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북파공작부대의 어제와 오늘

醉月 2009. 9. 19. 09:30

前 국군정보사령관이 말하는 북파공작부대의 어제와 오늘
“독 오른 살쾡이의 눈빛… 훈련 참관하던 국회의원이 졸도했다”

 황일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북파공작부대. 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게 됐지만, 정작 그 실체를 체계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북파공작원 문제가 첨예한 이슈로 떠올랐던 2000년대 중반 정보사령관으로 재직하며 관련 업무를 총괄했던 오항균 예비역 소장은 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 처참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공개모집과 정식 부사관 임용을 통해 ‘특수부대 중의 특수부대’로 자리매김한 현재의 실체에 이르기까지, 베일에 싸인 정보사 산하 특수임무부대의 모든 것을 들여다보았다.


1978년 서해 해안초소 폭파훈련을 하는 해군 북파공작부대.

1968년 11월의 어느 아침. 자줏빛 단풍으로 물든 산야가 아리도록 곱다. 아직 열여덟의 어린 나이, “동무, 살려달라”고 소리치던 북한군 병사를 향해 무참히 방아쇠를 당기던 손끝의 감촉이 수풀 속에 엎드린 그의 뇌리에서 접착제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북한군 막사 비포장 군사도로 언덕 위로 정치보위부 소대 병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순간이었다. 검은색 승용차에 탑승한 소련 군사고문관의 호위병력. 그는 크레모어 격발기의 안전핀을 풀고, 팀장의 신호에 맞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강원도 평강시 평강군 하진리 계곡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하늘을 찢었다.

 

아비규환 속에서 북한군 군관을 잡아채는 순간, 요란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손등을 스치고 지나가는 방망이 수류탄의 파편. 피투성이가 된 손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는 동안 혀는 바싹 말라 입천장에 달라붙는다.

10시간 뒤, 그는 죽음의 고비를 넘고 넘어 우리군 GOP 통문에 다다랐다. 미리 당도해 있던 동료 팀원이 살아온 그를 보고 눈물을 쏟는다. ‘다시는 이런 목숨 거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 가슴속으로 되뇌임이 이어지지만, 쉽게 현실이 될 수 없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부산이 고향인 홍남형(가명·60)씨가 인천에서 ‘물색관’에게 입대를 권유받은 것은 1966년 3월,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1968년 11월의 침투임무는 그가 수행한 마지막 작전이었다. 그러나 수백만 원의 돈을 주겠다는 애초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 30여 년 세월 동안, 그는 자신이 비무장지대 북방한계선을 넘나든 인물임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함께 작전하다 죽은 동료의 누이를 알고 있었지만,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명령에 끝내 전사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한국군의 모든 부대는 전시를 ‘대비’하는 부대다. 현재 전쟁을 치르고 있지 않은 국가의 모든 부대가 마찬가지다. 유사시를 대비해 계획하고, 준비하며, 훈련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공식적으로는 전쟁이 멈춘 이 나라에도 끊임없이 휴전선을 넘나들어야 하는 임무가 있었고, 이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가 있었다. 다만 비공식적이었으므로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북파공작원 문제를 수면으로 끌어올린 김성호 전 민주당 의원이 관련 책의 제목을 ‘우리가 지운 얼굴’이라고 붙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2009년 현재, 북파공작부대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비밀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났다. 1999년부터 쏟아져 나온 전직 부대원 및 그 유가족의 증언은 이들의 존재와 역사적인 실체에 관해 다양한 정보를 세상 밖으로 꺼내놓았다. 2004년 영화 ‘실미도’로 대중의 관심은 폭발했고, 정부 역시 같은 해 관련법령을 제정하고 이들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총 1만3000명을 양성했고 그 가운데 무려 7726명이 임무수행이나 훈련과정에서 사망했다는 공식 보고였다. ‘군사기밀’이라는 네 글자에 가려 있던,

