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길 오른 18세, 국채보상 나선 기생… 민초 발자취 따라 ‘진짜 성주’를 걷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별 것 없는 삶의 위대함’ 찾아 떠나는 경북 성주
왜병 피해 고향 떠난 도씨 일가
600년된 은행나무 서있는 마을
추모재 옆 마당의 작은 기념비
부모 업적 아닌 성품 기려 ‘눈길’
사비로 저수지 판 이순흠 비석
물줄기 끌어온 이 기린 공덕비
3대째 국밥집·40년 된 호떡집
전통시장엔 오래된 상점 ‘즐비’

성주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책 한 권으로 여정을 시작하다
여정은 책 한 권에서 시작됐다. ‘용사일기’. 120쪽 남짓의 자그마한 책이다. ‘참전용사’ 할 때의 ‘용사(勇士)’인가 싶었는데, 용(龍)과 뱀(蛇)을 뜻하는 ‘용사(龍蛇)’다. 지은이는 450여 년 전의 인물, 도세순(都世純). 1574년에 나서 1653년에 죽었다.
책 제목의 ‘용(龍)’은 용의 해였던 임진년(壬辰年)을 말하고, ‘사(蛇)’는 뱀의 해였던 계사년(癸蛇年)을 말한다. 그러니까, 용사일기는 ‘임진년부터 계사년까지의 일기’라는 뜻이다. 임진년은 1592년이고, 계사년은 그 이듬해인 1593년.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면, 바로 ‘임진왜란’이다.
용사일기는 경북 성주 작은 마을의 열여덟 소년, 도세순이 임진왜란 때 피란 가서 겪은 모진 고생을 기록한 일기다. 제목과는 달리, 임진년에 시작한 일기는 뱀의 해 계사년이 아니라 을미년, 그러니까 양의 해인 1595년까지 이어진다.
난리가 터지자 도세순은 부모님과 어린 동생, 친인척 등 40여 명과 함께 성주의 산속으로 몸을 숨겼다가 김천, 합천, 군위 등을 전전했다. 그 사연을 적은 일기는 적나라하다. 전쟁의 고통과 피란의 참상이 생생하다. 마을이 불길에 휘말리는 장면부터 무자비한 왜적의 살육과 겁탈까지, 끊이지 않는 전란의 고통을 적었다. 굶주림과 추위, 질병, 도둑질, 죽음…. 그는 전쟁에서 벌어질 수 있는 거의 모든 비참한 상황을 겪었고, 그 얘기를 하나하나 일기로 기록했다.
글깨나 읽었다는 선비들이 남긴 기록 속 임진왜란은 지극히 관념적이다. 사대부들은 눈앞에서 왜병의 학살이 벌어지는데도 명분을 따지고, 충(忠)을 말하며 공훈자 명단을 썼다. 공적은커녕 참전의 이력도 없는 이들이 후손의 출사를 위해 가짜 공적서를 끼워 넣기도 했다. 후세대들은 또 그들대로, 민족주의나 국난극복 사관으로 임진왜란을 해석하면서 ‘영웅’과 의병을 전쟁의 중심에 앞세웠다. 어느 쪽에서든 백성들이 겪었던 고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임진왜란이 전쟁으로서의 실재감이 잘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다.
반면, 용사일기에는 임진왜란의 끔찍한 참상과 그 속에서 고통받았던 백성들의 이야기가 날것처럼 담겨있다. 그의 일기에는 허위의식이 손톱만큼도 없다.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성 얘기 따윈 한 줄도 없다. 조상의 공덕이나, 문중에 대한 과시도 없다. 백성을 지켜주지 못한 나라에 대한 최소한의 원망 혹은 분노조차 없다. 그저 전쟁의 목격담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전쟁으로 인한 가족의 비참한 굶주림,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목격하는 고통만 생생할 따름이다. 430여 년 전, 통곡하며 쓴 한 젊은이의 일기는 뭉클하고 안쓰러웠다.
