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PART. 0 DAS BOOT...제국을 위협했던 가장 강력한 칼날
딴지 군사전문위원 펜더
제 목 : Das Boot(한국 출시 제목 “특전 유보트”)
감 독 : 볼프강 페터슨
주 연 : 유로겐 프록나우, 허버트 그로네메이어
제작년도 : 1981년
제 작 사 : 서독 바바리아 영화사
수 상 : 1981년 아카데미 6개부문 노미네이트,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상 후보
러닝타임 : 209분
우리나라에 들어와 “특전 U-보트”라는 촌티 팍팍 나는(!!)이름으로 들어와 밀리터리 매니아들과 잠수함 매니아들의 “성전”이 된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선 한때 현충일이나 6.25같은 때 방송사에서 한번씩 틀어주며 뭇 사나이들의 가슴을 용솟음치게 했던 작품 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겐 “걍 그런가부다” 하며 틀어주면 보고, 안틀어주면 안틀어주나 부다 하고 넘어가던 작품.
1997년 15년 만에 다시 디지털 사운드를 입혀 복원, 재출시 되면서 매니아들을 비디오 대여점으로 몰아넣었던 이 작품은 한때 매니아들 사이에선 “품귀현상”을 보였고, 비디오 대여점 아저씨들이 90년대 초 일본 애니메이션 LD 떠주던 장사가 생각나게 하듯이 이걸 복사 떠주며 쏠쏠하게 이문을 챙기게 해주었던 작품!!
본 필자가 본 U-보트 관련 영화 중 단연 “최고”라고 추천할 만한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재론의 여지는 없을 것이라 사료되지만, 정 못 믿겠으면 가까운 P2P 사이트를 찾아가 한번들 보시라.
원래 이 작품은 로탈 권터 부르하임의 자전적 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작품인데, 소설 자체도 16개국에 번역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작품이다. 최초의 시작은 TV용 미니시리즈였다. 총 6시간짜리인 이 작품을 다시 재편집하여 영화로 내 놓은 것이 바로 우리가 보게 된 Das Boot란 녀석이다. 제작 당시에도 준비기간 3년에 촬영기간 1년 제작비만 2천만 마르크이상(당시 한화 72억원) 투입되었고, 필름 100만자를 아낌없이 쏟아 부운 [대작]이란 소리를 들었던 작품이었고, 제작 후에도,
- 독일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전례 없는 반전영화의 수작
이란 호평을 받으며, 독일 영화론 드물게 미국으로 진출. 오스카상 후보에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해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이후로 [네버 엔딩 스토리]로 다시 한 번 대박을 터트린 볼프강 페터슨 감독은 헐리우드에 전격 스카웃 돼 우리가 익히 보아왔고, 즐겨왔던 작품들을 찍어내기 시작한다.
음...볼프강 페터슨이 누구냐구? 왜 다들 아실터인데...하긴 작품은 생각나도 헐리우드 감독하면 떠오르는 게 “I'm your father"의 조지 루카스랑 스필버그 아저씨 밖에 생각 안 나는 게 보통 관객들의 기억력이니까...(하긴 어지간해선 타이틀하고 엔딩 크래딧 다 기억하겠어? 쪽팔려 할 거 없으니 안심해라) 음...인디펜던스 데이와 쌍벽을 이루며 미국 대통령은 “특수부대” 출신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만들었던 “에어포스 원” 황야에서 총잡이 하던 우리 클린트 이스트우드 형님을 환갑 넘어간 나이에 리무진 앞 꼭다리 붙잡고 뛰게 만들었던 “사선에서” 양주 선전 하믄서 품격을 말하던 울 조지 쿨르니 아저씨를 선장으로 만들어 바다에서 빠져 죽게 만들었던 “퍼펙트 스톰” 등이 우리 볼프강 페터슨 감독의 작품들 되겠다...
볼프강 감독의 초기작인 “Das Boot"에 비견될 만한 작품은 유감스럽게 이 중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본 필자의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어쩌랴 세월은 흐르는 것이고, 사람도 변하는 것임을...영국 구축함의 아즈딕(ASDIC :Allied Submarine Detection & Investigation Committee : 2차대전 때 쓰던 소너로 생각하면 될 거다. 소너의 전신이니까)에서 쏘는 음파의 소름끼치는 반사음에 바짝 귀를 곤두세우던 U-96 승무원들의 모습과 청음병의 기묘한 표정만으로도 U-보트의 전투방식과 수중에서의 긴장감을 120% 표현해 내던 그의 재기발랄했던 연출력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아 안타깝도다.
1. Das Boot 에서의 생활...식생활에 대해서
이 영화는 종군 파견기자였던 베르너 중위가 레만 함장의 U-96에 승선해 U-보트의 순찰활동을 바로 옆에서 바라보며 경험한 것들을 엮어낸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출격 직전의 프랑스의 라 로첼 항에서의 파티에서 시작된다.
함장과 베르너가 탄 벤츠를 향해 일렬로 서서는 오줌을 싸는 수병들의 모습과 그걸 웃으며 받아넘기는 함장의 여유로 시작한 이 영화는 철십자장을 가슴팍에 달고 술에 쩔어 히틀러를 비웃는 톰슨 함장의 등장으로,
- 이게 반전 영화군
하는 필이 초반부터 팍 오게 만들어 버린다.
- 위대하시고, 뛰어나시고, 여자도 없고, 견습화가에서 위대한 전략가로, 대단한 해군 전략가로...
이렇게 시작되는 톰슨함장의 일장연설은 파티 분위기를 쏴- 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 분위기를 느꼈는지, 톰슨 갑자기 처칠에 대한 욕으로 연설(?)을 마무리하게 되고, 분위기는 다시 먹고 죽자는 분위기로 반전 된다. 그리고 다음날 U-96은 출항하게 된다. 술에 쩔어 있던 톰슨은 U-96의 출항을 보러 달려오고, 손을 흔들며 건승을 기원한다.
그 다음부터는 U-보트 안에서의 생활 그대로를 보여준다. 화장실, 무기고, 침대에 가득 쌓여있는 음식물들을 보면서 관객들은 의구심을 품을 테지만, 실제 U-보트가 작전할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니 의구심을 품을 필요 없다. U-보트 함대의 부대장이었던 칼 되니츠(Karl Doenitz)가 함의 안전을 위해 이런 “몰지각한”행위를 중지하라고 몇 번이나 명령했으나, 일선의 U-보트 지휘관들과 승무원들은 음식을 쌓아 올리고, 그 자리에 한방울의 연료와 한발의 어뢰라도 더 쌓아 올리려고 발버둥을 쳤었다. 왜?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바다에 있을 수 있고, 한발이라도 더 어뢰를 싣고 나가야 한척이라도 더 격침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이 식량의 저장에 대해서 영화에선 함 내 곳곳에 빽빽이 쌓는 모습을 보여주며 잠수함이 좁다란 사실에 대해서만 보여주었는데, 실제로 이 식량의 배치(?)는 잠수함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가뜩이나 좁은 함 내에 빽빽하게 식량을 쌓는다면 잘못하면 함의 균형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보통 출항 전에 고참 하사관들 몇 명이서 식량의 무게와 함의 밸런스를 고려해 음식물을 함 여기저기에 분산해서 골고루 배치(?)하는 것이었다. 전쟁이 길어지고, 이런 고참 하사관들이 점점 줄어들자 독일 잠수함 부대에선 함의 밸런스를 유지하며 식량을 탑재 할 수 있는 매뉴얼까지 만들어 배포 하였을 정도인걸 보면, 식량 쌓는 일도 보통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보통 U-보트는 다른 수상 함정 보다 많은 식량을 배급 받았는데, 열악한 U-보트 요원들에 대한 배려 차원이기도 하였지만,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다.
