구들은 안 먹는다. 아이들은 개고기를 먹이기엔 아직 어리고, 아내는 애초부터 먹지 않아 권하지 않는다). 몸이 허할 때 찾아 먹는 것은 아니고, 쇠고기나 돼지고기 먹듯 그냥 맛으로 즐긴다. 직장 동료나 사업 파트너들이 “고기 먹으러 갈까?”라고 말하면 나는 그 ‘고기’에 개고기도 포함됨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린다. 대부분의 중년 남성들이, 특히 여름철에는 나와 같을 것이다.
조리 방법이나 불량한 음식점엔 불만 많아
개를 좋아하면서 개고기도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위로가 될 만한 문헌이 있다(우리는 어디에 뭐라고 씌어 있다면 그걸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동양의 옛 의학서 중 대표격인 ‘본초강목’에는 개를 쓰임에 따라 세 종류로 나눠놓았다. “첫째는 전견(田犬·사냥개), 둘째는 폐견(吠犬·집 지키는 개), 셋째는 식견(食犬·잡아먹는 개)이다. 개는 양도(陽道)를 일으키고 오로칠상(五勞七傷)을 보하며 혈맥을 돕고 요추를 덥게 한다. 비위가 허한 병에 좋고 눈을 밝게 하며….” 이는 지금도 유용한 분류법인데, 폐견이 식견으로 잘못 이용되는 일만 피한다면 ‘애견인 개고기 식도락가’라는 심리적 갈등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머릿속에서 애완견과 식용견을 구별하지 않으면 개고기를 즐기는 데 큰 방해가 된다. 만일 보신탕 집에서 ‘셰퍼드탕 9000원, 요크셔테리어탕 7000원, 진돗개탕 1만원’ 등 품종별 가격을 차림표에 적어놓는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애완견을 기르지 않는 사람이라도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보신탕이라는 말도 ‘개’ 하면 먼저 떠오르는 애완견 코드를 잠재우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다. 보신탕이라는 이름은 이승만 정권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예전부터 써오던 이름은 ‘개장’이나 ‘구장’이었다. 개고기 먹는 것을 외국인이 미개하다 여기리라 판단하고 개장, 구장이란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후 보신탕이 개장을 뜻한다는 사실을 국민이 두루 알게 되자 이 이름도 쓰지 못하고 영양탕, 사철탕이라 불리기도 했다.
보신탕, 영양탕, 사철탕이라는 이름은 개고기가 몸에 좋다는 이미지를 함축하고 있다. 개고기를 먹는 한국인 대부분은 개고기가 몸에 좋은 작용을 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외국인이 개고기 식용을 ‘미개인’이라고 판단하는 데는 이런 보신 습성에 대한 비난이 일부 작용했으리라 본다.
개고기를 먹는 이유가 꼭 몸에 좋아서이기 때문일까?
내 입에 개고기는 참 맛있는 고기다. 쇠고기만큼 감칠맛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적당히 씹히는 촉감과 잔잔히 깔리는 고기 특유의 누린내가 쇠고기보다 낫다. 특히 소나 돼지보다 기름이 가벼워 질리지 않는다. 껍질이 붙은 고기는 쫄깃함과 야들야들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그러나 이 맛있는 개고기를 파는 음식점이나 조리하는 방법에는 불만이 많다. 나무껍질 빛깔 고기에 축축 처진 푸르뎅뎅하고 거무죽죽한 채소와 맛없어 보이는 육수, 게다가 냄비와 가스버너에는 묵은 때가 덕지덕지 앉아 있고 탁자와 방석에도 국물 자국이 선연하다. 실내에는 퀴퀴한 냄새가 나고 조명은 어둠침침해 불량한 느낌마저 주는 음식점이 많다.
