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과 전술의 귀재, 살수대첩의 을지문덕
고구려 '살수 물막이공사'로 수나라군 몰살?
■ 수양제의 만용
수양제는 귀국하여 패전의 죄를 우중문, 우문술 등 여러 장수들에게 돌려 파면하고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패전의 치욕을 잊지 못하여 613년 다시 조서를 내려 군대를 탁군에 집결케 했다. 또한 요동고성을 짓고 군량미를 비축하도록 지시한 후 또 다시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특히 “제장(諸將)의 패전은 군량이 모자라서이지 전쟁을 잘못해서가 아니다”라면서 다시 장군들을 복직시킨 후 그해 4월 우문술과 양의신에게 요수를 건너 평양성을 치게 했다. 반면 패전의 책임을 가장 크게 뒤집어쓴 우중문은 관직을 삭탈당하고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고 집에서 머물다 울화병으로 죽었다. 그 당시 왕인공이 신성(고이산성)에 도착하여 고구려군에게 포위되었음에도 큰 승리를 거두어 수나라 군의 사기를 올렸다.
양제 공격에 고구려요동성 철벽 20일 버텨
제2차 정벌 때와는 달리 서전에서 괄목할만한 승리를 거둔 양제는 1, 2차 정벌 때도 점령하지 못한 요동성을 다시 공격토록 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요동성은 이번에도 철벽을 자랑하면서 20일이나 버텼다. 수문제는 요동성과 높이가 같은 어량(魚梁, 공격형 방어벽으로 모래포대로 쌓았으므로 물고기 비늘이나 그물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인 이름)을 만들어 요동성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중국에서 급보가 날라 들었다. 중국 본토에 남아 군량 수송을 책임지던 예부상서 양현감(수양제 즉위의 일등공신인 양소의 아들)이 하남성 여양에서 10만 군중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수나라 군사들은 이 소식을 듣고 군수품과 공성장비를 그대로 둔 채 밤중에 몰래 철수하기 시작했다.
[사진설명] 살수대첩 기록화(독립기념관).
그러나 그들의 후퇴는 고구려 군에 포착되어 후군(後軍)이 고구려의 습격을 받고 거의 전멸했다. 수양제로서 다행한 것은 양현감의 봉기가 회군한 원정군에 의해 격파되어 반란이 손쉽게 진압되었다는 점이다.
중국 내부의 반란을 잘 수습했다고 생각한 수양제는 연패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정벌을 단념하지 않았다. 고구려 점령에 대한 그의 집념은 614년 병력의 탁군 재집결로 이어졌다. 양제는 직접 임유궁으로 가서 황제(黃帝) 사당에 참배했다.
수나라의 초전 결과는 이번에도 순조로웠다. 우선 비사성(요녕 금현성동 대흑산의 고구려산성)으로 진격하여 고구려 군을 격파했다.
고구려 요충지 함락에도 항전의 의지 불태워
그러나 고구려는 요충지가 함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항전 의지를 불태우면서 수나라 군을 괴롭혔다. 이번에도 무모하게 고구려를 침략한 부작용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당초 예상한 것보다 전투 기간이 길어지고 고구려 군의 게릴라전으로 탈주병이 늘어나는 등 도저히 전투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수양제로서도 철군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명색이 중국의 황제인데 일단 시작한 전쟁을 명분 없이 끝낼 수는 없었다. 상황이 점점 파국으로 치닫자 수양제는 결국 고구려에 대해 자신을 배반한 곡사정(斛斯政)만 인도하면 철수하겠다고 화의를 제의했다.
이때 고구려도 계속되는 전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어 국론이 두 파로 갈리었다. 한 파는 남쪽의 신라와 백제를 토멸하기 전에는 수양제와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고 또 한 파는 신라와 백제는 공격하여 점령하는 것이 수월하지 않으니 차라리 넓고 넓은 중국 대륙을 공격하여 아예 중국을 점령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수나라가 연전연패하여 사기가 떨어졌으므로 고구려와 백제가 있는 남쪽은 방어만 하고 중국 대륙을 공격하면 전 중국을 손에 넣는 것이 오히려 간단하다고 강조했다.
영양왕 곡사정 인도 조건으로 화의 수락
전자는 주로 영양왕의 동생인 건무가 주장했고 후자는 을지문덕이 주장했다. 영양왕은 수나라와의 전투에 혁혁한 공을 세운 두 사람의 주장이 갈리자 결국 곡사정을 인도하는 조건으로 화의를 수락했다. 신채호는 그 당시 화의 차 수나라로 간 장수 중 한 명이 화의에 분개하여 쇠뇌를 몸에 품고 사자의 뒤를 따라 들어가 양제의 가슴을 쏘아 맞히고 달아났다고 적었다.
