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남도 ‘山水 1번지’하동에 살어리랏다

醉月 2009. 10. 13. 08:52
남도 ‘山水 1번지’하동에 살어리랏다
지리산, 섬진강, 남해, 평사리 들판 자연의 4중주 ‘보배도시’가 빛을 발하다
글·사진 이상국 월간중앙 객원기자 [isomis1@joongang.co.kr] 사진 전민규 월간중앙 사진기자 [jeonmk@joongang.co.kr]

하동공원에서 바라본 섬진강과 지리산.

#1 壯而不秀, 늙은 어머니 같은 산

지리산은 오래 전 두류산이라고 불렸다. 두류(頭流)는 ‘두르다’ ‘둥글다’는 의미도 있지만 ‘백두[頭]가 여기까지 흘러왔다[流]’는 뜻도 지닌다. 백두산에서 부르르 떨며 솟아난 힘찬 기운이 동쪽 해안에 벼랑을 만들며 반도를 쿵쿵 뛰어내려오다 태백산에 이르러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경북 문경 어귀에서 숨을 고르는 듯하다 다시 뛰어 지리산까지 치닫는다. “금강산은 빼어나되 장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장하되 빼어나지 못하다. 구월산은 빼어나지도 장하지도 못하고, 묘향산은 빼어나고도 장하다.” 이렇게 말한 이는 서산대사였다.(최남선 <조선의 산수>,1947)

지리산은 왜 장이불수(壯而不秀)이던가? 땅의 큰 줄기가 굽이치며 내달은 백두대간이 여기에 와서 장엄한 종지부를 찍는 곳이니 굳이 빼어날 이유가 없다. 대단원이란 호쾌한 힘 자랑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깊이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너른 품을 벌리는 일일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품에 안아 들이는 늙은 어머니가 그렇지 않던가?

우람하게 돋아올라 구름 눈썹을 걸친 산들이 느리게 흘러가는데, 섬진강이 굽이치며 달려와 그 발을 씻는다. 지리산이 섬진강을 낳은 것도 아니고, 섬진강이 지리산의 갈 길을 말린 것도 아니다. 그저 백년해로한 부부처럼 산의 자락과 강의 하류가 어깨를 겯고 흘러간다.

#2 단군의 시간을 감춘 태초의 고을


 하동 녹차밭.

 

 

 

 

 

 

 

 

 

 

 

 

 

 

 

 

 

 

 

 

 

 

 

단군의 아들과 진시황의 신하가 지리산을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아는가? 쌓인 시간을 말하려면 이쯤은 돼야 천왕봉의 기개에 값할 수 있다. BC 2234년 10월에는 단군의 태자인 부루가 단풍 좋은 산색을 구경하고 있었다. 서른 즈음에 그는 천하를 다스릴 이채로운 지혜를 얻기 위해 이곳에 왔을 것이다. 

청학동 삼성궁은 환인·환웅·단군을 모신 전당이다. 현재의 궁주(宮主)인 한풀선사(강민주)가 일대를 정비하기 이전에는 삼성사가 있었다. 한풀궁주는 지리산 일대에 이 사당을 포함해 민족신화의 가장 오래된 영역인 마고의 성까지 구축해 겨레의 참된 뿌리를 되찾겠다는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한편 이 땅에 불로초가 있다면 아마도 지리산이 감추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 깊고 그윽한 품의 끝을 알 수 없어 사람이 감히 가 닿지 못하기 때문이다. BC 219년(진시황 28) 진나라의 방사(方士)였던 서불도 그런 생각을 했나보다. 불사약을 구하러 이곳에 왔다.

배 아홉 척에 어린 남녀 300명과 군인·뱃사람을 싣고 산둥(山東)성을 출발한 서불은 남해를 타고 들어와 섬진강(당시 다사강)을 거슬러올라 지리산(당시 방장산)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약초를 구하지 못한 그는 가마솥은 남해에 버리고 바위에 ‘서불, 여기를 지나가다’라고 새긴 뒤 탐라와 일본으로 가게 된다. 섬진강 서시천은 서불천을 잘못 읽은 것이다.


