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주변에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계시면 한 번 여쭤보시라. “팬텀이란 전투기를 아세요?” 라고 말이다. 물론 이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개중에는 ‘최강의 전투기’로 기억하시는 분들도 분명 계실 것이다. F-4 팬텀, 물론 지금은 최신예라고 하기엔 좀 오래된 전투기이긴 하지만 우리나라가 도입하던 당시에는 그런 소리를 들을 만 했다.
▲ 우리 공군의 F-4D. 도입 당시에는 미 공군조차 도입한지 1년 밖에 안되었던 최신예기로, 초기 몇 대는 방위성금을 통해 도입했다.
아무도 모르는 유령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아직 전투기의 절대다수는 왕복엔진으로 프로펠러를 돌려서 날아다니는 방식이었다. 허나 그 기술적인 수준에 차이는 있었지만 각 나라의 군대는 장래를 위해 제트엔진을 사용하는 전투기의 개발에 열중하고 있었고 여기에는 미 해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미 해군용 제트 전투기 개발계획은 항공기 제작사인 맥도널(McDonnell)이 맡아 2차대전이 끝나가던 무렵인 1945년 초에 XFD-1 팬텀(Phantom : 유령) 전투기를 개발한다.
이 당시 미 해군의 항공기 명명법에 의하면 X는 시제기(혹은 실험기)임을, F는 전투기를 뜻하며 D는 맥도널에서 만들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1은 이 팬텀 시리즈 중 첫 번째로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하지만 D는 또 다른 항공기 제작사인 더글라스(Douglas)가 쓰게 되면서 맥도널은 H를 쓰게 되었다. 그래서 실제 양산된 전투기의 이름은 FH-1 팬텀이 되었다.
▲ FH-1 팬텀. 미 해군에서 팬텀이란 이름을 사용한 첫 전투기다. 미 해군이 운용한 최초의 제트 전투기이기도 했으나 성능미달로 별로 주목 받지 못했다. FH-1 팬텀은 미 해군이 운용한 최초의 제트전투기라는 점을 제외하면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제트엔진을 달았음에도 속도는 왕복엔진 전투기보다 특별히 빠르지도 않은데다가 비행가능 거리도 짧았고 무장 탑재량 역시 왕복엔진 전투기들보다 적었다. 이 때문에 FH-1 팬텀은 겨우 60대만 제작되었으며 만들어진 지 채 2년이 안 되어서 퇴역했다. 악마와 싸운 십자군 FH-1 팬텀은 그렇게 잊혀져갔지만 맥도널은 이 팬텀을 기초로 하여 더 강력한 전투기인 F2H를 개발했다(F와 H 사이의 숫자 2는 맥도널에서 미 해군용으로 만든 2번째 전투기란 의미다). 맥도널은 이 전투기에도 밴쉬(Banshee : 비명소리로 죽음을 예고한다는 여자혼령, 혹은 마녀)라는 으스스한 이름을 붙였다. F2H의 형상 자체는 FH-1 팬텀을 크게 키워 놓은 것처럼 생겼지만 엔진을 두 개를 달아서 엔진 힘에 좀 더 여유가 있었다. 덕분에 더 많은 연료와 무장을 탑재할 수 있어서 6.25 당시 전폭기로서 큰 활약을 했다. 그 결과 895대라는 적지 않은 숫자가 생산되었다. 그 종류만 해도 F2H-1부터 F2H-4까지 다양했으며 세부적으로는 더 많은 개량형이 있었다.
