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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토의 중심축, 황룡사 9층탑

醉月 2009. 7. 4. 15:28

불국토의 중심축, 황룡사 9층탑

저자 : 정민
출처 : http://jungmin.hanyang.ac.kr/

백제에 미륵사가 있었다면 신라엔 황룡사가 있었다. 황룡사는 신라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두 가람의 중앙에 우람하게 솟았던 9층 목탑에는 어떤 염원이 담겼나? 전불(前佛) 시대의 가람터란 무슨 뜻인가? 부처들이 여기저기 땅 속에서 불쑥불쑥 솟아나고, 불상과 탑과 종의 규모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이 시기 왜 신라와 백제는 전쟁 중이었음에도 엄청난 물력을 쏟아 부어 가면서 대규모 사찰 건립에 경쟁적으로 몰두했을까? 그 속사정이 궁금하다.

가섭불의 연좌석과 전불(前佛) 시대 가람터

『삼국유사』 제 4, 탑상(塔像)편의 기사는 동경 흥륜사 금당(金堂)에 모신 십성(十聖)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것이 「가섭불의 연좌석」기사다.

『옥룡집(玉龍集)』과 「자장전(慈藏傳)」, 그리고 제가의 전기에 모두 말했다. “신라 월성 동쪽 용궁(龍宮) 남쪽에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다. 그 땅은 바로 전불(前佛) 시대 가람 터이다. 지금 황룡사의 땅은 이 일곱 가람의 하나다.” 국사를 살펴보니, 진흥왕 즉위 14년(533), 개국(開國) 3년 계유 2월에, 월성의 동쪽에 신궁을 세우는데, 황룡(皇龍)이 그 땅에 나타나므로 왕이 이를 의심하여 고쳐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 연좌석은 불전(佛殿) 뒷면에 있다. 일찍이 한차례 참배한 적이 있다. 돌은 높이가 5,6척 가량 되고, 둘레는 겨우 3주(肘)였다. 기둥처럼 서서 윗 부분은 평평했다. 진흥왕이 절을 세운 이래 두 차례나 화재를 겪어, 돌이 갈라진 곳이 있었으므로 절의 승려가 쇠를 붙여 보호하였다.

가섭불은 범어 Kassapa Buddha의 음역이다. 과거 칠불 중 여섯 번째 부처님이다. 사람의 나이로 쳐서 2만세 때에 출현한 부처님이니 석가모니의 전생이다. 위 기사는 그러니까 몇 만년 전 가섭불이 연좌(宴坐)하던 바위가 황룡사 터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내용이다. 연좌(宴坐)란 결가부좌를 한 상태로 좌선에 드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황룡사 터가 그 옛날 가섭불이 연좌하여 한 차례 설법으로 제자 2만명을 제도했던 바로 그곳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연좌석 이야기는 『옥룡집』을 비롯한 여러 전승들에서 한결같이 증언한 바다. 연좌석이 불전 뒤편에 있었으니, 결국 황룡사는 가섭불의 가호를 받는 거룩한 공간이 된다.
『삼국사기』 진흥왕 14년 봄 2월의 기사는 이러하다.

봄 2월, 왕이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월성의 동쪽에 신궁(新宮)을 짓게 했다. 황룡(黃龍)이 그 땅에 나타나자, 왕이 이를 의심하여 고쳐 불사(佛寺)로 만들고, 이름을 내려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

신궁(新宮)을 세우려는데 황룡(皇龍)이 나타났다. 진흥왕은 갑자기 나타난 황룡을 보고 신궁을 조영하려던 계획을 멈췄다. 두 기록 모두에서 왕이 의심했다는 표현이 보인다. 황룡의 출현을 전불 시대 일곱 가람 중 하나임을 알리는 표지로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용은 두 기록에서 황룡(皇龍)과 황룡(黃龍)으로 달리 적고 있다. 황룡(黃龍)은 말 그대로 황금빛의 용이다. 황(皇)에도 황백색(黃白色)의 의미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황룡(皇龍)은 용궁(龍宮)의 임금이 되는 용이다. 이렇게 보면 왕은 자신의 신궁을 황룡의 용궁에 양보한 셈이 된다. 불법을 왕권의 우위에 둔 것이다.
그런데 전불시대의 일곱 가람 이야기는 『삼국유사』 권 3의 「아도기라(阿道基羅)」조에 또 나온다. 고구려 여자 고도령(高道寧)이 아들 아도에게 신라로 가서 불법을 전하라고 권하는 말 중에 보인다. 장황함을 덜기 위해 일곱 가람의 위치와 조성연대를 여타 기록을 참조하여 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1 : 금교(金橋:西川橋) 동쪽 천경림(天鏡林) (현 경주시 사정동) 흥륜사(興輪寺)
     법흥왕 14년(527) 시작, 22년(535) 본격 착공, 진흥왕 5년(544) 완공. 천경림을 채벌하여 그곳의 목재로 세움.
2 : 삼천(三川)이 갈라지는 곳(서천과 남천의 합류지점) 영흥사(永興寺)
     법흥왕 22년(535)에 흥륜사와 함께 착공. 법흥왕의 왕비가 세운 것임.
3 : 용궁(龍宮) 남쪽(현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皇龍寺)
     진흥왕 14년(553) 착공, 진흥왕 27년(566) 준공.
4 : 용궁 북쪽(현 경주시 구황동) 분황사(芬皇寺)
     선덕여왕 3년(634) 준공.
5 : 사천(沙川)의 끝자락(현 경주 남천 북쪽, 천경림과 남천이 만나는 지점) 영묘사(靈妙寺)
     선덕여왕 4년(635) 준공.
6 : 낭산(狼山) 신유림(神遊林). (현 경주시 배반동) 천왕사(天王寺)
     문무왕 19년(679) 준공.
7 : 서청전(婿請田). 알천(閼川) 양산촌(揚山村) 남쪽, 오릉(五陵) 남쪽(현 경주시 탑정동) 담엄사(曇嚴寺)
     불명.