베트남전보다 많은 사망자의 사연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퇴역 부대원들의 기억에 의존한 북파공작부대 이야기는 지나치게 파편적이거나 부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기 일쑤였다.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정부가 운용해온 대북 첩보부대의 정확한 얼개와 흐름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누구나 북파공작을 알지만 그 정확한 내역은 여전히 안개에 싸여 있는 형국이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국군정보사령관을 지낸 오항균 예비역 육군소장(육사 29기)은 이를 체계 있게 들여다본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북파공작원 문제가 양지로 쏟아져 나오던 시점에서 정보사령관으로 재직했던 그는, 퇴역자나 유가족들과 만나 실태를 듣고, 정보사가 보관하고 있는 관련 기록을 뒤져가며 작전내용과 종사자, 전사자를 확인하는 한편, 보상 법률에 대한 시행령을 입안하는 작업까지 진행했다. 한마디로 북파공작 임무의 어제와 오늘을 꿰뚫고 있는 셈이다.

오 전 사령관의 회고와 경험담을 바탕으로 각 시기 전역자들의 증언과 자료를 취합해 북파공작부대의 극적인 역사와 그 맥을 잇는 정보사 특수임무 부대의 현재를 하나씩 정리했다.

 

“손에 쥔 건 자폭용 수류탄 뿐”

북파공작의 시작은 광복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법적으로는 1948년 건국 직후 창설된 육군본부 정보국을 연원으로 보지만, 이전부터 38선을 넘나들던 민간유격대나 미 극동군사령부 소속 첩보부대 KLO(Korea Liaison Office)까지 그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만만찮다.

이후 창설된 육해공군 첩보부대는 6·25전쟁의 참화 속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그 가운데는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한 이들도 있었지만, 민간인 신분으로 북한 지역에 뛰어든 평범한 젊은이들도 있었다.

열여덟 여학생의 몸으로 첩보작전에 참여했던 김부전(74)씨의 회고다.

   

오항균 전 정보사령관.

“여성계 지도자들의 독려에 따라 어린 여학생들이 첩보임무에 자원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갈래머리를 잘라 파마를 하고 는 배를 타고 북한 후방지역으로 투입됐다. 원래는 백마산의 유격단체를 접촉하는 임무를 받았지만 이미 사실상 해체된 상태였고, 대신 인근 지역 지하에 은폐돼있던 대형 비행장 시설을 확인해 보고하는 등 다양한 작전에 참여했다. 무장이라고는 붙잡힐 경우 자폭할 수 있도록 쥐여준 수류탄 하나가 전부였다.”

동해와 서해, 육상과 공중으로 나뉜 이들은 중국군의 참전 사실 확인, 북한군 고위간부 납치, 주요 군사시설 파괴 같은 임무를 수행했다. 전쟁을 전후해 이들 첩보부대는 육군의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 해군의 UDU(Underwater Demolition Unit), 공군의 AISU(Airforce Intelligence Service Unit)로 체제를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목장, 물색관, 왕사장

전쟁이 끝난 뒤 북파공작은 ‘무장공비’로 불렸던 북측의 침투에 대응하는 보복 공격 형태로 이뤄졌다. 쉽게 말해 북파부대는 한국 측의 무장공작원이었던 셈. 차이가 있다면 북한군의 무장공작이 후방침투 성격을 띠고 있었던 데 비해, 이들의 활동은 주로 휴전선 인근에 있는 북한군 연대·사단본부 등을 파괴하는 5~10명 단위의 임무가 많았다는 점이다.

이 시기부터 각 군 첩보부대는 안전가옥 형태의 훈련소를 여러 지역에 설치해 운영했다. 육군 HID의 경우 흔히 ‘목장’으로 불린 청계산 훈련소를 비롯해, 집 한 채와 텃밭이 전부인 안가가 인천, 논산, 춘천, 전곡, 인제 등 수십 개에 달했다. 해당 지역의 이름을 따서 ‘춘천대’ 등으로 불렸다.

대원이 생포되는 경우 전체 부대의 규모를 발설할 수 없도록 훈련소끼리도 거의 교류 없이 지냈다.

 

문제는 이들 중 상당수가 정식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이른바 ‘민수’)이었다는 점이다. 군인을 투입했다가 생포될 경우 정전협정 위반으로 국제법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되므로, 민간인들을 데려다 쓴 것. 내부적으로 군인 신분을 부여한 경우에도 군번이나 계급을 알려주지 않는 일이 많았다.

