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한나라 말기 건안칠자중 한사람, 공융(孔融)
醉月
2010. 8. 20. 07:13
술잔에 술이 비지 않으니 나는 근심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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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를 제패할 포부를 가진 조조가 군량을 절약하기 위해 금주령을 내렸다. 공융은 금주령에 반대하는 상소를 거듭 올렸고, 결국 조조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그 죄목이 이렇다.
첫째, 북해군(北海郡)에 있을 때, 천하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군대를 모집하고서, 유(劉)씨의 세상을 빼앗아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하였다. 둘째, 손권(孫權)의 사신에게 ‘조정’을 비방하였다. 셋째, 조정에서 예절을 지키지 않아 항상 의관을 갖추지 않고 궁정을 출입했다. 넷째, 예형(&31152衡)과 서로 치켜서 반동적인 언론을 퍼뜨렸다. 다섯째, 불효(이 항목은 성인으로 자처하며 반역무도한 것으로 여긴 학자도 있음)하였다.
공융은 술을 좋아하여, ≪전도수상삼국연의(全圖繡像三&22269演義)≫11회 <북해구공융(北海救孔融)>에, “자리에는 손님이 항상 많고, 술잔엔 술이 비지 않으니, 나는 근심이 없네.(坐上客常滿, 樽中酒不空, 吾無憂矣.)”라고 하였다.
또한 ≪주전(酒顚),일석천상(一夕千觴)≫에 “그의 시에 &65378집으로 돌아오니 술빚이 많고, 집으로 찾아온 손님이 많아 줄을 몇 개나 늘어섰다. 고상한 담론으로 자리를 놀라게 하고, 하룻저녁에 술 천 잔을 마셨다.(歸家酒債多, 門客粲幾行. 高談驚四座, 一夕傾千觴.)&65379”고 하였다.
≪주전≫은 이어서 또 하나의 고사를 전한다. 공용은 채옹과 친했는데, 채옹이 죽은 뒤에 궁정을 지키는 虎賁軍士 중에 채옹을 닮은 병졸이 있었다. 공융은 늘 술에 취하면 그와 함께 앉아서 말했다. “옛 관리는 없어졌지만 오히려 典型이 있네”라고 하였다.
또한 ≪후한서,공융전≫에 “황건적이 쳐들어오려하는데, 공융은 많은 술을 마시고 몸소 말에 올라 &28150水로 갔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본다면 그의 죄상 중 세 번째 항목은 능히 그리 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지만, 다섯째 항목인 ‘불효’는 ≪삼자경≫에서 언급한 내용과는 맞지 않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삼자경≫에 “공융은 4세에 자두를 사양할 줄 알았으니, 윗사람에게 공경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融四歲, 能讓梨 弟於長, 宜先知.)”라고 하였다. 이 고사는 ≪후한서(後漢書)&8228공융전(孔融傳)≫에 나오는데,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융이 4살 때, 부친 공주(孔宙)의 학생이 답례로 살구 한 바구니를 가져왔다. 부친이 자식(7형제이지만 막내가 당시에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음)을 모두 불러 앉히고, 여섯째인 공융에게 살구를 나누게 했다. 공융은 가장 좋은 살구를 부모에게 먼저 드리고, 큰형&8228둘째형…순서대로 살구를 나누고 자신은 가장 작은 살구를 가졌다는 것이다.(살구와 관련된 공융의 고사는 이 외에도 더 있지만 아마 후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기에 더 언급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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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융은 공자의 20대손으로서 위에서 보듯 어릴 때부터 장유유서(長幼有序)를 각별히 주의하였고, 또한 ≪후한서(後漢書)&8228공융전(孔融傳)≫에 “나이 13살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너무 슬퍼하여 몸을 상한 나머지 부축한 뒤에야 비로소 일어날 수 있었고, 그 지방에서 효자로써 이름이 났다.”고 하였다. 이러한 공융에게 ‘불효’라는 항목이 일견 맞지 않은 듯 하지만, 그 사건은 이렇다.
공융이 예형을 만나고 나서 그가 훌륭한 인물임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조정에 추천했다. 조조는 어진이를 극진히 대접한다는 명성을 얻기 위해서 예형을 대했지만, 예형은 거친 언사와 행동으로 조조의 노여움을 샀다. 조조는 그를 직접 죽이지 않고 유표(劉表)에게 보냈다. 유표 또한 그의 언행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화하여 결국 성질 급한 강하태수(江厦太守) 황조(黃祖)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런데 공융과 예형은 조그만 예법에 구속받지 않는 사람으로서, 술을 질펀하게 마시며 각종 사안을 담론했을 것이다. 공융이 예형과 노닥거릴 때, 예형이 공융을 향해 “공자가 죽지 않았군요”라고 하니, 공용이 예형에게 “안회(顔回)가 다시 살아났읍니다그려”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나아가 공융은 ‘부모가 자식에게 은혜를 준 것이 아니라는 주장(父母於子無恩論)’을 하게 되는데, 곧 아버지가 자식을 낳은 것은 천륜으로 인해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부친의 정욕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가 처음이 아니라 이전에 후한의 사상가 왕충(王充)이 ≪논형(論衡)≫에서 “대저 천지는 기가 합쳐져야 사람이 생겨난다. 이것은 마치 부부의 기가 합쳐져야 자식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
부부의 기가 합쳐지면 곧바로 자식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정욕이 발동하여 (기가) 합쳐지고, 합쳐져야 자식이 생기는 것이다.(夫天地合氣, 人偶自生也. 猶夫婦合氣, 子則自生也. 夫婦合氣, 非當時欲得生子, 情慾動而合, 合而生子矣!)”라고 하였다.
