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어어령의 다시 읽는 한국시_29

醉月 2009. 12. 12. 11:51

柳致環_귀고(歸故)


     검정 사포를 쓰고 똑딱船을 내리면
     우리 故鄕의 선창가는 길보다도 사람이 많았소.
     양지 바른 뒷산 푸른 松柏을 끼고
     南쪽으로 트인 하늘은 旗빨처럼 多情하고
     낯설은 신작로 옆대기를 들어가니
     내가 트던 돌다리와 집들이
     소리높이 창가하고 돌아가던
     저녁놀이 사라진 채 남아 있고
     그 길을 찾아가면
     우리 집은 유약국
     行而不信 하시는 아버께선 어느덧
     돋보기를 쓰시고 나의 절을 받으시고
     헌 冊曆처럼 愛情에 낡으신 어머님 옆에서
     나는 끼고 온 新刊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
      청마집  중에서

 

  정지용의  故鄕 과 靑馬 유치환의 시  귀고(歸故) 를 놓고 어느쪽이 더 시적으로 느껴지는가라고 물으면 어떻게 될까. 백이면 백 모두가 정지용쪽을 손꼽을 것이다. 노래 가사로 널리 불려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향 풍경을 묘사한 이미지도 음율도 그리고 그 정서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에 비해 선창가에서부터 고향집에 돌아와 부모님에게 절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순서대로 나열해 놓은 청마의  歸故 는 시(詩)라 하기
보다는 무슨 중학교 학생이 쓴 작문 한 토막같다고 할 지 모른다.
  그러나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로뇨 의 지용의 시에서 반복적인 음악성을 제거하고  아니로뇨 와 같은 종결어미를  아니다 로 바꿔놓으면  고향에 돌아와도 옛날 고향이 아니다 라는 지극히 밀도 없는 산문적 서술이 되고 만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산문적인 것은 지용쪽이라는 사실을 금세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 말은 귀향객들 누구에게라도 쉽게 들을 수 있는 상투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어떤 현란한 시적 수식어를 붙여도 지용의  고향은 근본적으로  고향은 옛날 고향이 아니다 의 예문(例文)처럼 항목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헌 冊曆처럼 愛情에 낡으신 어머님 옆에서/ 나는 끼고 온 新刊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 라는  歸故 의 고향은 일상적 의미 공간으로는 환원 불가능한 시적 고향인 것이다.  고향 선창가 의 바다로부터 시작한 그  물리적 고향 은 책력이나 그림책과 같은  책의 공간 으로 전환(轉換)되어 가고 있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歸故 의 고향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일상적인 고향 공간이 시적 언어공간으로 바귀어가는 그 변형과정을 읽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넓은 바다가 남쪽으로 트인 조각난 하늘과 송백의 산으로 바뀌고, 그것이 다시 돌다리와 집들이 들어서 있는 마을로, 그리고 그 마을은 다시 유약국이라는 고향집으로 좁혀진다. 이러한 공간의 수축작용은 집에서 대문으로, 대문에서 문지방으로, 문지방에서 방안으로 이어지고, 이윽고 그 내부의 구심점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리하게 된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공간 이동은 행동축과 연계되어 있다.  배에서 내리다 로 시작된 고향으로의 접근 행동은 무수한 경계 영역을 통하여  아버지에게 절을 하다 로 이어진다.  절하기 는 아버지의 몸과 자기의 몸의 거리를 최소한으로 좁혀주는 접근 운동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고향과 자신의 거리는  절하기 에 의해서 거의 제로(zero) 상태가 된다. 하지만 고향에의 접근을 멈추지 않고 거기에서 더 한발짝 들어간 것이 이 시의 마지막 행에 나타나 있는  어머니의 몸 이다. 아버지의 신체 공간이  돋보기 로 줄어들듯이  어머니의 몸 은  책력 이라는 비유에 의해서 공간과 그 시간이 모두 응축된다. 돋보기가 아버지의 시간을 나타내는 환유(換喩)이고( 아버께선 어느덧/ 돋보기를 쓰시고 나의 절을 받으시고 ), 冊曆은 어머니의 시간을 나타내는 은유(隱喩)이다( 헌 冊曆처럼 愛情에 낡으신 어머님 옆에서 ).돋보기, 책력들은 모두  책읽기 라는 행위소(行爲素)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靑馬는 이  독서의 추상 공간 으로 고향의 물리적 거리를 넘어선다.


