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이 예민하거나 프라이버시 침해가 정말 싫은 사람은 한옥을 피하는 것이 좋다. 한옥의 장점은 매우 세밀하고 섬세한 것이어서 적성에도 맞고 그것을 잘 알고 즐길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크나큰 선물을 선사할 것이나 그렇지 못하다면 별무효과이고 오히려 불편할 수도 있다. 다도(茶道)와 같다. 티백으로 된 녹차 마신다고 어디 가서 다도라고 할 수 없듯이, 한옥에도 도가 있어서 이것을 지키고 즐길 줄 알아야 한옥에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가부장의 사랑채가 중심이 되고, 안채는 어미 품처럼 자잘한 채를 넉넉히 품는다

한옥은 먼발치서 전체 모습을 봐야 한다. 집은 주인의 얼굴이자 성품이다. 한국에서 나이 먹는 지혜 가운데 하나가 먼발치서 뒷짐 지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집의 앉은 품새를 보고 그 집의 가운을 읽어내는 일이다. 집의 전경에서는 그만큼 집 주인과 가족에 대한 많은 정보가 읽힌다. 하물며 유교문명 시대 때 농촌 지역공동체의 지배계층 주거였던 한옥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한옥의 전경은 집 주인의 인격미의 발로이다. 유교적 형식과 사회적 격식을 두루 갖추면서도 노장사상을 바닥에 깔아 아기자기한 공예미를 잊지 않았다. 엄격하면서도 소탈한 양면성이 동시에 느껴진다. | |

창덕궁 낙선재 이 집은 긴 수평선을 중심으로 지붕의 구성미와 담의 장식미가 잘 어우러진 조화가 뛰어나다. 기회의 검고 강한 수평선은 장미(壯美)를 빌려 직설적 명쾌함을 이뤘다.대상의 미적 가치가 막힘없이 구현되는 정심(情深)의 경지이다. |
산을 등지고 논밭 한가운데 뿌리박듯 자리 잡은 한옥의 전경은 참으로 볼만한 거리이다. 안정적 수평선을 긋지만 그 속에서 크고 작은 지붕과 몸통이 사이좋게 어울린다. 유교문명의 위계를 반영하지만 더 깊은 속뜻은 그 위계가 서로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어울림을 노린다는 점이다. 유교사상의 가장 밑바닥에 ‘인(仁)’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한옥의 전경에서는 어울림의 미학을 읽어내야 한다. 가문을 책임 진 가부장의 사랑채가 중심을 잡지만 안채와의 다소곳한 어울림을 잊지 않는다. 안채는 어미의 품처럼 자잘한 채들을 넉넉하게 품는다.
공중에서 전체 구성을 보면 또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바깥행랑채, 사랑채, 안행랑채, 안채를 기본으로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채가 분화하고 이것들을 담는 마당이 짜이며 그 사이를 담이 가르고 문이 난다. 건곤이감 의 8괘를 이리 키우고 저리 잘라 사각형 맞추기를 한 것 같다. 오묘한 우주의 구성을 인간세계로 단순화시켜 놓은 구성이니 상대성의 변화무쌍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때로는 길한 한자를 본떠 복을 빌기도 했다. 채를 나누고 마당을 가르는 데에도 목적과 법칙이 있었다는 뜻이다. 모두 땅 위에 터 잡고 사는 인간살이를 평화롭게 보듬기 위한 것이었다. | |

규칙성을 거부하는 한옥의 창문 구성

최근 우리 사회는 집을 끼고 양극단을 오가며 방황하고 있다. 부동산 투기의 광풍이 주기적으로 나라를 휩쓸며 집을 망쳐놓고 있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참살이 바람이 불고 있고 집도 이것의 주요 대상이 되고 있다. 다소 제한적이긴 하지만 집을 둘러싼 참살이 대상에 한옥이 자주 거론된다. 부동산 광풍에 한옥 바람이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한옥이 조금 밀리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긍정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 내용은 한옥이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한옥의 과학성은 주로 콘크리트와 유리 중심의 산업화된 근대식 집에 대한 대안으로 거론된다.
물론 이것은 맞는 말이다. 한옥은 분명히 새집 증후군과 냉난방의 문제점에 대한 훌륭한 대안이다. 나무, 흙, 창호지, 기와 같은 자연재료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인체의 생체 리듬과 일체가 되며 열 조절 능력도 뛰어나다. 이 때문에 실내 마감재에 자연재료를 섞은 재료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은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많이 부족하다. 이것은 반드시 한옥이 아니라도 전통재료라는 관점에서 찾을 수 있는 장점들이다. 한옥은 건축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것 말고 훨씬 크고 중요한 장점들이 많다. 한옥에서 나무나 흙만 떼어내 그것을 장점이라고 하는 것은 한옥을 모욕하는 일이다. 한옥은 통째로 그 속에서 살아야 참다운 장점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리얼리즘, 인상, 순환 공간의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 |

오죽현 한옥의 창문은 어미가 새끼를 데리고 있는 친자의 정을 표현한다. |
리얼리즘은 창문의 구성에 잘 드러난다. 한옥의 창문은 불규칙하다. 행랑채처럼 기능이 중시되는 채를 제외하고 같은 창이 반복되는 법은 드물다. 이유가 있다. 너무 빤하기 때문에 너무 위대한 이유이다. 그냥 그게 좋아서이다. 조금 따져보자. 한 집에는 각기 다른 다양한 구성원들이 있다. 이들이 자신들의 방에서 바라는 것들은 모두 다르다. 각 방들도 처한 상황들이 다 다르다. 방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다르다. 식구들이 각자 방을 차지하고 생활한다는 것은 이처럼 여러 변수를 가지고 있다. 절대 한 가지 같은 패턴으로 고정될 수 없는 이유이다. 한옥처럼 각 방의 창들이 제각각 다르게 나타나야 하는 이유이다. 이 창문이 이 크기 이 형상으로 이쪽 구석에, 저 창문이 저 크기 저 형상으로 저쪽 위에 난 이유는 그것이 그 방속에 사는 사람한테 가장 잘 맞기 때문이다.
한옥은 가족살이를 건축적으로 드러낸다

이런 상식적인 이유가 왜 위대한가. 창문은 방 안에 사는 사람이 외부와 소통하는 숨통이다. 경치나 옆방 같은 주변 환경에 대한 태도에서부터 햇빛, 바람, 하늘 같은 자연 환경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런 태도들은 방 안에 사는 사람의 정신적, 심리적, 정서적 건강과 직결되는 중요성을 갖는다. 방안에 사는 사람들이 각각의 인격체로서 모두 다른 개성이 있고 그런 다름이 존중되고 지켜져야 되는 것과 똑같이 창문도 크기, 형상, 위치, 개수 등에서 자유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이런 자유가 한옥에 나타난 리얼리즘의 첫 번째 요체이다. | |

선교장 창문이 여럿 모이면 가족살이를 그대로 드러낸다. 각자 자기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편하게 어울리는 모습이다. |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옥의 창문은 한국의 전통적인 민족정서나 인간관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리얼리즘의 정수이다. 한옥의 창문들을 보고 있노라면 고즈넉한 겸손이나 넉넉한 여유 같은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가 물씬 느껴진다. 이런 정서를 대표하는 것이 가족살이에 유추될 수 있는 인간관계이다. 한옥의 창문에는 이 가운데에서도 부모와 자식 사이의 친자의 정이 특히 많이 표현된다. 큰 창문이 작은 창문을 데리고 나란히 나 있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훈훈해진다. 너무나 닮은 모습으로 친자의 정을 표현한다. 어미가 새끼를 거느린 형국이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이 한 마디면 충분하다. 모든 한국인들이 가슴 시려하며 똑같이 나누어 갖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정서이다. 작은 창문의 방이 자녀의 방이고 큰 창문의 방이 부모의 방이기 때문에 이런 은유는 더 제격이다.
인상은 품새에 잘 나타난다. 품새란 집의 내용과 형식 사이의 일체를 의미한다. 외관에 나타나는 집의 모습은 형식이며 이것은 그 집에서 살아가는 가족들의 분위기인 내용이 반영된 결과라는 의미이다. 품새란 내용으로 말미암는 형식이 얼마나 보기 좋고 품위가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이다 혹은 형식이 표현해주는 내용이 얼마나 내실 있고 격조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이다. 인상은 이런 품새의 종합적 상태이다.
한옥의 전경은 인상을 드러낸다. 멀리서 눈을 지그시 감고 뒷짐을 진 채 집의 앉은 품새를 보면 그 집의 길흉과 가풍을 점칠 수 있는 우리만의 전통적인 지혜, 이것이 한옥이 갖는 인상의 기능이다. 한 마디로 집안이 경박한지 점잖은지가 가감 없이 진솔하게 집의 외관과 모습에 반영된 상태를 의미한다. 사람의 얼굴 인상조차도 마음속 상태의 발로일진대 집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싸움이 잦은 집안은 서까래 하나를 올려도 티가 나는 법이다. 반대로 화목한 집안은 문짝 하나를 달아도 또 티가 나는 법이다. | |

안동 전주 류씨 무실종택(수곡종택) 반듯한 품새와 수평선의 중첩을 통해 탕탕한 기운을 집의 인상으로 보여준다. |
정이 깊고 기가 융성하는 한옥
인상은 정심(情深)과 기성(氣盛)으로 발전한다. 정심이란 말 그대로 정이 깊은 상태를 의미하는데, 집에 적용시키면 건축 구성의 반듯함, 장식사용의 똑바름, 축조의 알맞은 짜임새 등과 같이 건설 단계에서 확보되는 외형적 감정이다. 집을 지은 목적, 장인의 건축 행위, 집 주인의 기대와 성품 등이 하나로 어우러져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힘이다. 가세를 솔직하게 표현하려는 것 이상의 욕심을 바라지 않는 절욕의 멋이다. 과시적 허망을 배제한 상태가 만들어내는 집의 정직한 품격이다. 기성은 정심이 발전해서 기가 전성을 누리는 상태이다. 집에서 느껴지는 인간적 풍부함, 쓰임새의 친절함, 인간을 돕고자 하는 친밀감과 우호감, 탕탕한 가풍, 호연한 풍모 등에 유추될 수 있다. | |
정심의 상태로 지어진 집을 오랜 기간 즐겁게 사용하다 보면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기품이 쌓인 상태이다. 집은 사람을 이롭게 하고 사람은 집을 아끼는 상호 존중과 애호가 쌓여 집안이 화목하고 융성해진 상태이다. 혹은 이런 상태에서만 느낄 수 있는,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애(靄靄)와 풍요의 상태이다.
순환 공간은 전체 구성에 잘 나타난다. 한옥의 실내 구성은 막히거나 일직선이 아니라 돌고 돈다. 술래잡기를 해보면 안다. 숨을 곳도 많고 도망칠 구멍도 많다. 순환성이다. 순환은 여러 형식으로 나타난다.
외부에서 창과 방을 지난다고 끝이 아니라 다시 외부로 나올 수 있다. 그랬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며 또 다시 외부로 나갈 수 있다. 각 방들은 크기와 위치가 조금씩 어긋나지만 창을 모두 열면 꼬챙이로 꿸 수 있는 일직선 축이 형성된다. 이 축은 곧 바람이 통하는 길이다. 순환이란 ‘통(通)’이다. 통은 자연현상 가운데 음양이 협조하고 정기가 유창하여 아름다움에 이른 상태로 정의된다. 한비는 말한다. “자연에서는 음양(=정기)이 작동하고 변화하여 만물을 만들어낸다. 날고 달리기에 나아가며, 아름답기에 좋고, 자라기에 기르며, 지혜롭기에 맑은 상태이다. 물을 뚫어 썩음을 막고 병을 쫓아 악을 차단한다.” | |
|
하회마을 북촌댁 한옥의 공간은 순환한다.막힘 없이 통한다.
| |
순환 공간은 한 마디로 집 안 내부적으로, 그리고 집 안과 집 밖 사이에 막힘이 없이 두루 통한다는 의미이다. 여름에 바람을 받아들이고 겨울에 햇빛을 받아들이는 열린 자연관이라는 의미이다. 이 방과 저 방 사이에 단절이 아닌 소통이 유지된다는 의미이다.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되 다양한 간접 소통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자연과 통하니 육체가 건강하고 사람과 통하니 정신과 마음이 건강하다. 집이 인간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를 해준 셈이다. 집이 인간에게 병을 주고 인간의 마음을 해치는 콘크리트 아파트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우월성이다. | |