여성들이 개고기를 즐기지 않는 것도 이런 분위기 탓이 크리라 본다. 음식은 분위기 70, 맛 30이라지 않던가. 개고기라고 해서 깔끔하고 고급스런 실내에서 제대로 모양낸 요리로 먹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보신닷컴’이라는 개고기 판매 인터넷 사이트가 개설됐다가 여론의 포화를 맞아 전격 폐쇄를 결정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위생적으로만 관리한다면 불량한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 깔끔하게 집에서 맛보는 것도 괜찮을 듯한데, 개고기는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요즘 외식업계에 ‘분자요리학’이 유행하고 있다. 분자요리학은 음식 재료를 자르고 굽고 끓이고 튀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분자의 물리화학적 반응을 연구해 음식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런 개념으로 요리하는 것이 각광받으면서 ‘분자요리’를 내는 레스토랑이 최고 음식점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는 외신을 자주 접한다.
물리화학은커녕 원소기호도 헷갈리는 우리의 식당 주인과 주방장들은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음식은 손맛이라고 배웠는데 그게 ‘침대’처럼 과학이라니! 그러나 사실 분자요리학이란 것도 고등학생 정도의 과학상식으로 조금만 지적 활동을 하면 쉽게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강한 복사열로 삼겹살 육즙 가둬 환상의 맛
자, 고기집 불을 과학적으로 탐구해보자.
고기를 굽는 방식은 열의 이동에 따라 크게 대류, 전도, 복사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대류는 열원에서 나오는 뜨거운 공기에 고기를 익히는 것을 말한다. 전도란 구이판에 올려 굽는 것이고, 복사는 열원에서 방사되는 열이나 전자파로 고기를 익히는 방식이다. 세 방식 중 대류와 복사는 불의 종류에 따라 어느 방식이 주가 되고 보조가 되기도 하는데, 대체로 가스는 대류, 숯이나 연탄은 복사 방식으로 굽는다.
가장 흔한 방식이 구이판을 이용한 전도다. 다음으로 복사, 대류 순이다. 직화로 구울 때 가스불보다 숯불로 굽는 고기가 더 맛있다. 여기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숯불은 열과 원적외선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순식간에 삼겹살의 속까지 익혀준다. 때문에 육즙을 온전히 가둔다. 그러나 가스불은 복사가 매우 적기 때문에 삼겹살을 일시에 익히지 못해 육즙이 빠져나온다. 따라서 맛이 없는 것이다.
이런 과학적인 설명이 없어도 숯불이 고기 맛을 내는 데 좋다는 것이 널리 퍼지면서 웬만한 고기집에서는 숯불구이를 한다. 그런데 숯불만 있다고 해서 고기 맛이 나는 게 아니다. 조그만 화덕에 숯 몇 조각 넣고 구우면 불판보다 못한 결과를 얻게 된다. 일단 숯불의 양이 많아야 한다. 그리고 숯불과 고기의 거리를 최단으로 해야 한다. 복사열을 강하게 해 순식간에 익혀야 제대로 된 고기 맛을 얻을 수 있다.
수원갈비의 원조 ‘화춘옥’은 이런 복사열의 원리를 잘 이용하는 식당이다. 좌우 길이 1m가 훨씬 넘는 커다란 화덕에 숯불을 잔뜩 넣고 고기를 구워내는데, 손님 테이블에서는 고기가 식지 않을 정도의 열만 제공한다.
불판으로도 복사열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두툼하고 널찍한 돌을 장시간 데우면 된다. 손님을 받기 전 돌판을 장작불에 데워놓았다가 내놓는 것으로, 10여 년 전 고양시 화정 뒷골목에서 시작된 ‘똥돼지구이’가 이 전략을 썼다.
값싸게 복사열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 연탄이 그 주인공이다. 활활 타오르는 연탄 덩어리는 웬만한 숯불화로의 복사열보다 낫다. 그러나 연탄가스 냄새가 고기에 배는 것이 단점이다.
