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최정예 비밀부대, 작전부
<이 기사는 weekly chosun 2044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북한은 지난 2월 11일 인민군 수뇌부에 대한 전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인 김영춘이 인민무력부장으로, 평양방어사령관 이영호는 총참모장에 임명됐다. 하지만 노동당 작전부장 오극렬은 이번에도 유임됐다.
그동안 북한 군 수뇌부 인사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노동당 작전부장 오극렬 대장의 직책은 20년째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이번에 인민무력부장에 오른 김영춘과 오극렬은 각별한 사이이며, 두 사람 모두 김정일과 생사를 함께 하는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한 고위 탈북자는 “김일철 전 인민무력부장이나 김격식 전 총참모장 등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극렬은 1988년 “군에 대한 당의 통제가 심해 전투력 약화를 불러올 수 있다”며 이의를 제기했다가 김일성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는데, 이때 그를 지켜준 사람이 김정일 위원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살 때부터 뽑아 납치·파괴·폭파 훈련, 당·기관 지휘 안 받고 독자적 군사행동
이 오극렬이 부장으로 있는 곳이 노동당 직속 작전부다. 이 부서는 대외 첩보를 담당하는 대외연락부, 35호실 등과 더불어 북한판 ‘맥가이버’들이 집결한 특수 부대다. 규모는 약 2000명가량으로, 유사시 적의 수뇌부를 와해시키고 제압하기 위해 창설됐다.
이 부대는 “특수부대 요원 1000명 가운데 한명이 뽑힌다”고 할 만큼 두뇌와 체력을 겸비한 인재들로 구성돼 있다. 북한은 대상 인재를 중학교 때부터 선발, 혹독한 훈련 과정을 통해 정예 요원으로 양성한다. 특히 해상침투에 필요한 전투요원들은 12살 때부터 뽑아 훈련을 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상과 육지를 넘나들며 납치, 파괴, 폭파, 물자 전달, ‘피스톤(연락원)’ 등의 고난도 임무를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는 최고의 살인병기들이 이곳에서 양성되고 있다. 작전부 출신 탈북자 안명진씨는 “훈련과정에서 전투원들이 죽어나가도 훈련은 멈춰지지 않는다”며 “수많은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사람만 비로소 정예요원으로 선발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작전부 전투원들은 북한의 웬만한 특수부대 요원들은 만질 수도 없는 최첨단 로켓포를 비롯, 각종 특수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그 어떤 비상 상황이 와도 작전부만 투입하면 모두 진압할 수 있다”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인 것은 이같은 막강한 화력과 전투력 때문이다.
대남 사업부서들이 몰려 있는 평양 3호 청사 근처에 지휘본부를 둔 작전부는 북한 전역에 6개의 연락소를 운영하고 있고 평양, 청진, 원산, 개성 등 주요 요충지마다 은신처가 설치돼 있다. 김정일이 북한에서 유일하게 호위부대를 거느리지 않고 불쑥 방문하는 곳이 이 작전부 아지트라고 한다. 그만큼 작전부를 신뢰한다는 방증이다. 한 고위탈북자는 “김정일이 작전부를 방문해 ‘이곳은 나의 별동대’라고 극찬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친위부대를 포함한 24만명의 대규모 호위부대를 갖고 있는 김정일이 작전부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이유는 이곳이 군단지휘부도 순식간에 무력화시킬 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의 경우 호위 부대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작전부를 동원하면 일시에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명진씨는 “북한에서 모든 병력의 이동이나 작전은 사전에 당이나 기타 기관의 사전 통보가 있어야 하지만 작전부의 군사행동은 독자적으로 이뤄진다”고 말했다. 거꾸로 작전부는 누가 지휘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일’을 도모할 수도 있는 북한 정권의 핵심 무력인 것이다.
