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효주
‘초밥왕’ 안효주(51)씨는 1958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1978년 일식 요리사로 입문했다. 1985년에는 호텔신라에 입사, 일식주방장을 거쳐 일식당 총책임자 자리에 올랐다. 1998년엔 일식조리 기능장 자격증을 취득했다. 서울보건대학 전통조리과와 초당대학교 조리학과를 졸업했고, 경기대 서비스경영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인기 만화 ‘미스터 초밥왕’ 한국편에 등장해 더욱 유명해졌다. 현재 초밥 전문점 ‘스시 효’ 강남, 서초, 구로, 광화문점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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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hoto 유창우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 한 손에 350개의 밥알을 정확하게 쥐는 ‘초밥왕’ 안효주씨는 인터뷰 약속시간보다 1시간 먼저 나타났다. 매일 남들보다 1시간 이상 먼저 출근해서 주방을 정리하고 재료를 준비해왔던 몸에 밴 습관이 이날도 그대로 드러났다. 날 생선을 다루는 일식(日食) 주방의 생명은 청결과 위생이라며 그걸 위해 30여년간 ‘스포츠 머리’를 고집하면서 ‘맛의 예술’에 장인의 향기와 오로지 ‘칼로 승부해온’ 검객의 냄새가 함께 풍겼다. 지난 1월 19일 안씨는 “저 같은 사람이 인터뷰 대상이 되겠습니까”라면서 본사 주필 서재에 들어섰다.
[강천석] 요즘처럼 불안한 시대에 안 사장은 평생 일을 할 수 있는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 있어서 좋겠습니다. 스시집 이름이 ‘효(孝)’란 게 특이한데 ‘스시 효’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었습니까.
[안효주] 식당 간판을 의미 있는 이름으로 하고 싶었습니다.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제 이름에 들어있는 효(孝)자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직접 초밥을 만들고 있는 청담점은 5개의 방이 있는데 이름이 ‘효’ ‘삼’ ‘강’ ‘오’ ‘륜’입니다. 흔히 일본 식당에서 쓰이는 매, 란, 국, 죽 보다는 더 신선하다고들 합니다.
[강] ‘효를 잘하는 사람은 일도 잘한다’라는 생각에 사람을 채용할 때도 효심을 살펴본다고 들었습니다. 부모님 이야기를 해주시겠습니까.
[안] 돌아가신 아버지는 제 정신적 기둥이십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분이셨죠. 많이 배우지는 못한 분으로 면사무소에서 서류 등을 전달하는 일을 하셨어요. 어릴 땐 그런 사실을 숨기고도 싶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정말 훌륭하신 어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위를 뚫겠다고 정신집중을 하면 뚫린다는 강한 신념을 제게 물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 제가 요리 대접을 해드린 건 딱 한 번뿐이었어요.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버지 고향이 내륙지방인 전북 남원이라 회나 초밥 같은 날 것을 못 드셨어요. 그래서 스시집 효를 오픈한 날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가장 좋은 도미를 구해 조림을 해드렸습니다. 그 얼마 후 돌아가셔서 그게 아버지께 해드린 처음이자 마지막 요리가 돼버렸습니다.
[강] 안 사장이 신라호텔에 몸담고 있던 시절 지금처럼 IMF로 인해 나라 전체가 어려웠습니다. 당시 회사 중역이 따로 불러서 보자고 했다는데 혹시 구조조정되는 거 아니냐는 두려움은 없었습니까.
[안] 저는 쉬는 시간에도 남들처럼 드러눕거나 장기를 두거나 한 적이 없습니다. 휴식시간에도 요리 연습을 하거나 식당 바닥을 청소했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는지 정말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저를 승진시키려는 면담이었습니다. 제가 차장이고 저의 요리 스승이자 인생 스승인 이보경 선생님이 부장으로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역께서 “이 부장 없이도 잘할 수 있겠지?”라고 물으시더라고요. 저는 스승에 대한 도리도 생각해서 “아직 배울 것도 많아서 혼자 하긴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강] 선배를 그렇게 모시는 안 사장은 후배들에겐 어떤 선배입니까.