# 평범한 이들의 자취를 따라서…
도세순의 자취를 찾아 경북 성주로 갔다. 꼭 그것만 보러 간 길은 아니었지만, 그를 마음에 두고 가니 좀 다른 것들이 보였다.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이들이 남긴 소소한 것들에 더 눈길이 갔다. 그 시대를 살았던, 혹은 그 시대를 지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이런 건 모두 숨겨져 있었다. 묻고 또 물어서 허세나 과시가 아닌 진심으로 세운 자그마한 공덕비를 찾았고, 웃음을 팔아 번 돈을 주민들을 위해 아낌없이 기부한 기생 이야기도 들었으며 식민지시대에 노래로 나라 잃은 이들을 위로했던 유랑극단 가수를 기리는 비석도 봤다. 시장통 안에서는 2대, 3대로 이어지는 식당에 들러 뚝배기에 담긴 뜨끈한 국밥을 먹었으며, 대낮에 파리만 날리던 면 행정복지센터 앞 낡은 2층 한옥 다방에서 차를 마셨다.
대신 익숙한 여행지 몇 곳을 목록에서 지웠다. 성주를 대표하는 전통마을인 한개마을, 세종의 아들 18명에다 손자 단종까지 19명의 태를 묻은 세종대왕자 태실, 왕버드나무 무성한 성밖숲, 조선 중기 남인과 북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한강 정구의 회연서원, 그리고 정구가 경영했다는 무흘구곡…. 성주에서 들르게 되는 대표적인 명소는 가지 않았다. 다 좋은 여행지들이다. 하지만, 대체로 관광 명소나 이름난 명승은 이른바 ‘높은 사람’의 공간인 경우가 많다.
“개터의 소나무 아래에 앉아서 마을을 굽어보며 길게 탄식하던 재종숙 아재가 말했다. ‘대대로 내려온 집들이 장차 잿더미가 될 것이고, 조상의 무덤도 반드시 황폐한 구덩이가 될 것이다.’ 모두 눈물을 흘리고 머뭇거리며 차마 이곳을 떠나지 못하였다.”
1592년 4월 20일. 도세순이 피란을 떠나는 날의 일기다. 마을에 남은 ‘아재’가 피란을 말리면서 이렇게 말하자, 거기 모인 일가친척이 모두 눈물을 쏟았다. 이웃 마을에서 불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모든 군사가 적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는 밑도 끝도 없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날 도세순이 앉아 있는 개터는 어디일까. 경북 성주군 벽진면 운정리. 모내기를 막 마친 논 뒤쪽에 600년 된 은행나무 노거수가 서 있다. 정자는 없지만, 은행나무를 정자나무로 삼았다고 해서 ‘은행정 마을’이다. 마을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앞산과 뒷산의 뻐꾸기 울음이 겹쳐서 마치 돌림노래를 하는 듯했다.

# 부둥켜안고 울며 전쟁을 건넌 기록
성주 도씨 집성촌인 이곳에 도세순을 기리는 재각 ‘경암재(景巖齋)’가 있다. 관리가 잘 안 되는 듯하지만 제법 번듯한 건물이다. 문 앞의 나무에는 굵은 오디가 검게 익었다. 재각의 마당에는 말리기 위해 펼쳐놓은 갓 수확한 마늘이 가득하다. 이곳을 지키는 후손 도천호(63) 씨는 경운기를 손보던 중이었다. 그는 도세순이란 이름도, 용사일기란 책도 몰랐다. 당연한 일이었을까. 높은 벼슬을 한 것도, 가문의 명예를 드높인 것도 아니고, 용사일기가 당대의 명문장도 아니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늘 벼슬과 지위로 돌아갔으니까.
대신 후손 도씨는 일기에 나오는 지명을 정확하게 짚었다. ‘개터’가 어디냐고 묻자 그는 손가락을 들어 길 건너 정자 기국정(耆國亭) 뒤쪽의 산자락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벽진중학교 앞 비탈진 사면에 몇 개의 봉분과 소나무가 있었다. 용사일기의 설명과 딱 맞는 자리. 열여덟 도세순이 눈물을 훔치며 가족과 함께 피란길을 출발한 곳이 여기쯤이었을까. 433년 하고도 29일 전, 바로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기서 피란길에 오른 도세순은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 삶과 죽음이 경계를 이룬 칼날 같은 담장 위를 걷는 위태로운 피란길이었다. 성주 성은 함락됐고 왜적이 지른 불로 연기가 하늘을 가렸다. 도둑이 판을 치고 전염병이 창궐했다. 그의 일기를 보자. 적의 추격이 가까워지자 두 동생을 어루만지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내가 너희와 함께 죽는다면, 저승에 가서는 서로 헤어지지 말자.’자식들은 그런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전란의 와중에 기근이 들면서 굶주리는 이들이 지천이었다. 도세순 형제가 굶는 걸 보곤 안쓰러워하던 집안 어른이 동생을 데리고 나가 보리밥을 먹였다. 그런데 그 밥을 허겁지겁 먹던 동생이 그만 숨이 막혀 죽고 말았다.‘아아, 슬프고 괴롭다.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동생을 업고 돌아왔다. 다음날 임시로 묻었다.’ ‘형이 돌아와 동생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세상이 끝난 듯이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처참한 비극의 장면이었다. 도씨의 후손인 ‘용사일기’의 번역자가 후기에서 묻는다. 그는 왜 이런 전란의 참상을 꼼꼼하게 적은 일기를 문집에 담아 후손에게 전하려 했을까.
