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국경' 여행

醉月 2009. 9. 8. 08:53

백두산에 세 번 오를 계획을 세우다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국경' 여행 정만진 (daeguedu) 기자

  

  

▲ 백두산 천지 2009년 8월 24일, 드디어 백두산을 북파(북쪽으로 등정하는 산길)로 올라 눈부시게 환한 천지를 보았다. 도유(서양말로 가이드)는 이렇게 맑은 날씨에 투명한 천지를 보는 것은 "천운"이라고 하였다. 

아직 백두산에 가보지 못했다. 압록강도, 두만강도 물론 가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윤동주 생가에도 가보지 못했고, 광개토대왕비도 장수왕릉도 보지 못했다. 국내성, 환도산성, 호산장성 그 어느 곳에도 들른 적이 없다.

 

줄곧 중·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고, 대학에서 소설창작론 등을 가르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만나는 사람의 대부분이 교수나 교사들이고, 시인 아니면 소설가가 주종이다. 그러면서도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 윤동주 생가, 고구려 유적 등을 한번도 찾지 않았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안타까운 일이다. 금강산, 김일성 별장에서부터 판문점에 이르는 휴전선 일대, 백령도와 연평도에 가보았으니 그만하면 '국토'에 대한 예의는 갖춘 게 아니냐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소설가이자 교육자로서 2% 부족한 것만은 사실이다.

 

특히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야 하는 장면에 부닥쳤을 때, 뭐라고 할 것인가. 돈이 없어서 가보지 못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사실일 수는 있으나 설득력 있는 진실은 되지 못한다. '서시'를 가르치면서 윤동주 생가와 동명학교를 생생하게 언급하지 못하면 반쪽 강의가 될 것이고, '황조가' 수업을 하면서 환도산성을 말하지 못하면 그 또한 살아있는 문학시간은 못될 것이다. '여수장우중문시'가 현존 가장 오래된 우리 한시라고 말만 하면 뭣하나. 비록 대첩의 현장을 사진으로 보여주지는 못하더라도 광개토대왕비나 장수왕릉의 위용 정도는 제시할 수 있어야 '의도의 오류'나 '감상의 오류'가 최소화되는 교수-학습이 될 것 아닌가.

 

그래서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이어지는 '국경'을 한번 답사하기로 했다. 9월이 되면 백두산 입산이 금지된다니 부랴부랴 떠나지 않다가는 내년으로 미루어야 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 지금 떠나지 않으면 뒷날을 기약할 수 없다. 누가 알겠는가. 금강산과 개성 방문이 어느 날 갑자기 끊긴 것처럼 '국경' 일대에 발을 들여놓는 일이 불가능해질지 모르는 일 아닌가. 그렇지 않더라도 오늘의 풍광과 내년의 그것은 반드시 다른 법이니, 내년에 다시 가서 색다른 모습을 또 볼 수 있다면 그야말로 더 더욱 경사가 아니랴 여기면서 무조건 오늘 여장을 꾸려 먼 길을 출발해야 하리.

 

마음 같아서는 압록강과 서해가 마주치는 곳에서부터 두만강이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지점까지 걸어서 횡단을 했으면 싶지만, 그것은 어차피 가능한 꿈이 아니니 접어야 한다. 계획을 세워본다. 여행사들 상품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들은 으레 백두산을 중간에 놓고 고구려 유적 아니면 윤동주 생가 쪽 중 한 방향을 붙인 여정을 진열한다. 좀 더 뜻깊은 길을 잡아야 한다. 길이 있어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법일 터.

 

   

▲ 윤동주 생가 전경 2009년 8월 25일, 윤동주 생가를 방문했다. 그는 없고, 그가 어릴때 뛰어놀던 마당과 숨쉬던 맑은 공기만은 남아서 여전한 향기로 손님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비사성을 빼놓을 수 없다. 고구려와 수·당이 그토록 치열하게 맞붙어 싸웠던 곳이 바로 비사성인데 그 유적을 눈에 담지 않고서 어찌 민족교육을 이야기할 수 있으리. 그러려면 먼저 대련을 방문해야 한다. 백두산은 가볼 수 없는 길, 북한에서 등정하는 등산로를 빼고는 모두 다 밟아보아야 한다. 웬만한 고구려 유적은 다 들러야 하고, 윤동주 생가며 대성중학교, 연변에 세워진 최초의 조선족 교회인 명동교회, 압록강과 두만강도 꼭 가보아야 한다.