‘풍경작용’은 한옥이 주변과 어울리는 구체적 전략이다

집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주변 속에 들어있다. 집이 ‘나’라면 주변은 나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이다. 내가 이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듯 집도 주변과 ‘관계 맺기’를 해야 된다. 풍경작용은 집이 주변과 관계를 맺게 해주는 직접적 통로이다. 집이 주변과 친해지고 싶어하는 살가움을 보여준다. 주변과 어울리고 싶어하는 친화력을 보여준다. 실제로 친해지는 구체적 전략이자 이를 구현하는 건축적 기법이다. 집은 풍경작용이라는 매우 우아하고 문화적이면서 예술적인 방식을 통해 주변과 소통하고 한몸으로 작동한다. 한옥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한옥을 집만 봐서는 안 된다. 주변과 일심동체이기 때문에 주변과 함께 봐야 하는데 풍경작용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풍경작용이란 무엇인가. 집이 창을 통해 주변을 하나의 풍경화처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창은 액자를 이루기 때문에 필수적이다. 이는 창의 본래 기능에 가장 충실한 작용이기도 하다. | |
본래 창이란 ‘안과 밖을 소통시키고 이어주기 위해 건물 벽에 뚫은 구멍’이니 풍경작용은 여기에 ‘딱’이다. 소통에는 말도 있고 얼굴 보여주기도 있고 바람 들이기도 있는데, 풍경작용도 중요한 요소이다. 집 밖의 상황을 하나의 경치로 만든 다음, 이것을 그림 그리듯 창 속에 한 폭의 풍경화로 집어넣고 감상하는 방식이니, 창을 통해 주변과 소통하는 방식치고는 참으로 고상하기 이를 데 없다 하겠다.
풍경작용을 보면 한옥이 주변을 얼마나 소중하게 대하는지 알 수 있다. 주체인 내가 객체인 다른 사람을 존중하면서 친하게 어울린다는 뜻이니, 유교의 핵심적 가치인 어울림의 미학을 집에 실어낸 좋은 예이다. 유교문명의 대표적 주거형식인 한옥이 자기 시대의 가치관을 구현해낸 예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가치를 불이사상으로 더 강하게 추천한다. 세상의 분별심과 편 가름은 모두 내 아집과 탐욕에서 비롯된 부질없는 허망이니 본래 너와 나도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한옥은 ‘나쁜’ 집이 아니라 ‘좋은’ 집이다. ‘나쁘다’는 ‘나뿐이다’에서 온 말이고 ‘좋다’는 ‘조화롭다’에서 온 말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밀접한 한 쌍을 상징하는 관계가 많다. 음양의 조화는 우주의 이치이니 사이 좋은 남녀 관계가 그 중 으뜸이라 할 수 있다. 부부는 그 최고봉이니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어도 부부관계만 좋으면 거뜬히 살아낼 수 있다. 집과 주변도 밀접한 한 쌍이 될 수 있는, 되어야만 하는 관계이다.
사람이 밖과 단절된 집 안에만 살다 보면 감성은 황폐해지고 고집만 늘고 나만 알게 된다. ‘나뿐’인 ‘나쁜’ 사람이 되어간다. 집과 주변은 음양의 관계이니 둘이 화합하면 만사가 형통하고 기가 잘 돌아가서 마음이 건강해진다. 한옥은 금술 좋은 부부가 서로를 아끼고 보듬듯 끊임없이 주변에 관심을 쏟고 집중해서 집의 지평을 넓힌다. | |
|
소쇄원 광풍각 한옥의 창에 담기는 풍경은 바람소리도 나고 풀냄새 도 나는 오감작용의 대상이다. | |
풍경작용을 즐기는 일은 한옥이 주는 큰 은혜이다

권위 있는 한옥은 마당에 나무 한 그루를 심어도 그냥 심지 않는다. 반대로 방 안에서 보면 창이나 문을 낼 때 아무 곳에나 내지 않는다. 둘이 함께 어울려 풍경화 한 폭을 그릴 수 있는 위치에 나무를 심고 창을 낸다. 모든 창과 모든 나무가 이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중요한 포인트에 대해서는 분명히 이렇게 한다. 따라서 품격 있는 한옥을 구별해내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집 안의 중요한 포인트에 풍경작용을 실어냈는지의 여부이다. 무심코 문을 열었는데 눈앞에 갑자기 찬란한 풍경화 한 폭이 펼쳐진다면 일단 화들짝 놀라며 반가워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심호흡과 함께 천천히, 즐거운 마음으로 실컷 감상할 것이며 감상료로 그 집의 품격과 권위를 찬사하면 된다. 풍경작용의 참뜻을 알고 그곳에 심고 그곳에 낸 것이니 집을 지은 장인의 안목과 그것을 지휘한 집 주인의 안목과 감성이 보통을 훌쩍 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집에 한평생 살면서 그것을 즐겼다는 말이니 그 집살이가 얼마나 신나고 감성적이고 즐겁고 고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
|
윤증고택 한옥의 창은 그냥 낸 것이 아니다.보기좋은 풍경을 담으려는 고민의 결과이다. |
한규설 대감가 나무 한 그루를 심어도 창과의 대응 관계를 생각한다. |
나무 한 그루뿐 아니다. 한옥은 여러 채로 구성되고 꺾임이 많고 마당도 여럿이라 채와 채가 서로 대면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한다. 창이 그려내는 풍경화 속에는 내 집의 다른 부분이 들어갈 수도 있고, 마당의 넉넉함이 담길 수도 있다. 담 너머 먼 산이 여유를 부릴 수도 있고 수 십 개 장독대가 도열할 수도 있으며 굴뚝 하나가 선명하게 박힐 수도 있다. 집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올 수도 있고 건넌방 자식 놈 방문 하나로 꽉 채울 수도 있다. 모두 창이 풍경작용을 통해 주변을 담아내고 주변과 소통하고 주변을 안아주는 다양한 내용들이다.
집 안에 수십 장의 풍경화를 장르별로 다양하게 걸어놓은 셈이니 한옥이 왜 좋은 집인지를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한옥을 짓고 살았던 조선 선비의 문화적 안목과 예술적 감성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나무라도 한 그루 들어있으면 이놈이 계절 따라 잎이 나고 무성해졌다가 단풍이 지고 나목으로 벌거벗는 변신이 그대로 풍경화의 다양한 종류가 된다. 창 하나에서 이렇게 다양한 풍경화를 그려내니 집안 전체는 하나의 큰 미술관이 된다. 그것도 액자 속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자연 미술관이다. 기막힌 심미적 전략이요, 은혜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집권 지배계층은 세계관을 형성하는 거시적 안목에서 하루하루 벌어지는 미시적 통치에 이르기까지 예술적 안목을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다. 예술을 알아야 세상 이치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고, 그런 다음에야 나랏일을 경영하고 정적과 맞서 정책을 수립하고 국민을 다스릴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난 치고 풍류를 즐기는 일이 겉으로 드러난 경우인데, 한옥의 풍경작용은 숨어있는 그런 예술적 안목의 진수이다.
풍경작용은 최고의 놀이이다

한옥은 변화무쌍하다. 한시도 같은 모습으로 있질 못한다. 한옥을 겉으로만 한 바퀴 돌며 보아 넘기면 무거운 지붕을 머리에 이고 무뚝뚝한 사내처럼 굳어져 있는 것으로 느끼기 십상이다. 정반대이다. 재기 발랄하고 방정맞고 요동치듯 수시로 변한다. 집안에 들어가서 수많은 창을 직접 열었다 닫아보면 안다. 풍경작용은 그 핵심에 있다.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외적 형식이 집의 골격과 창의 다양성이라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 풍경작용이다. 한옥에 창이 많고 위치와 크기와 모양도 제각각인 이유이기도 하다. 다양성과 변화무쌍함을 확실한 목표로 삼아 치밀하게 짠 정교한 유기체 같다. | |

김동수고택 창을 통한 다양한 풍경작용은 집을 하나의 놀이터로 만든다. |
다양성과 변화무쌍함은 한옥을 하나의 큰 장난감으로 만든다. 그 자체가 하나의 놀이터이다. 한옥을 반가의 딱딱한 권력과 동의어로 보면 한없이 근엄하고 거리감이 느껴지고 무섭기까지 하지만 실은 즐거운 놀이기능을 갖춘 요술집이다. 풍경작용은 그 핵심에 있다. 이 자체가 즐거운 놀이기능을 갖는다. 지금처럼 감각적 놀이문화가 없던 시절, 집에서 즐길 수 있는 풍경작용은 분명 큰 놀이기능을 가졌을 것이다. 풍경놀이에서 느껴지는 풍성한 감성작용이 좋은 증거이다. 거꾸로, 요즘 집은 이런 놀이기능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집밖에서 놀이를 찾고 결국 유흥 퇴폐문화로 이어진다.
풍경작용이 갖는 놀이기능은 집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상호작용을 늘려 둘 사이를 친하게 만든다. 한옥이 체험적이고 감각적인 이유이다. 풍경작용은 오감 가운데 시각으로 시작한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다름 감각과 협동 작업을 펼친다. 액자 속 풍경이 살아있는 실체라서 오감으로 교류할 수 있다. 부엌 풍경이라면 밥하는 냄새가 날 것이고 꽃 풍경이라면 향기가 날 것이다. 건넌방 자식놈 방이라면 애들 웃음소리가 피어날 것이다. 나무라면 바람소리를 방 안까지 들려줄 것이다. 바람은 계절의 냄새를 실어주고 땀을 식혀준다. 풍경화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격이다. 마당 가득 들어온 햇빛은 풍경을 찬란하게 만들 뿐 아니라 방 안까지 파고들어 사람의 몸과 피부와 부드럽게 교감한다. 풍경작용은 이렇게 오감과 어울리며 온몸의 감각을 희열로 곤두세운다. 마음 가득 흠뻑 흥이 잔뜩 오른다. 기막힌 놀이이다. | |