영화 중간쯤에 보면 나오듯이 빵에 곰팡이 슬고 하는 것에서 보여주듯이 U-보트 내부의 위생상태는 열약 그 자체였고, 음식물의 변질로 인한 식량 감소분을 고려해 넉넉하게 보급하였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하얗게 곰팡이가 핀 빵을 U-보트의 승무원들은 흰토끼라 부르며 비아냥거리면서도 나름대로 잘 먹었다.(물론 곰팜이 핀 부분은 잘라내고 말이다) 가끔 낚시로 바다거북이나 생선 등을 잡아서 신선한 음식을 먹기도 하였지만, 음식 그 자체는 열약을 넘어서서 생존을 위한 영양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1인당 하루 물 배급량은 5리터였으니 기본적인 세면이나 샤워는 되도록이면 생각 안 하는 게 편할 것이다.
비타민 부족에 따른 구루병이나 각기병의 예방차원으로 레몬을 의무적으로 먹으며 생활하는 모습도 영화상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의무적인 음식 섭취 차원이던 레몬보다도 더 싫어했던 음식은 자몽통조림이었다.
2. 잠수함이 왜 물속에 있는 시간보다 나와 있는 시간이 더 많은 거야?
Das Boot를 보면, 잠수함은 부상한 상태로 천천히 바다를 떠다닌다. 그리고 함교엔 꼭 4명의 승무원들이 나와서 쌍안경을 들고 바다를 살피고 있다. 함 내 방송으로 순번을 정해서 함교로 올라가 감시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왜 저러는지에 대해 본 필자에게 물어보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여기서 U-Boat란 것에 대한 정의를 한번 내려야겠다.
사람들이 그냥 U-Boat라고 아무 생각 없이 말하는 이 유보트란 단어는 원래 U-BOOT라는 독일어가 영문으로 넘어가면서 편한 데로 붙여 진 것이 대명사가 되어 독일 잠수함 하면 유보트라고 인식 된 것인데, Boot는 말 그대로 “배”란 의미다. U는??(Unter see Boot 말 그대로 물 아래로 가는 배란 뜻이다) 아래로 밑으로의 의미이다. 즉 간단히 말해서 U-Boot는 물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 배이지, 24시간 물속에 잠수해 들어갈 수 있는 배는 아니란 것이다. 말 그대로 몇 주, 몇 달간 부상하지 않고 물속에서 생활할 수 있는 완전한 의미에서의 잠수함은 20세기 중반 넘어서서 개발되어진 원자력 잠수함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였을 뿐이었다.
이 녀석은 부상했을 때에는 일반 배처럼 디젤엔진을 돌려서 추진력을 얻고, 잠수 할 때는 디젤추진으로 전동기를 돌려 배터리를 충전해 놓은 걸 써먹는다. 즉, 수중에선 전기추진으로 나가는 것이다. 문제는 속도인데, 부상해서 디젤 추진으로 갔을 때에는(2차 대전 당시 독일군 유보트의 주력이었던 Ⅶ형기준)16노트에서 18.6노트의 속력을 얻었다. 반면 수중항해시의 속도는 7.6노트에서 8노트의 속도를 얻을 수 있었다. 속도도 속도이지만, 이 속도로 수중 항해를 지속할 수 있는 시간이 겨우 45분밖에 안 된다는 것도 수중 항해를 방해하는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수중에서의 항행이란 건 배터리를 사용하는 운행이기에 배터리가 다 방전되기 전에 부상해 디젤엔진을 돌려 충전을 해야 한다. 이 충전시간이 보통 2~3시간이 걸린다. 보통 상선의 평균 항진 속도가 10노트를 넘지 못한 수준이었다 하더라도 수중 항해로 이들을 쫓아가 격침시킨단 자체가 이야기가 되지 않는 것이다.
함교 위에 4명씩 배치되어 쌍안경을 들고 사주경계를 하는 녀석들은 바로 이런 이유 덕분에 나와 있는 것이었다. 각각 90도씩 구역을 할당 받은 이들은 부상상태의 취약한 U-보트의 유일한 방비책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잠수함이 떠 있는 상황이라면 주야를 불문하고 함교위로 올라가 사주경계를 해야 했다. 그리고 적의 구축함이나 항공기를 발견하는 즉시 잠수함을 긴급잠항 시키는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는 이들이었다. (바다 갈매기를 적기로 오인해서 긴급 잠항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었다는 걸 보면, 사람의 눈으로 관측한다는 건 역시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3. 함장 뒤편에 걸려 있던 파리가 앉아 있는 사진은 무엇인가??
영화 초반부터 함장의 어깨 뒤로 보이던 사진. 영화 중반쯤 가면 이 사진의 인물의 왼쪽 볼따귀에 파리 한 마리가 앉아서 기어가는 장면을 몇 초간 클로즈업으로 잡아주는 화면이 보인다. 이 모습을 보고 본 필자와 같이 영화를 하던 지인 한명이 했던 말이
- 잠수함 안에서도 파리가 살아 갈 수 있다는 모습...그리고 파리가 표현해 내는 잠수함 내 의 지리한 생활 모습과 무미건조한 함 내의 상태를 보여주는 샷이다...그런데 저 사진 혹시 나치 고위 간부 아냐? 괴링이나 괴벨스 같은 애...파리가 어떤 빈정거림의 효과가 아닐까?
이러면서 심각하게 이 장면을 이야기 하던 기억이 난다(L군 자네의 잘못이 아니네...)
만약 전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던가 아니면, 잠수함 전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있는 분이라면, 이 사진을 보면서,
- 아...되니츠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을 이 사진...그렇다 이 사람은 2차 대전 영국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던 독일 잠수함 부대 지휘관이자, 독일 해군 총사령관을 거쳐 히틀러가 독일 제3제국의 권력을 넘겨주었던 칼 되니츠(Karl Doenitz)제독이다.
이 사람이 걸어온 인생 자체가 바로 2차 대전 U-보트 전투의 시작과 마지막 모두를 말해주는 인생이었고, 이 사람이 있었기에 독일 제3제국은 영국과의 대서양 전투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전략적으로 가장 가치 있는 무기체계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다 되니츠는 2차 대전 내내 잠수함 부대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이 사람이 이렇게 유명하게 된 것은 바로 한 가지 전술적 작전법의 주창과 발전, 실행을 주도했단 점과 U-보트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제대로 인식을 보여준 “U-보트 300척 확보론”을 설파했던 점 덕분이다. 한 마디로 U-보트 부대의 아버지 같은 존재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남자이다(말 그대로 아버지였다).