표를 통해 일곱 가람의 차례가 절의 건립 시기 순이라는 점이 확인된다. 일곱 가람은 반경 수 킬로미터 이내에 밀집해 있다. 담엄사를 제외한 나머지 사찰은 왕명에 의해 세워진 국찰(國刹)이다. 이는 신라의 수도 경주가 전불시대 불국토(佛國土)의 중심이었다는 의미이고, 이곳에 세워진 사찰들은 전불시대의 재현을 알리는 상징이 된다.
그중 황룡사는 용궁 남쪽, 분황사는 용궁 북쪽에 자리 잡았다. 두 절의 가운데가 용궁(龍宮)이란 말이다. 용궁의 아래쪽을 파는데 황룡이 나와, 신궁 건설을 중단하고 절을 세웠다. 용궁을 관장할 황룡의 거처를 마련한 것이다. 더욱이 이곳은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는 곳으로 여러 기록에서 한결같이 입을 모았던 영험스런 장소가 아닌가? 분황사(芬皇寺)는 뜻으로 풀면 황룡사를 분화(芬華), 즉 꾸며주는 절이란 뜻이니, 황룡사의 부속적 성격을 띤다. 분황사와 황룡사 사이는 예전에는 습지였다. 황룡사는 발굴 결과에 따르면 백제의 미륵사와 마찬가지로 습지 또는 연못을 메워 조성되었다. 지금 분황사에서 황룡사지 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큰 우물이 황룡이 나타났던 장소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왜 하필 가람의 숫자가 7인가? 석가세존까지의 과거칠불(過去七佛)과 호응코자 함이다. 비바시불(毘婆尸佛: vipassin)·시기불(尸棄佛: sikhin)·비사부불(毘舍浮佛: vessabhu)․구류손불(拘留孫佛:kondanna)․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konagamama)․가섭불(迦葉佛: kassapa)․석가모니불이 전불시대 일곱 부처님의 이름이다. 황룡사는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는 곳에 자리 잡았으므로, 가섭불과 인연이 있다. 나머지 여섯 절이 어느 부처님과 각각 연결되는 지는 말하지 않았다. 일곱 가람이 과거칠불과 관련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일연은 위 기사 끝에 이런 찬시(讚詩)를 한 수 남겼다.

惠日沈輝不記年 은혜론 해 광휘 잠김 해를 기억 못하는데
唯餘宴坐石依然 연좌석만 예전처럼 다만 여기 남았네.
桑田幾度成滄海 뽕밭이 몇 번이나 푸른 바다 되었어도
可惜巍然尙未遷 가석타 우뚝하게 여태도 그대롤세.

1구의 혜일(惠日)은 전불시대 불법의 은혜로운 태양이다. 그 광휘가 잠겨 사라진 것은 햇수로는 따져서 기억할 수조차 없다. 그런데 그 겁의 세월 동안 가섭 부처님이 설법하시던 연좌석은 변함없이 남아 뽕밭이 여러 번 푸른 바다로 변하도록 그 자리에 꼼짝 않고 그대로 있다는 이야기다.
일연은 우뚝 선 연좌석을 직접 보았는데, 이어지는 글에서 “서산의 큰 군대 이후로 전각과 탑이 불에 타버렸다. 이 돌 또한 파묻혀서 겨우 지면과 더불어 평평하다.”고 적어, 1238년 몽고 침략 당시 절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연좌석이 땅에 묻혔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조선 초기 김시습(金時習)은 「희연좌석(戱宴坐石)」이란 시에서 “지금은 불에 타서 갈라졌다(今爲火所燒折裂)”고 적고, “어느 해에 연좌하여 『밀엄경(密嚴經)』을 강설했나. 한 차례 화겁(火劫) 만나 꼭대기가 뾰족하다. 미래에 그 자리에 걸터앉게 되신다면, 설법함에 마음이 편안치 못 하시리. 宴坐何年說密嚴, 一遭火劫上頭尖. 未來若踞漸漸處, 說法還應意不恬”이라고 노래했다. 조선 초기에도 연좌석은 남아 있었지만, 앞서 일연 이전 절의 승려들이 갈라진 돌을 쇠로 붙여 보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쪼개져 끝이 뾰족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알지 못할 장륙존상(丈六尊像) 기사

황룡사와 관련된 두 번째 기사는 역시 권 4 탑상에 실린 「황룡사장륙(皇龍寺丈六)」이다. 기사는 앞서의 이야기를 되풀이하며 시작된다.

신라 제 24대 진흥왕 즉위 14년(553) 계유년 2월에 용궁 남쪽에 자궁(紫宮)을 지으려는데, 황룡(黃龍)이 그 땅에 나타나므로, 이에 고쳐 불사(佛寺)를 세우고 황룡사(黃龍寺)라 했다. 기축년(569)에 담장을 둘러, 17년만에 겨우 마쳤다.

여기서는 황룡사(黃龍寺)로 적었다. 신궁(新宮)이 자궁(紫宮)으로 바뀐 것 외에는 앞서 본 내용과 다를 게 없다. 이어지는 기사를 보자.