대남 침투 담당, 무력부 소속 정찰국도 막강, ‘해상 육전대’ 등 특수부대원만 무려 20만명
북한에서 노동당 작전부 다음으로 손꼽히는 특수부대는 인민군 무력부 소속 정찰국이다. 이곳은 다른 대남부서들과 함께 독자적 대남침투에 대비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부대로, 최고의 무술 실력과 전투장비를 가진 부대로 꼽힌다. 이 부대를 나온 대원들은 제대 후에도 작전부 다음으로 우대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민군은 군단별로도 여단 규모(5000~7000명 규모)의 특수부대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들은 용도에 따라서 ‘저격’ ‘경보’등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인민군은 또 정규 군단 외에 군단 규모의 특수부대인 ‘교도지도국’도 운영하고 있다. 교도지도국은 특수부대를 더 확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위장 부대라 할 수 있다.
이밖에 우리의 해병대와 비교되는 ‘해상 육전대’ ‘항공 육전대’ 등 별도의 특수부대까지 포함하면 인민군의 특수부대는 약 20만명 규모에 달한다.
이같은 특수부대들은 유사시 서울과 경기도 일대를 일시에 점령하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반복하는 한편 북한 내부에 침투하는 가상의 적을 일거에 차단하는 임무에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특수부대들도 최근의 경제난으로 최악의 상황에 몰리고 있다고 한다. 가장 우선 적인 것은 특수부대원들의 처우 문제. 인민군 출신의 한 탈북자는 “특수부대원들은 고된 훈련을 견뎌야 하기 때문에 최고의 대우를 받아 왔지만 요새는 예전 같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고기도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린 특수부대원도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현재 북한의 웬만한 군 부대는 하루 두끼 식량공급조차 어렵다. 신발 등 피복 공급은 1 년째 비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군량미가 제대로 걷히지 않자 군대가 나서서 협동농장에 숨겨놓은 식량을 찾아내기 위해 대대적 수색을 벌이는 진풍경도 흔하게 벌어진다. 하지만 북한 정권은 이런 열악한 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라크전쟁 이후 게릴라전에 대비한다며 특수부대 강화에 힘을 쏟고 있다.
작전부 등 최정예 출신은 제대 후 요직에, 나머지는 일자리 못 찾아 문제집단 전락
또 다른 문제는 특수부대원들이 제대 후 받는 처우다. 작전부, 정찰국, 호위총국 등 권력을 가진 주요 특수부대 출신들은 제대 후 당(黨)·정(政)·군(軍)의 요직을 차지하는 반면, 정규 인민군 소속 기타 특수부대원들은 제대하더라도 변변한 직업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입국한 한 고위탈북자는 “최근 김정일을 호위하는 호위총국 출신도 제대 후에는 일자리가 없어 곧바로 생활고에 직면하곤 한다”고 말했다. 한 해에 제대하는 호위부대 출신은 10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수부대 경력만 있으면 번듯한 일자리를 보장받던 옛날과 달리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특수부대원들의 사기도 최악의 상황으로 떨어진 상태라고 한다.
일부 특수부대원들은 사회적 문제까지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대로 된 직업을 찾지 못하자 조직폭력집단의 두목이 되거나, 사회 곳곳에서 조직을 결성해 도둑·강도 등 각종 범죄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김정일의 올해 신년사에 이례적으로 “군대가 인민을 돕자”는 구호가 등장한 것도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선군정치를 하는 병영국가에서 민간이 경제활동을 통해 군대를 돕는 것은 상식이지만, 군대가 인민을 돕는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만큼 ‘인민군의 민폐가 도를 넘었다’는 의미로 “군대 때문에 사회 전체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한 탈북자는 “과도하게 만들어진 북한의 특수부대는 이제 체제수호의 일선에서 체제를 위태롭게 만드는 세력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며 “이들이 사회의 불만세력으로 돌변할 경우 김정일 체제는 걷잡을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병(私兵)으로 전락한 인민군, 군 수뇌부 막강 권력 휘두르다 김일성에 잇단 숙청
1995년 오진우 사망 후엔 김정일 유일 지도체제로
김일성 정권 초기 민족보위상을 맡았던 최용건은 중국 팔로군 군장 출신으로 인민군 총사령관을 겸임했었다. 그는 당시 김일성이 눈치를 볼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행사하고 있었다. 최용건은 김일성이 1960년대 중반 반대파의 공격으로 실각 위기에 몰렸을 때 무력을 동원해 김일성을 보호했다. 하지만 그는 김정일 후계구도를 찬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망 후 찬밥신세로 전락, 혁명열사릉(현충원에 해당) 중앙에 있었던 묘비가 구석으로 옮겨지는 수모를 겪었다.