되니츠는 1910년 임관해 잠수함 부대에서 열심히 활동하다가 종전을 얼마 앞둔 1918년 10월 4일 날 적 선단 공격 와중에 기관고장으로 그 상태에서 U-보트가 가라앉았다가 간신히 부상하게 된다. 문제는 그 부상 위치였는데, 재수 없게도 영국군 함대 한 가운데에 부상, 그길로 포로가 되어 버렸다.
여기서 잠깐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U-보트 부대의 운용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겠다...왜? 되니츠의 등장과 그가 주장한 Wolf pack 전술에 대한 이해를 구하자면 좀 들어둬야 한다. 자, 이야기가 좀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간단히 말해서 잠수함이란 게 등장한 지 꽤 되었거든? 그리고 실전에 쓴 역사도 좀 되었어. 남북전쟁 때에도 썼던 거 보면, 1차 대전 당시 느닷없이 등장한 게 아니거든...자 문제는 되니츠가 임관하기 얼마 전에 이미 잠수함이란 게 등장한 상태였는데, 이때엔 아직 잠수함이 어떤 개념으로 전투에 쓰여야 하는지 전술개념도 제대로 정립이 안 되어 있던 때였지.
- 잠수함이라는데?...신기하네 물속으로도 들어가네?
그 정도였지 당시 각국의 해군 지휘관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독일해군의 아버지로 불리던 당시 독일 해군장관이었던 티피츠(Alfred Von Tirpitz 1849~1930)만이 이 신 개념 함정인 잠수함에 대해서 관심을 보였다.
문제는 당시의 각국 해군의 분위기이다.
- 세계 2위 3위의 해군 대국이 연합하여 덤벼들어도 거기에 대적할 정도의 해군력 확보!
를 언제나 주장하는 대영제국 영국은 이 “잠수함”이란 물건을 “비열한 무기”로 규정지었다. 이유야 간단한 것이 그 당시까지 함대간의 결전의 주축은 바로 “전함”이었던 것이다. 각국은 미친 듯이 전함을 찍어내느라 정신이 없었고, 영국이 드레드노트급을 찍어내면서 각국 해군 관계자들은 새로운 기준에 맞춰서 전함 찍어내는 경쟁에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자, 문제는 영국이었는데, 이것들이 1899년과 1907년 헤이그 평화회담에서 전쟁 시 적국의 상선 공격 수순이란 것이 참으로 “신사적”이란 것이 문제였다. 일단 적국의 상선이란 걸 확인하면 정선을 시킨다. 배를 멈춘 상태에서 충분히 경고를 한 다음에 승무원들의 안전대피를 다 확인 한 연후에 이 배를 나포하거나 격침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게 통과 되었냐고? 그때 모였던 애들 다 이거에 찬성했다. 우리나라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까지 달려가
- 조선을 좀 도와 달라!!
라고 외칠 때, 이것들은 거기 모여서 배 격침 순서 정하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나쁜넘들...
좀 도와줘바바바
여하튼 이런 상선 파괴 수순을 따라서 배를 격침하려면, 잠수함은 죽었다 깨나도 못하는 것이다. 일단 덩치부터 차이가 났고, 승무원들을 어찌 잠수함에 다 싣고 움직일 것인가??
어쨌든 이 당시까지만 해도 독일의 U-보트 애들도 이 잠수함을 가지고 상선을 격침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일단 전쟁 터지면, 발틱해를 지켜내는 데에 온 독일의 해군력을 집중해야 하는 독일의 당시 상황에서 U-보트는 “물속에 숨을 수 있는 어뢰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자 문제는 이 어뢰정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1차 대전이 발발하고 얼마 뒤인 1914년 9월 5일 오토 헤르싱(Otto hersing)이 지휘한 U-21이 에딘버러 외해에서 영국 순양함 패스파인더(Pathfinder)를 격침시켜 승무원 296명 중 259명을 전사시켜 버린 것이다. 문제는 영국군은 이때 패스파인더가 잠수함에 의해 공격당했다는 사실 조차 인식을 못했다는 것이다. 워낙 시계가 불량했던 관계도 있었지만, 잠수함의 실력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남아있었던 거였다. 이런 의구심도 17일 뒤에는 말끔히 날아가 버리는데, 오토 베디겐(Otto weddigen)이 지휘하는 U-9에 의해 1시간 동안 3척의 영국 순양함이 격침되어 버리는 사건이 터져 버린 것이다. 총 2,200명의 승조원 중에서 1,459명이 전사 해버린 말 그대로 “학살”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영국 해군 참모총장이었던 피셔제독이,
- 넬슨 제독이 그의 전 생애 동안 수행한 전투에서 희생시킨 병사보다 더 많은 병사를 잃었다.
라면서 허탈해 하는 동안 독일 U-보트 편대들은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대서양을 휘젓기 시작한다. 그리고 1914년 10월 13일 드디어 U-보트가 가야할 길을 열어주는 “빛의 길”이 열리게 된다. 바로 U-17이 영국의 기선 글리트라(Glitra)를 격침시킨 사건이었다. 이제 U-보트가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인 것이다. 바로 통상파괴전의 시작이었다.
1915년 2월부터 독일은 잠수함을 통한 통상파괴전에 들어갔고, 1915년 한 해 동안에만 74만 8,000천 톤의 영국선박을 수장 시켜 버렸다.
미션 석세스
영국군은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해서 이 U-보트를 잡아보겠다고 설쳤지만 방법이 없었다. 고기 잡는 어망에 폭탄을 달아 도버해협에 깔아보기도 하고, 기뢰를 천지 사방에 풀어 보아도 U-보트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17년...바로 대망의 아즈딕(ASDIC :Allied Submarine Detection & Investigation Committee : 연합군 잠수함 탐지법 연구위원회 되겠다)이 개발 되었다...바로 음파를 통한 잠수함의 탐지 대책이 등장한 것이다.
자 그러나 어둠이 짙다는 건 새벽이 다가왔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짙어진 어둠 속에서 헤어 나오는 그 시간들은 길게만 느껴지는 법...독일군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펼치며 U-보트 보유 척수를 150척으로 늘리고 무자비한 대서양에서의 파괴전을 시작하게 된다. 이 엄청난 파괴전의 여파로 영국본토는 한때 8주 분의 연료밖에 보유 하지 못하는 위기상황에 까지 몰렸었고, 이 위기는 미국이 참전함으로써 겨우 벗어나게 된다(1915년에서 1918년 사이에 독일 U-보트 부대들은 1,218만 5832톤의 연합군 선박을 격침하였다).
자 문제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이다.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서 독일은 재무장 자체가 엄격히 제한되었고, U-보트는 아예 보유가 금지 되었다. 하긴 그 정도 당했는데, 이걸 다시 보유 하라고 하겠어? 이때 다시 독일로 돌아온 되니츠가 생각한 건 장차전 에서의 U-보트의 역할과 실효성 있는 공격방법에 대한 연구였다. 실제로 되니츠가 영국군에게 잡히 게 되었던 그의 마지막 출격은 1차 세계 대전 최초로 U-보트의 “잡단공격”을 시도하려던 작전이었다. 되니츠가 함장이었던 UB-68과 스타인바우어가 지휘하던 U-보트 2척이 오스트리아의 폴라항을 출격해 U-보트간의 합동 공격을 시도하려 하였지만, 스타인바우어의 U-보트는 기관고장으로 출격을 못했고, 되니츠만이 홀로 공격을 시도하다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포로가 된 것이다.