얼마 되지 않아, 바다 남쪽에서 한 척의 큰 배가 하곡현(河曲縣)의 사포(絲浦)[지금의 울주(蔚州) 곡포(谷浦)다.]로 와서 정박했다. 살펴보니 첩문(牒文)이 있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서축(西竺)의 아육왕(阿育王)이 황철(黃鐵) 57,000근과 황금 3만푼[별전에는 철 407,000근, 금 1,000냥이라고 하나, 잘못인 듯 하다. 혹 37,000근이라고도 한다.]을 모아서 장차 석가삼존상을 주조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배에다 실어 바다로 떠내려 보내며 빌었다. ‘원컨대 인연 있는 나라 땅에 이르러 장륙(丈六)의 존용(尊容)을 이루소서.’” 아울러 한 분 부처님과 두 분 보살상의 모양(模樣)을 실었다. 고을의 관리가 보고서를 갖추어 위에 아뢰니, 칙사가 그 고을 성 동쪽의 툭 터진 높은 땅을 골라 동축사(東竺寺)를 창건했다. 그리고는 삼존을 맞이하여 봉안하였다. 서울로 황금과 철을 옮겨와 대건(大建) 6년(573) 갑오 3월에[『사중기(寺中記)』에는 계사년 10월 17일이라 했다.] 장률존상을 주조하여 만들었다. 한번 북을 쳐서 이루니, 무게가 35,007근으로 황금 10,198푼이 들었다. 두 보살에게는 철이 12,000근, 황금은 10,136푼이 들었다. 황룡사에 안치하였다. 이듬해 장률존상이 눈물을 흘려 발꿈치에 이르니 땅을 한 자나 적셨다. 대왕께서 승하하실 조짐이었다. 어떤 이는 장률존상을 조성한 것이 진평왕 때였다고 하는데 잘못이다.
별본(別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아육왕은 서축 대향화국(大香華國)에 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1백년이 있다가 태어났다. 진신을 공양하지 못함을 안타까워 했다. 황금과 철을 얼마간 거두어서 세 차례 주조하였으나 보람이 없었다. 이때 왕의 태자가 홀로 이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왕이 사람을 보내 힐난하자, 태자가 아뢰었다. “혼자 힘으로는 이루지 못합니다. 이를 알기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왕이 옳게 여겨 배에다 실어 바다에 띄웠다. 남염부제의 16개 큰 나라와 500개 중간 나라, 1만개의 작은 나라와 8만개의 마을에서 해보려 했지만 모두 주조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신라국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文仍林)에서 이를 주조했다. 장률존상이 완성되자 상호(相好)가 두루 갖추어졌다. 아육(阿育)은 무우(無憂)로 번역한다.

황룡사가 완공된 것과 때를 같이 해서, 울주 앞바다에 큰 배 하나가 닿았다. 황룡사의 완공에 따른 장률존상 봉안을 신비화하려는 의도를 대번에 읽을 수 있다. 황금과 황철을 싣고 느닷없이 도착한 큰 배, 거기에 실려 있는 모양불(模樣佛)과 보살상. 보고를 받은 왕은 즉시 동축사(東竺寺) 창건을 명하고, 견본으로 온 작은 삼존불을 그곳에 안치한다.
동축사는 서축(西竺)이 동쪽으로 옮겨온 것을 기념하는 절이다. 배가 싣고 온 황금과 황철로 석가삼존상을 조성했다. 석가삼존은 주불인 석가모니불과 좌우에 모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다. 석가모니불의 전생인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던 곳에 아육왕의 염원이 담긴 석가모니불이 안치되었다. 결국 전불시대 가람이 서축 땅으로 잠시 옮겨 갔다가 이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온 셈이 된다.
당시 조성된 장륙존상(丈六尊像)의 크기와 모양은 어떠했을까? 장륙은 1장 6척의 줄임말이다. 보통 사람의 신장이 8척인데 반해, 부처님은 그 두 배여서 1장 6척이라 한다. 서면 1장 6척, 앉으면 8척이라고도 하니, 장륙존상은 1장 6척 높이의 입불(立佛)인 셈이다. 3미터가 훨씬 넘는 입상(立像)이다. 무게로 보면 가운데 석가모니불은 크고, 좌우의 협시불은 3분의 1 정도의 크기였을 것이다. 당시로는 이런 크기의 불상은 한번도 만들어진 적이 없었던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황룡사의 완공이 569년이고, 장률존상의 주조가 573년이니, 이 사이에는 다시 4년의 거리가 있다.
일연은 여기에 별본(別本)의 다른 전승을 다시 덧붙였다. 서축 아육왕의 불상 조성에 얽힌 사연을 소개한 것이다. 서축 대향화국의 아육왕은 인도의 아쇼카 왕이다. 당시 기준으로 1,300년 전에 살았던 기원전의 인물이다. 기원 전에 인도를 출발한 배가 그 많은 크고 작은 나라와 8만개의 촌락을 거쳐 근 1,300여년 만에 신라 땅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니, 사실의 언어로 받아들일 일은 애초에 못 된다. 결국은 인도 아쇼카 왕의 염원을 이어 신라 땅에서 장률존상을 조성해 전불시대의 가람터에 봉안하였다는 의미만 취할 수 있다.
진흥왕이 장륙존상을 단 한 번에 조성한 곳은 문잉림(文仍林)이다. 문잉림은 신유림(神遊林)과 함께 신라의 성소(聖所) 중 하나다. 「혜통항룡(惠通降龍)」조에서 혜통에게 쫓겨난 독룡이 신라로 건너와 인명을 해쳤던 곳이기도 하다. 어디서도 주조하지 못한 장률존상을 신라는 단 한 번만에 완성하였다.
일연은 다시 자장에 얽힌 후일담 하나를 덧붙인다.

뒤에 대덕 자장(慈藏)이 서쪽으로 배우러 가서 오대산에 이르렀다. 문수보살의 현신이 감응하여 비결을 주었다. 인하여 부탁했다.
“네 나라 황룡사는 석가와 가섭불이 강연하시던 땅이다. 연좌석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 까닭에 천축의 무우왕(無憂王)이 황철 몇 천근을 모아 바다에 띄워 1,300여년이 지난 뒤에 네 나라에 도착해서 완성하여 그 절에 안치하였다. 대개 큰 인연이 그렇게 시킨 것이다.”[별기에 실린 것과 꼭 같다.]
불상이 완성된 뒤 동축사의 삼존 또한 절 안으로 옮겨와 안치했다. 『사기(寺記)』에는 “진평왕 6년 갑진(584)에 금당(金堂)이 조성되었다. 선덕왕 대에 절의 초대 주지는 진골인 환희사(歡喜師)였고, 제 2대 주지는 자장 국통이며, 그 다음은 국통 혜훈(惠訓)이었고, 그 다음은 상률사(廂律師)였다”고 했다. 지금은 병화(兵火) 이래로 큰 불상과 두 보살상은 모두 녹아 없어졌다. 하지만 작은 석가불은 그대로 남아 있다.
찬(讚)한다.

