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이백은 술 한말에 백편의 시를 짓고...
醉月
2010. 7. 23. 15:07
"이백은 술 한말에 백편의 시를 짓고..
."<강경범의 음주고사>시성(詩聖) 두보는 대주가였는가
두보가 대주가였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시가 앞에서 언급한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다.
<술에 있어서 여덟 신선에 관한 노래(飮中八仙歌)>
知章騎馬似乘船(지장기마사승선), 하지장은 술에 취해 말을 타면 배를 탄 것 같아,
眼花落井水底眠(안화락정수저면). 눈이 몽롱하여 우물에 빠지더라도 그냥 자리라.
汝陽三斗始朝天(여양삼두시조천), 여양왕 李璡은 서말을 마셔야 조정에 나가고,
道逢麯車口流涎(도봉국거구류연), 길에서 누룩 실은 수레만 만나도 군침을 흘리고,
恨不移封向酒泉(한부이봉향주천). 주천으로 봉작되어 가지 못함을 한스러워 한다.
左相日興費萬錢(좌상일흥비만전), 좌승상 李適之는 하루의 흥을 위해 만 냥을 쓰고,
飮如長鯨吸百川(음여장경흡백천), 마실 때는 큰고래가 온갖 강물을 빨아들이듯 하고,
銜杯樂聖稱避賢(함배낙성칭피현). 술잔을 들면 청주를 즐기고 탁주를 싫어한다고 한다.
宗之瀟灑美少年(종지소사미소년), 최종지는 말쑥한 미소년으로,
擧觴白眼望靑天(거상백안망청천), 술잔 들고 눈을 흘기듯 푸른 하늘을 쳐다보면,
皎如玉樹臨風前(교여옥수임풍전). 하얗게 빛나는 품이 옥수가 바람 앞에 서 있는 듯.
蘇晋長齊繡佛前(소진장제수부전), 소진은 수놓은 부처 앞에서 오랫동안 정진하다가,
醉中往往愛逃禪(취중왕왕애도선). 술에 취하면 종종 참선에 빠져 졸기를 즐긴다.
李白一斗詩百篇(이백일두시백편), 이백은 술 한말에 백편의 시를 짓고,
長安市上酒家眠(장안시상주가면), 장안 저자거리의 술집에서 잠자며,
天子呼來不上船(천자호래불상선), 황제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自稱臣是酒中仙(자칭신시주중선). 스스로 ‘신은 주중신선입니다’고 말한다.
張旭三杯草聖傳(장욱삼배초성전), 장욱은 석잔 술에 초서의 성인으로 전하고,
脫帽露頂王公前(탈모노정왕공전), 모자를 벗고 민머리로 왕공들 앞에 나서고,
揮毫落紙如雲煙(휘호낙지여운연). 종이에 구름과 연기처럼 일필휘지로 쓴다.
焦遂五斗方卓然(초수오두방초연), 초수는 다섯 말을 마셔야 비로소 탁월하여,
高談雄辯驚四筵(고담웅변경사연). 고담웅변은 좌중을 놀라게 한다.
<술에 있어서 여덟 신선에 관한 노래(飮中八仙歌)>
知章騎馬似乘船(지장기마사승선), 하지장은 술에 취해 말을 타면 배를 탄 것 같아,
眼花落井水底眠(안화락정수저면). 눈이 몽롱하여 우물에 빠지더라도 그냥 자리라.
汝陽三斗始朝天(여양삼두시조천), 여양왕 李璡은 서말을 마셔야 조정에 나가고,
道逢麯車口流涎(도봉국거구류연), 길에서 누룩 실은 수레만 만나도 군침을 흘리고,
恨不移封向酒泉(한부이봉향주천). 주천으로 봉작되어 가지 못함을 한스러워 한다.
左相日興費萬錢(좌상일흥비만전), 좌승상 李適之는 하루의 흥을 위해 만 냥을 쓰고,
飮如長鯨吸百川(음여장경흡백천), 마실 때는 큰고래가 온갖 강물을 빨아들이듯 하고,
銜杯樂聖稱避賢(함배낙성칭피현). 술잔을 들면 청주를 즐기고 탁주를 싫어한다고 한다.
宗之瀟灑美少年(종지소사미소년), 최종지는 말쑥한 미소년으로,
擧觴白眼望靑天(거상백안망청천), 술잔 들고 눈을 흘기듯 푸른 하늘을 쳐다보면,
皎如玉樹臨風前(교여옥수임풍전). 하얗게 빛나는 품이 옥수가 바람 앞에 서 있는 듯.
