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룩 연구 대가 배상면 회장
- 1924년생인 국순당 배상면(裵商冕) 회장은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여섯이다. 백세주로 유명한 국순당은 예전보다 매출이 많이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독보적인 국내 1위 민속주 제조업체다. 큰 아들인 배중호 사장이 국순당, 차남인 배영호 사장은 배상면주가, 딸 배혜정씨는 ‘배혜정 누룩도가’ 대표이사를 맡아 각기 경영하고 있다. 자식 셋이 모두 가업을 이어받아 전통 술 관련 사업을 크게 하고 있는 셈이다.
평생을 누룩 연구에 몸바쳐온 배 회장은 이젠 쉬면서 여생을 즐길 법도 한데, 요즘도 그는 매일 아침 일찍 배상면주류연구소가 있는 서울 양재동 우곡빌딩으로 출근한다. 우곡(又麴)은 차남 배영호 사장이 지어준 그의 호인데, 곡은 누룩을 뜻한다. 다시 말해 우곡은 ‘다시 누룩’이란 뜻이다. 배 사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버님은 당신의 호가 의미하는 그대로 요즘 새로이 ‘또 누룩연구’를 하신다”고 말했다.
배상면 회장이 전통 술 전승에 미친 영향은 독보적이다. 1969년 국내 처음으로 한국미생물공업연구소를 차린 배 회장은 일본 누룩을 국내 탁주 제조에 처음 사용했으며, 탁주와 약주에 쓰이는 개량누룩을 만들어 누룩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밖에도 전두환 대통령 시절, 정부에 보리 하곡 수매를 건의, 정부 정책으로 채택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경제성에 밀려 제대로 된 누룩 못 만들어, 새 술 연구 전력… 남은 시간 많지 않아”
그러나 배상면 회장이 기자를 만나 처음 건넨 말은 충격적이었다. “아직 제대로 된 술을 만들지 못했다.” 60년 이상 전통 술을 연구해와 이 분야에서는 모두들 ‘대가’로 인정하는데, 정작 본인은 “그 동안의 술 연구 방향이 잘못돼 요즘 촌음을 아끼면서 새 술 연구에 전력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 잠도 잘 못 잘 정도로 걱정이 많다”고도 했다.
전통 술의 주요 원료인 누룩 연구에 평생을 바쳐오셨는데 방향을 바꾼다니요. “원래 우리나라 누룩은 ‘막누룩’이라고 해서 덩어리 누룩 형태인데, 그 원료가 밀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미 쌀로 누룩을 만들어 청주를 빚고 있었습니다. 저는 광복 후 우리 전통 누룩과 일본 누룩의 장점을 합쳐서 개량누룩인 조효소를 만들었지요.”
우리 전통 누룩이 일본 누룩만 못했나요. “우리 누룩은 자연의 섭리에 따른 누룩으로, 밀을 빻아서 물을 첨가해 발로 밟아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모양은 ‘보이차’ 덩어리와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전통 누룩은 품질이 들쭉날쭉 했습니다. 표준화가 안된 때문이죠. 반면에 일본 누룩은 균등한 품질이 유지돼 상업성이 뛰어났습니다.”
- 개량누룩으로 백세주나 산사춘 같은 인기 상품을 만든 거 아닙니까. “백세주나 산사춘은 생쌀발효법이라고 해서 한 단계 더 진전한 누룩으로 만든 건데, 어쨌든 개량누룩은 품질이 일정한 반면 전통 누룩이 갖고 있던 ‘젖산 발효’ 기능이 없어 품질 향상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백세주 수준의 술을 한국을 대표하는 술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누룩을 바꾸면 백세주도 완전히 달라지나요. “그럼요. 개량누룩으로 백세주를 만들었지만, 세계시장에 내놓아도 당당한 명품주는 만들지 못했습니다. 일찍부터 경제성·수익성만 좇느라 ‘최고 품질’의 술을 만드는 노력을 등한시한 때문이죠. ‘술은 값이 싸야 한다’는 논리에 너무 일찍 타협하는 바람에 외국에 내놓을 만한 좋은 술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우리 술을 제대로 만들지 못한 것은 제대로 된 누룩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고, 평생을 누룩연구에 몸담아온 저로서는 후회막급입니다.”
