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한 한문학자가 본 ‘先人들의 자서전’

醉月 2010. 6. 2. 07:53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누구인가

“전(傳)이란 전해 주는 것이니, 완연히 그 사람이어서 천명 만명과는 다름을 알게 하여야, 천애의 곳이나 아득한 세월 뒤에도 사람마다 나를 만나게 할 수 있으리라.”(이덕무)

沈慶昊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 1955년 출생.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日교토대 문학박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조교수, 同 기획조정실장, 강원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역임.
    現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 저서: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김시습평전> <간찰-선비의 마음을 읽다> <한시기행>
    <내면기행> <한학입문> <자기 책 몰래 고치는 사람> 등.

 

<<나는 어떤 사람인가>.>

<아아, 돌아가신 어머니는 계유년(1693), 갑술년(1694), 무인년(1698)에 세 왕자를 낳으셨는데, 내가 그 가운데다. 사랑해 주시고 보호해 주신 것이 어찌 심상한 정도에 견주겠는가. 아아, 무술년(1718)에 돌아가신 이후 56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추존(追尊)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미적거리고 있으니 어찌 효(孝)라 하겠는가?
 
  아아, 아바마마께서 서거하신 경자년(1720) 이후 우러르고 의지하는 바는 오로지 나의 자성(慈聖·숙종의 계비 인원왕후)이었으니, 9세부터 받들어 모셔서 64년간 즐거워하시는 뜻을 받들었다. 정축년(1757) 이후 17년 동안 나는 어둑하고 어둑한 상태였거늘, 금년에 80의 나이에 이르러서 두 달 사이에 간담이 모두 떨어지는 일을 만나고 보니, 정말 뒷말을 차마 다 하지 못하겠다. 하늘을 향해 부르려고 하지만 높디높고, 하늘에 대고 호소하고 싶지만 막막하기만 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땅을 굽어보기만 할 따름이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이 글은 조선 제21대 군주인 영조(英祖)가 만년(晩年)에 지은 자서전(自敍傳)인 <어제자성옹자서>(御製自醒翁自敍)의 일부다.
 
  주지하다시피 영조의 생모(生母) 최씨는 조선 역사에서 유일하게 무수리 출신으로 후궁(後宮)에 올랐던 분이다. 숙종의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와 친분이 두터워, 장희빈이 득세했을 때는 고통을 겪다가 1694년의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평상을 되찾았다. 하지만 49세 되던 1718년에 병으로 죽었다. 그 6년 뒤 왕위에 오른 영조는 어머니에게 높은 이름을 올려드리고 싶었지만 당장에 추존을 하지는 못했다. 숙빈 최씨가 세상을 뜬 지 26년 만인 1744년 7월에 비로소 어머니 묘에 소령(昭寧)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렸다.
 
  <어제자성옹자서>에서 영조는 생모에게 다섯 번에 걸쳐 존호(尊號)를 올린 사실을 먼저 적고서도, “56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추존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미적거리고 있으니 어찌 효라 하겠는가?”라고 후회하고, 효성을 다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라고 통렬하게 꾸짖었다.
 
  영조는 이 글만이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보는 자서전적인 시문을 상당히 많이 지었다. 1770년과 1773년에는 같은 이름의 <어제자성옹자서>를 각각 달리 작성하고, 그것들을 단행본으로 인쇄하여 배포했으며, 그것을 문신(文臣)들에게 읽게 했다.
 
 
  권력의 질곡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영조
  英祖의 御眞.
  이 글에서 영조는 자신의 호를 육오거사(六吾居士)라고 했다. 권필(權?)이 사오(四吾)를 일컫고 남용익(南龍翼)이 십오(十吾)를 일컬었던 것을 참작하되 자신은 ‘여섯’을 칭한다고 한 것이다.
 
  영조가 언급한 권필은 “나의 밭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나의 샘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며, 나의 천성을 지키고, 나의 연수를 마친다”는 뜻에서 사오(四吾)라는 당호를 썼다. 남용익은 나의 밭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나의 샘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며, 나의 집 서까래를 맺고, 나의 밭두둑에 의지하며, 나의 시편을 읊고, 나의 거문고를 타며, 나의 현묘한 도(道)를 지키고, 나의 잠을 편안히 자며, 나의 천성을 즐기고, 나의 연수를 마친다는 뜻에서 십오(十吾)라는 당호를 썼다. 그런데 영조는 나의 밭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나의 샘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며, 나의 책을 보고, 나의 잠을 편안히 자며, 나의 본분을 지키고, 나의 연수를 즐기겠다는 뜻에서 육오(六吾)라고 한 것이다.
 