소련군 대위로 김일성과 함께 평양에 입성한 남일 장군도 최용건과 더불어 군부의 핵심 세력이었다. 그는 정전 담판에서 미국과 논쟁을 벌여 유명해진 장군이기도 하다. 그는 인민군 총참모장을 역임하면서 군부의 실세로 군림했지만 1976년에 트럭에 치여 급사했다. 항간에서는 김일성이 그를 제거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1969년까지 민족보위상을 맡았던 김창봉 역시 군부의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다 김일성에게 숙청됐다. 당시 호위총국에 근무했던 장해성씨는 “김창봉이 김일성을 제거하기 위해 비행장에 고사포를 설치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기도 했지만,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창봉이 숙청된 뒤, 그가 이끌었던 특수부대는 집단 좌천돼 평안북도 회창 탄광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몰살당했다. 이로써 김일성은 군부를 장악할 수 있었다.
북한 군대는 김정일 시대에 들어와 완전한 사병화의 길을 걸었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 시대에는 오진우가 군부의 수장이 됐다. 6·25전쟁 때 김일성의 호위대장을 맡았던 오진우는 김일성이 차남 김평일에게 마음이 쏠려 있는 것을 눈치채고 ‘장자승계’의 원칙을 내세워 앞장서서 김정일을 후계자로 내세운 덕에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는 인민무력부장을 맡으면서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겸임할 정도로 파워가 막강했다. 오진우는 김정일도 범접할 수 없는 독자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김정일조차도 그를 하수인으로 취급하지 못했다.
하지만 1995년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사망한 뒤, 인민군은 철저한 김정일 개인 사병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오진우만한 파워를 가진 군인은 모두 사라졌고, 군 수뇌부는 김정일 개인에게 절대적 충성을 맹세한 김영춘, 오극렬, 조명록 등의 최측근들로 채워졌다. 인민무력부 중심의 군 지휘체계도 인민군 총참모부와 총정치국을 앞세운 김정일 유일 지도체제로 바뀌었다.
북한 군부 틀어쥔 '김정일의 남자' 김영춘
"쿠데타의 싹을 없애라" 특명, 용천 폭발·6군단 사건은 反김정일 세력의 증거
북한에서는 최근 1990년대 중반의 대아사(大餓死)와 비슷한 상황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최근 탈북한 한 군인출신은 "지금 북한 곳곳에서 탈영병이 속출하고 배고픈 군인들이 민가를 약탈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대별로 '강영실 중대' (강한 영양실조 군대의 약자)가 운영되고 있고 여론 악화 때문에 영양실조에 걸린 군인들을 귀가시키지 못한 채 방치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심각한 군부 반란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도 했다.
사단장 이상 장령급(장성) 군인들은 5분 단위로 5개 부서에서 동시에 동선(動線)이 김정일에게 보고될 정도로 감시받고 있다. 언제 어디서 반란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 급격한 경제난을 겪으면서 북한 내부, 특히 군부에서 크고 작은 반(反) 김정일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 ▲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영춘 신임 인민무력부장(왼쪽)등을 대동하고 포병사령부 산하 제681군부대의 포사격 훈련을 참관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이 12일 보도한 사진이지만 촬영날짜를 밝히지 않았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2004년 평북 용천 폭발사건은 강력한 반 김정일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다. 북한에서 김정일의 움직임은 호위부대에도 비밀에 부쳐질 만큼 극비다. 모든 동선은 2중 3중의 철통경비 속에 반경 5㎞ 이내는 모든 폭발물 검사가 이뤄진다.
그런데 김정일이 지나가는 기차역에 폭발물이 설치된 것이다. 최근 입국한 한 고위탈북자는 "용천사고는 군내에 무시할 수 없는 반 김정일 세력이 존재하는 증거"라고 말했다. 군 보위사령부는 20여명의 용의자를 체포해 고문을 통한 자백을 받아내려고 했지만 반정부 세력의 실체를 밝혀내지 못했다.