그 후에도 자존심이 상한 수양제는 영양왕에게 직접 입조하라고 계속 독촉했으나 수나라가 패망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영양왕이 이를 들을 리 만무였다.
[사진설명] 살수대첩도 우표.
수와 고구려 간에 벌어진 전투에 대한 대차대조표는 극명했다. 수나라는 수많은 인적 물적 피해만 입고 아무런 성과 없이 퇴각한 반면에 고구려는 장기간의 전투와 일부 피해에도 불구하고 요동지구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수나라의 운명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수양제는 618년 3월, 고구려 원정군 사령관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에게 피살당했다. 최후의 순간에 양제는 자살하겠다고 했으나 우문화급은 그것도 용인하지 않고 양제의 목을 졸라 죽였다. 살해된 양제의 시신은 돌보는 사람이 없어 후궁 하나가 평상을 뜯어 그 판자로 관을 만들어 매장했다고 임용한은 기술했다. 양제의 나이 50세였다.
수양제 중국 역사상 가장 무모한 황제 기록 수모
그해 중국에는 이세민이 세운 당이 들어섰고 다음 해인 619년 수나라는 결국 당나라에 멸망했다. 고구려와의 무모한 전투가 결국 수나라로 하여금 건국한지 단 30년도 안되어 당나라로 대체되는 요인이 되었고 수양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무모한 행동을 한 황제로 기록되는 수모를 당했다.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반목을 끝내고 내치에 힘쓰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후 고구려에 다음과 같은 국서를 보냈다.
‘우리나라와 귀국이 각자의 영토를 잘 보전하며 서로 화목하게 지내게 되어 다행한 일입니다. 다만 수나라가 귀국을 침공하여 피해를 입히고 우리 또한 피해가 크니 그것이 양국의 우호에 장애가 될까 두렵습니다. 먼저 당에 있는 귀국의 포로를 송환하니 귀국에서도 우리의 포로를 돌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 살수대첩 제대로 보기
위에 설명한 내용은 살수대첩에 대해 중국 측과 한국 측의 자료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 정보시대에 살고 있는 요즈음 역사에 대한 비평은 매우 진지하고 또 무서우리만치 합리적이고 공격적이다.
부처님 가호로 수나라군 살수에서 물리쳐
살수대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살수전투가 있기 전에 일곱 명의 고구려 병사가 스님으로 변장하고 바지를 걷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철수하고 있던 수나라 군사는 그곳 여울이 얕은 줄 알고 서로 먼저 강을 건너려고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렇게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큰물이 쏟아져 내리고 사방에서 고구려 군사들이 몰려나와 공격하자 수나라군은 지리멸렬했다. 그 뒤 고구려에서는 부처님의 가호로 수나라 군사를 물리칠 수 있었으므로 그 공덕을 기려 칠불사를 창건했다는 것이다. 그때 스님으로 변장한 일곱 명은 고구려 병사가 아니라 일곱 부처님이었다는 설명이다.
[사진설명] 수나라의 최신 무기인 삼단노, 수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최첨단 무기들을 개발했지만 고구려의 작전에 휘말려 대패했다.
그런데 딴지일보에서 '영화 속의 비과학적 구라'라는 컬럼을 선보였던 구라도리는 살수대첩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의문점을 조목조목 제시하면서 명쾌한 판단을 요구했다. 가능한 한 원문을 그대로 전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대로라면 살수에서 수나라 군이 모두 수장이 되려면 9군 30만 5천 대부분이 살수를 도하하고 있을 때 둑을 터뜨려야 하는데 수나라 9군 중 첫째인 1군이 살수에 도착했을 때 마지막 9군은 어디쯤 있었을까?
계산을 하기에 앞서 당시 평양성에 진격한 수나라 9군의 편제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1군의 구성은 기병 40대로 1대는 100명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기병 총수 4천명이었고, 보병은 80대로 1대는 200명으로 구성되어 있어 보병 총수는 1만 6천명이다. 그래서 보병, 기병 합계 2만 명으로 1군이 구성이 된다. 그래서 순수 전투병은 18만 명이고 여기에 수송, 경비, 병참을 포함하여 30만 5천의 군이 된 것이다(임 용한은 수나라는 모두 24군을 동원했는데 1군은 기병 40대와 보병 80대로 구성되었고 1대는 100명이므로 1군은 1만 2천명, 총 28만 8천 명이라고 계상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출정 시 각 군마다 40리 간격을 두고 출발을 시켜서 24군 전군의 길이는 960리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1군 20,000명 + 기타 병력의 행군 길이는 40리, 즉 16킬로미터 정도이다. 물론 이 거리엔 후미 부대와의 거리도 포함되어있다.