너무나 엄격한 父子有親 등 유가의 규율을 재해석하는 가운데 이 말들이 나왔을 것이라고 이해하더라도, 당시는 동란의 상황임을 감안하면 그는 주변의 상황과 예의규범을 고려하지 않고 언행을 가볍게 구사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조조는 어진이를 존중한다는 소문을 얻어 세상의 총명한 이를 끌어 모으려는 의도를 가졌고, 실제로도 그와 뜻이 같으면 극진히 대접하여서 전장에 그들을 수백 명씩 데리고 다니며 시부를 짓기도 했다.
그 결과 공융처럼 조조와 조화를 이루지 못해 결국 죽임을 당한 청객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위진시기는 명철보신의 방법으로 아예 세상을 등진 죽림칠현이 나타난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조조는 오랜 기간의 전쟁과 기근으로 양식이 부족하였기에, 군량을 준비하기 위해 금주령을 내렸다. 이해 대해 공융은 <재상 조조가 금주를 시행한 것에 대해 반박하는 글(難曹公表制禁酒書)>을 올렸다.
술의 덕을 칭송한 것이 오래되었습니다.……그러므로 하늘엔 주성(酒星)이 빛나고 땅에는 주천(酒泉)이라는 군현(郡縣)이 있으며, 사람은 술의 덕을 분명히 드날렸습니다. 요임금은 술 천 잔을 마셨지만 태평성대를 세우지 않음이 없었고, 공자는 술 백 곡(斛)을 마셨지만 성인의 경지에 올라가지 않음이 없었습니다.……이러한 것으로 볼 때 술이 정사에 어찌 어긋나겠습니까?
(酒之&20026德久矣.……故天垂酒星之耀, 地列酒泉之郡, 人著旨酒之德. &23591不千&38047, 无以建太平 孔非百&35290, 无以堪上&22307……由是&35266之, 酒何&36127于政哉?)
이에 대해 조조가 하은(夏殷)에 나라를 망친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을 거론하여, 결국 술은 결국 나라를 망치게 되기에 금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 공융은 또한 <조맹덕과 금주령에 대해 논함(與曹孟德論酒禁)>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저번에 훈계하신 회신에 답합니다. 하(夏)나라와 상(商)나라 등 2대의 재앙과 여러 사람이 실패한 것은 술로 인해 망한 것이라고 진술하셨는데, 실로 친히 오셔서 가르쳐주신 듯 합니다. 비록 서융(徐戎)임금은 인의(仁義)를 행하여 망했지만 지금의 조령은 인의를 끊지 말라고 합니다.
연왕(燕王) 쾌(&22130)는 사직을 양보하여 잃게 하였지만 지금의 조령은 겸손하게 물러나는 것을 금하지 않습니다. 노(魯)나라는 유생으로 인하여 손해를 보았지만 지금의 조령은 문학을 포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夏&8228商은 역시 부인네로 인해 나라를 잃었지만 지금의 조령은 혼인을 끊지 않습니다. 그런데 술을 아주 급박한 일로 여기는 사람은 아마도 곡식을 아끼는 것일 뿐으로, 왕을 망하게 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昨承訓答, 陳二代之禍, 及&20247人之&36133, 以酒亡者, &23454如&26469&35826. &34429然, 徐偃王行仁&20041而亡, 今令不&32477仁&20041 燕&21721以&35753失社稷, 令令不禁&35878退 &40065因儒而&25439, 今令不&24323文&23398 夏商亦以&22919人失天下, 今令不&26029婚姻, 而&23558酒急者, 疑但惜穀耳, 非以&20026戒也.)
이글에서 공융은 “夏&8228商은 역시 부인네로 인해 나라를 잃었지만 지금의 조령은 혼인을 끊지 않습니다.”고 할 정도로 그 논조가 지나쳤고, 심지어 ‘금주령’을 행하는 조조의 속셈을 직설적으로 거론함으로써 조조의 심기를 건드렸다.
또 음주와는 관련이 없지만 조조의 심기를 건드린 또 하나의 고사가 전한다. 건안(建安)9년에 조조가 업성(&37172城)을 함락하고, 원소(袁紹)의 아들 원희(袁熙)의 처 견씨(甄氏)를 얻어, 고민한 결과 조비(曹丕)에게 주었다.
이때 공융이 조조에게 편지를 보내, “옛날에 주(周) 무왕이 은(殷)을 함락하고 달기(&22962己)를 주공(周公)에게 주었다”고 하여서, 조조는 세상의 비난을 근심하였다가 비로소 안심하였다. 뒤에 조조가 역사를 아무리 뒤져봐도 그러한 고사가 나오지 않자, 공융에게 출처를 물으니, “지금의 상황으로 옛 것을 헤아리니, 마땅히 그러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고 대답했다. 그제야 조조는 그가 자신을 풍자한 것임을 알아챘으니, 그에 대한 미움이 어떠했겠는가?
