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전북 임실의 섬진강변
醉月
2014. 4. 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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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상류의 물길을 끼고 있는 전북 임실의 덕치초등학교는 지금 만발한 벚꽃으로 교문을 삼고 있습니다. 회문산 아래 화사한 벚꽃을 담장 삼고 있는 이 학교는, 알려져 있다시피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모교이자, 그가 36년 동안 재직했던 학교입니다. 혹시 슬며시 질투가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생으로 6년, 교사로 36년. 여린 강물이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변의 느리고 더디게 사는 사람들 속에서 시인은 이처럼 화려한 봄 풍경을 모두 마흔 두 번이나 보았을 테니까요. 그가 덕치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처음 봤다는 살구나무 한 그루는 생을 다해 베어졌고, 아이들에게 정직과 진실을 가르치던 시인도 이제 늙어 그 학교에서 물러났습니다. 그가 거의 평생을 다닌 덕치초등학교를 추억하면서 쓴 산문의 마지막 줄이 이렇습니다. “섬진강에 꽃이 피었고, 강물에 꽃그늘이 드리워지고 꽃잎이 강물에 흩날린다. 사람들아! 그 강물 위의 꽃잎이 세상을 향한 내 사랑인 줄 알거라.” 마침 시인이 이 글을 썼을 때도 지금처럼 화사한 봄날의 한복판이었던 모양입니다. 봄날의 섬진강이라면 아마 다들 첫 봄꽃인 매화와 산수유의 화신(花信)이 당도하는 섬진강 하류의 전남 구례와 광양, 그리고 경남 하동을 떠올립니다. 지류의 물을 받아서 몸집을 불린 섬진강 하류 쪽은 온통 흐드러지는 꽃으로 봄 내내 소란스럽습니다. 섬진강 하류에서 봄꽃은 시작되지만, 매화 꽃잎이 분분히 날려 강물에 떠내려가고 난 뒤에 섬진강의 아름다움은 단연코 섬진강의 상류 쪽에 오래 머뭅니다. 섬진강 상류는 만발한 꽃으로 화려하지도, 몰려든 행락객들로 떠들썩하지도 않습니다. 봄기운을 빨아들인 강변의 신록을 끼고 흘러 내려온 강물이 그저 고요하게 흐를 뿐입니다. 그 물길을 따라서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강변의 작은 마을들이 가득찬 평화로 출렁거립니다. 그 강변길에서 논둑에 나와 삽을 씻거나 농기구를 정리하면서 한 해 농사를 준비하는 순한 이들과 나누는 가벼운 목례만으로도 가슴은 따스해집니다. 이런 풍경을 찾아 전북 임실의 섬진강변을 따라가 봤습니다. 자전거도로를 만든다며 강변의 나무를 베어내고 아스팔트 도로를 놓아버려 영 예전의 맛을 잃어버린 길도 있었지만, 강을 거슬러 실타래처럼 갈래갈래 펼쳐진 물길을 되짚으면 아직 포클레인 삽날에 다치지 않은 우리 강의 본래 모습쯤은 어렵잖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섬진강을 이루는 임실의 오수천 방죽길도, 부드러운 천담마을길도, 옥정호의 호반길도 그런 곳 중의 하나입니다. 목적지가 따로 없으니 바쁠 것도 없습니다. 섬진강 자락을 따라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벚꽃은 이제 섬진강 상류에도 절정을 넘겼으니 이제 곧 시인이 ‘세상을 향한 내 사랑’이라고 말한 벚꽃잎이 섬진강의 맑은 물길을 떠내려갈 것입니다.
