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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안개 촉촉한 붉은 꽃잎, 도선사 ‘꽃무릇’

醉月 2008. 10. 18. 19:47

새벽안개 촉촉한 붉은 꽃잎, 도선사 ‘꽃무릇’

▲ 선운산 발치에 꽃무릇 붉은 물이 들었다. 연녹색 꽃대 끝에 매달린 붉은 면류관, 활활 타오르는 무령왕 불꽃왕관. 달밤에 보면 눈부시고 , 새벽안개 속에서 보면 황홀하다. 도솔천에 사는 미륵보살의 현신인가. 아니면 아기보살들의 가을 나들이인가. 꽃무릇은 단풍보다 더 애틋하고, 동백꽃보다 더 쿨하다. 한 꽃이 피면, 한 꽃이 지고, 한 꽃이 지면, 또 한 꽃이 핀다. 뽕! 뽕! 뽕! 붉은 꽃밥이 우르르 터진다. 선운사 도솔암에 오롯화게 핀 꽃무릇.
 

끝내 닿지 못한 나의 잎… 꿀꺽, 목젖 아픈 그리움
 젊을 때는 꽃이 보이지 않는다. 꽃은 구만리장천 너머 그 어디쯤에 있다고 믿는다. 발밑의 들꽃 같은 것은 아예 눈에 차지도 않는다. 먼 훗날 만나게 될 그 크고 황홀한 꽃. 우아하고 눈부신 꽃. 가슴 두근두근 향기로운 꽃. 젊은이들은 ‘그 무지개 꽃’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린다.

 

 꽃은 산에 오를 때도 보이지 않는다. 산봉우리가 바로 꽃이기 때문이다. 그 꽃은 손에 잡힐 듯 바로 가까이 서 있다. 허겁지겁 기를 쓰며 오른다. 하지만 막상 한 등성이를 오르면 정상은 한걸음 성큼 물러서 있다.


 꽃은 산에서 내려갈 때 비로소 눈에 뜨인다. 모든 꿈조차 사라져, 터벅터벅 무심히 내려올 때 보인다. 꽃은 길섶 ‘저만치 혼자’ 웃고 서 있다. 올라갈 때도 거기 있었다. 언제나 그곳에서 혼자 피었고, 홀로 꽃잎을 떨어뜨렸다. 혼자 바람을 견뎠고, 홀로 싹을 틔웠다. 그리고 열매를 맺었다.


 고은 시인은 노래한다. ‘내려갈 때/보았네/올라갈 때/보지 못한/그 꽃(‘그 꽃’ 전문)’. 송기원 시인도 탄식한다. ‘지나온 어느 순간인들/꽃이 아닌 적이 있으랴.//어리석도다/내 눈이여.//삶의 굽이굽이, 오지게/흐드러진 꽃들을//단 한번도 보지 못하고/ 지나쳤으니. (‘꽃이 필 때’ 전문)’.


 꽃은 역시 가을꽃자리가 한갓지다. 계절이 익어야 꽃도 제자리를 잡는다. 봄꽃은 불안하다. 우르르 잎보다 먼저 피어나, 바람 한 번 건듯 불면 우수수 떨어져버린다. 땅바닥에 나뒹구는 꽃잎은 참혹하다. 짠하다.

 

 돌밭 모래땅 좋아해 ‘석산’…탱화 불경의 접착제로 쓰여

 남도에 꽃무릇 보살들이 불타고 있다. 전북 고창 선운사, 전남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 장성 백양사, 경남 하동 쌍계사…. 이 중에서도 선운사 불갑사 용천사가 지천이다. 선운사는 절 입구에서부터 도솔암에 이르는 3.2km의 숲길이 붉다. 숲 발치가 봉숭아물들인 것 같다. 다홍치마 두른 가을 숲. 산제비나비와 호랑나비가 꽃무릇 붉은 면류관에 코를 박고 일어설 줄 모른다.


 하지만 사람 손 탄 흔적이 아쉽다. 다른 들꽃들은 아예 베어내 버렸다. 제철 맞은 물봉선도, 그 흔한 개망초도 씨가 말랐다. 억센 바랭이나 여뀌 쇠비름 명아주도 보이지 않는다. 꽃도 너무 많이 모여 있으면 멀미가 난다. 사람이나 꽃이나 떼 지어 있어서 좋을 것 없다. 무리 지으면 천해 보인다. 다른 것들과 어울려 있어야 더욱 아름답다. 어쩌다 달개비 꽃과 하얀 고마리 꽃이 눈에 띈다. 반갑다.

 

 


 문득 늙은 동백나무 그늘 아래 부스스 홀로 핀 붉은 꽃 한 송이. 상큼하다. 저만치 바위 틈에 뾰족이 혼자 올라온 붉은 꽃. 깜찍하고 앙증맞다. 외딴 암자 참당암(懺堂庵) 대웅전 뒤에 핀 꽃무릇이 으뜸이다. 군데군데 오종종 핀 붉은 꽃들은 머위 여뀌 엉겅퀴 강아지풀 개망초 꼬리뱅이 원추리 코스모스 개모시풀 까마귀머리 산딸기 왕고들빼기 한울타리 칡꽃 미국자리공들과 어우러져 우아하고 오롯하다. 당당해서 기품이 있다. 그 뒤론 늙은 반송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절 앞마당엔 붉은 배롱나무 꽃이 지쳐가고 있다.


