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위대한 학자 一行

醉月 2012. 11. 13. 12:05
Ⅰ. 불우한 천재 학자

 

一行阿(門+者)梨(683∼727)는 {대일경}과 {대일경소}의 記述者로 밀교학자 또는 승려로서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도교에도 능통하고, 또 수학과 천문학·풍수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는 8宗兼學일 뿐만 아니라 그의 전문영역은 인문과학, 자연과학에 걸쳐서 다양한 학문에 일가를 이루고 있다. 一行의 학문에 대해 그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프랑스 파리에 있는 세인트·쥬우느비에브 도서관의 벽에 뉴우톤 등의 과학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1955년에 과학자로서의 一行의 업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초상을 기념우표로 발행하기도 했다.

 

위대한 학자 一行은 많은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지만, 그 업적들이 충분하게 고증이 되거나 해명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즉 밀교사와 천문역학사 위에 남긴 족적의 위대함은 당나라 승려 중 굴지의 큰 인물이며, 더구나 그가 불교계에 기여한 공헌은 일반사회에 인정받지 못하고, 또 문화사 위에 남긴 자취의 위대함은 불교계에서 이해되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그 매우 불우한 한 사람이라 생각된다라는 지적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천문역술에 관한 공적은 불교학자들에게는 이러한 종류의 과학에 대한 열의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不問에 붙이는 것이고, 또한 그의 밀교에 관한 공헌은 일반학자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국내에 있어서는 일행의 사상이나 업적에 대한 연구가 그의 전무한 상태이다. 이에 필자는 一行阿 梨의 사상과 업적을 연구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그의 생애와 학문적인 영역을 소개하고자 한다.

Ⅱ. 일행의 생애에 관한 자료
一行의 생애와 학문에 관련된 전기자료로 대표적인 것은 {舊唐書}191의 [方伎傳], {宋高僧傳}5의 [義解篇], 공해의 {略付法傳}, 최징의 {內證佛法相承血脈譜}가 있다. 이 중에서 {구당서}의 [방기전]은 천문학·약학·음양·주술 등에 통달한 인물들의 전기와 일화 등을 수록한 것인데, 一行과 관련해서는 승려로서의 일행만이 아니라, 曆學의 대가로서의 一行의 행적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 이는 불교이외의 일행관련 기록으로서 매우 흥미 있는 점이 많다. {송고승전}에 나타난 일행의 기록은 唐의 段成式의 {酉陽雜俎}라든가 {舊唐書}191 등의 外典과 현종 御撰의 비명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비교적 자세한 전기이다. 여기에서는 주로 승려로서의 진면목과 그의 업적이 중심이 되어 있으며, 자연과학자로서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 {구당서}와 {송고승전}은 一行입적후 약 100년 내지 200년을 전후로 하여 기록되었는데, 이보다 앞서 기록된 것이 바로 공해의 {약부법전}과 최징의 {내증혈맥보}이다. 일본 진언종의 개조인 공해가 入唐한 것은 804년(唐의 德宗 貞元 20년)이고 귀국한 것은 806년(唐 憲宗, 元和元年)이며, 또한 일본 천태종의 개조인 최징도 804년에 입당하여 翌年 7월에 귀국하였다. 이들이 入唐한 804년은 一行의 入寂後 약 77년 후의 일이다. 공해의 {약부법전}에는 현종황제의 어찬인 비명이 실려 있다. 이 비명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이 {약부법전}에 의해서만 그 전모를 살펴 볼 수 있다. 또한 최징의 {내증혈맥보}에는 그 외의 글도 인용되어 있으며 {구당서}와 {송고승전}에는 없는 내용도 실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一行의 생애와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비록 일본에 남겨진 자료라 하더라도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釋門正統}· {佛祖統紀}· {六學僧傳}· {全唐文}, {神僧傳} 등이 있으며, 그 외의 많은 서적들에 나타난 일행관련 기록들은 {구당서}와 {송고승전}의 내용을 인용하거나 요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Ⅲ. 출가이전의 수학과 학문
위에서 언급한 一行傳의 자료들을 종합하여 출가이전의 생애와 학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행이 태어났던 시대는 밀교의 근본경전인 {대일경}과 {금강정경}이 성립하고 밀교가 활발하게 교세를 확장하면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되려든 시기인 683(道弘元)년에 魏州의 昌樂(하남성)에서 태어났다. 혹은 鉅鹿(하북성)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속성은 張씨이며, 이름은 遂이다. 唐初 襄州都督이었던 염국공근의 자손으로, 목축을 맡은 太僕의 벼슬에 있던 丞 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西의 李씨 출신으로 唐의 고종 弘道元年에 태어났다고 한다. 어머니가 一行을 잉태하였을 때에 이마 위에 두세치의 흰빛이 나타났으나 일행을 낳자 그 빛은 아들의 이마로 옮겨갔다고 한다.