# 업적 아닌, 성품을 말하는 비석
은행정 마을 북쪽에 역시 도씨 집성촌인 나복실 마을이 있는데, 마을 한복판에 ‘추모재(追慕齋)’란 재각이 있다. 용사일기를 쓴 도세순의 손자, 도처상(都處商)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처상은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글솜씨도 훌륭했고 근면했으며 어려운 이들을 돕기도 했던 모양이었다.
마당에 개 한 마리 묶어놓은 추모재보다 눈길이 갔던 건, 재각 옆집 빈 마당에 서 있던 두 개의 자그마한 화강암 기념비였다. 비석 하나에는 ‘도육성 이한이 생가’란 제목이 적혀있다. 이게 누구일까. 두 인물에 대한 설명이 새겨져 있다.‘도육성 할아버지는… 천하의 호인이며 인자하신 분이다.’ ‘이한이 할머니는… 지혜롭고 총명하고 욕심 많은 여장부이시다.’무슨 무슨 벼슬을 했다거나, 화려한 업적이 아니라 기리는 자의 ‘성품’을 말하는 비석이라니.
그 옆에 또 하나의 비석은 아예 제목도 없이, 아버지·어머니의 품성을 소개하는 문장 각각 하나씩을 새겼다.‘도지환 아버님은… 총명한 두뇌, 공정하고 정의로운 성품, 근면 성실한 태도로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신 분이다.’ ‘유정덕 어머님은… 근검절약하고 참고 인내하며 부지런하신 분으로 항상 그 자리에서 본분을 지키신 분이다.’이 역시 삶의 태도에 대한 서술이다. 비석을 찬찬히 읽으며 느꼈던 건 ‘별것 없는 삶’이 보여주는 도도함이다.
나복실 마을회관에서 주민들로부터 비석의 사연 이야기를 들었다. 마을에서 대를 이어 살다가 지금은 도시로 나간 큰아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리는 비석을 옛집 자리에 세웠다는 설명. 도시로 나가서 제법 성공한 자식의 여유에서 나온 행동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비석을 세운 아들이 ‘화물차 운전을 한다’고 했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비석 하나 세우는 데 그리 많은 돈이 드는 건 아니지만, 그런 마음을 내는 건 보통 경제적 윤택에서 나오는 법. 이건 그렇지 않은 경우다. 부모를 향한 마음이 지극하지 않고서야 그럴 수 없다. 부모의 성정을 묘사한 짧고 담백한 문장에서 자식의 부모에 대한, 그리고 땅에 대한 사랑을 읽는다.
# 기생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 하나
얘기가 나온 김에 성주의 비석 얘기를 더 해보자. 선정비나 공덕비는 백성 손을 빌렸으되 벼슬아치들이 스스로 세운 것이나 진배없는 이른바 ‘관제(官製)’인 경우가 많다. 자신의 덕행을 과시하기 위해 백성들을 들볶아 ‘어거지’로 세운 것이란 얘기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성주에서 지방의 세도가나 수령을 기리는 번듯한 선정비 말고, 낮고 누추한 이들이 진심을 다해 세운 비석들을 찾아봤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용암면 행정복지센터 부근에 ‘앵무빗돌’이다. ‘빗돌’이란 비석을 이르는 말. ‘앵무’는 구한말 서울까지 이름을 날렸다는 기생 ‘염농산’의 예명이다. 앵무빗돌은 마을 주민들이 세워준, 기생 앵무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다. 세도가도 아니고 벼슬아치도 아닌, 신분사회에서 가장 낮은 대접을 받았던 기생을 기리는 비를 여기 세운 까닭은 무엇일까.
염농산은 구한말 유명한 기생이었다. 그는 용암면의 논밭이 해마다 홍수로 쓸려나가는 수해를 입자 1919년 큰돈을 내서 석축제방(두리방천)을 쌓도록 했다. 공덕비는 마음 편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된 마을 주민들이 제방 준공 즈음에 감사함을 잊지 않고자 세운 것이다.