‘고기 굽기의 열역학’으로 볼 때 최고의 열원은 숯이다. 그러나 숯도 숯 나름이다. 숯은 왕겨를 압축해 만든 열탄(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고 동그랗게 일정한 모양을 하고 있어 일명 조형탄이라고도 한다), 숯가마 속에서 식혀 만든 검탄, 숯가마에서 빨갛게 불기가 남은 나무토막을 꺼내 흙을 덮어 만든 백탄으로 나눌 수 있다.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고 연기와 일산화탄소 발생량이 적은 백탄이 고기 굽기에 가장 좋다. 열탄은 숯가루로 일정한 모양을 만들기 위해 화공약품을 쓰는 탓에 숯이 타면서 나는 화학냄새가 고기 맛을 망친다.
최근 구이판 아래로 연기를 뽑아내는 식당이 늘고 있다. 하지만 이게 과연 숯불구이의 제 맛을 즐기게 하는 방식인지는 따져볼 일이다. 고기를 숯불로 구워 먹는 이유 중 하나는 고기의 기름이나 육즙이 숯불에 떨어지면서 피워올리는 연기가 고기에 배어 맛을 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연기를 밑으로 빼버리면? 옷에 냄새가 배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지만 고기 맛을 버리면서까지 이럴 필요가 있나 싶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고 있다. 지난 호 맛칼럼에서 내가 개고기를 먹는다고 했더니 누리꾼들이 온갖 욕설을 퍼붓는다. 칼럼 댓글이면 천박한 인터넷 문화 탓이려니 하고 넘어가겠는데 메일까지 보내며 욕설이다. 경찰에 고소할까 생각 중이다.
나는 개고기 식용 반대론자들과 논쟁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그냥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고 있고, 나 역시 개고기를 먹는 맛 칼럼니스트로서 그에 관한 글을 한 토막 쓴 것이다.
개고기 식용 반대론에도 일리는 있다고 본다. 개가 인간과 워낙 친한 동물이기에 그것을 먹는다는 게 역겨워 보일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고기 식용 반대론이 진리는 아닐 것이다. ‘내가 개고기를 안 먹으니 너도 먹지 말라’고 하면서 개고기 먹는 사람들에게 욕설과 협박을 하는 것은 폭력이다. 개를 지키기 위해 인간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인간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개에게 예의를 지킬 것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개고기를 먹는 나는 적어도 개고기 식용 반대론자들에게 그것을 강제로 먹일 의향은 없다. 이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슬람 친구에게 그것을 강제로 먹이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한국 음식문화를 공부하면서 나는 우리 사회의 한 계층에서 어떤 문화적 우월주의가 팽배해 있음을 느낀다. 사회적 지위가 조금 높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먹는 것을 달리하려는 경향이 있다. ‘너희는 이런 거 못 먹지?’ 하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외식산업이 번창하면서 이런 경계가 많이 줄어들었다. 예전 일류 호텔 레스토랑에서나 맛볼 수 있던 음식이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싼값에 팔릴 만큼 음식에서 상당부분 평준화됐다. 사정이 이러니 음식으로 일반인과 차별화하려는 그들의 전략에 차질이 생겼다. 자신들이 먹는 ‘고귀한’ 것도 일반인이 다들 먹으니 그들에게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고, 그게 개고기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남의 것을 업신여겨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돋보이게 하려는 전략인 것이다.
개고기 먹는 사람들에게 욕설과 협박 절대 이해 못할 일
개고기 식용 반대론자들이 한국 사회의 문화적 우월주의자라고 여기는 까닭은 개고기 식용 반대 이유로 개고기 식용이 비도덕적이라고 말하는 데 있다. 음식을 도덕과 비도덕이란 기준으로 가를 수는 없다. 상추를 두고 도덕적이다 비도덕적이다 구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들은 개고기를 먹느냐 아니냐에 따라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인간으로 분류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 한다.