창이라는 액자

창의 건축적 정의는 ‘방 안과 밖을 소통하기 위해 벽에 뚫은 구멍’이다. 사람과 밥상이 드나들고 목소리가 들리며 바람이 흐른다. 햇빛도 빠질 수 없는 주요 이용객이다. 소통에는 보는 것도 있다. 경치 감상이다. 창을 통해 무엇을 보는가는 한 평생 사람의 감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요한 환경요인이다. 만약 이것을 보다 본격적이고 의도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면 그 집은 사람에게 매우 이로울 수 있다. 한옥이 그렇다. 한옥에서는 창을 창으로 보지 않았다.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액자로 봤다. 한옥에 유난히 창과 문이 많은 이유이기도 한데, 선조들은 집에 앉아서 창과 문을 여닫을 때마다 수없이 다양하게 변하는 풍경을 만들어 보는 놀이를 즐겼다. 그 경치는 물감으로 그린 가짜 평면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3차원 실체이니 풍경화보다 훨씬 다이내믹하고 사실적이었다. | |

정여창 고택 사랑채 대청 대청 전면에 집안 전경을 큰 풍경화로 내건 격이니,가문과 집안을 이끌어가며 책임지는 유교다운 가부장에 제격이다. |
차경이다. 말 그래도 경치를 빌린다는 뜻이다. 가지려 하지 않고 잠시 빌려서 즐긴다. 소유해서 벽에 거는 그림과 달리 풍경 요소를 그대로 존재하게 한 뒤 그것을 빌려서 살아있는 풍경화를 그렸다. ‘소유 대 존재’의 화두에서 존재를 선택한 것이다. 붓 한 번 들지 않고 물감 한 번 찍지 않고 실로 다양하게 변하는 수십 장, 심지어 수백 장의 풍경화를 집안 곳곳에 걸어두었다. 하루 시간대에 따라, 일 년 시절에 따라, 또 날씨와 마음 상태에 따라, 그도 아니면 그저 눈길 가는 데 따라, 집안에는 늘 살아 숨 쉬는 다양한 풍경화를 구비해 두었다.
창만 있으면 풍경작용은 늘 일어나게 마련이니 특별할 것 없어 보일 수도 있다. ‘넓은 창을 통해 바깥 경치 보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집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능 가운데 하나이다. 한옥의 풍경작용은 색다르다. “눈만 달리면 본다”는 일반론과는 차원이 다르다. 분명한 의도 아래 아주 치밀하고 섬세하게 기획했다는 뜻이다. 조선 양반들은 한옥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풍경화 전시장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아마도 자신들 계급 권력의 기반을 문(文)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이란 글과 사상이 바탕을 이루지만 풍류도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 |
감각놀이를 즐기게 해주는 풍경작용

즐기되, 집의 창문을 액자처럼 활용해서 쉼 없이 변하는 풍경화 수십 장, 수백 장을 집안 곳곳에 걸어놓고 즐긴 것이다. 서양의 귀족도 예술사상을 중요한 통치 기반으로 삼았다지만 이렇게까지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공부만으로는 안 되는 법, 타고난 기질과 직관적 감성, 그리고 국민성 등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한국의 국민성은 자잘한 놀이를 좋아하고 다양성을 즐기는 상대주의가 강하다. 나의 바깥에 있는 객체나 자연과 동등한 입장에서 마음을 주고받고 감성을 교류하려는 인생관을 가졌다.
풍류에는 난초 정도는 칠 줄 알아야 무릇 양반이라 할 수 있는 예술적 감성도 들어 있었고, 자연과 하나 되어 어깨를 들썩일 수 있는 정신적 여유도 들어 있었다. 이같은 여러 배경들이 합해져 집을 풍류를 즐길 수 있는 하나의 큰 놀이터로 파악하고 그 가능성을 극대화해 집 곳곳에 심었다. 직접적 풍류는 물론 계곡 속 정자에서 벌일 일이지만, 일상생활 자체를 하나의 풍류로 보았고 집을 그 놀이터로 삼은 것이다.
풍경작용을 기준으로 보면 한옥은 참으로 감각적인 집이다.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를 온전히 놔두지 않고 감각적으로 즐기기에 제일 좋은 방식으로 창속에 담는다. 굴뚝 하나 건넌방 문 하나도 마찬가지이다. 담과 문, 장독과 댓돌, 기와와 문살, 기둥과 서까래, 눈과 신록, 낙엽과 단풍, 심지어 먼 산과 하늘과 햇빛까지 담을 수 있는 건 모두 담아 즐겼다. 즐기는 방식도 다양하다. 활짝 열어젖히며, 코앞에서 대면하듯, 손을 뻗쳐 애무하듯, 옆으로 삐딱하게, 숨어서 관음하듯, 낮은 목소리로 속마음을 트듯, 마주보며 호탕하게 웃듯, 어미가 자식을 품에 안듯, 반가운 친구와 악수하듯 끝이 없다. 뭉툭 그려, 우리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관계를 그대로 풍경작용에 옮겨 놓았다. 내 몸이 생활하는 감성의 흐름과 감각의 궤적을 집에 실어서 자연스럽게 집과 하나가 될 때 가능한 일이다.
| |
|
창덕궁 연경당 안채 5월 맑은 날 낮에 미닫이 문을 액자로 삼아 신록을 풍경으로 담았다.풍경요소와 한층 친밀해져 활기찬 하루를 즐기게 해주는 심리작용을 한다. | |
오감의 교류를 살리는 풍경놀이

한옥의 풍경작용은 시각작용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오감으로 가고야 만다. 어쩔 수 없는 한옥의 이치이다. 한옥 자체가 오감 작용이 뛰어난 집이려니와, 풍경작용은 이것이 잘 드러나는 통로이다. 풍경요소가 살아있는 실체라서 오감으로 교류할 수 있다. 부엌이라면 밥하는 냄새가 날 것이고 꽃이라면 향기가 날 것이다. 나무라면 바람소리를 방 안까지 불어 들려줄 것이다. 계절의 냄새를 실어주고 땀을 식혀준다. 마당 가득 찬 햇빛은 풍경을 찬란하게 만들 뿐 아니라 방안까지 파고들어 몸뚱이와 피부에 비벼댄다. 비타민을 선물하고 체온을 올린다. 풍경작용은 이런 것들과 함께 어울리고 온몸의 감각은 희열에 곤두선다. 방바닥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내 손으로 직접 창을 조작해서 풍경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오감으로 흠뻑 즐겨 마음 가득 흥을 채울 수 있다. | |
|
윤증고택 사랑채 1월 눈 오는 날 늦은 오후에 여닫이문을 액자로 삼아 뒤뜰 장독을 풍경으로 담았다.풍경요소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침작하게 하루를 마감하는 심리작용을 한다. |
정여창 고택 사랑채 방 한 사람의 남자로 침잠하고 싶을 때 에는 방에 들어 소박한 풍경을 즐기면 된다.차라도 한 잔 하면 서 센티멘털리즘에 빠질 수 있게 해준다. |
단순히 창 열어서 풍경을 담아낸다고 끝이 아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잔 감각에 유난히 예민하고 세상을 지극히 상대적으로 보는데, 풍경작용에서는 액자 형식을 다양하게 만드는 지혜로 나타난다. 경치를 다양하게 하려다 보면 자칫 풍경요소 자체에 손을 대기 쉬우나 이는 한옥의 지혜가 아니다. 풍경요소는 그대로 놔두고 경치를 담는 액자를 다양하게 한다. 한옥의 구조 골격이 ‘항변’하고 공간이 변화무쌍한 이유이기도 하다. 문의 종류부터 그렇다. 미닫이문은 풍경의 종류를 선택하는 데 유리하다. 여닫이문은 밖의 풍경에 대해 공간 깊이를 만들기 때문에 형식화 기능에 뛰어나다. 벼락치기 문은 통 크게 경치를 한 번에 확 잡아들인다.
정식 문만 문이 아니다. 기둥과 기둥이 양옆에서 한정하면 이것도 액자요, 서까래와 처마는 위에서 한정하니 이 또한 액자이다. 문의 크기와 위치도 제각각이다. 방 구석에 바짝 붙은 손바닥만한 창을 열면 그 격에 맞는 작은 풀 한 그루가 처연한, 그렇지만 너무 위대한 생명을 드러낸다. 이 나무 한 그루와 24시간, 사시사철 벗하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알게 해주는 형식의 통로가 풍경작용이다. 이런 조건들을 조합해서 다양한 경우의 수를 만들어내는 비밀은 창호지라는 재료에 있다. 반투명으로 가림 작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쪽을 열면 소담스런 나무 한 그루가 보이다가 저쪽을 열면 집안의 전경이 드러난다.
다양성은 사람의 감성을 돕는다. 감성 상태에 따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풍경의 종류를 항상 구비해놓은 셈이다. 정여창 고택 사랑채를 보자. 대청에 앉으면 집안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내 집 전경을 대청에 풍경화로 걸어놓은 격이다. 유교문명에서 가문과 가족을 책임지는 가부장으로서의 책임과 권위에 합당한 풍경작용이다. 그러나 가부장이라고 늘 목에 힘만 주고 살 수는 없는 일, 때로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감상적이 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이때에는 방에 들어 미닫이문을 열면 소담한 나무 한 그루가 말동무가 되어준다. 풍경을 벗 삼아 내면과 대화할 수 있다. 그래서 정약용은 족자에 대하여 “때때로 바꾸어 걸어야 할 것이다. 봄 여름에는 가을 겨울의 것을, 가을 겨울에는 봄 여름에 관한 것을 걸어야 하며(중략)”이라고 했다. | |