▲ F2H 밴쉬. FH-1 팬텀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엔진이 두 개로 늘어나고 기체크기도 더 커졌다. 팬텀에 비해 연료와 무장탑재량이 늘어난 덕에 전폭기로서 명성을 얻었다. 1949년에 맥도널은 또 다른 미 해군용 전투기 개발을 시작했다. 이 전투기가 바로 F3H 데몬(Demon : 악마)다. 미 해군 전투기 중에는 최초로 후퇴날개를 사용했으며, 엔진은 1개지만 훨씬 강력해진 J71을 사용한 덕에 비행속도, 무장탑재량, 연료탑재량 등 모든 면에서 F2H 보다 뛰어났다. 또한 레이더를 기본으로 탑재해 먼 거리의 목표물을 미리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개량형인 F3H-2M은 AIM-9 열추적 미사일과 함께 먼 거리의 적 항공기를 공격할 수 있는 AIM-7 레이더 유도 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었다.
▲ F3H 데몬. 이것의 후기형은 사진에서 보듯 AIM-7 스패로우 미사일을 탑재해서 먼거리의 적 항공기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팬텀, 밴쉬, 데몬으로 이어지는 시리즈를 흔히 마귀 시리즈라고 부르기도 했다. 맥도널은 팬텀을 만들던 시절만 해도 해군 전투기 개발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이후 밴쉬, 데몬 등을 개발하면서 뛰어난 해군용 전투기 개발사로 거듭났다. 맥도널은 여기서 전투기 개발을 그치지 않고 F3H 데몬의 엔진을 2개로 늘리고 기체 크기도 좀 더 크게 만들어 성능을 강화한 F3H-G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1952년에 마침 미 해군은 초음속 비행이 가능한 새로운 전투기를 찾고 있었다. 맥도널은 미 해군에게 F3H-G를 제안했고 이 외에도 그루먼사는 F11F 타이거의 개량형을, 노스아메리카는 F-100 수퍼 세이버를 미 해군용으로 개조한 모델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들을 다 제치고 미 해군의 차세대 전투기 자리를 차지한 것은 보트사의 F8U 크루세이더(Crusader : 십자군)였다.
▲ F3H-G의 실물크기 모형. 뒤에 등장할 팬텀은 이 F3H-G와 실루엣이 많이 유사하다.
▲ F8U 크루세이더. 미 해군 소속 전투기 중 최초로 초음속 비행이 가능했다. 꼬리에 있는 마크는 일본의 욱일승천기가 아니라 해가 가라 앉는 모습이다. 이 마크를 쓰는 부대는 선 다우너즈(Sun Downers)라 하여 2차대전 때 태양, 즉 일본을 가라 앉히겠다는 뜻으로 이러한 마크를 썼다. 유령의 귀환 1950년대는 항공기의 기술의 기술 발전 속도가 지금보다 몇 배는 빨랐던 시절이다보니 새로운 전투기가 채 10년도 안 되어서 구식이 되는 일이 흔했다. 미 해군은 이런 빠른 항공기 기술 발전 속도에 맞춰서 크루세이더가 막 배치될 무렵인 1955년에 새로운 전투기를 찾기 시작했다. 미 해군이 찾던 전투기는 최대속도는 마하 2 이상이며 AIM-7 공대공 미사일을 주 무장으로 하는, 적 폭격기로부터 함대를 지키는 방공전투기였다. (위에 언급한 AIM-7이 운용 가능한 F3H-2M은 1955년에 첫 등장했다)
보트사는 F8U 크루세이더를 대폭 업그레이드한 F8U-3 크루세이더III를 제안했다. 최대 속도는 마하 2.6이었으며 이론상 마하 2.9까지도 가능하리라고 봤다. (하지만 정말 이 정도 속도를 내면 기체가 그 온도와 공기에 의한 힘을 견디지 못했다) 장거리 비행 임무에 맞게 연료탑재량을 늘리면서 기체도 원래의 F8U 크루세이더보다 더 커졌으며, 넉넉해진 동체에 AIM-7 미사일을 3발 탑재할 수 있었다.
