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속에 담긴 옛 선비들의 사랑론
너도 네 마누라를 때리니?
철종 때 정수동(鄭壽銅)의 아내가 난산으로 목숨이 위태로웠다. 다급해진 그가 불수산을 조제해 오마고 집을 나섰다. 약방 가는 길에 친구를 만났는데, 금강산을 구경가는 길이라고 했다. 아내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도 까맣게 잊고 덜렁 금강산 구경을 따라나섰다가 돌아오니, 그때 낳은 아이가 백일이 지났더라고 했다.
가정에 무심한 옛 남정네들의 이런 종류 이야기들이 무슨 무용담이나 되는 듯이 전해진다. 그래서였는지 한 여자 대학원생의 페미니즘 관련 논문을 보니, 이렇게 씌여 있다. "조선 시대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이다. 가부장제란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를 의미한다. 조선조 사회에서 여성은 중심권 밖에서 살아가는 미미한 존재로서 여성은 단지 남성의 부속물로 여겨졌을 뿐이다. 여성은 아기를 낳아 기르는 생산 기능을 담당한 인물일 뿐 사회 참여가 처음부터 철저하게 구속되었다."
지난 해 대만에 교환교수로 머물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그들 말로 `따난런주의(大男人主義)`, 즉 남성우월주의가 한국은 왜 그렇게 심하냐? 너도 네 마누라를 때리느냐는 물음이었다. 심지어 국제학술회의장에서도 이 문제는 이야기 거리였다. 앞서 대학원생이 가졌던 조선 사회에 대한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나, 대만 사람들이 가졌던 한국 사람에 대한 왜곡된 편견은 내가 보기에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조선시대 여자들은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살았다. 지금도 한국 남자들은 여자들을 심심하면 때린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야담 속에서 공처가 이야기는 왜 그렇게 자주 보이는 걸까? 오늘날 남성들은 정말 아내를 때리며 폭군처럼 군림하며 사는가? 그 학술회의장에서 자신은 애처가이며 한국 남자들은 요즘 마누라 앞에서 기도 못 펴고 산다며, 마누라를 때리는 그런 야만적이고 간 부은(?) 남자는 없다고 해명하느라 진땀을 빼던 한국인 교수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가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해도 대만 사람들은 한국 남자들이 자기 아내를 때리며 산다고 믿는다. 또 지금 우리들은 조선시대 여성들은 핍박받고 학대받고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다고 무작정 그렇게 믿는다. 유산 상속 문서나 노비 문서를 통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그렇듯이 낮지는 않았다는 연구 성과를 접하고 나서는 오히려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데 내가 오늘 써야 할 글의 주제는 그 폭력의 주체였던 조선조 선비들의 사랑이다. 과연 그 시절의 여성들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철저하게 남성의 부속물, 또는 성적 노리개로만 살았던 것일까? 그 대학원생의 말처럼 여성을 남성의 부속물 쯤으로 여겼던 선비들에게 과연 사랑이란 것이 있었을까? 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언문 책을 베껴 주며
제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사람 사는 이치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생로병사하는 삶의 사이클이 변할 리 없고, 만나고 헤어지고 그리워 하는 남녀의 사랑에 때의 고금이나 양(洋)의 동서가 있을 리 없다. 조선시대 선비 하면 으레 사서삼경이나 떠올리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나올 것 같은 딱딱한 군자상을 떠올리는 것은 우리의 고약한 편견이다. 그들도 피가 돌고 살이 따뜻한 사람이었을진대, 어이 안타까운 젊은 날의 로맨스인들 없었겠으며, 갈피갈피에 숨겨둔 눈물겨운 사랑인들 왜 없었으랴.
묻노니 그대는 무얼 생각하는가
내가 그리는 건 북쪽 바닷가.
높은 가을 이슬 희고 부용꽃 지면
연희네 집 단풍나무 붉게 물들지.
그 많은 가지마다 붉은 등불 밝히니
비단 휘장 열고 보면 빛깔도 영롱해라.
단풍나무 그늘에서 달 떠오길 기다리다
달은 연희 비추며 오동나무 어루만졌지.
이 때 나는 차가운 강 길 따라 가
쌓인 낙엽 함께 앉아 얘길 나눴네.
