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세계 명장열전

醉月 2009. 5. 1. 10:56

글쓴이 : 여영무 인터넷신문 뉴스앤피플 대표 겸 주필

 

걸프전 영웅 노만 스워츠코프 장군

국가는 국민, 영역, 주권등 3 요소로 구성돼 있다. 이가운데 어느것 하나가 없어도 독립국가로서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없다. 주권은 외침을 막아 국민생명과 재산, 영역과 독립을 지키고 대내적으로는 최고의 지배권을 행사하는 권력을 뜻한다.

아무리 국가가 커도 군이 외부 침략을 물리칠수 없다면 주권과 함께 국가는 존립할 수 없다. 지난 6월 서해교전때도 만약 우리해군 장병들이 목숨 바쳐 북한 함선들의 무력도 발을 즉각 격퇴하지 않았다면 서해수역은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해군이 영역을 지킴으로써 독립과 주권이 보장될 수 있고 후방 국민들도 안심하고 일상생활에 전념할 수 있다. 6월 한달동안 국민들이 월드컵을 무사히 치르고 연인원 2 천만의 ‘붉은 악마들’이 열광적 응원을 할 수 있었던것도 국군장병들이 24시간 땅과 바다, 공중에서 우리영역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라마다 오랜 전투경험과 지도력, 애국심을 갖춘 지휘관들이 군대를 지휘, 국가 영역과 주권을 수호하고 있다. 국가 존립은 각급 군지휘관들이 얼마나 투철한 애국심과 강철같은 군인정신, 적을 능가하는 최첨단 전략전술로 무장돼 있는가에 달려있다.

그런점에서 H. 노만 스워츠코프 미 육군대장의 걸프전 무용담과 전략전술은 세계전사 에 기록될만 하다. 그는 전사상 최초로 전자전을 성공적으로 지휘, 42일이란 최단기간내 전쟁목적을 100% 달성한 명장으로 꼽히고 있다.

그의 시원하게 벗겨진 넓은 이마와 날카로운 눈매, 발달한 광대뼈, 굳게 다문 한일자 입, 큼직한 두귀가 용맹한 무인다운 풍모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사막의 폭풍’작전으로 명명된 걸프전은 90년 8월 2일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이 이웃 쿠웨이트를 기습, 점령 흡수한데 대한 반격전이었다. 유엔결의에 따라 91년 1월 17일 미군과 영국군 프랑스군등 다국적군등이 참전, 개전 42일만에 이라크군을 궤멸하고 쿠 웨이트 독립을 원상회복 해주었다. 짓밟힌 정의를 국제적 양심이 되찾아 준 것이다.

걸프전 목적은 뚜렷했다. 당시 미군 최고통수권자인 조지 부시 대통령(41대)은 스워츠 코프 장군에게 분명한 네가지 전쟁지침을 내렸다. 스워츠코프 장군은 이 전쟁지침을 한치 오차없이 실현, 전쟁목적을 달성함으로써 미국의 국민영웅이 되었다.

그 전쟁지침은

①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축출하고

② 쿠웨이트를 완전 해방, 주권회복을 도울 것

③인명피해를 최소화 할 것

④ 이라크군의 재침 전쟁수행능력을 궤멸 시킬것등이다.

스워츠코프 장군은 부시 대통령의 전쟁지침을 탁월한 지도력과 곰 같은 인내력, 과학적이고 단계적이며 체계적 작전수행으로 털끝만큼의 흔들림 없이 일사불란 하게 야전에서 실현했다.

걸프전은 종전 전쟁과 몇가지 다른 특징을 나타냈다. 첫째 상상을 초월한 최첨단 정보기술이 총동원된 전자전이었다. 미래 전자전의 예고편이었다. 둘째 철저한 과학전이었다. 셋째 매스 미디어 통제속에서 심리전을 구사한 미디어전이었다. 넷째 침공국가 이라크측은 8만5천명의 포로와 15만명의 대규모 전사자를 낸 반면 다국적군 사상자는 불과 4백명이었다. 스워츠코프 장군이 사우디 리아드에서 다국적군 연합작전을 매끄럽게 지휘, 일방적 승리로 이끈 덕택이었다.

전세계 사람들은 이런 전쟁상황을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철군으로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안방에서 TV화면으로 영화 감상하듯 볼수 있다.

걸프전은 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인구 60만의 작은 이웃나라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라크를 자신들 영토라고 주장해온 사담 후세인은 8년을 끈 이란-이라크전후의 민심수습을 위해 쿠웨이트 침공이라는 비상카드를 빼들었다.

그러나 이라크군은 격분하는 국제여론을 업은 미국등 다국적군에 의해 단기간내 궤멸되었다. 걸프전은 부시 대통령의 5개월여에 걸친 반격명분 쌓기 외교전및 심리전과 함께 치밀하게 준비해온 미국의 정보기술전, 과학전, 전자전, 미디어전의 승리로 끝났다. 42일 전쟁기간중 39일간이 전자전을 동반한 미사일과 전폭기의 항공전역(戰役)전이었고 이라크군을 몰아내는 지상전은 3일간에 불과했다.

스워츠코프 장군은 연합 야전군 사령관으로서 이런 작전개념을 오케스트라 지휘자 처럼 절묘하게 실현했다.

미국등 다국적군은 먼저 토마호크 미사일과 RC130기 공격편대로 이라크 방공망을 무력화시키고 이어 전폭기 편대들이 떼로 몰려가 이라크 지도부, 군지휘부, 지휘통제시설, 스커드 기지, 생화학무기 시설들을 집중 타격, 전쟁 지휘능력을 궤멸시켰다.

본국으로부터 보급이 끊기고 작전 지휘조차 받을 수 없었던 쿠웨이트 점령 이라크 군은 파죽지세로 치닿는 다국적군에게 저항능력을 상실하고 항복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베트남전과는 달리 ‘사막의 폭풍작전’중 전세계 매스 미디어를 교묘하게 다뤄 전쟁수행중 반전여론을 봉쇄, 승리로 이끈 야전군 사령관으로서 2차대전후 가장 인기높고 사랑받는 장군이 되었다. 그는 또 지루하고 인기없는 베트남전 참전 미군장교들을 시대적으로 대표하는 군인이기도 하다. 그는 베트남전 후 군에 남아 작전능력향상과 미군장교들의 군복무 성실성 보전에 크게 이바지 했다.

스워츠코프 장군은 1934년 8월 22일 뉴저지주 트렌톤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도 웨스트포인트를 나와 2차대전에 참전한 군인가족 출신이다. 스워츠코프 장군은 청년시절 아버지가 전후 이란 샤왕 군사고문으로 있을 때 중동을 처음 방문한 인연을 갖고 있다.

그는 벨리 포즈 군사학교와 웨스트 포인트를 나와 보병장교로 미국과 독일에서 근무했다. 남 칼리포니아 대학에서 2년간 수학, 유도미사일 분야 석사학위를 받은후 웨스터 포인트 교수진에 합류했다. 1년간의 교수생활후 그는 베트남전에 참전, 베트남 공수사단 고문으로 활동했다.

스워츠코프 장군은 다시 2년간의 웨스트 포인트 교수직과 육군참모대학을 거쳐 중령으로 조기 진급한후 베트남전으로 복귀했다. 1969-70년 그는 제23 보병사단의 제1대대 지휘를 맡았고 여러차례 무공훈장을 탔다. 그후 12년간 앨라스카와 하와이, 독일, 미국등지에서 다양한 분야 지휘관으로 활동, 승진을 거듭했다.

그는 1983년 6월 조지아주 포트 스튜아트에서 제24기계화 보병사단장으로 부임했고 그해 10월 그레나다 공격때 ‘긴급분노작전’ 부사령관겸 수석 작전지휘관으로서 ‘사막의 폭중작전’ 처럼 완벽하진 않았어도 작전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88년 4성장군때 그는 중동의 긴급사태 담당 군사령부인 중부군 사령관에 기용되었다. 걸프전에서 그는 베트남의 제한전 교훈을 인식, 공중, 해상, 지상군의 거대한 연합군을 일시에 집중투입, 42일간의 항공전과 100시간의 지상공격을 퍼부었다.

스워츠코프 장군은 걸프전에서 베트남전실패 교훈을 되새겨 올바른 전쟁에서 알맞은때 적임 장군임을 입증함으로써 세계전사에 깊은 자죽을 남겼다. 그는 걸프전 승리후 워싱턴에서 열광적 환영을 받은후 고향에서 조용한 은퇴생활을 하고 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독창적 전략·전술의 大家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이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대담한 인천상륙작전과 9·28서울 수복작전이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을 공산침략으로 부터 구출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1884년 1월 26일 아칸소 주 리틀록에서 아더 맥아더 장군의 아들로 군인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생을 전쟁터에서 보내면서 지략과 대담성의 군인 삶을 살아왔다. 대부분 그의 생애는 초고속 승진과 연전연승 개선장군의 영광과 환희로 빛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은 그를 한국전 영웅으로 만들었고 그의 인기는 본국은 물론 한국과 극동지역에서 하늘높이 치솟았다. 그의 일생에 가장 아쉽고 원통한 일은 그와 한국인들의 소원대로 압록강을 국경으로 하는 남북통일을 성사시키지 못한 것이었다.

이런 목표는 1950년 10월 중순 중공군 개입으로 아깝게 좌절되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 아더 맥아더는 남북전쟁에서 무공훈장을 받았고 그후 미국-스페인전쟁과 필리핀 내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육사 수석졸업, 1차대전 때 사단 지휘

맥아더 장군은 1903년 육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한후 소위로 임관, 공병대에 배치되었다. 맥아더는 군생활 초기 필리핀과 일본에서 그의 아버지 부관으로 근무했고 일본에서 러일전쟁(1904-5)을 현장 관찰하기도 했다.

1906년 그는 잠시 데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 군사부관 직책을 맡았고 1914년 대위때 맥시코 베라크루스를 점령했던 원정에 참가했다. 맥아더는 1차대전때 사단을 지휘한데 이어 2차대전 태평양지역에서 연합군을 지휘했고 한국전에서는 유엔군총사령관 직책을 수행했다.

1917년 1차대전에서 <42 무지개> 사단이 프랑스전선에서 싸울때 맥아더는 사단참모장에 이어 여단장과 사단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그는 전투때 적이 자기에게 절대 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작전때 마다 선두에서 부하들에게 대담성을 가지고 전진하라면서 쉬지않고 명령하곤 했다. 맥아더는 전투시 헬매트와 가스 마스크를 쓰지 않을 만큼 늘 용감했다.

1차대전후 그는 은성무공훈장 네 개를 받았고 1차대전 전쟁 영웅 존 퍼싱 장군으로부터는 "맥아더 장군은 우리부대에서 일찍이 없었던 위대한 지휘관이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중의 한 사람

맥아더는 두말할 나위 없이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들중 한사람이지만 동시에 대통령의 문민우위 권위에 도전, 가장 많은 논란을 빚었던 장군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그는 전략전술등 모든면에서 완벽할정도며 높은 학식과 교양을 갖춘 데다 드문 웅변가였다. 우뚝한 키와 귀족적 미남형의 풍모는 그를 더욱 당당하게 돋보이게 한다.

그는 대담한 군인이면서 동시에 멋을 즐기는 멋쟁이기도 하다. 꾸깃꾸깃한 작업모와 작업복 차림에 옥수수대 파이프와 래이번 안경이 그의 브랜드로 유명하다. 그는 작업복에 훈장을 다는 일이 없지만 5성계급장만은 반드시 달고 다닌다. 1950년 트루만 대통령과 태평양상 웨이크섬에서 만날때도 그는 이런 복장을 하고 나가 은연중 트루만 대통령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출중한 능력과 준수한 외모, 명문 군인가문 출신인 맥아더 장군은 군생활에서 항상 남보다 월등 앞섰기 때문에 부러울게 없었다. 그의 부하들은 그를 존경하거나 증오했지만 그의 적들을 포함, 모든사람들이 그의 전략적 독창성과 우수성, 수륙양용 상륙작전 전술의 대가, 최소한의 사상자로 승리를 쟁취하는 백전백승의 능력을 이구동성으로 칭송했다.

전역 후 재소집

그는 1919년 39세때 웨스트 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취임, 역대 가장 젊은 교장이 되었다. 맥아더 교장은 사관학교 행정과 교과과목을 현대화했고 그때 정해진 교과목은 수십년간 거의 변하지 않았다.

맥아더는 1922년 잠시 필리핀에 부임했다가 1930년 대장으로 승진, 육군참모총장으로 발탁되었다. 35년 다시 필리핀에 부임해 독립에 앞서 필리핀 군대를 조직 훈련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그는 1937년 12월 31일 전역했다.

1차대전 참전외에 그의 대부분 군생활은 모두 아시아 태평양지역이 활동무대였다. 그가 미국에서 극동통(極東通)으로 알려진 이유다. 그러나 미국 전쟁성(戰爭省)(오늘의 국방부)은 일본의 잇따른 아시아 침략전쟁과 대미 침략전 조짐에 대비해 1941년 7월 26일 그를 다시 현역으로 재소집했다.

그는 극동 미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그의 임무는 필리핀에 대한 일본군 침공에 대비, 필리핀을 방위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그해 12월 8일 진주만 기습공격을 감행했으므로 그의 현역 복귀시기는 절묘했다.

맥아더 장군은 태평양전쟁에서 1942년초 일본군 공격으로 마닐라를 빼앗기고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했다. 그는 2차대전때 연합군 남서태평양 방면 사령관으로서 45년 필리핀 수복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을 때 까지 대일작전을 총지휘 했다.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

그는 필리핀을 일본군에게 빼앗기고 피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필리핀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맥아더 장군은 45년 7월 필피핀을 완전 탈환함으로써 이 약속을 지켰을뿐 아니라 8월 일본을 항복시키고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45년 9월 2일 65세때 도쿄만 미국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문서를 받아냈다. 맥아더는 전후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서 6년간 일본의 전후복구와 민주헌정 수립 을 지원했다. 전후 일본은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했고 국민들은 기아와 질병의 고통속에서 신음했다. 전후복구와 경제부흥을 도와준 맥아더는 옛날 원수였던 일본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고 많은 일본인들은 그를 ‘왕관을 쓰지 않은 황제’로 불렀다.

맥아더는 전승국 군인으로서 점령지역에서 어떤 정치를 해야 하며 이를 위해 누구와 손잡아야 하는냐에 대한 모범적 해답을 제시했다. 그는 요시다 시게루 전직 외교관 출신 정치인과 협력, 전후 일본 부흥을 이끌어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이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6·25한국전도 진주만 기습공격 처럼 북한 공산군에 의한 기습전 남침이었다. 맥아더는 우선 전투부대 (스미스 대대)를 일본에서 한국전선에 급파했고 50년 7월 8일엔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인천상륙으로 대한민국 구출

13만명 인민군 보병부대는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남하,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한국군은 그때 북한의 위장평화공세에 속아 북한의 선의만 믿고 준비를 게을리 했다가 속절없이 당하고 만 셈이다. 인민군은 그후 낙동강 지역까지 밀고내려와 한국의 마지막 교두보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대한민국을 구출했다.

그는 인민군 남침직후 급거 한국전선을 시찰하고 돌아갔다. 인천상륙작전 구상은 이때 맥아더 머리를 섬광처럼 스쳐갔고 그는 이 기본구상을 2개월 반동안 참모들과 수십차례 토론 끝에 마침내 실전 작전개념으로 굳혔다.

그는 인민군이 저항없이 남하를 계속한다면 보급로가 감당할 수 없이 길어질것이고 유엔군이 배후에서 공격, 보급로 허리를 끊으면 서울 이남 인민군은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될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의 이런 거친 구상이 극비리에 작전개념으로 다듬어져 일부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 성공시킨 것이다.

인천 상륙작전 성공은 한국 수도 서울을 재탈환함으로써 상당한 심리적 장점도 살릴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은 적중했다. 이 상륙작언은 그의 충성스런 애국심과 최고지휘관으로서 탁월한 지도력, 정의감, 반공정신, 동맹국에 대한 의리정신이 어우려져 일궈낸 찬란한 승리였다.

최종 작전안은 8월 23일 도쿄 맥아더 사령부에서 로튼 콜린스 합참의장과 해군작전처장 포레스트 셔만 제독, 그리고 자기 참모들과 장시간의 격론끝에 마무리 되었다.