 

그런 마음을 쓸어담으니 대련(비사성)- 단동(압록강 단교와 위화도)- 집안(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국내성과 환도산성)- 백두산(남파, 서파)- 백두산(북파)- 용정(윤동주 생가)- 도문(두만강), 이렇게 여정이 계획되었다. 날마다 5시간, 혹은 7시간씩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난코스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학교나 신문사에 들러 책에서 읽는 것과는 다른 생생한 이야기들을 날것으로 들으리라. 이만하면 민족교육을 위한 답사여행이라 해도 손색이 없으렷다.

 

여행안을 제시하니 일행들이 한결같이 난색을 드러낸다. 백두산을 세 번씩이나 올라갔다는 여행객은 본 적은커녕 들은 적도 없다, 이렇게 다니다가는 집에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등등. 하지만 칼을 뽑았으면 호박이라도 찔러야 하는 법, 여행 기간을 하루 줄이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백 번 올라가야 두 번 볼 수 있다는 게 백두산 천지인데 어렵게 먼 길을 가면서 어찌 한번 등정으로 요행을 바라겠느냐", "백두산을 몇 번 올라가는 걸로 천지(天池)를 보려는 자는 정말 천치(天癡)라고 하더라", "남들이 잘 가보지 않는 비사성도 반드시 봐야 교육적 여행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등등. 심지어는 '만주의 호랑이' 김동삼 독립운동가가 남긴 유언까지 언급했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 지켜보리라.

 

북간도 용정에 있는 '일송정'의 이름도 김동삼의 호를 따서 붙여졌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사람들의 추앙을 받을 만큼 그는 신출귀몰한 독립군 장군이었다. 서로군정서 참모장으로 청산리전투에 참가했고, 1927년 김좌진, 이청천 등이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를 합하여 민족유일당촉진회를 주최했을 때에는 의장으로 피선되었다. 그의 며느리였던 이해동 여사가 수기 <만주 생활 77년>을 통해 평생에 걸쳐 시아버지를 세 번밖에 못 보았다고 실토할 만큼 그는 오직 생애 모두를 독립운동에 집어던진 사람이었다.

 

그는 향년 60세이던 1937년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 지켜보리라." 행을 구분하면 그대로 절명시(絶命詩)처럼 보이는 이 비장한 유언은 그가 죽으면서 남긴 피맺힌 외침인 것이다. "이런 땅을 어찌 편하게 다닐 수 있겠습니까.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그 많은 선배들이 한을 품은 채 눈도 감지 못한 채 묻혔지만 이제는 시신도 찾지 못해 아직껏 죽어서도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는데,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우리가 잠깐의 어려움도 참지 못해서야 예의가 아니지요."

 

그러면서 박진관의 명저 <신간도 견문록>을 꺼내어 펼쳤다. <신간도 견문록>은 영남일보 박진관 기자가 2006년 한국기자협회 추천으로 1년 이상을 신간도에 머물면서 연변과학기술대 사회교육원에서 수학도 하고 마을마을 골짜기골짜기 아니 다닌 곳 없이 답사도 하고, 그 이후 여러 차례 재방문하여 보강 취재를 한 끝에 한국언론재단의 연구저술 지원을 받아 발간한 책이다. 이미 2008년 2월 15일 출판기념회에 참가하여 구입한 이래 여러 번 독파한 바 있지만, 이번 여행을 앞두고 다시 공들여 읽고 있는 좋은 책이다. 그 책 중 한 부분을 모두에게 읽어주면서 말했다. "선조들을 기리는 안동 분들의 마음을 배웁시다."

 

삼원포에서 (수많은 독립군 요원과 지도자를 배출한) 합니하 신흥무관학교까지는 남동쪽으로 약 35km 거리이다. 그러나 100리가 채 안 되지만 길이 험하다. (버스로) 1시간 반쯤 지나 도착한 곳은 광화진 패루. 여기서 약 4km쯤 가면 합니하가 나타난다. 선조들이 힘들게 다녔던 길을 버스로 편안하게 가는 것이 도리가 아닌 듯하여 (경북 안동에서 선조들의 독립 유적지를 찾아 여기까지 온) 일행들은 버스에서 내려 신흥무관학교 옛터까지 다시 4km를 걸어가기로 했다. 

 

이윽고 비행기는 떴다. 연평도와 백령도에 갈 때 아래로 지나가면서 그 웅자에 감탄을 거듭했던 인천대교가

까마득하게 아래로 내려다보였다.