화개장터.

#3 하동차가 중국차보다 오래됐다?

하동에서 처음 녹차를 재배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온다. 신라 흥덕왕(?~836) 3년 12월 당나라에 조공하기 위해 김대렴을 사신으로 보낸다. 당의 문종은 인덕전으로 그를 불러 잔치를 벌이고 차나무 씨를 선물한다. 흥덕왕은 그것을 지리산에 심어 기른 뒤 진상하라고 명한다.

하동군이 자기 지역에서 생산한 차를 ‘왕의 녹차’라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에 기인한다. 하지만 다른 기록도 있다. 진덕여왕(?~654)의 넷째아들 김교각은 24세 때 불가에 입문해 법명을 지장이라고 불렀다. 지장은 지리산의 녹차 종자와 볍씨, 그리고 흰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당나라 구화산에 올라가 화성사라는 절을 짓는다.

그는 거기서 제자들에게 차 재배법과 달이는 법을 가르쳤다. 지장이 99세로 입적하자 제자들은 돌로 된 함에 안치했는데 3년이 지나도 육신이 썩지 않고 뼈마디에서 쟁반을 흔드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보살이라고 믿었다. 한편 경덕왕(?~765) 때 화랑인 충담사가 미륵세존에 차를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흥덕왕 때인 9세기가 아닌 7~8세기에 이미 지리산에 차나무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당나라 육우가 <다경(茶經)>을 펴낸 것이 760년 께인 것을 감안하면 신라차가 중국차보다 앞섰을 수도 있다고 한다. 하동 출신 차 연구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석한(石漢) 하상연(1934~2000)은 하동차가 중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자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인도·일본의 산은 신생대에 생긴 것으로 빙하 침식 때문에 차의 자생이 불가능했지만, 한반도는 중생대 이전에 생겨났기 때문에 차의 생장에 적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잎의 크기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진화하는 것을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소엽(小葉)이 아열대 지역에서 생산되는 대엽(大葉)으로 나아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도 했다.

하동 쌍계사(雙磎寺)에 가면 중국 육조대사 혜능(慧能)의 진영을 모신 탑이 있다. 이 탑을 모신 전각의 현판을 스님들은 추사체라고 소개했다. 하나는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 다른 하나는 ‘세계일화조종육엽(世界一花祖宗六葉)’이다.

추사 연구가인 최완수 선생은 당시 만허(晩虛)라는 스님이 이곳에 살면서 차를 만들어 그에게 보냈기에 그 보답으로 추사 김정희가 글씨를 써 보낸 것 같다고 말했다(추사의 진적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추사는 만허를 위해 <희증만허(戱贈晩虛, 우스개 삼아 만허에게 주다)>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4 불교 역사 271년을 까먹었구나

이 땅에 언제 불교가 들어왔는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이며 372년이라고 학창시절 달달 외웠다. 전진의 왕 부견이 보낸 순도라는 사람에 의해서라고 말이다. 그러나 지리산 칠불사 사지(寺誌)에는 그보다 271년 전인 101년 김해가야 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이 절에서 불도(佛道)를 닦았으며 성불해 일곱 부처(七佛)가 되었다고 한다.

고구려로 들어온 것은 북방불교이고, 가야로 전파된 것은 남방불교일 가능성이 높다. 기록에는 왕과 왕비 허황옥이 왕자들을 만나러 방문했다고도 한다. 그런데 왜 교과서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리지 않았을까?

친일 사학자들이 일본의 주장인 임나일본부설을 지원하기 위해 가야사를 축소 왜곡했기 때문이라고 하동문화원장인 정연가(향토사학자) 선생은 주장한다. 가야를 지우개로 지워버렸으니 칠불사에서 공부하던 수로왕의 왕자들도 설 데가 없어진 셈이다.