[안]신라호텔을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저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안 선배가 있을 때가 좋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저는 후배들에게 엄한 편입니다. 후배 칼이 녹슬어 있으면 주방 식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쓰레기통에 버릴 정도였지요. 그러나 “그냥 따라서 해”라고 하지 않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와 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래야 빨리 이해를 하는 법이지요.일부 선배들이 기술을 감추고 후배들에게 안 가르쳐주는 것이 생각나서 ‘이것이 일본 요리다’라는 책도 내서 모든 기술을 공개했습니다. 저보다 더 나은 기술을 개발하라는 의미를 담은 거죠.
[강] 초밥의 고향인 일본에도 몇 차례 연수를 다녀오셨는데 어떤 점을 배워왔습니까.
[안] 신라호텔과 기술 협약을 맺고 있던 일본 오쿠라호텔에 연수를 갔습니다. 보통 연수를 가면 몇 가지 기술을 익혀오는데 저는 그곳에서 무엇보다 일본 요리사들이 요리를 대하는 마음을 읽고 돌아왔습니다. 일본 요리사들은 식자재를 다루는 자세부터 다릅니다. 생선을 다룰 때에도 신주 모시듯 아기 다루듯 정성을 가득 담습니다. 생선 껍질도 한국에서처럼 확 벗기지 않고 정성스럽게 해요. 또 칼질에는 혼이 들어가지요. 음식의 재료를 정성껏 대하면 그 재료도 자신의 맛을 그대로 드러내는 걸로 보답합니다. 우리는 수산시장에서도 생선을 마구 던져 생선에 멍이 들고 상처가 생겨요. 그래서는 생선이 제 맛을 못 냅니다.
[강] 요리사가 되기 전에 권투를 했다는데 권투를 접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안] 권투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시작했어요. 작은 형님이 권투를 했고 방학 때마다 집으로 글러브를 가져와 가르쳐 주었습니다. 전국학생복싱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까지 했죠. 남원농고를 졸업하고는 큰물에서 놀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상경했습니다. 시골 이웃집 살던 동네 형이 일하던 일본 식당에서 그릇을 닦아주며 숙식을 해결하고 명보극장 뒤 한국체육관에 나가 권투 연습을 했습니다. 하루에 보통 냄비 400개 정도를 닦았습니다. 그러다가 프로 데뷔전을 갖게 됐는데 몇 십 년 만에 온 추위에다 식당일로 과로를 해 감기에 걸려 프로 데뷔전에 출전을 못했습니다. 만일 프로 데뷔를 했다면 제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고선 군대에 갔습니다.
[강] 권투선수였다는 게 요리에 무슨 도움이 되던가요.
[안] 권투나 요리는 모두 반사신경이 좋아야 합니다. 초밥은 더욱 그렇죠. 그리고 체력입니다. 하루 10시간에서 12시간을 서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하체 힘이 좋아야 하거든요.
[강] 제대 후 요리로 인생 방향을 틀고 요리학원을 졸업한 다음 첫 취직처인 식당에서 안 사장 인생에 큰 변화를 준 이보경 스승을 만났는데, 그 분 첫인상은 어땠나요. 20여년간을 사제지간으로 지내시면서 단둘이 술을 마셔본 횟수가 열 번도 안 된다고 하대요. 이보경 스승은 안 사장의 어떤 면을 보고 좋게 판단하셨을까요.
[안] ‘일본관’이라는 식당에서 스승님을 만났습니다. 당시 저는 바닥이었고 스승님은 요리사들 중 최고인 실장님이었습니다. 매우 위엄 있고 말씀이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경우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다른 선배들을 걸레자루로 때리기도 했는데 제겐 욕 한 번, 매 한 번 드신 적이 없었습니다. 눈빛으로 말을 하셨죠. 그래도 가까이 하기엔 어려운 분이었습니다. 제가 남보다 한 시간 두 시간 먼저 출근해 준비를 하고 잘난 체 안 하면서 예의가 바르다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저는 아는 이야기가 나와도 아는 체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스타일이거든요. 스승님께서 그런 점을 잘 봐주신 것 같습니다. 스승님을 보조할 때도 칼이면 칼, 도마면 도마를 알아서 제때에 준비하고 편하게 해드린 점을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제가 특별히 해드린 거라곤 전날 약주를 하신 것 같으면 라면을 끓여드린 게 전부지요
[강]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신라호텔에 들어가 14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최고 주방장이 됐습니다. 특별한 비결이 있었나요.