흔히 ‘물색관’으로 불린 첩보부대 관계자들은 기차역 같은 번화가에서 ‘몸이 좋은 젊은이’를 골라 “공무원 자리를 보장해준다”거나 “집을 몇 채 살 수 있는 큰 돈을 주겠다”며 섭외하는 게 당시의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강도 높은 훈련과 보안 철저준수를 강조한 폐쇄성의 폐해도 컸다. 훈련 중에 사망하거나 북한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은 경우에도 유가족에게 제대로 통보되지 않는 일이 잦았다. 심지어 훈련 중에 중대범죄가 발생하면 자체적으로 즉결처분해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도 많았다. 북파공작부대가 인권유린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한 배경이었다.

 

이 무렵의 한 전역자는 “육신이 워낙 고단했기 때문에 일단 실컷 먹고 푹 자는 게 소원이었다”고 회고했다. 언제 전역하는지도 몰랐다가 ‘왕사장’으로 불리던 HID 대장 앞에 가서 ‘전역 후 보안엄수 서약서’를 쓰는 순간에야 비로소 알게 됐다는 것. 집 몇 채를 살수 있는 거금을 준다는 약속은 깨끗이 사라졌지만, 부대를 떠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는 이야기다.

 

수도꼭지를 잠가도…

앞서 말했듯 북한군 전방 군사시설 공격이 주를 이뤘던 북파공작은, 그러나 1968년 1·21사태로 급변한다. 북한 무장공작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휴전선을 넘어 서울까지 진출한 이 사건은 정권 핵심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각 군에 기존의 첩보부대와는 별도로 ‘후방에 침투해 김일성 주석 등 수뇌부 암살을 시도할’ 새로운 형태의 북파공작 기획을 지시한다. 이와 함께 육군 HID가 AIU (Army Intelligence Unit)로 개편되어 ‘설악개발단’이라는 위장명칭을 사용하는 등 편제가 정규화됐고, 해병대도 별도의 첩보부대를 창설했다(이 부대는 1975년 해군 첩보부대로 통합된다).

 

오 전 사령관에 따르면, 조천성 HID대장(당시 준장)이 훈련을 책임졌던 ‘새로운 형태의 부대’는 형식상 군별로 하나씩 만들어졌다. 1968년 4월 창설돼 ‘684부대’로 불렸던 실미도 부대는 공군 소속이었고, 선갑도 부대는 육군 소속, 장봉도 부대는 해군 소속이었다. 침투 용이성을 위해 북한 지역과 매우 가까운 서해 섬에 하나씩 자리한 형국이었다.

 

각 부대는 김신조 부대와 똑같이 31명으로 구성되어 총 93명에 달했다. 실미도 부대 대원들은 영화 줄거리와는 달리 전과자 출신이 아니었고, 북파공작부대를 통틀어 선갑도 부대만이 교도소에서 사면을 약속받고 차출된 이들로 구성됐다. 이렇듯 각 군이 비슷한 성격의 부대를 중복 편성한 데는 ‘충성경쟁’이 한몫했다는 게 같은 시기 AIU에 참여했던 특수임무수행자회 김희수 회장의 평가다.

 

그러나 1971년 8월 실미도 부대원들이 섬을 빠져나와 청와대로 향하던 중 서울 대방동에서 자폭하자, 놀란 중앙정보부와 각 군 수뇌부는 나머지 두 부대도 바로 해체했다. 그 과정에서 부대원들 일부가 ‘보안유지’를 위해 살해당하는 끔찍한 일도 벌어졌다. 여기에 이듬해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됨에 따라 한국군의 북파공작 수행은 공식 중단을 맞게 된다. 그러나 퇴역자들 사이에서는 1990년대 초반까지 첩보수집이나 북한군 전방부대 공격을 위해 휴전선을 넘었다는 경험담이 적지 않다. 오 전 사령관은 “수도꼭지를 잠가도 단번에 물이 완전히 끊기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고 에둘러 표현했다.