蘇晋長齊繡佛前(소진장제수부전), 소진은 수놓은 부처 앞에서 오랫동안 정진하다가,
醉中往往愛逃禪(취중왕왕애도선). 술에 취하면 종종 참선에 빠져 졸기를 즐긴다.
李白一斗詩百篇(이백일두시백편), 이백은 술 한말에 백편의 시를 짓고,
長安市上酒家眠(장안시상주가면), 장안 저자거리의 술집에서 잠자며,
天子呼來不上船(천자호래불상선), 황제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自稱臣是酒中仙(자칭신시주중선). 스스로 ‘신은 주중신선입니다’고 말한다.
張旭三杯草聖傳(장욱삼배초성전), 장욱은 석잔 술에 초서의 성인으로 전하고,
脫帽露頂王公前(탈모노정왕공전), 모자를 벗고 민머리로 왕공들 앞에 나서고,
揮毫落紙如雲煙(휘호낙지여운연). 종이에 구름과 연기처럼 일필휘지로 쓴다.
焦遂五斗方卓然(초수오두방초연), 초수는 다섯 말을 마셔야 비로소 탁월하여,
高談雄辯驚四筵(고담웅변경사연). 고담웅변은 좌중을 놀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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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하지장을 필두로 하여 여양왕 이진(李璡), 좌승상 이적지, 최종지, 소진, 이백, 장욱, 초수 등 여덟 명이다. 만약 두보가 당시 장안에서 누구라도 인정하는 술꾼들과 질펀하게 술을 마시고 나서 이 여덟 명을 꼽았다면 그 역시 대주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 시가 그러한 배경 하에 이루어진 것인가?
이 시는 대략 천보 5년(746년) 두보의 나이 35세에 장안으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쓴 시라고 알려져 있다. 확실히 이해에 이 시를 지었다면 이백을 ‘인간세상으로 유배 온 신선(謫仙人)’이라고 칭찬한 하지장(659~744년)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었다.
또한 이적지(694~747년)는 죽기 1년 전으로, 당시 그는 이임보에 의해 의춘(宜春)태수로 폄적당한 상태였다. 이로써 보면 두보는 하지장과 이적지는 아예 만나보지도 못했다는 말이 된다.
만약 천보 3년(744년) 두보의 나이 33세에 낙양에서 이백과 만나 함께 유람했던 시기에 썼다하더라도, 하지장과 이적지를 만났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해 보인다. 또한 두보는 많은 시간을 낙양에서 거주했기에 장안의 소식을 어느 정도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음중팔선인’ 중 민간인 신분인 초수(焦遂)의 음주습관까지 알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두보에게 ‘음주팔선인’의 호쾌한 음주고사를 전해 준 이가 누구일까? 필자는 이백이거나 두보와 이백이 함께 유람할 때 동반했던 문인들이었을 거라고 추측해본다.
두보는 나이 24세에 낙양에서 진사시험에 낙방하고, 근 7년간 산동지방인 제(齊)와 하북지방의 남부지역인 조(趙)땅으로 만유(漫遊)를 떠났다가 개원29년(741년) 30세에 낙양으로 돌아와 집안을 꾸린다.
이후 천보3년(744년) 33세 때 장안에서 현종의 총애를 받으며 온갖 일화를 만들어 내었던 이백(당시 44세)이 내침을 당해 낙양으로 왔다가 서로 조우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유(壯遊)>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당시 아직까지 젊은 혈기가 왕성했던 두보에게 시재 하나로 양귀비와 고력사를 마음대로 희롱한 이백이 어떻게 비춰졌을까?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두보는 유람에서 돌아온 지 얼마되지도 않았지만 이백을 따라 또다시 제노(齊魯)지방으로 유람을 떠났다가 천보5년에 장안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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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유람을 잠시 개괄해 본다.
천보 3년 가을에 두보와 이백은 산서성 晋城市 陽城縣과 하남성 제원(濟源市) 사이에 있는 도가성지인 왕옥산(王屋山)을 찾는다.
목적은 도사 화개(華蓋)를 만날 요량이었지만 화개가 이미 죽은 뒤였기에, 이들은 이백의 종조부인 채방대사(採訪大使) 이언윤(李彦允)을 방문하러 진류(陳留·하남성 개봉시 陳留鎭)으로 갔다.