  만인의 위에 군림하는 제왕(帝王)이라 해도 한 사람의 인간이다. 인간으로서의 영조는 삶을 돌이켜보면서 후회할 일을 곱씹어 보고, 또 권력의 질곡(桎梏)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뜻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심리와 지향을 영조는 자서전에 남긴 것이다.
 
 
 

자서전이란 무엇인가
    19세기 초의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는 자서전인 <에고티즘의 회상> 제1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기 자신을 모른다. 그래서 한밤에 그 점을 생각하면 때때로 마음이 괴로워진다. 나는 선한 사람일까, 악한 사람일까? 재능 있는 사람일까, 어리석은 자일까?”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누구인가, 되묻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기 삶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기획이다. 그리고 그 기획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문학 장르가 자서전이다.
 
  자서전은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적은 것을 말한다. 굳이 정의하자면,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생 가운데 일정한 기간을 단위로 삼아 자기가 겪은 일들을 서술해서 자신의 삶의 궤적을 고백하고 자신의 인성 형성의 과정을 성찰하는 시와 산문을 말한다. 자기 삶의 궤적을 고백하고 자기 인성의 형성 과정을 성찰한다고 할 때, 고백과 성찰의 대상이 되는 기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기까지의 전 생애를 포괄할 필요는 없다.
 
  서구(西歐)에서 자서전은 18세기 후반, 19세기 전반에 이르러 널리 나타났다. 하지만 한자문화권에서는 자서전이란 말의 근원에 해당하는 ‘자전(自傳)’이란 용어가 중당(中唐)의 시기인 9세기에 이미 널리 사용되었다. 바로 그 시기에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자문화권에서 자기 삶을 고백하고 인성(人性)을 성찰하는 글쓰기는, 당나라보다도 더 소급하여 한(漢)나라 때 출현했다. 곧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 ‘자서(自序)’를 적으면서 단순히 자기 책의 구성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그 책의 집필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지난 인생을 개괄했다.
 
  그 이후 당나라에 이르러 자전(自傳)·자지(自誌)·자표(自表) 등의 명칭으로 스스로의 일생을 개괄하는 문체가 독립 양식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서적의 서발문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서술한다는 의미의 자서(自敍)라는 문체도 발달했다.
    
  전형적 인물에 맞추어 자신을 인식
 
  산문(散文)이 아니라 운문(韻文)의 형식으로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인성을 성찰하는 방식은 더 일찍 나타났다. 이미 굴원(屈原)의 <이소>(離騷)가 자서전적 시로서 높은 문학성을 지녔다. 진(晉)나라의 도연명(陶淵明)과 송(宋)나라의 진소유(秦少游)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만장(輓章)을 지어 자기 삶을 개괄했다.
 
  이렇게 해서 한자문화권의 지식인들은 삶을 고백하고 인성을 성찰할 때, 자전 이외에도 탁전(托傳)·자서·자술(自述) 등 생애의 사실을 주로 기록하는 문체뿐만 아니라, 자지·자명(自銘)·자만(自挽·自輓) 등 스스로의 죽음을 예상하고 자신의 생애를 평가하는 문체까지 두루 이용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자서전적인 시와 산문은 고백과 성찰의 주요한 계보를 이루어 왔다. 나는 2004년부터 이러한 양식의 시문들을 대상으로 근대 이전의 ‘주체’에 관해 탐색하려고 계획하여, 2008년에는 상당한 분량의 원고를 이루었다. 2009년에 이르러 ‘죽음’을 다룬 글들만 독립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내면기행 : 선인들, 스스로 묘비명을 쓰다>(이가서, 2009)를 엮어 출판했다. 그리고 이번에 자서전적 시문들만을 묶어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 선인들의 자서전>(이가서, 2010)이라는 책을 냈다.
 
  선인들이 활용한 자서전적 양식은 오늘날의 자유로운 산문과는 달라서, 삶의 특정한 국면을 해부적으로 바라보는 자유와 자율을 앗아갔다. 글쓰기의 도구와 책략은 역사적 제약을 좀처럼 쉽게 뛰어넘을 수 없었다. 더구나 한자문화권의 지식인들은 기성(旣成)의 인물을 전형(典型)으로 설정하고 그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인식하고 형상화하는 방식을 즐겼다. 자기 자신이 형성되어 나온 과정을 세세하게 추적하기보다는 형성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과거의 전형과 비교하면서 서술하거나,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상정한 삶을 서술하는 일이 더 많았다.
 
  그렇다고 우리 선인들이 개별자의 삶을 전형의 틀에 부합시키는 것으로 만족한 것만은 아니다. 전형을 통해 보편적 윤곽을 그려내야 한다는 문화적 관습과 함께, 자기 삶을 고백하고 인성을 성찰해야 한다는 개별화의 요구가 동시에 작용하여, 그 두 축의 긴장 속에서 자서전적 시문이 이루어진 것이다. 
    