“젖산균 누룩으로 빚은 세계 최고 술 만들 것”, 석·박사 5~6명 매달려… 성공 관건은 보존
배 회장의 요즘 일과는 새 누룩 만들기에 집중돼 있다. 그가 기자에게 보여준 새 누룩은 ‘젖산균 누룩’. 지금껏 자신이 개발한 개량 누룩은 전통누룩과 달리 젖산 발효가 잘 안돼 최고의 맛을 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젖산균 누룩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주세요. “개량누룩으로 만든 술이 전통 누룩으로 만든 술에 비해 맛이 떨어지는 것은 술 발효과정에서 젖산균 발효가 생략됐기 때문입니다. 와인 제조에도 있는 젖산균 발효는 술 맛을 다양하게 하고, 또 극대화해 주죠. 그런데 누룩의 경제성을 따지다 보니 전통 누룩이 갖고 있는 장점을 제대로 못 살린 것이죠. 이건 제 잘못이 큽니다.”
젖산균 누룩으로 빚은 술은 언제 맛볼 수 있나요. “이미 실험실에서는 만들고 있습니다. (배 회장은 이 시점에서 직원을 불러 실험용으로 만들고 있는 젖산균 발효 탁주를 맛보여 주었다. 기존 탁주에 비해서는 훨씬 걸쭉하고 알코올 함량도 높았다.) 그런데 젖산균 누룩 양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젖산균 누룩은 만드는 데 기간이 많이 걸리고 또 생산단가가 비싸 이를 원료로 술을 만들 경우 가격이 기존 제품보다 훨씬 비쌀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최고의 술을 만드는데 가격이 중요하겠습니까?”
현재 배상면주류연구소에는 5~6 명의 석·박사급 고급 인력들이 새 누룩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배 회장이 새로 만드는 ‘젖산균 발효 누룩’ 개발 성공의 관건은 보존성이다. 다시 말해 누룩에 함유돼 있는 젖산균이 일정 기간 이상 죽지 않고 활동을 해야 젖산균 발효가 정상적으로 일어나 술 맛을 풍부하게 해준다. 배 회장은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로는 젖산균 활동이 한 달 이상 진행되고 있는 사실을 현미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며 “이 정도 보존성이라면 충분히 경제성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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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상면 회장이 차남인 배영호 배상면주가 사장(서 있는 이)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 술 원료 무려 97% 수입… 친환경 쌀 재배해야, 농업 - 술산업 연계 못한 정부 정책도 큰 잘못
배 회장은 새 누룩 연구와 함께 친환경농업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대학교수를 독일로 보내 술 지게미(술을 짜내고 남은 술 찌꺼기)를 활용한 친환경순환농법 현지조사 보고서를 써 정부기관에 “우리나라도 유기농법으로 제대로 된 쌀을 수확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다. 그는 “술 지게미를 자연 비료로 사용하면 좋은 술을 만들 수 있는 쌀을 수확할 수 있는데, 아직 우리 정부는 거기까지는 관심이 없다”며 아쉬워했다.
현재 우리나라 술 원료의 97%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국내 술 산업과 우리 농업은 사실상 거의 상관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배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 농민도 반성해야 합니다. 좋은 술을 만들 수 있는 쌀 개발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죠. 더 큰 잘못은 정부가 우리 농업과 술산업이 유기적으로 연계되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하지 않은 것이고요.”