▲ 비행중인 XF8U-3 크루세이더III. 기체가 더 커진 한편, 빨라진 최대속도에서도 안정적으로 비행할 수 있도록 커다란 배지느러미가 추가 되었다. (지상에 있을 때는 땅에 닿지 않도록 접힌다) 본래의 크루세이더는 AIM-9 사이드와인더 단거리 미사일만 탑재 가능했지만, 크루세이더III는 사진처럼 동체에 AIM-7 중거리 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었다. 한편 크루세이더에게 한 번 패배했던 F3H-G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비록 미 해군은 F3H-G를 정식 전투기로 채용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개발 사업을 죽이기엔 아까워서 지상공격기로 개발하려고 했다. 그래서 이름을 AH-1으로 바꿔서 사업을 이어갔는데, A는 공격기(Attacker)를 뜻하며 H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맥도널이 만든 해군용 항공기란 의미였다. 그리고 이 AH-1을 기초로 다시 미 해군이 찾는 함대 방공용 전투기를 개발했다.
AH-1을 기초로 새로 개발된 전투기는 마하 2 이상으로 날 수 있도록 엔진은 당시로선 매우 강력한 J-79 엔진을 2개 탑재했다. 또 1인승인 F8U-3와 달리 맥도널의 전투기는 2인승으로 앞에는 전투기의 조종만을 전담하는 조종사가, 후방에는 조작이 복잡한 레이더와 많은 전자장비를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이들을 전담해서 조작할 화기관제사가 탔다. 이 전투기의 이름은 맥도널의 4번째 미 해군용 전투기, 즉 F4H-1이었다.
두 전투기는 서로 경쟁을 벌였고, 각종 비행테스트를 해본 끝에 미 해군은 F4H-1을 택했다. F4H-1는 크루세이더III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AIM-7 미사일을 4발이나 탑재할 수 있었고, 그 상태에서도 AIM-9 미사일을 4발 더 달 수 있었다. 넉넉한 기체 크기 덕에 다양한 지상공격 무장을 탑재하기도 적합했다. 무엇보다도 미 해군이 맘에 들어했던 것은 바로 승무원이 2명이라는 점이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레이더와 전자장비 조작은 당시로선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승무원이 2명인 편이 여러모로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 XF4H-1의 1:1 모형. 2인승이라고는 하지만 후방석에 앉은 승무원은 밖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뒤쪽 창이 작았다. 기체 밑에 4발의 AIM-7 미사일이 달려 있는데, 평소에는 동체 쪽에 접혀서 반쯤 파묻혀 있다가 발사시에는 사진처럼 바깥으로 발사대가 빠져나오는 식으로 만들려 했다. 후에 이 방식은 미사일을 그냥 아래로 투하한 다음 발사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미 해군과 맥도널은 이 새로운 전투기의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지 고민했다. 맥도널은 처음에는 사탄(Satan)과 미트라(Mithra : 페르시아 지방의 빛과 진리의 신)중에 하나를 선택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이름들은 논란의 여지가 많았고 (특히 사탄) 결국 정부에서 압력을 넣어서 팬텀이란 이름을 쓰도록 했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팬텀은 이미 있었던 이름이므로 F4H-1의 정식 이름은 팬텀2가 되었다. 다만 FH-1 팬텀은 워낙에 안 알려진 전투기이기 때문에 으레 팬텀이라 하면 F4H-1을 의미한다. 1962년, 미 해군의 항공기 명명법이 미 공군, 육군의 것과 통합되었다. 그 결과 F4H-1의 이름은 새로운 명명법에 따라 F-4 팬텀으로 바뀌었다.