  물소 이마에 칼날 같은 눈썹
  청나라 화가 나빙이 그린 박제가의 초상.
  정조(正祖) 연간의 문인 박제가(朴齊家·1750~1805)는 26세 되던 1776년에 지은 자서전에서 스스로의 외모가 ‘물소 이마에 칼날 같은 눈썹을 하고 눈동자는 검고 귀는 희다’고 적었다. <소전>(小傳)이라는 제목의 그 글을 보면, 몸이 다부지고 눈빛이 강렬한 젊은이의 모습이 되살아날 듯하다.
 
  <조선이 개국한 지 384년, 압록강에서 동쪽으로 1000여 리 떨어진 곳이 그가 태어난 곳이다. 신라의 옛 땅 출신으로 밀양을 관향(貫鄕)으로 하는 집안이 그가 태어난 가계다. <대학>(大學)에서 제가(齊家, 집안을 가지런히 함)를 강조하는 본뜻을 취하여 제가라고 이름을 지었고, ‘이소(離騷)’라는 초(楚)나라 노래에 뜻을 가탁하여 초정(楚亭)이라고 호를 지었다.
 
  그는 물소 이마에 칼날 같은 눈썹을 하고 있으며, 눈동자는 검푸르고 귀는 하얗다. 홀로 우뚝한데다가 고매한 사람만 골라서 친밀하게 사귀고, 번잡하고 화려한 상황은 멀리서 보기만 해도 더욱 멀리했다. 그러므로 세상과 뜻 맞는 일이 거의 없어서 늘 가난했다.
 
  어려서는 글귀를 아로새기는 문장가의 말글을 배웠다. 자라서는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제도할 수 있는 학문을 좋아해서, 서너 달 동안 집에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 사람 가운데는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
 
  그래서 고명한 분이 남긴 서적을 마음으로 즐겨 세간의 잡무는 떨어내버리고, 명분과 이치를 얽어 종합하여서 깊고 오묘한 도에 침잠했으며, 백 세대 이전의 인물을 옳다고 허여하고, 일만 리 너머 아득한 곳에서 활개 쳐서 비상했다. 구름과 안개가 이루어내는 색다른 모습을 관찰하고 갖가지 새들의 신기한 소리를 들어 알며, 멀리 떨어져 있는 산천과 일월성신, 극히 미세한 초목과 벌레·물고기·서리·이슬 등, 날마다 변화하여 어째서 그런지 알 수 없는 것들까지도 또렷하게 가슴 속에 터득했다.
 
  다만 언어로는 그 실정을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고 입과 혀로는 그 맛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기에, 혼자서 터득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세상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
 
  아아, 몸뚱이는 남아도 영구히 흘러가는 것이 정신이다. 뼈는 썩어도 영원히 남는 것이 마음이다. 그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아마도 생사와 이름을 초월한 곳에서 그 사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찬(贊)은 이러하다.
 
  죽간(竹簡)과 비단에 기록하고 단청으로 모사해도 
   세월이 도도하여 그 사람은 멀어지는 법
   하물며 본래의 정화(精華)를 버리고
   남들과 똑같은 진부한 말을 주워 서술한다면 
   어찌 그 사람을 불후하게 하랴 
   전(傳)이란 전해 주는 것이니
   조예를 극도로 드러내거나 인품을 곡진히 드러낼 수 없다 해도 
   완연히 그 사람이어서 천명 만명과는 다름을 알게 하여야 
   천애의 곳이나 아득한 세월 뒤에도
   사람마다 나를 만나게 할 수 있으리라.>
 
  박제가는 규장각(奎章閣) 검서관(檢書官)으로 활약하고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나서 당대 명사들과 두루 교유했지만, 서얼(庶孼) 출신이어서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는 없었다. 그는 몸뚱이나 뼈보다, 영구히 흘러가는 정신과 영원히 남을 마음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소전>을 지어, 생사와 이름을 초월한 곳에서 자기를 알아줄 사람을 만나고자 했다. 
    
  ‘경원 선생은 조선의 미친 선비다’
 
  중인(中人) 출신의 문인 조수삼(趙秀三·1762~1849)은 풍채가 아름다워 신선의 기골이 있었으나, 신분상 좌절을 겪어야 했다. 그는 “경원(經?) 선생은 조선의 미친 선비다”로 시작하는 <경원선생자전>(經?先生自傳)을 남겼다.
 
  ‘미쳤다’는 것은 뜻은 크지만 실행을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광견(狂)이나 광간(狂簡)의 준말이다. 광견 혹은 광간의 인물은 군자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해도 덕을 해치는 향원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조수삼은 자기 자신이 중도의 인물은 아니지만, 자신의 뜻을 그대로 밀고 나아가는 광사라고 말한 것이다.
 