 

 

  ▲ 하늘에서 본 인천대교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인천대교는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백령도와 연평도로 가면서 각각 올려다보던 때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작아보인다고나 할까. 바다보다도 하늘보다도 그것은 너무나 왜소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 쳐다본 인천대교 2009년 8월 5일, 아래로 지나가면서 인천대교를 올려다보았다. 그 위용은 사람을 압도했다. 

비사성, 고구려 천리장성이 시작되는 역사의 '국경'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1시간 15분 정도만 지나면, 바다를 끼고 장엄하게 드러누워 있는 대련이 창밖으로 아득히 내려다보인다. 아니, 대련 시가지보다 먼저 봉추도(棒木追島)가 눈에 들어온다. 대련에서 불과 9km 떨어진 곳에 방망이 모양으로 붙어 있는 섬이라 하여 이름이 그렇게 지어졌다.

 

'봉추'?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유비의 군사(軍師)가 언뜻 생각난다. "와룡(제갈공명)과 봉추(방통) 중 한 사람만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회자되던 그 유명한 방추 말이다. 방추는 일찍 전사한다.<삼국지연의> 를 읽으면서 독자들이 한결같이 안타까워하는 몇 대목 중 하나가 바로 그가 새파란 나이에 어이없이 죽는 그 장면이다. 그런데<삼국지>를 보면 방추는 전투를 직접 지휘하며 싸우고, 와룡은 언제나 뒤에서 지휘만 하지 위험에는 노출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사람 중 누가 더 뛰어난 인물일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두 사람이 맞붙어서 싸워본 적이 없으므로……. 어쨌거나, 봉추는 와룡에 비해 천운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 봉추도 대련 앞바다에 떠 있는 봉추도. 중국 최고위급 인사들과 외국 귀빈들을 위한 국빈관이 있으며, 섬에 들어가려면 20위안의 입장료를 내어야 한다. 들어가보지는 못했고,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며 사진만 찍었다.

다시 어쨌거나, 대련 앞바다의 봉추도는 방통[鳳雛]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한자 글자도 다르다. 봉추도는 중국 공산당 간부들이 자주 방문한 곳으로 이름이 높은데, 섬 안에는 국빈관이 있다고 한다. 주은래, 등소평, 유소기, 호요방, 강택민, 화국봉, 주덕 등 쟁쟁한 거물들이 머문 국빈관은 1961년에 완공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이 그곳을 방문할 수는 없다. 애초부터 봉추도 방문은 우리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코 섬 안으로 들어가는 데에 20위안(약 4천원)의 입장료를 납부해야 하기 때문은 아니다.

 

이윽고 비행기가 대련 시가지 상공을 휘감아돈다. 인구가 600만 명을 넘는 대도시라더니 과연 온 사방이 건물들로 가득 메워져 있다. 그런데 첫 느낌은 그리 상쾌하지가 못하다. 무슨 아파트가 저렇게 많담! 언젠가 신문에서 프랑스 청년학도가 한국인들이 왜 아파트를 그토록 선호하며, 그 속에 갇혀서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는지를 다룬 논문으로 자기네 나라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문화수준이 높은 서양인들에게는 거의 비호감이라는 아파트를 이곳 대련사람들도 저렇게 지어대는 것을 보면, 여기도 아파트 투기가 심한가 하는 의구심이 일어난다. 그렇지 않다면, 인구는 20배가 되지 않지만 국토 면적은 우리나라(통일한국)에 비해 무려 50배나 되는 중국 사람들이 뭐가 아쉬워서 닥지닥지 아파트를 지어놓고 거기 들어가서 산단 말인가.

 

 

▲ 대련항 하늘에서 내려다 본 대련항. 인구 600만을 넘는 대도시다운 위풍을 보여준다. 그러나 비행기가 공항으로 다가갈수록 어마어마한 아파트 밀림들이 도시를 꽉 메우고 있어 찾아오는 이의 첫인상에 답답함을 안겨주는 도시이다.

그러나 대련의 첫인상은 금세 산뜻하게 바뀌었다. 면적이 176만㎡나 되어 여의도광장의 약 5배나 되는,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대륙에서도 가장 큰 광장인 성해(星海)광장에서 목도한 거대한 '책' 덕분이었다. 대련시 100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책 모양의 거대한 조각이 바다를 향하여 활짝 펼쳐져 있었는데, 그 위에는 어림잡아 수백명은 족히 넘을 것 같은 대단한 군중들이 뛰어놀고, 기념촬영을 하고, 손을 맞잡은 채 즐거워하고 있었다.

