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발생설과 조선조 발생설이 대립돼 있고 기원도 아리송하지만,
4음보의 유장한 가락이 제한없이 연속되는 가사의 유용성은 대단히 크다.
시대적으로는 조선조, 개화기를 거쳐 현대에도 부르는 이들이 있고, 계층상으로 승려, 선비로부터 서민, 부녀자들까지 두루 사랑했다. 이는, 우선 1음보가 3,4음절로 되었고 율격이 4 음보라는 것이 한국인의 심리적 율동의식과 잘 맞아 떨어졌다.
그 장르적 속성이 시조와는 달리 퍽 개방적이어서 서정, 서사, 교술은 물론 극적 내용까지도 수용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매력절 장르인 가사에 술이 제재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 것은 당연하다.
인생 칠순이 예부터 드물거든
몇 백년 살 것이라 저대도록 아끼는고
영욕이 병행하니 부귀도 불관터라
죽은 후 천자 이름 그 역시 허사여니
생전 일배주 이 아니 반가운가
청하거나 절로 오니 승우가붕 다 모였다
팽양포고 못하여도 개,돝이나 익게 삶고
백하홍로 없거니와 청탁주 관계할까 -실명씨(권주가)-
인생칠십고래희, 고작해야 칠십 사는 것이 인생일진대 뭐 몇 백년 살 것처럼 아낄 것이 있느냐고 한다.
부귀 영화에는 빈천치욕도 따라 붙게 마련이며, 임금이다 하는 고귀한 자리도 죽으면 말짱 헛것이다.
그러니 살아 생전 한 잔 술이 소중하다는 향락 논리다. 그래서 청해 오든 제 발로 찾아오든 좋은 벗 모여들면,
저 중국 술꾼들이 즐겼다는 삶은 양이나 염소구이 대신 우리식으로 개 잡고 돼지 삶아 안주 장만하고,
원래 애주가란 청탁불문이라 하니 술이야 청주가 됐건 막걸 리가 됐건 그거야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40대 이후라면 6.25사변 후의 주당 풍속을 기억할 것이다.
싸구려 막소주 한 병에 마른 오징어 한 마리(그때는 오징어가 꽤나 흔했다)면 필요조건은 구비한 것이다.
여기에 여름철이라면 고추장에 풋고추 몇 개로 충분조건이 된다.
그리하여 쓴'쐬주'한 잔 홀짝 털러 넣고나서 찝찔한 오징어다리를 씹거나 약오른 풋고추에 매운 고추장 듬뿍 찍어 먹으면서,
안주 보다 열 배나 쓰고 짜고 매운 인생을 논하고 시국을 점쳤었다.
아무리 가난하던 시절에도 술인심처럼 후한 것은 없다든가, 한국인은 싫다는 사람에게라도 굳이 술을 먹이려고 애쓰는 버릇이 있다.
임지 부임길의 백호 임제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죽은 황진이의 무덤에까지 찾아가 술을 권하다가
정치문제로 비화되어 파직을 당했다고 하지만,
어찌 됐건 대작할 상대가 없다는 것이 술꾼에게 있어서는 죽음 자체보다 더 외롭고 슬픈 모양이다.
일조에 죽어지면 어디 가 먹저 할꼬/ 물망산 깊은 골에 무덤 총총 못 보신가
풍소소 우낙락할 제 어느 벗이 찾아와서/ 제 노래 내 들으며 내 술을 뉘 권할꼬 -실명씨(권주가)-
이미 송강의 <장진주사>에서도 들은 이야기지만 즐비한 무덤 거기에 쓸쓸한 바람 불고 궂은 비나 흩뿌릴 때
그 절절한 고독과 비애를 상상이나 해 보시라.
내노라 하는 평양 기생의 갖은 유혹에도 끄떡없었다는 도학자 퇴계선생도 술한테만은 꼼짝을 못 하셨는가.
선생이 지으셨다믐 가사 한 대목을 보자.
태평성대에 굴레 벗은 이내 몸이/ 청풍명월 벗삼아 의지해서
오늘 취 내일 취 모래 취 글피 취
누우나 앉으나 취함이 일이로다. -이황<귀전가>-
시조에서 그렇듯이 가사에 보이는 술꾼들 역시 대개 술멋에 각별한 뜻이 있는 이들이다.
벗과 음악과 자연을 사랑함이 그것이다. 그러나 미식가들에겐 뭐니뭐니 해도 식도락 이상 가는 것이 없다.
'계우사'에서는 고급주효로 '생복회 과하주'를 말하니, 생복오이란 전복을 생으로 굵게 썰어 초장에 찍어 먹는 회요,
과하주란 약주와 소주의 혼합주로서 여름에 즐기는 수이었다.
그러나 이는 주것의 운치와는 무관하니 대신 퇴계 선생과 노계 선생의 작품에서 그 진정한 풍미를 맛보라.
깊들어 가는 그물 여울에 주어두니
자린은순이 수없이 걸렸거늘/
잔놈 굵은놈 다줏어 끌어내어
잔놈은 회치거나 굵은놈은 탕치거니
청대콩 드문 놓아 자채밥 점심 짓고
질병에 채운 술을 취토록 먹다가 -이황<귀전가>-
살진 고사리 향긋한 당귀초를
저포녹포 서로섞어/ 크나큰 버들고리 흡족히 담아두고
붕어회 초미에 눌어,생치 섞어 구워
빛빛이 들이거든 와준에 백주를
박잔에 가득 부어 한잔 또 한잔 -박인로<노계가>-
가을날 천렵을 가서 그물을 치니 붉은 비늘 가진 불거지며 은빛 주둥이 가진 붕어가 잔놈 굵은놈 다 걸려든다.
잔고기는 회로 먹고 굵은 고기론 매운탕을 만들어 풋콩을 드문드문 놓고 윤기 도는 자채쌀고 점심을 짓는다.
여기다 쿠박한 질병에서 따라 마시는 술맛은 무엇에 비기랴.
노계 선샌도 민물고기를 좋아한듯, 붕어는 회치고 눌치와 꿩고기를 섞어 생치구이를 만든다.
이를 일러 회자라 하니 "인구에 회자한다"는 숙어의 어원이다. 와준은 질동이요 백주는 막걸리다.
박잔은 바가지 잔이니 본래 '대포'란 것이 이것이다.
대포잔 가득히 막걸리를 부어 한 잔 또 한 잔 거듭하니 노계는 주량이 얼마였을까 궁금하다.
주량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그 규모에 있어 단연 으뜸은 역시 송강 선생일 것이다.
잠깐만 가지 마오 이 술 한잔 먹어보아
북두성 기울려 창해수 부어내어
저 먹고 날 먹여늘 서너잔 기울이니
화풍이 산들산들 양액을 추켜드니
구만리 장공에 웬만하면 날리로다
이 술 가져다가 사해에 고루 나눠
억조창생을 다 취케 만든 후에
그제야 다시 만나 또 한잔 하자꾸나 -정철<관동별곡>-
북두칠성을 연결하면 자루 달린 거대한 바가지 모양이 된다. 이 바가지를 술바가지 삼고
저 푸른 바닷물을 술로 만들어 서너 잔 꿀꺽꿀꺽 마시고 나니 산들산들 부렁오는 바람결에 양쪽 겨드랑이가 간지럽다.
추켜드니 문득 창공을 나는 학이 되는 느낌이다.일컬어 취선! 이 좋은 기분을 혼자 만끽하기에는 너무 아깝다.
그리하여 그는 동서남북 온 세상 사람들에게 한 대포씩 퍼 먹여 다 취하게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이 호방한 주호의 도도한 주흥을 누가 막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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