말 끝나면 연희의 손을 잡고서
단풍나무 붉은 뜰을 함께 오갔지.
問汝何所思 所思北海湄
高秋露白芙蓉落 蓮姬園裏楓樹赤
千條萬條燭天紅 錦步障開光玲瓏
蓮姬待月楓樹下 月照蓮姬撫孤桐
是時我從寒江渚 坐著葉堆相與語
語罷却携蓮姬手 紅樹園中共來去
김려(金 , 1766-1821)가 32세 때 유언비어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부령 땅에 유배 가 10년 가까운 세월을 이곳에서 보낸 일이 있었다. 한양으로 돌아온 그는 그곳의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연작시를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유악부(思 樂府)》 290수이다. 위시는 그곳에서 만나 깊은 사랑을 나누었던 여인 연희에게 바친 그리움의 노래이다. 말이 그리운 얼굴들이지 이 연작시 290수 가운데 수십 수가 오로지 연희에게 바쳐진, 전편에 걸쳐 연희를 향한 가슴 메이는 그리움이 구절마다 메아리치고 있는 작품이다. 위시를 짓다가 그는 분명히 울었을 것이다.
여울지며 흘러가는 찬 강물을 따라 사랑하는 여인의 집을 찾아가면, 그리움처럼 온통 붉게 물든 단풍 숲 아래에선 그녀가 오동나무를 어루만지며 달 떠오길 기다리며 서 있었다. 지천으로 깔린 낙엽 위에 둘이 앉아 소곤소곤 사랑의 밀어를 나누다 달빛이 너무 고와 할 말이 없어지면 가만히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고서 불붙은 단풍 동산을 밤새 왔다 갔다 했었다.
묻노니 그대는 무얼 생각하는가
내가 그리는 건 북쪽 바닷가.
괴상해라 오늘 밤 꿈도 이상해
연희가 내 손잡고 눈물 줄줄 흘리며,
한 차례 목이 메다 겨우 하는 말
"서방님 묶인 채로 성문 나선 뒤
우물가 앵두나무 살구나무는
벌레가 뿌리 먹어 함께 죽었죠.
올 가을 접어들자 홀연 잎이 나더니
손바닥만한 잎이 가지마다 가득해요.
서방님도 나무처럼 어서어서 돌아와
이생에서 다시 만나 함께 지내요.
問汝何所思 所思北海湄
怪底今宵夢兆異 蓮姬握手橫涕泗
一回嗚咽一回言 阿郞被逮出城門
井上櫻桃與丹杏 一時竝강충齧根(죽을 강, 벌레 충)
彊到今秋忽生葉 葉葉如掌枝枝疊
願郞如樹早回還 此生重逢共歡협(기쁠 협)
이번엔 연희가 꿈길로 그를 찾아왔다. "서방님이 떠나신 뒤 우물가에 심었던 앵두나무와 살구나무는 그만 벌레가 뿌리를 갉아먹어 죽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웬 일이랍니까? 올 가을에 다 죽었던 나무에서 손바닥만한 잎이 가지 가득 돋아나 되살아났지 뭐예요. 서방님! 저 나무처럼 다시 제 곁에 돌아오셔서 그때처럼 다정하게 함께 살아요." 그 목소리가 하도 안타까워 그만 잠이 깨고 말았다. 어느새 베갯잇은 푹 젖어 있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녀는 그 먼 꿈길을 달려 나를 찾아 왔을까? 얼마나 보고 싶었길래 그는 이런 꿈을 다 꾸었을까?
역시 가슴 메이는 사연이다. 체통을 따지기로 한다면 젊잖은 처지에 차마 붓을 들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랑을 노래로 남겼다. 부끄러움이나 체모 따위는 따지지 않았다. 그만큼 그 사랑이 소중하고 안타까웠던 까닭이다. 조선시대 선비의 시속에서 이런 진솔한 사랑의 토로를 만나게 되는 것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다음은 기준(奇遵, 1492-1521)이 귀양지에서 고향집의 아내를 그리며 지은 시 〈회처(懷妻)〉다.
슬하의 어린애는 말을 갓 배웠겠고
부엌의 늙은 종은 양식이 없다겠지.
뜨락엔 황량하게 가을 풀이 돋았겠고
날로 여윌 그 얼굴이 보일 듯 삼삼해라.