마당과 여닫이문이 만들어내는 풍경, 장경

장경(場景) 혹은 장경주의는 “경치를 하나의 특별한 장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장’은 멍석을 깔아놓은 구경거리나 연극을 올려 공연이 벌어지는 무대이다. 풍경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인공적 형식을 강하게 가하겠다는 의도를 갖는다. 차경에서 ‘빌린다’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볼거리를 ‘제대로 폼 나게’ 꾸민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남에게 보여주자는 것은 아니다. 집안 일상생활에서 즐기는 풍경작용의 종류를 다르게 만들려는 다양화가 목적이다. 차경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생기는 법, 형식적으로 꾸며낼 필요가 생기게 마련이다.
나와 풍경 사이에 상당한 밀접함이 유지되면 차경이 되고 이 범위를 넘어서면 장경이 된다. 내가 풍경에 감정이입을 실어 풍경과 동질감을 가질 수 있고 풍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이쪽으로 끌어들임으로써 풍경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으면 차경이다.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고 걸어 나가면 바로 풍경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내가 풍경과 한 공간 안에 있다는 느낌이 유지되면 차경이다. 풍경은 감상보다는 직접 경험의 대상에 더 가깝다. | |
|
윤증고택 사랑채 여닫이문을 열면 액자가 3차원 공간이 되 면서 나와 풍경요소 사이에 무대 같은 인공 형식이 꾸며진다. 나는 풍경과 한 몸으로 섞이지 않고 나만의 세게에 침잠할 수 있다. |
하회마을 북촌댁 솟을대문 피지배계층이 솟을대문을 통해 들여다보는 반가의 풍경작용 역시 계급의 위계와 공동체의 동질감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
장경은 다르다. 이보다 훨씬 인공적이고 형식적이다. 나와 풍경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면서 다른 세계에 있는 것으로 느끼게 된다. 연극에서 객석과 무대 사이의 거리감이 좋은 예이다. 요즘이야 관객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기도 하고 배우가 객석으로 내려오기도 한다지만, 전형적인 기준에서 보면 이런 일은 사고가 된다. 두 영역 사이에는 지켜야 하는 형식과 예절이 있다. 관객이 무대를 자신들이 사는 세계와 분리된 다른 세계로 느낄 때 무대 위 연극세계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것을 풍경에 적용하면 장경이 된다.
거리와 형식이 관건인데, 거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마당이고 형식을 갖추는 것은 여닫이문이다. 물리적 거리감은 기본 요소이다. 거리감은 곧 이격(離隔)이다. 떨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이격을 만들기 위해 액자와 풍경 요소 사이의 거리를 여백으로 비워두어야 한다. 풍경요소가 액자 속에 꽉 차 있으면 나와 같은 차원에 있는 것으로 느껴지지만 둘 사이에 마당이나 공간 같은 틈과 여백이 생기면 풍경은 그만큼 멀게 느껴진다. 한옥에서 마당을 비워둔 데에는 바람을 이용한 환경조절 같은 과학적 이유도 있지만 장경을 즐기려는 감성적 이유도 있다.
창의 종류에서는 액자에 공간 깊이를 주는 여닫이문이 제격이다. 여닫이문을 반쯤 열면 두 장의 문짝이 일소점 투시도 작용을 일으켜 액자가 3차원 공간 깊이를 갖게 된다. 관찰자와 풍경 요소 사이에 공간 켜가 하나 만들어진다는 의미이다. 이것만으로도 풍경은 무대 위에 올려진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미닫이문이 가세해서 양쪽 끝에서 여닫이문을 조금씩 먹고 들어오면 틀이 하나 더 추가되면서 액자는 완전히 무대 세트로 변한다.
여기와는 다른 세계의 풍경

장경은 나를 온전히 독립적 상태로 놔두고 싶을 때 알맞은 풍경작용이다. 주변 환경과 섞이지 않고. 나 이외의 타자를 관조의 대상으로 보겠다는 태도이다. 풍경은 손을 뻗어도 만질 수 없고 풍경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관객이 무대 위로 올라가면 판이 깨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풍경에 동화되는 직접 경험이 부담스러워 풍경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을 때 여닫이문을 열어 풍경에 무대형식을 가하면 된다. 자신에게 집중하고 싶을 때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채에서 디테일에 이르는 많은 구성요소들이 급하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한옥에서 요소들 사이에 숨통을 터주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미닫이문과 여닫이문이 같이 있으면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미닫이문만으로 풍경을 조절하면 차경이 일어나 풍경과 주관적 일체가 일어난다. 나를 잠시 잊고 풍경과 어울려 하나가 된다. 나와 주변을 포함한 더 큰 장을 정의할 수 있고 나는 그것의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가 되기 때문에 그만큼 나를 ‘죽일 수’ 있다. 반대로 나의 존재감을 느끼고 혼자 있고 싶을 때에는 여닫이문을 사용해서 장경을 만들면 된다. 풍경은 가까이 오지 못하고 저만큼 멀리 떨어져 객관적 형식으로 남는다. 미술관에서 벽에 걸린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이원화로,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이것이 한옥에서 미닫이문과 여닫이문을 같이 두는 이유이기도 하다. | |

한규설 대감가 사랑채 빈 마당은 나와 풍경요소 사이에 거리감을 주어 장경을 만든다.주인마님의 공간과 아랫것들의 공간 사이에 계급의 위계를 유지하게 해준다. |
개인적 이유 이외에 사회적 목적도 있다. 건축 구성요소나 집안 구성원들 사이에 형식적 거리감이 필요할 때이다. 사랑채 대청에서 일어나는 장경작용은 가부장제 아래에서 집주인이 집 전체를 감시하는 기능을 갖는 점에서 사회적 목적에 해당된다. 대감마님은 사랑채 대청에 앉아 집안 전체를 관조하듯 감상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늘 확인한다. 이런 작용은 쌍방향이어서 지위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가문을 대표하는 가장으로서의 책임도 늘 각성하게 해준다. 권위와 책임만으로는 불완전하다. 가족으로서의 사랑과 동질감도 필요하다. 사랑채 대청과 행랑채 사이에는 사회적 형식미에 따른 위계질서가 표현되기는 하지만 서양의 경우보다 그 차이가 적다. ‘가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대청이 행랑채에 대해 활짝 열림과 동시에 둘을 가르는 마당이 휴먼 스케일을 유지함으로써 관찰자와 풍경요소가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는다. 타자를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남으로 남게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타자와 같아질 수는 없으나 타자와 나, 즉 객체와 주체를 하나로 묶어 ‘우리’라는 공동체로 발전시킨다.
피지배 계층과 선을 긋다

사랑채 이외에 장경 작용이 많이 일어나는 곳은 솟을대문인데, 한옥이 반가의 주거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조선시대 양반은 주변지역에 대해 상당히 높은 단계의 지배권을 갖는 지역의 통치자였다. 반가는 주변 농가와 대비되어 통치자의 권위와 위계를 과시할 사회미로 무장해야 했는데 솟을대문이 이 기능을 담당했다. 장경작용에 수반되는 분리와 동질화의 양면적 기능은 여기에 적합했다. 바깥 세계와 일정한 분리를 이루어 반가 자신에 독립성을 줌으로써 권위를 지킴과 동시에 주변 마을과 동질화를 이루어 공동체의식을 형성하고 화목을 도모하는 양면작전을 구사한 것이다. | |

충효당 사랑채 계급 위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마당거리를 좁히고 건축형식을 동질로 하면 장경이라도 손을 잡아끌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서애다운 어질음이다. |
솟을대문에서는 사랑채나 중문간채 등의 집안 전경이 풍경요소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행랑마당이 장경작용에 필요한 거리를 확보해준다. 솟을대문은 여닫이문 가운데 제일 크기 때문에 형식성이 유난히 강한 액자이며 장경작용에 필요한 조건인 인공다움을 잘 만족시킨다. 솟을대문이라는 액자를 통해 들여다보는 양반집 풍경은 정녕코 무대 위에 잘 올려진 인공 세트, 즉 장경을 보는 것 같다. ‘아흔아홉 칸’ 양반집의 규모와 복합 구성, 그리고 몇 단계는 더 높은 위계의 건축형식 자체만으로 피지배계층에게는 계급 차이를 보여주려니와, 이것을 연극무대처럼 ‘폼 나게’ 형식화까지 했으니 복종심이 절로 우러났을 법하다.
사랑채에서와 마찬가지로 솟을대문에서도 장경은 위압적이지만은 않다. 장식을 절제하고 적절한 휴먼 스케일로 나눠진 겸양의 미덕은 그대로 풍경요소의 겸손함이 된다. 풍경요소에 가해진 적절한 분절처리는 전체 분위기에 분산적 여유를 주며 구성미와 율동감 등을 통해 친근감을 유발한다. 중간에 휴먼 스케일의 마당이 들어가 적절한 거리감을 주면서도 너무 멀지 않게 느껴지게 한다. 솟을대문을 통해 들여다보는 대감댁 전경은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일뿐더러 자신들의 집과 닮은 점이 있는 것을 보고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 대감댁은 더 이상 영원히 넘볼 수 없는 성전이 아니다. 심미화의 감상 대상이 되면서 상징기능에서 해지된다. 솟을대문 자체도 아담하려니와 그것을 통해 들여다보는 집안 전경은 지배계층의 권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평화로운 풍경화 한 폭을 보는 것 같다. | |

한옥에서는 창과 문의 구별이 없다. 그래서 ‘창문’이다. 서양에는 없는 단어이다. 사람이 다닐 만하면 문이요, 그렇지 않으면 창인데, 딱히 구별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몸을 잔뜩 웅크려야 겨우 통과할 수 있는 문도 많고 문지방을 높여 기어오르듯 통하는 문도 있다. 형식이나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내서 쓰면 그만이라는 노장사상 의 ‘대교약졸(大巧若拙)’이 반영된 개념이다. | |
창은 문살을 통해 주역의 궤를 장식문양으로 활용한다. 천지 운행의 원리를 인간살이에 견줘 기하학적 구성으로 단순화했지만 일정한 변화를 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안정적이면서도 리드미컬하다. 중국처럼 현란하거나 과도하지 않고 일본처럼 단조롭고 지루하지 않다. 한국다운 중용과 조화의 균형미이다.
한옥의 창을 살려내는 것은 한지라는 창호지이다. 반투명 재료이기 때문에 햇빛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햇빛을 사람의 온기로 바꾸기도 하고 창살에 그림자를 실어 문양에 입체감을 주기도 한다. 먼동 틀 때에는 청회색으로 시작해서 한 낮에는 어머니 젖무덤의 뽀얀 속살로 변했다가 해질녘에는 붉은 자줏빛을 발한다.
창은 기둥과 보와 협력해서 흰 회벽을 분할한다. 몬드리안이 그토록 도달하고 싶어 했던 구성미이다. 한옥의 구성분할은 선비의 추상같은 기개를 드러내긴 하지만 몬드리안처럼 계산적이거나 차갑지는 않다. 어딘가 숨 쉴 틈 하나 남겨서 정 나눌 구실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가족살이 장면을 반영하는 기막힌 리얼리즘으로 발전할 수 있다. 행랑채를 제외하면 같은 창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제각기 크기와 형상을 가져 개별적 자존감을 지키면서도 서로 정답게 어울린다. 어미가 자식을 데리고 방안에서 편하게 노는 모습이다.
한옥의 문은 크게 솟을대문과 중문으로 나눌 수 있다. 솟을대문은 집의 얼굴이다. 양반의 위엄을 드러내면서도 집안 전경을 바깥 세상에 살짝 보여주는 소통의 통로이다. 멀리서 보면 불쑥 솟았지만 열린 문을 통해 들여다보는 집안 전경은 의외로 섬세하다. | |
|
장교동 한규설 대감댁 햇빛은 한옥의 또다른 주인다.한옥은 햇빛 을 가장 잘 받고 햇빛을 가장 잘 살려내는 건물이다.한옥이 햇빛을 받는 통로는 문이다.햇빛이 창호지로 들어오면 문식(文飾)을 만들 어낸다.문식은 예(禮)를 통해 얻어지는 교양 있는 미적 형식이다. | |
목재건축에서 나올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지붕 아래 옹기종기 모여 어울리는 모습을 문틀을 통해 액자 속 풍경처럼 보여준다. 중문은 좀 더 차분하고 소박하다. 채와 채를 이어주는 속 통로이기 때문에 채와 채 사이의 예절을 중시한다.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와 안채, 행랑채와 사랑채 등 각 영역의 주인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구별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 |

