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87년11월 쿠데타 음모 진상

醉月 2009. 5. 14. 08:55

 [87년11월 쿠데타 음모 진상] 김용갑과 허화평
  전두환  전대통령  임기말에 민정수석을 지냈던 김용갑(金容甲·63)  한나라당  의원은 최근 ‘아내 얼굴을 화장하는 남자’라는 책을 냈 다.  이  책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내를 위해 쓴 책으로 병상 간호  체험담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증언이 두가지 있다. 하나는 87년 11월말의 쿠데타 움직임을 저지했다는 증언과 다른 하나는 629
  선언에  대한  증언이다. 6?9선언에 대한 증언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지만 쿠데타 움직임을 저지했다는 증언은 이번이 처음이다.
 
  먼저 쿠데타 움직임과 관련, 그의 책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자.
 
  “내가 2년2개월 동안 청와대 민정수석을 하면서 87년 6월의 상황보 다도 오히려 더 힘들고 괴로웠던 순간은 87년 가을, 더 자세히 말하
  자면 11월말경이다. 지금까지 가슴에만 묻어 두었던 그 이야기를 조금만  해보고 싶다. 그 무렵 나는 말할 수 없는 번민에 휩싸여 있었
  고,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어떻게 보면 가장 힘들었다고 말할 수 있  는 고비를 맞지 않으면 안되었다.(중략)
 
  나는  629선언의 골간을 대통령께 건의한 사람으로서 대통령선거에  막중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만약 대통령 직선제가 실패로 돌아
  간다면  629선언 자체가 잘못된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에 파생될 정국혼란을 수습할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막상  선거전이 시작되자 우려했던 문제들이 하나 둘 표면위로 돌출 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지역 감정의 증폭
  이었다.(중략)
 
  민주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넘어야 할 산이라고는 하지만, 지역감정과  맞물려 사회 혼란이 극도로 가중되는 시점에서 우려의 목소리
  가 나오기 시작했다. 또한 사회 일각에서는 이러다 북한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즉 국가안보에 대한 불안감도 점차 수위를
  높여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이럴 바에는 대통령 선거고 뭐고 일단 나라부터 구해 보자는 논리를 앞세워 일단의 세력이 움직이고 있다는 제보
  가 중요인사로부터 들어왔다. 개인의 야욕이 아닌 순수한 우국 충정과 국가 안보에 대한 걱정에서 그러한 움직임이 출발한 것이라고 믿
  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움직임에 군부가 개입돼 있다는 사실은  경악하고도 남을 만한 일이었다.
 
  만약 군이 본격적인 행동을 취할 경우 예측을 불허하는 상황이 도래 할  수도 있지 않은가. 문제의 제보를 정밀 검토한 결과, 군이 실행
  에  옮기는  것은 사실상 초읽기에 들어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통령에게 보고할 경우, 곧바로 계엄령이 선포될 수도 있을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국민이 그토록 갈망하던 대통령 직선제는 끝장나지 않는가. 진정한 민주화를 기대했던 국민들의 열화 같은 열망
  에도 찬물을 끼얹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중략)
 
  그렇다면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군의 동요를 막고  이번 선거를 차질없이 진행할 묘책은 없을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도 뾰족한 대안이 마련되지 않았다.
 
  직책상 그런 제보가 들어오면 대통령께 보고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자칫 대통령께 엄청난 부담을 지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
  통령의  결단  여하에 따라 역사 앞에 더 큰죄를 짓게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심사숙고 끝에 대통령께 보고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내가  직접 뛰어 들어 사태를 수습해보기로 가닥을 잡았다. 이러한 맥
  락에서 나는 그 움직임의 핵심 인물을 직접 만나기로 결심했다.
 
  그 인물이 누구인지는 그야말로 ‘무덤까지’ 비밀로 할 작정이므로 소상히 밝힐 수는 없지만, 평소 나와 비교적 잘 아는 사이였다.
 