그는 마지막 토론에서 일부 반대하는 장성들에게 특유의 과장법을 빌어 "나는 지금 찰칵 찰칵, 운명의 초침 소리를 듣고 있다.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우린 다 죽는다"고 비장한 결론을 내렸다.

인천상륙작전은 시작되었고 맥아더는 최소한의 사상자로 승리했다. 뒤이어 계속된 수도 서울탈환작전도 성공, 한국군은 그해 9월 28일 중앙청 꼭대기에 태극기를 꽂았다. 맥아더는 이승만 대통령과 나란히 세단을 타고 총탄구명으로 만신창이가 된 중앙청건물 행사장에 도착, 서울수복 축하행사에 참석했다.

"장군은 우리 민족의 구세주"

그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섭리로…, 유엔군은 대한민국 고도(古都) 서울을 공산 전제정치로 부터 해방함으로써 서울시민들은 불가침의 개인자유와 존엄성을 으뜸으로 하는 생활방식을 변함없이 누릴 기회를 회복하게 되었다"고 역설했다.

맥아더는 자기 옆 이(李) 대통령을 향해 "각하, 장병들과 저는 이제 군사작전임무 수행을 위해 민간행정 책임을 각하에게 넘긴다"고 말하자 눈물어린 노 대통령은 장군의 손을 덥석 움켜잡으면서 "우리는 장군을 우리민족의 구세주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고 감동의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나 그후가 문제였다. 38선 이북으로 진격한 국군과 유엔군이 그해 10월 완전승리를 앞두고 돌연 중공군개입 복병을 만났기 때문이다. 압록강까지 쳐올라간 국군은 통일을 바로 눈앞에 두고 휴전으로 타협해야만 했다. 맥아더는 한국전 승리를 위해 중공폭격등 여러가지 확전론을 제시했다가 1951년 4월 11일 트루만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고 말았다.

맥아더 장군은 1937년 이후 14년만에 고국에 돌아와 뉴욕환영 퍼레이드에서 7백만 군중들의 열광적 환영을 받았고 상하원 합동회의에서는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뿐이다" 라는 감동적 명연설을 남겼다.

그의 대통령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1차대전에서부터 핵시대와 냉전시기를 출중한 장군으로 살아온 그는 현대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저명한 장군의 한사람이라는 점에는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아이젠하워

사상 최대의 작전 지휘한 名 지휘관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 장군은 2차대전때 노르망디 연합군 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다. 그는 전후 군을 떠나 잠시 컬럼비아대학 총장으로 있다가 트루만 대통령에 의해 1951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령관으로 다시 군에 복귀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1952년 트루만 대통령의 불출마 선언에 따라 공화, 민주양당의 후보추대 대상에 올랐다가 공화당후보로 출마, 압승을 거두었다. 52년 제34대 미국 대통령 선거전때 내세운 케치프레이스는 "나는 아이크를 사랑해"였다.

<아이크>는 그의 대중적 애칭이다. 그는 공화당 대통령으로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후 다시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전을 휴전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가 선거전에서 국민들에게 한 약속을 지켰고 일생 동안 두 개의 큰 전쟁을 자기 주도로 지휘하고 끝낸 셈이다.


맥아더 장군과의 인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는 묘한 인연을 맺었다. 1935년 아이젠하워는 맥아더 장군이 육군참모총장 시절 총장실에서 근무했고 필리핀에서 3년간 맥아더 장군의 부관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던 한국전의 휴전을 성사시킨 것이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초대규모 전쟁에서 최대규모의 다국적 군대를 총 지휘했다. 2차대전 노르망디 작전때 그는 육해공 4백만명의 대군을 장악, 연합군의 총공격을 계획 지휘, 독일 이탈리아등 추축국들을 패망시켰다.

여러나라 군대들로 구성된 다국적군과 고집센 예하 지휘관들을 통솔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비범한 능력을 발휘해 연합군을 통솔, 어려운 승리를 일궈냈다.


아이젠 하위의 성장기

그는 1890년 10월 14일 택사스주 데니슨에서 출생, 양친과 함께 칸사스주 아비렌으로 이주해서 그곳에서 성장했다. 집이 넉넉지 않아 대학을 갈수 없었기 때문에 미국 육군 사관학교인 웨스트 포인트를 선택했다.

그는 웨스트 포인트 육사시절 축구선수였으며 1915년 졸업동기생 중에는 50여명의 장군을 배출했다. 164명 졸업생중 61번째 성적을 받은 그는 보병소위로 임관되었다.

아이젠하워는 초임 장교로서 보병과 신설 탱크부대 합동작전 훈련계획을 개발해서 이 름을 얻었다. 맥아더와는 달리 1차대전에 참가하지 못하고 본국근무를 하면서 1920년 고속승진, 소령계급장을 달았다. 그러나 다음이 문제였다.

그는 20년간 소령으로 제자리 걸음을 하는 바람에 적은 군대월급으로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무척 고생을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묵묵히 인내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는 앞날에 인생의 거대한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예감했다. 그때 만약 참지못하고 화풀이로 군대를 떠났더라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대성공도, 2대에 걸친 8년간의 미국 대통령의 찬란한 영광도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칸사스 포트 레벤워스에서 군사참모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그는 1929년 존 조제프 퍼싱장군 밑에서 1차대전에 대한 안내서를 저술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여러분야에서 완벽한 참모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계속 좋은 평가를 받았다. 미국이 2차대전전 대외 확장정책을 쓸 시기 그는 마침내 중령으로 승진했다.

그후 2차대전때 3년간의 짧은 기간, 그가 5성장군으로 도약,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관 직책을 맡을줄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멀티플레이어 선수처럼 다재다능한 그의 우수한 능력을 인정한 사람들도 똑 같은 생각을 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퍼싱, 맥아더에게 우수한 업무추진 능력과 적극적이며 호감어린 인상을 주었다. 그 덕택으로 마샬 참모총장은 일본의 진주만기습 직후 그를 육군 작전사단장에 임명했다.

그는 태평양 전장에서 일본군을 견제하면서 유럽에서는 나치군을 섬멸하는 연합군 종 합작전전략을 수립했다. 마샬은 그를 직접 소장으로 발탁했고 1942년 7월 중장진급과 동시 북아프리카 침공작전인 ‘휏불작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초기 케서린 통로작전에서 독일의 에르윈 롬멜 아프리카 군단에게 밀리자 그는 예하부 대장들을 자신이 직접 선택한 부대장들로 전면 교체했다. 아이크의 부대장 교체와 지도력은 롬멜장군 부대에 대한 열세를 압도적 우세로 역전시켜 결국 나치와 이탈리아 군의 대규모 항복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북아프리카 침공작전에서 대승한 그는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과 조지 S. 패튼 장군 같 은 고집세고 거만한 휘하 부대장들을 철저하게 장악하는 능력을 인정 받았다. 4성장군으로 진급한 아이크는 1943년 7월 시시리 상륙상륙을 지휘한데 이어 이탈리아 반도에 입성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지휘

아이젠하워는 43년‘유럽정벌 연합군’최고사령관으로서‘오버로드 작전’(과부하 작전)아래 노르망디 상륙작전 수립과 집행을 총지휘했다. 그의 직접 작전지휘와 행정능력 덕분으로 연합군은 유사이래 최대의 상륙군사력을 한곳에 집결시켰고 기습시간과 장소를 작전순간까지 독일군조차 소름끼칠만큼 극비에 부쳐 철벽보안에 성공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북부해안 노르망디에 상륙한후 수백만 연합군을 이끌고 독일로 진격해 들어갔다. 노르망디에는 미국 제1군, 영국 제2군, 캐나다 제1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상륙했다. 영국 몽고메리 장군이 상륙군의 실전지휘를 맡았다.

이 날 수송기 2,316대와 수많은 글라이더로 공수부대를 독일군 배후에 투하시켜 프랑스 내륙에 거점을 확보한 연합군은, 그와 거의 동시 항공기 총 13,000대와 함선 6,000척을 동원, 노르망디 해안을 초토화하면서 7개 사단을 상륙시켰다.

‘사상 최대의 작전’이었다. 이 날부터 7월2일까지 연합국측은 인원 약 100만명, 물자 약 57만톤, 각종차량 17만량을 프랑스에 상륙시켰다.

상륙 후 첫 3주동안 연합군의 손실은 공식적으로 사망자 8,975명, 부상자 51,796명에 달했고 작전 과정에서 독일군 41,000 명을 포로로 잡았다. 전쟁 초기 서부 전선에서 순식간에 패배해 유럽 대륙으로부터 퇴각한 연합국측은 이 작전을 통해 비로소 독일 본토로 진격하기 위한 확실한 발판을 마련했다.

프랑스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노르망디 해안은 험한 절벽이었고 상륙작전 전날 밤은 폭우 안개 등으로 도저히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운 극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고민하던 연합군 지도자들은 이 결정적인 작전의 성공을 위해 각각 기도했다.

루스벨트 대통령, 처칠 수상도, 아이젠하워 사령관도 모두 전쟁의 승리를 위해 지극정성으로 기도했다. 특히 루스벨트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17시간이나 기도 했다는 에피소드도 남겼다. 아이젠하워는 오랫동안 전략을 수립했고 가장 치열한 전투가 전개된 이 작전은 결정적 타격을 나치 독일군에게 안겨주었다. 이 작전은 90일간의 전투라고 일컬어 진다. 그만큼 집중적인 전투가 전개돼 피아간 희생자도 많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배경은 연합군이 물샐틈 없는 전략전술을 잘 구사한 탓도 있지만 독일 롬멜 사령관이 남부 독일 우름시에 있는 아내 생일선물을 전달하느라 프랑스 기습현장을 비웠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또 연합군은 44년 봄부터 영국 남부 해안 지대 각항구에 수백만명의 미군들이 북적거리게 하고 보급품과 무기탄약들을 실어날아 프랑스 북부 칼레지방이 상륙지점인 것 처럼 독일군을 속였다.

연합군 양동작전팀이 이따금 칼레지방에 출격, 노르망디로 부터 나치군의 주의를 분산 시켰고 고무로 만든 가짜 탱크들을 수없이 배치해 칼레지방 침공이 임박한 듯 속임수 심리전을 썼다.

노르망디상륙 전쟁영웅으로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나선 아이크는 민주당 아들라이 스티븐슨 후보의 풍부한 행정력과 지식, 재치, 세련된 언변, 화려한 공약등을 두차례나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대통령 아이젠 하워와 한국전쟁

그는 39세의 젊은 캘리포니아 출신 상원의원 리처드 닉슨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선택함으로써 62세로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자신에 대한 국민들 우려를 불식시켰다. 압도적 다수로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긴급과제는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질질 끌어온 한국전쟁의 종결이었다. 이것은 선거공약이기도 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는 52년 11월 29일 극비리에 뉴욕을 출발, 한국으로 향했다. ‘명예로운’휴전타결을 위한 직접 한국전선 현장 시찰여행이었다. 찰스 윌슨등 예비국방장관과 제임스 헤거티 공보비서, 허버트 브라우넬 범무장관 지명자들과 비밀선서를 한 기자들 일행만이 동행했다.

그는 72시간 한국에 머무는동안 대부분 시간을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밴 프리트 8군사령관등 주요 일선 군지휘관들과 만나 현황파악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크가 1주일간 머물면서 국회연설과 대규모 군대사열을 하고 자신과 장시간 한국전 수행에 관해 협의하기를 바랐지만 그런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이크는 사흘간의 한국체제기간 이(李) 대통령과 두차례 만났지만 시간은 한시간 뿐이었다.

이(李) 대통령의 생각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쳐올라가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고 한국을 민주국가로 통일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한전을 하면서 공산측과 적당한 선에서 휴전으로 전쟁을 끝내려는 아아크의 계획에는 처음부터 절대 반대였다.

이 대통령은 북한측 도발로 시작된 한국전이 막대한 피만 흘리고 원래 분단선인 38선과 대차없는 전선에서 휴전한다는 발상에 비통함을 억제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크는 53년 7월 27일 한국전을 휴전으로 끝냄으로써 그의 선거공약을 지킨 셈이다.

맥아더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의 실전업적으로 성공한 장군이라면 아이젠하워는 행정력과 기획력, 참모역할로 성장한 군인으로 좋은 대조를 이룬다.

아이크는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펜실베이니아 게티스버그 농장에서 은퇴생활을 하다가 1969년 3월 26 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군인출신 대통령인데도 재임중 국제평화의 전도사로서 냉전해소와 세계평화 달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오마 넬슨 브래드리

 

브래들리 장군은 나서기를 삼가고 과묵하며 침착했기 때문에 성급한 패튼과 같은 장군들을 차례로 제치고 군인으로서 성공했다. 그는 꾸준한 노력과 각고하는 인내로 다져진 철인적 강인함과 온화한 포용력이 침략자로부터 조국을 구원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꾸준한 노력, 인내로 다져진 대기만성형 인물
미국은 1차 세계 대전 때부터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미국이 그때부터 세계의 전쟁과 평화문제에 대해서 주도적 역할을 했고 미국에 전쟁영웅들이 유달리 많은 것도 미국의 이런 세계적 중심 역할 때문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한 사람의 전쟁영웅만으로 성공할 수 없는 역사적 대규모 전투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미국의 전쟁영웅 아이젠하워 장군은 물론 오마 넬슨 브래드리 장군과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 등이 긴밀하게 협력해서 이룩한 공동의 승리였다.

오마 브래드리는 1915년 웨스트 포인트 졸업생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과 동기 동창이다. 그때 164명 동기생들 중 50명이 장군으로 진급, 1차 대전과 2차 대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오마 브래드리 장군도 이들 중 한명이다.

브래드리 장군은 2차 대전 중 유럽전투에서 으뜸가는 미국 지상군 사령관으로서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섬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투에서 군단을 지휘했다. 당시 프랑스 해안으로부터 돌파구를 마련한 직후 그는 130만 명으로 구성된 제12군 지휘를 맡아 독일내륙까지 깊숙이 쳐들어가 나치군을 패망시켰다.

이때 130만 명의 대군은 미국 역사상 단일 편성으로서는 최대의 군사력이었다. 미국이 최근 이라크 공격전을 준비하기 위해 20만 명을 투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보도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군대가 아닐 수 없다. 브래드리는 큰 전투에서도 항상 상식에 충실하고 일반병사들에 대한 헌신적 보살핌이 그를 ‘병사 장군’이란 별명으로 불리게 만들었다.

브래드리는 1893년 2월 12일 미조리주 클라크에서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런 곤경에도 불구하고 학교공부와 스포츠 활동에서 모든 열정을 다 바쳐 노력했고 마침내 미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 포인트에 합격했다.

브래드리가 2차 대전에서 미국 선두그룹 장군집단의 한사람이 되었을 때 그는 전투경험이 없었다. 그가 1차 대전때 참전하려고 수많은 시도를 했으나 브래드리는 이곳저곳 미국 내 군사보직에 배치되었을 뿐이다.

1차 대전 후 브래드리의 군 생활은 미국 내 다른 장교들의 생활과 별반 다른 점이 없었다. 이때는 아이젠하워 장군이 겪었던 것처럼 일선 군 지휘를 맡았다가 재교육과정을 거치는 등 승진도 너무 늦을 뿐 아니라 봉급수준도 형편없이 낮았다. 참으로 지루한 나날이었다. 브래드리는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한지 9년만에야 겨우 소령계급장을 달수 있었고 그 후 중령 진급 때 까지 12년이란 긴 세월을 또 다시 기다려야 했다.


軍에서 두각을 드러낸 브래드리

계급 진급을 떠나서 그는 군 생활 시작 초기 때 부터 미국 육군역사에 뚜렷한 두각을 나타냈다. 예컨데 1920년대 그는 하와이에서 제27 보병연대에서 3년간 근무한 다음 칸사스시 포트 레벤워스 기지 일반참모대학에서 1년간 지휘관 연수를 마쳤다. 그 후 1929년 그는 조지아주 포트 베닝기지로 돌아가 교관으로서 후배장교들을 가르쳤다.

이 기간 브래드리는 미래의 미 육군참모총장이 될 조지 마샬 장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마샬 장군은 일찍부터 젊은 브래드리의 조직적이고 지도자적 자질과 능력을 인정하고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20년간 브리드리와 마샬은 만났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식으로 두 사람은 상관과 부하로서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마샬 장군은 부하장교 브래드리의 타고난 재능을 높이 사 미국군 발전과 브래드리의 생애에 도움이 되는 보직을 연속적으로 부여했다.