 

일행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經史를 博覽하고, 經史를 펴들고 하루에 萬言을 외우고 九流를 배워 모두 그 깊은 뜻을 통하였다고 한다. 또한 師는 출가하기 이전에 도교에 통달해 있었다. 당시 유명한 도사였던 尹崇에게서 楊雄의 {大玄經}빌려 연구를 하여 그 성과물로 {大衍玄圖}와 {義決}을 저술하여 윤숭을 놀라게 하였다. 뒤에 일행이 도교의 세력이 강했던 당나라의 조정에서 도사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활동을 하게 된 것도 자신이 도교에 능통하였으며 도사들과도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이 지적되어 있다.
또한 일행은 수학자로서도 유명한데, 기록에 의하면 大衍之術을 공부하기 위해 불원천리하고 천태산 國淸寺에 찾아갔다고 한다.
일행이 문간에 이르자 절방에서 산가지를 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은 문간에 엄숙히 서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그 소리를 경청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 방안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배움을 구하러 문 앞에 왔구만, 왜 들어오지 않는고?" 그리고는 산가지를 놓는 소리가 계속되었다. 잠시 후에 다시 소리가 흘러나왔다. "문 앞의 물은 서쪽으로 물러나서 흘러가리니, 배움을 구하러 온 제자는 들어오너라." 이렇게 하여 일행은 고명한 스승을 만나 뵙고 신묘한 수학의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다 배우고 나자 정말로 문 앞에서 동쪽으로 흐르던 냇물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이와 같이 학문에 대해 왕성한 연구의욕에 불타있던 일행선사는 음양·참위의 서책이 있으면 한결같이 다 탐구하였다고 전기는 말하고 있다. 다시 천태산 국청사에서 수학의 연찬을 쌓았다. 타고난 총명한 소질과 의욕적인 학습에 의해서 일행은 음양학, 수학에 관해 깊은 지식을 얻었다. 음양학과 참위설 등은 어느 것이든 치밀한 계산에 의해 길흉을 판단하는 것이므로, 합리적인 수학적 사고가 그 학문의 밑바탕에 요청된 것이라 볼 수 있다.

Ⅳ. 출가이후의 수학과 학문
어린 시절부터 총명한 두뇌로 중국의 전통적 한문을 습득하여 뛰어난 재능을 나타낸 일행은 21세(측천무후, 長安3년, 703) 때에 갑자기 양친 부모를 여의었다. 그로 인하여 심적인 충격을 받았다. 이로 인하여 일행은 "豁然히 세상을 싫어하여 方外(出家)의 마음을 품었다."고 {내증혈맥보}에 그 출가의 동기를 잘 말해주고 있다. 마침내 厭世의 뜻을 세워 형주 옥천산 恒景律師를 따라 출가를 하였다. 그의 학문은 崇山의 선승이었던 普寂禪師(671∼739)의 문하로 가서 禪을 익히고, 戒律을 當陽의 승려인 惠眞에게 배우고, 密敎를 광복사의 金剛智와 성선사의 善無畏로부터 金·胎兩部의 密法을 전수 받았다.

 

먼저 일행이 恒京으로부터 천태를 상승한 것에 대해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圓珍이 지은 {諸家敎相同異集}에는,
상전에 말하길, 章安대사의 제자는 道素율사이며, 道素율사의 제자는 弘景율사이며, 弘景율사의 제자는 一行阿 梨이다.
라 하였으며, 智  → 灌頂 → 道素 → 恒景 → 一行으로 相傳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에 의해서 仁空은 {大日經義釋搜決抄}권1에 [山王院記}를 인용하여,

 