이후 송주(宋州·하남성 商丘)에서 고적(高適)을 만나, 송주 북쪽에 있는 단부(單父·지금의 산동성 單縣 남쪽)의 금대(琴臺)에 오르고, 양원(梁園·지금의 하남성 개봉시)주루에서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기도 했다.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 뒤 고적은 초(楚)땅으로 가고, 두보와 이백은 산동의 제주(齊州·지금의 산동성 제남시)로 향했다. 제주에 도착한 뒤, 두보와 이백은 잠시 헤어지게 되는데, 두보는 이옹(李邕)을 만나러 가고, 이백은 북해 고천사(高天師)의 도록(道籙)을 받으러 노자를 제사모시는 자극궁(紫極宮)으로 갔기 때문이다.
다음해 가을 이들은 산동의 연주(兗州)에서 다시 만난다. 당시 이백의 집이 연주 부근의 임성(任城: 지금의 濟寧)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함께 동몽산(東蒙山·산동성 蒙陰 남쪽)으로 동련사(董鍊師)와 원일인(元逸人)을 방문했고, 또 함께 연주 북문(北門)의 황야에 숨어지내는 범은사(范隱士)를 찾기도 했다.
이렇게 또 한 해를 넘기고 연주성 동쪽의 석문(石門)에서 헤어져, 두보는 장안으로 향하고 이백은 강동(江東)으로 떠났는데, 이후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두보의 시에서 특히 이백을 그리워하는 시가 많은데, 이백에 관한 시가 대략 10여수가 된다면, 두보에 관한 이백의 시는 겨우 다섯 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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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의 시: <봄날 이백을 그리며(春日憶李白)>, <이백에게 줌(贈李白)>(5언배율), <이백에게 줌(贈李白)>(7언절구), <금릉으로 떠나는 이백에게(贈李白別金陵)>, <뵙지 못했다(不見)>, <이백과 함께 범십의 은거를 찾아서(與李十二白同尋范十隱居)>, <하늘끝 멀리있는 이백을 그리며(天末懷李白)>, <겨울철 이백이 생각나(冬日有懷李白)>, <병으로 물러나 강동을 유람하는 공소부를 전송하고, 아울러 이백에게 드림(送孔巢父謝病歸游江東,兼呈李白)>, <꿈에 이백을 보고(夢李白)>
*이백의 시: <노성의 북쪽 범거사를 찾다가 길을 잃고 노꼬마리속으로 떨어졌는데, 범거사가 술자리를 펼치고 도꼬마리를 따는 것을 보고 짓다(尋魯城北范居士失道落蒼耳中見范置酒摘蒼耳作)>, <사구성 아래에서 두보에게 부치다(沙丘城下寄杜甫)>, <가을날 노군 요사정 위 술자리에서 범시어가 빠진 상태에서 두보를 전송하다(秋日魯郡堯祠亭上宴別杜補闕范侍御)>, <노군의 동쪽 석문에서 두보를 전송하고(魯郡東石門送杜二甫)>, <희롱하며 두보에게 줌(戱贈杜甫)>
*밑줄 친 시는 范隱士를 찾은 것을 시제로 삼아 각각 지은 것이니, 두 사람의 풍격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임.
이들이 동행한 유람을 보다보면 두 가지 특징이 눈에 띤다. 첫 번째는 결국 두보는 장안에서 연주 부근의 집으로 돌아가는 이백의 여정에 따라 간 점이다. 두보의 <이백에게 줌(贈李白)>이란 시에서,
二年客東都(이년객동도), 낙양의 나그네 된지 2년,
所曆厭機巧(소력염기교). 지내보니 간교에 염증을 느꼈소.
野人對腥羶(야인대성전), 순박한 이 시골뜨기 비린내를 맡으니,
蔬食常不飽(소식상불포). 소찬도 평소에 배를 채우지 못합디다.
豈無靑精飯(기무청정반), 장수하는 청정밥이,
使我顔色好(사아안색호). 어찌 나의 안색을 좋게 만들지 않겠소?
苦乏大藥資(고핍대약자), 가난해서 귀한 약재 살 돈도 없으니,
山林跡如掃(산림적여소). 산속의 자취를 씻은 듯 끊었소.
李侯金閨彦(이후금규언), 이백형은 대궐 금마문의 출중한 인물이지만,
脫身事幽討(탈신사유토). 그곳에서 벗어나 산속의 그윽한 생활을 하네요.
亦有梁宋遊(역유양송유), 또한 양과 송땅을 노닐며,
方期拾瑤草(방기습요초). 신선초를 줍고자 하네요.