 

우리 한국인들이 흔히 '만주'라고 부르는 중국의 동북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과 연변조선족자치주(연길, 용정, 화룡, 도문, 혼춘, 돈화, 안도현, 백두산 등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함경북도와 러시아에 가로막혀 동해를 볼 수 없다.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망망대해를 보려면 가장 가까운 대련으로 와야 한다. 그 탓에 이곳 대련은 1년 동안 외국인은 100만 명 안팎이 방문하지만 내국인인 중국인 관광객은 무려 3천만 명이나 찾아온다고 한다. 우리는 한반도 어디에 살더라도 대략 2시간 정도 달리면 동해, 서해, 남해 중 어디든 닿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바다가 멀기만 한 것이다. 그래서 저들이 저토록 좋아하는 것일까.

 

 

▲ 바다를 향해 펼쳐져 있는 거대한 '책' "이제 대련은 100년 역사를 맞이하여 새로운 장을 열었다, 새 역사가 펼쳐졌다!" 이런 뜻에서 상해광장 끝 바다와 맞붙은 곳에 어머어마한 책 조각을 건립한 대련시 관계자들의 문화적 인식이 돋보이는 멋진 관광 상품(?)이었다. 

무수한 군중들이 정말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많이 올라 환호작약하는 광경을 보노라니, 이 어마어마한 책 조각은 대련에서도 가장 눈부신 명소가 아닐까 여겨졌다. 거대한 책 조각이 등장하게 된 것은 도시 출발 100년을 맞이하면서 '대련의 새 역사를 펼쳐나가자,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했으니, 대련시가 100년을 맞아 기념조각으로 거대한 책을 바닷가에 세운 것은 정말 뛰어난 지혜가 아니랴.

 

대구시교육청의 신축 건물이 생각났다. 대구시교육청은 이 고층건물을 신축하면서 규칙을 정하여 호언하기를 '전통미의 아름다움'을 두드러지게 나타낼 수 있도록 짓겠노라 공언하였다. 그러나 그 건물은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러한 전통적 양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래에서 올려보나 멀리 떨어져서 쳐다보나, 방향을 바꿔가며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전통미는커녕 일반적 아름다움도 전혀 발견되지 않는 밋밋한 상자에 불과하다. 성해광장의 거대한 책에는 규모로나 아름다움으로나 내재된 의미로나 도무지 미칠 수 없는 성냥곽에 지나지 않는다. 엄청난 예산을 쏟아붓고도 이런 건물밖에 짓지 못하는 곳이 대구광역시를 대표하는 교육기관이라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대구시교육청 전통미가 돋보이도록 짓겠다고 했지만, 그런 느낌은 전혀 주지 못하는 대구시교육청 건물에 인부들이 매달려 유리창 청소를 하고 있는 아슬아슬한 광경.

 그렇다고 성해광장에서 마냥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늘의 가장 높은 목적지, 고도만이 아니라 그 뜻으로도 최고의 방문 예정지인 비사성(卑沙城)으로 가야 한다. 차량은 금세 시가지를 벗어났고, 멀리 비사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사성을 중국 사람들은 대흑산산성(大黑山山城)이라 부른다. 대흑산(663.1m)에 있는 산성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백두산이라 부르는 것을 저들은 장백산이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비사성은 고구려 때 축조된 성이지만,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비사성은 대흑산 가파른 절벽 위에 석회암을 드높여 쌓아 축조한 거대 석성(石城)으로, 실제 현장에 도착해서 하늘 끝까지 쳐다보면 '사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다만 서문(西門)을 통해서만 오를 수 있다(<삼국사기>권21 고구려본기 제9편)'는 기록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실 그 자체임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천혜의 요새 비사성은 수·당이 바다를 건너오면 즉각 마주치는 지점에 있었으니, 수·당도 고구려를 공략하려면 자연스레 군사적 요충지인 비사성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언제나 전쟁은 이 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만큼 나라를 지키는 데 있어서 그 어느 곳보다도 중요한 국경 지대였던 비사성은 조국 고구려가 수(隋)·당(唐)과 전쟁을 할 때마다 적군의 침략을 막는 최전선 역할을 감당해왔던 셈이다. 수나라 양제(煬帝)가 614년(영양왕 25) 7월(음력) 마지막으로 고구려를 침공해왔을 때에도, 고구려군은 하나뿐인 성문을 굳게 닫고 저항해 수나라 군대는 미미한 전과도 올리지 못한 채 물러가고 말았다. 수는 결국 건국한 지 40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으니 고구려와 벌인 무모한 전쟁 탓이었고, 수를 물리치고 조국을 지켜낸 선봉장이 바로 비사성이었다.