 꽃무릇은 봄꽃처럼 꽃이 먼저 핀다. 잎은 꽃이 다 진 뒤에야 비로소 돋는다. 돌밭 모래땅을 좋아한다. 한자로 석산(石蒜), 즉 ‘돌 마늘’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마늘대 같은 연녹색 꽃대를 곧게 밀어올린 뒤 붉은 면류관 꽃을 주렁주렁 매단다. 백제 무령왕릉의 불꽃왕관처럼 활활 타오른다. 인디언추장 깃털머리의 후투티 새 같다. 언뜻 보면 사이클 선수의 붉은 모자 같기도 하다.

 


 꽃무릇은 왜 절집에 많을까? 그것은 독성이 있는 알뿌리 때문이다. 절집에선 풀을 쑬 때 꽃무릇 알뿌리를 갈아 섞는다. 그 풀은 탱화를 그릴 때 천에 바르거나, 불경을 묶을 때 접착제로 쓴다. 그렇게 하면 좀이 슬거나 벌레가 꾀지 않아 오래간다. 천연 방부제인 셈이다.


새벽안개 아슴아슴, 촉촉한 붉은 꽃잎 아득하여라

 선운사 꽃무릇은 도솔천을 따라 있다. 도솔천은 미륵보살이 사는 불국정토. 도솔천 머리에는 도솔암이 있고, 그곳 절벽엔 마애불상(보물 제1200호)이 있다. 가로 16.8m. 동학농민전쟁 때 손화중 장군(1861∼1895)이 배꼽에서 비결(秘訣)을 꺼냈다는 바로 그 불상이다. 하지만 구멍 흔적은 배꼽이 아니라 명치 끝에 있다. 손화중은 그곳에서 비결을 꺼낸 뒤 “후천개벽의 시대가 왔으며, 머지않아 미륵이 내려와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꽃무릇 산책길은 보통 관리사무소∼선운사∼장사송∼도솔암∼마애불상∼용문굴∼낙조대∼천마봉(386m)까지 이어진다. 4.7km 거리. 느릿느릿 걸어도 왕복 4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영광 불갑사에서 함평 용천사에 이르는 코스도 3시간이면 가능하다.


 유칠선(48) 선운사 문화관광 해설사는 “꽃무릇은 9월 말까지가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꽃은 새벽안개가 아슴아슴 피어오를 때 보는 게 으뜸이다. 붉은 꽃잎들이 이슬을 먹어 촉촉할 때 보면 한순간 정신이 아득해진다. 또한 사람들이 많지 않아 호젓하게 볼 수 있다. 낮엔 도솔천 물에 어린 붉은 꽃을 그윽하게 감상하는 게 일품이다”라고 말했다.

 

 

 

 

 선운사 도솔천은 한 해 세 번 붉게 물든다. 4월엔 핏빛 동백꽃 모가지가 툭툭 부러져 붉게 물들고, 9월엔 진홍 꽃무릇이 물속에서 활활 타올라 물들고, 10월엔 온 산이 화끈화끈 발그레한 단풍에 물든다.


 고은 시인은 말한다. ‘갈보도 좋아하네/꽃 좀 봐//열네 살/선희도 좋아하네/꽃 좀 봐(‘3월 30일’ 전문)’. 3월 봄꽃은 ‘어느 시러베 꽃’이라도 다 예쁘다. 하지만 가을꽃은 슬프다. 붉은 꽃은 더욱 그렇다. 숯불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목젖 같다.


 꽃무릇은 향기가 거의 없다. 그래도 암갈색 부처나비가 찾아든다. 붉은 면류관 위를 난다. 나비는 날아다니는 꽃이다. 꽃은 가부좌 틀고 있는 나비다. 이제 꽃도 나비도 동안거(冬安居)가 머지않았다.

 

 

 


상사화와 꽃무릇
 상사화와 꽃무릇은 잎과 꽃이 따로 핀다는 점에서 같다. 둘 다 수선화과의 알뿌리 식물이라는 점에서도 같다. 하지만 상사화는 봄에 잎이 돋았다가 진 후, 여름에 꽃이 핀다. 꽃무릇은 9월 중순께 꽃이 먼저 피었다가 시든 후에 비로소 잎이 돋는다. 꽃 색깔과 모양도 다르다. 상사화는 희거나 분홍 혹은 노란색 계통이지만 꽃무릇은 붉은색이다.

 

 

 

 

▲ 영상취재 : 동아일보 특집팀 조성하 기자


 상사화는 붉노랑상사화, 진노랑상사화, 위도상사화, 제주도상사화 등 여러 종류가 있으며 꽃 색깔과 꽃피는 시기가 약간씩 다르다. 하지만 꽃무릇이 필 때는 이미 모든 종류의 상사화는 이미 꽃이 진 이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