  승려나 귀화인도 자서전을 남겼다. 조선 후기의 승려 연담유일(蓮潭有一·1720~1799)은 78세 때인 1798년에 <자보행업>(自譜行業)을 지었다. ‘문도(門徒)들이 누가 먼저 입문했고 전체 문도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도록 이 <자보>를 적는다’고 했지만, 연담은 이 <자보행업>을 통해서 수행정진의 한 모델을 제시해서 불교계의 자성을 촉구하려고 한 듯하다.
 
  귀화인인 천만리(千萬里·?~1597)도 자서전을 남겼다. 그는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 군사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화산군에 봉해지고 그대로 정착했다. 그는 <사암자서>(思庵自敍)를 지어, 후손들에게 자신이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졌던 사실을 잊지 말고 자신의 증조부 이하의 사적을 기억하라고 당부했다. 향화인(向化人·여진이나 일본 출신 귀화인)과 황조인(皇朝人·명나라 출신 귀화인)도 우리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되기에, 그에 대한 연구는 과제로 남아 있다.
 
  자서전을 가장 많이 남긴 사람들은 사대부(士大夫) 지식인 계층이다. 조선조의 사대부 지식인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나는 과연 가문의 영광과 선조의 덕행을 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스스로 되물어보고, 스스로를 반성했다. 
    
  김정국의 ‘8가지 남음’
  이서구.
  1530년 섣달그믐, 51세 되던 이자(李?·1480~1533)는 스스로의 삶에 대해 서술한 대장편의 <자서>를 지어, 자신이 가문의 영광과 선조의 덕행을 실추시키지는 않았는지 되물었다. 이자는 한산(韓山) 이씨 명문가의 이곡(李穀)·이색(李穡)의 후손이다. 이자는 <자서>의 서두에서 자신의 가계(家系)를 서술하여 청환(淸宦·맑은 벼슬)의 가문임을 자부했다. 그러면서 그 자신은 “한 세상을 그렁저렁 보내고 하루하루를 허랑하게 보냈다”고 자책했다.
 
  1519년 기묘사화로 삭탈관직된 김정국(金正國·1485~1541)은 고양(高陽) 망동(芒洞)에서 <팔여거사자서>(八餘居士自序)를 지었다. 그는 35세 때인 1519년 11월, 황해도관찰사로서 해주목사를 겸하게 되었으나, 겨울의 기묘사화 때 고신(告身·직첩)을 빼앗기자, 망동에 은거하면서 ‘팔여거사’라 자호(自號)하고 내면의 덕을 길러나갔다. 그가 말한 남아도는 여덟 가지란 물질을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소유하게 되는 참된 즐거움이다. 팔여(八餘)란 무엇 무엇인가?
 
  <토란국과 보리밥으로 배불리 먹음에 남음이 있다. 
    부들자리와 온돌로 자리 누움에 남음이 있다. 
    솟는 못과 맑은 샘으로 마심에 남음이 있다.
 
  시렁에 가득한 서적들로 보기에 남음이 있다. 
   봄날의 꽃과 가을의 달로 감상에 남음이 있다. 
   새들의 말과 소나무 숲의 소리로 들음에 남음이 있다. 
   눈 덮인 매화와 서리 내린 국화로 향내 맡음에 남음이 있다. 
   이 일곱 가지 남음으로 즐거움에 남음이 있다.>
 
  팔여를 하나하나 꼽으면서 평안을 얻는 방법은 좋은 안분법(安分法)이라고 할 수 있다.
 
  광해군~인조 때의 명신 신흠(申欽·1566~1628)은 호를 현옹(玄翁), 당호를 현헌(玄軒)이라 했다. 그는 <현옹자서>(玄翁自敍)를 지어, “조화의 큰 길을 가겠다”는 큰 뜻을 말했다. 신흠은 선조 말과 광해군 초에 주요 직책을 두루 거쳤다. 하지만 1613년(광해군 5)의 계축옥사 때,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 하여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후 김포에서 생활하다가 1616년의 인목대비 폐위 이후 춘천에 유배되었다. 본래 <주역>의 상수학에 통했던 그는, <현옹자서>에서 “삶을 대관(大觀)하고,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기보다는 재주나 학식을 감추려고 한다”는 뜻을 밝혔다.
 
  황윤석(黃胤錫·1729~1791)은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으로, 노론의 석실서원 학맥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787년에 <자서설>(自敍說)을 지어, 어려서 과거시험과는 관계없는 다양한 방면의 공부를 하려고 애썼던 일, 어지럼증과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고투한 일을 또 밝혔다. 만년에 눈이 흐려져서 부친의 행장조차 완료하지 못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 일도 적어두었다. 깊은 연민과 공감을 느끼게 하는 글이다.
 