塵方何處匪眞鄕 티끌세상 어덴들 참고향이 아니랴만
香火因緣最我邦 향화의 인연이야 우리 땅이 으뜸일세.
不是育王難下手 아육왕이 손대기 어려워서가 아니니
月城來訪舊行藏 월성으로 옛 자취를 찾아온 것이라네
.

일연은 찬시에서 무우왕 즉 아육왕이 굳이 신라 땅까지 황금과 황철을 실어 보내 1,300년만에 완성케 한 것은 직접 만들지 못해서가 아니라, 월성에 남은 전불시대의 옛 자취를 굳이 찾아오려한 이유에서였다고 적었다. 자장에게 현신한 문수보살의 증언이 이러한 믿음을 더 굳건하게 해준다.
정리해보자. 553년(진흥 14)에 신궁을 지으려다 착공한 황룡사 공사는 17년 만인 569년(진흥 30)에 완공되었다. 완공 후 4년 뒤인 573년에는 엄청난 규모의 장률존상을 조성하여 봉안했다. 584년(진평 6)에 다시 금당이 조성된다. 절의 규모가 더 커진 것이다. 여기에 9층목탑이 완공되는 것은 그로부터 무려 61년 뒤인 645년(선덕 14)의 일이다. 가람이 완공되는 데 9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 대역사였다. 특히 선덕여왕 대의 초대주지가 진골 출신의 환희사였다고 적은 것을 보면, 황룡사는 그저 보통의 절이 아니라 왕실을 위한 왕실에 의한 왕실의 절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황룡사 9층탑의 위용과 황룡사 종

신라 진흥왕은 석가삼존을 황룡사의 주불로 모셨다. 근 70년 뒤 백제 무왕은 미륵삼존을 미륵사의 주불로 모셨다. 진흥왕이 가섭불의 연좌석 설화와 아육왕의 황금을 실은 배 이야기까지 동원해서 신라가 전불시대 가람터이고, 황룡사의 건립이 후불시대의 새로운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임을 선포했다면, 무왕은 미륵사를 통해 장차 올 미륵세상의 도래를 선언했다.
특히 진평왕과 무왕의 대규모 사찰 건립은 자못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다. 미륵사 서쪽 석탑은 금번 발굴된 사리봉안기로 보면 639년에 세워졌다. 미륵사 중앙에 서 있던 9층 목탑은 이미 그 전에 완공되었을 것이다. 미륵사 근처 제석사(帝釋寺)에도 화재로 타버리긴 했으나 7층 목탑이 우람하게 서 있었다. 그러고 보면 목탑이든 석탑이든, 탑파의 조성 기술만큼은 백제가 신라를 월등히 앞지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제 다시 「황룡사장륙」조에 이은 「황룡사구층탑」조를 검토하겠다. 자못 긴 서사와 다양한 전승을 싣고 있어 간추려서 읽는다. 황룡사 관련 기사에서 이상한 점은 앞 항목의 내용을 반복하며 연쇄적으로 화제를 이어간다는 점이다.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와 절을 짓게 했다는 기사는 「가섭불연좌석」과 「황룡사장륙」에 같이 보인다. 자장이 선덕여왕 즉위 5년(636)에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현신을 만나 법을 받고, 신라의 불연(佛緣)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황룡사장륙」과 「황룡사구층탑」조에 역시 반복된다.
「황룡사구층탑」조에서 자장에게 들려준 문수보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네 나라의 왕은 천축국 찰리종(刹利種)의 왕이다. 미리 불기(佛記)를 받았으므로 따로 인연이 있다. 동이(東夷)나 공공(共工)의 종족과는 같지 않다. 하지만 산천이 험준해서 사람들의 성품이 거칠고 패려 궂다. 삿된 견해를 많이 믿어, 때로 천신이 재앙을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해박한 비구가 나라 안에 있어서 임금과 신하가 편안하고 태평하며, 백성들이 화평하다.

찰리종(刹利種)은 고대 인도의 카스트 계급 중 크샤트리아 계층, 즉 왕족 혹은 무사계급을 가리키는 4성의 하나다. 아예 신라 국왕이 인도 천축국 찰리종의 우두머리라고 말한 것이다. 앞서 진흥왕 대부터 신라 왕실의 석종의식(釋宗意識)에 입각한 명명법과도 관련이 깊다. 이제 신라는 전불시대의 중심지였고, 왕은 인도 왕실의 왕이기도 한 것이니, 불국토의 인연은 새삼스레 더 말할 것이 없게 된다.
자장은 다시 태화지(太和池) 곁에서 신인(神人)과 조우한다. 어지러운 나라 형편을 걱정하던 자장에게 신인은 여자가 임금으로 있어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 나라가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빨리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말했다. 그는 자장에게 신라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을 이렇게 일러준다.

황룡사의 호법룡은 내 큰 아들이다. 범왕(梵王)의 명을 받고서 와 이 절을 지키고 있다. 본국으로 돌아가거든 절 가운데 9층탑을 만들도록 하라. 이웃 나라는 항복하고, 구한(九韓)은 와서 조공하리니, 왕의 복조(福祚)가 길이 평안하리라. 탑을 세운 뒤에는 팔관회를 베풀어 죄인을 사면하라. 그리하면 외적이 능히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또 나를 위해 서울의 남쪽 기슭에 한 정려(精廬)를 세워 내 복을 함께 빌어주면 나 또한 은덕으로 갚을 것이다.

황룡사의 호법룡은 태화지의 호법룡인 신인의 맏아들이었고, 황룡사의 지킴이가 된 것도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서였다. 나아가 신인은 자장에게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염원을 담은 9층탑의 건립을 명했다. 자장은 마침내 신인의 분부에 따라 643년에 귀국한다. 그리고는 즉각 9층탑의 건립을 건의한다. 전후 사정을 보자.

