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황교익의 味食生活_29

醉月 2012. 9. 9. 08:37
양념 밴 33조각 입에 달라붙었다

안동찜닭

안동찜닭은 생닭을 쓴다. 그래서 그 맛이 빈다. 이를 극복하려고 닭 한 마리를 33조각으로 잘게 나눠 맛을 풍성하게 한다.  

 

1990년대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경북 안동에서 비롯한 한 음식이 전국 외식시장을 강타한 적이 있다. 안동찜닭이다. 매스컴에 자주 나온다 싶더니 순식간에 떴다. 한두 집이 대박을 치자 프랜차이즈 업자들이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렇게 하여 1~2년 사이에 젊은이가 붐비는 곳이면 어디서든 안동찜닭집을 볼 수 있었다.

 

그때 대충 기록해둔 안동찜닭집 브랜드는 이랬다. 봉추찜닭, 이귀남 원조 안동찜닭, 고수찜닭, 고추찜닭, 다래 안동찜닭, 찜닭 영계소문, 찜닭웰, 김대감 찜닭, 다기야, 단가마, 신안동찜닭, 당추찜닭, 안동 참찜닭, 하회 안동찜닭, 원조 안동찜닭, 안동 봉황찜닭, 와룡 안동찜닭, 와룡 봉추찜닭, 왕추찜닭, 안동 민속 찜닭, 닷컴찜닭. 참 많았다. 그러나 안동찜닭 붐은 오래가지 못했다. 순식간에 번진 그 정도의 속도로 순식간에 외식시장에서 사라졌다. 독자 여러분도 “그때 그랬나?” 싶을 것이다.

 

안동에서도 안동찜닭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었다. 1990년대 말 안동시청 위생계 관계자에게서 취재한 내용은 이랬다.

“예전부터 해먹던 음식은 아닙니다. 닭집 골목이야 예전부터 있었고요. 1980년대 중반쯤 찜닭을 하는 집이 생겼습니다. 누가 원조인지는 모릅니다.”

안동 구시장 내 찜닭집 주인들의 증언도 이와 비슷하다. 한때 자기 이름으로 안동찜닭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법 크게 벌였던 이귀남 씨는 자신이 원조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1990년대 말 그가 한 말이다.

“남편 도박 탓에 가정 경제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시장 안에 있는 조카 집을 빌려 생닭과 튀김닭을 팔았는데 집세도 못 낼 만큼 장사가 안 됐죠. 가게 이름은 매일통닭이었습니다. 학교 선생님인 듯한 분들이 단골이었는데 닭을 찌개처럼 끓여달라는 주문을 자주 했어요. 처음엔 고춧가루 넣고 찌개를 하다가 이 손님들의 요구에 따라 채소가 들어가고 감자와 당면도 넣기 시작했죠. 그러다가 차츰 지금의 안동찜닭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후로 손님이 늘어 하루에 80~100마리씩 팔았고 주변에도 이 음식이 번져나갔습니다.”

1980년대 중반 안동 구시장 찜닭집 골목에서 개발돼 10년 정도 그 자리에 머물다 외식 프랜차이즈 업자들에 의해 순식간에 외지로 퍼져나간 것이다.

 

외식 시장에서 한순간에 번지는 아이템은 생명력이 길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다. 닭고기 소재 아이템이 특히 그러한데, 창업비용이 적게 들어 진입장벽이 낮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이런 아이템은 유행이다 싶으면 너도나도 매달리고, 얼마 가지 않아 사업자와 소비자 모두가 ‘피로’를 느끼고 관심을 거둬버리고 마는 것이다. 외지에서는 그렇게 사라졌지만 안동찜닭의 발상지인 안동 구시장 골목에는 여전히 많은 찜닭집이 있다.

 

2001년 안동찜닭 맛에 대해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안동찜닭 맛은 단순하다. 양념이 전혀 되지 않은 생닭을 살짝 익혀 소스에 버무려 음식을 하며, 그 소스라는 것도 간장 맛과 단맛, 매운맛의 조화만 있을 뿐 뒤에 숨은 맛이 없다. 이런 음식은 금방 싫증을 느끼게 돼 있다. 안동찜닭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최근 안동 구시장에 가서 찜닭을 먹었다. 찜닭집 사람들도 필자가 지적한 찜닭 맛의 한계를 알아차렸는지 조리법을 개량했다. 닭을 더 잘게 나누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통닭이나 닭볶음탕은 닭 한 마리를 26~27조각으로 나누는데, 찜닭은 33조각으로 나눈다. 닭고기에 양념을 더 많이 배게 하기 위해서다. 또 닭을 이렇게 잘게 나누면 닭뼈가 더 많이 노출돼 조리 과정에서 골즙을 풍부하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찜닭 맛이 한결 좋아졌다. 그렇다고 다시 외지에 나갈 생각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안동찜닭이니 안동에만 있어도 괜찮은 일이다.