  영남 남인의 석학인 정종로(鄭宗魯·1738~1816)는 <무적공자서>(無適公自敍)를 지어, 자신의 호인 무적옹에 대해 풀이하면서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무적’이란 ‘어디고 갈 곳이 없다’ ‘쓸모가 없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정의 어디에도 적합하지 않기에 별도의 곳인 향촌에서 적합함이 있다는 뜻으로 자기 호의 ‘무적’이란 말을 새롭게 해석했다. 별호(別號)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그렇게 새로 재정한 별호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조선 정조, 순조 연간의 학자이자 명문장가인 이서구(李書九·1754~1825)는 장편의 <강산자술>(薑山自述)을 남겼다. 모두 36장에 달하는 필사본이다. 이서구는 생년인 1754년부터 집필 시점인 1806년까지의 이력을 편년(編年) 형식으로 서술하되, 모두 15개 조목으로 나누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평소 마음공부를 하지 않았고 재앙을 당해서는 마음이 황망하기만 해서 두서없이 이력을 서술했다고 겸손한 뜻을 밝혔다. 또한 기록한 바가 시휘(時諱)에 저촉되는 바가 많으므로 30~50년이 지난 뒤에나 남에게 보일 만하다고도 했다. 
    
  托傳 - 가공의 인물 통해 자신의 삶 서술
 
  자서전 가운데는 가공(架空)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 주인공의 삶을 서술하는 것처럼 하면서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있다. 이것을 탁전(托傳)이라고 한다. 탁전은 소설의 한 양식으로 취급되기도 하지만, 대개 작가가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현재의 삶을 기획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자서전의 한 부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25세 때인 1192년에 <백운거사전>(白雲居士傳)을 지어 자기 이야기를 백운거사의 일로 가탁했다. 이규보는 국문학 사상 가장 방대한 규모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남기고, 민족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과 가전체(假傳體) 산문 <국선생전>(麴先生傳)으로도 유명하다.
 
  이규보는 1189년의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예부시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했으나 한동안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바로 이 시기에 그는 <백운거사전>을 지었다. 생활은 어려웠지만 이 무렵의 그는 창작 욕구가 왕성해 장편의 시와 참신한 산문을 많이 지었다. 거사는 특정한 사찰에 예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불법(佛法)을 닦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규보는 반드시 불교를 믿어서 거사를 자칭한 것이 아니라, “뜻이 본래 천지 바깥에 있으니, 하늘과 땅도 그를 얽매지 못하리라. 장차 원기(元氣)의 모체(母體)와 함께 무한한 공허(空虛)의 세계에 노닐리라”는 자유의 정신을 추구한다는 뜻에서 거사라고 자칭한 것이다.
 
  고려 말의 최해(崔瀣·1287~1340)는 충숙왕 10년인 1323년에 벼슬을 그만둔 뒤 경주 사자산(獅子山)에 은둔하여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을 지었다. 최해는 자기 성과 이름의 발음을 늘어뜨려 다른 이름을 만들어 예산농은을 가공의 인물처럼 꾸미고, 그 인물이 <열자>(列子)에 나오는 거인국인 용백국의 후손이라고 했다. 거인국 후손이라면 당연히 웅대한 뜻을 펴야 하거늘 뜻을 펴지 못한 존재임을 말하여, 자기 자신이 절의 밭을 빌려서 먹고사는 전호(佃戶)로 전락한 사실을 자조한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는 자족의 삶을 살자고 마음 고쳐먹고는 동산의 이름을 취족원(取足園)이라 했다. ‘취족’은 쓸 만큼만 취한다는 말이다.
    
  ‘책만 읽는 바보’ 자처했던 이덕무
 
  조선 전기의 문인 성현(成俔·1439~ 1504)은 <부휴자전>(浮休子傳)을 지어, 자신의 삶을 묘사하고 그 삶의 아이러니를 자조했다. 부휴자란, ‘부화(浮華)하고 쓸데없는 자’란 뜻이다. 성현은 66세로 죽기까지 세조·문종·성종·연산군 네 군주를 섬기면서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지만 중년의 삶은 평온하지 않았다. 41세 되던 1479년에 연산군 생모 윤씨를 폐하는 사건과 60세 되던 1498년에 선비들이 일망타진되는 무오사화(戊午士禍)를 거치면서 자기 삶을 자조적으로 바라보고 <부휴자전>을 지었다. 그는 자기 삶이 세간 명리(名利)를 추구하는 데는 우활(迂闊·사리에 어둡다는 뜻)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내적 자유를 추구하기에 결코 우활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덕무(李德懋·1741~1793)는 책만 읽는 바보라는 뜻의 간서치(看書痴)라는 자호로 유명하다. 그는 스스로를 간서치로 규정하고 <간서치전>을 지었다. 이덕무는 정종(定宗)의 서자 무림군의 후손이었다. 신분상의 제약과 집안의 환경 때문에 불우한 젊은 시절을 보냈으나, 종로 원각사탑 주변에서 여항의 문인들이나 박지원 등과 함께 백탑파를 형성하여 시문과 학문을 연마했다. 그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목멱산(남산) 아래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살았는데, 어눌하여 말을 잘 하지 못했으며, 성격이 졸렬하고 게을러 세간 사무를 알지 못하고, 바둑이나 장기는 더욱 알지 못했다. 남들이 욕을 해도 변명하지 않고 칭찬을 해도 자긍(自矜)하지 않으며, 오직 책 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아 추위나 더위나 배고픔을 전혀 알지 못했다.>
 