선덕여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의논하자 신하들이 말했다.
“백제에 공장(工匠)을 청한 뒤라야 될 것입니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요청하였다. 아비지(阿非知)란 이름의 장인이 명을 받고 와서 목석(木石)으로 세웠다. 이간(伊干) 용춘(龍春)[용수(龍樹)라고도 한다」이 일을 주관하였다. 소장(小匠)을 2백인이나 거느렸다. 처음 찰주(刹柱)를 세우는 날, 공장은 본국 백제가 멸망하는 형상을 꿈꾸었다. 공장은 이에 의심이 들어 손을 멈추었다. 그러자 홀연 대지가 진동하더니만 캄캄한 중에 한 노승과 한 장사가 금전(金殿)의 문에서 나와 기둥을 세웠다. 승려와 장사는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공장은 이에 다시 뉘우치고 그 탑을 모두 완성했다. 「찰주기(刹柱記)」에는 “철반(鐵盤) 위로 높이가 42척이고, 그 아래로는 183척이다.”라고 했다. 자장은 오대산에서 받은 사리 백 알을 나누어 기둥 안에 안치하고, 통도사의 계단(戒壇)과 대화사(大和寺) 탑에도 함께 넣었다. 연못 용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대화사는 아곡현 남쪽에 있다. 지금의 울주다. 또한 자장 스님이 창건한 것이다.]

신라가 백제에 정식으로 공장(工匠)의 파견을 예물을 갖춰 요청한 것을 보면, 당시 신라의 탑 조성 기술이 백제만 못했음이 확인된다. 앞서 백제의 무왕도 미륵사 건립 당시 신라 진평왕에게 기술자 파견을 요청했던 일이 있다. 두 나라는 당시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사 건립에 관해서만은 서로 협조적 관계에 있었던 듯 하다.
643년에 황룡사 9층탑 건립을 위해 신라로 파견된 아비지는 639년에 완공된 미륵사 서쪽 석탑과 중앙의 9층목탑 및 근처 제석사 7층목탑의 공사 책임자였던 것이 분명하다. 현재 미륵사 동서 석탑의 규모로 보아, 중앙 목탑의 높이를 짐작할 수 있는데, 신라는 아비지의 그 노하우가 필요했던 것이다. 9층탑의 중심 기둥인 찰주(刹柱)를 세울 때 생긴 이상한 꿈과 이적이 있었다. 9층탑 건립은 뒤에 태종 무열왕의 아버지가 되는 용수가 공사 책임자였고 소장(小匠)이 200명이나 동원된 대규모 국가 사업이었다. 끝에 보이는 대화사 탑은 태화지의 호법룡인 신인의 부탁에 따른 것이다.
일연은 「찰주기」의 한 대목을 인용했다. 1964년 9층탑의 찰주가 얹혀 있던 심초석 발굴 당시 사리함은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이 유물은 기적적으로 다시 발견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리함 안에서 심하게 부식된 「찰주본기」가 나왔다. 시독우군대감(侍讀右軍大監) 박거물(朴居勿)이 찬한 글의 전반두 판독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저 황룡사 9층탑은 선덕대왕께서 창건하셨다. 예전 진골 귀인인 선종랑(善宗郞)이란 이가 있었다. 젊어서 살생을 좋아해, 매를 놓아 꿩을 잡게 했다. 꿩이 눈물을 흘리며 울자, 여기에 감동해서 발심하여 출가를 청해 입도했다. 법호를 자장이라 한다. 대왕 즉위 7년(638), 대당 정관 12년, 우리나라 인평(仁平) 5년 무술년에 우리 사신 신통(神通)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다. 대왕 12년(643) 계묘년에 본국으로 돌아오려고, 남산의 원향선사(圓香禪師)에게 절하고 인사하니, 선사가 말했다. “내가 관심(觀心)으로 그대의 나라를 살펴보니, 황룡사에 9층의 높은 탑[堵波]을 세우면 해동의 여러 나라가 모두 네 나라에 항복할 것이다.” 자장이 이 말을 받들어 돌아와 아뢰었다. 이에 명하여 감군(監君)은 이간 용수요, 대장(大匠)은 백제 아비 등이며, 소장 2백인을 거느리고서 이 탑을 건립했다. 14년(645) 을사년에 비로소 얽어 4월 8일에 찰주를 세우고, 이듬해에 공사를 마쳤다. 철반(鐵盤) 이상이 높이가 7보(步)이고, 이하는 높이가 30보 3척이다. 과연 삼한을 통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니, 군신이 안락하여 지금까지 이에 힘입는다.

자장의 입도 경위는 권 5에 실린 「자장정률(慈藏定律)」조에도 나오지 않는 새로운 내용이다. 원향선사 부분은 「황룡사구층탑」조의 주석 부분에 간략하게 언급되었다. 탑의 높이에 대한 설명은 『삼국유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철반은 9층이 끝나고, 위로 상륜부(相輪部)가 시작되는 지점의 구조물이다.
공사는 3년간 계속 되어 최종 완공은 646년에 이루어졌다. 발굴 보고에 따르면 9층탑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7칸인 사각 평면식으로 사방 22.2미터, 면적 150평, 높이는 무려 82미터에 달했다. 30층 아파트의 높이에 해당한다.
일연은 이 설명만으로도 성에 안찼던지 다시 안홍(安弘)의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를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신라 제 27대에 여왕이 왕이 되자, 비록 도가 있었으나 위엄이 없었다. 구한(九韓)이 침범하여 수고롭게 되자, 용궁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운다면 이웃 나라의 재앙을 누를 수가 있다고 하였다. 제 1층은 일본이요, 제 2층은 중화(中華)다. 제 3층은 오월(吳越)이요, 제 4층은 탁라(托羅)다. 제 5층은 응유(鷹遊)요, 제 6층은 말갈이다. 제 7층은 단국(丹國), 제 8층은 여적(女狄), 제 9층은 예맥(濊貊)이다.