  실제 물리적 거리를 놓고 보더라도 인사를 하고 받는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어보이지만,  어머니 옆 에서 신간(新刊)을 읽고 있는 나는 거의 거리를 느낄 수 없게 좁혀져 있다. 내가 끼고온 신간이라는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여기의 신간은 자기 자신의 몸과 일체성을 나타내는 환유로써 어머니의 몸으로 비유된 헌 책력(冊曆)의 은유와 대비를 이룬다. 이 대비를 통해서 지금까지 나와 고향 사이의 공간적 거리가 시간적 거리로 그 위상이 바뀌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새 책과 헌 책으로 상징되는 나와 어머니의 신체적 차이는 책읽기에 의해서 소멸되고, 내가 모태(母胎) 속으로 회귀해 가는 시간의 소급 운동이 시작된다. 그것이 바로  新刊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 라는 언표에 의해서 드러난다.


 어머니의 곁에서 책읽기 란 어른들이 읽는  신간 을 유아들이 보는 옛날  그림책 으로 바꿔놓는 내면적 행위이다.  책읽기에서 책보기 로,  문자에서 그림으로 ,  어른의 몸에서 아이의 몸 으로 어머니의 몸(고향)은 그 시간성을 역류시킨다. 그렇게 해서 고향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몸(신체성)으로 수축되고, 그 몸은 다시 책으로 상징되는 언어 공간으로, 그리고 그것은 시간을 나타내는 책력장의 숫자나 유아의 그림으로 환원된다. 고향의 섬이 육지=도시와 대비되는 공간을 해체하고 있듯이 신간을 그림책처럼 읽고 있는 어머니 몸의 그 공간은 지식(책읽기)과 역사성(신간)을 모두 해체해 버린다.


  그래서 육지에서 섬으로, 어른에서 아이로, 책읽기에서 책보기로 끝없는 구심점을 향한 공간의 수축작용과 모태로 돌아가는 시간의 소급행의의 이중 렌즈에 의해 찍힌  歸故 의 고향은 우리가 추석 때 돌아가는 그런 고향의 의미와는 다른 것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시적 공간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고향인것이다.
  일상적 공간은 많은 경계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歸故 의 시에도 다섯 개의 경계 영역이 나타나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첫번째 경계가 바다와 뭍 사이에 있는  선창가 이고, 두번째 경계가 마을 안과 마을 밖을 나누는 돌다리 의 경계 영역이다. 세번째는  유약국 으로 이 시에서는 무표항(無標項)으로 되어 있으나 그것은 담이라는 경계 영역으로 표시된다. 넷째 경계 영역은 아버지 어머니와 나의 몸이라고 하는 생체적 경계영역으로 성명(姓名)처럼 추상적인 것과 피부처럼 구상적인 것으로 혼합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경계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경계 영역은 완전히 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추상적인 내면의 경계 영역에 속한다.  절을 하다 와  절을 받다 는 아버지와 나의 경계 영역과 그것을 넘어 들어가는 행위를 나타낸다. 그리고 어머니 곁에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되돌아가 신간책을 그림책처럼 보고 있는 것이 바로 내부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들이다.
  고향은 이같이 많은 삶의 경계 영역을 돌파하여 보이지 않는 내부의 구심점으로까지 돌아가려는 공간과 시간으로 출현한다. 인간의 행위와 역사는 크게 말해서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원심 운동과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구심 운동으로 되어 있다. 그 원심 운동에서 생겨난 것이 객지(客地)이고, 그 구심 운동에서 탄생되는 것이 고향(故鄕)이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라고 한탄한 지용의 고향이  시적으로 표현된 산문적인 고향 이라고 한다면  어머니 옆에서 내가 끼고 온 신간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 라고 한 청마의  歸故 는 산문적으로 표현된시적 고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마는 고향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무수한 경계 영역을 넘어 끝없이 수축해 들어가는 구심적 공간,
그리고 출생의 모태를 향해서 끝없이 역류하는 시간으로서 고향의 의미를 창조해 내고 있는 것이다.