 
  ◆ 플라자호텔에서 만나 격론 벌여
 
  우리는 시청 앞 P호텔의 한 객실에서 만났다. 나는 혼자만의 힘으로  부족할  것이라 생각되어 그쪽도 잘 알고, 나도 잘 아는 한 분과 동
  행했다.  굳게  잠근 객실 안에서 마주 앉은 상대의 의지는 결연하기만 했다. 그는 역시 무엇보다도 국가안보 문제를 가장 우려하고 있었다.
 
  “도대체 대통령선거가 뭡니까? 민주화는 또 뭡니까? 나라가 있어야  대통령이고  민주화도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러다가 나라를 송두리째
  김일성이에게  넘겨주는 것 아닙니까? 나로서는 현재 돌아가고 있는 꼴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억울한데,  지역감정을 앞세워 무엇을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그렇게 해서 대통령을 뽑는다고 합시다. 그런 대통령 아래에서 과연 국론이
  결집되고, 민족의 에너지가 살아날 것 같습니까?”
 
  “하지만  군을 동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민주화를 실현코자 그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
  가  극도로 혼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민주화 과정에서 이 정도  진통은 반드시 견뎌내야 합니다. 이 고비를 잘 넘기면 국민들이
  한층 더 성숙해질 것입니다.”
 
  “쓸데없는 말씀 그만하십시오. 나는 이미 결심을 굳혔습니다. 내가  권력에 탐이 나서 그러는 줄 아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는 김
  수석도 알다시피 권력이나 정치에는 연연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북한이 일을 저지를까봐
  죽기를 각오하고 거사에 나서려는 것입니다.”
  그는  정연한 논리를 개진했다. 그의 논리는 마치 보수 계층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듯했다. 그의 애국심과 투철한 안보 의식은 누가 뭐
  래도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입술이  바싹바싹 타올랐으나, 물 한 잔도 마시기 힘든 팽팽한 긴장이 온 방에 감돌고 있었다. 나는 조금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아는 사이라 해도 끝내 고집을  부린다면 나는 청와대 민정수석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조
  치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위협적인, 어떻게 보면 최후의 통첩과도 같은 말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일어섰다. 그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나에게 이해를 구하
  려  들었지만, 우리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달리는 열차처럼 위험하고도 긴박한, 그리고 피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중략)
   나는  전전반측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길고도 지루했던 밤이  지나고 먼동이 트자마자 나는 여러 채널을 동원해 돌아가고 있는 외
  부 상황을 파악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모든 상황이 중단돼 있었다. 특히 어제 저녁에  만났던 문제의 핵심 인물은 내가 권유했던 대로 해외로 출국해 선거
  가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해외로 나갔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렸다. 앞으로 또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모르지만 일단 최
  악의  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그후로도 나는 군의 동향에 대해서는  계속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김용갑  의원은 이처럼 극적인 내용을 공개하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망설이다 결국은 책속에 넣게 되었다고 토로했다.
 
  “원고 내용을 몇번이나 고쳐 구체적인 사실들은 거의다 빼버렸습니 다.  그동안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은 내용입니다. 내가 모시던 전두
  환 전대통령에게도 이에 대해서는 한번도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내는 책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아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87년에 민주화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했던지를 보여주려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날 만난 당사
  자가 누군지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비밀은 아무리 음지에 감춰도 언젠가 햇볕아래 드러 나기  마련이다. 더구나 공개적으로 ‘쿠데타 움직임’을 거론한 이
  상  이 비밀을 ‘무덤’까지 갖고 가겠다는 김의원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언론의 추적이 계속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책 내용을 일단 분석한 결과 베일에 싸인 주인공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를 네 가닥 발견했다. 첫째, 김용갑 의원이 핵심인물을 만난 때
  와 장소는 87년 11월말 서울 시청 앞 플라자호텔.
 