결국 일연은 이중 삼중으로 관련 문헌 근거를 반복 배치함으로써 황룡사 9층탑이 갖는 영험을 부각시켰다. 또한 황룡사 창건에서 9층탑 건립에 이르는 90년의 대역사가 오로지 부처님의 섭리에 의해 전불시대의 자취를 되찾고, 국태민안의 염원을 성취하는 과정이었음을 밝혔다.
장륙존상 안치를 위한 금당 건립에 이어 646년 황룡사 9층탑의 완공으로 황룡사는 명실공히 신라 최고의 가람으로 우뚝 섰다. 백고좌(百高座) 법회가 잇달아 열리는 등 호국불교의 구심점으로 오롯이 부각되었다. 전례 없는 여왕의 등극으로 인한 국가의 위엄 추락을 막고 국가적 역량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한편 황룡사 9층탑 전승에 예외 없이 자장과 문수보살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탑상편의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은 자장이 문수보살과 조우했던 중국 오대산을 우리나라 오대산으로 옮겨오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가섭불의 연좌석과 아육왕의 장륙존상에 이은, 황룡사 9층탑 건립, 그리고 문수보살이 늘 머물고 있다는 오대산의 이야기까지 묶어지면서 신라의 불국토설은 한층 탄력을 받아 신앙 중심부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따로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황룡사 대종 조성과 황룡사의 의미

9층탑 건립으로부터 108년 뒤인 35대 경덕왕 13년(754)에는 황룡사 대종이 만들어진다. 탑상편 「황룡사종(皇龍寺鐘)」 관련 기사를 읽는다.
신라 제 35대 경덕대왕이 천보 13년(754) 갑오년에 황룡사 종을 주조했다. 길이가 1장 3촌, 두께가 9촌, 또 무게가 497,581근이었다. 시주는 효정이왕(孝貞伊王) 삼모부인(三毛夫人)이고, 장인은 이상택(里上宅)의 하전(下典)이었다. 숙종(肅宗) 조에 다시 새 종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6척 8촌이었다.

봉덕사 신종, 즉 에밀레종이 12만근의 황동으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황룡사 대종의 무게는 50만근에 가깝다. 에밀레종의 4배가 넘는다. 에밀레 종이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에다가 무게가 무려 18.9톤이었던 점에 비겨볼 때, 황룡사 대종의 크기는 가늠이 잘 안 될 정도다. 당나라 숙종조(756-762)에 다시 새 종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길이가 절반 가량 줄어들었다. 숙종조라야 처음 종을 주조한 시점에서 불과 2년 뒤다. 754년 처음 만든 대종이 너무 커서 몇 년 만에 깨졌거나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두 번째로 만든 종은 처음 만든 종의 쇠를 다시 녹여 만들었을 것이다.
이 종은 1238년 몽고의 침입으로 황룡사 탑이 불타면서, 종을 탐낸 원나라 군사들에 의해 바다길로 옮겨지다가 강물에 떨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감은사 앞을 휘돌아 나가는 대종천(大鐘川)의 전설이 그것이다.
이상 살폈듯 신라에서 황룡사가 차지하는 위치는 특별하다. 신궁을 세우려던 용궁의 남쪽에 황룡사를 세우게 되는 것은 그곳이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는 전불시대 가람터였기 때문이었다. 황룡의 출현도 범왕(梵王)의 명을 받들어서 일어난 일이다. 장륙존상의 조성은 아육왕의 1300년 간 염원의 실현이었다. 황룡사 9층탑의 건립은 문수보살과 태화지 신인(神人)의 인도로 가능했다. 신라는 백제의 장인을 초빙해 오면서까지 이 일에 국가적 역량을 쏟아 부었다. 자장은 문수보살로부터 범어로 된 게송을 직접 받아오기까지 했다.
황룡사는 진흥왕대 창건되어 선덕왕대 9층탑이 건립되고, 종은 경덕왕 때 주조되었다. 창건에서 9층탑 건립까지가 92년 걸렸고, 종 주조까지는 200년이 걸렸다. 이후 1238년에 소실되었으니, 686년간 존속했다. 나라에 일이 있을 때마다 백고좌 법회가 열렸고, 벼락이 치고 별이 떨어지고 불이 날 때마다 국가적 사업으로 수리하고 복원했다. 장륙존상과 탑, 그리고 종의 규모는 일찍이 신라에서 보지 못했던 엄청난 규모였다. 9층탑은 경주의 중심부에 우뚝 서서 신라가 부처님의 가호를 받고 있는 불국토임을 증언했다. 삼국 통일의 에너지도 이 탑에서 얻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 『동사강목』에서 정리하고 있는 황룡사 관련 연대별 기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년도 왕력 기사
553 진흥 14 신궁 짓다가 황룡이 나타나 황룡사 창건
566 진흥 27 황룡사 준공. 동륜을 태자로 삼음
574 진흥 35 장률존상 주조
613 진평 35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황룡사에서 백고좌 설치하고 원광 등을 맞아 불경을 강하게 함.
622 진평 44 춘정월 왕이 황룡사에 거둥함.
636 선덕 5 왕이 병이 나자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설치하여 호국삼경을 강설케 하고, 1백인에게 도승(度僧)을 허락함.
643 선덕 12 자장이 불사리 등을 지니고 당에서 귀국. 황룡사에서 7일간 보살계를 강연함.
645 선덕 14 3월 황룡사 9층탑 조성. 김유신이 백제 격파.
673 문무 13 1월 황룡사에 별이 떨어짐.
674 문무 14 7월 큰 바람에 황룡사 불전 전각 일부가 무너짐.
698 효소 7 6월 황룡사탑에 벼락이 침.
718 성덕 17 6월 황룡사탑에 벼락이 침.
720 성덕 19 황룡사탑 보수를 명함.
754 경덕 13 황룡사 종을 주조함.
758 경덕 17 황룡사 9층탑에 벼락이 침.
768 혜공 4 6월 별똥이 황룡사 남쪽에 떨어짐. 지진이 일어나고, 범이 궁중에 들어옴.
868 경문 8 6월 황룡사 탑에 벼락이 침.
871 경문 11 1월 황룡사탑을 개조함. 높이가 22장. 전보다 더 화려해짐. 3년간 공사를 진행함. 872년에 사리함을 넣으면서 찰주본기를 작성함. 876 헌강 2 2월 왕이 황룡사에 가서 백고좌를 베품.
886 헌강 12 황룡사에서 백고좌 베풀고 불경을 강함. 이해 왕이 훙함.
887 진성 1 황룡사에서 백고좌 베풀고 왕이 설법을 들음.
890 진성 4 상원일에 왕이 황룡사에 행행하여 관등(觀燈)함.
924 경애 1 고려 태조7 경애왕이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설치하고 친히 행향(行香)함.
고려 외제석원 창건
947 정종 2 10월 황룡사 9층탑 화재.
953 광종 4 10월 황룡사 9층탑 화재.
1021 현종 12 황룡사 9층탑 수리.
1035 정종 1 황룡사 9층탑에 벼락이 침.
1064 문종 18 황룡사 9층탑 수리.
1238 고종 25 4월 몽고군이 황룡사 9층탑을 불태움.