 

그렇다 해도 1972년을 기점으로 북파임무의 횟수가 크게 줄어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군 내부에서도 ‘훈련에만 집중하고 있는’ 이들 부대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비판이 거셌다. 이에 따라 1990년 국방부는 정보당국과의 협의를 거쳐 이들 부대를 배대웅 당시 중장이 사령관을 맡고 있던 국군정보사령부 산하로 통합한다. 물색관 제도가 사라지고 대신 알음알이로 지원병을 받는 형식으로 모집형태가 바뀐 것이나, 곳곳에 흩어져 있던 안가가 하나 둘씩 폐쇄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특수임무를 수행할 첩보부대의 규모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지만, 한국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됨에 따라 거꾸로 이들의 존재 자체는 숨길 수 없게 돼버렸다. 1999년 말 전직 북파공작원들과 그 유족들이 명예회복과 인권유린에 대한 진상규명, 보상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것. 여기에 김성호 의원 등 정치권의 실체공개가 이어지면서 2002년 정부는 관련 법률을 개정해 임시방편으로 위로보상금을 지급하기에 이르지만, 정부의 공식적인 인정과 적절한 예우를 요구하는 관련자들의 시위는 계속됐다. 오 전 사령관의 설명이다.

 

1974년 해병대 첩보부대의 ‘지옥주’기간 훈련.

“한밤중에 국방부 장관 공관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는 소식에 뛰어나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국가정보원이나 정보사는 물론 내 집 앞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군 입장에서는 보안문제 때문에라도 이들을 공식 인정하기란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나로서는 내가 지휘하고 있는 부대의 선배에 해당하는 이들을 피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정보사령관실에 들어와 뜻을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결국 가려져 있던 이들의 실체를 양지로 끌어내는 마지막 결정은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이뤄졌다. 2003년 국방부는 국회에서 북파공작원 양성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2004년에는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당초 군에서 우려했던 보안 누설이나 국가신인도 문제는 생각만큼 파장이 크지 않았다.

 

2007년에는 특수임무수행자들의 단체 설립을 규정하는 법률 작업도 마무리됐다. 퇴역한 북파공작원들이 지역별, 부대별로 단체를 만들어 혼선을 빚던 상황은 이 법에 따라 지난해 1월 창립된 특수임무수행자회가 국가보훈처의 인정을 받으면서 마무리됐다. 그 밖의 단체로는 각 군 첩보부대 장교 출신으로 이뤄진 정보동우회와 특수임무수행자유족동지회가 있다.

김희수 특수임무수행자회 회장은 “실체가 가려져 있던 시절에는 전과자 출신으로 오해도 받았고, 명예회복 과정에서는 ‘가스통 시위’ 같은 과격행동으로 어두운 인상도 주었지만, 이제 공법단체가 된 만큼 그에 걸맞은 활동을 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 1월 법 개정으로 길이 열린 수익사업도 국민의 원성을 살 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자긍심이 감금보다 낫다”

앞서 설명한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은 그 대상자를 ‘1948년 8월15일(건국) 이후 2002년 12월31일까지 군 첩보부대에 소속되어 특수임무를 하였거나 이와 관련한 교육훈련을 받은 자’로 특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2003년 이후에는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부대가 더 이상 없다는 말일까. 이들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국방부 관계자들 중에서도 정보사 산하 특수임무부대는 폐지된 것으로 생각하는 이가 적지 않지만, 이들은 분명 여전히 실재한다. 인원이 이전에 비해 크게 줄긴 했어도, 2003년을 기점으로 부대의 존재는 공식화되었고 일정부분 공개됐다. 뒤집어 말해 그러한 부대와 인원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더 이상 군사보안의 영역이 아니다. 다만 전에는 인권유린과 보상 미비 문제가 있었지만, 2003년부터는 특수임무에 종사할 인원을 공개 모집하고 위험한 훈련에 상응하는 수당도 관련 법령이 정한 대로 지급하고 있기 때문에 보상 대상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2003년 이후 정보사는 매년 자체 홈페이지와 각 지역 병무청에 게시하고 있는 ‘특수정보부사관’ 모집공고를 통해 부대원을 모집하고 있다. 군 관계자들이 젊은이들을 ‘물색’하고 다니던 과거의 방식을 벗어나 일종의 ‘홍보’ 개념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 인터넷을 검색하면 누구나 각 지역 정보사 특수부사관 모병 담당관의 연락처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공개모집을 결정했던 오 전 사령관은 “예전처럼 휴가도 못 가게 막는다고 해서 보안이 유지되는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어차피 이들도 언젠가는 제대할 것 아닌가.

