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의 원류를 찾아서_09
俠客 의사, 부청주
명조에 멸망의 기운이 감돌던 1607년, 산서성 양곡현에서 태어난 부청주(傅靑主, 1607~1684)는 시대를 대표하는 의사일 뿐만 아니라 명나라를 대표하는 자존심이었다. 서극 감독의 무협영화 칠검에도 등장하는 부청주라는 캐릭터는 의협심이 강하고 뛰어난 무술과 의술로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으며, 실제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청주의 원래 이름은 정신(鼎臣)이지만 훗날 산(山)으로 바꾸었고, 많은 자와 호를 가지고 있지만 주로는 청주(靑主)로 불렸다. 특히 여과 즉 산부인과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며, 여러 저서를 남겨 후대에 의술을 전하기도 했다. 이번 호는 부청주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간략히 다루고 다음 편에 그가 남긴 일화를 통해 한의학 업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부청주(傅靑主)에 대한 세인의 평가는 다음 문장에 다 담겨 있다.
부청주의 이름을 모르는 세인이 없다. 허나 누가 그의 자(字)를 아는 것이 그의 시(詩)만 못하고, 그의 시를 아는 것이 그의 그림만 못하며, 그의 그림을 아는 것이 그의 의술만 못하고, 그의 의술을 아는 것이 그의 인품을 아는 것만 못함을 알겠는가?
어릴 때부터 영특했던 부청주는 15세에 이미 향시에 단독 합격할 정도로 신동이었다. 강직하고 학식이 높은 스승 원계함(袁繼鹹)을 모셨다. 하지만 부청주가 뜻을 펼치기에는 명말의 모습은 참담할 정도였다. 탐관오리의 전횡으로 백성은 고통받았고, 나라의 기강은 무너질대로 무너졌다. 뜻을 같이 했던 스승 원계함은 환관 장손진(張孫振)의 모함을 받아 붙잡혔고, 부청주는 전국적으로 구명 운동을 전개해 결국 원계함의 무고를 증명하고, 장손진의 죄상을 폭로해 도리어 그가 처벌받게 하였다. 당시 부청주는 북경으로 압송되던 스승이 탄 호송차를 미행하면서 전국의 생원들에게 알렸으며, 장손진의 위협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조정은 여론의 흐름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부청주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부청주가 39세 되던 해에 명조가 멸망하고 청조가 들어섰다. 부청주는 한탄하며 가족을 데리고 토굴 속으로 들어가 칩거했으며, 가끔 약재와 땔감을 내다팔아 생계를 유지할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아 반청복명(反淸復明) 운동을 전개했다. 원계함은 체포되었고 끝까지 불복하다 살해당한다.
그는 스승의 유고를 정리하고 북경을 떠난다. 고향으로 돌아가 계속 저항 활동에 나선다. 그는 선비의 복장을 벗고 도가의 복장으로 갈아입어 ‘붉은 옷의 도인’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저항 활동을 하는 중에도 의사로서 병자를 계속해서 진료했다. 그의 진료소는 종일 사람이 꽉 찼고, 왕진을 요청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200~300리 되는 거리도 결코 사양하지 않았으며, 집이 빈곤해 약을 살 돈이 없으면 무료로 약을 줬다. 하지만 관리와 지방 토호의 왕진에는 응하지 않았고, 내원해야만 비로소 진찰했으며 또한 다른 환자와 평등하게 줄을 서서 순서대로 진료를 보도록 했다.
순치 11년, 반역자의 밀고로 인해 부청주는 체포된다. 감옥 속에서 9일간 단식하며 끝까지 회유에 굴하지 않다 졸도해 쓰러지기를 수차례. 하는 수없이 부청주를 풀어줬고, 이 일을 계기로 또다시 천하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다. 청조도 민심을 얻어야 천하를 얻는다는 이치를 깨달으면서 나라가 평안해지기 시작한다. 부청주는 결국 반청복명이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강희 17년, 부청주가 72세 되던 해에 청 조정은 천하의 인재를 모으기 위해 ‘박학홍사과’를 설립했고 부청주를 등용하고자 했다. 부청주가 거듭 거절하자 지방 관리는 부득불 반강제로 그를 북경까지 이송했다. 상경 후 부청주는 강한 설사약인 대황을 먹고 중병이 난 것처럼 꾸민다. 강희제는 부청주를 대면하고 이 같은 행동이 강직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처벌하는 대신 처사로 예우하고 내각중서(內閣中書)를 내린다. 내각중서는 지방 관리가 특별히 안부를 묻고 챙겨야 하는 직책임을 뜻한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자 일대의 관리들이 모두 찾아가 문안했다. 어떤 관리는 부청주의 대문에 현판을 달려고 했으나 부청주는 엄중하게 거절했다. 그는 스스로를 끝까지 백성으로 칭했으며 시골에 거주하며 스스로 자신에 대해 고상한 뜻은 높은 바람과 바위와 같은 성품과 절개가 있다고 표현했다.