#5 피보다 붉은 철쭉이 피는 뜻은


섬진강 재첩국.
지리산은 선혈을 많이 먹은 산이다. 섬진강도 그렇다. 해마다 붉어지는 철쭉과 단풍은 그래서 더 고운지 모른다. 군사를 감출 수 있는 깊은 산이기에 전쟁을 비켜갈 수 없었다.

하동군 진교면에는 ‘발꾸미’라는 곳이 있다. ‘군사를 냈던 곳(發軍尾)’이라는 의미인데, 광개토대왕 시절 생긴 이름이다. 고구려 군사들은 396년 3월 말을 타고 일본을 정벌하러 이곳까지 달려왔다. 여기서 머무르며 배를 만들어 왜(倭)를 공략한다.

200여 년 뒤(622)에는 신라의 김유신이 이곳에 들어온다. 스물여덟 살의 유신은 석굴에 살면서 7년간 무술을 연마한다. 이곳에서 천룡검·활·신책(神策)을 얻고 용소 옆에서 말을 얻은 다음 원단원·지경개 등 50명의 산적을 부하로 삼아 낭비성으로 출전해 고구려병 6,000명을 무찌르니, 지리산은 굳이 누구의 편이 아니다.

모두를 품어 시세(時勢)와 의지를 돕는다. 칠불암 아자방에서 좌선수도한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 1만 명을 이끌고 평양성을 탈환하러 달려갔고, 왜병에 쫓기던 정씨 여인은 딸을 들쳐 업은 채 섬진강에 뛰어들며 “왜놈들 듣거라. 나 조선 박인립의 처 이곳에서 죽겠노라” 하며 고함을 질렀다.

1894년 동학혁명 때는 관군과 동학군이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교전해 수백 명이 죽었다. 또 한국전쟁 무렵 남부군 이현상이 최후를 맞은 빗점골에 흐른 피는 7년 동안 이곳에서 죽어간 수만 명 유혼(幽魂)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6 바다와 뭍이 만나는 화개장터

가수 조영남이 <화개장터>라는 노래를 불렀을 때 사람들은 영남과 호남이 서로 넘나드는 그 정서의 교역(交易)을 인상 깊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기야 ‘영(嶺)의 지역’인 산과 ‘호(湖)의 지역’인 물이 서로 잘 감싸는 곳으로 화개(花開)만 한 곳이 있으랴?

하동사람, 구례사람, 혹은 진주사람과 광양사람이 재첩국을 함께 말아먹는 고장이니 동서 화합을 말하는 장소로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으랴? 김동리의 소설 <역마>는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화개협 시오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고, 경상 전라 양도 접경이 한두 군데일 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장터를 두고 있었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도라지·두릅·고사리들이 화개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화물 장사들의 실·바늘·명경·가위·허리끈·족집게·골백분들이 또한 아랫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하류 해물장사들의 김·미역·청각·명태·간조·간고등어들이 들어오곤 하여….”

그러나 지금은 박경리의 소설 <토지> 속의 월선네가 장이 서는 아침마다 주막에서 용이를 기다렸던 그 자리는 가늠할 수도 없는, 엉거주춤한 간이 장터가 썰렁한 채 옛 정취를 그리워하는 길손을 기다릴 뿐이다. 어쩌겠는가? 시장이란 필요와 욕망이 만나야 하는 것이니, 옛 것이 그립다고 자동차와 대로의 세상에서 화개장터를 온전히 불러올 수야 없는 것 아닌가?

섬진강은 쉽게 깎여 들지 않는 지리산의 편마암을 관류하기에 잘 깎이는 화강암과 달리 좁은 강폭과 수심을 유지하면서 흘러갈 수 있다. 이 긴장된 물줄기는 하동군을 훑으며 남해 포구 부근에 다다라서야 넓은 강물길을 내준다. 하동포구는 강으로서는 출구이고 바다로서는 입구다.