그런데 조조는 그를 곧장 죽이지 않았는데, 이는 천하를 제패하려는 포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처신한 것인데, 이는 곧 공융이 당시에 제법 명성을 지닌 명사임을 반증한다. 다음은 그가 제법 명성을 갖추게 된 두 개의 고사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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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융이 살구를 양보하다의 기념우표 |
공융이 10세 되던 해, 부친을 따라서 낙양으로 갔다. 당시 등용문 고사로 유명한 이응(李應: 자가 원례(元禮))은 상당한 명성이 있었고, 사례교위(司隸校尉)를 맡고 있었다.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을 추천했기에 그의 집엔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준재라고 하더라도 친척이거나 안면이 있는 사람만이 그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공융이 그의 집앞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나는 이응어른과 친분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이응을 찾아뵙게 되었다. 이응이 예를 갖추어 “그대는 나와 무슨 친분이 있는고?”라고 묻자, 공융은 “옛날 조상 공자와 어르신의 조상 노자(노자의 이름이 李耳임)는 스승의 존칭을 썼으니, 저와 어르신은 여러 대가 지난 뒤에도 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응과 여러 빈객들이 그가 재기가 있다고 여겼는데, 태중대부(太中大夫) 진위(陳&38873)가 늦게 도착하여 그 말을 듣고, “어릴 때 똑똑하다고 해서 커서도 반드시 훌륭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네.”고 하니, “어르신의 어릴 때를 생각해보면 반드시 똑똑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한다.
분명 공융의 재치와 답변은 10살의 꼬마가 답변한 것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민첩하고 총명한 것이지만, 어려운 자리에서 자신의 할 말을 꼬박꼬박 대꾸를 했다는 사실은 그의 경박한 성격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하여튼 이 일로 인해 그의 명성이 조금 알려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래에 그의 명성을 세상에 알린 또 하나의 고사를 소개한다.
공융이 16살 되던 해, 동한 말은 환관으로 인해 ‘당고지화(黨錮之禍)’가 일어났다. 환관을 비판했던 장검(張儉)이 화를 피하여, 평소 교분이 있는 공융의 형 공포(孔褒)를 찾아왔다. 마침 형이 외출 중이었던 터라 공융이 그를 숨겨주었다. 이로 인하여 공융과 공포가 잡혀 죄를 얻게 되었는데, 공융이 “장검을 숨겨준 사람은 나이니, 나를 잡아가시오.”라고 하였고, 왕포는 “장검이 나를 찾아왔으니, 나를 잡아가시오.”라고 하였다. 그 결과 공포가 감옥에 갇혔고, 공융을 풀어주었다.
이 일로 인해 공융은 명성을 얻게 되었고, 이후 그런대로 쉽게 관직으로 나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조조의 야심과 궤를 같이 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지만, 결국 죽음을 초래한 것은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가벼운 언행 때문이었던 것이다.
공융은 그의 죽음을 직면했을 때에야 비로소 사람의 마음이 모두 자신과 같지 않음을 깨달았던 모양이다. 그의 <임종시(臨終詩)> 속에서 “사람의 마음이 두세 개가 되는데 어찌 하나로 될 수 있으리.……살아있으면 근심이 많고, 죽어야 만사가 끝난다네(人有兩三心, 安能合爲一……生存多所慮, 長寢萬事畢.)”라고 한 것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가 죽임을 당할 때 두 아들이 한 말이 계속해서 뇌리에 남는다.
조조가 정위(廷尉)에게 공융을 잡아오라고 명령한다. 공융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나이가 어렸고, 마침 서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좌우에게 다급하게 “어른께서 정위에게 잡혀갔으니 반드시 목을 벨 것입니다. 두 아드님은 어찌 급히 도망치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두 아들은 “집이 깨졌는데 어찌 달걀이 무사하겠소?”라고 답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정위가 도착하여 두 아들을 잡아다가 모두 참시하였다. 경조(京兆) 지습(脂習)이 시체에 엎드려 곡을 하였다. 조조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순욱(荀彧)이 “저가 듣기로 지습이 항상 공융에게 ´공은 너무 강직하여 화를 부를 것입니다´고 간했다고 들었는데, 지금 공융의 죽음을 알고 찾아와 곡을 하니 의로운 사람입니다. 죽여서는 안됩니다”고 간하여서, 조조가 그만두었고, 지습이 공융 부자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고 한다.
아! 신동이라 불린 인물의 결과가 이러할 진대, 중국 고전에서 항상 ‘크게 어리석음은 뛰어남과 같다(大拙若巧)’거나 “7%는 성실하게 삶을 도모하는데 쓰고, 나머지 3%은 어수룩하게 죽음을 대비하는데 쓰라!(留七分正經以度生, 留三分癡&21574以防死.)”는 ‘도광(韜光),‘호도(糊塗)’의 처세방식이 자꾸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