다시 말하지만, 개고기 식용 반대론에도 분명 일리는 있다.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문화라는 것은 없다. 시대에 따라 문화는 변화하게 마련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고기가 ‘건강한 여름을 나기 위한 시절음식’이었으나 최근 10여 년 사이 번창한 애견문화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역겨운 음식’으로 여기게 됐다. 개를 방 안에서 기르기 시작한 게 얼마나 되었는지 생각해보라. 우리 민족에게 ‘식용견’은 수천년의 문화이고 ‘애견’은 극히 최근의 문화다. 그러나 현재 ‘애견’이 문화적으로 강세다. 이런 식으로 가면 분명 개고기 식용 인구는 줄어들게 돼 있다. 이는 개고기 식용이 도덕적이냐 비도덕적이냐 하는 판단에 따른 변화는 아니다. 그냥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좋은 음식이냐 아니냐’ 하는 판단에 따른 변화일 뿐이다.
음식을 두고 문화 차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자칫 상대의 감정을 매우 상하게 할 수 있다. 음식에는 이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문화적 정체성이 강하게 투영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발 개고기 식용 반대론자들이여, 제 주장을 하더라도 의견이 다르다고 비도덕적이니 어쩌니 하는 욕설은 하지 말지어다. 개를 더 예뻐하기만 해도 개고기 식용 문화는 자연스럽게 퇴조할 운명이니 말이다.
나는 암행취재를 원칙으로 한다. 대놓고 취재하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따르기 때문이다. 식당 주인은 뭔가 대접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고 나도 반찬 하나라도 더 나오면 글 쓰는 데 부담이 된다. 우선 음식을 먹고 난 후, 또는 먹다가 주인인 듯한 사람에게 눈치 못 채게 핵심 질문만 간단히 던진다. “복이 야들야들한데 생복인가요?” “김치가 잘 삭았던데 저장하는 곳이 따로 있나요?” 이런 질문에 보통 식당 주인들은 거리낌 없이, 어떨 때는 신나서 묻지도 않은 비법까지 늘어놓는다. 질문의 전제가 칭찬이니 주인 처지에서는 기분 좋은 일인 것이다. 말이 암행취재지 정말 쉽다.
그러나 이것은 음식이 맛있을 때 얘기고 맛이 없으면 이때는 취재가 아니다. 맛 칼럼니스트가 아닌 그냥 손님으로 행동한다. 손님들은 대부분 ‘에이, 맛없네. 다음에 절대 오지 말아야지’라고 속으로 말한다. 그럴 때는 돈 내고 사먹는 음식인데 맛이 없으면 그 자리에서 따져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때로는 음식을 다시 내오게 할 정도로 강하게 나가야 한다. 특히 1인분에 몇만원씩 하는 비싼 음식은 그 자리에서 바꿔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식당 주인에게도 도움이 된다. 주인들이 자기 집 음식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면전에서 따져야 음식 질 개선, 식당도 발전
불만 사항은 구체적으로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오이냉국이 이렇게 달아서야 먹을 수 있겠어요?” “생고기에 왜 맛소금을 뿌려요?” 이런 식으로 따지는 손님에게 대드는 주인은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세요? 죄송합니다. 다음에 오시면 제대로 된 음식을 드릴게요”라며 대부분 고개를 숙인다.
요즘엔 음식을 평가하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다. 블로그 덕분에 너도나도 음식 전문가다. 블로그에 한번 뜨면 수천, 수만명이 일시에 접속하며 댓글까지 남긴다. 대중매체에 소개된 식당들도 ‘맛대맛에 방송된 집’ 식으로 블로그에서 다시 한 번 검증되는 게 예사다. 이때는 대중매체에 대한 평까지 따라붙어 때에 따라서는 대중매체보다 블로그를 더 신뢰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니까 ‘맛 칼럼니스트 추천 맛집’보다 ‘블로그 추천 맛집’이 더 신뢰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블로그 식당 평가가 칭찬 일색이 아니라는 데 식당 주인들의 고민이 있다. 맛없다, 비싸다, 불친절하다 등의 부정적인 평가가 예사로 붙는다. 그런 평가가 객관적일 때는 식당 주인도 이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디저트에 힘이 약하다’ ‘전반적으로 맛이 밋밋하다’ 등 인상기에 가까운 글로 좋지 않은 평가를 해놓으면 식당 주인이나 요리사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개선하려 해도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체면을 중시해 면전에서 허물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에서는 조용히 있다가 뒤에서 구시렁거린다면 이는 예의에도 어긋난다. 설령 허물 있는 사람도 제 잘못을 살피기보다는 사람들이 뒤에서 욕한다고 못마땅해한다.