일행화상은 智者의 제4대 제자이며, 일찍이 當陽의 홍경선사에게서 天台法華止觀을 오래도록 익혔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기록 외에도 善無畏가 구설하고 一行이 기록하였다는 {大日經疏}와 그것을 교정한 {大日經義釋}의 내용을 보면, {대일경}을 {법화경}의 敎學으로 해석한 곳이 몇 군데 있다. 이것은 天台學에 대한 일행의 깊이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천태와 밀교학을 일치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일경}을 해석하면서 자연스럽게 천태교학의 소양이 스며나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일행은 律僧弘景(634∼712)의 제자인 혜진(673∼751)에게 律을 배웠다고 한다. {내증혈맥보}에 의하면 일행은 律部와 諸經論을 탐구하여 모든 요점을 빼어내 {調伏藏}10권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조복장}은 圓仁의 請來本에는 書名이 보이는데 현재는 전하지 않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一行에게 禪을 가르친 普寂선사(651∼739)는 북종선의 派祖인 神秀의 高第로서 북종선의 제7조였다. 宋의 도원이 쓴 {경덕전등록}4에 의하면 숭산의 보적선사에게는 46인의 법사가 있었는데, 그 중 제22번째의 嵩陽寺 一行禪師의 이름이 보인다. 또한 榮秋의 {大日經疏緣起}에 의하면,
선문의 사자상승을 살펴보면, 제5조 홍인대사의 문하에는 두 명의 제자가 있는데, 하나는 혜능으로 남종의 파조이며, 다른 하나는 신수로서 북종선의 파조이다. 이 신수의 제자 이름이 普寂이며, 즉 疏主(一行)의 師이다. 라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일행의 禪사상은 북종선을 상승한 것이라 이해 할 수 있다. 그런데 {내증혈맥보}는 景선사에게 출가한 후, 이어서 大照선사를 따랐다고 하며, {송고승전}에는 普寂에게 출가 삭발했다고 적었다. 그렇지만 [비명]에는 출가의 스승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숭악의 승려 寂深에 의해 禪門을 통달하였다고 적었다.

이처럼 출가를 하여 天台와 律, 그리고 禪을 배운 이후에야 비로소 密敎를 만났다. 현종의 어제인 [비명]에 의하면,
금강지삼장으로부터 다라니와 秘印을 배워 먼저 불단에 올라 法王의 보배를 받았다. 또 선무외삼장과 함께 盧遮那佛經을 번역하여 뒤에 부처의 나라를 열었다. 고 하고 있다. 일행이 밀교를 배운 차례가 이와 같다면, 먼저 금강지삼장에게 {금강정경}계의 밀교를 배우고 뒤에 선무외삼장과 함께 {대일경}을 번역한 것이 된다.

 

금강지(662∼732)가 719년에 장안에 도착하자마자 일행은 달려가 관정을 받고, 제자의 예를 가지고 이 가르침을 받는 것을 기뻐하며 여러 가지의 질문을 하여 敎示를 받고 있다. 그리하여 {금강정경} 계통의 법을 이어받았다. 또한 선무외삼장이 724년 낙양에서 {대일경}을 번역할 때에 함께 참여하였으며, {대일경}의 강의를 받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대일경소}20권을 저술하였다. 이를 통해서 볼 때 一行은 금·태양부의 법을 전승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증거로서 {大日經疏}의 내용을 살펴보면 {금강정경}의 뜻을 가지고 해석한 곳이 적지 않다. 이는 {금강정경}에 대해서도 상당히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금강정경}외에도 {대지도론}·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반야경}· {중론}· {耶經}· {소실지경}· {십이문론} 등을 인용하였음을 볼 때 불교의 전반에 대해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행하게도 일행은 단명으로 스승인 선무외·금강지 양 삼장보다 일찍 입적했다. 그 의미에서 일행은 스승들의 유업을 계승해서 발전시켰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중국에 본격전인 밀교를 전파한 금강지·선무외·불공 등은 인도인이었지만, 일행만이 순수한 중국인이었다. 중국의 전통학문에도 조예가 깊고, 지적인 수재이며, 사회적인 지위도 높았던 일행이 밀교경전의 번역과 주석서 제작에 참여하였다는 것은, 밀교가 중국사회에 정착하는데 가장 알맞은 사람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행은 선·천태·율·밀교에 통달한 불교학자인 것만이 아니라 도교·역학·수학에도 빼어나고, 특히 {개원대연력}을 작성한 천문학자로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불후의 명성을 얻고 있다. 이 {대연력}은 {주역}의 大衍의 수를 달력의 기본수로 해서 조립한 것이다. 여기서 일행의 易學 및 수학의 지식이 충분히 활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종은 일행의 학식이 높다는 명성을 듣고 그를 불러 새로운 달력을 만들어라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일행은 역법을 제정하기 위해서는 天體를 관측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당시의 천문가로 알려져 있던 梁令瓚의 도움을 받아서 開元13년에 黃道游儀와 渾天銅儀를 만들었다. 이것은 오늘날에 말하는 天體儀와 지구의이다. 천체의는 赤道·黃道·星宿 등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어 일원성신의 운행이 한 눈으로 알 수 있도록 장치되어 있다. 일행은 실지측정을 통하여 大衍의 수와 고금의 역법을 참고해서 大衍曆 작성의 대위업을 727년에 완성했다. 그런데 草稿인 채 공포되지도 못하고 일행은 입적하였다. 이에 현종은 特進張說과 曆官陳玄景 등에게 명하여 이것을 완성하게 하고, 이듬해 8월에 장설이 그것을 {개원대연력}이라 이름을 붙여 황제에게 奉獻하였다. 新舊唐書의 曆志는 {개원대연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을 하고 있다.
태초부터 麟德曆에 이르기까지 23家가 있어 천체를 연구하였는데 아직 자세하지 못했다. 비로소 一行에 이르러 자세하고 정밀하였다. 그는 수학에 의하여 대연력을 지었으며, 후세에 改作하는 자가 있어도 모두 이에 의거할 따름이라.