자, 여기서 웃기는 것이 1차 세계대전 당시 그 엄청난 전과를 올렸던 U-보트들은 다 따로따로 떨어져 홀로 작전을 했다는 것이다. 일단 출격하고 나선 U-보트 혼자서 알아서 선단을 발견하거나 상선을 발견해 그걸 격침시켰다는 것인데...필연적으로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었다. 비효율 적인데도 왜 그랬을까? 그들도 편대를 만들거나 떼로 모여서 덤벼들면 좀 더 효과적이었을 터인데 말이다. 물론 이런 생각을 안했던 것은 아니었다. 1917년과 1918년에 로제 중령과 오토 슐츠 중령이 U-보트의 합동 공격 작전을 입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 합동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상호교신]과 [통신]에 대한 해결책이 없었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무선통신 수단이었던 무선전신의 경우 U-보트 들과의 합동작전을 받쳐 줄만한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까진 아직 단파나 초장파 송신수단이 없었다. 결국 1차 세계대전의 U-보트들은 일단 물속에 들어가면 통신두절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부상한 상태에서 무선을 보내는 것이 원활 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일단 부상해서 무선을 보내기 위해서는 함교 위에 두개의 안테나를 설치해야 했고, 그 송신거리 역시도 합동작전을 하기에는 턱없이 출력이 부족하였다.
자, 문제는 1차 대전이 끝나고 기술은 진보하였고, 잠수함간의 교신이 가능할 정도의 무선통신이 가능한 방법들이 개발 되었다. 이제 어쩌지? 되니츠는 그 동안 품고 있던 생각들을 풀어내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바로 [wolf pack]전술이었다. 이것이 무엇이던가? 그렇다. 바로 U-보트를 떼로 모아서 한꺼번에 수송선단을 공격 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애들은 상선들이 개별적으로 운항하다가 U-보트의 먹이가 되는 걸 보고 수송선단이란 걸 생각해 내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한 두 척 씩 움직이던 배들을 30척 혹은 50척 이상 떼로 뭉쳐놓고 여기에 구축함이나 호위함들을 붙여서 하나의 수송선단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 상태에서 U-보트 한척이 나타나 이 거대한 선단을 헤집고 들어가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고, 나름대로 이 수송선단 체계는 대잠수함 작전으로서의 실효성을 보였다. 저쪽에서 떼로 뭉쳐서 방어를 한다면, 이쪽에서도 떼로 뭉쳐서 공격해야 하는 게 정답이라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론이 아니었을까?
자, 되니츠가 이 [늑대떼 전술]을 생각하던 찰나에 히틀러는 1935년 3월 16일 그동안 독일을 억누르던 베르사이유 조약을 포기하고, [주권국가로서의 독일]을 주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국과 영독 해군 협정에 들어가게 된다. 이제 독일도 군대를 만들고, 군함도 만들고 해보겠다는 것이다. 결국 독일은 아주 순순히 영국 해군력의 35% 수준에서 독일해군을 건설하겠다는 영독 해군 협정을 1935년 6월 18일에 사인했다. 여기서 U-보트는 약간 더 융통성을 부여 받았는데, 잠수함은 영국 해군 수준의 45% 수준까지 확보 할 수 있고, 만약 이 잠수함 전력을 더 확보 하고 싶다면, 다른 전함이나 군함의 톤수를 줄이고, 그걸 잠수함에 더 사용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영국 해군 잠수함 세력의 100%까지 잠수함을 확보할 수 있다는 예외조항까지 얻어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얻어낸 U-보트의 총 허용 톤수는 24,000톤이었다.
영국은 이때 1차 세계 대전의 그 쓰라린 기억을 잊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당하고도 U-보트의 무서움에 대해선 생각을 못했던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 영국은 이제 잠수함이란 무기체계가 그렇게 효과적인 무기체계가 아니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앞전에 말했던 아즈딕이란 잠수함 탐지 기술이 개발 되어진 상태였고, 선단방어 개념의 등장으로 한 두 척의 U-보트들이 설쳐 봤자. 1차 대전 때처럼 그렇게 위협적인 공격을 할 수 없을거란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 혹시 모를 잠수함의 선단 공격에 대비해 영국은 국제법을 손보기 시작하였다. 바로 [런던 잠수함 협정]이란 것을 만든 것이다.
1936년 영국은 전 세계의 좀 한다하는 해군 애들을 다 런던으로 불러 모아서 전시 잠수함 사용에 대한 영국의 “요구조건”을 딴 나라 해군들에게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앞전에 말했던 상선 나포나 격침 시, 경고와 위협, 승무원의 대피를 다 완료한 후에 상선을 격침하거나 나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은 이런 잠수함 협정이 독일의 대 상선 파괴 작전으로부터 영국의 해상 교통로를 지켜 줄 것이라 믿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뭐 1차 대전 끝나고 해군 군축 협정인 [워싱턴 조약]이란 게 있는데, 전함의 톤수를 제한하는 협정이었는데, 영국 애들은 이걸 참 순진하게도 잘 지킨 거 보면, 여하튼 신사의 나라는 신사의 나라인가 보다. (배라는 게 무게 재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잖아? 4,5만 톤 나가는 걸 무슨 수로 재겠어? 결국 뭐 조금씩 눈속임하고, 무게를 감추고 그랬거든...일본만 해도 그랬었고, 독일도 4만 톤이 넘어가는 비스마르크와 티피츠를 3만 5천톤급 전함이라고 우겼거든...영국 애들은 그래도 지들 주력 전함이던 프린스 오브 웨일즈 같은 건 딱 3만5천 톤에 맞춰서 만들면서 워싱턴 조약을 지키려고 애썼지...뭐 그래서 조약형 전함이란 별명이 붙고 그랬지)
1937년 영국 해군성은 선단방어 자문위원회에 보고서 하나를 보내게 되는데, 그 내용은
- U-보트는 더 이상 1917년에 우리가 당면했던 방법으로 우리를 대항하지 못할 것
이라는 내용이었다.
