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하 시인
1963년 출생.
1989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영혼의 북쪽’ 외.
성욕이 먼저 오고 사랑이 오는가.
사랑이 먼저 오고 성욕은 나중에 오는가.
아니면 그것은 삶과 죽음처럼 붙어서 한꺼번에 같이 오는가.
육 체를 눈앞에 불러내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 늘 심장 속에서 만나는 어떤 몇몇의 사람들.
부재로 인해 더욱 간절해지는 존재들.
여러 갈래 오솔길이 허파를 뚫고 지나가듯 그리도 부드러운 이파리 같은 육체가 숨막히게 그 도시를 지나갔다.
아직도 생각은 밑천 없이 껑충 난리지만 이미 물 건너 간 나라.
기억날까.
추억에 대못처럼 혀 때려박던 키스가 섹스보다 짜릿했던 시절.
마음은 잘 벼린 회칼 위의 오징어처럼 저며지던 그곳은 절단당한 계단과 옥상,
그곳은 입술 절인 안개,
앞만 보며 흘러가던 강물의 뒤만 보일 때 꼬리에 꼬리를 문 골목을 끼고 꼬리에 꼬리를 문 구름으로 발기하던 그대의 창문,
덜컹덜컹 창문 두들기는 봄바람 속에 내 정처 없는 발자국이 회한을 문 열자
그대의 얼굴은 저 껌껌한 공중바다까지 별과 달을 친친 동여맨 얼굴,
골목 끝에 다다른 담벼락에 그대의 허리를 부축하고 있던 동해와 서해는 치맛자락처럼 말려 올라간
나의 시선을 일제히 애무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을 모른다.
연인에게는 오늘만 사치,
오늘만 불치.
그 시절 그 나라,
그 눈망울,
그 입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얼 시치미떼던 말인지 알게 된 것은 먼 훗날의 일.
그 옷매무새가 무슨 연산(演算)이었는지 알게 되었을 때는 아주 까마득히 글러먹은 후세의 일….
이제 어디 가서 그 암내… 그 철 지난 레퍼토리를 구하랴?
“영원히!” “언제나!” “절대로!” 이런 말들을 겁 없이 쓰던 날들은 모두 어디로 다 가버린 것일까.
아니 그런 불멸의 말을 별 거리낌없이 쓰던 곳으로부터 그는 도대체 얼마나 멀리까지 떠내려온 것일까.
영원한 것은 우리가---우리의 몸, 우리의 정신,
우리의 사랑---영원하지 않다는 사실뿐일지도 모른다.
기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이미 모두 시한부 인생인 것이다.
하루를 살면 살 날이 하루 줄어드는 이 절대의 사실만큼은 절대로 영원하다.
그는 오늘 하루도 별의별 잡념과 상념에 비벼진 괴로움과 즐거움을 머리에 이고 지구를 걸어갈 것이다.
때로는 머리카락 올올이 들어찬 성욕에 시달리기도 하면서.
솔직히 말해 보자.
밥 먹듯 반복하는 매일매일을 정말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끼니와도 같은 성욕:
식욕과 성욕은 늘 척추에 붙어 있는 배와 등 같은 것 아닐까.
적어도 삶은 이 두 개의 큰 축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성욕이 없었다면 우리는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날 수 없으며,
식욕이 없다면 생을 유지해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성욕: 달랠 길 없는 식욕마냥 이 역사는 우주스러운 수줍음과 난폭함이 늘 쌍날의 칼처럼 맞대고 있다. 나만 그랬겠는가/그렇겠는가.
한 인간이 타자를 볼 때 그 순간 그는 전적으로 그 타자의 몸을 볼 것이다.
몸에 들어 있는 그 타자의 정신이나 마음을 우리가 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좁혀 말한다면 당연히 그 사람의 몸을 사랑하는 행위다.
그것을 확대해 말한다면 그 몸에 깃들여 있는 그의 말과 마음과 함께 그의 삶을 사랑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랑과 성욕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듯 떨림과 꼴림도 역시 그럴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그 둘은 때때로 전혀 상관 없이 따로따로 제멋대로 움직이지 않던가.
그렇지 않다고 그대는 장담할 수 있는가.