방에 앉아서 내 집의 일부를 본다는 것의 의미

한옥 속을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 독특한 장면이 눈에 잡힌다. 창이나 문을 통해서 보는 장면이 집의 일부인 경우이다. 창문에 잡히는 풍경요소의 종류는 자연요소, 마당, 담, 집의 일부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집의 일부를 통한 풍경작용은 그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에 별도의 현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자경(自景)’이다. 말 그대로 ‘나 스스로, 즉 내 집의 일부가 풍경이 된다’는 뜻이다. 언뜻 들으면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대문이 있는 집이라면 대문을 통해 집의 일부를 풍경요소로 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옥의 자경에서는 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풍경요소로 삼으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풍경작용이 대문이 아니라 집 속에서 일어난다는 추가 조건이 붙는다. 집 안에서 창문을 열면 집의 일부가 풍경요소가 풍경작용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 |

두곡고택집의 일부를 풍경요소로 삼는 자경은 단순한 풍경감상을 넘어 내 집의 살림살이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살피라 는 뜻을 포함한다. |
이것 또한 모든 집에서 일어나는 상식적인 얘기처럼 들릴 수 있다. 아파트만 되어도 문을 열면 부엌이나 거실 등 실내 일부가 문을 통해 보이기 때문이다. 한옥의 자경은 이런 차원이 아니다. 풍경으로 보이는 장면이 집의 외관인 경우가 많다. 집 안에 앉아서 창문을 여니 집의 외관이 보인다는 뜻이다. 안과 밖이 뒤집어지거나 아니면 집이 담 밖으로 길게 휘어져 나와야 가능한 얘기처럼 들리는데, 그 비밀은 한옥의 독특한 건축적 특징에서 찾을 수 있다. 건물 전체가 여러 채로 나누어 구성되고 그 채들에 꺾임이 많으며 그 사이에 여러 개의 마당이 개입한다는 특징이다. 방이 앞뒤로 모두 외기를 면한다는 특징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구성이 종합적으로 작용하다보니, 문을 열면 집안에 앉아서 내 집의 외관 일부를 풍경작용으로 보고 즐길 수 있는 아주 특이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내가 내 집의 외관을 본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아파트에 사는 현대인들은 자기 얼굴은 하루에도 수 십 번씩 거울에 비춰보며 ‘거울아 거울아~’를 외쳐대지만, 정작 자신이 사는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특별히 관심을 가질만한 특기사항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심심한 콘크리트 건물에 똑같은 창이 쭉 나고 숫자나 호수로만 구별을 하기 때문에 밖에서 볼 때에는 내 집, 네 집을 구별할 필요성이 없어진다. 빨래 색깔 정도나 구별 기능을 가질 뿐이다. 집을 통해 나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일은 점점 불가능해진다.
집밖에서 만이라도 내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문제는 안 생겼는지, 집의 분위기와 앉은 품새는 잘 유지되는지 등등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물며 이것을 집 안에 앉아서 창문을 통해 풍경작용으로 감상을 겸해서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근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옥은 이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자경이라는 독특한 풍경작용을 통해서이다. 한옥에 채 분리와 꺾임이 많고 다시 이것을 여러 겹의 마당이 에워싸는 이유이다. 집 안에 앉아서 내 집의 일부를 볼 수 있는 공간구도를 의식하고 집을 짰다는 뜻이다. 내가 내 몸을 보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행동의 의미를 잘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것을 집에 심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증자의 [일성록]과 나르시시즘

자경은 단순히 풍경을 감상하는 것 이상으로 교훈적 내용을 많이 담는다. 그래서 한옥이 유교정신을 반영한 집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내가 내 몸을 보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동양에서는 증자 의 [일성록]에 나오는 “하루 세 번 내 몸을 돌이켜 살핀다”는 구절이 대표적이고 서양에서는 나르시시즘 이 대표적이다. 같은 행동을 놓고 그 내용은 두 문명이 다른 만큼 다르다. 동양에서는 이를 자기 수양의 한 과정으로 본 반면, 서양에서는 자아도취를 통한 자기 각성으로 보았다. | |

용흥궁 안채 안방에서 문을 열면 대청 건넛방의 문살이 풍경요소로 들어오는 경우가 안채의 자경 작용 가운데 제일 전형적인 장면이다.내 방의 문살과 건넛방의 문살이 한데 어울리는데 이는 교열을 정리하는 집안 대소사를 잘 챙기고 식구들을 간수하라 는 뜻(왼쪽)김동수 고택 사랑채 사랑채도 안채와 같은 공간구조를 가지면 자경이 일어날 수 있다.(오른쪽) |
증자의 가르침은 단순히 내 몸에 때가 안 묻었나 살피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몸을 살핌으로써 마음가짐도 살필 수 있다. 몸가짐을 반듯이 하면 마음가짐도 반듯해진다는. 유교다운 형식미의 핵심 개념이다. 한 평생 반듯하게 살아온 선비는 멀리서 걸음걸이 하나만 봐도 구별이 된다. 마음과 정신은 숨김없이 그대로 외관과 몸가짐에 드러난다. 집 안에 앉아서 내 집의 모습을 살피는 자경작용도 마찬가지여서, 창호지가 찢어지고 문짝이 휜 것을 찾아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집을 사용하는 나와 식구 구성원의 마음과 정신상태가 어떠한지 까지도 살핀다는 의미이다. 식구의 마음이 편치 않으면 그 구성원이 거처하는 방에는 어떤 식으로든지 그런 상태가 반영되게 마련이라는 내심일체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내심일체라는 가정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받아들이는 쪽에서 대상에 대해 한 없는 인(仁)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내심일체라는 개념 또한 유교다운 형식미의 전형이고 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유교정신의 출발점이니, 이 둘을 자경이라는 풍경작용으로 구현해낸 한옥은 가히 유교문명을 대표하는 주거형식이라 할 수 있다.
나르시시즘은 신화 자체에 한정시키면 자기애에 빠진다는 다소 부정적 의미를 내표한다. 좀 더 분석해보면 서양문명의 중요한 세계관이 담겨있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을 좀 더 발전시켜 인격형성 과정을 분석하는 데 적용했다. 단순히 자신의 육체만 보고 성적 대상으로 삼는 단계는 아직 미숙한 오토에로티시즘(autoeroticism)으로 봤고 여기에 자신의 정신적 정체성을 더할 때 비로소 성숙한 나르시시즘에 이른다고 했다. 동서양 모두 육체와 정신의 합일을 가르치고 있는데, 동양은 이것을 수양의 의미로 해석해서 육체를 정신에 종속시킨 반면 서양은 인격의 완성으로 해석해서 둘 사이의 동등한 통합을 지향한다. 한옥의 자경에서는 굳이 둘을 구별할 필요는 없다. 한옥의 자경작용에서 관찰되는 관음증의 느낌은 서양적 의미의 오토에로티시즘 단계로 분명 포함한다. 그러나 이것이 핍쇼(Peep Show)에 머물지 않고 집 전체에 통일된 정체성을 주고 궁극적으로 집안 구성원 사이의 화목을 돕는 단계로까지 나아가는 점에서 나르시시즘과 증자의 가르침을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머니의 치마폭 같은 안채의 ‘ㅁ’자형 공간

자경은 사랑채와 안채에서 모두 일어날 수 있는데, 안채의 자경작용이 특히 독특하다. 안채를 안채답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사랑채가 앞에 행랑마당을 가지면서 집 전체를 상대하는데 반해 안채는 집의 깊숙한 곳에 은밀히 자리한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한옥의 안채는 특히 ‘ㅁ’자형이라는 독특한 공간구조를 갖는다. 이 형식은 전 세계적으로 관찰되는 공간유형이지만 한옥 안채의 ‘ㅁ’자형은 그 은밀함이 특히 심하다. 행랑마당은 남자들의 대외적 작업공간이기 때문에 개방적이고 트인 반면 안마당은 폐쇄적이고 스케일이 촘촘해서 여러 방과 채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 |

관가정 안채 안채는 자경 작용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곳인데,안채 특유의 공간구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풍경요소가 창문 속으로 들어온다.이는 유교문명 아래에서 여성에게 부여된 사회적 의미를 반영한 결과이다. |
자경이 일어나기에 좋은 조건이라는 뜻이다. 창문만 열만 집의 다른 일부가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제일 대표적인 경우가 안채 안방에서 문을 통해 대청 건너편을 바라보는 경우이다. 대청을 기준으로 좌우에 방이 배치되는 구조에서는 사랑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풍경작용인데 사랑채는 이런 공간구조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이는 안채의 전형적인 풍경작용이라 할 수 있다. 안채의 자경 작용은 반드시 대청을 낀 좌우대칭 구조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채 분할이 심한 곳 또한 안채이기 때문에 집의 일부가 작게 조각나면서 창문을 통해 다양한 풍경요소로 들어온다.
안채의 자경 작용은 유교가 여성에 대해서 갖는 기본 인식을 반영한 결과이다. 남편과 아내를 지칭하는 ‘바깥양반’과 ‘안사람’ 혹은 ‘집사람’이라는 말이 말해주듯, 여성이 집안 깊숙한 곳에서 안일을 책임지는 일을 맡던 시대, 집안이 제대로 반듯하게 유지되는지 거울을 보듯 항상 챙기라는 뜻이다. 놀이기능일 수도 있다. 바깥나들이 한번 맘 편하게 하기 힘들었던 시절, 집의 일부를 대상으로 삼아 즐기는 풍경놀이는 감옥살이 같았을 수 있는 여성들의 일상생활에 조그만 위안거리를 줬을 수 있다. | |