오히려 공개적으로 모집하고 충분한 대우를 해줌으로써 임무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는 게 훨씬 낫다고 봤다”고 말했다.

 

별도편제, 별도예산

현재의 정보사 특수임무부대는 19세에서 24세 사이의 미혼 남성만이 입대할 수 있다. 학력은 고졸 이상이지만 실제로는 2년제 대학 졸업자가 많다. 날카로운 민첩성이 생명인 임무 특성상 키가 너무 큰 사람(185cm 이상)은 아예 지원자격을 주지 않고, 병무청 신체검사 1등급 판정자만 입대가 가능하다.

정보사의 모집공고는 태권도 등 무술특기자와 폭약취급, 스쿠버다이빙, 사진 등의 기술보유자를 우대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가장 까다로운 것은 역시 체력검정과 신원조회. 윗몸일으키기를 30초에 35회 이상, 40kg짜리 모래주머니를 메고 50m를 12초 이내에 통과해야 만점을 받는다. 시력이 0.8이 안 돼 안경을 쓴 사람은 아예 시험도 볼 수 없다. 고교 생활기록부까지 제출받는 깐깐한 인성평가와 신원조회를 통과하고 나면 합격통보 후 이틀 뒤에 곧바로 입대한다.

 

총 복무기간은 51개월. 이 가운데 3개월은 기초교육기간이다. 강원도 모처에서 진행되는 기초교육기간 중에는 포기하고 귀향을 요구해도 막지 않을뿐더러 탈영도 아니라는 것이 오 전 사령관의 설명. 이를 통과하고 나면 비로소 정보사령부 소속 하사로 임관하고, 다시 2년을 복무하면 중사로 승진한다. 영내생활이 의무화되어 있지만 전과는 달리 1년에 7일의 공식휴가가 주어지고 경조사 등 필요한 경우에는 청원휴가도 허락된다. 다른 부대처럼 정기 외출·외박도 있다.

 

부대 안에서만 생활하므로 4년간 주어지는 월급과 각종 수당을 꾸준히 모으면 전역 무렵 1억4000만원을 수령할 수 있다고 정보사 측은 설명한다. 전역 후에는 경찰특공대 등 관련분야에 진출할 수 있도록 사령부 차원의 지원도 이뤄지고 있다. 해당 채용시험에서 사용하는 권총을 구해 전역이 임박한 대원들의 사격연습에 활용하기도 한다고.

 

이들의 소속은 육상과 해상으로 나뉘는 임무에 따라 육군과 해군으로 구분된다. 모집부터 분리해서 뽑는 식이지만, 각 군 정원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보사는 이들의 침투수송 임무만을 전담하는 수단을 각 군 편제와는 별도로 확보해 운용하고 있다. 예산도 국방예산과는 별도의 경로를 통해 책정, 집행된다. 이전에 비해 인원을 크게 줄였기 때문에 전국의 안가에서 소규모로 훈련하던 이전의 관행을 폐지하고 동해와 서해의 주요 훈련장에서 함께 생활한다.

 

제압술 아닌 ‘살인술’

이들의 신분은 대한민국 국군의 정식 부사관이다. 문화도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그렇지만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상상하기 쉽지 않은 수준의 보안의식과 강도 높은 훈련이다.

이들의 복장에는 계급장이 없다. 한국군 전투복은 지급되지 않는다. 오히려 훈련과정에서 북한군 위장복장을 착용하는 경우는 있다. 자신의 직속상관이 누구인지만 알 뿐, 부대의 전체 구성형태나 지휘체계에 관한 상세정보는 알려주지 않는다. 호칭 역시 군 계급 대신 별명을 지어 부르는 식. 오 전 사령관은 “나 역시 이들을 방문할 때는 군복을 입지 않았고, 사령관이라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다. ‘서울에서 온 손님’이었을 뿐”이라고 전했다.