30만5000의 병력(현재 우리나라 육군의 50%)의 행군형태를 현재 2열종대로 행군했다고 가정하자. 이렇게 가정한 이유는 우리나라 산악 지형과 좁은 길의 특성상 이렇게 행군할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5만2천5백 명으로 이루어진 종대 형 행군의 길이는 144킬로미터이다(서울에서 대전 간의 거리). 한편 수나라 군은 퇴각시 마름모꼴 형태의 방진을 치며 퇴각했다고 한다. 수나라 군이 방진을 치며 퇴각한 것은 우리나라의 자연 지형 때문인 듯하다.
계산상의 편의를 위해 35만 전군이 방진을 치며 퇴각했다고 가정하고 방진의 형태는 마름모의 네 귀퉁이에 병력이 포진한다고 가정한다면 진군시보다 약 20퍼센트가 줄어 115킬로미터면 가능하다. 그런데 이 115킬로미터도 평양성에서 살수(지금의 청천강) 상류까지의 직선거리보다도 멀다.
행군로가 굽은 도로라는 점을 감안해도 1군이 살수를 넘을 때 후미군인 9군은 살수에서 최소 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면 이들이 살수에서 몰살했다는 것은 어폐가 있다. 결론적으로 당시 군 편제나 행군 대열을 감안해 보면 살수에서 모두 수장시켰다는 것은 크게 과장됐다는 것이다.’
[사진설명] 비사성, 고구려를 공격하는 길목에 위치한 고구려의 중국과의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 중에 하나로 수나라군과 고구려군은 비사성을 둘러싸고 혈투를 벌렸다(사진 신형식).
살수대첩을 최대의 미스터리로 만들고 있는 것은 살수 상류에 세워졌다고 하는 둑이다. 그 둑에는 여러 가지 비밀이 숨겨져 있는데 이 부분의 해석도 매우 진지하다.
우선 고구려 군은 수나라 군을 수장시킬 최적의 둑의 위치를 찾은 후 그곳에 비밀리에 둑을 쌓았다고 추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진설명] 을지문덕함, 을지문덕은 수나라의 육군뿐만 아니라 수군으로 격파하는 등 해군과 많은 관련이 있다.
강을 도하해야 하는 수나라 군의 입장에선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은 하류보다는 강폭이 좁고 수심이 낮은 중, 상류를 선택하는 것이 상식이다. 또한 수나라 군이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장되었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수나라 군이 도하한 장소로 당초에 평양성으로 진격하기 위해 청천강을 건넜던 장소가 가장 유력하다. 또 처음 건넜을 때 부교를 이용하여 넘었지만, 철수할 때는 고구려군이 상류지역에 둑을 쌓아 놓아 살수의 수심이 얕아졌기 때문에 부교를 이용하지 않고 건넜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둑을 쌓는 고구려의 입장에선 우선 둑의 위치가 적의 눈에 띄지 않게 그리고 빠른 시간 안에 쌓아야 하기 때문에 강폭이 좁은 지역을 택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고구려군의 입장에서 볼 때 수나라 군이 회군하여 도주 할 때 어느 지점을 선택할지는 쉽게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수나라의 철수에 대비하여 물막이 공사를 진행했다. 기록에 의하면 수나라 군이 살수를 넘어 평양에 머무르다 다시 살수를 넘는데 걸린 시간은 대략 2주일에서 3주 정도라 하므로 이 기간에 공사를 완성했음이 틀림없다.
도하 시 개인간의 간격 2미터로 간주
수나라 군이 한꺼번에 모두 도하를 하다 수장되었다면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할 수 있다.
1) 강의 상류를 막아놓았기 때문에 수나라 군이 도하할 지점의 수심은 사람이 건널 수 있을 정도이다.
2) 도하 시 개인 간의 간격은 물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2미터정도로 간주한다.
3) 수나라 전 병력이 강을 도하 중이라 하면 강 폭의 1/2인 250미터까지 사람이(125명) 건널 수 있고 3)의 가정으로 강 상/하류로 뻗어진 길이를 계산을 해보면 4,480미터(2440명)다.