경상감영의 관기(官妓)였던 앵무는 기생 신분임에도 재산을 민족과 사회를 위해 기꺼이 희사했다. 앵무는 배포가 컸다. 국채보상운동을 벌이던 서상돈을 찾아가 당시 집 한 채 값인 100원을 꺼내놓으면서“여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한 푼이라도 더 낼 수 없어서 100원을 내지만, 누구든 몇천 원이나 몇만 원을 낸다면 나도 어떻게든 그만큼 더 내겠다”고 도발적으로 선언하기도 했다.
100년 넘게 지붕도 없는 시멘트 담 안에 안내판도 없이 누추하게 서 있던 빗돌이 안쓰러웠는데, 근래에 비석이 새로 지은 번듯한 비각 안으로 들어갔다.

# 먹고사는 일을 위해 쌓은 공덕
피폐했던 식민지 시절에 ‘먹고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또 있었을까.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웠던 그 시절의 소작농들에게 논에 그득 담긴 물은 생명수나 다름없었다. 마른 논에 물을 대주는 건, 쌀과 밥을 그냥 주는 것이나 진배없는 일. 그러니 사재를 털어 못을 만들어 주는 이른바 ‘수리자선(水利慈善)’은 선행 중의 선행이었다.
성주읍 학산1리 경로회관 가는 길가의 농자재창고 앞에 작은 비석이 있다. 마을을 몇 바퀴 돌면서 묻고 또 물은 뒤에야 어렵게 찾은 것이다. ‘이주사순흠선덕불망비(李主事舜欽善德不忘碑).’ 소작농들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일제강점기 시절, 주사 이순흠이 사비로 저수지를 파서 이웃과 물을 나눴다. 연못을 만든 건 1912년이고, 마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운 건 6년 뒤인 1918년이다.
비석에는 ‘만인의 여론(萬口)’으로 비석이 세워졌으며 ‘연못을 파고, 부역을 덜어주고, 굶주림을 구제한 덕업(德業)을 잊을 수 없어서’ 세운 것이란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비석을 세운 마음이야 지금도 익히 짐작할 수 있지만, 저수지는 다 메워져서 이제 흔적도 없고, 비석의 글씨도 비바람에 희미해졌다. 그 시절의 사연을 아는 마을 사람도 이제는 없다.
수리자선에 대해 말한다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젊어서 국회의원 보좌관도 했고, 언론에도 몸을 담았다는 선남면 출신의 정근후다. 그는 1956년 고향 땅에서 낙동강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 사업을 벌였다. 사재로 밀가루를 사서 나눠주며 진행한 민간 취로사업이었다. ‘낙동강 칠백 리에 강물을 길어 농사짓는 땅은 서 마지기도 안 된다’는 말이 있을 때였다. 수운의 뱃길 역할을 했지만, 낙동강을 농업용수로 쓰지 못했던 시절 이야기다. 물을 대지 못하니 낙동강 주변에 논은 없고, 죄다 밭이었다. 오죽했으면 ‘낙동강에서 자란 처녀는 쌀 두 말을 못 먹어보고 시집간다’는 얘기까지 있었을까.
그가 앞장선 취로사업에 늦게나마 정부 지원이 더해지면서 13㎞에 달하는 수로와 양수장이 만들어졌다. 수로와 양수장 덕에 논에 물을 댈 수 있게 된 이들만 9개 마을 609가구나 됐다. 농업용수는 물론이고 식수와 빨래할 물도 모자랐던 마을 구석구석까지 물줄기가 이어지면서 수박, 참외 등 과수 재배가 이뤄졌고, 마을은 점점 더 부자가 됐다. 1967년 사망한 정근후를 기리는 비석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4년 만인 1981년에 선남면 소학고개 옆에 세워진 이유다. 비석은 마을 주민들이 집집마다 3000원부터 5000원까지 걷어서 세운 것이다.
‘한계정근후선생공덕비(寒溪鄭根厚先生功德碑)’는 고갯길 도로의 철망 너머에 있다. 길이 끊긴 풀숲에 숨어있는 비석은 ‘찾은 게 요행’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길은 없어졌지만 비석은 그나마 누가 관리하는 듯했다. 비석 앞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소학고개를 짐칸 가득 참외를 실은 트럭들이 부지런히 넘어다니고 있었다.