어쨌든 독일 애들은 영독 해군 협정이 발효되기 이전에 몰래 U-보트를 진수 했었고, 스페인과 스웨덴에 몰래 어뢰연구를 의뢰했었다. 그리고 2만4천 톤이라는 한정된 배수량 안에서 잠수함을 어찌 생산할까를 고민해야 했다. 당시 독일해군은 2천 톤급이 넘어가는 대형 잠수함을 선호하였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바로 1차 세계 대전 때처럼 U-보트는 또다시 원양에 홀로 나가 단독작전을 벌일 것이라는 판단에 의해 먼 거리를 나아가 홀로 작전을 하여야 하기에 많은 연료 탑재량과 한발이라도 더 많은 어뢰를 실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여기에 더해 잠수함에 달고 다니던 함포를 좀 더 안정적으로 쏘기 위해선 적당한 크기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여기서 한 가지 말할 것이 1,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잠수함에는 어뢰 말고도 함포를 달았단 사실이다. 보통 88미리 포를 달았는데, 이걸로 배를 포격해 격침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배를 격침하기 위해선 수십 발 이상 쏴야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말이다...한 가지 확실한건 당시 독일 해군은 이 함포를 쏠 때, 그 탄피를 다 챙겨 와서 반납하여야 했다는 것이다. 요동치는 밤바다에서 탄피 회수해서 챙기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꿋꿋하게 탄피를 챙기는 그 모습은 대한민국 예비역들에게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모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되니츠는 2천톤급 한척 보다는 5백톤급 4척이 훨씬 효과적임을 역설했고, 1935년 제작된 Type Ⅱ와 Type Ⅰ, 그리고 Type Ⅶ 세 종류의 U-보트 중에서 되니츠는 Type Ⅶ을 강력하게 지지하기 시작한다. Type Ⅱ는 배수량이 250톤에 수상속력 13노트였지만, 작전반경이 겨우 3100마일 밖에 안 된다는 결점이 있었다. Type Ⅰ은 수상 속력 17노트, 작전반경 7,900마일을 자랑했지만, 잠수함의 조종성이 나빴다...자...여기서 2차 세계대전 당시 U-보트 부대의 주력이자, 최대의 생산량을 자랑했던(1944년 말 까지 626척이 완성 되었다) Type Ⅶ형이 등장하게 된다. 배수량 626톤에 수상속력 17노트(수중 항해 시 8노트), 작전반경 6,200마일을 자랑하는 이 녀석은 조종성과 안정성이 뛰어났고, 잠항 시 걸리는 시간이 불과 20초밖에 걸리지 않았으며, 어뢰역시 12발에서 14발을 적재 할 수 있어서 여러모로 봐도 되니츠가 구상하던 늑대 떼 전술에 적합한 녀석이었다.
더군다나 영국과의 해군 협정에서 확보한 2만 4천 톤의 잠수함 할당톤수에서 잠수함을 제작하여야 하는 독일 잠수함 부대로서는 대형 잠수함 몇 척보다는 중소형 잠수함 여러 척이 훨씬 남는 장사였다. 물론 이 Type Ⅶ형에도 결점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작전반경이 6,200마일 밖에 안 된다는 점이었는데, Type Ⅶ을 17톤 정도 크기를 키우면 연료를 180톤 정도 더 늘릴 수 있고, 그에 따라 작전반경도 8,700마일로 늘릴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테드센 대령이 들고 나오면서 해결책을 찾게 된다. 바로 Type Ⅶb형의 등장인 것이다.
되니츠가 주력생산 잠수함을 결정하고, U-보트 승무원들을 훈련시키며 앞으로 일어날 전쟁을 대비하면서 장차전에서의 승리를 위해서 한마디 던진 것이 그 유명한 “U-보트 300척 확보론”이었다.
- U-보트 300척만 있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음...이게 무슨 소리냐구? 말 그대로 이다. 되니츠는 U-보트 3백 척 만 있으면 영국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실제로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하필 3백척이냐구? 되니츠는 일단 이 3백 척을 확보하면, 일단 1백 척은 전장인 대서양에 퍼져 있고, 1백 척은 기지로 귀환하여 수리와 보급, 승무원들의 휴식 등 재충전을 시키고, 나머지 1백 척은 기지와 전장을 오가는 사이에 배치시키면, 독일은 항시 100척의 U-보트로 영국의 해상교통로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료와 원자재, 수출의 100%를 바다를 통해서 수출입하는 섬나라 영국의 경우 이 해상교통로가 마비된다는 사실은 그걸로 전쟁은 끝났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윈스턴 처칠은 2차 대전 회고록에서 수차에 걸쳐 U-보트에 대한 두려움을 가감 없이 풀어냈다.
- 전쟁 중 나를 진심으로 두렵게 만든 유일한 것은, U-보트의 위협이었다. 광막한 대양을 가로 지르고 있는 우리 생명선, 특히 영국 근해의 항로는 위험에 마냥 노출되어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이 싸움이 영국 본토 항공결전이라 일컬었던 자랑스런 항공전보다 더 근심이었다.
- U-보트의 공격은 우리의 가장 큰 불행이었다. 독일로서는 그것에 모든 걸 거는 것이 현명했을 것이다.
- 대서양 전투는 전쟁 전 기간을 통하여 결정적인 요소였다. 우리는 한 순간도 다른 곳의 육상, 해상, 공중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결국은 그로부터 나오는 것에 달려 있다는 걸 잊을 수 없었고, 다른 모든 염려 중에서도 하루하루 바뀌는 그 곳의 운을 희망과 불안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영국의 해군 관계자들은 되니츠를 붙잡고 그들의 궁금증을 물어 보았다.
- 어째서 독일은 모든 가용자원을 총동원해 U-보트에 집중하지 않았는가?
되니츠는 레더제독의 뒤를 이어 독일 해군 총사령관이 되면서부터 끊임없이 히틀러에게 “철”과 “가용자원”을 요구하였고, 언제나 히틀러를 설득하기 바빴다. 그는 언제나 독일 전체 철 생산량의 6.4%에서 8.3% 정도의 철을 확보하기 위해 부지런히 히틀러와 제3제국의 수뇌부를 설득해야 했고, 확보한 철에서 또다시 U-보트용과 수상함용으로 분배를 하여야 했고, 포탄과 포를 생산 하는 데에도 이를 할당해야 했다. 그야말로 생산과의 전쟁이었다. 그 와중에 그는 발달한 영국의 대잠수함 작전에 대응하기 위해 [완전한 수중항해]가 가능한 발터 잠수함을 개발하는데 신경을 썼고, 스노켈 시스템을 잠수함에 달기 위해 뛰어다녔다. 그러나 아쉽게도 U-보트에 대한 이해는 독일 측보다는 연합국 측에서 더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당시 미 공군이 발행 배포한 지시서에 보면,
- U-보트가 만일 6,000톤급 선박 2척과 3,000톤짜리 유조선 1척을 침몰시킨다면 우리가 입을 수 있는 손해의 전형적인 목록은 다음과 같다.
: 탱크 42대, 6인치 곡사포 8문, 25파운드 포 88문, 40미리 포 40문, 장갑차 24대, 경기관총 또는 자동소총 50정, 탄약 5,210톤, 소총 600정, 탱크 부품 428톤, 식품 2,000톤, 연료 1,000드럼
만일 그 선박 3척이 안전하게 항구에 도착한다면 그 많은 것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라! 적이 공습으로 그 비슷한 손해를 우리에게 입히려면 3,000회를 출격해야 할 것이다.
4. 사진 찍다 욕먹던 베르너 중위를 보며...
영화 초반부를 넘어설 무렵 베르너 중위가 사진기를 들고 함 내 이곳저곳을 찍는 장면이 나온다. 마스트 위로 올라가 견시(見視)를 보고 있는 요원들과 함장 앞에 사진기를 들이 댔다가 한소리 먹는 베르너 중위
- 임무 수행 후 복귀할 때 사진을 찍어라...그때쯤이면 다들 수염이 자랐을 거요...엄마 치맛 자락에 있을 애들을 끌고 와 전쟁을 한다는 걸 알면 영국 애들이 비웃을 테니까...