1941년 2월 마샬장군은 브래드리에게 보병학교 교장자리를 주선했고 이 자리가 마침내 그에게 준장계급으로 진급할 수 있는 행운의 기회가 되었다. 2차 대전 선전 포고 후 전쟁준비를 하는 동안 브래드리 장군은 잠시 제82보병사단장과 제28보병사단장을 각각 맡아 지휘했다.


아이젠 하워 장군의 부관으로..

브래드리 장군의 최초 전투임무는 웨스트 포인트 사관학교 동기생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의 부관역할이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당시 북 아프리카 주둔 미군사령관이었다. 그의 첫 일선전투 임무는 또 한사람의 2차 대전 영웅인 조지 S. 패튼 장군 밑에서 제2군단 부사령관을 맡아 지휘하는 것이었다.

조지 패튼 장군이 제7군 사령관으로서 진급해 자리를 옮기자 브래드리 장군은 중장 계급장을 달고 제2군단 사령관 직책을 맡았다. 그는 이 직책을 2차 대전 북아프리카 전투 내내 가지고 있었다. 1943년 5월 7일 브래드리 장군의 제2군단은 북아프리카 비제르트 항구를 점령하고 40,000명의 이탈리아와 독일 등 추축국 군인들을 포로로 잡았다.

비제르트 항구는 페니키아 시대 때 부터 항구였고 이곳의 역사는 15, 16세기경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도 이 항구는 2차 대전 때처럼 전쟁에 얽혀들어 이스람교도들은 스페인을 점령한 기독교인들로 부터 도망쳐 나와 이곳에 숨어 피난생활을 했다.

브래드리 장군은 1943년 7월 10일 시칠리 상륙 작전 때 까지 패튼 장군의 제7군 휘하 제2군단 사령관으로서 근무했다. 그는 연합군 총공격작전 최선봉에서 지휘했고 시칠리 상륙 5주만에 이탈리아 본토 남단과 건너편 시칠리섬 사이 메씨나해협을 탈환했다. 그 후 메씨나 해협에는 철로와 도로기능을 합친 길이 3,300m의 아름다운 현수교가 건설되었다.


2차 대전의 제1군 사령관

1943년 10월 아이젠하워 장군은 브래드리를 미국 제1군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제1군은 ‘오버로드’(과부하 작전)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준비 중인 여러 지상군부대들로 구성돼있었다. 이때 유명한 조지 패튼 장군은 여러 명의 부하 장병들을 구타한 불미한 사건 때문에 제1군 사령관으로 선정되지 않았다.

그는 거꾸로 지금까지 그의 부하였던 브래드리 사령관의 부하로 강등돼 전투에 참여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에서 적군의 방위 벽을 뚫고 프랑스 내륙으로 깊숙이 쳐들어감으로써 브래드리 장군의 책임은 더욱 무거워졌다. 130만 명의 제12군 선봉에서 브래드리 장군은 독일군 공격을 교묘히 치고 빠지곤 했다.

그는 이 작전에서 이미 해방된 파리에서 더 이상 독일군이 저항하지 못하게 눌러놓고 파죽지세로 독일 국내로 밀고 들어갔다. 1944년말 경 아르덴느 산악에서 히틀러군의 최후의 발악적 반격작전에 밀려 잠시 후퇴했지만 브래드리는 1945년 초 시크프리드 전선을 뚫고 레마겐 다리에서 라인강을 건널 수 있었다.

독일군은 시크프리드 언덕에 난공불락의 영구요새를 구축해놓아 연합군이 돌파하는데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레마겐은 독일 본, 동남쪽 라인강 왼쪽에 위치한 언덕의 고장으로서 여기를 가로막고 있는 철로는 돌파하기 어려운 전투 지역이었다. 이곳은 과거 로마 요새로서 로마유적들이 많다.

브래드리의 전광석화 같은 진격작전은 라인강 근처 루르 포케트 지역에서 독일군을 독안에 든 쥐처럼 철통 포위한 후 335,000명 독일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작전 성공 후 브래드리는 1945년 3월 12일 4성장군으로 진급했다. 그 다음 달 그의 군대는 엘베강가에서 소련군과 합세해 마침내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항복을 받았다.

2차 대전 2년 뒤 그는 재향군인행정처장을 잠시 지낸 후 1948년 아이젠하워 장군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에 보임되었다. 1949년 1월 16일 브래드리는 신설된 3군합동 총사령부격인 초대 합창의장직을 맡았다. 그는 여기서 초기 냉전시기와 한국전 기간 내내 합참의장으로 군을 지휘하면서 국가에 봉사했다.

1950년 브래드리는 출중한 극소수 미국장성들에게만 수여되는 특권적 계급인 영광의 5성장군으로 진급했다. 대게 5성장군들은 은퇴 않는게 통례인데도 그는 1953년 8월 15일 현역에서 예비역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1981년 4월 8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뉴욕시에서 군사문제와 민간 기업 자문역으로 활동했다.

브래드리 장군이 2차대전에서 연합군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주요 공로자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사상초유의 초대규모 군병력을 가장 유능하게 지휘해 영국군과 여타 연합군과의 합동작전에서 절묘한 규형을 유지함으로써 마지막 승리를 굳혔다.

그는 잘난체 나서기를 삼가고 과묵하며 침착했기 때문에 유능했지만 성급한 패튼과 같은 장군들을 차례로 제치고 군인으로서 성공을 극대화 할 수 있었다. 그도 처음에는 상관 눈에 잘 뜨이지 않았던 대기만성(大器晩成)형 인물이었다. 그러나 꾸준한 노력과 각고하는 인내로 다져진 철인적 강인함과 온화한 포용력이 침략자로부터 조국을 구원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오직 조국을 지키려는 애국심과 독재자들을 척결해야 하겠다는 굳은 신념이 국가적 개인적 시련을 타넘고 파시즘과 나치즘의 전체주의를 무찌를 수 있었다.

브래드리 장군은 1차대전과 2차대전의 중간시기 태어난 영웅이다. 조지 마샬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조지 패튼 장군들도 모두 이시기 성장한 전쟁영웅들이다. 1920년대 군대 규모도 작고 현대장비도 부족했던 미군은 군인들 교육과 이론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1차대전후 미국군 역사상 비몽사몽 안보의식이 결여되었던 시기 오마 브래드리 같은 장군이 여유있게 홀로 묵묵히 지휘력을 성장시키고 꾸준히 전술을 연마했다. 그의 이런 노력 덕택으로 1940년대와 1950년대 미국은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기 군을 전쟁에서 평화로 무사히 구출해 낼수 있었다.

앞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브래드리는 1차대전에 참전하지 못하고 본토에서만 근무했던 점을 늘 안타까워 했다. 그때 프랑스 전투에 참가했던 동료들은 승승장구 진급하는데 자신은 그 대열에서 빠졌기 때문에 한때 직업군인으로서 대 실패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우울한 자체평가는 조급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35년후 그는 5성장군의 영광에다 두 번 임기의 초대 합창의장까지 역임하고 유럽전장에서는 사단과 군단, 군, 그리고 집단군을 차레로 지휘,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래드리는 미국 장성중 가장 사랑받는 전설적 영웅으로 남아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미국인들과 여타 연합국가들은 그의 엘리트주의적 태도와 오만한 성격을 싫어했지만 윈스턴 처칠만은 그를 정당하게 평가했다. 처칠은 "몽고메리의 아라메인 작전 승리이전 연합군은 한번도 승리하지 못했고 그 작전후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고 그의 용맹성을 격찬했다. 결국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 중요 역할을 완수한 그는 미국 전쟁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미국과의 마찰 속에서 자신의 스타일로 승리

▲ 2차대전 당시 몽고메리 장군의 모습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은 2차대전때 북아프리카와 유럽의 연합군 상륙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가장 영향력있는 영국 육군원수다. 그는 오만할 만큼 자존심이 강하고 병적일 정도로 대미 우월감이 강한 영국 군인이었다. 몽고메리는 독재자 히틀러의 독일군에게 첫 연합군 승리를 안겨준 지휘관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나치즘을 무찌르고 2차대전의 종결을 가져온 대독일 연합군 작전에서 중요한 지휘 역할을 맡았다.

몽고메리는 군인으로서는 누구보다 탁월한 지휘력을 가지고 용맹을 떨쳤지만 세련된 영국 신사형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거만하고 거칠고 허영심이 많고 때로는 기상천외의 일도 저질르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몽고메리는 전투에서는 부하 장병들이 끊힘없이 전진해서 승리를 거머쥐게 하는 마력의 소유자다.


몽고메리의 성장기

그는 1887년 11월 17일 영국에서 태어난지 2년후 영국국교의 독실한 주교인 아버지와 함께 타스메니야 지역으로 이주했다. 몽고메리의 청소년시절은 불행했다. 그의 군대생활 시작도 처음에는 이런 불행으로 부터의 탈출구였다.

몽고메리는 성 바우로 고등학교에서 4년을 마치고 1907년 영국 육군사관학교인 샌드허스트에 입학했다. 1908년 여름 그는 다른 사관생도들을 괴롭힌 죄로 거의 퇴학지경까지 갔다가 간신히 용서를 받고 소위로 임관되었다. 역시 그의 괄괄한 성격때문이었다.

몽고메리는 담배를 피거나 술도 마시지 않았지만 늘 설치기 좋아하는 난폭성은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였다. 첫 근무지인 인도에서 그는 다른 동료장교들과 함께 난투극에 연류돼 봄베이 요트크럽 하우스를 온통 다 부셔놓기도 했다. 그는 술 한모금 않는 절대금주자였다. 그럼에도 몽고메리는 만취상태인 다른 장교들과 달리 맹숭 맹숭한 정신으로 순전히 폭력을 즐기기 위해 그 난투극에 참여하곤 했다.


1차대전에서 발휘한 뛰어난 지휘능력

1차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최전선에서의 용맹성과 뛰어난 참모역할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몽고메리는 피비린내 나는 프랑스전선의 참호속에서 그후 다른 전투에서 활용할 수 있는 슬기로운 지휘능력을 배양했다.

1914년 8월 23일은 자기 부대가 프랑스에 도착한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바로 그날 작전계획을 세우고 준비할 겨를도 없이 몽고메리의 소대는 르 카토에서 독일군을 맞아 싸웠다. 앞 뒤 조차 가릴수 없는 혼란스런 전투에서 몽고메리는 많은 소대원들을 잃고 자신도 며칠동안 행방불명자로 신고되기도 했다. 참으로 기억하기 싫은 쓰라린 패배 경험이었다.

1914년 10월 13일 26세의 몽고메리는 와이프레스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승리했다. 이때 지휘관으로서 발휘한 무공과 용맹성으로 그는 무공훈장을 받고 대위로 진급했다. 영국으로 후송돼 부상치료를 마친 몽고메리는 제104 여단 참모장교로서 프랑스전선에 다시 복귀했다.

그는 여기서 1915년 6월 24일부터 11월 13일까지 대학살전이 벌어진 솜머지역 전투에 참가했다. 몽고메리는 남은 1차대전 기간 참모장교로서 보다 더 중요한 책임있는 직책을 맡아 처리했다. 1차대전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그는 중령으로 진급, 탁월한 전투지휘관과 참모장교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차대전후 몽고메리는 아일랜드와 팔레스타인 지역을 오가면서 보충 재교육을 받거나 일선복무를 번갈아가면서 했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사단을 지휘하는 중장으로 진급했고 1939년 9월 30일 다시 프랑스에 상륙했다. 이때 자기 사단의 임무는 초기전투에서 연합군이 후퇴하기전 추격하는 독일군에 대항해 벨지엄의 루방지역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몽고메리는 던커크 전투에서 독일군이 연합군 교두보를 측방 공격하지 못하게 방어하면서 후퇴작전중 후방방어를 지휘했다.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대장계급장을 달았다. 몽고메리가 위대한 군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행운은 1942년 8월에 찾아왔다.


몽고메리의 최대 전성기 북아프리카 전투

그때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 사령관으로 선정된 한 장군이 항공기 추락사고로 사망하자 몽고메리는 대신 사령관 직책을 맡게 된 것이다. 이집트에서 그는 제8군 사령관 지휘를 맡았다. 8군은 독일의 에르윈 롬멜장군이 이끄는 아프리카 군에게 전투때 마다 연전연패 함으로써 장병들의 사기가 극단적으로 떨어져 있었다. 몽고메리는 이런 심각한 문제의 해결사로서 8군 지휘봉을 잡게 된 것이다.

그는 즉각 8군의 신뢰와 자신감을 쌓는 작업에 착수, 장병들과 탱크 포들을 대폭 증강했다. 1942년 8월 31부터 9월 2일까지 아람 할파지역 전투에서 몽고메리 부대는 롬멜부대의 전진을 저지했다.

이 전투에서 한달이 지난후 몽고메리는 병력과 무기를 독일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증강, 주도면밀한 반격을 개시했다. 그는 독일군의 숫적열세와 병참 지원의 약점을 이용,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몽고메리는 그해 10월 23일 엘 아라메인 전투에서 롬멜군을 패주케 하고 5만 9천명의 독일군을 사살 또는 포로로 잡고 500대의 독일전차를 파괴했다. 그는 이전투 승리후 몸을 사리면서 소극적 공세를 취해나갔다.

그러나 그는 이때 공격을 둔화시켰다는 주위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1943년 5월 12일 서쪽에서 진격해온 미군들과 합류해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추축국 군대의 모든 저항을 송두리채 뿌리뽑는데 성공했다.

북아프리카 전투승리때는 몽고메리 생애에서 최전성기였다. 그 이상의 성공도 가능했지만 그는 장차 부대지휘권이 미국 손아귀에 넘어간다는데 대해 못내 서운했다. 몽고메리는 평소 미국인들이 영국인들 보다 열등한데 어떻게 자기가 미국 지휘를 받아야 하는가 하고 불만을 터트렸다. 그는 이런 불만과 미국인들에 대한 경시태도를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냈다.

미국 작전지휘권에 대한 이런 무례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몽고메리는 1943년 7월 19일 시칠리섬 상륙작전때 자기 부대를 효과적으로 지휘해 대승을 거두었다. 시칠리섬 상륙 후 자기가 맡은 지역을 확보한다음 그는 다음단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획, 준비하기 위해 다시 영국으로 갔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몽고메리는 처음부터 1백만명으로 구성된 45개사단의 지상군을 지휘했다.

그러나 그는 노르망디상륙 교두보 확보작전과 요충지 카엔시 점령때 신속하게 행동하지 않고 꾸물거렸다. 거기다 연합군 원정대 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과 불화마져 빚게되자 미군 사령관들이 지상군 지휘권을 넘겨받아 직접 행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오마 브래드리 장군과 동열로 격하돼 아이젠하워 휘하에서 작전지휘를 맡게되었다. 그후 몽고메리는 여전히 거칠고 신경질적이었지만 그럼에도 연합군의 빠리 해방때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는 공적 책임과 개인적 감정을 철저하게 구분할 줄 아는 슬기로운 장군이었다.

아이젠하워와 몽고메리는 마지막 독일 진격때도 의견차를 드러냈다. 아이젠하워는 전선을 폭넓게 확대해서 공격 하기를 원했지만 몽고메리는 거대한 단일 전선으로 돌파해 들어가는 것을 주장했다. 지상군 원수인 몽고메리는 먼저 라인강 교량을 확보하기 위해 네덜란드를 공습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래야만 뒤따라온 기갑부대들이 독일중심부로 밀고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미국과의 마찰 속에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2차 대전을 승리로

미국측은 그의 그런 작전 동기를 의심했다. 그가 지상군을 이끌고 먼저 독일점령을 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추가로 2개 미군사단을 자기 지휘아래 두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1944년 9월 17일 독일로 쳐들어가기 위해 네덜란드로 수천명을 공수하는 <마케트 가든>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 작전이 계획대로 성공했더라면 2차대전은 44년 크리스마스 전에 끝났을 것이다. 독일군이 연합군 진격로의 목을 지킨다는 정보를 사전 탐지하지 못해 몽고메리군 장병들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44년 12월 독일 아르덴느 지역 공격때 북부지역을 잘 방어함로써 그의 네덜란드 작전실패를 얼마간 보상한 셈이다. 그럼에도 그는 <벌즈 전투>때 미군들 전투능력이 보잘 것 없었다고 쓸데없이 깎아내려 공연히 미군 지휘관들의 미움만 사기도했다.