 

이들이 사용하는 개인화기 역시 북한군이 주로 사용하는 체코제 수입품이다. 심지어는 담배나 소형 가전제품 등 개인물품도 표식이 없는 것으로 특수 제작하거나 상표를 제거한다. 부식 등 보급품도 외부에서 직접 ‘사제품’을 구매해 조달한다. 이들의 훈련소에 군 시설임을 알 수 있는 표식이 없음은 불문가지다.

 

오 전 사령관은 기초훈련을 마치고 나면 이들 부대원들이 “재빠른 행동으로 상대의 급소를 노리는 자그마한 살쾡이 같은 인상”을 갖게 되더라고 표현했다. 다른 특수부대가 상대를 쓰러뜨리는 제압술을 훈련한다면, 이들은 ‘살인술’을 익힌다는 것. 도검류도 통상 사용하는 단검 대신 특수한 형태를 사용한다. 모집공고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이들에 대한 훈련은 산악구보를 기본으로 고공강하, 스킨스쿠버, 스키, 잠수 등 침투능력 극대화가 주종을 차지한다. 여기에 독도(讀圖)나 지형지물 익히기, 폭파, 사격, 고립지역에서 야생 동식물로 식량을 조달하는 생식 등이 포함된다.

 

오 전 사령관은 “그쪽에서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특전사보다 훨씬 강도 높은 훈련이 진행된다”고 평했다. 산악구보만 해도 부대원들이 일렬로 줄지어 이동하는 통상의 행군이 아니라, 한쪽 산봉우리에서 다른 산봉우리까지 정해진 코스 없이 무조건 짧은 시간 내에 도착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 훈련과정이 워낙 강도 높다보니 실족 등으로 사상자가 생기는 부작용 역시 피하기 어렵다. 다음은 오 전 사령관이 전하는 에피소드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의원들을 공식 초청해 이들의 훈련을 참관케 한 적이 있다. 벽돌 깨기 같은 보여주기용 시범은 하지 않는다. 진짜 흉기를 손에 쥐고 정말 죽고 죽이는 것처럼 처참한 비명이 오가는 실전훈련만 할 뿐이다. 영화에서는 간단하고 멋있게 그려지지만, 실제 상황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처참한 광경이 이어지자 의원 대부분이 고개를 돌렸고, 한 의원은 쇼크로 정신이 혼미해져 약까지 먹어야 했다. 잠시 훈련을 참관하는 것만으로도 그 정도다.”

 

최후를 위한 마지막 카드

2003년 공개모집을 전후해 정부 안에서는 이 부대를 존속시킬 필요가 있는지 격론이 벌어진 바 있다. 근래 들어 이들에게 북한지역 침투라는 본연의 임무가 실제로 주어진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부대를 별도로 구성하고 엄중한 보안에 부친 것은 상시적으로 북파공작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는데, 임무가 거의 없는데다 부대의 존재마저 공개된 상황이고 보니 다른 특수 부대와 통합해야 한다는 견해가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결정은 ‘계속 유지’였다는 후문. 당장 북파공작을 벌일 일이 없다 해도 전시든 평시든 극단적인 상황이 왔을 때 활용할 ‘일당백의 정예요원’이 필요하다는 결론이었다고 한다. 특히 부대 창설 당시부터 구성과 운영에 상당부분 관련이 있는 정보당국의 견해가 완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공개할 수는 없지만 현재 이들에게는 전시에 수행할 임무가 명확히 설정돼 있고, 이를 준비하기 위한 훈련도 정교하게 실시되고 있다. 오 전 사령관의 말이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나 현재의 남북관계를 감안할 때, 북한이 무장공비를 내려 보내듯 우리도 북측 후방에 침투해 휘젓고 다닐 수는 없다. 이 부대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언젠가는 사라질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든 최후의 순간에 투입할 비장의 카드 한 장은 남겨두는 법이다. 특수임무 가운데서도 특수한 임무라고 할까. 극단적인 상황에 미리 대비하는 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한때의 어두운 과거만으로 이 부대의 존재 이유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