예부터 섬진강 물길은 최고 속도의 유통을 보장하는 곳이었으니, 지리산 저쪽의 풍성한 물건과 산물을 받아 뱃길로 수송하는 것이 가능했고, 그 값에 걸맞은 해산물을 뭍으로 들이기 좋았다. 그 물목에 장터를 차렸으니, 화개장터는 경제의 꽃이 피는 화개(花開)였고, 뭍과 물이 만나 서로 인사하는 자연과 인간의 공동 장터였다.

이 시장이 힘을 잃어가는 것은 뱃길 유통보다 더 빠른 도로와 자동차가 생겨나면서부터였고, 거기에 섬진강 윗목에 댐이 생기는 바람에 흘려 보내는 수량이 줄어 배가 드나드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7 ‘메이드 인 하동’ 팔만대장경의 비밀

고려 중기 무신집권기의 최충헌은 권력을 남용해 지탄받았는데, 특히 불교왕국이던 고려에서 승려들이 이에 반발하자 대학살을 저질렀다. 이후 그의 아들 최이가 집권한 뒤 불교계와 화해하기 위해 대장경 재판각사업을 벌였다. 이렇게 하도록 최이를 설득한 사람은 하동사람인 정안(鄭晏)이었다.

정안은 최이의 처남이었다. 정안은 최이의 대장경 판각을 돕기 위해 자신의 식읍 땅(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토지)인 하동·남해·진양을 내놓고 거기에 분사도감을 만들어 경을 제작하게 했다. 강화도에 대장도감이 있었지만, 실제로 대장경을 판각한 곳은 분사도감이 있는 남해 일대였다.

대장경에 쓰인 나무들을 분석한 결과 지리산의 산벚나무와 돌배나무인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은 하동사람 정안이 하동 일대의 작업소에서 지리산의 목재로 만든 셈이다. 그렇다면 왜 정안의 공적은 철저히 가려졌을까? 권력자 최이의 뒤를 이은 사람은 최항이었는데, 의심이 많고 포악했다.

한때 그가 아버지에게 쫓겨났을 때 계모가 말리지 않았다 하여 계모의 친인척을 모두 죽였다. 정안은 “사람 죽이기를 어찌 이같이 하는가” 하고 말했는데, 이에 최항은 “정안이 딴 마음을 먹었구나”라고 말한 뒤 백령도로 유배보내 바다에 수장(水葬)시켜버린다. 그는 역적으로 몰렸고, 대장경을 판각한 공로의 기록조차 지워진 것이다. 하동의 정안봉이라는 산은 최근까지도 역산(逆山)으로 전해왔다.

#8 지리산도 식후경, 野江山海 진미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지만 지리산도 마찬가지다. 하동의 식탁은 산·들·강·바다에서 나는 음식의 경연장이다. 섬진강은 숙취에 시달리는 속을 시원하게 달래주는 재첩국과, 싱싱한 은어회와 은어튀김, 그리고 밥도둑이라 할 만한 참게장과 참게탕을 내놓는다. 지리산은 일등 산채비빔밥을 내놓고 갖은 나물 곁반찬도 올라온다.

녹색 바둑판처럼 잘 정리된 논과 밭에서는 따뜻한 밥과 고추나 깻잎 따위를 아끼는 법이 없고, 가끔 청국장 같이 구수한 것도 차릴 줄 안다. 냄새가 나지 않는 솔잎돼지도 명물이다. 바다에서는 온갖 해물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들락거린다. 한 상 잘 먹고 나면 이곳의 배나 감이 후식으로 나오고, 지리산 안개와 햇살이 키운 녹차 한 잔이 마음마저 배부르게 한다.

여기에 와서야 맛이 생겨나는 비밀을 조금 알게 된다. 섬진강이 키운 것은 강처럼 맑고 개운하다. 지리산이 키운 맛은 순박하고 청순하며 풋풋하다. 평사리 들녘이 키운 것은 대부분 달고 짜고 맵고 싱겁고, 남해가 키운 것은 우물거리거나 오물거리며 서늘하고 비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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