1996년 초에도 김정일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함남에 주둔하던 6군단 반란이 그것이다. 북한 당국은 이 사건을 군(軍)간부들의 뇌물과 부화(섹스 스캔들)사건으로 치부하지만 수백명의 고위군인이 처형될 만큼 상황이 심각했다.
인민군 군관(장교)출신 탈북자는 "남조선 정보기관과 연계돼 막대한 자금을 끌어들인 군단 사령부 전체가 이 사건 이후 반역자로 전락했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말했다. 김정일의 지시가 군단 내에서 집행되지 않고 주요 간부들이 중국식 개혁개방만이 살길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6군단 사건은 말단 군 보위부 요원의 집요한 문제 제기로 중앙에 보고돼 일망타진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그 요원은 군단 내 분위기가 김정일은 안중에도 없고 반정부적이라는 이상 징후를 느꼈다. 이를 상급 보위부에 보고했으나 계속 묵살되자 그는 보고 절차를 무시하고 중앙에 직접 보고했다. 이후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정일에게도 직보(直報)된 이후 당시 군(軍)보위사령관 원응희와 김영춘 등이 특수부대를 은밀히 이동시켜 군단지휘부를 장악하면서 소위 반역자들의 음모는 저지됐다. 김정일은 이들을 처절하게 응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목격자는 "장성급 고급군인들을 모두 옷을 벗긴 채 손발을 뒤로 묶어서 냉동차에 돼지를 잡아 걸듯 매달아서 실어갔다"고 말했다. 군단장과 군단 정치위원, 보위부장 등 핵심 간부들은 모두 내부 처형됐다고 한다. 군 장교 수백명이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가족까지 압송됐다.
그 이후 6군단 전체가 해체돼 부대는 각각 다른 군단에 편입됐고 6군단 출신 군관들은 모두 한직에 내몰렸다고 한다. 6군단 사건 이전에도 크고 작은 군 반란사건들이 발생했다.
1992~1993년에도 구 소련 군사아카데미 출신 장성 11명이 쿠데타를 꾸미다가 적발돼 처형됐다. 내부적으로는 구 소련 KGB와 연계돼 기밀을 해외로 유출한 혐의를 받았지만 심각한 반정부 음모가 적발됐다고 한다. 군관 출신 탈북자 차성주씨는 "그들은 인민군 내의 엘리트들인데 이런 사람들과 김정일은 상극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김정일은 절대로 머리 좋은 사람을 군 최고 수장으로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은 자꾸 딴마음을 품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 군의 최고 수장이 되는 가장 우선적인 조건은 두뇌보다는 충성심이다. 참모로는 고급 두뇌들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북한의 군부는 반정부적인 성향이 가장 강하고 서구 지향적인 북한의 386세대가 중간급 요직을 장악하기 시작해 내부 반발은 더 거세질 전망이다.
- ▲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자설이 나오 고 있는 김 위원장의 막내아들 정운의 11 세 때(현재 26세) 사진이 공개됐다. 이 사 진은 KBS가 김정일의 전속요리사로 일 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씨로부터 제 공받아 공개했다. 뉴시스
전문가들에 따르면 원래 북한은 1995년 오진우(원수) 인민무력부장이 사망하기 전까지 군부 권력이 인민무력부 한곳에 집중되는 시스템이었다. 오진우는 6·25 때 김일성의 경호대장 출신이다. 그러나 1998년 김정일 위원장은 '선군(先軍·군을 우선하는) 정치'를 내세워 군을 직접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군부 권력을 인민무력부·총참모부·총정치국에 쪼개 나눠 주는, 일종의 '디바이드 앤 룰(divide & rule)' 방식을 택했다는 관측이다. 인민무력부는 군 행정만 담당하며 김일철 차수(대장과 원수 사이 계급)가 1998~2009년까지, 총참모부는 군 작전을 수행하며 김영춘 차수가 1995년~2007년까지 이끌었다. 군 인사와 감독권을 갖고 있는 총정치국은 조명록 차수가 1995년~현재까지 맡고 있다.