2차대전 최종단계에서 몽고메리는 영국군을 지휘, 주도면밀한 작전계획을 성공시켜 잇따른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이 일련의 성공적 전투에서 네덜란드와 덴마크, 북부독일을 점령할 수 있었다. 몽고메리는 1945년 5월 14일 발틱 해안의 뤼벤부르크 헤쓰 지역에서 독일군의 전면적 항복을 받아냈다.

그는 2차대전때 모든 작전계획이 완벽하지 않을 때는 공격하는 것을 주저하거나 거부했는데 이런 작전태도는 1차대전때 익힌 경험 때문이었다. 그도 인간이기 때문에 장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부하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은 모든 계급의 부하들로 부터 칭송과 인기를 모았지만 부하들에 대한 과잉 요구와 빈번한 파면조치등은 그가 동료 장군들로부터 소외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인들과 여타 연합국가들은 그의 엘리트주의적 태도와 오만한 성격을 싫어했지만 윈스턴 처칠만은 그를 정당하게 평가했다. 처칠은 "몽고메리의 아라메인 작전 승리이전 연합군은 한번도 승리하지 못했고 그 작전후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고 그의 용맹성을 격찬했다. 결국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 중요 역할을 완수한 그는 미국 전쟁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몽고메리는 전후 영국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독일에 그대로 머물렀고 1951년부터 1958년 은퇴할 때 까지 나토(NATO)군을 지휘했다. 그는 88세를 일기로 1976년 3월 25일 영국 알튼 지방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지 C. 마샬군인으로서 최초 노벨평화상 수상 조지 C. 마샬 장군은 2차대전때 작전후방 미국본토에서 승전 전략을 수립하고 총 지휘한 사령탑 역할을 맡은 또 한사람의 미국 전쟁영웅이며 정치가다. 그는 플랑크린 D. 루스벨트 32대 대통령과 하리 S. 트루만 33대 대통령을 받들어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유럽 戰後볼구 위한 '마샬 플랜' 입안
마샬 장군은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던 시기 육군 참모총장과 국무장관, 국방장관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고 현역때 5성장군으로 승진했다. 그는 특히 2차대전후 폐허가된 유럽 동맹국들과 독일등 적국들이 잿더미의 절망에서 재기할 수 있도록 초대규모 전후복구 부흥원조 사업을 기획, 집행함으로써 전후 유럽경제재건과 부흥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는 그 공로로 마침내 1953년 노벨평화상을 수 상했고 군인으로서는 최초의 수상자였다. 그의 유럽부흥 사업이 곧 그 유명한 <마샬계획>이며 이 계획은 그후 모든 전후 복구사업의 모델겸 대명사가 되었다.

마샬 계획 덕택으로 서(西) 유럽지역이 전후 경제뿐 아니라 정치 군사적으로 재기할 수 있었고 미국과 함께 동서냉전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다. 미국과 유럽이 종국적으로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구 공산불럭 국가들과의 냉전 대결에서 마침내 공산 종주국 소련과 동구공산권 붕괴를 촉진하는 결정적 동력과 끈기를 제공해준 것도 바로 마샬계획이었다.

2차대전 기간동안 그의 직속 상관인 헨리 L. 스팀손 전쟁장관(전후 전쟁성이 국방성으로 개편됨)은 "마샬이야 말로 자기가 만난 사람중 가장 자기희생적 공직자였다"고 회고했다.

영국의 전쟁 영웅이며 대 정치가인 윈스턴 처칠경도 유럽 경제재건 마샬 계획을 성공시킨 마샬을 가리켜 "역사상 가장 숭고한 사업을 이룩한 인물"이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마샬 계획을 통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지역에 수십억달러의 미국 자금이 제공되었다.

그는 2차대전시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미국 군대를 조직, 실전에 투입했고 독일 이탈리아등 추축국들을 패퇴시킨 두 개 전선의 전쟁전략을 세워 집행했다. 마샬은 또 전쟁수행기간 루스벨트와 트루만 등 두사람의 대통령에게 모든 군사문제들에 대해서 조언하는 으뜸가는 자문역이었다.

그는 대전중 연합군 주요 전략회의에 참석하거나 해외 후방지역을 가끔 방문하는 것외 2차대전 전기간중 주로 워싱턴에서만 근무했다. 모든일에는 적절한 인원배치와 각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제작자와 감독이 정확한 배역을 결정하는 이치와도 닮았다.

마샬은 2차대전중 수도 워싱턴에서 전쟁 계획과 전략을 개발하며 이를 총 지휘하는 가장 적절한 역할을 한치 오차 없이 완벽하게 해냈다. 그는 일선작전에 참가한 장병과는 달리 한방의 총성도 듣지 못했지만 그가 이룩한 빛나는 역할 때문에 미국 전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장군의 한사람으로서 우뚝 서 있다.

마샬 장군의 성장기

마샬은 1880년 12월 31일 펜실베니아주 유니온타운에서 석탄 장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1년 버지니아 군사학교를 졸업한후 보병 소위로 임관되었다. 마샬의 첫 부임지는 필리핀이고 거기서 2년을 보낸후 본토 중서부지역에서 군부대와 재교육 훈련소에서 몇가지 임무를 맡아했다.

마샬은 필리핀에서 자기극복 이론과 연구습관, 그리고 훗날 그를 뛰어나게 만든 지휘관으로서의 특징들을 연마한 것으로 전기작가들은 전하고 있다. 1차대전때인 1916년 대위로 승진한후 이듬해 그는 참모장교로서 프랑스전선에서 제1보병사단에 배속돼 싸웠다.

마샬은 이때 임시 영관급 장교로서 50만 군대와 3천문의 포를 아르곤 전투지역으로 이동시키는 작전계획을 수립, 감독하는 임무를 맡아 이를 성공시켰다. 그는 이 역할로 인해 군인으로서의 잠재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마샬은 1차대전 기간 내내 참모장교로서 활동했고 휴전후 다시 원래의 대위 계급장을 달고 존 조제프 퍼싱 장군 부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퍼싱장군이 1924년까지 육군참모총장을 하는동안 그 밑에서 일했다.

이시기 마샬은 중령으로 진급했고 퍼싱 장군으로부터 많은 군사지식을 배웠다. 그에게서 배운 이런 군사지식은 그가 2차대전때 군사문제와 정치문제를 합리적으로 연결, 두부문을 절묘하게 조화할 수 있는 슬기를 발휘하는데 커다한 도움을 주었다. 그가 명장이며 훌륭한 정치가라는 명성을 얻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마샬은 퍼싱의 부관 자리를 떠난후 중국을 수차례 다녀왔고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보병학교 부교장으로 승진했다. 거기서 그는 새로운 군사 훈련방법을 개발, 2차대전때 뛰어난 인물이 된 여러명의 장군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사우스 칼로라이나에서 제8 보병연대를 지휘하는등 군 지도자로서의 경력을 착실히 쌓아갔다.

1938년 마셜은 준장으로 진급, 육군의 참모장군 역할을 맡았다. 그의 직책은 전쟁성의 전쟁계획수립 국장이었다. 전쟁성의 핵심 자리였다. 이때 이미 그의 미래 군 지도자적 역할에 자신감을 품고 그는 비망록에다 자기에게 감명을 주고 뛰어난 잠재력을 지닌 장교들의 이름을 꾸준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에 임명

1939년 9월 프랑크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를 육군참모총장에 발탁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마셜장군 보다 계급과 지위가 더 높은 선임장군 32명을 제치고 그를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한 것이다. 유능한 대통령만이 명장을 식별해낼수 있는 발탁 혜안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2002 월드컵때 한국 축구팀감독 히딩크가 대표선수들 선발기준으로 허명 (虛名)과 연륜, 학력 지연보다는 능력위주로 했던 것과 같은 원칙이다.

마셜은 모든 것을 앞서가면서 미리 준비했다. 그는 미국이 미래 유럽에서 2차대전에 참전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이에 철저히 대비했다. 그는 전쟁에 대비해서 전략을 짜는 한편, 병력증강과 군대를 적절히 무장하고 장비를 증강하기 위해 예산편성권을 가진 국회에 대해 직접 적극적 로비를 벌이기도 했다.

마셜은 처음 2개월간 육군참모총장 서리로 일하다가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군의 폴란드침공을 시작으로 2차대전이 발발하자 정식 참모총장으로서 전쟁계획과 작전수행을 100% 장악했다. 그는 자기 지도아래 새로운 사단편성과 군사훈련, 군장비 조달, 고위군지휘관 선정등 모든 것을 직접 꼼꼼히 챙겼다.

군 고위지휘관 선발 때는 미리 메모해 두었던 비망록이 요긴한 도움이 되었다. 그의 이런 군비증강 노력결과 병력은 4년내 20만명에서 무려 830만명으로 4배 이상 대폭 증가했다. 그는 군편제를 3대 사령부 체제로 분류, 지상군 사령부와 육군행정사령부, 육군항공대 사령부등으로 개편했다.

일본이 1941년 12월 7일(일본시간 8일) 새벽 해공군 합동작전으로 진주만을 기습 폭격하고 미국이 선전포고를 하자 마셜은 전쟁계획을 긴급히 수정 보완했다. 미국은 당시 번영과 풍요를 구가하면서 전쟁을 잊고 평화에 도취해 있었다.

하와이 미군 장병들은 일본의 선의만 믿고 진주만 기습때 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평화에 도취해 있다가 어이 없이 허를 찔린 것이다. "전쟁때는 평화를 생각하고 평화시에는 전쟁을 준비하라"는 격언을 실감케 하는 비극적 광경이 아닐수 없었다.

2차대전 기간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트루만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군사자문 역을 겸했다. 트루만 대통령은 마셜 장군보다 네 살 아래다. 마셜은 워낙 기획력이 뛰어나 군사문제라면 모든 것을 100% 마껴도 안심일 만큼 트루만 대통령을 편하게 해주었다. 트루만 대통령은 59년 마셜이 세상을 뜨자 "저세상에서 나는 마셜의 부관(副官)이 되어 마셜을 모시고 싶다"고 말할만큼 트루만은 마셜을 존경했다.


국가에 봉사하고 대통령에게 충성한 군인

그의 아이디어로 개발한 새로운 무기와 군장비들은 미국 대중들과 산업기지들을 신속히 총동원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마셜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 일선부대를 총 지휘하려는 의사를 여러차례 밝혔지만 매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통령등 그의 상사들은 그가 일선에서 지휘하는 것 보다 본토에서 군참모와 고위 전략가로서 조국을 위해 전쟁수행을 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역할이라는 것이 거부 이유였다.

마셜의 가장 중요한 특장들중 하나는 그가 모신 두 대통령들과 인간적으로 언제나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두 대통령들과 원만한 관계를 가질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대권(大權)을 잡으려는 정치적 야망을 품지않고 오직 직업군인으로서 국가에 봉사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그를 5성장군으로 진급시킨것도 영국군과 대등한 지위를 갖도록 하려는 배려이지 그의 대권야망을 북돋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2차대전후 그는 참모총장직을 물러나면서 아이젠하워 장군을 그 자리에 추천하는 미덕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셜의 은퇴는 며칠 가지 않았다. 그가 참모총장을 사퇴한지 10일후 트루만 대통령은 그에게 대통령 특사로서 중국으로 가 모택동의 공산군과 장개석 국부군(國府軍)간의 내전을 말리는 중재역을 맡아달라고 설득했다.

그는 이 역할을 성공시키진 못했지만 트루만 대통령은 1947년 1월 그를 국무장관으로 발탁했다. 같은해 6월 5일 그는 유럽경제재건 프로그램인 마셜계획을 작성 발표했다. 미국이 폐허가 된 유럽 동맹국과 독일등 적국들의 경제재건과 부흥을 위해 미국이 천문학적 액수를 퍼붓는 거대한 전후 재건계획이었다.

이 재건계획은 서 유럽지역에 대한 공산세력의 확산을 막는데도 그 목적이 있었다. 그는 과로로 건강이 좋지않아 국무장관 자리를 물러났다. 그러나 트루만 대통령은 1950년 다시 그를 국방장관에 기용했다.

마셜은 이 자리에서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등 유엔군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옹호했다. 그는 1951년 공직에서 완전 은퇴했으며 1959년 10월 16일 워싱턴에서 세상을 떠나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가 2차대전 전략을 수립하고 집행, 전쟁을 승리로 이끈 핵심적 역할을 했음에도 명성면에서 아이젠하워와 맥아더 보다 뒤진 것은 오직 2차대전때 일선부대를 지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적 총명과 순수한 군인정신, 세계적 전략가로서의 풍부한 지성이 오늘날 미군을 세계 최강 군대로 성장시키는데 가장 영향력 있는 역할을 했다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존 조제프 퍼싱

 

존 조제프 퍼싱은 1차대전때 미국의 유럽원정군대를 지휘한 용맹스러운 장군이다. 그는 당시 말을 이용한 구식군대를 현대적 군대로 발전시키는데 중심역할을 했다. 그의 이런 노력으로 미국군대는 마침내 기계화 차량과 항공기, 기관총등으로 무장한 신식군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1차대전 때 미국의 유럽원정군 지휘


퍼싱은 인디안 소탕등 서부개척, 스페인전쟁과 1차대전의 영웅이다. 그는 서부지역 대(對)인디안 전투에 참가한다음 쿠바에서 미국-스페인전쟁(1898년)에서 싸웠고 1916년 멕시코의 전설적 반군지도자 판쵸 빌라 추격전에서 징벌원정부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판초 빌라는 당시 멕시코 내전때 미국 민간 무기밀거래상들과의 갈등 때문에 1916년 뉴멕시코 컬럼비아시를 침공했고 미국은 그에 대한 징벌로서 반격전을 폈다. 이때 퍼싱 장군이 징벌원정군 사령관을 맡았다.

퍼싱 부대는 멕시코에서 판초 빌라를 잡는데 실패했지만 원정군의 징벌전은 미국의 대(對)독일 1차대전을 대비하는 신무기의 실험장이 되었고 조지 S. 패튼 같은 유능한 장군을 비릇한 차세대 군지휘관들을 양성하는 훈련장이 되었다. 퍼싱 장군은 서부지역의 대(對)인디안전과 스페인전, 그리고 판초 빌라 징벌 추격전을 통해 용맹성에 대해 많은 칭찬을 받았다.


교사생활을 하다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

퍼싱은 1860년 9월 13일 미조리주 린 카운티에서 출생, 조그만 시의 상인 아들로 성장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친후 가난 때문에 곧장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5, 6년간 교사노릇을 했다. 그후 그는 교사직업을 접고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군인으로서의 뜻을 키워갔다.

퍼싱은 1886년 웨스트 포인트 졸업과 함께 기갑부대 장교로 임관된후 미국 서남부 지역에서 아파치 인디안족 소탕에 나섰다. 그는 1891년 사우스 다코다 운디드니 전투에서 수우족 소탕의 성공적 마무리를 도왔다. 퍼싱은 1891년부터 1895년까지 네브라스카 대학에서 군사학 교수로 근무했고 이때 비번 시간을 활용, 법학학사가 되었다.

미국-스페인전 발발후 그는 대위로서 흑인들로만 구성된 제10중대를 지휘했다. 퍼싱은 이때 맡은 직무와 유모를 모르는 그의 엄격한 성격때문에 ‘블랙 잭’(Black Jack)이란 별명을 얻었고 이별명은 일생동안 그를 따라 다녔다. 퍼싱과 그의 흑인 병사들은 쿠바의 엘케니와 케틀 언덕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고 이때부터 그는 데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신임에 의해 고속승진

퍼싱은 쿠바에서 감염된 말라리아병에서 회복한 다음 1899년 필리핀으로
전근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모로 반란군을 평정하는 전투술과 군행정을 쇄신함으로써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후 퍼싱은 필리핀 근무와 주일본 대사관 무관직책을 수행하면서 1905-1906년의 일러전쟁 관찰역을 맡기도 했다.