  둘째, 핵심인물은 김의원과 비교적 잘 아는 사이. 셋째, 핵심인물은 정연한  논리를 개진했으며 마치 보수 계층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듯
  했다. 넷째, 핵심인물은 김의원이 권유한 대로 다음날 해외로 출국,  대통령선거가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기 위해 6월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내 사무실에서 김용갑 의원을 만나보았다. 김의원은 처음에
  는  책  내용 이상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책 내용만으로는  소설 같아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지적에 마지
  못해 몇가지 질문에 답변해 주었다.
 
 
  ◆ ‘하나회 출신’ 핵심인물
 
  ―김의원이 당시에 만난 핵심인물은 김진영 장군이었습니까?
  “아니오. 내가 당시 알아보니까 그 그룹에서도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가까웠던 김진영씨는 못미더워했던 것 같아요.”
 
  ―당시  김진영 장군을 비롯한 육사 17기 출신 장군들의 친위쿠데타  설이 파다했는데….
 
  “핵심인물이  말한 것은 친위쿠데타가 아니오. 전두환 대통령은 물론이고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대통령후보를 모두 구속시
  키려는 것이었어요.”
 
  ―그 핵심인물이 분명히 체포대상자들의 이름을 거론했습니까?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정치지도자들을 모두 잡아넣겠다고  했으니 내가 겁이 났던 겁니다.”
 
  ―명분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당시 대통령 후보들이 유세를 가면 돌멩이를 던지는 등 지역감정이  극심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우니까 북한의 남침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므로 국가 안보상 민주화는 유보할 수 있다는 것이  었어요.”
 
  ―핵심인물이 당시 군인이었다면 어떻게 갑자기 출국할 수 있었을까 요?
 
  “제보한 중요인사는 군인이었지만 핵심인물은 그 당시 군인이 아니 었어요. 군인출신이었지요.”
 
  ―그 핵심인물은 군에서 신망을 받던 인물입니까?
 
  “그렇지요.”
 
  ―하나회 출신이었습니까?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보니 그 핵심인물 뿐아니라 동조하는 군인도 7, 8명 됐는데 대부분 하나회였어요. 그때는 하나회 출신
  이  군을  잡고 있을 때였거든요. 그래서 선후배간에 피비린내가 날것  같아 노심초사했던 겁니다. 전대통령에게 보고도 못하고 말입니
  다.”
 
  ―그  사람들이 실제로 쿠데타를 도모했다기보다 그 당시 군부가 위축된 상황에서 불만을 토로하는 정도 아니었습니까.
 
  “이미 뜻을 모은 그룹이 형성돼 있었고 그냥 뒀으면 4, 5일내로 일을  저지를 것 같았습니다. 거사 날짜를 정해 놓았다는 느낌을 받았
  습니다.”
 
  ―그 그룹이 그만한 힘을 갖고 있었습니까?
 
  “핵심인물과 관련된 군인들이 모두 병력을 갖고 있었어요.”
 
  ―핵심인물은  당시  김의원을 만나 쿠데타 움직임이 사전에 발각된  줄 알고 깜짝 놀랐겠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만나 군부 개입 움직임이 있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사실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우국충정에서 그런 생각을 했겠
  지만  내가 보기에 민주화 추세에도 맞지 않고 불가능하다고 했더니  오히려 나를 설득하려 했어요.”
 
  ―함께 동행했던 사람도 군인이었습니까?
 
  “그 당시는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쿠데타 움직임을 보안사에서는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나도  다른 기관에서 혹시 알고 전대통령께 보고할까봐 걱정이 돼서  알아봤는데 당시 고명승 보안사령관은 모르고 있었어요. 그래서
  보안사쪽으로  이야기가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차단을 해놓았습니다.
  ”
 
  ―그날  김의원은 핵심인물을 만나 설득하는 것에 실패한 것으로 보 이는데 어떻게 그 사람들이 쿠데타를 포기했습니까.
 