  간서치의 치(痴, 癡)란 바보라는 말이다. 진(晉)나라의 화가 고개지(顧愷之)에 대해서 사람들이 “치매(癡?)와 총혜(聰慧)가 절반씩 들어 있다(癡?各半)”고 평하면서 그를 치절(癡絶)이라고 불렀다는 고사가 있다. 치는 무언가에 골똘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간서치는 책 보는 데 정신을 팖으로써 세간의 명리를 돌보지 않는 고결한 태도를 지킨다는 뜻을 지니는 것이다. 
    
  안정복, “요긴하지도 않은 저술이 분량만 많다”
 
  조선 후기에 안산에 거처하면서 실학을 연구한 이익(李瀷·1681~1763)은 <동방일사전>(東方一士傳)이라는 탁전을 남겼다. 도연명의 <의고>(擬古) 제5수의 뜻을 차용하여 개결한 은둔자의 형상을 그려 보이고, 그로써 자신의 이상적인 삶을 가탁한 것이다. 곧, 도연명의 <의고>에 보면 “동방에 한 선비가 있으니 이름도 없고 성씨도 전하지 않아서, 어떤 인물인지 알 수가 없다”라고 했다. 이익은 그 시에 의거해서 도연명이 이상으로 생각한 인물을 상상 속에서 그려내어 자신이 그와 같이 되겠노라고 가만히 밝힌 것이다.
 
  성호학파를 이끈 안정복(安鼎福·1712~1791)도 경기도 광주의 영장산 아래 거처하면서 <영장산객전>(靈長山客傳)이라는 탁전을 지었다. 그 글은 “객은 광주(廣州) 사람으로, 성은 아무개요, 이름은 아무개요, 자는 아무개이다. 그 자를 근거로 거처하는 집에다 순(順)이라고 편액을 걸고, ‘천하의 일은 순리뿐이다’라고 했다”고 해서, 영장산객의 당호가 순암(順菴)임을 밝혔다.
 
  <영장산객전>에서 안정복은 자기 자신을 은사(隱士)의 유풍을 지닌 자로 부각시키고자 했고, 장성한 후에는 학문을 좋아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학문에 사우(師友)가 없어 마음 내키는 대로 온갖 서적을 두루 보았다”고 했으며, “26세에 <성리대전>을 얻어 읽어 보고서야 비로소 이 학문이 귀하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요긴하지도 않은 저술이 분량만 많다”고 자조적(自嘲的)인 말을 직설적으로 내뱉었다.
 
  근세의 조면호(趙冕鎬·1803~1887)는 탁전인 <자지자부지선생전>(自知自不知先生傳)을 남겼다. 스스로 도리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 자신은 잘 알고 있다는 뜻에서 ‘자지자부지’라는 호를 사용하고, 자기 삶을 반추(反芻)한 것이다. 그는 서실인 자지자부지서옥에 글도 적었다. 그 글은 “서옥은 세 칸이다. 밖에는 긴 나막신이 하나, 꾸미지 않은 짚신 하나가 있다”로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에 이른바 주인옹이라는 자가 있는데, 맥 놓고 편안한 자세로 백발을 드리우고 그 사이에서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늘 스스로 알지 못함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홀로 즐거워한다. 마땅히 집에 편액을 달기를 ‘자지자부지’라 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자지자부지선생전>의 뜻과 통한다. 
    
  詩로 자신의 삶 돌아본 이수광·고경명
 
  선인들은 시가의 형식으로 자서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특히 ‘술회’ 시는 지난 생애를 돌아보고 삶의 의미를 사색하며 장래의 지향을 밝히는 시 양식이다.
 