데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은 필리핀에서의 퍼싱의 성실한 근무자세와 풍부한 정보보고들을 높이 평가해서 1906년 그를 대위계급에서 바로 준장으로 진급시켰다. 대위가 중간계급을 거치지 않고 바로 준장까지 올라간 예는 전례 없던 일이었다. 이런 유례없는 4계급 뜀뛰기 비약승진은 퍼싱보다 계급이 높은 900명의 선임장교들을 앞질러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그가 대위에서 준장으로 진급했다는 사실은 그에 대한 데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의 높은 신임을 나타낸 것이다. 이처럼 비범한 재능을 가진 퍼싱은 마침내 정치적 권력을 가진 연방 상원의원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야망을 나타내게 된다.

고속승진을 통해 아침햇살처럼 힘차게 솟아오른 퍼싱의 야망뒤에 숨은뜻이 무엇이든 그의 선택은 일단 슬기로운 것이었다.


뚝심으로 작전을 지휘

그는 극동지역에서 수년간 더 복무 한다음 샌프란시스코 요새의 사령관직을 맡게 된다. 1916년 3월 9일 뉴 멕시코 컬럼비아시에 대한 멕시코 반도들과 반군 게릴라 지도자판초 빌라군의 습격을 받은후 퍼싱은 징벌원정부대를 이끌고 멕시코로 진격해 들어갔다.

퍼싱은 이 원정작전에서 판초 빌라를 사로잡거나 사살하지 못했지만 그는 많은 반군병력들을 살상함으로써 멕시코 반군의 저항력을 크게 위축시켰다. 퍼싱은 동력화 차량과 항공기들을 포함, 새로운 군장비들의 전술적 사용방법을 익히는등 이 전투에서 중요한 경험을 쌓게 되었다. 미군이 말등으로 장비들을 실어나르는 구식 전투방식을 기계화 전투로 전환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멕시코 원정전투때 부터였다.

퍼싱이 멕시코 반란군 지도자 판초 빌라를 추격하고 있는동안 샌프란시스코 군숙소에서 일어난 화재로 인해 부인과 두딸이 사망했다. 이 건은 그에게 닥친 끔찍한 불행이었다. 이 처참하게 불행한 비극은 이미 과묵한 퍼싱을 한층 더 차갑고 접근하기 어려운 지휘관으로 만들었다. 그가 더욱 묵묵히 일에만 돌두함으로써 부하들에 대한 요구사항 들도 그만큼 증가했다.

1917년 5월 12일 퍼싱은 유럽원정 미군사령관직을 수락, 그해 6월 23일 프랑스에 도착했다. 그는 프랑스 도착직후 뒤따라 오고있는 미군부대들을 영국과 프랑스군대와 합류시키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이런 명령을 받은후 휘하부대를 조각조각으로 나눠 전선에 배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는 미군 부대들을 영국 독일군 부대와는 독립시켜 독자적 책임전투지역에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상부에서 어떤 작전지시가 내려오건 언제나 "나는 강요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고 뚝심 센 고집을 부리곤 했다.

그러나 퍼싱도 인간인고로 딱 한번 소신이 흔들린 적이 있었다. 그가 아직 백만 휘하 군대를 조직하고 훈련중일 때인 1918년 봄 독일군의 공세가 거세졌다. 이 때 잠시 프랑스 주둔 미군사단들을 증원해주었다. 그후 연합군이 전선을 안정시키자 퍼싱은 다시 증원부대를 자기 휘하로 철수시켰다.


미군의 유럽원정 성공과 군행정 운영의 개편

1918년 여름 퍼싱은 로레인 전투에서 미국의 유럽원정군을 독립된 전투부대로 전환시켰다. 그는 장기간에 걸친 지루한 참호전을 싫어했기 때문에 정체된 작전을 기동전으로 전환, 즉각적인 공세를 취하곤 했다. 유럽원정 미군은 그해 7월 25일부터 8월 2일까지 아스네 마른 공세와 9월 12일-17일의 세인트 미히엘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퇴했다. 이런 연전연승은 그해 11월 휴전때까지 계속되었다.

세인트 미히엘 지역은 1918년 9월 12일 퍼싱장군의 유럽원정 미군이 처음으로 단독작전을 벌여 승리한 곳이다. 퍼싱장군은 참전 초기 유럽원정 미군부대들을 페르디난드 포크 프랑스군 최고사령관 지휘하로 돌렸다.

유럽원정 미군부대들은 처음 벨로 우두 전투와 아스네 마른 전투때 피곤에 지친 프랑스군과 나란히 같은 참호에서 독일에 대항해 싸웠다. 프랑스군과 미군부대가 아스네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의 전진을 저지한후 폭스 원수와 퍼싱 장군은 미국 제1군이 세인트미히엘지역에 독립사령부를 설치키로 합의했다.

독일군은 1914년 가을 이곳을 점령해서 베르둔과 세인트 미히엘 돌출부로 알려진 난시지역사이 3각연결 통로를 요새화했다. 그 목적은 빠리와 동부전선 사이 수송로를 효과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1918년 8월 13일 유럽원정 제1군은 메쓰지역을 통과, 라인강을 건너 독일로 진격하기위해 세인트 미히엘 돌출부를 향해 독립전선을 구축했다. 이어서 오랫동안 준비한 공격을 개시했다. 퍼싱은 당초 1차대전을 1919년 말 끝내기로 결심했지만 그해 11월까지 독일군을 패퇴시키지 못할 것으로 예측했었다.

대독일 공격전을 계획하면서 미군은 장갑차등 최신 무기들을 총동원 했다. 퍼싱 장군은 당시 총명하며 공격적인 젊은 조지 S. 패튼 중위 휘하에 보병부대 지원 탱크여단을 창설했다. 패튼은 1918년 여름 내내 이 탱크여단 병력을 훈련시켰다. 유럽원정 미군부대들은 기갑부대 대신 탱크여단으로 무장해 싸움으로써 연전연승 했다.

1918년 9월 12일 탱크들은 보병부대들이 바짝 뒤 따르면서 참호들 위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다음 수일간 닥친 악천후는 독일군 보다 더 무서운 적이라는 것을 실감케 했다. 억수같이 퍼붓는 폭우는 전장을 진흙탕으로 만들었고 모든 참호들을 빗물로 가득한 도랑으로 돌변케 했다. 폭우는 수많은 탱크들을 오도가도 못하게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독일군은 물로 채운 탱크 함정들을 더 많이 파놓음으로써 악천후를 그들에게 최대한 유리 하게 만들어갔다. 퍼싱 장군이 지휘하는 미군부대들은 이런 역경에도 불구하고 세인트 미히엘 돌출부를 양면 공격, 이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퍼싱장군은 1918년 9월 16일 프랑스령인 이지역을 독일점령에서 마침내 해방시켰다.

이 전투에 이은 모이세 아르곤 전투에서도 탱크전이 주류를 이루었다. 연합군측은 이 전투에서도 독일군을 격퇴함으로써 1918년 11월 11 일 드디어 독일군의 항복을 받고 1차대전을 종결했다.

퍼싱장군과 원정미군부대들은 대독(對獨) 참전이 늦었지만 그들이 전쟁승리에 끼친 공로는 결정적이었다. 유럽 원정미군은 서부전선의 10%를 장악했으나 독일군은 최종 공세때 미군의 전진을 둔화시키기 위해서 전군의 4분지 1까지 여기 투입했다.

퍼싱이 연합국들의 정치적 압력에 맞서면서 한편으로는 백만대군을 조직하는 능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격찬할 만한 일이다. 그는 또 군을 일반참모 행정편제(G-1)와 정보 (G-2), 작전(G-3), 병참(G-4)등으로 분류함으로써 군행정 운영을 대폭 혁신했다.

이 군 행정제도는 미국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을 만큼 잘된 제도다. 퍼싱은 유럽원정 미군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공로로 1917년 중장으로 진급했고 같은해 말 다시 대장으로 승진하게 된다. 그가 미국으로 귀환하자 말자 퍼싱은 영광스런 육군 원수로 진급했다. 이 원수계급은 그때까지 조지 워싱턴만이 가졌던 가장 높은 자리였다.

1921-1924년까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퍼싱 육군원수는 20세기초 미국의 가장 위대한 군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가 2차대전기간 미국군 발전과 작전에 끼친 직접적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퍼싱은 2차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이 패망하는것을 지켜 본후 1948년 7월 15일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조지 S. 패턴미국군대에서 기갑전의 길을 최초로 열어준 인물 패턴은 야전군 지휘관으로서 2차대전중 전쟁만은 똑똑히 치러서 큰전투에서 한번도 지는때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부하들의 존경을 한몸에 모으고 미국내 민간인들로부터도 커다란 인기를 누렸다.
조지 패턴 장군은 미국군대에서 기갑전의 길을 최초로 열어준 인물이다. 그는 그후 군 생활에서 2차대전중 가장 뛰어난 야전사령관으로도 이름이 높다. 패턴은 군대내에서 늘 특유한 행동으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오만하고 거칠며 허영심 많고 별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그의 이런 특별한 군대생활을 다룬 영화조차 인기였고 아카데미상 최우수작품상과 최우수 남우주연상, 최우수 감독상까지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패턴은 야전군 지휘관으로서 2차대전중 전쟁만은 똑똑히 치러서 큰전투에서 한번도 지는때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부하들의 존경을 한몸에 모으고 미국내 민간인들로부터도 커다란 인기를 누렸다.

패턴은 어릴 때 가난했던 아이젠하워, 퍼싱장군과는 달리 버지니아에서 오랜 군인가족 전통을 지닌 부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역시 군인가문에서 태어난 더글러스 맥아더와 일면 닮은성격을 가진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한다.


운동실력이 뛰어났던 패턴

패턴은 1885년 11월 11일 캘리포니아주 산 가브리엘에서 고고의 소리를 울렸다. 패턴은 미국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 포인트에 입학하기전 가장 우수한 초중고등 학교들을 마쳤다.

그는 자라면서 무인답게 기골이 장대하고 용감했으나 육사생활중 독서장애증과 수학실력이 모자라 쩔쩔 매기도 했다. 그의 학과실력은 별로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반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오히려 한해를 유급해서 1909년도에 졸업, 기병부대 소위로 임관되었다. 패턴은 학교실력이 뛰어나지 못한 대신 그 부족분을 그의 엄청난 에너지로 충분히 보완했다.

패턴은 최상급 기병장교(기갑장교)로서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대회 최초의 근대5종 경기에 미국군과 미국의 국가대표 선수로 참가, 5위를 차지했다. 5종경기는 4km 크로스 칸트리 달리기, 말타기, 총쏘기, 펜싱, 300m거리 수영등 다기능 종목이었으니까 여간한 운동실력으로는 엄두도 못내는 복합경기였다.

1년후 그는 프랑스 기갑학교에 유학했고 미국으로 귀국한후에는 기갑부대 교본을 펴내기도 했다.1916년 패턴은 존 조지프 퍼싱 장군이 인솔하는 멕시코 원정부대에서 멕시코 반군지도 자 판초 빌라 추적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퍼싱장군의 부관으로서 그의 용맹성과 군지휘관으로서의 창조력과 개척정신을 이어받았다. 이때는 아직도 인디안 토벌작전의 서부개척시대였다.

이 작전기간중 그는 자동차등 기계화 군장비를 사용하는 첫 경험을 했고 자동차를 탄 채 말을 타고 덤벼드는 판초 빌라 반군들을 권총으로 사살하기도 했다. 이런 대담성으로 인해 그는 용감한 군인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후 그는 1917년 프랑스에 진주한 유럽원정 미군과 함께 퍼싱 장군 부관으로 참전했다. 피성 장군이 이때 지루한 참호전의 교착상태를 깨기 위해서는 장갑차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1917년 11월 패턴에게 미국 최초의 공식기갑부대와 랭그래 장갑차 운전병 훈련학교 지휘를 맡겼다.

미국 제1탱크여단은 1918년 9월 쌍 미이엘 지역에서 첫 기갑전투를 치르게 된다. 패턴은 그후 잇따른 뫼즈-아르곤느 공세기간 동안 가벼운 부상을 입고 그의 뛰어난 용맹성을 거듭 높이 평가 받아 십자훈장을 받게 된다.


기갑전의 중요성을 주장...기갑부대 지휘

1차대전이 끝난다음 그는 신생 미국 기갑부대를 이끌고 미국으로 귀국, 이번에는 새이름으로 개편된 314탱크여단을 지휘하게 된다. 패턴은 그후 20년동안 기갑부대를 지휘하고 기갑교육을 맡았기 때문에 기갑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열열히 주장하고 다녔다. 그러나 1차대전후 평화시기 군사예산의 제한과 대공황시기 경제적 곤경 때문에 탱크무기개발연구와 생산증가의 길도 막혀있었다.

미국은 유럽에서 2차대전이 발발하고 독일 탱크부대의 전격전이 대승(大勝)을 거둔후에야 황급히 기갑전력을 증강하기 시작했다. 패턴은 1940년 제1기갑여단 지휘를 맡았고 이부대는 다음해 4월 곧 제1기갑사단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그는 1942년 3월부터 7월까지 소장 계급장을 달고 캘리포니아와 아리조나주 경계선상선에서 <사막탱크훈련소> 교장으로서 탱크전 훈련 임무를 맡았다. 여기서 그는 미국 기갑전 이론을 확립하고 본격적으로 기갑부대를 양성했다.

패턴은 2차대전때 북아프리카에서 미국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서부전선 기동부대를 지휘했다. 1943년 3월 미국이 케서린 통로에서 크게 패한다음 패턴은 미국 제2군단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부대장 임명을 받자말자 재빨리 부하장교들을 교체하고 기강을 세움으로써 극도로 떨어진 군사기를 북돋우고 동기부여가 안된 부대에 전투의욕을 불어넣었다.

효율적인 부대로 전환하기 위한 긴급 조치였다. 그는 비로서 북아프리카에서 공세태세를 갖추고 추축국군대를 격퇴하는 것을 측면지원할 수 있었다.


패턴의 어린시절

패턴의 어린시절 꿈은 영웅이 되는 것이었다. 그의 조상들은 모두 미국독립전쟁과 멕시코전쟁, 남북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의 군인생활과 영웅관도 이런 군인가문과 전통이 성장과정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는 어릴 때 조상들의 용맹성과 성공적 인 무용담을 들으며 성장했다. 패턴은 사관학교시절 만나 데이트를 해왔던 베아트리스 아아어 여사와 1910년 결혼,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1943년 7월 패턴은 중장으로서 시칠리아 공격작전에서 미국 제7군을 지휘했다. 대담한 패턴은 메시나 공격때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 휘하 장병들을 앞질렀기 때문에 본국에서는 명성을 얻었으나 연합군으로 부터는 악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얄궂은 경쟁심이 여기서 드러난 것이다. 그는 시칠리아를 점령한다음 부상 장병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위문했다. 그때 패턴 은 부상하지도 않고 단순히 전투피로증에 걸린 2명이 꽤병 치료를 받고 있는 겁쟁이들 이라면서 때려주었다.

이 하사관 구타 소문은 패턴이 악명을 떨친 사건으로서 그후 군 내외에 널리 퍼졌다. 이 사병구타 사건 때문에 그는 시칠리아 점령때 사소한 임무만을 맡았고 그후 뒤따른 이탈리아 반도 상륙전때도 참가하지 못했다.


2차 대전 중 패턴의 활약들..

1944년 1월 패턴은 영국에 파견돼 노르망디 상륙작전 계획수립을 도왔다. 이때 그는 사병구타사건에 대한 처벌로 여전히 근신중에 있었다. 그는 서류상에서만 존재하는 유령부대를 지휘했다.

이 부대의 임무는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작전지점은 노르망디가 아니라 파드 칼레 지역이 될것이라는 위장작전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 패턴이 지휘하는 서류상의 군대는 파드 칼레 지역을 연속 위장 폭격하기도 했다. 패턴 장군은 노르망디 상륙이 성공한후부터 제3군 사령관으로서 야전군 지휘를 다시 맡았다.

패턴은 이때 2차대전중 가장 혁혁한 전공을 세운 야전사령관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44년 8월 1일 그는 아브랑쉐에서 교두보를 돌파, 2주간내 팔레즈-아르장탕 갭지역에서 10 만명의 독일군을 포위했다.