  “아무리  이야기해도 내 말을 듣지 않기에 ‘너 마음대로 해라. 그 러나 나는 조치를 취하겠다. 다만 24시간내 출국하면 비밀에 부치겠
  다’고 했더니 핵심인물은 바로 다음날 출국했어요. 그것을 보고 포기했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였습니다.”
 
 
  ◆ 11월말 출국, 대선후 귀국한 인물
 
  김용갑 의원의 책 내용과 인터뷰 내용을 종합하면 쿠데타를 하려 했 던 핵심인물의 윤곽을 다음과 같이 그릴 수 있었다.
 
  첫째, 당시는 군인이 아니었지만 현역 장성들을 규합할 정도로 군부 내에서 신망을 받고 있던 하나회 출신 인물.
 
  둘째, 육사 17기인 김용갑 의원과는 비교적 잘아는 사이인데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나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후보와는 거리를 두고
  있던 인물.
 
  셋째,  당시 상황을 혼란으로 보고 민주화보다는 국가 안보가 더 중  요하다는 논리를 정연하게 펼쳤던 인물.
 
  넷째,  87년 11월말에 서울 시청 앞 플라자호텔에서 김용갑 당시 민정수석을 만난 뒤 바로 다음날 갑자기 출국해 대통령선거가 끝난 뒤
  귀국한 인물.
 
  일단  김용갑  의원과 동기인 육사 17기생 중에서 첫째 사항에 맞는  사람을  찾아본 결과 허화평(許和平·52)씨와 허삼수(許三守·53)씨
  가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은 모두 12?2사태 때 신군부측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허삼수씨는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는
  데  직접적인 역할을 했고 허화평씨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참모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후 ‘5공설계사’로 불릴 정도로 신군
  부 집권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철희·장영자사건  때 정무1수석비서관이었던 허화평씨와  사정수석비서관이었던 허삼수씨는 대통령 친인척문제를 건드려 이순
  자씨의  눈밖에 나고 결국은 청와대에서 밀려나 미국으로 유학을 떠 나게 됐다.
 
  그런데  두 허씨중 둘째 사항에 비춰보면 전두환 전대통령과 거리가  더  먼 사람은 허화평씨였다. 애당초 전두환 전대통령은 허화평씨만
  해임하려  했는데 허삼수씨가 같이 사표를 냈을 뿐아니라 12대 총선때  전두환 전대통령은 해외에 나가 있던 허삼수씨에게 민정당 전국
  구를 제의했으나 허삼수씨가 허화평씨와 함께가 아니라면 응하지 않겠다고 하여 무산된 적도 있다.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후보가 출마했을 때도 87년초에 귀국한  허삼수씨는 노후보 진영에서 일을 많이 했지만 허화평씨는 노후보측
  을 전혀 돕지 않았다.
 
  셋째 사항의 ‘안보우선론’은 당시 군부내 장성이나 장성 출신이라면 대부분 갖고 있었을 법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생각을 명
  분있는  논리로 만들어 군 장성들의 동감을 얻고 대외적으로도 주장 할 수 있는 인물은 허화평씨뿐이었다.
 
  허화평씨는 홍콩의 시사주간지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87년 11월19일자에 기고한 ‘한국정치에 있어서 군부의 역할’이라는 글에
  서  자신의 소신을 뚜렷이 밝혔다. “군부엘리트가 정치권밖에 머물   수는  없으며 자기 몫을 담당해야 한다”는 견해를 담은 이 글은 13
  대 대선을 앞둔 시점에 국내에 소개돼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허화평씨의 이 기고문은 군부엘리트의 입장을 대외적으로 밝힌 ‘매 니페스토’이자 군인들을 향한 격문으로 읽히기에 충분했다.
 
  넷째  사항을 알아보기 위해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된 허화평씨의 80년대 행적을 정리해보았다.
 
  ‘허화평씨는  83년 1월 미 헤리티지재단의 초청으로 도미, 이 재단의 수석연구원으로 일하다가 86년 6월, 3년5개월만에 일시 귀국했다
  가  한달 남짓만에 다시 미국으로 떠나갔다. 86년 9월과 87년 8월말에도  잠시 다녀갔으나 귀국 때마다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도 매스컴
  과의 인터뷰는 일체 사양했다.
 