# 섬진강 상류, 연둣빛 신록으로 물들다. 섬진강 상류의 물길은 지금 온통 연두색 신록으로 반짝이고 있다. 봄꽃이 이르더니, 신록은 더 과속이다. 강둑은 벌써 새잎을 낸 풀들로 벨벳처럼 윤이 나는 초록이다. 물이 한껏 오른 강변의 버드나무 가지에도 연두색 순한 이파리가 새로 돋았다. 초록이 저리 환할 수가 없다. 섬진강 상류에는 화선지 위에 둠뿍 찍은 수채화 물감처럼 초록이 번져 나가고 있다. 붓을 들어 찍은 자리마다 초록의 채도가 다르다. 봄날의 강물이 가장 맑아 보이는 것도, 물소리가 이맘때 더 청아하게 들리는 것도 다 초록 덕분인 듯하다. 봄날의 섬진강변을 따라간다. 내비게이션에 입력할 첫 목적지는 전북 임실의 ‘천담교’다. 임실의 강진면사무소에서 순창의 동계면사무소로 이어지는 717번 지방도. 그 딱 중간쯤에 섬진강을 건너는 자그마한 다리 천담교가 있다. 다리를 건너면 길은 T자다. 왼쪽으로 꺾어지면 섬진강변의 천담마을과 구담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 길은 진뫼마을을 지나서 덕치초등학교까지 이어진다. 두 길을 놓고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망설일 건 없다. 그냥 두 길을 다 걸으면 된다. 부드러운 흐름의 강을 따라가는 길이니 오르내림은 없다. 이 길이나 저 길이나 다 순하다. 필요한 건 시간일 텐데, 애초에 봄날의 섬진강을 걷겠다고 나선 길이라면 느긋하게 여유를 두자. 봄날의 구경을 흔히 ‘완상(玩賞)’이라고 한다. ‘희롱할 완(玩)’자. 한마디로 ‘논다’는 얘기다. 봄볕에 놀자는 데 바쁠 일이 뭐 있을까.
# 아름다운 시절…구담마을 가는 길 선택은 필요없지만, 길을 밟는 순서는 있다. 먼저 막다른 길부터. 천담마을과 구담마을로 이어지는 길이 강의 물길에 닿아 끊긴다. 이쪽 길의 정취는 일찌감치 알려졌다. 1998년 이 길 끝의 구담마을과 천담마을에서 찍은 영화 한 편이 꼭꼭 숨어 있던 이 길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렸다. 이광모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시절’이다. 6·25전쟁을 전후한 시기, 영화는 좌우익의 대립과 가난으로 가장 혹독했던 시절을 가로지른다. 실제로도 구담마을 일대는 회문산을 근거지로 한 빨치산과 토벌대의 비극의 생채기가 깊이 파였던 지역이다. 이런 영화에 ‘아름다운 시절’이란 제목을 붙인 건 마땅히 역설로 풀이할 것이지만, 스크린 속에 펼쳐진 구담마을 일대의 풍경만큼은 탄성이 나올 정도로 눈부셨다. 영화가 개봉되고 화면 속의 강변마을이 알려지면서 외지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구담마을에 한때 관광객들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곧 영화는 잊어졌고, 외지인의 발길도 뜸해졌다. 그러나 영화가 잊어진 지금에도 구담마을 끝 당산나무 언덕의 정취는 여전하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강 풍경은 섬진강 전체를 통틀어 본다 해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특히 요즘 같은 봄날의 풍경이 그렇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과 그 물을 건너는 징검다리, 강둑에 무성한 지난가을의 억새와 새로 돋은 초록의 풀, 신록으로 물들기 시작한 나무들…. 이 자리에서는 딱히 무엇을 봐야 하는 게 아니라,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그러니 사진으로 담기에도 요령부득이고, ‘거기 가면 어떤 경치가 좋으냐’는 질문에도 딱히 답할 수 없다. 직접 가서 봐야 그 아름다움을 안다는 뜻이다. 천담교에서 구담마을까지는 편도 3㎞ 남짓. 길이 순해서 간 길을 그대로 되짚어 나온다 해도 1시간 30분이면 넉넉하다. # 꽃으로 교문을 삼다…덕치초등학교
길은 몇 개의 시비와 김용택 시인의 생가를 지나고 환경단체로부터 ‘풀꽃상’을 받은 정자나무도 지나 강변에 딱 붙어 이어진다. 이윽고 자그마한 다리를 건너가면 덕치초등학교가 있다. 섬진강을 발치에 두고 야트막한 언덕 위 학교의 건물은 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강을 따라가다가 왼편으로 키 큰 벚나무들이 늘어서 터트린 꽃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곳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 덕치초등학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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