어쩌다 우리 술산업이 이렇게 뒤처진 것일까요.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대에는 전국에 약 12만명의 술 제조업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제가 술제조금지령을 내려 전통술 제조의 맥을 잘라버렸지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역시 부족한 식량 해결 차원에서 쌀을 원료로 술을 만들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국권을 회복한 후에도 전통술 복원이 제대로 될 수 없었습니다. 현재는 전국에 술 제조업자가 1000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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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상면 회장이 개발 중인 젖산균 발효 누룩. 왼쪽 것은 잘게 빻은 것이고,오른쪽은 같은 것을 덩어리로 만든 것이다.
- “농업이 살아야 술도 산다” 직접 쌀 농사 추진, 가양주 품평회 열고 새 누룩 제조법도 전파할 것
배 회장은 최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박근혜 의원을 만났다. “현재 도농 간 소득 격차가 심하잖아요. 그러니 도시의 직장인들이 실직을 하더라도 농촌으로 돌아갈 엄두를 못 내는 형편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도시 실직자들이 스스로 귀농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배 회장은 박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어렵게 만남이 성사돼 30여분 동안 우리 농업이 나아갈 방향을 이야기했다.
“정부는 농촌에 금융지원만 해서 빚만 늘게 할 게 아니라, 스스로 살 길을 찾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귀농 도시인들이 우리 쌀로 우리 술을 만들도록 한다면 농촌도 살고 우리 술도 같이 살 수 있다 등등의 얘기를 한참 했더니, ‘잘 알겠습니다’고만 대답하시더군요. 저로서야 제 얘기를 이 정도로나마 귀담아들어 주시니 고마울 따름이죠.” 배 회장의 농업부활론은 계속됐다. “독일은 일반 농가가 술 지게미를 유기 비료로 사용하고 있고, 또 20만명이 술 제조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 농가에서 만드는 알코올(술)은 독일 정부가 시가(時價)의 두 배에 우선 수매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방식으로 농가에서 알코올을 만들면 대체연료나 증류식 소주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전국의 농가에서 탁주 같은 술을 임의로 만들 경우, 술 유통이나 맛의 표준화·개량화에도 문제가 될 수 있어 현재 법적으로는 개인 차원의 술 제조·유통을 금하고 있다. 배 회장은 “판매 목적이 아니라 명절 등 제수용으로 만드는 가양주(家釀酒)의 명맥은 전국 곳곳에서 아직도 이어져 오고 있다”며 “정부의 후원을 받아 이들 가양주 품평회를 오는 가을쯤에 열어 토속주 개발을 양성화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번 행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가양주 제조업자에게는 배 회장이 개발한 누룩 제조법을 공개해, 좋은 술을 계속 빚을 수 있도록 지원할 생각도 갖고 있다. 그는 “지금 내가 새 누룩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이유는 우리 전통 술 전체의 수준을 높이자는 것이지, 결코 좋은 누룩 만들어 ‘누룩 장사’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좋은 술을 빚을 수 있는 새 누룩을 개발, 제조과정을 단순하게 정리해 일반에 공개하기로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농가가 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획기적 지원이 선행돼야 한다. 우리 정부의 농업정책 얘기를 늘어놓을 때면 배 회장의 목소리가 한층 커진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우리 맥주는 우리 보리로 만들어야 한다”고 배 회장이 건의한 덕분에 일시적으로 보리 하곡 수매가 정부 정책으로 채택됐지만, 몇 년 되지 않아 다시 흐지부지해져 현재 국내 맥주 원료는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배 회장은 “지금은 정부 차원의 보리개발 연구비가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이러니 점점 우리 보리는 설자리를 잃고 수입 보리에 밀릴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술 박사’ 배 회장이 이처럼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농업이 술산업 발전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와인이나 사케를 만드는 포도나 쌀을 따로 개발하듯이 우리 술 맛을 가장 맛있게 하는 쌀 역시 별도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농업이 살지 못하면 우리 술도 살지 못합니다. 농업과 술산업은 같이 살고 같이 죽는 공동운명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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