실제로 U-보트의 승무원들의 평균 연령은 수상함을 타던 다른 독일해군에 비해 어렸다. 보통 18세에서 22세 사이의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지원병]에 한해서 선발한다는 기준이 있었지만, 꼭 지원병만 받는다는 건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원”해서 U-보트에 탄 사람도 있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이들은 다른 독일 해군과 비교해서 [엘리트]였던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른 병과의 해군 보다 학력도 높았으며, 특히 [체력]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짧게는 4주 길게는 10주 이상 그 좁은 잠수함 안에서 햇볕도 제대로 못보고, 맨손 체조 역시 제대로 할 수 없는 잠수함 안에서 지내야 했으며, 목욕 같은 기본적인 위생활동은 꿈도 못 꿨으며, 불결한 위생환경과 폭뢰의 공격에서 버텨낼 정도의 정신력을 지니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은 기본이었다.
이들은 3개월간의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해군 중에서 U-보트 부대에 들어가겠다고 지원한 병사들 중 선발한 병력을 다시 6개월간 U-보트 학교에 보내 훈련을 시키고, 또다시 실전 투입되기 전에 몇 개월간 폭뢰체험훈련, 어뢰 공격 훈련 등을 받으며 실전 감각을 익히고 투입되었다. 즉, U-보트를 타고 출격하기 전 적어도 1년 정도는 훈련을 받은 이들이란 소리다.
(현대 해군에서도 잠수함 부대의 부대원은 엘리트로 분류된다. 미 해군의 경우가 이를 잘 대변해 주는데, 차례차례 진급해 마지막에 해군장성에 오르는 이들의 출신병과를 살펴보면 거의 다 잠수함 부대 아니면 해군비행대, 항모항공부대 출신들이 많다. 힘든 만큼 배려해 준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 만큼 엘리트란 걸 인정해 주는 것이다)
베르너가 멀뚱하게 있다가 어뢰실로 가서 어뢰 집어넣었다 뺐다 하면서 뺑이치고 있던 애들한테 사진기 들이밀다 기름걸레를 맞는 장면 보면서,
- 내 저럴 줄 알았다
라고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나는데...U-보트 승무원들 중 특히 힘든 보직이 바로 어뢰를 담당하던 애들이었다. 보통 어뢰란 게 장전 되어 있으니까 따로 빼고 할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발사관 중 하나는 꼭 빼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어뢰를 정비하고 배터리도 체크하고 하면서 끊임없이 손을 봐야 했다. 그래도 불발이 종종 발생 하였던 게 그 당시의 어뢰였다. 문제는 이 어뢰란 것의 재장전이 쉬울 것 같아 보이는데, 당시 어뢰란 것은 533미리의 외경에 길이만 7미터가 넘어갔고, 기본적으로 무게만 1.5톤이 넘어가는 것들이었다. 이걸 일일이 사람 손으로 장전하거나 발사관에서 빼서 정비한다는 것이 보통일은 아니었다. 보통 한발 재장전 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10분에서 20분정도 걸렸으나 파도가 요동치고, 전투상황이란 극한 상태에서 그 좁은 함 내에서 10분 만에 이걸 해낸다는 건 그야말로 초인적인 작업이었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그야말로 쌩 노가다였다.
독일 U-보트의 주력이던 Ⅶ형은 다른 나라 잠수함에 비해 승무원의 거주성이 극히 나빴다. 단각식 구조였기에 밸러스트 탱크(잠수탱크로 보면 된다. 잠수함은 이 밸러스트 탱크에 물을 채워서 잠수하고, 부상할 때는 여기의 물을 빼서 부상하는 것이다)나 용골 등등 모든 시설이 선체 내에 들어가 있었고, 전투에 필요한 설비를 제외한, 승무원의 거주성을 위한 배려는 거의 없었다. 그 나마 최소한의 거주구도 승무원들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포기(?)했다 (침대나 화장실 등등에 식량과 연료를 조금이라도 더 싣고 나가기 위해 거주구 마저도 포기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은 어뢰 발사관실도 마찬가지였는데, 어뢰 발사관실 역시 병력 거주구와 같이 배치되어 있어서 U-보트 요원들은 어뢰 사이에서 잠을 자고 생활하였던 것이다. 영화에서,
- 어뢰 좀 빨리 쏘고 넓게 지내자!!
이랬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5. 작지만 궁금했던 것들...
베르너 중위의 맞은편에 누워있던 한 넘이 프랑스 애인한테 편지 쓰는 거 보면서, 과연 저 편지를 언제 붙인다는 건가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관객들 있을 터인데, 실제로 U-보트 승무원들은 편지를 써서 [붙였다] 대서양에서 무슨 택배가 나타나 보냈냐구? 아니다...U-보트에게도 보급함이 있었고, U-보트들끼리의 “물물교환”이 있었다.
당시 U-보트 중 주력이던 Ⅶ형의 여러 개량형들은 아무리 덩치를 키웠다 하더라도 항속거리가 1만 해리가 넘어가는 것이 거의 없었다(소나타 덩치를 아무리 키운다고 해도 에쿠스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Ⅶa형의 경우는 겨우 6,200해리였었고, 최장 항속거리를 자랑하던 Ⅶd형도 11,200해리였다. 문제는 연료를 다 쓸 동안에 선단을 발견해서 가져 간 어뢰를 다 쏘고 귀환하거나 하면 좋겠지만, 그럴 경우 보다는 연료나 식량이 떨어져 귀환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보급 유보트였다. 연료와 식량을 싣고 대서양으로 진출해서 식량과 연료를 보급하였는데, 1,700톤급 ⅩⅣ 형이 “탱커”라 불리며 다른 공격형 U-보트들에게 연료를 공급하였다. 이 탱커는 총 700톤의 연료를 싣고 움직일 수 있었는데, 이 700톤 중 4~600톤을 다른 유보트들에게 보급하였다(U-보트 승무원들은 이 탱커 유보트를 ‘젖소’라 불렀다).
이 탱커의 등장으로 U-보트들은 카리브해에서 희망봉까지 작전 구역을 넓힐 수 있었고, 덕분에 미영 연합군은 그들의 방어선을 더 넓힐 수밖에 없었다. 물론, 미영 연합군들은 이 젖소를 잡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웠고, 독일 잠수함 부대에서도 “연료 보급지”를 선정하는데 있어서 언제나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서너 척의 U-보트들이 한꺼번에 젖소에게 젖을 받아먹기 위해 대기 하거나, 연료를 보급 받던 그 시간이 U-보트에게 가장 취약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귀환하는 U-보트가 작전 중인 U-보트에게 남는 식량과 연료를 주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U-보트 중에 여유 있는 U-보트가 기름이 바닥나 빨간 불 들어온 U-보트에게 기름을 나눠주는 경우도 있었다. 보통 이런 경우 귀환하는 젖소나, U-보트에게 그동안 써놨던 편지 등을 건네는 것이 일상이었던 것이다.