[안] 신라호텔에 들어간 것은 이보경 스승께서 신라호텔에서 사람을 구한다더라 하시면서 제 추천장을 써주셨습니다. 스승님이 그 전에 신라호텔에 계셨거든요. 저는 항상 새로운 곳에 가면 맨 밑바닥부터 시작했습니다. 바닥을 쓸고 닦는 일부터 출발했지요. 그리고 늘 그래왔듯이 남들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해서 그날 필요한 것을 준비했죠. 그리고 틈 나면 무를 사과 깎듯 끝까지 깎는 연습도 하고 손으로 초밥 쥐는 연습을 혼자서 했습니다. 선배들 가운데 그걸 못마땅해 하는 분들이 있었지요. 일식 요리사에게는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일본어도 공부하다 버스 종점까지 가버렸던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요즘 한 달에 한 번은 일본에 장보러 가는데 혼자도 잘 돌아다닙니다.
[강] 일식 요리 기능장 시험에 한식 시험도 봐야 한다는 게 조금 이상하더군요.
[안]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식도 알아야 한다는 것 같아요. 기능장 자격증이 있다고 해서 별다른 혜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 자신을 항상 업그레이드 하고 싶었습니다. 매년 새로운 이력을 추가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게 된 거고요. 늘 발전이 있어야 사람다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강] 신라호텔 근무시절 ‘자랑스러운 삼성인상’ 서비스 부문에 뽑힌 적이 있더군요. 고객의 직업, 가족사항, 음식 취향 등 고객에 관한 신상정보를 노트 2권에 가득 기록하고 암기했다고 들었습니다.
[안] 신라호텔 재직 때 잔심부름 하던 밑바닥 시절부터 손님에 관해 기록을 하곤 했습니다. 그날 오신 손님은 누구이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부인이나 아이들은 또 어떤 요리를 좋아하는지 등을 기록하고 암기했어요. 당시 아버지를 따라왔던 아이들이 지금은 대부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업 대표가 됐죠.
[강] 45세 때 신라호텔을 나와 ‘스시 효’를 개업했습니다. 어떻게 식당을 열게 됐습니까.
[안] 대부분의 직장인들에게는 ‘이제 내 일을 해야 할 때가 왔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옵니다. 박수 쳐주는 사람이 있을 때 명예롭게 떠나가는 게 축복이라는 생각도 더해지고요. 초고속 승진을 했는데 그때부터 10년 이상 그 자리에 있으면 밑의 후배들이 어떤 눈으로 보겠습니까. 늦으면 더 어려워질 것 같기도 했고요.
[강] 신라호텔 재직 시절 잊을 수 없는 손님을 든다면 어느 분입니까.
[안] 10년 전 최고급 재료로 회덮밥을 해달라고 주문하셨던 손님입니다. 가장 싱싱한 재료로 만들어 드렸더니 음식값이 9만원이 나왔어요. 주방장을 나오라고 하시더니 너무 비싸다며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려 하기에 기둥 뒤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그 분과는 더 가까워졌습니다. 또 일본에서 먹은 김밥이 맛있었다고 싸가지고 오셔서 연구를 해보라고 제게 전해주신 손님도 기억에 남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 이미 상한 것이었지만 재료를 분해해서 똑같이 만들어 드렸더니 일본 것보다 더 맛있다면서 브랜드화 해보라고 하시더군요. 그게 바로 지금의 ‘유엔마끼’라는 대형김밥입니다.
[강] 신라호텔을 그만두고 ‘스시 효’를 열 때 두말 없이 창업자금을 빌려준 김정완 매일유업 부회장과의 일화가 있더군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요.
