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인삼주 세계화 꿈꾸는 중앙대 정헌배 교수

醉月 2009. 2. 17. 07:58

인삼주 세계화 꿈꾸는 중앙대 정헌배 교수

경영학 교수가 왜 술에 빠졌냐고요? ,우리도 코냑 같은 명품주 만들어야죠
중앙대 경영학과 정헌배(54) 교수는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중앙대 창업대학원장을 지냈다. 창업대학원은 프랜차이즈 가맹 본사의 사장과 고위 임원, 창업컨설턴트 등 창업과 관련된 ‘나이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특수대학원이다. 영남대 경영학과 출신인 그는 1984년 말 프랑스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인 1985년 봄학기부터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로 근무해 중앙대 재직만 올해로 25년째다.

그러나 정 교수는 5년 전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완전히 다른 길을 묵묵히 걷고 있다. 우선 서울 집을 떠나 안성의 한 외딴 집에서 혼자 기거한 지가 벌써 5년째로 접어들었다. 가족이 있는 서울의 집에는 가끔씩 들르는 정도. 그의 거처는 야트막한 산에 위치한 폐사(閉寺)의 방 한 개로 이곳에서 차로 2분 거리에 그가 평생을 걸쳐 꿈꾸어온 인삼주연구소가 둥지를 틀고 있다.

경기도 안성시 가사동 15-91 번지에 위치한 농업벤처기업 정헌배인삼주가㈜ 연구실에서 만난 정헌배 교수는 점퍼 차림이었다. 2년여 전에 정장 차림의 ‘정헌배 교수’를 본 적이 있는 기자로서는 다소 낯선 모습이었다. “기자님 오신 다고 평소와 달리 옷을 신경 써 입은 겁니다. 시골에 있다 보니 옷차림에 신경 쓸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의 양손에는 동상을 입은 흔적까지 눈에 띄었다. “늘 산에 있다 보니 추위가 평지보다 매섭다”며 “경비 아낀다고 난방도 평소에 잘 가동하지 않는 편”이라고 말했다. ‘대학원장까지 지낸 그가 무슨 엄청난 일을 한다고 손에 동상까지 걸려가면서 이 고생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지가 도움으로 연구소 부지 마련
‘부동산 투기’ 소문에 곤욕 치르기도


정헌배인삼주가(www.insamju.net)는 서울을 기준으로 보면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다. 경부고속도로 안성IC에서 진출, 안성 방면으로 곧바로 우회전해 줄곧 직진하다가 2개 터널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빠지면 정헌배인삼주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전체 부지는 21만4877㎡(6만5000평) 규모지만 지금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연구소 시설만 들어서 있다. 이 땅은 그를 잘 아는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마련했으나 규모가 워낙 커 ‘유명세’를 타야 했다. 한때 “정헌배 교수가 부동산 투기에 나섰다”는 소문이 거세게 일어 국세청을 비롯한 여러 정부기관으로부터 조사를 받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는 이곳에 머지않아 지하 12m 깊이의 지하 술 저장고와 제조 공장, 인삼밭, 교육시설(인삼대학)까지 건립할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러나 현재로선 실현 가능성을 점치기가 쉽지 않다.


인삼·안성쌀 발효 후 증류시켜 3년 숙성
기존 인삼주는 소주에 인삼뿌리 넣은 것


그를 이해하려면 우선 그가 만드는 인삼주를 알아야 한다.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인삼주는 일반 희석식 소주에 인삼 한두 뿌리를 집어 넣은 상태의 술이다. 어찌 보면 사람 모양 같기도 한 근사한 인삼이 소주에 푹 빠져 있는 모습 자체가 애주가들의 입맛을 다시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정헌배 교수가 만드는 인삼주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지금까지의 인삼주는 인삼 성분을 우려낸 술이지요. 소주에 한동안 인삼을 담가 놓으면 인삼 성분이 천천히 소주에 우러나는 원리를 이용한 겁니다. 그러나 이 같은 술은 오래 두면 혼탁해지기 쉽고 또 인삼 성분이 제대로 술에 혼화(混化·제대로 섞이는 것)되기도 어렵습니다.”