그리고 동쪽으로 진군해서 8월말까지 사르 강에 도달했다. 패턴의 전술은 자기부대 장갑차의 기동력과 충격적 기습공격전에 초점을 집중하는 것이었다. 그의 탱크들은 독일군이 새로운 방위선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가능한한 재빨리 공격을 퍼부었다. 탱크들의 전진은 때때로 독일군의 보급선이 새로 형성된 전선에 적응 하는 것 보다 더 빨랐다.

그는 필요하다고 느끼면 다른 부대로 부터라도 긴급 보급과 탄약 지원을 서슴없이 요청하곤 했다. 패턴 장군은 때때로 상부 명령을 무시하고 많은 예비군 병력지원 없이도 공격을 밀어부쳤고 그가 가진 모든 자원을 전투에 쏟아부었다.

패턴은 그해 12월까지 3군을 메츠지역으로 진군토록 명령했다. 독일군이 아르덴느 지역을 기습공격 하면서 벌즈전투를 선도하고 연합군 후방을 위협하자 패턴은 부대 공격 선두를 90도로 대전환했다. 그래서 그는 바스토뉴 지역을 구출하고 독일군 전진을 저지 하기 위해 동부방향으로 진격했다.

그는 1945년 3월 22일 아르덴느에서 부터 독일쪽으로 전진, 오펜하임에서 라인강을 건넜다. 3군은 번개처럼 전진을 계속, 항복을 거부하는 시와 요새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했다. 이로 인한 독일군의 사상자들은 무려 150만에 달했다.

패턴은 루르 지대에서 또 다른 독일주력군을 포위, 전승을 거두고 이어 바바리아를 질풍노도처럼 휩쓸고 첵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로 뚫고 들어갔다.

1945년 종전후 아무도 자기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을 때 패턴은 소련에 대한 우려를 털어놓았다. 그는 미국은 나중에 강제로 떠밀려 어쩔수 없이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것보다 지금 당장 소련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태도는 나치들에 대한 관용적 처리와 함께 또 다시 그의 지휘권을 박탈당 하는 곤경을 불러왔다.

그는 전후 독일을 재건하는데 나치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보고 이런 소리를 한 것이다. 패턴의 최후 임무는 바바리아주 점령군 주지사로서 별로 중요치 않은 것이었다. 1945년 12월 9일 60세 되던해 그는 맨하임 부근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치료중 그해 12월 21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병발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유럽대륙을 가로질러 질주하다 떨어진 전우들을 따라 룩셈부르크 미군 전몰장병묘지에 안장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메달과 리본을 단 정장 군복차림에 상아 손잡이 45구경 권총을 허리춤에 찬 당당한 모습을 자주 보곤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부하들에게 사기를 불어넣어 더 용감하게 싸우도록 독려 하고 대중들은 자기를 더욱 존경하도록 만드는 쇼맨쉽의 인물이었다. 패턴은 미군역사상 기갑전을 창안한 선구자며 늘 절제되지 않은 거침없는 언동과 정치적 발언 때문에 자주 신문 제목을 장식함으로써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그는 큰 전투에서 항상 승리자가 되는 능력만은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 타고난 야전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44년 3월 31일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미국인들은 승리자를 사랑하며 패배자는 용납치 않는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전쟁에서 한번도 진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전쟁에서 패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미국인들은 전쟁에 진다는 생각자체를 극도로 미워하기 때문이다" 요즘사담 후세인의 무장해제를 호언하고 있는 부시 대통령의 태도도 바로 이런 발상에서 비릇된 것이 아닐까 한다.

 

 

니미츠 제독

미국의 이순신, 니미츠 맥아더와 함께 태평양전쟁 지휘

체스터 윌리암스 니미츠는 2차대전때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와 긴밀히 협력, 대일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끈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 해군제독이다. 그는 2차대전 기간 미해군을 오늘의 현대적 모습으로 키워낸 공로로 미해군사상 최초로 5성계급의 해군원수 기록을 가진 해군장교이기도 하다.

▲ 니미츠 항공모함

최첨단 항공모함 니미츠 호도 그의 이름에서 따올만큼 미국 해군사상 그의 명성은 가히 전설적이다. 미국의 ‘이순신(李舜臣) 장군’이라고 할 수 있다. 니미츠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제국주의 해군을 패배시킨 대규모 작전을 직접 계획, 조정하고 집행했다.

그가 육군이며 고집센 맥아더 원수와 협력해서 태평양 전쟁을 수행해 나가기란 매우 어려운 과업이었다. 니미츠 제독의 친화력과 외교력, 그리고 관용성이 없었더라면 맥아더와의 협력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제한된 물적 인적자원을 가지고 새로운 전술과 책략으로 과감하게 밀어 부침으로써 결정적 승리를 이끌어낸 것이다.

그의 오랜 해군생활과 해상함대의 실전경험, 그리고 잠수함 근무경력이 육해공군 해병대등 다면적 태평양 총사령부를 효과적으로 지휘, 승리를 움켜잡을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평탄한 성장기

니미츠는 1885년 2월 24일 택사스주 프리데릭스버그에서 태어났다. 그는 원래 육군사관학교를 지망했으나 당해 연도 빈 자리가 없어서 1905년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를 선택한 것이다. 퇴역 함장이었던 그의 할아버지는 고향에서 묘한 모양의 호텔을 지어 여행업을 했으며 그는 부유한 청소년시절을 보냈다.

니미츠의 해군사관학교 성적은 우수했고 특히 수학에서 뛰어났다. 114명 졸업생중 7등의 석차로 학업을 마쳤다. 해군사관학교를 나온후 아시아 해군함대에 배속되었고 진급을 거듭해 데카투르 구축함장이 되었다.

해군생활에 그럭저럭 익숙해질 무렵 그는 큰 사고를 내 자칫 해군을 떠날번 한 적도 있었다. 1908년 7월 7일 구축함 좌초사건이 바로 이런 악운이었다. 그때 직무태만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나 처벌은 다행히 견책정도로 가벼운 것이었다.

니미츠는 미국본토에 돌아와 5-6차례 번갈아가면서 잠수함 근무를 한후 1913년 독일과 벨기에 디젤엔징 개발연구를 위해 유럽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귀국한후 그는 독일과 벨기에에서 배운 신지식을 제2 마우미호를 디젤엔징으로 업그레이드 하는 선박건조 작업을 감독 지휘하고 1916년 10월 16일 이배를 진수시킨후 행정책임자겸 수석 엔지니어로 복무했다. 마우미호는 해면을 운항하는 미해군 최초의 디젤엔징 선박이었다.

니미츠가 개발한 디젤엔진 마우미호의 1차대전 승리

니미츠가 디젤엔진으로 개발한 마우미호는 1차대전 참가이전 미국 동해안과 쿠바연안을 운항했다. 미국이 1917년 4월 6일 개전후 마우미호는 영국으로 파견돼 해상에서 구축함에 재급유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마우미호의 해상급유는 함대가 장기간 모항이나 우호국 항구에 돌아가지 않고도 장기간 해상에서 작전할수 있어서 2차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미국이 1917년 4월 1차대전에 참전하자 말자 니미츠는 마우미 호와 함께 대서양 함대에 합류했다. 그는 그해 8월 해군 소령으로 승진한후 사무엘 S. 로빈손 잠수함전단 사령관 부관이 되었다. 로빈손 사령관은 그후 다음 10여년간 니미츠의 후원자로서 그를 계속 돌봐주었다. 두사람의 경우처럼 부하를 아끼고 사랑하는 존경할 만한 상관 밑에는 언제나 니미츠 같은 훌륭한 인재가 발굴될수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1차대전이 끝난후 그는 워싱턴에서 해군사령부 참모장교로 근무했고 1920년 진주만(펄하버)으로 전근, 후일에 대비, 새로운 잠수함기지 건설을 감독 지휘했다. 니미츠는 그후 20여년간 전함과 구축함등 근무는 물론 다양한 잠수함 근무경력을 쌓았다. 그는 여러차례 워싱턴 근무를 했고 미국대학들에서 최초의 해군예비장교훈련 프로그램을 조직, 운영하는 책임도 맡았다.

1938년 해군소장으로 승진한후 산디에고에서 순양함 단대(單隊)와 하와이에서 아리조나 전함을 포함한 전투함 단대를 각각 지휘하기도 했다. 그는 1939년 워싱턴에 돌아와 해군사령부 항해국장을 맡는다. 이어 1941년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을 때 해군 징모국장으로서 전시 대규모 병력증원 책임을 맡았다.


맥아더와 함께 태평양 전쟁 지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1년 프랭크 녹스 해군장관 추천으로 니미츠를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한후, 그를 해군대장으로 진급시킨다. 그때 태평양지역에는 육해공군 해병대등 모든 군종을 합친 단일 사령부만 있었기 때문에 각군별 연락과 협력등 운영상 문제가 많았다. 육군과 맥아더 장군은 해군장성 지휘를 받으면서 전쟁수행을 하는 것을 꺼려했다.

결국 타협의 산물로서 니미츠와 맥아더가 각각 태평양 전쟁수행 책임을 공동으로 맡는 두 개 지휘체계를 갖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니미츠의 원만한 성격과 친화력 때문에 두 장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을 맞아 승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긴박감 앞에서 비교적 잘 협력해 나갔다.

2차대전때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 지역에서 두 개의 거대한 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그런가운데 미국은 대일(對日)태평양전쟁 보다 독일과 이탈리아등 대(對) 추축국(抽軸國) 전쟁에 보다 중점을 두었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니미츠는 시간을 다투어 그의 전략전술을 밀어부쳐 일본의 확전을 저지하고 그들이 빼앗은 영토를 탈환하며 전선을 일본 본토까지 몰고갔다. 그는 일본군에 관한 미국 암호해독자들이 넘겨준 군사정보를 이용해서 1942년 5월 산호섬 전투에서 첫 교착상태를 돌파했다.

니미츠는 다시 군사정보에 의지해서 다음달 6월 미드웨이섬 전투때 야마모토 이소로꾸 제독이 지휘하는 일본 적군의 해역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야마모토 제독(전사후 원수로 승진)은 바로 진주만 기습폭격을 명령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일본 육해공군 총사령관으로서 미드웨이 전투에서 미해군 함대를 뿌리채 절멸시키려는 필사의 대결전을 벌였다. 그러나 그는 니미츠와의 이 전투에서 미국에 일본해군의 우위를 빼앗기고 과다캐널로 후퇴했다가 1943년 4월 18일 북부 솔로몬제도 전선 시찰중 암호를 해독한 미육군 항공전투기에 의해 폭사당했다.

<이소로꾸>는 56 숫자의 일본 발음으로서 그가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을 때 아버지 나이가 56세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미국 하버드대학에 유학했고 1925 ~ 28년사이 주워싱턴 일본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한 경력도 있어 미국의 엄청난 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애당초 대미전 을 반대했다는 설도 있다. 니미츠는 이런 야마모토 함대와 미드웨이 전투에서 대결해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의 함대가 일본 항공모함을 공격했을 때 대부분 일본 함재기들은 함상에서 재급유를 하거나 재무장중이었다. 니미츠의 이때 대승은 대일전 첫승리였고 일본해군으로서는 350년 만의 대패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측 손실은 전체 함대에서 9척의 항공모함중 4척의 침몰과 300대 항공기, 많은 최상급 조종사들의 전사였다. 태평양 전쟁중 핵심적 전투인 미드웨이 전투는 미국측에 결정적 우위를 가져다 주는 대신 일본에는 결정타를 안겨주었다.

니미츠와 맥아더 장군은 광할한 태평양상의 일본 점령 섬들을 하나 둘씩 탈환하는 메뚜기 뛰기식 작전에서 긴밀히 협력해 나갔고 이런 협력작전이 일본 본토쪽으로 점점더 가까이 포위해 들어갔다. 니미츠 제독 휘하의 군대는 1943년 11월 길버트를 점령한데 이어 1944년 2월에는 마셜군도를, 그리고 그해 8월에는 다시 마리아나 군도를 점령함으로써 숨돌릴사이 없는 파죽지세로 일본군을 몰아부쳤다. 니미츠는 그해 10월 오스트레일리아 쪽에서 올라온 맥아더 장군휘하 군대와 합동작전을 벌여 필리핀을 완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미국정부는 대일전에서 연전연승의 전공을 세운 니미츠 제독에게 미국 해군역사상 최초로 만들어낸 별 다섯 개의 계급을 달아주어 그를 5성계급의 함대원수로 승진시켰다. 미국 대통령과 전쟁성이 협의 한 끝에 니미츠 대장의 전공을 만장일치로 인정, 그에게 이런 영광스러운 최상급 계급을 부여한 것이다.

니미츠는 1945년 초 괌과 이오지마, 그리고 오키나와섬에 대한 총공세를 취해 이섬들을 차례로 점령했다. 그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카사키 시에 원자폭탄을 투하, 일본이 항복했을 때 일본본토 공격을 준비중이었다. 1945년 8월 29일 니미츠는 사우스 다코타 기함을 타고 도쿄만에 들어갔다.


'니미츠의 날'을 부여받는 금의환향

그는 같은 해 9월 2일 미조리호 함상 항복서명식에서 미국정부 대표로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고 합의문서에 서명했다. 니미츠는 그해 10월 5일 <니미츠의 날>로 지정된 날 워싱턴으로 돌아와 열열한 환영을 받았다. 이런 환영축제가 있은 후 그는 해군총사령관 직책을 맡았고 다음 2년간 핵추진 잠수함들을 개발하면서 동시에 병력과 전함들의 전시동원 해제작업을 감독했다.

니미츠는 1947년 12월 15일 퇴역했다. 그는 그후 수년간 해군장관 고문역을 맡았고 2 년간 카슈미르 분쟁지역의 유엔 판문관을 지냈다. 니미츠 해군원수는 만년 불행하게도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리면서 고통을 겪었다. 그는 1966년 2월 20일 81세 생일 직전 수술 병발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는 검소한 가족장으로 치러졌으며 샌 프란시스코 금문교 국립묘지 묘비에는 5성계급과 출생및 별세 일자만이 기록돼 있을뿐이다. 풍전등화의 조국을 구출한 계급높은 장성이면서도 생전 그의 겸양지덕이 묘비문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는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육해공군 구별없는 전군적 존경과 협력을 얻어낼수 있는 달인으로서 2차대전중 가장 영향력 높은 미해군 지도자로 기록되고 있다.

그의 광범위하고도 다양한 경력은 그로 하여금 과감한 전투를 벌이게 해, 마침내 일본의 가장 우수한 제독인 야마모토를 미드웨이 전투에서 제압할 수 있게 했다.

 

헨리 H. 아놀드

 

헨리 H 아놀드 장군은 미국 항공대를 초창기 부터 맡아 2차대전후 오늘의 현대공군으로 성장시킨 인물이다.

그는 2차대전후 항공대를 육군에서 공군으로 분리, 독립시켜 세계 최강의 공군으로 키원낸 미국 공군의 위대한 대부라고 할 수 있다.    

아놀드는 2차대전에서 연합군 승리를 도운 항공이론과 조직, 절차등을 확립했다. 그의 이런 이론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미국 공군과 다른 나라들 공군들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라이트 형제로 부터 비행교습을 받고 조종사 자격을 얻다

그는 1886년 6월 25일 펜실베이니아 그래드윈에서 의사의 아들과 남북전쟁 참전군인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웨스트 포인트를 나와 보병소위로 임관되었다. 아놀드는 육사졸업후 기갑부대를 지원했으나 성적이 좋지않아 보병으로 배치되었다.

필리핀 근무를 마친후 다시 기갑부대를 지원했으나 두 번째로 거부당했다. 그의 실망은 컸다. 그는 하는수 없이 통신부대로 배치돼 1911년 오하이오 데이턴에서 라이트형제로 부터 비행교습을 받고 조종사 자격증을 받게 된다.

아놀드는 미국군에서 기십명에 지나지 않는 최초의 조종사집단에 들어갔다. 그의 조종사 자격증은 미국에서 발부된 자격증중 29번째였다. 이것이 그가 미국 항공 부대를 발전시키고 독립공군 창설의 산파역을 맡게된 인연이자 배경이 되었다. 아놀드 는 1911년 9월 미국정부 우편물을 항공기로 실어나르는 최초의 비행을 했고 1912년에는 6,540피트의 고도비행을 하는 기록을 세웠다.