풍경에 취해 풍경이 되어버린 창

창과 문은 액자 만 만들지 않는다. 스스로 풍경요소가 되기도 한다. 창이 특히 그렇다. 미닫이창이 완전히 닫히지 않았을 때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문짝이 창틀 안쪽으로 밀고 들어와 풍경을 가릴 경우 이 부분을 액자로 볼지 풍경요소로 볼지의 문제가 생긴다. 열쇠는 창호지가 쥐고 있다. 창호지가 빛을 받아 반투명 막이 되고 창살문양이 드러나면 창은 액자로만 머물지 못하고 그 자체가 풍경요소가 된다. 마치 두 장의 풍경을 겹쳐놓은 것처럼 보인다.
‘창 스스로 풍경이 되다’는 창이 풍경에 틀 짜기를 가하고 풍경을 재단하는 일을 하다 풍경에 취해 못 참고 스스로 풍경이 되어버린 형국이다. 창 스스로가 하나의 풍경요소, 즉 인공적 풍경요소가 된 것이다. 창살문양은 창을 풍경요소로 둔갑시키는 일차적 역할을 한다. 문양 자체가 강한 조형 형식을 띠면서 액자 이상의 기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 |
창살문양이 풍경요소 가 되기 위해서는 수직-수평으로 가지런히 정리하는 기능에서 벗어나 스스로 감상의 대상으로 변모해야 한다. 하나의 ‘보기 좋은 장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마음에 감흥이 일어나는 감성작용이 실려야 된다. 이것을 해주는 것이 창호지이다. 창호지는 중성적 건축형식인 창살문양을 마음의 감성작용에 대응시켜 심미 요소로 둔갑시킨다. 인공 형식미에 온기를 실어 생활 속 일상가치를 상징하게 만든다. 이런 도움 덕에 창살문양은 풍경요소가 될 수 있다.
창호지는 반투명이기 때문에 빛을 받으면 창살문양의 조형성을 잘 드러낸다. 불투명하면 벽의 연장으로 읽힐 뿐 스스로 풍경요소로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풍경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유리처럼 투명하면 바깥 풍경요소 위에 셀로판지를 붙여 놓은 것처럼 보일 뿐 스스로 조형 형식을 갖추지 못한다. 풍경요소가 되지 못하고 바깥 풍경요소 위에 묻은 얼룩처럼 느껴진다. 풍경이 되기에는 과하다. 반투명인 상태에서 창살문양은 온전히 스스로 풍경이 될 수 있다. 창살문양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딱 적당한 상태로 제 모습을 드러낸다. 제 모습을 드러내면서 바깥의 바깥 풍경요소 위에 겹쳐지지 않고 병렬을 이룸으로써 스스로 풍경이 될 수 있다.
빛의 종류와 세기 등에 따라 창과 문양의 분위기나 모습이 변하는 것도 창호지의 활약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런 다양성이 바로 창살문양에 감성작용을 실어 내주는 기능을 한다. 하루 시간의 흐름, 날씨, 계절 등이 기준이다. 바깥의 빛 사정에 따라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변하며 다양한 감성작용을 일으킨다. 진짜 풍경요소보다 나중에 더해진 인공 풍경요소가 더 심하게 변하니 그 그림은 실로 모든 종류의 인간 감성에 대응할 수 있게 된다. 먼동이 트는 아침의 청회색에서 시작해서 대낮에 직사광선을 받은 뽀얀 우윳빛, 그리고 해지는 석양의 붉은색에 이르기까지. | |
|
관가정 사랑채 창호지가 빛을 받으면 창살문양은 액자에 머물지 않고'스스로 풍경이된다'.밖의 진짜 풍경요소와 병렬로 놓이면서 풍경작용의 의미를 다양하게 만들어준다. | |
창호지로 창살문양에 감성을 싣다

한 마디로 창호지의 활약 하나만으로 독립적인 풍경작용 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창호지, 즉 한지를 쓴 이유이다. 한지는 엄밀히 얘기하면 건축 재료가 아니다. 내구성이 약하기 때문에 창과 같은 외부마감에는 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쓴 것은 창에 감성작용을 실어 풍경요소로 만들려는 목적이 큰 부분을 차지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집 전체를 하나의 큰 그림으로 만들어 집과 감성으로 교류하려던 목적이었다. 집 스스로 풍경을 그릴 수 있게 만들어 집에 그림을 가득 채우려는 목적이었다. 결국 한옥에 산다는 것은 큰 그림 하나를 생활 속에 이고 사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 그림은 시시각각 변하면서 다양한 풍경화를 선사했다.
물론 창호지를 쓴 것은 유리산업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산업적 측면에서 보면 후진성으로 볼 수도 있다. 사실 창은 건물의 여러 부분 가운데 재료 사용에 제한이 많은 곳이다. 시야와 조도 등을 위해서는 투명성을, 방음과 단열 등을 위해서는 내구성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이 두 조건은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동시에 만족시키기가 쉽지 않다. 유리는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현실성이 높은 재료임에 틀림없다. 실용적 문명인 서양은 유리를 선택했고 감성적 문명인 우리는 한지를 선택했다. | |
|
한규설 대감가 안채 자경중첩이다.인공적 정리기능이 극에 달하게 된다.이때,창문은 스스로가 하나의 풍경요소로 읽히지 만 여전히 액자에 머무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이 경우 족자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
나상열 가옥 사랑채 액자에는 창문만 있는 것이 아니다.길게 돌출한 처마선과 그 안쪽의 서까래도 훌륭한 액자가 된다.액자 형식을 다양하게 만드는 것 역시 족자 개념을 집에 적용한 것이 다. |
한지가 전통 필기도구인 지필묵(紙筆墨)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한지는 글씨 쓰는 필기도구인 동시에 난초 치고 소나무 대나무 그리는 그림 재료이기도 했다. 창호지에 한지를 사용해서 풍경작용을 만들어낸 것은 곧 집을 한지 위에 단풍나무 그리는 풍경화에 유추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옛날 선조들은 정말로 집을 하나의 큰 그림으로 정의했음에 틀림없다. 창 조작을 통해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하는 다양한 풍경화를 집안 가득 담아놓고 살았다. 풍류의 극치요 예술의 극치이다. 창 만드는 건축행위가 붓 놀려 난초 치는 그림 그리기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니, 진정 풍류의 극치요 예술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다.
창 스스로 풍경이 될 경우 창살문양과 창호지는 진짜 풍경요소와 중첩되면서 더 큰 풍경을 만들어낸다. 진짜 풍경요소가 수목, 꽃, 먼 산 같은 자연물이면 차경중첩이 되고 집의 일부분이면 자경중첩이 된다. 창은 인공요소이기 때문에 자연물과 어울릴 경우 자연과 인공의 어울림이라는 동양문명의 큰 특징에 귀속된다. 이때 창에 나타나는 문양은 자연을 정리하는 상징성을 갖는다. 정리하되 정복 개념은 아니다. 집의 일부분과 어울리는 자경중첩에서는 인공성이 극대화된다. 풍경 전체에 인공질서가 가득 찬다. 사회를 향한 위계질서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유교 형식미의 대표적인 예이다. | |
바깥 풍경과의 조화로운 어울림

한계마을 대산동 교리댁 처마 끝 서까래와 벼락치기 문이 합작해서 액자를 만든다.
| |
|
창살문양을 풍경요소로 보지 않고 여전히 액자로 볼 수도 있다. 이때는 족자 (簇子)에 해당된다. 한국화의 족자에서는 그림 옆에 여백을 두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에 별도로 문양을 넣거나 연하게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액자의 틀을 면적을 갖는 여백으로 키운 뒤 그림과 별도의 예술세계를 하나 더 만든 셈이다. 족자 개념을 적극적으로 대입시키면 창 이외의 건축요소가 액자가 되는 경우를 가정할 수 있다. 기둥과 보, 서까래와 도리, 회벽과 천장 등 골조를 노출시켜 액자로 활용하는 경우이다. 솟을대문도 좋은 예이다. 스스로 하나의 완결된 건축구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솟을대문 전체가 시야에 들어오는 경우면 언제라도 족자가 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안대문이나 중문은 이보다 못하지만 여전히 족자가 되기에 충분한 조형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처럼 한옥의 골조는 천천히 뜯어보면 족자를 생각하고 만든 것으로 보이는 곳들이 많다.
왜 그랬을까. 특별한 의도가 있었다는 뜻인데, 한 마디로 ‘바깥 풍경과의 조화로운 어울림’을 위해서이다. 집과 풍경, 사람과 자연, 안과 밖 등 흔히 이항대립으로 인식되고 있는 관계들 사이에 조화로운 어울림을 얻어내기 위한 목적에서 건물에 끊임없이 족자작용이 일어나게 했다. 한국화에서 족자는 이동과 보관의 편리함을 위한 것이 일차적 목적이지만 하다 보니 그림과 일정한 심미적, 예술적 어울림을 얻어내는 데까지 나간 것과 같은 이치이다. 건축부재를 이용한 족자작용은 분명 집의 분위기를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 창 조작에 따라 분위기를 다양하게 바꿀 수 있다. 창문 이외에 다양한 가능성을 추가로 갖는 점도 마찬가지이다. 사용자의 마음에 부합되고 감성을 어루만져주는 심리작용이었다.
다양한 풍경작용을 통해 마음과 감성의 변화에 합당한 다양한 장면을 만들어준다.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조형 환경이 자신의 마음과 감성 상태와 합치될 때 행복을 느끼며 집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기 때문이다. | |

동북아 건축에서 지붕은 주역의 대장괘를 옮긴 것이다. “상고 시대 사람들은 혈거로 생활을 하며 들에서 거처하였는데 후세 성인들이 그것을 가옥으로 바꾸어 지붕마루를 위에 만들고 서까래를 아래로 깔아 바람과 비를 피하게 하였으니 이는 대개 대장괘에서 취한 것이다”라고 했다. 지붕이 대자연의 장미(壯美)의 상태인 대장괘를 본떠 만들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대장괘가 드러내는 구체적 심미성이 장미이다. 한옥에서 장미는 인간 중심적인 특징을 갖는다. 인간의 역량에 대한 적극적 긍정을 전제로 인간의 감정을 앙양, 분투케 함으로써 자연에 대해 공포, 재난, 비극 등의 부정적 요소를 극복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이는 유교다운 인본주의의 핵심이다. | |