  그러다가 13대 대통령선거 1개월전인 87년 11월15일 귀국했다. 대통령선거를 앞둔 마당이어서 사람들은 그의 거취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그는 아무런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다.’
 
  그러면 87년 11월15일 귀국 이후 허화평씨의 행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6월12일  오전 서울 서소문로에 위치한 대한빌딩에 있는 허화평씨의 사무실을 찾았다. 허화평씨는 이 사무실에서 바이아기스(VIAGIS) 센
  터라는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바이아기스란 비전, 아젠다, 이슈를 약칭한 것으로 국가정책과 국가경영전략을 8개 분야로 나눠 연구
  하고 있으며 회원 중 하나회 출신 장군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허화평씨는 바이아기스센터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 핵심인물과 허화평의 행적 비슷
 
  허화평씨에게  제일 먼저 87년 11월15일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87년 11월15일에 서울에 들어왔다가 보름쯤 머물다가 다시 미국으로 나갔습니다. 당시 1주일 안에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정리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88년 5월에 가족을 데리고  완전히 귀국했습니다.”
 
  그의 대답은 김용갑 의원이 말한 핵심인물의 행적과 거의 일치했다.
  당시  신문이나 잡지는 13대 대선을 앞두고 허화평씨가 완전히 귀국  한  것으로 보도한 경우도 있었고 88년 3월에 귀국한 것으로 보도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허화평씨는 11월말경에 미국으로 나간 후 13대 대선과 총선이 모두 끝난 뒤인 88년 5월에야 귀국했다.
 
  ―87년  11월 당시 귀국할 즈음에 허 이사장이 쓴 ‘한국 정치에 있어서 군의 역할’이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에 실렸습니다. 이
  글은 국내 언론에도 소개됐는데 13대 대선을 앞두고 군의 정치 개입을  주장한 글이어서 파문이 일기도 했습니다. 왜 미묘한 시점에 그
  런 글을 썼습니까.
 
  “나도  귀국중인 비행기 안에서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를 펼쳤더니 이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원고는 미국에 있을 때인 9월말경
  기고한  겁니다. 영어로 썼는데 번역이 잘못된 것도 있어 오해를 불러 일으켰는지는 몰라도….”
 
  ―허  이사장은 그 글에서 ‘군부엘리트는 한국의 정치 장래를 민간의 손에 전적으로 맡겨둘 수 없다’는 민감한 주장을 펼쳤는데….
 
  “군이 권력을 잡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팔다리와 몸이 하나의 육체로  통합되어 있듯이 군은 국가체제와 떼놓을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글은 한가한 일반론을 펼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절박한 심정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한국  정치의  앞날을 내다보고 쓴 겁니다. 정치가 이제 민간으로 넘어갈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되면 군에 대해 피해의식이 있는 정치
  지도자들이 군의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쓴 겁니다.”
 
  12?2사태와 5공 초기의 핵심인물이었던 허화평씨는 당시 김영삼 후보나 김대중 후보가 정권을 잡게 되면 피해의식을 가진 이들이 군을
  어떻게 처리할지 불안했던 모양이다.
 
  “결국  그 후에 우려할 만한 사태가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YS가 하나회에 보복하고 군인사에서 불이익을 줄 뿐아니라 5?8재판까지 벌
  어지지 않았습니까.”
 
  ―허 이사장이 쓴 당시의 글은 한국현대사를 군부엘리트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것인데  군의 정치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
  다.  상당히 열정적으로 썼던데 당시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그 글의 메시지를 이해했을까요.
 
  “군인  출신 중에서 그런 글을 쓴 사람으로는 유일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글을 제대로 이해한 군인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
  글은 어디까지나 민간인들을 향해 쓴 겁니다. 당시 우리를 몰아세우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그 글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 왜곡했습니 다.”
 