성욕과 사랑을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우리는 은연중 세뇌받거나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나를 세뇌하듯 자가세뇌하며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성욕이 먼저 오고 사랑이 오는가.
사랑이 먼저 오고 성욕은 나중에 오는가.
아니면 그것은 삶과 죽음처럼 붙어서 한꺼번에 같이 오는가.
나는 본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 셔터를 들어올리고 밖을 본다.
너를 보는 순간 나는 오직 내가 아니다.
내가 내 밖을 본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자신 안의 영역에서만 옹졸하게 구겨져 지낼 수 없다.
내가 내 밖의 세상을 보지 않으면 내 안의 세상이 어두운 것처럼 나는 너를 비추지 않으면,
너를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밝아지지 않으니 거참, 신기하지 않은가.
눈을 뜨고 해와 달과 별이 비추는 이 세계를 보지 않으면 나는 밝아지지 않는다.
너를 비추지 않으면 내가 밝아지지 않는 세계 - 사랑의 세계.
사랑의 시선으로 남을 밝히지 않으면 나 자신 역시 밝아지지 않는다.
눈을 감고 잠을 자는 행위는 내 밖의 밝음의 세상으로부터 어둠의 세상으로 시선을 철수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긴 잠,
어둠뿐인 잠 속으로 영원히 들어가는 것이 ‘죽음’ 아닐까.
그렇다면 잠은 죽음의 예행연습,
죽음의 세리머니라고도 할 수 있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면 건강하단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하루를 요약하면 먹고 싸고 자고거나 자고 먹고 싸고겠다.
하기는 인생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없다고 용기 있게 말할 자신도 없지만 있다고도 말 못 하겠다.
그렇다면 아무리 숙고해도 한 사람의 인생을 요약하면 그는 매일매일 먹고 싸고 자기를 반복했다거나
자고 먹고 싸기를 열거했다겠다.
‘몸’ 사고 중심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세상이다.
‘몸’은 우리 시대의 ‘신’이다. 우리 시대가 몸에 얼마나 열광하는지는
‘몸값’이라는 이 한 마디 말 - ‘마음값’이나 ‘정신값’이라는 말은 없다 - 에 잘 요약되어 있다.
우리의 시대는 몸을 쫓고 쫓기는 시선이 얽히고 설킨 한바탕 광란의 축제다.
우리는 그 사람의 정신을 먼저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몸을 먼저 본다.
시각은 절대다.
그래서 어떤 몸은 거울 앞에서 연민한다.
아니다, 번민한다. 아니다, 거울 앞에서 자수한다.
아예 부르르 떤다. 보는/보이는 ‘성’(性)의 기계적인 한 극단은, 보이기 위해,
오직 보이기 위해 진열장에 전시된 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몸은 슬프다. 나는 너의 몸을 보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
너는 너의 몸을 잘 보이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불사한다. 몸이여! 몸이여!
그래서 무관심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너의 몸에 대해 나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대체 이 노릇을 어쩔 것인가.
나도 시인이고 너도 시인이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모두 ‘시인’(視人)이다. 보는 데 환장한 자들이다.
아니다. 어쩌면 이 세상이 보이기 위해 환장한 것 아닐까.
우리는 기갈들린 자들처럼 보는 데 미쳐 있으며 굳이 보지 않아도 될 것들을
우리는 너무 많이 보며 하루를 소비하고 흘려보낸다.
“나는 본다. 고로 존재한다.”
내가 너를 본다고 할 때 사실은 너의 이미지---더욱 구체적으로 너의 몸 이미지---를 본다.
그렇다면 너는 무엇이란 말인가.
너는 이미지란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너의 이미지를 사랑한다는 말인가.
사람들은 실물보다 때로는 이미지를 더 중시 여긴다.
봐라. 실물보다 사진이 더 근사하게 나올 때 그들은 얼마나 더 안도하는지. 봐라.
어디서 읽었더라?
우리 시대가 몸의 시대임을 일러주는 한 사례;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열심히 조깅하는 한 여성에게 “직업이 뭐냐?”고 묻자 그는 아무 거리낌없이 “창녀!”라고 답한다.
재차 그 여성은 “그러니 몸 관리는 기본이죠!”