膝下孩兒新學語 조門老婢舊懸瓢(부엌 조)
林園廖落生秋草 想見容華日日凋
시의 주제는 말할 것도 없이 "여보! 미안하오"이다. 귀양올 때 뱃속에 있던 아이는 지금쯤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제 자식 얼굴도 모르는 아비도 있다던가. 남정네 없는 집안 살림은 또 얼마나 궁색할 것인가. 안 봐도 그 정경이 훤히 눈 앞에 보이는 것만 같다. 마당엔 잡초가 돋아 있겠고, 늙은 계집종은 빈 뒤주를 박박 긁으며 끼니 걱정을 하고 있겠지. 멀리 나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 쉬고 있을 그 여윈 얼굴이 눈앞에 삼삼하게 떠오른다. 고개를 돌리고 만다. 아! 가족이 다시 만나 도란도란 오붓하게 옛날 이야기를 하며 살아볼 날이 오기는 올 것인가?
시월에 유마자는 다시 서울에 갔다가 동짓달에 집으로 올 때, 도중에 병이 들어 간신히 집에 와서 두 달을 고생하니, 부인이 주야로 잠을 자지 못하고 병간호를 하거늘, 유마자가 탄식하여 말했다. "부인이 병이 들었다 해도 나는 저렇게는 못할 것이니 그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가 있으랴." 유마자는 생각했다. `언문 책을 베껴주면 부인이 심심할 때 소일하리라.`
한글 필사본 소설 『수호지』의 말미에 씌여진 필사기(筆寫記)이다. 겨울철에 서울로 볼일 보러 갔던 남편은 12월 엄동설한에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병이 들어, 집에 오자마자 두 달을 몸져누웠다. 밤낮 없이 잠 한 숨 못 자고 병간호를 해준 아내가 그는 너무 고마웠다. 아내의 극진한 간호 덕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는 아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소설책을 베껴주면 심심할 때 그것을 읽으며 소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 끝도 없이 긴 소설을 한 자 한 자 붓으로 베껴 아내에게 선물했다. 밤마다 사랑채에서 여러 날을 몰래 베껴 써서 마침내 필사가 끝났다. 그날 위의 필사기를 쓴 뒤 뒷춤에서 꺼내 아내 앞에 멋적게 쭈빗쭈빗 이 책을 내놓았을 그의 표정이 이 필사기 속에는 그대로 담겨 있다. 이 책을 받아든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책을 펼 때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기울였을 남편 생각에 소설의 이야기보다 더 큰 행복과 감동을 맛보았으리라.
나는 죽고 그댄 살아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은 아내가 세상을 뜬 후 26편의 시와 24편의 문을 지어 죽은 아내를 향한 그리움을 토로했다. 아내는 연일 병구완 끝에 지쳐 잠든 남편을 공연히 깨우지 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떴다. 그는 〈누원(淚原)〉 즉 `눈물이란 무엇인가?`란 글을 지어 아내에게 바쳤다.
눈물은 눈에 있는 걸까 마음에 있는 걸까? 눈에 있다 하면 마치 물이 웅덩이에 고인 것 같단 말인가? 마음에 있다 하면 또한 피가 핏줄을 돌 듯 한단 말인가? 눈물이 눈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데, 눈물이 나오는 것은 신체 다른 부위와는 무관하게 오직 눈이 홀로 이를 관장하니 눈에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 마음에 있지 않다고 하지만,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데 눈이 홀로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없으니 또 마음에 있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만약에 또 마음에서부터 눈으로 나오는 것이 마치 오줌이 방광에서 신(腎)으로 나오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면, 저가 모두 물의 종류여서 아래로 흐르는 성질을 잃지 않을 터인데, 유독 눈물만 그렇지 않단 말인가. 마음은 아래에 있고 눈은 위에 있으니, 어찌 물이 아래로부터 위로 흐르는 이치가 있단 말인가?
이어지는 글에서 그는 아내가 죽고 나서 시도 때도 없이 주체 못하고 눈물을 흘리던 일을 말하며, 눈물이란 마음에 느꺼움이 있을 때 정신이 이에 감응하여 흐르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즐거운 잔치 자리에서 거문고 피리 소리가 낭자할 때나, 일이 바빠 처리해야 할 공문이 책상 위에 수북히 쌓여있을 때도, 문득 죽은 아내 생각이 나서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나면, 아내의 영혼이 잠깐 내 곁에 왔었구나 하고 생각했었다는 이야기를 담담히 덧붙였다.