 
  ◆ 13대 총선 출마. 전대통령이 말려
 
  ―민주화의  획을 그었다는 6?9선언도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았겠습니다.  군부엘리트의 주도권이 민간 관료나 정치인에게 밀린 것으로
  봤습니까.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단임을 실천하고 물러나는 과정에 내각제 개헌이니 호헌이니 하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권력
  주도권을  둘러싸고 군부와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 간의 싸움에서  군부가 밀린 겁니다.”
 
  ―당시  대선 때까지 시국상황을 보려고 들어왔다가 그 글이 파문을 일으키니까 갑자기 출국한 것은 아닙니까?
 
  “그 당시는 완전 귀국을 준비하기 위해 들어왔습니다. 들어온 김에 13대  총선에 출마하려고 했는데 전대통령께서 말리고…. 만약 공천
  을 받아 출마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더 머물러 있었을 겁니다. 전 대통령은 제가 정계 진출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어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이철희·장영자 사건 이후 가졌던 허화평씨에 대한  ‘앙금’이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5공설계사’
  의 움직임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이에 대해 허화평씨는 “그 이유는 모르겠어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87년 11월말에는 플라자호텔에 머물고 있었죠?
 
  “그렇습니다.”
 
  ―그때  김용갑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 찾아와 시국과 관련해 격론을 벌이지 않았습니까?
 
  “김용갑  의원을  여러번 만나긴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어요. 나는  바깥에  있다가 들어왔으니까 국내 상황을 주로 듣는 편이었고 바깥
  에서  느낀 점을 이야기한 정도입니다. 무슨 격론이랄 것이 있나요?  ”
 
  ―김용갑  의원이 쓴 책 내용과 인터뷰내용을 종합해보면 쿠데타 움직임의 핵심인물은 허 이사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나는 미국에 있었는데…“
 
  ―87년  11월15일 이후의 일입니다. 김용갑 의원의 증언이 진실이라면 그런 일을 도모할 인물은 허 이사장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이런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주간지에 나기도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어 대응하지 않았어요. 김용갑 의원은 민주화
  에  일익을 담당했다고 무용담을 쓴 모양인데 김용갑 당시 민정수석은  그런 것을 막을 위치에 있지도 않았고 영향력도 없었어요. 무슨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김용갑씨 발언에 비중을 두면 안됩니다. 우리가 부인을 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조사할 겁니까  ?”
 
  ―정말 그 상황에 거사를 할 생각이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그런 일이 가능이나 했겠어요.”
 
  ―87년 6?0항쟁 때부터 계엄이나 친위쿠데타설 등이 끊임없이 나돌지  않았습니까.  군에서 그런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돈 것 아닙니까.
 
  “당시 분위기에는 군인들 사이에서도 온갖 이야기가 오고갈 수밖에 없는  거죠. 만약 사회가 혼란해지고 안보에 문제가 생기면 군이 대
  비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 논의는 다 나라를 위해서 그런 겁니 다.”
 
  ―허 이사장은 어떤 입장이었습니까. 상당히 고민을 많이 했을 텐데  ….
 
  “저 같은 사람은 5공 권력주체들이 잘못한 부분은 내부에서 스스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남으로부터 정리되는 것
  은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는 했습니다. 그 정도 수준에서 저는 미국 에 들어갔어요.”
 
  허화평씨는  인터뷰 말미에 한 역사가의 표현을 빌려 “역사는 애매모호한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더 이상 파고 들어봐야 결코 사실
  을 확인할 수 없을 것이라는 암시인가.
 
  허화평씨 인터뷰를 끝낸 후 김용갑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허화평씨를 만나본 결과 김의원이 말한 핵심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라고 했더니 김의원은 “아니다”고 응답했다. 무덤속까지 비밀을  갖고 가겠다는 김의원에게 계속 따지는 것도 ‘결례’일 것 같아 수
  화기를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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