비행 신기록을 수립하며 항공계의 주목을 받았던 아놀드

아놀드는 초창기 항공사상 이런 저런 신기록들을 수립하면서 항공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때 매리랜드 파크 대학 활주로에 소수그룹의 조종사들과 항공기 기술자들을 불러 모았다. 여기서 이 소수그룹 조종사들은 신참비행사들을 훈련시키는외 비행기부품과 비행절차에 관한 군사 노멘크라투르(특권계층)를 형성했다.

이들은 또 항공무기와 폭격조준기 그리고 공대지 통신들에 관해서도 실험을 했다. 아놀드의 초급장교시절 하늘을 나르는 초창기 항공술은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었다. 몇 차례 추락을 경험한후 그는 스스로 지상근무를 선택했다. 그는 3년이상의 지상근무를 한다음 초기의 추락공포에서 겨우 벗어나 다시 조종사로 복귀했다.


1,2차 세계대전에서의 활약

아놀드는 비교적 풍부한 조종경험을 쌓아올렸기 때문에 그가 원치않았는데도 1차대전동안 항공본부 참모로서 워싱턴근무 명령을 받았다. 그는 워싱턴 본부보다 전선에 나가 조종사로서 항공근무를 하고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1차대전 종전후 그는 계급과 직책에서 천천히 그러나 착실하게 승진의 사닥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아놀드는 항공부대를 공군으로 독립시켜야 한다는 빌리 미첼의 주장을 적극 지지하고 따랐다. 미첼은 미국 조종사로서 1차대전때 미국 항공부대 최고사령관이었고 대량폭격편대 전술을 창안했다. 그는 이때 부터 공군의 독립을 주장했고 미래전에서 폭격기가 전함을 대체할 것으로 예측했다.

아놀드는 이어 항공전술에 끼친 업적으로 제 1회 맥케이 토로피를 받았다. 그런가 하면 그는 전략공군의 항속거리를 실험하기 위해 본토에서 알라스카까지 B10폭격기 편대 비행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공로로 최고의 비행십자훈장을 받기도 했다. 맥케이 트로피는 클레렌스 맥케이가 1911년 제정했다. 맥케이는 당시 우편전신회사 사장이었다.

항공과 전신은 조종사들이 공대지 항공 통신을 하는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는 1935년 육군항공대 부사령관이 되었다. 오스카 웨스토버 사령관이 1938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자 아놀드는 그의 후임으로 그 자리에 승진 임명되었다.

아놀드는 항공 사령관으로서 전쟁에 필요한 대량군수산업 확장을 위한 토대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2차대전동안 합동참모본부 고위간부의 한사람으로서 여러곳 전투현장에 대한 공군전략을 지휘하는 최고 책임을 맡고 있었다.


까다롭지만 타고난 감각을 지녔던 공군 지휘관

아놀드는‘햅’(Hap·행복을 뜻함)이란 자기별명과는 달리 언제나 까다로운 지휘관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부하들 업무에 간섭하면서도 자기 막료들을 효율적으로 부리고 조직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뿐 아니라 그의 변덕스런 기질은 일면 자신을 가볍게 보이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커다란 단점을 동시에 훌륭한 장점으로도 만드는 비범한 수완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공세적 드라이브와 비전, 사물을 주도하는 감각등은 거대 공군을 지휘하는데 불가결한 요소였다.

1913년 아놀드는 보병부대로 돌아와 필리핀에서 또 다른 직무를 맡게 된다. 그는 필리핀 바탕가에서 야전훈련중 유명한 조지 마셜 중위(후에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이 됨)를 만나게 된다. 두사람의 두터운 우정과 직업적 관계는 그후 일생동안 계속되었다.

지금까지 아이젠하워, 맥아더 원수등 적잖은 전쟁영웅들을 소개했지만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에는 아직도 많은 영웅들이 남아있다. 이들도 이 아메리카 영웅그룹중의 한사람이다.

전세계 수백 인종들의 다양한 이민들로 구성된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이 200여년 역사의 큰 나라로 발전하면서 나라규모와 정비례해서 수많은 영웅들이 차례차례 탄생했다.

 

 

 

알랜 프란시스 부루크

2차대전 당시 던커크 철수작전의 영웅 알랜 부루크는 2차대전때 영국 합참의장겸 전(全)영국군 사령관으로서 윈스턴 처칠 수상의 전시내각 수석 군사자문역을 맡았다. 그는 2차대전 기간 미국 및 소련연합국들과 연합전선을 매끄럽게 이끌어 오면서 다국적 연합군의 단결을 촉진하고 전투목표와 목적들을 수립할때 능동적 역할을 수행했다. 처칠과 명콤비 이루어 2차대전 승리로 이끌어
알랜 부루크는 2차대전때 영국 합참의장겸 전(全)영국군 사령관으로서 윈스턴 처칠 수상의 전시내각 수석 군사자문역을 맡았다. 그는 2차대전 기간 미국 및 소련연합국들과 연합전선을 매끄럽게 이끌어 오면서 다국적 연합군의 단결을 촉진하고 전투목표와 목적들을 수립할때 능동적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2차대전 초기 부루크는 많은 전공을 세워 추축국 군대의 전진을 저지하고 전쟁 종반전 독일군을 패배시킬 때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인도 포병부대를 지휘했던 알랜 부르크

알랜부루크란 애칭으로 불린 그는 1883년 7월 23일 프랑스 바니에르-드-비고르에서 아일랜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부루크는 울위치 영국왕립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전 프랑스와 아일랜드에서 초중등학교 교육을 받았다.

그는 1902년 육군사관학교 졸업과 동시 포병장교로 임관되었다. 부루크는 1차대전때인 1914년 프랑스에 주두하기전 아일랜드와 인도에서 근무했다. 그는 1차대전때 카나다와 인도 포병부대를 지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도는 영국식민지였고 카나다는 영연방내 자치령이었기 때문에 영국장교가 부대 지휘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부루크는 전투중 용맹성에 대해 여러차례 무공훈장을 받았고 영국의 공격부대를 후방에서 단계적으로 지원하는 포병지원 사격술을 창안, 격찬을 받기도 했다. 1차대전 종전후 그는 참모와 지휘보직을 번갈아 순회하면서 포병학교 교장과 전쟁성의 군사훈련 총책을 담당했다.


던커크 전투에서의 활약

1, 2차대전동안 그는 참모역할에서 뛰어난 업적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그가 군사훈련 책임을 맡았던 때는 1936년-37년사이였다. 부루크는 2차대전때인 1939년 프랑스에서 제 2군 사령관으로서 일선부대 지휘를 했다. 그는 <던커크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압도돼 전세가 불리해지자 1940년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영국원정군의 대규모 철수작전을 성공시켰다. 이때 그는 훌륭한 전략전술을 발휘해 상부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던커크는 프랑스 북부 항구도시로서 지금은 인구 7만의 전자및 조선과 각종제조업도시로 발전했다. 독일군은 기갑부대를 한군데로 총 집중하면서 전격전을 한데 반해 프랑스와 영국군은 기갑사단들을 광범한 전선에 전개함으로써 던커크전투에서 대패했다. 영국은 모든 수단방법을 총동원, 30만명의 연합군을 철수시켰다. 쌍방의 희생은 컸고 얼마후 프랑스는 독일군의 나치점령하에 들어갔다.

이때 영국군은 방위선을 고수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싸웠다. 영국은 사용가능한 모든 선박들을 전투장병들의 집단 철수작전에 총동원했다. 6월 4일 22만명의 영국군과 11만 명의 프랑스군이 영국으로 철수했다. 4일 아침 독일군이 던커크를 점령한후 4만명의 연합군을 포로로 잡았다. 영국군은 예상보다 더 많은 장병들을 철수시켰으나 거의 모든 중장비들을 독일군에게 빼았겼으며 대부분 장병들은 영국에 무기없이 빈손으로 귀환했다.

던커크 전투때 독일공군은 연합군 함대에 대해서 엄청난 손실을 끼쳤다. 상선 80척과 상당수의 전함들이 격침당했다. 독일군 역시 연합군 보다 더 많은 항공기를 잃었다. 독일군은 여세를 몰아 솜강(江) 전선으로 계속 밀어붙였다. 프랑스군은 흩어진 군부대를 재편성, 방어했으나 힘은 미치지 못했다.

6월 7일 아미앙과 해안선 사이 전선이 무너지고 그로부터 8일후 빠리는 독일군에게 함락되었다. 그후 쉘부르, 셍말로, 브레스트, 셍나제르, 낭트등이 차례로 독일군에게 넘어갔다. 6월 22일 프랑스 헌팅징어 장군이 독일군과 휴전협정을 조인하고 그날부터 프랑스는 5년간 나치치하에서 사실상의 ‘점령통치’를 받았다.

부루크는 독일군에게 포위당할 위기에 처하자 후퇴를 지연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일부러 일선부대장들을 일일이 직접 방문함으로써 부대장들에게 영불해협을 통해 연합2군 장병들을 대부분 철수시킬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연합군에게는 던커크 철수작전이 대재앙이었다.

성공적 던커크 철수작전때 부루크 예하 사단장 두사람은 바로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과 하롤드 루퍼트 알렉산더 장군이었다. 두사람은 나머지 2차대전 기간동안 높은 명성을 얻었다. 부루크는 이 두사람 부하들 보다 명성면에서 뒤떨어지지만 성공적 던커크 철수 작전 계획과 집행을 총지휘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가 훨씬 더 큰 영 향력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처칠 수상은 1941년 7월 부루크가 영국으로 귀환하자 그를 본토방위군 사령관으로 임명한데 이어 그해 12월 육군 참모총장에 기용, 승진시켰다. 그는 1946년까지 이 직책에 머물렀다. 부루크는 그후 합참의장으로서 고위 장성들의 견해를 처칠 수상과 미국 합참 의장에게 충실하게 전달해 연합군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전략전술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부루크는 영명한 군지휘관으로서 광범한 명성을 얻었지만 연합군의 유럽공격작전 지휘관을 포함해서 해외의 대규모 전투지휘를 맡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했다. 이런점이 무인인 그에게 하나의 좌절로 기록됨으로써 옥에 티로 남게 되었다.


많은 후일담을 담고 있는 부루크의 '전쟁일기'

2차 대전후 그의 전쟁일기 발췌문 내용이 아이젠하워 장군을 인신공격했다고 해서 한때 말썽을 빚기도 했다. 그가 전쟁일기에서 아이젠하워 장군의 군지휘관으로서의 능력과 미국의 전략을 호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부루크는 자기의 전쟁일기에서 그의 임무는 처칠수상의 정치적 영감을 군사감각으로 전환,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썼다. 실제로 그는 극동에서 연합군의 전군사력을 항일전투에 투입하기전 유럽에서 먼저 독일을 격파해야 한다는 ‘유럽 제일주의’스로건을 최초로 만들어 실천했다.

부루크는 또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이탈리아를 먼저 해방해야 한다는 전략을 짰다. 그는 전쟁을 계속하려는 독일군의 전의를 꺾기 위해 독일에 대해서 이런 목표아래 집중폭격을 계속했다. 그의 부하들이 최초로 노르망디 상륙작전계획을 창안했다.

그가 이 상륙작전 개념을 처칠 수상에게 상신했더니 처칠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를 이 상륙작전의 최고사령관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미군의 참전병력이 영국군에 비해 압도적이었기때문에 부루크 최고사령관 아이디어는 실현되지 못했다.

부루크는 군인으로서 그 자리를 원했지만 미국에 양보하고 말았다. 이때 미국측은 참전군병력이 연합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기 아이디어는 부루크 부하들이 내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최고사령관 자리는 미국쪽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처칠과 명콤비를 이뤘던 부루크

부루크는 처칠 수상을 "내가 만난 사람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송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전쟁일기 가운데서 자기 보스(처칠)는 "내가 만난 사람가운데서 함께 일하기에 가장 까다로운 인물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런 성격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처칠은 정치지도자로서, 부루크는 군사 지휘관으로서, 두사람은 전쟁을 계획하고 진행하는데 있어서 절묘한 명 콤비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부루크는 스탈린을 포함해서 소련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발전시킨 것이다. 그는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미국측 군사지휘관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고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미국측 군사상대역인 조지 마셜 장군은 부루크를 가리켜 그는 자기직책에서 결심이 공고하지만 협상에서는 늘 부드럽고, 판단에서는 관용적이며 우정에서 는 항상 기쁨을 가져다 주는 호감어린 인물이라고 평했다.

부루크 전쟁일기속에는 말못할 속마음을 드러냈지만 아이젠하워와 그는 직업군인으로서 서로 존경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전후 출간한 자기 회고록에서 "부루크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 날이 선듯 의견차를 서슴없이 드러내지만 이런 태도가 개인적인 우정을 손상하거나 그의 지지를 흐트러지게 하지 않은 탁월한 능력의 장군이었다"고 썼다.

처칠 수상도 부루크의 탁월한 능력에 대해서 동의하고 1944년 그를 육군원수 계급으로 승진시켰다. 2차대전때 전세계 연합국들은 하나같이 부루크의 전쟁승리에 끼친 그의 공헌을 인정했다. 폴란드와 벨지엄, 프랑스, 덴마크, 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 폴투갈, 에티오피아, 소련, 스웨덴등 연합국들은 부루크의 2차대전중 공헌에 대해서 존경의 뜻을 잊지않았다.


가려진 명성...

부루크는 전후 1946년 현역에서 은퇴한후 자작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그는 1963년 6월 17일 79세를 일기로 영국 위트니에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부루크는 그의 전략적 외교적 능력외 영국 육군 원수로서 모든 것을 조국에 다 바쳤다.

그는 후리후리하고 체육선수같은 모습에다 말쑥하게 다듬은 콧수염을 뽑내면서도 항상 군인으로서의 엄격한 자세를 흐트려 뜨리지 않았다. 부루크는 접근하기 어렵고 강철같은 의지의 소유자이면서도 근무중 늘 부하들에게는 인내와 포용력으로 대했다. 그는 근무중이 아닐때는 개방적이고 친철하며 모든 계급의 장병들에게도 접근이 쉬운 상사였다.

그의 전쟁일기 내용들은 2차대전중 중요하거나 사소한 모든 의사결정과정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전쟁중 부루크의 예하 일선사령관들인 몽고메리와 알렉산더가 더 많은 인기와 명성을 누렸지만 전쟁정책 수립과 연합군의 단결을 이룩한 사람은 바로 부루크이기 때문에 그가 2차대전중 영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군인라는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전쟁 초기 부루크는 다른 어떤 군인들 보다 전략전술 수립과 작전수행면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미국의 참전병력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미국이 군사적으로 강력해지고 영국의 힘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조지 마셜과 아이젠하워 장군의 명성이 부루크의 역할을 그늘 지게 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

중국을 군사적으로 통일, 연합국의 對日戰 승리로 이끌어

장제스(蔣介石)는 민족주의자며 불요불굴의 반공주의자로서 1920대 중국을 군사적으로 통일한 인물이다. 그는 2차대전때 루즈벨트, 처칠, 드골등 미영불 지도자들과 나란히 연합국의 대일(對日)전을 승리로 이끌어 세계적 지도자로 떠 올랐다. (편집자주·장카이섹은 광동발음이고 장제스는 베이징 표준발음)

국민정부 총통이 되어 통일 중국 통치


2차대전후 장제스는 국공(國共)내전에서 마오제둥(毛澤東)이 이끄는 중공군에 본토를 빼앗기고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옮겼다. 그는 거대 대륙을 마오제둥에게 내주고 망명지 대만에서 뒤늦게나마 군부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토지개혁을 단행, 정치적 안정과 경제번영을 이룩했다. 미소를 중심으로 한 동서냉전시기 대만은 한때 한국과 함께 아시아지역의 자유반공 보루로서의 역할을 했다.

장제스의 아호는 중정(中正). 1887년 10월 31일 샹하이 인근 저장성(浙江省) 펑화현[奉化縣]에서 농업겸 소상업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이런 전통적 가업을 떠나 원대한 꿈을 이룩하기 위해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1906년 바오딩(保定)군관학교에 입학, 짧은 교육기간을 거쳐 다음해 일본 도쿄로 건너가 일본육사에서 유학했다. 거기서 장제스는 辛亥혁명을 주도한 쑨원(孫文)을 만났다.