 

 

살살 녹는 민어회? 진짜 못 말린다

민어

수족관에서 억지로 활어 상태를 유지하다 죽은 민어다. 살아 있을 때 피를 빼지 않아 이 민어의 살은 붉고 잡내가 날 수 있다.

 

여름, 민어 철이다. 최근 민어에 대해 묘한 말이 퍼져 있다. 복날에 상것들은 개고기를, 양반들은 민어를 먹었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민어가 서울 양반들의 복달임 음식이라는 소문이 났는데, 그 말이 확장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근거 없는 말이다.

민어, 옛날에는 흔했다. 서해에서 무지 잡혔다. 지금은 주로 전남 해안에 어장이 형성되지만 옛날에는 인천 앞바다에서도 많이 잡혔다. 민어 파시가 전남의 특정 앞바다에서만 형성되는 듯이 말하는데 인천 앞바다의 민어 파시도 아주 컸다. 민어는 흔해서 가격이 쌌고, 그러니 예부터 서울 사람들은 양반, 상것 가리지 않고 여름이면 민어를 먹었다.

 

근래 들어 민어가 서울 양반들이 먹던 것이라는 말이 번진 데는 비싼 가격이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민어, 서민이 먹기에는 분명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복날 비싼 민어 한 점 먹으면서 양반이고 싶다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런 생각 자체가 상것들이나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민어 먹는 ‘양반’이 많아져서인지 근래에는 민어를 두고 별스러운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민어를 수족관에서 살려뒀다가 이를 잡는 즉시 회로 먹는 것이다. 이른바 활민어회다. 이게 과연 맛있을까.

 

1800년대 말에 나온 책 ‘시의전서’에 민어회 조리법이 나와 있다.

“민어 껍질을 벗겨 살을 얇게 저며서 살결대로 가늘게 썰어 기름을 발라 접시에 담고 겨자와 고추장을 식성대로 쓴다.”

‘시의전서’는 발견 지역이 경북 내륙이며 책 내용에도 경상도 사투리가 나온다. 그러니까 영남 내륙 지방 사대부가의 요리책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민어는 남부 해안에서도 잡히니 남해, 아니면 민어가 많이 나는 서해에서 영남 내륙까지 운송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냉장시설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민어를 산 채로 유지하는 시설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자동차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민어를 회로 쳐서 먹을 만한 상태로 어찌 운송했을까.

 

모든 생선이 그렇듯 민어는 죽으면 금방 썩는다. 요즘 같은 여름 날씨면 두 시간도 안 돼 냄새를 풍기기 시작할 것이다. 이를 썩지 않게 하려면, 피를 빼고 내장과 아가미를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바닷물로 씻어 말리거나 살짝 소금을 뿌려 그늘지고 바람 좋은 곳에서 말려야 한다. 필자 짐작에 ‘시의전서’ 속 민어는 이렇게 말린 상태의 민어였을 것이다. 그래야만 영남 내륙으로 운송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린다 해도 한 보름 정도는 민어 속살이 약간 촉촉한 상태로 유지된다. 이를 회로 쳐서 먹었던 것이다. ‘시의전서’에 “살을 얇게 저며서 살결대로 가늘게 썰어” 하는 구절이 있다. 민어는 살이 무른 편인데 얇게 저미고 이를 다시 가늘게 썬다는 것이 특이해 보이지 않는가. 촉촉한 상태를 넘어 꾸덕꾸덕한 살을 발라 먹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말리는 과정에서 민어는 숙성됐을 것인데, 그러니까 조상들은 ‘자연 숙성 민어회’를 먹었다고 할 수 있겠다.