[안] 김 부회장님은 어릴 적부터 아버님과 함께 신라호텔 일식당에 오셨던 분입니다. 저를 보면 항상 “우리 스시집 함께 해볼까?”라고 하셨죠. 그래서 다른 호텔에 있는 능력 있는 친구를 소개시켜 드리겠다고 했더니 ‘돈 벌려는 것도 아닌데 하면 안 차장과 하고 아니면 안 한다’고 하셨습니다. 신라호텔을 그만두려고 결정은 했는데 막상 제겐 식당 열 돈이 없었습니다. 고민을 하다가 찾아 뵈었더니 은행계좌번호만 적어두고 가라고 하시더군요. 벌어서 갚으라면서요. 그런데 그 돈만으로 안 되자 김 부회장께서 추가자금을 만들 테니 그럼 동업을 하자고 그러시더라고요.- [강] 계약서도 없이 언약만으로 이만큼 사업을 하신 걸 보니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꽉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안] 김 부회장님은 그릇이 큰 분이십니다. 저에 관해서도 잘 파악하고 계시고요. 제가 간섭을 받으면 더 하기 싫어하는 고약한 성격을 가졌는데 그런 저를 잘 아시고 전혀 간섭을 하지 않으시죠. 계약서 없이 신뢰 하나만으로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는 것도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강] 안 사장은 지금도 매일 새벽 노량진 수산시장에 나가 재료를 구입한다고 들었습니다.
[안] 한식은 양념이 맛을 결정하고 일식은 식재료가 맛을 좌우합니다. 따라서 좋은 재료를 구별하는 안목이 중요한 법이지요. 쌀은 해남에서 나온 것을 사용하고 소금은 전북 고창의 염전 집안에서 그분들이 사용하려고 아껴놓은 걸 구해와서 사용해왔고 지금은 5년 후 쓸 소금을 강화에서 구해놓고 있습니다.고추냉이(와사비)는 일본 나가노현에서 나는 것이 우수합니다. 수온이 항상 섭씨 13도 정도 돼야 하고 오염되면 자라지 않고 모래밭이어햐 하는 등 조건이 까다롭지요. 매달 일본에 가서 장을 봐오기도 합니다.
[강] 요리하는 사람에게 칼이란 검객의 칼과도 같다고 하던데 칼에 얽힌 이야기도 있나요.
[안] 요리사와 칼의 관계는 검객과 칼의 관계와 같습니다. 요리사 신체의 일부이기도 하죠. 그런데 제게 식재료를 공급해 주시던 일본인에게 선물로 받은 칼을 잃어버린 적이 있어요. 보검처럼 빛나는 칼이었는데 선물로 받고 돌아오는 길에 택시 운전사가 거스름돈이 없다고 해서 근처 약국에서 잔돈을 바꿔서 택시비를 주고는 칼을 택시에 두고 내리고 말았습니다. 방송에 칼을 찾아달라는 이야기도 냈는데 못 찾았어요. 칼 주인이 제가 아니었던가 봅니다. 그런데 그분께 얼마 전 칼을 다시 선물 받았습니다. 제가 쓴 ‘안효주, 손끝으로 세상과 소통하다’라는 책을 선물로 드렸는데 그분 손자가 한국어를 공부해서 읽어드렸다고 하더군요. 그 책에서 칼을 잃어버렸다는 내용을 들으시고 전화가 왔습니다. 미안해서 말씀을 못 드렸다고 하니 다시 선물로 칼을 보내주셨습니다.
[강] 요리 인생에 대한 앞으로의 포부를 말해주세요.
[안] 산 속에 황토로 집을 지어 텃밭에서 야채를 기르며 식당을 해보고 싶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나 지인들을 초대하려고요. 요리사는 일반인들이 놀 때 일하고 일할 때 쉬어서 인간관계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직장에서는 우등생이었지만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열등생이었죠. 가족과 친구들에게 베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두 번째로는 일본에 가서 1년 정도 식당을 꼭 해보고 싶습니다. 싱싱하고 좋은 재료로 원 없이 칼질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래야 요리 인생이 끝나는 날 미련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꿈은 초밥학교를 만들어 후배를 양성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