- ▲ 북 신임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 연합=조선중앙TV촬영
또 다른 축인 조명록 총정치국장은 오랜 기간 병을 앓고 있어 김정각(대장) 총정치국 제1부국장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김 위원장이 건강에 문제가 생기자 최측근인 김영춘 부장을 '원 톱'으로 앞세워 군부를 확실히 장악하고 안정화하려는 포석인 것 같다"(유동렬 치안정책연구소 연구관)는 분석이 우세하다.
문제는 김영춘이 1995년 이후 북한의 각종 도발을 주도해 온 대표적인 강경파라는 점이다. 동해 앞바다 잠수정 침투 사건(1998년), 대포동 1호 발사(1998년), 제1차 연평해전(1999년), 제2차 연평해전(2002년), 대포동 2호 발사 및 핵 실험(2006년) 등이 모두 그가 총참모장을 맡고 있을 때 일어났다. "김영춘은 평소 술도 거의 마시지 않고 작전 구상이 취미인 스타일"(대북 소식통)이라는 소문까지 있다. 그는 야전사령관인 제6군단장과 총참모부 작전국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우리 군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고 한다. 가뜩이나 북한이 잇단 대남 협박과 미사일 발사 움직임 등으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강경파 김영춘'의 등장이 북의 '모험' 가능성을 높여주는 또 하나의 징조가 아니냐고 우려하는 것이다.
김영춘이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그의 뛰어난 '정치적 처세술'도 한 몫을 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한 대북 소식통은 "김영춘은 김 위원장의 차남 정철과 3남 정운의 생모인 고영희(2004년 사망)가 살아있을 때는 '고영희 라인'이었다는 소문이 있다"고 했다. "군 부대 내에서 고영희를 '평양 어머니'로 부르며 떠받들게 한 사람이 김영춘"(정부 소식통)이라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일부 전문가들과 언론은 "김 위원장이 이번에 김영춘을 발탁한 것은 고영희의 아들, 특히 3남 김정운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김영춘은 김 위원장 장남 정남의 후견인인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이 급부상하던 90년대 중반에 같이 떴던 인물"(백승주 국방연구원 박사)이라며 '3남 후견인설'을 반박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어떻든 김영춘의 인민무력부장 취임을 계기로 북한 군부의 대남·대미 현안 개입은 앞으로 빈도도 잦아지고 강도도 더욱 세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 ▲ 오극렬 국방위 부위원장
김정일은 자신이 겸임하고 있는 국방위원장과 당 중앙군사위원장 명의로 오극렬(78·대장) 노동당 작전부장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0일 보도했다. 당 작전부장은 대남 간첩 양성과 침투를 총괄하는 자리이며 국방위는 북한군을 지휘하는 사실상 최고통치기구이다.
오 부위원장은 1989년부터 20년 동안 당 작전부장을 지내며 1992년 여간첩 이선실(북한 서열 22위)이 개입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1995년 2인조 무장간첩 사건, 1999년 여수 앞바다 반잠수정 침투 사건 등을 주도해 대표적 '강경파'로 꼽힌다. 1979~1988년에는 총참모장(합참의장)으로 일하면서 1983년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1987년 KAL기 폭파 사건 등에도 연루됐을 것이란 관측이다.
현재 국방위에는 조명록(79·차수) 제1부위원장과 이용무(86·차수) 부위원장 등이 있지만 고령(高齡)과 건강 문제로 실제 활동이 어려운 상황이다. 따라서 "김 위원장이 오 부위원장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국방위를 더욱 확실히 장악하려는 것"(유동렬 치안정책연구소 연구관)이란 분석이 나온다.
공군사령관 출신인 오 부위원장은 총참모장 당시 북한군 현대화를 주도했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이 살아 있던 1987~88년 당시 실세였던 오진우(원수) 인민무력부장과 군 개혁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어 좌천됐다가 김정일 위원장의 보호로 살아남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일제 말기 '김일성 부대' 대원이던 오중성의 외아들로, 어릴 때 김 위원장과 형제처럼 함께 자란 것으로 알려진다. 정부 당국자는 이 같은 최근 북한군 인사에 대해 "김 위원장 건강과 후계 문제 등으로 체제가 불안한 상황에서 최측근 기용으로 군부를 다잡으면서 군사적 긴장 조성을 통해 내부 통제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으로 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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