그의 서예는 당대에 청나라 초기 제일 서예로 불리었다. 그의 그림도 매우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산수, 매화, 난초, 대나무 등 그림에서 모두 정교했으며 일품으로 평해진다. ‘화징록(畫征錄)’에서는 “부청주의 산수에는 준법이 많지 않고 작품 속에 뜻이 깊으며 먹으로 그린 참대도 기가 있다”는 평이 실려 있다. 그의 필획은 모두 자신의 성품이 고상하고 숭고한 절개가 녹아 있었다.
명나라 말과 청나라 초를 대표하는 명의 부청주는 평생 수많은 환자를 치료했기에 적잖은 치료 사례가 남아 있다. 그 중에서 부청주가 돌맹이로 중병 환자를 치료한 일화는 부청주의 진면목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청초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에 이소우라는 남자가 살고 있었다. 부인의 이름은 분연이었는데, 평소 금슬이 좋았지만 우연찮은 일로 심하게 다투게 됐다. 평소 남편을 사랑하던 부인으로서는 남편이 자신에게 화를 내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고, 울화병이 생겨 시름시름 앓더니 결국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게 됐다. 남편은 그제서야 조급해져 용하다는 의사를 찾아 백방으로 다니며 치료를 요청했지만, 부인의 병세는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결국 60리(약 24km)를 걸어 명의로 소문난 부청주를 찾아갔다. 부청주는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듣고는 환자를 보지 않아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약재를 수일 내로 준비해 줄테니 한 가지를 준비해 오라고 한다. 남편이 해야 할 일은 색이 짙은 돌맹이를 하나 주워서 집에서 물에 넣고 삶되, 색이 옅어질 때까지 물을 보충하면서 달이는 것이었다. 남편은 다소 의아했지만 부청주의 말이었기에 집으로 돌아가 밤낮을 쉬지 않고 돌을 삶았다.
물이 마르면 절대 안 된다는 지시에 물을 붓고 불을 살피기를 수일. 물을 49회나 붓고 끓였지만 돌맹이 색은 그대로였다. 어찌보면 누가봐도 당연한 일이었다. 보다 못한 부인이 일어나서 “제대로 끓이고 있는 것인가요, 방법이 틀린 것은 아닌지요”라고 물었다. 남편은 부청주가 지시한 대로 하고 있는데 잘 안된다고 말했다. 부인은 자신이 지켜보고 있을테니 부청주에게 가서 다시 한번 물어보라고 말했다. 남편은 부인에게 불을 맡기고는 부청주를 다시 찾아갔다.
부청주는 남편에게 지금 누가 불을 살피고 있는지 물었고 남편은 부인이 대신해서 보고 있다고 답했다. 부청주는 웃으며 당신이 집으로 돌아갈 때면 부인의 병이 이미 나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왜 그러한지 설명했다.
“당신의 부인은 노기가 쌓여서 생긴 것으로, 노기를 풀어주면 병이 낫습니다. 당신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궁이에 앉아 돌맹이를 삶는 모습에 자연스럽게 노기가 사라졌고, 동시에 간목(肝木)이 되살아나고 비위의 기능이 회복되었을 터이고, 이미 병이 나은 것입니다.”
아니나다를까 남편이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의 병은 이미 나아 있었고, 부청주의 탁견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고대의 심리치료법은 오행(木火土金水)의 상생과 상극을 이용한 것이다. 오장육부와 오지(五志), 칠정(七情)은 모두 오행으로 나눌 수 있다. 간(肝), 노하는 감정, 혼(魂)은 오행의 목(木)에 속한다. 심(心), 기뻐하는 감정, 신(神)은 오행의 화(火)에 속한다. 비위(脾胃), 사려(思慮), 의(意)는 오행의 토(土)에 속한다. 폐(肺), 슬퍼하는 감정, 백(魄)은 오행의 금(金)에 속한다. 신(腎), 공포, 지(志)는 오행의 수(水)에 속한다.
돌맹이 치료법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울분과 분노로 간의 병이 생겼고, 간은 오행에서 목에 해당하며 목에 병이 생기면 토를 억누르게 되며, 토와 연결되는 장부는 비위이기에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헌신으로 아내의 분노가 눈녹듯이 사라지게 되자, 간과 비위(목과 토)의 균형이 정상을 회복하게 되고 아내의 병도 좋아졌던 것이다.
현대인의 병의 상당수가 마음, 즉 스트레스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병은 고유 명사로 사전에 등록될 정도로 한국인의 분노와 억울, 슬픔은 큰 문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의학이 발달하고 한의학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지만 지금도 부청주와 같은 지혜를 발휘하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다. 대증치료로 안정제와 수면제, 수많은 처방과 치료법이 있지만 실제로 마음의 병은 쉽게 낫지 않고, 따라서 몸의 병도 낫지 않으니 말이다.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돌아보지 않고, 시대를 걱정하며 백성의 삶과 애환에 울고 웃던 협객 부청주가 그리워지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