나는 본다. 나는 너의 몸을 본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의 몸을 사랑한다.
이것을 과연 부정할 수 있을까.
시선은 절대다.
눈은 손이 애무하기 전에 먼저 그대/세계를 애무하지 않던가.
결국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느낌을 절감할 때 우리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이거나 밤이나 낮이나 가까이에서나 멀리서나
그 누군가를 끝없이 눈으로 보고/만지고 있다는 말과 크게 틀린 것이 아닐 것이다.
당신이 한 사람을 눈으로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당신은 손으로 그 사랑을 실감하고 그 사랑에 도착하기를 얼마나 염원했던가.
사랑의 시선으로 이 세계를 대할 때,
사랑의 힘은 삶을 보는/아는 힘이며 나아가 삶의 덧없음/부질없음,
다시 말하면 유한한 생에 대한 찬사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사랑의 시선으로 대하는 타자의 몸은 이미 하나의 고깃덩어리가 아니다.
까놓고 말해 남편은 아내의 창남이고,
아내는 남편의 창녀다. 그러므로 지구가 창남·창녀 천지겠건만 고상한 척 따지시지 마시고…
사랑도 명예도 순결도 개코도…
그러나 지상과제처럼 오로지 한 여자의 창남으로 오로지 한 남자의 창녀로 살아가는 연인들도 희귀하기는 하겠지만…
부부는 섹스 파트너이기 전에 대화 파트너라는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화도 분위기도 키스도 없이 그들 부부는 후닥닥 사타구니만 맞춘다.
인간의 몸을 받고 태어난 그는 인간의 몸이 아닌 몸을 받고 태어난 동물과 식물의 몸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그의 몸 속에는 뱀도 들어 있고 지렁이도 들어 있고 거미도 들어 있을 것이다.
내 몸 아닌 것들이 내 몸을 살리는 셈인데,
인간의 몸은 자신의 몸 생각만 하기에도 늘 시간이 모자라는 모양이다.
몸은 그렇게 이기적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대는 자신의 몸이든 타인의 몸이든,
걸어다니는 공해인 인간의 그 몸에 대해,
그 몸의 울긋불긋한 욕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 기억이 있는가.
한 사람의 일생을 짊어지고 그 사람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함께하는 그 몸의 충성심에 대해 독실하게 생각해본 기억이 있는가.
절제나 침묵,
금기와 도덕 대신 눈과 코와 입과 귀와 손과 성기가 심란하게 달려 있는 그 몸에 대해
얼마만큼 우리는 과연 배려했던 것일까.
그대가 잔광이 물들던 저녁 무렵 광화문 네거리를 걸어 나올 때,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저 많은 몸 중에서 함께 밤을 지낼 몸 하나조차
내게는 왜 없는 것일까 하고 탄식에 잠긴 적은 없었던가.
사타구니 때문에 서러웠던 날들,
인간이라면 다들 갖고 계시겠죠?
그곳에 샘이 솟는데…
젖과 꿀과 오줌과 정액과 온갖 악의 원천이 흐르는데…
사타구니가 인생대사라는 것도,
근데 그게 늘 골칫덩어리라는 것도 잘 알고 계시겠죠?
육체가 서로의 슬픔을 알아보던 밤이 지나고 나면 허탈한 아침이 밝아온다.
아마 너에게도 이런 기억 한 조각쯤은 몸 깊은 곳에 파편처럼 박혀 있을 것이다.
그리도 다정다감했던 눈빛이 한순간 그리도 단호하고도 냉정한 시선으로 무장한 채 덜컥
우리 앞에 나타나 “이제, 그만 만나!”라고 잘라 말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시선은,
우리의 내면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날 너는 무엇에 얻어맞은 것이었을까.
옛날은 이미 흘러가 버렸으므로 손댈 수 없고 미래는 아직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상태이므로 역시 손댈 수 없다.
흘러간 과거는 생각해 뭐해.
지나갈 미래한테나 잘해.
지나간 사람은 생각해 뭐해.
지나갈 사람한테나 잘해.
한때 죽자사자 목숨까지 걸고 온갖 행복을 독차지할 것 같은 그들이
“대체 우리가 사랑한 사이이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남 대하듯 태도를 바꿔 먹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랑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와 같은 신세로 전락한 것은 아닐까.