  <지봉유설>(芝峰類說)이라는 백과사전의 집필자로 유명한 이수광(李?光·1563~1628)은 장편시 <술회오백칠십언>(述懷五百七十言)으로 자신의 인생을 술회했다. 이수광은 1606년에 병을 얻어 안변부사의 직을 사임하고, 어떤 일인가에 연좌되어 금고(禁錮)를 입었다. 해를 넘긴 1607년에 그는 이 <술회> 시를 작성해서, 굴원처럼 현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홀로 깨어 있어야 하는 고독을 경험하기보다는 차라리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었던 완적처럼 달관의 자세를 지니겠노라고 했다.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유명한 고경명(高敬命·1533~1592)은 비교적 짧은 <자술> 시에서 자신의 가문과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는 명종 연간에 사간원과 예문관의 여러 직임을 맡았으나, 1563년 이조판서 이량(李樑)을 탄핵할 때 그 사실을 몰래 알려주었다는 이유로 전적으로 좌천되었다가 울산군수가 된 후 곧 파직되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19년 동안 은거해야 했다. 바로 이 시기에 <자술>을 지었기에, 신세가 초라하다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수광의 아들인 이민구(李敏求·1589~1670)는 <술회일백운>(述懷一百韻)을 지어, 기구한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다 못해 “하늘은 옥 관(棺)을 더디 내려보내네”라고 통곡했다. 하루빨리 죽고 싶다는 뜻에서 그런 것이다.
 
  이민구는 24세 때인 1612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된 이후 평탄한 관직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49세 때인 1636년의 병자호란 때 강도검찰부사로서 왕을 모시고 강화로 가다가 청(淸)나라 군사의 저지를 받았는데, 적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영흥의 철옹성에 유배되어 7년이나 그곳에서 지내야 했다. 그 고통의 시기에 이민구는 <술회일백운>을 지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싶다고 한 것이다. 
    
  “하늘이 나를 낳으신 것은 또한 어떤 뜻인가?”
 
  숙종 때의 명문장가 신유한(申維翰·1681~1752)은 신분상의 한계로 요직에 나가지 못하고 늘 뜻과 현실의 모순을 경험했다. 곧, 1713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한 다음 말단 관직을 역임했을 뿐 크게 현달하지 못했다. 1719년에 제술관이 되어 통신사 사절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뒤로도 지방관과 봉상시의 직을 전전하다가 벼슬길에서 물러나, 만년에는 가야산에 은거했다. 언젠가 <야성에서 객이 되어 있을 때 크나큰 수심에 마음이 꽉 막혔으므로 평소의 심경을 스스로 서술한 60운>(野城作客 牢愁鬱結 自敍平生 六十韻)을 적어,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고 불우한 현실을 서글퍼했다. 이 시에서 그는 자신은 유배객이 아니지만 어디 간들 유랑민일 따름이라고 서글퍼했다. 세상에서의 명성을 버리고 스스로 빛을 감추기로 했다고 자기 삶을 옹호하지만 행간에는 불평의 심기가 노출되어 있다.
 
  노론(老論)의 관료 조관빈(趙觀彬·1691~1757)은 장편의 <자술>을 지었다. 그는 선왕(先王)인 영조로부터 받은 은총을 회상하면서 그 은혜를 갚지 못한 아쉬움을 술회했다. 조관빈의 부친 조태채(趙泰采)는 영조를 세자로 추대하는 데 공을 세운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이다. 1721년과 1722년에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조태채는 화를 당하고, 조관빈은 연좌되어 흥양현으로 귀양 갔다. 이때 조관빈은 ‘자술’을 지어, 신임사화로 부친이 화를 당하고 자신도 연좌되어 귀양 온 일을 뼈아프게 생각했다. 심지어 “하늘이 나를 낳으신 것은 또한 어떤 뜻인가?”라고 반문했다.
 
  장혼(張混·1759~1828)은 중인 출신으로 우리나라 출판문화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인데,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지극한 바람을 적은 <자술>이라는 제목의 시를 남겼다. 이 시에서 그는, 인간세상에서 쓰이길 포기하고 쑥대문과 사립문을 친 작은 집에서 유유자적하겠노라고 했다. 세속의 구속을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거친 밥도 나날이 대지 못하는 가난 때문에, 물러나 편히 지내겠다고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우울한 사실도 함께 적었다. 장혼은 인왕산 옥류동 골짜기 동쪽에 이이엄(而已?)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호는 “허물어진 집 세 간뿐이다(破屋三間而已)”에서 따온 것이다.
 
  한편 선인들은 자전이나 탁전, 술회가 아니어도, 책의 서문이나 서찰, 심성 수양의 허구적 산문, 연작시 등의 방식으로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현재의 삶을 기획했다. 
    
  다양한 형식으로 자신의 삶 회고
  서산대사.
  최치원(崔致遠·857~?)은 신라 헌강왕에게 자신의 문집인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을 헌정할 때 공식문건인 표(表)도 함께 올렸다. 이 글은 훗날 <계원필경집>이 간행될 때 서문으로 되어, 흔히 <계월필경서(序)>라고 한다.
 