▲ 시험 비행중인 XF4H-1 팬텀. 기체가 크다 보니 무장탑재 공간도 넉넉하다. 사진 속의 기체는 무려 22발의 500파운드(225kg) 폭탄을 탑재하고 비행중이다. 시험 비행 중에는 눈에 잘 보이도록 폭탄도 붉은 색이나 오랜지 빛으로 칠하곤 한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이야기 1 미 해군은 1962년 이전까지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이름을 지었다. 예를 들어 XF4U-5N라고 하면,
X : 항공기 상태 F : 항공기 종류 4 : 제작사에서 만든 순서 U : 제작사 이름 -5 : 개량된 순서 N : 세부적 개량 형태
즉 이 전투기는 보트(U : Vought)사에서 만든 4번째 전투기(F : Fighter)로서 그중 5번째 세부 모델로(-5), 특히 그 중에서도 야간전투용 모델(N : Night)이다. 다만 아직 실전배치되지 않고 실험중인 상태(X : Experimental)다. 다른 예로 위에서 언급한 것 중 F3H-2M의 이름을 살펴보자면 맥도널에서 만든 3번째 전투기, 그 중 2번째 세부 모델이며 특히 미사일(M : Missile)을 탑재할 수 있는 모델이라는 의미다. 한편 그 회사에서 제일 처음 만든 미 해군용 항공기는 숫자 1을 생략한다. 그래서 팬텀은 F1H-1이 아니라 FH-1인 것이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이야기 2 1962년 이전까지는 미 해군 전투기와 미 공군 전투기는 전혀 다른 번호체계를 사용했지만 미 육, 해, 공군의 모든 명명법을 통합하면서 이 번호체계도 통합되었다. 그러면서 몇몇 전투기들의 이름이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새로 바뀐 이름 체계에서 숫자 앞의 F는 전투기(Fighter)를 의미한다.
FJ-3 퓨리(Fury : 분노) -> F-1 퓨리
F2H 밴쉬(Banshee)-> F-2 밴쉬
F3H 데몬(Demon) -> F-3 데몬
F4H 팬텀(Phantom)2 -> F-4 팬텀2
F-5 프리덤파이터(Freedom Fighter :자유의 투사(혹은 전투기)) ->(변경 없음)
F4D 스카이레이(Skyray : 하늘의 가오리) -> F-6 스카이레이
F2Y 씨-다트(Sea-Dart : 바다의 다트 ) -> F-7 씨다트
F8U 크루세이더(Crusader : 십자군) -> F-8 크루세이더
F9F 팬서(Panther : 표범, 특히 미국의 표범. 퓨마라고도 함) -> F-9 팬서
F3D 스카이나이트(Sky Knight : 하늘의 기사) -> F-10 스카이나이트
F11F 타이거(Tiger : 호랑이) -> F-11 타이거
이렇게 통합하기 이전 미 공군의 전투기들의 번호는 이미 100번대를 넘게서고 있었다. 그러나 통합 이후 번호를 1부터 다시 시작 하면서, 흔히 알려진 숫자 100이 넘는 전투기들 이후 F-4나 F-5 같은 작은 숫자를 쓰는 전투기들이 나온 것이다.
이렇게 명명체계가 통합된 이후, 현재는 23번까지의 숫자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YF-23으로 명명된 블랙위도우는 F-22 랩터에 밀려서 결국 실제로 생산되진 않았다. 한편 13은 불길한 숫자라서 쓰이지 않았으며, 19는 노스롭사의 요청에 따라 사용되지 않은 채 건너뛰고 F-20으로 넘어갔다. (MIG-19와 혼돈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있고, F-117 나이트 호크 스텔스 전폭기의 존재를 은폐하려고 만든 가상의 전투기, F-19의 자리라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실제로 F시리즈의 마지막은 F-35다. 그러나 이 35라는 숫자는 원래 F 시리즈가 아니라 X 시리즈에서 온 것이다. 미국의 차세대 전투기들에 사용할 기술을 실제로 증명해 보이려고 보잉은 X-32, 록히드 마틴은 X-35를 만들었다. (여기서 X는 실험기라는 의미) 군은 이들 실험기들을 가지고 평가한 결과 록히드 마틴의 설계를 채택했다. 새 전투기는 원래 F-24가 되어야 하지만 X-35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그냥 앞의 알파벳만 바꿔서 F-35로 이름붙였다. 그런 이유로 숫자가 23에서 갑자기 35로 건너뛰게 된 것이다.
기사제공= 주간 공군웹진 공감 / 필자 이승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