라고 하였는데, 두 사람은 낙양에서 함께 만날 때 이미 이번 유람을 계획했던 모양이다. 아마 이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양주와 송주를 거쳐서 임성으로 간다고 하니, 두보는 이번 길에 이옹도 한번 만나볼 요량으로 군말없이 이백의 여정에 동참했던 것 같다.
둘째, 이 시기에 만난 이들이 주로 도사, 일인(逸人), 은사라는 점이다. 이 점은 두보의 사상관념과는 약간 다른 것으로, 이번 여행길이 이백의 주도로 이뤄졌음을 반증하고 있다.
또한 <증이백>의 끝부분에서도 언급했듯이, 은일과 장생술에 대한 관심을 보인 것은 그의 젊은 시절 호쾌한 면과 시대적인 조류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이백의 영향이 더 컸을 것이다. 이후 그가 완전히 유가적인 입장으로 돌아선 것이 이를 반증한다.
*이백의 시: <노성의 북쪽 범거사를 찾다가 길을 잃고 노꼬마리속으로 떨어졌는데, 범거사가 술자리를 펼치고 도꼬마리를 따는 것을 보고 짓다(尋魯城北范居士失道落蒼耳中見范置酒摘蒼耳作)>, <사구성 아래에서 두보에게 부치다(沙丘城下寄杜甫)>, <가을날 노군 요사정 위 술자리에서 범시어가 빠진 상태에서 두보를 전송하다(秋日魯郡堯祠亭上宴別杜補闕范侍御)>, <노군의 동쪽 석문에서 두보를 전송하고(魯郡東石門送杜二甫)>, <희롱하며 두보에게 줌(戱贈杜甫)>
*밑줄 친 시는 范隱士를 찾은 것을 시제로 삼아 각각 지은 것이니, 두 사람의 풍격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임.
이들이 동행한 유람을 보다보면 두 가지 특징이 눈에 띤다. 첫 번째는 결국 두보는 장안에서 연주 부근의 집으로 돌아가는 이백의 여정에 따라 간 점이다. 두보의 <이백에게 줌(贈李白)>이란 시에서,
二年客東都(이년객동도), 낙양의 나그네 된지 2년,
所曆厭機巧(소력염기교). 지내보니 간교에 염증을 느꼈소.
野人對腥羶(야인대성전), 순박한 이 시골뜨기 비린내를 맡으니,
蔬食常不飽(소식상불포). 소찬도 평소에 배를 채우지 못합디다.
豈無靑精飯(기무청정반), 장수하는 청정밥이,
使我顔色好(사아안색호). 어찌 나의 안색을 좋게 만들지 않겠소?
苦乏大藥資(고핍대약자), 가난해서 귀한 약재 살 돈도 없으니,
山林跡如掃(산림적여소). 산속의 자취를 씻은 듯 끊었소.
李侯金閨彦(이후금규언), 이백형은 대궐 금마문의 출중한 인물이지만,
脫身事幽討(탈신사유토). 그곳에서 벗어나 산속의 그윽한 생활을 하네요.
亦有梁宋遊(역유양송유), 또한 양과 송땅을 노닐며,
方期拾瑤草(방기습요초). 신선초를 줍고자 하네요.
라고 하였는데, 두 사람은 낙양에서 함께 만날 때 이미 이번 유람을 계획했던 모양이다. 아마 이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양주와 송주를 거쳐서 임성으로 간다고 하니, 두보는 이번 길에 이옹도 한번 만나볼 요량으로 군말없이 이백의 여정에 동참했던 것 같다.
둘째, 이 시기에 만난 이들이 주로 도사, 일인(逸人), 은사라는 점이다. 이 점은 두보의 사상관념과는 약간 다른 것으로, 이번 여행길이 이백의 주도로 이뤄졌음을 반증하고 있다.
또한 <증이백>의 끝부분에서도 언급했듯이, 은일과 장생술에 대한 관심을 보인 것은 그의 젊은 시절 호쾌한 면과 시대적인 조류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이백의 영향이 더 컸을 것이다. 이후 그가 완전히 유가적인 입장으로 돌아선 것이 이를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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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두 사람은 함께 유람하였고, 함께 유람하면서 자연히 술잔을 기울이고 시도 함께 읊었을 것이다. 아울러 한창 술기운이 일어나면 이백의 화려했던 장안생활을 입에 올랐을 것이고, 두보는 이를 동경하며 경청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장안으로 돌아온 뒤, 주변 사람에게 당시 대주가의 고사를 확인하고서 <음주팔선인>을 선별한 것으로 사료된다.