# 고바우식당에서 가수 백년설까지
‘지금’ 성주의 보통 사람들 얘기는 시장통과 오래된 가게에 있다. 성주는 대도시 대구와 가까우면서도 지역 내에서 생산과 소비가 이뤄지는 경제공동체를 유지해왔다. 규모가 작긴 하지만 말이다. 이런 사실은 도시 규모에 비해 월등히 많은 ‘노포(老鋪)’로 확인된다. 성주에는 2대, 3대에 걸쳐 이어지는 가게가 많다. 주인이 바뀌었어도 업종과 간판을 버리지 않고 명맥을 잇는 경우는 더 많다.
워낙 많아서 그런 곳을 다 소개할 수는 없다. 그중 몇 곳을 추려보자. 성주전통시장에는 ‘고바우식당’이 있다. 시장통에서 3대를 이어온 집이다. 지금처럼 다양한 국밥이 없었던 60여 년 전에 고바우식당은 각종 고기 부위와 내장 등을 한데 넣고 푹 끓여낸 ‘장터국밥’을 냈다.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성주에서 이름난 시장 국밥집이다. 고바우식당 옆에는 모아모아식당이 있다. 칼국수와 수제비를 내는데 인기 있는 건, 장날에만 만들어 파는 호떡이다. 식당이 1987년 호떡 노점으로부터 시작했으니 식당의 뿌리가 호떡인 셈이다. 장날에는 호떡 외에도 떡볶이, 순대, 어묵 등을 판다.
시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허리케인’ 식당이 있다. ‘그야말로 옛날식’ 경양식 집이다. 돈가스와 김치, 양송이, 새우 등을 넣은 덮밥(라이스) 종류가 주메뉴. 돈가스는 고기를 두드려서 얇게 편 옛날식. 캐러멜을 넣지 않은 소스가 분홍색에 가깝다. 세대를 건너온 만큼의 내력은 없지만 성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외지로 나갔던 이들이, 다시 성주를 찾으면 가장 먼저 찾아가는 식당이다.
시장통에는 희미한 간판의 흔적으로 남은 오래된 상점의 자취가 곳곳에 있다. 길 쪽으로 툭 튀어나온 진열장의 ‘난미분식’도 그렇고, 버스터미널 근처 2층의 ‘쇼팽 피아노’도 그렇다. 대도시 상점은 비슷한 품목의 가게들끼리 집적(集積)하지만, 중소도시에서는 상점들이 맥락 없이 들어선다. 이발소 옆에 떡집, 그 옆에 채소가게, 또 옆에 전파상, 그리고 꽃집…. 뭐 이런 식인데 이런 것을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아, 하마터면 백년설 노래비를 빼먹을 뻔했다. 성주의 명소로 꼽히는 성밖숲 남쪽 끝의 공영주차장에는 가수 백년설 노래비가 있다. 노래비에는 가수 백년설의 대표곡 ‘나그네 설움’의 가사를 새겼다. 공원의 나무그늘 아래 삼삼오오 모여 장기며 바둑을 두는 동네 노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 노래비를 중심으로 모여든다.
백년설 노래비는 성주역사테마공원에도 있다. 이곳의 노래비에 적힌 건 ‘번지 없는 주막’의 가사다. 백년설의 노래비는,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로 시작하는 조선 개국공신 이직의 시비와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로 시작하는 고려 때 문신 이조년의 ‘다정가’ 등의 시비와 함께 ‘성주 이씨 시비공원’에 서 있다. 백년설 노래비가 성주 이씨 시비공원에 있는 건, 본명이 이갑용인 백년설이 여기 성주읍 출신이면서 성주 이씨이기 때문이다. 내로라하는 역사 인물의 고전 시가도 누구나 아는 이름난 문장이지만, 아무렴 ‘오늘도 걷는다마는…’으로 시작하는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보다야 더 많이 읽히거나 불렸을까.

■ 독용산성 가는 길
독용산성은 ‘성주 12경(景)’ 중 제10경(景)으로 꼽힐 정도로 빼어난 주변 경관을 자랑한다. 단풍 물드는 가을의 경치가 가장 뛰어나지만, 녹음이 가득한 초여름의 싱그러운 풍경도 좋다. 산성은 험준한 산속 깊은 곳에 있어 걸어서 접근하기는 쉽잖다. 성벽 바로 앞까지 임도가 나 있어 승용차를 타고 쉽게 가볼 수 있다. 가천면 금봉리 금봉파크골프장 뒤쪽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독용산성으로 이어지는 임도 입구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