 

 

▲ 비사성 사면 중 서쪽으로만 사람이 오를 수 있는 비사성. 과연 가파른 절벽 위에 우뚝선 비사성의 위용은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올라가보고 싶다는 욕망에 들끓게 하였다. 나도 이런데, 옛날 먼 길을 달려 쳐들어온 수나라, 당나라 장수와 군사들은 오죽하였을까.

세월이 흘러 다시 당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비사성에도 비극은 닥쳐왔다. 645년 4월, 당나라는 4만여 대규모 수로군으로 비사성을 공격한 뒤, 다음달 초 정예병으로 서문을 기습하였다. 중과부족이었던 고구려군은 결국 패하고, 퇴로가 없어 살아남은 8천여 명은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당 태종은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에게 대패한 뒤 물러갔고, 비사성에서도 철수하였다. 당태종은 귀국 후 전쟁에서 다친 부상을 이기지 못해 곧 죽지만(649년), '중국을 위해 중국의 수치를 숨긴다(爲中國諱恥)'를 역사 기록의 원칙으로 삼아온 중국 사필(史筆)의 전통에 따라 <당서> 또한 당태종의 사인을 애매하게 기록함으로써 스스로의 치욕을 덮으려 한다. 당태종 이세민은 아들에게 유언한다. "결코 고구려를 침범하지 말라."

 

비사성에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대련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고, 멀리 바다 위를 오가는 작은 배들까지도 어김없이 시야에 포착된다. 수·당의 수군이 전함을 몰고 쳐들어오는 것을 고구려 군사들이 못 볼 리 없고, 적들이 몰려와 성을 향해 진격할 때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좌우로 가파른 산세가 날을 세우고 서 있는 골짜기 한복판에 난 계곡길뿐이니, 미리 기다리고 있던 고구려 군사들이 양쪽에서 불화살을 날리고 기름에 절여 불붙인 나무둥치들을 굴릴 때 그들은 도무지 살아남을 재주가 있을 수 없어보였다. 게다가 성벽 바로앞까지 다가온다 한들 일부러 깎는다 해도 그렇게 날카롭게 벼리지는 못했을 것 같은 절벽을 기어오르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했을 터이다. 듣던 그대로 '역시 비사성은 하늘이 내려준 천혜의 요새로다!' 싶은 감탄이 저절로 일어났다.

 

 

▲ 비사성에서 바라보는 대흑산 산정 풍경 온통 바위암벽으로 이루어져 저절로 천혜의 요새가 되어주었던 고구려 비사성이 위치하고 있던 대흑산 산정에는 지금 중국의 레이다 기지가 설치되어 있다. 비사성은 예나지금이나 여전히 국방적 의미가 뚜렷한 장소인 모양이다.

 

 

비사성 점장대에서 바라보는 대흑산 산정 방향의 풍경

비사성, 고구려 때에는 국경의 시작점이었다. 수·당과 맞붙은 경계선 중에서도 땅으로서는 가장 서쪽, 그리고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지키는 최선봉의 국경 지대였다. 천리장성이 시작되는 고구려 영토의 출발 지점이었다. 비사성 점장대에 올라 저 아래로 굽어보이는 바다와 대련 시가지를 바라보노라니, 백령도에서 강원도 고성 앞바다까지 이어지는 휴전선이 국경이 아니라, 이곳이야말로 우리 역사의 진정한 국경선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는 감회가 저절로 솟구쳐 올랐다.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만주벌판(저들은 '동북평원'이라 부른다)을 부지런히 '관광'한다. 혹자는 본디 우리땅이었던 곳을 부질없는 과거회귀적 역사관에 빠져 비싼 돈까지 만주벌판에 뿌려대며 돌아다닌다고 힐난하기도 하지만, 고구려 시대의 지나간 국경을 마음으로 안타까워하는 일이 분단의 현실을 극복하고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사의 결정적 시기를 새로이 맞이하려는 염원의 발로일 수도 있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젖는다. 우리의 국경선은 백령도에서 고성 앞바다까지 이어지는 휴전선이 아니라 적어도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라야 한다는 당위를 남의 땅이 되어버린 비사성 성루에서 안타까이 되새겨보는 것이다. 

 

 

▲ 비사성에서 내려다보는 대련 시가지와 바다 비사성에서 바라보면 바다의 움직임과 대련 시가지의 동향이 한눈에 보인다. 고구려 군사들은 이곳에서 적들의 침입을 살피며 낮과 밤을 쉼없이 보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