 

생선은 잡은 후 일정 시간 숙성해야 감칠맛이 살고 조직감도 좋아진다. 덩치가 큰 민어는 어민들의 말에 따르면, 사흘 정도는 숙성해야 진미가 난다고 한다. 일주일 숙성한 것이 가장 맛있다는 말도 있다. 요즘 서울의 일부 양반입네 하는 사람들은 이 민어를 활어로 회를 쳐서 먹는다니, 1800년대 말 조선시대 사람들보다 못한 민어회를 먹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짜~잔 하고 등장

진주냉면 탄생기

 

진주 밀면이다. ‘개발된’ 진주냉면에 올리는 육전이 여기에도 올라 있다. 진주와 그 인근 지역에서는 으레 국수에 육전을 올린다. 국수 위 육전은 전통적이라 할 만하다.

 

진주냉면을 낸다는 식당이 제법 생겼다. 평양냉면, 함흥냉면과 더불어 조선 3대 냉면이었다는 말도 돈다. 한국인 대부분은 냉면을 북녘 음식이라 여기는데, 남녘 중에서도 아주 먼 남쪽에 있는 한 도시의 냉면이 예부터 유명했다 하니 부쩍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사실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도 먼 조선시대부터 유명했던 것은 아니다. 그땐 냉면을 파는 식당조차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서야 평양냉면이 맛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함흥에도 그 시절 냉면집이 있기는 했으나 함흥냉면이라는 고유명사를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다 6·25 전쟁 이후 남녘 땅에서 함흥냉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먼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천한 한국 외식문화 역사에서 그 정도만으로도 전통이 깊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진주냉면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진주에 냉면집이 있기는 했지만 누구도 진주의 어떤 냉면을 두고 진주냉면이라 부른 적은 없었다. 진주냉면의 탄생 스토리는 이렇다.

 

2000년대 초 한 음식 연구가가 진주에 나타났다. 그는 진주 사람들에게 이때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진주냉면이란 것이 있었는데, 평양냉면만큼 유명했다. 그 내용이 북한 과학백과사전에 실려 있다.”

진주의 음식문화 관련 인사들은 이 말에 솔깃했다. 그 유명한 평양냉면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진주냉면이 자신이 사는 지역에 있었다 하니 무척 고무됐을 것이다.

 

그들은 북한에서 말한 그 진주냉면의 흔적을 찾기로 했다. 그러나 어떤 냉면을 진주냉면이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진주냉면 조리법이 나와 있는 문헌도 없었다. 그렇다고 진주냉면이라는 이름을 덜렁 내버려둘 수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진주냉면을 개발하기로 했다. 평양냉면은 쇠고기 국물을 기본으로 하니 이와 차별화하면서도 진주라는 지역 특징을 살릴 수 있는 해물육수를 기획했다. 멸치, 새우, 문어 등으로 국물을 내어 식힌 뒤 메밀국수를 말았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진주와 그 근처 도시에서는 냉면 또는 밀면 등에 육전을 올리는데 진주냉면에도 이 육전을 올리기로 했다. 그렇게 하여 진주냉면을 복원했다 하고는 외부에 알렸다.

 

진주냉면 개발 이후 문제가 생겼다. 그 조리법대로 냉면을 내는 식당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 개발한 음식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이름으로 냉면을 내는 식당을 섭외해 그 조리법을 알려주고 진주냉면이라 간판을 달자고 설득했다. 간판 비용은 물론 그 식당에서 낸 것은 아니다. 개발된 진주냉면 조리법을 전수했으나 조리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육수 내는 방법이 중간에 바뀌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내 여러 매체가 대대적으로 진주냉면을 보도했는데, 중간에 바뀐 그 조리법이 오히려 특징적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 묘한 조리법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하여 아주 잠깐 만에 진주냉면은 한반도를 대표하는 냉면으로 자리를 굳혔다.

 

진주에서 느낀 것인데, 처음 ‘진주냉면 발굴 또는 조작 작업’에 나서게 한 북한의 그 책을 진주 사람들은 마치 신비의 서적이나 되는 듯 여기는 게 아닌가 싶었다. 북한 서적이니 쉽게 구할 수 없으리라는 착각에 더해 평양냉면을 문화자산으로 가진 북한이 내놓은 과학백과사전이라고 하니 그 책 내용에 신비의 권위를 입힌 것이다.

진주냉면이 거론돼 있다는 그 책은 1994년 북한에서 낸 ‘조선의 민속전통’이다. 한민족의 전통문화를 총 7권으로 엮은 책이다. 제1권이 식생활 풍습인데, 그 책에 딱 한 줄 이런 구절이 있다.

“랭면 가운데서 제일로 일러주는 것이 평양랭면과 진주랭면이었다.”

이 문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