두보와 이백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지내며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기에, 상대의 주량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술마시는 상황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한번 보자.
<근심을 풀다(遣懷)>-두보
…
憶與高李輩, 이백과 고적 등을 생각하면,
論交入酒壚. 술집에 들어가 친교를 논했지.
…
<이백과 함께 범십의 은거를 찾아서(與李十二白同尋范十隱居)>-두보
…
醉眠秋共被(취면추공피), 술에 취해 잘 때는 가을철이라 비불을 함께 덮었고,
攜手日同行(휴수일동행). 손을 잡고서 날마다 동행했었지.
…
두보와 이백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지내며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기에, 상대의 주량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술마시는 상황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한번 보자.
<근심을 풀다(遣懷)>-두보
…
憶與高李輩, 이백과 고적 등을 생각하면,
論交入酒壚. 술집에 들어가 친교를 논했지.
…
<이백과 함께 범십의 은거를 찾아서(與李十二白同尋范十隱居)>-두보
…
醉眠秋共被(취면추공피), 술에 취해 잘 때는 가을철이라 비불을 함께 덮었고,
攜手日同行(휴수일동행). 손을 잡고서 날마다 동행했었지.
…
<노성의 북쪽 범거사를 찾다가 길을 잃고 노꼬마리속으로 떨어졌는데,
범거사가 술자리를 펼치고 도꼬마리를 따는 것을 보고 짓다(尋魯城北范居士失道落蒼耳中見范置酒摘蒼耳作)>-李白
…
還傾四五酌(환경사오작), 다시 술 4․5잔을 기울이며,
自咏猛虎詞(자영맹호사). 스스로 맹호사를 읊는다.
近作十日歡(근작십일환), 가까이는 10여일을 즐겼고,
遠爲千載期(원위천재기). 멀게는 천년의 바램이다.
風流自簸蕩(풍류자파탕), 풍류가 저절로 솟아나고,
謔浪偏相宜(학랑편상의). 익살마저도 적합하다.
酣來上馬去(감래상마거), 술이 한창일 때 말에 올라 돌아오다가,
却笑高陽池(각소고양지). 오히려 高陽池에서 크게 웃는다.
<사구성 아래에서 두보에게 부치다(沙丘城下寄杜甫)>-李白
…
魯酒不可醉(노주불가취), 노땅의 술은 취하지 않고,
齊歌空復情(제가공복정). 제나라 노래는 마음을 풀 수 없다네.
…
<노군의 동쪽 석문에서 두보를 전송하고(魯郡東石門送杜二甫)>(李白)
醉別復幾月(취별복기월)? 술에 취해 이별한 지 다시 몇 달이 되었는가?
登臨徧池臺(등임편지대). 두루 연못을 대하고 누대에 올랐지.
何時石門路(하시석문로), 어느 때 석문 길에서,
重有金樽開(중유금준개)? 다시 금술동이를 열 수 있을까?
秋波落泗水(추파락사수), 가을 물길이 사수에 떨어지고,
海色明徂徠(해색명조래). 물색이 조래산을 밝히고,
飛蓬各自遠(비래각자원), 비래봉이 각각 멀리 있으니,
且盡手中杯(차진수중배)! 잠시 손에 있는 술잔을 비웁시다!
…
還傾四五酌(환경사오작), 다시 술 4․5잔을 기울이며,
自咏猛虎詞(자영맹호사). 스스로 맹호사를 읊는다.
近作十日歡(근작십일환), 가까이는 10여일을 즐겼고,
遠爲千載期(원위천재기). 멀게는 천년의 바램이다.
風流自簸蕩(풍류자파탕), 풍류가 저절로 솟아나고,
謔浪偏相宜(학랑편상의). 익살마저도 적합하다.
酣來上馬去(감래상마거), 술이 한창일 때 말에 올라 돌아오다가,
却笑高陽池(각소고양지). 오히려 高陽池에서 크게 웃는다.
<사구성 아래에서 두보에게 부치다(沙丘城下寄杜甫)>-李白
…
魯酒不可醉(노주불가취), 노땅의 술은 취하지 않고,
齊歌空復情(제가공복정). 제나라 노래는 마음을 풀 수 없다네.
…
<노군의 동쪽 석문에서 두보를 전송하고(魯郡東石門送杜二甫)>(李白)
醉別復幾月(취별복기월)? 술에 취해 이별한 지 다시 몇 달이 되었는가?