이 {대연력}의 내용은 천지음양의 이치를 근거로 자연의 법칙에 기초하여 世運盛衰가 오고가는 바를 명확히 한 제1급의 官曆이었다. 때문에 중국의 역법중에 가장 우수한 달력의 하나로 손꼽히고, 唐 이후의 역학자는 대부분이 {대연력}에 의지하고 있다. 또한 일행은 祖東台의 舍人이었던 太素를 도와서 {後魏書} 100권을 저술하고, 그 중 [천문지]가 미완성이었으므로 그가 혼자힘으로 계속해서 완성시켰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장태소의 {후위서}의 천문지는 일행이 완성한 것이 되며, 오늘의 {위서}의 천문지에는 일행이 찬집한 것이 들어 있는 것이 된다. 이처럼 천문과 역상에 대한 一行의 공적은 위대했었다고 할 수 있다.

Ⅴ. 일행의 저서와 학문
일행의 저서를 분야별로 분석해 보면 역학·도교·불교 등 매우 광범위하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불교에서는 {大日經疏}20권이고, 불교이외의 것은 {대연력}1권이다. 여기서는 {大正藏}에 그와 관계된 번역불전과 찬술불전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7권 선무외공역, {금강정경비로자나1백8존법신계인}1권 선무외공역, {약사유리광여래소재제난염송의궤}1권 一行撰, {대비로자나불안수행의궤}1권 一行記, {만수실리염만덕가만애비술여의법}1권 一行撰, {숙요의궤}1권 一行撰, {칠요성진별행법}1권 一行撰, {북두칠성호마법}1권 一行撰, {대비로자나성불경소}20권 一行記이다. {대일경}과 그 소에 대해서는 앞에서 간략하게 언급을 하였고, {약사소제의궤}는 藥師法의 本軌로서 아주 유명하다. 또 {만수실리법}은 大威德明王의 법을 행한 雜密軌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圓仁의 {입당신구성교목록}과 安然의 {제아사리진언밀교부류총록}권상에 의하면, {최상승수보리심계급심지비결}1권 무외역 一行記, {섭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팔연화태장해념비생만다라광대념송의궤}3권 무외역 一行筆受寶月譯語, {조복장}10권 등이 언급되어 있다. {조복장}은 {구당서}의 일행전과 {弘簡錄}에 언급되어 있다. 이외에도 {신당서}권57, 同59와 {예문지}에 의하면 도교와 천문과 역법에 관한 저술이 17부가 언급되어 있다.

 

一行阿 梨는 불교에서는 계율·선·천태·金胎兩部의 밀교에 통달하고, 外敎에서는 道敎·易學·風水에도 저서를 남긴 동시에 {대연력}을 작성한 천문학자이다. 다시 말해 密敎史에서도 曆術天文史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제 一行의 진가는 그 兩面에서 정당하게 평가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