6. U-보트의 공격 방법
영화에서 보면, 몇 차례의 전문을 받고, 함장이 해도를 보며 거리를 계산하고, 거리가 너무 멀다고 포기하던가, 아니면 쫓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앞전에 설명한 그 [늑대떼 전술]이란 것이다. 되니츠는 대서양 여기저기에 U-보트를 그야말로 뿌려놨다. 그리고 그 뿌려 논 U-보트 중 한척이라도 영국으로 향하는 선단을 발견 하게 되면 곧장 U-보트 본부에 무전을 쳐 알린 다음 곧바로 이 선단에 대한 추격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무전을 받은 U-보트 본부는 그 근처의 U-보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곧장 이 선단을 추격해 같이 협공하라고 지시를 내리는 것이다.
영화 초중반의 그 지리한 시간 동안 함장은 [괴링]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이 바로 이 [선단]의 발견에 대한 부분이란 것도 잠시 언급해야겠는데, 앞전에 잠수함의 마스트 위에 4명의 견시병이 90도씩 나눠서 사방을 감시한다는 걸 이야기 했던 걸 벌써 까먹지는 않았을 테구...일단 그 견시병들이 아무리 24시간 불철주야 감시를 한다 하여도 사람 눈으로 보는 감시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시계가 탁 트였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잠수함의 마스트가 낮다는 한계 덕분에 10킬로미터 정도의 시계를 확보 하는 게 고작이었다. 결국 U-보트들은 항공기를 통한 수상 정찰을 궁리하게 된다. U-보트에 조립식 항공기나 오토자이로 같은 1인승 헬리콥터 등을 분해해서 들고 가다가 필요할 때 이들을 조립해 띄워서 정찰을 한다거나 하는 방법도 개발되어 사용 하였지만, 역시 성능상의 문제로 활성화 되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되니츠는 강력하게 수상정찰을 요구하였지만, 괴링은 독일에서 날아다니는 모든 건 [공군소속]이라며 쌩쑈를 했고, 잠수함 부대를 위해 정찰기를 보내는 걸 극력 반대했다. 되니츠는 항공 정찰로 선단을 발견해 그걸 각 U-보트들에게 타전하면 선단 공격이 훨씬 효율적인 논리로 나섰고, 결국 항공 병력을 얻어냈지만, 그때는 너무 늦어버렸다.
음...어쨌든 U-보트들은 일단 적 선단을 발견 하게 되면 일정거리를 두고 추적을 하면서 주변의 U-보트들이 모이길 기다렸다가 야간에 슬며시 부상하여 집단으로 어뢰 공격을 하는 것이 [정석 플레이]로 인정됐다. 영화에서처럼 슬며시 부상해 조준기를 마스트 위에 달고 함장이 그걸 보면서 조준하고 어뢰를 발사하는 게 일반적이란 것이다. 이유? 간단하다 어뢰의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그 당시 어뢰는 유도어뢰가 아니라 쏘면 그냥 직선으로 달려 나가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뭐 조금 지나 자기어뢰나 음향호밍 어뢰 등등이 나왔지만 서두 야밤에 부상해서 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정석 플레이였음은 변하지 않았다.
7. 지브롤타...쥐덫 속으로
영화상에서 보면, 지브롤타를 거쳐 지중해로 들어가라는 전문을 받고 U-96의 애들이 거의 뭐 사색이 되어 죽을상을 짓고 앉아 있는 걸 볼 수 있다. 음 이 부분에 대해선 지금에서도 의견이 분분한데, 일단 그 배경부터 설명해야 겠다.
1940년 6월 28일날 히틀러의 파트너이자, 문제아이자, 사고뭉치인 이탈리아의 뭇솔리니가 이딴 말을 했었다.
- 영광스런 로마제국의 후예들이여!! 총을 들어라!! 노쇠한 대영제국으로부터 이집트를 넘겨 받아 제 2의 로마제국을 건설하자!!
독일 혼자 너무 많이 헤쳐 먹었다고 이탈리아가 요리조리 궁리하다가 결국 사고를 친 것이다. 그리고 1940년 9월 13일 날 이탈리아 애들이 이집트로 진출했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넘길 수 있는데, 문제는 영국의 리처드 오코너 장군이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독일한테는 초반에 밀리는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대영제국 아니던가? 리처드 오코너 장군은 이탈리아를 떡실신 만들어 버린 것이다. 싸워도 너무 잘 싸워서 이탈리아 군을 개차반으로 만들어 버린 오코너.
음...결국 1941년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를 기념하며 역사상 사막전투에서 가장 유명한 장군으로 이름을 떨친 사막의 여우 [롬멜]장군을 끌어 낸 것이다. 이 사막의 여우가 아프리카 대륙에 발을 내 딛으면서 이탈리아 군은 고생 끝 행복시작이었고, 영국군은 꽃길의 끝을 봐야 했다. 영국군 개 박살이 나는 동안에 그나마 좀 독일군을 괴롭힐 수 있는 것이 지중해를 타고 넘어오는 독일군과 이탈리아 군의 보급선들을 공격하는 것 이였다. 말타섬의 영국군 항공대 애네들이 이 보급선들을 보이는 족족 격침시키면서 롬멜은 심각한 보급 난에 허덕여야 했다. 심한 경우엔 보급물자의 60%가 지중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경우도 생기자. 히틀러는 비장의 카드를 들이민다.
- U-보트를 지중해로 보내버려!!
그의 생각은 간단했다 말타 섬의 영국군 항공부대도 보급 없인 못 버틴다. 즉, 그 보급선을 U-보트가 잘라주면 말타 섬은 자연스럽게 독일군에게 넘어온다는 것이다. 음 일견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되니츠의 생각은 달랐다.
- 어차피 영국군의 보급물자는 대서양에서 건너오는 것이다. 영국본토의 숨통을 조이면 모 든 전선이 다 무너진다!! 지금 지중해에 U-보트를 보내면 그만큼 대서양에서의 선단 사냥에 구멍이 뚫린다!!
되니츠 혼자의 주장이었다. 영국의 처칠 역시도 히틀러의 판단이 [영단]이었음을 인정하였지만, 되니츠는 지중해에 U-보트를 보내는 것 자체가 U-보트의 죽음이라고 판단하고 있었고, 실상 그 말이 맞는 말이었다. 되니츠의 표현을 빌자면,
- 지중해는 U-보트의 쥐덫이다.
일단 지중해로 들어가는 길목인 지브롤타에 영국군이 지키고 앉아 있는 게 문제긴 하지만, 일단 들어가는 것은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물론 들어가다 몇 척의 U-보트가 피격되고 격침된 경우도 있었으나, 나오는 것 보다는 상대적으로 쉬웠다. 일단 조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세차게 흐르기 때문에 들어가는 건 잠수해서 조류에 몸을 맡겨 들어간다 하지만, 빠져 나오는 건 조류 때문에 나오는 게 그렇게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지중해가 말이 좋아 바다이지, 육지에 둘러싸여 있는 [호수]형상이기에 대잠 초계기가 뜨기가 용이 했고, 일단 영국군이 마음먹고 지브롤타를 봉쇄한다면, U-보트의 지중해 탈출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대서양에 배치해야 할 U-보트 한척이 아쉬운 마당에 쥐덫 속으로 U-보트를 보내야 한다니...되니츠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결국 되니츠가 결사적으로 반대했으나 U-보트의 지중해 배치는 결정사항이 되었고, 1941년 11월 29일자 해군 총사령부의 명령으로 지중해 바깥쪽 지브롤타 인근에 상시 15척을 배치하고, 지중해 안으로 10척의 U-보트를 배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물론 지중해 안쪽으로 들어간 U-보트의 활약은 기대 이상이었다. 영국의 항공모함 아크로얄을 비롯해 순양함 구축함들을 격침시키며 맹위를 떨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승리는 지엽적인 부분에 불과 한 것이었다. 한척의 잠수함이 아쉬운 판에, 되니츠는 1942년 말까지 총 62척의 U-보트를 지중해로 보내야 했고, 이 중에 살아서 다시 대서양으로 돌아온 U-보트는 단 한척도 없었다. 되니츠의 말처럼 지중해는 U-보트의 쥐덫이었던 것이었다.