  최치원은 중국에 유학하고 종사관이나 관리로서 활동하다가 신라에 돌아와 중국에서 지은 시문을 엮은 문집을 헌강왕에게 헌정했다. 혹은 <계원필경집>은 신라 헌강왕이 아니라 당나라 황제에게 올린 것이라고도 한다. 최치원이 당시 올린 표가 <계원필경서>로 되었다. 최치원은 이 글에서 자신의 저술 사실을 밝히고, 유학을 가게 된 동기와 유학기간 동안 수학한 내용, 귀국하기 전까지 중국에서의 경력도 함께 기록했다.
 
  서산대사 청허휴정(淸虛休靜·1520~1604)은 완산 부윤 노수신(盧守愼)에게 올린 서한에서 60세까지의 행적을 자서전식으로 서술했다. 곧 <상완산노부윤서>(上完山盧府尹書) 가운데 자서전 부분을 <삼몽록>(三夢錄)이라고 한다. 서산대사는 이 서찰에서, 37세에 이르기까지 생을 상세히 밝혔다. 9세에 부모를 잃었을 때의 고통, 고을 원의 주선으로 상경하여 과거 공부에 전념한 일, 고찰을 유람하다가 불가(佛家)에 투신하게 된 사정, 참학하여 오도(悟道)에 이른 과정, 운수승으로서의 행각 등을 서술했다.
 
  한편 시조 작가로 유명한 박인로(朴仁老·1561~1642)는 <무하옹전>(無何翁傳)을 지었다. 이 글은 박인로가 입암으로 산림처사 장현광(張顯光)을 찾아가 도(道)에 대해 깨달음을 얻었던 사실을 우의적으로 서술한 듯하다. ‘무하옹 구인산기(無何翁九山記)’라고도 일컬었다.
 
  구인산이라는 이름은 ‘구인의 높은 산을 거의 이루었다고 해도 한 삼태기의 흙을 더하지 않아 그 높이를 이루지 못하면 실패하고 만다’는 공휴일궤(功虧一?)의 교훈을 새기며, ‘나의 도덕적 완성은 나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자각해서 그렇게 정한 것이다. 장현광은 <무하옹 구인산기>에 글을 써주어 박인로의 구도 정신을 칭송했다.
 
  훈민정음을 연구한 <언문지>(諺文志)의 저자로 유명한 유희(柳僖·1773∼1837)는 27세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비옹칠가>(否翁七歌)를 지었다. 친척이나 지인을 부르면서 자기의 답답한 심경을 노래하는 방식은 두보의 <동곡칠가>(同谷七歌)를 본받았다. 유희는 세간의 부조리를 광정(匡正)하려고 마음 먹었지만 아무 성취 없이 세월만 흐르는 것을 한탄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영향을 준 학자들, 어머니 사주당(師朱堂), 넷째 누이, 친구를 하나하나 부르면서 그리워하고,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는 자신을 한심해했다. 마지막 수에서는 자신이 거처하는 용인 관청(觀靑)의 이름을 부르면서, 앞으로 자연을 벗 삼아 안분지족(安分知足)하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나도 자서전을 써 보자
 
  자서전은 반드시 길어야 할 필요가 없다. 내가 겪은 일, 지나온 생애를 어느 한순간에 회고하면서 그때의 감정이나 상념을 반추하고 지금 시점에서 갖게 되는 감정이나 상념을 일인칭으로 적거나 혹은 제3자를 내세워 서술한다면 그것이 곧 자서전이다.
 
  물론 현대의 자서전은 자신이 겪은 사건들의 세부 사실을 밝히고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세밀하게 분석해서 서술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편폭이 길어야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반드시 수사(修辭)에 뛰어난 글일 필요가 없다. 흔히 자서전이라고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글 잘 짓는 사람에게 자기 이야기를 집필해 달라고 의뢰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글 잘 짓는 사람의 글이 나의 인생을 더 잘 묘사해 주고 지금의 감정과 상념을 더 잘 드러내 준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물론 자기 이야기를 말하거나 글로 적는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사실 자체를 완전하고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감정과 상념은 의도하지 않아도 왜곡될 수 있고, 사실 자체도 지금의 감정과 상념에 따라 변형될 수 있다. 더구나 자신의 성격적 결함, 털어놓기 거북한 일화, 부도덕한 습관을 감출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서전을 적는 것은 자기 삶의 일정한 시간 그리고 공간을 스스로 구획하여 그 의미를 스스로 분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바로 지금의 삶을 새로 기획하는 매우 소중한 체험이라고 생각된다.
 
  청운의 꿈을 꾸며 기쁨으로 가득한 시절을 보낸 분, 나를 배반하는 많은 것 때문에 망망함을 느꼈던 분, 그분들에게 자서전을 쓰도록 권하고 싶다. 자서전을 적어보는 일은 자기의 존재의의를 재확인하는 유력한 기획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