‘섹스중독증’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게 말한다면 ‘인생중독증’이나 ‘사랑중독증’이라는 말도 있어야 하겠네.
하지만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죽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인생중독증’ 환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섹스는 붙었다 떨어질 수밖에 없는 행위이므로,
다시 말해 그것은 죽음을 예고해 두고 사는 삶의 숙명처럼 이별을 예정한 만남이므로 근본적으로 서글픈 행위다.
하지만 그 서글픔은 인류 역사 이래 죽도록 되풀이된다.
반복이 끝나면 또 반복된다. 반복의 나라에서 밥 먹고 잠 자고 배설하고,
그러므로 이 반복에서 끝나는 날은 자신의 무덤을 기억하는 날이 될 것이다.
인생이나 섹스도 자연처럼 질리는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문 상처도 상처의 궤적이듯 그 사람은 기억의 한쪽에 남아 있게 될 것이고,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배 짼 칼자국처럼 이제는 다 잊었어 해도 불쑥불쑥 쑤시는 상처처럼 그 사랑은 지나갔다고,
이미 과거가 되었다고,
옛날은 손댈 수 없다고 단정을 내려도 그 사람/사랑은 지금도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인간의 삶이란 어쩌면 상처 주고 상처 받고 상처 지우기의 파노라마가 아닐까.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너에게 상처를 주기 시작한다.
인간은 ‘성(性)적인 인간’이다. 기적처럼 ‘성(聖)적인 인간’이 태어나기도 한다.
남의 자식을 자기 자식처럼 키우는 사람들이 다름아닌 성자(聖者)다.
오로지 관심이라고는 ‘성(性)적’인 자기 몸뚱어리와 남의 몸뚱어리밖에 없는
‘성자(性者)들’ 천지인 세상에 남의 몸과 넋을 자기 몸이나 넋처럼 보살피는
마더 테레사 같은 ‘성(聖)적’인 인류도 있다.
밥 먹기 위해 식판 들고 구내식당에 우중충하게 줄서서 기다리던 그대 뒷모습은 그래도 양호하다.
햇빛 화창한 일요일 오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똥 누기 위해 화장실 앞에 찌뿌드드하게 줄서서
기다리던 그대 옆모습은 그래도 양호하다.
‘위안소’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병사들 속에 나도 줄서서 기다린다.
한 인생이 교미로부터 태어나자 온갖 욕망도 함께 태어났던 바,
욕망하고픈 교미도 교미하고픈 욕망으로부터 시작되었던 바,
한 인간이 교미로부터 태어나자 그도 교미를 통해 욕망의 되풀이,
욕정의 반복을 몸소 실천하게 되고 두 인간이 한 몸처럼 들러붙어 한 인간을 세상에다
공허를 이불삼아 살라고 하늘과 땅 사이의 감옥에다 던졌다.
아마 조물주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거야.
인류가 이 행성에서 이토록 흥행에 성공할 줄을 꿈이라도 꿨겠는가.
사랑이라? 그런 게 어디 있었던가.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라는 난처하고 당혹스럽고 처치 곤란한 질문을
서너 차례 기습으로 받았던 그의 기억 속에는,
그저 빨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이불이나 뒤집어쓰고 잠이나 한 숨 푹 잤으면 싶었던 생각이 시큰둥하게 남아 있다.
어쩌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 말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환상 같은 것 아니었을까.
우리가 서로를 사랑했던 것은 환상---그 환상조차 환멸이기 일쑤이지만---의 힘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대라는 환상을 사랑했던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환상을 깨는 순간 너는 이미 네가 아니다.
꿈 없는 현실이 지옥이듯, 환상 없이 이 지독한 고해의 삶을 견뎌낼 재간이 인간에게 있는 것일까.
환상을 깨지 마라.
깨는 순간 너는 없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어떤 규정을 내리지 못한다 해도 분명한 것은
우리는 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요구되는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지 이 세계가 늘 사랑이 충만한 곳은 아니라는 말과 같다.
깊이 없는 시선일수록 이 세계와 타자에 가하는 폭력의 깊이는 더할 것이다.
깊이가, 사랑의 깊이가 너를, 나를, 이 세계를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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