8. 뒷이야기...
되니츠는 U-보트야 말로 2차 세계대전 독일을 승리로 이끌 유일한 카드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연합국측도 되니츠의 생각에 100% 동조한 상황이었다). 그 카드를 끝까지 움켜쥐기 위해 최선을 다해 U-보트 부대를 양성, 훈련시켰고, U-보트를 한척이라도 더 확충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말한 3백 척의 U-보트가 실제로 되니츠의 손에 들어갔다면, 2차 세계 대전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처칠은 이탈리아가 독일편에 붙는 것을 어쨌든 막아보려고 애썼고, 이탈리아가 독일편에 붙고 난 다음에 엄청난 불안과 번민으로 고민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탈리아가 보유하고 있던 2백 여척이 넘어가는 잠수함 세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국에게는 다행일 수 있었던 것이 이탈리아 잠수함대가 [멍청했다는] 것일 것이다. 되니츠가 이탈리아 잠수함과 지휘관들을 불러와 열심히 가르쳤지만, 독일의 U-보트와 같은 활약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었다.
되니츠가 한순간만이라도 3백 척에 근접한 U-보트를 확보했던 때라곤 1938년 가을의 독일 해군 계획위원회가 제시한 Z 계획의 [서류상]의 U-보트 함대에서였다.
이들은 영국과의 접전에서 영국을 이기기 위해선 그들의 [상선대를 분쇄]하는 것만이 유일한 승리방안이라는 제대로 된 결과를 도출 해 냈고, 그에 소요되는 해군의 전력 확충 계획을 제시하였다. 그것이 바로 Z계획이었다. 1948년까지 독일해군은
1. 56,000톤급 전함 6척(42,000톤급 비스마르크와 티피츠에 추가하여 건조)
2. 31,000톤급 순양전함 3척
3. 20,000톤급 항공모함 4척
4. 그밖에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44척, 구축함 68척, 어뢰정 90척
5. U-보트 249척
이 정도 수준의 전력을 그때까지 확충하겠다고 히틀러에게 보고했고, 히틀러는 1939년 1월 계획을 앞당겨 1945년까지 이 전력을 확충하라고 말했지만, 1939년 9월 1일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이 모든 계획은 어그러졌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시작과 함께 대영제국과의 전투에 뛰어든 U-보트 함대의 전력은 고작 56척에 불과하였다.
그야말로 한줌도 안 되는 U-보트들은 대서양에서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사투를 벌였다. 고작 44~52명이 타는 U-보트 한척을 발견하고 격침시키기 위해 25척의 대잠 전투함과 1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해야 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2차 세계 대전 전 기간 동안 독일의 U-보트 건조비와 연합군의 대잠세력 건조비, 그리고 상실된 선박 건조비의 교환비는 1:15의 비율을 유지하였다.
연합군이 U-보트를 공격하기 위해 선단에 호위 항공모함을 배치하고, 대잠수함 세력을 확충하여 U-보트를 압박 하였다 하지만, 실상 연합군이 U-보트를 이길 수 있었던 수단은 대잠수함 세력의 힘만은 아니었다.
진정 연합군이 U-보트를 이길 수 있었던 결정적인 무기는 바로 리버티선(Liberty ship)이라 불리던 전시표준선의 등장 때문이었다. 헨리 카이저라는 인물이 생각해 낸 이 리버티선은 1만 920톤의 화물을 싣고 시속 11노트로 1만7000해리를 갈수 있는 배인데, 가격은 놀랍게도 척당 200만 달러밖에 하지 않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배 한척을 완성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10일 이었고, 선박 건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8시간 반 만에 한척이 완성되기도 하였다.
당시 연합국의 생각은 간단하였다.
- U-보트가 파괴하는 화물선 숫자 보다 더 많은 화물선을 찍어내서 보내면, 결국은 우리가 이기는 것이다.
어찌 보면 상당히 [무식한] 방법처럼 보이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1942년 되니츠는 어쨌든 월평균 700,000톤을 격침시켜야 연합국 선박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계산을 내놓았다. 그리고 추축국 3국이 이 선박 파괴에 모든 운명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미국의 리버티선이었다. 8시간 반 만에 만재 배수량 1만 톤이 넘어가는 배 한척이 건조되는 게 말이 될까 마는 헨리 카이저는 이걸 해냈다. 1941년 9월부터 1942년까지 597척의 리버티선을 만들어 낸 미국은 1943년이 되자 월평균 140척씩 리버티선을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같은 기간 U-보트의 월평균 생산량은 23.6척이었다. 전쟁 전 기간 중 가장 높은 생산량을 보여주었지만, 이는 수상함의 건조비율을 그만큼 낮춘 뒤의 효과였다. 그 다음해에 수상함의 건조 비율을 높이자 U-보트의 월평균 건조 척수는 19.5척으로 급감하게 된다.
1943년 7월까지 연합국 측의 선박 톤수는 감소하였다. 그러나 리버티선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면서 이야기는 달라졌다. 1943년 7월이 지나고, U-보트가 격침시킨 화물선 보다 더 많은 배를 찍어내 대서양으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물량에 U-보트 함대는 서서히 압도되어 갔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직전의 독일 U-보트의 세력은 고작 56척이었으나, 전쟁 중 1,099척을 건조 하였고, 10척을 노획하였다. 총 1,170척의 U-보트 중 작전에 투입된 U-보트는 863척 이었으며, 이 중 753척이 대전 중 격침되었다. 나머지 U-보트 중 215척은 연합군의 유럽침공에 발맞춰 승조원들에 의해 자침되거나 폭파되었고, 그 나머지는 대전 기간 중 수리 불가판정을 받은 38척, 중립국 항구에 억류되거나 타국 해군에 양도된 11척을 제외한 153척이 연합국 측에 인계 되었다.
U-보트 부대가 이 정도 손해를 입으며 연합군 함대와 선단에 입힌 피해는 실로 막대하다 할 수 있겠는데, 항공모함 3척과 호위항모 3척을 포함해 148척의 군함을 격침 시켰고, 45척의 군함을 드라이 독으로 집어넣었다. 여기에 더해 U-보트의 궁극적인 임무였던 상선 파괴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총 2,759척 14,119,413톤의 상선을 침몰 시켰다. 이 기간 동안 U-보트 승조원 중 28,000명이 전사 하였고, 5,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같은 기간 동안 영국해군 전사자수 7만여명 중 대부분이 U-보트와의 전투에서 그 목숨을 다 해야 했었고, 영국인 선원의 사망자 숫자만 3만 명을 상회했을 정도니 U-보트에 의한 그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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