구라도리는 여기에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수나라 군사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물의 량을 계산했다.
우선 내려오는 물로 사람이 쓸려 내려가려면 사람의 무게중심보다 높은 수위(최소 1미터)의 물이 빠른 속도로 흘러야 한다.
위의 가정에서 단순하게 계산해보면 최소한 2,440,000세제곱미터(톤)의 물이 상류 둑에서 수나라 군이 있는 지역까지 손실 없이 그대로 도착해야 한다. 그러나 둑의 위치에서 수나라 군까지의 거리는 전혀 고려치 않은 최소의 양이기 때문에 둑에서 수나라 군까지의 거리인 최소 7킬로미터, 최대 10킬로미터의 양을 계산하면 7킬로미터일 경우는 3,500,000톤, 10킬로미터일 경우 5,000,000톤이 된다.
그렇다면 둑이 저장할 물의 양은 최소한 5,940,000톤에서 최대 7,440,000톤이 되어야 한다.
이 정도의 저수량이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전용 댐 정도의 크기로 금강에 있는 무주댐은 저수량 3,400,000톤에서 5,200,000톤이고 댐 높이는 60미터이다.
고구려가 5백만톤 넘는 댐을 20일내 만들수 있었을까
그런데 과연 서기 612년 고구려의 토목기술로 흙만을 이용하여 저수량 5백만 톤이 넘는 크기의 댐을 10일에서 20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만들 수 있을까? 근래의 토목 기술로도 설계부터 완공까지 최소한 10년 이상이 걸린다.
5백만 톤을 저장하는 둑을 단번에 터트릴 방법도 만만한 것은 아니다. 지금처럼 다이너마이트나 화약을 사용하지 않고 기계적인 장치나 인력으로 댐을 한 번에 부수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댐을 만들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진설명] 북한 측의 살수대첩 추정지.
제일 먼저 상류에서 5백만 톤의 물을 방류하면 하류에서 얼마의 시간이 걸려야 도착한다는 것을 고구려 군은 알아야 한다. 현대 과학 기술로는 이와 같이 절묘한 시간에 댐을 폭파하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첫째 실제 똑같은 조건에서 둑을 터뜨려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과 둘째 컴퓨터의 시뮬레이션을 거쳐 시간을 계산하는 방법이다.
당시의 상황으론 어느 것 하나 가능하지 않다. 결국 살수에서 30만여 명의 수나라군이 수장되었다는 것은 과장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이들 작전이 어느 정도 과장됐다 하더라도 수나라 대군이 고구려군에 대패했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다.
이상과 같은 살수대첩에 대한 의문점과 해법은 그야말로 신선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상식으로 귀결된다. 수나라 군이 살수 등지에서 대패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고구려 군이 물막이 공사로 수나라 군을 몰살시켰다는 드라마틱한 요소를 가미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약간의 과학적 지식만 갖고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았다면 살수에서 둑을 터뜨려 대승했다는 말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나간 역사를 과학의 입장에서 음미해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살수대첩에 대한 북한의 역사기술은 우리와 다르다.
북한의 살수대첩 역사기술 우리와 달라
살수대첩이 있었던 역사의 무대가 한반도 북부지역이 아니라 모두 지금의 압록강 이북, 즉 중국 요령성 일대라는 것이다. 살수대첩의 현장인 살수(薩水)는 현재 평안남ㆍ북도를 남북으로 가르며 황해로 흘러드는 청천강이 아니며, 전사에 등장하는 평양성이나 압록수도 지금의 평양이나 압록강이 아니라는 것이 북한의 해석이다.
1979년에 발간된 북한 통사인 『조선전사』 제3권<고구려사>에 따르면 살수대첩의 살수는 현재 요동반도에 있는 대양하(大洋河)의 지류인 소자하이다. 또한 수나라 별동대가 평양성을 향해 떠날 때 건넜던 압록수는 소자하 위쪽에 있는 오늘날의 태자하 하류(일명 오렬수)이며, 그들이 점령하고자 했던 평양성도 압록강 북쪽에 있던 봉황성(현재 봉성)이라고 설명된다.
당시 고구려에는 수도 평양 외에 평양의 북쪽(북평양)과 남쪽(남평양)에 각각 부수도(副首都)를 가지고 있었는데 봉황성(임금이 있는 성)은 북평양이었는데 고구려 왕이 있던 왕성이었기 때문에 수나라가 이곳을 평양(수도)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1년 평양에서 발간된 『력사사전』 제2권에는 살수가 청천강으로 되어 있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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