황룡사, 시로 남은 기억

신라의 한시 속에 황룡사를 노래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고려 당시 화재 이전에 이곳을 찾았던 시인의 기억 속에 황룡사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었을까? 차례로 살펴보겠다. 고려 명종 때 시인 김극기(金克己, 1150?-1209)는 2수의 시를 남겼다. 먼저 볼 것은 「황룡사제영(皇龍寺題詠)」이다. 두 수 모두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항목에 실려 있다.

層梯繚繞欲飛空 층층 사다리 감아 돌자 허공으로 날듯 하니
萬水千山一望通 일만 물과 일천 산이 일망무제 탁 트였네.
身出盧敖登降外 몸은 노오(盧敖)가 오르내리던 밖에서 나왔고
眼呑竪亥去來中 눈은 수해(竪亥)가 오가던 곳을 삼키네.
星槎影落簷前雨 은하수 그림자는 처마 앞 비에 떨어지고
月桂香飄檻下風 월계 향기 난간 아래 바람에 나부낀다.
俯視東都何限戶 동도(東都)의 저 많은 집들을 굽어보니
蜂窠蟻穴轉溟濛 벌집과 개미집인양 외려 아득하구나.

1구는 황룡사 9층탑이 나선형으로 감아 도는 계단이 설치된 구조였음을 말한다. 올라갈수록 탁 틔여오는 시계(視界)에 대뜸 전설 속 인물인 노오(盧敖)와 수해(豎亥)를 떠올렸다. 노오는 진시황이 신선술을 배우려 하자 동해로 도망쳐 숨었다는 은자다. 자신이 현재 있는 곳이 동해 너머임을 이렇게 말했다. 수해는 우(禹)임금의 신하로 북극에서 남극까지 걸어서 거리를 쟀다는 인물이다. 5,6구에서는 탑의 높이가 주는 위압감을 서술했다. 은하수가 손에 닿을 듯, 달 속 계수나무 향기가 느껴지는 듯 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개미집 같고 벌집 같은 많은 집들을 보며 아득해지는 심사를 가누지 못했다.
다음의 장시도 제목이 「황룡사」다.

五侯耽耽宇 귀족들의 저 많은 훌륭한 집은
當夏不受暑 여름에도 더위를 안 받는다네.
炎官恥失威 염관(炎官)이 위엄 잃음 부끄러워서
陋屋煩遷怒 누옥에다 성냄을 옮기었구나.
焦心愁似火 마음 태워 근심은 불과 꼭 같고
爍軆汗如雨 몸을 달궈 땀이 마치 비오듯 한다.
願隨葉靜能 원컨대 섭정능(葉靜能)을 뒤따라 가서
飛入淸虛府 날아가 청허부(淸虛府)로 들어가리라.
身騎靑瑤蟾 푸른 옥 두꺼비를 몸소 타고서
手弄白玉兎 백옥의 토끼와 장난을 치리.
可惜凡骨腥 가석타 비린내 나는 범골이어서
雲霄失歸路 구름 하늘 돌아갈 길 잃어버렸네.
不如叩幽人 차라리 숨어사는 이를 찾아가
霑灑淸軟語 맑은 말씀 적셔짐만 같지 못하리.
曉起理枯藤 새벽 일어 등나무 지팡이 짚고
來尋西社主 서쪽 절 주지 스님 찾아왔다네.
蝸涎繞砌苔 달팽이 침 섬돌 이끼 둘리어 있고
鳥哢歸雲樹 우짖는 새 구름 나무로 돌아가누나.
殿閣誇壯麗 전각은 장려함을 한층 뽐내어
尋空欲飛去 허공 찾아 날아서 가려 하는 듯.
一室曼陀花 방안엔 만다라화 활짝 피어나
繽紛落玉麈 어지러이 옥주(玉麈) 위로 떨어지누나.
坐久黃金鴨 황금 오리 화로 앞에 한참 앉으니
湛烟橫篆縷 맑은 연기 실오리가 비끼었구나.
活火試芳茶 활화로 향기런 차 끓여내오니
花甆浮玉乳 화자잔에 옥유가 둥둥 떠있네.
香甛味尤永 향기롭고 달아서 맛 오래 가니
一啜空百慮 한번 마셔 온갖 근심 사라지누나.
暮色入平林 저문 빛 평림에 스미어 들자
長廊鳴法鼓 장랑에선 법고가 둥둥 울리네.
才微萬象驕 얕은 재주 만상이 저리 뻗대니
把筆吟尤苦 붓 잡고 시 읊기 더욱 괴롭다.

앞쪽에서는 한 여름에도 시원한 귀족들의 집과 찌는 듯 더운 자신의 누옥을 비교하여 세상을 향한 불평한 심사를 드러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신선이 되어 구름 위로 훨훨 날아가고 싶지만, 범골(凡骨)인지라 하늘 가는 길을 잃고 말았다. 대신 그는 황룡사로 찾아가서 마음의 위로를 받을 작정을 한다.
황룡사의 전각은 여전히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방안에는 만다라 장식이 찬란하였다. 황금 오리 화로에선 한 오리 향이 솟는다. 스님은 활화(活火)를 피워 화자잔(花瓷盞)에 유차(乳茶)를 끓여서 내온다. 한 모금 머금어 내리자 앞서의 불평한 기운이 말끔히 가신다. 어느 덧 하루 해가 저물고, 장랑에선 두둥둥 법고가 운다.
이때까지만 해도 황룡사는 크게 퇴락하지 않은 채 그 위용을 잃지 않고 있었던 듯하다. 비슷한 시기 진각국사 혜심(慧諶, 1178-1234)이 직접 황룡사 9층탑에 올라보고 지은 「황룡탑에 올라[登黃龍塔]」란 작품도 있다.