어느 식당에 갔다가 음식 맛도 좋고 분위기도 좋기에 사진을 찍으려다 제지당했다. “저희 식당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워낙 단호하고 정중한 태도여서 난 아무 말도 못했다. 블로그에 실려봤자 별 효과가 없다고 판단한 업주의 결정인 듯했다. 식당 방침이 이러면 어쩔 수 없다. 신분을 밝힌 뒤 취재를 청할 수도 있으나 한번 제지당한 처지에서 더 민망할 듯해 그만뒀다.
우리나라 누리꾼들은 블로그 꾸미는 데 세계 제일이다. 나 역시 취재거리를 찾기 위해 블로그를 서핑한다. 음식 사진이며 맛 평가 글이 전문가 뺨치는 블로그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식당 입구부터 인테리어, 테이블, 수저, 차림표, 음식과 화장실까지 찍어 올려놓은 블로그를 보면 글만 가득한 내 칼럼은 ‘구석기시대 유물’처럼 보인다.
식당과 소비자가 소통할 수 있는 이 훌륭한 매체가 식당 주인도 누리꾼도 모두 만족하는 단계에 이르려면 면전에서부터 솔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계산을 하고 나오다 고기가 퍽퍽해 맛이 없었다고 주인에게 말했더니 ‘오늘은 육질이 안 좋다. 죄송하다. 다음에 오면 좋은 고기로 올리겠다’고 말했다.”
맛없다고 식당 주인 앞에서 투정하는 것도 손님이 갖춰야 할 예의다
우리는 지금의 보편적이고 일반화된 사실을 두고 예전에도 그랬을 것이라 짐작하는 버릇이 있다. 예컨대 우리 민족과 고추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보고 웅녀가 동굴에서 마늘, 쑥 외에 고추도 먹지 않았을까 여긴다. 그런데 고추는 임진왜란 이후 들어온 외래식물로,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김치는 고추가 들어온 뒤에도 한참 후 발명(?)됐으므로 김치 역사가 길어야 200년 남짓하다고 하면 “에이, 설마” 하고 의심한다.
칼국수도 이와 비슷한 오해를 사는 음식이다. 음식 자료를 뒤적이다 칼국수가 “조선시대 대표적인 서민음식”이라 적힌 글을 간혹 발견하게 된다. 비싸야 5000원 정도 하는 지금의 칼국수 값과 분식집 등 서민이 즐겨 찾는 음식점의 주요 메뉴임을 보고 그런 오해를 하는 듯하다.
조선시대에도 칼국수가 있기는 있었다. 단지 지금 같은 밀가루 칼국수는 서울 양반가에서나 해먹은 귀한 음식이었다. 조선시대 조리서 ‘음식디미방’에 소개된 칼국수는 메밀을 주재료로 하고 있다. 메밀가루만으로 반죽을 하면 차지지 않으므로 밀가루나 감자녹말, 찹쌀풀 따위를 넣어 반죽했다. 그러니까 일본의 소바 비슷한 면발이라 여기면 될 것이다. 지금은 이런 메밀칼국수를 내는 식당이 거의 없는데, 메밀로 유명한 봉평에 가면 몇몇 집이 토속음식처럼 내놓고 있는 게 전부다.