그가 만드는 인삼주는 증류주인 위스키, 코냑에 가깝다. 100% 우리 쌀에 쌀알 크기로 잘게 썬 최상급의 6년근 인삼을 섞어 발효시킨 뒤 이를 다시 증류시켜, 적어도 3년 이상 지하저장고에서 숙성시켜 만든다. 우리 쌀과 인삼, 누룩, 물 외에는 아무것도 섞지 않은 ‘무공해 무첨가 술’인 셈이다. 안성은 6년근 인삼의 국내 최대 생산 지역이며, 안성쌀 역시 오래전부터 명품쌀로 알려져 왔다. 그의 연구소가 이곳에 자리잡기에는 안성시청의 지원도 컸다. 정 교수는 “국내에서는 아직 이런 방법으로 만든 인삼주가 없다”며 “인삼주를 영국의 스카치 위스키, 프랑스의 코냑 같은 세계적 명품주로 만들겠다는 목표로 이 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프랑스 유학 시절에 술 마케팅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술과의 인연이 시작됐으니 그의 ‘술 경력’도 30년 남짓이다.

그렇다고 술 양조학 학위를 한 것도 아닌 그가 인삼주 제조에 직접 나선 이유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인삼주를 포함한 전통주 복원을 아무리 설명해도 대기업 주류회사는 들은 척도 안하고 전통주 업체들은 영세해 개발 여력이 없었지요. 결국 제가 직접 해보겠다고 나선 셈이죠.”


좋은 술의 기본은 누룩… 직접 배양해 사용
옹기에 담아 지하 보관, 매일 국악 들려줘


연구소 문을 열자마자 누룩 향이 왈칵 밀려왔다. 술 빚는 냄새다. 쌀로 빚는 모든 술의 원료가 되는 누룩은 이곳 1층 배양실에서 직접 키운다고 한다. 그의 ‘술 강의’는 누룩부터 시작됐다. “좋은 술의 기본은 균(누룩)입니다. 일본 술을 만드는 균은 ‘오리제균’이라고 하는데 이 균은 따뜻한 기운을 좋아해 일본 술 중에는 데워 먹는 게 많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 술은 찬 성분을 좋아하는 ‘라이조푸스균’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차게 마시지요.” 한국 술은 차갑게 마셔야 하는 근거를 대기 위해 그는 조선시대 ‘향약집성방’까지 인용했다. “이 책에는 우리의 4가지 주 음식인 밥, 국, 장, 술을 사계절에 비유해 설명합니다. 밥은 ‘봄’같이 따듯하게, 국은 ‘여름’처럼 뜨겁게, 장은 ‘가을’처럼 서늘하게, 술은 ‘겨울’처럼 차갑게 마시라고 써놓았습니다.”

그의 이름을 붙인 ‘정헌배인삼주’는 발효, 증류과정을 거친 후 지하 저장고에 보관돼 최소 3년의 숙성을 거친 뒤에야 세상에 나온다. 작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주문생산’에 들어간 정헌배인삼주는 와인, 위스키를 숙성시키는 오크통 대신 전통 옹기통에 담아 보관 중이다. 특유의 나무향이 강한 오크통과 달리 맛과 향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도 오크통처럼 숨을 쉬는 보관재료로는 옹기가 최적이기 때문이다.

 

9리터 한 통 순재료비만 30만원 넘어
“자금 여력 없어 아직은 주문생산만”


-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증류·숙성의 과정을 다 거친 인삼주 맛을 본 뒤에야 사는 게 맞지 않나?

“물론 그렇다. 그러나 현재 9리터들이 옹기 한 통에 들어가는 인삼주를 만드는 데 쌀 20㎏, 6년근 인삼을 비롯해 순수 원료비만 30만원이 넘는다. 하지만 나는 ‘자본’을 갖고 시작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대량으로 미리 술을 만들어 놓을 여력이 없다. 때문에 고객의 주문(9리터들이 옹기 한 통에 99만원)을 받아 미리 돈을 받고서 인삼주를 만들고 있다. 고객은 주문 뒤 3년이 지나 일반 술병에 담은 형태의 인삼주를 받을 수 있다. 최소 3년(국제공인 숙성주로 인정 받기 위한 최소 연한)은 숙성시켜야 하기 때문에 자녀 출생, 결혼 같은 특별히 기념할 만한 날에 쓸 술을 미리 준비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 서양에는 자녀 출생 후 그 애가 20년 후 대학에 가거나, 결혼을 하는 날 하객들과 같이 마실 와인을 미리 준비해두는 풍습이 있다.”