또 〈신산종수기(新山種樹記)〉란 글에서는 고향 파주에 새집을 조그맣게 짓게 되자 기뻐서 아내와 새 집의 모습을 상의하던 이야기가 나온다. 공사가 끝나면 꽃과 나무 심을 일도 같이 이야기했는데, 집이 채 지어지기도 전에 아내는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병이 위독해 졌을 때 아내는 자기를 파주 새집 곁에 묻어달라고 했고, 그의 이사 길에 아내는 관에 실려서 왔다. 집 가까이 아내를 묻고, 그녀가 살아 그토록 좋아하던 꽃과 나무를 집 둘레에 빼곡이 심어 가꾸면서, 살아서는 파주의 집을 얻지 못했지만 자신이 죽어 흙으로 돌아간 뒤 부부 함께 영원히 파주의 산을 얻어 누리자고 축원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그대는 장차 살 것은 도모하지 않고 죽은 뒤의 계책만 세우고 있는가? 죽으면 아무 것도 알 수 없는데 무슨 계획을 한단 말인가?"라고 말하자, 그는 "죽으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말은 내가 참으로 참을 수 없는 말이다"라고 하며 목이 메어 글을 맺었다. 아내는 비록 죽었지만, 그에게 아내는 결코 죽어 아무 것도 모르는 그런 존재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한 그루 한 그루 나무를 심고, 그 나무가 푸르러 동산을 이루어 가는 것을 죽은 아내에게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옛 문집을 보다 보면 도망문(悼亡文), 즉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지은 시문이 의외로 많은 것에 놀라게 된다. 필자가 본 것만도 어림잡아 수백편이 넘는다. 그 글 마디마디 마다 평생 고생만 하다 죽은 아내를 향한 미안함과, 살아 잘해주지 못한데 대한 회한이 가슴 저미게 스며 있음을 본다. 다음은 심언광(沈彦光, 1487-1540)이 꿈에 죽은 아내를 만난 뒤 쓴 〈몽망처(夢亡妻)〉란 작품이다.
열 식구 두 뙈기 밭 의지해 사니
가난한 집 살림살이 자네 어짐 덕이었네.
간신히 먹고 산 지 서른 여섯 해
공명을 누린 것은 겨우 몇 해 뿐.
흰머리 되도록 함께 살자 했더니
날 두고 어이 먼저 황천 가셨나.
넋이 오매 저승길이 막힌 줄 몰랐더니
꿈속에선 평소 모습 완연히 그대로라.
十口常資二頃田 貧家生理賴妻賢
艱辛契活曾三紀 榮顯功名僅數年
自謂與君同白首 何先棄我落黃泉
魂來不覺冥途隔 夢裏기巾尙宛然(초록빛 기)
꿈을 꾸다 꿈길에서 죽은 아내를 만났다. 생시의 모습이 완연하여 죽은 사람인 것도 잊었더니 깨고 보니 허망한 꿈이다. 열 식구 큰 살림이 겨우 두 뙈기 밭에서 나는 소출만 보고 살아왔다. 평생 고생만 하다가 뒤늦게 열린 벼슬길에 이제 겨우 먹고 살만 하니까 아내가 훌쩍 세상을 떴다. 이젠 살만 해 졌으니 건강하게 흰머리로 백년해로 하자던 묵은 약속이 하도 허망해서 그는 자꾸만 눈물이 난다. 다시 한 수를 더 보기로 하자.
월하노인 통하여 저승에 하소연해
내세에는 남편 아내 바꾸어 태어나리.
천리 밖서 나는 죽고 그댄 살아서
이 마음의 이 슬픔을 알게 하리라.