一層看了一層看 한 층을 보고 나서 한 층을 다시 보니
步步登高望漸寛 걸음걸음 높이 올라 전망 점점 틔여지네.
地面坦然平似削 지면은 평탄하여 깎은 듯이 평평한데
殘民破戶不堪觀 피폐한 백성 부서진 집 차마 보지 못하겠네.

역시 한 층 한 층 올라가면서 틔여오는 전망을 말했고, 깎은 듯이 평탄한 주변의 지형을 언급한 것은 오늘날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 너머로 바라뵈는 ‘잔민파호(殘民破戶)’를 보며 가슴 아파했다. 황룡사 둘레의 폐도(廢都) 경주는 점차 전날의 화려함을 잃고 쓸쓸함만 더해 갔던 모양이다.
한편 최자(崔滋, 1188-1260)의 『보한집(補閑集)』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황룡사(皇龍寺) 우화문(雨花門)은 옛 신선의 무리가 창건했다. 풍물이 황량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애상에 빠지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학사 호종단(胡宗旦)이 나라 일을 보러 갔는데 그 문을 지나다가 기둥에 진사 최홍빈이 남긴 시를 보았다. 호종단은 깜짝 놀라 “참으로 보기 드문 재주다.”라고 했다. 돌아가 보고할 때 임금께서 경주에서 있었던 일을 물었다. 마침내 이 시를 아뢰자 놀랍게 생각했다.

황룡사의 문 이름이 우화문(雨花門)이었다는 것은 이 글에서 처음 나온다. 원나라 학사 호종단이 그 문 기둥에서 보았다는 최홍빈의 시는 다음과 같다.

古樹鳴朔吹 고목엔 삭풍이 울부짖고
微波漾殘暉 잔 물결에 일렁이는 석양빛.
徘徊想前事 서성이며 지난 일 생각자니
不覺淚霑衣 나도 몰래 눈물로 젖은 옷깃.

이 시가 『동문선』에는 엉뚱하게 「서성룡사양화문(書星龍寺兩花門)」으로 잘못 적혀있다. 황룡사가 불타 없어지기 훨씬 전에 황룡사로 놀러왔다가 쓴 시다. 그렇다 하더라도 삭풍 부는 석양 무렵, 쓸쓸한 풍경에 막막히 눈물짓고 말았다. 우화문은 우담발화 꽃잎이 비처럼 내리는 문이라는 뜻이다.
고려 말 민사평(閔思平, 1295-1359)은 당시 민간에서 불려지던 노래를 한시로 옮긴 「소악부(小樂府)」 연작을 남겼다. 그 가운데 황룡사와 관련된 것이 한 수 있다.

情人相見意如存 고운 님 보고픈 생각이 나면
須到黃龍佛寺門 황룡사 문 앞으로 달아 오소서.
氷雪容顔雖未覩 빙설 같은 얼굴이야 비록 못 봐도
聲音仿佛尙能聞 방불한 그 목소린 여태 들려요.


이때는 황룡사의 9층탑도 불타고, 전각도 재로 변해 폐허만 남았을 때다. 그래도 절집 문의 자취만은 여전했던 모양이다. 고운 님의 모습이 생각나면 딴 데로 가지 말고 황룡사 문 앞으로 달아 오라고 한 가락이 애틋하다. 빙설처럼 고운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가만히 우화문 앞에 서서 눈을 감으면 고운 님의 목소리가 소곤소곤 들려올 것만 같다.
흥미롭게 조선초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사유록(四遊錄)』에도 「황룡사의 큰 불상을 희롱하다[戲黃龍大像]」란 작품이 실려 있다. 제목 아래 주석에 “다만 구리 불상 하나만 홀로 언덕 위에 서 있다(唯一銅像獨立丘上)”고 적었다.

銅人屹立向丘原 구리 부처 우뚝 서서 언덕을 향했는데
興廢從來欲不言 흥폐는 이제껏 말하지 않으려네.
周主若逢遭壞劫 주나라 임금 만약 괴겁(壞劫)을 만났더면
利他何似勿遭冤 이타(利他)함이 어이 원망 안 입음만 했으랴.

김시습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언덕 위에 구리 부처 하나가 홀로 서 있었다고 했다. 일연은 석가삼존상이 다 녹아버렸고, 모양불만 남았다고 했는데, 그가 본 부처는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 3구의 괴겁(壞劫)은 세계의 파멸을 뜻하는 불교 용어인데, 앞뒤 문맥은 분명치 않다.
『삼국유사』에서 제목에 절 이름이 세 번씩 나오는 것은 황룡사 뿐이다. 뿐만 아니라 이 기록들은 연쇄적 고리로 이어져 하나의 긴 서사를 그려낸다. 황룡사가 창건되어 장륙존상이 모셔지고, 9층탑이 솟고, 대종이 주조되는 과정은 신라불교 흥망성쇠의 자취이기도 하다.
황룡사는 이제 빈터로만 남았다. 애틋한 사랑의 기억도 잡초 속에 뒹군다. 지금도 빈터를 서성이다 눈을 감으면 난데없이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불타버린 9층목탑 땅에서 불쑥 솟고, 법고 소리 두둥둥 울려 퍼질 것만 같다. 감았던 눈을 뜨면, 옛 나무 등걸 사이로 울며 가는 칼바람 소리. 그 바람이 던진 연못 위 잔물결에 기우는 석양빛이 파르르 떤다. 말씀이 꽃비가 되어 내리던 그날은 다 어디로 갔나. 황룡이 금빛 갈기를 세우며 무궁세에 지켜주마 다짐하던 그 언약의 시간들은 이제 어디로 숨어 버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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