조선시대엔 귀한 음식 … 이젠 서민들 최고 음식
칼국수는 6·25전쟁 이후 미국의 구호품으로 밀가루가 들어오면서 서민음식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밀 재배 북방한계선이 충청도를 넘지 못하는 까닭에 미국의 원조 밀이 들어오기 전만 해도 밀은 꽤 귀한 식재료였다. 일부 농민, 시민단체에서 이 원조 밀을 계기로 우리의 식량자급률이 급격히 떨어지고 결국엔 미국에 식량주권이 종속됐다고 주장하지만, 한편으로는 값싼 밀 덕분에 조선 양반가 음식이던 칼국수가 대한민국 서민음식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 칼국수를 거의 먹지 못했다. 어머니가 칼국수를 만들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우리 집 바로 옆 국수공장에서 파는 우동이 엄청 싸 어린 시절 내내 이 집 우동만 먹었다. 10원짜리 몇 장 들고 가면 여섯 식구 다 먹고도 남을 생우동을 한 양푼 담아주었다.
내가 칼국수에 입맛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 서울에 올라와서다. 서울에서는 그때 벌써 칼국수 전문점이 번창하고 있었다. 지금은 ‘명동교자’로 이름을 바꾼 ‘명동칼국수’는 박정희 시대부터 유명세를 떨쳤다. 육영수 여사가 김치 담그는 법을 가르쳤다, 배웠다 하는 소문이 퍼져 명동칼국수를 먹지 않으면 서울 사람 취급하지 않을 정도였다. 상경한 다음 날 나는 근처 백화점을 구경하고 30분간 줄 서 기다렸다 먹은 기억이 있다.
진한 닭육수에 마늘이 잔뜩 들어간 김치 맛은 가장 고전적인 서울칼국수로 꼽을 수 있다. 여기에 비교되는 칼국수는 ‘칼국수 대통령’의 휘호가 걸려 있는 ‘혜화동 칼국수’다. 구수한 사골국물과 칼칼한 양념으로 손님을 끌었는데, 시원한 맛은 덜한 편이다. 혜화동이라는 장소 덕인지 ‘혜화동 칼국수’는 서울의 (쇠락한) 양반음식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또 하나 서울 양반가 음식이라는 특징을 보여주는 칼국수로 ‘연희 칼국수’를 꼽을 수 있다. 보기 드물게 가는 면발에 개운한 사골육수 맛은 품위가 있어 보인다.
1990년대 들어서는 지역의 유명 칼국수집 브랜드를 이용한 프랜차이즈 점포가 주택가 곳곳을 점령했다. 그러면서 버섯칼국수, 해물칼국수, 바지락칼국수 등 메뉴도 다양해졌다. 이들 프랜차이즈 칼국수집의 특징은 전골냄비를 올려 버섯이나 채소 먼저 먹고 칼국수를 먹은 뒤 그 국물에 볶음밥이나 죽까지 해먹음으로써 ‘싸게, 그러나 배부르게 먹었다’는 포만감을 주었다. 즉 ‘서민음식’이라는 컨셉트에 충실한 것이다.
집에서 해보면, 칼국수 맛내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래서 웬만한 칼국수집은 다들 맛에서 낙제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국물에만 신경 쓰는 때문인지 면에서 실패하는 칼국수집이 의외로 많다. 특히 반죽 후 숙성 과정을 거치지 않아 생밀가루 냄새 풀풀 풍기는 칼국수를 내놓고 어찌 장사할까 싶은 곳이 부지기수다. 또 면을 쫄깃하게 하기 위해 ‘무엇’인가 첨가하는 것은 좋지만 첨가제의 이상야릇한 냄새는 조리과정에서 어찌하지를 못한다. 아무리 칼국수가 값싼 서민음식이라 해도 맛에 좀더 신경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올해로 우리 음식문화를 전문으로 취재한 지 15년 정도, 맛 칼럼니스트란 이름을 달고 활동한 지 딱 10년 됐다. 맛 칼럼니스트는 10년 전 모 시사주간지에 칼럼을 연재하면서 담당기자(지금은 승진해 편집장)가 작명한 것이다.