登臨徧池臺(등임편지대). 두루 연못을 대하고 누대에 올랐지.
何時石門路(하시석문로), 어느 때 석문 길에서,
重有金樽開(중유금준개)? 다시 금술동이를 열 수 있을까?
秋波落泗水(추파락사수), 가을 물길이 사수에 떨어지고,
海色明徂徠(해색명조래). 물색이 조래산을 밝히고,
飛蓬各自遠(비래각자원), 비래봉이 각각 멀리 있으니,
且盡手中杯(차진수중배)! 잠시 손에 있는 술잔을 비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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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두 사람이 유람할 때 늘 술을 가까이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서로를 각각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살피면 대주가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두보가 이백을 바라본 시각은 <음중팔선가> 속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예를 들면, “실컷 술마시며 미친 듯 노래하며 헛되이 세월만 보내고, 제멋대로 날뛰는 것은 누구를 위한 기백이오?(痛飮狂歌空度日, 飛揚跋扈爲誰雄?)”(<贈李白>), “금릉은 제왕의 터전이지만, 이백은 왕손도 아니다. 주머니에 푼돈이 말라가니, 주루의 기녀들 웃음꽃도 시들었다.(此地帝王宅, 靑蓮非王孫. 囊中乾少錢, 樓妓失含笑.)”(<贈李白別金陵)>),
“민첩한 구상으로 시 천여 수를, 술 한잔에 쏟아낸다.(敏捷詩千首, 飄零酒一杯.)”(<不見>), “이백은 시에서 대적할 이 없고, 솟아나는 그의 시상은 출중하다. …어느 때 술 한잔 나누며, 다시 함께 시문을 논하겠소?(白也詩無敵, 飄然思不群. 何時一樽酒, 重與細論文?)”(春日憶李白)>) 등이다.
그런데 이백은 두보의 음주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백과 함께 유람할 때, 두보가 자신이 동경하던 11살이나 많은 대시인을 모시고(?) 삼가 조심해서 술을 마셨든지, 아니면 특별한 대주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보면, 두보가 술을 가까이 하고 즐겨 마셨겠지만 대주가는 아님이 분명하다.
두보가 대주가였을까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글을 쓰다보니, 두보의 진면목이 약간 흐려진 듯 하여 아쉽다. 만약 두보가 대주가였다면 어떻다는 것인가? 이 말은 호사가들이 안주삼아 하는 말이고, 오히려 그의 시풍과는 맞지 않아서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듯 하다. 이러한 의구심을 품기 이전에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두보의 시편들을 먼저 숙독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예를 들면, “실컷 술마시며 미친 듯 노래하며 헛되이 세월만 보내고, 제멋대로 날뛰는 것은 누구를 위한 기백이오?(痛飮狂歌空度日, 飛揚跋扈爲誰雄?)”(<贈李白>), “금릉은 제왕의 터전이지만, 이백은 왕손도 아니다. 주머니에 푼돈이 말라가니, 주루의 기녀들 웃음꽃도 시들었다.(此地帝王宅, 靑蓮非王孫. 囊中乾少錢, 樓妓失含笑.)”(<贈李白別金陵)>),
“민첩한 구상으로 시 천여 수를, 술 한잔에 쏟아낸다.(敏捷詩千首, 飄零酒一杯.)”(<不見>), “이백은 시에서 대적할 이 없고, 솟아나는 그의 시상은 출중하다. …어느 때 술 한잔 나누며, 다시 함께 시문을 논하겠소?(白也詩無敵, 飄然思不群. 何時一樽酒, 重與細論文?)”(春日憶李白)>) 등이다.
그런데 이백은 두보의 음주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백과 함께 유람할 때, 두보가 자신이 동경하던 11살이나 많은 대시인을 모시고(?) 삼가 조심해서 술을 마셨든지, 아니면 특별한 대주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보면, 두보가 술을 가까이 하고 즐겨 마셨겠지만 대주가는 아님이 분명하다.
두보가 대주가였을까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글을 쓰다보니, 두보의 진면목이 약간 흐려진 듯 하여 아쉽다. 만약 두보가 대주가였다면 어떻다는 것인가? 이 말은 호사가들이 안주삼아 하는 말이고, 오히려 그의 시풍과는 맞지 않아서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듯 하다. 이러한 의구심을 품기 이전에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두보의 시편들을 먼저 숙독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