聊將月老訴冥府 來世夫妻易地爲
我死君生千里外 使君知有此心悲
만년에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고단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서울 집에서 아내의 부고가 날아들었다. 귀양살이에 지친 남편에게 편지와 옷가지를 보내며 집안 대소사를 알뜰살뜰 챙기던 아내, 평생 그늘에서 애만 태우던 그녀의 일생을 돌이키며 추사는 견딜 수 없는 자책감과 슬픔에 빠져들었다. 제목은 〈배소만처상(配所輓妻喪)〉이다. 정작 평생의 고락을 함께 했던 아내의 죽음 앞에, 가서 곡 한 번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참담하였다. 그래서 그는 남녀의 인연을 맺어준다는 월하노인을 찾아가서, 내세에는 부부의 역할을 바꿔서 다시 한번 만나게 해줄 것을 하소연하겠다고 했다. 단지 내세에도 부부로 다시 만나자는 허망한 다짐을 두려 함이 아니다. 그때도 천리 밖 멀리 서로 떨어져 있다가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먼저 죽고 당신은 살아서 지금의 이 내 참혹한 슬픔을 느껴 보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저 읽기만 해도 당시 추사의 처연한 슬픔이 감염되어 온다.
내 나이를 묻지 마오
눈썹 곱게 단장한 흰 모시 적삼
마음 속 정스런 말 재잘재잘 얘기하네.
님이여 내 나이를 묻지를 마오
오십년 전에는 스물 셋이었다오.
澹掃蛾眉白苧衫 訴衷情話燕니남(니: 口+尼, 남: 口+南)
佳人莫問郞年歲 五十年前二十三
신위(申緯, 1769-1847)의 〈증변승애(贈卞僧愛)〉란 작품이다. 신위가 그의 풍류를 사모하여 곁에서 모시면서 필묵의 심부름이라고 하겠다는 변승애란 기생에게 써주었다고 전해지는 작품이다. 혹 조수삼(趙秀三)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해학스러우면서도 함축미가 뛰어난 작품이다. 눈썹을 단정하게 그리고 흰 모시 적삼을 청결하게 갖춰 입은 그녀가 마치 제비가 지지배배 거리듯 곁에 앉아 제 마음 속 품은 정을 쉴새 없이 소곤소곤 이야기한다. 머리가 이미 허연 나는 그녀의 애교 짙은 태도에 그만 애간장이 다 녹을 지경이다. 3구에서 내 나이를 묻지 말라고 해놓고, 4구에서 제 입으로 말하는 밀고 당기기가 재미있다. "내 나이가 몇이냐 하면, 음 그러니까 50년 전에는 스물 셋이었느니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말하자면 자신이 이미 늙었음을 핑계로 그녀의 사랑을 완곡하게 거절한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사랑스런 마음이야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자신은 황혼의 늙은이요, 그녀는 한참 피어나는 꽃봉오리이니, 그녀를 위해 내 욕심을 잠깐 눌러 보는 것이다. 이런 유머와 은근함 속에는 읽는 이의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따뜻함이 배어 있다.
개화기 때 이해조는 "춘향전은 음탕 교과서요, 심청전은 처량 교과서"라며, 커가는 청소년이 이런 소설을 읽으며 자란다면 나라 교육의 장래가 어찌 되겠느냐며, 읽어 하나도 재미 없는 신소설 〈옥중화〉 창작의 변을 소리 높인 일이 있다. 흔히 우리는 `그때 거기`는 `지금 여기`와 판연히 달랐으리라고 지레짐작한다. 우리의 착각은 여기서 시작된다. 옛적에도 저 고구려 유리왕의 노래로 전하는 〈황조가〉에서부터 고려가요의 그 농도 짙은 사랑, 시조에서의 농탕한 가락도 있었다. 판소리 속의 걸쭉한 육담이나 고전소설 속의 진진한 사랑은 여기서 일일이 다 말하지 못한다. 그때 거기나 지금 여기는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달라진 것은 표피의 겉모습 뿐이지,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언제나 한가지다.
이상 성글게 한시의 거울에 비친 옛 선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적어 보았다. 표현하는 방법은 달라도 사랑은 문학의 영원한 주제다. 옛 사랑의 표현은 지금처럼 직접 드러내놓고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무미건조하고 근엄한 것만도 아니었다. 인간의 체취가 느껴지고, 따뜻한 마음이 오가는 그런 사랑이 있었다. 너무나 안타까워서 차마 다 말 못하고, 안으로 머금는 그런 사랑이 있었다. 가슴이 저미도록 그리워서 꿈길로 가서 만나는 그런 사랑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