수애당 전경 대장괘가 주는 대표적 미학이 장미(壯美)이다. 인간의 인내와 의지를 굳건히 드러내 강건함을 표현하는데, 이는 선비의 기개를 드러내는 집의 인상과 같은 말이다. 집의 전경을 보면 주인의 성품과 가문의 가풍을 알 수 있으니 이를 인상이라 한다. |
한옥의 지붕은 멀리서 보면 집의 인상을 결정한다. 담과 행랑채, 다시 그 뒤로 사랑채와 안채의 지붕이 중첩되면서 유교 가문의 기풍과 선비의 품격을 드러낸다. 이는 사람에게 요구되던 최고의 덕목이었으니 집과 사람은 인상을 공유하며 동의어가 된다. 지붕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 서양의 신사도도 대략 이와 유사하니 지붕은 인공적 형식미를 대표한다.
한옥 지붕의 조형미는 단연 매끄러운 곡선이다. 한국다운 곡선미의 대표적인 예로, 한 획을 휙 그은 서예의 부드러운 힘 같기도 하고 북소리에 맞춰 돌아가는 가락 같기도 하다. 곡선으로 휘었지만 정면에서 보면 갓을 눌러쓴 선비의 절제된 몸가짐을 보여준다. 추녀 밑으로 다가가 올려다보면 흥에 겨워 풍류를 즐기는 선비의 몸짓이다. 한옥의 처마 곡선은 단연 최고이다.
한옥의 지붕은 채 사이의 위계와 관계를 반영한다. 집안을 대표하는 책임을 지는 사랑채는 지붕도 그러해서 행랑채나 안채의 지붕을 품고 이끈다. 반가에 요구되는 엄격한 계급구조를 지키되 그것을 넉넉한 품으로 품어내려 애쓰는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계급 위계가 없는 동기간의 관계일 때에는 누구보다도 흥겹게 어울린다. | |

고성 어명기가옥 한옥 지붕의 처마 선을 일반화시키면 한국다운 곡선의 미학이 된다. 옷소매와 가락, 고름과 치마폭, 초가와 뒷동산이 모두 그렇다. 한옥 지붕은 화들짝 하늘을 향하지만 동시에 땅도 굽어보는 중용의 균형에서 아름다운 곡선이 나온다. |

창이 두 겹 겹치는 ‘중첩’

한옥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장면 가운데 하나가 창문 속에 또 창문이 있고 그 밖에 풍경이 보이는 경우이다. 이른바 ‘액자 속 액자’이다. 액자가 두 개 이상이라는 뜻이다. 풍경요소는 하나로 고정되어 있고 이것을 여러 개의 액자가 앞뒤로 거리 차이를 가지며 겹쳐서 담아낸다. ‘풍경 속 풍경’이라고도 한다. 첫 번째 창문 속 큰 장면이 첫 번째 풍경이고 다시 그 속에 두 번째 창문이 들어가면서 두 번째 풍경을 담는다. 웬만큼 큰 한옥이면 집 전체에서 이런 장면이 몇 개는 만들어진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의도된 느낌이 강하다. 마주보거나 앞뒤로 늘어서는 등 창문들 사이의 관계나 풍경요소의 위치 등이 ‘액자 속 액자’를 염두에 두고 짠 것 같다. | |
이런 특이한 장면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중첩’이라는 한옥의 공간 구조에 있다. 한옥은 공간 켜가 많다. 어려운 말 같지만 그렇지 않다. 방의 앞뒤로 마당이 있고 마당 건너 다른 방이 있으며 다시 문과 담 너머 다른 채가 있는 한옥의 구조를 생각하면 된다. 한 마디로 복잡하다는 것이고 이는 곧 집이 여러 겹 겹친다는 뜻인데, 이를 지칭하는 공간미학 개념이 중첩이라는 것이다. 그냥 겹치게 하긴 쉬운데 그러다간 혼란스러워지기만 할 뿐, 이것이 일정한 공간형식을 갖춰서 심미성을 갖도록 정리한 개념이 ‘중첩’이다. 공간형식을 기준으로 하면 채 분리와 꺾임이 많고 그 사이에 마당을 끼워 넣은 구성에서 기인한다.
중첩은 한옥만의 특징은 아니고 한국다운 국민성 전반에 깔린 특징이다. 사물을 단정적으로 둘로 가르지 않고 중간적 태도를 취하는 상대주의 국민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중첩은 의복, 음식, 대화법, 사람 사이의 관계 등 여러 곳에 나타난다. 중첩은 풍경작용에서도 나타난다. 대표적인 경우가 이쪽 문에서 반대편 문을 통해 건너편 장면을 보는 경우이다. 내 앞에 액자가 하나 있고 그 속에 방의 공간 켜를 지나 반대편에 액자가 하나 더 들어있다. 다시 그 속에 마지막으로 풍경이 담긴다. 공간 중첩이 풍경 중첩으로 형식화되는 순간이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창문과 건너편 풍경 모습이 짜 맞춘 듯 일직선 축 위에 놓이면서 잘 들어맞는다. 마치 누군가 액자 속에 그림을 정성 들여 담아 걸어놓은 것 같은 장면이다. 중첩을 괜히 중첩시킨 것이 아니라 ‘풍경 속 풍경’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했다는 뜻이다. | |
|
오죽헌 이쪽 문 속에 있고 그 속에 방이 있으며 맞은편이 문이 하나 더 있고 마지막으로 그 속에 풍경이 담긴다. | |
한옥의 백미 ‘액자 속 액자’

대청 뒷마당에서 대청 뒷문을 열고 안마당을 바라보는 경우도 ‘액자 속 액자’가 일어난다. 내가 서 있는 쪽에 대청 뒷면의 창이 하나 나고 그 속에 대청이라는 공간 켜가 하나 있으며 반대편에 대청 앞 기둥과 지붕이 한정하는 액자가 하나 더 있다. 이 두 번째 액자 속에 들어오는 요소가 풍경화를 만들어낸다. 안 행랑채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곳에 중문이 들어서면 중첩이 한 번 더 계속된다. 중문 자체가 또 하나의 액자가 되면서 모두 세 겹의 액자가 겹치게 된다. 한옥의 백미 가운데 하나이다. 많은 한국 현대 건축가들이 현대적으로 재생해내고 싶어 했던 공간 구조이다.
‘액자 속 액자’가 일어나는 또 다른 장소로 안채의 부엌과 광을 들 수 있다. 위치로 보면 안채에서 뻗어 나온 팔의 양쪽 끄트머리 부분이다. 안채는 전체 형태가 ‘ㄷ’자 형이나 ‘ㅁ’형이 대부분이라서 대청에서 양 옆으로 뻗어 나온 두 팔이 만들어진다. 이곳에는 자녀들의 방과 함께 부엌과 광이 들어간다. 부엌과 광은 대청 쪽에 가깝게 붙기도 하지만 대청에서 먼 팔의 끄트머리에 들어가기도 한다. 집이 큰 경우 끄트머리 두 부분이 모두 광이나 부엌으로 사용된다. 부엌과 광은 기능은 다르지만 공간구조는 비슷한데, 앞뒤로 벽 전체를 거의 다 차지하는 큰 나무 문이 나는 형식이다. 흔히 ‘광 문’이라고 부르는 문인데, 부엌에도 같은 문을 단다. | |
 |
 |
 |
|
충효당 사랑채 대청 뒤에서 창문을 통해 앞을 보면 ‘액자 속 액자’가 일어난다. 뒷마당은 못 쓰는 물건이나 재어 놓는 버려진 공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풍경작용을 만들어내는 살아있는 공간이다. |
김동수 고택 광 뒷마당에서 네 개의 문을 모두 열고 건너편 광 쪽을 바라보면 액자가 네 개 겹치는 풍경 중첩이 일어난다. |
양쪽 팔 끄트머리에 이런 공간이 하나씩 들어있을 경우 참으로 풍부한 ‘액자 속 액자’의 풍경놀이를 즐길 수 있다. 모두 네 개의 문이 일렬로 늘어서는 형식이 된다. 네 개의 문을 다 연 다음 부엌이나 광 뒤쪽 마당에서 안을 통해 건너편 부엌이나 광 쪽을 바라다보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액자가 네 개나 겹치게 된다. 꼬챙이에 산적을 꿴 형국이다. 너무 과하다 싶으면 안으로 들어가서 건너다보면 액자가 세 개 겹친다. 발걸음을 좀 더 옮겨 안마당으로 나와 광 문 앞에 서서 부엌이나 광을 바라보면 액자가 두 개가 된다. 연차적으로 ‘줌 인(zoom in)'이 일어나는 영화기법이 일어나는 곳이다. 한옥의 또 다른 백미 가운데 하나이다. 여담이지만, 한옥의 백미에는 사랑채의 활짝 편 지붕처럼 노골적이고 과시적인 것도 있지만, 앞에 얘기한 대청 뒷면이나 이곳 부엌처럼 공간의 중첩이 극대화되는 은근한 곳도 있다. | |
한옥만의 독특한 공간 구조가 만들어내는 기묘한 현상

풍경 중첩 혹은 ‘액자 속 액자’는 한옥만의 독특한 공간 구조가 만들어내는 기묘한 현상이다. 방의 앞뒤 양면에 창을 내는 구조이다. 방의 한쪽은 복도로 막히면서 문이 나는 것이 전 세계 주택의 공통적 구성인데, 한옥의 방만 유독 두 면, 심지어 세 면이 외기와 면하는 독특한 구조를 갖는다. 방안에서 어느 문을 열어도 바로 바깥이다. 이 문제는 확장하면 한옥의 장단점과 연관이 깊다. 가장 큰 단점은 외풍이 세고 겨울에 춥다는 점이다. 열효율 면에서는 분명 불리하다. 아파트에서 가장 따뜻한 방은 집 한 가운데 들어있어서 창이 하나도 없는 화장실이라는 사실을 뒤집어 생각하면 된다. 비바람에 노출되기 때문에 마모가 많이 일어나 유지관리와 보수에 잔손이 많이 간다는 점도 불리할 수 있다. 흔히 한옥이 불편하다고 하는 내용들이다. | |
장점도 있다. 겨울에 추운 것을 감수하고라도 굳이 이렇게 만든 이유가 있을 터인데 그것은 불이사상 때문이다. 공간의 안팎을 다른 것으로 분별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외기와의 단절을 최소화해서 바깥을 항상 손쉽게 접할 수 있게 하겠다는 의도이다. 방 하나가 가급적 외기를 많이 면하게 하고 창문을 여러 곳에 낸다. 한 면에 창문이 두 개 이상 나기도 한다. 채의 끄트머리에 있는 방은 세 면이 외기를 면하면서 그 세 면에 모두 창문이 난다. 심한 경우 방 하나에 문이 다섯 개, 여섯 개씩 나기도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문이 모두 열리면서 바로 바깥과 통한다는 점이다. 산업화 이후 대표주자가 된 전면유리를 훨씬 능가한다. 전면유리는 시각적으로는 모두 열려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은 하나만 내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이런 특징이 또 다른 단점이 될 수도 있다. 방은 아늑하고 실내다워야지 한(寒) 데에 텐트 하나 친 정도여서야 어디 그게 방이냐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아파트에 익숙한 사람이 시골 진짜 한옥에서 자게 되면 첫날밤은 대부분 신경이 곤두서서 뜬눈으로 보내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뒤집어 보면 그만큼 바깥과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아서 항상 바깥과 함께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해준다는 뜻이 된다. 소극적 의미의 ‘친 자연’이다. 방안 어느 곳에서든지 다섯 걸음 이내에 바깥을 접할 수 있게 해준다.
한옥만의 이런 특징이 공간에서는 중첩으로, 풍경작용에서는 ‘액자 속 액자’라는 독특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 자체만으로도 불이사상이라는 당시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반영한 것일진대, 그렇게 집을 짓다 보니 거기에 따른 여러 가지 조형작용과 심미작용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정신적 가치에 따라 집을 지었을 때 나타나는 좋은 점이며, 전통건축이 우수한 이유이기도 하다. 기능과 효율과 돈 논리에 따라서 집을 짓는 요즘은 접할 수 없는 문화적 깊이이다. 바깥 대상과 안쪽 나 사이의 관계를 편 가름하지 않고 소통 통로를 다원화하려는 철학이 집에 녹아 든 결과이다. | |
|
운현궁 이노당 앞뒤 창문과 건너편 집 모습이 일직선에 놓이며 ‘액자 속 액자’를 만드는 모습은 우연이라고 보기 힘들다. 외풍이 센 단점을 감수하고서 풍경작용을 선택한 이유이다. | |