그는 도쿄에서 국민당 전신인 <중국통일혁명동맹>에 가입했고 이단체는 얼마후 신해혁명을 일으켜 300년간의 봉건전제국가인 청조(淸朝)를 전복하고 중국을 근대국가의 공화정으로 통일했다. 장제스는 그 후 5, 6년간 중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그의 군사정보지식을 확대하고 중국통일의 정치적 야망을 가다듬었다.

장제스는 1911년 쑨원의 신해혁명에 참가했고 이혁명은 마침내 중국을 중화민국으로 변모시켰다. 그는 1918년 쑨원(孫文)의 부하로서 주로 군사면에서 활약하고 1923년 소련을 방문, 적군(赤軍)편제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장제스는 이때 소련에서 소련식 군사교육과 사회제도를 연구하고 신 중국건설을 위해 필요한 재정지원도 받아왔다.

손자(孫子·순쓰)

 

중국인들은 손자병법을 군사전략의 성경(聖經)이라고 칭찬하고 일본인들은 세계 제1의 병서이며 동방병학(兵學)의 비조(鼻祖)로 받들고 있다. 2차대전후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승리, 천하통일에 성공한 마오저둥도 정보심리전과 게릴라전을 위해 손자병법에 탐익했고 통일 베트남의 국부(國父)호치민(胡志明)과 베트남 게릴라전의 영웅 보구엔지압장군, 나폴레옹등이 모두 이 손자병법을 활용했다.

"남을 조종하되, 내가 남에게 조종받으면 안된다"

손자는 B.C. 4세기 중국 춘추시대 말기, 전국시대 초엽 오(吳)나라의 장군이며 유명한 군사전략가이다. 그는 원래 제나라 사람으로서 동향인 오자서(伍子胥)의 추천으로 오왕(吳王) 합려(闔閭)를 섬기면서 그의 패업(覇業)에 공헌했던 장군이다.

손자는 전투현장의 일선지휘관으로서 보다 불후의 군사전략 명저, 손자병법(孫子兵法)으로 더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저서외 그의 사람 됨됨이라든가 활약상을 확실히 전해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손자병법 연구자들이 소개하는 손자의 인물평은 간단하다.


군령이 곧 군의 생명임을 강조

그의 본명은 손무(孫武)로서 제(齊)나라 출신이다. 오나라는 오늘의 소주(蘇州)근처에 도읍을 정했고 제나라는 산동성 근방을 가르킨다. 그는 병법에 통달했는데 오왕 합려가 그의 저서를 통독한후 그를 불러 병법의 몇가지 실제를 물어본다음 그를 군 지휘관으로서 임명했다. 합려가 손무에게 면접삼아 군지휘요령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궁중의 미녀 180명을 차출해 이들을 2개대(隊)로 나눠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손무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를 처벌하기 위한 도끼를 들고 전원이 알아듣도록 구령을 했다. 그는 북을 치면서 전후좌우 동작을 요구하는 구령을 몇번씩 되풀이했는데도 궁녀들은 킬킬거리면서 웃기만 했다.

손무는 이런 동작에 대한 구령을 되풀이했는데도 궁녀들이 계속 말을 듣지않자 왕의 제지를 무시하고 대장 두사람을 훈련장에서 처벌하고 새로이 대장을 임명했다는 것이다. 이때 손무는 "이부대의 장수는 신(臣)이며 장수가 군을 지휘할때는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는수도 있아옵니다"라고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이 훈련에서 군령이 곧 군의 생명이라는 교훈을 깊이 심어주었다.

이런 일이 있은후 궁녀들은 구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기침소리 하나 없이 군사훈련을충성스럽게 해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이때 합려는 손무가 빼어난 용병술을 가졌다는 사실을 현장 확인하고 그를 휘하 장군으로 썼다. 오나라는 그후 강국인 초(楚)나라를 격파하고 북쪽으로는 제나라와 진(晉)나라를 제압했는데 이는 모두 손무의 공으로 이룩된 업적이었다.


최고의 병서로 인정받는 '손자병법'

그후 오나라가 손자의 군사전략으로 강대국으로 비약하자 오왕 합려는 마침내 교만해지고 정사는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국정이 날로 문란해졌다. 손자는 이에 실망한나머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흰구름과 들의 학을 벗삼아 여생을 유유자적했다고 한다. 손자병법은 특히 대적(對敵)정보심리전과 간첩전을 중요시 하면서 여러 가지 속임수와 적 내부갈등조장, 적군 동맹국간의 이간질등을 많이 열거하고 있으나 이것은 병법일뿐 그는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원칙을 지키는 고고한 인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손자병법에서 손자는 저서명인 동시 저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여기서 자(子)라고 하는 것은 옛날 동양에서는 남자에 대한 미칭(美稱)으로서 고인의 글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창작에 의해 일가를 이루면 그 글을 ‘자서(子書)’라고 불렀다. 예컨데 장자(莊子), 노자(老子), 순자(筍子), 한비자(韓非子)등과 같은 것이며 성인(聖人)의 저서는 경서(經書)라고 부른다.

손자는 전략전술을 담은 병서(兵書)인 동시에 국가 및 기업경영과 처세수양(處世修養)을 위한 기본 독본이기도 하다. 근자 우리나라를 비릇해서 일본, 미국, 유럽등지에서 손자병법이 정치, 경제, 외교에 있어서도 하나의 비법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손자병법을 군사전략의 성경(聖經)이라고 칭찬하고 일본인들은 세계 제1의 병서이며 동방병학(兵學)의 비조(鼻祖)로 받들고 있다. 2차대전후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승리, 천하통일에 성공한 마오저둥도 정보심리전과 게릴라전을 위해 손자병법에 탐익했고 통일 베트남의 국부(國父)호치민(胡志明)과 베트남 게릴라전의 영웅 보구엔지압장군, 나폴레옹등이 모두 이 손자병법을 활용했다.

6·25때 의용군으로 참전한 중공(中共)군의 전투행태를 봐도 마오저둥을 비릇 중공군 지휘관들이 손자병법을 최대한 활용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낮에는 쉬고 밤만 되면 인해전술로 북과 징, 꾕과리를 치고 피리를 불면서 돌진하는 전투행태가 모두 손자병법에 나오는 전술이다.

손자병법을 이용하는 북한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의 을지문덕, 이순신장군등이 이 병서의 전략전술을 많이 활용했다고 한다. 손자병법의 전략전술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측은 북한이다. 처음에는 김일성, 그후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등이 해방후부터 지금까지 대남적화전략목표 달성을 위해 이 손자병법에 주로 의존해왔다고 할 수 있다.

손자는 적이 강하고 아군이 약할때 쉬면서 적과 담판하고 적이 약하고 아군이 강할 때 공격하며 몰아부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특히 적이 강할때는 군사력동원보다 정보심리전과 간첩전을 극대화해서 적내부에 갈등을 조장하며 분열을 일으키로 적과 적의 동맹국을 이간질해 적내부의 힘을 분산, 무력화 하도록 손자병법은 기술하고 있다.

북한측이 근자에 마침 핵문제를 둘러싸고 남북간, 북미간 마찰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때‘우리민족끼리 통일’구호아래 ‘민족자주’, ‘민족공조’를 날마다 내돌리며 극력 선전하는 것도 손자병법에 따른 우리 내부분열과 갈등조장용이며 한미동맹의 이간질용이다.

북한이 작년 느닷없이 부산 아시안게임 참가를 통보하고 대규모 미녀군단을 응원단으로 파견하고 인공기가 한국텔레비전을 통해 전국방방곡곡에 방영되도록 한것도 ‘민족감정’을 자극하고 북한을 미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대남정보심리전인 것이다.

미국도 육군사관학교 교과목으로 손자병법을 활용하고 있으며 지금 이라크전쟁 준비과정에서 사담 후세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대 이라크 정보심리전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미국 정부 최고위당국의 대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무장해제 요구와 이라크 주변지역에 대한 미군병력과 항공모함파견, 부시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장관, 콘도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 파월 국무장관등의 일일발언등이 모두 후세인을 굴복시키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짜여진 대 이라크 입체 정보심리전의 하나다. 최근 후세인의 망명설이 잇따라 흘러나오는 것도 미국이 손자의 최상책인 부전승(不戰勝)을 거두려는 전략전술에 다름 아니다.

손자병법은 전부 13편 2만5천자로 돼 있다. 중국에 여러 가지 병법저서가 있지만 첨단과학이 발달된 오늘까지 여전히 실용성있는 이론적 병서는 이 책이 유일하다. 손자병법은 전쟁계획과 전투방법을 기술한 가장 오래된 명저이기도 하다. 손자는 극히 단순명쾌한 것이 그 특징이다. 그럼에도 몇천년 전쟁사에서 교전국들은 이런 단순한 기본병법 원리조차 번번히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기이할 정도다.

그 전략전술 이론의 두가지 교리는 어떤 침공도 격퇴할 수 있도록 적합한 방위태세를 갖출것과 적을 패망시킬수 있는 전략전술을 개발, 준비하라는 것이다. 적을 패배시키고 승리하는 방법 즉 전략전술은 쉽지않다.

손자는 적을 이기는 전략전술은 적과 실제 전투를 하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기술했다. 손자는 무력사용은 최하책이며 무력은 오직 최후 수단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했다. 어디까지나 정보심리전과 간첩활용을 통해 무혈 부전승을 거두도록 충고하고 있다.

손자는 능숙한 전략가들은 적과 교전하지 않고 적의 항복을 받아내고 적국의 도시들을 포위하지 않고 점령하며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적국을 전복하는 것이라고 갈파했다. 이 모두가 손자병법 13편 간용(間用)편에서 강조하는 정보심리전과 간첩전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뜻이다.

손자는 간첩전과 정보심리전을 위해서는 천문학적 경비가 들어도 반드시 지출해야 한다고 말할정도로 이 전법의 긴요성을 역설했다. 북한의 최근 대남행태에 비춰, 그들의 전략전술도 핵(核)협박 벼랑끝전술에다 정보심리전과 흑색선전, 간첩전을 배합, 부전승을 노리고 있다고 봐야 한다. 손자는 무력을 사용하기전 먼저 반드시 딴 방법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먼저 적국내에서 흑색소문을 광범하게 퍼뜨리고 뒤흔들어 혼란에 빠뜨리며 사기를 저하시키는 것이다. 또 적국의 고위관료들을 될 수있는대로 많이 매수해서 자기편으로 포섭함으로써 평소 적내부를 손바닥 들여보듯 훤히 파악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고했다. 월맹의 보구엔지압도 이런 정보심리전과 간첩전을 구사,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즉, 70년대초 사이공 독립궁에서 고위전략회의가 끝난직후 회의내용 전부가 곧바로 하노이 수뇌부에 전달돼 월맹군은 월남군의 뒷통수를 망치로 치듯 역공을 하곤했다. 정보심리전과 간첩전의 중요성이 여기서도 극명하게 실증되었다.

요컨데 손자는 싸우지 않고 이기고 승산 없는 전쟁은 절대 않는다고 했다.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우선 "지피지기(知彼知己), 즉 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모공편· 謀攻篇). 손자는 전쟁을 할 때에는 " 남을 조종하되 내가 남에게 조종받으면 안된다(치인이불치여인·致人而不致於人-虛實篇)"고 했다. 즉 주도권을 잡지않으면 안된다는 뜻이다. 상대방 병력을 분산시켜 수세에 몰아넣은 다음 실(實)한 것을 피하고 허(虛)한 것을 공격하는 전략전술을 권고했다.

또 적의 무방비한 곳을 공격하고 적이 미쳐 대처하지 못한 곳을 노리라고 했다. 상대방의 의표를 찔러야 한다는 것이다. 96년 98년 두차례 북한의 동해 무장 잠수함침투와 작년 서해교전등도 바로 이런류의 속임수 전술이다. 그는 궤도편(詭道篇)에서 전쟁은 속임수라고 했다. 즉 위장평화나 지키지 않을 허위협정과 합의로 상대 적군을 방심케 해놓고 기습공격, 적을 제압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속전속결로 하고 지구전은 어리석은 우책(愚策)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대남전략전술이 모두 손자병법의 이런 속임수와 속전속결로 짜여있다.

손자병법이 나온지 2,400년의 긴 세월이 흘렀지만 속에 담긴 국가경영 및 처세술등 기본적 도(道)와 전략전술은 핵과 미사일등 첨단무기가 최고도로 발달한 지금도 여전히 녹슬지 않고 유효한 전략전술로 살아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무턱대고 많이 축적하고 비싼 첨단 무기만 사잰다고 적을 이기는 것은 아니다. 손자병법을 배우고 익히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 그 어느때 보다 중요한 때다. 핵심은 전체 국민들의 민감하고도 철처한 안보국방의식과 정부의 빈틈없는 경계와 방위태세다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 군벌 타도와 중국 통일에 힘씀

장제스는 다음 10년간 중국북부에서 군벌을 토벌하고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는등 미래 중국통치자로서의 바쁜 나날을 보냈다. 1924년 귀국하자 그는 황푸(黃浦)군관학교 교장에 발탁되었고 1926년에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해 북벌(北伐)을 개시했다. 황푸 군관학교시절 그는 젊은 장교들에게 자기의 정치적 영향력을 넓히고 성장하는 권력기반을 더욱 확충해나갈 기회를 잡았다.

쑨원이 지도자였던 국민당 광동정부는 1925년 쑨원이 서거하자 집단지도체제의 국민정부로 개편해 군을 국민혁명군이라 불렀다. 이때 장제스는 국민혁명군(북벌군) 총사령관으로서 군벌을 타도하고 중국을 통일하고자 1926년 7월 북벌에 나선 것이다. 이때 장제스는 8개사단을 조직해 북부와 중부 중국의 북벌을 했다. 24년 시작된 1차국공합작이 깨진것도 이 무렵이었다.

장제스는 북벌 첫해 국민당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다. 축출된 공산주의자들은 국민당 창당때 부터 참가한 창당 당원들이었다. 그다음해 그는 중국 최고갑부의 딸 세자매중 막내인 송미령(宋美齡)과 결혼했다.

송미령 친정의 막대한 부와 서구교육을 바탕으로 한 송씨네 금융가문은 장제스의 정치적 야망과 영향력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북벌 성공으로 그의 당내 위치는 확고해졌다. 북벌 때 국민정부 좌파와 중공(中共)은 장(蔣)의 정치적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염려해 북벌에 극력 반대했다.

거기다 북벌군은 10만여 명에 불과했으나 군벌세력은 약 1백만 명으로 10대 1의 열세였다. 그 가운데 오패부(吳佩孚) 장작림(張作霖)의 세력이 제일 컸고, 손전방(孫傳芳)이나 염석산(閻錫山), 풍옥상(馮玉祥)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북벌은 중공과 일본의 제남사변(濟南事變)등의 방해로 한때 차질을 겪기도 했으나 풍옥상과 염석산이 국민혁명군에 협조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북경에 있었던 장작림(張作霖)은 동북으로 돌아가다 매복 일본군에게 황고둔(皇姑屯)에서 폭사당했다. 그후 그의 아들 장학량(張學良)이 국민정부의 깃발로 바꾸어 달고 장제스의 국민 정부에 합류 함으로써 장제스의 북벌은 성공으로 끝나고 그는 전중국을 통일할수 있게 되었다.


국민정부 총통이 되어 통일 중국을 통치하다

장제스는 북벌에 성공함과 동시 1928년 10월 10일 국민정부 총통이 되어 통일 중국을 통치했다. 이로써 국민정부는 군정(軍政) 단계를 마감하고 혁명 2단계인 훈정(訓政)의 단계로 접어 들었다. 훈정은 무력통일된 성(省)의 자치과정을 말하며 혁명의 마지막 단계가 헌정(憲政)이다.

장제스의 초기 공산당과의 군사 및 정치투쟁은 일방적인 우세였다. 1924년 국민당은 소련과 손잡고 중공당을 산하에 포용하는 연소용공(聯蘇容共)정책을 썼다. 이때 공산당은 개인적으로 국민당에 가입했다.

그러나 그는 쑨원이 병사한후 국민당에서 좌파 및 공산당을 몰아냈다. 장제스는 1927년 상하이(上海) 쿠데타를 일으켜 1928년 베이징을 점령했다. 그는 난징(南京)에 새로운 단독 국민정부를 세우고 주석과 육해공군 총사령관이 되어 당과 정부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장제스는 유일한 반대세력인 공산당을 불법화하고 그들에게 정면 승부수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