정 교수가 안내한 지하 저장고에는 수백 개의 옹기가 고객의 이름이 부착된 상태로 3년 후 세상에 나올 채비를 차분히 하고 있었다. 또 이곳에는 연구 목적으로 약 10년 전에 이미 증류과정을 거친 인삼주들도 있었다. 정 교수는 “증류 직후의 인삼주는 노란색이 약간 비칠 정도로 거의 투명한데 3~5년 숙성을 거치면 황금빛이 뚜렷해지고 술 맛도 한결 부드러워진다”고 말했다. 증류 직후 40도의 알코올 도수는 3년 숙성 후에는 36~37도로 약간 내려간다.

- 지하저장고에 국악이 들리던데 음악을 틀어주는 이유는?

“유럽에는 와인, 위스키를 숙성시킬 때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는 경우가 많다. 음악의 잔잔한 파장이 술의 갖가지 성분이 잘 섞이도록 돕는다는 원리를 활용한 것이다. 오전·오후 하루 4시간씩 국악을 들려주고 있다.”


“야구 심판 보다가 직접 야구 선수로 나선 셈
수백년 대물림 가능한 빈티지 인삼주가 목표”


프랑스 파리9대학에서 ‘세계 주류시장의 국제 마케팅 전략’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85년에 귀국한 정 교수는 그동안 정부의 주류(酒類) 정책에 주도적으로 관여하면서 국내 민속주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해왔다. 약주 판매 지역을 생산 지역에 국한한 ‘약주 공급구역’을 해제하고 술 제조 첨가물 제한을 풀어 국순당 같은 민속주 업체들의 경영에 날개를 달아준 것도 그가 정부의 세제발전 심의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이뤄낸 결과였다.

그렇다고 직접 술을 만들겠다고 뛰어든 것은 다소 무모하다는 게 현재까지의 평가다. 야구 심판을 보다가 직접 야구 선수로 나선 꼴이기 때문이다. “제가 추구하는 바는 전통주 복원, 제조기술 과학화, 우리 술 세계화로 집약됩니다. 일단 현재 진행 중인 인삼주 연구로 첫 번째와 두 번째 목표는 어느 정도 이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인삼주의 세계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의 목표는 수백년 이상 ‘대(代)물림’이 가능한 빈티지(vintage·포도 수확연도를 말하는 것으로 술 제조연도를 표시) 인삼주를 만드는 것이다. “100년 된 와인, 100년 숙성 위스키가 있듯이 우리 술도 수십 년 뒤에 더욱 맛이 살아나는 세계 명품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인삼주의 세계화를 통해 우리 전통주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 와인, 위스키, 사케 같은 외국 술에 관심이 더 많은 애주가들이 다시 민속주를 찾도록 하겠다는 것이 ‘술 박사’ 정헌배 교수의 간절한 바람이다. ▒


| 인삼주 제조 과정 |

술밥제조→발효→증류→숙성의 4단계
대량생산 체제 못 갖춰 하루 8통만 생산


정헌배인삼주는 크게 4단계 과정으로 만들어진다. 술밥제조→발효→증류→숙성 과정을 거친다. 술밥 제조에는 100% 안성미와 안성 6년근 인삼이 들어가며 일주일쯤 진행되는 발효과정에는 한국전통 발효균(누룩)과 비봉산 약수가 쓰인다. 그리고 증류설비 중에서 인삼주가 지나가는 부분에는 순동(純銅) 고리를 사용했다. 증류는 대개 4시간 정도 진행되며 이후 전통 옹기에 담아 봉인을 한 후 지하저장고로 옮겨져 숙성단계로 들어간다. 9리터 옹기 한 통을 숙성 후 병입하면 500mL 술병 17~18병이 나온다. 결국 고객은 500mL 인삼주 18병을 99만원에 사는 셈이다.

그러나 현재 정헌배인삼주가에는 연구소만 들어서 있어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정헌배 교수는 “현재의 시설로는 하루에 최대 9리터들이 옹기 독 8개 분량만 생산할 수 있다”며 “대량생산은 본공장이 지어진 다음에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 본공장 건설의 구체적인 일정은 잡지 못하고 있다. 대규모 투자가 이뤄지지 않으면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일단 내가 시작을 했으니 인삼주 대중화에는 다른 분들이 힘을 보태주기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