거울로 비춰 본 듯, 거울작용

한옥을 다니다 보면 가끔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주로 문을 통해서 안을 들여다볼 때인데, 비슷한 장면이 앞뒤로 반복되는 경우이다. 거울에 비춰본 것처럼 닮았다. 액자의 모양새와 풍경요소의 모양새가 닮은 경우로 ‘거울작용’이라 부를 수 있다. 넓게 보면 중첩 현상의 하나이다. 중첩에는 공간에 의한 액자중첩 이외에 요소중첩도 있게 되는데, 이때 액자와 풍경요소 사이에 닮은꼴이 어느 선 이상을 넘어서면 거울작용이 된다. 주로 문을 통한 풍경작용에서 많이 일어난다. | |
솟을대문이나 중문 등을 통해서 안을 들여다보면 종종 문과 닮은 모습이 액자 속에서 반복되는 신기한 장면이 나타난다. 닮은 요소는 지붕인 경우가 제일 많다. 문에 달린 지붕이 풍경요소에서 반복되는 식이다. 한옥에서는 기와 얹은 지붕이 ‘약방의 감초’처럼 온갖 곳에 다 들어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문과 담 위에까지 약식으로 소품화한 기와지붕을 얹는데, 이것이 액자형식을 이루면서 풍경요소의 진짜 지붕과 겹쳐질 경우 거울작용이 일어난다. 기와의 역할이 중요하다. 들쭉날쭉 시각적 자극이 강한 부재이면서 작은 크기가 가지런히 반복되기 때문에 조금만 반복해도 닮은꼴이 강조되기 쉽다.
문에서 본 지붕이 문 속 풍경요소에서 똑같이 반복된다. 액자를 이루는 문의 지붕이 마치 액자 속에서 증식해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때 증식과 반복을 유발하는 매체를 거울의 반사작용으로 설정한 개념이 거울작용이다. 실제 모습을 보더라도 거울작용이 일어나는 장면에서는 마치 문을 거울로 비춰서 문 속에 하나 더 넣어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문이 담을 끼고 있고 문 속 풍경작용이 같은 건축형식으로 구성되는 경우도 또 다른 거울작용의 좋은 예이다. 집이 커서 행랑채가 두 겹으로 반복될 때, 솟을대문 양옆에 늘어선 바깥쪽 행랑채와 안으로 한 번 들어온 곳에 있는 두 번째 행랑채가 문을 매개로 앞뒤로 반복되면서 중첩되는 경우이다. 이때에도 액자와 풍경요소가 빼다 박은 듯 닮기가 쉽다. 기와지붕 단독으로 일어나는 경우보다 시각적 자극은 약하지만 좀 더 갖춰진 건축형식 사이에 일어나기 때문에 그만큼 안정적이고 좀 더 건축답다. ‘담-벽-지붕’으로 이어지는 수평 요소들의 높낮이가 앞뒤로 비슷하게 맞을 경우 마치 하나의 장면이 중간에 조금 어긋난 정도로만 보이면서 거울작용은 감쪽같다. 문에 달린 지붕의 서까래와 풍경요소 속 기와지붕의 볼록 튀어나온 부분도 부재 종류는 다르지만 시각적으로 유사성을 가지면서 거울작용을 돕는다. | |
|
충효당 지붕을 얹은 액자 속 풍경요소 역시 지붕을 얹고 있다. 완전 대칭은 아니지만 액자를 거울에 비춰본 것 같은 유사성을 갖는다. | |
거울작용의 의미

거울작용은 공간 켜를 여러 겹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벽을 거울로 처리하는 트릭 기법에서 많이 나타난다. 서양건축에서도 복합공간이 새롭게 등장하던 1960~70년대에 벽에 거울을 바르는 다소 유치한 기법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일부 설치미술 작가들은 거울을 이용해서 공간에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한옥에서는 이보다 훨씬 이전에, 그것도 거울 같은 직접적 소품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건축 구성만으로 은유적으로 거울작용을 만들어 즐겼다. 게다가 트릭이 아닌 실제 현실이었다. | |

창덕궁 연경당 담과 지붕과 창의 위치가 수평이 어긋나기는 하지만 몽타주 기법으로 생각하면 둘은 거울을 보듯 닮은 장면이 된다. |
거울작용은 ‘창과 풍경의 하나됨’이 더 적극적으로 발전한 경우이다. 궁극적 목적은 어울림의 미학이다. 액자는 나, 즉 주체이고 풍경은 너, 즉 객체이자 대상이다. 나와 너 사이에는 나에서 너로 향하는 일방통행식 관계가 생기는 것이 통상적이다. 나는 나의 주관과 가치관에 의해 객체와 대상, 즉 주변을 정리하고 정의한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그런데 거꾸로 너의 입장에서 보면 이번에는 내가 객체요 대상이 된다. 너와 내가 이렇듯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고수하면 반드시 다툼과 대립이 발생하게 되어 있다. 서양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나를 중심으로 나의 능력과 의지에 의해 주변을 정리하고 다스리려는 입장을 갖는다. 반면 한옥의 거울작용에서는 나를 너와 닮게 만들어서 다툼과 대립의 소지를 근본적으로 제거한다. 각자의 존재를 충분히 지키면서 서로 닮는 쌍방향 교류가 요점이다. 생활 속 상식으로 환원하면 ‘역지사지(易地思之)’ 쯤에 해당된다.
나와 너, 주체와 객체, 액자와 풍경 사이에 분별이 없다. 분별이 없으니 우열도 없다. 본디 우열이란 분별하려는 부질없는 욕심에서 발생한다. 내가 남과 다르고 싶은 마음은 백이면 백 남보다 우월하고 싶은 욕심으로 결론난다. 거울작용에는 이런 것이 없다. 서로 상대방을 열심히 닮아 무심하게 어울리려는 평등한 통합을 지향한다. 이런 관계에는 사실 친소를 따지는 것이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둘이 친해야 가능한 일이다.
‘문양종합’에 의한 소극적 거울작용
 거울작용의 또 다른 좋은 예로 ‘문양 종합’ 혹은 ‘부재 종합’이란 것이 있다. 소극적 거울작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액자 속 풍경요소가 집이면서 몸통만 보이고 지붕은 살짝 암시만 하는 경우이다. 지붕이 빠진 불완전한 모습이다. 지붕은 액자에 해당되는 대문이 제공한다. 대문은 지붕만 덩그러니 얹어서 역시 불완전한 모습이다. 이 둘, 액자의 지붕과 풍경요소의 몸통을 합하면 한옥 한 채의 완전한 모습을 보게 된다. 거리 차이가 있어서 모서리가 그냥 집 한 채를 보는 것만큼 완벽하게 맞진 않지만 상상으로 바느질을 해서 둘을 이어 붙이면 한 채의 한옥이 훌륭하게 완성이 된다. 약한 의미의 몽타주 기법이기도 하다. 각자는 불완전한데, 서로 합하니 비로소 완전한 상태에 이른다. | |
이런 느슨한 조합은 이분법에 의한 명확한 편 가르기를 부담스러워하는 한국 특유의 국민성 가운데 하나이다. 세상은 짝 요소로 이루어지고, 이것들은 대립적 관계를 갖기가 쉽다. 흔히 인문학에서 ‘이항대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형식과 내용도 좋은 예이다. 형식은 액자이고 내용은 풍경요소인데, 둘은 자칫 ‘제로섬 관계’에 놓이기 쉽다. 액자를 강조하면 풍경이 죽고, 풍경을 강조하면 액자가 죽는다. 둘이 양보를 안 하고 자기 존재만 고집하면 다툼이 일어나고 한쪽이 죽는다. 이긴 쪽도 승자가 아니다. 풍경 없는 액자는 결국 창고에 처박혀서 손님을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한다. 액자 없는 풍경은 공중에 붕 뜬 허상이 된다. 어울려야 둘 다 살 수 있다. 사람살이의 일반론과 전혀 다르지 않다.
거울작용에서는 액자가 스스로 풍경이 되어버림으로써 제로섬 관계를 극복한다. 극복하는 정도가 아니라, 앞에서 보았듯이, 서로 부족함을 메워 비로소 완성된 상태를 만든다. 흔히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나 혼자서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지극히 작은 것일 뿐이라는 교훈을 깨우쳐준다. 액자를 이루는 서까래와 풍경요소를 이루는 처마 선이 사이 좋은 유사성을 가지면서 형식과 내용 사이의 구별을 없앤다. 액자와 풍경 사이에 분리가 일어나지 않고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키워준다. 둘은 같이 작동하고 협력해서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런 장면은 솟을대문을 통해 동네에 내 집의 모습을 친절하게 소개하는 기능을 갖는다. 집 전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모습을 샘플로 삼아 집밖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너무 많이 보여주자니 프라이버시의 문제가 있고, 너무 조금만 보여주면 깍쟁이 같다. 둘 사이의 절묘한 중간지점에 해당되는 것이 문양종합에 의한 소극적 거울작용이다. 바깥에 대한 의사소통과 주변과 어울리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친절과 환영의 의미이다. 농촌사회의 지배세력이 주변의 피지배계급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전형적 태도이다. 한옥이 유교문명 시대 때 반가의 주거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 |
충효당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생가로 보물 제 414호이다. 조선 중기에 총 52칸의 규모로 지어졌다.
- 창덕궁 연경당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에 있는 목조건물. 1828년(순조 28) 진장각(珍藏閣) 옛터에 세워졌다. 창덕궁에 있는 다른 건물이 단청을 한 데에 비해 연경당은 하지 않았다. 매우 단촐하고 아담하여 조선시대 사대부의 집 형태를 잘 보여준다.
- 수애당
경북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에 있는 수애 류진걸(柳震杰)이 지은 사가(私家)로서 1985년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56호로 지정되었다. 춘양목(春陽木)을 목재로 1939년에 지어졌으며 조선 말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
- 귀봉종택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臨東面) 천전리(川前里)에 있는 조선시대의 가옥. 귀봉 김수일의 종택으로 조선 현종 원년(1660)에 건립된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종가양식의 건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