처음엔 칼럼니스트라는 ‘형이상학적인’ 단어에 ‘맛’이라는 ‘형이하학적인’ 단어가 결합돼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이 분야 필자들이 자주 사용해 보통명사처럼 됐다. 이름 덕분인지 당시 식당 소개 정도가 전부였던 인쇄매체 음식 관련 기사들이 요즘엔 칼럼 수준으로 격상된 듯도 하다.
“에이, 정치나 영화 같으면 몰라도 음식에 무슨 칼럼이야. 그 따위 것에 전문적인 식견이라도 필요하단 거야?”
처음 맛 칼럼니스트로 활동할 때 비웃음치던 아내도 3년 정도 지나자 인정하기 시작했다. 칼럼이 훌륭해서라기보다 평소 온갖 음식 관련 서적들을 읽고 시간만 나면 주방에서 칼질을 해대는 내 모습이 ‘기특해 보여서’였을 것이다. 그러다 한 2년 전부터 “그거 안 하면 안 돼?”라는 말을 자주 한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에서 영상으로 다 보여주는데 글이 먹히느냐”는 것이다.
사실 10년 전과 지금은 많이 다르다. 가장 큰 변화는 전문가의 영역이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예전엔 발로 뛰어 현장을 확인하지 않으면 쓸 수 없던 정보들이 인터넷에서 클릭 한 방으로 얻을 수 있다.
전문가 영역의 축소는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음식문화에서 유독 심한 것은 모든 사람이 삼시 세 끼를 먹으니 ‘만만해’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또 맛 칼럼니스트란 게 뜻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내 심정을 꼭 집어낸 듯한 글을 발견한 적이 있다. 그의 어느 소설에 음식 칼럼을 쓰는 자유기고가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는 사진기자와 함께 음식점을 돌아다니며 시식하고 그중 맛있는 집을 골라 기사를 쓰는 일을 한다.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이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야. 이 일을 어쩌다 내가 맡아 할 뿐이지. 눈치우기와 같은 거야. 문화적인 눈치우기….”
사실 나의 맛 칼럼도 ‘문화적 눈치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식당 가서 음식 먹어보고 이렇더라 저렇더라 쓸 수 있는 사람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 어쩌다 내가 이 일을 맡아 할 뿐인 것이다.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워’에 대한 논쟁을 보면서 전문가 집단의 견해에 격렬히 반대하거나 무시하는 누리꾼들의 반응에 꽤 놀랐다. 나도 음식에 관련해서는 전문가 집단에 들어가니 누리꾼들에게 ‘저 꼴’을 당할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기도 했다.
때마침 ‘디워’의 마케팅 담당이 대학 후배 녀석이라 전화를 해봤다. 흥행도 좋지만 누리꾼과 전문가 집단의 대결구도에 다소 불만이 있어 한마디 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영화 전문가 집단에 엄숙주의가 만연해 있는 게 사실이잖아요. ‘디워’는 그냥 오락영화일 뿐인데, 관객이 보고 즐거우면 그만 아닌가요. 예술영화 평가하듯 하면 안 되지요.”
맞는 말이다. 음식도 맛있으면 그만이다.
‘주간동아’에 맛 칼럼을 연재한 지 1년 반이 넘었다. 그간 썼던 칼럼들을 일별해보니 딴에는 음식문화를 조금 안답시고 ‘후까시’가 잔뜩 들어간 글이 수두룩하다.
독자들이 답답해했을 것 같아 미안함이 앞선다. 다음에는 가볍게 눈 치우는 마음으로 독자들과 만날 수 있도록 ‘비우기’에 열중할 생각이다.
'풍류, 술,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어령의 다시 읽는 한국시_22 (0) | 2009.10.11 |
---|---|
양영훈의 가족 맞춤여행 (0) | 2009.10.06 |
정찬주의 茶人기행 (0) | 2009.10.05 |
‘杜門不出’_두문동 72賢을 찾아서 (2) | 2009.10.05 |
醬은 최고의 몸짱 식품 (0) | 2009.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